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조협려 (원제: 무뢰한)
- 감독
- 원규, 여대위
- 제작년도
- 1992
- 출연
- 유덕화, 매염방, 곽부성, 글로리아 입, 유가령, 종진도
2003년 | 에그필름 감독: 박찬욱 | 원작: 츠치야 가롱 | 시나리오: 황조윤 임준형 박찬욱 | 제작: 지영준 김동주 | 촬영: 정정훈 | 프로덕션 디자인: 류성희 | 음악: 조영욱 CAST 오대수: 최민식 | 이우진: 유지태 | 미도: 강혜정 최근엔 그렇게 빈번하지 않지만, 2000년대 초만 해도 웬만한 영화들은 모두 현장 공개를 했습니다. 그럴 경우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장면일 경우가 많았죠. 그런데 < 올드보이 >는 조금은 예외인데요, 꽤 중요한 장면을 두 번에 걸쳐 공개했습니다. 앞의 포스팅에 담은 우진의 펜트하우스 신과 함께, 전설의 ‘장도리 액션 신’을 공개했던 거죠. 참고로 이 신은 파주의 아트서비스 스튜디오에서, 펜트하우스는 7월의 양수리 종합 촬영소에서 촬영되었습니다. 오대수는 15년 동안 갇혀 있던 감금실을 탈출하는 과정에서 한 바탕 격한 액션을 거치게 됩니다. 바로 복도에서 펼쳐지는, 장도리를 든 오대수와 그를 막으려는 수많은 사람들 사이의 ‘일대다 액션’이죠. 2분 40초 동안 이어지는 신입니다. 조금 있으면 액션이 벌어질 복도에 앉아 있는 무술팀. 이 신엔 총 20명이 등장합니다. 오대수와 19명의 스턴트맨들이죠. 수많은 리허설을 통해 짜맞춘 합 속에서 이들은 액션 스펙터클을 만들어내고, 정정훈 촬영감독의 카메라는 그들의 액션을 따라 서서히 좌우로 움직입니다. 리허설을 마치면 최민식 배우는 땀으로 흠뻑 젖곤 했습니다. 거친 숨을 몰아쉬었고요. 40대의 나이에 이처럼 격한 액션을 소화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죠. 하지만 그러기에 이 신은 더욱 처절한 액션으로 탄생했을지도 모릅니다. 리허설 전과 후 그리고 리허설 장면입니다. 여러 차례 이뤄진 리허설은 최민식 배우뿐만 아니라 젊은 스턴트맨들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었죠. 옷 안에 보호대를 대지 않으면 다치기 십상인 장면이었고요. 웃고 있는 최민식 옆에 있는 흰 티셔츠를 입고 있는 사람은, 혹시 낯이 익으실지도 모르겠네요. < 신세계 >(2012) < 무뢰한 >(2014) < 아수라 >(2016) 등 최근 수많은 영화의 액션을 지휘했던 허명행 무술감독입니다. 거의 실제 촬영에 가까운 리허설입니다. 이전엔 합을 맞추기 위해 약간은 완만한 속도로 진행되었다면, 의상과 장도리까지 갖춘 최민식 배우의 액션은 그 속도감을 더했습니다. 그런 역동감을 그대로 담아낸 현장 사진인데요, 이 느낌의 비주얼로 아트포스터가 제작되기도 했죠(CGV 용산의 박찬욱관에 가시면 보실 수 있습니다). 현장에서 액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박찬욱 감독과 최민식 배우입니다. 박찬욱 감독은 원래 이 신을 롱 테이크로 갈 생각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오대수가 장도리로 상대방을 가격할 때, 맞는 부위가 마치 X 레이 촬영 이미지처럼 옵티컬 처리가 되어 빠른 편집을 통해 삽입되는 방식이었다고 하죠. 하지만 박찬욱 감독은 최민식 배우가 대역 없이 직접 액션을 해내는 쪽을 선택합니다. 이유는… 촬영 일정에 쫓겼기 때문이죠. 박찬욱 감독은 스타일리시한 액션 시퀀스보다는 캐릭터의 처절함을 강조하는 쪽을 선택했고, 그 결과 영화사상 길이 남을 롱 테이크 액션 신이 탄생했습니다. 아마 최민식 배우에게 이 영화는, 그리고 이 장면은, 인생작으로, 그리고 인생 신으로 남을 겁니다. 현장에서 거의 녹초가 되었지만, 그 이상의 ‘보상’을 안겨주었으니까요. 한편 그는 이 장면을 찍은 후 다시는 액션을 안 찍겠다고 했습지만, 이후 < 주먹이 운다 >(2005) < 악마를 보았다 >(2010) 같은 영화에서 좀 더 센 강도의 액션 신을 선보였죠. 이미지 디지털화 지원 NAVER
1970년대까지만 해도 김학성 (金學成) 촬영감독에게는 여배우 최은희 의 전남편이라는 과거사가 따라붙었다. 여기에 미8군 무대에 섰던 재미 가수 김계자의 외삼촌으로 그녀의 어머니가 바로 월북 배우 김연실 (金蓮實)이라는 사실, 그리고 그가 전 조선 아마추어 복싱 플라이급 선수권 보유자였다는 전력이 함께 언급됐다. 그는 평소에 한 번도 자기 자신을 위한 삶을 연출해보지 못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운명에 떠밀려 살아왔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말이다. 이러한 그의 운명론적 인생관은 죽음의 고비를 여러 차례 넘나든 특유의 6?25 전쟁 체험에서 비롯됐을 것이다. 전쟁의 포화 속에서 종군기자로 활동하다 당시의 촬영기사들은 전황을 기록하기 위해 종군했다. 김학성 도 국방부 정훈국 촬영대 소속으로 최전방에 나섰다.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에 의해 북으로 끌려가던 아내( 최은희 )가 국군의 포로로 붙잡혔다가 풀려난 지 얼마 안 된 뒤였다. 1.4후퇴 때였다. 수원 북방 안성 2백고지 전투는 서울 진격의 성패가 달린 중요한 고비였다. 1사단 15연대는 혼성부대와 함께 혈전을 벌였다. 선두에 선 소대가 고개 중턱에 이르렀을 때 박격 포탄이 작렬했다. 그 순간 그들을 따라가던 그의 몸도 땅 위로 솟구쳤다. 그날 오후 고갯마루로 진격해온 군인들이 시체더미 사이에 떨어진 뉴스 촬영용 아이모 카메라(Eyemo Camera)를 발견하지 못했다면, 아니 그때 그가 국방부 정훈국 소속 촬영대원임을 밝히는 완장을 차고 있지 않았다면 이 세상에 없는 존재가 됐을 것이다. 아랫배에 세 군데나 관통상을 입은 그의 오른쪽 가슴은 온통 피투성이였다. 더욱이 오른발은 반이나 날아간 상태였다. 피로 얼룩진 국방부 발행 신분증을 보게 된 대대장의 지시에 따라 수원의 야전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미군의관은 살아날 가망이 없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끈질긴 그의 목숨은 대구 제16육군병원으로 후송된 후 한 미군 고문관의 도움으로 살아났다. 이번에도 그의 몸을 덮은 담요에 표시된 ‘보도대원’ 덕이었다. 그는 이렇게 사망 선고나 다름없는 세 번의 고비와 일곱 시간에 걸친 대수술 끝에 목숨을 건졌다. 뒤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를 포화 속에서 살려낸 것은 메고 있던 스틸용 카메라 코닥 레티나(Kodak Retina)였다. 파편이 카메라를 관통하는 바람에 심장이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바다 건너온 일본 카메라맨의 우정 내가 의례적인 인사만 건네던 김학성 선생과 가까워지게 된 것은 1966년 봄께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한 월간지의 기자로 근무하고 있을 때였다. 사회 각계 인사들이 보물로 여기는 애장품을 소개하기 위해 섭외하면서부터였다. 자택에 와주기를 바라는 대부분의 인사들과는 달리 약속한 충무로의 어느 다방에 나타난 그는 물 한잔을 마시고 나자 메고 있던 낡은 카메라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는 것이었다. “이것이 내 목숨을 살려준 보물이에요. 나의 가보지요.” 예의 스틸용 카메라 코닥 레티나였다. 이 카메라는 선생의 모습과 함께 ‘나의 가보(家寶)’라는 제목으로 화보에 소개 됐다. 이런 인연으로 나는 선생을 통해 서울을 방문한 일본의 촬영기사 오카자키 고우조(岡崎 宏三) 씨를 알게 됐다. 조선호텔에서 였다. 맘씨 좋은 동네 아저씨 같은 이분은 김 선생이 일본 신코(新興)키네마의 촬영 조수 시절 가깝게 지낸 동료였다. 나이는 1913년생인 김 선생보다 다섯 살 아래였지만, 같은 해인 1939년 <사랑의 기념일>로 등장한 데뷔 동기였다. 그는 이후 <36인의 승객>(1957), <어용금>(御用金, 1957), <무뢰한>(1970) 등 40편이 넘는 촬영 작품을 내놓으며 일본의 대표적인 카메라맨으로 자리를 잡았다. 일본 영화인들의 왕래가 드물었던 시절, 어렵게 바다를 건너온 옛 친구를 집으로 초대하지 못한 자신의 처지를 토로하며 미안해하던 김 선생의 모습이 아직도 지워지지 않는다. 그는 그때 명동 퇴계로 방향 지금의 퍼시픽호텔 왼쪽 남산으로 올라가는 언덕에 살았다. 나는 이들의 각별한 우정을 <주간 조선>에 소개하고, 두 사람을 MBC의 간판 프로였던 <모닝 쇼>에 출연하도록 주선했다. 오카자키 씨는 일본으로 돌아간 뒤 나에게 선물과 함께 연하장을 보내오기도 했다. 김학성 선생은 광복 전후의 촬영기사 시대를 대변하는 상징적인 인물이다. 오늘날에는 촬영기사 대신 촬영감독이라는 명칭을 쓰지만 1980년대까지만 해도 그냥 촬영기사로 불렸다. 촬영감독 이라는 지칭에는 영화감독의 지시를 받는 단순한 화면 구성자가 아니라, 이와 동등한 위상을 가진 수평적인 존재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이런 인식에 이르는 데는 그를 존경했던 정일성 촬영감독의 역할이 컸다고 할 수 있다. 임권택 감독과 콤비를 이룬 < 만다라 >(1981), < 서편제 >(1993), < 취화선 >(2002) 등이 진가를 발휘하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그러나 김학성 선생은 이런 일에 개의치 않고 30여 년에 이르는 카메라 인생의 길을 걸어왔다. 데뷔작 < 성황당 >( 방한준 ,1939)을 비롯한 < 집 없는 천사 >( 최인규 , 1941), < 거경전(巨鯨傳) > < 풍년가 >(이상 방한준, 1944), < 새로운 맹서 >( 신경균 , 1947), < 밤의 태양 >( 박기채 , 1948), < 생명 >( 이강천 , 1958), < 오발탄 >( 유현목 , 1961), < 성웅 이순신 >(유현목, 1962), < 건너지 못하는 강 >( 조긍하 , 1963), < 아리랑 >(유현목, 1968) 등 19편이 그 자취이다. 이 가운데는 6.25 전쟁 전후의 < 여수 순천 반란사건 >(1948)과 <정의의 진격>(1951) 등 2편의 기록영화가 포함돼 있다. < 집 없는 천사 >는 ‘부랑아의 구제 문제’를 부각시켜 ‘사회적인 반향’(<영화순보>, 1941년 11월1일, 제30호)을 일으켰고, < 새로운 맹서 >는 최은희 를 배출함으로써 한국영화 발전에 기여했다. < 생명 >은 한국 최초의 시네마스코프 시대를 여는 기술적인 성과를 거두었으며, < 오발탄 >은 한국영화의 대표작으로 인정받으며 그가 창출한 영상미에도 주목하게 했다. 1982년 11월 20일 선생이 쉰아홉 생애를 거두고 간 지 어느새 32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분과 함께 남산 영화진흥공사 시사실에서 김연실이 출연한 북한영화를 보고 아쉬워하며 어두운 남산길을 내려오던 일이 손에 잡힐 듯한 기억으로 다가온다.
한국 영화시장은 해가 다르게 변화하고 있다. 2011년 씨너스가 메가박스를 합병하고, 2013년 CGV가 프리머스시네마를 합병하면서, 상영시장은 이제 CGV·롯데시네마·메가박스 등 3개 사업자가 시장의 90% 이상을 과점하는 체제로 바뀌었다. 한국영화의 배급시장은 2008년 설립된 NEW(넥스트엔터테인먼트월드)가 안정적인 시스템을 갖춘 2010년 이래, CJ E&M·롯데엔터테인먼트·쇼박스·NEW 등 4개사가 시장의 8~90%를 차지하는 형태로 고착되었다. 외국영화를 포함한 전체 영화 배급시장의 사정도 다르지 않다. 앞서 언급한 4개의 한국 메이저 배급사와 이십세기폭스코리아 등 직배사가 시장의 90%를 분점하는 형태로 고착되었다. 그사이 SK플래닛, KT싸이더스 등 통신자본과 방송자본인 에스비에스콘텐츠허브 등이 배급시장의 진입을 시도했지만 성공적이지 못했다. 정리하면 독과점 된 상영자본을 중심으로 영화시장이 재편되었으며, 재편의 방향은 소수의 메이저가 시장을 과점하는 것이다. 이들을 중심으로 고착된 시장은 높은 진입 장벽을 구축하고 있으며, 다른 자본이 시장에 참여하는 것은 점점 불가능해지고 있다. 최근 예외적으로 시장 진입에 성공한 사업자는 1위 상영업자인 CGV뿐이다. 이런 변화는 영화시장의 양극화를 가중시키고 있다. 빈익빈 부익부가 심화되는 상황에서 독립영화 등 비주류 영화사업자들의 사정은 더욱 열악해지는 중이다. 영진위의 2013년 결산기준으로 ‘다양성영화’로 분류되는 영화의 개봉 편수는 342편이었다. 이 중 안정적인 상영기회를 얻은 작품은 몇 편일까. 한국영화산업불공정행위모니터링센터의 자료에 따르면 전체 스크린의 90% 이상을 점유하고 있는 멀티플렉스 3사는 2013년 개봉영화 909편 중 평균 429편(CGV 412편, 롯데 477편, 메가박스 399편)만 상영했다. 전체 개봉 영화의 절반 이하(약 47%)만이 멀티플렉스에서 상영기회를 얻은 것이다. 이 기회를 얻지 못한 영화들은 바로 시장에서 사라진다. 높은 시장장벽 속에서 비주류영화 배급사들의 미래는 암담하다. 게다가 비주류 영화시장은 급격하게 요동치고 있다. 급변의 주체는 앞서 언급한 1위 상영사업자 CGV다. CGV는 ‘아트하우스’라는 이름의 투자배급 레이블을 만들어 저예산영화의 제작투자·배급과 독립영화의 마케팅투자·배급 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1위 상영사업자답게 성공 가능성이 있다고 평가되는 독립영화에는 안정적인 스크린을 확보하고 통이 큰 마케팅 투자와 배급을 도입했다. 또한 CJ E&M과의 역할 분담을 통해 저예산 영화의 제작 투자도 활발하게 진행 중이다. 2014년 < 한공주 >와 <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 등의 성공은 독립영화 마케팅 투자·배급의 성과이며, < 우아한 거짓말 >과 최근 개봉한 < 차이나타운 > 등은 저예산영화 제작투자·배급의 성과다. CGV는 최근 투자한 <차이나타운>과 < 무뢰한 >이 각각 2015년 칸영화제 비평가주간과 주목할만한 시선 부문에 초청되면서 작품성까지 인정받는 분위기다. 누군가에게는 비주류영화 시장의 성공신화를 써내려가는 것이겠지만, 애초에 이 시장에서 활동했던 사업자에게는 사형선고나 다름없다. 상영시장을 지배하는 사업자와 누가 경쟁할 수 있겠는가. 과점으로 인한 양극화의 확대, 강력한 상영자본의 틈새시장 진출과 비주류 영화사업자들의 붕괴는 영화진흥정책의 보다 적극적인 역할을 요구하고 있다. 시장의 성장도 중요하지만 성장의 열매가 골고루 분배될 수 있도록 하는 정책의 역할을 기대하는 것이다. 영화인들은 진흥기관이 제 역할을 하여 공정한 경쟁과 거래가 이뤄지기를 바라고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영화진흥을 책임지는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는 기대를 저버리고 있다. 시장 독과점과 수직계열화 문제의 해결방안을 함께 고민하자고 요구했지만, 내놓은 결과물은 민간 사업자 간의 자율적인 협약을 통한 상생방안 마련뿐이었다. 강제성이 없는 협약 속에서 사업자들은 개별적으로 생존을 고민해야 한다. 그럼에도 영진위는 독과점과 수직계열화를 통한 시장의 성장을 자축하며 잔치판만 벌였다. 심지어 비주류 영화시장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거대 상영사업자 CGV와 손잡고 수직계열화에 대한 면죄부를 주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새해 들어 영진위가 펼치는 정책들은 여전히 영화인들의 요구나 기대와는 다른 것들뿐이었다. 공정시장 조성 대신 대기업 자본의 수직계열화로 인해 큰 어려움을 겪고 있는 비주류 영화사업자들에게 지원 대신 칼날을 들이댔다. 비주류 영화시장을 지탱해왔던 예술영화전용관 지원 사업은 폐지될 예정이며, 다양성영화 개봉지원 사업은 내홍 끝에 2015년에 한해 한시적으로 추진되나 내년엔 사라질 전망이다. 독립영화 배급·상영의 보루인 독립영화전용관 지원 사업은 지역에 신규 독립영화전용관 1곳을 신설한다는 이유로 기존 독립영화전용관에 대한 지원이 중단되고 지원되는 영화관 수도 축소된다. 이뿐만이 아니다. 영진위는 지난 2월엔 다양한 영화의 상영 기회를 보장해온 영화상영등급분류 면제추천 제도에 관한 규정 개정을 검토하기도 했으며, 최근엔 글로벌국제영화제 육성지원 사업에서 예비심사 결과와 무관하게 지원예산을 결정해 비판을 받고 있기도 하다. 영진위에게 과연 영화진흥의 의지가, 독립영화와 예술영화 등 비주류 영화를 진흥시킬 의지가 있는지 의심할 수밖에 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영진위의 영화진흥사업을 위해 집행되는 영화발전기금은 관객이 내는 소중한 입장료의 부과금 등을 통해 마련된다. 관객이 부과금을 내는 이유는 영화예술의 질적 향상과 한국영화산업의 진흥·발전을 위함이다. 최근 영진위가 내놓는 정책들은 관객들이 부과금을 내는 이유와 부합하는가. 영진위는 영화발전기금과 영진위의 존재 이유가 무엇인지, 그리고 현재 영화시장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진정으로 고민하며 노력하고 있는지 되물어봐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