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성년이지만 어린애는 아냐
- 감독
- 하나부사 츠토무
- 제작년도
- 2017
- 출연
- 나카지마 켄토, 타이라 유우나, 치넨 유리, 야마모토 마이카, 타카시마 마사히로, 이쿠타 토모코
<순교자>는 유현목 영화의 정체성을 대표하는 기독교반공문예영화다. ‘기독교·반공·문예’는 당시 정권과 순치되고 나아가 권장되었던 요소들이어서 일견 검열에서 문제될 것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이 영화의 상영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공보부의 공식적인 검열 단계는 비교적 수월히 통과했지만 국방부, 중앙정보부, 내무부, 문교부의 개입이 이어졌다. 어떤 면에서는 국책과 순치되는 영화였기 때문에 관계기관들이 더 간섭하려는 면도 있었다. 또한 이 영화는 <7인의 여포로> 이후 국가가 영화를 보다 적극적으로 통제하려던 분위기와 맞물려 있기도 하다. 한편으로는 언론을 통해 드러나는 엘리트들의 의견 역시 중요한 벡터로 작용하고 있었다. 따라서 <순교자>를 둘러싼 논란과 검열 과정은 검열 관계기관들의 역학을 비롯해 <7인의 여포로> 이후 검열의 변화, 그리고 이로 인한 갈등이 당대 여론을 주도하는 지식계층을 통해 봉합되는 국면을 드러낸다. <순교자>의 검열과정: 상영허가증 발급 이후 국방부, 정보부, 문교부, 내무부가 개입하다 1965년 3월5일 제작사(극동흥업)는 공보부에 <순교자> 영화 제작을 신고한다. 3월 20일에 “정부시책과의 관계-저촉 사항 없음”이라는 전제 하에 시정사항 4개가 지적되며 제작신고가 수리된다. 이후 영화가 완성되어 중도에 제작권한을 양도받은 합동영화주식회사 명의로 6월 10일 ‘영화상영허가신청서’가 제출된다. 6월 15일에 “보안상 유해로운 점 없음”이라는 검열의견서가 작성되고, 대사 1개처를 삭제하는 조건으로 6월 16일에 ‘영화상영허가증’이 발부된다. 그런데 상영이 허가된 6월 16일에 국방부에서 화면 1개처를 삭제하고 대사 1개처를 수정하라는 전언통신문을 보내온다. 공보부에서는 이미 영화상영허가증을 발부한 상태에서 내부적으로 고심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6월 18일 공보부 영화과 계장이 기안한 내부 결재 서류에 의하면 화면 1개처 삭제를 추가 제한사항으로 승인하지만, 이미 녹음이 끝난 뒤라 대사 수정은 불가능하다고 적고 있다. 또한 “방화 <순교자> 심사 의견 처리”라는 제목의 부전지에는 <순교자>는 “군사극영화가 아니고 종교극영화”로 “국방부 후원은 군장비 후원”이었고 공보부에서 “국방부에 심사 요청한 바가 없”다는 내용이 담겨있다. 이에 결국 6월 18일 공보부는 국방부에 직접 “수정사항을 업자 측에 통보하시고 수정토록 조치”하라는 전언통신문을 보낸다. 공보부와 국방부 간의 미묘한 신경전이 감지되는 대목이다. (그림 1) 전언통신문: 국산극영화 “순교자” 심사의견 처리 검열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순교자>가 아카데미극장에서 상영중이던 6월 22일에 중앙정보부는 “보안상 유해로운 것이 내포되어 있음을 발견”하였으므로 “삭제 후 상영토록” 하라고 공보부에 통보한다. 그 내용은 화면 3개처와 대사 3개처를 삭제하라는 것이었다. 중앙정보부의 지적에 대해서는 공보부가 보다 긴장하는 기색이 서류에서도 감지된다. 6월23일 ‘방화 <순교자> 제한조치의견 처리’라는 제목의 서류에서 중앙정보부를 CIA라고 칭하며 “토의가 요하다고 사료되옵기 공람하고 회신은 추후 기안”하는 것으로 처리한다. 그러면서 ‘참고사항’으로 “검열 당시 CIA 파견 검열관”이 “보안상 유해로운 점이 없다”고 판단했다는 내용을 부기하고 있다. 여기에서 6월 15일 합동검열에 중앙정보부가 참여하여 “보안상 유해로운 점 없다”는데 동의해 놓고 뒤늦게 다른 소리를 하는 것에 대한 난감함이 묻어난다. 1964년 중앙정보부의 입장 번복으로 감독이 구속되었던 <7인의 여포로> 사건을 겪은 후였기 때문에 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냥 반공영화가 아니라 ‘기독교반공문예영화’였다. 6월 26일에 공보부는 이 영화가 “세계 각국에서 다량 발매된 재미교포” 작가의 소설에 충실하였다는 점과 “당초 귀부와의 합동검열 당시 합의된 바” 있으며, “귀부 추가제한요구를 집행하는 경우에 예견되는 상황을 감안”해야 한다는 점을 들어 “현행대로 상영토록” 하겠다는 의견을 중앙정보부에 통보한다. (그림 2) 방화 “순교자” 제한조치 요청에 대한 회신 이로써 국방부와 중앙정보부의 사후 검열은 일단락된 듯한데, 아직 등급을 정하는 문제가 남게 된다. 6월 17일에 합동영화주식회사가 ‘학생관람허가신청서’를 공보부에 접수한 뒤 6월 26일에 문교부 측에서 제한사항 없이 ‘고등학생 이상’에 관람을 허용해도 된다는 의견을 공보부에 통보한다. 그런데 7월 2일에 문교부가 입장을 바꾸어 군인의 방에 걸린 태극기가 표준형이 아니므로 표준형 태극기로 화면을 수정해야 고등학교 이상 관람을 허용한다는 의견을 보낸다. 그리고 7월 6일에 내무부 치안국 보안과에서 ‘학생관람불가’ 의견을 공보부에 보낸다. 7월8일 공보부에서는 문교부와 내무부의 의견을 종합하여, 등급은 ‘미성년자관람불가’로, 문제가 된 태극기 화면은 표준형 태극기로 수정하여 필름과 대본까지 다시 제출하라고 제작사에 통보한다. <7인의 여포로> 사건, 유현목, 그리고 <순교자> 당시 정부의 정책 방향에 거스를 것이 없어 보이는 영화가 이렇게 수난을 겪게 된 것에는 여러 이유가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영화 한 편을 두고 문화 담당 기관은 물론 국가안보, 치안, 교육을 담당하는 복수의 행정기관들이 검열에 참여하였다는 데 이유가 있다. 이에 대해 국책에 부응하는 영화라고 해서 검열을 덜 받은 것이 아니라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더 간섭하려는 기관이 많았다는 것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또한 <7인의 여포로> 사태 이후 중앙정보부가 영화 통제에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는 점도 눈에 띈다. 5.16쿠데타 직후에 설립된 중앙정보부는 박정희 정권 내내 전방위적으로 권력을 강화해간다. <7인의 여포로> 사태는 영화계에서 하나의 변곡점이 된 사건이었고 <순교자>는 그 여파 속에서 검열을 받은 것이었다. 여기에 당시 기독교계의 반응은 또 하나의 중요한 변수였다. 유현목 감독은 자서전에서 <순교자> 개봉 당시 상영을 앞두고 기독교계가 반발했다고 회고한다. 목사들이 문공부장관을 찾아가 영화에서 신목사(김진규)가 ‘신은 없다’고 말하는 대목을 문제 삼으며 상영금지를 호소했다는 것이다. 개봉한 이후에도 기독교계의 반대는 계속되어서 지방 상영극장 앞에서는 신자들이 입장을 막기도 했다고 말한다. 1) 당시 신문을 보면 기독교계가 일방적으로 반대만 한 것은 아니고 찬반이 있었다. 그리고 문제가 된 것은 영화만이 아니라 원작소설부터였다. 1964년 영문으로 출간된 『순교자』(The Martyred) 2) 는 미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남한에도 번역되었다. 그런데 이 소설 속 목사들의 죽음이 거룩한 순교로 묘사되지 않았다는 것 때문에, 국내 일부 기독교계에서는 김은국 작가를 “20세기의 가롯 유다”라고까지 비난했다. 유현목 감독이 이 소설을 영화화하자 큰 화제가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소설에 대한 비난의 연장선상에 놓이게 된 것이었다. 목사들이 공산당 앞에서 신을 부정했다는 것도 문제였지만, 그것을 증언하는 인물이 북한군 소좌라는 것이 ‘반기독교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는 분단 이후 남한 개신교와 반공 이념의 강력한 결속이 ‘배교와 이단’의 판단에 결정적으로 작용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기독교계에서도 “현대 기독교의 문제를 제시하고 기독교적인 고민을 심화하고 있는 작품”이라고 평가하는 목사들―문익환(한국신학교), 변선환(이화여고 교목), 김광우 목사 등―이 있었다. 3) 또한 언론에서도 “성직자의 고독을 묘파” 4) 한 “중량감 넘치는 역작” 5) 이라는 호평이 이어졌다. 그러던 7월 13일에 유현목 감독은 돌연 반공법 위반 혐의로 입건된다. 1965년 3월 23일에 ‘은막의 자유’ 6) 라는 주제로 열린 세계문화자유회의 한국본부 세미나에서 발제한 내용이 뒤늦게 말썽이 된 것이었다. 7) 공안 검찰은 <순교자>뿐만 아니라 <오발탄>(1961)과 <잉여인간>(1964)도 용공적이라고 판단하여 유현목 감독을 소환했다고 전한다. 8) <7인의 여포로>의 이만희 감독에 이어 또 다시 영화감독이 반공법으로 입건되는 데 대해 영화계는 물론 보수언론에서도 우려스러워했다. 9) 이와 같은 논란 속에서 <순교자>는 더욱이 문제작이 되었고, 영화에 대한 평가는 높아졌다. 1965년에 베니스영화제에 처음으로 5편을 출품했는데, 그 맨 앞에 <순교자>가 놓였다. 10) 1965년 『실버스크린』 6월호에서는 “세계명작을 영화화한 영화예술의 극치”로 <순교자>를 소개한다. 11) 그리고 9월호에서는 종전에 영화학도들을 위해 연재해오던 학술적인 코너 3개를 합쳐 “내일의 영화인을 위한 쎄미너”라는 지면을 만들고 개봉된 영화 중에서 문제작 한 편을 골라 집중적으로 분석 검토하는데, 그 첫 번째 텍스트로 <순교자>를 선정한다. 1965년 말에 가면 <순교자>에 대한 문화예술계의 평가는 “종교논쟁까지 불러일으켰던 작품”으로 “테마는 휴머니즘”으로 정리되는 분위기였다. 그리고 유현목 감독은 공보부에서 주관하는 대종상 감독상을 수상한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유현목 감독에 대한 검찰의 수사는 계속되어 1966년 1월 서울지검은 반공법 위반에 음화제조 혐의(<춘몽>)를 더해 유현목 감독을 불구속 기소한다. 1967년 3월 반공법에 대해서는 무죄가 선고되고, 음화제조에 대해서는 벌금 3만원 형이 확정되기까지 법적 논란은 계속된다. 일련의 과정은 법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검찰이 중앙정보부와 함께 문화예술까지 재단할 수 있는 상위의 공권력임을 과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언급해 둘 것은 이런 가운데 <순교자>는 미국에 첫 수출되어 상영된 영화 13) 가 되었다는 점이다. 기독교를 매개로 한국전쟁과 인권 문제에 대한 미국의 관심 속에서 국내 공권력의 역학 밖에서 움직이는 힘이 있었음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이로 인한 박정희 정권과 기독교계의 충돌은 1970년대에 들어서며 본격화된다. 1) 유현목, 《영화인생》, 혜화당, 1995, 151-152쪽. 2) Richard E. Kim, The Martyred, George Braziier Inc., N.Y.C., 1964. 3) <기독교계에 순교자 파문>, 《동아일보》, 1965.6.29. 4) <[새영화] 성직자의 고독을 묘파>, 《경향신문》, 1965.6.19. 5) <[영화평] 중량감 넘치는 역작>, 《조선일보》, 1965.6.20. 6) <은막의 자유>, 《경향신문》, 1965.3.24.; <은막의 자유」, 《조선일보》, 1965.3.25. 7) <영화감독 유현목 씨 입건>, 《경향신문》, 1965.7.13. 8) <유현목 감독 입건 논문 말썽>, 《조선일보》, 1965.7.14. 9) <만물상>, 《조선일보》, 1965.7.15. 10) <<순교자> 등 다섯 작품 베니스영화제에 출품>, 《동아일보》, 1965.9.14. 11) <[이달의 문제작] 세계명작을 영화화한 영화예술의 극치>, 《실버스크린》, 1965년 6월호, 114쪽. 12) <[지상콘테스트 200자 시리즈(완)] 청룡상에 출품된 영화들-순교자>, 《조선일보》, 1965.11.28. 13) <영화 <순교자> 미에 첫 수출>, 《동아일보》, 1966.7.21.; <미주 등서 일제상영>, 《조선일보》, 1966.7.21.
사진: " A Brighter Summer Day ", IMDb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과거에 만난 작품과 그로부터 얻은 영감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 본 글에는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의 일부 장면과 결말에 대한 묘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 < 장손 >(2023)의 개봉 이후 인터뷰나 관객과의 대화를 통해 수많은 선배 감독의 영화를 참고하고 영향받았음을 솔직히 고백했다. 몇몇 필자들은 <장손>을 두고 존경받는 한국 감독들의 계보를 잇는 영화라 평하기도 했다. 감사하지만 과찬이라 민망할 따름이다. 지난 3월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열린 대담 에서 금동현 평론가는 나에게 내밀한 질문을 던져왔다. 그는 영화감독들이 공개적으로 영향받았다고 언급하는 영화들은 대개 거짓말이라 믿지 않는다며 나에게 숨기고 있는 진짜 영향받은 영화가 무엇이냐 물었다. 그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가장 소중한 것은 가장 깊이 숨기는 법이다. <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에드워드 양, 1991)을 처음 본 감각을 또렷이 기억한다. 무언가 대단한 걸 본 건 분명한데 이 영화가 왜 대단한지 설명할 길이 없었다. 하지만 문득 다른 매체는 할 수 없는 무언가를 영화는 능히 해낼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겼다. 십여 년이 지난 지금도 이 영화의 본질을 독자분들께 설명할 자신은 없다. 당시 대만 정치 상황과 에드워드 양의 영화 미학에 대한 뛰어난 평론은 많으니, 그것들을 참고해주기 바라며 나는 그저 ‘이 영화가 나를 스쳐 지나가며 남긴 흔적들’을 적어보려 한다.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은 1961년 6월 대만에서 최초로 발생한 미성년자 살인사건을 모티브로 만들어졌다. 공교롭게도 감독 에드워드 양은 살인을 저지른 소년과 동갑으로, 이 사건은 그에게 잊지 못할 기억으로 각인되었을 것이다. 데뷔 이후 < 공포분자 >(1986)에 이르기까지 대만의 모더니티를 탐구하던 그는 돌연히 1960년 자신의 어린 시절로 돌아간다. 이 영화의 주인공인 샤오쓰가 감독 에드워드 양처럼 상해 출신의 외성인이라는 설정은 우연일 리가 없다. 비록 자전적인 이야기는 아닐지언정 자기 삶이 깊게 밴 친숙한 이야기임이 틀림없다. 사진: " A Brighter Summer Day ", IMDb 이 영화는 지루하거나 불친절하지 않다. 하지만 다 보고 나서 이 영화가 말하는 바가 무엇인지 인물들이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떠올려 보면 쉽사리 답할 수가 없다. 에드워드 양은 의도적으로 영화의 모든 씬을 연결하지 않고 파편화한다. 영화는 샤오쓰를 따라가기도 하고 샤오밍을 따라가기도 하고 제3자를 따라가기도 한다. 타이베이의 한 마을이라는 제약 아래 카메라는 마을 곳곳을 반복적으로 비추며 그 변화를 보여준다. 예컨대 영화 초반에 217파와 학교에서 다투던 슬라이가 몰래 만나던 여성이 샤오추이인줄 알았으나, 3시간 30분이 지나서 사실은 샤오추이가 아니라 샤오밍임을 알게 되는 식이다. 영화는 수많은 복선으로 가득해서 단 한 장면이라도 놓치면 이후 등장하는 장면에서 의도하는 바를 알 수 없게 된다. 하지만 모든 장면을 놓치지 않는다 한들 샤오쓰가 왜 샤오밍을 찌르는지, 에드워드 양이 이 영화를 통해 던지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선명하지 않다.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은 완성될 수 없는 조각 그림 맞추기인 셈이다. 어쩌면 에드워드 양의 목표는, 애초에 정답이 없는 조각 그림 맞추기를 관객들이 나름대로 필사적으로 맞추려고 노력하도록 하는 데 있지 않을까. 관객들이 서사에 함몰되지 않고 씬과 씬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유추하고 지연된 정보를 종합하는 사유의 과정에서 1960년의 장제스 치하의 타이베이 공기를 느껴보기를 에드워드 양은 바랄 것이다. 제목 그대로 영화 말미에 주인공 샤오쓰는 자신이 사랑하는 샤오밍을 칼로 찌른다. 사건을 저지른 직후 샤오쓰의 행동을 보면 마치 제정신이 아닌 사람처럼 헛소리를 해대고 발작을 일으킨다. 마치 우리가 이제껏 보아온 샤오쓰와 다른 사람이 된 것 같다. 샤오쓰가 왜 샤오밍을 칼로 찌르게 됐는지를 살펴보기 위해선 먼저 샤오밍에 대해서 알아볼 필요가 있다. 샤오밍은 마성의 매력을 가진 여학생으로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가 그녀를 좋아한다. 현재 그녀는 소공원파의 보스인 허니의 애인으로, 허니는 그녀 때문에 산동파의 보스를 죽이고 타이베이를 떠나 잠적한 상태다. 자연이 진공을 허락하지 않듯 허니가 사라지자 동네 수많은 남학생은 샤오밍에게 접근한다. 그리고 샤오밍 또한 남자들을 뿌리치지 않고 다음 짝을 고르듯 만난다. 하지만 이를 샤오밍의 남성 편력으로 오해해서는 곤란하다. 슬프게도 샤오밍에게 남자란 생존 전략의 수단에 가깝다. 샤오밍과 그녀의 엄마는 외성인으로 타이베이에 마땅한 기반이 없다. 남의 집에서 식모살이하던 그녀는 엄마의 지병인 천식이 도지자 남의 집을 전전한다. 핑 아주머니에게 쫓겨난 그들은 야박한 친척 집을 들렀다가 소공원파의 경쟁조직인 217파에게까지 의지한다. 의아해 보이지만 사실 그녀가 217파 보스와 연인관계였던 것을 떠올려보면 자신의 친정집으로 돌아간 셈이다. 그러다 사라졌던 허니가 다시 돌아오자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 허니에게 의지한다. 그런데 영화를 보면 이상한 점이 있다. 허니와 샤오밍이 연인이라고 하지만 그 어떤 장면에서도 두 사람의 스킨십 장면이 없다. 그 흔한 손잡는 장면이나 포옹 장면도 없다. 그저 허니의 첫 등장에서 두 사람이 함께 서 있는 장면이 유일하게 함께 담긴 장면이다. 그리고 허니는 샤오쓰에게 “샤오밍이 널 많이 좋아한다고 그러더라”라고 말한다. 이게 어디 남자친구가 할 법한 말인가. 허니는 애인이 아니라 오히려 샤오밍에게 부재한 오빠나 아버지에 가깝다. 허니는 샤오밍의 유사 가족인 셈이다. 비극적인 사고로 허니가 죽자 다시 샤오밍은 떠돌아다닌다. 자신에게 환심을 보이는 의사 선생님에게 의지했다가 그에게 약혼녀가 생기자 다시 샤오마의 집에 식모살이로 들어간다. 그리고 아무런 능력이 없는 샤오쓰는 이 모든 과정을 무기력하게 보고 있을 수밖에 없다. 샤오밍과 허니 (사진: "A Brighter Summer Day"_ 1 , 2 , IMDb) 그러면 반대로 남자들은 왜 이렇게 샤오밍에게 열광하는가. 동네 불량배 남학생들은 허니가 사라지자 샤오밍에게 접근한다. 표면적으로 드러난 슬라이, 타이거, 샤오쓰 외에도 더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들은 동네의 강력한 1인자 허니가 등장하자 꼬리를 감췄다가, 허니가 죽자 다시 샤오밍에게 접근한다. 샤오밍을 욕망하는 남자들은 샤오밍에게 경쟁적으로 구애하지 않고 서로 싸우기에 바쁘다. 그들에게 진정 원하는 것은 ‘샤오밍의 마음’이 아니라 샤오밍을 욕망할 수 있는 위치인 ‘허니의 위치’에 오르는 것이다. 르네 지라르를 빌려 이야기하면 자신 내부의 자발적 욕망이 아니라 중개자에 의해 만들어진 허상의 욕망인 셈이다. 남자들은 스스로 ‘샤오밍’을 욕망한다고 생각하지만, 이는 거짓이며 욕망 중개자인 ‘허니’를 모방하고 있을 뿐이다. 그들에게 정작 중요한 것인 ‘샤오밍의 마음’을 얻어 다른 남자들의 우위에 서는 ‘허니의 위치’에 오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샤오밍을 욕망하는 남자들은 하나같이 샤오밍이 허니의 이야기를 하는 것을 질투하기는커녕 중요하게 생각한다. 샤오밍의 마음을 얻지 못한 남자들, 다시 말해 허니의 위치에 오르지 못한 자들은 모두 무너진다. 슬라이는 권력을 잃고 타이거 또한 말을 잃는다. 주인공 샤오쓰도 샤오밍을 평생 지켜주겠다며 고백하지만 거절당하자 언제 그랬냐는 듯 다른 여학생과 만남을 가지고 키스를 한다. 그리고 다음날 샤오쓰는 자신을 지켜준다는 약속을 지킬 거냐는 샤오밍에게 자신의 부정을 숨기고 뻔뻔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샤오밍과 교제를 시작한 샤오쓰는 잠시 행복할 뿐 그녀가 떠나 버릴까 봐 불안하다. 샤오쓰는 샤오밍이 주위 남자들을 정리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널 깔볼 거야”라고 말하는데, 이는 실상 다른 사람들이 아닌 샤오쓰의 본심이다. 불미스러운 일로 퇴학을 당한 샤오쓰는 점점 샤오밍과 멀어진다. 큰 나무 아래서 샤오쓰는 주간부에 들어가기 전까지 샤오밍을 보러 가지 않겠다고 말하자 샤오밍은 “허니가 타이난으로 떠났을 때랑 비슷하네”라고 대답한다. 이는 마치 앞으로 벌어질 일의 불길한 복선처럼 느껴진다. 두 사람의 가장 빛나던 순간인 나무 아래 장면 다음 샤오마의 집으로 연결된다. 샤오마의 아버지는 고위 장군으로 그의 집에는 커다란 일본 장도와 총이 가득하다. 캣과 비행기는 전쟁놀이를 하고 있고 총을 가지고 장난을 치던 샤오밍은 실수로 샤오쓰를 향해 총을 쏴버린다. 샤오쓰는 그대로 얼어버리고 놀란 샤오마는 샤오밍의 손에 들린 총을 빼앗고는 뺨을 때린다. 모두의 선망 대상이자 친구 샤오쓰의 애인이지만 샤오마에게는 샤오밍은 그저 입버릇처럼 말하는 ‘여자 따위’에 불가하다. 여기서 결코 좁힐 수 없는 권력의 차이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영화 속 남자들, 총을 겨눈 샤오밍 퇴학을 당한 샤오쓰는 주간부에 들어가기 위해 공부에 매진하지만 계속 샤오밍을 그리워한다. 캣의 집에 놀러 간 샤오쓰는 캣에게 샤오밍의 안부를 묻는데 이때 샤오쓰가 은장도의 주인이자 정절를 중요시한 일본 여자의 사진을 보고 샤오밍을 언급한다는 사실은 꽤 의미심장하다. 이후 샤오밍을 볼 수 없는 샤오쓰는 일본 여자의 사진을 통해 샤오밍을 생각한다. 불안한 샤오쓰는 샤오밍이 자신만을 생각하고 정절을 지키길 바라는 것이다. 하지만 슬라이를 통해 샤오밍이 샤오마의 집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샤오쓰는 샤오마와 갈등한다. 캣이 중재해 보려 하지만 샤오마가 칼을 들고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 샤오쓰는 촬영장에서 종이에 글을 쓰더니 손전등을 두고 사라진다. 눈이 나쁜 샤오쓰가 항상 밤마다 들고 다니던 손전등을 버린다는 것은 더 이상 세상을 볼 필요가 없다는 뜻이며, 그가 쓰던 글은 나중에 밝혀지지만 둘째 누나에게 남기는 유서였다. 샤오쓰는 죽기를 각오한 것이다. 캣의 은장도를 들고 학교로 찾아간 샤오쓰는 샤오마 대신에 샤오밍을 우연히 마주치고는 이렇게 말한다. 사진: " A Brighter Summer Day ", IMDb “이제 네게 남은 희망은 나밖에 없어. 과거에 허니가 그랬지. 네가 왜 허니를 못 잊는지 알아? 그건 네가 날 허니처럼 생각해서 그래.” 자신이 곧 허니라고 말하는 샤오쓰는 자신이 샤오밍의 유일한 구원자라고 주장한다. 이에 샤오밍은 이렇게 대답한다. “내가 변하도록 도와주겠다는 거야? 너도 똑같아. 내가 사람을 잘못 봤네. 너도 다른 애들처럼 나한테 감정을 바라고 잘해 준 거였어. 그러면 안심이 될 테니까. 참 이기적이야. 네가 날 바꾸겠다고? 난 이 세상과 같아. 세상은 변할 수 없어.” 애석하게도 샤오밍은 샤오쓰를 ‘허니’가 아닌 허니가 되지 못한 ‘다른 애들’로 취급해 버린다. 순간 샤오쓰는 자신의 존재를 부정당한 셈이다. 허니가 되지 못한 공허한 존재, 샤오쓰는 반대로 자신이 지키려던 존재, 샤오밍을 부정해 버린다. 그건 샤오밍을 죽여버리는 것이다. 그는 정절을 지키지 못한 샤오밍을 비난하듯 은장도로 찌른다. “넌 희망이 없어. 뻔뻔한 계집 부끄러운 줄 알아.” 자신의 존재를 부정당한 샤오쓰는 그대로 미쳐버리고 다시는 영화에서 그의 정상적인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은 샤오쓰가 샤오밍을 왜 죽였는지 묻는 영화가 아니라 샤오쓰가 샤오밍을 죽이기까지 어떻게 미쳐가는지 보여주는 영화라 할 수 있다. 아쉽게도 내 능력의 부족과 마감 기한이 임박한 관계로 영화 속 학생들의 세계 중 일부만 다루는 반쪽짜리 글로 마무리해야 할 것 같다.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영화 속 어른의 세계를 다뤄보기를 바라며 마지막으로 독자분들과 나누고 싶은 인상적인 장면 세 가지와 영화를 보며 해소되지 않는 질문 세 가지만 공유해보고 싶다. 1) 체육 시간에 캣은 허니를 무시하는 타이거에게 공을 날린다. 공에 맞은 타이거는 이를 샤오쓰의 행동으로 오해한다. 하교하던 샤오쓰 일행은 어둠 속에서 웃음소리와 함께 날아온 농구공을 마주한다. 개인적으로 태풍 속에서 217파를 살육하는 장면보다 훨씬 무섭다. 타이거로 유추는 가능하지만 상대방이 누군지 몇 명인지 어떤 무기를 들고 있는지 우리는 도저히 알 수 없다. 에드워드 양은 이 장면에서 공포를 보여주는 대신 상상하게 만든다. 보여주는 것에는 한계가 있지만 우리의 상상은 한계가 없다. 2) 샤오쓰의 아버지는 친한 친구 왕 선생과 연루되어 이적 혐의로 며칠 동안 비밀경찰의 심문을 받는다.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자신이 알고 모든 것을 진술하기를 강요받는다. 이 장면의 첫 컷에서 카메라는 아버지에게 천천히 다가간다. 발소리와 함께 진술을 그만해도 된다는 경찰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면 경찰의 시점 샷으로 유추된다. 아버지는 시간을 조금 더 달라고 부탁하는데 이때 먼 곳에서 다른 경찰의 목소리가 들린다. 놀란 아버지는 뒤를 돌아보지만, 그곳에는 아무도 없다. 아버지는 환청을 들은 셈이다. 그런데 이때 샷 구성이 굉장히 흥미로운데, 두 번째 컷에서 아버지의 시점 샷 대신에 대신 경찰이 있을 것이라 예상했던 위치에서 시점 샷으로 연결된다. 아버지가 경찰의 시선으로 자기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셈이다. 독재국가의 폭력에 미쳐버린 아버지를 보여줌과 동시에 자기검열과 감시의 시선을 내면화한 죄수의 모습을 효과적으로 그려낸다. 세 번째 컷에서 드디어 아버지의 시점 샷으로 문이 활짝 열린 모습이 나오는데 아버지는 왠지 열린 문으로 쉽사리 나가지는 못할 것 같다. 3) 샤오밍이 샤오마의 집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샤오쓰는 당장 샤오마의 집으로 찾아간다. 샤오쓰가 어떻게 된 일이냐고 따지자, 샤오마는 샤오밍이 자신의 집에 찾아와 일자리를 달라고 부탁해서 받아준 것이라고 대답한다. 마치 별일 아니라는 듯 들어와서 샤오밍을 만나고 가라고 하지만 샤오쓰는 끝내 들어가지 않는다. 이 장면에서 카메라는 샤오마를 따라 오른쪽으로 이동한 다음 아무런 움직임도 없이 샷이 나누어지지 않은 채로 지속된다. 우리는 집 안에 있는 샤오마를 볼 수 있지만, 바깥에 있는 샤오쓰는 볼 수 없다. 오직 목소리로만 샤오쓰를 느낄 수 있다. 그렇다면 에드워드 양은 왜 컷을 나눠서 샤오쓰를 비추지 않았을까? 에드워드 양은 이 장면에서 샤오쓰가 차마 집 안으로 들어올 수 없는 심정을 찍고 싶었을 것이다. 그는 샤오밍이 살고 있는 샤오마의 집에 한 발짝도 들이고 싶지 않은 샤오쓰의 내면을 샤오쓰가 등장하지 않는 장면으로 형상화해낸다.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은 모든 장면이 뛰어나지만 특히 이 장면이 가장 훌륭하다. 나에게 영화라는 매체에 대한 사유를 매번 하게 만드는 선생님 같은 장면이다. - - - 앞서 말했듯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은 완성될 수 없는 조각 그림 맞추기 같은 영화다. 몇 번을 봐도 해결할 수 없는 의문점이 생긴다. 첫 번째 질문. 의사 선생님은 왜 샤오밍에게 호의를 베풀었는가. 의사 선생님은 샤오밍과 그녀의 어머니까지 치료해 주고 지낼 곳을 마련해준다. 샤오밍의 말처럼 의사 선생님도 그녀를 좋아해서 무언가 대가를 바라고 한 행동인지 아니면 순수하게 의료인으로서의 호의를 베푼 것인지 알 수 없다. 샤오밍이 죽고 난 뒤 그녀와 어떤 관계였냐고 따져 묻는 기자의 말에 발끈하는 의사 선생님의 모습에서 우리는 그를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 주저하게 된다. 다음 질문. 샤오추이는 어떤 인물인가. 샤오밍이 샤오마의 집에 산다는 사실을 알게 된 샤오쓰는 샤오추이와 데이트를 한다. 이때 샤오추이는 슬라이가 학교에서 217파와 붙었을 때 옆에 있던 여자가 자신이 아닌 샤오밍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슬라이가 허니가 돌아오면 맞아 죽을까 봐 샤오밍이 아닌 자신이라고 소문을 냈다는 것이다. 사실 샤오쓰는 몰랐던 사실이지만 샤오추이는 이런 비밀을 지켜줘서 고맙다고 말한다. 그런데 샤오추이가 고마워하는 이유가 과연 무엇인지 궁금해진다. 남자들이 샤오밍을 욕망하며 허니가 되고 싶었던 것처럼 샤오추이도 슬라이를 욕망하며 샤오밍이 되고 싶었던 것일까. 마지막 질문. 엔딩 장면의 의미는 무엇인가. 결국 15년형을 선고받은 샤오쓰가 떠나고 남은 가족들은 대청소를 하고 있다. 그러던 중 고장 났던 라디오가 다시 작동하더니 대학 합격 명단이 흘러나온다. 마당에서 옷을 정리하던 샤오쓰의 어머니는 샤오쓰의 교복을 발견하고는 생각에 잠긴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수많은 명단 중 샤오쓰의 본명인 ‘장첸’이라는 이름이 흘러나오는데, 현실적으로 중학생이자 감옥에 있는 샤오쓰는 대학에 들어갈 수 없다. ‘장첸’이라는 이름이 우연으로 들어갈 리도 없는데 에드워드 양은 왜 이런 장면을 엔딩으로 선택했을까. 이 정답 없는 질문들을 공유하며 언젠가 독자분들과 함께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에 대한 대화를 나누기를 고대한다. 마지막으로 내 마음의 북극성 같은 에드워드 양 감독님께 존경의 인사를 보내며, 나 또한 이렇게 끊임없는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영화를 만들겠다는 약속을 남긴다. 오정민(영화감독) l 영화로 먹고사는 방법을 열심히 찾고 있는 베짱이. < 장손 >(2023) 연출.
한국영상자료원이 보유한 10,000건 이상의 검열 행정자료들 중 흥미롭고 주목할만한 것들을 선별하여 영화사적 배경이나 상황과 함께 소개하는 시리즈입니다. 이 글들을 통해 새로운 자료들을 발견하는 기쁨과 아울러, 한국영화사를 보다 다양한 관점에서 볼 수 있는 계기를 만나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 7인의 여포로 >(이만희, 1965)는 한국검열사에서 매우 중요한 영화이다. 한국영화사 최초의 반공법 위반, 최초의 감독 구속 사건을 초래한 유례 없는 사건의 주인공이었기 때문이다. < 돌아오지 않는 해병 >(이만희, 1963)의 비평적·대중적 성공으로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던 이만희 감독은 1964년, 새로운 한국전쟁 소재의 영화를 연출한다. 전쟁 중 북한군에게 사로잡힌 간호부대 소속 7명의 여군 포로(정확히는 4명의 여군과 양공주를 포함한 3명의 민간인 여성, 그리고 운전병 1명으로 총 8명이다)를 호송하던 북한군 수색대 대원들이, 중공군에게 강간당할 위기에 처한 여군들을 구하고 남한으로 귀순한다는 줄거리를 가진 이 영화는, 개봉 직전인 1964년 12월 중순 검찰에 의해 ① 감상적 민족주의를 내세웠고 ② 무기력한 국군을 묘사했으며 ③ 북한괴뢰군을 찬양하고 ④ 미군에게 학대받는 양공주들의 참상을 과장 묘사하는 등의 외세 배격 풍조를 고취했다는 네 가지 혐의로 기소되었다. 이때 검찰은 이만희 감독의 구속영장을 청구했으나, 당시 법원은 영장 발부를 기각했다. 이듬해 2월, 검찰은 다시 구속영장을 청구했고 이 청구가 받아들여져 이만희 감독은 3월 보석으로 풀려날 때까지 약 40일간 옥중 생활을 해야 했다. 1965년 12월, 결국 선고유예의 판결을 받았지만, 그 사이 영화는 검열당국에 의해 만신창이가 된 채 1965년 7월 <돌아온 여군>이라는 제명으로 개봉했다. 한국영화사에서 악명 높은 이 사건의 전개 과정과 결말은 당시 검열서류를 통해 상세히 남아있다. 1막: 석연찮은 상영보류 결정 영상자료원에 보존된 검열서류 에 따르면 1963년 11월, 이 영화의 제작신고가 이루어졌고, 약 1년의 시간이 흐른 1964년 12월 7일, 완성된 영화의 본편 검열이 접수되었다. 12월 8일에는 실사 검열이 이루어졌고, 12월 10일에 상영허가가 승인되었다. 양공주의 노골적이고 비판적인 대사 및 여군이 “괴뢰장교에게 경례하는 장면” 등 화면 1개 처, 대사 3개 처에 대한 제한이 가해졌다. 통상적인 수준이었다. 그런데 이 서류는 다른 서류와 달랐다. 일반적으로 상영허가 서류가 영화제작사에 대한 공문 발송의 형태로 이루어지는데 반해 이 서류는 내부 보고의 형태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즉 이 상영허가 결정이 제작사에게 통보되지 못했다는 의미이다. 그 이유는 약 열흘 후인 12월 19일 공보부 검열 실무자들에 의해 작성된 검열경위서를 통해 밝혀진다. 12월 19일은 검찰이 이 영화의 감독 겸 각색자 이만희에 대한 구속영장을 신청하고 필름을 압수한 다음날이었다. 경위서에 의한 영화의 검열 과정은 다음과 같다. (글꼴: 경기천년바탕) 공보부 담당자에 의해 작성된 <7인의 여포로> 검열경위서 (1964. 12. 19.) 위 경위서에 따르면 1964년 12월 10일까지만 하더라도 중앙정보부 검열관은 통상적인 수준의 제한 및 개봉에 동의하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그런데 11일, 급작스럽게 보류방침 이 통보된다. 그 내막이 알려져 있지는 않다. 중앙정보부의 상영보류 조치와 검찰의 기소가 결정되면서 공보부는 급히 움직여야 했다. 일부 지역에서 예고편이 상영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12월 하순 공보부는 각 지역의 시도지사에 공문을 발송했고, 합동영화주식회사는 지역 극장에서 상영 중 혹은 상영 대기 중이던 예고편 필름을 반환받았다. 한편 공보부는 상영보류 후 검찰 기소에 들어가기 전인 12월 15일 공보부자문위원회영화분과위원회(위원장 이순근)의 자문 심의를 받았다. 이순근, 이청기, 여석기, 이진섭 등으로 구성된 자문위원들이 12월 16일 제출한 장문의 보고서는 이 영화의 작품적 측면, 사상적 측면, 법적 측면을 고찰하였고, 종합적으로 군데군데 오해를 살 여지는 있지만 작품적으로 우수하고 반공영화임에는 틀림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당시 언론들 역시 공보부 자문위원들의 견해와 대체로 일치했고, 이들의 입을 빌어 영화에 대한 검찰 수사를 비판했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12월 21일, 서울형사지법 부장판사는 감독에 대한 구속영장은 기각하고 필름 압수영장만 발부했다. 물론 사건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수사 기간 동안 영화에 대한 상영허가는 여전히 보류된 상태였고 이 영화의 수난은 이제 시작이었다. 2막: 감독의 구속과 논란의 확대(1965년 2월) 1965년 1월 검찰은 감독을 소환조사한다. 불구속 상태였지만 사건은 여전히 진행 중이었다. 2월 4일 마침내 감독이 구속 기소되었다. 검찰은 영화의 대사와 캐릭터를 거론하며 앞서 언급한 네 가지 혐의를 거론했다. 감독 구속이라는 초유의 사건은 영화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당시 언론들은 앞다투어 표현의 자유가 위축될 것을 우려했고, 검찰의 무리한 수사를 비판했다. 영화인협회 산하 영화감독협회 역시 공보부에 접수한 진정서를 통해 검찰의 공소장을 조목조목 비판하고, “한 예술인의 인신구속이 앞으로의 창작활동을 심리적으로 위축케 할지 모르”며, “반공군사영화가 앞으로 ‘스크린’에서 자취를 감추는 위기를 조성할 우려”가 있음을 지적하며 이만희 감독에 대한 선처를 호소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사회적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감독의 인신구속을 계기로 검열당국은 2월 6일 합동영화주식회사에 영화상영허가 보류를 공식적으로 통보한다. 동 영화가 반공법 위반 혐의로 입건수사 중에 있다는 이유였다. 구속 다음날 발 빠르게 작성된 서류였다. 1964년 12월 7일 신청된 서류에 대한 2개월 만의 공식적 답변이었던 셈이다(물론 당사자 간의 비공식적인 의사소통은 있었을 것이다). 이후 검열당국의 반응은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3월 15일 서울형사지법은 이만희 감독의 보석을 허가하여 석방 결정했다. 사회적인 여론과 영화계의 반응이 부정적인 가운데 감독마저 석방되면서 영화를 살리기 위한 타협이 필요한 시점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만희 감독의 선처를 호소한 감독협회 진정서 (1965. 2. 10.) 3막: 천신만고 끝 누더기 상태의 개봉 합동영화주식회사는 4월 19일 작성하여 29일 접수한 민원에서 재편집과 보충촬영을 했으니 재심의 후 상영보류를 해제해주기 바란다는 취지를 밝힌다. 그런데 이 재편집의 결과물이라는 것이 대사 삭제 100여 개처, 화면 삭제가 10개 처에 달하는 대규모 수정판이었다. 편집의 대상은 대개 검찰의 공소장에서 거론된 네 가지 문제의 흔적을 없애는 것이었는데, 그중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한 것은 전반부는 양공주 관련, 후반부는 북한군의 언행에 관련된 내용이었다. 또한 북한 수색대장과 동료들이 “자유대한으로 월남귀순할 것을 모의”하는 장면이 보충촬영을 통해 추가되었다. 이는 귀순의 정당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이 민원은 공식적으로는 4월 29일에 접수되었지만, 부속 자료를 감안할 때 실제로는 4월 20일에 접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공보부 영화과는 중앙정보부 검열 담당과 함께 4월 27일 재편집본에 대한 재심의를 진행했다. 재심의에 대한 중앙정보부의 의견은 2주가 훨씬 지난 5월 14일 전달되었다. 영화사 측의 대규모 편집에도 불구하고, 정보부는 이에 만족하지 않았다. 중앙정보부는 우선 영화제명을 변경할 것을 요구했고, “검찰에서 기소한 문제점을 완전 삭제치 않았으므로 이를 시정하고 반공적인 내용으로 대폭 보강할 것”을 요구했다. 완전 삭제치 않은 부분으로 거론된 것은 “괴뢰군이 양공주를 총살하는 장면, 중공군이 여포로를 겁탈하려 하자 인민군이 중공군을 사살하고 인민군이 영웅적으로 동족애를 발휘하는 장면” 등 6개 장면이었다. 나아가 영화의 장면들을 “삭제하고 재편집함에 있어 관객으로 하여금 뚜렷한 반공적 이념을 공고히 하도록 주의깊게 보강”할 것을 요청했다. 애초 제작사의 재편집을 거치며 원모습을 거의 상실했던 영화는 그 잔재마저 사라져가고 있었다. 중앙정보부가 공보부에 보낸 「영화재심 의견통보」(1965. 5. 14.) 이에 영화사는 5월 25일 자로 영화검열보류재심 신청을 제기한다. 흥미로운 사실은 작성자와 작성일자를 알 수 없는 공보부 내부 메모(부전지)에 의하면 공보부가 “CIA”에 해당 영화에 대한 의사를 문의했고, CIA, 서울지검 등의 관계기관과 충분한 합의를 거친 후에 보류해제 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는 점이다. 그간 필자를 포함한 몇몇 연구자들이 “CIA”를 미국의 정보기관으로 오해하는 일도 있었으나, 여러 정황을 감안하건대, 한국 중앙정보부의 영어식 약자로 생각된다. 합동영화주식회사는 5월 25일 상영보류에 대한 재심을 요구하였으나, 공보부 내부 문건에 의하면 일부 필름의 재편집이 완료되지 못해 검열이 이루어지지는 못했다. 그러나 재편집 과정이 그렇게 시간을 소요하지 않는다는 점을 감안할 때 어쩌면 5월 25일 당시 필름이 재입고되었으나, 공식적인 서류에 드러나지 않은 과정을 통해 정부 측의 불만족 사항이 전달되어 필름이 반려되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는 5월 26일 CIA 측에 재심을 통고했다는 공보부의 7월 5일 자 서류상의 내용을 감안할 때 더욱 신빙성이 높아진다. 어쨌든 재검열 대상 필름은 6월 23일 입고되었고, 6월 28일 중앙정보부가 참석한 가운데 재검열이 이루어졌다. 중앙정보부는 7월 2일 “본 영화는 64. 12. 8 검열 당시 반공법 위반 혐의로 입건된 후 동 작품이 수차에 걸친 수정으로 불온 부분을 삭제 또는 보강하여 건전한 반공영화로 재편집되어 보안상 유해로운 사항이 없음으로 상영보류 해제하니 상영조치하시기 바랍니다”라는 의견을 전달했다. 7월 2일 중앙정보부의 입장을 전달받은 공보부는 7월 10일 마침내 영화 제명을 <돌아온 여군>으로 개제하고, 추가 대사 삭제 9개 처의 의견으로 상영보류 조치를 해제 하게 된다. 중학생 이상 미성년자 관람가 등급이었다. 7월 10일 상영보류 해제를 통고받은 영화사는 드디어 7월 30일 자로 이 영화를 명보극장 에서 개봉했다. 이 영화의 개봉 당시 검열로 화제가 되었던 사실을 강조하여 홍보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1965년 7월 28일 자 경향신문 광고에는 “상영금지되였든 화제의 전쟁드라마! 드디어 상영금지 해제”라는 자극적인 선전문구와 함께 “칠인의 여포로”라는 원명을 적시하고 있다. 이는 제작사가 검열을 상업적으로 활용한다는 최근까지의 검열당국의 주장과 연계할 때 더욱 흥미로운 부분이기도 하다. <돌아온 여군> 광고 (경향신문, 1965. 7. 28.) 4막: 개봉이 끝이 아니었다-국방부의 참전 드디어 기나긴 과정이 끝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뒤늦게 국방부 가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국방부는 1965년 7월 30일 이 영화가 “여군 전체의 사기를 극도로 저하시키고 군의 대외 위신을 손상하며 장차의 여군 모병에 큰 지장을 초래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으므로 다음과 같이 삭제 또는 수정하여 상영하도록 귀부에서 조치하여 주시기 의뢰”한다. 구체적으로 문제가 되었던 장면은 인민군 부관이 여군을 강간하는 장면과 관련 대사였다. 이 요구를 접수한 공보부는 검열 주무기관으로서의 권위와 주관을 제대로 세우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공보부는 국방부의 요청을 자체적으로 판단하지 못하고, 국방부의 요청사항을 받아들일지를 중앙정보부에 문의한다. 이에 대해 중앙정보부는 자부의 의견은 이미 충분히 전달한 상태이므로, 국방부의 요구를 받아들일지는 공보부에서 자체적으로 판단해서 처리하라는 답변을 보낸다. 공보부는 결국 8월 10일, 국방부의 의견을 받아들여 제작사에 추가제한 을 지시했다. 그러나 이러한 추가제한이 어느 정도 실효를 가졌는지는 의문이다. 이 영화는 7월 30일 자로 개봉을 했고, 8월 10일이면 이미 개봉 2주차를 지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개봉관에서 대략 2~3주를 흥행하던 당대의 관행을 감안할 때, 적어도 이 조치는 서울 개봉관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을 것이다. 물론 이후 지방의 개봉 등에는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 국방부, 「군사극영화 “돌아온 여군”에 관한 삭제 의뢰」(1965. 7. 30.) 그리고 이만희 감독에 대한 법원의 판결 절차 역시 진행되고 있었다. 법원의 판결은 1965년 12월 8일에 내려졌다. 처음 문제가 된 지 정확히 1년 만이었다. 당시 서울형사지법은 이만희 감독의 반공법 위반 사건에 대해 징역 1년, 자격정지 1년의 선고를 유예하는 판결을 내렸다. 사실상 무죄에 가까운 판결이었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은 아니었다. 1심의 선고에 대해 검찰은 항소했고, 무려 4년 뒤인 1969년 3월에야 법원이 검찰의 항소를 기각하고 원심을 확정했다. 기나긴 이야기는 이제서야 끝이 났다. 영화적 반공이 본격화되다 우리는 막연하게 반공영화에 대해 정부가 추동 혹은 지원했던 영화 장르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고, 따라서 반공영화는 정부 정책을 지원하는 일종의 관제영화로 인식되어 왔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실제 검열 현장에서 항용 가장 큰 문제를 불러일으키는 영화 장르 중 하나가 다름 아닌 반공영화이기도 했다. 비단 <7인의 여포로>뿐 아니라 1955년 작 이강천 감독의 < 피아골 > 역시 영화의 용공적 성격이 문제가 되었고, 조긍하 감독의 < 철조망 >(1960), 이만희 감독의 < 들국화는 피었는데 >(1974), 이두용 감독의 < 최후의 증인 >(1980) 등도 검열과 관련하여 당국과 마찰을 빚은 영화로 회자된다. 당대 평자들이 <7인의 여포로>를 옹호하는 과정에서 밝혔듯, 영화감독과 같은 창작자를 포함한 영화계 인사들은 보다 흥미로운 반공영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북한군 캐릭터, 한국전쟁에 대한 시각, 전장에서의 병사들의 운명에 대해 보다 입체적이고 복잡한 해석을 가해야 함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창작자의 의도는 검열자가 보기에 때로 작은 뉘앙스의 차이만으로도 한국전쟁과 남한 정부, 혹은 냉전적 세계체제의 본성을 폭로하는 불온한 영화가 될 수 있는 잠재적 위험성을 포함하고 있었다. 따라서 남과 북의 극한적 대결 구도의 선봉에 섰던 반공영화 장르는 뜻하지 않게 논란의 중심에 설 수 있는 위험한 장르이기도 했다. 검열자의 시각에서 <7인의 여포로>는 이러한 반공영화의 잠재적 위험성이 현실화된 극명한 사례였다. 그리고 <7인의 여포로> 사건은 이후 ‘ 영화적 반공 ’의 기준점이 되었다는 측면에서 상징적이다. 1960년대 중반은 박정희 정권의 3공화국이 안정되며, 냉전 반공을 지배 이데올로기로 삼아 정권의 권위주의가 강화되기 시작한 시기였다. 이제 한국전쟁 영화는 단순한 역사적 재현이 아니라 당대의 냉전 반공이라는 이데올로기적 지형 내에 강고하게 포착되고, 관점과 캐릭터가 고정된다. 그와 함께 영화적 반공에 포착된 한국전쟁 영화, 스파이영화, 간첩영화, 문예영화 등은 점차 그 상업적 활기를 잃어갔으며, 1970년대에 이르게 되면 정부의 인위적인 “우수영화” 정책으로만 그 명맥을 유지해 가는 상황에 이른다. 그 중요한 분기점이 <7인의 여포로>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부록: <7인의 여포로> 사건 경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