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일에 만납시다
- 감독
- 최훈
- 제작년도
- 1964
- 출연
- 김진규, 김지미, 박암, 허장강, 최무룡, 이경희, 이대엽, 박철, 정애란, 윤인자, 황정순, 김용학, 남은주, 경윤수, 유명숙, 김창섭, 정미해, 송억, 정철, 최성, 성소민, 채랑, 주연, 양훈
경기천년바탕체 R(저작권자: 경기도, 출처: 한국저작권위원회 ) (위 사진 클릭 시 유튜브 인터뷰 영상으로 이동) 1957년, 가설극장으로 시작하다 미림극장은 6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주민들과 함께 한, 인천을 대표하는 지역 상영관이다. 1957년 인천 동구 송현동에 고은진 씨가 천막을 세워 무성영화를 상영한 것을 시작으로 문을 연 미림극장은 이후 47년간 다양한 영화들을 소개하며 지역 주민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처음에 평화회관으로 시작한 천막극장은 이내 평화극장이란 이름으로 운영되었다가 최종적으로 미림(美林)극장으로 개명한다. 극장 운영은 고은진 대표의 아들 고용성 씨와 사위 오윤섭 씨가 맡아왔다. 이후 오윤섭 씨는 미림을 그만두고 오성극장을 설립하면서 미림극장은 고은진 씨의 아들 고희성 씨가 대표를 이어받았다. 1970년대부터 90년대 초반까지 외화 중심의 상영 영화들이 크게 흥행하면서 지역 문화 공동체의 거점으로 자리 잡았다. 미림극장은 1970년대 중반 단층이었던 건물을 이층으로 신축하였고 그때 지금과 같은 2층 발코니 구조로 완성되었다. 1966년부터 미림극장에서 근무한 조점용 영사기사에 따르면 1980년대 중반에는 고희성 대표의 탁월한 외화 프로그램 구성이 소문이 나서 서울의 극장배급사에서도 찾아와 견학할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2000년대 초반부터 인천 지역에 들어선 멀티플렉스 영화관의 공세에 밀려 2004년 7월 29일 영화 <투 가이즈> 상영을 마지막으로 폐관하여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것처럼 보였다. 다행히 9년 뒤인 2013년 10월 미림극장은 ‘추억극장 미림’으로 단장하여 다시 돌아왔다. 미림극장 로비 추억극장으로 재출발하다 재개관한 추억극장 미림은 인천 최초이자 유일한 실버전용관을 콘셉트로 지역사회에 새롭게 자리 잡았다. 그 중심에는 140개 회원사를 가진 인천광역시 사회적기업협의회의 의지가 있었다. 원도심을 살리기 위한 복합문화공간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가능성 있는 사업 중 옛 영화관을 살려내자는 아이디어가 제시되었다. 인천시에서 재정을 지원하고 비영리단체인 인천시 사회적기업협의회가 운영을 맡는 방식으로 출발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인천시의 정책이 여러 차례 변경되면서 약속되었던 인프라 구축은 원활히 이루어지지 않았고 2016년 인천시는 사실상 지원 종료를 통보한다. 지원이 끊어진 후 여러 차례 진정서와 청원서가 제출되었지만 방침은 변함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려낸 옛 영화관의 문을 다시 닫을 수 없다고 판단한 사회적기업협의회는 크고 작은 후원을 바탕으로 현재까지 운영해 오고 있는 상황이다. 2016년 2월 29일 공익형 사회적 기업 1호로 거듭난 추억극장 미림은 단지 영화 상영뿐 아니라 지역 기반의 커뮤니티 확장에 공을 들이는 중이다. 고령, 경력 단절 여성 등 취약 계층의 고용률을 60% 이상 유지 중이며 실버 세대의 자원활동 프로그램도 지속적으로 개발하고 있다. 상영관 내부, "추억극장 미림에서 추억의 명화를 만나보세요"라는 현수막이 걸려있다 무엇보다 추억극장이라는 콘셉트에 충실하되 그것에만 스스로를 가둔 채 제한하지 않는다는 점이 중요하다. 현재 ‘미림’(美林)은 ‘아름다운 숲’이란 의미처럼 세대를 아우르며 공존하는 문화공간을 지향한다. 문화 혜택의 사각지대인 실버 관객을 위한 프로그램을 구성하는 것을 넘어 가족이 함께하는 문화공간으로 거듭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다. 2016년 문화관광부 예술영화전용상영관으로 지정된 이후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지역사회와 밀착 중이며 2016년 9월 SK사회성과인센티브 프로젝트와 협약을 체결하기도 했다. 2017년 인천광역치매센터 치매극복 선도기업으로 지정된 후 노인문화복지 증진에 힘을 기울이고 있는 것도 빼놓을 수 없다. 동시에 젊은 관객층 개발에도 소홀하지 않고 관객들이 직접 영화를 선정하여 상영하는 프로그램도 지속적으로 개발 중이다. 과거의 추억을 되돌아보는 고전영화 상영을 기본으로 하되 후배 세대와의 소통 창구를 꾸준히 개발하여 공존의 의미를 강화해 나가고 있는 것이다. 역사 복원을 위한 노력 10년의 폐관 기간 동안 미림극장의 많은 자료들은 안타깝게 유실되었다. 하지만 재개관 후 보관된 자료들을 복원하고 인천 주민들이 가지고 있던 자료들을 기증받는 등 자료복원과 관리에 공을 들이고 있다. 극장의 3층에는 영화연구가 정종화 선생이 50년간 수집한 영화 포스터, 전단, 스틸 사진 등의 자료가 전시 중이다. 매월 마지막 주 목요일 진행되는 정종화 영화연구가의 시네마데카메론 수업을 통해 과거의 낭만을 되짚어보고 청년세대에게 전하는 만남의 장이 이어지고 있다. 그야말로 어제에서 오늘로 이어지는 공존의 현장이라 할만하다. 미림극장은 상영관 오른쪽에 바로 외부와 연결되는 문이 뚫려있는 독특한 구조다. 얇은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현실과 영화의 세계를 오가는 건축물은 지역주민과 밀착하여 가깝게 소통하는 미림극장의 정신을 상징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3층 미림역사관에 전시된 미림극장의 역사 자료들 공간 및 운영개요 1. 위치(주소): 인천시 동구 화도진로 31 (송현동 92-7) 2. 설립일 - 1957.11월 최초 개관(평화극장) - 1958.10.5. 정식 개관(미림극장), 2004.7.29. 폐관 - 2013.10.2(재개관)~ 3. 대표자: 고은진(창업주), 고희석(폐관 당시), 최현준(현재) 4. 규모: 대지면적 477m², 연면적 745.79m², 바닥면적 437.79m²(지상2층, 지하1층) (1~3층 구조인데 건축물대장에는 이와 같이 표기되어 있음) 5. 극장 구성 - 단관극장, 재개관하면서 1층 206석, 2층 77석이였으나 2002년 3월 CGV 좌석기부를 통해 2층 좌석을 교체하면서 47석으로 줄어듦. 현재 253석. - 1층: 매표소(매점 겸업), 여자화장실, 커피자판기, 정수기 - 2층: 미림살롱(소공연장), 남자화장실, 커피자판기, 정수기 - 3층: 미림역사관(상설전시관), 영사실 6. 운영시간: 쉬는 날 없이 매일 9:30~20:30 7. 입장료 - 고전영화(기본 5,000원, 학생 4,000원, 65세이상 2,500원) - 개봉영화(기본 7,000원, 학생/65세이상 5,000원) 인터뷰: 최현준 대표(인천 미림극장) 미림극장 최현준 대표 송경원 _미림극장에 대한 간단한 개요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최현준 _미림극장은 1957년도 지금 이 위치에서 평화극장이라는 이름의 천막극장으로 시작됐습니다. 오랫동안 인천시민의 사랑을 받아오다가 2004년도에 폐관을 했고, 다시 문을 연 건 2013년입니다. 인천 구도심의 오래된 영화관의 모습을 다시금 살려내어 향수를 추억하는 동시에 청년세대에게도 고전영화의 감동과 즐거움을 전하기 위해 운영 중입니다. 송경원 _9년 동안 폐관되었다가 어떻게 다시 문을 열 수 있었나요. 최현준 _1999년도에 인천 지역 멀티플렉스가 생겼습니다. 신도시로 인구 이동이 많았죠. 자연스럽게 동인천역 주변 지역은 구도심이 되었는데 그렇게 극장을 비롯한 상권의 상황이 좋지 않았습니다. 2004년에 결국 미림도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문을 닫았고 10년 동안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재개발 이슈가 있었지만 당장 이뤄지는 건 아니라서 오히려 보존된 부분도 있었습니다. 그러다 원도심을 살려내자는 이야기가 나왔고 그 중 하나가 옛 영화관을 부활시키는 거였습니다. 인천시와 시민단체들이 힘을 모아 미림이 다시 문을 열었죠. 송경원 _하지만 그 뒤로도 상황이 순탄하지는 않았다고 들었습니다. 최현준 _맞습니다. 원래 인천시가 인프라 구축과 재정지원을 약속했는데 이행이 차일피일 미뤄지다 결국 포기해버렸습니다. 운영을 맡았던 사회적기업협의회는 한번 폐관됐던 극장을 다시 또 문닫게 할 수는 없다는 원칙을 세우고 방법을 모색했습니다. 그렇게 비영리 단체이 기업협의회의 주관 아래 다양한 후원과 관객들의 사랑으로 지금까지 운영을 이어나가고 있습니다. 송경원 _미림은 '아름다운 숲'이란 뜻인데 특별한 의미가 있을까요. 최현준 _이름의 근원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바 없습니다. 원래 평화극장이었다가 어느 날 미림으로 변경된 걸로 알고 있습니다. 부르기 쉽고 아름답고, 인근 수도국산이 있기도 하고 문화적인 쉼터라는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네요. 처음에는 시장통에 천막을 치고 시작했다가 점점 사람들이 모여 동인천 인근의 문화공간으로 유명해졌다고 들었습니다. 시장 번화가이기도 하고, 맞은 편에 달동네가 있었는데 사람들의 문화적 갈증을 채워주는 장소였던 셈이죠. 계단 벽, "미림, 아름다운 영화의 숲"이라는 슬로건이 보인다 송경원 _건물 형태가 독특합니다. 극장 바로 옆에 출입구를 열면 바깥으로 이어지는 구조입니다. 최현준 _미림극장에 오래 근무하신 직원분들에게 여기에 얽힌 에피소드를 자주 들었습니다. 간판 그림을 그리신 김기봉 선생님, 극장 입구를 지키셨던 양재영 선생님, 그리고 영사를 맡았던 조점용 선생님이 있습니다. 전성기였던 1970, 80년대에는 200석 남짓한 극장에 하루 2, 3천 명씩 몰려들어 영화를 봤다고 합니다. 70년대 중반 관객을 좀 더 수용하기 위해서 극장을 확장했는데, 천장이 높은 장점을 살려 2층에 발코니를 만들고 80석 규모를 늘렸습니다. 그렇게 사람이 많이 몰려도 사고 한 번 나지 않았던 걸 오래 근무하신 분들은 다들 자부심으로 여깁니다. 문을 열면 바로 바깥으로 나갈 수 있는 구조 덕분이기도 한 것 같아요. 들어오는 사람과 나가는 사람의 동선이 겹치지 않으니 사람이 깔릴 일이 없는 거죠. 한편으론 낭만적인 면도 있습니다. 2시간 남짓 영화의 세계에 푹 빠졌다가 오른쪽 출구 문을 여는 순간 현실의 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걸 보면 이곳이 영화관이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으셨다고 합니다. 미림극장을 추억할 때 제일 먼저 떠올리는 것도 이런 건물구조라는 분도 꽤 계십니다. 상영관 출구가 거리로 이어지는 독특한 구조로 되어 있다 송경원 _실버영화관 콘셉트의 추억극장 미림으로 재개관을 했습니다. 최현준 _문화 소외층인 노령층을 주요 대상으로 하는 영화관입니다만 거기에 국한되지 않고 가족 관객이 함께 찾는 지역 문화공간을 지향합니다. 2층에 시네토크를 할 수 있는 소공연장 미림살롱을 마련해 다양한 행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3층에는 역사를 기억할 수 있는 상설전시관인 미림역사관을 만들었습니다. 저는 재개관 2년 뒤인 2016년에 입사를 했는데 미림에 와서 제일 처음 한 일도 과거 자료들을 찾는 거였습니다. 1957년에 개관한 영화관이니 얼마나 많은 자료가 있을까 기대했지만 사실 남아있는 자료는 그렇게 많지 않았습니다. 다행히 정종화 선생님을 비롯한 여러 뜻있는 분에게 자료를 기증받았고, 공사를 하면서 발견한 작은 박스에서 예전 극장을 운영했던 장부 등의 기록 문서가 나오기도 했습니다. 그런 것들을 정리할 필요를 느끼고 3층을 역사관으로 꾸몄습니다. 지금도 조금씩 수소문하며 과거의 자료들을 모으는 중입니다. 아직 많은 자료를 복원하진 못했지만 미림을 방문해주신 인천 시민분들께 이곳이 어떤 곳인지, 우리가 어떤 역사와 얽혀서 지금까지 왔는지 알리고 싶습니다. 시네토크를 할 수 있는 2층 미림살롱의 무대 공간 송경원 _미림극장에는 어떻게 근무하게 된 건가요. 최현준 _인천 지역에 개인적인 연고는 없습니다. 문화재단 관련 일을 오래 하면서 자연스럽게 문화예술 분야의 사회적 기업들과 함께 일하는 경우가 많았고 그 과정에서 미림극장도 알게 되었습니다. 부천국제영화제가 첫 직장이었는데 그렇게 알게 된 영화에 대한 애정과 친숙함이 미림극장에서 일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송경원 _사회적 공익기업이 주체인 만큼 다양하고 특색 있는 프로그램이 눈에 띕니다. 최현준 _실버영화관이 시작이었던 만큼 인천광역치매센터와 함께 노령층을 위한 여러 프로그램을 운영 중입니다. 다만 지금은 거기에만 머물러서는 생존하기 힘든 상황이라 저변을 넓히기 위한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회적 기업의 정신에 맞게 취약 계층 고용률을 60% 이상으로 유지하고 있습니다. 물론 현실은 쉽지 않고, 피치 못한 사정으로 직원들이 떠나야 하는 상황도 있었습니다. 신기한 건 인천시와 같은 외부 지원이 끊어진 상태에서도 어려운 순간을 극복할 수 있는 다양한 도움의 손길이 있다는 점입니다. 2016년에 인천시의 지원이 중단됐을 때 2500여 명의 시민들이 서명을 하여 청원을 넣기도 했습니다. 그런 힘으로 오늘까지 왔다고 생각합니다. 상영관 입구, 다양한 시민들의 메시지가 붙어있는 벽면이 보인다 송경원 _실버영화관에서 출발하여 지역 기반의 문화공동체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최현준 _아직 갈 길이 멀고 과정 중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70대 이상 관객이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실버영화관이 노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차라리 추억을 어떻게 함께 하는가의 문제가 아닐까 합니다. 어르신들에게는 추억을 회상하는 공간으로, 젊은 관객들에게는 새로운 고전 걸작과 만날 수 있는 소통의 장이 되고자 합니다. 클래식의 가치는 변하지 않는다고 믿습니다. 필요한 건 그걸 어떻게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입니다. 1957년에 문을 연 미림극장은 세월의 힘이 쌓여 있습니다. 거기에 지금은 오래된 영화관 이상의 특별함을 드리기 위해 다양한 시도 중입니다. 어르신들은 물론 원도심 인근의 아이들에게는 이 극장이 유일한 문화공간입니다. 우리 동네 마을 극장이라고 할까요. 공동체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꾸준히 고민하면서 이 공간이 가능한 오래 지속되길 희망합니다. 인터뷰: 조점용 영사기사(인천 미림극장) 미림극장 조점용 영사기사 송경원 _미림극장에서 가장 오래 근무하신 분이라고 들었습니다. 조점용 _1964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1966년부터 미림극장에서 영사기사 일을 시작했습니다. 미림극장의 흥망성쇠를 함께 지켜보며 그때부터 지금까지 한시도 영사기를 손에서 놓지 않고 자식 셋을 키워냈습니다. 오래 했지만 뒤돌아보면 뚜렷하게 남긴 건 없네요. 그저 쉬지 않고 했습니다. 미림극장이 문을 닫았을 때도 말이죠. 매주 월요일에는 간석동에 있는 노인 종합문화회관, 화요일에는 중구청 지역의 문화원, 수요일에는 부천지역까지 가서 영화를 틀었습니다. 지금도 미림극장에서 불러주면 영사기를 만집니다. 송경원 _미림극장에 처음 오셨을 때 극장은 어떤 모습이었나요. 조점용 _내가 처음 왔을 때는 천막은 아니고 단층극장이었어요. 단층에 200석인데 손님은 미어터져서 건물을 새로 지었지요.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더 몰리고. 재밌는 외화가 한다고 소문나는 시기에는 매일 작게는 1천 명, 많게는 3천 명까지 와서 장사진을 쳤죠. 인근 지역에서 사람이 몰려드는 그야말로 화제의 중심에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 시절에는 내가 여기서 영화를 튼다는 것만으로도 자부심이 가득했습니다. 송경원 _개관 당시부터 꾸준히 인천 문화의 중심지였군요. 조점용 _맞습니다. 1960년대 후반에는 TV가 집집마다 있는 것도 아니고 영화관이 최고의 호사였으니까요. 당시 수도국산 산동네는 정말 못 사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빈민촌이었습니다. 그래서 희로애락을 주는 영화가 더욱 소중했죠. 인천 동구는 물론이고 서울에서도 이쪽으로 영화를 많이 보러 왔습니다. 왜냐면 서울에서는 개봉영화를 보려면 예매를 해야 하는데, 여기는 아무 때나 와서 자리만 있으면 들어갈 수 있는 곳이었으니까요. 당시 인천 지역의 극장 시스템은 그랬습니다. 지금은 문을 닫은 문화극장이나 오성극장, 그 위쪽의 인천시민회관 등 인천 지역 영화의 산실이 바로 동인천 동구 이 동네였거든요. 송경원 _동구 지역 영화관 중에서도 미림극장이 특별했던 점은 무엇인가요. 조점용 _사장님이 흥행할 영화를 잘 골라왔어요. 당시 영화수입업자들은 다 충무로에 있었는데 인기 있는 영화를 얼마나 가져오느냐에 따라 수입 차이가 꽤 컸습니다. 한국영화는 별로 인기가 없어서 억지로 틀고 그 대신 외국영화 틀 날짜를 받아오곤 했지요. 당시 사장인 고용성 씨가 미 8군사령부 수석 통역관이었던 사람이라 영어를 기가 막히게 잘했어요. 영어가 되니까 영화도 잘 고르는 거죠. 그래서 서울의 수입업자들이 고용성 사장을 찾아와서 어떤 영화를 수입할지 물어보는 일이 허다했습니다. 고용성 그 양반이 영화에 대한 식견도 높아서 당시에 해외영화 잡지 같은 것도 챙겨보고 그랬습니다. 영화가 미국에서 흥행했다고 한국에서 다 흥행하는 것도 아니거든요. 한국 정서에 맞는 작품을 잘 찾아야 되는데, 고용성 사장이 귀신같이 그런 걸 잘 골라냈습니다. 그런 자산을 가지고 영화를 빠르게 잘 배급해오기도 하고 그랬지요. 역사관에 전시되고 있는 80-90년대 상영되었던 영화 예고편 필름들 송경원 _40년 세월 영화를 틀어오셨지만 그 중에서도 좋은 기억을 가지고 있는 영화가 있을까요. 조점용 _글쎄, 워낙 많아서. <킬링 필드>(롤랑 조페 감독, 1984)라는 영화가 공무원들이 인사고과에 반영된다고 반드시 봐야 하는 영화라 단체관람객이 많이 왔던 게 생각납니다. 학생 단체관람도 많았고. 당시에 한국영화는 관객이 잘 안 드는데 스크린쿼터 때문에 억지로 틀기도 했어요. 그럴 땐 한국영화 간판만 걸어놓고 외화를 틀기도 했죠. 단속이 나와서 걸리다 보니까 나중에는 못하게 됐지만. 송경원 _2층 발코니 공간의 좌석이 특색이 있는 구조입니다. 조점용 _사람이 워낙 몰리니까 조금이라도 더 보여주려고 공사를 했죠. 당시엔 건축학과 교수들도 와서 이야기하곤 했어요. 여기가 인천에서 영화 보기 제일 좋은 곳이라고. 다들 좌석 한 자리라도 더 늘리려고 하지 이렇게 영화를 보기 좋게 설계한 곳이 없다고. 상단, 하단, 구석 어디에 앉든 스크린이 가려지는 곳이 없거든. 280석이 정원이지만 계단에 앉아서 보기도 하면서 최대한 많은 사람을 받았습니다. 돈도 돈이지만 어렵게 발걸음 했는데 많이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더 컸던 것 같아요. 손님이 하도 많으니까 여름에는 에어컨이 돌아가도 소용이 없어요. 사람들 열기랑 습기가 섞여가지고 유리창이나 렌즈만 닦는 아르바이트를 따로 고용해야 할 정도였으니까. 그래도 몇십 년을 운영하면서 이제껏 큰 사고 한번 안 났습니다. 신기하지 않습니까. 지금까지도 그게 자랑거리입니다. 그만큼 직원들이 사명감을 가지고 일했다는 거죠. 상영관 2층 발코니 형 좌석 송경원 _그러던 게 1990년대 말, 2000년 초가 되어 멀티플렉스가 등장하면서 침체에 빠졌습니다. 조점용 _서서히 사람이 없어진 게 아니라 어느 날 갑자기 관객이 한 번에 사라졌어요. 시대가 바뀐 거죠. 한 번에 14개 관에서 여러 영화를 상영하니 단관극장으로 사람들이 올 리가 있나. 매일 미어터지던 입구가 정말 거짓말처럼 한산해졌습니다. 송경원 _2004년 문을 닫는 마지막 날까지 근무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조점용 _지킬 수 있을 때까지 지켜본 겁니다. 손님들이 갑자기 사라졌을 때 허전한 마음이 말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이제 이 길이 내가 갈 길이 아닌가 보다 싶기도 하고. 그래도 어쩌겠어. 평생 해온 게 이 일이고 내 자리가 여긴데. 에어컨도 없이 여름이면 지옥 같은 영사실에서 그렇게 오래 해왔는데 이제 와서 뭘 다른 일을 하겠어요. 우리 집이 바로 여기서 몇십 미터 앞이거든. 여기서 일하려고 집을 아예 구해버렸지. 일하기 좋았던 시절도 있고 어려운 시절도 있고 그렇게 하루하루 살다 보니 오늘이 되었습니다. 지금은 극장이라는 공간이 많이 퇴색이 됐어요. 추억을 쌓고 잊히지 않는 공간으로 자꾸 발전되어야 하는데 그런 즐거움을 찾을 수 있는 곳이 많지 않아요. 미림극장이 다시 문을 연 건 반가운 일입니다. 요즘 같은 시대에 쉽진 않지만. 필자: 송경원(씨네21) 사진촬영: 손홍주 인터뷰 일자: 2022년 5월 20일
5월 31일 월요일 500미터쯤 걷고 카프성모병원에서 처음으로 멈추었다. 거기서부터 서쪽으로 꺾어 걸어갈 생각이었다. 카카오맵으로 아람누리도서관 방향을 헤아렸다. 이제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알겠다. 오전에 영상자료원 담당자에게 메일이 왔다. 바쁘신 와중에 혹여 (이미 한 번 미룬) 마감일을 잊으셨을까 하여 리마인드 드린다는 내용이었다. 그럴 수 없다, 지금은 안 된다, 이 시점에 한국 영화계가 이런 글을 읽어서는 안 되며 우리는 이 마감을 허락해서는 안 된다, 라고 나는 중얼거렸다. 노트북과 기계식 키보드, 그 외에 필요한 책들을 백팩에 챙겼다. 슬리퍼는 새것이고 푹신해서 충분히 믿을 만했다. 걸어서 가면 어리석은 초고를 돌이킬 수 있는 아이디어가 떠오를 거라는 확신을 품고, 나는 아람누리도서관으로 향하는 최단 거리의 도로를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온전히 혼자이기를 원했다.* 어제까지 내가 쓴 초고는 왜 우리의 비디오 에세이가 박무석이 곽철용 앞에서 ‘불나비’를 부르는 < 타짜 >의 장면에서 시작해야 하는지에 대한 나름의 대답이었다. 금정연(V.O.) : 저는 늘 최동훈을 한국의 셰익스피어라고 생각해왔어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 배역 대신 배우의 이름을 말하는 게 훨씬 자연스러운 다른 많은 영화들과 달리 고니나 아귀 같은 이름은 제게 이아고나 오셀로처럼 대체할 수 없는 고유명으로 느껴집니다. 둘. 영국인들이 셰익스피어를 즐겨 인용하듯 한국인들은 <타짜>를 인용할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습니다, 적어도 저는… 하지만 그와 별개로 나는 <타짜>가 21세기 한국 영화 산업에 대한 은유, 나아가 일종의 선언이라고 생각한다. 흥행=도박이라는 오래된 비유. 두 개의 충무로가 있다. 올드 충무로와 새로운 충무로. 올드 충무로는 충무로에 있다. 새로운 충무로는 강남에 있다. 그런데 왜 충무로지… 최동훈의 영화에서 올드 충무로를 대표하는 건 곽철용이다. 그는 올드 충무로의 큰손으로 박무석 같은 감독들을 고용해서 영화를 찍어내는 제작자다. 새로운 충무로를 대표하는 건 물론 고니다. 그는 신진 제작자 정마담, 동료 감독 겸 시나리오 작가 고광렬과 손잡고 올드 충무로의 아성에 도전한다. 아귀나 짝귀 같은 타짜들이 올드 충무로를 대표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물론 그들은 올드 충무로의 대표적인 감독들이다. 다만 지나치게 성공한(성공했던) 아웃라이어일 뿐, 제작자 중심의 시스템 속의 플레이어들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고니를 가르친 평경장 역시 타짜지만, 다른 타짜들과 달리 시스템에 한 발만 걸친 일종의 독립영화감독이라고 할까, 상대적으로 인지도는 떨어지는 편이다. 결국 <타짜>의 심층 서사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고니가 박무석이 만드는 독립영화에 우연히 제작부로 참여하며 영화라는 도박판에 발을 들이고, 독립영화계의 거장인 평경장 밑에서 본격적인 연출을 배우며, 신진 제작자 정마담과 의기투합해 메이저 영화판에 새로운 바람을 몰고 오지만, 정마담 또한 기존의 제작자들과 다를 게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손절-홀로서기 하는 이야기, 다시 말해 충무로가 제작자 주도의 영화판에서 감독 주도의 영화판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그리는 영화, 혹은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스스로 ‘선언하는’ 영화다… 금정연: 박무석이 노래하는 장면의 메시지는 분명해요. 그는 자기 자신이나 관객이 아닌 사장의 눈치를 봐야 하는 월급 감독입니다. 따라서 박무석은 곽철용에게 망한 흥행은 뒤로 하고, 두 번째 기회를 허락해주기를 구걸하고 있는 거죠. 노래를 통해서. 하지만 단순히 그것만은 아닌 것이, 그가 부르는 노래 가사를 들어보세요. "얼마나 사무치는 그리움이냐~ 밤마다 불을 찾아 헤매는 사연~" 이는 그가 마음 속에 아직 도박/영화에 대한 열정을 지니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무엇보다 그가 노래를 부르는 게 정확히 영화의 중간, 정확히 중간점이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어요. 영화의 구조에서 주인공의 결심이나 변화, 커다란 고난이나 가짜 희망 같은 중요한 사건에 할애되어야 할 중간점을 박무석에게 주고 노래를 부르게 한다? 이는 박무석 또한 고니와 같은 꿈을 꾸던 감독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며, 박무석이 고니와 손잡고 곽철용의 뒤통수를 칠 거라는 복선이잖아요. 더불어 이렇게 말해도 좋다면, 안 좋으셔도 어쩔 순 없지만, 최동훈이 선배 감독들에게 보내는 일종의 윙크라고 할 수도 있겠죠. 그리고 이제 최동훈은 감독인 동시에 스스로 거대한 기업이 되었습니다. 저는 그런 최동훈의 윙크를 전유하고 싶은 겁니다. 정지돈: …… 금정연: 지돈 씨, 평경장의 죽음을 생각하세요! 정마담의 제작부장인 빨치산에게 하필 ‘오른팔’을 잘려 ‘기차’에서 떨어져서 죽음에 이르렀다는 게 과연 우연일까요? 정지돈: (대체 무슨 말인지?????) 머릿속으로 정지돈과 대화를 나누며 나는 계속 걸었다. 숏/리버스 숏. 그런데 그걸 대화라고 할 수 있나. 아까부터 정지돈은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는데… 모르겠다. 이참에 나는 그를 JD로 부르기로 한다. 불만 있으면 말을 하겠지… 문득 장 루이 뢰트라가 [영화의 환상성]에서 소개한 일화가 떠오른다. 앙토냉 아르토의 장례식에서 알랭 게르브랑은 퍽 기이한 일을 겪는다, 아르토의 시신을 실은 영구차가 게르브랑의 앞을 막 스쳐 지나가는 순간이었다, 영구차의 운전사가 고개를 돌려 게르브랑을 바라보았고, 그 순간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는데, 그때 운전사의 얼굴이 다름 아닌 죽은 아르토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걸 마주침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우리의 대화도 대화가 아닐 리 없다. 그리고 나는 대화를 멈추지 않을 생각이다. 적어도 우리가 도서관에 도착할 때까지는. 공원 벤치에 앉아 잠시 쉬고 있는데 어디선가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백일 정도 지났을까, 아직 아기 티를 벗지 못한 작은 고양이 한 마리가 풀숲에 앉아 울고 있었다. 뭐라도 주고 싶었지만 가진 게 없었다. 르네 도말은 아내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에서 주려고 하면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는 걸 알게 된다고 썼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는 걸 알게 되면 손에 무언가 넣으려고 한다, 손에 무언가 넣으려고 하면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알게 되면 무언가가 되려고 욕망한다, 무언가가 되려고 욕망하면 그때부터 우리는 살게 된다. 오늘은 5월의 마지막 날이고, 생일을 맞은 영화인들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콜린 파렐, 그리고 JD. 나는 여전히 피곤한 얼굴의 JD를 위해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른다. 생일 축하해요, JD. 6월 1일 화요일 영화 보기를 미루는 건 영화 만들기를 미루는 것과 같다. 마찬가지로, 책 읽기를 미루는 건 책 쓰기를 미루는 것이다. 예전에는 읽기=쓰기가 싫어질 때면 영화를 봤다. 그때 내가 보던 것은 농담으로라도 훌륭하다거나 예술적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 영화들이었다. < 나이스 가이즈 > < 털기 아니면 죽기: 제한시간 30분 > < 위험한 패밀리 > < 홀패스 > < 쥬랜더 리턴즈 > < 베일리 어게인 > <비트윈 투 펀스: 투어 스페셜> <미스터 롱> < 22 점프스트리트 > <기동순찰대> < 젠틀맨 > 등등… 도대체 왜 그런 영화를 보면서 인생의 시간을 낭비하는 거죠? 모르겠다…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입을 모아 좋다고 말하는 영화는 안 보고 쓸데없는 영화만 보는 마음에는 약간 판도라의 상자 비슷한 구석이 있는 것 같다. 1)호기심에 이끌려 영화라는 상자를 엶 2)형편없는 영화들의 면면에 화들짝 놀라 상자를 닫음 3)상자 속 깊은 곳에는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좋은 영화들이 남아 있음 4)세상엔 내가 아직 보지 못한 좋은 영화들이 무척 많다는 사실을 생각하며 거친 현실을 묵묵히 살아갈 용기를 얻음… 영화를 만들기로 한 다음부터 모든 종류의 영화를 보기가 싫어졌다. 아니, 싫어졌다는 말은 정확하지 않다. 로베르토 볼라뇨의 표현을 빌리면 그리스 선박왕과 그 아내의 관계, 다시 말해 아내를 사랑하는 유부남이지만 아내를 최대한 안 보려는 관계 같다고 할까. 그때 JD가 오만상을 찌푸리는 게 보였다. 그는 소리 없이 입모양만으로 무언가를 말했는데, 아마 ‘꼰대’라고 하는 것 같았다. 확신할 순 없다. 코로나 이후로 많은 것들이 종종 흐릿하게 보인다. 심지어 내 머릿속에 있는 것들도… 나는 예전에도 볼라뇨의 저 말을 인용한 적이 있다. 차이가 있다면 그때는 유부남이 아니었지만 지금은 유부남이라는 것. 유부남이 하는 유부남 농담만큼 소름 끼치는 것도 없다. 군필자가 하는 군대 이야기를 제외하면… 어젯밤에는 아내와 함께 영화 VOD 몇 편을 구매했다. 이사하며 IPTV를 바꾸고 사은품으로 받은 5만원 쿠폰의 사용기한이 어제까지였던 것이다. 우리는 일종의 의무감을 가지고 영화를 지독히도 증오하는 사람이 만든 게 분명한 IPTV의 영화 메뉴를 탐색한 끝에 7편의 영화를 선정했다. < 포드 V 페라리 > < 더 파더 > < 스파이의 아내 > < 노매드 랜드 > < 테넷 > < 소울 > < 자산어보 >. 대여 아닌 영구소장으로. 남은 500원은 가볍게 포기하기로 했다. 나도 아내도 딱히 그 영화들을 보고 또 보고 싶은 건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였다. 영구소장의 매력은 지금 당장 보지 않아도 된다는 것, 그러니까 일석이조인 셈이다. 쿠폰도 쓰고 영화도 안 보고, 원한다면 영원히 보지 않을 수도 있고… 최근 내가 가장 사고 싶은 책은 크리스티안 키슬리와 제이슨 미텔과 캐더린 그랜트가 함께 쓴 [비디오 에세이 만들기The Videographic Essay]다. 출판사는 이모션북스. [The Films of Bong Joon Ho](Rutgers University Press, 2020)를 쓴 Nam Lee의 트위터에서 표지 사진과 함께 올라온 출간 소식을 본 게 5월 26일이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아직까지 어느 서점에도 DB가 등록되지 않았다. 하루에도 몇 번씩 인터넷 서점에서 제목을 검색했다. 그러면서 당장 책을 사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간절함도 더해졌다. 이걸 뭐라고 설명하면 좋을까? 1985년 제니 홀저는 뉴욕 타임스퀘어의 전광판에 이렇게 썼다. 내가 원하는 것으로부터 나를 보호해줘(Protect me from what I want). 그럼 나는 내가 읽고 싶은 것으로부터 나를 보호하기 위해 책을 사려는 걸까(Protect me from what I want to read by buying them)? 그와 함께 기껏 책을 만들어놓고 팔지는 않는 출판사에 대한 의구심도 생겼다. 어쩌면 이건 일종의 복수 같은 게 아닐까? 영화도 출판도 모르는 세상에 대한? 밑도 끝도 없지만 그런 생각까지 들었다. 이모션북스의 대표는 임재철이다. 이사 온 집은 1층, 우리집 베란다 앞 작은 풀밭에 자리를 잡고 아직 눈곱도 제대로 떨어지지 않은 새끼 세 마리를 키우는 고양이 가족에게 사료와 물을 챙겨주고 집을 나왔다. 작업실에 도착하니 택배 상자가 쌓여 있었다. 일을 할 수 없는 주말에 인터넷 서점을 신경질적으로 뒤지며 헌책 새책 가리지 않고 산 책들이었다. [르 코르뷔지에 - 자연, 기하학 그리고 인간] [보이는 기호학 제3판] [영화음악의 실제] [그림편지] [나의 할아버지 피카소] [알기 쉬운 현대미술의 개념풀이] [얼트 문화와 록음악 1] [파운드 푸티지] [소외과 가속] [밀수 이야기] [젊음의 코드, 록] [영화 같은 시간] [매체로서의 영화] [영상 미디어와 보도] [하이퍼건축] [영화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소프트웨어가 명령한다] [영화 음악의 이해] [예술가로 살아남기] [나의 사랑 씨네마] [할리우드의 영화산업] [데뷔의 순간] [이렇게 살아가도 괜찮은가] [죄수 운동법] 등등. 모두 읽지 않아도 되는 책들이다. 책의 단점은 VOD와 달리 눈에 보인다는 것이다. 몇 주 전에는 읽지도 않을 책을 쌓아두기만 하는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 도서관에서 [너는 너의 삶을 바꿔야 한다]라는 책을 대출했는데, 아무것도 바뀌진 않고 연체만 되었다. 정작 책은 읽지도 못했어. 6월 2일 수요일 2016년 가을 나는 지금은 사라진 문지문화원 사이에서 열린 임재철의 6강짜리 강의 ‘스탠리 카벨의 세계’를 들었다. 어느 날의 강의에서 임재철은 이렇게 말했다. 도서관이 없다고 상상해야 한다. 자기 집 책장에 있는 책들을 가지고 해결해야만 한다. 그렇게 생각하고 일을 할 필요가 있다. 고민하고 준비하고 모으고 계속해서 부족한 부분을 찾으며 시간을 보내다 보면 끝이 없다. 목숨을 건 도약이 필요하다(비평가들이 이 말을 할 때마다 500원씩 받았다면 나는…). 그는 또 예전에는 외국영화를 볼 수 있는 방법이 없어서 책이나 잡지에 소개된 짧은 글만 보고 영화를 상상해야 했는데 나중에 영화를 보면 십중팔구는 자기가 상상했던 영화가 훨씬 더 재밌었다는 말도 했다.* 그날 임재철과 함께 택시를 타고 돌아오며 나는 충무로 아저씨들과 함께 시나리오를 썼는데 끔찍한 경험이었다고, 내가 요즘 하고 싶은 일은 비디오 에세이를 만드는 건데 잘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하지만 유튜브는 곧 시작할 거라는 등의 말을 두서없이 늘어놓았다. 택시가 밤의 도시를 빠르게 달리고 있었다. 불빛들. 그림자들. 사라지는 시간들. 차창에 비친 임재철의 얼굴이 유령처럼 창백하게 보였다. 그는 내게 언제 유튜브를 시작할 거냐고 물었고, 나는 2023년이라고 대답했다. 그때는 그게 좋은 대답처럼 느껴졌는데. 모르겠다. 그날 이후 나는 많은 것을 잊고 복사꽃을 좋아했던 것만 기억하기로 했다. 오늘도 [비디오 에세이 만들기]는 등록되지 않았고, 나는 머릿속에서 나의 [비디오 에세이 만들기]를 빠르게 훑어본다. 그리고 JD에게 말한다. 금정연: 그러니까 일종의 '제텔카스텐' 같은 거예요. 인덱스카드와 펜, 그리고 상자만 있으면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거죠. 자, 인덱스카드의 한쪽 면에 영화 정보를 적어요. 제목, 감독, 배우, 몇 분 몇 초에 나오는 씬이다 같은 걸. 그리고 뒷면에는 해당 씬에 대한 짤막한 메모를 남기는 거죠. 그런 다음 이걸 레퍼런스 박스에 넣어두는 거예요. 그리고 얼마가 지난 다음, 상자를 열어 짤막한 메모를 들여다보면서 생각을 정리해요. 그리고 새로운 상자를 열고 빈 인덱스카드에 방금 레퍼런스 박스의 메모를 보며 떠오른 아이디어, 이런저런 생각들을 적어서 넣는 거죠. 여기서 중요한 건 하나의 카드에 하나의 생각만 적는 거예요. 물론 각각의 카드의 한 면엔 레퍼런스가 되는 영화의 씬 정보를 적고요. 그리고 거기에 적절한 흐름대로 번호를 매겨서 새로운 상자(영화 메이킹 박스라고 할게요)에 보관해요. 추가할 카드가 생기면 역시 적절한 위치에, 이를테면 97과 98사이에 넣어야겠다면 97-A라는 식으로 번호를 매겨서, 끼워넣고요. 시간을 들여 같은 일을 반복하다 보면 어느 날 상자가 꽉 차게 되고, 그안에서 자기들끼리 상호작용하며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거죠. 그러다 적당한 시간이 지난 어느날 상자를 열고 인덱스카드를 꺼내서 차례대로 늘어놓으면 짜잔, 한 편의 비디오 에세이가 완성되었습니다! JD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쯧쯧, 혀를 차는 것도 같았다. 나는 조금 억울한 기분이 되었다. [제텔카스텐 – 글 쓰는 인간을 위한 두 번째 뇌]는 [죄수운동법]과 함께 다름 아닌 JD가 내게 권해준 책이었기 때문이다. 정연 씨, 새로운 육체에 새로운 정신이 필요하지 않으세요? 책을 추천하며 정지돈이 말했다. 그 책들의 제목을 들으니 문득 조정래가 떠오르네요. 그러자 정지돈이 반문했다. 조정래…요?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무언가를 말한다는 투였다. 예전에 등단 40주년을 맞아 [황홀한 글감옥]이라는 제목의 자전적 에세이를 냈거든요. 저도 모르게 황홀한 글감옥에서 죄수운동법으로 운동을 하면서 제텔카스텐으로 글을 쓰는 이미지가 떠올라 버렸네요. 네… 정지돈이 한숨을 내쉬듯 대답하더니 덧붙엿다. 조정래랑 정연 씨랑 두 분이 비슷한 연배신 거죠? 6월 3일 목요일 나는 날씨에 따라 사는 것 같다. 업과 다운을 반복하면서. 맑은 날에는 그늘 찾고 흐린 날이면 짜증난다. 비가 내리는 동안에는 거의 죽어 있다.* 우리는 메세나폴리스에서 만났다. 정지돈과 나 그리고 ㅍ출판사의 편집자 s. 만남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지 않다. 나는 비가 와서 반쯤 죽어 있었고, 정지돈은 마감에 치여 반쯤 죽어 있었다는 것 말고는. s와 헤어지고 정지돈과 둘이 남아 밥을 먹으러 갔다. 우리는 닭콩국수를 먹으며 글쓰기와 인간됨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글을 쓰는 일은 쓰는 사람을 강퍅하게 만들고 주변을 짜증나게 만든다, 물론 우리가 글을 안 쓴다고 더 좋은 사람이 될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당장의 작은 마감들이나 이런저런 쪽글들을 줄일 필요는 있다, 그렇게 남는 시간과 체력을 큰 기획이나 한 권의 책에 집중해야 한다, 그런데 쪽글을 안 쓰고 큰 기획이나 한 권의 책에 집중하려면 먼저 큰 기획이나 한 권의 책이 상업적으로 터져줘야 한다, 그러려면 우선 쪽글을 안 쓰고 큰 기획이나 한 권의 책에 집중해야 한다, 그런데… -예전에는 글을 쓸 때 이 생각에서 저 생각으로 건너뛰거나 비약하거나 반복하거나 스스로의 말을 취소하고 모순된 말을 하는 게 두렵지 않았는데 요즘에는 자꾸 이래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움츠러들게 돼요. 책임지지 못할 말을 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정연 씨, 정연 씨가 올해 몇 살이에요? -서른아홉이요, 만으로… -하, 우리 아빠보다 나이 많아! 나는 깜짝 놀라 정지돈을 쳐다봤다.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온한 표정으로 먼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약이라는 감각은 인식의 너비와 관련되어 있어요. 반복이나 모순도 마찬가지죠. 만약 지적인 거인이 있다면 우리의 어떤 말도 비약이라거나 모순이라고는 느끼지 않을 겁니다. -문제는 제가 지적인 거인이 아니라는 사실 아닐까요. 뱁새가 황새 쫓아가면 가랑이가 찢어진다는 말 모르세요? 정지돈이 나를 보고 희미하게 웃었다. -그래도 뭐라도 찢었네요… 그날 저녁 작업실로 돌아온 나는 < 고양이를 부탁해 >를 봤다. 얼마 전에 올해로 개봉 20주년을 맞았다는 소식을 SNS를 통해 들었다. 시간 참 빠르다는 생각을 하면서 볼 수 있는 곳을 검색했는데 온라인에는 서비스하는 곳이 없었다. 어째서? 나는 이해할 수 없었고,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작업실을 뒤지다 먼지 쌓인 디비디를 발굴한 것이다. 오프닝. 인천의 만석 부두에서 교복을 입고 깔깔 웃으며 함께 사진을 찍는 다섯 명의 친구들. 이제는 일종의 유사 아날로그적인 감성마저 느끼게 하는 지글지글한 저화질의 디비디를 통해 그 장면들을 보는 순간 과거의 기억들이 스물스물 피어올랐다. 20년 전에 내가 이 영화를 보며 무슨 생각을 했더라? 모르긴 해도 엄청나게 공감하거나 몰입하면서 봤던 것 같지는 않다. 내 이야기라기보다는 여자친구들의 이야기, 서울 아닌 인천의 이야기라고 생각했겠지.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의 나는 순전히 내가 있는 우물을 통해서만 세상을 보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래도 재미있게 봤고, 디비디로도 몇 번 더 봤을 것이며, 특히 모임 별이 작업한 사운드트랙 씨디는 닳도록 들었다. 하지만 중반을 향해가면서 영화는 내게 점점 낯설어졌고, 후반부에 접어들면서부터는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새로운 영화처럼 느껴졌다. 예전에는 그냥 흔들리는 청춘?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나와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되는 친구들의 이야기? 라고만 생각했는데 다시 보니 계급과 주거에 관한 이야기였고, 그것도 노골적인 계급과 주거에 관한 이야기였어. 특히 지영의 집이 무너지고 경찰의 강압적인 태도에 아무 말도 하지 않기를 선택하며 감옥에 들어가는 부분은 지금-여기의 상황에서도 곱씹어 볼 부분이 많을 것 같았다. 내가 곱씹어 보기에는 너무 큰 조각처럼 느껴지기는 하지만… 집 앞 고양이 가족들에게 써보고 싶었지만 한 번도 쓰지 못했던 고양이 번역기 어플로 조부모의 장례식장에서 상복을 입은 지영의 품에 안겨 야옹야옹 우는 고양이의 말을 번역해보았다. 고양이: 기분이 좋지 않아요. 고양이: 엄마 아빠는 어디 있어요? 밤. 아내와 와인 마시며 TV 보다가 예전에 사놓았지만 당연히 읽지 않은 [씨네21]을 충동적으로 펼쳐들었다. ‘영화를 향한 질문들’이라는 기획으로 유운성과 김소영과 정성일의 글들이 두 호에 걸쳐 실려 있었다. 그중 김소영의 '영화의 피는 응고하지 않아 - <기생충>을 중심으로 쓴 영화의 (신)물질론'을 읽다가 번쩍! 하나의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액체 근대 사회에서는 “사회 같은 것은 없다”라는 마거릿 대처의 악명 높은 구호가 자기실현적 예언이 된다. 기정의 발언, “그 누구도 돌보지 마”가 번개 천둥을 불러왔다면”이라는 구절을 읽는데, 머릿속에 순간 번개 천둥이 쳤다. 움찔하며 놀라는 JD를 뒤로하고, 나는 급히 노트북을 열어 정지돈에게 메일을 쓰기 시작한다. 금정연(V.O.): 저 역시 가끔은 깜짝 놀랄 만한 아이디어가 떠오르고 연결되는 걸 느낍니다. 그것들은 순간이지만 놀라운 형태의 연결성을 보여줍니다. 아니면 단지 제가 취했거나요. 그러나 의식은 그 자체로 소통할 수 없습니다. 연결은 내용에서 일어나지 않으며 내용을 설명하는 것은 핵심을 빼놓는 행위입니다. 텍스트가 매순간 스스로 재현하도록 해야 합니다. 하지만 어떻게?* 오늘 지돈 씨를 만나고 돌아온 후 제 머릿속에서는 21세기 첫 20년의 한국 영화사가 새롭게 쓰여졌습니다. 결론부터 말할게요. 지돈 씨, 박무석과 '불나비'는 잊으세요. 우리의 비디오 에세이는 <고양이를 부탁해>에서 시작해 <기생충>에서 끝날 것입니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지만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그렇다면, 나중의 나중은 어떨까요? 이것은 계급과 거주과 그것을 대하는 우리의 인식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집이 없이 떠돌아다니는 길고양이를 자기보다 조금 형편이 나은 친구에게 '부탁'하는 것과 모략으로 다른 사람들을 자리를 차지한 후 "그 누구도 돌보지 마"라고 말하는 것 사이의 거리에 대한 이야기, 김소영이 말하는 <기생충>의 큰 비=도시의 유동성=액체근대와 고양이의 액체성=청춘의 유동성의 이미지를 대비시키는 이야기, 동시에 그것은 어느 소설가가 일간지의 지면을 통해 “나는 속으로 ‘공각기동대’ 실사 영화를 다시 찍는다면 세트를 만들 필요 없이 그냥 여기서 촬영하면 될 거 같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우리 부부는 사이버펑크 전사가 아니므로 그 단지에 살면 틀림없이 불행해질 거라고 느꼈다”*라는 문장을 아무런 수치도 느끼지 않는 것처럼 쓸 수 있는 사회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저는 이것이 크리스티앙 메츠가 말한 시네마의 실행, 적어도 실행의 한 시도가 될 수 있다고 느낍니다. 여기, 두 영화에서 생각나는 장면을 급히 쓴 인덱스카드를 스캔한 이미지 파일을 동봉합니다. 지돈 씨의 의견이 궁금합니다. 두서없는 메일 죄송합니다. 저는 지금 무척 살고 싶습니다. 당신의 K정연 나는 발송 버튼을 누르고, 그리고 기다린다. 정지돈의 답장을 [비디오 에세이 만들기]가 출간되기를 충동구매한 존 그레이의 [고양이 철학]이 배송되기를 밝은 미래를 아마겟돈을 핵폭탄을 나는 늘 기다린다 come, come, come, nuclear bomb…* *참고자료 [얼음 속을 걷다](베르너 헤어초크, 안상원 옮김, 밤의책, 2021) (*첫 문단 전체는 위 책의 서문과 1974년 11월 23일 일기의 일부를 변형한 것이다) [영화의 환상성](장 루이 뢰트라, 김경온 긴김, 동문선, 2002) (*알랭 게르브랑의 일화를 19쪽에서 인용했다) [마운트 아날로그](르네 도말, 오종은 긴김, 이모션북스, 2014) [참을 수 없는 가우초](로베르토 볼라뇨, 이경민 옮김, 열린책들, 2013) [담배와 영화](금정연, 시간의흐름, 2020) (*임재철에 관한 일화를 149쪽에서 인용했다) [제텔카스텐-글 쓰는 인간을 위한 두 번째 뇌](숀케 아렌스, 김수진 긴김, 인간희극, 2021) [I Seem to Live: the New York Diaries, 1950-1969: Volume 1](Jonas Mekas, Spector Books, 2020) (*1950년 1월 1일 일기의 일부를 변형했다) '영화의 피는 응고하지 않아' (김소영, [씨네21] 1301호) [모든 것은 영원했다](정지돈, 문학과지성사, 2020) (*159쪽에서 연결과 재현에 관한 부분을 인용하며 인용자가 일부 변형했다) ‘지금 무엇이 끝나고 있는 걸까’ (장강명, https://news.joins.com/article/24077719) Morrissey, 'Everyday Is Like Sunday' (관련글) 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 , 금정연, 2021.03.19. 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 , 정지돈, 2021.05.07. 3.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3) , 금정연, 2021.06.11. 4.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4) , 정지돈, 2021.07.03. 5.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5), 금정연, 2021.08.06. 6.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6), 정지돈, 2021.08.31. 7.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7) , 금정연, 2021.10.08. 8.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8) , 정지돈, 2021.11.05. 9.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9) , 금정연, 2021.12.03. 10.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0) , 정지돈, 2021.12.31. 1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1) , 금정연, 2022.03.02. 1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2) , 정지돈, 2022.03.30. 13.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3) , 금정연, 2022.05.11. 14.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4) , 정지돈, 2022.06.10. 15.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5) , 금정연, 2022.07.08. 16.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6) , 정지돈, 2022.08.03. 17.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7) , 금정연, 2022.08.31. 18.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8) , 정지돈, 2022.10.14. 19.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9) , 금정연, 2022.11.11. 20.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0) , 금정연, 2022.12.07. 2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1) , 정지돈, 2022.12.15. 2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2) , 정지돈, 2022.12.30.
“나는 본디 활동사진을 좋아하는 터에 단성사 신파 활동사진을 요새 가 보니까 참 조선에 처음 되는 것으로 어찌 마음에 상쾌하고 좋은지 모르겠어요.” -애활가(愛活家), 《매일신보》 1919년 10월 31일자 4면. 1919년 10월 《매일신보》의 독자 한 사람이 단성사에서 공개된 조선 최초의 연쇄극 <의리적 구토>(김도산, 1919)를 관람한 후, 연쇄극에 삽입된 활동사진에 대한 감격을 신문에 투고했다. 그는 자신을 “애활가(愛活家)”라고 소개했다. 애활가란 ‘활동사진 애호가’를 가리키는 말로, 종로와 본정(本町)을 중심으로 극장이 들어서고 그 사이를 누비고 다니는 구경꾼이 늘어난 1910년대 중후반부터 신문지상에 심심치 않게 등장한 용어다. 《매일신보》에 투고한 이 애활가는 연극과 영화가 결합한 연쇄극 <의리적 구토>에서 전성기를 지나 저물어가는 신파극의 긴 그림자보다 조선 사람들도 활동사진을 제작할 수 있다는 여명(黎明)을 보았다. 같은 해 12월 어느 날, ‘예술잡지’ 『녹성(綠星)』(편집 겸 발행인 이일해)이 발간되었다. ‘경성 죽첨정 1정목 39’에 발매소를 둔 『녹성』은 원래 문예지로 기획되었지만, 사정상 첫 호는 영화 분야의 재료만 다루었다. 근대 초기의 불안정한 출판 환경 속에서 나온 잡지들이 그렇듯 『녹성』도 창간호가 곧 종간호가 되는 불운에 처했고, 그러다 보니 『녹성』 창간호는 본의 아니게 ‘애활가’에 의한, ‘애활가’를 위한, ‘애활가’의 잡지가 되었다. 환하게 이를 드러내고 웃는 여배우를 표지 모델로 내세우고, 제럴딘 파라(Geraldine Farrar), 그레이스 커나드(Grace Cunard), 몰리 말론(Molly Malone)과 에디 폴로(Eddie Polo) 등의 권두 화보를 넣어 만들었지만, 본문 중에는 화보가 거의 없어서, 구경하기 좋아하는 애활가들의 욕구를 만족스럽게 채워주지는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조선 애활가들을 실컷 울렸던 블루버드 영화사(Blue Bird Photoplay Inc.)의 신파영화 해설부터 “아무리 큰 우수(憂愁)를 안고 있는 우려객(憂慮客), 아무리 사경에 빠진 병자라도 그의 동작에는 큰 소리로 웃지 아니치 못”하는 중절모의 ‘잡후린(雜侯麟, Charlie Chaplin)’ 선생까지 모두 이 한 권의 책 속에 모았다는 것만으로도 상당히 획기적인 일이었으리라. 대중문화를 소비할 수 있는 물적 기반으로서 극장의 출현이 중요했듯이 그 공간을 향유할 수 있는 관객 집단의 등장 역시 주목할 장면이다. ‘애활가’라고 밝힌 이가 자신의 감상평을 직접 신문에 투고하고 애활가 집단을 겨냥한 잡지가 출간되는 등 1910년대 말과 1920년대 초 서울의 분위기는 소박하나마 적극적인 관객층이 형성되고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애활가들은 문명국가에서 온 박래품의 신기함 때문에만 극장을 찾은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활동사진 그 자체에 매료된 이들이었고, 그러한 스스로를 특별히 ‘애활가’라 칭함으로써 다른 관객과 자신을 구분 지으려는 사람들이었다. 일본어를 읽고 이해할 수 있는 이라면 『활동사진계(活動寫眞界)』, 『활동화보(活動畵報)』, 『영화세계(映画世界)』와 같은 일본 영화잡지를 보고, 메리 픽포드(Mary Pickford)나 더글라스 페어뱅크스(Douglas Fairgbanks) 등 외국 배우들의 이름을 곧잘 입에 주어 담으면서 은근히 뽐낼 줄도 알았다. 영화를 보고 비평하며 그 자신의 고급한 취향을 과시하는 애활가. 이런 애활가가 된다는 것은 근대의 라이프 스타일을 체화하는 일이기도 했다. 1920, 30년대의 잡지에는 애활가가 되려면 그에 앞서 극장에서 지켜야할 예법(禮法)을 몸에 익숙하게 하는 것이 중요한 것마냥 「고급영화팬 되는 비결 십칙(十則)」 1 이나 ‘극장 예법’을 다루는 ‘모던 생활 강좌’ 2 같은 글이 잡지에 실리곤 했다. 조선의 현실과는 거리가 있어 보이는 과잉의 형식을 설명하고 있는 예법 강의는 그런 매너가 몸에 배어야 ‘고급(high and noble)’한 모던 라이프를 진정 향유할 수 있다는 식의 뉘앙스를 풍겼다. 극장을 찾는 자신을 특별히 과시하고 싶은 사람들을 우스꽝스럽게 만드는 글이지만, 애활가가 되고 싶은 이들의 귀는 이런 글에도 제법 솔깃했을 듯하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애활가의 일은 먼저 신문광고에서 볼 만한 영화를 선택하는 것부터 시작된다. 애활가는 그 영화의 감독과 주연배우, 스틸 컷 등에 대한 정보를 충분히 숙지하고 극장을 찾아야 하며, 극장에서 받아보는 프로그램 순서지의 도움 없이도 영화의 플롯이나 주제를 이해할 수 있는 식견을 갖추어야 한다. 영사가 시작되었는데도 불빛을 훔쳐 프로그램을 읽으려 애쓰는 사람은 ‘영화팬’의 기본 자격을 상실한 것이다. 평소에 신문이나 잡지에 실리는 영화비평을 정독해 두는 것이 중요하다. 무릇 애활가라면, 이미 본 영화를 또 보더라도 옆 사람에게 영화의 줄거리를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 예의이며 프로그램 진행 중에 소리 내어 말하지 않는 것이 상식이다. 간혹 박수를 칠 만한 장면에서도 너무 흥분하지 말 것이며, 다른 사람들의 박수 소리가 그치기 전에 박수를 끝내는 것이 좋다. 프로그램 중간 ‘10분 휴식’ 시간에는 극장의 전속 악단이 음악을 연주해 주는데, 이때는 휴식 시간이므로 연주가 끝났다고 해서 손뼉을 치거나 해서는 안 된다. ‘주악’에 너무 귀를 기울이거나 “헐하게 감격”하지 않는 것이 요점이다. 극장의 스크린 옆에는 유리등을 끼워놓고 호출할 사람의 이름을 적어 신호하는 통고등(通告燈)이 있는데, 여기에 이름이 비치면 전화가 왔거나 일행이 찾는 것이니 조용히 일어나 나가면 된다. 스스로가 활동사진 애호가라고 생각한다면, 다른 사람의 감상을 방해하지 않고 공공질서를 지켜가면서 조용히 영화를 즐기고 감상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 사실 극장 예법을 잡지에서 배운 사람이 조선에서 그의 이상대로 조용하고 우아하게 영화라는 예술을 ‘고급하게’ 감상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의 신문과 잡지에 그려진 극장의 풍경은 무성영화가 상영되는 시대의 극장이 온전히 감상에만 집중하기 어려운 환경이었음을 암시한다. 변사는 때로 영화와 무관하게 쓸데없는 이야기를 늘어놓기도 하고, 자막을 잘못 해설하기도 한다. 그런 변사의 해설에 관객들은 울고 웃고, 때로는 야유를 보내기도 한다. 입에 손가락을 넣고 휘파람을 불어대거나 손뼉을 치거나 발을 동동 구르며 관객들이 한바탕 법석을 벌이는 것이다. 영화 상영 중에도 과자를 파는 사람이 객석을 돌아다니고, 전화 온 손님의 이름을 버럭 부르는 직원도 있다(극장의 전화 교환은 다른 관객들의 관람을 위해서 점차 통고등을 사용하는 방식으로 바뀌어 갔다). 자주 정전이 발생하고, 영사가 돌연 중단되는 일도 많다. 어떤 관객은 옆 사람의 입에서 품어져 나오는 담배 연기에 숨이 막히는 듯 했을 것이다. 냉난방 설비가 충분하지 않은 극장에서는 여름이면 겨우 몇 개의 부채, 겨울이면 화로 몇 점으로 더위와 추위를 견뎌야 했을 것이다. 결국 애활가의 극장 예법이란 극장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져도 침착하고 의연하게 대처하는 노하우, 그런 매너를 갖춘 관객이 되는 법이었다. 1) 스크린 빨-쥐, 『별건곤』 제 29호(1930년 6월), 108~11쪽. 2) 청의아(靑衣兒) 생, 「현대 신사 숙녀로서 알아 둘 모던 생활 강좌」『조광』 1936년 1월호, 222쪽. 상단 그림. 극장 안 풍경 출처: 석영 생, 「서울행진(5) 480석, 5년간 중학생 학비」 《조선일보》 1928년 11월 7일자 3면. <자료> ※ 이하 자료는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 현대어 표기에 맞게 다시 썼다. 일부 표현은 문맥에 맞게 다듬었다. 1-1. 「극장만담」『별건곤』 제5호(1927년 3월), 94~5쪽. (부분 발췌) 근일에는 극장을 가보면 관객의 변천을 볼 수 있다. 그것은 장내가 소란치 않은 것이다. 그리고 유년 관객이 적어진 것이니 그것은 입장료가 고가이고 예전과 다른 정도 높은 영화를 해득하기에 어려운 까닭이라 할지 가정에서 감독이 심한 까닭인지는 모르나 비판력이 모자라는 그들에게는 다행한 일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한 가지 특별히 변한 것은 희소하던 부인석에 남자석 이상으로 매일 만원인 것이다. 노부인, 여염집 부녀, 기생 그리고 여학생들인데 진기한 일은 그중에서 성에 갓 눈뜬 여학생이 반 수 이상을 참렬한 것이다. 그 뿐 아니다. 경악할 인은 ‘키쓰’하는 장면–그 순간에는 반드시 질식할 듯한 외마디 소리가 부인석에서 의례히 돌발한다. 그런데 부인석 중에도 머리 틀어 얹은 젊은 여인들 모여 앉은 곳에서. 이 말은 거짓말인가. 거짓말이 아닌 것은 극장 출입 잦은 이에게 물어보면 알 것이다. 어쨌든 세상은 변하였다. 극장 간판―이 간판도 수년 전에 비하면 여간 발전된 것이 아니다. 그러나 늘 보면 그 간판의 그림은 그림으로 보아서는 덜 추하나 그 영화 중에 그 영화 전편을 통하여 제일 주요한 신을 빼놓고 영화 자체에 있어서도 제외하여 버려도 실패가 안될 장면만을 그리는 때가 많은 것이 그 간판, 더욱이 극장 간판의 임무가 어디 있는지 물어보고 싶다. 그러한 극장 간판 중 좀 미안한 말이지만은 우미관 간판이 좀 천한 느낌이 있다. 그 간판은 입장료를 5전씩 받던 옛날 그 시절과 현재와 별반 차도가 없는 것이 그 관을 위하여 좀 불안하다는 말이다. 극장 내부―근일에는 단성사의 영화막(스크린) 상하좌우의 장치가 예전보담은 색채라든지 구성이 좀 아담한 듯하다. 그리고 조선극장은 옛날과 그리 현격한 변화가 없지만은 그저 추하지는 않다. 우미관도 그저 그러하다. 10분 휴식―10분 휴식에 음악을 연주하는 것은 관객의 피로한 뇌를 쉬게 하는 데는 퍽 유효할 것 같다. 그러나 그때에 변사가 나와서 잔소리하고 서있는 것이다. 한마디도 들어서 유리할 데 없는 자기의 회포를 천 명이나 오백 명의 청감을 가진 관객에게 늘어놓아서야 미안치 않은가? 다음번에 갈릴 영화 예고를 한다는 목적이라 하더라도 무대 위에 예고간판을 세워놓고 프로그램지에 적어놓고 또 무슨 필요가 있을까? 물어본다. 그리고 10분 휴식 간에 오케스트라도 있으려니와 무슨 다른 여흥이 있으면 좋겠다. 그것은 경영난인 현금의 극장에 주문하는 것은 무리이지만, 무도나 독창이나 독주나 있었으면 10분 휴식하는 의의가 있지 않을까 한다. 음악―어느 극장이나 오케스트라는 좀 변화가 지체되는 감이 있다. 영화 차환할 때마다 새 곡조로 갈았으면 어떨지. 너무 들어서 도리어 감정을 괴롭게 한다. 그리고 좀 정도를 높였으면 어떨지 물어본다. 변사―변사 제군에 하나 제안한다. 다른 게 아니라 그 ‘하얐다’, ‘하얐었다’가 글 쓰는 데는 모르겠지만 말로 하는 때에 듣는 사람으로서는 어떨지? 처음 극장가는 노인은 대분개할 것이다. 그 조(調)를 고치고 ‘하였습니다’, ‘하였었습니다’ 하면 어른에게나 어린이에게나 퍽 다정하게 들릴 것이다. 더구나 인정극에리오. 그리고 변사계에 한 가지 유행이 있으니 ‘마음자리’라는 말이다. ‘마음자리’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 마음의 돗자리라는 말인지, 마음이 깔고 자는 자리인지 어쨌든 해석할 수 없는 말이다. 그리고 한참 긴장한 장면에 가서 농담(醜談)을 탁 터뜨리는 변사가 있다. 그 변사는 원래, 희극에는 더 우는 조로 하는 이인데 청승맞은 것은 좋으나 너무 그 음성이 청승맞아서 너무 천하게 들린다. 그리고 한 가지 우스운 일이 있으니, 어떤 변사는 한참 자기도취로 “자연의 의지와 우주의 이성이 아–슬프다!” 하니 그것이 무슨 의미일까? 그러한 고상한 문자를 안 써도 능히 할 수 있는데 얼토당토않은 문자를 쓰는 것이 도리어 자기 폭로에 지나지 않을 줄 안다. 그리고 장면이 벌써 지났는데 지난 장면을 가지고 떠들고 섰으니, 그것도 자기 취미지만 관자(觀者)는 그러한 변사를 원치 않을 것이다. 특히 이 점에 생각 좀 하여 주었으면 고맙겠다. 전화―극장에 온 손님에게 전화가 올 때, 그것을 전달하는 사람이 소리를 버럭 질러서 그 사람의 이름을 부를 때 당자는 (더구나 여자) 퍽 불쾌할 것이다. 여기에는 완전치는 못하나마 조선극장에서 하는 방식이 좋을 것이다. 스크린 옆 기둥을 뚫고서 유리등을 끼워놓고 그 유리에 부를 사람의 이름을 써놓고 전등으로 신호하는 방식이다. 1-2. 「극장만담」『별건곤』 제6호(1927년 4월), 108~9쪽. (부분 발췌) 모든 것이 구각(舊殼)을 벌어 젖히고 자체로부터 신생물의 싹을 좇는 이 봄에 근일에 각 극장에서는 2, 3년 전에 수입되었던 영화를 다시금 되풀이하고 있으니 여기에 극장경영자의 몰상식을 규시(窺視)할 수 있다. 설령 2, 3년이나 1, 2년 전에 일반 팬에게 호감을 산 영화이어서, 그것을 수십 차라도 되풀이하여도 매야(每夜) 만원의 성황을 이룰 수 있다치더라도―원래 수입되는 서양영화는 대개가 3, 4년 전 혹은 5, 6년 전 심지어 십 년 전 제작된 영화가 (기적적으로 1년 이내에 수입되는 것도 간혹 있지만) 상장되는 것인 그만큼, 먼 과거에 제작된 영화인 터에도 그것을 재삼 상장한대서야 시대 변천에 너무나 몰각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영업 편으로 보아서는 유리한 방책이라 하더라도 일반팬에게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말이다. 여기 있어서 될 수 있는 대로 새로운 경지를 향하여 움직이는 팬보다도 더 앞서 나아가지 않으며 어느 시기에든지 큰 실패를 맞이하리라. 근일에 영화열이 팽창함에 따라서 팬의 수효도 배전(倍前)으로 증가되어 어느 날이든지 극장은 대만원의 성황을 이루게 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말할 것은 그러한 때에 좌석이 참도 불고(不顧)하고, 그저 공간만 있으면 관객의 눈에 스크린의 끄트머리도 보이지 않더라도 불고하고, 그저 우릿간에 송아지 몰아넣듯이, 막 쓸어 넣는다 하면 너무도, 관객에게 불친절이 지나치지 않는가? 그뿐 아니라 젊은 색시들이 남자의 틈에서 비명을 질러도 그저 쓸어 넣어서 한푼이라도 더 모으려고 하여서야 될 수 있는가? 그러한 까닭에 종차(從次)로는 입장권에 좌석 순차표를 첨부하여서 누구든지 먼저 입장한 이를 제일 좋은 자리에 앉히고 그 다음 순차대로 좌석을 정돈시킨 후 좌석만 차면 문을 닫아버리면 어떨까 하는 것을 참고로 말한다. 그래서 될 수 있는 대로 관객의 피로를 덜어 주었으면 좋을 줄 안다. 그리고 입장권 매팔구(賣捌口) [필자 주: 판매소] 에는 써 붙이지 않고 내용으로 특등석을 설치하여 놓고 돈을 더 받으니, 이것은 경찰과 무슨 약속이 있는가? 그렇지 않으면 경찰의 허가도 없이 비밀히 하는 일인가? 우리로서는 그 진의를 알 수가 없다. 그이들의 것 무슨 구실이 있다 할지라도 이상에 말한 방법으로 한다면, 특등석도 없어질 것이요, 따라서 그 비밀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당하는 창피도 없어질 것이다.(상층 하층을 구별치 말라는 말은 아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변사와 대(對) 관객(특히 남녀 학생과 소년)과의 관계를 말하려 한다. 변사들이 영화대본(설명서)을 보지 않는지, 영화의 내용과는 아주 다른 추담을 베푸는 변사가 많은데, 항용 청소년 혹은 남녀 학생들의 염서(艶書)나 담화에까지 그 추담병이 전염된 것이다. 여기에 대하여서 희극변사 최병룡 군(단성사)의 추담 없이도 점잖게 웃기는 그 비결을 좀 배웠으면 어떨지? 그리고 변사의 말이 났으니 말이지 그 영화에 역할된 인물의 성명(영어나 기타 외국어에)을 어떤 나라말이든지 발음의 만능인 조선말을 하는 사람이 그대로 못하느냐, 모르면 누구에게든지 물어볼 수 없을까. 예(例)하면, ‘짹크’를 ‘짯구’라니 외국인의 웃음거리를 장만할 필요는 무엇 있는가. 일본 것이 아무리 좋대도 나쁜 것은 배우지 않는 것이 좋을 듯하다. 2. 강사 스크린·빨-쥐, 「고급영화팬 되는 비결 십칙」『별건곤』 제29호(1930년 6월), 108~11쪽. 현대청년이란 그 언어에 있어 행동에 있어 처신에 있어, 아니 손가락 한 개를 놀리는 데 있어서도 모름지기 고급이어야 한다. 고급! 얼마나 입맛이 당기는 말이냐! high and noble. 존 바리모어(John Barrymore)의 프로필과 같은 noble. 미국이면 마천루 꼭대기와 같은 high. 그러한 것을 집어삼킨 듯한, 자신과 같은 풍도(風度)를 가져야 한다는 말이다. 점잖으면서도 완미(頑迷)한 구석이 없고 경쾌연미(輕快軟美)하면서도 부경(浮輕)한 맛이 없어야만 소위 고급에 속하는 영광을 가질 것이다. 그러나 고급의 시대 철학적 해석은 다음 강의에 미루고 오늘은 제군들 앞에서 영화의 고급팬 되는 비결을 해설하는 영광을 내가 먼저 가지기로 한다. 1 대개 수요일이나 목요일 석간신문에는 각 영화관의 사진 교체 광고가 다투어 난다. 제군이 고급영화팬이 되려면 먼저 그러한 광고 가운데서 한번 감상할 가치가 있음직한 영화를 선택한 다음에 그 영화의 감독이며 주연배우 등의 이름을 외워두고 사진 내용에 들어가서도 될 수 있는 대로 다소간 미리 알아둘 필요가 있다. 그리고 위연만한 영화이면 봉절하기 전에 신문이나 잡지에서 「시사실에서」란 제(題)로 간단한 비평 비슷한 것이 실리는 법이다. 제군은 무엇보담도 먼저(1면 기사보담도) 그 기사를 통독해 두어야한다. 그러고 보면 제군이 제군의 연인과 더불어 산보를 나왔다가 “차나 한잔 마시려오, 극장엘 가시려오?” 할 때도 그러한 예비식견이 여간 유효한 게 아니다. 더구나 여자들이란 사진이 좋지 못하면 그 사진을 같이 간 사나이가 만들기나 한 것처럼 짜증을 내고 책망을 하는 고약한 버릇이 있다. 가령, 이를테면 “이까짓 걸 다 사진이라고 구경 오랬어요! 당신두 참 딱도 하시우!” 혹은 “인젠 두 번두 당신하고 같이 극장에 오진 않을 테야요. 내가 그래 겨우 이 따위 사진을 보러 왔단 말이요……?” 이런 매서운 선고 등이다. 무섭지 않느냐!? 또 설사 이러한 연애, 구애 관계 등의 이득을 도외시하고도 노상에서 우연히 사람을 만났을 때 그 사람의 질문에 응하여 시방 아무 영화관에서는 무슨 영화를 상영 중인데 그 영화는 운운, 이렇게 즉석에서 대답할 수 있는 이익이 따르는 까닭이다. 이와 같이 즉석에서 남의 질문에 응답할 수 있다는 것은 무슨 일이고 간에 남의 찬탄을 받는 법이다. 또 그리고 만약 제군이 극이나 영화의 기맥에 다소간 통하는 바가 있다면 그 답을 할 때 살짝살짝 첨부 삽입 작용을 하고 보면 효험이 더욱 날 것이 틀림없다. 2 자, 그러면 제군이 광고의 안내로 (혹은 연인이나 친구들의 요청에 응해서든지 상관이 없지만) 이제 영화관의 한 좌석을 차지했다고 하자! 그러면 그때 제군이 가장 먼저 취할 방법 이 무엇일까? 제군은 무엇을 먼저 하여야 할 것인가! 그러나 너무 어렵게 생각할 것은 없다. 그저 변소에 가라는 게다. 우스운 말 같으나 이 변소에 가라는 것은 마음을 가라앉히는 데 적지 않은 도움이 될 뿐 아니라 다음 방책을 세우는 데도 필요한 것이다. 사진관에 들어가 보아서 시작하기까지에 시간의 여유가 있을 때는 변소에 갔다 나와서 유유름름(悠悠凜凜)한 태도로 당하나 통로 같은 데를 거니는 것도 흥이 있다. 이때 태도는 아주 침착하고도 무게 있게 보여야 하나니 하여간 일견지하에 남들이 짐짓 아마 놈이 영화계 명사인가 보다 하고 남에게 경계와 찬미의 탄사가 흐르게끔 태도를 가져야 한다. 지루해 못 견디어 하는 얼굴로 하품을 하는 것도 남의 주의를 끌기는 하나 이 방법은 도로히 반대의 효과를 가져오기가 쉬우니 이 방법을 택할 때는 기미를 잘 보아서 하지 않으면 실패다. 그리고 만약 제군이 사진관으로 달려갔을 때 이미 영화가 시작되었을 때는 사진쯤 상관할 것 없이 자리를 잡아 모자나 외투를 놓아두고는 변소부터 먼저 가야 할 것이다. 이미 시작된 사진일 것 같으면 2, 3분 동안 더 보나 덜 보나 마찬가지다. 그것보다는 변소에 다녀오는 게 더 필요하다. 한 사진이 끝나고 다시 다른 사진이 시작되는 짧은 휴식 시간에 부리나케 변소에 갔다가 황급히 자리에 돌아오는 사람을 많이 보는데 그것은 극히 졸렬한 행동이요, 적어도 고급에 있어서는 물론 사회도덕의 관념에서 말하더라도 그리 칭찬할 바 행동이 못된다. 3 그리고 사진이 시작되기 전에 급해 빠져서 프로그램이나 『위클리』에 쓰인 플롯을 읽는 사람이 있는데, 그것도 아름답지 못한 일이라. 대관절 영화를 보기 전에 그런 류의 해설을 읽지 않고는 영화의 스토리나 연락을 모른대서야 영화팬으로서 적지 않은 문제라 할 수 있다. 이것만으로도 영화팬의 자격은 완전히 상실된다고 각오하고 있어도 좋다. 크게 주의할 일이다. 프로그램 같은 것은 집에 돌아가서 눈을 한번 거치면 그만이다. 더구나 기막히는 것은 사진이 시작되어 전등이 꺼진 뒤에도 그 캄캄한 불빛을 훔쳐서 프로그램을 읽으려 애쓰고 있는 친구들이다. 이렇게 되면 비참 우(又) 참담, 실로 언어도단이다. 영화란 원래 그 first scene과 아울러 최초에 나오는 자막이 가장 필요한 것이다. 이 제작역할을 일별하고는 미소를 띠어서 아래턱을 쓰다듬게쯤 되지 않고는 아직도 고급팬 되기는 멀었다. 그리고 모르는 친구들은 hero와 heroine이 서로 껴안기만 하면 벌써 다 된 줄 알고 일어나서 무엇이 그리 급한지 출구로 우르르 몰려나가는 고약한 버릇이 있다. 그러나 이것도 적지 않은 실책인 것이, 영화란 그 뒤에도 사건이 시작되는 수가 있으며, 첫째 last scene을 보지 않고 일어선다는 것은 영화팬으로 용서치 못할 일이다. 어떠한 일이고 첨이 있고 끝이 없는 법은 없다. first scene과 last scene은 영화를 논함에 있어서 반드시 팬들의 입에 오르는 것임을 알아두어야 한다. 4 그 다음 휴식 시간에 주악(奏樂)이 있을 때는 그것을 들어도 좋고 듣지 않아도 상관이 없다. 단지 요점은 주악에 너무 귀를 기울여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더구나 끝난 뒤에 감격해서 손뼉을 치든지 하고 보면 남의 조소를 받을 우려가 많은 것이니 주의할 일이다. 하여튼 고급영화팬이란 그리 헐하게 감격해서는 견뎌나갈 수 없는 처세술(?)이다. 무엇이고 “정말 우스워 못 보겠네”라든지 “나 원, 기가 막혀 이걸 어떻게 듣고 있어”라든가 “이건 지독한데” 등등의 능청스런 태도를 가져야 한다는 것을 늘 머릿속에 명념(銘念)해 두어야 한다. 5 그러면 제군! 영화 중에 돌연히 필름(film)이 끊어질 때는 어떠한 태도를 취할 것인가. 그때는 크리스트와 같은 얼굴을 하고 묵묵히 앉아 있어야 한다. “사진 망했다”, “불 켜라” 하고 노호한다든가 영사실을 힐끗힐끗 들여다보는 것은 천박하기 짝이 없는 짓이다. 또 정전이 되었을 때에도 자리에 가만히 앉아서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게 좋다. 그렇다고 너무 생각하는 척 하노라고 눈을 감고 그대로 잠이 들어버리면 야단이다. 6 다음 해설자가 쓸데없는 것을 늘어놓는다든지 자막 같은 것을 오역했을 때는 어떠한 태도를 취할 것인가 하면, 그때는 아주 무서운 얼굴로 해설자가 서있는 편을 노려보는 것이다. 이것은 객관적으로 아무런 효과도 없다고 생각할는지 모르나 주관적 견지에서 본다면 정의의 열혈이 끓어오르는 지사와 같은 흥분을 느끼게 되어 다시 없이 마음이 쾌(快)한 것이다. 7 자! 제군은 인제 영화를 보았다. 그러면 어떻게 그것을 비평할까가 나머지 문제일 것이라. 스토리는? 시나리오는? 감독은? 배우는? 이렇게 판에 박은 듯한 비평을 한다면 벌써 제군은 고급영화팬이 못된다. 그런 것을 지껄이는 도배(徒輩)를 가리켜 제군은 식소사번(食少事煩) [필자 주: ‘먹을 것은 적고 할 일은 많다’는 뜻.] 의 주문돌이 [필자 주: 미두장 등에서 주문을 대행해주는 브로커.] 라고 비소(鼻笑)하고 있어도 좋다. 그보다는 경구(警句)를 토해야 한다. 한 말로 그 영화를 차 던져야 한다. 기다란 변설(辯舌)을 농(弄)하여 내용의 공허를 폭로시킨다든지 자기의 부족처를 남에게 보이든지 하는 것은 모던 고급팬들의 관여할 바 못된다. 무엇이고 Make believe의 세상이니 말이다. 8 그리고 보면 금세의 고급영화팬 된 자 반드시 이름 있는 영화를 전부 다 보고 다니지 않아도 된다. 아니, 보지 않더라도 고급팬으로 통할 수 있다. 그 대신 신문잡지에 실리는 영화비평을 정독해 두었다가 다른 사람들이 왜 안보느냐고 물을 때는 그 비평의 공격 부분만을 외워두어서 “결국 허잘 것 업는 스토리에 좌우된 영화였지 뭐야! 흥, 그까짓 걸 누가 보러간단 말이야” 하고 한마디로 격퇴해 버리면 고만이다. 그러고는 외국 영화잡지 등을 일별해두었다가 “그러나 이번 미국 ○○회사에서 제작하고 있는 △△란 영화만은 나로서 적지 않은 기대를 가지고 있는 걸! 그것이 건너오기만 하고 보면 억만 사(事)를 제처 놓고도 보러 가겠네만은……”하고는 슬쩍 영화통인 점을 보여서 상대자의 간을 주물러 놓는 것도 속 시원한 노릇 아니냐. 9 복색은 너무 혼란해서는 못 쓴다. 너무 지나치게 화려하다든지 제법(製法)이 별나고 보면 부랑자나 모뽀로 잘못 보이기가 쉬워서 헛되이 명성을 떨어트리게 된다. 영위계구(寧爲鷄口)일지언정 불위우후(不爲牛後) [필자 주: 혹은 ‘영위계구 물위우후(寧爲鷄口勿爲牛後)’. ‘닭의 입이 될지언정 소의 꼬리는 되지 말라’는 뜻으로 큰 집단의 말석보다 작은 집단의 우두머리가 낫다는 의미이다. 줄여서 ‘계구우후’라고도 한다.] 로 맑스·뽀이로 보일지언정 모뽀로 잘못 보여서 쓸까보냐다. 또 그러고 촬영감독이나 카메라맨으로 보여서도 안 된다. 고급영화팬은 촬영소 인종들과 혼동되는 것을 세심한 주의를 가지고 피해야 한다. 비평가 부류의 인종하고도 혼동이 되지 말아야 한다. 적어도 촬영소 인종들을 자본가의 영리한 주구(走狗)로 보아 경멸하고 비평가를 기생충이나 어용 매문업자로 취급하는 것이다. 그러고 영화잡지 같은 것은 외국 것이면 몰라도 절대로 가지고 다녀서는 안 된다. 요컨대 고급영화팬은 시네아스트의 긍지를 가지고 스넙 [필자 주: snob] 하면서 우울하여야 하고, 경멸할 줄을 알고 천학박식(淺學博識)이어야 하며, 또한 교묘한 궤변가여야 하며, 기타 여러 가지여야 한다. 10 끝으로 한 가지 부언해 둘 것은 요사이 유행 영화인 토키(talkie)에 대한 것인데, 우리 고급영화팬들은 그것이 사운드·픽처이면 상관이 없지만 불행히도 토킹·픽처일 때는 근신을 해야 한다. 하고(何故) 하면 제군이 뛰어난 어학자이거나 기막힌 즉흥시인이 아닌 이상 동반자(예컨대, 군들의 연인)의 질문에 응하지 못하여 천추에 회한을 남길 염려가 없지 않으니 말이다. 그러므로 다시 말하노니 고급영화팬은 광범 심원한 지식과 교양을 요하는 것은 이것저것 할 것 없이 덮어놓고 경이원지(敬而遠之)하고 그 대신 매멸(罵蔑)하는 것을 유일한 Motto요, 철학이요, 전술로 알고 굳게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