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문학관 : 문밖에서
- 감독
- 박진수
- 제작년도
- 1987
- 출연
- 임동진, 황정아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서 어떤 장면을 선택하고 버려야 하는지는 언제나 판단하기 어려운 문제다. 장면마다 미묘하게 다른 표현과 뉘앙스가 영화 전체에 무슨 효과를 가져올지 어떻게 가늠할 수 있을까. 튀르키예의 여성감독 펠린 에스메르의 2017년 작품인 < 유용한 것 >에 이끌린 것은 이런 이유와 맞닿아 있다. ‘유용한 것’이라는 제목은 과거에 시인이자 변호사로 일하는 주인공 라우라의 삶의 태도에 걸쳐 있는 실존적 질문을 가리키지만, 범위를 넓혀 생각해본다면 필연적으로 무언가를 선별하고 삭제하는 과정을 통해 만들어지는 영화 작업에 대한 지시적인 자문(自問)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영화적 경험에 있어 무엇이 유용한 것이고 무용한지 규정하는 기준은 분명치 않다(하나의 기준이 아니라 복수형의 기준과 판단이 있다는 식으로 회피하기란 쉽지만, 장면은 언제나 하나의 오케이컷만을 요구한다). 어떤 장면은 의미와 상징을 과시하지만, 어떤 장면은 선뜻 유용하다고 말하기 어려운 쓸모없는 요소들로 잊을 수 없는 순간을 만들어낸다. 반대로 무의미하기 짝이 없는 순간들로만 이루어진 장면에도 관객이 받아들이는 쓸모와 의미는 불쑥 생성되어 영화적 경험에 남겨진다. 영화는 무의미와 의미가 끊임없이 긴장을 이루며 충돌하는 장소다. 영화 주변을 맴도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그 확신 없는 장소에서 모든 순간 결정을 거듭해야 하는 조건 앞에서 흥분을 느끼거나 불안에 몸서리쳐본 적이 있을 것이다. 감독의 전작인 <연극>과 <망루>를 인상적으로 보았지만, 그것 말고는 별다른 정보 없이 보게 된 작품이었다. 시작하자마자 영화에 사로잡혔다. 일견 산만하게 느껴지는 첫 장면에서부터 영화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동창회에 참석하기 위해 기차역에 도착한 변호사 라일라의 예기치 않은 여행을 다루는 이 영화는, 플랫폼 문 앞에서 결혼사진을 찍는 커플을 보여주는 데서 시작한다. 잠시 뒤에 문밖에서 서성이는 라일라의 모습이 보이고 카메라는 화면의 중심부에서 벗어나 움직이는 라일라를 담아내기 위해 그녀의 걸음에 맞춰 좌우로 이동한다.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으로 들려오는 화면 바깥의 목소리는 라일라의 복합적인 성격을 말해준다(“그녀는 낭만적이고, 내향적이었으며, 조금은 사회성이 부족했다”). 짧지 않은 롱테이크로 구성된 첫 장면은 중심적인 영역에서 또 다른 영역으로 시각적/청각적 차원의 초점을 계속해서 움직인다. 이 영화에서 롱테이크의 지속은 하나의 움직임에서 다른 움직임을 불러들이고 여러 가지의 활동을 결합하는 형식이다. 그것은 영화의 화면을 지속적으로 변형하고, 한 인물의 내면을 다른 사람의 얼굴과 대면케 한다. 망설이듯 우왕좌왕하던 라일라가 문을 열고 나선다. 그녀가 문을 열고 플랫폼으로 들어오는 데서 시작하는 이 영화는 그러므로 화면을 개방하는 다양한 시도들로 구성되어 있다. 라일라는 고개를 돌려 결혼사진을 촬영 중인 커플을 바라본다. 이 순간에 그녀의 시선에 들어온 것은 커플뿐만이 아니라 우연히 그들 옆에서 촬영에 필요한 액자를 들어주던 카난이라는 어린 여성이라는 것을 인지하기는 어렵지만, 다음 장면에 카난의 아버지가 라일라에게 혼자 오디션을 보러 간 어린 딸을 돌봐달라고 부탁하면서 두 사람은 여행의 경로에서 만나게 된다. 그들은 다른 목적지로 향하지만, 생각지 않게 같은 곳을 경유하고 함께 움직이기 시작한다. 별다른 말 없이 헤어진 두 사람이 다시 마주치고 대화를 나누는 곳은 야간열차의 내부에서다. 여러 형태의 문으로 형성된 다양한 ‘틈’의 장소다. 라일라는 한밤의 창문을 거울처럼 관찰하면서, 화장실 문을 열고 나오는 카난과 맞닥뜨린다. 창문의 반영과 문틈의 개방은 그렇게 서로 다른 얼굴들을 만나게 한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의 특별한 순간은 야간열차의 식당칸에서 처음 보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초반부의 장면에 있다. 주문한 음식을 기다리던 라일라와 카난의 옆자리로 우연히 두 여인이 합석하게 된다. 화면에는 라일라와 카난의 대화와 더불어, 합석한 두 여인의 몸짓이 붙잡힌다. 카난이 전화를 받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자, 대화는 테이블에 남겨진 세 사람의 이야기로 전환된다. 라일라는 합석한 이들과 맥주를 마시면서, 연인에게 걸려온 전화를 받고, 기차 칸 뒤편에서 심각한 얼굴로 통화하는 카난에게 시선을 던진다. 보고 듣고 만지고 먹는 일상의 감각들이 통일성 없이 쏟아지는 순간이다. 서로 다른 몸짓과 목소리가 연쇄적으로 발생하면서 이전까지 진행되던 대화가 중단되고 타인의 반응이 화면 내부로 침범하는 것이다. 쓸모 있고 유용한 인물과 대화를 중심에 두고 그 밖의 나머지 것들을 배제하는 구성이 아니라 중심과 주변을 산만하게 뒤섞고 얼굴과 말의 위계를 배척하는 방식이다. 어쩌면 다큐멘터리의 방법을 픽션에 가져온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에스메르는 다큐멘터리로 경력을 시작한 작가이고 주목할 만한 작업인 <연극>은 농촌에 사는 아홉 명의 여자들이 자기 삶에서 가져온 소재로 연극무대를 준비하는 과정을 다룬 작품이었다. 에스메르가 그리는 삶은 다성적이고 소란스러운 목소리들의 권리로 구성되어 있다. 열차가 전하는 매혹은 내부와 외부를 통과하며 무작위로 형성되는 만남에 있다. 누군가 자리를 비우고, 누군가는 우연히 도착하는 장소다. 그런 장소에서라면 처음 만나는 사람끼리 같은 공간을 점유하고 무용하거나 비밀스러운 말을 주고받는 낯선 친밀함을 형성할 수 있다. 그것은 영화관에 가는 행위와도 유사하다고 말할 수 있다. 라일라와 카난이 탑승한 야간열차는 이따금 이런저런 이유로 불이 꺼진다. 사람들은 어둠 속에 잠기고 창밖의 풍경과 눈앞에 있는 상대방의 얼굴만이 간신히 보인다. 그런 공간적 조건에서 카난은 처음 만난 라일라에게 내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배우를 꿈꾸는 지망생이자 간호사인 그녀는 친구를 대신해 죽음을 원하는 남자의 조력 자살을 도와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바로 이런 면모로 인해 <유용한 것>은 의도치 않게 코로나 이후 시기의 영화의 유용함을 생각하게 하는 작업이면서, 고다르의 죽음 이후에 삶의 유용성을 고려하는 영화가 되기도 한다). 그녀의 아버지조차 알지 못했을 카난의 비밀을 듣게 된 라일라의 여행에는 예상치 못한 방향과 성질이 덧붙는다. 그들의 여행은 밤에 속해 있다. 밤의 어둠이 드리운 내밀한 무대는 한시적으로 나타나고 사라진다. 인물 뒤편의 유리창 너머로는 아름다운 밤거리의 풍경이 지나가고 있다. 이 시간이 지나간다면, 라일라는 자살을 택하는 남자(그는 라일라와 만나 그녀가 쓴 시집의 독자라는 사실을 고백한다)와 대화를 나누고, 오랜만에 재회한 동창들과 기나긴 말을 주고받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밤의 야간열차에서 속삭여지는 말과 다른 성질의 대화이다. 영화가 묘사하는 열차의 풍경들에서 이런 우연한 마주침과 내밀한 대화는 사라져가고 있다. 크리스티안의 펫졸트의 < 트랜짓 >의 마르세유로 향하는 열차 안에서 게오로그는 상처 입은 동승객이 고통 끝에 죽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된다. 미코 레베레자의 <노 데이터 플랜>에서 기차 내부의 이민자들은 얼굴을 숨기고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목소리로만 나타나고 있다. 카말 알자파리의 <암피옥서스는 멀어요>에서 기차는 도착하지 않고 사람들은 모두 대기실에서 잠들어 있을 뿐이다. 열차는 정치적 망명의 얼룩진 기록으로, 불법 체류자들과 난민들의 피로한 기억이 새겨진 장소로 재편되고 있다. 풍경을 바라보고 지나간 시간을 반추하는 장소의 기능은 희미해진다. 그것은 코로나 시기를 통과한 영화관의 곤경과 유사한 맥락을 갖는다는 점에서, 우리를 다시 영화의 장소라는 문제와 만나게 한다. <유용한 것>에서 변모하는 여행자의 ‘무용한’ 상태는 별 의미 없어 보이는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자신의 삶과 상관없는 사람들에게 시선을 건네는 조건이 된다. 그런 얼굴과 목소리를 담아내는 것이야말로 여행하는 영화가 제안하는 삶의 조건일 것이다. 의도를 갖지 않는 무작위에 의한 만남 속에서 영화는 발생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만남을 전제하는 장소들이 사라진다면, 우리는 어디서 영화를 나타나게 할 수 있을까?
자신의 제작사(Argosy)에서 만든 가장 개인적인 프로젝트 중의 하나였던 < 도망자 >(1947)의 흥행 실패로 큰 빚을 떠안게 되자(12회 참조), 존 포드는 서부극으로 돌아와 < 아파치 요새 Fort Apache >(1948)를 만든다. 포드는 자신의 전후 서부극을 돈벌이용(potboiler)이라고 스스로 폄하했지만, 그중에서 < 황색 리본의 여인 She Wore a Yellow Ribbon >(1949)에 대해선 종종 자부심을 드러냈다. 하지만 <아파치 요새>에 대한 자평은 엇갈린다. “돈벌이 목적에는 잘 맞았지. 하지만 날조된 이야기야.”(1950년, 린지 앤더슨과의 인터뷰). “내가 좋아하는 영화 중의 하나야. 거기엔 액션도 있고 유머도 있고, 내 인디언 형제들이 영웅으로 등장하는 첫 작품이지.”(1965년, 에릭 르게브와의 인터뷰).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 존 포드의 변덕스럽고 짓궂은 자평을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하지만 후자의 발언에서 ‘내 인디언 형제들’, 그리고 그들이 ‘영웅으로 등장한다’는 말은 흥미롭게 들린다. 이 말은 < 아파치 요새 >의 어떤 면을 정확히 표현하고 있다. <아파치 요새>를 오래전에 보고 개인적으로 받은 첫 충격은 이 영화가 포드 자신의 < 수색자 >(1956)를 포함한 후대의 소위 수정주의 서부극들보다 더 수정주의적이며, 서부극의 만사(輓詞)로 알려진 <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 >(1962)보다 더 급진적인 탈신화와 서사를 이미 1948년에 완성했다는 사실이다. 반복건대, 서부극의 진화론 그리고 수정주의 서부극이라는 개념은 이런 영화 앞에서 고개를 들 수 없다. 물론 포드의 말이 흥미로운 건 그 때문만은 아니다. 줄거리는 이렇다. 오웬 써스데이 중령(헨리 폰다)은 아파치 요새 신임 부대장에 임명된다. 딸 필라델피아(셜리 템플)와 함께 요새에 도착한 이 성마른 인물은 외딴 서부로 밀려난 것에 대한 불만과 승진 및 동부 귀환에 대한 야심을 감추지 않는다. 요새에는 백전노장 요크 대위(존 웨인), 써스데이의 육사 동기생 콜링우드 대위, 그리고 이들과 오랫동안 전장을 누빈 특무 상사 오로키(워드 본드)를 비롯한 노련한 하사관들이 있다. 마침 아파치 족이 보호구역을 넘어 멕시코로의 탈출을 시도한다. 요크 대위는 평화적으로 그들을 복귀시키려 하지만, 써스데이는 보호구역 탈출을 핑계 삼아 전쟁을 벌인다. 그리고 써스데이와 그의 부대는 몰살당한다. < 젊은 날의 링컨 >(1939) < 분노의 포도 >(1940) < 황야의 결투 >(1946) < 도망자 >(1946)을 보고 헨리 폰다라는 배우에게 매혹된 사람이라면, 이 영화가 당혹스러울 수 있다. 허공을 휘젓는듯한 긴 팔과 다리, 느린 걸음으로 등장해 어느 순간 프레임을 우아하게 장악하던 이 배우의 아름다운 움직임을 여기선 전혀 볼 수 없다. 존 포드는 헨리 폰다의 특별한 자질을 < 아파치 요새 >에선 정반대의 방식으로 사용했다. 전작들에서 헨리 폰다는 망설이듯 프레임에 진입한다. 그는 어떤 프레임에서도 앤의 묘비 앞에서 중얼거리던 젊은 링컨의 자문, 혹은 폐허가 된 자신의 성당을 다시 찾은 떠돌이 신부의 자문을 멈추지 않는 것 같았다. ‘여기에 내 의지로 온 것일까? 아니면 누군가가 이끈 것일까?’ 의지와 운명의 영원한 내적 교전. 그의 낮은 음성과 느린 동작에는 혹독한 교전의 흔적이 새겨져 있어 침묵조차 치열했다. < 아파치 요새 >의 써스데이 중령은 전적으로 의지의 인간이다. 자신의 권위와 지위 외엔 어떤 것에도 무관심한 이 과도하게 각 잡힌 군인은 포드 영화에선 보기 드문 범속한 속인이다. 그는 아무래도 포드의 영화 세상에 잘못 찾아온 손님 같다. 누구도(물론 영화에 등장하지 않는 군사령부를 제외하고) 그를 초대하지 않았다. 그는 단호한 걸음으로 진입해 엄격한 말투로 프레임 내부의 모두에게 명령한다. 그의 등장은 프레임을 불편하게 만든다. 대화는 침묵에 빠지고 술자리는 어색해지며 무도회는 중단되고 저녁 식탁은 엉망이 된다. 그를 간절히 필요로 하는 곳에 체념의 몸짓으로 묵묵히 걸어 들어오던 헨리 폰다는 이제 그를 전혀 원치 않는 곳에 난입해 모두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존재가 된 것이다. #1 #2 #3 이것이 중요한가, 라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존 포드는 그렇게 보이도록 찍었다. 두 시간여의 러닝타임 중 반 이상은 요새 내부의 일상을 담고 있다. 4년 만에 돌아온 아들을 맞는 가족, 평화로운 저녁 식사, 젊은 남녀의 로맨스, 무도회, 신병훈련... 요약된 줄거리에는 결코 포함되지 않을 사소한 사건과 표정이 곳곳에 흘러넘친다. < 아파치 요새 >는 미군과 아파치의 충돌을 그린 서부극이라기보다 아파치 요새라는 공동체의 풍속도에 가까운 것처럼 보인다. 헨리 폰다의 경직된 몸짓과 강압적 말투는 이 풍속도의 오점으로 드러난다. 써스데이 중령의 죄는 무엇인가. 협상이 필요한 상황에서 전쟁을 벌여 자신과 자신의 병사들을 몰살시킨 것이다. 그에겐 그만큼 중대한 죄가 또 있다. 공동체를 부인한 것이다. 아파치 요새라는 공동체가 지닌 고유한 규칙과 지혜, 생기와 소란의 활동을 부정하고 억압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군지휘관으로서의 전술적 오류와 공동체 수장으로서의 인간적 결함 사이엔 논리적 연관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 아파치 요새 >에서 그 오류와 결함은 한몸이다.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능력과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는 자는 다른 공동체의 능력과 아름다움도 볼 수 없다. 써스데이는 여기 오지 말았어야 했다. 이곳은 존 포드의 세상, 그러니까 소란과 도취, 왈츠와 세레나데의 난장이다. 결국 세속의 질서가 개입해 중단되지만, 어쩌면 중단의 운명으로 인해 덧없는 난장의 순간이 더욱 반짝이는 공동체다. 써스데이가 요새 공동체를 부인했을 때, 아파치 공동체를 오인한 전술가로서의 실패도 이미 예정된 것이었다. 이건 너무 작위적인 설정이 아닌가, 라고 묻는다면 역시 그렇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포드가 이 영화를 ‘날조된 이야기’라고 말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리틀 빅혼 전투’ 혹은 ‘커스터의 옥쇄(Custer’s Last Stand)’라고 불리는 실제 사건(1876년 6월, 커스터 장군이 이끌던 제7기병대가 인디언 수족에게 패배해 미군 268명이 몰살당한 전투)을 소재로 삼긴 했지만, 존 포드는 인명과 지명을 전부 바꾸면서 실제 사건과는 사실상 절연했다. 이것이 ‘날조’가 뜻하는 바다. 포드의 관심사는 실제 전투라는 사건이 아니었다. 우리가 알고 있듯 다수의 비서부극도 포함해 포드 서부극의 숨은 주제는 공동체의 몰락이다. < 아파치 요새 >는 영웅이 없는 거의 유일한 포드 서부극이며, 따라서 공동체의 문제가 전경화된다. 요크 대위는 영웅의 자질을 갖추고 있지만 그의 자질은 공동체의 몰락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써스데이는 요새 공동체의 오점이며 공동체를 몰락시키는 반영웅이다. 그의 뒤에 국가의 명령이 도사리고 있다. 다른 한편에 아파치 공동체가 있고 그곳엔 탐욕스러운 상인인 미첨이라는 반영웅이 있다. 그의 뒤에도 국가의 위탁이 받쳐주고 있으며 아파치에게 저질 위스키를 팔아 그들을 병들게 한다. 아파치 요새가 주 무대라고 해도 여기엔 두 공동체와 각 공동체를 파열시키는 두 반영웅이 있는 셈이다. 이렇게 바꿔 말할 수 있다. < 아파치 요새 >의 주인공은 두 공동체다. 이 영화의 인상적인 장면 가운데 하나는 아파치와의 협상을 위해 먼 길을 떠나온 요크 대위가 추장 코치스에게 예의를 갖출 때이다.(#4) 코치스는 요크는 서로를 존중하고 신뢰한다. 국가의 명령과 위탁이라는 완장을 두른 써스데이와 미첨은 두 공동체의 존중과 신뢰를 파괴한다. <아파치 요새>는 그렇게 몰락해가는 공동체를 위한 만가이다. “내 인디언 형제들이 영웅으로 등장한다”는 존 포드의 말은 아마도 이런 의미였을 것이다. #4 에필로그는 얼마간의 세월이 지난 뒤 부대장 요크와 기자들의 대화를 담고 있다. 써스데이의 대형 초상화를 보며 기자가 묻는다. “위대한 분이었겠죠? 위대한 군인이었고요. 아이들한테는 영웅이 됐어요.” 요크가 대답한다. “그래요. 용감하게 싸우다 죽었죠. 부대를 승리를 이끌었고요.” 이어지는 대화. “그런데 같이 죽은 사람들은 누구죠? 써스데이는 기억하는 데 다른 사람들은 다 잊혀졌군요.” “잊혀지지 않았어요. 저기 그대로 살아있어요... 얼굴과 이름은 달라져도 그들은 지금이나 50년 뒤에나 여전히 이 요새의 훌륭한 대원들로 남을 거요. 써스데이가 해냈죠.” 이 대목은 <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 >의 에필로그에 등장하는 유명한 대사 “전설이 사실이 될 때, 그 전설을 보도합니다”를 고스란히 상기시킨다. 하지만 < 아파치 요새 > 쪽이 훨씬 신랄하고 비관적이다.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에서는 이미 사건이 해결되었고, 다만 해결의 영웅이 누구인가가 문제였다. 그러나 <아파치 요새>에서는 국가 권력의 대리자들로 인해 사건 해결이 실패했고 공동체는 끔찍한 최후를 맞았다. 그럼에도 지금 이곳은 조작을 통해서라도 영웅의 전설을 간절히 필요로 한다. 영웅적 자질을 갖추고 있으며 진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인물이 서글프게도 지금 그 조작의 조력자 노릇을 하고 있다. 존 포드의 ‘날조’는 정확히 그 조작을 겨냥하며, 그리하여 잊혀진 공동체의 기억을 되살리려는 것이다. 이 영화의 가장 아름다운 장면은 한 저녁 식사 장면이다. < 아파치 요새 >의 단란한 시간들은 모두 써스데이에 의해 중단되지만 이 장면만은 예외다. 콜링우드의 집에 요크, 오로키 상사의 아들이자 신참 소위 마이클, 그리고 마이클과 사랑에 빠진 필라델피아가 모였다. 이때 문밖에서 세레나데가 들려온다. “제네비브, 그대에게 세상을 드리죠....” 영창 신세를 지고 있는 그러나 부대에서 가장 노래를 잘하는 퀸캐넌을 닥터 윌킨스가 빼내 노래를 시키고 있다. 아름다운 노래가 끝나자 닥터는 위스키 한 병을 주머니에 꽂아주며 퀸캐넌을 영창으로 돌려보낸다. 노래와 춤이 없는 존 포드의 영화를 이젠 상상하기 힘들지만, 이 장면은 그 예외성과 넘치는 유머로 인해 유독 깊은 정감을 남긴다. #5 #6 또 다른 장면 하나를 빼놓을 수 없다. 오로키 상사의 집에 그의 아들이 마이클이 소위 계급장을 달고 4년 만에 돌아오는 장면이다. 성경을 읽고 있던 오로키 상사가 문을 열고 등장한 아들을 쳐다본다. 그리고 잠시 성경으로 눈을 다시 돌린 뒤 일어나서 아들과 포옹한다. 그리고 잠시 돌아서 눈물을 훔친 뒤에 조용한 목소리로 주방에 있는 아내에게 “여보, 아들이 왔어”라고 말한다. #7 #8 #9 #10 #11 #12 #13 이 장면이 왜 그토록 감동적인지에 대해선 잘 설명하진 못하겠다. 다만 오로키가 아들을 보고 바로 일어나지 않고 다시 성경을 보는 그 짧고 단순한 행위에 기쁨과 감사의 어떤 표현보다 깊은 감정이 담겨 있다는 건 알겠다.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에게 가질 수 있는 가장 자애로운 마음이 그렇게 짧은 지체와 작은 동작에 담길 수 있다는 사실을 이 장면을 보기 전까진 상상하기 힘들다. 지난해 한국을 방문한 태그 갤러거도 이 장면을 < 조용한 사나이 >에서 존 웨인이 모린 오하라에게 들꽃을 건네주는 장면과 함께 포드 영화 전체를 통틀어 가장 좋아하는 장면으로 꼽았다. 이 아름다운 순간들을 선사한 오로키도 콜링우드 부부도 그리고 다정했던 주정뱅이 하사관들은 이제 곧 사라질 것이며 그들의 소란스러운 공동체도 몰락할 것이다. < 아파치 요새 >는 아름답지만 더없이 스산하다.
존 포드의 ‘영예의 시기’(1939~1941)에서 마지막으로 다룰 영화는 < 분노의 포도 The Grapes of Wrath >(1940)이다. 자신의 땅에서 유배된 농부 가족의 이야기. 대공황의 여파와 오클랜드 지역의 오랜 가뭄 그리고 땅의 소유권을 독점한 은행과 대기업이 톰 조드의 가족과 이웃 소작농들을 축출한다. 서부로 떠나온 그들을 기다리는 건 또 다른 착취와 무자비한 공권력이다. 존 스타인벡의 동명 소설을 스크린에 옮긴 이 영화는 < 밀고자 The Informer >(1935)에 이어 그에게 두 번째 오스카 감독상을 안겼으며 미국 평자들 사이에서 포드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로 종종 언급된다. AFI(The American Film Institute)는 이 영화를 영화사의 걸작목록에서 23번째 자리에 올려놓았고, 앤드루 새리스 Andrew Sarris는 이 영화가 “한 사람의 스크린 스토리텔러를 미국의 계관시인으로 바꿔놓았다”고 극찬했다.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 대릴 자눅 Darryl F. Zanuck 그럼에도 < 분노의 포도 >를 말하는 것은 망설여졌다. 다루기 까다로운 점이 몇 가지 있기 때문이다. 첫 번째는 이 영화가 존 포드의 영화로는 드물게 메시지 중심적인 영화로 보인다는 점과 연관된다. 존 포드는 원작 소설의 사회적 분노와 정치적 발언을 고스란히 옮겨놓았다. <분노의 포도>는 사실상 좌파정치학의 메시지를 직접 드러낸 유일한 존 포드 영화이다(이 때문에 2차대전 이후 매카시즘 시기에 포드와 스타인벡은 친공산주의 혐의로 조사대상이 되기도 했다). 보수파로 알려진 존 포드가 이 영화에 얼마나 자신의 창의성과 진정성을 쏟았는지 가늠하기란 어렵다. 평자들이 다루기에 더욱 까다로운 또 다른 문제는 제작자 대릴 자눅의 깊은 연루다. 원작 소설의 판권을 사고 제작의 전 과정을 총지휘한 자눅은 존 포드의 용인 아래 이 영화의 라스트 신을 직접 연출했고, 자신이 제작한 다른 영화에서도 그랬듯이 편집에 깊이 관여했다. 원작이 현실을 과장하고 있지 않은지 확인하기 위해 자눅이 이주민 수용소에 위장 이주민을 파견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요컨대 < 분노의 포도 >에는 포드와 자눅의 공동연출의 성격이 어느 정도 있다고 봐야 한다. 이 두 가지 문제를 직접 다루기는 쉽지 않다. 존 포드의 정치학에 대해선 간략하게 말해두는 게 좋을 것 같다. 한 사람의 작가를 말하는 데 있어 그의 정치학은 평자의 호기심의 대상이긴 하지만 주된 이슈는 될 수 없다. 발자크의 소설이 그의 부르주아 정치학을 배신하듯, 작품과 작가의 정치학은 종종 어긋난다. 더구나 이 연재의 2회에서 살펴봤듯이 존 포드처럼 종잡을 수 없는 모순과 복합성의 존재라면, 그의 정치학과 작품의 내면적 연관을 밝히려는 시도는 헛된 짓일 것이다. 다만 그의 작품이 거의 예외 없이 비판적이고 염세적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둘 필요는 있다. 고전적 서부극의 완성이라 일컬어지는 <역마차>에서조차 창녀와 무법자는 공동체에 통합되지 않고 문명의 저편으로 떠났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좋을 것이다. 로저 에버트의 표현대로 이 영화가 ‘맑시즘과 초월론의 조우’라고 해도 포드가 자신의 신념을 벗어난 영화를 만들었다고 판단할 근거는 없다. ‘I’ll be there speech’ < 분노의 포도 >가 우리를 당황케 하는 것은 원작과 공유한 계급정치학이 아니라, 정돈된 언어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이다. 무엇보다 일종의 정치적-종교적 강론이 서사를 매듭짓는다. “이제 네 소식을 어디서 들을 수 있니?”라는 엄마의 슬픈 물음에 톰 조드는 이렇게 대답한다. “전 주위의 어둠 속에 있어요. 어머니가 계신 곳엔 어디에나, 가난한 자의 투쟁이 있는 곳엔 어디에나, 경찰의 부당한 폭력이 있는 곳엔 어디에나, 분노의 함성이 있는 곳엔 어디에나, 아이들의 웃음과 굶주림이 있는 곳엔 어디에나, 사람들이 제 손으로 기른 것을 먹고 제 손으로 지은 집에서 사는 곳엔 어디에나 있을 거예요.” 브루스 스프링스틴의 사무치게 구슬픈 노래 ‘The Ghost of Tom Joad’(1995)에도 인용되는 이 유명한 ‘I’ll be there speech’는 시적이며 마음을 흔든다. 하지만 이것은 포드의 방식이 아니지 않은가. 존 포드는 “영화는 말(words)이 아니라 그림(picture)으로 이야기한다”는 것을 믿었던 사람이고, 현장에서 그가 하는 일 중 하나는 스크립트를 찢어내 대사를 줄이는 일이었다. 소설의 대사를 거의 그대로 옮겨온 이 감동적이지만 장황한 강론은 전과자이자 농부인 주인공의 말이라고 믿기 힘들며, 결말부에서 갑작스럽게 쏟아진다. 이 비약을 어떻게 봐야 할까. Bruce Springsteen - ‘The Ghost of Tom Joad’ 우리는 여기서 몇몇 예외(< 젊은 날의 링컨 > < 도망자 > < 웨건 마스터 > 등)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존 포드 영화가 한 개인의 온전한 사적 창작물이 아니라 프로듀서가 주도하는 스튜디오 시스템의 산물이라는 당연하지만 잊기 쉬운 사실을 떠올려야 할지 모르겠다. 소설 < 분노의 포도 >는 1939년에 출간돼 43만 부가 팔린 베스트셀러였고 이듬해 퓰리처상을 받았다. 그런데 영화 <분노의 포도>는 소설이 출간된 바로 그해 10월 4일부터 11월 15일까지 촬영되었고 이듬해 1월 24일에 개봉되었다. 믿기 힘들만큼 급박한 일정이다. 이것은 <분노의 포도>라는 영화가 제작자 대릴 자눅의 기민한 상업적 기획이라는 사실을 뜻한다. 앞서 말했듯 자눅은 라스트 신의 연출자였고 최종 편집자이기도 했다. < 분노의 포도 >에 대한 존 포드의 태도는 자료들마다 조금씩 다르다. 예컨대 1955년에 가진 조지 블루스톤과의 인터뷰에서 포드는 이 영화가 “내 암흑기 시절의 작품”이라며 ‘젊은 시절의 일탈’처럼 말했다고 한다. 하지만 다른 인터뷰들에는 정반대의 발언이 담겨 있다. 1973년, 월터 와그너와 가진 생애 마지막 인터뷰에서 그는 “<분노의 포도>는 자눅이 시켜서 만들었지만 농촌에서 가난하게 자란 내가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였고 즐겁게 촬영했다”고 회고했다. 라스트 신도 자신이 자눅에게 연출을 권한 것이었다고 전했다.(「John Ford : Interviews」, ed. by Gerald Peary) 물론 우리는 어느 쪽이 진실에 가까운지 판단할 수 없다. 실은 그건 중요하지도 않다. 그는 인터뷰에서 종종 본심과 반대로 말했으며, 설사 본심을 말했다 해도, 관객으로서의 우리는 창작가의 발언과는 무관하게 그의 작품을 즐기고 말할 수 있다. 예컨대 그가 억지로 만들었으며 실패작이라고 간주하는 < 데이 워 익스펜더블 They Were Expendable >(1945)은 재평가되어야 할 걸작이다.(이 영화는 별도로 다룰 예정이다) 제작 배경과 관련된 사실을 다소 길게 적은 것은 한 가지 가설을 되새기기 위해서다. 스튜디오 시스템에서 작업한 존 포드에게, 앞서 언급한 몇몇 예외적 영화들을 제외하면, 포드 적인 주제도 포드 적인 이야기도 없다는 것이다. 다만 포드 적인 방식, 혹은 포드 적인 쇼트, 포드 적인 리듬이 있을 뿐이다. 더 과격하게 말한다면, 포드 적인 ‘영웅’도 없다. 다만 포드 적인 ‘캐릭터들’이 있을 뿐이다. (물론 이것은 논란이 있을 수 있는 주장이다. 태그 갤러거도 ‘Fordian Hero’를 주요 의제로 삼는다. 하지만 나는 당분간 이 가설을 유지할 생각이며 이 점은 나중에 다시 논할 예정이다.) < 분노의 포도 >라는 영화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감동적인 연설이나 분노의 격정이 아니라, 포드의 방식이다. < 분노의 포도 >는 아름답다. 이 영화에서 존 포드와 처음 작업한 그렉 톨랜드(존 포드와는 <분노의 포도>와 < 롱 보이지 홈 The Long Voyage Home >(1940)을 찍었으며 이듬해 오슨 웰즈의 < 시민 케인 >을 찍었다)의 촬영은 다큐멘터리적 사실주의와 불길한 악몽의 톤을 부드럽게 넘나들고, 대화만으로 이루어진 롱 테이크의 투 쇼트와 전통적인 쇼트-리버스 쇼트가 교차하며 우아한 리듬을 빚어낸다. 물론 여기에서도 < 젊은 날의 링컨 >에서처럼 헨리 폰다라는 특별한 배우의 육체와 음성이 그 속도와 리듬을 유연하게 조절한다. 헨리 폰다 많은 평자들은 존 포드를 시인이라고 부르고, < 분노의 포도 >를 시적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무엇이 시적인 것인가. 서정적 풍경, 혹은 시적인 대사인가. 하지만 그건 소재 혹은 촬영감독의 기예, 혹은 시나리오에 속한 자질이다. 그것만이라면 영화의 계관시인이라는 칭호는 옹색해질 것이다. 존 포드 영화에 사로잡히게 만드는 시적 감흥은 특정한 쇼트의 내부 요소들에만 국한되지 않은, 미장센과 움직임 그리고 그들의 배열 전체가 빚어내는 모종의 운율 혹은 오케스트레이션의 효과다. 그 효과는 분석의 언어가 직접 닿을 수 없는 영역이다. 앞에서 톰 조드의 ‘I’ll be there speech’의 비약에 대해서 말했다. 원작소설에서는 이 대사가 비약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소설의 구어체가 지닌, 현실의 구어와는 다른 특별한 문어적 화법에 우리가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주인공의 각성 과정이 장편소설의 긴 시간과 갖가지 사건들의 경험을 통해 제시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에선 그 사건들의 극히 일부만 묘사되므로 톰 조드의 마지막 대사는 분명히 부자연스런 비약이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이 비약이 ‘성립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 비약이 단순히 부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모종의 운율을 빚어내 우리를 이성적으로뿐만 아니라 감각적으로 설득한다는 것이다. 나는 앞서 이것이 존 포드의 방식이 아니라고 말했지만, 그 말을 수정하려 한다. 이것은 존 포드의 또 다른 방식이다. 그 대사의 내용이 아니라 그 비약을 성립시키는 존 포드의 방식이 경이롭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여기에 존 포드의 위대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논리적인 것이 아니라 간접적이고 우회적인 것일 뿐이다. < 분노의 포도 >를 둘러보는 우리의 여정은 이 비약에 관한 간접적이고 우회적인 그리고 간략한 해명에만 한정될 것이다. 초반의 한 장면을 살펴보자. # 1 # 2 # 3 우발적 살인으로 4년간 복역하고 가석방된 톰 조드는 전직 목사 케이시와 함께 가족들이 머물고 있는 존 삼촌 집에 찾아온다. 그는 애타게 가족을 찾아 헤맸으므로 톰과 가족의 조우는 격정적일 것이라고 우리는 기대한다. 그런데 사태는 그렇게 흘러가지 않는다. 가족들은 지금 아침 식사를 하고 있다(#1). 식사를 차린 어머니는 문득 창밖을 쳐다보니 톰과 케이시가 등을 보인 채 서 있다(#2). 톰은 무심한 동네 청년과 같은 자세로 케이시에게 무언가를 얘기하고 있다. 이 장면은 정말 이상하다. 톰은 왜 바로 창을 통해 가족이 보일 수 있는 위치에 서서 집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등을 돌린 채 문밖에서 알 수 없는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일까. 왜 어머니가 부르자 그제서야 부드럽게 웃으며 어머니를 바라보는 것일까(#3). 영화의 서사 내에는 단서가 없으며. 소설에는 이 이상한 순간이 아예 등장하지 않는다. 이 장면은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다. 다만 여기에 은밀한 공백 하나가 기입된다. 그것이 사건의 공백인지. 캐릭터에 관한 정보의 공백인지 알 수 없다. 다만 사건의 흐름에 어떤 영향도 미치지 않지만 우리의 지각에 미세한 지각의 공백이라는 잔상을 남겨둔다. 아무것도 아닌 이 사소한 순간에 존 포드의 운율의 비밀이 담겨있다고 나는 느낀다. 유사한 계열의 쇼트가 영화 초반부에 등장한다. 막 출옥한 톰은 차주의 지시를 어기면서 자신을 태워준 고마운 트럭 운전수에게 갑자기 공격적인 말을 내뱉는다. 그리고 차를 내리면서 “내 죄목이 정말 궁금하겠지? 살인이야”라고 사납게 쏘아붙인다(#4). 우리는 톰이 왜 갑자기 악의적으로 변하는지 알 수 없다. 이 대목은 소설에 상세하게 나온다. 트럭운전수가 심문하는 듯한 말투의 온갖 질문들을 계속 던지자 톰은 더 참지 못하고 화를 낸다. 하지만 영화에서 트럭운전수의 말과 태도에는 적의를 품을만한 점이 없다. 이 장면 역시 모종의 공백을 만들어내는데, 이번엔 분명히 캐릭터에 관한 정보의 공백으로 남는다. # 4 전자는 소설에 등장하지 않는 장면, 후자는 소설의 장면을 축약한 장면이다. 양자의 공통점은 정보의 공백을 만들어 온전한 감정이입을 방어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이 공백들은 정보들과 동시에 축적되어가며 모종의 운율을 만들어낸다. 온전히 형식적인 것도 그렇다고 내용에만 귀속되지도 않는 이 운율의 구현자는 배우 헨리 폰다의 육체와 음성이다. 이 배우의 연기는 불가사의하다. 그의 조용한 몸짓과 나지막한 목소리에는 사건에 연루되지 않으려는 듯한 망설임 혹은 사건에 연루될 수 없는 초연함이, 사건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담담함과 분간할 수 없이 혼재되어 있다.(< 젊은 날의 링컨 >과 < 분노의 포도 >, 언젠가 다루게 될 < 도망자 >에서 헨리 폰다의 연기는 영화사에 남을 만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들에서 폰다는 그의 육체와 음성만으로 시네마틱한 순간에 이른다.) < 분노의 포도 >에서 헨리 폰다는 또 다른 면모를 보여주는데 그것은 사건을 넘어서는 과도함이다. 이 과도함은 격정이 아니라 일종의 제스처로 제시된다는 점에서, 사건에 온전히 종속되지 않는 초연함의 또 다른 표현이라고 봐야 한다. 트럭운전수에게 화를 낼 때, 그는 정말 화가 난 게 아니라 화를 내야 하는 운명의 과묵한 수행자처럼 보이는 것이다. 같은 의미로 삼촌의 집 앞에서 서성일 때, 그는 자신에게 닥쳐올 무거운 운명의 예감 앞에서 망설이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의 몸짓과 음성에는 사건과 정보로 환원되지 않는 빗금의 영역, 공백의 영역이 있다. 헨리 폰다라는 육체의 존재 자체가 일종의 공백이다. 이 정도의 설명만으로 ‘I’ll be there speech’의 비약이 성립되는 이유가 납득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렇게 말할 수는 있다. 사건의 공백, 정보의 공백, 그리고 헨리 폰다라는 육체의 공백이 이루는 전조의 계열이 없었다면, 마지막 순간의 비약은 성립하지 않을 것이다. ‘I’ll be there speech’는 깨달은 자의 격정적 간증이 아니라, 가혹한 운명의 담담한 수락 연설이다. 나는 이 연설을 헨리 폰다 아닌 어떤 다른 배우가 말하는 것을 상상조차 할 수 없다. 포드 적인 공백의 쇼트들, 헨리 폰다라는 특별한 자질의 육체가 마지막 순간의 비약을 기적적으로 성립시킨다. (대릴 자눅이 연출한 마지막 장면은 ‘I’ll be there speech’의 비약 이후에 덧붙여져 있다. 톰 조드가 떠나고 남은 가족들이 좋은 일자리를 찾아 떠난다. 자눅이 수고했지만 내 생각에 이 마지막 장면은 완전히 불필요한 사족이다.) ‘영예의 시기’의 네 영화(< 젊은 날의 링컨 > < 역마차 > <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 > < 분노의 포도 >)를 말하면서, 각 영화의 서사를 거의 다루지 않았다. 존 포드가 뛰어난 스토리텔러라는 세간의 평이 틀린 건 아니지만, 그의 위대성은 다른 데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존 포드의 영화는 읽는 영화가 아니라 보는 영화다. 이 단순한 명제를 실행하는 것은 누구에게도 어려운 일이다. 존 포드의 영화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이 시기의 영화에 대해 썼다. 다음 여정을 아직 정하지 않았다. 얼마간의 시간을 갖고 생각하며 정하려 한다. 좋은 여름 보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