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란다
- 감독
- 문신구
- 제작년도
- 1995
- 출연
- 한은정, 유영철, 김민, 박진실, 정선우, 김윤희, 김을동, 국정환, 양택조, 주호성, 박동현, 이명배, 정찬규, 박용팔, 문선경
이 영화를 수용할 수 있는지 여부는 첫 장면에 달려있다. 버스 정류장에 근처에 예닐곱의 사람들이 모여 있는 모습을 고정숏으로 보여준다. 어안렌즈로 찍은 것처럼 곡선으로 구부러진 버스가 정차 후 지나가면 버스 정류장에는 세 사람이 남는다. 그들은 마치 사람들 사이 보호색을 띠었던 양 이제야 눈에 띄는데, 행색을 보면 처음에는 눈에 띄지 않았다는 게 의아하다. 젊은 여자와 나이 든 여자는 머리를 귀신처럼 늘어뜨린 한 쌍처럼 보인다. 이들은 뒤로 보이는 연방 우체국의 우편물을 노린 3인조 가족 사기단이다. 이 장면의 압권은 딸 올드 돌리오(에반 레이첼 우드)가 선보이는 특별한 준비 동작이다. 굼떠 보이는 인상과는 달리 날랜 동작으로 바닥에 납작 엎드리거나 낮은 난간을 뜀뛰기 하듯 넘나드는 모습이 놀라움을 안긴다. 그렇게 해서 과연 CCTV를 피할 수 있을지 의심스러울 만큼 동작은 눈길을 끈다. 이는 임무 완수를 위한 제의 혹은 스트리트댄스 같다. 우스꽝스러운 동작은 다시 등장한다. 버블 공장에 딸린 사무실을 집처럼 사용하는 이들은 몇 달째 집세를 밀린 상황이다. 주인의 시선을 피해 낮은 담 아래로 몸을 굽히고 걸어가는데, 유독 돌리오만은 림보를 하듯 허리를 거의 180도로 뒤로 꺾은 채 성큼성큼 걷는다. 그 모양은 우스운 것을 넘어 그를 도시 공간과 소통하는 거리의 무용수처럼 보이게 한다. 그가 보여주는 것은 명백한 몸개그로, 이것이 몸의 영화임을 다소 난해한 방식으로 예고한다. 이들의 거주지는 매일 일정 시간마다 천장 벽 틈새로 분홍색 비누 거품이 새어드는 곳이다. 그럴 때마다 집은 마치 살아있는 존재에 가까워지며 무생물과 같은 거주자들과 반대 방향에서 접점을 만든다. 가짜 가족처럼 보이던 이들은 실은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인데, 애초에 이들에게 가족이라는 개념 자체가 붕괴한 것 같다. 여기에서 가족은 비즈니스적 공동체이며 감정적 유대가 아닌 공평의 실현을 목적으로 한다. 모든 수익과 손해는 3분의 1로 정확히 나눈다. 동시에 울리는 손목 알람에 따라 정해진 일을 수행하고 몫을 나누어 갖는다. 딸 올드 돌리오는 < 산책하는 침략자 >(2017)의 개념을 잃어버린 신조(마츠다 류헤이)처럼 모든 개념을 처음부터 습득해야 하는 부적응자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는 26살에 뒤늦게 시작된 돌리오의 성장기라 정의할 수 있다. 그러나 정확히는 성장기가 아니라 ‘출생기’다. 그는 태어나서 한 번도 다른 사람과의 신체 접촉을 해본 적이 없는 사람 같다. 하지만 태어난 직후부터 접촉을 피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그는 아직 태어나지 않았다. 환불 불가능한 마사지 쿠폰을 포기하는 대신 생애 처음 마사지를 받은 돌리오는 작은 터치에도 몸을 떨고 눈물을 보인다. 한 임산부의 부탁으로 예비 부모를 위한 강연에 참석한 돌리오는 아기가 어머니와 감정적 유대를 맺는 최초의 행위인 ‘브레스트 크롤’(태아가 엄마의 젖가슴을 본능적으로 찾아가는 행위) 장면을 보면서 큰 충격을 받고, 자신이 태어난 직후 엄마 테레사(데브라 윙거)와 접촉했는지 여부를 궁금해한다. 비행기에서 부모와 떨어져 앉게 된 돌리오는 우연히 부모님과 나란히 앉은 멜라니(지나 로드리게즈)가 자신보다 더 그들의 딸처럼 보인다는 사실을 자각한 뒤 테레사의 애정에 더욱 집착한다. 돌리오가 대리 참석한 강연장에서 출산 영상이 등장하는 대목은 다소 급작스럽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영화 속의 모든 상황은 ‘태어남’을 은유하기 위한 치밀한 우연처럼 보인다. 앞서 언급한 돌리오의 우체국 진입 장면 이후에는 우편함을 뒤지는 돌리오의 손을 보여주는 숏이 등장한다. 우체국 내부는 사방이 작은 우편함으로 구획된 어딘가 비현실적인 공간이며, 돌리오는 그중 한 곳을 열고는 좁은 구멍 속에서 손을 좌우로 더듬으며 우편물을 찾는다. 그러다 옆 칸에 놓인 긴 직사각형 형태의 우편물을 조심스럽게 빼내는데, 그 모양이 마치 좁은 구멍으로 분만을 유도하는 출산 장면을 은유하는 것처럼 보인다. 구멍을 통과한 뒤에는 진동처럼 지진이 찾아온다. 가족이 약진에 유난스럽게 반응하며 길가에 얼어붙을 때, 옆에서 행인이 아무렇지 않게 지나가는 모습이 목격된다. 지진을 통해 세상은 개념이 아닌 살아 움직이는 존재로서의 운동성을 드러내고, 그럴수록 이 가족은 무생물처럼 고정된다. 진동하는 비행기는 이들이 세상을 체감하는 방식을 요약한 공포 체험의 장소다. 갑작스러운 난기류로 차체가 흔들리는 현상이 벌어지자 이들은 겁에 질려 어쩔 줄을 모른다. 세상을 은유하던 비행기는 작은 우편함 구멍과 출산 비디오 영상과 어우러져 출산 체험을 위한 기구가 된다. 비행기는 누구나 망각했을 태어남의 순간을 내부에서 단체로 경험하는 물질로 도약한다. 내부의 시점에서 출산을 체험하려는 불가능한 욕망은 후술하는 장면을 통해 마침내 성공적으로 충족된다. 테레사가 무심결에 멜라니를 ‘아가’(hon(ey))라고 부르자, 돌리오는 수하물 분실을 조작해 얻은 여행보험금을 걸고 자신에게 ‘아가야’라고 말해보라고 테레사를 채근한다. 그러나 테레사는 끝내 돌리오를 ‘아가야’라고 부르지 못한다. 이 집단에서 막내딸 정도의 역할일 줄 알았던 멜라니는 자신의 진짜 역할이 어머니임을 자각하고는 돌리오의 손을 잡고 집단을 벗어난다. 멜라니는 자신의 집을 새로운 활동 기지로 삼아 ‘아가야’라고 불러주기를 비롯해 테레사가 거절한 것의 목록을 만든 뒤 하나씩 실행에 옮긴다. 리스트의 핵심 항목은 단연 브레스트 크롤이다. 멜라니는 이왕 하는 거 제대로 하자며 실감나는 재현을 위해 불이 들어오지 않는 화장실로 돌리오를 데려가 문을 잠근다. 어둠 속에서 지진이 찾아오자 겁에 질린 돌리오는 이것이 자신의 끝이라고 생각한다. 진동이 멈춘 뒤 문이 열리고 다시 빛을 보게 된 돌리오는 마치 이제 막 태어난 사람처럼 기쁨에 젖어 만나는 모든 이에게 인사를 건네며 생의 축복을 만끽한다. 아직 가장 중요한 동작이 남았다. 화장실에 갇힌 패닉 상황에서 실언을 내뱉어 멜라니에게 상처 입힌 돌리오는 그에게 사과하는 의미로 콘크리트 바닥을 기어 멜라니에게로 다가간다. 돌리오의 첫 브레스트 크롤은 엄마의 품보다는 다소 거칠지만, 그보다 넓은 세상의 맨몸을 더듬는 행위이다. 덧붙여 누군가에게 먼저 마음을 열어 보이는 최초의 시도다. 그렇게 돌리오는 태어난다. 그리고 비로소 산다. <카조니어>에서 미란다 줄라이가 보여준 것은 아직 한 번도 쓰인 적이 없던 방식으로 시도된 사랑스럽고 무모한 퇴행이다.
동시녹음 시대의 한국영화를 기억하는 사람들이라면 성우의 대명사는 고은정 일 것이다. 고은정을 모르더라도 “경아, 오랜만에 누워보는군”, “아 행복해요. 더 꼭 껴안아주세요”라는 1970년대 영화의 대사는 익숙할 것이다. 각종 TV프로에서 패러디되어 마치 후시녹음 시대의 전형처럼 남아있는 그 목소리, <별들의 고향>(이장호, 1974)에서 안인숙이 연기한 경아의 목소리가 바로 성우 고은정의 소리이다. 1960~70년대 한국영화를 제대로 접하지 않았어도 그 시대 영화 속 인물들의 목소리나 말투는 왠지 익숙하다. 고은정을 위시한 많은 성우들이 만들어낸 영화 속 인물들의 목소리와 말투는 이 시기 한국영화의 특징 중 하나로 남아있다. 고은정은 영화 후시녹음은 물론 라디오 드라마 연기자, 문화영화의 나래이터 때로는 텔레비전 외화 시리즈 더빙과 텔레비전 방송진행까지 영화와 방송계를 넘나들며 활동한, 한 시대를 대표하는 목소리의 주인공이었다. 고은정은 1936년 2월 1일 서울에서 태어나 그해 일본으로 건너가 6년간 일본에서 자랐다. [사진1, 2] 1940년 일본에서 찍은 가족사진이다. 일제강점기 일본에서 사업을 했던 부친 고희정과 모친 김재순, 그리고 좌로부터 오빠 고흥욱, 동생 고흥호, 구술자 고은정이다. 1941년 말을 타고 찍은 사진을 보면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녀를 확인할 수 있다. 1940년 일본에서 찍은 가족사진이다. 일제강점기 일본에서 사업을 했던 부친 고희정(高犧鼎)과 모친 김재순(金在順), 그리고 좌로부터 오빠 고흥욱, 동생 고흥호, 구술자 고은정이다. 1941년 말을 타고 찍은 사진을 보면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녀를 확인할 수 있다. 채 6살이 안된 어린 그녀는 당구를 삼백 정도나 치던 어머니가 아버지와 함께 당구장에서 당구를 즐기던 모습을 기억한다. 그녀는 자줏빛 카페트 위에서 연분홍 와이셔츠에 감색 망사 조끼 그리고 회색 스커트를 차려입은 어머니의 모습을 생생하게 떠올렸다. 생모와 보낸 시간이 짧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 어머니의 영향은 크고 강렬했다. 음악과 미술에 조애가 깊은 어머니는 사별하기 전까지 어린 그녀의 예술적 감수성을 부지런히 키워줬다. 그래서 어린 그녀는 밀레의 만종을 보고 그림에서 종소리가 난다 말할 만큼 충만한 감성과 관찰력을 지닌 아이로 자랄 수 있었다. 헌신적이고 생활력이 강했던 할머니와 새어머니로부터는 오랜 세월 동안 방송과 영화계에서 지치지 않고 일할 수 있는 근성을 배웠다. 그녀는 개화기와 일제강점기, 해방과 한국전쟁을 겪으며, 미망인으로 가족을 지켰던 강인하고 지혜로운 할머니를 일컬어 시대를 살아낸 모성이라고 표현했다. 어린 시절에는 모친의 죽음을, 청소년기에는 한국전쟁과 부친의 죽음을 겪었고 전후 재건기 대학생 시절에 사회생활을 시작해 목소리 하나로 시대를 풍미한 그녀 또한 집안의 강인한 모계혈통을 이을 만한 여성이라 할 만한다. 그녀는 1954년 KBS방송극회원 1기 (서울중앙방송극단 연구원 1기) 즉, KBS성우로 방송계에 입문한다. 라디오가 유일한 전파매체이던 시절, 인기 있는 라디오드라마는 사람들의 일상적인 말투를 바꾸어 놓았다. 심지어 성격파 배우 노경희 조차 영화 후시녹음에서 당시 인기였던 최초의 라디오드라마 <청실홍실>(1956, 조남사 작, 이경재 연출)의 전후파 여성 동숙(성우 정은숙 연기)의 말투를 따라 말끝을 흐리며 대사를 했다하니 라디오드라마 성우들의 영향력은 대단했던 것이다. 고은정은 KBS방송극회원으로 선발되고 난 뒤 1955년 KBS 아나운서 시험에도 합격하여 8개월 동안 아나운서로 활동했다. [사진3] 1955~56년 KBS 아나운서시절, 국회부의장실에서 찍은 사진이다. 왼쪽부터 당시 KBS 아나운서였던 장금자, 고은정, 강영숙, 라연수 이다. 어린 시절부터 웅변보다는 동화구연에 더 뛰어났던 그녀는 아나운서 생활을 8개월 만에 정리했다. 목소리에 배어있던 바이브레이션은 아나운서의 발성에 적합하지 않았고 무엇보다 그녀의 자유로운 성격은 다소 경직되고 보수적이던 아나운서실의 문화와 어울리지 않았다. 물론 발성을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게 된 후에는 국립영화제작소의 뉴스와 나래이션을 도맡아 했지만, 이제 막 방송에 데뷔해 연기에 대한 설렘으로 가득 차있던 시절의 그녀에게는 보도보다 드라마가 훨씬 더 어울렸다. 실제로 그녀는 대단한 이야기꾼이었다. [사진4] 1957년 KBS남산 사옥에서 찍은 KBS 방송극회원 1기생들. 왼쪽 뒤부터 김수일,고은정, 박용기, 김옥경, 윤미림, 오른쪽아래부터 이창환, 김소원, 심영식, 신원균 당시 KBS 방송극회원 동기생들은 영화를 보는 대신 그녀에게 영화 줄거리를 들으며 영화를 즐겼고 그래서 그들 사이에 영화 보러 가자는 말은 그녀에게 영화 이야기를 들으러 가자로 통했을 정도로 그녀의 이야기 능력은 자타가 인정하는 수준이었다. 그녀가 가진 이야기꾼으로서의 재주는 후에 방송작가로 등단할 수 있는 바탕이 된다. 그래서 그녀가 구술한 사건과 경험들은 늘 흥미롭거나 아련한 이야기들이다. 그녀가 들려준 한국전쟁 경험은 전쟁을 배경으로 한 애틋한 우정과 사랑의 드라마였다. 십대 문학소녀의 시선에서 전쟁과 피난의 여정은 친구와의 아쉬운 이별 이야기로 그려졌고, 9.28 수복 후 여군으로 생활하며 지낸 부산의 훈련소는 소공녀의 방으로 도치되었다. 물론 성장소설의 한 대목처럼 묘사된 그녀의 이야기 속에도 잔인하고 고된 현실은 존재한다. [사진5] 서울 수도여고 1학년 재학시절 동기생들과 함께 찍은 우정사진. 왼쪽부터 고은정, 최도영, 최순림. 그녀는 9.28 수복 후 서울에서 여자의용군 2기를 모집할 때 예술대에 자원입대한다. 이때 동덕여고 무용부, 한성여고 밴드부가 단체로 입대했고 그녀를 포함한 수도여고 학생 4명 또한 중창단으로 들어가 병과 훈련과 예술대 훈련을 받았다. 당시 여자의용군은 정훈대, 첩보대, 전투부대, 예술대에서 활동했고 1, 2기생 중 우수자는 전선에 배치되어 현지 임관되기도 했다. 그녀는 1.4후퇴 때 의용군 예술대 대원들과 함께 부산으로 피난해 영도의 학교건물에서 내무반 생활을 이어갔다. 위문공연을 하며 종군할 생각으로 연습과 훈련을 이어가는 속에서도, 여고생 4명은 내무반 건물 한 쪽에 책을 쌓아 소공녀의 방을 꾸미며 막막한 전쟁기를 버텨갔다. 그녀는 내무반에서 입은 부상으로 병가 제대를 하고 부산에 피난 와 있던 수도여고에서 학업을 재개했다. 여고생들에게 지낼 곳을 내어준 신부님 댁에 기숙하면서 장갑을 짜고 수를 놓아 교통비를 마련해 어렵게 학교에 다녔다. 그 속에서도 친구와 함께 쓰던 좁은 방에 씨레이션 박스로 책상을 만들고 보리밥풀로 교복의 각을 세울망정 벽에는 그리어 가슨, 그레고리 펙, 몽고메리 클리프트의 사진을 붙여 놓고 창 밖 하늘과 연결되도록 해 서정적인 상상의 공간을 만들어 어려운 현실을 견디려했다. 전쟁기 고단한 생활을 이어가는 속에서도, 휴전반대시위에 참여한 학생들을 인솔하는 규율부였던 그녀는 인기 많은 경기고 대대장과 안면을 트고 YMCA 영어강좌에 함께 참석하는 등 설레는 순간들로 그 시절을 회상한다. 그녀의 전쟁담은 사춘기 소녀가 주인공인 성장영화를 떠올리게 한다. [사진6] 1952년 수도여고 부산 피난 시절 동기생들과 함께 찍은 우정 사진. 왼쪽 아래 황양자, 고은정. [사진7] 1952년 수도여고 부산 피난 시절 휴전반대시위 중 규율부 동료와 함께 찍은 사진. 왼쪽부터 김진숙, 고은정 역사적인 사건을 정서가 도드라지는 개인사와 연결시켜 묘사하고, 감정이 고리가 되어 이야기를 자유롭게 이동시키는 방식이 그녀의 구술이 지닌 논리이자 특징이다. 그러다보니 그녀의 구술 채록문에서 가령 한국전쟁에 관한 사건은 각기 다른 주제로 다른 회 차에 반복해서 등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모두 완결된 이야기로 정리되기에 전쟁과 피난생활에 관련된 다양한 면들을 풍부하게 접할 수 있다. 그녀는 전쟁이 끝나고 숙명여대에 진학하여 연극반 활동을 한다. 이때 선배의 권유로 우연히 지원하게 된 KBS방송극회원 모집에 합격하여 방송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는 연극에 대한 갈증이 있어 친구와 함께 서라벌예술대학 연극영화과에도 진학을 결심한다. 그래서 백병원에 줄을 서서 피를 팔아 번 돈으로 서라벌예대 입학원서를 내고 남은 돈으로 당시 한창 유행하던 핫케익을 먹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연기욕심 덕에 매일 정동의 KBS방송국과 남산 서라벌예술대학 그리고 청파동의 숙명여대를 발에 못이 박히도록 뛰어다녀야했다. [사진8] 1956~7년경 KBS방송국(HLKA 서울중앙방송국) 정동사옥 앞. 성우로서의 그녀의 기초체력은 연극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고은정는 성우란 아름다운 목소리 뿐 아니라 연기에 대한 이해와 사랑, 그리고 면도날처럼 섬세한 감각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라 말한다. 그녀는 끝까지 라디오를 떠나지 않았기에 오랜 시간 동안 목소리로 표현할 수 있는 섬세한 연기실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물론 처음부터 그녀가 뛰어난 성우로 자리매김하지는 않았다. 그녀가 데뷔했을 당시 이미 전문 성우로 이름이 알려진 동료들이 있었다. 작은 녹음실에서 뿜어져 나오는 젊은 에너지들이 경쟁하고 상처받고 번민하는 일은 빈번했다. 그녀는 방송국에서 연습하던 대본들을 주워와 매일 집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여러 역할을 독학으로 연습했다. 그러던 순간 귀가 트이는 경험을 하게 된다. 신체 내부의 울림으로 자신의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타인이 듣는 소리로 인식하며 자신의 객관적인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경험으로 자신감을 얻은 후 KBS 라디오드라마 <산넘어 바다건너>(조남사 작, 이보라 연출, 1957)의 미라 역으로 주목 받기 시작한다. 이후 박남옥 감독의 남편인 연출가 이보라의 연기지도로 관습화된 연기와 언어가 아닌 현장의 연기와 실제 언어를 반영하는 훈련을 통해 KBS 라디오드라마 <동심초>(조남사 작, 이보라 연출, 1958)에서 19살 경희 역을 훌륭하게 소화해낸다. 그리고 이어서 KBS 라디오드라마 <장희빈>(이서구 작, 박동근 연출, 1959)에서 독한 장희빈의 연기를 탁월하게 해내 10년 뒤 텔레비전드라마 <장희빈>이 등장하던 시기에도 그녀의 이름이 회자될 정도로 대중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사진9] 1959년 KBS방송국(HLKA 서울중앙방송국) 라디오 드라마 <장희빈>의 마지막 녹음을 마치고 촬영한 사진이다. 서있는 이들 왼쪽부터 성우 박동근, 백성희, 고은정, 정애란, 박순옥, 작가 이서구, 김소원, 오정환, 앉아있는 이들 왼쪽부터 나옥주, 오승룡, 장서일. 1959년 <장희빈>의 마지막 녹음을 마치고 나온 사진 속 화사한 그녀의 모습처럼 그녀는 1954년에 KBS 성우로 발탁된 뒤 5년 만에 주연급 성우로 자리를 잡게 된다. 1950년대 후반 인기 라디오드라마가 방송 직후 영화로 만들어지던 시절에 성우 즉, 라디오연기자였던 고은정이 동명 영화의 후시녹음을 맡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구술자는 영화 <동심초>(신상옥, 1959)에서 자신이 했던 19살 경희를 연기한 엄앵란의 목소리를 맡게 된다. [사진10] <동심초>에 미망인의 딸 경희역으로 출연한 배우 엄앵란의 목소리를 고은정이 더빙했다. 애초에 좀 더 큰 비중의 역을 추천받았지만 본인에게는 라디오에서 했던 역의 연결이 중요했고, 귀엽고 사랑스러운 동작이 돋보이는 엄앵란의 연기가 마음에 들어 경희 역을 고집했다고 한다. 엄앵란 또한 자신의 이미지를 잘 살려준 그녀의 목소리 연기가 간절했기에 배우 엄앵란과 성우 고은정의 콤비 관계는 영화 <동심초>(신상옥, 1959)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심지어 엄앵란이 영화제 연기상 수상을 목적으로 후시녹음을 직접 했던 작품에서도 그녀의 도움과 보완이 필요했을 정도로 고은정은 엄앵란에게 각별한 존재였다. 두 사람은 적어도 영화텍스트 안에서는 하나의 정체성으로 움직였고 때때로 개인사적인 궤적 또한 묘하게 겹쳐지기도 했다. 1963년 3월 잡지 국제영화 주최 독수리상 시상식에서 여자방송인상을 수상한 고은정과 여자영화배우상을 수상한 엄앵란의 행복한 사진을 보면 두 사람의 얼굴마저 닮아 보인다. [사진11] 1963년 3월 잡지 국제영화 주최 독수리상 시상식에서 여자방송인상을 수상한 고은정과 여자영화배우상을 수상한 엄앵란이 축하연을 즐기고 있다. 숙명여대 사진동아리 숙미회에서 주최한 고은정과 엄앵란 사진전에서 보듯 대학 동문인 둘은 오랜 기간 동안 연기자로서 서로에게 기대고 의지하며 대표적인 배우-성우 콤비로 자리매김한다. [사진12] 1960년대 초반 숙명여자대학교 사진동아리 숙미회의 엄앵란·고은정 사진전에 참석한 고은정과 엄앵란 1963년 8월 방송문화상을 수상하는 고은정은 이미 당시 최고의 성우였다. [사진13] 1963년 8월 15일 방송문화상 수상식 현장. 공보부장관 임성희, 고은정. 엄앵란 뿐만 아니라 김지미, 문희, 윤정희, 남정임, 정윤희, 안인숙 까지 당대의 내노라할만한 여배우들의 목소리는 전부 고은정을 거쳐 갔다. 영화 후시녹음에서 목소리 연기는 입모양에 맞춰 대사를 넣어주는 역할 뿐 아니라 배우들이 미처 다 하지 못한 연기를 완성시켜주어야 했다. [사진14] 1960년대 후반 남산 한양녹음실에서 영화 후시녹음 중인 성우들. 왼쪽부터 강부자, 고은정, 김순원. 1960년대 후반 남산에 있던 한양녹음실에서 영화 후시녹음 중인 그녀의 표정을 보면 성우 또한 연기자임을 확인할 수 있다.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이 싫어 제대로 울지 않는 영화 속 여배우의 표정에 소위 된장을 풀어달라는, 즉 눈물을 펑펑 쏟게 해달라는 감독의 제안을 받을 때면 여배우가 얼굴을 가리거나 커트가 바뀌는 순간을 노려 눈물을 쏟아내야 했다. 연기자가 대사를 실수한 채로 어영부영 넘어갈 경우 입모양에 맞춰 애드리브나 웃음으로 그 장면을 살려내는 것은 전부 성우의 몫이었다. 배우들의 겹치기 촬영으로 연기의 몰입도가 부족하거나, 빠르게 진행되는 촬영현장에서 놓칠 수밖에 없는 부분은 후시녹음 단계에서 성우들의 연기로 보완해야만 했다. 그러다보니 후시녹음 된 한국영화에서 배우가 말꼬리를 흐리거나 대사를 반복하는 장면이 종종 등장하는데 이는 배우의 대사가 대본과 맞지 않아 성우가 궁여지책으로 보완한 경우이고 또 컷이 바뀔 때 웃음소리 등이 이어지는 경우 편집의 속도나 연속성이 맞지 않아 목소리로 연결을 맞춰 준 장면들이라 하겠다. 남산의 한양녹음실 위층에는 다방이 있어 녹음하다 잠시 다방에서 쉴 때면 연예부 기자들이 찾아와 인터뷰를 요청하기도 했다하니 녹음실과 주변 풍경 또한 영화촬영 현장만큼이나 분주했던 듯하다. 때로 후시녹음이 한국영화의 진보를 더디게 했고 더빙을 탁월하게 잘 해준 성우들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역설적인 비난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당시의 영화제작의 관행인 입도선매와 입도선매로 투자받을 수 있는 조건인 특정 배우들의 겹치기 출연 그리고 배우들의 겹치기 출연을 지탱해야 하는 빠른 제작 속도 등, 꼬리에 꼬리를 무는 영화 제작의 악조건은 촬영현장에서 부족한 부분을 후반작업에서 성우들이 메워주기를 원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실력 있고 인기 있는 성우들은 낮 시간에 라디오방송 녹음을 마치고 영화녹음실로 출근해 밤새 영화를 녹음하는 식으로 밤낮없이 일하며 1960~70년대를 보내게 된다. [사진15] 1963년 만리동 녹음실에서 러시필름을 보며 후시녹음 중인 성우들. 그러나 영화가 극장에 걸리기 전 마지막 순간에 숨을 불어넣는 그들의 역할은 영화 텍스트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다. 영화의 크레딧에 올라가지 않았기에 기록으로 남아있지 않아 그녀의 영화후시녹음 작품목록을 완전하게 완성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밤낮없이 녹음실에서 영화 후시녹음을 했고 심지어 고은정과 엄앵란, 이창환과 신성일 등 성우와 배우 콤비가 공공연하게 회자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영화 크레딧에 성우들의 존재는 남아있지 않다. 당연하고 공공연하지만 기록되지 않은 채, 타인의 연기에 목소리를 넣어주는 일에 대한 회의감 때문에 그녀는 1983년도를 마지막으로 영화후시녹음을 그만둔다. 물론 1980년대 들어 한국영화계도 동시녹음으로의 변화를 꾀하긴 했지만 장비, 자본과 제작시스템의 문제 때문에 1980년대 내내 여전히 성우들의 후시녹음은 이어졌다. 연기에 갈증이 있는 그녀는 영화 일을 하면서도 자신의 이름으로 독보적이고 온전한 연기를 보여줄 수 있는 라디오가 항상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사진16] 1963년 동아방송 개국 시 동아일보사 정문 모습. 그러나 방송계 또한 1960년대 초중반부터 민영방송국들이 대거 등장하며 성우와 탤런트를 확보하기 위해 전속제를 추진하다보니 KBS에서 나와 프리랜서로 일을 고수해 온 그녀는 불이익을 받게 된다. 그리고 1960년대 후반 텔레비전 시대가 도래 하자, 엄연히 성격이 다른 매체임에도 불구하고 라디오가 부차적으로 여겨지는 안타까움에 직면해야 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라디오 방송의 인기시리즈 <법창야화>(MBC, 최풍 각본, 고무송 연출, 1977)나 <고백>(MBC, 1975~76)같은 프로그램의 주인공으로 활동을 이어갔다. [사진17] 1975년 2월 MBC 텔레비전 프로그램인 <유쾌한 청백전>에 출연한 MBC 라디오드라마 <법창야화>팀. 뒷줄 왼쪽 세 번째부터 고은정, 최풍, 김현직, 변웅전, 고무송PD, 아랫줄 왼쪽 두 번째부터 최선자, 김성옥, 홍성민. [사진18] MBC라디오 1인 드라마 <고백>팀. 성우 고은정이 홀로 엮어 나가는 모노드라마 형식으로 주목받았다. 왼쪽부터 고무송PD, 첫 회 주인공이었던 가수 문주란, 고은정, 유현종 작가. 뿐만 아니라 인기 텔레비전 외화시리즈 <왈가닥 루시>(1971)의 루시, <사랑스런 지니>(1977)의 지니 역을 더빙해 텔레비전에서도 그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사실 그녀는 1950년대 말 종각에 있던 한국 최초의 상업텔레비전 방송국인 HLKZ에서 이순재, 김승호와 함께 텔레비전 드라마에 성우가 아닌 연기자로 출연하기도 했다. 1959년 목조건물인 HLKZ방송국이 불에 타지 않았다면 텔레비전 연기자로 활동을 이어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라디오로 목소리가 널리 알려진 상태에서 1970년대 다시 텔레비전에서 얼굴과 목소리를 일치시켜 활동해야 된다는 것은 부담이었다. 20년이 넘도록 라디오와 영화, 텔레비전 방송에서 목소리를 전달했던 그녀가 방송 매체의 변화와 보이지 않는 역할에 회의를 느낀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그녀는 1977년 작가로서의 이력을 새롭게 시작한다. MBC 라디오 각본공모에 <대니 할머니>로 당선되며 성우에서 작가로 자리바꿈을 시도했다. 그리고 같은 해에 12년간 동아방송의 동명 프로그램에서 직접 집필했던 방송 원고를 바탕으로 한 에세이 <고운정 미운정>을 출간한다. 이 책은 1996년에 다시 재간되기도 했다. 작가로 데뷔한 뒤 성우 일을 접고 세계를 돌며 취재 여행을 다니기도 했으나 그녀의 목소리가 만들어 놓은 세계는 너무도 견고하여 작가로서의 활동은 성우의 명망 뒤에 숨겨지게 된다. 1977년 이후 그녀는 방송작가와 성우를 겸했고 영화 <위기의 여자>(정지영, 1987)를 각색하고 정지영 감독의 권유로 잠시 출연하기도 했다. [사진19, 20] <위기의 여자>(정지영, 1987)에서 각색을 맡았고 수명(정윤희)의 정신과 의사로 출연했다. 사실 그녀는 연극을 통한 연기활동을 대학시절부터 꾸준히 이어왔다. 라디오드라마 <동심초>(이보라 연출, 1958)와 <장희빈>(박동근 연출, 1959)으로 한창 바쁠 때에도 그녀는 제작극회 초기작인 연극 <불모지>(김경옥 연출, 1958)와 현대극회의 창립작인 연극 <칵테일파티>(이보라 연출, 1959)에 출연했다. 현대극회는 중앙방송국(KBS)과 기독교방송국(CBS)의 성우들과 작가 및 연출가인 이보라, 임희재, 조남사가 모여 만든 극단이다. [사진21] 1958년 7월 제작극회 4회 발표작 연극 <불모지>(차범석 작, 김경옥 연출). 왼쪽부터 효과 최창봉, 건너 띄고 이두연, 박현숙, 조동화, 건너 띄고 작가 차범석 작가, 연출 김경옥. 아랫줄 가운데 노인 분장을 한 고은정, 아랫줄 오른쪽 끝 안평선. [사진22] 1959년 10월 공연한 현대극회 창립기념 작 연극 <칵테일파티>(T.S 엘리엇 작, 이보라 연출). 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 꽃을 들고 있는 이가 박용기, 고은정, 연출 이보라, 이미경, 박기선, 오승룡. 둘째 줄 안경을 쓴 이가 각색 윤병일, 최을선 가운데 위쪽 분장하고 꽃을 들고 있는 신원균, 이우영, 최난희. 1962년 유치진이 만든 드라마센터의 연극에도 꾸준히 출연했다. 1966년 드라마센터의 연극 <나도 인간이 되련다>(오사량 연출)에는 나타샤 김역으로 1968년 드라마센터의 연극 <동굴>(유인형 연출)에는 유애 역으로 열연했고 1972년 7월 국립극장에서 공연한 극단 성좌의 연극 <돈 후안>(1972, 권오일 연출)에는 첼레스티나 역으로 유인촌과 함께 출연했다. [사진23] 1966년 5월 공연한 드라마센터 연극 <나도 인간이 되련다>(유치진 작, 오샤랑 연출) 중 한 장면. 왼쪽이 나타샤 역의 고은정이다. [사진24] 1968년 4월 공연한 드라마센터 연극 <동굴>(김승규 작, 유인형 연출)의 한 장면. 왼쪽부터 김정철, 민지환, 고은정, 백성희. [사진25] 1972년 7월 공연한 극단 성좌의 연극 <돈 후안>(막스 프리쉬 작, 권오일 연출)의 출연진. 왼쪽 상단 유인촌, 아랫줄 가운데 첼레스티나 역의 고은정, 오른쪽 옆에 최병학, 건너 띄고 이수나, 고은정 뒤로 돈 후안 역의 황일청, 그 오른쪽에 미란다 역의 노경자. 그뿐 아니라 막역한 사이인 최은희 선생의 배우극장 멤버로 꾸준히 공연을 올렸고 지방 순회공연까지 참여했다. 그녀는 성우로 인기를 구가하던 시절에도 연극에 출연하며 연기에 대한 열정과 애정을 보여주었다. 공적인 영역의 활동 또한 활발해 1982년부터 1985년까지 성우협회 이사장을 지내며 성우 에이전시를 만들어 처우개선에 힘썼고 정당 활동을 통해 정치적 신념을 표출하기도 했으며 오랫동안 성우, 작가, 배우, 교수 등 다양한 역할로 전문성을 펼쳐왔다. 그러한 전문성과 노련함이 그녀의 구술채록문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사진26] 1977년 단행본 『고운정 미운정』에 실린 작가 고은정의 소개 사진. 1950년 말 우미관에서 개봉한 서부영화들을 극장 영사실에서 더빙한 기억, 1971년 개봉 영화 <러브 스토리>(아더 힐러, 1970)의 영화홍보용 라디오드라마에 출연했던 경험, 영화후시녹음의 다양한 기술, 성우들과 영화감독들의 작업 스타일, 국립영화제작소의 뉴스녹음 방식 등 무척 흥미로운 내용들이 담겨져 있다. 하지만 그녀의 구술이 지닌 가장 큰 의미는 수많은 작품에 참여했지만 단 한 번도 크레딧에 이름을 올린 적 없고 영화와 관련된 수상을 해본 적 없는, 영화의 공적 기록과 역사에서 부재된 채 남아있는 그녀의 역할을 그녀의 목소리로 기록했다는 것이다.
개봉 당시 찬사를 보낸 전력이 있다는 이유로 KMDb 담당자로부터 < 베테랑 >에 관한 글을 써보지 않겠느냐는 청탁을 받았을 때는 다소 당황했다. “딱히 걸작이라고까지 생각한 적은 없는데요.” 평소 ‘한국영화걸작선’ 청탁이 들어오거든 임권택 감독의 < 원한의 거리에 눈이 나린다 >나 유현목 감독의 < 불꽃 >에 관해 쓰겠노라 공상해 왔거늘. 혹은 류승완 감독 영화 중에서 선택하더라도 < 아라한 장풍 대작전 > < 주먹이 운다 > < 짝패 > 중 한 편을 골랐을 테고. 어쨌든 <베테랑>을 이 목록에 넣는 것은 작품의 성취를 떠나서 생각하더라도 너무 이르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베테랑>에 관해 할 말이 있는 것도 사실이니 이런 핑계로라도……. 영화진흥위원회 박스오피스 통계에 따르면 8월 5일 개봉한 < 베테랑 >은 총 13,414,009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데뷔 이후 꾸준히 영화를 만들었으나 10년 동안 흥행과는 거리가 멀어 팬을 노심초사하게 했던 감독이 지난 5년 사이에 남부럽지 않은 흥행작 세 편을 내놓았으며 그중 마지막 작품은 그해 가장 많은 관객을 모은 작품이 됐다니, 감개무량한 일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 베테랑 >의 놀라운 흥행은 의아하고 걱정스럽기도 하다. 이 영화가 그렇게까지 흥행해도 괜찮은가? 이 영화에 관한 일반적인 합의에 선뜻 수긍해도 괜찮을까? 그리고 그 합의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베테랑>의 성취가 단순해지고 있지는 않은가? 단적으로 말해서, 나는 <베테랑>이 한국 사회에 만연한 재벌의 횡포에 맞서 소시민인 베테랑 형사들이 자기 본분에 충실하게 맞서 싸움으로써 승리를 거두는 통쾌한 사회 비판 경찰 액션 영화로 받아들여지는 상황에는 상당한 불안을 느낀다. 이 영화는 그렇게까지 수월하게 삼킬 만한 영화는 아니다. 나 역시 < 베테랑 >을 보며 기쁨을 느낀 관객이기는 하다. 그러나 그 기쁨은 형사 서도철이 온갖 방해 공작을 뚫고 망나니 재벌 3세 조태오를 기어이 혼내주고 정의를 구현했다는 데에서 온 기쁨은 아니다. 나의 기쁨은 류승완 의 액션 연출이 한결 보기 편안하면서도 강도는 더 높아졌다는 것, 보기보다 복잡다단한 서사를 다루는 그의 화술이 여전히 능수능란하다는 것, 그리고 항상 장르와 현실 사이의 긴장과 씨름하던 그가 어떻게든 해피엔딩을 끌어내고자 몸부림치는 과정에서 영화를 장르를 내파하기 직전까지 몰고 가며 부지불식간에 자기 쇄신의 가능성을 보였다는 것에서 비롯했다. 이중 앞의 둘은 <베테랑>뿐만 아니라 류승완의 전작들을 함께 아우르며 이야기하는 편이 좋을 테니, 여기에서는 마지막 기쁨에 관해서만 언급하고자 한다. 데뷔 이래 늘 영화광 출신 액션 감독으로 낙인찍힌 탓에 간과된 면이 없잖아 있지만, 사실 류승완 은 언제나 장르와 현실 간의 불화와 씨름해온 이야기꾼이었다. 허문영 평론가는 < 주먹이 운다 >에 관한 평론 「충무로 액션키드가 우는 까닭은?」에서 류승완이 처한 딜레마를 ‘액션영화를 만들기 위해 영화적 수련을 했는데 만들 액션이 없다’로 요약한다. 액션 영화의 기본은 주인공이 무력을 이용해 갈등을 해결하는 것이지만, 류승완이 담고자 하는 현대 한국 사회는 이를 용인하지 않는다. 주먹으로 해피엔딩에 이르기에는 그가 대적하는 상대는 너무 거대하며 세상에 대한 인식은 너무 냉정하다. 그는 <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 < 피도 눈물도 없이 > < 아라한 장풍 대작전 >에서 사사롭거나 추상적인 적을 상대로 몸을 푼 뒤 <주먹이 운다>에서 ‘사회’를 끌어들였고, < 짝패 >에서 그 사회를 향해 있는 힘껏 주먹을 휘둘러본 다음 그래 봐야 남는 건 자멸뿐임을 확인했다. 그런 다음에는 (< 다찌마와 리-악인이여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라 >를 통해 ‘옛날’ 장르 세계로 돌아가 흥행 참패를 맛보고 나서) 공공연히 장르로서의 액션에는 관심이 없어졌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과연 < 부당거래 >는 주먹과 발 대신 정보의 흐름과 차단을 이용해 권력관계 안에서 싸우는 영화였다. (한편 지금으로써는 총체적 난국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 베를린 >이 류승완의 세계 안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게 될지는 좀 더 두고 보아야 할 듯하다.) 그러나 < 베테랑 >은 순도 100%의 액션 영화는 아닐지라도 여전히 유사한 장르 전통, 즉 형사 액션 영화의 세계에 발을 들이고 있는 영화다. 멀게는 1940년대 필름누아르, 가깝게는 6~70년대 하드보일드 형사 영화에서 기원을 찾을 수 있는 이 장르의 기본 논리는 사실상 앞서 이야기한 류승완 의 딜레마와 무척 흡사하다. ①불의가 있다 → ②법 때문에 불의를 처단하기 어렵다 → ③내 손으로 해결한다. 이것은 법보다는 상식과 감정에 호소하는 장르이며, 사실상 주인공이 악당만큼이나 불편한 존재이기에 십상인 장르다. 많은 형사 액션 영화들은 이 위험을 피하고자 매우 다급하고 위험한 상황을 만들어 형사 주인공의 행동이 불가피하도록 내몰거나, 사법 절차를 매우 비합리적인 장애물로 만들거나, 혹은 주인공의 불편함까지도 끌어안고 네가 심연을 들여다보면 심연도 너를 들여다보면서 모두 다 나빠진다는 식의 주제를 설파하는 길을 택한다. 간단히 말하자면 < 베테랑 >은 이런 완충 장치를 넣는 데에는 실패한 영화이며, 그럼에도 형사 액션 장르의 관습을 뒤엎음으로써 이를 만회할 가능성을 남기는 영화다. 나는 후자 때문에 <베테랑>을 지지하고 류승완 의 다음 영화를 기대하지만, 전자를 간과한 채 마냥 ‘부패한 권력을 혼내주는 소시민 영웅의 통쾌한 액션 영화’라는 식의 찬사를 보내서는 안 된다고 믿는다. 인정하자. 서도철 형사는 매우 위험하고 불쾌한 인물이다. 그는 서민 노동자로서 자신이 지닌 상식과 신념이 당연히 옳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매우 시끄러운 아저씨다. 그는 “싸나이”와 “가오”를 필요 이상으로 입에 달고 살면서 의미심장한 일침을 가하거나 가르침을 주고 싶어 하고, 맞벌이 부부임에도 아내를 ‘당연히 집안일도 도맡아야 하는 여자’로 대우하는가 하면 동료 형사가 여자라는 이유로 “미쓰 봉”이라고 부르는 데에 아무런 주저함이 없는 구식 성차별주의자고, 범인이 러시아인이라는 이유로 “야 이 스키야!”라든가 “효도르와 크로캅” 같은 호칭을 쓰는 흔한 인종차별주의자이며, 필요하다면 공권력을 함부로 휘두르는 데에 거리낌이 없는 폭력 경찰이다(그리고 이런 점을 지적한다면 틀림없이 ‘사회를 아직 잘 몰라서 하는 소리’라든가 ‘사람 사는 게 그런 게 아니다’고 할 것만 같다). 형사 액션 영화의 주인공들이 인격적 결함을 지닌 캐릭터인 것도 어느 정도는 장르 전통이지만, 서도철쯤 되면 < 더티 해리 > 시리즈의 해리 캘러핸이나 <리쎌 웨폰> 시리즈의 마틴 릭스보다 문제가 훨씬 심각하다. 아마도 한 문화권에서 일상적으로 용인되고 있는 무례함의 한계가 다르기 때문이 아닐까. < 베테랑 >이 한국 사회의 지긋지긋한 가부장적 기질, 시스템보다 우선하는 핏줄과 인맥 등을 류승완 영화 중에서도 전에 없이 빼곡하게 채워 넣으며 캐릭터 행동의 원동력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이런 불편함은 어느 정도는 의도한 바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중 서도철 쪽에서 나타나는 많은 병폐는 유머의 탈을 뒤집어쓰고 있으며, 카메라가 그에게 상당 부분 이입하고 있다는 점도 부정할 수는 없다. 이것이 <베테랑>의 가장 큰 결함이자 이 영화가 평단과 관객에게 고른 지지를 받았다는 사실이 걱정스러운 이유이기도 하다. 이런 영화를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선뜻 환영해도 괜찮은 걸까? 따라서 영화가 시작한 뒤 한참 동안, 나는 류승완 의 액션 연출이 더욱 보기 편해지면서도 섬뜩함은 잃지 않았으며 복잡다단한 플롯을 한 호흡에 엮어대며 정보를 쥐락펴락하는 이야기꾼으로서의 솜씨도 여전히 능란하다는 점에 박수를 보낼지언정, < 베테랑 >을 좋아하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결국 이종격투기에 능한 재벌 3세와 주먹다짐을 벌여 이긴다 한들 통쾌할 리가 없을 텐데? 반전은 최후에 찾아왔다. 서도철과 동료들은 우여곡절 끝에 조태오를 궁지로 내몰고, 조태오는 도심 한복판에서 경찰을 치고, 시민들의 차를 부수고, 행인들을 위협하며 도주한다. 서도철은 조태오의 차 밑으로 오토바이를 밀어 넣어 추격전을 멈춘다. 행인들이 둘러싼 가운데 무대가 마련된다. 나는 이전에 거의 똑같은 장면을 류승완 의 다른 영화에서 본 적이 있다. 그가 제작자로 참여하고 각본을 썼으며 권혁재 감독이 연출하고 설경구 가 음모에 휘말린 전직 형사로 출연한 액션 영화 < 해결사 >의 클라이맥스에서다. 거기서도 주인공과 악당은 추격전 끝에 도로 한복판에서 싸움을 벌인다. 추격전이 끝난 순간 악당의 운명은 사실상 결정돼 있지만, 주인공은 자신의 분을 풀기 위해, ‘가오’를 세우기 위해 악당과 대결을 벌여 상대를 때려눕힌다. 서도철은, 시민들의 시선을 의식한 다음, 체포하고자 하는 상대를 호명하고, 또박또박 미란다 원칙을 읊는다. 만약 < 베테랑 >에 명대사가 있다면, 그건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가 아니라 바로 이 미란다 원칙이라고 생각한다. 추격을 중단하고 주먹을 휘두르기 전의 절차. 형사 액션 영화의 오랜 전통 안에서 미란다 원칙은 대체로 정의 수호를 방해하는 거추장스러운 사법적 장애물 노릇을 해왔다. 형사가 긴급 상황에 몸을 던져 범인을 잡아놓으면 악덕 변호사가 나타나 미란다 원칙 고지 문제를 들먹이며 유유히 범인을 빼낸다. 이에 넌덜머리가 난 형사들은 종종 < 인정사정 볼 것 없다 >의 우 형사처럼, “너 같은 새끼한테 내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넌 변호사를 선임할 수 있고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어. 어? 어? 그리고… 그다음은 생각이 잘 안 나, 이 XX놈아. 나중에 판사가 물어보면 들었다고 그래, 무조건. 어? 이 XX놈아.”라고 농담 반 욕설 반으로 무시하기도 한다. <베테랑>은 악당이 저지른 무수한 악덕의 목록을 열거하고 미란다 원칙을 고지하는 경찰의 선언을 클라이맥스로 삼는 드문 영화다. 그런 다음 예상했던 서도철과 조태오의 액션이 펼쳐진다. 그런데 류승완 은 악당을 두들겨 패는 대신 주인공을 두들겨 패는 데에 공을 들인다. 물론 이것은 어느 정도는 서도철이 의도한 바다. 체포 과정에서 폭행을 가했다는 혐의를 피하기 위해 일단 맞는 모습을 CCTV 기록에 남기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맞아줬다고 말하기에는 지나칠 정도로 아프게 맞는다. 그는 머리로 유리창을 들이받고, 차 문짝에 다리를 찍히고, 소화전에 가슴을 찍힌 다음에는 한동안 숨도 못 쉰다. 그렇게 한참을 맞은 다음 “이제부터는 정당방위다.”라고 호기롭게 외치며 2차전을 벌이지만, 그 뒤로도 뺨을 몇 대 친 정도가 전부일 뿐, 죽도록 얻어맞고 결국 발목까지 꺾여 일어나지도 못한다. 그렇게 조태오를 붙들어둔 서도철은 동료들이 도착하자 피떡이 된 얼굴로 웃으며 말한다. “이 XX 싸움 X나 잘해.” 액션 영화의 맥락에서, 또 류승완 영화의 맥락에서, 이 장면과 대사는 기묘한 쾌감과 슬픔을 불러온다. < 짝패 >에서, 두 짝패는 싸움에서는 이겼지만 그 결과는 죽거나 나쁘거나였다. 전투에서는 승리했지만 전쟁에서는 패배했다. 그들이 얻은 건 ‘가오’뿐이었다. < 베테랑 >은 정반대의 길을 택한다. 저놈이 나보다 싸움을 잘해, 라는 패배의 인정은 마초 수컷 세계에서는 ‘가오’ 떨어지는 일이다. 혹은 다른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맞는 것도 마찬가지. 그럼에도 서도철은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그는 자신이 지금껏 끊임없이 구부려왔던 절차를 바로 펴 지킨 다음, 자기 성질을 버리고 액션에서 완패함으로써 승리를 거둔다. 그런즉 돌이켜보면 <베테랑>은 서도철이 체포한 상대가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로 거짓 상처를 내고 거짓 증거를 만들어 폭행했던 순간부터 이어져 온 이야기였던 셈이다. 서도철이, 혹은 류승완 이 그 거리를 얼마나 의식적으로 계산하고 변화를 의도했는지는 알 수 없다. 아마도 반 이상은 무의식적으로, 몸으로, 영화를 만들고 실패하면서 배운 교훈의 결과이리라. 그럼에도 어쨌든 이 구제불능처럼 보였던 한 인간이 오랜 고생 끝에 조금은 바뀔 조짐을 보였다. 이것이 < 베테랑 >에서 가장 존중할 만한 부분이자, 여전히 류승완의 다음 작품을 기다리게 되는 요인이다. 듣자하니 그는 당장은 아니더라도 <베테랑>의 속편을 만들고 싶다고 한다. 보통 속편에는 찬성하지 않지만, 여기에는 찬성이다. 나는 서도철이 몸으로 어디까지 배울 수 있을지 궁금하다. 한 가지만 제안하자면, 그에게 더 큰 악당, 더 높이 있는 악당, 더 공분을 불러일으키고 대상화할 수 있는 공공의 적을 붙여주기보다는 더욱 복잡하고 서민의 정의감과 상식만으로 딱 잘라 말할 수 없는 범법자를 붙여주기를. 나는 그가 증오범죄의 대상이 된 외국인 노동자나 성 소수자, ‘불법시위’를 조직한 시민 앞에서는 어떤 결단을 내릴지 보고 싶다. 미란다 원칙 고지 정도로 해결할 수 없는 사안 앞에서, “저놈은 나쁜 놈이야!”라고 단정하기 어려운 상대 앞에서 류승완이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을지 알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