마음 착한 며느리
- 감독
- 나가에
- 제작년도
- 2017
- 출연
- 시오미 유리코
이와사키 아키라 환영회 중 문예봉(좌)과 한은진(우) 다시 만난 세계: 식민지 조선의 극장문화 이야기 한국영상자료원에서 발간하는 『신문기사로 본 조선영화』 시리즈를 바탕으로 역사의 지층 속에 묻혀 있던 이야기와 행간 속에 숨겨진 욕망들을 재조명합니다. 영화의 발흥 이래 재현의 사실성에 대한 추구는 극장가의 화두로 떠올랐다. 카메라가 구현해 낸 재현의 정밀성은 실로 센세이셔널한 반응을 불러일으켰고, 영화에 익숙해진 관객들이 늘어나면서 선행매체인 연극 역시 사실적 환영을 만들어내는 작업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군다나 연극과 영화가 하나의 공간을 함께 점유하며 관객을 나눠 가졌던 식민지 조선의 극장 속에서 그 영향관계는 훨씬 긴밀했을 것이다. 대체 불가능한 지위를 획득한 ‘여배우’는 재현의 사실성에 대한 식민지 조선 극장문화의 지향성을 압축적으로 보여준 존재였다. 재래의 관습이었던 여형배우는 여배우의 등장과 함께 전근대적 유습으로 낙인찍혔다. 이것은 배우와 배역의 생물학적 동일성이 여성성을 사실적으로 재현하는 데 있어 근원적인 조건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생겨난 변화였다. 무대와 스크린의 주역으로 급부상한 여배우의 일거수일투족은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공공의 시선 속에 노출된 육체의 감각적 즉물성이야말로 여배우의 지위를 굳건한 지반 위에 올려놓은 원동력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언제든 시각적 쾌락의 대상으로 전락할 수 있었으며, 여배우들의 육체는 관객의 관음증적 욕망 앞에서 품평의 대상으로 격하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더욱이 여배우들을 향한 응시는 극장 속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모든 이들은 직업적 영역에서의 공공적 삶뿐 아니라 일상을 영위하는 개인으로서 사적인 삶 또한 살아간다. ‘워라밸(Work and Life Balance)’이라는 표현이 함의하듯 두 영역의 분계선을 명확히 하는 일은 누구라도 품을 법한 보편적 욕망이겠지만, 유독 여배우에게만큼은 직업과 일상의 분리가 허용되지 않았다. 우수진이 정확히 지적한 것처럼, 이것은 여배우가 문화적으로 ‘ 구성 ’된 존재였기 때문이다. *주1 육체를 통해 현시된 여배우의 존재감은 재현의 사실성을 담보했지만, 그로 인해 생겨난 강력한 동일시의 기제와 이에 기반한 극장 체험의 여파는 관객들로 하여금 허구적 배역과 실제 배우의 삶을 혼동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실제로 배우의 사생활은 ‘스캔들’의 형식으로 소비되는 일이 잦았다. 특히 여성의 사회활동을 억압했던 전통적 관념이 맞물린 결과, 여배우의 ‘사생활’은 단순한 관심거리의 수준을 넘어 도덕적 단죄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식민지 조선 사회에 여배우의 이미지를 각인시켰던 이월화 또한 이러한 시선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는데, 배우 활동만으로 생계를 이어나가기 어려웠던 그는 기생과 여급 일을 병행한 바 있다. 이월화에게 사치와 허영심이 강한 여성이라는 프레임을 덧씌워진 것은 이 때문이었다. 한편 토월회가 해산한 후 영화에 출연하기 시작했던 복혜숙 은 ‘비너스’라는 카페를 직접 운영하면서 마찬가지로 비난의 시선을 견뎌내야 했다. (좌) 이월화 (사진: 부산영화체험박물관 기증) (우) 복혜숙 특히 성욕이 강한 여성이나 신여성 캐릭터를 연기한 배우들의 경우, 사생활 또한 문란할 것이라는 의혹의 시선에 둘러싸였다. 이러한 시선은 비단 식민지 조선의 배우들뿐 아니라 할리우드의 영화 스타들에게도 투사되었는데, 그들의 사생활을 다룬 가십성 기사들이 신문 연예란의 단골 메뉴였던 것은 대중적 관심의 향배를 잘 보여준다. 여배우들은 수없이 애인을 갈아치우는 왕성한 남성 편력을 지닌 이들로 지목되었으며, 사소한 이유로 이혼을 일삼는 부도덕한 존재라 낙인찍혔다. 물론, 스타의 화려한 삶과 막대한 재력에 대해 찬탄하는 시선도 엿볼 수 있다. 전 세계적 인기를 구가하던 그들의 천문학적 주급이나 으리으리한 대저택은 물론이고 사치스러운 취미활동 등이 소개되기도 했다. 그러나 열악한 조선의 연예계에서 여배우는 헐리우드 스타와 같은 동경의 대상으로만 여겨지지 않았다. 즉, 여배우는 자신의 힘으로 직업적 성취를 이뤄낸 당당한 여성이 아닌, 생활난에 시달리는 가련한 존재이거나 끝내 ‘첩살이’ 신세를 피할 수 없는 비참한 운명을 지닌 이들로 인식될 따름이었다. 여배우의 전도, 남배우의 전도- 이것이야말로 한번 신중하게 생각할 문제이다. 오늘날 만사가 초창 혁신기에 잇는 조선에 잇서서 더 크게 더 탐탁하게 바랄 수는 업다고 치드라도 인생의 흥망을 기약하는 청춘기에 잇서서 다시 돌이키기 쉽지 않은 직업에 몸을 붙이게 되는 때 장래는 어떻게 되겠는가 하는 생각이 없을 수는 없다. 우선 여배우 여류 무용가가 되면 나중에는 어떻게 되겠는가. 그 대답은 극히 간단하다. 『아무래도 시집을 가야지』 여자로서는- 더욱히 경제적으로나 인격적으로나 자립하기가 어려운 조선의 여성에게는 마지막 닥치는 문제는 반드시 이것이다. 그러면 어떠한 사람에게로 가게 될까. 『첩!』 그것이야 참으로 참으로 예술가를 극도로 모욕하는 말이다. 『재산가의 부인!』 그것은 좋기는 하나 졸연히 얻어 걸리기가 어려운 사정이 있으니 재산가치고 조혼을 하지 않는 사람이 없으니 여배우니 무엇이니 하는 동안에 어느덧 이십이 넘고 나서 사면을 둘러보아야 모두가 기혼 남자들뿐이다. 『그러면 착실한 신사』 아직도 조선서는 소위 착실하다는 청년 쳐 놓고는 사리 잡힌 가정 쳐 놓고는 배우 안해이나 여배우 며느리 얻기를 즐겨하지 않는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 머리 길게 기르고 누더기 가튼 양복을 입고 다니는 같은 경우 같은 식경에 도취되어 있는 예술가이나 그렇지 않으면 처음에는 펄펄 뛰다가도 나중에는 하는 수 업시 『하는 수 있나. 사랑만 해 주면 그만이지. 첩 노릇이라도 해야지!』 눈물겨운 탄식이나 나아올 것이다. 이미 여배우 노릇을 하든 사람이 그러하였으며 장차 나아올 여배우의 운명이 그러하다. 이것은 여배우 자신의 잘못도 아니요 그 단체 그 사회의 죄도 아니다. 오직 조선의 민도가 일반의 머리가 아즉도 예술- 더욱히 무대예술에 존경을 갖지 못한 탓이다. 그러함으로 적어도 배우 노릇을 하고자 나서는 분은 우선 이담에 크게 고려를 하야 사랑에서 사랑으로 자유스럽게 날아다니랴는 무거운 결심을 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죽더라도 상당한 배우자가 나기까지는 결혼을 하지 않겠다는 기막힌 결심을 갖든지. 『잘 놀면 그만이지』 여배우 노릇을 부자의 눈을 호리는 수단으로 알고 무대를 매음부의 전람회 같이 알든지 이 세 가지 길의 하나를 택해야 할 것이다. - 『 신문기사로 본 조선영화 1929 』, 1035쪽 이춘풍, “ 생활로 본 그들의 내막 - 배우, 레뷰껄, 딴써 등등 ”(5), 《중외일보》, 1929. 11. 12. 이춘풍이 연재한 글은 사뭇 직설적이면서도 신랄하다(‘이춘풍’은 이서구 의 필명으로 추정된다). 그는 여배우를 비롯하여 여류 무용가나 레뷰걸과 같은 여성 연예인들의 생활상을 자조섞인 어조로 소개했다. 그의 글 속에서 여성 연예인의 생활상은 사실상 성노동자의 삶과 유비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경제적으로나 인격적으로나 자립하기 어려운” 조선 여성의 처지에서 결혼은 피할 수 없는 문제였지만, “재산가의 부인”이 되자니 그들은 대부분 조혼을 해서 본부인이 있는 상태이고, “착실한 신사”에게 시집가자니 집안의 반대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그나마 여배우들의 사정을 이해해 줄 법한 이들은 “가난한 예술가”들뿐이겠지만, 그게 싫다면 누군가의 “첩”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는 것이 여배우들의 운명이라는 것이다. 이서구는 예술가에 대한 존경심이 부족한 식민지 조선 사회 에서 고통받을 수밖에 없었던 여배우의 처지를 동정한다. 그가 보기에 결국 여배우들이 택할 수 있는 길은 세 가지뿐이었다. 방종한 여성이 되어 자유를 구가하거나, 결혼 자체를 포기하거나, 아예 대놓고 “부자의 눈”을 홀리기 위해 극장을 “매음부의 전람회”처럼 만드는 일이 그것이다. 영화 < 아리랑 >(나운규, 1926)을 통해 일약 스타덤에 오른 신일선 은 배우 활동을 오래 이어나가지 못하고 능주(전남 화순군) 지역 부호의 자제인 양승환과 결혼하게 된다. 이른바 ‘신일선당’이라고 불렸던 열성팬들은 그의 결혼 소식에 아쉬움을 표하면서도, 정성껏 행복을 빌어 주었다. 이는 신일선이 <아리랑>에서 쌓아올린 이미지와도 관련된 반응일 것이다. 신일선은 주인공 영진( 나운규 )의 여동생 영희 역을 맡았는데, 호색한의 위협을 받는 순진무구하고 어린 여동생의 모습이 관객들의 동정심을 유발했기에 그러한 이미지가 배우 신일선에게도 겹쳐졌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다만, 양승환에게는 본처가 있었기에 결국 신일선도 ‘첩살이’의 운명으로부터 자유롭지는 못했다. 게다가 신일선이 가난한 집안살림을 돕기 위해 친오빠의 강권으로 양승환과 결혼하게 된 것이란 사실이 알려지면서 동정 여론이 빠르게 확산되기도 했다. 결혼과 함께 영화계를 떠났지만 신일선의 근황, 특히 그가 불행한 결혼생활을 견뎌내고 있다는 소식이 지속적으로 전해졌던 것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 볼 수 있다. 신일선 이야기는 여배우의 박복한 운명을 압축적으로 보여 준 사례로 거론되었던 것이다. 신일선 반대로 사랑을 쟁취하려 하는 여배우의 적극성은 어디까지나 남성 편력에 불과하다고 치부되는 데 그쳤다. 잔인하게도 여배우의 사랑이 진실한 것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은 ‘정사 사건’과 연관되었을 때, 즉 죽음을 담보로 사랑의 진정성을 증명할 수 있을 때에만 가능했다. 조선의 유명 성악가이자, 토월회에서 배우로 잠시 활동하기도 했던 윤심덕의 경우가 그러했다. 그는 다수의 연애 스캔들에 휩싸여 세인들의 입방아에 오르기도 했지나, 극작가이자 연극운동가인 김우진과 함께 현해탄에서 실종된 이후 ‘낭만적 사랑’의 화신으로 재규정되기에 이른다. 영화 < 아리랑 후편 >(이구영, 1930)에서 신일선의 뒤를 이어 ‘영희’ 역으로 출연했던 임송서 역시 이루지 못한 사랑 때문에 음독자살을 택한 바 있다. 미수 사건에 그치진 했지만 이애리수 의 ‘정사 사건’도 세간의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유행가 가수이자 배우로 인기가 높았던 이애리수는 전문학교에 재학 중이던 배동필과 사랑에 빠져 결혼까지 약속했으나, 배동필의 부모는 여배우와 결혼하는 것을 허락할 수 없다며 극력 반대했고, 결국 그들은 다음 생에서라도 못 다한 사랑을 이루고자 동반 자살을 시도하게 된다.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그들의 소식은 신문 지상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었고, 결국 배동필의 부모가 이애리수의 연예계 은퇴를 조건으로 결혼을 허락하면서 사건은 일단락된다. 그러나 훗날 배동필의 본처가 찾아오게 되자 위협을 느낀 이애리수는 재차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으며, 작고할 때까지 자신의 연예계 활동 이력에 대해 철저히 함구했다고 전해진다. (좌) 윤심덕 (우) 이애리수 이처럼 여배우를 둘러싼 시각은 냉랭했으며, 때로는 음험하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배우들은 대상화된 육체의 지위에 머물기보다 예술의 주체 로 거듭나기 원했으며, 서서히 자신의 목소리를 담론장에 기입하기 시작한다. 변화의 전조는 1930년대에 접어들며 점차 가시화되었다. 1931년에는 ‘Y.Y생’이라는 필명을 내세운 필자가 《동아일보》를 통해 “여배우 언 파레이드”라는 제목으로 식민지 조선의 여배우들을 소개하는 장문의 글을 연재한 바 있다. *주2 비슷한 시기 《매일신보》에 연재되었던 “무대 스타- 순방기”는 매 회차마다 남성 배우와 여성 배우를 한 쌍으로 묶어 주요 활동이력과 연기의 고유한 스타일에 대해 소개하기도 했다. 또한 1934년에 서광제 는 《조선중앙일보》 지면을 빌려 헐리우드의 여배우들을 다룬 “세계영화계 행각”을 연재했는데, 이 글들은 여배우를 가십의 대상으로 다루기보다 예술의 완성을 위해 정진하는 직업적 전문인으로 바라본다는 점에서 시각을 공유하고 있었다. 이춘풍이 ‘동정의 대상’으로 바라보았던 여배우는 이제 공공적 담론장에서 ‘예술가’로 조명받게 된 것이다. 특히 ‘여배우’가 타고난 외형이나 신체적 조건을 전시하는 데 만족하지 않고 자신의 ‘기예’를 연마하기 위해 기울여 온 노력을 전경화 한다는 점에서 시각의 변화를 엿볼 수 있다. 더 나아가 여배우들의 목소리가 인터뷰나 대담을 통해 노출되는 사례도 빈번해졌다. 신카나리아 는 유명 여성인사들의 새해 포부를 밝히는 지면을 통해 장차 연극을 연구하며 일생을 배우로 살아가리라 다짐했으며, 새해에는 연극 이론서를 집중적으로 독파할 것이라 밝혔다. *주3 1933년에 《매일신보》가 개최한 신년 좌담회에 참석했던 이경설과 이애리수는 여배우의 사생활이 난잡할 것이란 세간의 추측을 정면으로 반박하며 여배우가 오히려 남배우들보다 “책임 있게 일을 잘 한다”고 주장했다. *주4 최초의 조선어 발성영화 < 춘향전 >(이명우, 1935)의 주역이었던 문예봉 은 발성영화에 좀 더 “적합한 억양”을 연구하겠다고 밝혔으며, 극예술연구회의 대표적 여배우인 김복진 또한 “어린애 역부터 늙은이 역까지” 어떠한 역할이 주어지더라도 철저히 연구하여 제몫을 해낼 것이라 다짐했다. *주5 1937년에 《동아일보》를 통해 장기간 연재된 “스타의 기염” 시리즈에서도 여배우들의 포부를 엿볼 수 있다. 차홍녀 , 한은진 , 남궁선과 같은 연극배우는 물론이고, 문예봉, 김소영 을 비롯한 영화배우들까지 총망라된 이 시리즈에서 여배우들은 자신이 곧 예술의 주체라는 자의식을 숨김없이 드러낸다. (좌) “여배우 언 파레이드”에서 다뤄진 복혜숙 (사진: “ 여우언파레이드 영화편 (9) 인기도 한떄런가 복혜숙양 ”, 《동아일보》, 1931. 8. 9.) (우) "스타의 기염"에서 다뤄진 남궁선 (사진: “ 스타의 기염 (2) 그 보푸계획자랑야심 극은 일생사업연극인 남궁선 ”, 《동아일보》, 1937. 11. 25.) 같은 맥락에서 < 미몽(죽음의 자장가) >(양주남, 1936)의 한 장면에 주목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현전하는 가장 오래된 한국 발성영화로 알려진 이 작품의 주연배우는 당대의 최고 인기스타였던 문예봉이었다. <미몽>의 주인공 애순(문예봉)은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나머지 가정까지 버렸던 인물로, 그의 일탈은 결국 파국으로 치닫게 된다. 어찌보면 이른바 ‘신여성’에 대한 처벌 서사처럼 보이는 작품이지만, 실제로 <미몽(죽음의 자장가)>을 둘러싼 해석의 결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아래의 쇼트들은 내연남인 창건과 함께 무용 공연에 참석했던 애순이 박경림( 조택원 )의 독무를 바라보고 있는 장면을 구성한다. 흥미롭게도 이 장면은 <미몽(죽음의 자장가)>에서 온전한 형태의 시선 편집(eyeline match)이 거의 유일하게 드러나는 곳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시선의 주체와 시선의 대상을 연속적으로 배치하게 될 경우, 시각 주체의 욕망과 그것이 투사된 대상의 정체를 가리키게 된다. 그렇다면 <미몽(죽음의 자장가)>에서 이 장면만큼 주인공 애순의 욕망이 직설적으로 노출된 순간은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미몽(죽음의 자장가)> 중 이 장면이 문제적인 것은 시선의 엇갈림을 통해 식민지기의 극장 속에 착종된 욕망 들을 압축적으로 제시했기 때문이다. 즉, 객석에 앉은 애순의 모습은 시선의 주체인 동시에 시선의 대상으로서 포착된다. 시선의 주체로서 애순은 무용가의 춤에 대한 애호의 감정을 드러내고 있지만, 동시에 그는 주변 남성들의 시선 속에서 대상화된 존재로 재현되고 있다. 더욱이 그들의 응시는 창건이 자리를 비운 직후부터 보다 노골적으로 이어진다. 더욱이 객석에 앉은 애순을 향한 남성들의 응시는 부재하는 창건의 자리를 향한 것이기도 하다. 이는 식민지 조선에서 여성이 남성의 울타리를 벗어날 경우, 무제한적인 욕망의 대상으로 전락하게 된다는 점을 의미한다. 남성들의 왜곡된 시선은 애순의 주체성을 훼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순은 시각적 주체로서의 지위를 끝내 포기하지 않으며, 잡담을 주고받는 산만한 남성들과 달리 무용가의 춤에 집중하면서 극장의 본래 취지에 걸맞는 ‘이상적 관객’의 형상을 드러낸다. 이 장면이야말로 <미몽(죽음의 자장가)>이 지닌 미묘한 해석의 결을 함축적으로 드러내는데, <미몽>은 ‘신여성’을 부정적 표상으로 낙인찍고 대상화하려는 사회적 시각을 보여주면서도, 이러한 시각으로 결코 포합될 수 없는 여성의 주체성 또한 재현해 내기 때문이다. ‘애순’의 모습처럼 식민지 조선의 여배우들은 그들을 둘러싼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폭압적인 시선을 예술적 주체를 향한 주목으로 바꿔놓기 원했던 이들이었다. 사회의 무지함에 대해 항변하는 대신 그들은 스스로의 부족함을 겸허히 채우고자 했으며, 극장문화의 공진화적 발전을 목표로 삼았다. 일찍이 발터 벤야민은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을 통해 영화가 현대인들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논한 바 있다. 기계장치의 냉혹한 메커니즘 속에 짓눌린 현대인들은 스스로의 인간성을 포기하도록 강요받지만 영화를 통해 해방의 서사를 발견한다. 즉, 배우는 카메라라는 기계장치 앞에서 끊임없이 시험받게 되지만, 그 가혹한 테스트를 의연하게 버텨낼 뿐 아니라 적극적 상호침투를 통해 가장 인간다운 형상을 제시하는 데 성공한다는 것이다. 대상화된 육체의 지위를 넘어 예술적 주체로 발돋움하기 원했던 식민지 조선 여배우들의 인정투쟁이야말로, 영화를 현대사회의 냉혹한 논리에 ‘복수’를 가하는 장치라고 보았던 발터 벤야민의 생각과 상통하는 대목이 아닐까? *** 주1. 우수진, 「여배우의 사회문화적 구성과 이월화」, 『현대문학의 연구』 82, 한국문학연구학회, 2024. 주2. ‘Y.Y생’은 김유영의 필명으로 추정된다. 주3. 기사, “직업여성의 가두에서 맛는 1931년 - 신산한 그들의 생활에서 새해의 출발을 보자!”, 《조선일보》, 1932. 1. 2. 주4. 기사, “직업여성의 좌담회”, 《매일신보》, 1933. 1. 3. 주5. 기사, “백화요란한 음악, 미술, 극, 영화, 무용 각계의 성관 - 예원에 활약하는 여성들”, 《동아일보》, 1936. 1. 1. 이광욱(극장문화사 연구자) l 읽고 생각하며, 말하고 글쓰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다. 과거의 기록을 뒤적이고 오늘의 사람들과 소통하며 함께 미래를 고민한다. 건국대학교 글로컬캠퍼스 조교수(동화 한국어문화학과), 한국영상자료원 객원연구원(『신문기사로 본 조선영화』 시리즈). 『드라마, 일상성의 미학』(2024) 공저, 「카프 연극대중화론의 전개와 송영 풍자극의 매체미학」(2018), 「도달한 임계점과 보존된 미래 – 발성영화의 정착과 경성 소재 조선인 극장의 연쇄 반응」(2021), 「표류하는 조선영화 : <임자 업는 나루배>에서 <정춘삼>으로 – 최초의 영화 판권 소송과 식민지 조선영화 시장의 추이」(2022) 집필.
< 사방지 >는 1980년대에 양산되던 사극 에로영화로 분류될 수 있다. <사방지>는 조선 세조시절 『실록』에 기록된 실제 사건을 영화화했다. 『실록』에 따르면 양반가 종인 사방지가 주인집 과부 며느리인 이씨와 놀아난다는 소문이 돌아 조사해보니 그가 음낭과 음경을 갖고 있어 고발당했다고 한다. 이 고발은 세조가 자신의 사위인 정현조를 보내 살피게 할 정도로 큰 스캔들로 발전한다. 그리고 사방지는 여성과 남성의 성적 특징을 모두 갖고 있는 어지사지, 즉 간성임이 밝혀진다. 조정은 사방지를 시골로 쫓아내는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한다. 권력자들이 관대해서 그런 결정을 내렸다기보다는 그를 기존의 인간 질서를 벗어난 존재, 즉 비-인간으로 봤기 때문에 큰 죄를 내리기 어려웠던 것으로 추정된다. 말하자면 인간에게 해당하는 법을 비-인간에게 적용하기 어려운 것이다. 사방지는 추방된 곳에서 다른 여성들과 성 스캔들을 일으키고 이씨와도 다시 만남을 가졌다고 한다. 세조는 이 소식을 듣고 사방지를 관노비로 내치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사람은 인류(人類)가 아니다. 마땅히 모든 원예(遠裔)와 떨어지고 나라 안에서 함께 할 수가 없으니 외방 고을의 노비로 영구히 소속시키는 것이 옳다.” 이씨 부인의 아들 역시 관직을 얻지 못하게 하는 등 불이익을 받았지만 그를 인간 범주에서 제외하지는 않는다. 이씨 부인의 행위는 그저 인간의 비도덕성으로 규정된다. 영화 <사방지>는 사방지(이혜영)의 존재를 처음부터 ‘비-인간’의 범주에 놓는다. 영화가 묘사하는 ‘비-인간’은 한편으로는 위계적으로 인간보다 못한 짐승 같은 존재로 묘사된다. 사방지의 출산 장면이 재현되는 오프닝은 몰아치는 비바람으로 불길한 기운을 강조하고, 영화는 그의 존재를 뱀, 달팽이 같은 짐승들로 직유한다. 사방지의 등장에는 늘 뱀이나 달팽이의 클로즈업 쇼트가 돌발적인 충격으로 삽입된다. 하지만 사방지의 비인간적 면모는 동시에 그가 보통의 인간을 넘어선 비범하고 특별한 존재라는 걸 증명한다. 인간과 동물, 여성과 남성의 양가적 특징을 다 가진 그는 양성 모두를 홀리는 성적 매력, 세심함과 대담함, 자수와 같은 정교한 기술과 놀라운 체력, 아름다운 외양과 지성 모두를 갖춘 이로 묘사된다. 이소사(방희)와 사방지의 만남은 운명적인 사랑으로 묘사된다. 이소사는 처음부터 사방지의 비범함을 알아챈다. 이소사와 사방지의 만남은 성적 은유로 가득 차 있다. 폭포에서 몸을 씻던 이소사 앞에 똬리를 튼 큰 뱀이 등장한다. 나뭇가지 사이로 훔쳐보던 사방지는 전혀 두려워하지 않은 채 나뭇가지로 그 뱀을 들어 무심하게 던져버린다. 이 장면은 낭만적인 구원자로서의 사방지를 강조하는 동시에 그의 남성 성기를 직접적으로 은유한다. 이소사는 뱀을 보고 놀라는데 이는 사방지의 남성성에 대한 매혹과 경탄을 장면화 한다. 이상할 정도로 뱀을 보고도 평정을 유지하는, 동물 근친적인 사방지의 태도는 그의 비인간성을 강조하는 것이기도 하다. 한편 영화는 이소사가 사방지를 사랑하게 된 것이 단지 그의 남성 성기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을 재차 확인하려 한다. 이소사의 사랑을 통해 사방지의 비인간성은 특별함과 비범함이 된다. 즉 인간 이하의 존재가 아니라 인간의 평범함과 비루함, 세속적인 기준을 초과한 인간이다. 그는 ‘대물’로 성적으로 여성들을 만족시켜줄 수 있을 뿐 아니라 다른 여자를 보호하는 낭만적인 구원자이며, 천자문도 읽고 자수에도 뛰어난 다재다능한 능력을 가졌다. 이소사 뿐 아니라 다른 여자와 남자들도 색다른 그에게 매력을 느낀다. 이소사는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절에서 밥이나 짓는 애인 줄 알았는데 이런 재주가 있다니. 날마다 너를 새롭게 보는구나.” 물론 이 영화는 에로영화로서도 충실한 기능을 하며 이 대사를 계기로 둘은 동침을 하게 된다. 하지만 이 영화는 계급 불평등과 그에 대한 분노를 폭발시키는 멜로드라마가 되면서 일반적인 에로영화를 넘어선다. 이소사와의 관계가 들통이 나고 양반이라는 신분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이소사는 사방지를 배신한다. 사랑하는 두 여자 사이의 차이는 젠더나 섹슈얼리티보다 계급에서 두드러진다. 무녀 모화는 자신의 남편이 양반가의 씨내리로 사용된 후 살해된 복수를 위해 사방지를 이용한다. 자신을 도구화하려는 모화의 계략과 납치를 비난하던 사방지는 그녀의 사연을 듣고 함께 복수에 참여한다. 흥미로운 점은 둘 모두 자신들에게 직접 가해를 한 개인이나 가문이 아니라 양반이라는 계급 자체에 복수를 한다는 것이다. 모화는 포주 노릇을 하며 양반가 마님들에게 돈을 받고 사방지와의 성적 관계를 제공한다. 그들의 재산을 갈취하려는 이유도 있지만, 그보다는 성적 규범과 도덕성을 자신들의 우월한 특징으로 내세우는 양반의 계급적 위선을 폭로하기 위함이다. 물론 이 설정은 이소사에 순정을 갖고 있던 사방지가 많은 여자들과 관계를 맺는 성애적인 씬을 만들기 위함이기도 하다. 하지만 곧 사방지는 자신의 몸을 이용해 복수를 하는 것이 자해 행위임을 깨닫게 된다. 성적 도구가 된 사방지는 그 자체로 비인간화 된다. 모화는 “넌 달팽이의 혼을 타고 나서 음지에서 살 수밖에 없다.”고 말하며 그를 통제하려 한다. 여기서 그 유명한 달팽이의 클로즈업 몽타주가 끼어든다. 사방지는 그렇게 여러 번에 걸쳐 비인간화된다. 하지만 그의 비인간성은 신체적 특징에 있다기보다는 젠더와 섹슈얼리티, 계급 등에 의해 그를 비인간화하고 그 행위들을 합리화하려는 ‘인간들’에 의해 구성된다. 사방지는 결국 “전 남자도 여자도 아니지만 짐승도 아니에요.”라고 절규한다. 그는 정체성의 혼란, 소속감에의 결여를 겪으며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기에 이른다. 사방지는 “부처님이 계시다면, 왜 저 같은 저주받은 생명을 만드셨습니까. 남자도 여자도 아닌 병신을 말입니다.”라고 울부짖는다. 이소사와의 재회가 이뤄지지만 자살이라는 비극으로 끝이 난다. 엔딩씬에서 자신의 남성 성기를 잘라 버리는 사방지의 신체훼손은 특정 성별로의 결정이나 ‘정상성’에의 순응이라기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주지 않는 세상에 대한 저항이다. 둘 간의 사랑과 갈등은 단순히 가부장제 억압의 결과나 ‘에로 영화’의 성적 대상화된 장치로 설명되기 어렵다. 사방지를 여자로 알면서도 그를 사랑한 이소사의 섹슈얼리티, 사방지와 이소사의 주요 갈등인 계급과 신분, 간성에 대한 다채로운 반응 규범과 질서를 초과한다. 아마도 이러한 묘사가 가능한 것은 에로 영화라는 장르의 특징 때문이기도 하다. 결국 영화는 이소사의 자살과 사방지의 성기 절단이라는 파격적 비극으로 끝나지만 현대적 관점에서도 단순하게 분류되지 않는 그/녀들의 정체성과 섹슈얼리티는 더 많은 이야기를 남겨 놓는다.
< 오마주 >는 신수원 감독의 다섯 번째 장편 연출작이다. 신수원 감독은 < 레인보우 >로 2010년 장편데뷔한 후 올해까지 거의 한 해도 거르지 않고 꾸준히 영화를 만들어왔다. 장편영화를 개봉하지 않은 해에는 옴니버스 영화, 텔레비전 단막극, 다큐멘터리를 연출하며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영화연출에 전념해 왔다. 한국영화에서 성별과 나이를 막론하고 이만큼 생산적인 감독은 드물 정도다. 데뷔작인 <레인보우>는 교사를 하다 그만두고 서른아홉의 나이에 첫 장편영화를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감독지망생 지완(박현영)의 좌충우돌을 그린 자전적인 영화다. <레인보우>는 저예산 독립영화였던 만큼 크게 흥행을 하지는 못했지만 여러 영화제에 수상을 하고 비평적으로도 좋은 평가를 받았다. 배급사가 제공한 줄거리에 따르면 <레인보우>는 최악의 상황에도 “꿈”과 “희망”을 잃지 않고 도전을 멈추지 않는 재기발랄하고 따뜻한 “응원”의 성장영화이자 음악영화다. 물론 이 설명은 전혀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이 영화의 진정한 매력은 전형적인 성장영화를 넘어선 ‘근본 없음’과 지리한 일상에 느닷없이 침투하는 ‘날 것의 폭력’을 응시하고 그려낸 데 있다고 본다. 오래 전 태백의 한 미디어센터에서 <레인보우> 공동체 상영과 토크를 진행한 적이 있다. 평일 낮이었던 탓인지 대부분의 관객이 노년층이어서 낯선 독립영화 스타일과 영화감독의 장편 데뷔 이야기에 공감을 해줄까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그 우려는 기우였다. 관객들은 영화계의 맥락을 잘 알지 못하면서도 주인공 지완의 고생담을 직관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코미디로 즐겼다. 특히 모든 시도가 엎어지고 지완이 친구인 조감독과 함께 바닷가를 지나다 우연히 마주친 영화현장에서 지인의 부탁으로 ‘행인3’으로 출연하는 장면에서는 예상을 넘어선 박장대소가 나왔다. 마지막 즈음에 나오는 이 장면은 영화의 클라이맥스라 할 수 있다. 지인인 감독은 그냥 지나가기만 하면 된다고 했지만 막상 연기가 시작되자 만취한 남자를 연기한 배우는 느닷없이 행인인 지완의 뺨을 때린다. 만취한 남자: 아줌마 어디가? 어디 가냐고? 행인3(지완): 몰라요. (만취한 남자가 행인3의 뺨을 때린다) 감독은 지완의 리액션이 맘에 들지 않는다며 계속 NG를 부르고 지완은 열 번에 걸쳐 뺨을 맞는다. 바스트 쇼트으로 반복되는 열 번의 뺨 맞는 장면은 지완의 움찔하는 신체반응과 매우 사실적인 사운드로 관객들의 몸도 오그라들게 만든다. 지완은 열 번째에 이르자 마침내 참지 못하고 “아프잖아! 그렇게 뺨을 때리고 그래. 그렇게 만만해 보여. 내가 그렇게 우습냐고. 나도 때리면 아프다고.”라고 폭발하며 행인의 존재감을 보여준다. 이 순간 일상과 판타지, 현실과 연출, 카메라 앞과 뒤, 스크린 안과 밖의 경계가 급격히 무너져 내린다. 신수원 감독 특유의 비린내 나는 날 것의 폭력은 거리를 지우고 포장을 벗겨버린다. 그것은 현실의 은유라기보다는 직접적인 직유이고 관객들은 스크린 위의 폭력을 슬랩스틱 코미디를 보듯이 반응한다. 지완의 친구인 조연출은 “맞으니까 좋냐? 이 매저키스트, 또라이야. 어디가 그렇게 가고 싶었냐.”라고 웃으며 말한다. 이 말은 관객들에게도 적용된다. 자학적인 폭력은 지완과 관객 모두에게 이상한 카타르시스의 순간을 만들어낸다. 신수원 감독은 <레인보우>를 만들면서 지완의 간절한 바람을 이루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내용은 지난한 실패의 과정만을 담는다. 이로써 ‘성취’와 ‘실패’는 구분되지 않고 서로 엉키게 된다. 근본 없음과 느닷없는 폭력은 신수원 감독의 이후 장르영화들뿐만 아니라 최근작인 <오마주>에서도 도드라지는 특징 중 하나이다. <오마주>에서는 여자들이 만든 창작물들은 빈번히 실종되며 연속성을 갖지 못하고, 여성 창작자들은 뿌리 없는 자기 욕망과 쓸모의 근거를 찾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근본 없음은 자유로움을 줄 수도 있지만 또한 때때로 생존을 힘들게 만들며 심지어는 자기 존재에 대한 파괴적인 상황을 야기할 수도 있다. <오마주>는 지완(이정은)과 친구인 프로듀서 그리고 남편과 아들로 구성된 가족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레인보우>의 자전적 세계관을 고스란히 가져온다. 지완은 이제 조금 더 나이가 들고 세 번째 영화 ‘유령인간’을 개봉했다. 흥행은 너무나 어렵고 그래서 첫 번째 영화만큼 그 이후의 영화 만들기도 녹록치 않다. 여전히 ‘성취’와 ‘실패’가 얽혀있다. <레인보우>에서 시나리오가 잘 써지지 않는 가운데 뜬금없이 개미의 환영을 마주했던 것처럼 <오마주>에서도 지완은 갑자기 ‘되’와 ‘돼’가 헷갈리며 시나리오의 진도를 뽑아내지 못한다. 장편데뷔가 <레인보우>의 미션이었다면, 이제는 영화계에서 생존하기가 목표가 된다. <레인보우>에서처럼 남편과 아들은 지완의 창작 작업을 막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전폭적으로 이해해 주지도 않는다. 그는 외롭고 막막하다. 여전히 기댈 곳이 없는 상황, ‘근본 없음’이 그의 뿌리가 된다. 오랜 동반자였던 프로듀서도 영화를 그만둬야겠다고 하는 상황에서 지완은 과연 영화를 계속 만들 수 있을까? 만들어야 할 동기는 무엇일까? 지완이 따라갈 수 있을 만한 선례가 있는가? 심란한 상황에서 지완은 영화박물관에서 1960년대 활동하던 여성 감독 홍재원의 새로 발굴된 영화 프린트에서 사운드가 소실된 장면의 복원을 위한 연출을 의뢰받는다. 지완은 사운드 복원을 넘어서 아예 사라진 장면의 프린트를 찾아내기 위해 홍재원 감독의 주변인들을 찾아다니며 그의 흔적을 쫒는다. 그러는 동안 지완이 사는 아파트의 주차장에서 자살한 여자의 사건을 알게 되고 한참 동안 집에 들어오지 않는 옆집 여자가 실종되었을 수도 있다는 의심을 품게 된다. <오마주>에 등장하는 1950-60년대 영화계에서 활약한 여성 삼인방 홍재원과 박남옥 감독 그리고 이영희 편집감독의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다. < 여판사 >는 한국영화사에서 두 번째 여성감독으로 기록된 홍은원의 데뷔작이다. 실제로 신수원 감독은 <레인보우> 개봉 이후 MBC에서 창사기획 특집으로 <여자만세>(2011)라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박남옥 감독과 홍은원 감독에 대해 알게 되었다고 한다. 홍은원 감독은 약 12년 간 스크립터, 편집, 조감독으로 일하다 1962년 <여판사>로 데뷔를 하게 된다. 이 영화의 프린트는 유실되었다가 2015년 발굴되어 복원되었다. 하지만 일부 장면의 사운드가 온전치 않은 상태였다. 한국 최초의 여성 판사였지만 1961년 서른셋의 나이에 타살인지 사고인지 알 수 없는 이유로 갑자기 사망한 황윤석의 실제 이야기를 소재로 삼은 영화였다. 이 영화는 “홍일점 여판사에 홍일점 여감독”이라는 광고카피를 달고 있었던 만큼, 1960년대 각자의 직군에서 거의 유일했던 여성 전문직업인들을 연결짓는다. 여성 감독들에게는 끊임없이 텍스트 안과 밖을 연결 지으려는 시도가 스스로도 그리고 타인들에게서도 보인다. 이것은 때로 창조적 자양분이 되기도 하고 또 때로는 독이 되기도 한다. 박남옥 감독이 < 미망인 >(1955)으로 장편데뷔한 후 차기작을 연출하지 못했던 것과 달리, 홍은원 감독은 세편의 장편영화를 만든다. 그러나 나이 들어서도 계속 영화를 연출하고자 했던 바람은 이어지지 못했다. 홍은원 감독은 <여판사> 연출을 맡으며 실제 사건이나 원작 시나리오와는 다른 결말을 원했고 수정해 연출했다고 한다. “오랜 세월을 두고 불행했던 이 나라 여성들”을 위해 법관으로서 일하겠다는 굳건한 사명감을 갖고 판사가 된 진숙(문정숙)은 시댁과 남편의 괴롭힘 속에서 결국 가부장제 체제에 굴복하고 판사를 그만두고 희생적인 며느리 역할을 맡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시어머니가 살인죄를 뒤집어쓰자 변호사로 변신해 법정에서 변론하며 공적 역할과 사적 역할을 협상하고 생존을 꾀한다. 시어머니를 비롯해 남편과 시댁은 여성이 판사로 일하는 것은 쓸모없는 일일 뿐 아니라 심지어 가족의 해체를 촉진하는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한다. 대의명분이 중요한 진숙은 사적영역에서 가부장제가 요구하는 역할을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의 욕망과 존재 자체를 부정 당한다. 진숙은 자신을 억압했던 바로 그 시어머니를 살리고 가족을 유지하기 위해 그리고 여성들을 도우려 했던 대의를 실천하기 위해, 변론을 통해 공적영역과 사적영역 모두에서의 자신의 가치를 재증명한다. 여성이 되고, 여성으로서 생존하는 것은 가부장제가 구분지어 놓은 경계를 허무는 일이 된다. 그런 면에서 법정의 변론 장면에서 진숙의 설명적인 보이스오버와 사건을 재구성하는 플래시백으로 명징하게 재현되는 것 그리고 그중 일부 사운드 유실된 것은 너무나 상징적이다. 홍은원 감독은 당시 여성들에게 일단 실종되거나 죽지 않고 ‘생존하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수정한 시나리오의 결말에서 일단 실제 사건과 달리 진숙을 살린다. 그리고 생존 그 자체에서 그치지 않고 설사 일부 타협이 있을지라도 법관으로서의 공적영역을 되찾아준다. 그래서 <오마주>의 지완도 실종된 프린트 일부를 찾는 것과 옆집 여자의 생존을 확인하는 것이 모두 중요하다. 지완은 이제는 폐허가 된 오래된 단관 영화관에 버려진 밀짚모자에서 우연히 유실된 프린트를 찾는다. 밀짚모자의 챙을 세우기 위해 사용된 필름 조각들은 설사 영화로서 기능하지 못했을 때조차도 또 다른 사용가치를 부여받고 있었다. 지완은 왜 그렇게 유실된 장면을 찾으려했던 것일까? 실종으로 뚝뚝 끊기며 연결되지 않는 서사는 어떤 폭력을 야기하는가? 여성들이 자신의 경력에서 일이 잘 진척되지 않아 자기회의에 빠질 때 성별은 징크스가 되기도 한다. 성차별적인 사회에서 여자라는 성별이 혹시 일에 방해가 된 것은 아닐까하는 의심. 그 의심은 때때로 사실에 근거한다. 그럴 때 역사 속 선례는 그 징크스를 깨는 모티브가 될 수 있다. 홍은원 감독의 경우 영화 3편을 연출하고 더 이상 영화를 만들지 못하면서 나이 들 때까지 평생 영화를 만들겠다는 자신과의 약속은 지키지 못했지만, 데뷔작 영화 한편을 만들고 더 이상 영화를 연출하지 못했던 박남옥 감독보다는 나아간 것이다. 홍은원 감독은 박남옥 감독, 최은희 배우/감독/제작자 같은 선배, 동료들과 함께 이것을 만들어 간 것이다. 군데군데 비어있고 희소하고 유실되어서 소재와 개연성이 떨어지는 것 같은 여성 영화사에서 여성영화인들은 무언가를 잃어버렸다는 회의감과 근본 없음에 빠진다. 그럼에도 그 희귀한 조각들을 우연히 발견했을 때, 특히 여전히 모자의 틀을 잡아주는 심으로 여전히 사용가치를 발휘하고 있을 때 그것은 징크스인 동시에 영화에 대한 열정을 멈추지 않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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