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갑이 목욕탕 개업하다
- 감독
- 안성찬
- 제작년도
- 1963
- 출연
- 김희갑, 구봉서, 정애란, 양훈, 양석천, 후라이보이, 서영춘, 주선태, 장혁, 남춘역, 추석양, 장훈, 박상익, 안성기, 박옥초, 방성자, 최지희, 이빈화, 도경화, 이애숙, 장미승, 김미영, 고설봉, 조향, 원해남, 김완기, 박일, 김수천, 박현철, 강동규, 신고석, 양명렬, 문치홍
< 지옥만세 >는 십대 소녀 나미(오우리)와 선우(방효린)의 로드무비다. 학교폭력 피해자인 둘은 사는 게 지옥 같다. 가족도 자신들의 고통을 알아주지 않는다. 힘들다고 토로해봤자 약해빠졌다거나 너보다 더 힘든 동생을 배려하라는 말을 들을 뿐이다. 결국 학교 폭력에서 벗어날 방법을 찾지 못한 둘은 지옥 같은 현실을 탈출하기 위해 동반자살을 기도한다. 몇 번이나 자살에 실패했던 나미는 선우의 도움을 받고, 선우도 나미의 뒤를 따르기로 약속한다. 하지만 자살기도 중 나미는 따돌림을 주도했던 채린(정이주)이 서울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고 복수를 위해 선우와 함께 서울로 향한다. 학교폭력, 자살기도, 납치와 그루밍, 사이비 종교집단 등 무거운 주제를 다루고 있음에도 영화는 반전처럼 경쾌하고 엉뚱하며 발랄한 톤을 갖고 있다. 초성만 쓰면서 가볍게 주고받는 문자, 싸이키델릭한 록 스타일의 음악, 뮤직 비디오 같은 회상 몽타주씬들은 그러한 톤을 뒷받침한다. 그렇다고 앞의 나열된 소재를 표피적으로 다루지는 않는다. 나미와 선우의 예상을 엇나가는 반응과 엉뚱한 선택들은 십대 소녀들이 자신의 고통의 기원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일관되게 해결책을 찾는 것이 불가능한 현실을 입체적으로 제시한다. 지옥 같은 현실이 압도해 올 때 이성적인 선택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둘은 왜 자신들이 따돌림을 당하고 고통을 겪어야 하는지, 언제 어떻게 이 지옥 같은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같은 처지에 있는 서로가 있고, 그렇기에 두 소녀는 지옥에 살면서도 생동감이 넘칠 수 있다. 자살에 성공할 방법을 역동적으로 고민하고 시도하는 것처럼 말이다. 자신들을 이해해 주는 사람 하나 없는 둘은 파국으로 치닫는다. 그들이 처한 파국의 풍경은 자살 장소로 대변된다. 나미와 선우가 사는 곳은 온천 관광지로 유명했던 수안보이다. 한때 인산인해를 이루던 관광지는 그 영광을 잃어 점차 쇠락했다. 이제 이곳은 문 닫은 대중목욕탕들로 가득하다. 더 이상 사람들이 찾지 않는 버려진 대중목욕탕은 자살하기에 좋은 장소다. 엄마에게 들켜 자살에 실패하곤 했던 나미는 선우의 도움으로 진짜 자살에 성공하기 직전까지 간다. 하지만 자꾸 자살 도구를 트집 잡고 왕따 주동자인 채린의 소식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나미의 태도는 그가 정말로 죽기를 원하는 건 아니라는 걸 말해준다. 죽을 만큼 괴로워하고 있으며, 이 상황을 해결하고 싶지만 방법을 몰라 무력감에 놓여 있을 뿐이다. 선우에게 유서를 건네며 “그냥 아무 우체통에다 넣어줘. 운명처럼 어디든 닿겠지”라고 말하는 나미 대사는 죽음과 어울리지 않게 낭만적이고 낙관적이다. 우여곡절 끝에 서울 종로에 도착한 나미와 선우는 어이없을 정도의 우연으로 채린과 마주친다. 무작정 종로를 헤매자던 나미의 전략이 성공에 이르게 된다. 잘나가던 채린의 아버지 사업은 부도가 났고 엄마는 사이비 종교에 빠져 ‘낙원’이라 불리는 해외의 종교 집단 거주지로 떠나버렸다. 홀로 남은 채린은 엄마를 따라가기 위해 고군분투 중이다. 나미와 선우는 채린의 얼굴에 ‘기스’를 내어 살아있는 지옥을 맞보게 해주기로 결심하지만 채린은 이미 가해자가 아닌 회개자의 얼굴로 그들을 반갑게 맞이한다. 채린은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있다며 나미와 선우에게 용서를 빈다. 나미는 채린이 진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흔들리지만, 선우는 채린이 여전히 종교 집단에서 함께 살며 낙원을 가기 위해 경쟁하는 아이들 안에서 ‘여왕벌’ 노릇을 하며 따돌림을 조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이 따돌림을 가능하게 해주는 건 겉으로는 다정다감해 보이는 명호(박성훈)다. 명호는 사이비 종교 교주인 목사가 교도소에 수감된 뒤 조직을 이끌어 가고 있다. ‘낙원’으로 가려면 높은 점수를 받아야 한다. ‘피해자에게 받는 용서’의 점수가 가장 높기 때문에 채린은 이 점수를 받기 위해 나미와 선우에게 자신을 용서해 구원해달라고 애걸한다. 영화는 어떤 존재와 사건이든 하나의 얼굴만 갖고 있지 않음을 강조한다. 채린은 학교 폭력 가해자이지만 동시에 부모에게 버림받았으며 종교집단의 납치폭력과 그루밍을 당한 피해자이기도 하다. 나미는 가해자 집단의 우두머리였던 채린과의 관계에 있어선 피해자이지만 가해자 무리에 속해 선우를 향한 괴롭힘에 동조하고 외면해왔다는 점에선 가해자이다. 선우는 피해자이고 다른 피해자를 잘 알아차리며 보호하려는 태도를 취하지만 나미에게 복수하기 위해 나미 엄마 식당에 대한 악플을 올렸다는 점에선 가해자이다. 나미와 선우는 피해자이지만 마냥 착하거나 약한 자들은 아니다. 취약한 상황에서 이상한 신념에 빠진 이들과 달리 나미와 선우는 그들의 친절함에 고마워하면서도 경계심을 놓지 않는다. 둘은 채린을 향한 복수의 여정에서 자신들뿐만 아니라 채린을 구해 나올 정도로 용기 있는 이들이다. 또한 나미는 선우와의 관계에서 회개했다는 채린에게 더 동일시하며 그의 위선을 알아채지 못해 선우에게 상처준 것에 대해 용서를 구할 정도로 자신을 성찰하는 힘을 갖고 있다. 이때서야 영화는 회상 장면에서 얼굴이 보이지 않았던 피해자와 가해자의 얼굴을 똑바로 보여준다. 영화의 오프닝은 ‘황구라’라고 불리는 아이의 생일을 축하하는 또래 무리들이 촬영한 것 같은 친밀한 카메라를 시뮬레이션 한다. 하지만 생일을 맞은 아이와 함께 즐겁게 장난치는 것처럼 보였던 장면은 곧 지옥으로 변한다. 이 영상이 사실은 학교폭력 피해자를 괴롭히는 영상 푸티지라는 것이 밝혀진다. 피해자인 아이의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고 얼굴에 케이크를 맞고 괴로워하는 뒷모습만을 비춘다. 한 아이가 쓰러진 아이를 동정어린 시선으로 보지만 곧 무리의 부름에 그를 버리고 가버린다. 선우가 채린에게 연민을 보이고 공감하는 나미에게 실망할 때 나미의 회상 속에서 이 오프닝 장면이 다시 반복된다. 이번에는 피해자 아이와 동정어린 시선을 보냈지만 배신하고 가버린 아이의 얼굴이 모두 정확히 보인다. 피해자는 선우이고 버리고 가버린 아이는 나미다. 피해자든 가해자든 그 얼굴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더불어 나미는 자신이 선우의 얼굴을 다시 한 번 외면했음을 깨닫는다. 이 장면은 피해자든 가해자든 다양하고 복잡한 얼굴을 갖고 있다고 해서 한 얼굴이 다른 얼굴로 상쇄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역설한다. 채린이 피해자의 얼굴을 갖고 있지만 그렇다고 그가 갖고 있는 가해자의 얼굴이 사라지거나 면죄 받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사실 채린이 가길 바라는 낙원은 이미 지옥이 된지 오래일 것이다. 명호가 돌보고 이끄는 아이들 공동체도 겉으로 보기에는 서로를 돌보는 따뜻한 분위기에 선행으로 가득 차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낙원행 티켓을 타기 위한 생존게임에 불과하다. 명호는 친절하고 관대한 젊은 종교 지도자처럼 보이지만 그 스스로 사기공모 범죄자이며 사기 피해자이다. 지옥과 낙원은 동전의 양면이다. 나미와 선우의 여행은 어쩌면 고립된 이상향으로서의 낙원은 부재하고 도처에 지옥의 면모가 있기에 지옥탈출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여정이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선 지옥 역시 낙원의 일면이 잠재해 있을 수 있다. 고통을 알아봐 준 서로가 있다면 조금은 지옥을 견딜 수도 있을지 모른다. 친절해 보였던 어른들의 광기와 납치폭력에서 탈출하고 명호의 자살을 실제로 목격한 후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에 꽂혀 있던 ‘낙원’ 엽서는 꽤 직접적인 은유가 된다. 현실은 바뀌지 않은 채 여지없이 돌아오자마자 괴롭힘을 당한다. 이번에는 서로가 있고 더 이상 죽고 싶어 하지 않으며, 가해자들을 무서워하지 않을 용기가 생겼다는 차이가 있다. 극복, 해방, 낙원 이런 것은 생존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해방과 낙원은 곧 지옥이 될 것이기에. 죽지 않기 위해선 지옥을 벗어나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 가볍게 인정하며 “오키 오키”라고 답할 수 있는 태도, 적어도 죽지 말고 “지옥을 견뎌내는” 마음이 필요하다. 자기들만의 ‘수학여행’을 마치고 서로의 집으로 향하는 엔딩씬에서 나미는 자전거를 타고 멀어져 가는 선우를 응시한다. 망원렌즈 촬영으로 거리와 초점이 왜곡된 쇼트에서 얼마 안가 선우의 뒷모습은 포커스가 나가 흐릿해지다 못해 빛 속으로 사라질 것처럼 보인다. 나미는 선우의 생존을 확인이라도 해보듯 다급하게 부른다. 가해자들이 별칭으로 부르던 ‘황구라’가 아닌 ‘선우’라고 분명하게 부른다. 포커스가 나가 있기 때문에 선우가 나미의 부름을 들었는지, 그가 되돌아오고 있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선우는 그의 부름에 응답하며 되돌아온다. 드디어 초점이 맞춰져 선명하게 마주하게 된 선우의 얼굴 클로즈업에 나미는 웃으며 “웰컴 백 투 더 헬, X발”이라 말한다. 다시 각자의 집으로 가는 나미와 선우의 얼굴 클로즈업이 교차한다. 오늘은 그의 이름을 불러 지옥을 살아내고 있음을,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그래서 우리는 유튜브 라이브를 하기로 했다.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2020년 5월에는 정지돈의 『농담을 싫어하는 사람들』 출간 기념 라이브 북토크를 했고(촬영하던 아이패드 배터리가 중간에 떨어지는 바람에 강제 종료됐다), 2021년 5월에는 오한기의 『인간만세』 출간 기념으로 셋이서 라이브 북토크를 했다(오한기가 화장실에 가야겠다며 도중에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줌을 통해 진행했던 것까지 포함하면 라이브 경험은 더 많다. 우리가 연예인도 아니고 무슨 라이브냐고, 너무 민망하다고, 식은땀 흘리며 새하얘진 머리로 아무 말이나 하던 시절은 이제 지나갔다(이제 멀쩡한 정신으로 차분하게 아무 말이나 한다). 그렇지만 이런 적은 처음이다. 정말로… (하나, 둘, 셋-) (심호흡) 1. 23 아이덴티티 -안녕하세요? 우리는 한영한사! 지금부터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신년 특집 유튜브 라이브를 시작하겠습니다. 저는 K정연이고요, 제 옆에는- -안녕하세요 JD입니다. -처음 연재 제안 받고 서교동 카페에 둘이 마주보고 앉아서 도대체 뭘 써야 하나 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해가 바뀌었어요. 신년인데 어떻게 지내시나요? 근황부터 좀. -네, 저는 요즘 누워 있는데요. 누워서 책도 보고 누워서 소설도 쓰고 밥도 누워서 먹고 지금도 사실 누워 있어요. -세상에, 지금 라이브 스트리밍 중이잖아요! 어떻게 그럴 수 있죠? 독자들을 기만하시는 건가요? How dare? -어차피 안 보이잖아… 근데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해요? 이게 뭐야 진짜. 그러게. 오해를 피하기 위해 말하자면 이건 장난이 아니다. 오늘을 위해 나는 유튜브 채널까지 만들었다. 이름은 레코드 디스코드(검색해도 안 나옴), 오디오 비주얼 전문(일단은) 채널이다. 계획은 이랬다. 영자원에 미리 양해를 구해서 라이브 시작과 동시에 유튜브가 임베드 된 연재 페이지를 올린다, 스페셜 게스트들과 함께 2시간 남짓? 지난 10화 동안의 연재를 돌아보고 21세기 한국 영화에 대한 솔직한 이야기를 나누며 앞으로 남은 11화 동안 나아갈 길을 모색하는 시간을 갖는다, 라이브가 끝난 다음에는 AI 노트 어플을 통해 자동으로 푼 녹취를 연재 페이지에 추가한다, 클립 일부를 NFT로 판매해서 에세이 필름 제작비를 확보하고 남는 돈은 사회에 환원한다… 다시 봐도 완벽한 계획이다. 단 하나, 유튜브에서 라이브 스트리밍을 하려면 구독자가 1000명을 넘어야 한다는 사실을 제외한다면. -지금 구독자가 몇 명이죠? -사실 좀 아까워요. 딱 23명이… -23명이 모자라다고요? -딱 23명이라고요. -그게 뭐가 아까워요? -그럼 안 아까워요? -?? 2. 그는 사막에 서서 인생의 순간들을 세고 있다 1954년 12월 10일 요나스 메카스는 절망적인 소식을 듣는다. 동생 아돌파스 메카스와 뉴욕 언더그라운드 영화계의 다른 백수들과 함께 전설적인(그때는 아니었지만) 영화 잡지 [필름 컬쳐]를 창간했지만, 그들에게 돌아온 돈이라고는 고작 120달러가 전부라는 소식이었다. 다음 호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돈은 700달러. 메카스는 심플한 해결책을 떠올린다. 편집위원들에게 100달러씩 갹출하는 방법이었다. 참고로 초등학교 시절 나의 꿈은 전국민에게 100원씩 받아서 놀고먹는 것이었다. 물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조지는 남미 여행을 준비하느라 빈털터리 신세였다. 루이스는 잡지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줄 수 있다고 했다(“돈만 빼고”). 메카스 형제는 원래 돈이 없었다. 고든은 돈이 있다, 하지만 돈을 낼 수는 없다, 그건 신념의 문제다, 라고 말했다. 왜? 엘비스 프레슬리 모창 가수와 동명이인이자 훗날 에드워드 마이브리지, 토마스 에이킨스, 미국 영화의 기원에 대한 책을 출간하게 될 고든 헨드릭스가 메카스를 쏘아붙였다. 왜 돈도 없으면서 잡지를 시작한 거야? 최소한 3호나 4호 정도는 낼 돈은 쥐고 있었어야 하는 거 아냐? 만약 우리들이 전부 그렇게 생각했다면 [필름 컬쳐]를 시작하기 위해 22세기까지 기다려야 했을 것이다. 메카스는 말했다. 세상에는 돈도 있고 사업 수완도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이건 돈도 없고 사업 수완도 없는 우리가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신은 잔인하다… 무거운 마음으로 집에 돌아온 메카스는 일기장을 펼쳤다. 그리고 이렇게 썼다: 오늘 아침 법원에서 소환장이 날아왔다는 얘기는 차마 꺼내지도 못함. 인쇄비를 주지 않았다며 인쇄소에서 우리를 고소했다. 783달러 91센트를 갚아야 한다, 일주일 안에… -제가 하고 싶은 말이 이거예요. -돈도 없고 구독자도 없지만 우리가 해야만 하는 일이라고요? -신은 잔인하다고요. 3. 볼륨을 높여라! 최근 나는 오디오와 엘피에 빠져 8개월 할부(그 이상은 무이자가 안 됨)로 너무 많은 것을 샀다. 최소한 3/4분기까지는 뭘 사기는커녕 마리모처럼 꼼짝없이(움직이면 돈이니까) 누워 지내야 할 판이다. 마감은 늘 밀려 있고 시간은 부족하고 의욕적으로 시작한 유튜브 채널의 구독자는 23명이다(아마 다 아는 사람이지 싶다). 그렇지만 최근 몇 년 중에 가장 의욕이 넘치고 동시에 홀가분한 마음이기도 하다. 인생, 우주, 그리고 모든 것에 대한 궁극적인 질문의 답인 42(더글러스 애덤스의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참고)살이 되어서 그런가? 마치 [기나긴 이별]이라고 이름 붙인 장편소설의 초고를 끝낸 레이먼드 챈들러 같은 기분이다. 1952년 5월 14일 담당 편집자에게 보내는 편지를 챈들러는 이렇게 썼다. “나는 이것을 내가 원하던 대로 썼습니다. 왜냐하면 이제 그럴 수 있게 됐으니까요.” 물론 나는 챈들러가 아니다. 일기나 트윗, 심지어 메모조차 내가 원하는 대로 쓰지는 못한다. 영상이라면 조금 다를지도 모르지만, 영상을 다룰 줄도 모르고 다루는 법을 배울 여유도 없다. 하지만 내게는 이미 이중의 우회로가 마련되어 있다. 1)이건 글이 아니라 유튜브 라이브임 2)유튜브 라이브지만 글을 통해서 송출되는 라이브임 말하자면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 없는 일종의 회색지대가 있고, 그곳에서 나는 중력의 존재를 모르기 때문에 중력의 영향을 받지 않는 사람처럼 굴 준비가 되어 있다. 개연성과 물리법칙을 가볍게 무시한 채 라이브 스트리밍 도중에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을 하기도 하고(이렇게), 중간중간 의미없고 지루한 부분을 빠르게 건너뛰며 플래시 포워드를 하기도 할 것이다(저렇게). 서두르자. 어쨌거나 밤은 짧을 것이고 우리에겐 아직 많은 이야기가 남아 있다. 4. 비카인드 리와인드 -21세기 한국 영화가 < 박하사탕 >과 함께 시작했다는 거 알고 있었어요? -아니요? -2000년 1월 1일이 딱 되자마자 개봉했대요. 자정에, 특별 이벤트로. 새로운 천년의 시작을 나 다시 돌아갈래! 하는 절규와 함께 시작한 셈이죠. How ironic? -2000년 1월이면 20세기잖아요. 21세기는 2001년부터고요. -…넷플릭스에 있길래 다시 봤는데 저희가 그동안 연재를 통해 이야기했던 한국 영화의 특질들, 그러니까 목욕탕이니 노래방이니 화면을 가득 채운 K-얼굴의 스펙터클 같은 것들이 전부 나오더라고요. 종합선물세트처럼요. 정말이지 깜짝 놀랐지 뭐예요. 우리가 더듬더듬 어떻게든 길을 찾아가고 있구나, 하는 생각도 들어버렸고요, 하핫. -저기요? -그럼 이쯤에서 이런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은데요. 이창동 감독은, 그 전직 문화부장관은, 아니 미래의 문화부장관은 과연 <박하사탕>을 통해 어디로 돌아가고자 했던 걸까요? -K정연? 제 말 안 들려요? - 설경구 가 기차 선로에 서서 문제의 대사를 외쳤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어요. 설경구와 충돌한 기차는 뒤로 가기 시작하고요. 1994년 여름으로, 1987년 봄으로, 1984년 가을로, 1980년 5월로, 1979년 가을로, 그리고… -야. 물론 <박하사탕>은 회귀물이다. 그리고 이창동은 21세기 한국 대중서사의 우세종이 된 웹툰과 웹소설의 트렌드를 선취했다. 혹은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박하사탕>은 한국 현대사의 외상적인 사건들을 통해 재구성한 ‘60년생 김영호’(아마도 그의 생일은 4월 19일일 것이다)의 이야기다. 그렇다고 이창동이 [82년생 김지영]의 성취를 선취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창동의 영화가 거대한 역사의 흐름에 떠밀리다가 흐름 그 자체가 되는 문제적-남성-개인의 픽션을 보여준다면, 조남주의 소설은 거대서사 속에서 매번 남자주인공의 아내(김여진)로, 정부(서정)로, 작부(고서희)로, 첫사랑(문소리)으로 주변화되고 대상화되는 여성들의 삶-이야기들을 통계와 기사를 재료로 픽션의 형태로 재구성한 것이다, 아주 가까스로(소설이 지영을 진료한 남의사의 진술을 통해 성립된다는 사실을 기억할 것. 그것이 바로 소설이라는 근대적 양식의 본질이다). 둘의 차이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또 다른 자리가 필요하다. 20년의 시간을 회귀해 스무살의 천변으로 돌아간 김영호는 첫사랑 순임을 다시-처음 만난다. 손으로 뷰파인더를 만들어 주위를 둘러보며 나중에 사진을 찍고 싶다고, 사진기를 메고서 이런 이름 없는 꽃들을 찍고 다니고 싶다던 영호는 순임에게 말한다. -이상해요. 여기 내가 한 번도 와본 적이 없거든요? 근데 옛날에 한 번 와본 데 같아요. 저 철교랑 강이랑 다 낯익어요. 여긴 내가 너무나 잘 아는 데거든요? -그럴 때가 있어요. 그런 건요, 꿈에서 본 거래요. -정말 꿈이었을까요? -영호 씨, 그 꿈이요. 좋은 꿈이었으면 좋겠어요. 그렇지만 그 꿈은 좋은 꿈이 아니고 악몽이고 그 속에서 영호는 스스로 다른 이들이 꾸는 악몽의 주재자가 된다. 그렇기에 그는 손뼉을 치며 ‘나 어떡해’ 노래를 부르다가도 홀로 무리에서 떨어져나와 돌바닥에 누워 철교를 올려다보며 조용히 눈물 흘리는 것이다: 그는 그것이 꿈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혹은, 그것이 꿈이라는 걸 알지만 그 꿈에서 깰 수 없다는 것도 안다. 아무리 역사의 열차를 뒤로 가게 만든다고 하더라도 궤도 밖으로 나갈 수는 없다. 따라서 이건 회귀물이라기보다는 루프물이다(“나 ‘다시’ 돌아갈래!”). 정해진 루트를 반복해서 달리는 열차의 운동이 그런 것처럼. 그런데 만약 충분히 많이 되돌린다면 어떨까? 20년이 아니라 아예 100년 쯤을 되돌린다면? 처음으로, 1895년 12월 28일 파리의 그랑 카페에 뤼미에르 형제의 열차가 도착하던 때로 되돌아갈 수 있다면? 세계 규모의 전쟁이나 유대인 문제에 대한 최종 해결책은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했고 크툴루의 부름은 아직 들려오지 않았으며 원한다면 누구나 아무 거리낌 없이 이름 없는 꽃을 찍고 서정시를 쓸 수 있었던 시대로. 그땐 어쩌면 좋은 꿈을 꿀 수 있을지 모른다. 최소한 더 길고 다채로운 꿈이라도. 그리하여 영호(와)의 악몽이 조금이나마 희석될 수 있도록. 물론 이것은 비약이다. 왜 아니겠는가? -차라리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네요. <박하사탕>의 회귀(루프)는 가리봉 봉우회에서 야유회를 갔던 천변에서 시작하고 또 끝나지만, 21세기 한국 영화는 설경구의 외침과 함께 과거(트라우마적)-현재(망가진)의 무한 루프를 벗어나 대과거(기원)로의 동반 회귀를 감행했다고요. -요즘 웹소설을 너무 많이 읽은 거 아니에요? -그곳에서 한국 영화는 현실을 바꿀 수는 없지만 최소한 현실이 아직-도래하지-않은-척은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따라서 한국 영화는 ‘정치적인 것’을 생산해내기를 멈추고, ‘정치’를 서사 내부에 가둔 채 극의 논리에 따라 자체적으로 소멸되고 해소될 수 있는 스펙터클을 더 잘 만드는well-made 일에 매달리기 시작했지요. 그것 말고는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으니까요. 마크 피셔를 따라 말하자면 21세기 첫 20년 동안 한국 영화의 장르는 단 하나, 바로 자본주의 리얼리즘입니다! -그만! 저는 여기서 나가야겠어요. -한국 최초의 천만 영화가 실화를 바탕으로 한 강우석의 < 실미도 >라는 사실을 기억하세요. 물론 그 영화는 웰메이드가 아니지만요. 거기서 설경구는 1971년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죠. 비겁한 변명입니다… 5. 노 홈 무비 2001년 1월 1일 <박하사탕>과 함께 시작한 21세기 한국 영화의 첫 20년은 2019년 12월 26일 지각 개봉한 허진호 의 < 천문: 하늘에 묻는다 >와 함께 끝난다. 혹은 그보다 조금 이른 7월 24일에 개봉한 송강호 박해일 주연의 < 나랏말싸미 >와 함께 끝났다고 해도 좋다. 둘 다 세종대왕을 내세우고 있다는 게 지금 생각하면 무척 묘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진정한 끝은 2019년 12월 31일 당시에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신문 기사와 함께 왔다(뉴시스, “中 우한서 원인불명 폐렴 환자 집단 발병...당국 긴장”). 돌아보면 21세기 첫 20년의 한국 영화는 대규모 물량 공세와 와이드릴리즈를 통해 누가 천만이라는 깃발을 가져갈 것인가를 두고 다투는 ‘극장전(劇場戰)’에 지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충무로의 토착자본이 CJ나 롯데 같은 대기업의 자본으로 재편된 21세기 한국 영화가 돌아가고자 했던 곳은 어쩌면 스튜디오 제작 체계가 확립되던 무렵의 헐리우드, 황금기라고 불리는 시절의 헐리우드였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이 더는 불가능해진 지금 한국 영화는 모두가 알고 있는 것처럼, 그러나 그게 정확히 무엇인지는 누구도 모르는 것처럼, 새로운 시기에 접어들었다. 덩달아 내 인생도 새로운 시기에 접어들었다. 다들 그렇듯 나 역시 종종 새로운 인생을 꿈꾸긴 했다. 회귀나 빙의나 이세계 같은 황당무계한 상상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결코 이런 식은 아니었다. 지금 같은 삶은 아니었다. 한동안 내가 그렸던 미래는… 우리 가족이 살 수도 있었을 그것은… 솔직히 나는 <나랏말싸미>가 천만 영화가 될 줄 알았다… 6. 내 차 봤냐? -요즘에도 극장 자주 가세요? -요즘에도 극장 안 가세요? -작년에는 한 번 갔던 것 같아요. 같이 갔잖아요, < 라스트 듀얼 > GV하러. 아 GV 전에 미리 보느라 시사회도 갔었으니까 두 번이죠. 아내가 시간 나면 지돈씨랑 같이 영화나 보라고 유효기간이 12월 31일까지인 라이카 시네마 초대권 두 장 줬는데 결국 그건 못 갔네요. 아쉬워라. -정말… 너무 아쉬워서 눈물이 날 것 같네요… 그래도 올해는 벌써 한 번 다녀왔다. 3시간짜리 영화였으니 1.5번이라고 해야 하나? 맞다, 하마구치 류스케의 < 드라이브 마이 카 > 이야기다. 타임라인에 쏟아지는 트네필들의 기립박수에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과연. 영화는 재밌었다. 중간중간 지루할 법도 한데 3시간짜리 영화라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한 2시간 26분 정도로 느껴졌달까? 물론 엉덩이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나는 욱신욱신 쑤시는 꼬리뼈와 함께 도서관에 갔고, 무라카미 하루키의 원작 소설을 읽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어정쩡한 자세로 의자에 걸터 앉아 일기장을 열었다. 그리고 이렇게 썼다. 새삼 느낀 하루키의 인기 비결: 그건 그가 통속성을 다루는 방식에 있는 것 같다. 하루키의 소설은 일종의 제로 콜라다. 통속적인 멜로드라마를 다른 방식으로 보여주기보다는, 통속적인 멜로드라마에서 결정적인 ‘X’를 제거한 채 그것에 조금 미달하는 방식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반면 하마구치 류스케는 다르다. 내 생각에, 그건 이 영화가 탐구하는 핵심적인 질문이 통속성을 어떻게 대할 것이냐 라는 문제이기 때문인 것 같다. 혹은 이 영화가 탐구하는 핵심적인 질문은 인생을 어떻게 대할 것이냐 라는 문제인데, 하마구치 류스케는 인생이 통속성 그 자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중략…) (…중략…) 다시 말해보자. 가후쿠에게는 맹점이 있다. 아내가 살아 있을 때 발견된 맹점은 아내가 죽은 후 더 커지지도 줄어들지도 않은 채 그 상태 그대로 거기에 있다. 그것이 커지지 않은 이유는 가후쿠가 때마다 안약을 넣기 때문이다. 즉, 가후쿠가 눈물을 흘리기 때문이다! 그는 무엇을 보려하지 않는가? 그건 바로 통속성이다. 정확히 말하면, 통속성 자체가 바로 맹점이다. 통속성이란 어떤 것들을 설명하는 가장 간편한 방식인 동시에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럼 결국 주인공의 녹내장은 나은 건가요? -의사는 정확한 원인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완치가 불가능하다고 말했잖아요. 그럼 정확한 원인을 알게 되면 완치할 수 있다는 이야기 아닐까요? 물론 이건 제 생각일 뿐이지만요. 진료는 의사에게 약은 약사에게. -저도 재밌고 잘 찍은 영화라고 생각하는데, 몇몇 장면은 도저히 못 참겠더라고요. 특히 마지막 눈밭에서 연설하는 부분. 보면서 진짜 와 저래도 돼? Really? -엄청 뻔뻔하죠. 저도 그 부분 보면서 좀 그랬는데, 이 영화를 좋아하는 분들도 아마 그 부분까지 좋아하는 건 아닐 것 같아요. 다만 뭐랄까, 그 부분이 있기 때문에 영화를 더 좋아할 수는 있겠죠. 어떤 결정적인 작은 흠이 전체를 더 매력적으로 느껴지게 하고, 나아가 옹호해주고 싶게 만드는 것처럼요. 그러니 우리도 좋은 이야기만 하죠. -저는 운전하는 장면들이 좋았어요. -저는 담배 피우는 장면들이 좋았어요. -저는 니시지마 히데토시가 너무 잘생겨서 깜짝 놀랐어요. 원래 이렇게 잘생겼나? 얼굴을 좀 고쳤나? -잠깐, 왜 우리가 <드라이브 마이 카> 이야기를 이렇게 길게 하고 있는 거죠? 지금? 한국 영화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기에도 모자랄 판에. 7.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런데 한국 영화가 도대체 뭘까요? 이제 와서 새삼 묻는 것도 우습지만, 연재가 지속될수록 한국 영화가 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자꾸 들어요. -언젠가 이승훈 시인(하늘에서 평안하시기를)은 시가 무엇인가를 안다면 우리는 시를 쓸 필요가 없다고 말했어요. 한국 영화가 무엇인가를 안다면 우리는 한국 영화에 대한 에세이 필름을 만들 필요도 없겠죠. 이런 글을 쓰고 있을 이유도요. -한국 영화를 새롭게 발견하려고 하고 있다는 말인가요? -내 인생을 새롭게 발견하려고 하고 있다. 그렇다. -?? 왜 갑자기 반말…? -정신 차리세요! 지금 우리에게는 격식이나 따지고 있을 시간이 없습니다! 틱톡 틱톡! 단도직입적으로 물을게요. <드라이브 마이 카>에는 한국 배우들이 셋이나 출연하고 한국말도 자주 나오죠. 한국인 스텝들도 여럿 참여했고요. 에필로그 같은 마지막 장면의 배경이 부산이기도 한데요, 그럼 <드라이브 마이 카>는 한국 영화일까요 아닐까요? A)한국 영화라면 그 이유는? B)한국 영화가 아니라면 그 이유는? -갑자기 그런… -그만! 대답하지 마세요. 어차피 시간도 없으니까! 결론부터 말하겠습니다. 중요한 건 <드라이브 마이 카>가 한국 영화냐 한국 영화가 아니냐가 아니에요. <드라이브 마이 카>를 한국 영화로 받아들일 것인가 받아들이지 않을 것인가가 문제인 거죠. -받아들인다고요? -아카데미 위원회가 21세기의 새로운 20년을 맞아 < 기생충 >을 미국 영화로 받아들인 것처럼요. -도대체 누가 <드라이브 마이 카>를 한국 영화로 받아들인다는 건데요? 무슨 자격으로요? -그건… 그때 갑자기 화면 멈추고, 멈춘 화면 위에 빨간 자막이 뜬다. (자막) “K-씨네필의 이름으로(In The Name of The K-inephile)” (To be continued…) (관련글) 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 , 금정연, 2021.03.19. 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 , 정지돈, 2021.05.07. 3.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3) , 금정연, 2021.06.11. 4.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4) , 정지돈, 2021.07.03. 5.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5), 금정연, 2021.08.06. 6.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6), 정지돈, 2021.08.31. 7.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7) , 금정연, 2021.10.08. 8.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8) , 정지돈, 2021.11.05. 9.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9) , 금정연, 2021.12.03. 10.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0) , 정지돈, 2021.12.31. 1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1) , 금정연, 2022.03.02. 1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2) , 정지돈, 2022.03.30. 13.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3) , 금정연, 2022.05.11. 14.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4) , 정지돈, 2022.06.10. 15.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5) , 금정연, 2022.07.08. 16.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6) , 정지돈, 2022.08.03. 17.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7) , 금정연, 2022.08.31. 18.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8) , 정지돈, 2022.10.14. 19.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9) , 금정연, 2022.11.11. 20.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0) , 금정연, 2022.12.07. 2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1) , 정지돈, 2022.12.15. 2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2) , 정지돈, 2022.12.30.
K정연과 알고 지낸지 거의 10년이 됐지만 함께 영화를 본 건 손에 꼽는다. 그와 많은 것을 했다. 밥을 먹고 산책을 하고 커피를 마시고 술을 마시고 택시를 타고 비행기를 타고 도쿄에 가서 목욕탕에 가고 한 침대에서 자고 파리에서 햄버거를 먹고 전동 킥보드를 타고 전시를 보고 런던의 클럽에서 아마추어 밴드의 저주에 가까운 음악을 듣고… 그러나 영화를 같이 봤냐고 물으면 기억나는 건 단 한번 뿐이다. 임재철 평론가의 클래스에서 본 장 피에르 고랭의 <루틴 플레져 Routine Pleasures>(1986). 지난 글에서 말한 바 있는 이 영화를 서너명의 사람들과 어느 출판사 건물에 딸려 있는 강의실에서 봤다. 밤이었고 출판사에는 사람이 없었고 왜인지 우리가 허락도 받지 않고 몰래 영화를 보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 이상 아무도 상영하지 않고 보지 않는 영화를 보기 위해 도시를 떠돌며 빈 건물을 일시적으로 점유하는 씨네-프레카리아트. <The Cinema of the Precariat>의 서두에 톰 자니엘로는 이렇게 쓴다. “프레카리아트는 미미한 존재감 때문에 언제든 끝장날 수 있음에도 계속 (영화에 관한) 일을 하는 사람이다. 그것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기 때문에.” 1) <루틴 플레져>는 장 피에르 고랭의 나레이션으로 시작한다. “두 남자가 작은 역의 벤치에 앉아 기차가 들어오길 기다린다. 한쪽이 자기 인생사를 들려준다. 난 언제나 그런 이야기를 좋아했다. 로저가 이야기를 끝내면 내 이야기를 시작할 것이다.”(장면: 살찌고 머리가 벗겨진 중년 남자와 그를 바라보는 장 피에르 고랭 미디엄 투샷) <루틴 플레져>의 오프닝 씬을 나와 K정연의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한쪽이 이야기를 끝내면 다른 쪽이 이야기를 시작한다. 어느 쪽이 살찐 아저씨인지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중요한 건 결국 둘 다 말하고 둘 다 듣게 될 거라는 사실이다. 이 과정은 일반적인 대화와는 약간 다르다. 영화와 관객의 관계와 유사하다고 할까? 영향을 주고받지만 실시간적으로 일어나는 교류나 상호작용은 아니다. 한쪽이 끝날 때까지 다른 한쪽은 기다려야 한다. 영화는 인터랙티브 아트가 아니다. 영화가 마주해야하는 건 즉각적인 응답, 반응, 참여가 아니라 어둠과 침묵 속에서 이어지는 불안정한 기다림이고 불현듯 잉태되고 사라지는 잠재성이다. 조르조 아감벤은 <내용 없는 인간>에서 예술 작품을 바라보는 행위를 시간의 지속성이 단절되고 차단된 느낌, 정신의 바깥, 근원적인 차원에 체류하는 사태로 묘사한다. 이러한 유보를 그리스어로 에포케epoche라고 한다. “즉 리듬의 에포케라는 바깥으로 떨어져 나오는 행위를 통해 예술가와 관람자는 그들의 본질적인 동맹 관계와 공동의 지반을 다시 발견하게 된다.” 2) 이것이 영화라는 매체가 우정을 형성하는 방법이다. 영화는 우정의 한 형식이다. 정성일과 유운성 평론가의 평론집 첫 챕터 제목은 각각 다음과 같다. “지구라는 행성에서 영화 친구를 사귀는 방법에 관한 작은 가이드”. 3 ) “우정의 이미지들”. 4) 유운성은 세르주 다네를 인용한다. “유대 그리고 우정이라는 말은 아주 아름다운 말이다. 나는 한번도 우정이라는 관계 이외에 사람들과 다른 어떤 관계를 가질 수 있다고 상상해 본 적이 없다.” 정말이지 영화만큼 우정을 사랑하고 의미화하는 예술도 없다. 그런 의미에서 지돈씨와 제가 10년 동안 같이 본 영화가 한편이라는 사실이 우리 관계를 증명해주는 같네요. K정연이 말했다. 뭘 증명하는데요? 우리가 친구가 아니라는 사실. 영화와 우정에 대한 K정연의 철학에 따르면 만약 우리가 친구였다면 더 많은 영화를 함께 봤을 거란다. 그 태도가 너무 단호해 나는 섭섭함과 함께 왈칵 눈물을 쏟을 뻔했다고 하면 거짓말이고 뭔가 반전이 있겠거니 했다. 예를 들면 우정은 친구 이상의 것, 자신 안에서 타자를 발견하는 탈주체화의 지각이자 게니우스genius적인 것과 스페키에스species적인 것과의 관계 맺음이며 극장과 카메라가 사라지거나 감춰진 새로운 미디어 환경에서의 변화한 상호주관적인 행위다, 등등. 그러나 K정연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제가 2살 많잖아요. 헉. 앞으로 형이라고 하세요. K정연…!! 나는 비명을 지르며 잠에서 깨어났다. 시간을 보니 오후 여섯시였고 나는 원고를 쓰다 지쳐 컴퓨터 앞에서 깜빡 낮잠이 든 거였다. 메일이 와 있었다. 영자원 담당자에게 온 메일로 마감 시한을 고지하는 내용이었다. 나는 K정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꿈 얘기는 하지 않았고 우리가 써야할 원고에 대해서, 우리가 만들 에세이 필름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눴다. 정연씨의 이야기를 그대로 받아쓸 테니 어서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21세기 한국영화의 과거와 현재, 미래에 대한 고견을 들려주세요! K정연이 말했다. < 고양이를 부탁해 >(2001)는 계급과 주거, 프레카리아트에 대한 영화다, K시네마를 주거와 부동산의 역사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무주택자의 영화, 다주택자의 영화, 전세사기꾼의 영화, 메타버스 가상부동산 업자의 영화… 홍상수와 김기덕은 홈리스 영화의 대표적인 두 형상이다, 한쪽은 돈이 많아서 집 없이 전국을 떠도는 모텔-호텔 생활자, 다른 한쪽은 돈이 없어서 강바닥과 절을 떠도는 (검열)… 등등. K정연은 이사를 한뒤 부동산에 대한 관심이 많아졌다고 했다. 나는 동료 소설가인 오한기도 부쩍 부동산에 관심이 많아졌다고 말했다. 왜 사람들은 집에 관심이 많은 거예요? 지돈씨도 결혼하고 애 낳으면 알 거예요. K정연……. 네? 아니에요. 모든 한국의 연극영화과가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다녔던 학교에는 이상한 문화가 있었다. 선배를 무조건 형이나 누나, 언니 또는 오빠라고 불러야 했다. 선배를 선배라고 하면 하극상으로 끌려가서 얼차려를 받았다(대체 왜?). 자신보다 어린 선배를 선배라고 하면 기강이 해이해진다는 이유였다. 형, 누나야말로 윗사람을 대하는 진정한 호칭이란다(설명을 들어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당신은 정상…). 이것 말고도 학교에는 이상한 문화가 많았지만 이 자리에서 다 얘기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나는 선배들을 피해다녔다. 형, 누나 호칭이 입에 붙지 않아서였다. 외동으로 자란 탓일까? 사람들은 왜 형이나 누나, 오빠, 언니라는 호칭을 좋아할까. 나는 생각했다. 내가 영화를 찍지 않는다면 바로 이것 때문이라고, 유사 가족 문화권에서는 진정한 시네마가 태어날 수 없다고. 가족은 우정이 아니라 혈연이고 K시네마의 혈연은 가부장제와 연결되며 가부장제는 남성연대와 여성혐오로 이어지고 결국 신자유주의적 가치 체계를 내면화한 청년 남성으로 과대표화된 담론과 정치를 불러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가 지금, 바로, 이 순간에 고양이를 부탁해를 다시 보자고 한 거예요. K정연이 말했다. 영화야말로 젠더를 생산하고 그 성격을 결정짓는 “젠더 테크놀로지”입니다. 5) 솔직히 고백하면 나는 <고양이를 부탁해>를 보지 않았다. 영화 개봉 당시 생물학적 여성인 친구들이 너무 좋다고 말하며 등장 인물들의 대화와 행동을 흉내내고 논평했던 게 기억나지만, 나는 보지 않았다. 그건 단지 우연이었을까, 아니면 내가 컴퓨터 스크린으로 혼자 영화를 보는 것만을 유일한 낙으로 생각한 웹친화형 K-시네필이었기 때문일까. <고양이를 부탁해>를 검색했다가 잊고 있었던 단어를 발견했다. “와라나고”. 와라나고는 수작이지만 블록버스터에 밀려 극장에서 제대로 상영 못한 영화를 네티즌이 발굴해낸 영화 다시 보기 캠페인이었다. < 와이키키 브라더스 >(2001), < 라이방 >(2001), < 나비 >(2003), <고양이를 부탁해>. 문득 기억 속에 묻어두었던 영화들이 생각났지만, 다시 한번 솔직히 고백하면 나는 와라나고 캠페인에 속한 어떤 영화도 보지 않았다. 이런 내가 21세기 한국영화에 대한 에세이필름을 만들 자격이 있을까. 이렇게 영화를 안 보는데? 학교 선배들이 왕가위와 이와이 슌지, 미야자키 하야오를 보지 않는다고 훈계를 했던 해묵은 일도 기억났다. 어떻게 < 스왈로우테일 버터플라이 >를 안 볼 수가 있어? < 화양연화 >도 안 봤다고? 제정신이니? 넌 영화과라고 할 수가 없구나. 과거가 떠올라서일까, 아니면 단지 원고를 쓰고 에세이필름을 만드는 일의 어려움과 지속불가능성, 때때로 급습하는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하는 회의와 공포 때문일까. 나는 K정연에게 다음 문장으로 끝나는 긴 메일을 보냈다. “…… 건강하고 밝은 사람으로 살고 싶은데 그건 무리겠죠? 격일로라도 밝게 살았으면 좋겠다.” 다음날, K정연에게 전화가 왔다. 지돈씨. 그가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왜 K정연인지 알았어요. 왜요? 키아누 리브스가 뉴욕타임즈 비평가 선정 21세기 가장 위대한 배우 4위인 거 아시죠? 키아누 리브스 생일이 9월 2일이거든요. 그리고 제 생일도 9월 2일. 지난 원고에 이 이야기를 쓴다는 걸 깜박했네요. 그걸 왜 써요…. 오늘은 오전에 나윤이(K정연과 박지은 사이에 태어난 딸을 뜻함) 문화센터에 데려다주고 작업실로 가는 버스를 탔거든요. 버스에서 상우씨가(이상우 소설가를 뜻함) 추천해준 젠하이저 이어폰을 끼고 넷플릭스로 <키드 디텍티브>를 보며 응암으로 가는데 문득 기분이 이상한 거예요. 세줄 뒤에 앉은 덩치 큰 중년 남자가 저를 쳐다보는 것 같더라구요. 그게 누군지 아세요? 키아누 리브스? 유운성 평론가. 헉. 그래서요? 그래서…. K정연이 말했다. 그래서… (다음 화에 계속) 1) <The Cinema of the Precariat: The Exploited, Underemployed, and Temp Workers of the World >(Thomas Zaniello, Bloomsbury Academic, 2020) *본문에서 괄호 안은 옮긴이가 추가한 내용이다. 2) <내용 없는 인간>(조르조 아감벤, 윤병언 옮김, 자음과모음, 2017) 3)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정성일, 바다출판사, 2010) 4) <유령과 파수꾼들>(유운성, 미디어버스, 2018) 5) “섹스리스 K-시네마: 한국영화 속 젠더 배치의 문제”, <21세기 한국 영화>(손희정, 앨피, 2020) (관련글) 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 , 금정연, 2021.03.19. 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 , 정지돈, 2021.05.07. 3.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3) , 금정연, 2021.06.11. 4.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4) , 정지돈, 2021.07.03. 5.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5), 금정연, 2021.08.06. 6.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6), 정지돈, 2021.08.31. 7.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7) , 금정연, 2021.10.08. 8.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8) , 정지돈, 2021.11.05. 9.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9) , 금정연, 2021.12.03. 10.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0) , 정지돈, 2021.12.31. 1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1) , 금정연, 2022.03.02. 1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2) , 정지돈, 2022.03.30. 13.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3) , 금정연, 2022.05.11. 14.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4) , 정지돈, 2022.06.10. 15.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5) , 금정연, 2022.07.08. 16.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6) , 정지돈, 2022.08.03. 17.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7) , 금정연, 2022.08.31. 18.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8) , 정지돈, 2022.10.14. 19.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9) , 금정연, 2022.11.11. 20.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0) , 금정연, 2022.12.07. 2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1) , 정지돈, 2022.12.15. 2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2) , 정지돈, 2022.12.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