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사랑아
- 감독
- 김다솜
- 제작년도
- 2022
- 출연
- 최수견, 장도하, 김소영, 양승욱
홍콩 시티대학교와 한국영상자료원 공동 주최해 2025년 5월 16일부터 17일까지 진행된 국제 컨퍼런스 ‘목적지 홍콩: 한국과 중국어권 영화와의 조우 (Destination Hong Kong: South Korean Cinema’s Encounter with Chinese-Language Cinemas)’의 기조연설과 2일차 발표 및 토론 내용 을 요약합니다. 컨퍼런스 개최 개요와 1일차 발표 및 토론 내용은 이전 글( 링크 )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기조연설> 아시아 지역에서의 초국가적인 영화 협업 활동의 사례를 발견하고 그 맥락을 짚는다는 컨퍼런스의 목표에 맞춰, 영국 킹스 칼리지 런던의 크리스 베리 교수와 한국영상자료원의 김홍준 원장이 기조연설을 진행했다. 20세기 중후반의 역사적 사건들이 당대 아시아 영화의 제작과 배급, 수용에 미친 영향을 거시적인 차원의 담론과 미시적인 차원의 자전적 경험담을 통해 파악할 수 있었다. 한국과 중국어권의 영화 연결 역사 속 우연성과 불가해성: 최국인, 신장, 그리고 <용의 해> (킹스 칼리지 런던 영화학과 교수 크리스 베리) 크리스 베리(Chris Berry) 교수는 카자흐스탄과 러시아, 그리고 북한이 주 활동 무대였던 영화인 최국인과 그가 공동 연출한 <용의 해>(아사날리 아시모프, 최국인, 1981)를 중심으로, 영화를 통한 한국과 중국어권의 연결이 얼마나 우연적이면서도 불가해하게 발생할 수 있는지를 설명했다. 그는 두 문화권의 영화적 교류가 이외 지역의 개입을 통해 더욱 확장된 프레임으로 논의될 가능성을 보였다. 아시아 내 여러 지역을 옮겨가며 활동한 “마이너 디아스포라”로 규정되기도 하는 최국인은, 1926년 조선에서 태어나 1934년에 부모님을 따라 상하이로 이주하고, 6.25 전쟁 이후 북한에 체류하다가 1950년대 초반에는 모스크바 국립영화학교 브기끄(VGIK)에 다니며 영화인으로서의 이력을 정립했다. 이후에는 카자흐스탄 알마티의 카자흐필름스튜디오(Kazah Film Studio)를 마지막 근거지로 하여 활동했다. 다큐멘터리 < 굿바이 마이 러브NK: 붉은 청춘 >(김소영, 2017)을 통해 최국인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된 크리스 베리는, 최국인을 ‘냉전’ 개념의 복합성을 깨닫게 해준 인물로 기억하고 있었다. 스탈린이 사망한 후 개인 숭배(cult of personality)를 통해 자신을 절대적 지도자로 신격화했던 스탈린의 행태를 비판하며 스탈린 체제로부터 이탈해야 함을 주장한 흐루쇼프의 연설이 있은 후, 당시 소련에서 브지끄의 학생이었던 최국인과 그의 동창들은 이를 모방해 북한 김일성의 개인숭배를 비판한다. 이에 따라 그들은 졸업 이후 북한으로 돌아간다면 신변 위협을 받게 될 것이라고 우려해 소련에 잔류하기로 결정하고, 소련은 이를 허가한다. 흔히 미·소 간 대립을 중심으로만 이해되는 냉전의 이분법적 의미는 대개 서구 사회에 의해 구성되었고, 이외 문화권이 처한 사회적 상황에 따라 그 서구적 의미 바깥에서 (심지어 사회주의 집단 내부에서도) 얼마나 다양한 굴절이 발생하는지 를 알게 해준 일화였다. 게다가 동아시아가 ‘현대’ 사회로 돌입하며 받아들이게 된 이념은 상당 부분 외부로부터 유입되어 동아시아 각지에 사회적 혼란을 야기했는데, 크리스 베리는 이 혼란에 대응하기 위해 영화를 통해 연대하려는 노력 이 최국인과 같은 영화인에게서 엿보인다고 주장했다. (이는 패권국이 시시각각 대립하며 파장을 낳는 동시대 사회 속 불안정한 일상과 일면 유사하기도 하다.) 관련 활동은 연설의 제목에도 나타나듯이 아시아 곳곳의 영화인들에 의해 ‘우연적’으로 발생했다. <용의 해(Year of the Dragon)> 포스터 / 사진: IMDb 그가 1981년 중 연출에 참여한 <용의 해>는 신장 지구와 위구르족에 대한 청나라의 폭력적인 정복을 다룬다. 작품의 제작과 개봉에 관해서는 여러 의문이 제기된다. 당시 소련에서는 어떤 목적으로 이러한 내용의 영화 제작을 허가했고, 왜 최국인을 공동 연출자로 임명했을까? 작품 자체가 갑작스럽게 종적을 감춘 이유는 무엇일까? 역사적 맥락을 먼저 살펴보자면, 작품은 20세기 중·후반 지속됐던 중·소 분열(Sino-Soviet Split)을 배경으로 기획됐다고 할 수 있다. 1950년대부터 중국은, 흐루쇼프를 필두로 탈스타린 기조에 접어든 소련과 대립하기 시작했고, 그 연장선상에서 1964년에는 두 국가 간 국경이 과거 불평등 조약에 의해 확정됐다며 중국 측에서 소련을 대상으로 국경의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여기에는 중국 서부 국경 지대에 해당하는 신장 지구가 포함된다). 그리고 당시 소련의 역사학자들은 대부분 신장 지구 내 위구르족의 투쟁이 국가의 독립과 자유를 위해 전개됐다는 입장으로 위구르족을 지지하며, 과거 청나라와 당시의 중국이 견지한 무리한 영토 확장 욕구를 비판하곤 했다. 더불어, 민족성(ethnicity)에 대한 두 국가의 인식 차이도 작품에 드러난다. 소련은 ‘소비에트 연방’이라는 단어에서 알 수 있듯이 연방에 속한 개별 국가들의 자치 가능성을 시사한다. 하지만 중국은 각기 다른 민족이 통합되어 ‘하나의 중국’을 형성함을 주장해왔는데, 크리스 베리는 극중 청나라의 장군과 위구르족의 일원이 위구르족의 중국 융화 필요성, 그리고 민족의 자기 결정권 존속을 두고 논쟁하는 장면이 이러한 인식 차이를 반영하고 있다고 짚었다. 과거에 위구르족을 향해서 그랬던 것처럼, 작품이 제작됐던 당시에도 중국은 소련에 대해 ‘하나의 중국’ 기조를 강요한다는 소련의 비판적 입장 이 내포됐다는 분석이다. 연설 중 재생된 <용의 해> 본편 영상 일부 한편, 최국인 개인의 이념이 작품과 연관되어있을 가능성은 쉽사리 파악하기 어렵다. 그의 정치·사회적 이념을 추정해볼 수 있는 자료가 부재할 뿐더러, 그가 활동하던 시기 소련 영화산업의 현실을 고려하면 연결고리가 잘 형성되지 않는다. 당시 소련의 영화 제작은 보통 개별 감독에게 국가가 작품을 배당함으로써 진행됐기에 배당을 받지 못한 감독들의 수입은 비교적 낮아질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최국인이 순전히 물질적인 관점에서 공동 연출 제의를 수락했는지, 그 이면에 개인의 이념적 지지 등이 존재했는지는 연설 제목처럼 여전히 불가해(unknowable)하다. 크리스 베리가 작품과 관련해 지적한 우연적이고 불가해한 또 다른 부분은 작품이 갑작스레 사라졌다는 점이다. 당시 기준으로 상당한 예산을 들여 제작됐고 1982년 제15회 소련 탈린영화제 수상까지 경험했음에도 오늘날 본편을 감상할 수 있는 자료를 찾기가 매우 어렵다. 유일하게 남아있는 저화질의 유튜브 영상에는 작품 배급이 갑작스레 중단된 데 대해 여러 이용자가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그는 원인으로 추정해볼만한 상황을 역사학자 피터 롤버그(Peter Rollberg)의 설명을 참고해 제안했다. 본 작품이 소련에 대한 민족주의적 저항의 알레고리 로, 즉 중국이 아니라 소련의 정치적 상황에 대한 은유로 인식될 여지가 있어 소련 차원에서 배급 중단에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가설이라고 할 수 있다. 가설을 뒷받침할 만한 영화학적 개념으로 그는 이스턴 장르를 언급한다. 서구 문화권에서 비롯된 웨스턴 장르는 미국 서부 지역을 정복한 유럽인의 이야기를 다루는데, 이를 모델로 발전한 이스턴 장르는 중앙아시아 지역에 대한 소련의 정복을 다룬다. 원주민과 카우보이의 구도가 바스마치(소련에 저항한 중앙아시아 세력)와 볼셰비키로 전환되는 것이다. 사막이나 스텝 지대를 배경으로 삼고 석양을 따라 말을 타고 달리는 인물들, 그들의 총격전 등을 보면 자연스레 웨스턴 장르가 연상된다. 극중 몇몇 장면을 컨퍼런스 현장에서 직접 재생한 그는, 중·소 분리와 소련·중앙아시아 간 대립을 동시에 은유할 가능성을 통해 냉전 국면에서 아시아의 영화사적 기록을 되짚을 때 감지되는 우연성과 불가해성을 다시 한 번 강조하며 연설을 마무리했다. 황홀한 기억: 홍콩영화와의 조우, 1966년부터 1989년까지 (한국영상자료원 김홍준 원장) 김홍준 원장은 삶의 궤적을 따라 홍콩영화와 맺어온 관계와 그로부터 받았던 인상, 영감, 깨달음을 개인적 일화들을 바탕으로 공유했다. 그가 영화인으로 활동하기 시작하며 한국영상자료원장으로 재임하기까지 되새길 만한 추억으로 남아있는 홍콩영화는, 동시대 아카이브가 지닌 고유의 임무를 환기하는 것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1967년, 11살이 되고 막 사춘기에 접어들던 때 그는 홍콩영화를 처음으로 접했다. 당시는 박정희 정부가 유신정권에 돌입하기 전, 국군이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던 시기다. 동시에 반공주의적 의식이 사회 전반에 공유됐는데, 흥미롭게도 007 시리즈가 이러한 이념에 부합하는 영화로 인식되기도 했다. 시리즈에서 세계 평화를 위협하는 존재는 공산주의 세력으로 묘사되었고, 주인공들은 '위험 세력'으로 그려진 이들을 소탕했기 때문이다. 이때 국내 군사 정부는 과거 식민 통치를 자행한 일본의 문화를 배격하던 와중이었기에 일본영화가 수입되지 않았다. 다른 아시아 국가들에서 일본영화가 점했던 영역을, 한국에서만큼은 홍콩의 액션 및 시대극 영화들이 차지할 수 있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같은 시기, ‘마카로니 웨스턴’ 장르의 등장으로 < 황야의 무법자 >(세르지오 레오네, 1964) 등의 명작이 소개된 직후, <대취협>(호금전, 1966) 을 접했다. 중국어권에서 집필된 무협소설이 크게 인기를 얻고 있었던 시절, 김홍준 원장 역시 이 작품을 만나기 전에 대만의 유명 무협소설 작가 와룡생이 쓴 『군협지』를 먼저 접한 상태였으며, 그의 표현처럼 어린 시절 그에게 “무협의 피”는 이미 흐르고 있었다. <대취협>은 홍콩에서 1966년에, 한국에서는 이듬해인 1967년에 개봉했다. 당시 17살이었던 그가 처음으로 본 무협영화이기도 한 이 작품은, 그가 대만 출신 배우 정패패와 영화 속 쿵푸의 세계를 최초로 알게 되는 계기였다. 이후 중국어권의 여러 무협영화 들이 국내에도 선을 보이면서 10대 관객들은 이들의 무협적 요소에 매료됨과 동시에 장르에 내재된 정서에 힘입어, 사춘기의 반항심이 거세지는 경험을 하기도 했다. 특히 정패패, 데이비드 치앙, 적룡과 같은 배우나 당대 걸출한 연출자로 꼽혔던 장철이 기억에 남는다고 밝혔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러한 종류의 무협영화들이 정교하게 연출된 액션이 아닌 맨주먹을 이용한 싸움을 소재로 하기 시작했기에, 무협 장르의 본령을 져버렸다고 생각한 그는 이전만큼 홍콩영화에 애정을 갖지 못했다. 이소룡과 성룡이 등장한 이후 20년간 홍콩영화를 그렇게 잠시 잊고 지내다가, 그가 2001년부터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를 이끌게 되면서 인연이 다시 시작됐다. 국내 최초로 호금전 회고전을 기획해 < 협녀 >(1969), < 용문객잔 >(1967), < 산중전기 >(1979) 등의 작품을 상영한 것인데, 놀랍게도 30~50대 관객이 크게 몰렸다. 영화제 관객의 주 연령대인 2030 세대가 아니라 중년 관객층이 호응한 이례적인 사례였다. 2003년에는 복원 또는 재개봉된 작품들을 중심으로 쇼브라더스 특별전을 개최했고, 영화제를 방문해 자신의 영화 인생 안내자로서의 호금전에 대해 설명하던 정패패를 직접 만나는 기회를 맞기도 했다. <대취협> 중 정패패 / 사진: Film at Lincoln Center 대학 재학 중이던 1976년으로 돌아가보면, 김홍준 원장은 슈퍼 8mm 필름으로 다큐멘터리 영화들을 제작했고, 이중 < 서울 7000 >의 수상을 계기로 영화 제작 활동을 보다 진지한 취미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군 제대 이후에는 학내 영화 동아리 ‘얄라셩’에 합류해 영화와 관련된 워크숍을 진행하며 관련 활동을 지속했지만, 본래 인류학을 전공했고 학업을 이어가고 싶다는 생각에 1987년부터 1989년까지는 미국 템플대학교에서 영상·문화인류학을 공부했다. 하지만 남는 시간에는 캠퍼스나 시네마테크 등을 찾아 계속 영화를 감상했으며, 교내 도서관의 간행물 섹션에서 《사이트 앤 사운드( Sight and Sound )》나 《아메리칸 시네마토그래퍼( American Cinematographer )》, 《카이에 뒤 시네마( Cahiers du cinéma )》와 같은 영화잡지를 즐겨 읽었다. 이때 토니 레인즈가 작성한 한 기사에서 홍콩영화계의 새로운 세대가 “ 홍콩 뉴웨이브 ”를 구축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홍콩영화에 대한 관심이 다시 되살아났다. 그렇게 학업을 이어가며 영화도 자주 감상하던 어느 날, 미국의 한 극장에서 < 도마단 > (서극, 1986) 을 상영하는 더블 피쳐 프로그램이 열렸고, 영화잡지 외에는 관련 정보를 살펴볼 기회가 드물었기에 그는 반가운 마음으로 찾아갔다. 아무런 사전지식 없이 관람했지만 홍콩 출신 여자 배우 3인의 우정이 아름답고 감성적으로 그려지는 순간이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인물들이 곧 일어날 ‘혁명’을 예고하는 마지막 장면 역시 돋보였다. 1980년대는 광주 민주화운동을 시작으로 한국에서도 ‘민주화’를 향한 사회적 외침이 본격화되던 시기였기에, 해당 장면 속 대사와 분위기가 암시하는 ‘혁명’은 그로 하여금 단어에 내포된 의미와 가치를 되새기도록 했다. 작품을 연출한 홍콩 출신의 영화인 서극은 감독이자 제작자, 배우로서 여러 역작을 남겼다. 국내에서는 그가 연출 또는 제작한 < 영웅본색 2 >(오우삼, 1987), < 황비홍 >(1991), < 신용문객잔 >(1992) 이 흥행했다. 공교롭게도 김홍준 원장의 연설이 있기 3주 정도 전에, 서극은 이탈리아 우디네극동영화제에서 평생공로상을 수상하며 거장의 반열에 공식적으로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 좌 ) <도마단> 중 주인공 3인 / ( 우 ) 혁명 후 만남을 기약하며 헤어지는 인물들 / 사진: IMDb 그리고 몇 년 후, 김홍준 원장은 국내 영화잡지 《로드쇼》에서, 한 작품의 특정 장면을 영화 이론이나 영화사적 개념으로 해설하는 “도시에” 섹션 연재를 맡는다. 섹션 내 첫 원고의 주제로는 대중적 관심도에 비해 주류 평론계에서 충분한 논의가 이뤄지지 못했던 홍콩영화를 선택했다. 원고 작성 시 참고할 만한 자료가 많지 않던 시절이라서 고충은 있었지만, 편집장이었던 정성일 평론가의 말처럼 1990년대 홍콩영화를 진지하게 비평하려는 최초의 시도였다는 데서 의미를 찾았다. 1990년부터 1991년까지 본 잡지에 그가 ‘구회영’이라는 필명으로 연재한 이 원고들은 이후 『영화에 대하여 알고싶은 두세 가지 것들』이라는 단행본으로 출간된다. 그가 홍콩영화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키워가도록 한 작품이 한 편 더 있다. 왕가위 감독의 < 열혈남아 >(왕가위, 1989)다. 국내에 수입된 당시 배포됐던 포스터와 한국어 제목이 전형적인 홍콩 누아르의 이미지를 연상시킨 것과는 정반대로. 작품은 완성도 높은 예술영화에 가까웠다. 결투 중심의 홍콩영화로부터 경험해보지 못한 감정적 동요와 신선한 충격에 사로잡혀 홍콩영화의 새로운 시대를 여는 감독이 나타났다는 생각에 들뜨기도 했다. 그는 눈에 띄는 강렬한 몇 장면을 연설 중 공유했으며, 그중 하나는 포장마차에서의 액션 신이다. 얼핏 보면 인공 혈흔과 같은 특수효과가 매우 어색해보이지만, 액션을 비롯해 카메라의 움직임과 편집 기술이 무척 유려하게 적용됐다는 점이 놀랍다. 공중전화 부스에서 유덕화와 장만옥이 만들어낸 명장면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김홍준 원장이 본래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는 홍콩영화 관련 영상자료들도 다수이지만, 그는 원내수집 담당 부서에서 국내 기증자를 대상으로 대규모 수집을 진행한 덕에 최근 한국영상자료원에 1,000여 점에 달하는 홍콩영화 DVD 또는 블루레이가 소장돼 있다고 전했다. 아카이브를 통해서만 완수될 수 있는 기억의 과정으로서, 작품을 재발견하고 수집한 후 디지털 복원해, 대중에게 그 가치를 전파하면서 작품 자체가 다시 상상(re-imagine)되는 데 기여하겠다는 마음가짐을 밝히기도 했다. 연설을 마무리하며 그가 재생한 <열혈남아> 속 두 배우의 얼굴처럼, 과거의 한 순간에 멈춰 있지 않고 미래 세대를 위해 계속해서 재발견될 영화 속의 무언가를, 필름 아카이브로서 꾸준히 찾아 공유하고 싶다는 소망도 덧붙였다. <패널 3> 장르, 리메이크, 그리고 조우 특정 장르 속에서 한국과 중국어권 영화계가 각자의 스타일과 인력을 교환한 역사를 들여다보고, 그 이면의 지정학적·산업적 영향을 분석했으며, 홍콩대학교 김소혜 교수가 발표자들을 소개했다. 중국 멜로 TV 드라마 속 한국 남성 스타와 한류 남성성의 현지화 (영국 카디프대학교 현대언어학부(중국학) 조교수 일레인 정) (당시 해외 체류 중이었음에 따라 비대면 발표 진행) 일레인 정(Elaine Chung)은 중국 멜로영화나 TV 시리즈에 주인공으로 출연한 한국 남성 배우들의 배역을 통해, 중국어권이 ‘한국의 남성성(Korean masculinity)’을 현지화하게 된 배경과 사례를 소개했다. 특히 상당수의 한류스타가 중국어권 콘텐츠 산업에 진출한 시기, 즉 그들의 인기가 중국어권에서 부상한 2000년부터 사드무기체계(THAAD) 배치로 인해 양국 교역이 대폭 축소된 2016년까지의 작품들에 주목했다. 당시 한국인 배우들이 연기한 남자 주인공의 특성으로부터 중국어권 사회가 도출한 ‘한국의 남성성’과 이에 대한 인식이 내러티브에 어떻게 반영되어있는지를 분석하기도 했다. 로맨스와 남성성은 한국 드라마는 물론 아시아에서 흥행한 한류 콘텐츠 전반이 중심적으로 다루는 소재다. 정선의 한류 연구(“Pan-East Asian Soft Masculity”, 2001)에서는 두 요소의 결합을 통한 남성 한류스타들의 강력한 팬덤과 한국 멜로 TV 시리즈 흥행이 2000년대 초반 동아시아 한류 열풍을 본격적으로 불러일으켰다고 분석한다. 일레인 역시 한류 콘텐츠 속 한국인 남성 주인공들의 가장 대표적인 특징으로 ‘ 부드러운 남성성(Soft masculinity) ’을 언급했다. 신사적이고 예의 바른 태도, 차분한 말투, 그리고 섬세한 성격을 지닌 것으로 묘사되는 그들은 종종 재벌로 등장하며, 경제적 형편이 어려운 상대역 여성과 함께 신데렐라 내러티브를 완성시킨다(2000년대 초반 당시 한국 멜로 TV 드라마의 전형이다). 그러나 일레인은, 한류 콘텐츠를 통해 이상화된 부드러운 남성성이 중국 TV 시리즈 속 한국인 남성 배우를 거치면서, 중국어권 대중에게는 다르게 인식될 여지가 있다며 TV 시리즈 세 편을 예로 들었다. 부드러운 남성성을 지닌 한국인 남성 주인공의 성격이 또 다른 중국인 남성 배우와 비교 또는 대조되며 내심 부정적으로 평가 된다는 점에서 그렇다. <백령공우(White Collar Apartment)>(2002)의 안재욱, <100번째 신부(The 100th Bride>(2004)의 지진희, <다이아몬드 러버(Diamond Lover)>(2015)의 정지훈 모두 여성 주인공과 연인 관계를 주도적으로 이어가지 못하고 결국 관계를 지켜내는 데 실패한다. 반면 그들과 여성 주인공 사이에서 삼각관계를 이룬 중국인 남성 배우는, 실용적이면서도 강인한 면모를 보이며 마침내 여성 주인공과 연인이 된다. 혹은 한국인 남성 주인공과 달리, 이들은 부유하지는 않지만 자수성가했으며 여성 주인공에게 지속적으로 헌신하는 독립적이고 성숙한 어른을 표방하면서 더욱 이상적인 방식으로 ‘부드러운 남성성’을 구현한다. <다이아몬드 러버> 주요 인물 / 사진: TV Time 예시가 된 세 작품의 자세한 줄거리를 살펴보면, 시리즈 흥행을 위해 남성 한류스타를 캐스팅하고 전면에 내세워 홍보하면서도 결말은 중국인 남성에게 우호적으로 전개된다. 중국어권 콘텐츠 제작자의 관점에서 강력한 팬덤을 동원한 한류스타의 이미지를 문화적 자본으로 활용 해 상업적 성공을 꾀하면서도, 인물 구도와 내러티브를 중국어권 문화의 맥락에서 지역화한 결과 라고 일레인은 분석한다. 경제 발전 이후 중국사회에서 단정하고 신사적인 외양으로 대표되는 소위 “화이트 칼라 남성성(White-collar masculinity)”이 호응을 얻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일레인에 따르면, 중국어권에 아직 널리 공유되어있는 통념상 가장 바람직한 남성 이미지는 ‘부단히 노력한 후 사회적 성공을 거둬 가정의 생계를 책임지는 가장’에 가깝다. 따라서 부드러운 남성성을 지닌(부유한 집안에서 편안히 자랐지만 가정을 이끄는 독립적 주체로까지는 성장하지 못한) 한국인 남성 배우의 역할은 이에 부합하지 않는 인물로 지각되어 내러티브에서 소외됐을 가능성이 높다고 일레인은 추측했다. 중국어권 콘텐츠 흥행 수단으로 한류의 대중적 인기를 활용함과 동시에, 인기의 핵심이 되는 남성 이미지는 지역화해서 내러티브에 반영함으로써 한류와의 차별화를 시도하는 전략이라는 해석이다. 한·중 영화 협력의 산업적·정책적 측면: <제3의 사랑>을 중심으로 일본 교토대학 강사 김수현(현 영국 퀸즈대학교 벨파스트 조교수) 김수현 교수는 2000년대 이후 본격화된 한국과 중국어권 간 콘텐츠 합작이 시도된 역사를 산업과 정치의 맥락에서 분석했다. 특히 한·중 합작 영화에서 작가로서의 권리와 투자자로서의 권리가 각 스태프에 의해 복합적으로 행사되는 현상 을, 동아시아의 정치와 산업에 관한 담론에 기반해 설명했다. 연구 방법론 중 하나로 참여관찰법을 도입해 합작 영화 < 제3의 사랑 >(이재한, 2014) 제작 현장에서 어시스턴트 프로듀서로 활동한 경험을 녹여낸 점도 인상적이었다. “20세기는 방송(Broadcasting)의 시대”라며 방송이라는 동시다발적 송신의 매체가 대중문화 형성에 미치는 영향을 강조한 미셀 힐름스(Michele Hilmes)의 주장을 ‘영화’에도 적용하는 것으로 발표가 시작됐다. 영화도 기술을 바탕으로 초국적으로 전파될 수 있고, 스타나 대중문화에 관한 담론과 영향을 주고받으며 세계화된 문화적 양식으로 공유되기 때문이다. 동아시아에서는 2000년대부터 영화를 매개로 초국가적인 협업이 발생했는데, 그중에서도 중국은 같은 시기 세계무역기구에 가입하고 정부 당국이 한층 완화된 문화 정책을 펼치면서 ‘합작’에 대해서도 개방적인 태도를 취하기 시작했다. 이때 한국은 합작 파트너로서 중국어권 제작나와 배우와 협업해 < 비천무 >(김영준, 2000), < 무사 >(김성수, 2000), < 아나키스트 >(유영식, 2000) 등의 작품을 내놓았다. 김수현 교수에 따르면, 이러한 초국가적 합작의 경제적 기반을 조성한 여러 주체들 간의 협상 결과에 따라, 작품의 ‘작가(author)’로서 창작의 방향을 결정하고 통제할 권리가 주어진다. 한·중 합작 영화의 경우 제작 과정 전반에 걸쳐 정부 당국의 검열이 만연한 중국 영화산업의 특성까지 더해져, 작가로서의 권리가 제작 주체들 사이에서 합리적으로 배분되기가 쉽지 않다 . 그는 <제3의 사랑>의 어시스턴트 프로듀서로서 각색과 제작, 배급 과정에 직접 관여했던 경험을 빌려, 이 과정에서 견제나 갈등, 때로 불공정한 상황까지 야기될 수 있음을 보였다. <제3의 사랑> 포스터, 스틸 / 사진: IMDb( 1 , 2 ) <제3의 사랑>은 동명의 중국 소설을 원작으로 한국인 이재한 감독(John. H. Lee)이 연출하고 중국 제작사 HS엔터테인먼트가 제작을 맡은 멜로드라마 장르의 영화다. 원작을 각색한 각본은 본래 이재한 감독이 집필했지만 최종적으로 채택된 각본은 중국 측 프로듀서의 작업 결과물이었다. 특히 영화 제작 및 배급을 담당하는 국영 기업 차이나 필름 그룹(China Film Group Corporation)의 당시 부대표는, 일부 장면이 여자 주인공이 남자 주인공을 대면하려는 동기를 약화한다는 이유로 원작 소설에 충실할 것을 지시하는 이메일을 감독에게 직접 보내기도 했다. 차이나 필름 그룹이 중국영화에 관한 대규모 투자 및 배급을 주도하는 국영 기업이라는 점에서, 각색에 참여한 한국 스태프 인력은 합작 영화의 창작을 둘러싼 권력 구조를 개편하지 못하고 그의 지시에 따라야 했다. 중국 제작사 측의 불공정한 대우는 직업 안정성에 대한 위협으로까지 이어졌다. 김수현 교수가 인터뷰한 한국 출신 조감독의 경우, 현장 참여를 위해 중국에 체류하던 중 비자가 만료되었음에도 중국 제작사는 이를 연장하는 데 협조하기를 거부했고, 해당 조감독은 촬영 도중 출국해야 했으며, 중국 측 제작사와의 갈등을 이유로 중국 재입국도 허락되지 않았다. 결국 중국 제작사는 촬영 종료일까지 참여하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그의 이름을 작품 크레딧에서 제외하고 만다. 이렇게 중국에서 일시적으로 근무한 한국 출신 스태프들은 체류 목적에 적절히 부합하는 비자를 발급받는 데 어려움을 겪었고, 제작 현장에 기여한 바와 관계없이 스태프로서의 지위까지 위협받는 불안을 감수해야 했다. 게다가 배급 지역마저도 중국 측 배급사가 단독으로 결정하면서, 대규모 흥행에도 불구하고 한국 관객으로부터 발생할 잠재적 수요는 무시된 채 작품은 중국 내에서 배급되는 데 그쳤다. 또 다른 한중 합작 영화 < 평안도 >(장윤현, 2014)는 출연한 배우가 대만의 독립을 지지하는 정치 성향을 띤다는 등의 이유로 중국 내 상영이 금지됐고, 중국 당국의 압력으로 인해 해외 상영까지도 무산되며 2016년까지 개봉을 하지 못하는 고초를 겪기도 했다. 위와 같은 몇몇 사례를 종합했을 때, 한·중 합작은 중국이 상대 국가와 맺고 있는 여러 종류의 이해관계를 반영하며, 그에 따라 합작 결과물의 중국 시장 진출 향방이 정해지는 현상을 엿볼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합작’이라는 외형을 지녔지만 제작과 배급 전반이 실질적으로는 중국을 중심으로 전개될 수밖에 없게 되는 한계 가 드러나기도 했고, 상대국 제작진이 체감하는 지정학적 불안정성 이 그들의 제작 참여 경험의 질에 악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김수현 교수는 이렇게 영화산업의 논리와 제작 방식이 서로 달라 충돌하는 상황에서, 국제 합작이라는 작업에는 통상 모종의 긴장 관계가 형성됨을 언급했다. 그리고 ‘시장 확장’을 목표로 한다는 본래 특성상 합작 영화 제작 시 감독의 권한이 상대적으로 약화될 여지가 있으며, 위에 언급한 국가 간 이해관계와 지정학적 역학 관계에 따라 창작과 배급을 주도할 권리가 주어지는 현상도 소개했다. 국제 합작은 이렇게 서로 다른 문화권 간 타협과 조율, 그리고 힘겨루기의 장이 되며, 합작을 둘러싼 권리는 예술적 아이디어나 행위뿐만 아니라 지정학적 영향력이 작용하는 가운데 주장 된다. 다만 산업 환경이 변화하면서 오늘날 동아시아의 국제 합작 경향은 조금씩 달라지는 중이다. 199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의 합작에서는 각본이나 캐스팅 등을 공동으로 진행하며 작품의 ‘창작’을 함께 하려는 기조가 강했다(단, 일본의 경우 < 박하사탕 >에서처럼 제작 투자 위주로 참여했다). 그리고 시장을 효과적으로 확장하기 위해 동아시아 관객 모두가 친숙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공통의 주제(< 적벽대전 >과 < 묵공 >에서와 같이 대개 역사적 사건)를 바탕으로 한 블록버스터 대작들이 주로 제작됐다. 2010년대에 들어서면 중국을 무대로 한 작품을 중심으로 한중 합작이 주로 이뤄졌고, 중국을 찾는 한국인 제작진들의 규모도 증가했으며, 후반 작업 단계까지도 합작이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다가 최근 2020년대에는 분위기가 달라져, 앞서 언급한 캐스팅, 각본 집필 등의 창작 과정을 함께 하지 않고, 장소 섭외와 같은 프로덕션 서비스만을 서로에게 제공하는 새로운 방식의 합작이 시도되고 있다. 하지만 김수현 원구원은 한·중 합작 사례가 갈수록 드물어지고 있다는 부정적 현실을 전했다. 2016년, 사드무기체게(THAAD) 배치 문제로 한·중 간 지정학적 긴장 관계가 형성되면서 대부분의 합작 프로젝트는 취소되었다. 해당 분야에 투자되던 예산 역시 삭감되면서 2020년대까지도 한중 합작은 거의 성사되지 않고 있고, 최근 동아시아 내 합작은 주로 일본과 중국, 대만 간 진행된다. 액션! 대만 갱스터 영화의 부활과 한국 영화인·문화와의 연결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커뮤니케이션 대학 조교수 팅 우 초) 팅 우 초(Ting Wu Cho) 교수는 이전부터 자신이 연구해왔던 ‘대만 펄프 영화(pulp film)’라는 주제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대만 갱스터 영화가 한국영화와의 상호작용을 거쳐 2000년대 이후 부흥한 현상을 다뤘다. 이를 위해 1950~60년대 대만 고전영화를 비롯해 대만 내 영화산업의 발전, 지역문화, 그리고 지정학적 관계의 변화에 따른 영향까지 폭넓게 고려했다. 논의를 뒷받침할 수 있는 개념으로는 냥유연(Long-liu-lian) 을 제안했는데, 중국어 방언의 한 종류인 복건어로 표현된 ‘낭유연’은 목적 없이 방랑하며 시간을 흘려 보내는 행태를 말한다. 그는 제작 자본의 투자와 시장 구조, 장르적 요소의 측면에서 불안정하고 혼종적인 성격을 지닌 대만 갱스터 영화 의 특성이 이 개념과 유사하다고 봤다. 1970년대부터 현재까지의 대만 갱스터 영화 중 다수가, 타국의 영화산업과의 합작을 통해 액션연기를 수입하고 자국 관객의 취향에 맞게 변화시키면서, 작품의 장르와 자본 모두 초국가적이고 혼종적인 방식으로 구성되는 결과를 낳았기 때문이다. 팅 우 초는 대만 갱스터 영화를 시간 순으로 세 종류로 구분했다. ‘방랑자’의 전형을 타고난 인물에 대한 구원 서사 가 중심이 되는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의 작품들이 첫 순서다. 대만의 지역적 특성을 반영한 범죄 및 갱스터 영화의 관습이 이들에게서부터 처음으로 발견되기 시작했다. 냥유연을 체화한 방랑자로서의 인물과 지역의 청년문화, 그리고 유행가 삽입을 통한 뮤직비디오와도 같은 연출이 눈에 띈다. 장르의 측면에서는 일본의 야쿠자 영화와 홍콩의 액션 영화가 모두 엿보인다. 그리고 제작 자본은 불안정하게 투입된 데다 당시 검열의 강도는 높았기에, 이 시기에 발표된 대만 갱스터 영화들 대다수는 상업적 흥행을 이루지 못했다. 계엄이 해제된 1990년대에는 대만 뉴웨이브 의 영향으로, < 비정성시 >(허우샤오셴, 1989), <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에드워드 양, 1991), < 남국재견 >(허우샤오셴, 1996) 등 작가주의적 경향이 짙고 독특한 내러티브를 지닌 작품들이 갱스터 주제의 대만 펄프 영화 중 대다수를 이뤘다. 반면 세 번째 구간이라고 할 수 있는 2000년대 이후에는, 상업적 장르영화의 형식을 갖춘 작품들을 통해 갱스터 장르가 부흥하기 시작했다. < 맹갑 >(유승택, 2010)과 같은 “ 대만 뉴 갱스터 필름 ”, 즉 1970~80년대 대만 펄프 영화의 특징에 청년들 간의 낭만주의적 요소를 가미함으로써 상업성을 띠게 된 2000년대 이후 장르영화가 대중적 인기를 얻은 것이다. 같은 시기에 아시아 전역에 세계화 트렌드가 나타나기도 하면서, 대만의 최신 가요와 인기 배우 등에 대한 국제적 인지도가 향상됐고, 타국 영화산업 인력과의 영화 공동 각색 및 합작 역시 활성화될 수 있었다. 대만 갱스터 영화의 지역적 전통과 세계적인 영화 트렌드가 맞물린 지점이다. <맹갑> 포스터 / 사진: IMDb < 하이자오 7번지 >(위덕성, 2008)라는 멜로드라마가 흥행하면서, 대만의 지역적 특성이 대중적인 인기를 불러일으킬 잠재력을 지녔음이 재발견되고, 대만 영화산업의 십년 간의 침체가 극복되는 기회가 마련됐다. 이윽고 2010년에 개봉한 <맹갑>은 실제 야외 거리와 주변 지역에 거주하는 갱스터들을 묘사하는 등 초기(1970~80년대) 대만 갱스터 영화의 특징을 여럿 지니고 있다. 하지만 초국가적 협업 이 두드러진다는 점에서 초기의 형태와 차별화된다. 촬영과 프로덕션 디자인, 액션 연출 등의 주요 보직에 외국인 스태프를 많이 기용했다. 그리고 액션 자체도 정교하게 짜인 홍콩 스타일이 아니라 정제되지 않은 본능적 움직임이 돋보이도록 연출됐는데, < 올드보이 >(박찬욱, 2003)의 액션에서 영감을 받아 양길영 무술감독을 섭외한 후 배우들에게 액션 연기를 전수해주기를 요청하기도 했다. 양길영 감독의 지도를 바탕으로 작품에는 1분 28초에 달하는 싱글 테이크 액션신이 삽입될 수 있었고, 이 장면은 <올드보이>의 장도리 액션신에 대한 오마주이자 동시대 대만 액션 연출의 우수 사례로서 현재까지도 언급되고 있다. <맹갑>에서 양길영 감독이 참여한 사례를 기점으로 대만의 갱스터 영화의 액션 연출은 물론 각색, 투자 등 종합적 측면에서 한국 영화인들의 기여가 늘어나기 시작했고, 이는 대만의 상업영화 제작 기반이 다시금 다져지는 데 큰 도움이 됐다. 일례로, 한국영화 < 남자가 사랑할 때 >(한동욱, 2013)를 대만의 문화와 관객 취향에 맞게 리메이크해 흥행한 < 맨 인 러브 >(은진호, 2021)를 들 수 있다. 연출을 맡은 대만 출신 감독 은진호는 이전에 대만 밴드 “EggplantEgg”의 뮤직비디오 연출을 맡았던 것으로 잘 알려져 있었다. 해당 뮤직비디오에서 역시 청년 갱스터 문화를 반영하는 서사가 전개되며 음악과 잘 어우러져 “방랑자(Wanderer) 유니버스”를 구축하는 데 일조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그런 그는 <남자가 사랑할 때>를 대만의 관점에서 제작된 갱스터 영화로 리메이크하기 위해, 대만의 문화적 혼종성을 드러낼 수 있도록 동남아시아 출신 노동자 인구가 집중돼 있거나 일본문화도 일부 관찰할 수 있는 지역을 배경으로 촬영을 진행했다. 여기에 대만의 인기 가요까지 삽입하면서, 한국영화에 대한 성공적인 지역화 사례라는 평가를 받으며 본 작품으로 당해 대만 개봉작 중 최고 흥행 성적을 달성하기도 했다. (좌) 국내 원작 <남자가 사랑할 때> / (우) 대만 리메이크작 <맨 인 러브> (사진: ㈜사나이픽처스, IMDb ) 한편, <맹갑> 흥행 이후 해당 작품의 제작자는 대만의 소위 ‘지하세계’ 경험을 모티브로 또 다른 갱스터 영화 <가타오>를 제작했다. 이 작품 역시 인기를 얻자 제작자 장웨이인이 후속편을 제작하면서 시리즈에 대한 관심은 높아져갔다. 후속편 <가타오 2: 제왕의 부상>(2018)은 대만 뉴웨이브 작품에 자주 등장한 배우 겸 감독이자 과거 조폭집단에서 활동하기도 했다고 알려져있던 옌정궈가 연출을 맡아 화제가 됐다. 가오제나 콜린 쩌우와 같은 유명 배우가 출연하기도 했으며, 한국의 홍의정 무술감독과도 협업했다. IP 활용 범위도 넓어져, 작품 관련 OTT 스트리밍과 주제가 발표, 라이브 콘서트를 기획하며 ‘가타오 유니버스’를 조성하기에 이르렀다. 그 결과, 다음 편인 <가타오: 최후의 방랑자>(2021)에서는 한국 투자사와 타이베이 영화 기금 모두로부터 자본을 조달할 수 있었다. <가타오 2: 제왕의 부상> 포스터 / 사진: IMDb 결론적으로, 한국 영화인들의 전문성과 산업 구조 도입에 힘입어 형성된 대만의 뉴 갱스터 장르 는, 상업영화의 공식을 정립하고 이를 대만이라는 지역에 특화 하면서 대만 영화산업에 내재됐던 야심을 실현하는 장으로 기능했다. 그러나 최근 몇 년 간은 또 다른 종류의 변화가 발생하고 있는데, The Pigs, the Snake and the Pigeon (2023)이라는 작품이 대만영화로는 처음으로 중국 본토에서 대규모 흥행 성적을 거두며, 아시아 국가 간 협업을 통한 갱스터 장르의 색다른 변모 가능성을 제기한 것이다. 위 작품의 무술감독은 대만의 스턴트맨 출신이지만 <가타오> 시리즈에서 한국인 무술감독과 함께 작업한 이후 무술감독으로 성장했다. 또한 대만에서 가장 큰 규모의 멀티플렉스를 운영하는 비쇼시네마(Vieshow Cinema)의 대주주인 와닌국제비주얼엔터프라이즈(Wanin International Visual Enterprise)는 중국의 영화 제작 및 배급 업체 알리바바픽처스(Alibaba Pictures)와 계약을 맺어, 작품의 IP를 범중국어권에 수출하려는 의도를 내비쳤고, 추후 일본과 한국, 말레이시아와의 합작 가능성도 열어 뒀으며, 리메이크 작품 제작을 맡을 한국 지사까지 설립하기도 했다. 이렇게 다차원적으로 심화되기 시작한 아시아 국가 간의 영화 합작이 대만 영화계에도 생기를 불어넣을지, 혹은 대만의 갱스터 장르를 근본적으로 재구성하게 되는 현상으로 이어질지를 주의 깊고도 흥미롭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팅 우 초는 설명했다. 포스트 정동 혹은 새로운 사후세계: <마약전쟁>과 <독전>을 통해 본 홍콩 누아르의 공명 (부산대학교 영화연구소 전임연구원 박은지) 박은지 연구원은 특정 시기에 한국을 찾아온 ‘ 홍콩영화 신드롬 ’의 특징을 바탕으로 < 마약전쟁 >(두기봉, 2012)과 이의 한국판 리메이크작 < 독전 >(이해영, 2018)을 비교하며, 한국영화 속 (포스트) 홍콩 누아르의 흔적 을 발견했다.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국내 관객이 홍콩영화에 열렬히 반응한 일련의 현상을 일컫는 홍콩영화 신드롬은 특유의 감성과 에너지를 국내 영화계에 각인시켰으며, ‘문화적 기억’으로 회자될 만큼 영화문화 형성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여기에 국내 영화인들의 상상력까지 가미되어 여러 차례의 각색과 리메이크, 오마주가 나타나기도 했다. <독전>은 그러한 사례들 중에서도 상업적으로 가장 큰 성공을 거둠과 동시에 평단의 반응도 호의적이었던 작품이다. 반면, 놀랍게도 <마약전쟁>의 리메이크작이라는 이 작품 본연의 정체성은 잘 알려져 있지 않은데, 이는 홍콩 반환 이후 제작된 영화들의 국내 수입량과 인지도가 크게 감소한 데 영향을 받았을 수 있다. 국내 수입된 홍콩영화 편수는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연간 50~80편이라는 높은 수치를 기록했지만 1997년부터 41편으로 급감했고, 2000년대에는 이내 한 자릿수까지 곤두박질치며 반환 이후 급속 냉각되고 있는 홍콩영화 시장의 현실을 드러냈다. 하지만 신드롬이 한창이던 시기, 한국영화는 홍콩영화 특유의 어둡고 강렬한 미학을 열정적으로 받아들이며 ‘홍콩 누아르’의 등장에 열광했다. 기록적인 흥행을 거둔 오우삼 감독의 <영웅본색> 시리즈에 이어, < 첩혈쌍웅 >(오우삼, 1989)과 < 천장지구 >(진목승, 1990), < 지존무상 >(왕정, 향화승, 1989) 등 범죄 및 갱스터 장르의 홍콩영화가 한국에 성공적으로 안착하며 홍콩 누아르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홍콩 누아르’라는 용어는 1991년에 『영화에 대하여 알고싶은 두세 가지 것들』에서 김홍준 원장이 처음 사용하며 이후 비평계에서 통용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홍콩 누아르에 대한 국내 팬들의 열정이 거세졌고, 이전까지 이상적인 목표로 받아들여졌던 할리우드와 유럽영화로부터 벗어난 영역으로서, 한국 영화문화의 매력적인 대안으로 고려되기에 이르렀다. <첩혈쌍웅>, <지존무상> 중 (사진: MUBI , IMDb ) 박은지 연구원은 홍콩의 누아르와 액션을 한국영화만의 방식으로 수용 했다는 데 더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반환이 일어난 1997년 즈음 홍콩에 스며든 우울함을, 민주화를 열망하던 1980년대 후반 한국사회의 시대정신을 바탕으로 재전유(reappropriation) 했다는 분석이다. 홍콩영화를 접하기 시작한 1980년대 후반 한국사회는 서울올림픽을 통해 본격적으로 세계화를 경험하는 한편, 1987년 민주항쟁 이후 민주주의의 불완전한 정착에서 비롯된 감각 역시 이상하게 공존하고 있었다. 특히 충심과 형제애 등의 유교적 이상에 부합하지 않는 분위기로서의 “ 정동적 아노미(affective anomie) ”는 홍콩 누아르의 핵심적인 감수성으로 국내 관객에게 지각됐고, 파멸적이고 어두운, 울분의 폭발과 같은 키워드가 이 장르를 추동하는 감정으로 거론됐다. 박은지 연구원은 당시 한국사회의 정치적 불안정성의 영향으로 내면에 모종의 불안이 자리하게 된 국내 관객이, 선과 영웅주의 위주의 표면적 서사 이면에 있는 이러한 누아르적 감수성에 열광했을 가능성을 제안했다. 비슷한 시기에 영화잡지 《키노(KINO)》는 오우삼과 왕가위 등을 정전화하며 해당 장르를 작가주의적 관념과 연결해서 이해하기도 했다. 그리고 한국영화 감독들은 홍콩 누아르의 기묘한 매력에 이끌려 2000년대부터 2010년대에 이르기까지 본 장르의 연장선상에서 작업을 이어갔다. 홍콩 원작들에 대한 눈에 띄는 리메이크 시도들 역시 있었지만, 아쉽게도 많은 작품이 무산되거나 흥행에 실패했다. 반환 이후 홍콩에서 직접 제작된 누아르 영화들 자체가 국내 관객에게 소개되는 경우는 비교적 드물었는데, 홍콩 누아르의 중심 인물인 두기봉 감독이 2000년대 연출한 역작 Breaking News , Election , PTU 등마저도 국내 대중에게 선보일 기회가 없었던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좌) 홍콩 원작 <마약전쟁> / 사진: IMDb (© 2013 - Variance Films) (우) 국내 리메이크작 <독전> 중 / 사진: ㈜용필름 와중에 <독전>이 흥행에 성공하며 원작 <마약전쟁>에 대한 관심도 불러일으킨 점이 흥미롭다. 두 작품은 줄거리는 같지만 스타일과 톤, 감정을 전달하는 방식에서 확연한 차이를 보였다. 이를 통해 <마약전쟁>은 전형적인 홍콩 누아르와는 구별되는 독특한 작품으로 국내 관객에게 인식될 수 있었다. 영화는 두기봉 감독이 연출한 첫 홍콩-중국 본토 합작 영화로, 홍콩 마약 카르텔의 브로커 티미(Timmy)가 사형을 면하기 위해 마약 경찰 장(Zhang)과 공조한다는 설정으로 언더커버 범죄 스릴러의 흔한 관습을 따르며 시작한다. 하지만 이내 티미의 배신이 가져온 범죄 조직의 붕괴로 초점을 옮겨가고, 경찰 조직이 참혹하게 파괴되며 마무리된다. 치밀하게 탈출을 계획하는 티미와 마약 카르텔을 끈질기게 추적하는 장은 각자의 목표를 향한 굳은 결심을 지닌 채 극명하게 대립한다. 반면, <독전>은 경찰 원호( 조진웅 )와 락( 류준열 ) 사이의 정서적 긴장을 강조하고, 두 인물 간 경쟁 관계를 점차 심화시킨다. 그리고 자기 존립과 배신을 원동력으로 움직여 윤리적 측면에서 모호한 위치에 있던 <마약전쟁>의 티미와 달리, 락은 마약 조직 내 구조적 폭력의 희생자로서 경찰의 수사를 도우면서 윤리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 인물로 상정된 듯한 느낌을 준다. 이런 인물 설정은 홍콩 누아르의 특징을 공유하는 한국형 범죄영화에서 자주 나타나며, ‘ 속죄를 통해 회복된 영웅적 행동 ’의 맥락에서 해석될 수 있다. 원작 <마약전쟁>은 국가 간 합작으로 탄생한 동시대 홍콩 누아르에 그치지만, 리메이크작 <독전>에서는 남성 인물들이 차츰 동료애를 형성함과 더불어 서로의 정체성 형성에 영향을 주고받는 와중에, 극단적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카르텔의 착취 구조를 배경으로 그에 대한 사회적 응징의 아이디어도 제시한다. 원호와 락은 마약 카르텔의 폭력에 어머니를 잃은 락의 사연, 그리고 그 카르텔에 대한 수사에 공조하려는 의지를 매개로 잠시나마 연대하고, 이로써 경찰과 범죄 조직원의 경계가 희미해진다. 이후 경찰 원호는 국가의 통제를 벗어난 개인의 실행을 중심으로 ‘정의’의 개념을 재구성하고, 락은 무자비한 착취를 기반으로 이익을 창출해온 브라이언의 신체를 훼손해 흔적을 남기며 사적 응징을 완수한다. 두 인물은 이윽고 서로를 총으로 겨눈 채 마지막 장면에서 마주하는데, 한때 감정적으로 결속했지만 극중 사건 이후 멀어진 둘 사이에 모호한 연대와 상호 환멸의 분위기가 감돈다. 박은지 연구원은 <독전>의 이와 같은 차별화된 서사와 감정들이, 홍콩영화 신드롬이 정착시킨 ‘농도 짙은 감정’의 범죄물을 한국 조폭영화의 관점에서 이해한 결과 라고 설명한다. 창작자의 시네필적 면모와 장르의 혼종이 작용하면서, 홍콩 누아르와 한국형 범죄영화의 특징들을 반영함과 동시에 전복하기도 하는 독창적인 리메이크 작품이 탄생한 것이다. * 토론 * 홍콩 침례대학교 영화과 조교수 도로시 와이 심 라우(Dorothy Wai Sim Lau)가 패널 3 발표자 4인의 연구 내용을 요약하고 아래와 같이 질문했으며, 발표자들이 답했다. Q. 김수현 교수에게 (질문1) 시대별로 한국과 중국이 처해있는 외교적 상황에 따라 합작 양상이 달라진다고 설명해주셨다. 그렇다면 <제3의 사랑> 제작 당시 한·중 간 정치·사회적 관계 는 어떠했는지 궁금하다. (답변) <제3의 사랑>이 제직됐던 2010년부터 2015년 사이, 한국 정부는 영화산업에서의 합작에 호의적이었고 관련 절차가 다양한 방법으로 지원되기도 했다. 이에 힘입어 본 작품의 감독과 촬영감독, 음악감독을 비롯한 여러 스태프 역시 작업을 위해 한국에서 중국으로 이동했지만, 발표 중 이야기했듯이 중국 제작진의 개입과 지정학적 불안정성 등으로 인해 충분한 창작 권리를 획득하지 못했다. (질문2) 중국의 제5세대 감독들에게서 나타난 작가주의적 특색과 달리, 블록버스터 < 유랑지구(The Wandering Earth) >와 같은 작품은 국가 권력에 기반한 창작(national authorship)과 국가적 브랜딩이 눈에 띈다고 발표 중에 말씀하셨다. 후자의 ‘ 국가 권력에 기반한 창작 ’이 무엇일지 보다 구체적으로 듣고 싶다. (답변) 물론 장이머우와 천카이거 감독과 같은 이들은 한국의 봉준호 와 박찬욱 감독처럼, 독창적인 작품 세계를 통해 작가주의 감독으로서의 지위를 오랜 기간 인정 받아왔다. 하지만 이들이 속한 제5세대 이후에 등장한 주선율영화(1990년대 중국에서 개혁·개방이 이뤄진 후 사회주의와 애국주의 등의 중국사회 주류 이념을 교육 및 선전할 목적으로 제작된 영화의 종류)와 같은 장르에서는 작가주의에 관한 어떠한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 여기에는 중국 정부가 추구하는 가치관과 비전이 관객 선전을 목적으로 하여 주입돼 있다. 따라서 감독이나 스태프 개인의 개성을 중심으로 한 작가주의를 바탕으로 하지 않고, 국가 권력과 이념을 기반으로 ‘중국영화’라고 이름 짓는 행위 자체만이 의미를 갖게 된다 는 점에서 제5세대 감독들의 활동과는 맥을 달리한다고 볼 수 있겠다. Q. 팅 우 초 교수에게 (질문) 중국과 홍콩에서 비롯된 액션 스타일과, <맹갑>에 도입된 한국식 액션 스타일의 차이점을 설명해줄 수 있는가? (답변) 홍콩의 액션은 중국으로부터 상당한 영향을 받아, 각기 다른 그룹이 터득한 기술을 바탕으로 정교하게 연출돼 있다. 한국의 영화인들은 이와 같은 홍콩식 액션을 받아들이되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응용 했는데, 카메라 앵글에 맞춘 인위적 동작이 아니라 보다 현실적인 움직임을 가미 했다는 데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Q. 박은지 연구원에게 (질문) 발표에서도 언급해주신 홍콩 누아르의 ‘정동’적 측면이 동아시아 국가의 리메이크작을 통해 표현 될 때 주로 어떤 특징이 나타난다고 생각하시는지 여쭤보고 싶다. (답변) 이번 발표를 위해 진행한 <독전>에 대한 연구를 중심으로 말씀드리자면, 먼저 정동적 모티프로부터 영향에 따라 범죄자와 경찰의 경계를 흐릿하게 하는 설정 이 있다. 이는 남성들 간의 연대에 기반한, 매우 불안정하고 양가적인 감정에서 비롯된다. 다른 하나는 ‘ 상호반영적 페르소나(mirroring persona) ’의 발견이다. 한국 범죄 스릴러에서 자주 등장하는 장면으로, 두 남성 인물이 서로를 응시하면서 마치 거울을 보는 것처럼 상대의 모습을 자신의 정체성에 투영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패널 4> 한·홍 합작의 재해석 특정 영화인이나 작품의 사례를 인용해 한국과 홍콩 간 영화 합작이 일어난 역사를 돌아보고, 눈 여겨 볼 만한 몇 가지 대목을 자세히 살펴봤다. 영화의 안과 밖 모두에서 새로운 시대를 직면할 수밖에 없게 된 상황에서, 영화를 통한 두 국가의 협력이 나아갈 방향에 대한 제언도 이어졌으며, 패널 발표 전반은 홍콩 침례대 케니 응 교수가 이끌었다. 호금전의 한국 산악영화에 대한 재평가 (영화사가 · 독립 연구자 스테판 테오) 1970년대 한국영화는 홍콩과 대만과의 합작을 여러 번 시도했으며, 이 과정에서 “Destination South Korea”와 같은 현상으로 일컬을 만큼 합작 영화의 주 촬영지로 자주 등장하기도 했다. 스테판 테오(Stephen Teo)는 그중에서도 < 사문의 승객 >(1979)과 < 산중전기 >(1979)에 집중해, 한·홍 합작의 로케이션으로 한국의 산세가 선택된 맥락과 함께 각 작품의 역사적 의미를 되짚었다. 그는 한국의 산속에 자리한 전통적 양식의 건축물과 사찰, 주변의 절경이 두 작품의 핵심적인 미적 요소로 기능했고, 배경이 되는 전근대 중국(historical china)을 상징하는 공간이 되어줬다고 말했다. 모든 장면이 인위적인 세트나 스튜디오를 이용하지 않고 실존하는 장소에서 있는 그대로 촬영된 점도 특별하다. 스테판 테오는 ‘문화적 냉전(cultural cold war)’이 이어지던 1970년대 중·후반 중국어권과 한국의 영화 합작이 선호되는 환경이 마련됐고, 두 편의 작품 역시 그 결과물이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당시 중국은 문화혁명의 잔재로부터 벗어난 직후였기에 정치와 사회 전반이 불안정한 상태였으며, 무협을 비롯해 귀신, 종교, 미신 등(신이나 요괴, 초자연적 현상을 다루는 중국영화의 한 장르로 ‘신괴’로도 일컬어진다)이 개입한 장르나 서사의 유통도 금지돼 있었다. 그는 이런 상황에서 한국이 영화 촬영지로서, 감독 호금전이 의도한 장르를 시도할 ‘자유’를 선사 했다고 봤다. 한국과 홍콩, 대만이 영화 제작 측면에서 ‘ 자유에 기반한 네트워크(freedom nexus) ’를 구축하며, 중국 본토에서의 정치, 사회, 문화적 제약으로 인해 수용되기 어려운 작품들이 제작되는 환경으로 기능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며 지정학적 상황도 변화했기에 위와 같은 맥락은 작품의 가치를 뒷받침하기에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대신 그는 한국이 ‘문화적 중국’으로 재현됐다는 주장을 바탕으로 합작의 의의와 효과를 설명했다. 유교학자 뚜웨이밍(Tu Wei-ming)이 제안한 개념인 ‘문화적 중국’은 중국문화로부터 영향을 받은 지역으로 구성된 국제적 공동체를 가리키며, 중국 본토와 홍콩, 대만을 포함해 전 세계의 중국어권 디아스포라 지역도 해당된다. 그중에서도 홍콩은 ‘문화적 중국’의 기조로 기획된 영화를 한국과 합작했고, 호금전의 위 두 작품에서 한국이라는 배경이 ‘문화적 중국’을 재현하는 데 효과적임이 입증됐다고 그는 평가했다. 호금전이 한 인터뷰에서 답변한 내용에 따르면, 한국의 전통 건축 양식과 몇몇 자연 경관으로부터 중국과의 문화적 유사성을 발견한 경험을 계기로 두 작품을 한국에서 촬영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이외에도 두 국가는 유교와 불교와 연관된 의식이나 생활 양식을 오랜 시간 공유해왔다. 같은 맥락에서, 홍콩의 영화 제작진들 역시 중국과의 교류가 단절된 문화적 냉전 시기, ‘문화적 중국’을 재현할 수 있는 대안적 공간으로 한국을 택해 합작을 시도했다는 주장이다. <산중전기> 중 / 사진: IMDb( 1 , 2 ) 한편, 아시아 문화권에서 공유되어온 동양 철학의 개념이 작품 속 주제의식의 동력이 된 점도 눈에 띈다. 도가적 사상에서 비롯된 장자의 ‘소요유’는 『장자』 제1편에 등장하는 용어로, 어떠한 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노니는 정신적 경지를 뜻한다. 사물과 세상에 구속 받지 않고 광막한 공간에서 누리는 절대적인 자유이자 참된 행복이라고도 할 수 있을 텐데, 이는 호금전의 작품의 모티프로 자주 등장한다. <사문의 승객>과 <산중전기>에서도 인물들은 계속 걷는다. 단순히 땅 위를 걷는 것뿐만 아니라 적을 쫓아 뛰고, 몇몇 액션신은 공중에서 펼쳐지며 ‘하늘에서 걷는’ 듯한 느낌을 자아내기도 한다. 스테판 테오는 소요유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 ‘자유’의 감각을 포착한 호금전이, 이를 인물의 다양한 움직임들(걷기, 뛰기, 공중에서 활동하기)로 작품 속에서 실현 하고 있다면서, 배경이 된 한국의 자연경관 역시 기여했다고 덧붙였다. 결과적으로, 그의 관점에서 ‘소요유’ 개념에 기반하고 있는 두 작품은 그 개념의 특성에 따라 존재와 시간의 ‘실존’을 지지하게 된다. 한편 호금전은 일종의 방랑자로서, 당시 중국사회의 제한적 환경에서 벗어나 한국이라는 대안적 공간에서 예술적 자유를 발휘해 창작한 작품으로 소요유 개념을 시각화했다고 덧붙였다. 무사, 스파이, 그리고 쿵푸 마스터: 정창화 감독과 초국가적 영화 제작자의 탄생 (홍콩 시티대학교 창의미디어학부 조교수 이상준) 이상준 교수는 그간 학술적으로 분석된 적이 드문 정창화 감독에 대한 예비적 수준의 연구로서 1960~70년대 한국과 홍콩에서 그가 지나온 연출 여정을 들여다봤다. 감독으로 데뷔한 1953년부터 1977년까지 그는 50여 편에 달하는 작품을 제작함으로써 국내는 물론 홍콩에서도 합작영화 제작의 주역으로서 크게 활약했다. 2003년 부산국제영화제가 마련한 회고전을 계기로 그의 연출작이 지닌 영화사적 가치가 국내에서 재발견되기 시작했고, 당시 회고전에서는 쇼브라더스와 골든하베스트와 작업한 한·홍 합작영화 9편이 상영됐다. 여러 국가를 오가며 활동하는 아시아 영화인들은 ‘내셔널 시네마’라는 프레임에 부합하지않는다는 이유로 과거 연구의 대상으로 쉽사리 선정되지 못했다. 현재는 이런 편협한 경향성이 사라지긴 했지만, 정창화 감독이 활동하던 당시만 해도 디아스포라의 정체성을 지녔거나 초국가적 작업에 참여하는 감독과 촬영감독, 배우 등은 연구자들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정창화 감독은 활동 초기부터 여러 장르에 걸쳐 왕성화게 활동했다. 1965년부터 3년간 멜로드라마, 청춘, 무협 등의 장르영화 15편(< 황혼의 검객 > 등)을 한국에서 연출했고, 1968년에 쇼브라더스와의 협업을 시작했다. 이후 그는 6.25 전쟁 이후로 중국어 문화권의 제작사 두 곳(쇼브라더스, 골든하베스트)과 공식적으로 협업하며 높은 흥행 수익을 올린 최초의 한국인 감독으로 거듭났다. (물론 그가 쇼브라더스와 초반에 합작한 다섯 편은 제목과 감독의 이름을 사실과는 다르게 명시한 ‘위장 합작(counterfeit coproduction)’에 해당한다.) 그리고 많은 한국인 배우와 촬영감독, 무술감독과 같은 제작 인력이 그의 활동을 계기로 홍콩으로 넘어와 본격적으로 합작에 합류하는 기회가 만들어졌다. 제작 파트너가 골든하베스트로 바뀐 뒤에는, 그는 제작사 산하에서 본인이 직접 운영하는 별도의 전속 스튜디오를 설립해 한국은 물론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 제작사들과도 활발히 합작하기도 했다. 다만 그가 홍콩에서 제작했지만 한국에서 공개한, 앞서 언급된 ‘위장 합작’ 작품들은 그의 필모그래피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혼란을 불러일으키는 터라, 홍콩에서의 그의 활동이 학술적으로 면밀히 분석되지 못하게 되는 상황을 낳고 말았다. 국내의 많은 영화사 연구자들은 그 작품들의 존재를 아예 무시하거나, ‘탈국적(denationalized)’ 활동의 결과물 또는 한국영화사의 ‘비공식적 일화’ 정도로만 평가했다. 이는 홍콩영화사 연구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 철인(죽음의 다섯손가락) >(1972)이 ‘컬트적 고전(classic)’으로 인식되기도 했지만 역시 그를 ‘작가’로 인정하지는 않았다. 이상준 교수는 이와 관련해 2008년에 홍콩의 영화 연구자 웡 아인 린(Won Ain-ling)과 대화하며 접한 설명을 인용했다. 웡 아인린에 따르면 1997년 홍콩 반환 이후 ‘홍콩영화’의 정체성 구성이 간절해진 상황에서, 홍콩을 상징하는 무협 장르의 영화에 한국과 일본 출신의 영화인들이 관계되어있다는 사실이 홍콩의 영화인들을 약간은 불편하게 했을 수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주자(Emigré)와 망명자(Exiled)와 같은 디아스포라 영화인들은 초국가적 영화사 형성의 핵심 동력이라는 점에서 ‘내셔널 시네마’의 영역에 편입되지 못한다는 이유로 그들의 활동이 망각돼서는 안된다고 이상준 교수는 주장한다. 영화와 사람, 문화적 움직임, 협업, 공간 등이 여러 국가에 걸쳐 조직될 수 있다는 ‘초국가적 관점’ 을 전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정창화 감독은 1960~70년대 한국과 중국어권 간의 영화적 교류를 중개한 이로 상정된다. 그는 정치적 상황이 불안하고 정부 개입도 심각했던 당대 한국영화계에 쿵푸영화의 매력을 제시했고, 새로운 합작 파트너로서 동남아시아권의 인력을 소개하는 참신한 역할을 수행했다. 이상준 교수는 관련해 정창화 감독이 한국에서 홍콩으로 제작의 근거지를 옮기고 초반에 발생한, 쇼브라더스와의 합작 사례를 더욱 자세히 설명했다. 그가 < 망향 >(1958)을 통해 홍콩과의 합작을 처음으로 시도한 이후 < 조용한 이별 >(1967)과 < 비련 >(1967)을 제작했지만 홍콩 관객들로부터 호응을 얻지는 못했다. 하지만 1960년대 한국의 대표적 첩보 스릴러로 손꼽히는 < 순간은 영원히 >(1966)의 흥행 성적은 비교적 준수했다. 설립자 런런쇼의 관심을 끄는 데도 성공해 1968년, 쇼브라더스와 5년간의 계약을 체결하게 되기도 했다. 정창화 감독은 (당시 기준) 동시대적 설정을 바탕으로 ‘현대 액션 영화’를 구현할 줄 알았기에 자신이 섭외됐을 것 이라고 추정했다. 이때까지 홍콩은 사극 기반의 무협 장르가 액션 영화의 중심이 되어 현대적 액션 연출 경험은 부족했기 때문이다. 같은 시기에 쇼브라더스에서는 일본 출신 감독, 촬영감독, 작곡가, 안무가 등이 상당수 활동 중이었으며, 정창화 감독이 입성한 이후 성훈, 임지은, 남석훈 등의 한국 배우들의 합류도 앞두고 있었다. 당대 여느 제작사보다 국제적으로 조직이 구성되었던 업체라고 할 수 있다. 쇼브라더스의 국제 교류 역량에 힘입어 정창화 감독이 해당 제작사 안에서 처음으로 연출한 작품은 < 천면마녀 >(1969)로, 홍콩에서 007 시리즈가 유행하던 중 그와 같은 형식으로 제작된 여성 주연의 액션 영화다. 두 명의 조감독과 배우 한 명(성훈)은 한국인으로, 세 명의 핵심 스태프는 일본인으로 기용하며 동아시아 출신의 인력들이 어우러졌다. 크게 흥행하지는 못했지만 적정 수준의 상업적 이익을 달성하며 유럽 영화계에 진출한 최초의 쇼브라더스 제작 작품이라는 수식어를 얻게 됐다. 그 사이 호금전의 <대취협>(1966)이 홍콩 박스 오피스에서 신기록을 세우고 아시아 전반에 무협 장르 붐을 일으키면서 쇼브라더스의 제작 기조도 무협 장르 쪽으로 기울었다. 이후 정창화 감독 역시 시장의 수요를 의식해 한국에서 < 나그네 검객 황금 108관 > 등 ‘국내 무협영화’를 연출한 데 이어 쇼브라더스에서도 중국어권 출신이 아닌 감독으로서는 최초로, 사극 무협 기반의 작품들을 연출했다. 그는 쇼브라더스의 무협 액션 스타일에 반일 감수성을 결합하고, 미국의 웨스턴 장르도 일부 차용했으며, < 강호여협 >(1970)과 < 아랑곡의 혈투 >(1970)와 같은 작품을 선보였다. 특히 <아랑곡의 혈투>가 긴박하고 현실적이면서도 효율적으로 연출된 전투 장면들로 볼 때 1960년대 만주리안 웨스턴 장르의 분위기를 성공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천면마녀>, <아랑곡의 혈투> 중 (사진: 영화진흥위원회) 다만 이상준 교수에 따르면, 정창화 감독은 무협 장르의 붐에 다소 늦게 반응했다고 할 수 있다. 그가 쇼브라더스와 계약하고 본격적으로 무협 장르 연출을 시도했던 1970년대 초반은 쇼브라더스의 무협 제작 열기가 식고 홍콩영화가 ‘쿵푸’라는 물결을 마주하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보다 현대적인 공간을 배경으로 벌어지는 노동 계급의 이야기, 그리고 무기를 사용하지 않는 맨손 쿵푸 액션은 홍콩영화의 새로운 흥행 공식으로 자리매김했고, 골든하베스트(Golden Harvest)라는 제작사의 설립 및 운영의 주된 목표가 됐다. 정창화 감독은 이 트렌드를 재빠르게 수용해 1972년에 <철인(죽음의 다섯손가락)>을 제작했다. 그가 처음으로 연출한 쿵푸영화였지만 한국에서 제작했던 전작들과 유사하게 반일 감정을 모티프로 한 서사가 중심이 됐다. 다만 작품 개봉 직후에는 홍콩 내에서 흥행에 실패한 듯 보였고, 쇼브라더스의 새로운 인력과의 의견 불일치 등의 문제도 겹쳐 정창화 감독은 같은 해에 골든하베스트로 이직한다. 하지만 1973년 작품은 미국 박스 오피스 흥행 1위라는 놀라운 기록을 세우며 1970년대 초반 홍콩영화의 국제적 영향력을 입증했다. 골든하베스트는 할리우드와 같이 수직적으로 통합된 구조를 추구하며 유연한 제작 체계역시 갖춘 기업이었다. 정창화 감독은 이곳에서 < 흑야괴객 >(1973), < 흑무사 >(1974), < 황비 >(1974), < 심판자 >(1976)를 연출했고, 다양한 장소를 로케이션으로 삼는 골든하베스트의 방침에 따라 태국, 인도네시아, 필리핀, 대만, 한국 등 여러 아시아 국가들에서 촬영했다. 그런데 그의 마지막 작품 < 충열도(파계) >(1977)가 개봉하자, 그는 갑작스럽게 홍콩을 떠났다. (정창화 감독은 당시 “홍콩영화 발전에 기여하신 만큼 한국영화의 발전에도 기여해줬으면 한다”라는 부탁을 문화공보부로부터 받았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그 즈음 국내에서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사망 이후 전두환 정부 출범을 앞두고 있어 정치 상황이 매우 불안정했다. 귀국 후 정창화 감독은 스스로 제작사 화풍흥업을 설립해 1980년대 중에는 국내에서 제작자로 활동했고, 이를 계기로 영화 연출에서 은퇴한 그는 1996년 미국으로 이주했다. 이상준 교수는 2003년 부산국제영화제의 정창화 감독 회고전 프로그램의 코디네이터로 활동한 조영정을 인용하며, “액션영화의 선구자로서 이 장르를 한국에 소개하고 발전시킨 그가 다채로운 이력에도 불구하고 심도 깊은 연구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라는 점에 아쉬움을 표했다. 그리고 발표 당시 컨퍼런스에 함께 하며 기조연설을 맡기도 했던 연구자 크리스 베리(Chriss Berry)의 말처럼, “영화를 통한 한국과 중국 간의 연결이, 자연적으로 주어진 민족성(ethnicity)과 유사한 ‘국민국가(nation-state)’ 개념에 기반하지 않고, 개별적인 초국가적 프로젝트들에 의해 더욱 구체화”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며, 관련된 학술적 논의가 이어지는 데 기여하고 싶다는 소망을 밝히기도 했다. 하나의 냉전에서 또 다른 냉전으로: 한·홍 합작의 과거로 미래를 살펴보기 (홍콩필름아카이브 소속 영화평론가 샘 호) 샘 호(Sam Ho)는 이틀 간의 컨퍼런스를 마무리하는 순서에 걸맞게, 한·홍 합작의 과거를 지나 그로부터 역동적으로 변화한 결과로서의 현재를 개괄하고, 이를 바탕으로 양국 간 영화 협업의 미래를 조망했다. 그는 동시대 사회가 유례 없는 새로운 질서 를 마주함과 동시에, 그와는 정반대의 가치를 추구하는 국제사회의 냉전 상황 역시 목도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래서 이번 컨퍼런스의 목표가 더욱 뜻깊은데, 두 국가로부터 비롯된 영화적 움직임들이 갈라지면서도 합쳐지는 대목들을 다루고 있어, 모순되면서도 상호 보완적인 방식으로 발전하는 오늘날의 역사와 일맥상통하기 때문이다. 지난 150년의 역사만 보더라도, 아시아는 외부의 오랜 침략과 억압으로 인해 깊은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하지만 그만큼 고통으로부터 교훈과 깨달음을 얻어 현재와 미래를 가꾸려는 의지가 돋보인다고 샘 호는 말했다. 따라서 아시아는 새로운 질서를 받아들이는 와중에 지정학적 권력의 중심으로 피할 수 없이 끌려갈 수밖에 없는 동시대 상황 속에서, 지금까지의 역사를 통해 얻은 교훈을 바탕으로 그 권력의 중심지를 조정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러려면 마주하게 되는 사건의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맥락을 짚어야 하는데, 개인이 모든 맥락을 파악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여러 연구자가 관점을 공유하는 이번 컨퍼런스와 같은 자리가 자주 마련되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다. 그가 한·홍 합작 역사를 읽는 방법으로 추천한 바는 이렇다. < 이국정원 >(전창근, 도광계, 와카스기 미쓰오, 1957)을 기점으로 합작이 시작된 1950년대부터 1960년대 초반까지를 그는 홍콩영화의 제1 황금기라고 보는데, 좌익(left-wing)과 우익(right-wing) 진영의 제작사들이 절묘하게 균형을 이루며 홍콩영화 발전에 기여했기 때문이다. 홍콩영화의 두 진영은 당시 이분법적으로 분리되어 있지 않았으며, 샘 호에 따르면 오히려 긴밀히 연결된 채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찾아온 냉전 체제에도 불구하고 다극적인(multi-polar) 영화산업을 구축해나갔다. 여러 작품에 걸쳐 홍콩과 합작한 한국인 정창화 감독에 대해서도 언급하며, 한국영상자료원에서 그의 작품을 처음으로 관람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과거 홍콩국제영화제에서 2000년대 초반의 독창적인 한국영화들을 관람하고 완전히 매료된 그는 해당 작품들 이전의 한국영화사가 궁금했고, 홍콩필름아카이브의 지원으로 한국에 방문해 한국고전영화를 연구하는 기회를 얻은 바 있다. 정창화 감독을 비롯해 홍콩과 합작한 여러 한국영화인들의 활동 역시 이러한 연구의 의지를 다지도록 해줬다. 그는 그러면서 한국과 홍콩의 합작이, 동아시아의 문화와 가치를 통합하고자 노력하는 과정에서 양국이 공유하게 된 경험 이고, 결과적으로 두 국가의 영화적 전형에서 벗어난 새로운 무언가가 창작됐다고 설명했다. 이후 그는 홍콩필름아카이브의 여정을 홍콩영화사와 연결 지어 돌아봤다. 홍콩은 자국 내 영화산업도 활성화된 상태였지만 영화 미학의 측면에서도 기여한 바가 큰 반면, 타국에 비해 필름아카이브를 상당히 늦게 설립했다(1990년대). 그래서 소장자료의 규모 역시 상대적으로 작은 편인데, 그럼에도 아카이브로서 사업을 개척하고 학계와 유기적인 관계를 지속하는 데 성공했다는 점이 고무적이다. 샘 호는 그 비결이 영화 연구에 미치는 지정학적 영향력을 수용하면서도 아카이브 고유의 임무에 충실한 연구를 병행 했다는 데 있다고 말했다. 전 세계 영화 연구의 성과를 측정하는 기준은 아직까지 상당 부분 서구 문화권의 기준을 따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정치·사회적으로 민감하거나 그다지 대중적이지 않은 연구 주제는 여전히 “저명한 지면”, 즉 서구의 주도 아래 발행되는 지면을 통해 공개되기 어렵다. 샘 호는 이를 비판하기보다, 지정학적 영향력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사회 속 불가피한 현실임을 인정한다. 따라서 그는 필름아카이브의 연구 업무를 수행하는 자로서 영화학계의 여론을 지배하는 서구 문화권의 가치관에 근접한 연구 성과를 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다만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가지지 않더라도, 필름아카이브만이 파고들고 매진할 수 있는 주제로 연구하는 이들을 지원 하기도 한다. 아시아 영화인 1인의 필모그래피를 종합적으로 정리한 저서를 집필하는 등, 주류 학계의 틈새를 메우는 이들의 유의미한 연구는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샘 호는, 자신을 포함해 과거와 현재를 면밀하고 꾸준하게 연구하려는 의지를 지닌 아카이브의 일원들이 있기에, 홍콩영화의 미래는 결코 어둡지 않으리라고 내다봤다. * 토론 * 패널 3과 4의 발표자들이 모두 모인 가운데, 청중이 질문을 던지거나, 발표자들이 서로의 주제와 관련해 궁금했던 점을 문의하고 답변했다. Q. (청중) 이상준 교수에게 (질문) 정창화 감독은 홍콩에서 영화를 제작할 당시, 한국인으로서의 민족적 정체성에 더욱 영향을 받았는지 , 혹은 홍콩 영화산업과 연출 방식에 동화된 상태였을지가 알고 싶다. (답변) 그의 자기 정체성 인식이 작품을 통해 명확히 나타나지는 않는다. 다만 처음 쇼브라더스를 통해 홍콩에 진출했을 당시, 그는 제작사와의 계약에 의해 섭외된 여러 외국인 감독 중 하나였다. 따라서 각본에 개입하지도 않았고, 작품 자체를 통제할 권한을 충분히 확보하지 못했다. 하지만 구체적인 연출 방식(액션 동작과 인물 설정, 반일 감정에 관한 요소 등)만큼은 당대 쇼브라더스에서 제작된 다른 작품들과는 차별화됐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골든하베스트 에서의 필모그래피는 달랐다. 이곳에서는 그가 창작에 관해 주장할 수 있는 권리가 더욱 확대 됐고, 한국 출신 인력을 도입할 여건도 형성되어 쇼브라더스에 비해 훨씬 많은 ‘합작’ 작품이 제작될 수 있었다. 그래서 본인은 개인적으로 그가 골든하베스트에서 작업할 당시 연출한 작품들을 선호한다. 물론 작품의 가치를 기준으로 평가한 것은 전혀 아니며, 개인적인 취향에 따라 말씀드렸다는 점 참고 부탁드린다. Q. 샘 호 평론가 (질문) 일레인 정이 발표한 ‘부드러운 남성성’은, 중국의 유교적 가치관으로부터 파생된 이미지로 인식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오래 전부터 유래된 유교 사상에 입각해, 중국에서는 학문에 정진하는 ‘학자’로서의 태도 가 남성의 이상적 이미지를 구성하는 조건이 된다고 여겨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이 유교적 남성상은 점차 변화를 겪어 ‘신체적 강인함’을 수련하려는 태도도 강조 된 바 있다. 그럼에도 중국에서는 학문 수양을 중심으로 한 전자의 ‘부드러운 남성성’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는데, 한국의 경우는 어떠한지 궁금하다. (답변: 김수현 교수) 대부분의 각본을 남성이 집필하는 한국‘영화’ 의 경우, 신체적으로 강인하고 마초적인 남성성을 형상화하는 작품들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반면 한국‘드라마’ 작품들은(특히 멜로드라마 장르가) 여성 작가에 의해 주로 집필되곤 한다. 그리고 이들이 그린 남성 인물의 이미지는 작가의 주관이 반영된, 이상적이면서도 무척 비현실적인 요소들이 집합함으로써 탄생하기에, 한국드라마가 설정한 남성 이미지는 현실 사회에서는 실재하지 않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정리하면, 한국 영상 콘텐츠를 통해 남성성에 대한 인식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영화와 드라마에 각기 다른 양태로 형성되어있는 젠더 및 섹슈얼리티 구분 현상 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본다.
어제는 제 20대 대통령 선거일이었고 나는 오후 1시 즈음 코인세탁소에 이불 빨래를 돌리고 성원초등학교에 들러 투표를 했다. 어느 때보다 경쟁이 치열하고 향방을 알 수 없는 선거라지만 투표에 어려움은 없었다. 나는 약 20년 정도 되는 투표의 나날동안 일관되게 한 당과 그 당의 후보에 표를 줬고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덕분에 선거 때마다 같은 말을 듣는다. 사표를 만들지 말아달라, 이번에는 어떤 후보가 되는 걸 막아야돼, 니 고집만 지켜서 될 일이 아니야 등등. NL 출신 금정연씨(42세)의 사정은 어떨까. 그와 나는 정치 이야기를 거의 나누지 않는다. 정치에 냉소적이거나 무관심해서가 아니라 할 말이 없기 때문이다. 왜 할 말이 없냐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없기 때문에, 말을 하기 시작하면 생각이 시작되고 생각이 시작되면 행동을 꿈꾸게 되는데 그 일이 우리를 막다른 곳으로 몰고가기 때문에. 그러나 이번은 다르고 이제는 다르다(는 생각도 든다). 세상은 변하지 않지만 어느새 세상이 달라졌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 것이다. 징징대는 건 이제 그만. 그래서일까. 금정연은 정치 트윗을 리트윗하고 세태/세대에 대한 담론에 관심을 기울인다. 그리고 우리는 어쩌면 이것이 한국 영화에서 길 잃은 한국 사람들이 길을 찾는 방법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나는 선거일을 기념해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의 정치 에세이 <기운내, 심바: 안티 후보의 트레일에서 보낸 일주일>을 읽었다. “롤링스톤즈”의 특파원 신분으로 2000년 공화당 대선 경선 후보 존 매케인의 캠프를 밀착 취재한 기사인데, 솔직히 말하면 나는 이 글을 삐딱한 자세로 읽기 시작했다. 공화당 후보를 옹호하는 기사를 쓰다니 제정신이 아니군 생각했던 것이다. 역시 DFW는 근본주의자야(여기서 근본주의자는 문화적인 측면에서 실천은 급진적이지만 신념은 보수적인 일군의 사람들을 지칭하는 나만의 용어로 구체적인 설명은 글의 방향과 어긋나니 나중으로 미루겠다. 그럼에도 부연하는 까닭은 1. 근본주의자라는 용어에 대한 오해를 피하고 2. 근본주의자들이 특정 장에 끼치는 영향이 상당하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기사는 충분히 흥미로웠다. 고귀한 보수의 상징인 존 매케인(버락 오바마와 대선에서 맞붙었을 당시 네거티브를 요구하는 언론과 지지자들에게 매케인은 오바마는 훌륭한 시민이며 우리는 의견이 다를 뿐이다, 라고 대답했다. 물론 그는 대선에서 패했다)의 인품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어서가 아니라 특정 현상에 대해서, 그리고 그 현상을 경험하는 것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DFW는 “이 글은 어떤 인상적인 인물의 선거운동을 다룬다기보다는 밀레니얼 세대의 정치와 그 모든 포장과 홍보와 전략과 미디어와 여론 조작과 만연한 부패가 우리 미국인 유권자로 하여금 실제로 어떻게 느끼게 하는지에 대해” 다룬다고 쓴다. 여기서 인물과 선거운동 따위를 작품이나 영화 등으로 바꾸면 어떨까. 그러니까 한영한사가 진짜 다루고 싶은 건 어떤 작품이 왜, 어떻게 좋으냐가 아니라, 작품과 그 작품을 둘러싼 환경을 우리가 실제로 어떻게 느끼고 경험하고 재생산하는가 라고 말이다. 한편, 정연씨는 꿈을 꿨다고 했다. 대통령 선거를 하루 앞둔 밤이었고 매일 같이 악몽으로 시달리던 한 주였기 때문에 꿈을 꿨다는 사실 자체는 특별할 게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꿈은 달랐다. 정연씨는 한국의 영화제 시상식에 있었다. 부산국제영화제인지 대종상인지 청룡영화상인지는 알 수 없다. 그게 그건가 싶기도 하고, 셋 모두 보지 않는 정연씨로서는 구분할 방도가 없었던 탓이다. 그러나 한국의 영화 시상식임은 분명했다. 사회자는 왜인지 박솔뫼였고(또는 박솔뫼 역할을 하는 김혜수) 시상자로는 소설가 김연수가 나왔다. 다만 정연씨의 꿈에서 김연수는 소설가가 아니라 영화감독이었고(“아마 홍상수 영화에서 맡은 배역 탓이겠죠.” 정연씨가 말했다) 얼굴은 허진호와 닮아있었다. 그러면 정연씨는 어떻게 김연수가 김연수라는 사실을 알았을까. 외모도 직업도 다른데 김연수가 맞긴 한 걸까. 김연수를 규정하는 영혼의 징표라도 존재하는 걸까. 내가 정연씨에게 말하자 정연씨는 그게 꿈의 신기한 점이라고 했다. “꿈에서는 우리를 구성하는 물질적 요소나 과거와 같은 전기적 사실보다 생각이 현실을 규정하니까요.” 정연씨는 칼 융의 공시성을 생각해보라고 했다. 우리가 우연의 일치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사실 정신의 작용이라면. “정신이 물질과 상호작용한다는 사실이 정신과 물질을 가르는 경계가 모호하다는 증거예요.” “그게 한영한사랑 무슨 상관이에요?” 내가 정연씨에게 물었다. 참고로 우리는 에세이 필름 제작을 위해 서교동의 카페에서 미팅을 진행 중이었다. 미팅 전에 나는 DFW 에세이를 읽고 든 생각을 말했다. 21세기 한국 영화를 말할 때 보통은 비평적으로 훌륭한 영화를 나열하고 그 의의를 평가한다. 홍상수, 이창동, 봉준호 등. 특정인의 감식안에 선정된 영화들이 곧 한국 영화인 것이다. 그게 아니면 산업적인 측면을 주목한다. 천만 영화의 등장, 제작, 유통의 변화, 새로운 기술의 도입 또는 한국 영화의 해외에서의 위상 등. 그러나 그게 정말 우리가 경험한 한국 영화일까. 이런 과정들은 중요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우리의 경험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럼 어떻게 해야할까? 그렇게 고민을 하는 와중에 정연씨가 뜬금없이 꿈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정연씨는 엠마뉘엘 카레르가 쓴 필립 K. 딕의 전기 <나는 살아있고 너희는 죽었다>를 읽고 있다고 말했다. PKD를 따라 주역과 칼 융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고 그들이 미국영화와 한국영화, 현재의 정치 상황과 이어진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고 말이다. “20세기 말 이후의 모든 미국 영화는 PKD의 자장 아래 있습니다. < 매트릭스 >, < 트루먼 쇼 >, < 다크 시티 >, < 플레전트빌 >에서 시작됐죠. 이렇게 말하면 어떨까요? 미국 영화는 PKD의 편집증적 우주다. 그리고 21세기 한국 영화는 미국 영화죠. < 기생충 >이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고 이정재가 미국배우조합상 남우주연상을 받은 사실을 생각해봐요. 이곳은 누구의 편집증적 우주일까요? 윤석열?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영화라는 우주가 그것을 보고 원하는 사람들의 정신과 원격작용을 한다는 뜻이에요.” 정연씨가 말했다. 나로서는 알아듣기 힘든 이야기였지만(<플레전트빌>이나 <다크 시티>를 기억하는 사람이 있나요?) 정연씨의 편집증-꿈-영화제 이야기는 계속 이어졌다. 정연씨의 꿈에서 작품상을 받은 영화는 < 돈 룩 업 >이었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제니퍼 로렌스, 아담 맥케이, 티모시 살라메가 나란히 도열해서 박솔뫼와 김연수가 주는 상을 받은 것이다. “작품상은 보통 제작자가 받지 않나요?” “그건 핵심이 아니죠. 제가 하고 싶은 말은….” 그러니까 정연씨가 하고 싶은 말은 다음과 같았다. <기생충>, < 오징어게임 > 같은 한국의 영화/드라마가 로컬이자 글로벌인 미국의 영화제에서 상을 받는 것은 이상하지만 납득할 수 있는 현상이다(정연씨는 아이비리그 인류학과 박사과정생들의 면면을 살펴보라고 했다. 각국의 학생들이 자국의 가장 중요한 문화인류학적 사안을 미국에서 연구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헐리웃 영화다). 하지만 반대로 한국 영화제에서 헐리웃 영화에 상을 주면 어떨까? “지금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가 누구죠?” 정연씨가 말했다. “윌 스미스?” “그렇죠. 윌 스미스가 청룡영화상 남우주연상을 받는 거예요.” “오… 그런데 윌 스미스가 상을 받으러 올까요?” “지돈씨,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필립 k. 딕의 전기에 이런 문장이 나와요. ‘네 엄지발가락에서 해방되어라. 그리하면 벗이 다가오리니 그를 믿어도 될 것이니라’.” “그게 무슨?” “영화를 엄지발가락이라고 생각해보세요.” “?” “이렇게 말해보죠. 지돈씨 < 명량 > 봤어요?” “아니요.” “< 해운대 >는?” “아니요.” “< 국제시장 >은?” “아니요.” “하지만 이 영화들은 모두 천만 영화죠.” “그렇죠.” “제 말이 바로 그거예요. 사람들이 정말 이 영화를 봤을까요?” “사람들이 안 봤는데 본 척 한다는 말이에요? 천만영화는 음모다?” “아니요. 이게 무슨 나꼼수도 아니고. 핵심은 영화라는 ‘형식’이 단지 내적인 요소로 짜여진 게 아니라는 말이에요.” 정연씨는 나윤이를 유치원에 데려다주고 데리러 가는 길에 곰곰히 생각했다고 말했다. 우리가 21세기 한국 영화에 대해 얘기하려면 정말로 뭘 어떻게 해야하는지 말이다. 그러던 중에 버스에서 PKD의 전기를 읽었고 잠이 들었고 꿈을 꿨고 영화가 어쩌면 개인들의 편집증적 우주라는 생각에 이르렀다고 말했다. 우리는 이러한 편집증적 우주의 공시성 속에서 살고 있는 거고. “오.” 정연씨에 따르면 영화를 보는 것은 어떤 작품의 내용이나 내적인 형식을 보는 것이 아니었다. 다양한 사회정치적 형식들이 영화라는 형식과 마주치고 얽히면서 의식이나 행위를 조직하고 나아가 삶을 조직하는 것이었다. “저는 그걸 영화 경험이라고 부르기로 했어요.” 정연씨가 말했다. 사람들은 단지 영화를 보는 것이 아니다. 언제나 영화 이상을 보거나 영화 이하를 본다. “캐롤라인 레빈은 이렇게 말했죠. 의미보다는 패턴을, 해석적 깊이보다는 관계의 복잡성을 찾는것이 비평이라고. 가장 전략적인 정치적 행위는 사회적 경험을 지배하는 서로 다른, 연결성 없는 배열들을 면밀하고 세심하게 이해하는데서 출발해야 한다고.” “좋은 말인데… 그래서 어떻게 해야되는 건데요?” “저는 사람들이 영화라고 생각하고 말하는 것에 대해서 생각하고 말할 것을 제안합니다. 더 나아가 영화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말하는 것에 대해서 생각하고 말하는 것도요.” “그게 무슨…?” “예를 들면, 유튜브 영화 채널은 영화 리뷰를 보는 용도일까요, 영화를 보는 용도일까요? 다시 말해, 이 재생산의 플랫폼이 영화와 무관하게 존속할 수 있다면 그건 무슨 의미일까요?” “그 말은 영화가 없어도 영화 리뷰 채널이 존재할 수 있다는 뜻인가요?” “그건 장 보드리야르를 떠올리게 하는 말이네요.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영화 보다 영화에 대한 것이 더 영화일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나는 정연씨의 말을 들으며 왜인지 최근 읽은 워커 퍼시의 소설 <영화광>을 떠올렸다. 주인공 빙크스 볼링은 이렇게 말한다. “사실 나는 못 만든 영화라도 일단 빠져들면 무척 행복하다.” 다시 말해, 빙크스 볼링에게 좋은 영화 나쁜 영화는 문제가 아니다. 영화의 내용 역시 문제가 아니다. 그가 동경하는 헐리웃 스타 윌리엄 홀든은 어떤 영화에 나오든 윌리엄 홀든이다. 그렇다고 그가 완전히 현실의 윌리엄 홀든인 것도 아니다. 영화 속 인물과 실존 인물 사이 어딘가에 윌리엄 홀든이 있고 빙크스 볼링은 일상 속에서 그 형상을 반복적으로 창조하고 구성하는 것이다. <영화광>은 씨네필에 대한 소설도 아니고 빙크스 볼링도 씨네필이 아니다. 그러나 볼링은 어떤 의미에서 진정한 영화광이고 영화 경험의 창조자다. 그에겐 모든 현실이 영화 경험을 경유해 “인증” 된다. 예를 들면 볼링은 요즘 세상에서는 어디에 살든 그곳에서 진짜 산다는 느낌을 받을 수 없다고, 공허감만 팽창할 거라고 말한다. 이러한 공허감을 불식시킬 유일한 방법은 자기 동네가 영화에 나오는 것이다. 영화에 자신이 사는 곳이 나오는 순간 그곳은 “아무 데가 아니라 특정한 데”가 된다. 이것을 영화 경험이 만들어낸 편집증적 우주라고 할 수 있을까? 우리는 21세기 첫 20년 후의 대한민국이라는 편집증적 세계 속에서 영화를 경유해 길을 찾을 수 있을까? 아니면 그 반대가 될까. (관련글) 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 , 금정연, 2021.03.19. 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 , 정지돈, 2021.05.07. 3.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3) , 금정연, 2021.06.11. 4.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4) , 정지돈, 2021.07.03. 5.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5), 금정연, 2021.08.06. 6.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6), 정지돈, 2021.08.31. 7.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7) , 금정연, 2021.10.08. 8.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8) , 정지돈, 2021.11.05. 9.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9) , 금정연, 2021.12.03. 10.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0) , 정지돈, 2021.12.31. 1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1) , 금정연, 2022.03.02. 1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2) , 정지돈, 2022.03.30. 13.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3) , 금정연, 2022.05.11. 14.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4) , 정지돈, 2022.06.10. 15.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5) , 금정연, 2022.07.08. 16.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6) , 정지돈, 2022.08.03. 17.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7) , 금정연, 2022.08.31. 18.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8) , 정지돈, 2022.10.14. 19.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9) , 금정연, 2022.11.11. 20.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0) , 금정연, 2022.12.07. 2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1) , 정지돈, 2022.12.15. 2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2) , 정지돈, 2022.12.30.
1980년대 한국영화 제작 자유화 이전 다큐멘터리와 교육영화, 뉴스영화 등 논픽션 영화를 통칭하는 용어였던 ‘문화영화’는 그 자체로 약간의 거부감을 불러일으키는 단어였다. 그 이유의 첫 번째는 ‘문화인이 되도록 교육받는다는 느낌’ 때문에 영화감상보다는 교양교육의 일환으로 여겨졌던 까닭이고, 두 번째는 정부 주도로 제작된 영화들이 대부분인 탓에 감독과 제작자의 순수한 의도보다는 그 이면에 있는 ‘정치적 목적’이 더 들여다보이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극영화 상영 전 ‘무조건’ 상영되는 형태 때문에 ‘강제적’으로 영화를 봐야했고, 이러한 관람형태는 영화관람 전 이미 부정적인 감정을 불러 일으키는 경우가 많았다. 때문에 문화영화에 대한 평가 역시 미학적 완성도보다는 정치적 목적성에 맞춰진 경우들이 많았다. 하지만 수십 년에 걸쳐 수천 편 만들어진 문화영화에서 교육적, 정치적 의도만이 담겨있지는 않을 것이다. 현재 남아 있는 문화영화들 중에 전쟁의 폐허 속에서도 따뜻한 한국인의 심성을 그려내며 상처를 어루만지고 함께 발맞추어 살아가길 기대하는 영화들이 있다. 그리고 그 영화들을 만든 감독 중에 배석인 감독이 있다. 소년, 영어를 통해 세상에 눈을 뜨다 배석인 감독은 일제강점기가 한창인 1929년 경상남도 창원에서 태어났다. 부모님은 귀한 3대 독자인 아들의 교육을 위해 조금 더 큰 도시였던 김해로 이사를 갔다. 독실한 기독교 집안이었던 탓에 배석인 감독은 어린 시절부터 빠지지 않고 새벽기도에 참석하였다. 이를 눈여겨 본 젊은 목사님은 그에게 영어로 된 성경 한 권을 선물하고, 자신과 함께 영어로 성경공부를 할 것을 제안한다. 현재 80세가 넘는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복음서를 영어로 줄줄 외우고 있을 정도로 그 시절 영어공부는 그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미쳤다. 조금씩 다른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영어 단어와 문장은 단순히 번역을 넘어 언어를 해석하고, 사람들과 소통하는 방식에 대해 생각하게 하였다. 또한 성경을 통해 접하는 이야기는 인간이 추구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지속적인 성찰을 하는 밑바탕이 되었다. 중학교에 입학한 후 일본인 선생님의 어이없는 발음과 영어 실력에 실망한 그는 《리더스 다이제스트》를 구입해 혼자 영어를 공부하였다. 그리고 중학교 졸업과 함께 해방을 맞이하고, 1946년 부산 동아대학교에 입학한다. 이때는 미군정 시기로 많은 미군들이 부산에 상주해 있었고, 영어의 중요성을 더욱 실감한 그는 대학 재학 중 야간학교와 중학교에서 영어교사로 근무하기도 하였다. 주한미군 정보기관 요원에서 영화 <자유전선>의 주인공이 되다 배석인 감독이 대학을 졸업한 1951년 한국은 동족상잔의 전쟁 중이었다. 전투의 현장을 직접 대면하지는 않았지만 피난민과 가난 등 전쟁의 상처는 그가 살고 있는 부산 지역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는 주한미군정보기관에 지원하여 정보사령관의 한국담당 정보관으로 근무하기 시작하였다. 한국말을 모르는 정보사령관의 통역을 담당하면서 한국의 여러 상황을 알려주고 조언을 하는 것이 그의 역할이었다. 이 일을 하면서 그는 국제교류의 중요성을 깨닫고 외교관이 되기로 결심한다. 이후 미국 시라큐스 대학에 입학 허가를 받고, 출국을 기다리던 중 부산 광복동에서 한 사람을 만나게 되는데, 김홍 감독이었다. 훤칠한 외모에 미군복을 입고 있던 그에게 김홍 감독은 미군을 비롯한 UN군의 참전에 고마움을 표하는 영화 <자유전선>을 제작할 예정인데, 그 영화의 주인공이 되어 달라고 부탁한다. 영화배우라는 것을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배석인 감독은 거절하였지만, 김홍 감독은 한 달여 동안 그를 설득하고 결국 출연을 수락하게 된다. [사진 1] 영화 <자유전선>의 북에서 내려온 창환(조항)과 논쟁하는 성호(배석인). 오른쪽부터 배석인, 조항, 주증녀 영화의 배경이 된 한국전쟁의 참혹함 못지않게 당시 한국의 영화촬영 현장은 맨주먹밥에 소금물로 끼니를 때우고 거적을 깔고 잠을 청해야 할 정도로 열악했다. 하지만 주증녀, 황해, 조항 등 선배들과 함께 1년여 간 이어진 촬영 속에서 영화에 대한 매력과 영화가 감독의 예술이라는 점을 느끼게 된다. [사진 2] 영화 <자유전선>에서 브라운 대위를 구하는 육군 중대장 성호(배석인) 이 영화는 전쟁이 끝난 1955년 서울 시공관에서 개봉하였는데, 러시아와 미국의 격전장이 된 한반도와 그 속에서 피어나는 UN군과 국군의 우정을 그린 영화로 전쟁의 참혹함보다는 우방과의 연대에 초점을 맞춘 것에 주목을 받았다. 이 영화의 주인공이었던 배석인 감독은 이후 여러 영화에서 섭외요청을 받았다. [사진 3] 영화 <자유전선>의 홍보전단지 USIS를 거쳐 국립영화제작소에서 다큐멘터리 감독이 되다 유학과 영화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던 배석인 감독에게 영어교사로 일할 때부터 친분이 있던 미국공보원(USIS, United States Information Service) 원장은 ‘교사는 자신의 생각을 칠판을 통해 전달하는 것이고, 감독은 영상에 담아 전달하는 것’이라면서 USIS 영화과에서 함께 일할 것을 제의한다. 평소 생각과 마음을 나누는 것에 관심이 많던 그는 부모님을 떠나 미국으로 가는 것보다는 부모님 옆에서 꿈을 이루어야겠다는 생각에 USIS에서의 근무를 택한다. 그곳의 라이브러리에서 수많은 영화들을 보았고, 동시녹음 카메라, 편집기 등을 통해 영화적 기술을 익혔다. 그리고 《마산일보》를 배경으로 지방 독립지가 제작되는 과정을 담은 <지방신문편집자>(1958)라는 문화영화를 처음으로 제작하였다. USIS에서 일한 지 3년째가 되던 1958년, 국립영화제작소로 자리를 옮긴다. 국립영화제작소는 1957년 중앙청 내에 건물을 새로 지어 세트장, 현상소, 녹음실 등을 갖추고, 본격적인 문화영화제작을 하고자 여러 인재들을 영입하던 중이었다. 배석인 감독은 미국의 시각보다는 대한민국의 입장에서 영화를 만들면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였고, 상대적으로 국가의 지시나 통제에서 자유로운 ‘촉탁’으로 근무를 시작하였다. 촉탁은 과장, 계장 등의 직급이 없는 대신 경력을 인정받아 자신이 제작하고자 하는 작품의 기획안을 올려 통과가 되면 예산과 장비, 인력 등의 지원을 받아 영화를 제작하면 되는 자리였다. 의무적으로 뉴스영화나 홍보영화를 찍을 필요도 없었다. 그렇게 옮겨간 국립영화제작소의 상황은 듣던 것과는 많이 달랐다. 영화 관련 장비를 갖추었다고 하였지만, USIS에 비하면 장비의 수준이 낮았고, 장비가 있다고 하더라도 제대로 다룰 수 있는 기술진이 없었다. 영화 관련 용어들도 일본어와 영어, 한국어가 혼재되어 있어 서로 소통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많았다. 그래서 배석인 감독은 먼저 영화 인력에 대한 교육을 시작하였다. 영어로 된 영화사전을 번역하여 직원들에게 나누어주어 익히도록 하였고, 미국 시라큐스에서 파견된 영화교육단의 통역을 맡아 영화에 대한 지식과 기술들을 전달하였다. 시라큐스의 교육으로만은 부족하다고 느낄 때면 따로 직원들을 모아놓고 영화기술에 대해 교육을 하기도 하였다. [사진 4] 국립영화제작소 로고 [사진 5] 중앙청 내에 위한 국립영화제작소 건물. 오른쪽에서 6번째에 서 있는 사람이 배석인 감독 (출처: 국가기록원) 그렇게 시간이 흘러 1960년 4.19 의거가 일어나고, 혼란스러웠던 당시 중앙청에서 몸을 피해 어느 화장실로 숨었다가 신문 한 장을 발견하게 되는데, 거기 쓰여 있던 것이 노산 이은상 선생의 기행문 『피어린 600리』 였다. 끝없이 철썩거리는 동해의 물결! 백사장(白沙場)가에 박아 놓은 철조망의 마지막 쇠말뚝을 붙드는 순간, 나는 그만 주저앉아 버리고 말았다. 그래, 이것이 피어린 휴전선의 마지막 철조망, 마지막 쇠말뚝이냐! 그래, 내가 이 마지막 쇠말뚝 하나 잡아 보려고 600리를 허위허위 달려왔더냐. 길이 끝났네, 더 못 간다네. 병정은 총 들고 앞길을 막네. 저리 비키오. 말뚝을 뽑고 이대로 북으로 더 가야겠소. 바닷가 모래 위에 주저 앉아 파도도 울고 나도 울고. - 노산 이은상의 기행문 『피어린 600리』 중에서 이은상 선생이 휴전선의 서쪽 끝부터 동쪽 끝까지 600리 길을 걸으며 보았던 분단의 비극, 만나지 못하는 아픔을 영화화하기로 결심했다. 기행문을 참고하여 직접 나레이션을 쓰고 DMZ 지역까지 들어가 촬영한 끝에 17분짜리 문화영화 <피어린 600리>(1962) 1 를 완성할 수 있었다. 이 영화는 1963년 제2회 대종상 문화영화상을 수상하였으며, 제10회 아시아영화제 비극부문과 제13회 베를린영화제에 출품되어 호평을 받기도 하였다. 하지만 배석인 감독에게는 출품과 수상이라는 공적인 지표보다 현재 대한민국 국민들의 아픔을 공감하고 위로할 수 있는 영화를 만들었다는 것이 더 큰 기쁨이었다. [사진 6] 영화 <피어린 600리> 한반도에 그어진 38선의 이미지 [사진 7] 영화 <피어린 600리> 철로가 끊어진 채 더 이상 올라 갈 수 없는 금화지구 [사진 8] 영화 <피어린 600리> 금화지구 내 폐허 속에 방치된 부서진 열차 [사진 9] 영화 <피어린 600리> 600리의 마지막 동쪽 끝 해안에 위치한 철조망 이후에도 배석인 감독은 대중들의 감성에 말을 거는 영화를 많이 만드는데, 그 중에서 <새길>(1962) 2 이라는 영화가 있다. 이 영화는 전쟁 고아들의 비행과 일탈이 사회문제가 되고 있던 시대에 그들이 일탈할 수밖에 없었던 구조적적 문제와 어른들의 책임을 묻고, 비록 죄를 지었지만 자신을 반성하고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는 이야기를 다룬 세미다큐멘터리였다. 실제 구두닦이 소년을 캐스팅하여 실감나게 연출한 덕분인지, 이 영화가 전국적으로 상영되었을 때, 영화를 본 마을 사람들은 주인공 소년을 실제 범죄자라 착각하여 범죄자가 된 소년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소년을 마을에서 쫓아낸 웃지 못할 일화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새길>은 궁극적으로 당시 문제아 혹은 범죄자로 터부시되던 전쟁고아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포용을 이끌어 내는 역할을 했다는 점과 극영화의 연출 기법을 차용하여 30분이라는 러닝타임 동안 지루하지 않게 한 소년의 이야기를 풀어나갔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작품이었다. [사진 10] 영화 <새길> 판사 역할로 출연한 배석인 감독 [사진 11] 영화 <새길> 실형을 선고 받는 광민 [사진 12] 영화 <새길> 감옥에 들어온 광민을 쇠창살 너머에서 보여주는 장면 [사진 13] 영화 <새길> 즐거운 위문공연 장면을 통해 소년원 수감자들도 행복한 일상을 살아갈 수 있는 동등한 존재라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 한국을 알리고 싶은 노력의 결과물 <팔도강산>(1967) 배석인 감독은 1964년 미 국무성의 초청으로 배우 김희갑과 함께 미국의 영화촬영 현장을 견학할 기회를 얻는다. 이때 미국 남가주 대학에서 특강을 하게 되는데, ‘6.25전쟁’은 알지만 ‘대한민국’은 모르는 미국 학생들과, 텍사스 도서관 내 한국관에 자료가 없어 텅텅 비어있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는다. 이 충격은 배석인 감독을 다큐멘터리스트로 새롭게 자각하게 만들었다. 아직은 열악한 한국영화산업 환경에서 극영화로 세계무대에 진출하자고만 목소리를 높일 것이 아니라 한국을 알릴 수 있는 다큐멘터리를 통해 그 기반을 튼튼히 닦아 놓는 것이 먼저이고 자신의 사명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독일과 스페인을 거쳐 한국에 돌아온 그는 사비를 털어 책을 구입하여 텍사스 도서관에 한국관련 서적들을 비치하였고, 스페인에서 영화 시작 전 국가를 트는 것을 본 떠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촬영한 영상과 함께 국도극장에서 처음 영화상영 전 애국가를 틀었다. 난데없는 애국가에 관객들이 당황하는 것도 잠시, 한두 명씩 자리에서 일어나 함께 애국가를 제창하던 그날의 기억을 그는 잊을 수 없다고 한다. 이어 가장 중요한 두 번째 작업에 착수한다. 그것은 극영화 <팔도강산>(1967)을 만드는 일이었다. 당시는 경제 개발과 새마을운동이 한창이던 때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여행은 커녕 자신의 거주지 주변을 벗어나보지도 못한 경우가 많았다. 이에 직접 가서 보지는 못하더라도 우리나라의 구석구석 아름다운 모습을 영화로라도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였고, 한 달여 간의 밤샘 작업을 통해 <팔도강산>의 초고 시나리오를 완성하였다. 그리고 극작가 신봉승에게 각색을 부탁하여 몇 개의 씬을 추가하고, 김희갑, 황정순을 비롯하여 최은희, 김진규, 김승호 등 당대 최고의 배우들을 캐스팅하였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서울에서만 3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였고, 다른 감독들에 의해 속편도 제작되었다. <팔도 기생>(김효천, 1968), <팔도 사나이>(김효천, 1969) 등의 아류작도 쏟아져 나왔다. [사진 14] <팔도강산>(1967)의 개봉극장인 국도극장 앞에 모인 사람들(출처: 국가기록원) [사진 15] <팔도강산>(1967)의 포스터 [사진 16] <팔도강산>(1967) 사돈(김승호)의 안내에 따라 속리산 법주사를 구경하는 김희갑과 황정순의 모습.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역사와 문화를 보여주는 장면 중에 하나이다. [사진 17] <팔도강산>(1967) 사위(김진규)의 안내에 따라 삼천리 시멘트 공장을 구경하는 김희갑과 황정순. 우리나라의 큰 공장과 발전된 산업을 보고 놀라는 황정순의 표정이 재미있다. [사진 18] <팔도강산>(1967) 비행기에서 담뱃불을 붙이는 김희갑에게 “이륙 시에는 답배를 피울 수 없다”고 안내하는 모습이 흥미롭다. TV 다큐멘터리 제작과 63빌딩의 아이맥스 영화관 설립 국립영화제작소에서 꼭 10년을 보낸 1968년, 배석인 감독은 국립영화제작소를 나와 홀로서기에 나선다. 1971년 영화제작자이자 평론가인 호현찬과 함께 한국문화프로덕션을 설립하고, <한국의 美> 등 TV용 다큐멘터리를 만들어 KBS에 납품한다. 하지만 다큐멘터리의 수익성은 매우 낮았고, 회사는 1년만에 문을 닫게 된다. 이후 배석인 감독은 독자적으로 배프로덕션을 설립하고 프랑스에서 『직지심경』이 발견된 것을 계기로 우리의 출판문화를 알리는 영화 <한국의 출판문화>(1972)를 제작하여 세계도서 엑스포에서 상영하였다. 또한 <게릴라전>, <화생방교육> 등 신병들을 대상으로 한 군교육 영화도 제작하였는데, 당시 시도되기 시작했던 셀 애니메이션 기법을 도입하여 실사영화보다 더 많은 제작비를 들여 영화를 제작하였다. 이렇게 수익성이 없음에도 사재를 털어서까지 문화영화에 매진했던 것은 일종의 책임감이었다. 우리 문화를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제대로 알리고 싶은 마음, 국경을 넘어 해외에 한국을 알려야 한다는 책임감이 늘 경제적인 이득보다 앞에 있었다. 또한, 언제 실전에 투입될지도 모르는 군인들에게 시뮬레이션을 통해서라도 전술을 완벽하게 체험하게 해주어야 한다는 책임감도 그의 다큐멘터리 작업을 이끌었다. 1984년 국내 굴지의 기업이었던 대한생명은 우리나라 최고층 건물인 63빌딩을 건설하면서 이 건물 내부에 우리나라의 첫 아이맥스 영화관을 설립하기로 하고, 총책임자로 배석인 감독에게 스카웃 제의를 한다. 늘 새로운 분야의 도전에 주저함이 없었던 그는 곧 문화영화사를 정리하고 아이맥스의 본고장인 캐나다로 떠나 공부를 시작한다. 그리고 돌아와 만든 영화가 <아름다운 대한민국 Dance of the East>(1986)이었다. 20여 년전 <팔도강산>을 촬영할 때 그러하였듯이 대한민국 곳곳을 다니며 장소를 물색하고, 영화를 기획하였다. [사진 19] <아름다운 대한민국>(1986) 촬영 중인 배석인 감독 [사진 20] <아름다운 대한민국>(1986) 촬영 중인 배석인 감독과 촬영기사 박한춘 이 영화는 남북적십자 회담장에서도 상영되었고, 세계 곳곳의 아이맥스극장에서도 상영되었다. [사진 21] <아름다운 대한민국>(1986) 부채춤 장면 [사진 22] <아름다운 대한민국>(1986) 농악놀이 장면 [사진 23, 24] <아름다운 대한민국>(1986) 해외 상영을 위한 시놉시스 문서 하지만 기술과 인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지속적으로 아이맥스 영화를 만들기는 어려웠고, 이후에는 주로 해외 아이맥스 영화를 수입하여 상영하는 것으로 만족하여야 했다. 13년 동안 63빌딩 아이맥스영화관을 이끌었던 배석인 감독은 1997년 은퇴하였다. 다큐멘터리스트 배석인 구술의 의의 본 연구자가 배석인 감독의 구술 인터뷰를 진행한 것은 2009년의 일이다. 당시까지만 하더라도(물론 현재도 그렇지만) 문화영화는 대부분 소재가 불분명하여 볼 수 있는 작품이 많지 않았고, 감독이나 스태프를 찾기도 쉽지 않았다. 또한 당대의 검열서류가 공개되지 않은 탓에 정확한 작품명을 찾기도 쉽지 않았다. 한국영상자료원에 보관된 극영화 <자유전선>(김홍, 1955), <팔도강산>(1968)과 <지상최고의 여정>(1968), 그리고 국립영화제작소에서 함께 일했다는 양종해 감독의 증언, 63빌딩 아이맥스영화관의 개관 책임자였다는 몇 가지 단편적인 정보만을 가지고 첫 만남을 진행하였다. 극영화 영화인들과의 만남은 많은 자료를 가지고 토론하듯 인터뷰가 진행될 수 있는 반면, 자료가 없는 다큐멘터리 감독들과의 만남은 1차적으로 구술자의 증언에 기댄 채 어둠 속을 더듬어 나가는 듯 한걸음 한걸음 진행되지만 잊혀졌던 작품 하나, 정보 하나를 찾을 때마다 마치 고고학자가 된 양 희열을 느끼게 하는 작업이 될 수 있다. 이런 작업을 통해 발견된 영화들을 볼 때면 기존에 가지고 있던 문화영화에 대한 편견을 버리고, 조금은 더 애정 어린 시선으로 감독들이 추구하려고 했던 영화의 핵심에 다가서게 한다. 이 구술을 통해 찾을 수 있었던 두 편의 문화영화 <피어린 600리>와 <새길>이 그러하였다. 분단이나 교화 등의 키워드로만 알려졌던 영화들을 실제로 관람하면서 이러한 이데올로기적인 용어로만은 담을 수 없는 당대 대중들의 감성과 소통의 노력을 엿볼 수 있었다. 구술자와의 만남 이후에 다시 보게 된 영화 <팔도강산>은 ‘한국의 경제 발전상을 알리는 국책영화의 효시’로서만이 아니라 최고의 스타들을 한 영화 안에서 볼 수 있고, 실제 가보기 힘든 전국 방방곡곡을 구경하는 대리만족을 얻으며, 거기에 적절한 위트와 감동까지 선사하여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은 당대 최고의 오락물이라는 의미가 더욱 크게 다가왔다. 이후 수많은 속편과 아류작이 제작된 것뿐만 아니라 KBS 일일연속극 <팔도강산>(윤현민 작, 김수동 연출)이 무려 3년 동안 방송되면서 전국을 넘어 해외까지 로케이션을 다니며 인기를 구가한 것은 대중들의 호응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 구술을 통해 국립영화제작소와 독립프로덕션의 초기 제작형태에 대한 기본적인 지형도가 그려졌다. 이후 국립영화제작소와 문화영화, 그리고 관에서 혹은 독립프로덕션에서 문화영화제작에 대한 연구를 위해 영상자료원에서 2012년 문화영화에 대한 주제사 구술을 진행하였다. 이러한 기본적 연구를 바탕으로 한국 문화영화의 역사와 위치에 대한 연구가 지속되기를 바란다. 1) 이 영화는 KTV국민방송 e영상역사관(http://www.ehistory.go.kr)에서 볼 수 있다. 2) 이 영화는 KTV국민방송 e영상역사관(http://www.ehistory.go.kr)에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