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온 모리스
- 감독
- 차드 하티건
- 제작년도
- 2016
- 출연
- 크레이그 로빈슨
조선극장 흥행광고 3호 중 일부 (사진: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다시 만난 세계: 식민지 조선의 극장문화 이야기 한국영상자료원에서 발간하는 『신문기사로 본 조선영화』 시리즈를 바탕으로 역사의 지층 속에 묻혀 있던 이야기와 행간 속에 숨겨진 욕망들을 재조명합니다. 조선극장 은 단성사 와 더불어 식민지기의 대표적인 조선인 극장으로 손꼽혔던 곳이다. 그러나 ‘경성의 일류 극장’이라는 명성이 무색할 만큼 조선극장은 유독 ‘스캔들’의 진원지로 호명될 때가 많았다. 객석에서 발생한 삐라 살포 사건이나 극장 주위에 진을 친 폭력단들의 범죄행위도 여러 차례 신문 지상에 오르내렸지만, 무엇보다 빈번했던 것은 극장 경영권을 둘러싼 내홍 에 얽힌 이야기들이었다. 실제로 조선극장의 운영 기록(1922~1936)을 살펴보면, 일시 휴관을 선언하고 극장 문을 닫는 일이 적지 않았는데 주된 원인은 경영권 분쟁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었으며 극장이 재개관할 때는 대개 새로운 경영주의 취임 소식을 동반하곤 했다. [1] 이는 단성사가 경영주 박승필 의 수완과 카리스마에 힘입어 안정적인 경영 체계를 구축해 나갔던 것과 뚜렷한 대조를 이룬다. 사실 조선극장의 경영권 분쟁은 탄생 시점부터 어느 정도 예견되어 있던 사태였다. 동양생명보험회사 경성지부장으로 근무하던 일본인 시택근차랑(矢澤近次郞)은 얼마간의 자금을 모아 사업에 뛰어들 계획을 갖고 있었는데, 이때 지인을 통해 소개받은 사업 파트너가 바로 황원균이었다. 두 사람은 극장업을 시작해보기로 의기투합한 후 본격적인 절차에 착수했다. 시택근차랑이 자금을 대고, 황원균이 흥행장 건축허가를 비롯한 실무를 담당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니 실질적인 지배권은 시택근차랑에게 있었겠지만 문제는 서류상의 소유주가 황원균의 이름으로 명시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당연히 시택근차랑은 명의변경을 요구했고, 황원균은 영업 개시 전에 명의변경을 하면 신용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약속을 차일피일 미뤘다. 결국 두 사람의 갈등은 법정 공방으로 이어지기에 이른다. 이후 시택근차랑은 건물 소유권을 동경 건물회사에 판매한 후 조선극장에서 발을 뺐다. 다만 동경 건물회사는 조선극장의 흥행권, 즉 직접적인 운영에 관여하지는 않았고, 실질적인 운영 책임을 담당한 것은 ‘지배인’으로 취임한 조선인 흥행주들이었다. 점차 흥행권은 소유권과 별개의 권리처럼 유통되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일정한 비용을 지불하고 조선극장의 흥행권을 양도했던 사례들이 이를 잘 보여준다. [2] 1926년에는 변사 김조성 이 새로운 흥행주로 취임하게 되었으나 극장 자금을 유용했다는 혐의를 받아 관원들과 갈등을 빚은 끝에 3개월 만에 물러나게 되었고, 차영호, 현철, 김영식, 이필우 , 이태진 등이 공동 혹은 개인 명의로 경영권을 승계했으나 대개는 1년을 넘기지 못했다. 그만큼 1920년대 조선극장의 경영은 불안정했던 것이다. 심지어 1928년 8월에는 연이은 휴관사태 속에 위기의식을 느낀 관원들이 공동명의로 흥행주 역할을 맡아 1년간 경영을 이어나가기도 했을 정도였다. 조선극장의 경영이 비교적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던 것은 안봉호와 신용희 가 이태진으로부터 경영권을 인수한 1929년부터의 일이었는데, 안봉호는 얼마 지나지 않아 경영권을 넘기고 손을 뗐기에 실질적으로 조선극장의 흥행권을 행사했던 인물은 지배인으로 취임한 신용희였다고 볼 수 있다. (좌) 조선극장의 모습 (사진: “ 조선극장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우) 조선극장 개관 관련 신문 광고 (사진: “ 개장피노 ”, 《동아일보》, 1922. 11. 7.) 한편 조선극장의 경영구조는 1931년부터 기존과 사뭇 다른 방식으로 변화하게 되었다. 1931년 7월에 창립한 조선흥행주식회사 는 흥행업에 포함된 제반 사업들을 모두 아우르는 데 목표를 두고 있었다. 즉, 제작, 배급, 상영의 수직적 통합 을 통해 최대한의 이익을 확보하려 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조선극장은 개인 경영 방식을 벗어나 조선흥행주식회사의 직영관으로 운영되기 시작했다. 조선흥행주식회사의 사장은 평양에서 고무공장을 운영하던 사업가 정완규가 맡았으며, 안봉호로부터 경영권을 인수한 정현국은 전무취체역을 담당했다. 그리고 신용희는 조선극장 지배인과 조선흥행주식회사 상무취체역을 겸임하게 되었다. 조선흥행주식회사의 창립과 직영관 제안은 조선극장 입장에서도 충분히 매력을 느낄 만한 사안이었다. 발성영화로의 전환 과정에 직면한 식민지 조선의 극장들은 기로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무성영화보다 과중한 필름 대여료를 지불해야 했고, 장비 설비에도 목돈을 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전면적인 발성영화 전환을 천명한다는 것은 적지 않은 위험을 감수해야 할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점차 관객들의 취향이 무성영화를 ‘재래의 저급 취향’으로 낙인찍는 경향이 현저해지고 있던 상황에서 무조건 무성영화의 재탕 상영을 반복하기도 어려웠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본금 8만원을 들여 출범한 조선흥행주식회사는 든든한 뒷배 역할을 해 줄 수 있었으며, 실제로 조선극장은 라이벌 관계에 놓여 있던 단성사보다 적극적으로 발성영화 전환을 시도 하며 시장의 트렌드를 주도해 나갔다. 재계 공황의 영향으로 말 못 된 흥행계는 예년에 비하야 참경에 빠진 셈인데 더구나 영화계는 조금도 새로운 면목을 보여주지 않고 다만 재삼 상영한 영화를 최염가의 관람료로써 상설관의 수명을 연장시켜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형편이었으나 기신양행(紀新洋行) 겸 조선극장의 지배인 신용희(申鎔熙) 씨가 일본에 갔다 오고 일본 동화상사(東和商事) 사장이 구라파에서 돌아오는 길에 동화상사 조선지점장인 고윤묵(高潤黙) 씨와의 회견으로 기신양행 측에서는 순전한 『토-키-』 배급 , 동화상사 측에서는 구라파 특작 무성영화 로써 영화배급전이 개시될 모양인데 무성영화 측에서는 이미 명작을 계약하야 수입 중이라 하며 기신양행 측에서는 조선극장에 불일간 『토-키-』영사기계를 장치하여 일반의 목을 놀래일 예상 인데 실패한 기왕에 일본제의 『토-키-』영사기계와는 달라서 이번의 것은 순미국제를 사드려 임이 『파라마운트』 회사의 『모로코』를 위시하야 『명작 토-키-』를 계약하였으므로 조선극장에서는 가을에는 얼마동안 『토-키-』 전문으로 흥행- 『단성사』에서는 무성구라파영화로써 영화전이 개시될 모양이라 한다. 기신과 조극 측에서는 과연 완전한 토-키-를 보여줄 것이며 동화상사 측에서는 과연 구라파의 명작을 가지고 『토-키-』의 새 진영을 돌파할지 일반 영화『팬』의 흥미를 자아내고 있다 한다. - 기사, “금추 흥행계는 발성 무성 영화전 - 기신 측엔 토-키- 상사 측엔 무성”, 《조선일보》, 1931. 8. 25. - 한국영상자료원 편, 『 신문기사로 본 조선영화 1931 』, 1,114쪽. 1931년 가을 흥행 시즌 당시 단성사와 조선극장이 보여준 노선은 명확하게 엇갈렸다. 단성사가 명작 무성영화 전문관을 표방하며 유럽산 특작 영화들을 전면에 배치하려 한 반면, 조선극장은 기신양행과 손을 잡고 “순전한 토키”들로 프로그램을 채우고자 한 것이다. 주목할 것은 조선극장이 기왕의 일본제 발성영사기보다 훨씬 우수한 미국제 장비(RCA)를 전격적으로 사들였다는 점이다. 구매 시기를 고려할 때, 조선극장이 이처럼 공격적인 설비 투자에 나설 수 있었던 것은 조선흥행주식회사의 자본력에 힘입은 바 컸다고 볼 수 있다. 조선극장과 달리 유럽산 특작 무성영화를 전면에 내세운 단성사의 모습 (자료 출처: 『大京城都市大觀』(朝鮮新聞社, 1937), 映畫常設館ノ部 / 사진: “ 단성사 ”, 서울역사아카이브, 서울역사박물관) 단성사와 조선극장의 상반된 행보는 여러모로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이 싸움의 승패는 곧 발성영화 전환 문제에 있어 향후의 행보를 결정지을 만한 바로미터가 될 것이라 인식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승부는 발성영화 전환이라는 과제가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 흐름임을 각인 시키는 결과로 낙착되었다. 이듬해인 1932년 4월에 단성사와 우미관은 발성영사기를 구매하고 토키의 상영 비중을 늘려나가며 뚜렷한 노선 변화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1932년 7월에 지난 1년간의 사업 융창을 자축하는 의미의 기념 상영회를 열었을 만큼 조선극장과 조선흥행주식회사는 원만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 그렇기에 1932년 10월에 조선극장 지배인 신용희가 일방적인 해고 통보를 받은 것 은 굉장히 갑작스러운 조치처럼 여겨질 만한 일이었다. 조선흥행주식회사 측은 신용희가 배임 행위를 저질렀다고 지목하면서 지배인 자리에서 물러날 것을 종용했는데, 신용희가 격렬하게 반발함에 따라 조선극장은 한 달이 넘는 기간 동안이나 일시 휴관 사태에 접어들 수밖에 없었다. 당시 신문기사를 통해 보도된 사건의 전말은 다음과 같다. 『인생안내』 계약이 발단 / 정(鄭), 신(申) 양파로 대립 / 지배인은 건물 소유자와 악수 / 알력의 전말 내용 조선극장은 소화 四년 九월에 건물 소유자인 부내 황금정(黃金町) 二정목 五十九번지 동경건물주식회사(東京建物株式會社)와 임차계약(賃借契約)을 안봉호(安奉鎬) 씨가 체결하고 보증금(保證金) 六천 五백원을 내게 되었는데 그 후 소화 五년 七월에 정현국(鄭鉉國) 씨가 一만원을 내고 영업권리권(營業權利權)을 양수(讓受)하여 주식회사로 조직 후 조선흥행주식회사(朝鮮興行株式會社)를 조직한 나머지 정완규(鄭完圭) 씨가 사장(社長) 으로 취임하고 신용희(申鎔熙) 씨는 지배인(支配人) 으로 취임하여 정씨는 금전에 관한 일절 책임을 지고 신씨는 영업에 책임을 맡아 이래 경영을 하여 오게 되었다. 그리하여 날로 업적을 나타내어 작년에는 二, 三천원의 순이익까지 보게 되어 주주들 간에 상당한 배당까지 하게 되었다. 지난번에 인생안내(人生案內)라는 영화를 상영하려고 영화배급소와 계약 체결을 할 당시 조선극장 간부의 승낙 없이 자기 개인으로 약 四백원에 계약을 하여 가지고 극장 간부와는 五할 배당을 하자는 조건을 제출하였는바 이에 극장 간부 측에서는 동 극장에 지배인의 지위에 잇는 사람으로 당연히 극장을 대표하여 계약을 체결할 것인데 불구하고 개인의 계약이라는 것은 배신 행동이라 하야 지난달 중순경에 신씨에게 해임장을 발송 하게 되었다. 이에 분개한 신(申)씨는 극장 건물 계약관계자인 목미(木尾) 씨에게 그 사실을 말하게 되자 전기 목미 씨는 신씨를 지지(支持)하는 터이라 결국은 정씨 일파와 신씨 일파 사이에 분쟁을 일으키게 되어 페관의 운명에까지 이른 것 이라고 한다. 관객을 위하야 애석한 일 - 사장 정완규 씨 담(談) 금번 분규사건에 대하여 사장 정완규(鄭完圭) 씨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조선에서 몇 개 안 되는 흥행계에 극장 간부들의 분쟁으로 휴관까지 하게 된 것은 조선흥행계를 위하야 일반 사회 각 방면 인사에게 진실로 미안하기 끝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 간부는 어떠한 일이 있든지 양보를 하고 원만 해결을 지으려 합니다. 극장세만 하야도 九월에 七백 五十원 하든 것을 十월에 八백원을 내라고 하야도 아모 이의도 업시 그대로 다 지불하였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회사 규정에 의하야 부정한 행동이 있는 지배인 하나를 처치하엿다고 극장 계약자가 흥행을 못하게 하는 것은 너무나 횡포한 일 이 아닌가 합니다. 지난번에 처분한 신 지배인에 대하여도 처분을 관대하게 하기 위하야 九백원이라는 퇴직금까지 보내었습니다. 이런데도 불구하고 목미(木尾) 씨가 극장을 사용치 못하게 한다는 것은 신씨와 어떠한 밀접한 관계가 있는지 알 수 없으나 일반대중을 위하여 너무나 애석한 일입니다. 장래를 위하야 해결에 노력 - 지배인 신용희 씨 담(談) 일찍이 동 극장의 지배인으로 있던 신용희(申鎔熙) 씨는 말하되 금번에 소위 배임행동이라고 하는 것은 지난번 인생안내(人生案內)를 계약하였을 당시에 四백원을 내 돈을 내어 계약을 하였다는 것이나 그것은 당시 간부들이 너무나 사진값이 비싸다고 계약하기를 주저하므로 만약 다른 극장에서 계약이나 하여 사진값이나 오르면 더욱 극장에 손해가 될 듯하기에 내가 먼저 계약을 한 것 입니다. 여하간 사실에 잘잘못은 어찌 되었든지 조선극장의 장래를 위하여 원만히 해결을 짓는 것이 좋을 듯하기에 해임장을 받고서도 정씨(鄭氏)를 방문하고 무조건으로 잘못하였다고 사과까지 하고 앞으로 사업을 계속하자고 하였으나 끝끝내 거절을 하므로 나는 부득이 극장 계약관계자 목미(木尾) 씨에게 그 사유를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목미(木尾) 씨의 방침은 사리를 모르는 회사 당국과는 계약은 하고 싶지 않다고 하며 회사라는 명칭을 떠나 개인으로 계약을 하고 싶다고 하는 중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목미(木尾) 씨는 나를 신임하느니만큼 내가 빠지어 다른 사람과는 계약을 하고 싶지 않다고 하는 중인데 현 간부 측에서는 나를 배척하니 앞으로 어찌될지 조선흥행계의 장래를 위하여 적지 아니한 걱정입니다 운운. - 기사, “『토키』영화의 전당 조선극장의 분규 - 휴관한 지 일개월에 아모 해결 업서”, 《매일신보》, 1932. 11. 28. - 한국영상자료원 편, 『 신문기사로 본 조선영화 1932 』, 1,382-1,383면. 사건의 발단은 한 편의 수입영화 계약을 둘러싼 이견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소비에트 영화 <인생안내>(니콜라이 에크, 1931)의 흥행가치에 주목한 신용희는 간부들이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자 개인 명의로 필름을 선구매했으며, 회사에는 추후에 수익금을 배분하리라고 통고했다. 그는 다른 극장과 경쟁이 붙어 필름 대여료가 폭등할까 우려했기에 불가피한 조치를 한 것이라 항변했지만, 조선흥행주식회사는 이것이 엄연한 배임 행위라고 보았던 것이다. 다만 <인생안내>가 신용희의 기대처럼 수익 창출에 큰 도움이 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사회 부랑자 청소년들이 철도 노동자로 재탄생하여 사회주의 건설에 기여한다는 이야기를 담아낸 <인생안내>는 ‘노력영웅’의 숭고한 희생을 조명하는 데 초점을 맞췄을 뿐, 계급투쟁을 전면적으로 다룬 작품이라 하기는 어렵다. 그렇기에 신용희는 <인생안내>가 무난하게 검열을 통과할 것이라 보았고, 상영을 앞두고 주요 일간지에 특별광고를 커다랗게 게재했을 만큼 자신감을 보였다. [3] 그러나 <인생안내>는 개봉 다음 날 “사정에 의하야 중지”하게 되었다는 공지만을 남긴 채 사라져 버린다. [4] 필름 검열은 통과했지만, 조선극장에서 자체 제작한 선전문이 문제시되어 압수됨에 따라 상영 불허 처분이 사후적으로 내려졌던 것으로 보인다. [5] (좌) 조극 흥행광고 3호 (사진: 대한민국역사박물관) / (우) <인생안내> 포스터 및 스틸 (사진: “Putyovka v zhizn( 1 , 2 )”, IMDb) 그러나 상영이 중지되었다고 해도 <인생안내>는 신용희가 개인 명의로 구입한 필름이었음을 감안한다면 조선극장 측의 손해가 아주 컸다고는 보기 힘들 것이다. 그런데도 조선흥행주식회사는 굳이 이 문제를 끄집어내어 신용희를 몰아내고자 했다. 아마도 이는 신용희의 개인 행동을 용인하게 된다면 장차 무척이나 불리한 선례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을 경계했기 때문일 것이다. 조선흥행주식회사는 극장업뿐 아니라 배급업에도 상당한 비중을 두고 있었기에, 신용희가 정상적인 배급 절차를 건너뛴 채 임의로 이익을 분배하게 되면 회사 측의 이익을 결정적으로 침해할 우려가 있었다. 그러므로 조선흥행주식회사는 위험의 싹을 미연에 잘라 버리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조선흥행주식회사가 신용희를 쉽게 몰아낼 수 없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조선흥행주식회사는 조선극장에 대해 완전한 장악력을 갖고 있다고 보기 어려웠다. 조선극장의 흥행권에 대해서는 일정한 처분 권한이 있었을지 몰라도, 최종적인 결정권은 어디까지나 건물 소유주인 동경 건물회사 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해임장을 받은 신용희는 동경 건물회사 측 대리인을 맡았던 일본인 목미호지조(木尾虎之助)를 찾아가 억울함을 호소했고, 평소 신용희의 사업 수완을 신뢰했던 동경 건물회사는 즉각 극장 문을 닫으며 조선흥행주식회사를 압박했다. 동경 건물회사는 양자 간에 원만한 합의를 이루도록 종용했지만 신용희와 정완규의 협상은 끝내 결렬되었고, 조선극장은 조선흥행주식회사와 결별하는 길을 택한다. 조선흥행주식회사의 투자가 주로 발성영화 상영 환경을 마련하는 데 집중되었으므로, 새롭게 설비된 장비들의 소유권 또한 조선흥행주식회사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32년 12월에 조선흥행주식회사는 단성사와 새로운 계약을 맺고 조선극장에 설비되어 있던 발성영사 상영 장비를 철거해 단성사로 옮겼다 . 단성사는 1932년 4월에 일제 발성영사기를 도입했지만, 음향이 희미하고 잡음이 많았기에 장비 개선에 관심을 갖고 있던 중이었다. 계약 체결 직후 단성사는 최신의 미제 RCA 상영기를 장만했다는 점을 대대적으로 광고하며 모리스 슈발리에 주연의 발성영화 < 오늘 밤에는 사랑해 주세요(Love Me Tonight) >(로우벤 마물리안, 1932)를 상영하게 되었다. <오늘 밤에는 사랑해 주세요> 포스터 및 스틸 (사진: “Love Me Tonight( 좌 , 우 )”, IMDb) 창졸간에 장비를 잃은 상황에서 신용희는 새롭게 영사기를 장만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이때 시간을 벌어 주었던 것이 바로 극장 대관업 이었다. 1932년 12월에는 새롭게 창단한 명일극장과 문외극단이 조선극장에서 연달아 연극을 올리게 되는데, 이는 극장을 마냥 닫아둘 수만은 없었던 흥행주의 입장과, 명망 있는 큰 무대에 서기 원했던 신생극단들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결과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신용희는 1929년에 지배인으로 취임한 직후부터 자체 레뷰단을 조직하여 공연을 올리고, 극단들에 무대를 대여해 주며 조선극장의 운영난을 타개해 나갔던 전력이 있었다. 영화 상영에 위기가 닥쳤을 때, 대관업을 적절히 병행하며 융통성을 발휘하는 데 능했던 그의 경영 노하우가 또 한 번 발휘된 순간이었다. 조선흥행주식회사와 신용희의 갈등은 연예사업 종사자 간에 일어난 단순한 알력관계를 넘어 여러 흥미로운 논점들을 수면 위로 밀어 올린 사건이었다. 조선흥행주식회사는 영화의 제작, 배급뿐만 아니라 상영까지 포괄 가능한 회사를 목표로 삼았으며, 이는 영화산업의 수직적 통합 을 염두에 둔 행보였다. 그러나 결국 실패로 돌아갔던 신용희 해고사태가 함의하듯 경영권 (조선인) 과 소유권 (일본인) 이 분리된 식민지 극장의 특수성 은 이러한 통합을 불가능하게 한 구조적 요인으로 작용했다. 또한 신용희를 비롯한 조선인 극장의 경영자들이 발성영화 전환에 따른 리스크를 줄이기 위한 방안으로서 대관업을 십분 활용 해 왔다는 점도 확인할 수 있다. 즉, 1930년대 초반의 발성영화 전환기에 연극 흥행은 프로그램 운영의 윤활유 역할을 담당했으며, 극장업자들이 최소한의 자율성이나마 확보할 수 있도록 통로를 열어 주었던 것이다. *** [1] 이승희, 「조선극장의 스캔들과 극장의 정치경제학」, 『대동문화연구』 72,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2010. [2] 1929년에는 안봉호가 이태진으로부터 6,500원에 경영권을 인수했으며, 1930년에는 정현국이 안봉호로부터 1만원에 경영권을 인수하였다. [3] 조선극장 특별광고, 《동아일보》, 1932. 9. 1., 2면. [4] 조선극장 광고, 《동아일보》, 1932. 9. 3., 6면. [5] 이 선전문은 전량 압수당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오늘날 전해지는 “조극 흥행광고 3호”가 <인생안내> 특별편으로 구성되었으며, 9월 1일자로 발간되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것이 바로 문제가 된 선전문일 것이라 추정해 볼 수 있다.(대한민국역사박물관, 『자료로 보는 일제강점기 극장문화』, 대한민국역사박물관, 2020, 196쪽.) “조극 흥행광고 3호”는 <인생안내>의 예술성과 제작진의 우수성을 상찬하는 내용으로 서두를 꾸몄는데, 불온성을 지적할 만한 내용이 크게 눈에 띄지는 않는다. 영화 줄거리에 대한 소개 역시 신문에 게재된 개요보다 약간 더 상세할 뿐 큰 차이가 없다. 눈길을 끄는 것은 <인생안내>에 삽입된 노래들의 가사를 옮겨놓았던 부분이다. <인생안내>를 “젊은 노서아”의 太息이자 熱로 소개하면서 ‘권로가’, ‘유랑의 노래’, ‘철도사역’의 가사가 나열되고 있는데, “무로가 영원히 매장되도록” “진흙 속에 영원히 무너버리고저 한다”라는 선언이나, “ᄯᅡᆼ을 긁지만 말고 / 정말로 파 업흐라”라는 구호, “낡은 세계를 ᄲᅮ리채 / 단연히 잘나낼 것은 이 손이다” 등의 구절은 시각에 따라 직접적인 선동으로 해석될 만한 내용들이었다. 이광욱(극장문화사 연구자) l 읽고 생각하며, 말하고 글쓰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다. 과거의 기록을 뒤적이고 오늘의 사람들과 소통하며 함께 미래를 고민한다. 건국대학교 글로컬캠퍼스 조교수(동화 한국어문화학과), 한국영상자료원 객원연구원(『신문기사로 본 조선영화』 시리즈). 『드라마, 일상성의 미학』(2024) 공저, 「카프 연극대중화론의 전개와 송영 풍자극의 매체미학」(2018), 「도달한 임계점과 보존된 미래 – 발성영화의 정착과 경성 소재 조선인 극장의 연쇄 반응」(2021), 「표류하는 조선영화 : <임자 업는 나루배>에서 <정춘삼>으로 – 최초의 영화 판권 소송과 식민지 조선영화 시장의 추이」(2022) 집필.
이야기는 현실에서 나옵니다. 우리가 보고 들었던 엄청나게 많은 기억들 속에서 일부만 골라낸 이야기를 영화라고 한다면, 미처 이야기가 되지 못한 나머지 기억들은 기록영상 컬렉션 곳곳에 심드렁하게 담겨 있습니다. 그에 대한 이야기를 되는대로 늘어놓아 보겠습니다. 때로는 기록영상의 맥락을 탐구하는 과정이 어떤 종류의 영화를 떠올리게 할 때가 있다. 주인공은 작은 물건이나 단서 하나에 호기심을 느껴 관련자들을 찾아다니며 탐문을 시작한다. 이렇게 영화가 시작하고 2시간 가량이 흐를 때까지는 건조하고 반복적인 장면들이 이어진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우연한 계기로 지금까지의 모든 사소한 정보들 뒤에 있던 거대한 맥락이 폭발하듯이 드러난다. 엔드 크레디트가 올라가는 동안에도 관객의 머릿속은 분주하다. 지금까지의 플롯들이 복기되고 재정의된 이후에야 비로소 영화는 결말을 맞이한다. 순차적으로는 설명되지 않고 작은 부분정보들이 서로를 설명하고 보완하여 전체의 윤곽을 이루는 구조의 이야기는 기록영상에서도 심심치 않게 발견된다. 이번에 소개할 이야기는 비슷한 주제를 촬영한 것으로 보이는 세 개의 미군 기록영상에서 시작한다. #1. 불친절한 세 개의 영상 < 미국 NA II 기록영상컬렉션 (2) >에서 ‘제이드 민사처병원’ 필터를 체크하고 검색하면 다음과 같은 세 개의 영상이 뜬다. (편의상 앞으로 각 영상을 알파벳 부호로 지칭하겠다) ● <A> , DEDICATION OF X CORPS CIVILIAN HOSPITAL, KOREA; [ETC.] ● <B> , BUILDING OF NEW KOREAN HOSPITAL, HYUN-NI, KOREA; [ETC.] ● <C> , ARMED FORCES ASSISTANCE KOREA, IP SONG NI, SOUTH KOREA 여기에는 건설이라고 하기 민망한, 작은 1층 벽돌 건물의 건설에 관한 미군의 원조 관련 장면이 포함돼 있다. 병원(Hospital)이라기보다는 의원이나 진료소(dispensary)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적합할 듯하다. 영상의 제목, 그리고 해당 장면의 슬레이트 정보와 화면 속 표지판 등 문자 정보를 간추리면 1차적으로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A> , 세 곳의 서로 다른 원조 현장이 촬영됐는데, 그 마지막 순서가 제이드 민사처병원(Jade Civilian Hospital)의 민간 이양식 광경이다. “미 제10군단과 UNCACK(주한유엔민간원조사령부)의 협조로 제4통신대대가 건립했다”라는 내용의 1953년 6월 3일자 준공표지판이 찍혔다. <B> , 1954년 3월 18일에(제목에 따르면) ‘현리에서 새 병원을 건설’하는 현장에서 제4통신대대장 모리스 중령이 한국인 병원장 ‘Dr. Kim’을 인터뷰하는 모습이 담겼다. 이 영상만으로는 어느 병원인지 알 수 없다. <C> , ‘입송리’의 AFAK(미군대한원조) 프로젝트 후원 현장 세 곳 [1] 을 담았다. 그중 세 번째 시퀀스가 시멘트를 발라 벽돌을 쌓고 있는 제이드 병원 건설 현장의 모습이다. 어느 곳인지 알 수 없는 곳을 찍은 두 번째 시퀀스에는 <영상 B> 에서 제이드 병원 시퀀스에 등장했던 모리스 중령이 나온다. 세 영상의 화면과 파편 정보는 서로 같은 듯 달라서 뭔가 개운하게 정리되지 않는다. 촬영 소대는 카메라의 시선을 좁혀 ‘원조라는 행위와 원조의 유형’만을 담았고, 자신들이 공유하고 있는 맥락 속에서 당연한 정보들은 슬레이트에 기록하지 않았다. 이로써 누락된 전체적인 맥락은 이제 단서 수집과 추리의 몫이다. 일단, 순수하게 영상들의 쇼트를 비교하는 것만으로 이 세 영상이 같은 장소의 같은 병원 건물에 관한 것이라는 점은 알 수 있다. <A>와 <C>에서 보이는 ‘준공표지판’과 ‘병원팻말’은 같은 것이다. 그리고 <A>와 <B>에 나오는 건물 모습은 서로 다르지만, 이 모두가 담긴 <C>를 통해 <A>가 병원의 앞을, <B>가 병원의 뒤뜰을 촬영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안내팻말 (왼쪽: <A>, 오른쪽: <C>) 준공표지판 (왼쪽: <A>, 오른쪽: <C>) 천막의 위치에 의해 공사 장소가 병원의 뒤쪽임을 알 수 있음 (모두 <C>) 그러니까 1953년 6월 3일, 미 제10군단 민사처는 UNCACK(주한유엔민간원조사령부)과 협조하여 예하 제4통신대대를 통해 이 병원, ‘Jade Civilian Hospital’ 건물을 짓고 민간에 이양했다(<A>). 이듬해 3월, AFAK 프로젝트의 형태로 병원 뒤뜰에 공사 원조가 있었고(<C>), 그 공사 현장을 배경으로 제4통신대대장이 직접 병원장을 인터뷰하는 장면을 촬영했다(<B>). 마지막으로, 10군단 민사처가 관리 주체임을 명확히 밝힌 안내표지판(<A>, <C>)에 의해, 이 병원은 ‘민사처병원’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 #2. 정리됐다는 착각 이제 이 병원이 어디에 있었는지 추리하는 단계로 접어든다. <C>는 제목에서 ‘IPSONG-NI(입석리)’를 언급하고 있지만 이는 입석리국민학교 건설 현장에 대한 첫 시퀀스에만 해당하는 무성의한 작명일 가능성이 높다. 반면에 <B>의 제목은 ‘HYUN-NI(현리)의 병원’이라고 직접적으로 밝히고 있다. 강원도 인제군 기린면 현리라면 전쟁 중후반기 미 제10군단의 영향력 아래 있던 지역인 만큼 신빙성이 있다. 이를 뒷받침하는 문건도 발견했다. OEC(유엔군사령부 경제조정관실)의 강원도 의료 시설 현황 보고서(이하 「OEC 보고서」라 칭하겠다)에는 ‘인제-제이드 병원(장로교 선교회)’이라는 항목 아래 제이드 병원이 ‘Sang Nam, Maechon, Naepyong and Kirin’에 있었다고 적혀 있다. 이로써 기린면에 있었다 는 증거를 잡았다. 이 이름이 붙은 병원이 여러 군데 있었던 이유는 ‘제이드’의 의미를 파악하기 전에는 알 수 없다. 제이드 병원을 이양받은 민간 조직이 장로교 선교회였다는 정보도 덤으로 확인된다. 하나 더, <B>의 인터뷰 장면에 등장했던 ‘Dr. Kim’이 누구인지도 좀 더 구체적으로 알 수 있었다. 미 육군 통신대 아카이브의 푸티지를 활용하여 제작됐던 미국 TV 시리즈 The Big Picture 의 한 에피소드, Armed Forces Assistance to Korea (미군대한원조)에 이 푸티지가 실린 것은 이미 알려져 있다. [2] 여기서 장면에 덧씌워진 내레이션에 그의 본명이 나오는데, 미국인의 발음으로 ‘김방모’, ‘김봉모’와 유사하게 들릴 뿐 특정할 수 없다. 그러나 「OEC 보고서」에는 그의 이름이 ‘Dr. Kim Bong Mu, director, grad. from Nippon University, Japan(일본대를 졸업한 병원장 김봉무 박사)’라고 구체적으로 적혀 있었다. 이제 확인해야 할 부분은 얼추 정리된 것 같다. (이렇게 끝나는 줄로만 알았다.) #3. 기록문서의 발견, 그리고 힘겨운 재구성 시간이 엄청나게 오래 걸리는 일이지만, 이런 컬렉션에서 최대한 정확한 맥락을 캐내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National Archives의 원조사업 관련 문건에서 영상 속의 원조사업 관련 정보를 찾는 것이다. 특히 AFAK 프로젝트는 열람이 가능한 문서만 해도 3개 문서군에 흩어져 있는 수백 건 이상의, 어림잡아 50만 쪽이 넘는 엄청난 분량이다. OCR이 되어 있지 않은 문서 파일을 일일이 눈으로 확인하는 일은 매우 고된 일이었고, 시간이 무한정 주어지지도 않았으므로 최대한 찾을 수밖에 없었다. [3] 그래도 AFAK 프로젝트 보고서는 UNCACK 관련 문서에 비해 정보가 구체적이다. 그리고 식별된 장소나 건물명으로 찾는 것보다 그나마 조금 나은 경우는 영상에 AFAK 프로젝트 안내지, 그중에서도 프로젝트 번호가 찍힌 경우다. 다행히 <C>에는 프로젝트 번호 ‘9219’가 영상에 찍혔고, 이로부터 시작하여 제이드 민사처병원과 관련한 3건의 AFAK 프로젝트 보고 문건을 찾았다. 그리고 대혼란에 빠졌다. 모두 동일하게 장소가 ‘Chaun-ni’라고 적힌 것이다. AFAK 안내지(<C>)에 프로젝트 번호가 희미하게 적혀 있다. AFAK #9219 보고문서, National Archives RG 338, Entry A-1 255, Box 2197, p.126. AFAK #9221 보고문서, National Archives RG 338, Entry A-1 255, Box 2197, p.123. AFAK #9239 보고문서, National Archives RG 338, Entry A-1 255, Box 2197, p.118. (*이상, 각 보고문서의 첫 쪽 일부 모습임) 아무리 전에 그럴 듯한 결론이 나 있더라도, 이 증거는 반박할 수 없다. 돌이켜 보면 슬레이트 어디에도 장소 명이 구체적으로 적힌 곳은 없다. 오히려 National Archives의 관리용 제목이나 「OEC 보고서」에 ‘Inje-Jade’라는 표현이 나오는 이유에 대해 다른 추정을 해야 할 상황이다. AFAK 문서의 내용은 구체적이고 정확했다. “민간 이양식 때 병실 사진을 찍었으나 보고 시점(8월 13일, 14일)에 사용할 수 없어 추후 제출하겠다”라는 문구가 있어 <A>의 내용을 지칭하고 있다. <B>, <C>의 병원 뒷편에서 하던 공사는 증축 또는 구획변경을 통해 수술실과 의료용품 공간을 추가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의료용품 공간에는 침구 보관 및 회의실 공간도 마련할 예정이었다. 이 병원에는 같은 시기에 다른 소규모 AFAK 프로젝트 두 건이 동시 진행 중이었다. 대략 1954년 2월 중순에 프로젝트 기획안을 제출, 승인받았으며 3월에 착공하여 7월에 완공됐다. 미 제45공병단이 일부 자재를 공급한 시기는 4월. <B>, <C>는 아직 자재도 오지 않은 공사 초기의 장면이다. 보고서의 제출자가 ‘제57통신지원중대’인 이유는4월 29일자로 제4통신대대로부터 이 후원 프로젝트를 이관받았기 때문이고, 이때 재고대장 등이 빠진 불완전한 상태로 서류가 넘어왔다는 메모도 있다. 이제 다시 따져봐야 한다. ‘Chaun-ni’는 어디일까? 강원도 지역에서 미군, 미국인이 이렇게 표기할 만한 곳은 두 군데로 추려졌다. ● 홍천군 내면 자운리 ● 홍천군 두촌면 자은리 홍천 일대의 기록에 언급되는 군 조직은 보통 미 제9군단이므로 10군단이 설립한 병원의 장소라고 생각하기가 더 어렵다. 그러다가 혹시라도 ‘인제군’과의 접점은 없을까 하는 간절한 마음에 명분을 주는 사실을 발견했다. 내면은 원래 인제군에 속해 있다가 1954년 10월에 제정된 「수복지구임시행정조치법」 [4] 의 부칙에 따라 홍천군으로 편입됐다. 본래 인제군은 강원도에서 가장 넓은 영역을 포괄하는 행정구역이었으므로 미군의 입장에서 그 인근은 대략 ‘인제’라고 불렀을 가능성이 높고, 영상과 문서가 생산된 시점은 개편 전이었으므로 실제로도 그렇게 부르는 것이 맞았다. 내면 자운리가 10군단 관련 지역, 그리고 「OEC 보고서」에서 언급한 제이드 병원들의 분포 지역과 다소 떨어져 있는 것이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말이다. 원래 인제군이 아니었던 두촌면 자은리보다는 가능성이 높지 않은가. #4. 마지막 반전, 드와이트 멀스배리 선교사의 흔적에 닿다 그런데 ‘제이드’는 무슨 의미로 쓰인 이름이었을까? 혹시 병원을 이양받아 운영했던 장로교 선교회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해서 관련 정보를 찾다가 드디어 ‘드와이트 멀스배리(Dwight R. Malsbary)’, 한국 활동명 ‘마두원’인 미국 북장로교 파송 선교사가 관심 범위에 들어왔다. 그는 1929년 숭실전문학교에 초청된 것을 계기로 한국 최초의 음악선교사로서 한국에 서양 음악을 보급하고 저명한 제자를 배출하는 등의 족적을 남겼고, 1940년에는 일제의 신사참배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추방당했던 인물이다. 해방 후에 다시 한국에 와서 교회, 신학교, 병원 등의 설립을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활발히 전개했다. 이 정도의 삶을 살았지만 다른 내한 선교사들에 비해 그에 관한 기록은 매우 드물다. 같은 교단 내 교파 갈등으로 인해 주류 학계에서 소외된 것이 원인이라고들 한다. 이것이 그가 강원도 사역에 전념했던 이유로 거론되기도 한다. 그의 선교활동 자체에 대해 참고할 수 있는 논문은 거의 없고, 그의 삶을 다룬 서적은 있으나 고증에 충실한 연구서적이라기보다는 종교적 의미에 방점을 둔 것으로 보인다. 현재 참고할 수 있는 정보는 2025년 3월에 그를 주제로 열렸던 세미나 [5] 중 이승구 교수(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이종전 교수(전 대한신학대학원대학교) 두 분이 앞의 책과 다른 여러 문헌을 종합하고 견해를 더해 발표한 것을 촬영한 영상, 그리고 홍천 출신의 강정식 시인이 《홍천신문》에 기고한 여러 글이 사실상 전부이다. 이 소스들은 앞에 언급한 서적 등 참고 문헌에 오류가 있을 수 있거나, 기억에 의존한 구술에 의한 것이므로 약간의 오류가 있을 수 있음을 감안해야 한다. 다만, 멀스배리 선교사가 강원도 홍천군 두촌면 을 중심으로 사역활동을 했으며, ‘미군의 요청으로 제이드 병원 을 운영했다 [6] ’라는 부분에 대해서는 모두가 일관된 입장을 보이고 있다. 서로 내용과 견해의 차이는 다소 있지만 종합하면 이렇다. 6.25 전쟁 이후 멀스배리 선교사는 홍천군 두촌면을 거점으로 선교활동을 시작하여 무려 26개에 달하는 교회를 세웠는데, 이 교회들은 44번 국도를 따라 속초까지 [7] 주변의 산골짜기에 분포돼 있었다. 그 이유는 당시 이 지역의 인구 대부분이 군사적 요충지를 따라 집중돼 있었기 때문이다. 44번 국도와 미 제10군단 및 멀스배리 선교사의 상관관계 (* 내면 자운리는 우하단에 떨어져 있음) 이런 맥락에서 ‘미 제10군단의 요청으로 군단이 운영하던 제이드 병원을 맡아 관리하게 됐다’라는 주장 [8] 도 개연성이 있다. 그와 관련됐던 병원의 위치에 대해서는 홍천군 홍천읍(지금의 홍천군청 서쪽 ‘명동보육원’ 터), 홍천군 두촌면 자은리, 속초의 세 군데가 언급되고 있으며, 두촌면 자은리의 제이드 병원을 제외한 나머지는 의사 부족 등의 문제로 먼저 문을 닫았다는 것에 대해서도 의견의 일치를 보인다. [9] 실제로 미 제10군단 본부였던 인제군 관대리, 멀스배리가 관여했다고 알려진 병원들의 위치, 「OEC 보고서」가 언급하는 제이드 병원의 소재지 등을 보면 실제로 44번 국도에 인접하거나 부근에 있는 반면에, 인제군 내면 자운리는 상대적으로 떨어져 있다. 이 정도라면 ‘Chaun-ni’는 ‘두촌면의 자은리’라고 봐야 할 것 같다. 이게 뭐라고, 반전에 반전이 거듭된 ‘위치 논란’이 드디어 마무리됐다. 더 확실한 자료가 발견되면 좋겠지만, 현재까지의 자료전쟁의 승자는 처음에는 예상하지도 못했던 두촌면 자은리다. #5. 가장 나중에 밝혀진 ‘Jade’의 의미 그래도 마지막으로 어떻게든 확인하고 싶었던 ‘Jade’라는 명칭의 의미. 혹시라도 이에 따라 또 무슨 반전이라도 있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불안감이 계속 나를 괴롭혔다. 이것이 미군의 호출부호를 딴 것이라는 말이 있어서다. [10] 최소한 지금까지 경험한 전문(telegram)에서 그런 종류의 부호를 본 적은 없다. 부대라는 것은 이미 부대명 약어로 충분히 구분되고, 대외비를 송수신한다고 해도 어차피 전문에 적힌 APO(Army Post Office)만으로 각 시기의 부대 정보가 대략 노출된다. 그보다 1950년대라면 필요한 경우에 어떤 기계나 알고리듬 [11] 에 의해 전문 전체를 암호화하여 송신하던 시대 아니었나? 이를테면 그 유명한 독일의 에니그마(Enigma)라든지, 태평양전쟁기에 미군이 일본의 암호체계(또는 기계)에 붙인 코드네임인 퍼플, 레드, 제이드 같은 것들 말이다. (이때의 ‘제이드’는 지금의 맥락과 무관하므로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애초에 호출부호라는 것은 항공 관제탑이나 선박 구분에 쓰이는 것 아닌가. 영상 <A>, <B>, <C>를 처음 본 순간부터 기약 없이 밤낮으로 찾아 헤매던 이 물음은 어느 순간에 허무하게 풀렸다. 답은 제이드 병원 원조 건설사업을 진행했던 제4통신대대의 부대사(史)문서 중에서 발견됐다. 이 컬렉션의 거의 모든 영상이 통신대 소속의 사진 및 영화 촬영 소대에 의해 촬영됐다고 해도, 통신대의 본 임무는 통신선로를 설치하여 통신망을 구축하는 것이다. 제4통신대대는 미 제10군단 본부가 전선을 따라 이동할 때마다 해당 지역, 이를테면 함흥-원산, 인천-김포 등의 영역 내에서 본부와 각 부대를 이어 구축했던 통신망의 다이어그램을 문서에 남겨 놓았다. 통신망 다이어그램은 각 노드, 즉 망이 모이고 분산되는 허브 역할을 하는 곳 또는 그곳의 통신장비에 대해 코드네임을 붙여 놓고 노드 사이를 선으로 연결해 놓은 그림이다. 본부가 어디로 옮겨 가든 제4통신대대의 통신망에서 늘 통신선이 집중되는 주 노드에는 ‘JADE’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그래서 추정컨대, ‘JADE’는 미 제10군단 본부에 설치되는 통신시설 또는 그 위치를 나타내는 식별부호일 것이다. 즉, ‘JADE’는 다른 노드에서 본부에 연락을 취할 때 호출명으로 사용됐을 수 있다. 다시 말해 통신 호출명 ‘제이드’는 그 자체로 군단을 대표하여 지칭하는 이름이 되는 것이고 그래서 ‘제이드 병원’의 정체는 10군단 민사처가 설립, 운영하던 모든 병원이었다고 보면 무리가 없을 것이다. 통신 노드와의 관련성을 유추해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증거로 영상 속의 AFAK 안내지를 다시 떠올려보면, 프로젝트 번호 아래 후원 부대가 좀 더 구체적으로 적혀 있다. “R&M OPN Co. 4th SIG BN CORPS” - 즉, 군단직속 제4통신대대 무선 및 교신(Radio & Message) 작전 중대. 에필로그. 짧은 기록영상 세 개에 이렇게 골몰할 일인가 하는 후회가 들기도 하지만, 그 결과로 마치 필름 현상 과정을 거쳐 잠상(latent image)이 드러나듯이 보다 다층적이고 구체적인 정황을 읽을 수 있게 됐다. 1950년대 강원도에서는 두 가지 플롯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 한 줄기는 이름도 몰랐던 먼 나라에 와서 사상 처음 경험하는 형태의 전쟁 한복판에 있던 미군, 그리고 그들이 전시 후방 안정화 및 전후 주둔지 스킨십 강화를 위해 여러 가지로 골몰했던 민사 활동들에 관한 것이다. 다른 한쪽에는 스스로를 ‘평양 마씨’라고 일컬을 정도로 사랑한 나라 한국에서 1929년부터 종교적 신념에 따라 선교를 계속하던 미국인 선교사의 사연이 있다. 미군과 선교사는 44번 국도를 따라 홍천에서 인제를 거쳐 속초까지 전쟁이든 선교든 각자의 일을 했다. 미 10군단은 서서히 본토로 귀환했고, 선교사는 외로운 사역을 계속하다가 1977년에 두촌면에서 홍천읍으로 가던 중 추돌사고로 사망했다. [12] 2025년, 한국의 한 아키비스트는 제이드 병원 영상을 보고 1950년대의 44번 국도 여기저기를 헤매며 오랫동안 가려졌던 사연에 접근한다. 흔한 영화 줄거리처럼 느껴지지 않은가? 이를 영화화한다면 제목은 <44번 국도에서 만나요> 정도가 좋을 것 같다. 흥행은 어렵겠지만. * <A>, <B>, <C>의 VOD와 각 장면에 대한 설명은 < 미국 NA II 기록영상컬렉션 (2) >에 있습니다. <참고문헌> 1. 이승구, 「말스베리 선교사와 김홍전 박사」, 초기 내한 선교사들에 대한 세미나7(2025. 3. 21, 한국개혁주의 연구소 주최, (주)유나이티드문화재단 후원) / Youtube 영상 2. 이종전, 「마두원의 해방 이후 사역에 관한 고찰」, 같은 세미나 / Youtube 영상 3. 강정식 시인, ⟪홍천신문⟫의 여러 기고글 4. “20. Kangwon-Do”, Unclassified Subject Files, ca. 1955 - 11/03/1961, RG 469, Entry P 321, Box 34, National Archives. p. 70. / 원문제공: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 (사료철 코드: AUS014_81_00C0311) 5. “AFAK [Armed Forces Assistance to Korea] Project Completion Reports, FY 55: July 1954”, Project Files, 1954 - 1963, RG 338, Entry A-1 255, Box 2197, National Archives. p. 118, 123, 126. / 원문제공: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 (사료철 코드: 사료계열AUS004_103) 6. “SGBN-4, History-4th Signal Battalion Corps, Nov. 1950”, Command Reports, 1949 - 1954, RG 407, Entry NM3 429, Box 4745, National Archives. p.13. / 원문제공: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 (사료철 코드: 사료계열AUS037_01_10C1079) 7. “SGBN-4, History-4th Signal Battalion Corps, Aug. -Sep. 1950”, Command Reports, 1949 - 1954, RG 407, Entry NM3 429, Box 4745, National Archives. p.27. / 원문제공: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 (사료철 코드: 사료계열AUS037_01_10C1077) *** [1] 두 번째 장소는 최소한의 정보도 식별되지 않는다. 첫 번째와 세 번째 중 어느 곳의 한 장면일 수도 있다. [2] 정영신(2021), 「미군의 대한원조 영상 속에서 재건되는 전후 주체: The Big Picture 시리즈의 ‘미군대한원조’와 ‘한국과 당신’을 중심으로」, 『역사연구』, 41, pp. 117-159. [3] 타이핑된 문서가 고품질의 OCR을 거치지 않은 상태라면 AI도 그리 큰 도움을 주지 못한다. 자동 OCR 프로세싱의 결과를 토대로 AI가 신뢰할 만한 결과를 내놓기는 어렵다. 또한 PDF는 의외로 구조적인 포맷이 아니므로 현재 AX(AI 전환) 분야의 큰 화두 중 하나는 AI를 위한 기존 문서의 전처리 및 구조화 기술 수준을 높이는 문제이다. [4] 6.25 전쟁의 결과 경기도와 강원도의 38선 이북 일부 지역이 우리의 영토가 됐는데, 이를 ‘수복지구’라고 한다. 「수복지구임시행정조치법」에는 전후 수복지구를 감안한 행정구역의 조정 사항이 포함됐다. [5] <초기 내한 선교사들에 대한 세미나7>(2025. 3. 21), 한국개혁주의 연구소 주최, (주)유나이티드문화재단 후원 [6] 선교회가 병원을 운영하는 것은 일제강점기부터 계속된 미국 내한 선교사들의 ‘트라이앵글 선교’, 즉 선교지역에 기지를 세운 후 이를 거점으로 교회-학교-병원을 함께 키워 연계하는 선교 방법론에 따른 것이다. 멀스배리 선교사도 해방 후에 부산, 강원 등지에서 끊임없이 교회, 학교, 병원을 건립하는 등 철저히 한국 내 전통적인 선교전략에 입각하여 활동을 전개했다. [7] 이종전, 앞의 세미나; (글쓴이 추가) 발표 자료에 해당 교회들의 분포가 나타나 있지는 않으나, 44번 국도는 6.25 전쟁 후반기 미군의 거점들을 포함하고 있고 지리적으로도 중요한 보급로로 사용됐을 가능성이 농후하므로, 이를 따라 군집한 촌락이 주 선교 대상이었을 가능성이 높은 것은 맞다. [8] 멀스배리 선교사는 이전에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북한군 포로들을 대상으로 선교활동을 했던 이력도 있고, 그의 강원도 선교 범위가 홍천과 인제 일대의 미 제10군단 작전 지역을 따라 형성됐으므로 지역 거주민들을 대변하여 미군의 각종 원조사업과 접촉했을 가능성이 있다. - 이종전 교수(앞의 세미나)의 견해를 중심으로 정리함. [9] 면허 의료진의 부족 및 민간 이양 후의 재정문제로 병원이 사실상 기능을 하지 못하거나 폐쇄됐다는 등의 상황은 「OEC 보고서」에서도 동일하게 언급됐다. 다만, 여기서 언급된 ‘제이드 병원’의 소재지 중에는 위 세미나 및 회고글에서 말하는 병원 중 홍천면 병원이 없고 대신 내평, 상남 등 다른 곳이 포함되어 있다. 이는 두촌면 자은리 병원, 범위를 넓히면 속초 병원까지만 제이드 병원이고 다른 곳은 제이드 병원과 무관한 선교사 병원이었을 가능성이 있음을 의미한다. [10] 이승구, 앞의 세미나; 발표에 참고했던 서적 중 김광섭, 전민수 공저, 『마두원 선교사: 한국음악의 아버지, 강원도 선교의 아버지』(영창서원, 2019)가 출처인 듯하다. [11] 이 의미로 흔히 쓰이는 알고리즘(algorism)은 수학의 계산법이라는 의미에 가깝다. 문제 해결의 흐름 및 절차를 뜻하는 경우에는 비록 알고리즘이 통용된다고 할지라도 원칙적으로 알고리듬(algorithm)이 맞는 표현이다. [12] 이승구, 앞의 세미나에서 앞의 책 인용.
이야기는 현실에서 나옵니다. 우리가 보고 들었던 엄청나게 많은 기억들 속에서 일부만 골라낸 이야기를 영화라고 한다면, 미처 이야기가 되지 못한 나머지 기억들은 기록영상 컬렉션 곳곳에 심드렁하게 담겨 있습니다. 그에 대한 이야기를 되는대로 늘어놓아 보겠습니다. < Archives Korea 1930-1940 >(이하, <AK>)의 가치와 의미에 대해서는 이 영상을 남긴 제임스 헨리 모리스(J. H. Morris, 1871~1942)의 생애를 중심으로 지난 글 에서 충분히 소개했다. 조악한 화질의 시각자료와 모호한 문헌으로 흐릿하게 전해지던 당시의 모든 것을 그야말로 송두리째 담은 이 필름 릴들을 보면, 이것이 과연 개인적인 취미의 수준이었는가 하는 의문마저 든다. 어쩌면 평생 남몰래 하나의 세계관을 발전시키고 그에 관한 방대한 저작물을 남겼던 헨리 다거 (Henry Darger, 1892~1973)와 같은 ‘이름 없는 예술적 수행자’의 범주로 그를 이해하는 게 맞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불행히도 모리스씨는 좋은 아키비스트는 아니었다. 그저 친구들과 저녁 식사 후에 영사기에 걸고 함께 담소를 나누거나, 잠이 오지 않는 밤에 커피를 마시며 홀로 감상하는 정도로 필름을 관리하면 됐을 것이다. 모리스 정도 되는 사람이 이따금 필름 앞뒷면이 뒤바뀐 채 스플라이싱(필름 이어붙이기)되는 줄을 설마 몰랐을까? 화면의 좌우가 뒤집혀 영사되는 것 정도가 무슨 큰 대수라고. 한 이벤트에 대한 푸티지들이 여기저기 나뉘어 붙어 있는 것도 다 알고 놔둔 것일 테다. 굳이 푸티지들을 다 자르고 정리하여 다시 이어 놓을 필요까지야 있겠나, 나중에 혹시 재편집할 일 있을 때 제대로 따다 붙이면 그만이지, 하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사실 이렇게 설렁설렁 하는 것이 푸티지 재사용이 빈번했던 무성영화필름 시대의 흔한 관행이긴 했지만, 그래도 컷들 사이에 적당한 메모가 적힌 리더필름이라도 삽입하든지 간략한 개요들을 따로 정리해서 적어놓기라도 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배부른 아쉬움이 없지는 않다는 말이다. 결국, 100년쯤 후에 조선인들의 후예가 이 엄청난 영상자료를 발견하고 기뻐서 흥분할지 답답해서 흥분할지 알 리 없는 이 위대한 은둔의 수행자는 필름 외에 다른 어떠한 단서도 남겨주지 않았다. 그래서 <AK>에는 아직 식별되지 않은 인물, 장소, 건물, 사건들이 넘쳐난다. 그런데 이를 알아내기 위한 추리와 발품 팔이 과정 자체는 괴롭지만 뜻밖에도 미묘하게 즐거운 중독성이 있다. 나는 이런 행위를 ‘식별놀이(Identification Game)’라 부르고 있다. 늘 대수롭지 않은 정보 하나를 밝혀내려 아등바등하는 것이 이상한 집착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 사소한 정보 때문에 장면 전체의 숨겨진 맥락이 수면 위로 떠오르고 이야기가 입체적인 버전으로 ‘리부트(reboot)’되는 경우가 있다. 식별놀이는 이 맛에 한다. 아는 지식이 많을수록, 아는 문헌이 많을수록 난이도가 쉬워지겠지만, 모르면 모르는 대로 느긋하게 과정을 즐기면 된다. 지난 글에서 언급한 ‘영상 속에서 누가 모리스인가?’에 대한 추론들도 이런 과정의 결과이다. 이 글에서 한가지 사례를 더 들어보겠다. 식별 미션 : 1930년대 탑골공원에 정말 어린이 놀이터가 있었나? 일제의 공원화 사업이 가지는 이중성에 대해서는 여기서 깊이 언급하지 않으려 한다. 어쨌든 일제는 「조선시가지계획령」(1934)을 기점으로 각 지역의 「시가지계획공원안」에 의해 근대식 공원녹지계획을 수립, 추진했고 경성부는 이보다 조금 이른 1930년, 「경성도시계획서」에 ‘아동공원’을 별도 분류 항목으로 처음 언급했다. 탑골공원의 경우 1932년 12월에 관리주체가 총독부로부터 경성부로 넘어가면서, 이듬해 하반기 즈음에는 ‘아동유희구’(놀이터 기구들) 설치 등의 개수공사를 통해 아동공원으로 재개장했으리라 추정한다. <AK>에는 정확히 식별할 수 없는 장면들을 포함하여 공원 풍경이 심심찮게 포함돼 있다. 이 중, (당시 탑동공원으로 더 많이 불렸던) 탑골공원으로 추정되는 장면은 흑백 시퀀스 두 군데, 컬러 시퀀스 한 군데가 있는데, 모두 아이들이 미끄럼틀, 회전그네, 정글짐, 시소 등을 타고 노는 장면을 포착하고 있다. [장면 1] <AK> 01:01:25 부근 [장면 2] <AK> 01:01:40 부근 [장면 3] <AK> 01:02:01 부근 [장면 4] <AK> 01:02:57 부근 [장면 5] <AK> 03:37:54 부근 [장면 6] <AK> 05:10:30 부근 * [장면 3], [장면 4]는 과거 컬러 규격 중 하나인 코다컬러(Kodacolor lenticular) 방식으로 촬영했으므로 화면 전체에 미세한 세로줄이 보임. 따라서 기본적으로 흑백 프린트지만 이를 전용 영사 시스템으로 영사하여 컬러를 구현했었음. [장면 6]은 코다크롬(Kodachrome) 촬영본임. 대략 그럼직하더라도 기본적인 정보부터 맞는지 확인하지 않으면 큰 억측의 발단이 된다. 영상의 장소가 1930년대 탑골공원인 것, 그리고 이때 탑골공원에 정말 놀이터 시설이 있었다는 것을 직접적이고 구체적으로 증빙할 근거를 모을 필요가 있다. 제일 만만해 보이는 [장면 5]부터 추리를 시작해 보자. [장면 5] <AK> 03:37:54 부근 장면 존재와 위치 검증 [장면 5]에는 담장 너머 ‘公園屋(공원옥)’이라는 곳의 간판에서 ‘釀造場(양조장)’이 어렴풋이 보인다. 이 업소에 대한 정보뿐 아니라 공원 담장 놀이터와의 연관성 등은 그 어떤 활자 기록이나 지도에서도 찾을 수 없었지만, 1925년에 태어나 인사동과 종로 3가 인근에서 살았던 아동문학가 어효선 작가(1925~2004)가 1990년 시점에서 1930년대 생활을 회고하여 남겨 놓은 책 한 권이 큰 도움이 됐다. (...) 그 옆이 공원 뒷문인데 동문과 같다. 지금까지 오른쪽 담을 끼고 돈 셈인데, 뒷문을 보고 서서 왼쪽은, 연못이던 것을 메우고 만든 어린이 놀이터였다. 그네, 미끄럼대, 시소, 뺑뺑이, 정글짐, 철봉틀이 있고, 모래밭이 있었다. (...) - 어효선(글), 한영수(사진), “탑골 공원과 뒷문 밖(발췌)”, 『내가 자란 서울 : 1930년대 서울 살림 엿보기』(2판), 대원사, 2003. (...) 공원 담 밑 길에서 인사동 큰길로 나가다가, 오른쪽 끝에 '공원옥'이라는 선술집이 있었다. 자리에 앉지 않고, 선 채로 술을 먹게 된 간단한 술집이다. 저녁 때 이 집에서 고기, 생선 따위를 굽는 맛있는 냄새가 풍겨서 아이들의 입맛을 다시게 했다. 드나드는 문에는 세 폭의 천을 위쪽 3분의 1쯤만 이어 박고, 아래쪽은 갈라진 짤막한 휘장을 걸었다. 이 휘장 한 폭에 한 자씩 '公園屋(공원옥)'이라고 써서, 간판으로도 썼는데,실상은 밖에서 안이 들여다보이지 않게 가린 것이다. 사람이 드나들 적에는 이 휘장을 젖히거나 쳐들게 된다. 이 휘장을 차면이라고 한다. (...) - 같은 책, “선술집과 장전(발췌)” 그러니까 이 분의 회고에 따르면 [장면 5]의 장소가 탑골공원인 것은 맞는 것 같다. 하지만 ‘기억’이 100% 신뢰도의 증거가 되지는 못한다. 자료가 거의 남아 있지 않은 경우가 아니라면, 이것에만 의지하여 식별놀이를 종결지을 수는 없다. 이번에는 시선을 살짝 돌려 이 장면의 오른쪽에 일부만 보이는 벽돌 건물에 주목해 보겠다. 전체 외양이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이 건물이 혹시 북촌 한옥마을 등 조선인을 위한 개량 한옥 단지의 개발자이자 민족사업가였던 ‘건축왕’ 정세권 (1888~1966)이 자비로 건립한 조선물산장려회관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든다. 나종에 알고보매 그(주: 정세권)는 조선을 사랑하는 마음이 특히 깊어서 조선물산장려를 몸소 실행할뿐더러 장산사(獎産社) 라는 조선물산을 판매하는 상점을 탑골공원 뒤에 두고 조선산의 의복, 양복을 장려하고 《실생활》이라는 잡지를 발행하야 조선물산장려를 선전하는 이인 줄을 알았다. - 이광수, “成造記”, 《삼천리》 제8권 제1호, 1936. 1. 1, 242쪽 조선물산장려운동의 재점화를 주도했던 정세권의 활약과 그러한 헌신의 상징인 낙원동 회관 건립에 관한 자료는 2017년 발간된 김경민 서울대 환경계획학과 교수의 저서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위즈덤하우스, 2017)와 프레시안에 기고했던 칼럼들에 상세하게 정리돼 있다. 이에 따르면 그 회관은 “ 낙원정 300번지에 위치한 3층짜리(또는 옥탑 층까지 포함하여 4층이라고 말하기도 함) 붉은 벽돌 건물 ”이었고, 당시 신문 보도 내용과도 일치한다. 문제는 이 ‘지번’이었는데, 일제강점기의 지번 체계가 광복 이후 얼마간 유지됐는지에 대해서는 아는 바도 없지만, 최소한 일제 토지조사사업에 따른 지적원도상의 지번과 현재 지번의 위치가 동일한 것으로 보아 대략 영상의 건물 위치와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앞의 책에서 추정한 위치와도 일치한다. 그 외에는 일제강점기부터 1950년대까지 지번이 표시된 그 어떤 지도에서도 낙원동 300번지를 찾을 수 없었다. 지면상 지번이 생략돼 있거나 디지털 사본 화질이 떨어져 식별이 어려운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낙원동 300번지에 대한 자료 조회 비교 (좌) "지번입서울특별시가지도(地番入서울特別市街地圖)", 대한서림(1958) /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 300번지는 생략되어 있다. (중) “지적원도”, 조선총독부(1917) / 국가기록원 지적아카이브 제공 : 토지조사사업(1910~1918)으로 확인된 300번지의 위치를 볼 수 있다. (우) 현재(2024) 지적도 등본상의 300번지도 동일한 위치로 추정되며 도로 지목으로 할당돼 있다. 사진과 영상의 비교, 촬영 상황의 재구성 보다 직접적인 근거는 회관 건물의 외양이 포함된 자료일 텐데, ‘이것이 회관 모습이다’라고 밝히는 자료는 사진이 실린 신문기사 1건 과 조선물산장려회 기관지 《장산(獎産)》(1931년 2월호) 표지 정도이다. 문제는 [장면 5]의 벽돌집이 일부만 나온 데다가 건물의 측면이라는 점이다. 외양의 특징적 유사성 정도는 확인할 수 있지만 아직 부족하다. 다른 자료가 발견되고, 교차 검증이 되고, 나아가 새로운 정보까지 낚는 순간이 오기 전까지는 여전히 이것을 ‘사실’이라 말할 수 없다. 이를테면 1950년대 이후의 사진 및 영상자료들도 교차 검증에 도움이 된다. 특히 공중 촬영 사진을 찾는다면 좋을 텐데 지형지물이 잘 구분되는 경우가 흔치 않다. 아마도 공중 촬영한 사진 중 이 글의 관심 사항인 공원 북서부를 가장 잘 포착한 것은 연합뉴스의 도광환 기자가 1953년 6월에 촬영한 사진 인 것 같다. ( 오마이뉴스 는 이 소스를 게재를 허가받아 고화질로 공개 중이다.) 이것만으로도 [장면 5]의 벽돌 건물이 회관이 맞다는 것과 화면에 보이는 부분이 건물의 측면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장면 5]는 공원 서문 쪽에 가까운 담장 근처의 미끄럼틀 장면이 분명해졌다. 또 다른 쓸 만한 자료는 김천길 기자(전 AP통신)가 1956년에 촬영했다는 공중사진 이다. 여기서는 북문 쪽에 더 가까운 공간에 그네가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고, 이때는 회관 옥상에 1층을 더 올린 것을 볼 수 있다. 북문 쪽 공간과 관련해서는 한국영상자료원이 소장 중인 < 조선의 애국일 >(1940) 중 물산장려회관, 공원옥, 공원 내 놀이기구(정글짐)를 동시에 담은 장면이 있다. 팔각정 쪽에서 석탑 뒤의 공원 북서부를 비스듬히 바라보고 찍은 것으로 보인다. 조선총독부 제작, <조선의 애국일>(1940) 4분 22초 부근. 가운데 ‘공원옥’이, 탑 오른쪽에 물산장려회관의 측면 일부가 보인다. ‘공원옥’ 간판은 비스듬히 왼쪽 프레임 밖을 바라보고 있다. 즉, 이 화면은 [장면 5]에서 담을 따라 북문에 더 다가간 곳이다. ‘공원옥’ 앞에 정글짐이 보인다. 지금까지 확인된 사항들을 가지고 <AK>의 ‘탑골공원과 인근으로 추정되는 장면들’을 다시 보면 장면들 사이의 공간 관계를 어느 정도 유추해 볼 수 있다. 단, [장면 4]의 장소는 탑골공원 외부인 것 같다. 처음에는 이 부근에 3층 이상 벽돌 건물이 흔치 않을 것으로 보아 여태껏 어느 자료에서도 나타나지 않은 물산장려회관의 뒷마당이 아닐까 추정했으나 결정적인 단서를 찾지는 못했다. <AK> 등 영상 속 촬영 장소와 시점의 추정 배경으로 활용한 자료는 “ 탑동공원 각소 수선지(之)도 ”의 일부이다. 공원 내 배치 상황으로 보아, 조선총독부가 경성부에 공원 관리사업을 이관하기 전인 1910. 8.~1932. 12. 사이에 제작된 지도일 것으로 추정한다. 식별 놀이는 원래 엔딩을 보기 힘들다 지금까지 모은 자료와 식별된 정보를 바탕으로 촬영 시기도 어느 정도 좁힐 수 있다. 위 장면들이 모두 비슷한 시기에 촬영됐다고 가정한다면, 조선물산장려회관이 준공된 1931년 9월 이후의 장면이다. 다시, 놀이기구가 보이므로 경성부 관리 이관 후 아동공원으로 재개장한 시기, 즉, 최소한 1933년 하반기는 지난 시점일 것이다. 그런데 이상의 자료들를 찾는 중에 한가지 변수를 발견했다. ‘경성상공협회 회관이 낙원정 300번지 외 1호의 2층 양옥집으로 이전했다’라는 1936년 9월 23일자 기사 가 있다. 물산장려회관의 300번지를 지번분할했다는 것인가? 그렇다면 물산장려회관과 상공협회관은 거의 붙어 있을 가능성이 있다. 이 기사에는 회관 건립 의연금을 기부한 사람 명단 중에 ‘정세권’이 있다. 결정적으로, 이보다 앞선 6월의 기사에는 상공협회관의 외양을 스케치한 그림이 실려 있는데, 납작한 2층짜리 상공협회관 건물 뒤로 보이는 실루엣은 물산장려회관의 탑층 있는 쪽 모습 과 유사하다. 다시, 아까 소개했던 김천길 기자의 탑골공원 공중사진(1956) 을 보자. 물산장려회관 뒤로 방금 본 상공협회관의 일부와 유사한 2층 건물이 그림자가 드리워 보이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만일 이것이 물산장려회관이 맞고 [장면 6]에서 상공협회관 왼쪽으로 빼꼼하게 보이는 흰 건물이 물산장려회관의 공개되지 않은 뒷 측면 모습이라면? 이 장면의 촬영 시기는 1936년 9월 이후로 늦춰지게 되는 것이다. 이미 충분히 지쳤으므로 이 부분은 앞으로 천천히 알아보기로 하자. 사실 <AK>에 사용된 필름의 엣지코드(edge code)로부터 필름 제조 연도를 확인하는 것만으로 실 촬영일과 1~2년 이내의 오차로 시기를 추정할 수 있지만, 아직 모든 장면에 대해 심층 분석을 한 단계는 아니므로 여기서는 논외로 하겠다. 다만, [장면 6]과 같은 코다크롬 규격은 1935년에 처음 출시됐고 <AK>에서 사용된 제조 연도가 가장 이른 코다크롬 필름은 1936년산이라는 점만 말씀드린다. 식별 정보로 봉인 해제된 영상 다시보기 이제 <AK>의 이 장면들은 더 이상 탑골공원 느낌의 어느 공원에 놀이터가 있고, 조선인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 놀고 있는 덤덤한 장면일 수만은 없게 됐다. 식민지 조선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미끄럼틀을 탄다. 해가 지면 북촌의 저임금 조선인 노동자들이 담장 너머 선술집에 모여들어 막걸리로 시름을 달랠 것이다. 일제의 견제로 힘을 잃은 지 십 년이 넘은 물산장려운동을 되살려 보겠다고 ‘건축왕’ 정세권이 자비를 털어 만든 물산장려회관이 공원 옆에 우뚝 서 있지만 그 한 사람의 힘으로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새로 생긴 놀이터는 내선일체 구호만큼이나 공허하다. 아마도 이 모든 맥락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을, 정동에 거주한 지 40여 년 되어가는 한 이방인 사업가는 화려한 남촌의 풍경이 아닌 쇠락한 북촌의 정경을 카메라에 담는다. ‘오, 주여. 이들을 보호하소서.’ 탑골공원과 인사동 인근은 어쩌다 보니 한국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장소로서 변화무쌍한 이력을 지니게 됐다. 너무나 많은 이야기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을 테지만 문헌에 남지 않았다면 서서히 희미해지다가 사라질 것이다. 영상은 그 최후의 보루이다. ‘식별놀이’는 나뉘어 묻혀 있는 기억들을 채굴하고 원 모습으로 재구성하는 ‘작업증명’의 대가로 받는 ‘소소한 즐거움’이라는 가상화폐 같은 것이 아닐까. <덧붙임> 1. 직접 게재하기 어려운 사진 및 기사 자료는 부득이하게 링크로 대신했습니다. 2. 일제강점기 공원 정책과 관련한 내용은 다음 문헌을 참고했습니다. - 조세호, 김영민, "경성부 도시계획서 상의 공원녹지 개념과 현황의 변화 양상", 『한국조경학회지』 vol.47, no.2, 2019, 117~132쪽. 3. 각종 자료를 무료로 공공에 개방하고 있는 국사편찬위원회, 서울역사박물관, 국립중앙도서관, 국가기록원에 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