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스토리 채널 : 이스라엘 민족의 영웅 모세
- 감독
- 스티븐 R. 탤리
- 제작년도
- 1996
- 출연
- 피터 그레이브스
1984년도에 완성된 이두용 감독의 가족 드라마 < 장남 >은 1970년대에 개성 있는 저예산 액션영화로 유명해졌지만 예술성으로는 큰 평가를 받지 못했던 감독이 1980년대에 만들어냈던 문제작의 연속들 가운데 놓이는 작품이다. 제목에서 파악되듯이, 80년대 경제성장의 열차를 타고 급격하게 변모된 도시 생활상을 배경으로 집안의 무게를 짊어진 장남과 부모세대의 갈등을 그린 건전한 가족 드라마로 내심 판단해버리고 말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장남>은 이러한 우를 범해서는 안 될 문제작 중의 문제작이다. <장남>은 < 최후의 증인 >(1980), < 여인잔혹사 물레야 물레야 >(1983), < 뽕 >(1985)과 같이 이두용의 영화작가로서의 자의식을 담은 작품이며, 2000년대 이후 재발견되고 있는 이두용의 작가성 연구에 있어 반드시 가치 평가되어야 할 영화다. 이두용 감독의 오리지널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영화화된 <장남>은 1980년대 초중반 급격한 도시화율과 함께 각종 분리와 분화로 인해 도시 양극화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된 시대를 배경으로 놓는다. 강남 아파트 단지 개발로 인해 중산층 모두가 아파트 생활자를 꿈꾸던 때, 농어촌 정책 부재로 삶의 터전을 떠나버려야 했던 수많은 고향 이탈자들이 서울로 몰려들며 서울은 더욱 복잡해지고, 더욱 거대해지고, 더욱 속도가 빨라지며 색다른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국민들의 비판 의식을 차단하기 위해 고안된 전두환 정권의 3S 정책으로 인해 < 애마부인 > 류의 에로영화가 최고 흥행 장르가 되었던 것과 동시에, 도시 중산층의 민주화 지향은 <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 류의 사회비판 멜로를 찾고 있었다. 억압과 유화의 위로부터의 문화정책과 맞서 아래로부터는 저항의 문화가 확산되어 가고 있던 것이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는 한국영화에 곧잘 투영되었다. <장남>은 그 경향성을 반영한다. 고향 마을이 수몰지구로 선정되어 농사를 짓고 살아가던 노부모( 김일해 , 황정순 분)가 갑작스럽게 서울로 상경하게 되면서 이야기의 갈등 구조가 형성된다. 장남( 신성일 분)은 컴퓨터 회사의 유능한 기술개발자이며 교사인 아내( 태현실 분) 덕택에 해외 유학도 다녀오고 서울 사대문 안에 이층 양옥집도 소유하고 있는 자수성가한 현대인이 표본이다. 그에 비해 두 남동생과 두 누이들의 생활은 많이 처진다. 머리 좋은 장남에게 가족의 모든 지원을 쏟아 부었다는, 누구나 예측할 수 있는 뻔한 전사들을 영화는 과감히 생략하고 부모가 상경한 현재 일어나는 갈등에 초점을 맞춘다. 장남과 여러모로 대조적인 차남( 김희라 분)은 자신의 콤플렉스 때문에 걸핏하면 아내를 때리고, 첫째 형의 지원 덕에 대학을 마치고 사회생활 중인 막내아들(김성수 분)은 착하지만 집안 내분에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으려고 한다. 일이 바쁜데다 아내의 눈치를 보느라 부모를 홀대하는 듯한 장남이 못마땅한 누나( 문정숙 분), 그리고 가난한 처지에도 자식 욕심이 많은 여동생이 있다. 그 누구도 부모와 함께 지내기가 쉽지 않은 상황에서 이리저리 치이며 익숙하지 않은 도시 생활 속에서 힘겨워 하는 노부모를 그냥 두고 볼 수 없어, 장남은 부모 형제가 함께 살기 위해 오래전에 계획했던 집짓기를 실행에 옮긴다. 그러나 행복은 쉽게 다가오지 않는 터. 집짓기에 매진 중인 상황에서 어머니가 지병으로 임종하고, 불행은 겹쳐 제주도 지사로 파견나간 장남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죽은 어머니를 담은 관이 고층 아파트 곤돌라를 타고 흔들리며 아래로 내려오고 있던 순간이다. 장남은 죽어서 철사 줄을 타고 내려오는 비극만은 막아달라던 어머니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이다. 전형적인 가족 갈등을 다루지만 <장남>은 플롯 전개나 캐릭터 표현에서 전형성을 탈피한다. 액션과 미스터리로 단련된 감독의 장기는 이 평범해 보이는 가족 드라마를 보다 묵직한 사회 드라마로 만든다. 그로테스크한 무드 속에 쉽게 예측되지 않는 복잡한 캐릭터들의 향연을 지켜보는 재미가 풍성한데, 전형적으로 전개되는 듯한 서사 과정에 놓인 개별 캐릭터들의 사사로운 단편들은 이두용 영화다운 어두움과 메시지의 성공적 결합의 한 요소들로 기능한다. 사회적으로 성공했지만 가족들의 수많은 요구 때문에 지친 장남이 요정 여성과 맺는 부적절한 관계 묘사, 늙은 부모의 눈에 비친 어지러운 도시 생활상을 묘사하는 촬영 기법과 사운드 운용, 너무 늦은 도착 때문에 좌절하는 아들의 비통함을 표현하는 편집 기법 등은 한 장면 한 장면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가족 간 갈등을 유발하는 악역인 것 같은 첫째 며느리의 난데없는 분노 표출은 보는 이를 어리둥절하게 하지만, 그의 행동이 이해가 되게끔 서사는 개연성을 가지고 전개되며 이로 인해 보다 입체적인 캐릭터를 구축한다. 자식들이 나빠서 부모를 죽음으로 몬 게 아니다. 이들은 모두 최선을 다했으나 욕망과 생활이 어지럽게 얽힌 치열한 도시 생활에 여유가 없다. 자신의 삶의 터전으로부터 쫓겨난 부모는 사랑하는 자식들의 도시적 삶에 적응할 힘이 없다. 애정과 혈연으로 감내하기에는 두 세대의 문화와 인식 차가 크고, 이 모든 것을 봉합한 채 함께 모여 살고자 했던 장남의 꿈은 헛된 꿈일 뿐이다. 완성하지 못한 온가족만의 대저택, 아들의 품에서 마지막을 고하고자 했던 어머니의 실현되지 못한 희망은 현대인의 상실감에 대한 은유다. 울리기보다는 차갑고 냉정한 현실에 멍해지게 하는 영화는 각자 가슴 속에 뼈아픈 메시지를 품고 다시 일어서게 한다. <장남> VOD 보러가기 KMDb VOD YouTube VOD (복원본)
고전영화와 현대영화를 가르는 기준은 육체다. 아아. 저 한마디 뱉는 순간 벌써부터 무수한 항변과 반론들이 들려온다. 기실 땅바닥만 찍지 않는 이상(헤어조그가 그런 적이 있었다고 재반론하고 싶지만 참는다) 육체를 찍지 않는 영화는 100년 동안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육체의 범위를 문자 그대로(“corpus”) ‘물체’로 조금만 확장하면 카메라를 들이대는 순간 모든 피사체가 이미 육체다. 심지어 카메라도 육체이고, 그걸 찍고 보는 작가도 관객도 죄다 육체다. 하지만 고전적 육체와 현대적 육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물론 그들 모두가 환경과 상호작용하면서 이미지의 변화를 표현하는 주인행세를 함에는 어떤 차이도 없겠지만 말이다. 고전적 육체는 정신의 담지자로서 먼저 나타난다. 고전적 육체는 정신적 가치보다 더 앞설 수 없다는 의미다. 물론 드레이어와 베리만의 영화에도 육체가 있다. 하지만 그들이 하얗게 지워져서 지금이라도 얼른 복원되어야 할 정신의 심도보다 먼저이진 않다. 그저 정신이 심도를 복원할 때까지 느릿느릿 움직여주고, 그에 필요한 말씀(<오데트>)을 전달해주면 그만이다. 고전육체는 정신의 수단인 셈이다. 반면 현대적 육체는 (신을 잃어버려서 그런지) 비틀거리고 넘어질 때 나타난다. 즉 진짜 육체는 피 흘리고 다칠 수 있는 육체다. 진짜 육체는 죽을 수 있는 힘으로 정의된다. 팔다리만 있다고 육체가 아니다. 팔다리가 떨어져 나갈 수 있어야, 그에 비명 지르고 펄쩍 뛸 수 있어야 진짜 육체다. 프레이밍에 의해 가려져 있던 잔 다르크의 가멸력을 화형대로 옮겨놓은 브레송은, 그런 의미에서 현대적 육체에 한 걸음 더 다가갔다고 말할 수 있다. 정신의 심도? 뜨거워 죽겠는데 무슨 심도 타령일까. 온몸의 신경이 화염에 불타오를 때 심도보단 비명이 먼저다. 요컨대 고전적 육체가 불멸의 정신적 가치(정의ㆍ믿음...)를 위한 수단에 불과할 때, 현대적 육체는 소멸의 물질적 가치를 위한 수단이자 목적이 된다. 누구 말을 빌리면, 진짜 육체는 가멸성의 “순수수단”이다. 표표히 사라지는 서부극 인물 죽을 수 있는 육체만이 진짜 육체라고 한다면, 고전 서부극엔 육체가 없다. 아무리 역마차의 속도가 빨라 봤자 그 종착지는 아메리카의 정의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셰인과 링코 키드는 죽지 않는다. 그저 표표히 사라질 뿐(물론 죽은 거나 진배없다는 추가해석이 가능하지만). 더욱 결정적인 사례는 종교영화들의 경우다. 종교적 상황들을 다루었던 고전시대극들에서 육체는 바리새인이나 유대인 할 것 없이 모두 휘황찬란한 의상들로 가려져 있다. 드밀과 와일러의 영화에서 육체보다 색깔이 먼저인 이유는 다시 색깔이 정신의 심도를 방해하거나 도와주는 역할을 맡기 때문이다. 로마제국의 테크니컬러 총천연색에 모세의 남루한 넝마주이 패션이 극한의 대조를 이룰 때, 우리의 영혼은 더더욱 가열차게 기도 모드에 돌입할 수 있음이다. 즉 고전종교영화에서 의상은 정신의 척도만을 내어주지, 육체의 척도를 내어주지 않는다. 심지어 로마 군인들이 바닷물에 휩쓸려 죽는 것마저도 그나마 파도에 가려서 잘 보이지 않는다. 여기서 중요한 건 육체가 죽었단 사실이 아니라, 로마제국과 그의 폭정이 죽었단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가장 육체의 출현을 방해하던 고전적 문법은 클로즈업이라고 할 수 있다. 얼굴 한 방이면 세계의 모든 것이 거기서 표현되고 있었다. 베리만은 이걸 한껏 즐겼다. 클로즈업은 육체의 죽을 수 있는 능력을 영혼의 가속도로 대체한다. <잠입자Stalker> (1972) 반대의 상황들로 가보자. 웨스턴을 지나 네오웨스턴으로 가보면, 거기엔 육체가 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육체가 있어도 너무 육체만 있다. 정의감이나 신념 따위는 개나 줘버리고 금 한 덩이 차지하기 위해서 동물적 본능만 남은 네오웨스턴의 육체들은 가히 ‘사막의 좀비들’이라 할 수 있다. 페킨파의 < 와일드 번치 >에 한 총잡이는 기관총 드립에 사망하여 널부러진 한 시체에서 금니를 캐내려고 한다. 이것은 모세의 정신적 넝마주이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동물적 넝마주이다. 심지어 페킨파는 육체의 가멸성이 충분히 강조되지 않을까 슬로우모션으로 죽는 순간을 찍어댔고, 많은 평론가들에게 상욕을 들었다. 페킨파의 슬로우모션은 클로즈업이 표현하던 영혼의 가속도와 대비되는, 영혼이 육체를 떠나는 가속도다. 헐. 현대의 신학영화는 그렇지 않을 거야! 여전히 신학은 정신이다, 육체가 아니라! 라고 울부짖는 그대에게 일독을 권장하는 영화는 타르콥스키의 영화다. 비록 그가 인터뷰에서 열심히 “영성”과 “희생”에 대해서 말하지만, 정작 그의 이미지들을 보라. 거기엔 안개와 유황 가스를 뒤집어쓰고 어쩔 줄 몰라하는 육체, 자신의 존재를 잊을까 봐 초원 위에 마치 비디오데크가 고장 난 것처럼 일시 정지된 상태로 몇 분이고 서 있는 육체, 무엇보다도 공중부양하는 육체가 있다. 이른 결론으로 건너뛰자면, 정신성의 회복을 위해 타르콥스키에게 먼저 고양되어야 할 것은 영혼이 아니라 육체인 것이다(물론 이건 인간의 육체만은 아니다). 그런 이유에서 타르콥스키는 클로즈업을 마뜩잖아 했다. 클로즈업이 보고 싶나? 말씀을 쏟아내던 입이 삭제된 뒤통수 클로즈업이나 봐라(< 스토커 >). 현대적 육체는 클로즈업을 경멸한다. 얼굴은 죽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몇몇 예외가 있다. 얼굴들을 겁나게 이어 붙여서 줄줄이 비엔나로 엮어낸 후 맥놀이 하듯 겁나게 흔들면 다시 육체가 나타난다. 이것이 카사베티스의 경우이고 그의 독특성이었다. 천의 얼굴은 하나의 육체와 맞먹는 셈이다(<얼굴들>). 오발탄 (1961) “가자...가자..” 요컨대 고전영화와 현대영화를 가르는 기준은 ‘고통’이다. 고통이 없는 모든 영화를 고전적이라고, 고통이 있는 모든 영화를 현대적이라고도 부를 수도 있을 터다. 현대 신학영화는 이 기준의 반대급부이기는커녕, 이 기준을 가장 먼저 밀고 나갔던 고통의 첨병들이었다. 유현목 의 영화들이 타르콥스키보다 이른 현대적 신학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거기엔 고통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천근만근의 짐짝”에 짓눌릴 때의 압사의 통각이고, “가자...가자..”의 환청에 고막이 찢어지는 통각이다(< 오발탄 >). 아무리 클로즈업과 의상으로 가려봐도 이 고통의 파동은 사라지지 않는다. 얼굴 안에 충치는 하나쯤 박혀있기 마련이고, 파동은 육체의 신경과 힘줄에 직접 작용하기 때문이다. < 막차로 온 손님들 >에서 도마질 소리에서 괘종시계 소리로의 이행을 들어보라. 모세가 듣는 신의 목소리는 노래방 마이크에서와 같은 에코라도 걸려 있었다. 그러나 유현목의 세계는 노래방이 아니다. 십계현판이라는 마이크도 없는데 울려 퍼지기 때문이다. 그 마이크는 내 뇌 속에, 내 신경 속에 이미 있다. 이건 거의 고막의 화형식이다. 너는 죽는다. 육체이기 때문이다. 믿음은 이에 대한 통각 없이 아무것도 아니다. 신은 압력이 되었다(타르콥스키는 “시압time-pressure”이라 불렀던 그것). 이것이 유현목이 진정 말하고자 하는 바다. < 순교자 >에서 신부를 휘어 감는 문제는 신이 있냐 없냐가 아니었다. 그건 신은 없는데, 어떻게 십자가가 있느냔 것이다. 저기에 우뚝 서서 이 폐허를 압박하고 있는 파동의 중심으로서의 십자가가. 이 모든 측면들이 유현목을 한국최초의 육체적 작가로 만든다. 유현목이 영화는 “체험”이라고 강조함을 잊지 않았다. 말 그대로 몸의 경험인 것이다. 고통으로만 존재하는 신념의 상태.
증기선이 질주한다. 목재를 태우고, 목재가 떨어지자 뜯어낸 갑판을 태우고, 구명보트를 태우고, 밀랍인형을 태우고, 악마의 음료이자 만병통치약인 럼주를 태우며 질주한다. 닥터 존(윌 로저스)이 이끄는 낡은 ‘클레어모어 퀸’ 호는 폭발할 듯 불꽃을 뿜으며 1890년대의 미시시피 강을 달린다. 태울 수 있는 것들을 모두 태우자(존 포드의 형인 프랜시스는 여전히 술에 취한 채 동료 선원도 태우려 한다) 비로소 결승점에 도착한다. 목적지에 이르자 모든 것이 한꺼번에 해결된다. 간발의 차이로 닥터 존의 조카 듀크는 교수형을 면하고, 그들 가족은 또 다른 증기선 ‘프라이드 오브 파둑’을 획득한다. 증기선은 자기의 모든 것을 태우고 달리며, 영화는 서사의 모든 것을 태우고 달린다. < 굽이도는 증기선 >이 걸출한 액션영화라면(하스미 시게히코는 이 영화를 최고의 액션영화 50편 중의 하나로 뽑았다), 증기선의 물리적 운동감 때문이 아니다. 사실 이 증기선은 그렇게 날렵하지도 빠르지도 않으며, 영화의 서사도 민첩하기는커녕 태평스럽고 느리기 짝이 없다. 태워질 것이라 예상할 수 없었던 것들, 사라질 것이라 기대하기 힘들었던 차이들이 화로에서 한몸이 되어 불타오른다. 불타오르며 둔중한 증기선을 힘차게 밀고 간다. 우리를 사로잡는 건 배의 속도감도 불의 물리적 형상도 아닌, 배의 육체도 서사의 육체도 다 태워버릴 듯한 난폭하고도 맹렬한 불의 활동이다. #1 #2 1939년 < 역마차 >가 나오기 전까지 존 포드의 1930년대는 위대했다고 말하기 힘들다. 윌 로저스를 주연으로 기용한 세 작품(< 닥터 불 > < 저지 프리스트 > < 굽이도는 증기선 >)과 < 순례여행 > <에어 메일> 등을 제외하면 그가 <역마차> 이전에 만든 20여 편의 유성 영화들은 어딘지 허술하고 독창성이 두드러져 보이지 않는다. 물론 < 밀고자 >(1935)로 첫 아카데미 감독상을 받긴 했지만 이 영화는 과대평가된 포드 영화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그의 동년배인 킹 비더와 조셉 폰 스턴버그가 무성 시대의 말기와 유성시대의 첫 10년 동안 자신의 대표작들을 쏟아낸 것과 비교하면, 존 포드의 1930년대는 차라리 탐색기에 가까운 것처럼 보인다. < 굽이도는 증기선 >은 이 탐색기의 의심할 수 없는 최고작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존 포드의 거의 모든 것이 여기 있다고 말하고 싶을 정도이다. 처음엔 자신을 한 사건의 서사로 제시하지만 사건이 거의 잊혀질만큼 그것의 장악력이 느슨해지면서, 그 틈새들 사이로 유머와 헛소동, 잉여의 몸짓과 표정들, 그러니까 삶의 조각들과 세계의 조각들이 제멋대로 빛을 내며 활동하기 시작한다. 포드는 이 조각들의 난장을 플롯의 기예로 정리할 생각이 없다. 대신 하나의 결정적 활동 안에 그들을 밀어 넣는다. 미시시피 강에서 증기선 경주가 벌어지는 마지막 20여 분의 시퀀스는 그 조각들이 불타오르며 벌어지는, 영화사가 기억해야 할 황홀한 축제이다. 줄거리를 요약하면 이렇다. 닥터 존은 미시시피 강 일대를 돌아다니며 싸구려 럼주를 만병통치약으로 속여 판다. 그는 한때 항해사였고 유일한 가족은 조카인 항해사 듀크다. 두 사람은 닭장처럼 초라하고 낡은 증기선 ‘클레어모어 퀸’을 최근에 구입해 들뜬 상태다. 듀크가 늪지대에 사는 소녀 플리티 벨과 사랑에 빠져 그녀를 데리고 나오면서 문제가 생겼다. 그녀에게 추근대던 선원을 살해한 것이다. 선원이 먼저 칼을 뽑았기 때문에 정당방위이지만, 유일한 목격자인 얼뜨기 예언자 ‘새로운 모세’는 행방을 알 수 없다. 듀크의 사형이 확정되고 항소는 거부당했다. 사형은 증기선 경주가 끝나는 시점에 경주의 결승점에서 집행될 것이다. 클레어모어 퀸은 듀크의 결백을 증언할 ‘새로운 모세’를 찾아 결승점을 향해 질주하기 시작한다. 여기엔 멀쩡한 사람이 없다. 주인공인 닥터 존은 사기꾼 약장사이며, 그의 조카는 정당방위이긴 하지만 사람을 죽였다. 자신을 새로운 모세, 새로운 엘리아 선지자라고 주장하는 엉터리 예언자들, 자수하러 온 살인자에게 귀찮다는 듯 감옥 열쇠를 던져주는 보안관, 사형집행을 앞두고도 증기선 경주에 더 관심이 많은 주지사, 항상 취해있는 알콜 중독 기관사 에페(프랜시스 포드) 등등, 이곳은 사기꾼과 가짜 예언자와 주정뱅이와 게으른 관리의 세계다. 여기엔 영웅도 악인도 없다. 신기하게도 포드는 이 비루한 세계를 더없이 평화롭고 따뜻한 곳으로 그려놓았다. 닥터 존과 ‘새로운 모세’는 적이지만 둘은 부딪히는 일 없이 각자의 방식으로 사기 치며 살고 있다. 다만 한 가지 문제가 있다. 이미 벌어진 정당방위 살인과 곧 벌어질 부당한 사형집행. 결코 사소하지 않은 이 문제를 포드는 사소하게 다룬다. 그의 인물들은 종종 그 문제가 없는 것처럼 행동하고, 그의 서사는 스스로 종종 그 문제를 잊어버린 것처럼 진행된다. 인물도 서사도 주어진 그 순간이 전부인 것처럼 현재에 몰두하는 것이다. 포드는 때로, < 황야의 결투 > 혹은 < 웨건 마스터 >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영화가 심각한 문제를 다룰 때조차 심각해질 필요가 없다고 믿는 사람처럼 보인다. 혹은 영화가 사건을 등장시킨다 해도 사건을 다루는 매체가 아니라고 믿는 사람처럼 보인다. 그에게는 중심 사건조차 서사의 한 조각일 뿐이거나 때로 핑계에 가깝다. < 굽이도는 증기선 >에서 살인과 사형집행은 무엇의 핑계인가. 혹은 살인과 사형집행을 사소화하면서 벌어지고 있는 일은 무엇인가. 결국 증기선의 연료가 될 두 소재, 럼주와 밀랍인형을 먼저 떠올려보자. 닥터 존은 럼주가 전설의 인디언 처녀 포카혼타스의 처방약이라고 선전한다. ‘새로운 모세’는 럼주가 악마의 음료라고 주장하며 ‘병든 영혼을 치유하는’ 성령의 리본을 판매한다. 각각 전설과 성경을 근거로 럼주를 찬미하거나 규탄하는 것이다. 의미의 원천인 전설과 성경이 여기선 두 사기꾼의 효과적인 선전도구로 작동한다. 하지만 포드는 이 사기행각들의 악덕을 드러내기는커녕 그것에 유쾌한 활력과 정감을 불어넣는다. 우리의 주정뱅이 에페가 성령의 리본을 달고 악마의 럼주를 들이키며 즐거워할 때, 그는 사기의 희생자라기보다는 조작된 의미들과 유희를 벌이는 아이와 같은 천진난만한 존재처럼 보인다. 증기선 안에 설치된 밀랍인형 박물관은 모세와 선지자들, 나폴레옹, 조지 왕, 그랜트 장군 등 위대한 전설을 거느린 역사적 인물들로 가득하다. 그런데 영리한 사기꾼 닥터 존은 그들을 남부의 농부들이 좋아할 만한 인물로 바꿔버린다. 조지 왕은 조지 워싱턴으로, 북군의 그랜트 장군은 남군의 리 장군으로, 모세는 무법자 제시 제임스로 명찰을 바꿔단다. 이 영화의 가장 우스꽝스러운 장면 가운데 하나는, 박물관을 부수러 온 성난 농부들이 제시 제임스로 앞에서 겁을 집어먹고, 리 장군에게 경례를 하는 장면이다. 총을 든 제시 제임스는 좀 전까지 모세였고, 리 장군은 좀 전까지 자신들이 싫어하는 그랜트 장군이었다. 물론 둘 다 밀랍인형이라는 모조품이다. #3 #4 #5 #6 럼주와 밀랍인형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소동들 속에서 역사와 전설, 신화와 성경은 제멋대로 전용되며 조작된다. 진리의 원천, 의미의 심층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지금 이곳에서 모든 것은 표층의 유희로 전유 되어 끝없이 변형된다. < 굽이도는 증기선 >가 기호 놀이라면 기의를 따돌린 기표들의 아방가르드적 유희가 아니라, 임의적이고 일회적이며 종종 기만적인 의미작용 자체를 유희의 대상으로 삼는 기호놀이다. 이제 이 영화에서 사건의 역할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사형집행은 사건으로서의 중대성 때문이 아니라 이 기호놀이의 종결자로 동원된 것이다. 클레어모어 퀸은 유일한 증인 ‘새로운 모세’를 찾아 사형집행 전까지 결승점에 도착해야 한다. 그 둔중한 육체를 전속력으로 약동시키기 위해서 필요한 건 에너지이며 힘이다. 이제 주변 사물들은 그것의 유동하는 의미와 상징이 아니라 에너지를 발산하는 순수한 물질로서만 가치를 지닌다. 조지 워싱턴, 리 장군, 제시 제임스, 악마의 음료, 만병통치약은 사라지고 오직 연료로서의 물질들만 남았다. 사형집행은 기만적이고 유희적인 기호놀이를 중단시키고, 모든 것을 힘과 속도의 문제로 바꿔버린 것이다. 목재는 물론이고 갑판도 구명보트도 태워버린 뒤, 닥터 존이 외친다. “박물관을 태워.” 이제 이름들과 의상들이 상징들이 사라지면서 밀랍인형들이 불탄다. ‘박물관’마저 다 태워버리자 화로는 다시 죽어간다. 부당한 사형집행을 막을 시간도 사라져 간다. 이때 주정뱅이 에페가 화로 곁에서 럼주를 마시지 않았다면, 그를 본 ‘새로운 모세’가 화를 내며 술병을 빼앗아 화로에 던지지 않았다면, 아무도 이 악마의 음료가 그토록 가공할만한 연료인지 몰랐을 것이다. 누가 주정뱅이를 비난할 것이며, 거짓예언자를 손가락질할 것인가. 우연의 간계는 때로 악덕을 천상의 미덕으로 바꿔놓는다. 럼주가 마지막 연료로 등장해 화로에서 폭음을 내며 배를 집어삼킬 듯 불꽃을 내뿜을 때, 탄성을 참기 힘들다. 닥터 존에게 럼주는 이제 조카의 죽음을 막은 진정한 만병통치약이 되었다. ‘새로운 모세’에게 이것은 악마의 음료를 태워 없애며 한 생명을 살린 신성한 의식이 되었다. 두 사람은 사기꾼이며 엉터리 예언자였고 또한 서로 적이었지만, 어떤 논쟁도 대결도 없이 럼주를 함께 불태우는 행위 하나만으로 자신의 사기와 엉터리 예언을 자기도 모르게 정당화한 것이다. #7 의지와 우연, 미덕과 악덕들이 모두 하나의 불꽃으로 타오르자 비로소 간발의 차이로 행복한 목적지에 이른다. 이 대책 없는 서사의 낙천성은 세계관의 낙천성과 무관하다. 그것은 의지의 뜨거움이 아니라 운명의 차가움에 대한 긍정이며, 운명의 차가운 힘을 알게 된 자의 유희정신이다. 존 포드는 후에 “이건 훌륭한 영화가 될 수 있었는데, 나서기 좋아하는 새 매니저(대릴 F. 자눅을 말한다)가 와서 코미디를 다 덜어내는 바람에 그렇게 되지 못했다.”고 불평했지만, < 굽이도는 증기선 >는 여전히 영화사상 가장 위대한 코미디 중 하나이고, 소란과 난장의 활력이 영화 전부를 지배하는 포드의 첫 유성영화이며, 그의 후기 대표작들을 예기하는 걸작이다. 이 영화가 개봉하기 3주 전인 1935년 8월 15일, 윌 로저스는 비행기 사고로 56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전 세계를 누빈 카우보이, 신랄하고도 유머러스한 칼럼니스트, 보드빌과 연극과 영화를 오간 배우이자 타고난 익살꾼이었던 로저스는 대통령에서부터 하층민에 이르기까지 당대 미국인이 가장 사랑한 사내였다. < 굽이도는 증기선 >의 원래 엔딩은 로저스가 또 다른 증기선 선장에게 손을 흔들며 안녕을 고하는 장면이었지만, 그의 죽음 직후 그가 증기선에 편히 누워있는 지금의 엔딩 장면으로 바뀌었다. 원래 엔딩으로 상영할 경우 극장이 울음바다가 될 것을 우려한 때문이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