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라이트 앤 발렌티노
- 감독
- 데이비드 앤스포
- 제작년도
- 1995
- 출연
- 캐서린 터너, 엘리자베스 퍼킨스, 기네스 팰트로우, 우피 골드버그, 섀디아 시몬스, 에리카 루트렐, 메튜 콜러, 스코트 윅웨어, 켈리 폭스, 해리슨 리우, 웨인 람
태양계 궤도를 도는 에베레스트 크기만한 새로운 혜성을 발견한 천문학과 박사 과정의 케이트(제니퍼 로렌스). 다른 동료들의 열렬한 축하를 받는 가운데 지도교수인 민디 박사(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궤도 계산을 하다 거의 100%에 가까운 확률로 6개월 안에 지구와 충돌할 거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부딪치는 순간 종말이 펼쳐질 게 명백한 상황이기에 케이트와 민디 박사는 NASA에 보고하는데 이때 정부 관계자들이 극비리에 개입된다! 여기까지만 보면 익숙한 SF 재난 블록버스터를 떠올릴 법하지만, < 돈 룩 업 >은 그 쉽고 흔한 길을 걷지 않는다. 이 영화는 혜성 충돌의 고전적인 마스터피스 <세계가 충돌할 때>나 < 지구의 대참사 >도, 할리우드 스케일의 위력을 담은 < 아마겟돈 >이나 < 딥 임팩트 >도, 운명적인 < 너의 이름은 >이나 로맨틱 코미디의 < 세상 끝까지 21일 >도, 그리고 암울한 아트하우스의 < 멜랑콜리아 >도 보여주지 않았던 세태 풍자에 집중한다. 무능한 정부는 정치 스캔들에서 벗어나 중간 선거에 이기기 위해 혈안이 돼있고, 언론은 심각한 분위기를 피해 가십으로만 소비하려 한다. 여기에 이익에만 눈이 먼 기업과 전문가들의 경고를 외면하고 기만하는 대중들이 가세하며 환장의 대(大)콜라보를 이룬다. SNL 작가 출신으로 윌 페럴과 함께 많은 코미디를 작업한 아담 맥케이 감독은 기후 환경 문제와 막장의 끝을 달린 트럼프 정부 그리고 제작과정 중 실시간으로 터진 코로나 상황을 혜성에 빗대 마치 실제 인류의 대위기 앞에서 벌어질 법해 정말로 무서워(!)지는 블랙 코미디를 완성해냈다. 제니퍼 로렌스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메릴 스트립, 조나 힐, 마크 라일런스, 케이트 블란쳇, 타일러 페리, 티모시 살라메, 론 펄만, 아리아나 그란데, 키드 쿠디, 히메시 파텔 등 초호화 캐스팅을 자랑하며, <돈 룩 업>은 넷플릭스에서 성공의 지표로 뽑는 “공개된 지 28일 동안 가장 많이 본 영화” 중 < 레드 노티스 >에 이어 역대 2위를 차지했다. 비판의 대상이 다소 편향적이라는 지적과 반복적이고 단선적인 플롯과 고압적인 자세가 불편하다는 반응도 있는 등 호불호가 갈렸지만, 2021년 오스카를 비롯해 각종 연말 시상식에서 작품상과 각본상 등 후보에 오르며 완성도에서 호평을 얻었으며, 현재 미국 사회가 가진 문제점과 치부를 적나라하게 드러났다는 극찬도 받았다.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한심한 작태를 풍자하는데 주력한 작품이지만, 이 극도로 암울한 상황 속에서도 웃음과 재미, 감동을 이끌어내는 건 바로 적당한 거리두기를 통해 나름 객관성을 유지하는 니콜라스 브리텔의 명민한 음악 덕분이다. 니콜라스 브리텔 배리 젠킨스의 < 문라이트 >와 < 빌 스트리트가 말할 수 있다면 >으로 오스카를 비롯한 각종 시상식 음악상 후보에 오르며 단숨에 주목을 받은 니콜라스 브리텔은 1980년대생 할리우드 영화음악가들 중에서 가장 성공적인 이력을 쌓고 있는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다. 뉴욕의 유대 가정에서 자란 브리텔은 피아노에서 발군의 실력을 드러내며 고교 시절 줄리어드 음대의 프리 칼리지 프로그램을 이수했으나, 왜 인간이 음악에 매료될까에 궁금증을 느껴 하버드 심리학과에 지원할 정도로 괴짜이자 수재였다. 학부 시절 내내 힙합 연주그룹에서 키보드 주자로 활동하며 다양한 장르의 음악에 심취했고, 자신의 하버드 심리학과 동기였던 배우 나탈리 포트만이 처음 연출한 단편 <EVE>에서 그의 소품 “Forgotten Waltz No.2”가 쓰이며 영화음악 세계에 발을 들이게 된다. 이후 포트만이 참여한 < 뉴욕 아이 러브 유 >의 한 꼭지를 비롯해, 각종 다큐멘터리에 참여하며 음악에 대한 끈을 놓지 않았다. 그럼에도 브리텔은 본격적으로 음악을 업으로 삼지 않고 월스트리트에서 잘 나가는 해지펀드 매니저이자 외환 딜러로 활동했는데, 그가 결국 다시 음악으로 마음을 돌리게 된 계기가 된 건 < 노예 12년 >에 참여하면서부터다. 스티브 맥퀸 감독의 부탁으로 한스 짐머가 <노예 12년>의 스코어를 맡았지만 영화 전반에 삽입될 소스 음악들에 대해선 다소 부담을 느끼고 있던 터라 새로 외부 음악가를 수혈했는데, 그게 바로 니콜라스 브리텔이었다. 그는 전혀 녹음된 바 없고, 제대로 전승되지도 못한, 잃어버린 노예들의 음악을 위해 19세기 중반 미국에서 실제 유행하던 스타일에 맞춰 철저한 고증 끝에 새롭게 만들어 빌보드 매거진으로부터 “<노예 12년> 음악의 비밀병기”란 극찬을 받았다. 금융권 출신답게 브리텔은 비즈니스적인 관점에서 제작과정을 이해하기 위해 단편 영화에 제작으로 참여하기도 했으며(그게 바로 데이미언 셔젤의 < 위플래쉬 >였다!), 후에 이 영화가 장편화되며 음악에서 일부 도움을 주기도 했다. 하지만 그를 확고히 영화음악가로 자리매김하게 만든 건 앞서 언급한 배리 젠킨스와 아담 맥케이와 함께 한 일련의 작품들이 성공한 덕분이 크다. < 빅쇼트 > 때 브리텔의 대본에 적힌 전문적인 금융(음악이 아니라!)업계 용어 메모에 놀라 아담 맥케이가 반했다는 우스갯소리도 있지만, 사실 그의 음악이 가진 매력은 대단히 놀랍다. 이미 <빅쇼트>와 < 바이스 >를 통해 복잡하고 민감한 경제와 정치 생태계를 깔끔하고 명료하게 음악적으로 정리한 바 있는 니콜라스 브리텔은 이번 <돈 룩 업>에서도 멸망을 앞둔 경박한 사회적 혼란과 진실이 잘못된 정보 앞에 덮이는 아이러니, 무능한 정부를 비꼬는 다양하고 세련된 스코어들을 들려준다. 신랄한 풍자와 날 선 묘사들로 불쾌해질 수 있는 영화의 공격성을 최대한 무마하고, 널뛰는 코미디와 진지한 드라마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기 위해 그는 여러 고민 끝에 혼란이 절정에 달했던 2차 세계대전 시기 유행한 업 템포의 빅밴드 사운드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이를 메인 테마의 색채로 잡는다. 광기와 혼돈을 묘사하면서 멸망이라는 실존적인 문제 앞의 우울함과 슬픔을 내재해야 하고, 동시에 코미디 음악으로서 희극적인 면모도 갖춰야 하기에 복잡하고 미묘한 톤을 유지해야 하는데, 브리텔은 절규하듯 울부짖는 브라스섹션에서 절묘한 부조리의 묘미를 찾았다. 그래서 주인공들이 필사적으로 혜성 충돌을 경고할 때마다 빅밴드 사운드는 더 처절하게 조증 기조를 발하고, 격렬하고 활력 넘치는 사운드는 이들이 무기력하게 실패할 때마다 공허하게 울려 퍼지며 어처구니없는 웃음을 뒷받침해준다. 또한 일론 머스크의 ‘스페이스 X’와 스티브 잡스의 ‘애플’, 그리고 마크 저커버그의 ‘페이스북’ 사이 어딘가에 위치할 영화 속 대기업 BASH의 다양한 징글(방송이나 광고, 벨소리에서 쓰이는 짧은 곡)을 배치해 공허한 낙관론과 가짜 희망주의를 조롱하며 음악적 효과를 더욱 부각시키고 있다. 니콜라스 브리텔은 이를 위해 영화 속에 나오는 모든 핸드폰 벨소리와 기업 프레젠테이션 속 영상, 방송 시그널과 CF 음악들을 일일이 작업했다. 여기에 영웅적인 블록버스터 사운드(물론 이마저도 비웃기 위해 사용되었다!)나 휴머니즘에 입각한 정통적인 할리우드 스코어까지 활용하며 음악적 재미와 감동을 선사한다. 장르적인 방식뿐만 아니라 악기에서도 베이스, 드럼, 트럼펫 그리고 색소폰 트리오 등의 빅밴드나 전통적인 오케스트라는 물론, 밴조와 만돌린, 토이 피아노, 첼레스타, 파르피사 오르간, 차임벨, 힙합 비트를 포함한 각종 일렉트릭 효과까지 특이하고 독특한 종류를 혼합해 유희적이고 절충된 사운드스케이프를 펼쳐 보인다. 일견 스코어만 듣고 있으면 짧은 큐들에, 워낙 다양한 장르의 음악들이 두서없이 펼쳐져 응집력이 떨어져 보일 수 있지만, 영화 내에서 각각 장면마다 강력하게 작용하며 존재감을 발휘한다. 또한 영화 내에선 니콜라스 브리텔이 공동으로 참여한 두 곡의 노래도 흘러나오는데, 극중 커플로 나오는 아리아나 그란데와 키드 쿠디가 영화 중반 소행성과 충돌을 경고하기 위해 콘서트장에서 부르는 “Just Look Up”과 동면에서 깨어나 새로운 세상에 진입하게 된 지구인들의 쿠키를 담은 엔드크레딧에 흐르는 “Second Nature”다. 아리아나 그란데와 키드 쿠디의 듀엣송으로 전통적인 사랑 노래처럼 시작하는 “Just Look Up”은 후반 2절에 이르러서 무지한 대중들의 계몽을 일깨우는 과격한 가사로 영화의 조롱 강도를 더한다. 아름다운 파워 발라드에 이질적인 가사가 던지는 격차야말로 이 노래의 백미로, 2021년 강력한 오스카 주제가상 후보였지만 아쉽게 탈락하고 말았다. “Second Nature”는 브리텔과 인디 밴드 본 이베어의 리더인 저스틴 버논이 함께 만든 곡으로, 혜성 충돌 후 모든 것이 사라진 세상에서 먹먹해진 감성과 풍자로 쓰린 속을 다스리기에 좋은 몽환적인 포크송이다. 권력과 재력으로 새로운 세상에 이주한 이들을 위한 노래가 아닌, 현시점에 지구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올바른 선택과 희망에 대해 화두를 던지는 응원가이자 송가라 할 수 있다. 코로나 시기 비장의 OST 중 하나였던 <돈 룩 업>으로 자신의 세 번째 오스카 음악상 후보에 지명된 니콜라스 브리텔은 아담 맥케이와 함께 HBO에서 4시즌까지 방영된 드라마 <섹세션>과 디즈니 플러스의 새로운 스타워즈 시리즈 < 안도르 >를 통해 안방 데뷔에도 성공했으며, 24년 배리 젠킨스와 새롭게 도전하는 라이온 킹의 실사화 속편이자 프리퀄인 <무파사: 더 라이언 킹>으로 돌아올 예정이다. Track List 1. "Just Look Up" by Ariana Grande & Kid Cudi 2. Discovery 3. Ephemeris 4. On Hold 5. The Call 6. C-5 Galaxy 7. Don't Look Up (Main Title Theme) 8. BASH Corporate Ident ("Liif") 9. Hyperobject Approaches 10. My Boyfriend Broke Up With Me 11. The Arrest 12. It's A Strange Glorious World 13. The Launch 14. The BASH Presentation 15. Kate Goes Home 16. FEMA-BASH Commercial 17. Arrival At The Hangar 18. There Is A Comet 19. The Comet Appears 20. The Prayer For Stuff 21. The BASH Launch 22. Twenty-Four Drones Is Enough 23. It All Comes Down To This 24. Thanksgiving (Overture To Logic And Knowledge) 25. The End? 26. Memento Mori 27. Don't Look Up (End Credits Suite) 28. Logic Waltz In B Major (Bonus Track) 29. Don't Look Up (Main Title Suite; Bonus Track) 30. Ode To Science (Bonus Track) 31. "Second Nature" by Bon Iver
<대불 +> 작년에는 전반적으로 흉작 또는 주목할 만한 영화가 없었다는 평들이 많지만, 아시아(독립)영화들로 보자면 나름대로 의미 있고 흥미로운 한 해였다는 평가를 내릴 수 있겠다. 성장하는 영화산업 규모와 더불어 급격하게 변화와 세대교체가 이루어지면서 등장하는 새로운 세대의 아시아 영화들 또는 주목할 만한 감독들, 혹은 어떤 경향을 보여주는 몇몇 작품을 통해 돌아보는 2017년 아시아독립영화에 대한 일종의 일람표이자 짧은 코멘트. 올해 중화권에서 가장 화제를 모은 영화는 <대불+>이다. 동명의 단편영화를 장편으로 확장하면서, 아이폰과 아이폰 플러스의 차이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대불+>로 타이틀을 붙인 이 대담하고 어두운 블랙코미디 영화는 대만영화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는 호평을 받았다. 주로 다큐멘터리 작업을 해오던 후앙신야오 감독의 첫 번째 장편극영화인 <대불+>의 탄생과정에는 <일로순풍>과 <실혼>의 감독 청몽홍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추앙신야오의 단편을 본 청몽홍 감독이 자신이 제작자로 참여할 테니 장편 버전을 만들어보자고 제안했던 것. 각본가이자 감독인 청몽홍이 촬영감독으로 참여할 때는 ‘나카시마 나가오Nakashima Nagao’라는 닉네임을 사용하는데, <대불+>에는 제작자로 그리고 촬영을 맡으며 적극적으로 관여했다. 그리고 <일로순풍>에 출연했던 배우 대립인(다이리 런, 레온 다이-배우 계륜미의 연인으로 알려져 있지만, 최근 홍콩 우산혁명에 대한 적극적 지지 이후 중국에서의 활동에 상당한 제한을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이 불상공장의 사장 케빈 역으로 출연해 중심을 잡아주었다. 영화는 거대한 청동 불상을 제조하는 공장이 배경이다. 공장 야간경비원 피클은 고물수집상이자 친구인 벨리 버튼과 함께 매일 밤 도색잡지나 뒤적이며 시간을 보낸다. 무료해진 둘은 공장 사장인 케빈의 고급차량에 달려있던 블랙박스 영상을 돌려보기 시작하는데, 사장의 은밀한 사생활과 불륜이 담긴 영상을 보던 중 살인사건을 목격하게 된다. 우연히 스치듯 만난 적이 있는 사장의 내연녀와 한밤의 살인사건, 사라진 그녀, 최근 공정보다 훨씬 빨리 완성된 거대한 불상, 그리고 피클과 벨리 버튼에게 다가오는 위협의 그림자. 세련된 만듦새를 보여주면서 동시에 대담한 형식적 실험을 시도하는 <대불+>은 대만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와 코엔 형제를 연상시키는 블랙코미디, 그리고 걷잡을 수 없이 확장하는 사건의 고리 등으로 상당한 완성도를 보여준다. 두 가지 정도를 언급하자면 우선, 흑백과 컬러의 대비를 통한 계급 관계에 대한 노골적인 언급. 피클과 벨리 버튼이 등장하는 비루한 일상은 흑백으로, 사장 케빈이 등장하는 블랙박스 영상은 컬러로 처리하는데, 소외계층의 파토스를 담고 싶었다는 감독의 설명처럼, 영화는 둘의 비루함과 무력감은 단조로운 모노톤으로 담아내고, 사장 케빈의 일상이나 정치인, 종교인, 지역 유지들이 등장하는 장면은 선명한 컬러로 담아내면서 분명한 의도를 드러낸다. 그리고 관음증의 세계. 자동차에서 벌어지는 내연녀와의 불륜 장면, 고속도로에서 싸우는 장면이나 러브호텔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는 장면 등은 실제 블랙박스 영상처럼 보이는데, TV에서나 접하던 가진 자들과 유한계급들의 은밀한 세계를 피클과 벨리 버튼과 함께 엿보면서 관객들도 두 세계를 함께 오가는 영화적 체험을 하게 된다. <살인자 말리나의 4막극>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2017년 단연 주목받았던 국가는 인도네시아다. 칸영화제 감독주간에 초청된 몰리 수리야 감독의 <살인자 말리나의 4막극>은 한 여성이 자신이 살해한 남성의 잘린 머리를 들고 경찰서로 가서 자수한 실화를 소재로 한 작품이다. 거장 가린 누그로호가 작업한 3페이지의 트리트먼트로 시작된 프로젝트이자 부산국제영화제 APM에서도 주목을 받았던 작품. 인도네시아 동부 숨바섬의 아름답지만 황량한 느낌의 사막을 공간으로, 복수와 구원이라는 서부극의 전통적인 모티브를 살짝 변형하고 여러 장르를 혼합한 독특한 형식과 색깔로 올해 최고의 아시아영화로 호평받았다. 잘린 남성의 머리를 들고 경찰서에 가기 위해 황토색 사막을 가로지르는, 서부극 카우보이 같은 말리나의 이미지가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영화로 인도네시아 예술영화를 주도하는 최고의 제작진이 참여해 프로덕션 디자인, 촬영, 음악까지 최상의 결과물로 완성했다. 상반기에 <살인자 말리나의 4막극>이 있었다면 하반기는 2011년 부산국제영화제 뉴커런츠 부문에 초청된 <거울은 거짓말하지 않는다>로 세계를 매혹했던 카밀라 안디니 감독의 두 번째 장편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단연 주목을 받았다. 병상에 누워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쌍둥이 남동생에게 드리워진 죽음의 그림자. 어린 동생을 떠나보내야 하는 누나 탄트리의 내면과 불안한 심리가 춤과 노래, 그리고 놀이를 통해 환상적이고 마법적인 이미지들로 펼쳐진다. 3년전 론칭한 토론토국제영화제의 첫 경쟁부문인 플랫폼은 주로 서양권 영화들로 채워지는데(<문라이트>와 <재키>와 같은 영화들이 여기서 경쟁했다) 아시아영화로는 드물게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초청을 받으며 화제를 모았다. 인도네시아 독립 예술영화계를 대표하는 감독이자 든든한 후견인을 자임하는 가린 누그로호의 딸로도 잘 알려져 있는 카밀라 안디니는 족자카르타에서 감독, 제작자인 이파 이스판샤와 함께 족자카르타 영화학교에서 강의와 연출지도를 하고 있다. 족자카르타에서는 매해 12월이면 족자-넷팩아시아영화제가 열리는데, 가린 누그로호와 이파, 그리고 감독 이스마일 바스베스(<회전목마는 멈추지 않는다>)가 적극적으로 관여하며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2016년에 4천 명 정도에 불과했던 관객 수가 올해의 경우, 3배 가까운 12,000명 정도로 증가했고, 무엇보다 관객들이 대부분 20대나 대학생들이어서 역동적이고 열정적인 분위기가 인상적이었다. 흥미로운 점은, 지난 2004년 제9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마련한 특별전 <가린과 넥스트 제너레이션: 인도네시아영화의 새로운 가능성>에서 가린 이후 그의 제자, 후배 감독과 제작자들이 새로운 산업적 토대와 미학구축을 통해 성과를 거뒀고 점점 확대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한 적이 있는데, 당시 하나의 주요한 경향이자 동력으로 언급했던 ‘여성파워’가 여전히 유효함을 확인할 수 있는 2017년이었다. <섹시 두르가> <뉴턴> 마지막으로 인도영화. 방대한 시장에 비해 독립. 예술영화는 여전히 큰 주목을 받지 못하는 인도영화는 2013년 <런치박스>의 국제적 성공(2008년 <슬럼독 밀리어네어>가 미친 영화도 아주 크다) 이후 새로운 변화를 위한 노력들이 이어지고 있다. 특히 발리우드 상업영화의 자장 아래서 예술. 독립영화의 생존 가능성에 대한 테스트가 활발한데, 2017년의 경우는 그 가능성의 희망을 본 해이기도, 절망을 확인한 해이기도 하다. 시작은 로테르담영화제에서 타이거상을 수상한 사날 쿠마르 사시다란 감독의 <섹시 두르가 Sexy Durga>다. 시나리오는 물론 스토리도 없이 배우와 소규모 팀을 꾸려 22일 동안 촬영한 이 저예산 말라야람어 영화는 인도 북부출신 여성과 케랄라 출신 남성이 야반도주를 시도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어둠이 짙게 내린 도로를 따라 역을 향해 걷는 커플에게 지나가는 승합차의 남성들이 합승을 제안하고, 차량에 올라탄 이들은 지옥을 경험한다. 다문화, 다인종으로 구성된 인도 사회에 내재된 공포를 그로테스크하게 담아내며 호평을 받은 영화지만, 오랫동안 인도 영화계를 짓눌러온 검열의 날을 비껴가진 못했는데, <S. Durga>로 제목을 바꾸고 일부 장면을 덜어냈지만 지금까지 자국 내 상영은 물론 개봉까지 험난한 과정을 겪고 있다. 2017년 인도독립영화인들에게 가장 큰 희망과 기대를 안겨준 작품은 아미트 마수카 감독의 <뉴턴>이다. 베를린영화제 포럼 부문에서 첫 공개된 이 영화는 마오주의 반군과 정부군이 대립하고 있는 차티스가르주 분쟁지역을 배경으로, 갓 공무원으로 임용되어 대기 중인 뉴턴이 이 지역주민들의 투표지원 업무에 자원하면서 생기는 과정을 따라간다. 강직하지만 융통성 없는 공무원 뉴턴과 지역을 관할하는 정부군 소속 군인들, 그리고 선거에는 아무 관심도 없는 변방 마을 주민들을 통해 인도 사회를 재치 있게 풍자하는 이 블랙코미디는 인도독립영화인들과 시네필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얻으며 새로운 대안 영화로까지 평가를 받은 작품. 이후 개봉을 통해서 나름의 성과를 거뒀으며 특히 쟁쟁한 상업영화들을 제치고 2018년 아카데미영화상 외국어영화상 부문 인도 출품작으로 선정되어 화제를 모았다. 아쉽게도 <섹시 두르가>는 아직 한국에서 소개된 적이 없으며, <뉴턴>의 경우는 서울독립영화제에서 상영된바 있다.
발터 벤야민의 이야기대로 인간의 역사치고 야만의 기록이 아닌 것은 없다. 인간이라는 단어에 함축된 휴머니즘, 이성, 합리, 교양 등 번지르르한 의미들이 새빨간 거짓말로 밝혀진 사례들이 허다하기 때문이다. 미국 사법재판 중 가장 기괴한 판례로 꼽히는 O.J. 심슨의 ‘세기의 재판’ 역시 야만 중의 야만의 기록이었다. < O.J.: 메이드 인 아메리카 >(이하 ‘<O.J.>’)는 이 야만적 기록의 속살을 들추어내는 영화이다. 영화감독 에즈라 에델만은 1995년 10월 3일 초조한 마음으로 TV 앞에 앉아 O.J. 심슨 사건에 대한 최종 평결을 지켜보고 있었다. 역사학 석사 출신의 에델만은 심슨에게 무죄가 선고되기를 기도했다. 당시의 에델만에게 심슨 스캔들은 범죄 스토리가 아니라 인종재판으로 비쳤기 때문이다. 4년 전 네 명의 백인 경찰관이 과속을 하고 도주하던 흑인 건설업자 로드니 킹을 무자비하게 폭행했던 사건에 무죄가 선고된 후 에델만은 흑인 남성이 강고한 미국의 인종주의 시스템을 파괴하는 순간을 고대해왔다. ‘심슨에게 힘을 주세요!’ 에델만의 기원은 현실이 되었다. 그로부터 20년 후 에델만은 스스로의 신념을 근본으로부터 뒤집는 영화를 만들게 된다. 그 자신의 편협과 무지에 대한 반성적 고백성사라고 할 수 있는 < O.J. >를 통해 에델만은 비열하고 치욕적인 속임수에 의해 각색된 역사를 도발적으로 전복한다. O.J. 심슨은 누구인가? 전미풋볼리그(NFL)을 호령했던 최고의 스포츠 스타이자 흑인으로서 가장 높은 단계의 명사로까지 도약했다가 일급 살인혐의를 받고 급속히 추락한 사나이. 천부적인 신체 능력을 타고난 ‘하드 바디’ 스포츠맨인 심슨은 인종의 장벽을 초월하여 전국구 지지를 받았던 슈퍼스타였다. 스포츠계에서 얻은 명성을 후광으로 삼아 심슨은 TV와 광고, 영화에서도 자신의 이미지를 전시하면서 영향력 있는 셀러브리티로 진화해간다. 그러나 심슨의 유명세를 정점에 올려놓은 사건은 따로 있었다. 전 부인 니콜 브라운과 내연남을 도살한 혐의로 기소된 후 치른 이른바 ‘세기의 재판’을 통해 심슨은 낯선 모습으로 재등장한다. 총 3개의 부분으로 이루어진 < O.J .>는 심슨의 흥망사를 추적한다. 거칠게 분류하면 1장은 심슨의 성공기, 2장은 ‘세기의 재판’을 둘러싼 논쟁, 3장은 심슨의 현재에 해당한다. 서사시적인 웅장함을 유지하면서 에델만은 백인 중산층을 동경했던 말썽꾸러기 흑인 소년에게 주어진 제한된 선택의 기회,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생득적인 운동능력, 흑인 시민권 운동에 동참하기를 거부한 심슨의 정체성 부정, 미식축구 선수로서 성공 가도와 영예, 범죄용의자로의 전락, 그리고 돈과 권력, 편향된 여론에 의해 불의하게 결론이 난 재판의 과정을 훑는다. 이 30여 년의 시간은 흑인의 영웅이 아닌 미국의 영웅으로 이미지를 육성해가는 심슨의 수완을 다각적으로 보여준다. 한 인물의 생애에 대한 전 방위 지도 그리기에 동참하면서 관객들은 먼발치에서 그를 바라보게 된다. 심슨의 인생유전에는 ‘반(反) 혁명’이라고 할 수 있는 인종혐오도 포함되어 있다. 한 인물을 구성하는 이토록 다채로운 이미지는, 새로운 관점에서 심슨 사건을 조망하는데 탄력을 줄 뿐 아니라 미국 사회를 장악한 무의식, 합법적이고 상징적인 폭력을 통해 유지되는 신화를 전복하려는 이 영화의 토대가 된다. 전기적 인물을 따라가는 연대기적 기록이라고는 하지만 < O.J. >는 인물연구 다큐멘터리가 아니다. 은폐된 사건의 진상을 밝혀가는 진실탐사 다큐멘터리도 아니다. 1994년 6월 17일 심슨이 벌인 사건, 미국 사회를 발칵 뒤집어 놓은 자동차 추격전은 명백하게 그가 살인을 했다는 증거였으나 심슨 재판의 최종 결과는 ‘무죄’였다. 8개월 넘도록 이어진 재판, 100명이 넘는 증인, 4만 5천 페이지가 넘는 입증 기록에도 불구하고 심슨은 어떻게 무죄를 받았는가? 그러나 에델만의 관심은 심슨이 유죄인지, 무죄인지가 아니었다. 대서사의 초점은 어떻게 재판이 인종주의라는 이슈를 따라 ‘국가’를 형성하게 되었는가로 모아진다. 스포츠맨으로서의 재능 외에도 미디어에 의해 재현되는 심슨은 가공할 매력의 소유자로 포장된다. 심슨은 유명인사가 되기 위해 사인을 하고, 자동차 렌탈 기업 ‘헤르츠’의 모델로 활약하면서 그의 전매특허라고 할 수 있는 번개 같은 달리기 능력을 뽐냈다. 그는 백인 소비자들에게 어필한 최초의 흑인 모델이었다. 인종의 경계를 넘은 우상이 희대의 살인 용의자로 나타났을 때 미국이라는 다인종 공동체는 다시 정의된다. 백인들이 심슨을 품어준 것은 아량일까, 신화에 대한 그들의 강박일까? 관대함과 카리스마를 갖춘 스포츠맨이자 셀레브리티로서 심슨의 모든 활동이 겨냥한 것은 미국의 백인 중산층에 내재된 무의식이었다. 심슨의 영웅적 풍모가 절정에 올랐을 때 미국인들은 그가 의도한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아카데미시상식 역사상 가장 긴 러닝 타임을 기록한 수상작이자 첫 TV 시리즈 수상작, 800시간에 달하는 푸티지, 72명의 인터뷰,’ 2017년 2월 치러진 89회 아카데미시상식에서 최고 다큐멘터리상을 받은 < O.J .>가 뿌린 미증유(未曾有)의 기록들은 이 영화에 내포된 웅대한 야심을 모두 말해주지 않는다. 7시간 47분에 달하는 이 매머드 시리즈는 미국이라는 공동체의 형성과 몰락, 거짓과 광기로 유지되는 가짜 이미지, 끝내 드러나고야 말 이면의 이데올로기를 폭로한다. 최근 미국영화의 화두 중 하나는 ‘블랙 무비’이다. < 노예 12년 > < 국가의 탄생 > < 문라이트 > <O.J.> < 겟 아웃 >으로 이어지며 러시를 이루고 있는 ‘블랙 무비’에는 미국 사회 안에서 흑인들이 공유한 체험, 의제들이 진하게 녹아 있다. <O.J.>는 지나치게 많은 자료와 의미가 들어있는 서사 다큐멘터리의 맹점을 극복하면서 끝까지 길을 잃지 않고 논점을 유지한다. 에델만은 한 나라에 대한 초상을 그려내기 위해 신화가 발아하고 진화하는 과정, 그 아성이 깨어지기를 두려워하는 무의식, 그 위에 똬리를 튼 허구적 이상화를 폭로한다. <O.J.>는 미학과 윤리, 양식의 측면에서 강력한 논쟁을 야기한다. 아마도 그 잔향을 숙고하는 데만 해도 꽤 시간이 걸릴 것이다. 에델만은 여기서 심슨의 전기를 통해 인종 차별, 가정 폭력, 뉴스 매체의 과잉 등 미국의 모든 병들어가는 신경세포를 건드렸다. 심슨을 매개로 묘사되는 폭력의 역사는 차별과 특권의식, 화합할 수 없는 인종갈등의 골을 파헤쳐 보인다. 또한 최고의 논픽션 영화들이 공통적으로 보여주는 것처럼, 대상에 매몰되지 않는 거리 두기, 성실한 리서치, 그리고 다루고자 하는 테제에 대한 심오한 성찰을 보여준다. 이는 빈틈없는 조사와 핵심을 찌르는 인터뷰, 자로 잰 듯 정교한 편집이 이루어낸 위업이라고 할 수 있다. ‘세기의 재판’ 과정은 내레이션 하나 없이 심슨의 친구와 적, 동료들의 인터뷰로만 중계된다. 상세하게 기술되는 에피소드들의 태피스트리는 심연의 구조와 시스템을 건드리고 몇몇 이미지들에서는 몽상적인 힘이 느껴지기도 한다. 심슨의 이야기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영화의 결말에서 그는 강도와 유괴 혐의로 33년형을 선고받아 복역 중(2017년 10월 가석방되었다)인 상태로 묘사된다. 세기의 재판이 종료된 후 심슨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보여주는 영화의 마지막 장은 보기에 고통스럽다. 타블로이드 잡지에나 등장할법한 누추한 범죄자로 네바다 교도소에 수감 중인 심슨은 참혹한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다. 수심이 가득한 초로의 노안(老顔), 그의 피부는 나무껍질처럼 푸석해 보인다. 이 세세한 여정의 끝에 목격하게 되는 것은 미국이 조형한 신화의 엔트로피이다. 한 흑인 스포츠 스타의 영락을 보여주기 위해 8시간이 필요했는가? 그 불가피함에 대해서는 내가 보증할 수 있다. 4시간 40분에 달하는 마르셀 오퓔스의 < 슬픔과 동정 >(1968), 10시간 동안이나 상연되는 클로드 란츠만의 < 쇼아 >(1985) 같은 기나긴 다큐멘터리와 마찬가지로 역사를 가로질러 무의식의 밑자락을 드러내기 위해 시간의 누적은 필요조건이었다. 또한 그것이 인종갈등과 정치, 미디어, 쇼 비즈니스가 혼재된 이 비극적 서사 드라마의 성취를 보증하는 힘이라고 확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