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물관 축제! 뮤지엄 위크(Museum Week)!
- 제작년도
- 2010
“영화는 비-영화적인 메시지를 위해 오용되어서는 안 된다” 빌헬름 하인과 비르기트 하인(이하 W+B 하인)이 첫 영화 < S & W >(1967)를 만든 이후 약 10여 년간 이어간 영화 제작 활동을 관통하는 핵심적인 개념이 있다면 재생산(reproductions)일 것이다. 전후 서유럽의 언더그라운드 실험영화에 대한 살아있는 기록이라고 할 수 있는 『XSCREEN: Materialien über den Underground-Film』(1971)의 77쪽을 보면, ‘재생산에 내재한 미학 Reproduktionismmanente Ästhetik’이라는 제목아래 쓴 짧은 글을 발견할 수 있다. 그 내용을 한번 살펴보자. “재생산 과정만으로도, 이미 필름의 미적 특질은 결정된다. 영화라는 공간은 서로 다른 재생산 과정 안에서 원본(vorlage)이 변화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곳이다. 이 변화를 명확하게 보여주기 위해, 원본(사진)은 16mm 카메라로, 8mm 카메라로, 비디오카메라로, 그리고 스틸 카메라(슬라이드)로 기록될 것이다. 그리고 하나의 공간에서 동시에 재생된다.” W+B 하인은 필름의 재생산의 결과로 나타나는 지각 효과를 전경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즉 영화에서 재생산 저 혼자서 발생시키는 미학적 경험을 선명히 하려 한 것이다. 재생산의 과정에서 무엇이 일어나는가? 이러한 맥락에서 그들의 관심사가 처음으로 드러나게 된 작업이 바로 < 생필름 Rohfilm >(1968)이라고 할 수 있다. 《Film as Film》(1977) 도록에는 비르기트 하인이 구조영화(Structural Film)에 대해 소개하고 그 역사를 서술한 글이 있는데, 그가 구조영화의 특징 중 처음으로 손꼽은 것이 ‘필름 스트립’이다. 여기에는 구조영화가 필름 스트립을 사용하는 세 가지 방법이 안내되어 있다. 첫 번째는 시각적인 ‘과정’이다. 필름의 연속이 내러티브 영화에서 내러티브 시퀀스를 만든다면, 구조영화에서는 시각적인 리듬으로 기능하는 데 이용된다. 두 번째는 네거티브와 포지티브 필름의 화학적 현상 과정이고, 세 번째는 필름 스트립의 표면에 직접 그림을 그리거나, 풀로 무언가를 붙이거나, 흠을 내는 것이다. 아무것도 촬영되지 않은 투명한 필름은 스크린에 흰빛만을 영사할 뿐인데, 이것 또한 ‘영화’로 인정한다. < 생필름 >을 보면 우리는 비르기트 하인이 언급한 이러한 특징을 모두 확인해볼 수 있다. < 생필름 >은 말 그대로 눈앞에 있는 대상이 무엇인지 모를 혼란스러운 경험을 선사한다. 빌헬름 하인의 얼굴이나 네거티브로 드러나는 남성의 형상, 쾰른 대성당을 롱 샷으로 찍은 장면 등 이미지의 파편들이 일정한 내러티브나 목표를 가지지 못하고 스크린에서 부유하듯 흐른다. 중간중간 남녀가 벌거벗은 채 침대에서 서로를 끌어안고 있는 장면이나 누군가가 책상에 앉아서 작업을 하고 있는 것 정도만이 형상을 제대로 인식할 수 있는 촬영된 이미지일 뿐이다. 스프로켓 홀과 필름의 경계가 화면에 드러나고, 스크래치, 일그러진 얼룩이 추상적인 조형이 되어 점멸한다. 두 종류의 필름 스트립이 한 화면에서 동시에 나타남으로써 검은 선으로 나뉜 분할화면의 효과가 생성되기도 하는데, 이 모든 시각적 자극이 뒤죽박죽된 영화는 20여 분 동안 지속된다. W+B 하인은 <생필름>을 위한 필름 스트립을 만들기 위해 머리카락, 먼지, 담뱃재, 잘게 조각난 네거티브와 포지티브 필름이미지, 종이 파편, 이어 붙인 천공 테이프 등을 비어있는 필름에 붙이고 여기저기 흠집을 냈다. 풀로 오브제를 붙여 두꺼워진 필름 때문에 회전이 때때로 멈추게 되면서 같은 이미지가 계속해서 나타나기도 한다. 또한 매우 느린 속도로 재생되면 프로젝터의 열이 필름을 녹이고, 이미지의 형상을 변화시킨다. 이 필름은 무비올라에 올라가 다시 8mm 혹은 16mm로 촬영되고, 재촬영 본은 임의로 선택된 필름 조각이 붙여진 뒤 재촬영된다. < 생필름 >을 통해 W+B 하인이 주요하게 내세웠던 태도는 앞서 말한 것처럼 필름이라는 물질 그 자체라기보다는 재생산의 전반적인 과정이다. 그들이 최초로 만든 필름 스트립은 또 다른 재생산 과정을 위해 소요될 뿐이며, 물신화되지 않고 폐기된다. 그 결과로 남는 것은 매우 강렬한 파괴의 인상을 주는 영상 이미지이다. 여기서 ‘파괴’적인 인상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생필름>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이것이 꽤 중요한 감각이기 때문이다. 비슷한 방식으로 만든 다른 작업을 떠올려 보자. 스탠 브래키지의 < Moonlight >(1963)는 나방의 날개나 잡초, 꽃 등을 투명한 필름 위에 붙인 것으로, 다소 낭만적이고 서정적인 운율을 전달한다. 오웬 랜드(조지 랜도우)의 < Film in Which There Appear Edge Lettering, Sprocket Holes, Dirt Particles, Etc. >(1965-66)는 여성의 상반신 초상이 담긴 필름을 중앙에서 빗겨나게 두어 스프로켓 홀과 필름에 적힌 숫자뿐만 아니라 먼지 따위가 모두 화면에 나오도록 했는데, 여기서는 영사된 이미지가 어떤 감정을 환기시킨다기 보다는 필름의 자기-지시적인 측면이 도드라질 뿐이다. 반면 W+B 하인에게 중요했던 것은, 영화의 한정적인 생산 양식 안에서 기존의 이미지를 다시 생산하는 행위 자체만으로 어떤 이미지의 효과, 미학적 상태가 발생할 수 있는지 탐구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사운드의 기능 또한 중요하게 등장한다. 사운드는 W+B 하인의 주된 관심사 중 하나였다. W+B 하인의 초기 작업에서 대부분의 사운드를 담당했던 것은 비르기트의 형제였던 크리스티안 미카엘리스(Christian Michelis)였다. W+B 하인이 이미지에, 미카엘리스가 사운드에 집중하여 비재현적이고 형식적인 영화 만들기에 헌신하면서, 그들은 사운드와 이미지 사이의 부조화, 그리고 비동시적인 관계를 성취하고자 했다. 사운드에 관한 미카엘리스의 생각을 살펴보자. “사운드는 영화의 분위기나 특정한 형식적 측면을 강조 혹은 무시하며 일종의 해석을 제공한다. 음향의 영역에서는 영화의 형식적인 문제나 기술적인 문제와의 유사성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그 유사성은 직접적으로 대응되는 것이 아니라 재료들의 조직과 유사하다. 이론적 개념들의 유사성보다 중요한 것은, 필름과 사운드의 효과로서 즉각적으로 지각되는 감각의 상호작용이다.” W+B 하인과 미카엘리스는 (그들이 뉴 아메리카 시네마의 작품들에서 확인한 순진한(naive) 전술이라고 할 수 있는) 익숙한 사운드를 거부했고, 관객이 편안함을 느끼지 않기를 바랐다. 영화의 지속 안에서 부유하며 감정적인 측면을 제공하는 음향은 스크린에서 아주 잠깐 동안만 식별 가능한 이미지의 발생과 같은 감각적인 인식을 요구한다. < 생필름 >은 1968년 11월 뮌헨에서 열린 “유럽 독립영화 감독들의 모임 European Meeting of Independent Filmmakers”에서 처음 상영되어 무척 호의적인 반응을 얻었으며, 빠른 속도로 주목을 받게 된다. 바로 뒤이어 뉴욕, 런던, 도쿄, 그리고 프랑스 감독 조합에 의해 설립된 비경쟁 프로그램인 감독주간(L Quinzaine des Realisateurs)을 통해 칸 영화제에서도 선보이게 된다. 그런데 비르기트가 이탈리아 영화감독 알프레도 레오나르디에게 쓴 편지를 보면 칸에서 <생필름>을 본 관객들에 대한 흥미로운 묘사가 나온다. “우리가 풀 사운드로 <생필름>을 보여주자, 관객들은 소리를 질렀고 마지막 십분 동안에는 상영을 중지하라는 박수를 쳤다. 그건 정말로 테러였다.” 이는 대부분 미카엘리스의 타협하지 않는 사운드 때문이었는데, 제5회 국제만하임영화제의 경쟁부문에서 상영될 때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관객들은 야유를 보내고 소리를 질렀는데, 한 신문의 지면에서는 이에 대해 “영화의 노이즈가 주는 메시지에 대한 적절한 응답”이라고 쓰기도 했다. 그러나 당대의 동료들이나 아방가르드 영화감독들에게는 이 영화가 그들의 실천에 있어서 기념비적인 것임을 적절하게 인지했다. 그들은 W+B 하인의 초기 영화들이 뉴 아메리카 시네마의 작업들과는 변별된다고 생각했다. 영국의 영화비평가 데이비드 커티스는 그의 저서 『Experimental Cinema: a Fifty Year Evolution』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필름이라는 물질에 대한 확신과 프로젝터 안의 물질이 지닌 존재감은 압도적이었으며, 내가 본 모든 미국 영화보다 강력하다.” 스티븐 드워스킨이 <생필름>에 대해 “시각적 폭탄”이라 표현한 것도 그렇게 과장은 아니라는 것을 짐작해볼 수 있다. 필름의 재생산이 낳은 “시각적 폭탄”과도 같은 강렬한 경험이라는 것은 단순히 수사에 그치는 것 같지 않다. 그보다는, W+B 하인이 영화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시화하기 위한 의도인 것처럼 보인다. 비르기트 하인이 1975년 『스튜디오 인터내셔널 Studio International』 11/12월호에 쓴 글은 영화의 영역에서 그들이 무엇을 추구했는지, 그리고 영화에 대한 태도가 어떠한지를 잘 보여준다. 이 글은 『Film as Film』 도록 마지막 부분에 개별 작가의 필모그래피와 함께 발췌되어 실렸다. “우리의 영화는 미학적인 창조의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시작점은 어디인가? 예술과 과학의 경계는 어디인가? 재생산의 기술적 과정은 어느 정도 수준으로 미학적 변형의 기본 단계로 여겨지는가? 이미 재생산된 현실의 해석을 촬영할 때, 가장 단순한 카메라의 조작은 어느 정도인가? 조작된 추상과 실제적인 물질 이미지의 대결에서, 또 다른 문제는 명백해진다. 이는 예술을 다룰 때면 언제나 발생하는 문제인데, 실제 오브제와 그에 대한 설명이 실려 있는 도록의 볼 때의 괴리를 상상해보라. 바로 이것이 육체적으로는 경험할 수 있지만 말로 표현할 수는 없는 시각적 형식의 ‘표현’이다. 이것이 하워드 아이헨바움이 영화의 ‘포토제닉, 자움(the zaum) - 본질’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이성을 넘어선, 이성 앞에 뉘어있는 언어’이다. 구조에 대한 연구는 이 문제를 걸고넘어지는 첫 시도이다. 작품의 ‘무의식적’ 요소를 의식적인 과정으로 만드는 것이 얼마만큼 가능한지 살피면서 말이다. 만약 당신이 사회와 사회의 역사적 과정의 바깥에 예술과 예술가를 놓아두고자 하는 이데올로기, 즉 무의식의 창조적인 힘이라거나 천재와 같은 낭만을 넘어서고 싶다면 이 질문은 중요하다. 영화는 종종 ‘손가락 운동’ 이라거나 예술이 아닌 것으로 평가되곤 했다. 이러한 반응은 느슨하고 열려 있는 영화의 구조 때문에 발생한다. 이는 고전적인 예술 작품의 닫힌 형식이나 유일성의 이데올로기에 반대되는 개념 중 일부이다. 영화의 구조는 변화와 연속에 열려 있다. ‘예술 작품’은 닫혀 있으면 안 되며 반드시 그 스스로 열려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작업의 과정을 열어 두는 것이 필요하며, 영화를 교훈적인 것에 가깝게 만들어야 하고 그것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보여주어야 한다.” 회고적으로 보면 < 생필름 >은 W+B 하인이 뒤이어 제작한 개별 영화에서 추구했던 미학적 전략이 응집된 핵심적인 작품으로 간주될 수도 있다. 제목에서조차 그들의 관심사가 무엇인지 잘 보여주는 작업 <재생산 Reproductions>(1968)은 W+B 하인이 아프리카, 이탈리아, 그리스 등지에서 휴가를 즐기며 찍었던 흑백 슬라이드 한 종류만을 이용해 만든 영상이다. 카메라는 풍경이나 건물이 찍힌 정지한 이미지를 훑기도 하고, 초점을 또렷이 맞췄다가 흩뜨리기도 한다. W+B 하인의 초기 작업에서 특징적인 것이 있다면, 비르기트가 말하듯 “개인적인 이미지를 형식적인 맥락에서” 이용하는 것이었다. 이에 반해 <625>(1969)는 순수한 추상처럼 보인다. ‘625’라는 제목이 지시하는 것은 PAL(Phase Alternation by Line) TV의 프레임당 주사선의 숫자이다. 볼렉스 16mm 카메라로 TV의 화면을 찍게 되면, 아날로그 비디오와 필름 카메라의 서로 다른 초당 프레임 숫자 때문에 두꺼운 검은색 띠가 생겨나는데, 1969년 빌헬름이 쿠르트 크렌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을 살펴보면 그가 1초당 8~32프레임으로 촬영 속도를 조절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에 따라 우리가 <625>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카메라의 재촬영을 통해서만 볼 수 있는)띠의 두께와 속도, 움직임 등이 끊임없이 변하는 것이고, 그 운동에서 발생하는 리듬을 느낄 수 있다. <머테리얼필름 Materialfilme>(1976) 시리즈에 이르러서는 필름의 재생산 과정보다는 이미 주어진 발견된 오브제(found object)로 탐구의 방향을 선회한다. 이를 마지막으로, 그들은 필름 만들기를 중단하고 1978년부터 독일 곳곳을 돌아다니며 클럽이나 바에서 직접 퍼포먼스를 선보이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재생산 과정을 거친 이미지의 지각적 효과와 그 미학을 탐구한 W+B 하인의 초기 활동은 30여 개가 넘는 실험적인 작업을 뒤로하고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된다. 빌헬름 하인 Birgit Hein과 비르기트 하인 Wilhelm Hein (W+B 하인) 덧붙여 보자면, 60년대 후반부터 70년대 후반까지의 기간 동안 W+B 하인이 영화의 영역에서 수행했던 것은 작품 제작뿐만이 아니다. 1966년 본격적으로 영화를 만들기로 마음먹고 그 이듬해인 1967년은 그들이 영화에 관한 기획까지 아우르는 전방위적인 활동을 이어나가는 데 영향을 준 중요한 사건들이 일어난 한 해였다. 그중 하나가 67년 10월 로마에서 < Bliss >(1967)를 상영하던 자리에서 그레고리 마르코폴로스를 만난 일이었다. 이를 계기로 W+B 하인은 마르코폴로스를 쾰른으로 초대하여 상영회를 마련한다. 12월 11일 마르코폴로스의 < Eros, o Basileus >가 쾰른대학에서 상영되었는데 무려 1천 명의 관객이 왔다고 한다. 다른 하나는 W+B 하인이 벨기에 크노케(Knokke)에서 열린 제4회 국제실험영화페스티벌에 참석한 일이었다. 이 행사는 영화를 선보이고 토론하는 장소였을 뿐만 아니라 아방가르드 영화의 유통, 비평, 프로그래밍 등의 국제적 협력을 도모하는 곳이었는데, 67년의 행사는 유럽에 ‘언더그라운드’ 아방가르드 영화를 확산시킨 것으로 여겨진다. W+B 하인은 쾰른으로 돌아와 1968년 국제적 아방가르드에 초점을 맞춘 정기적인 스크리닝 시리즈 《XSCREEN》을 그의 동료들과 기획하여 만든다. 이후 그들은 10여 년간 아방가르드 영화 이벤트를 꾸준히 마련하며 필름 큐레이팅에 대한 경험을 착실히 축적해 간다. 1977년에는 《도큐멘타 6》을 비롯해 《Film as Film》과 같은 대규모 전시에 공동 기획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 뮌헨 필름뮤지엄(Filmmuseum München)에서 출판하는 DVD 시리즈 ‘Edition filmmuseum’을 통해 W+B 하인의 초기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다. 이 시리즈의 54번 에디션으로 제작된 『Materialfilme1968-76』(2012)에는 < 생필름 >을 비롯해 <재생산> <625> <초상들 Portraits>(1970), 그리고 <머테리얼필름> 등 W+B 하인의 주요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또한 DVD에 포함된 소책자에는 W+B 하인에 대한 마크 시겔의 소개가 있는데, 본 글은 마크 시겔의 글을 참고하여 작성되었다.
< 노트북 >의 제작연도는 매체에 따라 상이하게 기록되어 있다. 1963년이 자주 눈에 띄고 1962년으로 표기된 경우도 있지만, 이 글에서는 1940년부터 1962년이라는 기록을 따른다. 이 또한 정확하지는 않다. 아담스 시트니는 <노트북>을 마리 멘켄이 영화 작업을 했던 1940년대 중반부터 1960년대 후반까지 완성된 작품으로, 그 시기를 대략적으로 기술하였다. <노트북>의 제작연도가 특히 불명확하지만, 멘켄의 작품들이 대체로 제작연도를 정확하게 표기하기가 어렵다. 그 이유는 일차적으로 멘켄이 어떤 계획을 가지고 일정한 기간 내에 이를 실현하는 방식으로 작업을 한 것이 아니라, 일상에서 주목을 끄는 순간들이나 대상들을 기록해두었다가 여러 조각들을 모아서 한 작품으로 편집하는 방식을 선호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1970년에 멘켄이 사망하기 직전, 그녀의 스튜디오에 홍수가 들어서 그나마 남아있던 기록들이 훼손되었기 때문에 작품에 관한 정보들도 상당히 부실한 편이다. 또한 멘켄은 작품의 최종본을 거의 만들지 않았고 첫 상영 이후에도 작품을 계속 수정했다. 멘켄의 작품들에 스크래치나 먼지가 많은 이유는 포지티브 필름으로 촬영한 이후 네거티브 프린트를 별도로 만들지 않고 영사기에 돌려서, 원본 필름 자체가 많이 손상되었기 때문이다. 위에서 나열한 단편적인 정보들로 미루어볼 때, 멘켄은 ‘작가’로서 ‘작품’을 만든다는 자의식이 거의 없었다고 할 수 있다. 멘켄의 작품들이 그녀의 생전에 널리 상영되어 주목을 끌었던 것도 아니고, 진지한 비평의 대상이 되었던 것도 아니기 때문에 멘켄과 관련된 주요 문서들은 그녀가 남긴 인터뷰나 그녀와의 일화를 떠올리는 친구들의 인터뷰들이 거의 대부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멘켄을 중요 작가로, < 노트북 >을 미국 실험영화사에서 주목해야 할 작품으로 꼽는 이유는 그녀에게 영향을 받았음을 스스로 적극적으로 밝히기를 주저하지 않는 친구들이 1960년대 이후 미국 실험영화의 양대 거목이라 할 수 있는 조나스 메카스와 스탠 브래키지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 친구들의 목록에는 그녀의 작품 제목에도 등장하는 이사무 노구치, 케네스 앵거, 앤디 워홀 등이 계속 추가될 수 있다. 이를테면 마리 멘켄은 불특정 다수인 관객과의 관계에서 규정되는 작가라기보다는 우정에 기초한 작가들의 공동체 안에서 정의될 수 있는 작가라고 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멘켄의 <노트북>을 조나스 메카스와 스탠 브래키지 그리고 공동체라는 관점에서 서술해보고자 한다. 이 각각의 요소들을 다시 나열하면, 일기영화(diary film), 신체적(somatic) 카메라, 그리고 그녀의 남편 윌러드 마스(Willard Maas)와 함께 했던 작가 집단인 그리폰(Gryphon)이다. < 노트북 >은 총 9개의 부분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 부분들을 만든 시기 순으로 나열한 것으로 보인다. 9개 부분들의 소제목은 ‘빗방울 Raindrops’[사진1], ‘신현 축일 Greek Epiphany’, ‘달 놀이Moonplay’, ‘흉내쟁이 Copycat’, ‘종이 자르기 Paper Cuts’, ‘전등들 Lights’[사진2], ‘밤-쓰기Night-Writing’, ‘알 The Egg’, ‘기타 등등 etcetcetc’이다. 이 중에서 앞의 세 부분은 흑백이고, ‘흉내쟁이’는 손으로 그린 애니메이션이며 나머지는 컬러이다. 부분들의 소제목을 보면 ‘빗방울’, ‘신현 축일’, ‘전등들’처럼 촬영한 대상들로 이름을 붙이거나, ‘달 놀이’, ‘종이 자르기’, ‘밤-쓰기’처럼 촬영한 대상과 자신이 수행한 행위가 결합된 제목들이 눈에 띈다. 놀이와 쓰기는 카메라를 흔드는 행위를 지시하고, 종이 자르기는 말 그대로 종이를 잘라서 종이조각들로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행위를 의미한다. <노트북>은 완성된 작품이라기보다는 습작들이 미완결인 채로 나열된 것처럼 보인다. ‘달 놀이’와 ‘전등들’ 부분은 각각 동일한 제목의 개별 작품들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노트북>은 마치 나는 이때 이러한 것들을 보았고, 그때 볼렉스(Bolex) 카메라를 이렇게 흔들어 보았거나 이런저런 기능을 써서 촬영해보았다는 정도 외에는 작품에서 읽어낼 수 있는 것이 많지 않다. [사진1] <노트북>의 ‘빗방울’ 부분 스틸 이미지 [사진2] <노트북>의 ‘전등들’ 부분 스틸 이미지 < 노트북 >이 아마추어의 습작과 같은 인상을 주는 이유는 하나의 통일된 의도나 주제, 혹은 구조 없이 일상에서 흔히 마주칠 수 있는 대상이나 사건이 우발적으로 기록되어 있고 우연하게 배치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형식에 준하는 문학 장르는 일기 혹은 에세이(앞으로 일기로만 표기)이다. 일기는 시나 소설과 같은 진지한 장르와는 달리 신변잡기적이고 주변적인 성격을 갖기 때문에 문학이라고 간주되어 오지 않았다. 특히 일기의 작가가 대부분 여성이었기 때문에, 일기는 타인에 대한 깊은 성찰과 거대한 이야기를 구성할 수 있는 능력을 결여한 여성만의 장르라는 비하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그러나 1960년대에 이르러 계급보다는 개인 속에서 정치적인 문제들을 발견하고 삶과 예술의 구분을 폐지하려는 분위기가 형성되면서, 일기는 문학 장르로 재평가를 받게 되었다. 일기가 한 개인의 유아론적인 진술들이 아니라, 주체가 형성되는 데 개입되는 요소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하여, 자기를 발견하고 혁신하는 실천적인 장르로 인식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분위기는 1960년대 문화 전반에 걸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소설가 자신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소설들이 증가하고, 자기 고백적인 시 양식으로서 일기와 거의 구별하기 힘든 시들이 발표되었다. 앨런 긴즈버그(Allen Ginsberg)의 「미국의 몰락 The Fall of America」(1965-71)과 로버트 로웰(Robert Lowell)의 「노트북 Notebook」(1967-68) 같은 시집들이 이러한 경향을 대표한다. 마리 멘켄은 일기 형식을 영화에 도입한 첫 작가로, < 노트북 >은 일기영화의 시작을 알리는 대표작으로 평가 받는다. 물론 일기 형식에 준하는 영화는 그 이전에도 찾을 수 있다. 만 레이는 1923년부터 파리에서 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일상의 사건들과 인물들을 기록하여 <홈 무비 Home Movies>(1938)[사진3]를 만든 바 있다. 또한 험프리 제닝스(Humphrey Jennings)는 제2차 세계 대전 막바지를 새로 태어난 아이를 위한 일기처럼 기록하고 구성한 다큐멘터리 <티모시를 위한 일기 A Diary for Timothy>(1946)를 제작하였다. 그러나 일기영화가 본격적으로 제작되기 시작한 것은 마리 멘켄 이후 1960년대부터였다. 멘켄뿐만 아니라 아말리 로스차일드(Amalie Rotschild), 캐롤리 슈니먼(Carolee Schneemann), 클라우디아 웨일(Claudia Weill)과 같은 여성 감독들이 일기영화를 만들었다. 1970년대에 이르러서는 일기영화가 북미 실험영화의 주요 특징 중의 하나로 나타나는데, 앤드류 노렌(Andrew Noren), 로버트 하우트(Robert Hout), 하워드 구텐플랜(Howard Guttenplan) 같은 작가들이 일기영화를 만들게 된다. [사진 3] <홈 무비>의 스틸 이미지 ( https://www.youtube.com/watch?v=Fl4U01zKI0I ) 멘켄 이후 일기영화를 만든 작가들이 다수 등장하였지만, 일기영화가 자신의 필모그래피를 관통하며 지금도 실천하고 있는 작가는 조나스 메카스이다. 메카스는 「빌리지 보이스 Village Voice」의 ‘무비 저널 Movie Journal’ 칼럼에서 멘켄을 자신의 영화적 스승으로 언급하기도 했었다. 메카스는 1962년 1월 4일 자 ‘무비 저널’에서 마리 멘켄의 < 노트북 >을 포함한 네 편의 작품을 보고 다음과 같이 평가했었다. 마리 멘켄의 작품은 산문(드라마, 에피소드, 스토리) 영화의 반대편에 있다. 시(poetry)를 내포하는 픽션 작품들은 있지만, 산문을 내포하는 좋은 시, 특히 좋은 서정시는 존재하지 않는다. 마리 멘켄은 서정 시인이다. 멘켄의 영화적 문장들, 그녀의 움직임들, 그녀의 리듬들의 구조는 시이다. 그녀는 현실을 시로 바꾼다. 시를 통해서 멘켄은 우리에게 현실의 미묘한 측면들을, 세계의 신비들을, 그녀의 영혼의 수수께끼를 드러내 준다. 멘켄과 메카스는 리투아니아계 미국인으로서 깊은 정서적 유대감을 갖고 있었다. 멘켄이 사망한 직후(멘켄이 죽고 4일 뒤에 그녀의 남편 윌러드 마스도 사망했다), 메카스는 1971년 1월 14일 자 ‘무비 저널’에 멘켄과 마스를 추모하는 글을 실었다. 이 글에서 메카스는 멘켄과 함께 했던 어느 시점을 다음과 같이 추억했다. 우리는 그녀(멘켄)가 엄마로부터 들어서 기억하고 있던 오래된 리투아니아 노래를 같이 부르곤 했다. 그 노래들은 매우 서정적이었다...우리가 같이 부르곤 했던 노래들의 일부는 꽃 정원(flower garden)과 그 정원을 가꾸는 어린 소녀에 관한 것이었다. 메카스는 1949년에 뉴욕에 도착했는데, 이때부터 1963년까지 촬영했던 푸티지들로 <로스트, 로스트, 로스트 Lost, Lost, Lost>(1976)를 만들었다. 이 작품은 고향을 상실한 비탄, 외로움, 향수와 같은 복잡한 감정들을 다루다가, 시와 영화 공동체를 발견하게 되면서 느꼈던 희열 등으로 전개된다. 이 작품의 초반부에서 비 내리는 장면[사진 4]은 멘켄의 < 노트북 > 중에서 ‘빗방울’ 부분의 인용으로 평가를 받는다. 또한 메카스가 만든 <월든 Walden>(1969)의 막간(interlude) 중의 하나는 그 제목이 ‘마리 멘켄을 위한 꽃들’이라고 붙여졌다. 이 제목은 메카스가 멘켄을 추모하며 언급했던 노래를 떠올리는 것이기도 하고, 멘켄이 만들었던 <정원을 언뜻 봄 Glimpse of the Garden>(1957)을 연상하는 것이기도 하다. 메카스의 작품에서 즐거운 순간들이나 친구들과의 우정과 자연을 예찬하는 장면들이 무작위로 나타나는 것처럼 보이는 특성은 멘켄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다(메카스의 <월든>는 필자의 연재 목록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한 설명은 뒤로 미룬다). [사진 4] <로스트, 로스트, 로스트> 초반부의 스틸 이미지 ‘신체적 카메라’는 아담스 시트니가 멘켄의 작품들을 압축하여 표현했던 용어이자, 멘켄이 브래키지에게 미쳤던 영향을 핵심적으로 지시하는 용어이다. 신체적 카메라는 서정영화(lyrical film)와도 통하는 개념이다. 시트니는 서정영화를 영화의 1인칭 시점 주인공으로서 카메라 뒤의 영화작가를 상정하는 영화로 정의했다. 다시 말하면, 영화에 작가가 등장하지는 않지만 작가가 카메라를 들고 찍음으로서 관객이 작가의 현존을 의식하게 되는 영화가 서정영화이다. 관객이 서정영화를 볼 때에는 작가가 보았던 시각적 대상을 보는 것뿐만 아니라, 작가가 그가 보았던 것에 어떻게 반응하는 지까지 함께 보게 된다. 서정영화에는 주인공이 없지만, 작가의 몸짓이 화면 자체의 움직임으로 관객에게 전달된다. 작가의 몸짓을 행위(action)라고 표현하면, 행위를 강조하는 경향은 미술에서 추상표현주의와 같고, 몸짓을 즉흥이라고 표현하면 음악에서 재즈와 같다. 멘켄의 < 노트북 >의 9개 부분은 모두 촬영 대상과 작가의 몸짓이 결합된 형태로 제시된다. ‘흉내쟁이’와 ‘종이 자르기’는 애니메이션으로서 그리는 행위와 종이를 자르는 행위가 전제되고, 나머지 부분들에서는 들고 찍기나 스톱 모션과 같이 카메라를 조작하는 행위가 화면의 움직임으로 나타난다. 이것이 시트니가 멘켄의 작품을 ‘신체적 카메라’로 함축해서 표현하는 이유이다. 브래키지는 「필름와이즈 Filmwise」에 실은 ‘제라드 말랑가에게 보내는 편지 Letter to Gerard Malanga’라는 글에서 자신이 멘켄에게 받은 영향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마리 멘켄이 내게 ‘열려라 참깨’와 같았던 것은 < 노구치에 관한 시각적 변주들 Visual Variations on Noguchi >이 카메라를 손으로 흔들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완벽하게 활용했던, 내가 본 첫 영화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장 콕토가 젊은 영화작가들에게 핸드-헬드 카메라의 자유를 기회로 삼으라고 했던 조언을 그 당시에 가장 순수하게 따랐던 제자이다...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마리가 기여한 것이 너무도 단순하다고 볼 수 있지만, 그것은 내게 하나의 보는(seeing) 방식 혹은 다수의 방식과 관련해서 영화의 실재 전체를 질문하기 시작하도록 했다. < 노구치의 시각적 변주들 >(1945)은 멘켄이 노구치의 스튜디오에서 그의 조각 작품들을 핸드-헬드 카메라로 찍은 장면들로 구성된 작품이다. 브래키지가 멘켄에게 받은 영향은 그의 표현대로 너무 단순해서, 손으로 들고 찍는 것뿐일 수 있다. 그러나 멘켄이 미친 영향의 실제적 의미는 본다는 것이 눈에만 국한된 시각적 봄이 아니라 신체적 행위라는 생각에서부터 파생될 수 있는 다양한 실천들에 있다. 브래키지의 작품 중에서 멘켄의 영향이 잘 드러나는 작품으로 <밤의 예감 Anticipation of the Night>(1958)[사진 5]이 일반적으로 뽑힌다. 이 작품에서는 < 노트북 > 중에서 ‘달 놀이’, ‘밤-쓰기’와 같은 부분에서 두드러지는 들고 찍기의 효과가 유사하게 발견된다. [사진 5] <밤의 예감>의 스틸 이미지 이제 마지막으로 검토가 남은 사항은 멘켄이 그녀의 남편 마스와 함께 만들었던 작가 공동체로서 그리폰이다. 이 사항은 미학적인 문제라기보다는 실천적인 문제일 수 있고 아니면 멘켄의 성품과 관련된 지엽적인 부분일 수 있다. 그러나 어쩌면 멘켄이 메카스나 브래키지에게 그토록 깊은 인상과 영향을 주었던 것은 미학적인 측면에서보다 그녀의 성품 혹은 작가적 태도에서부터 나오는 측면이 더 크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든다. 멘켄은 1910년 리투아니아 이민자의 가정에서 태어났고, 뉴욕 순수와 산업예술 학교(the New York School of Fine and Industrial Arts)와 예술학생연맹(the Art Students’ League)에서 회화를 공부했었다. 졸업 후, 추상회화 뮤지엄(the Museum of Non-objective Painting, 나중에 구겐하임 뮤지엄으로 재명명되었다)의 첫 번째 큐레이터였던 힐다 르베이(Hilda Rebay)의 비서로 일했다. 멘켄은 1937년에 야도 재단(Yaddo Foundation)에서 장학금을 받아 레지던시를 갔는데, 거기서 마스를 만나 같은 해에 결혼했다. 1942년에 멘켄과 마스는 미육군 통신대(Army Signal Corps)의 애니메이션 부서에 고용되었다. 여기서 그들은 그 당시 노먼 맥라렌의 동성 애인이었던 가이 글로버(Guy Glover)를 만났고, 그의 작업에 영향을 받아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멘켄과 마스는 1942년 습작으로 <코니 섬Coney Island>를 만들었고, 이듬해 그들의 두 번째 작품으로 < 몸의 지형 Geography of the Body >(1943)을 만들었다. 그리폰은 멘켄이 타임-라이프(Time-Life)에서 일할 당시에 받은 크리스마스 보너스로 1950년대 중반에 등록한 프로덕션 회사의 이름이다. 그러나 마스는 그의 회고록에서 그리폰의 시작은 맥라렌이 뉴욕에 머물렀던 194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언급했었다. 그리폰이라는 이름이 그 당시에도 쓰였는지 확실하지는 않으나, 작가 집단으로서 활동하려는 멘켄과 마스의 생각은 맥라렌이 뉴욕에 머물렀던 1940년 즈음에 그의 영향을 받아서 형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맥라렌은 영국에서 일하다가 1940년에 뉴욕으로 이주했고, 힐다 르베이를 찾아가서 제작 지원을 받았다. 이때 멘켄과 맥라렌은 만나서 친구가 되었고, 마스도 함께 어울렸다. 마스의 회고록을 보면, 그 행간에서 마스와 맥라렌이 한때 동성 연인 관계로 지냈다는 암시를 받을 수 있다. 브래키지가 쓴 ‘마리 멘켄’이라는 글에는 일반적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마스와 멘켄의 관계가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마스는 멘켄과 결혼한 직후 자신이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깨달았고, 이후 여러 남성 작가들과 연인 관계를 맺었지만 멘켄은 죽을 때까지 마스와 함께 했다. 멘켄이 사망한 후 4일 뒤에 마스 역시 세상을 떠났다는 것도 드라마적이다. 브래키지는 이 사실을 마스가 멘켄에게 해준 유일하게 로맨틱한 일이라고 평가했다. 브래키지는 마스를 예술가라는 자의식에 가득 찬 이기적인 사람으로 묘사하는 반면, 멘켄을 사랑과 우정으로 충만했고, 놀라운 직관을 가졌던 사람으로 기억했다. 브룩클린 하이츠에 있던 마스와 멘켄의 아파트에는 수많은 작가들이 머물기도 했고, 자주 들락거리기도 했다. 그 작가들의 목록에는 브래키지 외에도 케네스 앵거, 그레고리 마코폴로스, 로버트 휘트먼, 스탠 반더빅, 앤디 워홀 등이 포함된다. 마스와 멘켄의 아파트가 우정만 가득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곳에 한때 머물렀던 케네스 앵거는 그들의 주말이 얼마나 자주 전쟁처럼 끝났었는지를 언급했던 적이 있다. 마스와 멘켄이 주축이 된 그리폰은 단순히 작가들과 교류하거나, 영화 장비를 공유하고 상영회를 조직하는 수준을 넘어선 것이었다. 그리폰은 일종의 비관습적인 삶을 조직화하려는 확장된 시도로서, 영화에 관심을 가졌던 다양한 작가들이 상호 간에 영향을 주고받아서 그 에너지를 새로운 영화 만들기로 향하게 하고자 했던 의도적인 공동체였다. 일상과 예술의 구분을 거부하고, 관습에 벗어나는 삶을 실천함으로써 새로운 예술적 형식을 도모하려고 했던 분위기는 2차 세계 대전 이후 뉴욕 아방가르드에서, 특히 비트 세대 작가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이었다. 그리폰은 영화 작가들의 공동체라는 이상을 향한 과도기적 특성을 보여주는데, 이러한 이상이 실험영화 제작과 상영의 현실적 토대로 자리 잡게 된 것은 메카스가 주도한 뉴욕작가조합(New York Film-makers’ Coop) 이후라고 할 수 있다. 멘켄이 메카스와 브래키지에게 미친 실제적인 영향은 어쩌면 영화와 일상을 구분하지 않고 일상을 혁신하는 실천이 새로운 영화적 실천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발상에 있을지도 모른다. 자신의 영화이론을 설명하면서 일찍이 일기와 영화를 비교했던 세자르 자바티니(Cesare Zavattini)는 “일기와 영화는 존재의 윤곽을 확대하는 스크린을 통해서 관찰될 수 있는 존재의 비가시적인 구성요소들을 재현하고, 일기는 현실을 지시하며 즉각적인 분석을 생산하는 카메라와 같은 기능을 수행한다”고 말한 바 있다. 그는 생각과 그 생각을 영화적으로 구체화하는 과정 사이의 간극을 제거하기 위해서 카메라의 즉각성과 생생함을 옹호하였다. 자바티니는 “나는 일기가 영화의 가장 완벽하고 진정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하며, “우리는 현실에 굳건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 노트북 >은 생각과 영화 찍기 사이의 시간적 간극을 무시하고 친구들과 함께 만들고 보는 영화의 즐거움을, 예술가라는 자의식이 부재한 아마추어의 자유로움을 가장 단순한 방식으로 보여주고 있다. ※ 이 글에서 언급된 영화들과 마리 멘켄에 관한 사실들은 다음의 책과 논문들을 참고하였다. P. Adams Sitney, Visionary Film: the American Avant-Garde, 1943-2000, Oxford University Press, 2002. P. Adams Sitney, Eyes Upside Down: Visionary Filmmakers and the Heritage of Emerson, Oxford University Press, 2008. David E. James(ed.), To Free the Cinema: Jonas Mekas & the New York Underground,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92. Jonas Mekas and Gregory Smulewicz-zucker(ed.), Movie Journal: the Rise of the New American Cinema, 1959-1971, Columbia University Press, 2016. Stan Brakhage, Film at Wit’s End: Eight Avant-garde Filmmakers, McPherson, 1991. Juan A. Suarez, “Myth, Matter, Queerness: the Cinema of Willard Maas, Marie Menken, and the Gryphon Group, 1943-1969,” Grey Room 36, Summer 2009, pp.58-87.
1960년 5월 어느 날, 오스트리아 빈. 당시 26세의 청년이었던 피터 쿠벨카는 300석 규모의 상영관을 빌려 자신이 새로 완성한 영화의 시사회를 마련했다. 작품 제목은 < 아르눌프 라이너 >였고, 당시 오스트리아 미술계에서 주목받고 있던 젊은 예술가이자 쿠벨카의 친구기도 했던 아르눌프 라이너 본인을 비롯해 250명에 달하는 초대 손님들이 극장 안을 메웠다. 하지만 정작 영화가 시작되고 나니 관람객들은 하나둘씩 자리를 뜨기 시작해 상영이 끝났을 때는 고작 12명이 남아 있었다. 영화의 상영시간은 정확히 6분 24초였다. 라이너와 그의 회화 작품들을 담은 촬영본은 아예 영화에 활용조차 되지 않았고, 자신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보게 될 것이라 기대했을 라이너는, 쿠벨카의 증언에 따르면 “침울한 표정으로 의자에 기대앉아 있었지만 끝까지 남아 있기는 했다”고 한다. 이상은 쿠벨카가 마크 웨버와의 인터뷰에서 묘사한 <아르눌프 라이너> 첫 상영회의 모습이다. <아르눌프 라이너>가 당대의 가장 중요한 실험영화 가운데 하나로 재발견된 것은, 1960년대 중반 조나스 메카스 등의 주선으로 쿠벨카의 영화들이 미국 예술가들에게 소개되면서부터였다. 과연 < 아르눌프 라이너 >는 어떤 영화이기에 그처럼 격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던 것일까? 쿠벨카는 자신의 영화가 필름 이외의 다른 매체로 전환되는 것을 절대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그가 만든 여덟 편의 영화는 여전히 DVD나 블루레이 등으로 출시되지 않고 있다. ‘계측영화’(metric film) - 조나스 메카스와의 인터뷰에서 쿠벨카는 이 용어가 미터법을 뜻하는 독일어 표현 ‘Metrisches System’에서 차용한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그 의도를 살려 여기서는 ‘계측영화’라 옮겼다. - 로 알려진 그의 대표작 대부분(<아데바르> <슈베하터> <아르눌프 라이너>)은 오늘날 유튜브 등의 온라인 플랫폼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지만, 조악한 화질의 동영상을 통해 그의 작품이 주는 감각적인 충격을 고스란히 감지하기란 불가능한 일이라 생각된다. 하지만 아래의 사진은 <아르눌프 라이너>라는 작품과 관련해 적어도 그 구조적 특징만은 제대로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아르눌프 라이너>의 35mm 필름 프린트 전체가 배열되어 있는 벽 앞에 서 있는 쿠벨카의 모습이다. 사진을 주의 깊게 들여다보면, 이 벽에는 가로 64단과 세로 144단으로 총 9,216개의 프레임이 왼쪽 상단 모서리에서 오른쪽 하단 모서리까지 빼곡히 배열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35mm 필름의 정상 영사속도는 초당 24프레임이므로 이 벽에 배열된 필름을 영사하는 데 소요되는 시간은 총 384초, 즉 6분 24초라는 계산이 나온다. 또한 벽에 배열된 프레임들은 모두 흑색 아니면 백색(정확히 말하자면 투명)으로만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이 필름을 영사하게 되면 스크린 상에는 빛과 어둠이 교차되는 광경 이외에는 아무런 이미지도 떠오르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이 영화를 ‘깜빡임 영화’(flicker film)라 부르기도 한다.) 사운드트랙에 관해 말하자면, 잡음 아니면 전적인 무음 상태로만 구성되어 있다. <아르눌프 라이너>는 암흑과 (모든 파장의 빛을 포괄하는) 백색광, 무음과 (모든 주파수의 소리를 포괄하는) 백색잡음, 이렇게 영화의 기본이 되는 네 가지 뼈대만으로 이루어진 작품인 것이다. 더불어 쿠벨카의 계측영화는 영화란 (모종의 이미지가 담긴 ‘사진’이 아니라) 스틸(still)이 연속적으로 영사되는 것이라고 보는 그의 입장을 무척이나 과격한 방식으로 드러낸 작품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는 숏이 아니라 프레임이야말로 영화적 분절(articulation)의 최소단위라는 입장(“영화는 프레임 사이에서 말한다.”)을 줄곧 견지해 왔다. 그에 따르면 통상적인 영화는 프레임과 프레임 사이의 분절을 보이지 않게 하면서 숏과 숏 사이의 분절을 통해서만 의미를 만드는 데 집중한다. 말하자면 세상의 ‘거의’ 모든 영화는 프레임들 간의 ‘약한 분절’(weak articulation)에 기초한 숏들만을 활용한다. 차이가 거의 드러나지 않지만 미묘하게 변화하는 이미지들이 담긴 일련의 프레임들이 일정 시간 동안 연속적으로 영사되면서 움직임의 인상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쿠벨카의 용어법을 따르자면, 가장 약한 분절은 연속되는 프레임들에 담긴 이미지들이 동일한 경우, 즉 우리가 통상 ‘정지화면’이라 부르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된다.) 대부분의 영화에서 ‘강한 분절’(strong articulation)이 나타나는 것은 대개 숏과 숏이 전환되는 경우에 국한된다. 반면 무척이나 짧은 간격으로 이질적인 프레임들이 이어지는, 즉 빈번하게 강한 분절이 나타나는 영화를 떠올려 보자. 이때 우리는 스크린 상에서 ‘깜빡임’ 효과를 보게 될 것이며 이미지의 내용보다는 시각적 자극 자체에 보다 민감해질 것이다. <아르눌프 라이너>보다 2년 앞서 발표된 쿠벨카의 또 다른 계측영화인 <슈베하터>의 35mm 프린트 가운데 일부를 찍은 아래 사진을 보라. 강한 분절을 두드러지게 내세우는 영화적 방법론이 쿠벨카에 의해 처음으로 시도되었다고 주장한다면 사실을 왜곡하는 일이 될 것이다. (쿠벨카에 대해 논하는 평자들은 종종 이 점을 제대로 짚고 넘어가지 않아 오해의 여지를 남겨두곤 한다.) 영화사를 한참 거슬러 올라가, 1920년대에 이미 아벨 강스나 장 엡슈타인 같은 프랑스 인상주의 영화감독들은 1~2프레임으로 이루어진 짧은 숏들을 활용한 운율적 몽타주의 힘을 빼어나게 보여준 바 있다. 지극히 감정적인 멜로드라마이면서 혁신적인 영화적 효과를 대담하게 구사한 강스의 <바퀴 La Roue>(1923)는 당대의 아방가르드 영화작가들에게 심대한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이 영화는 ‘철로의 백장미’라는 제목으로 1920년대 식민지 조선에서도 개봉되어 호평을 받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쿠벨카의 계측영화들의 새로운 점은 강한 분절을 과감하게 노출했다는 사실 자체보다는 영화적 이미지의 내용을 최소화하면서 고도로 형식적으로 강한 분절을 활용할 수 있을 가능성을 보여준 데 있었다고 말해야 옳겠다. 무성영화시기부터 1950년대까지 아방가르드 영화의 계보가 거칠게 말하자면 시적 흐름과 추상적 흐름 사이에서 진동하며 전개되었다면, 쿠벨카식 계측영화의 정점에 자리한 <아르눌프 라이너>는 전적으로 프레임 단위에서 영화를 사고하는 한편 모종의 형식적 규칙을 고안해 전체 영화에 적용하는 구조적 흐름으로 향하는 길을 열었던 것이다. <아르눌프 라이너>가 “모더니스트 영화의 지주(支柱) 가운데 하나”(스테판 그리세만)로까지 평가되곤 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다만 <아르눌프 라이너>를 본 연재에서 나중에 다루게 될 ‘구조영화’들의 선구로 볼 수 있을지의 여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쿠벨카 자신은 그렇게 주장하고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쿠벨카가 <아르눌프 라이너>에서 활용한 구조적 형식은 어떤 것이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실로 그는 엄청나게 꼼꼼한 계획, ‘악보’라 해도 좋을 작업노트에 따라 그의 계측영화들을 만들었다. (하지만 쿠벨카는 그의 영화에 대한 냉담한 반응에 실망한 나머지 1962년에 거의 모든 작업노트들을 파기해 버렸고, 이 때문에 <슈베하터>와 같은 작품의 정확한 구조는 아직까지도 연구자들에 의해 해명되지 않고 있을 정도다. 저명한 영화학자인 애덤스 시트니는 <슈베하터>에서 해명되지 않는 부분은 사실 애초부터 쿠벨카의 주관적인 결정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었으리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아르눌프 라이너>는 2, 4, 6, 8, 9, 12, 16, 18, 24, 36, 48, 72, 96, 144, 192 그리고 288개의 프레임들에 기초한 시청각적 ‘주제’ 혹은 ‘악구’로 이루어진 작품이다. 주제를 이루는 프레임의 수는 임의로 결정된 것이 아니라 산술적 조작을 통해 쿠벨카가 ‘기저 리듬’(ground rhythm)이라 부르는 (영화에서 1초에 해당하는) 프레임 수인 24와 관련될 수 있는 수들에만 엄격하게 국한되어 있다. 이 열여섯 종류의 프레임 수는 다음과 같은 절차를 따라 얻어낼 수 있다. (이는 어디까지나 내가 생각한 방식이며 사람에 따라 다른 절차를 통해 동일한 결과를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1) 24보다 작은 수들 가운데 서로 곱해서 24가 될 수 있는 수들만을 고른다. 그러면 2, 3, 4, 6, 8, 12 총 여섯 개의 수를 얻게 된다. (세 개의 연산: 2×12=24, 3×8=24, 4×6=24) (2) (1)에서 얻은 여섯 개의 수 각각에 짝수인 2를 곱하거나 홀수인 3을 곱한다. 그 결과로 얻은 수들 가운데 (1)에서 얻은 수들과 중복되지 않는 수들을 고른다. 그러면 우리는 9, 16, 18, 24, 36 총 다섯 개의 수를 추가로 얻게 된다. (3) (1)에서 얻은 여섯 개의 수 각각에 24를 곱한다. 그럼 우리는 48, 72, 96, 144, 192, 288 총 여섯 개의 수를 추가로 얻게 된다. (4) 우리는 이제 2, 3, 4, 6, 8, 9, 12, 16, 18, 24, 36, 48, 72, 96, 144, 192, 288 총 열일곱 개의 수를 얻었다. 하지만 쿠벨카에게 있어서 17은 영사기의 영사속도, 즉 기저 리듬과 조화되지 않는 수이다. 따라서 이 수들 가운데 3을 제외시키고 열여섯 개의 수만을 남긴다. 3은 목록에서 제외되더라도 이상의 수들을 산출한 연산과정에 가장 깊숙이 개입한 ‘잠재적’ 수로 남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래는 쿠벨카가 <아르눌프 라이너> 작업을 위해 작성했던 ‘악보’이다. 이번에는 이해를 돕기 위해 악보의 특정 부분과 필름 프린트에서 그에 해당하는 부분을 캡처해 위아래로 배치해 보았다. 악보 상의 검은 십자표시는 흑색 프레임, 붉은 십자표시는 백색 프레임에 해당한다. 각각의 십자표시 아래에는 작은 줄이 함께 표기되어 있는데 검은 줄은 무음, 붉은 줄은 백색소음에 해당한다. 이 사진을 통해서는 필름의 사운드트랙 부분은 알아보기 어렵지만, 각각의 십자표시와 프레임이 정확히 대응한다는 것만은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가령, 앞서 살펴본 열여섯 종류의 프레임 수 가운데 최소에 해당하는 2프레임에 기초한 ‘주제’ 또는 ‘악구’의 조합을 떠올려 보자. 흑색과 백색, 소음과 무음의 네 개 요소를 통해 네 가지 다른 조합(흑색/소음, 흑색/무음, 백색/소음, 백색/무음)의 프레임이 가능하므로, 2프레임짜리 주제는 열여섯 가지 다른 방식으로 구성할 수 있다. 실제로 <아르눌프 라이너>에는 열여섯 가지의 2프레임짜리 주제가 모두 활용되고 있다. (4프레임짜리 이상의 주제에 대한 계산은 생략하기로 한다. 경우의 수가 너무 커서 모두 활용하기 힘든 경우, 쿠벨카는 몇 개의 주제를 선별적으로 골라 활용했다는 점만 밝혀둔다.) 쿠벨카는 <아르눌프 라이너> 전체를 총 16개의 섹션으로 나누었는데 각각의 섹션은 576프레임으로 이루어져 있다. 576은 영화의 기저 리듬에 해당하는 수인 24를 제곱(24×24)해서 얻은 것이다. 서두에서 이 영화의 총 프레임 수는 9,216개라고 밝힌 바 있는데, 이는 섹션의 수(16)와 각 섹션의 프레임 수(576)를 곱한 것이다. 쿠벨카가 운용하고 있는 수적 ‘게임’의 목록을 기술하는 일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계속 이어질 수 있겠지만 이쯤에서 정리하기로 하자. 여기까지 읽어 온 독자라면 분명 다음과 같은 의문을 머리에 떠올렸을 것이다. <아르눌프 라이너>가 철저하게 지적이고 형식적인 방식으로 구성된 영화임은 알겠지만, 정작 영화를 보고 있는 동안에는 그 구조를 전혀 지각할 수 없는데, 그렇다면 이 모든 작업 과정이 대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이에 대해 쿠벨카 자신은 항상 변함없는 답변을 들려주곤 했다. 자신이 바라는 것은 자연현상이 우리에게 전해 주는 감각과 유사한 종류의 감각을 전해주는 영화라고 말이다. 우리는 자연현상이 모종의 법칙과 원리에 따라 일어나는 것이라는 걸 알고 있지만 실제의 자연을 마주하는 순간에 그러한 법칙과 원리를 지각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그러한 무지로 인해 자연을 감각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쿠벨카의 계측영화들을 보면서 즉각적으로 그것을 구성하는 원리를 지각하지는 못하지만 그 영화들을 통해 형성되는 감각의 장에 온전히 몸을 내맡길 수는 있다. 이것이야말로 말 그대로 천둥을 동반한 번개와도 같은 작품인 <아르눌프 라이너>를 맞이하는 최선의 방식일 것이다. ※ <아르눌프 라이너>의 구조와 방법론을 개괄하는 데 초점을 맞춘 이 글에서는, 쿠벨카의 다른 계측영화들 및 다소 성격을 달리하는 그의 영화들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았다. 또한 ‘탈전문화’를 표방하며 영화 이외의 예술은 물론이고 요리에 이르기까지 관심을 기울여 온 그의 이력에 대해서도 기술하지 않았다. 쿠벨카의 작품세계 전반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면 다음의 자료들을 찾아보길 권한다. 쿠벨카는 2005년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마련한 특별전 참석차 방한한 바 있는데, 당시 영화제에서는 『피터 쿠벨카: 영화의 본질』이라는 제목의 50여 페이지짜리 소책자를 발간한 바 있다. 이 소책자에는 (쿠벨카 자신이 공동설립자 가운데 한 명인) 오스트리아필름뮤지엄 관장 알렉산더 호바트와 연세대학교의 서현석 교수가 쓴 작가론을 비롯해 인터뷰와 작품별 리뷰 등이 수록되어 있다. 국역본이 나와 있는 애덤스 시트니의 기념비적 저술 『시각영화 Visionary Film: The American Avant-Garde, 1943~2000』에서도 <아르눌프 라이너>를 비롯한 쿠벨카의 작품 대부분이 다뤄지고 있어 참고할 수 있다. 영문으로 된 자료 가운데서는, 1966년 10월 1일 조나스 메카스가 쿠벨카를 인터뷰한 기록과, 오스트리아 실험영화작가로 쿠벨카에게서 큰 영향을 받은 인물인 피터 체르카스키가 쓴 「쿠벨카에 따른 세계 The World According to Kubelka」를 추천한다. 메카스의 쿠벨카 인터뷰는 피터 지달이 편집한 『구조영화 선집 Structural Film Anthology』(1978)에 수록되어 있으며, 「쿠벨카에 따른 세계」는 체르카스키 자신이 편집한 『틀이 없는 영화: 오스트리아 아방가르드 영화의 역사 Film Unframed: A History of Austrian Avant-Garde Cinema』(2012)에 수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