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정신 : 더 무비
- 감독
- 피터 조셉
- 제작년도
- 2007
‘우미관’(1912~1982)은 70년 남짓이라는 긴 시간 서울의 종로 관철동에 위치하면서 도시 문화사의 한 축을 설명하는 키워드이자 어떤 장소성의 표식으로 기능해 왔다. 예컨대, 김두한(1918~1972)을 ‘영웅 협객’으로 그려냈던 임권택 감독의 영화 <장군의 아들> 3부작(1990~1992)이나 TV드라마 <야인시대>(2002~2003)에서 1930년대의 우미관은 종로 주먹의 요람과 같은 장소로 등장한다. 실제로 우미관 주변을 근거지로 삼았던 주먹패가 있었고, 종로를 누가 차지하느냐를 두고 ‘내선(內鮮)’ 간 치열한 주먹 다툼도 있었다. 김두한이 해방 후 국회의원이 되어 오물 투척 사건으로 영웅 협객의 파란만장한 정치사를 써나간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우미관의 김두한’ 혹은 ‘김두한의 우미관’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한동안 대중문화에서 우미관은 김두한으로 대표되는 ‘협객의 무대’로 표상, 전유되어 왔다. 열여덟의 나이로 우미관 일대를 제패하고 싸움 실력 하나로 일본인도 무릎 꿇게 했다는 협객 김두한. 일본인 자본가들이나 주먹 패거리로부터 조선인 상인들을 보호하려는 종로 주먹들의 민족적 의기와 의리. 이러한 재현이 우미관을 경험하지 않은 세대에게도 우미관을 기억의 공간으로 자리매김시키는 데 중요한 문화적 기능을 했다는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정말 우미관은 김두한의, 민족적 의기와 의리의 성지였을까. 아니, 어쩌다가 우미관은 종로 협객들의 공간이 된 것일까. 어쩌면 이런 식의 기억하기는 극장이 ‘관객(만)의 공간’이며 ‘관람 행위’가 기대되는 공간이라는 상식, 즉 ‘극장=관람 공간=관객의 공간’이라는 상식을 넘어서는 극장 경험을 암시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근대 문화의 첨단에 있던, 그래서 ‘영화 보기’라는 문화 실천이 근대의 패션으로서 그들의 일상과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던 모던보이와 모던걸뿐만이 아니라, 부랑자, 불량소년, 걸인 등 도시 문화의 주변부에 위치한 하위 주체들에게 극장이라는 장소의 경험이 무엇이었을지에 대해 생각할 계기를 마련해 주는 것이다. * 한국의 첫 근대 장편소설로 기록되는 이광수의 『무정』(1917)은 작가가 일본 도쿄에 체류하는 동안 집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소설 집필 전인 1916년 여름, 그는 잠시 경성을 다녀간 일이 있었다. 『무정』의 일본어판 번역자이자 한국문학 연구자인 하타노 세츠코(波田野節子)는 작품 속 영채의 유서를 근거로 이 소설의 시간적 배경이 1916년 6월 말부터 7월 사이라고 추정했는데, 어쩌면 소설 속 다음의 대목은 이광수가 경성에 머물면서 체험한 종로 밤풍경을 묘사한 것일 수도 있겠다. 밤은 서늘하다. 종로 야시에는 ‘싸구려’ 하는 물건 파는 소리와 기다란 칼을 내두르며 약 광고하는 소리도 들린다. (중략) 아직도 장옷을 쓴 부인이 계집아이에게 등불을 들리고 다니는 이도 있다. 우미관에서는 무슨 소위 ‘대활극’을 하는지 서양 음악대의 소요한 소리가 들리고 청년회관 이층에서는 알굴리기를 하는지 쾌활하게 왔다 갔다 하는 청년들의 그림자가 얼른얼른한다. 1 야시(夜市)가 열리는 종로의 소음들 속에서 “서양 음악대의 소요한 소리”를 가려들으며 우미관의 ‘대활극’을 연상하는 『무정』주인공 이형식을 그 여름의 이광수 자신이라고 했을 때, 그 ‘대활극’은 무엇이었을까. 당시 매일신보 광고를 살펴보면, 1916년 6월 말 우미관의 주요 상영 프로그램은 23일부터 개봉된 ‘세계적 모험 탐정 대활극’ 연속영화 <명금>(The Broken Coin, 1915)이었다. 뉴욕의 탐정소설가 키티 그레이(Kitty Gray)가 유럽 고대 왕국의 비밀을 파헤치기 위해 파란만장한 모험을 펼치는 영화 <명금>은 미국 유니버셜사가 총 22편 44권으로 제작한 연속영화로서, 1910년대 후반 미국발 활동사진 열풍을 불러 일으키며 우미관의 역사에서 가장 빛나는 시절을 장식한 흥행작이었다. 우미관은 1916년 개봉 이래 <명금>을 여러 차례 재상영했고, ‘명금 대회(名金大會)’라는 이름의 상영 행사를 열어 많은 관객들을 유인했다. 한국 근대소설에는 우미관에서 <명금>이 상영되었을 당시를 회고하는 대목이 종종 등장한다. 박태원의 「오월의 훈풍」(1933)에는, 1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수전동 골목 아이들이 우미관에서 본 영화를 흉내 내며 ‘명금 놀이’를 하는 모습을 회고하는 대목이 있다. 아이들은 각자 <명금>에 나오는 인물—‘기지꾸레’, ‘싸치오 백작’, ‘후레데리꾸 백작,’ ‘로로’—이 되어 골목길을 누빈다. 이태준의 자전적 소설로 알려진 『사상의 월야』(1941)에서도 주인공 송빈이 우미관에서 이 영화를 보는 장면이 있다. 우미관의 2층 좌석에서 송빈과 함께 영화를 본 일행은 누가 ‘기지꾸레’이고 누가 ‘후레데리꾸 백작’인지를 이미 잘 알고 있다. 우미관의 <명금>은 한 번도 안 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본 사람은 없는, 그런 영화였던 것이다. 우미관에서 이 영화의 해설을 진행했던 서상호에게도 <명금>은 변사 인생을 대표하는 흥행작이었다. 스물여덟에 경성고등연예관에서 변사 생활을 시작한 서상호는 우미관에서 생애 최고의 전성시대를 맞았다. 우미관은 김덕경, 우정식, 최병룡, 최종대 등을 견습 변사로 두고 영화 해설의 묘미를 선사했는데, 그중에도 서상호는 우미관의 ‘달러 박스’라고 할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명성이 높아지자 그는 우미관과 제2 대정관 사이를 오가며 몸값을 높였고, 단성사가 개관하자 극장주 몰래 변사, 악사, 종업원 등을 빼돌려 단성사로 옮겨버렸다. 이런 그였으나, 우미관에서 다시 ‘명금 대회’를 열었을 때에는 언제 배신했던가 싶게 우미관으로 돌아와 <명금>을 해설했다. 방탕한 생활과 아편 중독으로 생계가 기울고 결국 극장주도 관객도 꺼리는 변사가 되어 버렸지만, ‘우미관의 변사’로서 서상호를 빛나게 해주는 영화가 <명금>이었다. * 서상호의 변사 인생처럼, 우미관의 시대도 점차 기울어갔다. 북촌 조선인 상설관 중 단성사가 독보적인 자리를 차지한 이래, 우미관은 상영되는 영화보다도 극장 주변에서 일어나는 범죄들과 함께 악명을 높여갔다. 공교롭게도 조선총독부가 활동사진필름취체규칙(1926)을 제정하고 영화 검열을 본격화하는 때를 즈음해 도시의 소년범죄가 심각한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기 시작했다. 식민 당국은 영화가 미칠 악영향을 사전에 차단한다는 근거로 검열을 정당화하며, 영화를 보고 국가의 권위에 도전한다든가 범죄 수법 등을 학습하여 공공의 안전을 위협한다든가 하는 범죄자가 양산되는 것, 그리고 영화에 재현된 퇴폐적이고 음란하며 불량한 풍속이 선량한 풍속을 해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조선인 사회의 엘리트들 역시 영화가 모방 범죄를 야기하고 ‘미풍양속’을 위협하는 악한 쓰임새를 가질 수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소년범죄를 영화의 ‘모방범죄’로 치부하는 사회 담론들은 영화가 ‘불량소년’을 제조하는 마술적인 힘을 내장하고 있다는 듯 논했다. 종로의 영화상설관을 근거지로 절도 행각을 벌인 ‘불량소년단’의 검거 기사들은 제목부터 이 사건들이 범죄영화를 좋아하는 ‘영화광’의 ‘모방범죄’라고 암시했다. 영화의 한 장면을 모방했다거나 영화에 등장하는 악한을 흉내 낸 범죄는 말할 것도 없고, 영화를 모방한 범죄라고 단정할 만한 근거가 없어도 소년들이 돈을 훔쳐 극장 구경을 가려 했다는 진술만으로도 범죄 동기가 영화, 특히 이들이 좋아하는 활극영화에서 비롯된 듯 보도되곤 했다. 어떤 범죄의 원인이 ‘활동사진 중독’ 때문이라거나, 범죄의 발생 장소나 과정이 영화상설관과 연관되어 있다고 제시함으로써, 영화와 극장의 유해성을 증명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주장하는 듯 보일 정도다. 영화의 필름을 검열하는 것은 총독부 도서과에서 이루어지는 출판경찰의 업무였지만, 영화가 실제 상영되는 흥행장 및 흥행 행위에 관한 단속은 관할 경찰서 소속 풍속경찰의 업무였다. 풍속경찰은 임검(臨檢)을 명목으로 관련 영업장에 자유로이 출입하는 막대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다. 입장권 없이 극장에 들어가려는 자를 단속하는 것부터 상영 행위가 검열 기준에 저촉되는지의 여부를 판정하는 것, 극장의 위생 상태와 관객의 음란폐풍 행위를 감독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임검에서 수행하는 업무는 매우 포괄적이었다. 말하자면, 극장에서 발생할 수 있는 거의 모든 범죄의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하는 것이 임검 업무였다. 우미관과 그 주변을 근거지로 삼았던 불량소년들이 임검으로 대표되는 풍속경찰의 시야 안에 있었음은 물론이다. 김두한은 우미관의 불량소년들 중 하나였다. 그래서 아이러니하게도, 그들 패거리의 ‘불량’은 식민지 경찰과의 긴장과 대치 관계를 통해 식민지인의 ‘불온’을 구성한 중층적인 측면이 있었다. 이들이 ‘일제’로부터 종로 상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주먹을 휘둘렀다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이들은 ‘보호’라는 명분으로 상인들에게 돈을 뜯어내기도 했다.) 그러나 1930년대 경성이 근대 도시로서 확장되어 가는 동안 그들의 근거지였던 우미관과 그 주변이 상대적으로 종족적이면서도 계층화된 공간으로 게토화될 때, 김두한과 우미관 패거리의 불량스러움은 종족적 혹은 계급적 불온성을 잠재한 것으로 여겨질 수 있었다. 1938년도 경성 주요 극장의 관객 구성을 살펴보면, 2 우미관의 조선인 관객 대 일본인 관객의 비율은 9:1이다. 같은 시기 단성사가 8:2, 명치좌가 5:5의 비율을 보였다는 것을 고려하면, 우미관은 확실히 조선인 관객이 절대적으로 많은 수를 차지하는 극장이었다. 이 시기에는 우미관 역시 이미 북촌의 다른 극장들과 마찬가지로 일본영화를 병영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체 관객 중 조선인이 9할을 차지하는 종족 비율을 극장 프로그램에서 기인했다고만은 할 수 없다. 우미관을 줄곧 ‘3류관’의 위치에 머물게 했던 낙후한 설비와 비위생적인 환경, 저렴한 입장료가 오히려 조선인 관객에게 문턱을 낮추었다고 할 수 있다. 불결하고 불량한 극장의 분위기에 눌려 혹여 불량패들의 표적이 될까 두려워하는 일본인 관객이 굳이 우미관을 찾아 영화를 볼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김두한이 종로에서 싸움으로 명성을 쌓아가던 1930년대를 지나며 바야흐로 우미관과 그 주변은 경성 뒷골목의 불량하고 퇴폐적이며 자극적인 분위기를 물씬 풍기게 된다. 그와 동시에 아이러니하게도 걸인과 부랑자, 불량소년, 하층계급 노동자들에게는 안온한 공간이 된다. 공중화장실의 악취와 근처 우동집의 간장 달이는 냄새, 상경한 사람들이 묵는 싸구려 여관과 여인숙 특유의 음습함과 소음들. 이미 낡고 오래되어 어떤 ‘향수’의 공간이 되어버린 우미관의 화장실에서 왕년의 유명 변사 서상호가 자살하고, 김두한 패거리의 주먹질은 더욱더 골칫거리가 되었다. 우미관과 그 주변은 경성이라는 도시의 식민지적 이원성(식민자 일본인의 공간/피식민자 조선인의 공간)이 극장 문화에서 어떻게 굴절되어 나타났는지, 그 장소성의 다층적 의미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해준다. 1) 이광수,『무정』,김철 편집, 문학과지성사, 2005, 116쪽 2) 「서울 관객 구별」,『삼천리』,1938년 5월호, 25쪽. 상단사진 1. 우미관의 흥행작 영화 <명금(The Broken Coin)>의 두 배우 출처: 송완식 역 『(사진소설대활극)명금』 경성: 영창서관, 1923. (국립중앙도서관 소장자료) <자료> ※ 이하 자료는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 현대어 표기에 맞게 다시 썼다. 일부 표현은 문맥에 맞게 다듬었다. 1. 「영화를 모방한 가두 소년범죄」,《조선일보》,1935년 3월 6일 자, 2면. 이 역시 활동사진을 본뜬 소년의 탐정극 실연 일막 [一幕] ―4일 오후 한시 경에 시외 하왕십리 426번지 배추 행상하는 김사남(金四男, 14)은 배추 수레를 끌고 시내 관철동 우미관 앞을 지나는데 돌연 소년 한 명이 길을 막아서서 김사남의 호주머니에서 현금 60전이 든 지갑을 뺏어 가지고 도망하였으나 김사남은 곧 그 뒤를 추격하려 했더니 다른 소년 한 명이 또 나타나서 붙잡고 방해하였다. 마침 지나가던 종로서원 [鐘路署員] 이 보고 악 [惡] 소년 한 명은 현장에서, 한 명은 전차에서 뛰어오른 것을 쫓아가서 모두 붙잡았는데, 그들은 시내 돈의동 127번지 오량산(吳梁山, 29)과 초음정 14번지 김태산(金泰山, 14)으로서 우미관 부근에 근거를 둔 소년부랑패의 일당인 것이 판명되어 방금 엄중 취조중이다. 2. 일송생(一松生), 「극장풍경」,『영화시대』,1935년 10월호, 59~61쪽. (부분 발췌) 늦은 가을서부터 밤거리의 추워진 공기를 호흡하는 축만시(丑滿時)의 낭객(浪客)―. 텅 빈 종로 거리에 네온사인의 냉광(冷光)을 물리치는 듯 어디선가 구수한 냄새가 날라 온다. 오장육부 속속들이 사무치는 그 구수한 냄새야말로 진미(珍味)의 송곳 끝이 혓바닥을 콕콕 쏘아 한없는 침을 흘리게 한다. 얼큰히 취한 자는 ‘한 잔 더’의 미련으로 발이 안 떨어질 것이오, 맹맥한 노동자의 창자는 이 냄새에 십년은 감수하리라. 이 진미한 냄새. 밤거리의 낭객을 도취시키는 이 ‘구수한 냄새’의 출처는? 우미관 앞. 네 바퀴 달린 ‘오뎅(おでん)’ 장소에서이다. 원래 종로 가까이 있을 뿐 아니라 역사가 오래여서 비록 전신과 후신의 혈통이 다르다고 할지라도 우미관하면 모르는 이가 없고 또 따라서 연상되는 것의 세 가지가 있으니 1. 우미관 쌈패. 2. 우미관 조무래기 관상. 3. 우미관 문전의 ‘오뎅’ 장수 등이다. 근자에 와서는 경찰 당국의 경계로 경성 북촌 유일의 우미관 쌈패의 존재가 적이 미약해진 셈이고 또 네 바퀴 오뎅 장수보다도 그 앞은 카페를 위시하여 오뎅집, 바-, 만둣집 등등 동경(東京) 약초 [浅草, 아사쿠사] 풍경을 연상케 한다. 3. 이태준,『사상의 월야』,《매일신보》, 1941년 3월 4일~7월 5일 연재. (발췌는 1941년 5월 3일자, 4면.) 구경이란 말에 은주는 먼저 나서며 앞을 섰다. 배다리로 나와 광교 큰길을 건너 샛길로 관철동에 들어서니 벌써 군악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무슨 곡조인지는 몰라도 잰 걸음을 걷는데 신이 나게 맞는다. 가까이 가보니 전등을 구슬 꿰듯 해 여러 줄을 늘이었고, 이층 노대(露臺)에서는 눈이 불거진 사람, 볼이 불룩한 사람, 배가 내민 사람들이 새로 닦은 놋그릇 같은 악기를 메고, 들고, 흥겨운 몸짓을 하며 불고 있다. 그 노대 밑에는 큰 간판 그림들이 붙어 있었다. 첫머리엔 ‘명금 대회(名金大會)’라 쓰여 있었고, 달리는 말 위에서 소나무로 뛰어오르는 그림, 큰 다리 위에서 그 밑으로 달아나는 기차로 내려 뛰는 그림, 천여만여한 절벽과 절벽 사이를 자동자전거를 탄 채 건너뛰는 그림, 모두 입을 다물지 못하고 쳐다보는 사람들로 마당이 그득 찼다. 윤수 아저씨는 2층표를 샀다. 은주는 자주 와보는 데인 듯 2층길이 어수선한데도 익숙하게 곬을 찾아 먼저 뛰어가 앞줄에 자리를 맡았다. 은주가 먼저 앉고, 윤수 아저씨가 앉고, 그 담에 송빈이가 앉았다. 앉아서 보니 청년회관 대강당은 어림도 없게 넓고 그런 아래웃층이 별로 남는 자리가 없다. 이윽고 밖에서 나던 군악소리가 무대 뒤에서 나더니 그 군악에 맞춰 변사가 나타났다. 변사가 무대 한가운데 머물러 관중을 향해 예를 하자 군악소리는 뚝 끊쳤다. “오늘 저녁에도 이 우미관을 사랑하사 이처럼 다수 왕림…….” 어쩌고 한참이나, 다음 주일에는 무엇을 상연하겠으니 그때도 많이 와달라는 말까지 늘어놓고야 다시 군악에 발을 맞춰 들어갔다. 이내 불이 꺼지며 사진이 나타나는데 모두가 서양사람들이다. 송빈이가 보기에는 그 사람이 그 사람 같은데 은주와 윤수 아저씨는 어느 게 ‘기지꾸레’니 어느 게 ‘후레디리꾸 백작’이니 하고, 알아맞히며 지껄였다. 영사막 옆에서는 아까의 변사가 다시 나서서 목청을 높여 어떤 일정한 장단이 나게 떠들어댔으나, 송빈이는 한마디도 자세히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하, 재미있어, 하는 은주를 가끔 어스름한 속에서 엿보았다. 4. 이주홍, 「소년행」,《동아일보》, 1967년 12월 27일자, 6면. 저뭄이 깃들어오는 밤이면 영하 17, 8도의 매운바람을 가르면서 소년은 일과대로 종로를 향해 걸어갔다. 외투나 장갑이 있었다면 누가 투정을 할 것이랴. 열다섯 살 어린 소년의 살을 싸고 있는 것은 얇은 면 사지의 교복과 면 샤쓰, 그리고 물감 냄새가 채 가시지도 않고 있는 까만 새 모자에 발가락과 발뒤꿈치가 튀어나와 있는 떨어진 양말과 운동화뿐이었다. 화신상회 건너편의 야시(夜市)를 누비고 나가 소년은 수표다리 못미처에 있는 영화관의 우미관 앞에서 서성대는 습관이었다. 아슬아슬한 장면의 <명금>과 <동도> 그림 간판의 뼁끼는 전등불에 번쩍거리고 있었고, 발코니에서 신나게 뿡빠거려대는 악대 소리는 시골 소년의 가슴을 용수에 넣어 흔들 듯 흥분시켰다. 5전짜리 우동장사의 외는 소리, 왜간장 다리는 냄새와 코크스 타는 냄새를 간지럽도록 맡으면서 소년은 조심조심 매표구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소년은 표를 사려는 것이 아니었다. 손님의 턱밑에 내밀고 애원하는 것은 보인단(普仁丹)이나 영신환(靈神丸)인 것이었다. 지금 아이들만 한 간(肝)이 있었더라도 버스 안 승객들의 무릎 위에 갖은 미사여구로 엮은 삐라를 척척 나눠놓고서 한바탕 반(半)압력의 열띤 애국연설로 연필을 사달라 보챌 수가 있었을는지 모르지만, 지나치도록 암띠고 겁쟁이인 소년은 겨우 한마디로 익힌 대사 “학비를 벌어서 공부하는 고학생이올시다. 동정하시는 맘으로 약 한 첩만 갈아주십쇼”였다. 그러나 하룻밤에 세 첩의 약만 팔아도 두 때의 밥은 살 수 있는 것이었어도, 노상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잘해서 소금으로 반찬 해 먹는 4전짜리 팥밥 한 그릇, 아니면 세 때 네 때를 내리 달아 굶고 늘어져 있어야 하는 얼음장의 냉돌이었다. “배워야 산다.” 단 하나 끝까지 소년을 달랠 수 있는 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3.1 봉기 직후로 삼천리 전역에 불 지른 민족의 대구호, 그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인생행로는 촉도난(蜀道難). 세월이 꿈이 순을 잘라먹었음일까. 이것도 저것도 무엇 하나 제대로 된 것이 없이, 그때만큼이나 추운 날,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눈길을 걸어 효자동의 갈돕회 기숙사로 돌아가고 있던 외로운 소년의 뒷모습을 회상해 보면서, 서글피 오십년 뒤의 그 소년은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다.
1960년 영국에서 제작된 <비트 걸, Beat Girl>은 10대들의 성(性)과 비행을 다룬다는 이유로 제작에서부터 많은 논란을 낳았다. 1959년 3월, 영화의 오리지널 대본인 <스트립티즈 걸, Striptease Girl>은 영국영화검열위원회(The British Board of Film Censors, BBFC) 1 에 제출된 뒤 “기계로 찍어낸 쓰레기(machine-made dirt)”, “몇 년 사이에 본 최악의 스크립트(the worst script I have read for some years)”라는 혹평을 받았다. 이후 영화의 제목을 <비트 걸, Beat Girl>로 변경하고 누드 장면들을 대폭 삭제했으나, 검열위원회는 스트립티즈에 대한 묘사와 소년범죄, 그리고 기차 레일에 누워 담력을 시험하는 십대들의 치킨 게임 장면이 지닌 문제점을 강하게 지적하였다. 결국 영화는 스트립 클럽에서의 노출 장면을 비롯한 문제적인 장면들을 삭제당한 뒤, 관객 제한 수위가 가장 높은 X등급을 받고 개봉하였는데 2 작품에 대한 악의적인 평가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영국 박스오피스에서 성공적인 성적을 기록했다 3 . <비트 걸>의 상영을 둘러싼 논란은 동시대적으로 영화를 개봉되었던 대부분의 국가에서 발생했다. 특히 성에 대한 사회적 담론이 전무하다시피 한 한국사회의 문화적 환경을 고려하면 <비트 걸>의 상영은 그 자체로 놀라운 일이었다. 실질적으로 <비트 걸>의 국내 상영은 4.19 혁명 이후 급진적인 사회변혁의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진 제도적 변화를 빼고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영화를 둘러싼 정책적 기조가 국가권력에 의한 일방적인 통제에서 민간기구에 의한 문화예술의 보호육성이라는 관점으로 이동하면서 영화 상영은 허가제가 아닌 신고제로 변경되었다. 가히 혁명적이라 할 수 있는 제도적 환경 아래서 시장의 자율성은 보다 적극적으로 고려될 수 있었고,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시장 주체들의 도발적인 기획은 영화심의를 둘러싼 논란을 야기했다. 1960년 10월 4일, 영화윤리위원회의 심사를 마친 후 아카데미 극장에서 상영 중이던 <연인들(Les Amants, 1958)>이 불륜을 소재로 삼기에 사회의 미풍양속을 해친다는 이유로 문교부가 일방적으로 상영 중지한 사건은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비트 걸>의 경우는 상황이 조금 달랐다. 외국영화에 대한 수입 추천권을 지닌 문교부는 수입업체인 세기상사가 <젊은 육체들>이라는 제명으로 해당 영화를 배급하고자 했을 때 이를 승인하였고, 오히려 영화윤리위원회(이하 영륜)에서 해당 영화가 사회풍기를 문란케 한다는 이유로 상영보류판정을 내렸다. 이후 세기상사는 해당 조치에 불응하며 상영을 강행하는데, 세기상사와 문교부, 그리고 영륜 사이의 힘겨루기 양상으로 전개되는 <비트 걸> 논란은 박정희의 5.16 군사쿠데타와 맞물려 비로소 일단락되게 된다. 물론, 세기상사는 수입한 영화를 상영해야만 하는 입장이었기에 군부 정권이 자신들의 지배 체제를 수립한 시점에 다시금 상영허가를 신청하게 된다. 현재 한국영상자료원(KOFA)에서 보관하고 있는 <비트 걸> 검열 서류는 영화의 수입과 상영, 그리고 보류통보와 재상영을 둘러싼 일련의 과정을 재구성해볼 수 있는 구체적인 정보들을 포함하고 있다. 우선, 시간상으로 가장 앞선 서류를 살펴보자면, 1960년 11월 9일, 뉴욕에 본사를 두고 있는 리버티 상사(Liberty Trading Company)가 도쿄 지부를 통해 세기상사로 계약관련 내용을 확인하는 전신(cable) 내용이다. [그림 1] 리버티 상사가 세기상사에 보낸 계약 내용 확인 서신 [그림 1]에서 알 수 있듯이 해당 전신은 1960년 10월 29일에 세기상사가 “BEAT GIRL”이라는 제목(안건)으로 리버티상사에 보낸 문의사항에 대한 회신이다. 리버티상사는 세기상사에 <비트 걸>에 대한 복사 권한을 허용하되 프린트 복사를 5본으로 제한한다는 점을 명시하고 있다. 이를 통해 미루어 알 수 있는 내용은 10월 29일 이전에 양자 간의 영화 수입 계약이 체결되었고 원본 네거티브에 대한 듀플리케이션은 세기상사에서 진행했다는 점이다. 현재 남아 있는 검열 서류에는 계약서가 포함되어 있지 않아 판권대금을 비롯한 라이센스 기한과 같은 구체적인 계약 내용은 알 수 없다. 다만, ‘영화상영신고서’에 판권 대금이 “35미리 필름 10권 US $4,000”로 명시되어 있어 계약 사항을 짐작해볼 수 있다. 그러나 현재 남아 있는 ‘영화상영신고서’에는 “35미리 필름 10권 3편”만이 신고 대상에 올라와있는데, 복사판 계약을 5본으로 진행했던 정황을 미루어볼 때, 해당 시점에 나머지 2편에 대한 국내 배급 계약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서는 이후에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그림 2] <비트걸> 영화상영신고서 ‘영화상영신고서’의 경우는 해당 서식이 없어 기존의 ‘허가신청서’를 ‘신고서’로 수정한 흔적을 그대로 보여준다. 허가제에서 신고제로 변경이 그만큼 급격하게 이루어졌음을 엿볼 수 있는데, 여기서 주목해볼 점은 해당 서류에는 제명이 “젊은 육체들”로 변경되어 있다는 점과 1961년 1월 18일에 사단법인 외국영화배급협회를 경유하여 문교부에서 승인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외국영화배급협회는 배급업자들의 이익 단체인 만큼, 영화에 대한 심의권한을 독점하려는 영륜과 긴장관계를 형성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들 협회는 영륜의 권한은 심의 결정이 아닌 권고 수준에 그쳐야 하며, 영화에 대한 최종적 검열 권한은 배급협회에서 자율적으로 마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실질적으로 <젊은 육체들>이라는 제명으로 상영신고서를 제출할 당시, 수입사이자 배급사인 세기상사는 자율적인 심의를 통해 상당한 분량을 삭제하였다. [그림 3] 세기상사에 의한 자진삭제분 一 대사삭제부분 1. 사랑이란 섹스를 고상하게 표현한 말이죠(204) 2. 늙은 바보야(365) 3. 우린 양친과 무관계. 나는 나…. 제니에요. 완전히 독립된 신인간(632-634) 4. 내주엔 펑하고 세계가 연기로 화해 제로에요(650) 5. 법률엔(902, 905,906, 909, 913) 6. 굶주려선 정도를 못 지켜요 (985) 二 화면삭제부분 1. 나이트클럽 장면(5권) 단축 2. 무대 뒤에서 스테이지가 보이는 장면 단축 (529) 3. 노래 장면 삭제… 입과 입, 엉덩이와 엉덩이, 그대 욕적으로 수평선(846~847) 4 4. 제니가 옷을 벗는 장면(8권) 5. 스트립쇼에 유방 나오는 장면(10권) 6. 장면 변경 (1001에서 1010으로) [그림 3]은 1961년 1월 27일자 영화상영신고 품의서로서, 세기상사가 자체 심의를 통해 삭제한 항목이 명시되어 있다. 대사 6개처, 화면 6개처에 해당하는 삭제된 부분은 미풍양속을 해칠 우려가 있는 선정적 장면과 지배질서에 반하는 반사회적 내용에 주로 해당된다. 문교부는 자체 검열 결과에 대해 별다른 의견을 덧붙이지 않고 기안이 올라온 일자에 영화상영신고필증을 발부한다. 그런데 영화상영신고에서부터 신고필증이 발부되기까지 영륜의 심의과정을 반영한 문서는 보이지 않는데, 1961년 1월 28일자 《한국일보》의 기사를 참조해볼 때, 영륜에서는 상영신고 일주일 전인 1월 21일에 <비트 걸>에 대한 실사 심의를 진행하였다. 그리고 해당 영화가 사회풍기를 문란하게 한다는 이유로 전문위원 11명 전원일치로 상영보류 판정을 내렸다. 그리고 세기상사는 영륜의 판정에 불복하여 재심을 청구하였는데, 재심은 1월 27일 오후 7시에 재심이 열린 것으로 확인된다 5 . 그런데 주목할 점은 1월 27일은 세기상사가 자체적으로 문제의 소지가 있는 장면을 삭제하여 상영신고필증을 받은 날이기도 하다. 신고필증이 정확히 언제 발급되었는지 구체적인 시각은 알 수 없지만, <비트 걸>의 러닝 타임이 90여 분인 점을 감안하면, 신고필증의 발부는 영륜의 심의의견이 제출되기 전에 문교부의 일방적인 절차에 따라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결과적으로 영륜의 최종 심의의견은 다음날인 1961년 1월 28일에 언론을 통해서 공개되는데, 영륜은 전원 위원회에서도 9대 7로 상영보류를 희망한다는 의견을 제출한 상황이었다. 세기상사의 입장에서 보자면, <젊은 육체들>로 개봉할 영화는 문교부가 고시한 행정적 절차에 따라 상영신고필증을 받았기에, 상영보류 의견은 받아들일 수 없는 권고였다. 따라서 예정대로 신문사에 광고를 게재하며 “강렬한 장면의 연속! 숨막히는 애욕묘사!”와 같은 자극적인 문구로 대대적인 홍보를 시작하였다. 물론 세기상사의 행보는 영륜의 심의의견이 단지 권고일 뿐 근본적으로 어떠한 구속력도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었기에, 영륜은 언론을 통해 사건을 쟁점화하고 문교부와 세기상사의 행태를 비판하는 여론을 통해 자신들의 존재의미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었다. 결과적으로 영륜은 이 사건을 계기로 영화심의 과정에서 자신들의 입지와 사회적 역할을 분명히 명시하게 되는데, 1월 28일 기사를 필두로 영륜의 존재의미를 부정하는 문교부의 처사를 비판하는 기사가 연이어 쏟아지고, 검찰도 풍기단속을 위해 절차상 직무 유기를 한 이들에게 형법을 적용할 수 있다는 의견을 피력하게 됨으로써 <비트 걸> 논란은 사회적 문제로 부각된다. 결국 문교부장관은 영륜의 존재를 무시할 생각은 전혀 없으며 단순한 사무적인 실수일 뿐이라고 한발 물러섬으로써 사건을 일단락 지을 출구를 마련한다 6 . 이후, <젊은 육체들>에 대한 재심이 진행되었는데, 검열 서류에는 재심에 참여한 위원의 명단을 비롯하여 재심 과정의 내막을 엿볼 수 있는 단서들이 기록되어 있다. [그림 4] <비트 걸> 상영신고 필증 회수 관련 문서 [그림 4]는 1961년 2월 9일, 문교부가 세기상사에게 보내는 공문으로 <젊은 육체들>에 대한 재심의 결과 상영신고필증을 회수한다는 사실을 통보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외국영화 <젊은 육체들>의 상영을 별도의 지시가 있을 때까지 보류함 (2) 앞으로 상영 시에는 제명을 원명대로 할 것 (3) 현재 이후 모든 선전 및 광고에는 '젊은 육체'의 제명과는 일체 무관하게 할 것 신고필증 회수를 통보한 날로부터 나흘 뒤인 2월 13일에는 각 도지사에게 공문을 보내어 “이미 흥행허가가 시행되었다면 긴급히 흥행을 보류시켜 주기”를 요청한다. 그리고 그 다음날인 14일에는 세기상사에 다시 공문을 보내어 복사판 2편에 대해서도 상영신고필증을 반납할 것을 요구한다. 앞서 전신(cable) 내용을 통해 살펴본 바와 같이, 세기상사는 복사판을 5본 제작할 수 있는 권리를 확보했는데, 첫 번째 상영신고서를 제출할 당시에는 3편만을 접수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2편의 복사판에 대한 상영신고는 별도로 신청이 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실질적으로 <젊은 육체들>이라는 제명으로 영화를 개봉할 예정이었던 극장이 대한극장(서울)과 문화극장(부산) 그리고 천일극장(광주)이었던 점을 감안해보면 세기상사는 1차적으로 위의 세 극장과 상영계약을 체결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2편의 복사판에 대한 계약이 체결되고 그에 대한 상영신고필증을 발부받았을 것인데, 2월 14일의 문서는 해당 건에 대한 보류 통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문교부의 일방적인 신고필증 회수통보는 세기상사가 수입추천을 받을 시점인 1960년 11월 29일에 작성하였던 “각서”에 근거한 조치였다. 뿐만 아니라 문교부는 세기상사로 하여금 회수 통보를 받은 즉시 “서약서”를 쓸 것을 요구한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할 시 모든 책임을 지겠다는 포괄적인 내용의 ‘각서’와 ‘서약서’는 행정적 절차의 미비로 발생하는 문제에 대한 책임을 민원인에게 지우고 그에 따른 행정적 처분을 받게끔 한다는 점에서 결과적으로 사후적인 검열의 효과를 발생시키는 것이었다. 즉, 4.19 혁명 이후 검열제도의 폐기는 그 의의와 함께 한계가 분명히 존재하는 만큼, “각서”의 억압적 효과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림 5] <비트 걸> 상영신고 필증 재교부 관련 문서 [그림 5]는 2월 15일 세기상사가 제명을 <비트 걸>로 변경 후 신규로 상영신고필증을 발급받기를 희망하고 이를 허가해줄 것을 요청하는 품의서이다. 상영을 보류하지 않는 조건으로 문교부에서는 “<비트 걸>에 대한 선전 및 광고에서 ‘젊은 육체들’과 전혀 무관하게 할 것”과 “문제의 영화 운운하는 문구를 삽입치 못하게 할 것” 그리고 “영화 상영 시에 있어 관람객을 비롯한 일반여론을 충분히 파악하시어 물의가 있을 시에는 즉시 보고할 것”을 명시한다. 이와 같은 조치는 영화배급사인 세기상사가 노이즈 마케팅의 효과를 이용하려는 시도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조치라 판단된다. 그러나 세기상사는 다음날인 2월 16일, 영화의 선전과 광고가 아니라 “사과문”의 형식으로 신문광고란에 “사회 저명인사 중에는 극력 <젊은 육체들>을 찬양한 바도 있었으나 당국의 요청에 의해 <젊은 육체들>을 <비트 걸>로 개제하여 상영 7 ” 하게 되었음을 적극적으로 홍보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세기상사의 행태는 결국 문교부로 하여금 상영을 중지케 하는 빌미를 제공하는 결과가 된다. [그림 6] <비트 걸> 상영 중지를 요청하는 문교부의 공문 1961년 2월 19일 문교부는 서울특별시 교육감과 각 도지사에게 <비트 걸> 상영 중지를 요청하는 공문을 발송한다. 해당 문서에는 상영중지 처분의 이유를 “상영 후의 제반 사항을 고려하여 동 영화상영을 당시에 배급회사인 세기상사주식회사 우기동으로부터 수리한 별첨 각서와 상영계획서에 의거하여” 상영계획에 있던 극장에서 “재상영 및 동일 극장의 장기 상영을 일체 중지”할 것을 명령한다. 당시의 개봉이 계획된 극장은 대한극장, 문화극장을 비롯하여 대구의 제일극장, 광주의 동방(東方)극장, 그리고 인천의 동방(東邦)극장 5곳이었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이후의 신문기사와 관련 검열 서류를 참조해보면, 서울지역에서는 2, 3류 극장은 제외한 개봉관 상연은 제한적으로 허가된다. 2, 3류 극장의 경우 청소년들의 입장을 단속하기가 사실상 불가능하기에 영화 상영을 개봉관에 한정한다는 논리인 것 같으나, 어째서 서울 지역만 예외로 두었는지는 현재의 서류만으로는 알 수 없다. 다만, 영화수입추천에서부터 상영신고필증의 발부까지 문교부의 고시에 따라 절차를 밟아왔던 사안이었던 만큼, 세기상사에게 일방적인 손해를 입힐 수 없어 마련된 일종의 중재안 정도일 것이라 추측만 가능할 뿐이다. 결과적으로 <비트 걸>을 둘러싼 논란은 영륜의 권고안을 받아들여 서울의 개봉관에 한정하여 상영을 하게 됨으로써 일단락된다. [그림 7] <비트 걸> 재상영 허가 관련 서류 [그림 7]은 5.16 이후 정부조직이 개편된 뒤 세기상사가 공보부에 상영보류 해제를 신청했던 사실을 알 수 있게 하는 서류이다. 해당 문서는 1961년 12월 6일에 작성된 품의서인데, 그보다 앞서 1961년 11월 14일, 세기상사는 공보부 장관에게 상영보류해제와 관련하여 서신을 보낸 것으로 확인된다. “개봉 후 영화의 교육적 가치”가 인정되었고, “혁명 후(5.16 쿠데타를 의미) 이와 유사한 수편의 영화가 국내에서 상영된 사실”을 참작하여 상영을 승인해줄 것을 요청하는 것이다. 이후, 1961년 12월 6일, 공보부로부터 해당 영화가 “2월 18일로 상영보류된 작품이나” “서류고사 및 실사고사를 통하여 내용을 검토한 바 관객으로 하여금 저속한 감정을 도발할 우려가 있는 스트립쇼- 장면을 삭제하고 상영함이 무방하다”고 판정을 받고 재상영을 위한 허가증을 받게 된다. 검열 서류를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해당 영화에 대한 검열이 8월에 이미 실시되었다는 점이다. 군과 법무부, 민간 인사(추정)로 구성된 검열 위원회는 해당 영화에 대해 양가적인 결과를 내어놓는데, 역설적이게도 군에서 파견된 오세용 소령만이 “반항이 그 생리가 된 젊은 세대가 범하기 쉬운 악풍조의 감염을 부모들의 사랑과 조언으로 미연에 방지해야 된다는 것을 암시한 영화”로서 이를 검토한 결과 “스트립쇼를 하는 장면은 관객으로 하여금 야비하고 저속한 감정을 도발할 우려가 있으니” 해당 “장면만 삭제하면 상영하여도 가하다고 사료”된다는 입장을 내어놓는다. 결과적으로 영화는 상영허가가 되었고, 그 권리는 2년간 보장이 되었다. 검열 서류를 통해 알 수 있는 또 하나의 사실은 1971년 6월에 세기상사가 다시 한 번 <비트 걸> 상영허가를 신청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검열 당국은 해당 영화에 대한 권리가 세기상사에 있는지 분명하지 않다는 이유로 상영허가를 반려한다. 이후, 세기상사는 자신들이 가진 권리를 입증함으로써 권리 상에 문제가 없음을 보이고 문제가 되는 장면을 삭제하여 재심을 요청하는 의견을 전달한다. 그러나 검열당국은 “전체적인 영화의 내용이 문제되므로 화면 일부를 제거하여도 상영이 불가하다고 사료되어, 현재로서는 허가할 수 없으니” 이를 반송한다는 의견을 통보함으로써 상영금지처분을 내린다. <비트 걸> 검열과 관련된 일련의 서류들은 동일한 영화가 정책 당국의 입장에 따라 어떤 처분을 받게 되며, 그 과정에서 시장 주체는 어떠한 방식으로 대응하는지, 그리고 그들 사이의 역학 관계는 어떠한지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어 한국영화사를 구성하는 데 중요한 사료가 되리라 생각된다. 1. 1912년에 설립된 영국영화검열기구(BBFC)는 비정구기구로서 현재는 영국영화등급분류위원회(The British Board of Film Classification, BBFC)로 그 명칭과 기능이 변경되었다. 2. 1960년대의 영국의 영화 등급분류 기준은 U등급(Universal, 전체관람가)과 A등급(Adult, 성인동반 관람가능), 그리고 X(16세 이상 관람가능)등급으로 나뉘었다. 따라서 <비트 걸>의 X등급은 한국의 현행 영상물등급분류 기준으로 따지면, 청소년관람불가 등급 정도라 할 수 있다. 3. 「Beat Girl」, Wikipedia. (URL: https://en.wikipedia.org/wiki/Beat_Girl) 4. 의미를 알 수 없음. 5. 「<젊은 육체들> 말썽, 사회적 악영향을 우려하여」, 《한국일보》, 1961.1.27. 6. 「패륜영화의 상영과 극장가의 환경정리」, 《경향신문》, 1961.2.9. 7. 「영화 <젊은 육체들>에 대한 사과문」, 《경향신문》, 1961.2.16.
우리나라 희극은 왠지 감상적이다. 희극이 갖는 밝은 웃음과 축축한 눈물은 상관이 없을 성 싶은데 우리 희극에선 그것이 이상하게 동거 하고 있다. 1) 김희갑은 1945년 반도악극단에서 데뷔했다. 무대 뒤에서 배우들의 대사를 읽어주던 프롬프터였던 김희갑은 김대봉의 대역으로 코미디 배우의 길에 들어서서, 노인역과 코믹한 조연, 고복수, 현인 등의 모창에 재능을 보이며 악극단에서 눈에 띄는 배우로 성장했다. 한국 전쟁 무렵부터는 ‘웃기는 역을 도맡아’ 하면서 연기력을 인정받는 반도가극단의 스타 코미디 배우가 되었다. 그리고 1957년 <청춘쌍곡선>(한형모, 1957)에서 그의 특기인 현인, 남인수, 고복수 등의 모창을 선보이면서 영화계에 진출했다. 이후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비공식으로 700여 편, 공식적으로 약 300여 편의 출연기록을 남기며, 가장 오랫동안 가장 많은 작품에서 활약했다. 김희갑은 1950년대 후반, 약 4~5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30여 편의 영화에 출연했는데, 이 중 18편 가량이 코미디로 분류되며 그 외에도 <선화공주>(최성관, 1957), <느티나무 있는 언덕>(최훈, 1958), <인생극장>(김지헌, 1959), <사랑이 가기 전에>(정창화, 1959), <유관순>(윤봉춘, 1959), <박서방>(강대진, 1960) 등 다양한 장르의 영화에서 조연 혹은 단역을 맡았다. 1950년대 후반, 양석천이나 양훈, 구봉서 등의 동료 코미디언들이 코미디영화의 주연 혹은 비코미디영화의 비중 있는 조연으로 출연할 때, 김희갑은 비교적 비중이 작은 조연이나 단역도 가리지 않고 꾸준히 필모그래피를 늘려갔다. 이 시기, 김희갑을 코미디 스타 반열에 올려놓은 것은 권영순 감독의 <오부자>(1958)였다. 이 영화에서 김희갑은 이종철과 석금성의 네 명의 아들들(양훈, 양석천, 김희갑, 구봉서) 중 한 사람으로 출연하여, 연애담을 중심으로 하는 노래와 코미디를 선보였다. 이 영화는 개봉관인 국도극장에서 제작비를 다 걷어 들일 만큼 큰 인기를 끌었고, 함께 발매되었던 <오부자>의 사운드트랙 음반 역시 엄청난 인기를 모았다. 이 영화의 성공은 1950년대 말의 코미디영화 붐을 이끈 기폭제가 되었다. 양훈과 양석천이 이미 인지도 있는 라디오 및 영화계 최고의 스타였던 데 비하여, 이제 막 영화에 발을 들인 악극단의 작은 스타였던 김희갑과 구봉서는 이 영화를 통해 ‘합죽이’와 ‘막둥이’라는 평생을 따라다닌 애칭을 얻으면서 비로소 전국적인 스타덤에 오르게 되었다. (사진1) <오부자>(권영순, 1958) 포스터. 왼쪽부터 구봉서, 양석천, 이종철, 양훈, 김희갑. ‘뮈지칼코메듸’, ‘음악희극영화’라는 장르 명칭이 포스터 왼편 위쪽에 명시되어 있다. 김희갑은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 초까지 코미디영화의 공동주연뿐 아니라 비코미디영화에서 코믹 릴리프를 담당(<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신상옥, 1961), <성춘향>(신상옥, 1961))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그밖에 주인공의 친구로 등장(<박서방>(강대진, 1960), <서울의 지붕 밑>(이형표, 1961))하거나 단역으로도 출연(<청춘쌍곡선>, <백만장자가 되려면>(정일택, 1959))하면서 다양한 스펙트럼의 연기를 선보였다. 1960년대 초반, 양석천․양훈의 활동이 뜸해지면서 코미디영화의 인기 상승곡선이 소강상태에 이르고 제작 빈도가 줄어들던 시기에 오히려 김희갑의 활동은 더 활발해졌다. 김희갑은 이 시기 코미디영화의 명실상부한 주연배우로 자리매김 되었을 뿐 아니라, 당시 제작되었던 거의 모든 장르의 영화들에서 코믹 릴리프 역할을 수행하며 가장 많은 영화에 겹치기 출연하는 배우 중 한 사람이었다. 양석천과 양훈, 구봉서나 곽규석 등의 코미디언들이 코미디영화와 코믹 시퀀스를 통해 '코미디 배우'로서의 정체성을 드러냈다면, 김희갑은 코미디 장르나 코믹함을 넘어 거의 모든 장르의 영화에서 자신의 자리를 만들어 갔던 것이다. 즉, 김희갑은 단독 주연을 맡은 영화보다는 공동 주연을 맡거나 극의 코믹한 성격을 불어넣는 조연 역할로 출연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연기 초반에는 그의 특기였던 모창 실력을 드러낼 수 있는 영화들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후기로 갈수록 코미디보다는 드라마적 성격이 강한 영화에 출연했는데,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신상옥, 1961), <와룡선생 상경기>(김용덕, 1962), <팔도강산>(배석인, 1967), <속 팔도강산>(양종해, 1968), <내일의 팔도강산>(강대철, 1971) 등에서 뛰어난 연기력을 선보이며, 1970년대까지 계속 활발하게 활동했다. 196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 초를 거치며 본격적인 TV 시대가 열리기 시작했을 때, 코미디 배우들이 대부분 <웃으면 복이 와요>나 <쇼쇼쇼> 등의 코미디, 쇼 프로그램 등을 주 무대로 삼았던 것과 달리, 김희갑은 <꽃피는 팔도강산>, <제삼지대>와 같은 드라마를 중심으로 활동 범위를 넓혔다. (사진2) <성춘향>(신상옥, 1961)의 한 장면. 김희갑과 구봉서는 춘향이를 잡아오라는 변사또의 명을 받아 춘향의 집에 가는 포졸 역할로 등장했다. 춘향의 수난이 시작되는 시점에 등장한 두 사람은 점차 고조되는 춘향과 변학도 간의 긴장을 잠시 완화시켜 주는 ‘코믹 릴리프’의 역할을 수행했다. 1950년대가 홀쭉이와 뚱뚱이, 즉 양훈과 양석천의 시대였다면, 1960년대는 구봉서, 김희갑, 서영춘 등의 코미디가 빛을 발하던 시기였다. 김희갑 코미디의 특성 역시 1960년대 영화들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1950년대 김희갑은 다수의 코미디영화에 출연했지만, 주연배우로서의 존재감을 드러낸 영화는 많지 않았으나 1960년대 영화들에서부터 김희갑이라는 캐릭터와 김희갑의 코미디 스타일이 부각되는 경우가 많아지기 시작한다. '장르'로서 ‘김희갑’의 독특하고도 연속적인 관습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1960년대 영화들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워낙 다작이었기 때문에 김희갑의 코미디를 몇 가지 경향으로 정리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이 글은 1960년대 김희갑이 주연 혹은 주연급 조연으로 출연했던 코미디영화들로 텍스트를 한정하여 김희갑 코미디의 특성을 살펴보고자 한다. 앞서 인용했던 신문기사가 언급했듯이 "왠지 감상적"이고 밝은 웃음과 축축한 눈물이 동거하며 희극의 페이소스가 유난히 강조되는 것이 '한국형 코미디'의 큰 특징 중 하나였다고 한다면, 여기에 가장 가까운 것은 김희갑의 코미디라 할 수 있다. 김희갑의 코미디들은 1960년대 초반 영화계를 휩쓸었던 홈드라마에 근사(近似)한 것으로, 김승호 주연 홈드라마의 '코미디 버전'이라고도 볼 수 있다. 1960년대 그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와룡선생 상경기>나 <팔도강산> 시리즈는 드라마적 성격이 강화된 코미디들로, 이러한 경향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그의 코미디들은 '엎치락뒤치락'의 활기로 표현되는 양석천 양훈의 코미디나 '청춘 코미디'의 성격이 강한 구봉서의 코미디와 달리, '페이소스'를 내세워 감상적이고 구구절절한 사연 있는 인물들을 등장시킴으로써 ‘누선을 자극’하는 것이었다. 예컨대 <김희갑의 청춘고백>(최경옥, 1964)은 동아방송의 인기 라디오 프로그램인 <김희갑쇼>를 영화화한 것으로, <김희갑쇼>는 김희갑이 시골에서 올라와 성공을 하게 되기까지의 인생사와 그에 얽힌 인물들의 이야기를 에피소드 형식으로 이어가며 흘러간 옛 가요를 이야기 중간에 끼워 넣는 뮤지컬 코미디극형식이었다. 라디오극에서 비롯된 영화 <김희갑의 청춘고백>은 김희갑의 장기인 모창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출세하기 위해 무작정 서울로 뛰어든 가난한 청년과 그를 의지하는 고아 자매의 이야기를 큰 축으로 하는 '애조 띤' 코미디로 제작되었다. (사진3) <깁희갑의 청춘고백>(최경옥, 1964) 포스터. 김희갑의 얼굴을 전면에 내세운 이 영화에서 김희갑은 시골에서 올라와 ‘몸부림’빠의 전속밴드 멤버로 취업한 ‘김희갑’을 연기했다. 코미디언들의 성공담을 허구로 재구성한 코미디영화는 1960-70년대에 많이 만들어졌다. 이렇게 감상성이 가미된 김희갑 코미디의 경향은 천경자가 썼듯이 "카이젤 수염의 센티멘탈"과 "친근감을 주는 한국적 체취"를 갖는 "그야말로 코리언적인 체취가 풍기는 좋은 개성의 코미디언"2 ) 이라는 그의 페르소나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1) 공감과 풍자 김희갑이 출연했던 1950년대 후반 코미디 영화는 총 18편이었다. 이 중, 확인 가능한 작품에 한하여 김희갑이 주연으로 이름을 올린 작품은 <오부자>, <웃어야 할까 울어야 할까>, <복도 많지 뭐유>, <구혼결사대>, <부전자전>, <청춘배달>, <오형제> 7편이다. 이 7편의 영화에서 김희갑은 구봉서 등과 함께 공동주연을 맡았는데, 이 영화들은 로맨스가 가미된 청춘코미디에 가까웠다. 김희갑 역시 구봉서의 형제 혹은 친구 역을 맡아 취업과 연애에 성공하는 인물로 등장했는데, 단 한 편 <부전자전>에서는 김희갑이 구봉서의 아버지로 출연하여 중심 서사에서 제외되었다. 구봉서가 1960년대까지 이러한 청춘코미디의 경향을 이어가 자신의 장르로 만들었다면, 1960년대 김희갑은 매우 다른 경향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즉, 1950년대의 명랑한 분위기와는 사뭇 다른 '감상성'이 1960년대 김희갑의 코미디에서 드러나기 시작했다. (사진4) <서울의 지붕 밑>(이형표, 1961) 포스터. 김승호를 주연으로, 허장강과 김희갑은 그의 친구로 등장하여 코믹한 노인 3인방을 연기했다. 기본적으로 코믹한 캐릭터였지만, 김희갑은 가족도, 돈도 없이 친구들의 놀림을 당하는 가련하고 초라한 노인의 감상성을 보여주었다. 1950~60년대 코미디영화에서 김희갑이 맡은 내러티브의 역할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두 경우에서 모두 김희갑은 공감을 하거나 공감을 받을 수 있는, 관객들과 심리적으로 가까운 거리에 서 있는 인물로 등장한다. 첫 번째 경우는 김희갑 단독 주연 영화들에서 주로 볼 수 있는 경향으로, 김희갑을 주연으로 내세우고는 있지만 그가 관찰자의 입장에 서게 되는 경우이다. <와룡선생 상경기>(김용덕, 1962), <합죽이의 신혼열차>(황외천, 1962), <희갑 목욕탕 개업하다>(안성찬, 1963), <청색아파트>(이형표, 1963), <오색무지개>(조긍하, 1963) 등의 영화에서 김희갑은 주연이되, 논평하고 공감하는 관찰자 입장에 더 가까운 역할을 맡아 다른 등장인물들이 벌이는 내러티브 사건들에 개입하여 화해를 이끌어내는 인물로 기능한다. 그리하여 주요 내러티브 사건이나 사연들은 주인공 김희갑이 방문하는 서울의 제자들, 개업한 목욕탕의 손님들 혹은 김희갑이 소유주로 있는 아파트의 입주자이거나 김희갑의 자식들을 둘러싸고 벌어진다. 김희갑은 은퇴한 선생, 목욕탕 주인, 여행자, 아파트의 소유주, 아버지로서 대면하는 이들이 일으키는 다양한 사건, 사고들을 함께 겪고 공감해주는 인물이 된다. 김희갑의 초기 대표작 <와룡선생 상경기>를 비롯하여, 1960년대 후반에 제작되어 1970년대까지 속편을 거듭하고 TV 연속극으로도 제작되었던 <팔도강산> 시리즈 역시 이 계열에 속한다. <와룡선생 상경기>는 은퇴한 와룡선생이 서울 사는 제자들을 둘러보기 위해 상경하는데 대기업의 중역이거나 사업가로 성공한 제자들은 와룡선생을 박대하지만 소매치기, 빠 걸, 가난한 과부와 상이군인 등 근대화된 서울에 적응하지 못한 제자들만 와룡선생을 따뜻하게 맞는다. 그리고 '너무 출세하면 인간미가 없어진다'던 와룡선생의 교훈에 따라 잘못을 뉘우치고 제각기 변화한 제자들이 한 데 모여 와룡선생을 전송하는 장면이 엔딩으로 제시된다. (사진 5) <와룡선생 상경기>(김용덕, 1962)의 한 장면. 영화가 시작되면, 와룡선생은 눈물을 흘리면서 정년퇴임을 하고 정들었던 ‘신도국민학교’를 떠난다. (사진 6) <와룡선생 상경기>(김용덕, 1962)의 한 장면. 서울에 온 와룡선생. 제자(이대엽)가 결혼하게 될 여성(엄앵란)의 아버지(양훈, 왼쪽)와 계속 소동으로 얽히게 되는 와룡선생(김희갑, 오른쪽). <팔도강산>(배석인, 1967) 역시 ‘팔도’에 사는 자녀들을 방문하기 위해 부인과 함께 전국 일주에 나선다는 큰 틀을 가진 이야기로, 김희갑과 그의 부인(황정순)이 내러티브를 이끌어가는 주요 인물이되 내러티브 사건은 이들의 자녀들을 둘러싸고 벌어진다는 점에서 동일한 서사 전략을 취한다. <팔도강산>의 김희갑 부부는 전국을 돌아다니며 그에 적합한 음악 및 풍물을 소개하면서 근대화된 조국의 모습에 감격하고, 어렵게 살고 있는 자식을 도와주고 버릇없는 자식에게는 깨달음을 주면서 여행을 마감한다. 그리고 마지막 회갑연에서 전국 각지에 살고 있는 자식들을 불러 모아 우애 있게, 효도하며, '조국의 역군'으로 살아야 한다는 교훈을 전해준다. 이러한 영화들에서 김희갑은 여타 등장인물들의 사연에 크게 공감하고 안타까워하고 깨달음을 주기도 하면서 화해와 중재를 이끌어 내는 아버지의 형상으로 그려진다. (사진 7) <팔도강산>(배석인, 1967) 포스터. 이 영화는 국립영화제작소에서 만들어 이후 속편과 3편, 문화영화에서의 다양한 변주 시리즈들을 거친 뒤, 텔레비전에서 <꽃피는 팔도강산>으로 지속되었다.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으며 김희갑의 아버지 역할의 전형이 된 작품이었으나, 시리즈가 진행될수록 더욱 노골적으로 친정부적이고 선전적인 색을 드러내어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둘째, 공처가, 난봉꾼, 촌로, 구두쇠 등 일상적인 생활인으로서 코믹한 역할을 담당하는 경우로, 김희갑이 출연한 코미디영화의 대부분이 이런 경향이라고 할 수 있다. <부전자전>, <오형제>, <월급쟁이>, <마이동풍>, <신사는 새 것을 좋아한다> 등의 주연작 뿐 아니라 <고바우>, <구봉서의 벼락부자>, <로맨스그레이>, <남자조종법>, <남자식모>, <특등비서>, <신세 좀 지자구요> 등 조연으로 출연했던 대부분의 코미디영화 및 여타 장르의 드라마에서도 김희갑은 주로 코믹 시퀀스를 연기하는 일상적 생활인으로 등장했다. 이 경우, 김희갑은 평범한 인물이지만 숨기고 싶은 비밀 혹은 결함을 가진 캐릭터로 등장하면서 관객들의 공감과 함께 웃음을 이끌어내는 인물로 기능한다. 즉, 김희갑은 밖에서는 바람을 피우지만 집에서는 부인에게 꼼짝 못하는 공처가(<마이동풍>, <로맨스 그레이>, <남자식모>, <특등비서>), 급사를 사랑하는 회사 중역(<오형제>), 식모를 사랑하는 어리숙한 노인(<약혼녀>), 잘못된 자식 사랑으로 문제에 처하는 아버지(<부전자전>) 등의 역할을 맡아 소동을 벌이면서 웃음과 함께 페이소스를 이끌어낸다. 그러나 비극과 달리 코미디에서는 아무리 큰 결함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인물을 파멸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통합으로 이끄는 결정적인 계기로 작동한다는 점에서 김희갑이 맡은 인물들은 의미심장하다. 일련의 사건들을 계기로 바람난 공처가는 가정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고 급사와 식모를 사랑하던 이들은 우여곡절 끝에 진정한 사랑의 중요성을 느끼게 되며, 잘못된 자식 사랑으로 야기되었던 문제는 돈보다 귀한 것이 있음을 깨달음으로써 해결된다. 김희갑이 출연한 대부분의 작품에서 이러한 인물형을 연기했던 것은 그 인물형이 코미디나 코믹함의 표현에 적합한 것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진8) <마이동풍>(이봉래, 1961)의 한장면. 주당 3인방 김희갑, 구봉서, 양석천의 금주 소동을 다룬 영화로 김희갑은 ‘천하의 공처가’ 역할을 맡았다. (사진9)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신상옥, 1961)의 한 장면. 도금봉과 김희갑 콤비의 사랑 이야기가 소소한 웃음을 주면서 현실적인 사랑의 모습을 그렸다. 공감하는 관찰자의 형상이든, 결함이나 비밀을 가진 채 일상을 살아가는 생활인의 모습이든 김희갑은 평범하면서도 코믹한 인물들의 캐리커처에 누구보다 강점을 보였던 연기자로, 김희갑이 그려냈던 인물들은 갈등을 일으키는 인물보다는 갈등을 해결하고 통합을 이루는 인물들이었다. 그리고 그의 코미디 속에는 눈물샘을 자극하는 사연을 가진 인물들이 등장했다. 불과 세 살 차이지만 항상 연애 서사의 중심에 선 청년을 연기했던 구봉서에 비해, 30대 후반부터 중년 혹은 노년을 연기했던 김희갑은 선량해 보이는 얼굴과 인생의 희노애락을 알 법하게 겉늙어 보이는 외모, 그리고 뛰어난 연기력과 코믹한 애드리브 능력을 바탕으로 평범한 중년/노년의 일상을 가장 잘 표현하는 배우였으며 그의 눈물과 웃음을 통해 관객들은 그와 함께 공감할 수 있었다. 2) ‘생활과 윤리감, 그리고 페이소스’ 양석천과 양훈으로 대표되는 1950년대 코미디가 무질서의 활력을 이야기하는 '아나키즘적 코미디'의 경향을 보였고 구봉서가 1960년대 후반까지 이어지는 '청춘코미디'에서 독보적 영역을 구축했다면, 김희갑의 코미디는 애상적 정서를 띤 코미디로 1960년대 초반에 등장했던 홈드라마와 깊은 친연성을 가진 것이었다. 1960년대 초반 김희갑과 김승호가 짝을 이루어 등장하던, 홈드라마에 가까운 일련의 코미디들에 대해 이영일은 "생활이 있는 희극" 혹은 "풍속적 희극"이라고 칭했다. 이영일에 따르면 풍속적 희극이란 일상인들의 생활에 밀착되어 있는 코미디로 "소시민 상인, 말단 샐러리맨, 말단 회사간부, 시골선비" 등을 주인공으로 삼아 그의 일상을 통해 세태풍속을 그리는 동시에, 세태를 풍자하고 페이소스를 표현한 희극을 일컫는 것이다. 여기에는 '인생'과 '사회'가 "충실하게" 그려져야만 한다. 김희갑의 1960년대 초반 코미디들은 이영일이 가장 높게 평가했던 '풍속코미디'의 정의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3) 지금까지 살펴본 김희갑의 코미디들은 김희갑의 시선을 통해서 바라본, 혹은 김희갑 자신이 겪는 일상 속의 인물들과 사건들을 중심으로 했다. 그리고 공감의 중심에 서 있는 김희갑을 통해 가족 안에서의 화합과 더 나아가 새 시대의 질서 안에서의 통합을 이야기하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김희갑 코미디의 '통합'은 근대화 과정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뒤떨어졌지만 '충', '효', '예'와 같은 전근대적 가치관을 간직하고 있는 '페이소스'를 불러일으키는 인물들과, 속악한 근대화의 과정을 거쳐 '성공'한 희화화된 인물들 사이의 물질적 중재와 가치관의 중재를 포함한다. 그의 영화에서는 근대화된 환경들–구획된 도시, 서구적 생활환경, 개발 중인 팔도강산 등-의 전시를 통한 물질적 근대화가 강조된다. 특히 <팔도강산> 시리즈에서는 국가의 근대화 정책에 대한 찬양과 동조가 노골적으로 표현된다. 예컨대 <내일의 팔도강산(제3편)>(강대철, 1971)에는 전라도 농촌에 사는 사위 노식을 찾아간 희갑이 도시보다 농어촌이 더 많은 혜택을 입고 있다고 설교하는 장면이 삽입된다. 농어촌의 상대적 빈곤과 박탈감을 오히려 "혜택"으로 둔갑시켜 위로하는 한편, 사대강 개발이라는 국책을 편향적으로 선전하는 이 장면은 김희갑 코미디가 근간하는 이데올로기적 위치를 분명히 적시한다. 또한, 물질적 근대화, 세속적 성공을 긍정하기 위한 전략으로 '남존여비', '엄한 가부장', '형제간의 우애'와 '동료의식' 같은 전근대적 가치관의 '회복'이 주장된다. <내일의 팔도강산>의 후반부에는 사업을 무리하게 확장하려다 망하게 된 허풍장이 첫째 사위 장강과 그를 도우려는 성실한 넷째 사위 영균, 그리고 그런 그들을 보며 눈물을 흘리는 장모 정순과 훈계하는 장인 희갑이 등장한다. 즉, <팔도강산> 시리즈는 '근대화' 자체는 긍정하되 희화화된 인물들을 통해 그려지는 '속악한 근대화'만이 지양되어야 할 것임을 주장하면서 "올바른 근대화"의 방향을 제시하는, 지배 이데올로기에 합당한 '중재'와 '화해'로 나아가는 전략을 택한다. 그리하여 근대화의 그늘에 가려져 있거나 소외된 이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물질적 "성공"을 긍정하여 그것을 추구하도록 함으로써 그들 스스로 지배질서에 편입되도록 인도한다. 이러한 김희갑 코미디의 주제의식의 표명은 '근대국가' 형성의 논리를 앞세우던 박정희 정권의 이데올로기에 부합하는 것으로, 이후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국책으로 후원되고 장려되었던 김희갑의 <팔도강산> 시리즈와 텔레비전 드라마에서도 지속되었다. (사진10) <속 팔도강산 – 세계를 간다>(양종해, 1968) 포스터. <팔도강산> 시리즈의 두 번째 편 (사진11) <내일의 팔도강산 – 제3편->의 한 장면. 전라도 사위 노식에게 농촌이 받고 있는 혜택에 대해 설명하는 희갑. 왼쪽부터 김희갑, 박노식, 황정순. (사진12) <아름다운 팔도강산>(강혁, 1971) - <팔도강산> 시리즈의 4번째 편 포스터 (사진13) <우리의 팔도강산>(장일호, 1972) - <팔도강산> 시리즈의 5번째 편 포스터 1950년대 코미디를 대표하는 양석천과 양훈의 코미디가 무질서의 활력을 이야기하고 1950년대 후반과 1960년대에 지속적으로 만들어졌던 구봉서의 코미디가 낙관적 전망을 보여주면서도 점차 지배질서에 순응해 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었다면, 1960년대와 70년대에 걸쳐 제작되었던 김희갑의 코미디는 좀 더 생활밀착형 인물들을 등장시켜 관객들의 공감을 이끌었다. 그리하여 이 인물들에 대한 연민에서 비롯되는 애상적 감정을 숨기지 않으면서 지배질서로의 통합을 보다 정교하고도 노골적으로 이야기하는 영화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 “[신영화] 소시민적인 인정희극/ 이봉래 감독 <월급장이>”, 《한국일보》 1962. 7. 22. 4면. 2) 천경자, "웃는 얼굴 웃기는 얼굴 - 김희갑 편“, 《한국일보》1963.1.1.14면. 3) 이영일, 『한국영화전사- 개정증보판』, 소도, 2004, 360쪽. <참고문헌> “[신영화] 소시민적인 인정희극/ 이봉래 감독 <월급장이>”, 《한국일보》 1962. 7. 22. 4면. 천경자, "웃는 얼굴 웃기는 얼굴 - 김희갑 편“, 《한국일보》 1963.1.1.14면. 이영일, 『한국영화전사- 개정증보판』, 소도, 2004. 박선영, 『코미디언 전성시대- 한국 코미디영화의 역사와 정치미학』, 소명출판,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