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동하다
- 감독
- 박혜준, 윤가영
- 제작년도
- 2018
- 출연
- 김유민, 김하진, 이서윤, 서윤아, 최예원
※ 이 글은 2022년 10월 11일(화)부터 19일(수)까지 한국영상자료원 시네마테크KOFA에서 진행되는 시네마테크KOFA 기획전 ‘미완의 사가: 아오야마 신지(1964-2022) 추모전’과 연계한 기획입니다. 기획전에 대한 정보는 아래 링크에서 찾아보실 수 있습니다. https://www.koreafilm.or.kr/cinematheque/programs/PI_01428 아직 건강했던 즈음의 모습이나 목소리의 억양 등을 부족하나마 기억에 남겨두고 싶은 생각에 고인 화장을 한 채로 말도 없이 누워 있는 아오야마 신지--그건 터무니없이 아름다운 표정이었다고 후에 들었다--의 마지막 모습을 접하는 등의 일은 이 서글픈 늙은이에게는 도저히 견딜 수 없을 것 같았기에, 그 마음을 배우자인 도요타 마호에게 전화로 알릴 수밖에 없었다. 그때 수화기 너머로 다부지게 대응하는 마호의 씩씩함에는 그저 눈물을 쏟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아오야마 신지의 장례식에 참석하는 것을 스스로 금할 수밖에 없었던 노령의 나는 그 시각, 식이 행해지고 있을 공간을 생각하면서 어느 일간지 덕분에 영화작가로서의 그의 특이한 매력과 생각지도 못한 훌륭함을 이것저것 쓰고 있었지만, 쌓이는 생각과 그것을 전하려는 말이 신문 특유의 행수와 글자수의 제한에 막혀 마냥 공전할 수밖에 없었고, 생각처럼 글이 잘 진행될 리도 없었다. 그리하여 그날도 끝날 무렵에는 역시 피곤한 나머지 축 늘어진 채 일하던 책상에서 벗어나 소파로 도망쳐, 담배를 물어야 할지 아니면 TV 수상기를 향해 리모컨 버튼을 눌러야 할지 잠시 고민한 끝에, 결국 아마도 태생적인 나태함 때문일 거라고 생각되지만, 이렇다 할 확실한 이유도 없이 심야 흡연과 심야 TV 화면 점등을 거의 동시에 시작하고 말았다. 그러자 작은 화면에는 뭔가 돌계단 같은 경사진 공간에 서 있다가 앉아 있다가 하는 남녀가 비쳤는데, 아무래도 연속극의 마지막회스러운 그 화면 구도가 하나하나 완벽하게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심야의 이런 종류의 프로그램치고는 극히 드문 일이지만 이것은 숏을 찍을 수 있는 감독의 작품이구나 싶어 묘한 흥분을 느끼면서, 이야기의 줄거리도 작중 인물들의 관계도 전혀 모른 채 뜻하지 않게 끝까지 지켜보았다. 그 화면의 연쇄에는 어딘지 모르게 아오야마 신지적인 부분도 있어, 도대체 누가 이런 드라마를 찍었는지 궁금증이 커졌고, 마지막에 흐르는 캐스트와 스태프 이름의 연쇄를 눈여겨보다 보니, <시쥬카라>(シジュウカラ)라고 하는 제목인 것 같은 그 드라마의 연출가 이름은 어떻게 읽어야 할지 도무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大九明子’(오오쿠 아키코)라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런데 그 이름은 그날 오후 집에 도착한 단행본 『레오스 카락스 – 영화를 떠도는 사람』(필름아트사, 2022)의 목차에서도 봤던 이름이어서 그 사실에 새삼 놀랐고, 발행사의 편집자인 다나카 류스케 씨에게 메일로 문의했더니, 그 사람은 영화 < 제멋대로 떨고 있어 >(2017) 등을 통해 관객을 매료시킨 여성감독이라고 알려줘서, 나 자신의 무지--그것을 나이 탓이라고 말하진 않을 것이다--를 몹시 부끄러워하면서, 바로 그다음 날 아침부터 오오쿠 아키코 감독과 메일 교환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그 이메일 교환을 통해 감동을 받고, 더불어 알게 된 것은 <시쥬카라>의 연출가가 영화미학교 1기 수료생으로 아오야마 신지를 스승으로 추앙했다는 사실에 다름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아오야마 신지의 장례식 날 심야에 완전한 우연으로, 아오야마 세미나 출신자가 연출한 ‘양질’이라고 하는 말에는 도저히 만족할 수 없는 ‘극상’의 텔레비전 드라마에 마음이 깊이 움직여 버렸기 때문에, 그것은 마치 아오야마 자신이 그 명함--그런 것을 가지고 있었는지 어떤지는 알 길이 없지만--을 곁들여, 이 여성 감독을 나에게 소개해준 것이라고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그녀의 작품 DVD를 그 자리에서 즉시 구입한 것은 물론이다. 앞서 언급한 『레오스 카락스 – 영화를 떠도는 사람』에는 아오야마 신지 또한 마치야마 히로미(町山広美)와의 대담 「영화의 틀은 이미 사라졌다」(映画の箍はすでに外れている)를 실었기 때문에, 오오쿠 아키코 감독은 자신이 쓴 「레오스 카락스 감독의 특별 강의」가 스승 아오야마 신지에게 읽히게 될지도 몰라 멋쩍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녀의 스승인 아오야마 신지의 서거로 인해 그 기회는 영원히 상실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거의 불합리하게 우리들의 곁을 떠난 아오야마 신지는, 말로 하지는 않았으나 오오쿠 아키코가 만든 탁월한 숏의 연쇄를 마치 의도하지 않은 유언처럼 나에게 알려준 것이 되었으므로, ‘아오야마 신지, 고맙다’라고 심야에 고독하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이는 이 후기 고령자에게는 너무나도 사치스러운 선물이었다. 아오야마 신지는 릿쿄대학 시절의 나의 제자라고 되어 있다. 그것은 확실히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그의 형뻘인 구로사와 기요시나 만다 구니토시 등의 세대처럼 그들이 만든 8㎜ 필름 작품을 수업 중에 상영하거나, 찻집으로 자리를 옮겨 계속해서 영화 얘기를 하고, 그 후에도 친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격의 없는 사이는 아니었다. 그것은 그때 나 자신이 릿쿄대학의 교사직을 이미 그만두고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비상근강사로 강의를 하고 있었다는 제도적인 문제와도 무관하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아오야마 신지라는 이름은 강하게 의식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얼굴을 인식한 것은 훨씬 뒤의 일에 지나지 않는다. 아테네 프랑세에서 열린 다니엘 슈미트 작품 상영회 때, 그의 조감독이었던 아오야마 신지로부터 조용히 인사를 받은 적이 있다. 그것이 풍성한 장발을 어깨에 휘날리고 있던 그의 얼굴을 인식한 첫 번째 기회였다고 생각한다. 그의 이름을 특별히 의식하고 있었던 것은 그가 문학부 1학년이었을 때 쓴 학기말 리포트가 무척 뛰어났기 때문이었다. 이탈리아 영화에 대한 소론이었지만, ‘지금까지 내가 가장 두려워했던 영화의 “눈”은 오즈 야스지로의 그것이었다’라고 쓰기 시작해, ‘그 따뜻함이 두렵고, 그 다정함이 공포를 증폭시키는 것이다’라고 끝맺었듯이, 그 ‘따뜻함’과 ‘두려움’, 그리고 ‘다정함’과 ‘공포’와의 변증법적 기술(記述)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을, 대학 1학년 후기의 리포트이기 때문에 갓 스무 살이 된 젊은이가 아주 자연스럽게 해내고 있는 것에, 교사로서의 여유를 넘어선 두려움을 느낀 것이다. 대부분의 리포트는 거의 처분해 버렸는데, 〈a〉보다도 훨씬 뛰어난 〈A〉라는 평가가 기록되어 있는 그 짧은 글이 아직도 수중에 남아 있는 것은, 이 ‘아오야마 신지’라고 하는 이름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강한 의지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그는 뛰어난 글쟁이이기도 했다. 그것은 걸작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유레카>(2000)의 소설판을 통해, 누군가가 쓴 『백작부인』 같은 것보다도 15년 정도 전에 이미 미시마유키오상을 수상한 것에서 엿볼 수 있음에 틀림없다. 또 그것과는 별개로, 예를 들면 근저인 『다카라가이케의 가라앉지 않는 거북--한 영화 작가의 일기 2016-2020』(boid, 2022)의 어디라도 좋은 단 한 페이지를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아오야마의 글재주는 누가 봐도 확실한 것이다. 또한 그는 뛰어난 비평가였으며 그 비평적 눈의 선명함과 강렬함은 이 책의 곳곳에서 느낄 수 있다. 영화작가 아오야마 신지의 죽음, 그리고 소설가로서의 아오야마 신지의 죽음은 현대 일본의 가장 뛰어난 영화평론가의 죽음 그 자체도 의미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의 비평가로서의 측면은 구로사와 기요시와 나와의 공저 『영화장화』(리틀모어, 2011)에서의 긴 시간에 걸친 토론을 통해서 매번 느끼고 있던 것에 다름이 아니며, 그 부정하기 어려운 현실은 이미 『아오야마 신지와 아베 가즈시게와 나카하라 마사야의 시네콘!』(리틀모어, 2004) 등을 통해서도 충분할 정도로 감지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는 단순히 영화를 잘 찍는 감독에 그치지 않고, 뛰어난 언어로 영화를 말할 수 있는 일본에서도 극히 드문 비평가였던 것이다. 그것은 앞서 언급한 『레오스 카락스 – 영화를 떠도는 사람』의 마치야마 히로미와의 대담에서, 마치야마 히로미가 언급한 칼 드레이어의 <게르투르드>(1964)를 놓고 “현대영화의 기선을 잡은 <게르투르드>는 누구에게나 넘어야 할 ‘영봉’임에는 틀림없다”면서도 보다 현대성이 강한 <아네트> 같은 영화는 “<게르투르드>의 엄격한 가치 기준으로 따지면, 오히려 그 경지에서의 머뭇거림을 그리는 영화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도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을 상기하면서, 이 같은 정확하기 짝이 없는 가치판단을 내세울 수 있는 비평가가 지금 몇 명 있는지, 적이 염려스러운 생각이 들지 않는 것도 아니다. 아오야마 신지와는 2월 하순까지 이메일로 이런저런 말을 주고받는 사이였다. 신경 써서 보내준, 걸작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 구름 위에 살다 >(2020)를 아내와 나란히 보면서 소파에 몸을 맡기는 다베 미카코의 몸놀림이 터무니없이 아름답다고 감탄하던 아내의 반응을 전하자 아오야마 신지는 순순히 기뻐해줬다. 말할 것도 없겠지만, 이 추모글을 쓰게 되면서 아오야마 신지가 찍은 몇 편의 작품을 DVD로 다시 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극히 일부를 보는 것만으로 눈물이 왈칵 쏟아지기 때문에, 전부 도중에 보는 것을 그만뒀다. 예를 들면, < 헬프리스 >(1996)에 몇 번인가 삽입된 기타큐슈의 어떤 공장의 무인 숏. 그것을 보고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는 것은, 그것이 아름답기 때문이 전혀 아니다. 또 이야기에 어울리는 그 숏의 적확한 삽입이 눈물을 자아내는 것도 아니다. 그 피사체를 향해야 할 몇 개의 앵글 중에서, 이것 하나밖에 없다고 하는 적확하기 짝이 없는 카메라의 위치를 아오야마 신지가 선택하고 있다고 하는 그 절대적인 올바름이, 눈물을 자아내는 것이다. 그러한 점으로부터, 내가 아오야마 신지의 ‘눈’을 깊게 신뢰하게 된 계기인 < 셀레브레이트 시네마 101 >(1996)을 다시 보려고 했지만, 그것은 VHS 테이프로밖에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랜만에 두려워하는 그 예스러운 장치에 낡은 테이프를 삽입했더니 갑자기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기묘한 소리가 기계로부터 흘러나오며 어느 버튼을 눌러도 움직이지 않게 되어 버렸다. 테이프를 꺼내려 해도 금속제 뚜껑이 닫힌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리하여, 그때까지는 간신히 기능하고 있었던—사실 『존 포드론』의 집필 때문에 그의 TV 작품을 보기 위해서 몇 번이나 사용하고 있었다— 시대에 뒤떨어진 이 기재는, 아오야마 신지 때문에 기능 부전에 빠져 버렸으니, 부디 책임을 져달라고 말하고 싶은 바다. 다행히도 지금은 VHS로 봐야 할 작품이라곤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아오야마 신지 이 사람아’라고 호소하지 않을 수 없다. 자네는 우리 집의 낡은 VHS 재생장치를 철저하게 파괴해 버렸다네. 얼마나 밉살스러운 남자인가. 하기야 『다카라가이케의 가라앉지 않는 거북』의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아오야마 신지의 비평적 선명함과 강렬함이 다소 무뎌지는 순간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수시로 그렇게 지명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 나 자신 때문에 문제가 되고 있는 순간이다. 2018년 월드컵 때 그와 메일을 교환하다가 모드리치를 남군 장교에 비유한 것은 틀림없이 바로 나였다. 실제로 아오야마 신지는 그 비유를 보고 이렇게 썼다. ‘잠이 부족한 나날에 대해 보답받았다고 할까, 내가 보고 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확실히 가르쳐 주셔서 기분이 상쾌해졌다. 그렇다. 나는 모드리치 덕분에 무의식적으로 남북전쟁을 그리는 포드와 페킨파의 서부극을 월드컵에 겹쳐보고 있었던 것이다. 매우 납득이 가는 해설’(p.189)이라고 반응하고 있다. 맹세코 말하지만, 그렇게 쓴 나의 의도를 이해해 주는 것은 이 좁지 않은 세계에서도 아오야마 신지 한 명밖에 없을 거라고 확신하고 있다. 그것은 말하자면 그에 대한 은밀한 연애편지 같은 것이었다고 해도 좋다. 하지만 그 일을 자랑하기보다는 오히려 부끄러움을 느꼈다고 말하는 것이 맞다. 그런데 나는 아무래도 그를 울려 버린 적도 있는 것 같다. ‘어느 날 낮에 도착한 《문학계》에 실린 「존 포드론 제1장-II. 수목」을 단숨에 읽었다. 첫 페이지부터 눈물샘이 느슨해지기 시작했고 예상대로 < 말 없는 사나이 >를 거쳐 <일곱 여인> 부분에 접어들었을 때, 사정을 모른 채 옆에 있던 여배우가 “웬 오열?”이라며 놀라워했다. 이것은 나 자신도 정확히는 모르지만, 아마 시게오미 군과 관련된 일이 깊게 관계하고 있는 것 같다. 외아들을 잃은 분만이 쓸 수 있는 글이라고 생각되었던 것이다.’(p.422)라고 적혀 있는 것이다. 오열과 함께 이런 이야기를 써주는 사람은 아오야마 신지밖에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게 확신하고, 나 또한 오열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미우라 하루마를 <말 없는 사나이>의 모린 오하라처럼 나무로부터 멀리 떨어뜨려 놓음으로써 터무니없이 감동적인 < 도쿄공원 >(2011)을 찍고 난 직후였다고 생각되는데, 시게오미가 스즈키 다쿠지 감독의 <나는 고양이 스토커>(2009)나 스가누마 에이지 감독의 <속삭임>(2009)의 음악 작업을 끝낸 이후 몸이 약간 좋지 않아 처음으로 입원 생활을 하고 있을 때 문병을 가서 그 병실에 가까이 다가갔더니 안에서 쾌활한 웃음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들어가기를 망설이다가 되돌아가려고 했을 때, 그 목소리의 주인이 아오야마 신지라는 것을 금방 알아차렸다. 그렇다면 당분간 젊은이들끼리 대화를 즐기도록 놔두자고 생각하고 대기실로 돌아와 잠시 기다리기로 했다. 신진 작곡가인 시게오미와, 그의 초등학교 시절 같은 반 친구를 아내로 둔 영화작가 사이에는, 도요타 마호를 둘러싼 무수한 화제가 있어 마땅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15분이 지나도, 반 시간이 지나도, 결국은 1시간이 지나도, 아득한 병실에서 새어 나오는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결국 1시간 반 정도 후에야 야구 모자를 쓴 아오야마 신지가 복도를 지나며 ‘아아, 와 계셨습니까’라며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아니, 지금 막 도착했습니다’라고 애매하게 대답하자, ‘아아, 시게오미 군, 아주 건강해 보였습니다’라고 수줍게 말하고 그곳을 떠났다. 병실에서 나를 맞아준 시게오미는 시게오미대로, 몸이 나아지면 함께 영화를 만들자는 이야기를 들었다며 진심 어린 미소를 지은 채, 아오야마 신지로부터 차기작의 음악 작업을 의뢰받았다고 자랑스럽게 보고했다. 그러나 그 기회는 오지 않았고, 아오야마 신지의 수줍은 표정도, 그 통통 튀는 웃음소리도, 그와의 긴 대화를 진심으로 즐기던 시게오미의 자랑스러운 미소도, 이제는 영원히 상실되고 말았다. 그 현실을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말할 것도 없이, 머지않아 86세가 되어 가는 이 후기 고령자는, 이를 위한 어떠한 방법도 가지고 있지 않다. 유일하게 가능한 것은, 아오야마 신지를 함부로 추모하지 않는 것밖에 없을 것이다. (출처:「신초」2022년 6월호) 필자 - 하스미 시게히코: 일본의 문학평론가이자 영화평론가. 영화 분야 저서로는 『영상의 시학』(1979), 『감독 오즈 야스지로』(1992), 『영화의 신화학』(1996), 『고다르 혁명』(2005), 『보기 레슨: 영화사 특별 강의』(2020), 『쇼트란 무엇인가』(2022), 『존포드론』(2022) 등이 있다. 번역 - 한국영상자료원 학예연구팀 박진희 ※ 이 글의 무료 게재를 허락해주신 「신초」 편집부와 하스미 시게히코 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この文の無料掲載をお許しいただいた「新潮」の編集部と蓮實重彦様にお礼を申し上げます。) ※ 이 글의 원문은 아래 링크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https://note.com/monthly_shincho/n/n442dd74c8048 )
올해 서울국제여성영화제 프로그래머로 일하며 첫 번째 장편 영화를 만든 감독들의 영화를 보는 귀한 시간을 가졌다. ‘발견’이라는 단어의 뜻에 충실한 영화로 손모아, 안정연 감독의 데뷔작 < 가만한 >(2020)을 말하고 싶다. ‘움직이지 않거나 아무 말도 하지 아니하는 상태에 있다’라는 ‘가만하다’는 이 영화를 설명하는 오롯한 형용사이자 영화의 주인공 준서( 박수연 )의 상태이며 그것을 바라보는 이 영화의 핵심적인 태도의 말이기도 하다. 준서는 음악을 사랑하는 아이였다. 예고를 졸업하고 음악대학에 진학해 피아니스트가 되길 꿈꿨을 것이다. 그런데 어떤 이유인지 알 수는 없지만 준서는 꽤 오랫동안 피아노를 칠 수 없는 상태다. 손가락은 굳어 쉬이 움직이지 않고, 그 가만한 손을 내려다보는 준서의 얼굴은 표정을 잃었다. 마음에 웅숭그린 발화되지 못한 말을 끄집어내기보다는 적요한 침묵 속에서 자신의 손을 바라보는 일이 잦은 준서다. 굳어버린 건 손가락이기보다는 준서의 마음일 것이다. 영화는 준서가 한동안 떠나 있던 음악대학을 다시 찾아 그곳 학생이 아니라 임시 행정 조교 일을 하겠다고 결심하면서부터 시작된다. <가만한>에서 우리는 준서의 존재보다도 더 크게 바흐와 쇼팽을 비롯한 클래식 피아노 선율의 존재감을 보고, 듣고, 느끼게 될 것이다. 음악은 준서를 떠나지 않는다. 준서가 학교에서 피아노과 학생들을 보조하며 그들의 연주회를 준비할 때든, 강박적으로 피아노 연주에 몰두하는 편입생 수미(이화원)를 지켜볼 때든, 어째서 피아노를 치지 않는 거냐며 속상해하는 엄마( 오민애 )의 공간에 있을 때든 음악은 필수 불가결한 공기처럼 화면을 채우고, 흘러들어오고, 스며든다. 때론 먼 곳에서 누군가의 연주인지로 모를 음악이, 때론 지근거리에서 준서의 마음을 울리는 음악이 준서와 그녀의 공간, 나아가 이 영화 전체를 감싸 안는다. <가만한>에서 음악은 서사를 보완하기 위한 장치도, 분위기를 만드는 요소도 아니다. 이곳의 음악은 이미 오래전부터 준서였고, 지금의 준서이기도 하고, 앞으로의 준서를 예견하는 준서의 세계 그 자체다. 다시 쓰면, 음악이 준서를 떠나지 않는 게 아니라 준서가 음악을 떠날 수 없고, 떠나지 않는다. <가만한>은 준서의 굳은 마음의 상태가 해빙의 과정을 거치는 시간을 따른다. 이때의 해빙이란 결코 어떤 결론이나 해결을 전제하고 진행되는 게 아님을 기억하자. 그저 다른 방식으로 음악을 받아들이고 음악 안에서 살며 음악을 계속해가기 위한 분투, 다르게 음악을 사랑하려는 준서의 상태의 변화를 말한다. 미묘한 점진을 구현하는 이 영화의 방식은 일관되고 그 자세 역시 의연하다. 우리는 <가만한>에서 준서의 얼굴보다 훨씬 더 많이 그녀의 등과 뒷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상대방의 액션에 따른 준서의 감정의 리액션 쇼트를, 스펙터클한 얼굴의 세계가 아닌 준서의 가만한 등의 액션과 리액션을 더 유심히 봐야 하고 그곳에서부터 감응은 시작된다. 뒷모습이 보이는 조용하고 은은한 떨림과 부동에서 얼마나 더 많은 이야기가 전해질 수 있는가를 영화는 설득해내고 싶어 하고 또 설득해낸다. 반대로 몇 안 되는 순간이지만 카메라가 오직 준서의 얼굴만을 미동도 없이 똑바로 응시할 때가 있다. 카메라 너머에는 준서가 더는 가닿을 수 없는 음악의 세계가 있거나 더는 함께할 수 없는 불화하는 세계가 있다. 준서의 세계 이쪽과 저쪽이 완벽히 분리되는 순간을 이토록 정확하게 목격하게끔 할 때 우리는 또 다른 의미에서 감정의 파고를 경험할 것이다. 한편 영화는 이것만은 차마 볼 수 없다고, 보지 않아도 충분하다고 단호하게 자신의 입장을 보이기도 한다. <가만한>의 카메라는 대부분 고정돼 있지만 몇 차례 움직임을 보여줄 때가 있는데 그중 하나의 장면을 말하려 한다. 준서가 연습의 압박에 시달리다 손에 마비가 온 수미를 발견했을 때다. 카메라는 인물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수미가 마비된 제 손을 주무르고 그 곁으로 준서가 다가가는 순간까지를 보여준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수미의 얼굴로는 이동하지 않기로 한다. 굳이 보지 않아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고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듯이. 대신 <가만한>은 인물이 떠나고 난 공간을 더 오랫동안 바라보고 싶어 한다. 구체적인 그 장소는 조금 전까지 있었던 인물들의 움직임이 남긴 진동과 여진을 기억할 것이다. 사람은 가고 없어도 그들이 있었던 곳에는 여전히 음악이 흐르고 매미와 풀벌레 소리가 들려오고 새들의 지저귐이 있고 빛과 그림자가 함께할 것이다. 그 소리와 빛은 마음 한구석을 아릿하게 할 만큼 애틋하다. 부동 속에서 감지되는 미약한 흐름과 정동이 빚어낸 감흥일 텐데 그것은 봐야만 하는 것과 볼 수 없지만 들리는 것 사이에서 음악이 계속되듯, 준서의 삶도 계속되리라는 귀한 긍정을 목격하며 오는 것이기도 하다. 과격한 사건과 극적인 반전 혹은 자극 없이도 얼마든지 가능한 감동이 있음에 새삼 안도한다. 각본을 쓴 안정연의 사려 깊은 시선과 촬영을 맡은 손모아의 미더운 앵글이 가져다준 결과다.
무용 작품은 공연이 진행되는 동안에만 존재하며, 그 작품의 지속은 오롯이 기억의 몫이다. < 아이 바이 유 바이 에브리바디 >(김남석/최승윤, 2019)는 이처럼 한순간 일어났다 영원히 사라지는 무용의 시간을 간직하고 싶은 마음을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그런데 영화의 시간이 카메라 앞에 일어나는 현재를 포착하고 그것을 반복적으로 재생하는 기계에 기반을 두고 나타난다면, 무용의 시간은 매번 다른 현재를 만드는 신체의 움직임 속에서 산다. 영화와 무용은 서로 완전히 다른 속성을 가지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에 기록된 무용이란 무용 작품과는 또 다른 것으로, <아이 바이 유 바이 에브리바디>는 공연을 기록하는 영상이 되지 않으려 한다. 다시 말하면 이 영화는 무용이 아닌 것으로 무용을 남기려는 시도다. 영화가 공연일 수 없다면 영화는 어떻게 무용을 기록하고 간직할 수 있을까? 무용이라는 것은 어떻게 간직될 수 있을까? 영화는 공연이 무대에 오를 수 있도록 하는 이면의 시간을 기록한다. 총 5명의 무용가가 자신만의 공간에서 시간을 보낸다. 이들은 무용학원 강사로 일을 하고, 요가 스트레칭으로 몸을 단련하고, 승무원 시험을 준비하면서 미래를 모색하고, 진정한 욕망을 들여다보기 위한 여행을 준비하고, 안무 연습을 한다. 무용가이자 영화를 기획 중인 감독 최승윤은 이 무용가들을 각각 만나서 그들과 돈, 열정, 꿈 등에 관한 대화를 나눈다. 그들 삶에는 불안정한 미래를 나아가야 하는 불안이 존재하는 한편 그들에게 무용은 좋고 충만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무용가들은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자기 삶을 조직해가고 있다. 이들이 함께 한 공연은 영화에서 단지 포스터로만 소개되고, 공연을 함께 만들어낸 5인이 이야기를 나눈다. 무용이란 무용가들의 몸을 통해 실현되고 작품은 무용가들의 몸에 흔적을 남기는데 그것은 단지 안무를 기억하는 일이 아니다. 무용의 시간은 공연하는 순간 속에 존재하지만, 그 순간은 이미 다양한 열정들이 마주치는 과정과 그 과정에서 도달하게 되는 감정, 깨달음, 성취감, 유대감 등을 품고 있는 시간의 발현이고, 이러한 시간은 그것을 몸에 새긴 무용가들의 삶을 운영하는 영감이나 동력으로도 지속한다. 그런데 작품 전후 시간을 담아가는 형식 속에서 영화와 무용은 서로 더 복합적인 협업을 이룬다. 영화는 인물들이 인터뷰하면 카메라가 뒤에서 취재한 결과물의 편집이 아니라, 미리 공들여 계산된 장면들과 연출된 대화들을 통해 진행된다. 동료들과 만나고 있는 최승윤에게는 한 영화감독과의 만남도 끼어드는데, 그 대화에서는 영화와 무용 간의 공통점 및 차이점에 관한 생각이 오간다. 이 대화를 주고받는 영화감독은 영화의 장면 역시 한 번만 일어나는 것이라고 말한다. 촬영 때마다 매번 온갖 사물들이 빚어내는 상황이 다르다. 예를 들면 같은 앵글에 놓고 찍더라도 어떤 때는 바람에 나뭇잎이 흔들리지만 어떤 때는 미동도 없다. 그러므로 한 장면을 반복해서 찍는 작업은 똑같은 것의 반복이 아니다. 이 영화는 이런 영화 작품 이전의 반복과 변주를 영화 장면 자체로 실행한다. 장면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인물들의 동선은 같은 구성을 반복하는데, 그 반복은 조금씩 다른 앵글이나 시선 그리고 속도를 갖는다. 영화는 반복하지만, 그 반복 속에는 변화가 담겨 있다. <아이 바이 유 바리 에브리바디>는 마치 리허설 필름 같기도 하다. 영화 촬영이란 반복해서 찍으면서 좋은 것을 찾아내는 일종의 연습 시간인데, 이 영화에서는 반복 자체가 작품의 리듬을 형성하고, 그 반복의 시간 자체가 주제다. 영화는 작품이 리허설을 품기보다는 역으로 리허설이 작품을 품게 되는 모양을 그려나간다. 여기에서 리허설은 더 이상 작품 안에 완전히 포함될 수 없으며, 심지어 작품이라는 결과를 향한 목적론에 복무하지도 않는다. 영화의 시간과 무용의 시간 모두 작품이라는 목적보다 더 크거나 혹은 그러한 목적을 잘 모르는 리허설들로 채워져 있다. 작품 전후 활동 과정을 작품보다 부각하는 영화의 방향이 단지 자족적인 것으로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이러한 방향이 예술 작품이 무엇인지에 대한 잘 조직된 질문으로 나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우선 무용과 영화 각각이 가진 고유한 특성을 표현한다. 그리고 작품을 만드는 시간을 성찰하고 작품에 구현하기 위해, 일방적으로 흘러가지 않는 시간의 순환을 작품 내에 만든다. 영화는 최승윤 감독이 영화를 만들고자 결심하고 김남석 감독에게 조언을 구하면서 서로 편지를 나누는 보이스오버를 포함하고 있다. 그 편지는 최승윤 감독이 촬영을 막 완료하고 김남석 감독에게 소회를 밝히는 때까지 이어지는데, 우리는 이미 두 감독의 협업으로 완성된 영화를 보고 있다. 영화의 끝은 영화의 시작으로 이어지고, 이 영화는 협업으로 나아가는 만남의 과정이자 협업의 결과이기도 하다. 메이킹 필름과 동시에 완성된 이야기인 것이다. 과정과 결과는 선형적인 관계나 위계를 벗어나고, 결과는 늘 과정 중인 시간 안에서만 존재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아이 바이 유 바이 에브리바디>는 무용과 영화가 각각 작품으로서 무엇을 남기는지, 또 작품을 도출하는 작품 바깥의 시간이 가지고 있는 지위는 무엇인지를 질문한다. 남산타워가 창 너머로 잘려 보이기도 하고, 바깥에서 비스듬히 보이기도 하며, 또 밤하늘에 빛을 내며 오롯이 드러나는 위치에 놓이기도 하는 것처럼 영화의 반복은 새롭게 보면서 더 나은 것을 향하는 방법이 되고, 무용은 새롭게 움직이면서 더 나은 것을 찾는 경험으로써 몸에 기억으로 남아 일상을 이끈다. 이 영화에서 주목하는 반복의 시간은, 무용이 지속하는 시간의 성격을 성찰하게 하는 한편, 영화가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결정적인 시간이란 소위 사건의 클라이맥스보다도 오히려 그 사건을 도출해내는 전후 시간 속에 있는 것이 아닐지 질문하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