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줄
- 감독
- 홍광순
- 제작년도
- 1999
- 출연
- 현창걸, 리월숙, 김봉삼, 손철민, 김광문, 김철, 김련옥, 전룡주, 손병옥, 최대현, 김병준, 리영준, 리상진, 정주연
별 탈 없는 하루하루가 이어지면 문득 불안하다. 무사한 나날이 언제 깨질지 두렵고 찾아올 시련에 지레 겁을 먹어 그런 것 같다. 그럴 땐 매일 밤 습관처럼 그날 있었던 사소한 힘겨움을 복기한다. 자잘한 불행을 곱씹는 건 아직 닥쳐오지 않은 그 날을 위한 일종의 예방주사다. 때로 행복은 불행을 통해서 그 존재감을 드러내고, 평온은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상처를 통해 선명해진다. 직장에서 받은 스트레스, 함부로 내뱉은 말에 입은 자잘한 상처의 욱신거림을 통해 지금 내가 아직 안전한 곳에 있음을 새삼스레 환기한다. 비슷한 이유에서 다큐멘터리를 볼 때마다 최대한 불편한 감각을 유지하려고 애쓴다. 혹여 지금의 내 평온을 확인하기 위한 안전장치로 타인의 절박함을 소비하고 있는 건 아닐까 싶어 매번 스스로를 돌아보고 경계해왔다. < 사람이 산다 >가 반가웠던 첫 번째 이유는 이런 자질구레하고 쓸데없는 고민들이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평범한 다큐멘터리는 딱히 기교나 요령을 부리지 않는다. 송윤혁 감독은 쪽방촌을 철거한다는 소식에 쪽방촌에 들어가 1년 동안 함께 하며 그들의 삶을 기록했다. 여기에 무슨 특별한 비결이 있는 것 같진 않다. 그저 당연한 작업을 단순하게 수행했을 뿐이다. 쪽방촌 주민들이 카메라를 바라보는 시선만 봐도 이들과 친해지기 위해 감독이 얼마나 시간과 정성을 들였다는 게 대번에 느껴진다. 사실 카메라 저편과 이편의 거리는 생각보다 멀고,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마음으로 공감하는 건 전혀 다른 영역에 있다. 송윤혁 감독은 그들을 섣불리 동정하거나 위로하는 대신 함께 대책을 고민하고 푸념을 가만히 들었다. 요컨대 대상과 눈높이를 맞췄다. 기본임에도, 아니 그래서 근래엔 쉽게 접하기 드문 미덕이다. 영화는 세 그룹의 인물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하나. 이제 막 쪽방 생활을 시작한 남선 씨는 이곳에서부터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려 한다. 하지만 부모님이 살아 계신 남선 씨는 부양의무제도 때문에 기초생활 수급을 받지 못한다. 폐지 수집을 해보지만 월세와 생활비를 감당하긴 역부족이다. 둘. 쪽방 생활이 1년이 되어가는 창현 씨는 이제 쪽방을 벗어나고 싶다. 그러나 부정수급으로 행여 기초생활수급비를 잃을까 전전긍긍 눈치 보는 상황에서 몰래 하는 아르바이트로 겨우 생계를 이어갈 따름이다. 셋. 쪽방에서 태어나 자란 27살 청년 일수는 젊은 나이에 고혈압, 당뇨, 결핵을 앓고 있다. 역시 기초생활수급에 의지해 살아가지만 비슷한 처지의 반려인 승희를 만나 쪽방촌에선 보기 드물게 가정을 꾸린다. 혼인 신고를 하면 수급비가 줄어들지만 가정을 이루는 게 꿈이었던 두 사람은 부부가 되고 아이를 낳는다. 이제 갓 들어온 사람과 탈출하고 싶어 하는 사람, 쪽방이 고향인 사람의 삶을 교차시키며 그려낸 1년의 끝에는 빈곤의 굴레를 덧씌우는 부조리한 시스템이 자리한다. 몇 푼 되지 않는 기초생활수급비는 이들의 생명줄이다. 쪽방촌 주민들은 그저 살기 위해서 좁은 방에 몸을 맞추듯 부조리한 상황에 어떻게든 적응해야만 한다. 자신이 얼마나 무능력한지 증명해야 나오는 돈 앞에 존엄이란 허망한 수사에 불과하다. 그리하여 그들은 죽음이 다가오고 있는 것조차 느끼기 어려울 정도로 좁은 쪽방에서 천천히 죽어간다. 카메라는 시스템의 부조리를 큰 목소리로 고발하거나 일일이 설명하지 않는다. 다만 이들의 삶이 얼마나 뒤틀려 있는지 당사자의 시점에서 담담히 전달하는 것으로 몫을 다한다. 재밌는 건 영화의 주제에 비해 의외로 어둡거나 무겁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영화의 호흡은 상당히 빠르고 간결하며, 몇몇 순간엔 생기가 감돌고 심지어 따스하기까지 하다. 일수의 에피소드에서는 흐뭇한 웃음을 자아내는 장면들도 많다. 결혼을 앞두고 “형은 좋겠어요, 총각이어서.”라고 농담을 던지는 일수의 능청은 주변 평범한 이들의 모습과 하나 다를 것 없다. 탈출구 없는 그들의 삶을 암담하게만 그리지 않은 건 그들이 끝내 기초생활수급자, 장애인, 낙오자가 아닌 쪽방촌 주민이자 ‘한 사람’으로 살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동정이나 연민의 시선을 최대한 덜어낸 건 관찰대상 사이로 녹아들어 간 연출자의 공이라 할만하다. 송윤혁 감독은 금방 휘발되어 버릴 눈물 대신 시스템 전반을 바라보도록 유도한다. 동시에 그들 각자의 표정, 보통 사람으로서의 시간들도 놓치지 않았다. 그게 이 무난한 다큐멘터리가 유난히 미덥고 고마운 이유다. 문득 쪽방촌 주민들이 가까스로 짓고 있는 미소가 내가 매일 되새기는 사소한 상처들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일매일 작은 고민에 매달리며 일상에 안도하는 나와는 반대로 쪽방촌 주민들은 매일매일 사소한 행복과 별거 없는 농담, 폐지를 모아 산 소주 한 잔에 매달리며 오늘을 버틴다. 일견 다른 삶처럼 보이지만 실은 동전처럼 붙어 있다. 여기에도 거기에도 사람이 산다. 쪽방촌 주민들이 처한 현실에 분노하고 시스템의 부조리를 질타하는 힘은 거기서부터 시작한다. 동시대의 문제를 같은 눈높이에서 바라보도록, 관객을 친절히 안내할 줄 아는 귀한 영화를 만났다.
'용산’이라는 사건. 2009년 1월 20일 용산 재개발 지역 철거민들이 이주대책을 요구하며 남일당 옥상에 망루를 짓고 농성을 시작한다. 그러나 농성 시작 25시간 만에 경찰특공대에 의한 강제진압이 이뤄지고 이 과정에서 철거민 5명과 경찰특공대 1명이 사망한다. MB 정권 초반에 발생한 이 사건은 사건 자체의 참혹성과 비극성, 폭력성으로 인해 정권의 명줄을 뒤흔들 거대한 스캔들이 되었고 그 폭발력을 감지한 권력은 정권의 안위를 도모하고자 사법부를 비롯한 모든 수단을 총동원해 사건을 은폐, 조작한다. 그 결과 사건의 본말은 전도되고 가해자와 피해자가 뒤바뀐채 정권의 의도에 충실한 사법부의 일방적 판결문 낭독으로 사건은 종결처리된다. 그러나 사법부의 판결을 액면 그대로 믿는 이는 거의 없었다. 이 사건은 사법적으로는 종결되었지만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여전히 미해결인 사건이며 아무리 긴 시간이 흐르더라도 끝까지 파헤쳐 역사의 법정에 세워야할 사건으로 남아 있다. 그것이 우리가 흔히 `용산참사`라고 부르는 사건이다. 도대체 그날의 진실은 무엇이었을까? 정권은 무엇이 그리 두려웠기에 수천 쪽에 이르는 초기 수사기록을 감추고 현장에 있었던 카메라들 가운데 사건의 핵심에 가장 깊숙이 접근한 경찰 채증조의 촬영영상 일부를 삭제하면서까지 애초에 기록은 없었다고 발뺌하려 했을까? 사실 그들이 `용산`이라는 사건에 대한 기억을 어떤 식으로 만들고자 했는지는 명백하다. 사법부의 판결문에 그 모든 것이 담겨있다. 그 노골적인 의도가 지나치게 뻔뻔하기 때문에, 오히려 중요한 것은 정권이 그들의 `상대적 진실`을 주장하기 위해 억압한 사건의 실체적 진실은 무엇이며 정권이 만들어낸 공식기억에 저항하는 기억을 만들려는 이들은 어떤 노력을 해 왔는가,라는 점일 것이다. 실로 많은 이들이 그 대열에 동참했다. 남일당과 함께 철거된 진실을 알리기위해 용산의 찬 거리에서 긴박하게 돌려대던 그 많은 카메라들. 길거리 방송국, 개인방송을 자처한 수많은 개인들과 그들의 카메라가 기록한 파편적 영상들. 최근 몇년간 만들어진 다큐멘터리들 가운데 단일 사건으로는 가장 많이 다뤄진 것이 `용산`이라는 점에서 이 사건이 얼마나 많은 이들의 분노에 기름을 부었으며 이 사건을 둘러싼 기억 투쟁이 얼마나 치열하게 전개되어 왔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사건을 기록한 수많은 영상들 가운데 최종적인 작품의 형태로 세상에 나온 몇몇 다큐멘터리들이 있는데 이 영화들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장면이 있다. 화염에 휩싸인 남일당 망루와 진압작전을 수행하는 경찰의 행위를 기록한 장면이 그것이다. 사건의 당사자들 태반이 사망하고 유력한 증인들과의 만남이 제한된 상황에서 현장에서 촬영된 이 생생한 기록물들은 그날의 진실에 접근하는 중요한 증거물로서 가치를 인정받는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현장 접근이 제한된 상황에서 일정한 거리를 두고 촬영된 수많은 영상들은 실은 그 자체로는 아무런 진실도 말해주지 않는다. 케네디 암살을 기록한 저 유명한 ‘자푸르더 필름’이 모든 것을 보여주는 동시에 아무 것도 보여주지 않는 텅 빈 기표와 같다는 평가를 받듯이, 이날의 참사를 기록한 동영상 자체는(material) 아무런 의미를 담고 있지 않다. 그것은 표피적 사실을 보여줄 수는 있지만 표면 너머 사건의 실체, 진실까지 보여주지는 않는다. 이 가치중립적인 이미지에 구체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현미경적이고 망원경적인 시각을 동원해 영상을 해석하는 창작자의 세계관과 미학적 전략이다. 창작자의 전략 속에서 이 동영상은 비로소 의미를 갖고 발언하기 시작하며 동일한 시각적 기록도 어떤 관점에서 제시되는가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를 발생시킨다. 김일란 , 홍지유 감독의 < 두 개의 문 >은 용산이라는 트라우마적 사건을 관객에게 지극히 주관적으로 체험시키는 전략을 택한다. 영화는 사건에 대해 일정한 거리를 두고 관객에게 조목조목 설명하고 설득하는 방식을 포기한다. 대신 참사의 한 복판, 검붉은 화염에 휩싸인 남일당 망루를 향해 관객을 끌어들여 그 화마의 현장 속에 푹 담가버린다. 사건에 직간접적으로 연루된 이들의 목소리를 재연하고 그날을 기록한 영상을 수시로 인용하고 조립하는 전략을 통해 우리는 집요하게 참사의 현장 속으로 끌려들어간다. 그것은 참으로 끈질기고 집요한 반복이다. 에롤 모리스의 < 가늘고 푸른 선 >을 연상시키는 음울한 음악과 반복되는 화염의 이미지는 끊임없이 우리를 2009년 1월20일 7시 6분, 그리고 7시20분에 발생한 두 차례의 화재현장, 그 생지옥으로 초대한다. 가슴에 돌을 얹은듯 호흡마저 곤란해지는 관람의 악몽에서 벗어나기는 쉽지 않다. 90분이 넘는 러닝타임 동안 우리는 속절없이 생지옥의 현장에 빨려 들어가 그 시간을 온전히 견뎌내야 한다. 트라우마의 속살을 향해 관객을 밀어넣는 집요한 반복회귀 운동. 이 쉼없는 재귀적 운동을 통해 감독이 ‘용산’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영화를 보는 관객 모두, 나아가 이 사회의 구성원 어느 누구도 이 사건에 거리를 두고 객관적으로 논평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다는 것. 우리가 ‘용산’이라는 사태를 이해하는 유일한 방식은 희생자들이 겪었을 그날의 고통을 고스란히 체험함으로써 이 사건을 나의 것으로 체화하고 남일당과 함께 법의 이름으로 땅 속에 파묻혀버린 진실을 발굴하는 책무를 공유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설명과 이해가 아니라 고통의 체험과 공유이다. 이 영화는 지극히 주관적이며 편파적이다. 이 주관성과 편파성은 궁극적으로 관객에게 질문의 형태로 돌아온다. 당신은 이 억압된 진실에 어떻게 답하겠는가? 영화는 중립적인 논평과 입장 표명을 거부한다. 진실은 처음부터 명백했기 때문이다. 그 진실을 머리가 아닌 몸으로 느끼고 행동하라. 그리고 당신 역시 역사의 법정에서 한 역할을 하라. 그때까지는 어느 누구도 이 범죄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