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해
- 감독
- 신지수
- 제작년도
- 2021
- 출연
- 고영식, 임유빈
황당한 농담처럼 들릴 것 같지만, 십 년도 훨씬 전에 죽은 엄마에게 아버지가 아닌, 평생의 동성 연인이 있을 수도 있다는 상상을 한동안 해본 적이 있고, 지금도 그 의심에는 나름 합리적인 구석이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여기서 그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늘어놓을 생각은 없지만, 내가 말할 수 있는 사실은, 당시의 내가 겁에 질리고 화가 많았던 스물 몇 살이었고, 일견 터무니없어 보이는 상상을 통해서 엄마의 불행하고 때 이른 죽음이 조금이라도 덜 억울해지길 바랐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어디든 마구 뛰어내리고 싶었던 내 정신도 좀 더 안전한 울타리 속에 가둘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연극영화과를 지망했던 활달한 성격의 대구 여자였던 엄마에겐 친구들이 많았는데, 여자 형제가 없었던 엄마는 나로 하여금 그들을 ‘(누구)이모’라고 부르게 했다. 이모들과 함께 한, 구체적으로 재미난 일화 같은 건 이제 거의 기억나지 않지만, 엄마와 함께 그들을 한 번씩 만나러 갈 때 내가 얼마나 기분이 좋았는지는 또렷하게 생각난다. 은퇴한 운동선수들 마냥 아웃도어 스포츠를 즐기는 기운 넘치는 사람들이었던 이들은 고개를 뒤로 젖혀가며 큰 소리로 자주 웃었고, 만나고 헤어질 땐 다시 못 볼 사람들처럼 끌어안은 채 정전기가 날 정도로 서로의 등을 쓸어주었다. 그 손힘이 얼마나 센 것이었냐면, 그러고 나서 내 머리를 쓰다듬던 이모들의 손바닥으로 내 머리카락이 항상 붕 떠오르던 느낌이 아직까지 생각난다는 것 정도로만 말하겠다. 결혼하기 전의 엄마와 이모들이 찍힌 흑백사진을 가끔 들여다보면, 거기엔 지금의 나보다 훨씬 어린 나이의 젊고 아름다운 여자들이 지금 이 순간만큼은 자기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들이라는 듯 호탕하게 웃고 있다. 사진을 접었다가 펴면 깔깔대는 웃음소리가 영원히 지원될 것 같은 얼굴들이라고나 할까. 그중 나랑 닮은 얼굴의 이 행복한 여자가 당시 꿈꾸던 미래에는, 오십이 갓 넘은 나이에 암 선고를 받고 딱 반년 고통스럽게 살다가 어느 날 새벽, 조용히 눈을 감는 장면 같은 건 물론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짐작도 못 했겠지. 어떤 젊고 행복한 사람이 그런 미래를 상상할 수 있을까. 엄마의 장례식 이후로 이모들은 다들 실제로 존재했던 사람들인가 싶을 정도로 한순간에 내 인생에서 사라졌는데, 마치 약속이나 한 것처럼 동시다발적인 증발이어서 나에겐 서운함과 그리움을 넘어, 어리둥절하고 신비스럽기까지 한 느낌으로 남았다. 어쩌면 이건 무슨 질문이나 신호 같은 건가? 근심과 상상력 외에는 가진 게 없었던 스물 몇 살의 나는 한동안 그런 생각을 종종 했지만, 매번 적당한 대답을 찾지 못한 채 조용히 모른 척하는 것으로 끝났다. 하긴, 꼭 그런 이유 때문만은 아니고, 여기서 더 늘어놓기에 뭐해서 생략한 이야기들도 있지만, 나에게 부모의 죽음이라는 인생의 한 챕터를 닫는 느낌은 결국 그런 것이었다. 뭔지 모를 어리둥절함... 어느 날 갑자기 담요가 사라져 버린 걸 알게 된 라이너스가 텅 빈 손을 내려다보고 있는 얼굴을 상상해 보면 될 것이다. 딱 여기쯤에서 「펀 홈」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는 게 좋겠다. 2006년에 출간된 앨리슨 벡델의 그래픽 노블 「펀 홈 Fun Home」은, 미국 펜실베이니아 시골 마을을 배경으로 작가 본인의 어린 시절과 청년기를 오가며, 평생 클로짓 게이로 살다 갑작스런 교통사고로 사망한 장의사 아버지와의 복잡한 관계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회고록이다. 이렇게 소개하면 ‘읽다가 우울증 걸리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어둡고 울적한 이야기처럼 들리겠지만, 주인공 부녀를 비롯한 가족구성원들이 하나같이 매력 넘치는 괴짜들이라 페이지를 넘기는 내내 키득키득 웃게 되거나, 네모난 칸을 공들여 채운 그림과 정교한 앵글에 취해서 한동안 움직일 수 없을 때도 있다. 기대치 않은 정서적 충격과 감정적 고양의 순간들이 은근히 자주 튀어나와서 페이지를 넘기는 손을 붙잡기 때문이다. 이렇게 흥미진진한 역설의 힌트는 ‘FUN HOME’이라는 제목에서부터 짐작 가능한데, 벡델 가족의 가장이자 이 책의 심장이라고 할 수 있는 브루스 벡델의 직업이 장의사이며, 이야기의 주된 배경이 ‘장례식장(FUNeral Home)’이기에 가능한 별칭이다. “가끔 내가 졸라대면, 우리 아버지도 다른 아버지처럼 ‘비행기 타기’ 놀이를 해주셨다. 아버지가 두 발로 날 들어 올리면 온몸의 무게 중심이 내 배에 실렸다.” “이런 건 어쩌다 한 번씩 있는 아버지와 나의 신체 접촉이었다. 그리고 힘들긴 했지만 내가 아버지 위로 붕 떠 오를 때 균형을 제대로 잡아야 신나는 놀이였다. 서커스에서는 한 사람이 바닥에 누워 상대방의 균형을 잡아주는 곡예를 ‘이카로스’ 게임이라고 한다.“ “어쩌면 아버지는, 자신의 충고를 무시하고 태양에 너무 가까이 날아갔다가 날개가 다 녹아버린 이카로스의 운명이 생각나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신화에나 나오는 그런 장면을 우리가 재현했을 때, 하늘에서 떨어져 아픔을 겪게 될 사람은 내가 아니라 바로 아버지였다.” 왠지 어색한 표정의 두 부녀가 비행기 놀이를 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이 장면은, 「펀 홈」이 어떤 이야기로 시작해서 마무리될 것인지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아름답게 은유한 오프닝이다. 위태롭게 서로를 바라보며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 이 놀이에서 혹시라도 균형을 잃고 떨어진다면, 추락할 그곳에서 자신을 받아줄 사람이 아버지라는 사실, 그것이 7년에 걸친 작업과정 끝에 마주한 책의 결론인 것이다. 그리고 거기까지 가는 과정에서 특별하게 주목하게 되는, 이 이야기만의 흥미로운 지점이 있다. 함께 어울린다거나, 기분 좋게 공유할만한 구석이 하나도 없어 서로에게 소원했던(차라리 앙숙처럼 보였던) 이 두 사람에겐 의외의 공통점이 있었는데, 그것은 이들 부녀가 둘 다 게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시골 마을을 떠나 도시에서 대학을 다니며 동성애자로서의 사회적 자아를 키워가던 딸과는 달리, 시골 마을 장의사 가업을 물려받은 아버지는 쓰러져가던 고딕풍의 대저택을 강박적으로 복원하는 취미에 시간을 보내던 클로짓 게이로 자살함으로써, 세상에서 퇴장한다. (언젠가의 인터뷰에서 앨리슨 벡델은 사고사와 자살의 경계에 걸쳐있는 그의 모호한 죽음은 어쩔 수 없이 아버지와 어울리는 것이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아버지가 아테네인이라면 나는 스파르타인이었고, 아버지의 취향이 빅토리아식이라면 내 취향은 현대적인 것들이었다.” “목 끝까지 꼭 맞춰 입을 필요가 있나요? / 당장 노란 터틀넥 스웨터로 갈아입어라.” “먼지 털기도 힘든 이런 것들은 대체 왜 만드신 거예요? / 아름답잖니.” 판이하게 다른 성격으로 서로를 긁어대던 두 사람이 부인할 수 없는 영혼의 단짝이었다는 사실을 마주하면서, 「펀 홈」은 그저 그런 회고록이 좀처럼 보여줄 수 없는 수준의 예술적 긴장을 품게 된다. 그것의 정체는, 평생 혼자서 견고하게 쌓아 올린 비밀의 성안에 살던 아버지의 죽음이, 강박적으로 예민한 작가 앨리슨 벡델의 진정한 시작일지도 모른다는 의심, 그리고, 아버지가 남겨준 정신적 유산이 결국 자기 예술의 원천이자 근원이 되었다는 고백이다. 어색한 얼굴과 포즈의 두 사람이 아슬아슬 ‘비행기 놀이’를 하고 있는 오프닝이 절묘하게 아름답다고 느껴진다면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언젠가 아버지는 자수가 놓인 어떤 천이 붉은 자주색이냐 짙은 분홍색이냐를 놓고 저녁 식사에 초대한 여자 손님과 거의 싸울 뻔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아름다운 석양빛이 연어 살빛에서 황금색으로 또 암청색으로 끝없이 변해가는 동안에는 묵묵히 그 모습을 바라보고만 계셨다.” 총 7개의 챕터로 나뉜 과거사 속에서 똑같은 상황을 각기 다른 관점으로 보게 되는 구성이나, 그리스 신화와 영미문학을 오가는 풍부한 교양으로 사건과 인물의 내면을 추적하는 방식은 그 재미와 깊이가 결코 녹록지 않다. 여기서 앨리슨 벡델이 취한 작가적 태도는 추리작가와 인류학자의 그것으로, 대상을 바라보는 시선엔 생생한 유머와 인간적 온기가 기본적으로 깔려있다. 그렇기 때문에 다소 복잡해 보이는 구성이나 부담스러울 수 있는 문학적 레퍼런스들에도 불구하고, 묵직한 감정적 파장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결국 앨리슨 벡델이 「펀 홈」으로 해낸 성취는, 평생 펜실베이니아의 작은 마을에 처박혀 클로짓 게이로 살다 자살로 생을 마감한 아버지를 벽장 속에서 끄집어낸 뒤, 전 세계적으로 번역, 출판되어 수많은 상을 수상한 문학작품 속의 잊을 수 없는 주인공으로 부활시켰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캐릭터는 「펀 홈」에서 비범하게 복잡하고 아름다운 주인공의 자격을 획득했으며 그것이 자신의 분신이었던 딸의 손끝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특별히 더 찡하다. 「펀 홈」을 읽은 지 몇 년이 훌쩍 지났지만, 나는 작업실 책상이든 가방 속이든 이 책을 근처에 놓아두고 자주 펼쳐본다. 한때는 진지하게 이 책의 판권을 알아보려고만 했던 적도 있었는데, 그때 내가 가지고 있었던 거친 아이디어는 원작 그래픽 노블의 형식을 영화 안으로 화끈하게 가져오는 방식이었다. 내래이터인 작가 자신이 적극 개입해서 영화에 등장하기도 하고, 자신과 자신의 가족 구성원을 연기하는 배우들을 지켜보기도 하면서 말이다. 그것은 원작의 화자인 앨리슨 벡델의 적극적인 목소리와 생생한 코멘트에 대부분 기인한 것인데, 예를 들어, 내가 좋아하는 < 아메리칸 스플렌더 >라는 영화가 이런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언더그라운드 만화가 커플인 ‘하비 피카’와 ‘조이스 브랩너’를 중심으로, 그 이웃들의 별 볼 일 없는 일상을 스케치하듯 보여주는 영화였는데, 실제 주인공인 하비 피카가 내레이션도 하고, 등장까지 해서 코멘트를 막 던지는 것이다. 당시, 하비 피카를 연기한 배우가 폴 지아마티였고,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뭔가 더러운 기분을 경험 중인 표정으로 등장해 골목을 걸어가는데, 그 위로 실제 하피 피카의 목소리가 끼어든다. 이런 식으로. “자, 여기 이놈이 우리 주인공이야. 다 자란 어른인데 아주 제멋대로지. 이것저것 아는 척은 잘하는데, 정식교육 같은 건 받은 적이 없어. 거의 평생을 이 개떡 같은 동네에서 개똥 같은 일만 하면서 살았지. 지금은 비참한 재혼 생활 중인데, 네가 로맨스나, 현실 도피적인 삶을 꿈꾼다거나, 궁지에서 구해줄 수퍼히어로 따위를 찾는 사람이면... 잘 들어라, 넌 영화를 잘못 골랐어.” < 아메리칸 스플렌더 > 이런 방식을 두고 포스트모던이니, 브레히트 적이니 같은 말들을 줄줄이 덧붙일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 상영 내내 키득대다가 막판에 감동을 받으며 극장을 나왔던 기억의 영화다. 폴 지아마티와 호프 데이비스의 ‘인생 역할’처럼 보이는 이 만화가 커플은 보고 있기 엄청나게 흥미진진한 괴짜들이었거든. 대신, 「펀 홈」의 각색을 생각해보던 예전의 나는 실제 원작자를 연기하는 배우를 등장시켜 영화에 어떤 형태로든 개입시키는 아이디어를 생각하고 있었다. 중요한 상황마다, 멀리서 팔짱 끼고 자신의 어린 시절을 보고 있는 원작자 역의 배우가 프레임에 보인다거나, 끼어들어 코멘트를 던져도 (열심히 대화 중이던 배우들이) 안 들리는 척한다거나 하면, 감상에 엄청난 방해가 되면서 짜증도 나고, 기가 차서 코웃음도 나고 할 것 같지만, 내 전략상으로는, 바로 그런 접근이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재미라서, “그런 책을 영화로 만든다고?” 반문하는 친구들에게 결국 한 방 먹이는 것이었다. 하지만, ‘반나절 정도만’ 흥분하며 생각해본 듯한 이런 아이디어는 5분도 채 안 되는 인터넷 검색에서 어떤 식으로든 마침표를 찍게 됐다. 그러니까 바로 이런 방식으로, 「펀 홈」의 뮤지컬 각색 버전이 오프-브로드웨이에서 공연을 시작했던 것. 그리고 이듬해에 브로드웨이 공식 무대로 이어졌고, 2015년 토니상에서 뮤지컬 부문 작품상, 감독상, 남우주연상, 작곡상 등 5개의 토니 트로피를 가져가며 그해 가장 인기 있는 작품 중의 하나가 되었다. 재미있는 건, 2017년 현재, 그렇게 각색된 뮤지컬 버전을 마침내 본 나는, 뮤지컬 트랙의 송리스트를 내내 듣고 다니면서 가사를 외울 정도의 팬으로 입장을 바꾸게 된 것이다. 뮤지컬 <펀 홈> 트레일러 뮤지컬 <펀 홈>의 이카로스 게임 뮤지컬 <펀 홈> 세트 뮤지컬 버전이 놀라운 건, 타이밍이 어긋난 서로의 커밍아웃과 그로 인한 아버지의 죽음을 클라이맥스로 확실하게 보여준다는 것, 극 중 화자이자 성인이 된 딸이 죽기 전의 아버지와 나란히 앉아 ‘제발 어떤 이야기라도’ 해달라고 울부짖는 그 장면 내내, 노래로 소통하는 그들을 보면서 전혀 기가 차거나 코웃음이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콧물을 훌쩍이는 소리나, 눈가와 두 뺨을 손으로 훔치는 관객들의 손짓들이 여기저기 보인다는 것은 그런 방식이 성공했다는 증거겠지. 다시, 「펀 홈」으로 돌아가자. 요즘 나는, 회고록(memoir)만큼 솔직한 ‘정신적 투쟁’을 구경할 수 있는 문학 장르가 또 있을까, 하는 생각을 자주 하는 편이다. 그와 동시에, 자신의 과거를 만나고 해석하는 일이야말로, 현재를 진단하고 미래를 계획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작가적 미션이라는 이유가 그런 생각의 뒤를 따르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펀 홈」은 안타깝게 죽은 아버지를 향한 예술적인 부고(obituary)로 그치는, 그저 그런 회고록이 아닌, 고통스러울 정도로 솔직하고 꼼꼼하게 과거와 현재의 자신을 만든 사람들을 들여다보려는, 정신적인 투쟁을 기록한 르포이기도 한 것이다. 그럼 마지막으로, 오래전 죽은 엄마에 관한 내 가장 선명한 기억조각 중에 하나를 꺼내본다. 당시, 나는 중학교에 갓 입학한 어린아이였고, 엄마는 자신의 남동생들(외삼촌)과 함께 탁구장에 놀러 왔다. 외삼촌들은 운동신경이 좋고 기분도 항상 좋은 사람들이라, 나는 이모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만큼 그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즐겁다. 누나! 누나! 라고 불리는 엄마는 외삼촌들이 탁구 치는 걸 처음에는 구경만 한다. 탁구채를 건네도 손사래를 치는 엄마를 나는 신경도 안 쓴다. 외삼촌들이 괴성을 지르며 탁구 치는 모습을 보는 게 더 웃기고 재밌기 때문이다. 그러다 당시 아마 이십 대였을 것 같은 막내 외삼촌이 엄마를 끌고 와 탁구대 앞에 억지로 세운다. 그리고 탁구채를 억지로 잡게 한다. 어쩔 수 없이, 에라, 모르겠다, 쑥스럽게 자세를 잡은 엄마는 맞은편에 자리를 잡은, 유일하게 자신이 오빠라고 부르는 큰 외삼촌을 향해 예사롭지 않은 눈길을 슬쩍 보낸다. 큰 외삼촌을 비롯해, 지켜보던 세 명의 외삼촌들이 갑자기 조용하다. 탁구채를 잡은 엄마가 아무래도 어색한 사람은 나뿐인 것 같다. 바로 그 순간, 탁구대 위를 흐르는 그 시간부터 근 30년이 지난 지금까지, 나는 이후 이어진 몇 초간의 장면을 매번 또렷하게 기억해 낼 수 있게 된다. 대충 4K 해상도 정도로...? 그러니까 순식간에 탁구공을 머리 위로 던져 올려, 맞은 편 큰 외삼촌의 탁구대에 스카이서브를 정확하게 꽂아 넣던, 엄마의 우아한 번갯불 같은 동작 말이다. 방방 뛰며 좋아하던 외삼촌들의 모습도, 내 온몸을 지나갔던 소름의 기분도... 그리고, 얼굴은 기억 안 나지만, 내 머리를 쓰다듬어 정전기를 일으키던 그 이모들은 분명히, 엄마가 한때 전국소년체전에 나갈 정도의 실력을 자랑하던 유망한 탁구선수였음을 알고 있었겠지. * 「펀 홈」은 「재미난 집」이라는 제목으로 몇 년 전, 번역 출간된 적이 있으나, 현재는 절판 상태다. 올 해 안에 ‘움직씨’( https://twitter.com/oomzicc )라는 출판사에서 재번역/출간될 예정이라고 한다. #1 펀 홈 #2 안녕, 내일 또 만나 #3 마음은 외로운 사냥꾼 #4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 #5 이모와의 여행, 그 외 몇몇
황당한 농담처럼 들릴 것 같지만, 십 년도 훨씬 전에 죽은 엄마에게 아버지가 아닌, 평생의 동성 연인이 있을 수도 있다는 상상을 한동안 해본 적이 있고, 지금도 그 의심에는 나름 합리적인 구석이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여기서 그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늘어놓을 생각은 없지만, 내가 말할 수 있는 사실은, 당시의 내가 겁에 질리고 화가 많았던 스물 몇 살이었고, 일견 터무니없어 보이는 상상을 통해서 엄마의 불행하고 때 이른 죽음이 조금이라도 덜 억울해지길 바랐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어디든 마구 뛰어내리고 싶었던 내 정신도 좀 더 안전한 울타리 속에 가둘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연극영화과를 지망했던 활달한 성격의 대구 여자였던 엄마에겐 친구들이 많았는데, 여자 형제가 없었던 엄마는 나로 하여금 그들을 ‘(누구)이모’라고 부르게 했다. 이모들과 함께 한, 구체적으로 재미난 일화 같은 건 이제 거의 기억나지 않지만, 엄마와 함께 그들을 한 번씩 만나러 갈 때 내가 얼마나 기분이 좋았는지는 또렷하게 생각난다. 은퇴한 운동선수들 마냥 아웃도어 스포츠를 즐기는 기운 넘치는 사람들이었던 이들은 고개를 뒤로 젖혀가며 큰 소리로 자주 웃었고, 만나고 헤어질 땐 다시 못 볼 사람들처럼 끌어안은 채 정전기가 날 정도로 서로의 등을 쓸어주었다. 그 손힘이 얼마나 센 것이었냐면, 그러고 나서 내 머리를 쓰다듬던 이모들의 손바닥으로 내 머리카락이 항상 붕 떠오르던 느낌이 아직까지 생각난다는 것 정도로만 말하겠다. 결혼하기 전의 엄마와 이모들이 찍힌 흑백사진을 가끔 들여다보면, 거기엔 지금의 나보다 훨씬 어린 나이의 젊고 아름다운 여자들이 지금 이 순간만큼은 자기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들이라는 듯 호탕하게 웃고 있다. 사진을 접었다가 펴면 깔깔대는 웃음소리가 영원히 지원될 것 같은 얼굴들이라고나 할까. 그중 나랑 닮은 얼굴의 이 행복한 여자가 당시 꿈꾸던 미래에는, 오십이 갓 넘은 나이에 암 선고를 받고 딱 반년 고통스럽게 살다가 어느 날 새벽, 조용히 눈을 감는 장면 같은 건 물론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짐작도 못 했겠지. 어떤 젊고 행복한 사람이 그런 미래를 상상할 수 있을까. 엄마의 장례식 이후로 이모들은 다들 실제로 존재했던 사람들인가 싶을 정도로 한순간에 내 인생에서 사라졌는데, 마치 약속이나 한 것처럼 동시다발적인 증발이어서 나에겐 서운함과 그리움을 넘어, 어리둥절하고 신비스럽기까지 한 느낌으로 남았다. 어쩌면 이건 무슨 질문이나 신호 같은 건가? 근심과 상상력 외에는 가진 게 없었던 스물 몇 살의 나는 한동안 그런 생각을 종종 했지만, 매번 적당한 대답을 찾지 못한 채 조용히 모른 척하는 것으로 끝났다. 하긴, 꼭 그런 이유 때문만은 아니고, 여기서 더 늘어놓기에 뭐해서 생략한 이야기들도 있지만, 나에게 부모의 죽음이라는 인생의 한 챕터를 닫는 느낌은 결국 그런 것이었다. 뭔지 모를 어리둥절함... 어느 날 갑자기 담요가 사라져 버린 걸 알게 된 라이너스가 텅 빈 손을 내려다보고 있는 얼굴을 상상해 보면 될 것이다. 딱 여기쯤에서 「펀 홈」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는 게 좋겠다. 2006년에 출간된 앨리슨 벡델의 그래픽 노블 「펀 홈 Fun Home」은, 미국 펜실베이니아 시골 마을을 배경으로 작가 본인의 어린 시절과 청년기를 오가며, 평생 클로짓 게이로 살다 갑작스런 교통사고로 사망한 장의사 아버지와의 복잡한 관계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회고록이다. 이렇게 소개하면 ‘읽다가 우울증 걸리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어둡고 울적한 이야기처럼 들리겠지만, 주인공 부녀를 비롯한 가족구성원들이 하나같이 매력 넘치는 괴짜들이라 페이지를 넘기는 내내 키득키득 웃게 되거나, 네모난 칸을 공들여 채운 그림과 정교한 앵글에 취해서 한동안 움직일 수 없을 때도 있다. 기대치 않은 정서적 충격과 감정적 고양의 순간들이 은근히 자주 튀어나와서 페이지를 넘기는 손을 붙잡기 때문이다. 이렇게 흥미진진한 역설의 힌트는 ‘FUN HOME’이라는 제목에서부터 짐작 가능한데, 벡델 가족의 가장이자 이 책의 심장이라고 할 수 있는 브루스 벡델의 직업이 장의사이며, 이야기의 주된 배경이 ‘장례식장(FUNeral Home)’이기에 가능한 별칭이다. “가끔 내가 졸라대면, 우리 아버지도 다른 아버지처럼 ‘비행기 타기’ 놀이를 해주셨다. 아버지가 두 발로 날 들어 올리면 온몸의 무게 중심이 내 배에 실렸다.” “이런 건 어쩌다 한 번씩 있는 아버지와 나의 신체 접촉이었다. 그리고 힘들긴 했지만 내가 아버지 위로 붕 떠 오를 때 균형을 제대로 잡아야 신나는 놀이였다. 서커스에서는 한 사람이 바닥에 누워 상대방의 균형을 잡아주는 곡예를 ‘이카로스’ 게임이라고 한다.“ “어쩌면 아버지는, 자신의 충고를 무시하고 태양에 너무 가까이 날아갔다가 날개가 다 녹아버린 이카로스의 운명이 생각나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신화에나 나오는 그런 장면을 우리가 재현했을 때, 하늘에서 떨어져 아픔을 겪게 될 사람은 내가 아니라 바로 아버지였다.” 왠지 어색한 표정의 두 부녀가 비행기 놀이를 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이 장면은, 「펀 홈」이 어떤 이야기로 시작해서 마무리될 것인지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아름답게 은유한 오프닝이다. 위태롭게 서로를 바라보며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 이 놀이에서 혹시라도 균형을 잃고 떨어진다면, 추락할 그곳에서 자신을 받아줄 사람이 아버지라는 사실, 그것이 7년에 걸친 작업과정 끝에 마주한 책의 결론인 것이다. 그리고 거기까지 가는 과정에서 특별하게 주목하게 되는, 이 이야기만의 흥미로운 지점이 있다. 함께 어울린다거나, 기분 좋게 공유할만한 구석이 하나도 없어 서로에게 소원했던(차라리 앙숙처럼 보였던) 이 두 사람에겐 의외의 공통점이 있었는데, 그것은 이들 부녀가 둘 다 게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시골 마을을 떠나 도시에서 대학을 다니며 동성애자로서의 사회적 자아를 키워가던 딸과는 달리, 시골 마을 장의사 가업을 물려받은 아버지는 쓰러져가던 고딕풍의 대저택을 강박적으로 복원하는 취미에 시간을 보내던 클로짓 게이로 자살함으로써, 세상에서 퇴장한다. (언젠가의 인터뷰에서 앨리슨 벡델은 사고사와 자살의 경계에 걸쳐있는 그의 모호한 죽음은 어쩔 수 없이 아버지와 어울리는 것이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아버지가 아테네인이라면 나는 스파르타인이었고, 아버지의 취향이 빅토리아식이라면 내 취향은 현대적인 것들이었다.” “목 끝까지 꼭 맞춰 입을 필요가 있나요? / 당장 노란 터틀넥 스웨터로 갈아입어라.” “먼지 털기도 힘든 이런 것들은 대체 왜 만드신 거예요? / 아름답잖니.” 판이하게 다른 성격으로 서로를 긁어대던 두 사람이 부인할 수 없는 영혼의 단짝이었다는 사실을 마주하면서, 「펀 홈」은 그저 그런 회고록이 좀처럼 보여줄 수 없는 수준의 예술적 긴장을 품게 된다. 그것의 정체는, 평생 혼자서 견고하게 쌓아 올린 비밀의 성안에 살던 아버지의 죽음이, 강박적으로 예민한 작가 앨리슨 벡델의 진정한 시작일지도 모른다는 의심, 그리고, 아버지가 남겨준 정신적 유산이 결국 자기 예술의 원천이자 근원이 되었다는 고백이다. 어색한 얼굴과 포즈의 두 사람이 아슬아슬 ‘비행기 놀이’를 하고 있는 오프닝이 절묘하게 아름답다고 느껴진다면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언젠가 아버지는 자수가 놓인 어떤 천이 붉은 자주색이냐 짙은 분홍색이냐를 놓고 저녁 식사에 초대한 여자 손님과 거의 싸울 뻔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아름다운 석양빛이 연어 살빛에서 황금색으로 또 암청색으로 끝없이 변해가는 동안에는 묵묵히 그 모습을 바라보고만 계셨다.” 총 7개의 챕터로 나뉜 과거사 속에서 똑같은 상황을 각기 다른 관점으로 보게 되는 구성이나, 그리스 신화와 영미문학을 오가는 풍부한 교양으로 사건과 인물의 내면을 추적하는 방식은 그 재미와 깊이가 결코 녹록지 않다. 여기서 앨리슨 벡델이 취한 작가적 태도는 추리작가와 인류학자의 그것으로, 대상을 바라보는 시선엔 생생한 유머와 인간적 온기가 기본적으로 깔려있다. 그렇기 때문에 다소 복잡해 보이는 구성이나 부담스러울 수 있는 문학적 레퍼런스들에도 불구하고, 묵직한 감정적 파장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결국 앨리슨 벡델이 「펀 홈」으로 해낸 성취는, 평생 펜실베이니아의 작은 마을에 처박혀 클로짓 게이로 살다 자살로 생을 마감한 아버지를 벽장 속에서 끄집어낸 뒤, 전 세계적으로 번역, 출판되어 수많은 상을 수상한 문학작품 속의 잊을 수 없는 주인공으로 부활시켰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캐릭터는 「펀 홈」에서 비범하게 복잡하고 아름다운 주인공의 자격을 획득했으며 그것이 자신의 분신이었던 딸의 손끝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특별히 더 찡하다. 「펀 홈」을 읽은 지 몇 년이 훌쩍 지났지만, 나는 작업실 책상이든 가방 속이든 이 책을 근처에 놓아두고 자주 펼쳐본다. 한때는 진지하게 이 책의 판권을 알아보려고만 했던 적도 있었는데, 그때 내가 가지고 있었던 거친 아이디어는 원작 그래픽 노블의 형식을 영화 안으로 화끈하게 가져오는 방식이었다. 내래이터인 작가 자신이 적극 개입해서 영화에 등장하기도 하고, 자신과 자신의 가족 구성원을 연기하는 배우들을 지켜보기도 하면서 말이다. 그것은 원작의 화자인 앨리슨 벡델의 적극적인 목소리와 생생한 코멘트에 대부분 기인한 것인데, 예를 들어, 내가 좋아하는 <아메리칸 스플렌더>라는 영화가 이런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언더그라운드 만화가 커플인 ‘하비 피카’와 ‘조이스 브랩너’를 중심으로, 그 이웃들의 별 볼 일 없는 일상을 스케치하듯 보여주는 영화였는데, 실제 주인공인 하비 피카가 내레이션도 하고, 등장까지 해서 코멘트를 막 던지는 것이다. 당시, 하비 피카를 연기한 배우가 폴 지아마티였고,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뭔가 더러운 기분을 경험 중인 표정으로 등장해 골목을 걸어가는데, 그 위로 실제 하피 피카의 목소리가 끼어든다. 이런 식으로. “자, 여기 이놈이 우리 주인공이야. 다 자란 어른인데 아주 제멋대로지. 이것저것 아는 척은 잘하는데, 정식교육 같은 건 받은 적이 없어. 거의 평생을 이 개떡 같은 동네에서 개똥 같은 일만 하면서 살았지. 지금은 비참한 재혼 생활 중인데, 네가 로맨스나, 현실 도피적인 삶을 꿈꾼다거나, 궁지에서 구해줄 수퍼히어로 따위를 찾는 사람이면... 잘 들어라, 넌 영화를 잘못 골랐어.” <아메리칸 스플렌더> 이런 방식을 두고 포스트모던이니, 브레히트 적이니 같은 말들을 줄줄이 덧붙일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 상영 내내 키득대다가 막판에 감동을 받으며 극장을 나왔던 기억의 영화다. 폴 지아마티와 호프 데이비스의 ‘인생 역할’처럼 보이는 이 만화가 커플은 보고 있기 엄청나게 흥미진진한 괴짜들이었거든. 대신, 「펀 홈」의 각색을 생각해보던 예전의 나는 실제 원작자를 연기하는 배우를 등장시켜 영화에 어떤 형태로든 개입시키는 아이디어를 생각하고 있었다. 중요한 상황마다, 멀리서 팔짱 끼고 자신의 어린 시절을 보고 있는 원작자 역의 배우가 프레임에 보인다거나, 끼어들어 코멘트를 던져도 (열심히 대화 중이던 배우들이) 안 들리는 척한다거나 하면, 감상에 엄청난 방해가 되면서 짜증도 나고, 기가 차서 코웃음도 나고 할 것 같지만, 내 전략상으로는, 바로 그런 접근이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재미라서, “그런 책을 영화로 만든다고?” 반문하는 친구들에게 결국 한 방 먹이는 것이었다. 하지만, ‘반나절 정도만’ 흥분하며 생각해본 듯한 이런 아이디어는 5분도 채 안 되는 인터넷 검색에서 어떤 식으로든 마침표를 찍게 됐다. 그러니까 바로 이런 방식으로, 「펀 홈」의 뮤지컬 각색 버전이 오프-브로드웨이에서 공연을 시작했던 것. 그리고 이듬해에 브로드웨이 공식 무대로 이어졌고, 2015년 토니상에서 뮤지컬 부문 작품상, 감독상, 남우주연상, 작곡상 등 5개의 토니 트로피를 가져가며 그해 가장 인기 있는 작품 중의 하나가 되었다. 재미있는 건, 2017년 현재, 그렇게 각색된 뮤지컬 버전을 마침내 본 나는, 뮤지컬 트랙의 송리스트를 내내 듣고 다니면서 가사를 외울 정도의 팬으로 입장을 바꾸게 된 것이다. 뮤지컬 <펀 홈>의 이카로스 게임 뮤지컬 <펀 홈> 세트 뮤지컬 버전이 놀라운 건, 타이밍이 어긋난 서로의 커밍아웃과 그로 인한 아버지의 죽음을 클라이맥스로 확실하게 보여준다는 것, 극 중 화자이자 성인이 된 딸이 죽기 전의 아버지와 나란히 앉아 ‘제발 어떤 이야기라도’ 해달라고 울부짖는 그 장면 내내, 노래로 소통하는 그들을 보면서 전혀 기가 차거나 코웃음이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콧물을 훌쩍이는 소리나, 눈가와 두 뺨을 손으로 훔치는 관객들의 손짓들이 여기저기 보인다는 것은 그런 방식이 성공했다는 증거겠지. 다시, 「펀 홈」으로 돌아가자. 요즘 나는, 회고록(memoir)만큼 솔직한 ‘정신적 투쟁’을 구경할 수 있는 문학 장르가 또 있을까, 하는 생각을 자주 하는 편이다. 그와 동시에, 자신의 과거를 만나고 해석하는 일이야말로, 현재를 진단하고 미래를 계획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작가적 미션이라는 이유가 그런 생각의 뒤를 따르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펀 홈」은 안타깝게 죽은 아버지를 향한 예술적인 부고(obituary)로 그치는, 그저 그런 회고록이 아닌, 고통스러울 정도로 솔직하고 꼼꼼하게 과거와 현재의 자신을 만든 사람들을 들여다보려는, 정신적인 투쟁을 기록한 르포이기도 한 것이다. 그럼 마지막으로, 오래전 죽은 엄마에 관한 내 가장 선명한 기억조각 중에 하나를 꺼내본다. 당시, 나는 중학교에 갓 입학한 어린아이였고, 엄마는 자신의 남동생들(외삼촌)과 함께 탁구장에 놀러 왔다. 외삼촌들은 운동신경이 좋고 기분도 항상 좋은 사람들이라, 나는 이모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만큼 그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즐겁다. 누나! 누나! 라고 불리는 엄마는 외삼촌들이 탁구 치는 걸 처음에는 구경만 한다. 탁구채를 건네도 손사래를 치는 엄마를 나는 신경도 안 쓴다. 외삼촌들이 괴성을 지르며 탁구 치는 모습을 보는 게 더 웃기고 재밌기 때문이다. 그러다 당시 아마 이십 대였을 것 같은 막내 외삼촌이 엄마를 끌고 와 탁구대 앞에 억지로 세운다. 그리고 탁구채를 억지로 잡게 한다. 어쩔 수 없이, 에라, 모르겠다, 쑥스럽게 자세를 잡은 엄마는 맞은편에 자리를 잡은, 유일하게 자신이 오빠라고 부르는 큰 외삼촌을 향해 예사롭지 않은 눈길을 슬쩍 보낸다. 큰 외삼촌을 비롯해, 지켜보던 세 명의 외삼촌들이 갑자기 조용하다. 탁구채를 잡은 엄마가 아무래도 어색한 사람은 나뿐인 것 같다. 바로 그 순간, 탁구대 위를 흐르는 그 시간부터 근 30년이 지난 지금까지, 나는 이후 이어진 몇 초간의 장면을 매번 또렷하게 기억해 낼 수 있게 된다. 대충 4K 해상도 정도로...? 그러니까 순식간에 탁구공을 머리 위로 던져 올려, 맞은 편 큰 외삼촌의 탁구대에 스카이서브를 정확하게 꽂아 넣던, 엄마의 우아한 번갯불 같은 동작 말이다. 방방 뛰며 좋아하던 외삼촌들의 모습도, 내 온몸을 지나갔던 소름의 기분도... 그리고, 얼굴은 기억 안 나지만, 내 머리를 쓰다듬어 정전기를 일으키던 그 이모들은 분명히, 엄마가 한때 전국소년체전에 나갈 정도의 실력을 자랑하던 유망한 탁구선수였음을 알고 있었겠지. * 「펀 홈」은 「재미난 집」이라는 제목으로 몇 년 전, 번역 출간된 적이 있으나, 현재는 절판 상태다. 올 해 안에 ‘움직씨’(https://twitter.com/oomzicc)라는 출판사에서 재번역/출간될 예정이라고 한다.
60년대의 기운 시대적인 ‘기운’이라는 것이 있는 것 같다. 가령 1960년대가 그런 시대였다. 유럽은 프랑스의 68혁명으로 대표되는 반자본주의 혁명에 돌입했고, 미국은 반문화 정서에 몰두했다. 현대영화의 형식과 내용의 급진성이 과감하게 실험됐고, 미국 영화조차도 상상력의 자유가 허용됐다. 카메라 움직임과 앵글, 편집에는 금기가 없는 것 같았다. 소위 말해 “뭘 해도 의미는 만들어졌다”.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60년대의 일본 영화계는 대형 스튜디오들에겐 위기였으나 새로 등장한 신진 작가들에게는 새로운 계기였다. 오시마 나기사의 영화-정치학이 새로운 세대를 사로잡았다. 이마무라 쇼헤이도 이러한 시대에 동참했다. 오즈 야스지로의 조감독으로 영화계에 입문했지만 그는 오즈의 엄격한 조형미에 동의할 수 없었다. 왜 아니었겠는가? 그는 거의 인류학자의 태도로서 일본의 인간 군상들을 관찰했고, 원시주의적 열정으로 영화들을 만들어냈다. 차마 발언할 수 없을 것 같았던 인간의 동물적 본성과 에너지, 혹은 폭력과 무지가 그의 영화들에서 가감 없이 펼쳐졌다. 60년대 카이에 뒤 시네마에 실린 그의 발언은 그 자신을 가장 잘 대변한다. “나는 온 힘을 다해 두 가지 문제, 즉 인간 육체의 열등함과 일본의 일상적 현실의 끊임없는 바탕이 되고 있는 사회 구조의 열등함을 결합시키고 싶었다.” 정말로 그는 그렇게 했다. 시대적 기운도 그를 상승시켰다.(당대의 제도나 사회구조와는 다른 의미로서의 시대의식, 세대성) 쇼헤이의 60년대에서 70년대로 이어지는 걸작들은 금기가 없다. 검열도 없다. 카메라 움직임과 캐릭터, 주제와 소재, 영화적 형식과 스토리도 파격적이다. 그의 모든 영화들에는 스크린을 뚫고 나올 것 같은 괴이한 기운도 감돈다. 괴력의 감독이다. 다큐멘터리의 진실 혹은 허구 60년대 쇼헤이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이채로운 작품은 1967년에 만들어진 < 인간 증발 >이다. 젊은 날의 쇼헤이의 모습을 직접 확인할 수 있는 이 작품은 현장을 지배하는 그의 강단과 천재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일본 영화에 각별한 애정을 쏟은 영화평론가 도널드 리치는 이 영화를 이마무라 쇼헤이의 가장 중요한 업적으로 평가하였을 정도였다. 이 영화는 원래 TV 시리즈 물로 기획되었으나 영화로 전환됐다. 당시 일본에선 한해 십만 명에 육박하는 사람들이 실종되었고, 이마무라는 도대체 이 조그만 나라에서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사라지는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경찰청 실종 파일들을 뒤지기 시작했고 그중에서 가장 평범해 보이는 32세의 남자, 타다시 오시마를 추적하기로 결심한다. 여기에 그의 약혼녀 요시에를 동참시켜, 그녀가 오시마의 가족과 동료, 실종 당시의 정황 등을 파헤치고 다니는 모습을 기록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전문 인터뷰어로는 < 붉은 살의 >(1964) 등에 출연한 바 있는 남자배우 츠유구치 시게루를 캐스팅하여 요시에와 함께 움직이도록 하였다. 영화는 오시마 실종 1년 반이 지난 시점부터 촬영되기 시작해 거의 1년에 가까운 기간을 소요했다. 촬영팀은 오시마를 추적하는 수사팀과 흡사했고, 요시에와 시게루를 내세운 인터뷰들은 직계 가족부터 점점 주변으로 확장되었다. 영화 촬영팀의 첫 추적 대상은 당연히 오시마였다. 그의 내밀한 가족사와 부모 형제, 그가 왜 도시로 이주했으며 동료들에게 어떤 사람이었는지, 심지어 어떤 여성 편력을 지니고 있었는지 폭로되기 시작한다. 극기야 실종 시점에 오시마는 약혼녀 요시에가 아닌 다른 여성과 결혼을 약속하고 임신까지 시켰다는 증언이 나온다. 이쯤 되면 영화는 슬슬 관객에게 퍼즐과도 같은 질문의 발동을 걸기 시작한다. 부재하는 남자, 살았는지 죽었는지조차 확인할 수 없는 남자, 실체가 없는 남자가 오직 타인의 증언에 의해서만 관객에게 제시된다. 누군가에게 그는 무능한 일군이었고 어떤 이에게는 예의 바르고 착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어떤 이에게 그는 여자들을 농락하는 자였고 결국 실종 전에 회사 공금까지 횡령한 문제적 인물이기도 하였다. 그는 정말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러나 영화가 정작 질문하는 것은 오시마라는 사람의 존재 혹은 오시마가 죽었는지 살았는지가 아니다. 오시마를 경유해 이마무라 쇼헤이의 진짜 질문은 이것이었다. “영화가 어떻게 단편적 사실들(그의 흔적들, 증언들, 기억들, 관계들)을 통해 진실에 가 닿을 수 있겠는가?” 영화의 본격적인 게임은 중반에 이르면서 고조된다. 오시마 실종 2년째 되던 날, 일본의 TV와 언론 매체는 이마무라의 영화 촬영팀과 약혼녀인 요시에를 조명하기 시작한다. 어떤 미디어에서 요시에는 보기 드문 순애보의 주인공으로 추앙되었고, 어떤 기자는 “단지 찾겠다는 일념으로 이마무라의 촬영에 응한 것인가?”라는 의구심을 품기 시작했다. 실제로 요시에는 이때쯤 이미 변심하고 있었다. 그녀가 이 오랜 추적과정 속에 더 이상 오시마가 아니라 인터뷰어이자 배우인 시게루를 사랑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를 눈치 챈 이마무라 쇼헤이는 시게루를 불러 그것이 사실인지 확인한다. 그리고 내린 결론. “이미 영화는 목적(요시에의 오시마 찾기)을 잃었으니, 여기서부터는 요시에와 시게루의 관계를 밀어붙이자.” 영화와 현실, 허구와 진실의 경계 < 인간 증발 >은 명백히 다큐멘터리 형식을 표방하고 시작된 작품이었다. 오시마 실종이라는 사건, 오시마의 주변 사람들, 무엇보다도 요시에의 추적은 모두 사실에 기반했다. 그러나 그 과정을 영화로 기록하면서 이마무라는 새로운 실험을 덧붙인다. 영화의 후반부에서 이마무라는 관객들을 향해 다음과 같은 직설화법으로 이야기한다. “이 영화는 사실들을 추적하다 보면 진실에 다다르게 될 것이라는 믿음에서 시작했다. 물론 진실은 있겠지만 여기 세 명(극 중 진실 공방을 벌이는 요시에와 요시에 언니, 그리고 어떤 사건의 목격자인 생선장수)에게 진실은 다 다르게 존재한다. ... 사람 마음은 믿을게 못 된다. 이건 픽션이다. 오시마의 실종을 바탕으로 한 드라마일 뿐이다. 이 영화는 드라마다. 가공된 것이다.“ 실제로 영화는 중반 이후 관객들은 보이스 오버 방식으로 흘러나오는 영화 촬영팀의 목소리들을 듣게 된다. 화면은 여전히 오시마 주변을 배회하며 사람들을 인터뷰하는 요시에 일행을 제시하고 있지만, 목소리들은 이 영화의 방향에 대해 극영화적 스토리를 부여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촬영팀이 사건을 왜곡하거나 정황을 조작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다만 영화적 포커스를 오시마에서 요시에로 옮겨가며, 요시에 언니를 새로운 사건의 용의자로 제시한다. 막장에 가까운 의혹도 제기한다. 무당의 강신된 목소리가 결정적 계기를 제기했기 때문이다. 무당은 오시마가 이미 죽었으며, 그를 죽인 것은 오시마와 불륜을 저지른 요시에의 언니라는 것이다. 이제 영화의 포커스는 요시에와 그녀의 언니, 그리고 불륜을 목격했다고 주장하는 생선장수의 진실게임으로 전환된다. 영화는 끝까지 누구의 말이 진실인지 알려주지 않는다. 아니 알려주지 못한다. 화면 안으로 불쑥불쑥 들어와 선언하듯 이야기하는 이마무라 쇼헤이의 말처럼, 영화는 다 허구이며, 사실의 단편들이 진실을 말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주제의식이 가장 잘 드러내는 명장면은 영화의 후반부에 제시된다. 언니와 진실공방을 하던 요시에는 목격자인 생선장수를 집으로 불러와 언니와 대면시킨다. 이 세 명은 격한 논쟁을 하지만 누구도 상대방을 신뢰하지 않는다. 이때 이마무라 감독이 방안으로 불쑥 들어와 앉게 되고, 답답해진 요시에는 이마무라에게 질문한다. “감독님 진실은 무엇인가요?” 그러자 이마무라는 큰 목소리로 “세트 준비!”라고 외친다. 이에 누군가의 집일 거라고 간주되었던 방의 벽들이 뜯겨 나간다. 카메라는 뒤로 빠지며 이들을 전경화하는데, 카메라가 움직임을 멈췄을 때 관객은 이들이 실제 공간인 집이 아니라, 영화 세트장에 마련된 방과 집기들, 그리고 조명 장치 및 분주하게 움직이는 스태프들과 함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이마무라의 주장. “인간의 마음을 믿을게 못된다~(위에서 언급한 내용)”. 이 작품이 천재적인 것은 단순히 진실 게임을 능란하게 해서만은 아니다. 물론 이 영화는 다큐멘터리임에도 어느 심리 스릴러 못지않은 치밀함과 긴장으로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오시마는 살았는가? 언니는 정말 동생의 약혼자와 불륜을 저질렀나? 요시에는 약혼자를 찾겠다는 건가, 유명해지겠다는 건가? 그뿐 아니다. 이 영화는 정말이지 60년대의 산물이다. 한국의 TV 다큐멘터리나 독립 다큐멘터리에선 좀처럼 발견하기 힘든 파격적인 형식 구조와 실험이 전면에 배치된다. 이미지와 사운드의 관계. 증언자와 카메라의 관계, 관객과 사건의 관계 등 모든 것들은 관습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자신만의 리듬 속에서 놀라운 에너지로 결합된다. 이마무라는 자신만의 언어와 아이디어로 영화의 쇼트를 구성하고 편집하며 사운드를 배치한다. 그리고 그 인공적 가공물은 더 근원적으로는 영화와 현실의 관계, 허구와 진실의 관계에 대해 심오한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1967년 작인 이마무라의 이러한 파격적 실험은 동시에 유럽의 시네마 베리테나 미국의 다이렉트 시네마의 정신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특히 시네마 베리테의 인터뷰법은 이 영화에서 얼핏 유사하게 적용된다. 그러나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시네마 베리테는 진실을 추동하는 카메라, 무수한 질문들을 통해 진실에 가 닿을 수 있다고 믿었다. 유럽의 그들은 영화의 진실 가능성에 대해 확신했다. 그러나 이마무라는 그들의 한 계를 이미 간파했다. 증언자들은 신뢰할만한 것인가? 카메라는 과연 세계를 객관적으로 기록할 수 있는가? 이것은 증언자들의 윤리 문제가 아니라 영화의 ‘구성능력’에 관한 문제였다. 2차원적인 카메라 렌즈가 세상을 프레이밍 하는 순간, 영화는 그 자체로 또 다른 세계(드라마, 허구)를 구성할 뿐이라는 사실 말이다. 버스터 키튼의 < 셜록 주니어 >나 알프레드 히치콕의 < 이창 >, 그리고 고다르의 <경멸> 못지않게 뛰어난 자기 반영적 영화로서, < 인간 증발 >에서 진짜 진실은 오시마의 실종에 관한 것이 아니라 영화 그 자체의 구성능력, 현실과 영화가 맺는 관계에 관한 것이었다. 그래서 이 영화의 주인공은 오시마나 요시에가 아니라 영화 그 자체이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요시에 자매와 목격자가 거리 한복판에서 사건 정황을 두고 벌이는 논쟁을 기록한다. 촬영팀이 장비를 동원해 소란스런 촬영을 시작하고 세 명의 주인공들은 서로의 증언이 사실이라 우기며 싸우기 시작한다. 여기에 또 다른 관련자들이 모여들고 도시의 구경꾼들이 가세하면서 현장은 말 그대로 아수라장이 돼버린다. 그러자 이마무라는 더 이상 촬영이 불가능하다며 중단을 선언한다. 그러면서 하는 마지막 발언. “이 영화는 다양한 각도에서 포착해 편집한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예기치 않은 상황이 벌어졌다. 오시마의 실종에 다시금 초점을 맞춰야 한다. 이 영화는 픽션이다. 다 사실이 아니다.” 이때 카메라는 공중으로 빠지고 불쑥 침입해 들어오는 요시에와 시게루의 대화 목소리. “끝인가요?” “응 그래. 영화는 끝이지만 현실은 시작이지. 내일 뭐해?” ps. 영화가 개봉하자 여러 논쟁들이 벌어졌다. 무엇보다도 이 영화의 윤리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가 커졌다. 다큐멘터리가 현실을 조작했다는 비난부터, 오시마 및 요시에의 사생활 침해에 대한 논란까지 일었다. 그러자 역시 강단 있는 이마무라 감독의 응수. “내가 요시에의 시련을 영화 만드는 데 이용한 만큼 요시에도 나를 이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