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
- 감독
- 미야케 쇼
- 제작년도
- 2018
- 출연
- 에모토 타스쿠, 이시바시 시즈카, 소메타니 쇼타, 아다치 토모미츠, 야마모토 아이, 와타나베 마키코, 하기와라 마사토
<사랑은 낙엽을 타고>와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가 간직한 이미지의 존엄에 관해 벨라 타르는 영화감독을 은퇴하면서 설립한 영화학교 ‘필름팩토리’의 취지문에서 이미지의 존엄성(dignity)이라는 표현을 쓴다. 그가 자신의 영화를 말할 때도 이따금 사용하던 단어다. 영화 작업은 존엄을 보존하는 이미지를 생산하는 것이다. 벨라 타르는 연출자다운 확신의 언어로 말하지만, 존엄의 이미지가 무엇을 가리키는지 명확한 논리로 제시하지는 않는다. 영화가 인간의 존엄성을 지켜야 한다는 그의 믿음엔 의심할 바 없는 진실이 있다. 하지만 존엄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 존엄의 이미지는 어떻게 스크린에 정착할 수 있을까? 우리는 영화가 세계의 가려진 진리를 밝히는 안내서가 되길 바라지만 그런 믿음은 언제나 불투명한 결과로 돌아오기 마련이다. 사적인 인상이지만, 많은 이들에게 경험의 빈칸처럼 남겨진 코로나19 팬데믹을 통과하면서 그 불투명한 자국은 더욱 짙게 남겨진 것처럼 느껴진다. 이런 시기에 존엄을 보여주는 이미지는 절실한 필요성을 가질 것이다. 지극히 사소하고 범용한 사물이지만, 올해 지켜본 두 편의 영화에 나온 두 장의 종이가 마음에 남는다. 하나는 팬데믹 시기를 거치며 은퇴를 번복하고 돌아온 거장의 영화에 등장하고, 다른 하나는 팬데믹 시기에 촬영된 영화에 나온다. 모든 사회적 활동의 절차가 온라인과 디지털로 정립된 시기에 종이를 다루는 영화의 감각은 무척 희박하거나 시대착오적이라 말하기 쉽다. 두 편의 영화는 그처럼 미약하기 짝이 없는 종이의 물질성과 그 위로 글씨를 쓰는 손짓을 잊기 힘든 동작으로 새겨둔다. 두 장의 종이가 존엄을 증명하는 이미지의 사례라고 확신하기는 어렵다. 그런데도 그 이미지들을 떠올리면 존엄이라는 거창한 단어를 입에서 내뱉고 싶은 충동을 참기 힘들다. 한 장의 종이는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 사랑은 낙엽을 타고 >에 나온다. 앞서 벨라 타르를 말하며 거론한 단어들(공장, 인간, 존엄)에 더없이 적합한, 일찍이 타르 또한 찬사를 아끼지 않았던 카우리스마키의 신작이다. 슈퍼마켓 계약직으로 일하는 안사와 건설노동자인 훌라파는 영화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각자의 사정으로 일자리에서 해고된다. 계약직과 일용직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익숙한 광경이다. 그들은 노동의 권리를 잃어버린다. 물품을 다루고 건설 도구를 쥐던 손, 유통기한이 지난 샌드위치를 가져가고 술병을 들던 손에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안사가 일하던 식당이 문을 닫자 갈 곳이 없어진 두 사람은 밤의 극장으로 향한다. 영화를 보고 나온 안사는 종이에 연락처를 적어 훌라파에게 건넨다. 안사가 떠나고 훌라파가 담배를 피우려고 주머니에 손을 넣다 그만 연락처가 적힌 종이가 바람에 날려 바닥에 떨어지고 만다. 종이를 잃어버린 훌라파는 아무런 단서도 없이 극장 앞에서 담배를 피우며 안사를 기다린다. 극장 문 앞에 두 사람이 있었고, 한 사람이 사라진다. 다른 한 사람이 기다리다 마저 사라지면 그가 피운 담배가 바닥에 남는다. 단순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는 이 막연한 기다림이 말로 설명되지 않는 깊은 비애감을 불러온다. 극장 앞에서 누군가를 기다려 본 사람이라면 연인을 기다리며 피우고 버려진 담배에 마음이 흔들릴 것이다. 카우리스마키의 화면은 평면적이고 정적이다. 공간이 침묵하는 것은 물론이고 인물들조차 몸을 움직이고 동작을 구사하는 것에 서투르다. 거의 움직이지 않는 그의 화면은 몇 개의 단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구름이 떠다니는 천국과도 같은, 하지만 카우리스마키가 다루는 인물들에게서 멀리 떨어진 하늘(< 어둠은 걷히고 >의 원제는 ‘지나가는 구름’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인물들이 머무는 지상의 벽과 바닥이 있다. 카우리스마키의 영화는 공간을 극도로 단순화하는 절차에 속한다. 이러한 절차는 카우리스마키가 밝힌 촬영의 과정에 깃들어 있다. 그가 밝힌 화면의 단순화 과정은 이런 식이다. 하나의 벽이 있고, 벽 앞에 두 사람이 머무른다. 그 위로 미약한 빛과 깊은 어둠을 드리우고, 한 사람을 사라지게 한다. 그러면 남은 한 사람과 벽과 공간에 드리운 빛과 어둠이 있다. 남은 한 사람을 마저 사라지게 하면 벽과 빛과 어둠이 남는다. 벽을 제거하면 빛과 어둠이 남겨지고 마지막으로 빛을 제거하면 어둠이 남는다. 카우리스마키는 그 과정에 영화가 있다고 말한다. <사랑은 낙엽을 타고>에서 안사와 훌라파는 극장 문 앞의 벽에 선다. 그들 뒤에는 (두 사람이 함께 보고 나온 영화인) 짐 자무쉬의 < 데드 돈 다이 >와 데이비드 린의 <밀회>의 포스터가 붙어 있다. 안사가 전화번호가 적힌 종이를 남기고 떠나면 훌라파가 남는다. 훌라파가 자리에서 벗어나면 벽과 빛과 어둠이 담긴다. 극장은 카우리스마키가 제시한 영화의 원리를 전하는 연인들의 장소다. < 그들 각자의 영화관 >에 수록된 카우리스마키의 짧은 단편 <주조공장>은 공장에서 일하는 직원들의 쉬는 시간을 묘사한다. 그들은 점심시간이 되면 공장 안에 있는 영화관에서 샌드위치를 먹으며 공장을 나서는 노동자들을 카메라에 담아낸 뤼미에르의 단편영화를 본다. 건조하고 무뚝뚝하지만 친밀한 감정을 공유하는 관객들의 장소. 돈이 없는 채로 갈 곳을 잃은 안사와 훌라파가 일시적인 도피와 무뚝뚝한 사랑을 이루는, 상실된 만남을 기다리고 다시 재회하는 장소도 영화관이다. 과거 없는 남자가 새로운 삶을 발견하게 되는 것처럼, 그들은 기억 없는 극장에서 다른 시간으로 들어서고, 다른 현실의 경로를 택한다. 카우리스마키의 영화를 애틋하게 기억하는 이들이라면, 인간적 존엄과 기억의 흔적을 흰 종이나 천에 담아낸 장면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 과거 없는 남자 >의 첫 장면에서 기차에 도착한 남자가 담배를 피우기 위해 집어 든 종이, 그리고 기억을 잃고 바닥에 쓰러진 그의 몸에 둘린 흰 붕대. 그것들을 바라보는 카우리스마키의 시선은 인물의 시선이 위치한 곳보다 더 낮은 곳을 향한다. 안사가 떨어뜨린 종이와 훌라파가 피운 담배는 모두 바닥에 남는다. <사랑은 낙엽을 타고>는 떨어지는 낙엽을 바라보듯이 지상에 당도하는 시간을 담아낸 영화다. 영화 초반부, 안사가 일자리를 알아보기 위해 들른 인터넷 카페가 30분에 10유로를 받는 규칙을 설정해두듯, 어느새 카우리스마키의 영화에서도 시간은 자본의 논리에 붙잡혀 있다. 카우리스마키가 전제하는 영화적 실천의 방법은 그 시간의 질서에 격렬히 저항하기보다는 다른 속도의 시간을 동반하는 데 있다. 극장 앞에서 이름도 연락처도 모르는 상대방과 다시 만날 때까지 서 있는 믿음과 기다림의 시간이 그러할 것이다. 극장 불이 꺼지고 훌라파가 화면에서 사라지면 우리는 그가 기다린 시간이 영화에 담겨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카우리스마키의 카메라에 포착된 이들은 세계의 질서를 벗어나 높은 곳으로 향하는 이상적 천사들이 아니라 지상의 중력에 속한 평범한 노동자이자 관객들이며 연인들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그들은 어딘가로 떠난다. 카우리스마키 영화의 엔딩에서 인물들은 배를 타고 바깥으로 떠나거나, 지상에 남아 삶을 이어간다. <사랑은 낙엽을 타고>의 결말은 조금 다른 인상을 남긴다. 안사와 훌라파는 어디론가 떠나간다. 하지만 그들은 바닥에 닿은 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그들 사이에 한 마리의 개가 있다. 안사는 개의 이름으로 ‘채플린’이라는 정체성을 부여하지만, 그들은 채플린의 떠돌이처럼 세계의 바깥을 배회하다 어느새 돌아오는 자들이 아니다. 그들은 이곳에 있을 것이다. 그들 사이의 한 마리 개는 탈출을 모색하는 대신 이곳에 남아 삶을 지속하도록 이끄는 조건이다. 그렇게 두 사람과 한 마리 개의 뒷모습을 담아낸 마지막 장면이 이어진다. 존엄은 현실을 회피하지 않고 지상에서 대응하는 자들의 뒷모습에 기록되어 있다. 또 다른 종이에 대해 짧게 말하고 싶다. 미야케 쇼의 <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 >에서 주인공이 작성하는 공책이다. 많은 설명이 필요한 영화는 아닐 것이다. 다른 평자와 관객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나도 이 영화의 아름다움에 즉각적으로 사로잡혔고, 특히 첫 장면을 무척 매혹적으로 기억한다. 선천적 청각장애로 귀가 들리지 않는 복싱선수 케이코를 다루는 이 영화는 그녀가 일기장에 무언가를 적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 내용은 아직 알 수 없고 그녀가 들을 수 없는 볼펜 소리와 얼음을 씹는 소리가 관객에게 전달될 뿐이다. 16mm 필름의 질감 위에 정밀한 거리감으로 포착된 케이코의 옆모습은 이 영화의 특별한 자질을 순식간에 설득시켜버린다. 아름다운 도입부다. 소리가 들리지 않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기에 이 영화에서 글자를 쓰는 몸짓은 무척 특별하게 다뤄진다. 카메라는 잡다한 대화나 심각한 갈등을 포착하는 대신 무표정으로 일관하는 케이코의 침묵에 초점을 맞춘다. 그리고 가끔 그녀가 공책에 무언가를 적는 순간을 기록한다. 얼마 동안의 시간을 지나 공책에 무언가 적는 케이코의 습관이 기억에서 희미해질 즈음, 우연히 그 기록이 다른 누군가에게 전해진다. 갑작스럽게 입원한 체육관 코치의 병문안을 온 케이코는 병실에 들른 코치 아내의 요청에 공책을 건네준다. 케이코가 그린 그림과 매일 같이 실천한 자기명령의 기록들이 타인의 목소리를 타고 영화에 도착한다.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은 한 장의 종이가 다른 사람에게 전달되고 타인의 목소리를 매개로 스크린의 표면에 도착하기까지를 기다리는 영화다. 그러고 보니 이 영화에도 확신할 수 없는 미래를 향한 막연한 기다림이 있다. 두 편의 영화가 오늘날의 광폭한 시스템과 질서에 대항해 복고적 취향을 되살리는 영화라는 뜻은 아니다. 아키 카우리스마키와 미야케 쇼는 영화가 간직한 고전주의적 믿음(두 연출자는 필름 촬영을 고집해 이 영화들을 완성한 이들이기도 하다)이 오늘날의 환경에서도 여전히 유효한지 자문하는 긴밀한 긴장과 불화를 도입한다. 하지만 이는 영화의 복잡한 문제로 향하지 않는다. 두 영화는 무척 단순하다. 에드워드 양이 < 하나 그리고 둘 >의 제작 의도의 핵심으로 ‘극도의 단순성’을 말하던 것처럼, 장 뤽 고다르가 < 언어와의 작별 >에 관해 직접 작성한 개요에서 영화를 “단순한 왈츠”에 빗댄 것처럼 영화는 고독하고 아름다우며 무엇보다도 단순한 문제다. 두 편의 영화는 그 단순함의 원리를 한 장의 종이에 담아 보여준다. 누군가는 그 자리에서 어렴풋이 떠오르는 영화 이미지의 존엄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처음으로 좋아한 격투기는 프로레슬링이었다. 김일의 박치기와 천규덕의 당수를 보며 가슴 졸이고 환호했다. 홍수환, 유제두, 박종팔 등의 복싱도 열심히 봤다. 그리고 프라이드와 UFC 등을 접하며 종합격투기에 빠져들었다. 격투기는 원초적인 스포츠다. 프로레슬링은 번외로 하자. 프로레슬링은 육체의 기술을 갈고닦아 캐릭터와 스토리를 더해 만들어진 쇼다. 육체의 화려함과 열정을 최대한으로 뽑아내는 엔터테인먼트. 프로레슬링은 쇼이지만, 복싱과 종합격투기는 일상의 싸움과 다르지 않다. 후두부와 성기 등 급소를 때리지 않는 정도의 규칙만 있을 뿐이다. 맹수의 공격을 방어하고, 동물을 사냥하고, 인간끼리의 다툼에서 필요한 생존의 기술은 격투기로 발전했다. 내가 격투기에 빠진 이유는 단순했다. 싸우는 그들에게 끌렸다. 격투기의 결과는 승패로 갈린다. 하나는 이기고, 다른 하나는 진다. 오로지 승리하기 위해 그들은 상대를 때리고, 걷어차고, 꺾는다. 혼자 살아남기 위해 그들은 싸운다. 하지만 격투기를 보면서 승자에게만 열광하지는 않았다. ’졌잘싸‘라는 말이 있다. 졌지만 잘 싸웠다, 의 줄임말이다. 비록 승부에서는 패배했지만, 결코 굴복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싸우는 이를 보면 가슴에 무엇인가 일렁인다. 오로지 승리하기 위해서, 치사한 전략으로 일관하는 놈을 보면 짜증이 일어난다. 단지 지지 않기 위해서 시간을 낭비하는 녀석을 보면 그저 한심하다. 중요한 것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다. 미야케 쇼의 <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 >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격투기의 감흥을 떠올리는 것은 어딘지 이상하다.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은 격투기, 복싱의 희열이 무엇인지 그리는 영화가 아니다. 복싱을 택한 청각 장애인의 일상을 보여주는 영화에 가깝다. 복싱은 케이코에게 중요하지만, 생활을 압도하거나 대체할 수 없다. 케이토는 살아가는 과정에서 복싱을 택했을 뿐이다. 누군가가 아니라, 세상을 때리고 싶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싸우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세상에, 우리는 던져진 것이니까.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은 일본 최초의 청각장애인 여성 복서 ‘오가사와라 케이코’의 자서전 <지지 마!>(2011)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다. 미야케 쇼는 오가사와라의 모든 이야기를 영화에 담을 생각은 없었다. 아니 그의 모든 것을 담고 있지만, 모든 시간과 사건을 그리지 않는다. 미야케 쇼는 말한다. ‘복싱을 다룬 것만이 아닌, 하루하루 링 위에서 그리고 링 밖에서 싸워나가는 한 여성을 그린 영화다.‘ 오가사와라 케이코가 소속된 체육관의 관장은 이렇게 말한다. ‘솔직히 재능은 없어요. 키가 작고, 리치도 짧고, 스피드도 느리고요. 하지만 뭐랄까. 인간적인 기량이 있어요. 정직하고 솔직하고 아주 좋은 녀석이에요.’ 세상의 소리를 들을 수 없었던 케이코는 반항적인 아이였다. 고등학교 때는 분을 못 이겨 선생을 때릴 정도였다. 보통 아이들과 다른 자신의 처지 때문에 울분이 많고, 쌓인 감정을 발산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던 반항아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케이코는 호텔에서 객실 청소 일을 하고, 복싱을 시작한다. 케이코는 말한다. ‘때리면 기분이 좋아요.’ 그리고 또 말한다. ‘맞을 때 아픈 것이 싫어요.’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일은 아무래도 쉽지 않다. 치열하게 싸우지 않고는 살아남을 수 없을 것 같기도 하다. 케이코를 비롯한, 싸우는 사람들에게 끌리는 것은 그런 이유가 있을 것이다. 치고받으며 싸우는, 마지막까지 전장에 서 있는 이들을 보면 어딘가 연대감이 느껴진다. 처참하게 패배할지라도, 함께 끝까지 싸워보고픈 마음이 든다. <내일의 죠>의 명대사처럼, 마지막까지 ‘하얗게 불태워’버리고 싶은 마음이랄까. 실베스터 스탤론의 < 록키 >처럼, 지더라도 마지막까지 모든 것을 쏟아내고 난 후 링 위에 꿋꿋하게 서 있고 싶어진다, 할까. 그렇게 생각했었다. 젊을 때는. 나이가 들면서 조금 생각이 달라졌다. 미야케 쇼는 인터뷰에서 ‘나는 솔직히 말해 10대부터 20대까지 꾸준히 성실하게 살자, 라고 하는 구호에 약간의 반감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 나이대에 접어드니 생각이 달라지고 있다. 숏 한컷 한컷이 쌓여 완성되는 영화처럼 인생의 의미란 것이 결국 아주 조그마한 것들을 하나하나 차근차근 쌓아가는 게 아닌가, 그렇게 느리고 작은 움직임이 소중하구나 하고 깨닫게 된다.’라고 말한다. 그 말을 듣고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의 영문 제목을 떠올려 보니 ‘Small, Slow But Steady’다. 작고, 느린 것이 소중함을 나이가 들어서야 알게 되었다.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은 케이코의 위대한 승리나 처절한 노력을 말하지 않는다. 케이코는 직장에서 성실하게 일하고, 체육관에서 열심히 훈련한다. 그것만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일이 편해지지는 않는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시합에서 지는 일은 벌어진다. 그렇다고 상대가 엄청난 것도 아니다. 그 역시 케이코와 마찬가지로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운동하며 살아가는 생활 복서다. 천재도, 셀럽도 아닌 그들의 성취는 작고 느리게 이루어진다. 미야케 쇼는 케이코의 일상을 세심하게 그려낸다. 케이코는 들을 수 없지만, 세상에 가득 찬 소리들. 케이코가 다니는 체육관과 강변 그리고 골목길 등을 채우는 햇살과 공기 그리고 먼지들. 우리들의 일상은, 문득 멈추어 보지 않으면 알아차릴 수 없는 작고 느린 것들로 가득하다. 16밀리 필름으로 촬영한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은 다정하고, 섬세하다. 그리고 사려깊다. 소리도, 공기도, 어느 하나도 허투루 쓰이지 않고 각자 있어야 할 곳에 존재한다. 작고 느린 것들은 꾸준하게 움직이며 어디론가 나아간다. 아니 존재한다. 케이코는 아픈 것이 싫다. 복싱을 그만두고 싶은 마음도 있다. 세상도 그렇다. 때리고 싶고 싸우고 싶은 마음만큼 도망치고 싶고 피해버리고 싶은 마음이 넘친다. 그런 케이코를 붙들어주는 존재는 타인이다. 오랜 시간 권투를 했고, 지금은 후배를 키우는 체육관 관장. 나이가 들어 육체는 쇠하며 병이 들었고, 재개발로 인하여 체육관을 닫아야 한다. 세상은 결코 그의 편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재능이 뛰어나지 않은 케이코를 가르친다. 청각 장애인인 케이코가 싸워나가야만 하는 존재라는 것을 눈치챘기 때문일 것이다. 승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작은 일상의 싸움을 무수하게 해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공감했을 것이다. 관장만이 아니라,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의 인물들은 모두 예사롭지 않다. 음악을 하는 케이코의 남동생은 말한다. 누나는 강하다고. 자신은 누나처럼 강하지 않다고. 흑인 혼혈인 남동생의 애인 하나는 케이코에게 선뜻 다가가 인사를 하며 친해진다. 하나는 케이코에게 춤을 알려준다. 그들은 모두 저마다의 재능이 있고, 최고가 아닐지는 몰라도 서로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무엇을 가르칠 정도는 된다. 그들은 자신의 길에서 작고 느리게, 꾸준하게 나아가고 있다. 그리고 윗세대인 케이코의 엄마와 체육관 관장은 그들이 걸어가는 길을 지켜보고 있다. 결코 서두르지 않고, 미리 판단하지 않고, 묵묵히 지켜보면서, 세파에 움추러든 아이들의 등을 따뜻하게 두드려준다.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은 따뜻한 영화다. 케이코는 결코 외롭지 않다. 언제나 그들이 있고, 풍경이 있다. 케이코는 홀로 존재하지 않고, 풍경 속에서 어우러져 있다. 그리고 소리와 공기가 가득 차 있다. 케이코도 우리도, 언제나 함께, 세상 안에 있는 것이다.
활기와 권태, 기쁨과 슬픔을 껴안는 방식에 관하여 ‘나’는 서점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하는 청년이다. 어느 날 퇴근길에 같은 곳에서 일하는 사치코와 동행한다. 사치코는 한 잔 할 것을 제안하고 ‘나’는 몇 시간 후에 문자하겠다고 하고 헤어졌지만 ‘나’는 그만 잠을 자느라 약속시간을 어긴다. 그 날 ‘나’는 룸메이트 시즈오와 밤새 술을 마신다. 다음날 ‘나’는 카페에서 점심을 해결하다 사치코를 또 만난다. ‘나’는 어제의 약속을 어긴 것을 사치코에게 희미하게 사과하고 사치코는 애매하게 그의 사과를 받아들인다. 그렇게 두 사람의 연애 관계인 듯 아닌 듯한 관계가 시작된다. ‘나’와 사치코가 처음 섹스하던 날 귀가하던 시즈오는 두 사람의 기척을 느끼고 집에 들어가지 않는다. 시즈오가 두 사람 곁에서 물러나는 건 이때가 마지막이다. 그 후로 세 사람은 거의 늘 함께 한다. 함께 웃고 떠들고 밥을 먹고 당구 치고 탁구 치고 술을 마시며 밤을 새운다. ‘나’는 누구의 삶에도 간섭하지 않고 누구로부터도 간섭받지 않는 삶을 원하며 사치코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그런 태도로 대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사치코는 그런 ‘나’의 쿨함 또는 무심함에 슬쩍 마음이 상한다. ‘나’와 사귀기 전 서점 사장과 연인관계였던 사치코가 그 관계를 정리하려 할 때 ‘나’는 그런 사치코의 결정을 남 얘기 듣듯 하고 사치코는 ‘나’의 진지하지 못한 반응을 나무란다. 그 후 사치코는 ‘나’보다는 시즈오에게 끌린다. 뭔가 슬픔을 품고 있지만 내색하지 않는 시즈오는 뚜렷한 직업 없이 하루 하루를 소일하며 친구들에게 사심 없이 마음을 내어준다. 그런 시즈오에게 사치코는 ‘나’와의 관계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는다. 사치코가 말한다. “난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어.” 시즈오가 말한다. “그는 아무 생각도 안 하고 있을 거야.” 시즈오의 말은 빈정거리는 것이 아니다. ‘나’는 깃털처럼 가벼운 인생을 살고 싶어 하고 그런 척 한다. 약간의 선의를 품은 채 ‘나’는 가급적 세상으로부터 벽을 치고 방해받지 않은 삶을 살고 싶어한다. 연애도 ‘나’에게는 구속이 아니라 해방이다. 사치코가 시즈오와 더 가깝게 지내자 ‘나’는 그런 사치코의 변화를 기꺼이 수긍한다. 미야케 쇼 감독의 세 번째 장편 <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 >(2018)는 사토 야스시의 소설이 원작이며 요절한 작가가 서른 한 살에 쓴 작품을 역시 서른 한 살의 영화감독이 스크린에 옮긴 것이다. 원작을 읽어보진 못했으나 감독의 말에 따르면 원작의 비극적 결말을 소거하고 좀 더 무채색에 가까운 감정으로 옮겨낸 이 청춘의 이야기에서 사랑과 이별, 기쁨과 슬픔, 환희와 피로는 불가해한 형태로 뒤엉켜 공존한다. ‘나’와 사치코, 시즈오는 파트타임 직업으로 호구를 삼고 미래에 대한 별다른 계획도 없으며 세속적인 기준으로 보면 출구 없는 삶을 사는 젊은이들의 전형이다. 그들은 그들 각자의 방식으로 자기 삶을 견디고 있는 상태에서 바깥으로부터 오는 행복의 신호에 부드럽게 반응한다. 사치코는 권태와 무의미의 극단에 삶이 처해 있는 듯한 서점 사장과의 관계를 가만히 견디면서 ‘나’를 만났을 때 자연스럽게 구애의 의사를 전한다. ‘나’와 마찬가지로 별다른 가족 관계가 화면에 상술되지 않는 사치코는 ‘나’와 시즈오를 위해 기꺼이 지갑을 열며 그 대가를 바라지도 않는다. 밤새 바에서 술 마시고 춤을 출 때 무리에서 빠져나와 DJ 앞에서 홀로 자기만의 리듬에 맞춰 몸을 흔드는 사치코의 모습은 관계에 매달리지 않으면서도 어떤 순간의 농도를 제공하는 관계의 즐거움을 기꺼이 만끽하며 동시에 자기만의 영역을 세심히 지키는 행동을 보여준다. 시즈오는 딱히 뭘 하고 지내는지 알 수 없는 청년인데 길거리에서 경찰 심문에 걸려 살짝 모욕을 겪어도 실실 미소를 흘리는 여유를 잃지 않고 직업소개소에서 자기 차례를 기다리며 옆 자리 사람이 건네는 사탕 한 알을 물고 천진한 웃음을 짓는 만사태평한 성격의 소유자로 보이지만 그는 치명적인 병을 앓는 어머니가 있다. 가끔 술을 마시며 심드렁한 대화를 이어나가는 이들 모자는 필사적으로 절망을 견디는 것처럼 보인다. 마침내 어머니가 쓰러졌을 때 그의 병상을 정리하면서 시즈오는 생각한다. “병원 냄새를 참을 수 없다. 친구들과 단골로 갔던 장소의 냄새를 기억해내고 싶지만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는 사치코와 시즈오와 마찬가지로 특별히 내세울 것 없는 삶이지만 행복의 징후가 보이면 반갑게 그걸 껴안는 두 사람과 달리 겉으로 내색하지 않고 잠시 충만한 그 행복의 흐름에 무심한 척 몸을 맡기는 사람이다. ‘나’가 타인의 삶에 무관심한 것처럼 보이는 것은 자신의 삶에 대한 어떤 간섭도 용인하지 않겠다는 다짐의 표현이다. 서점에서 책을 훔쳐가는 손님의 행동을 보고도 별 신경을 쓰지 않는 ‘나’의 태도에 동료 점원은 분개하지만 동료점원의 자신에 대한 비난에도 태연하던 그가 사장과 바람피운다며 사치코를 비아냥거리는 동료점원의 말을 참지 못하고 혼내주는 건 누군가를 함부로 규정하는 사람들의 일상적 무례에 ‘나’가 예민한 성격임을 보여준다. 그런 그의 태도만으로 그의 삶이 보호받는 것은 아니다. 사치코와 시즈오가 둘이서만 캠핑을 떠난 시간에 홀로 거리를 산책하던 ‘나’는 자전거를 몰고 다니는 누군가로부터 묻지마 폭행을 당한다. 집에서 상처를 치료하는 ‘나’의 앞에 시즈오의 안부가 궁금해 찾아온 시즈오의 어머니가 나타난다. ‘나’는 사과가 담긴 비닐봉지를 그녀에게 내민다. ‘나’를 좋은 아이라고 칭찬해주며 떠나는 시즈오의 어머니는 ‘나’ 앞에서 보인 호기로운 태도와는 달리 아무도 없는 거리를 걸어가며 울적한 뒷모습을 감추지 못한다. 그로부터 며칠 뒤 시즈오의 어머니는 발작을 일으켜 의식불명으로 쓰러진다. 이런 장면들에서 타인들에게 보여주는 모습과 혼자 있을 때의 모습이 다른 등장인물들을 담아내는 것을 통해 그들의 다면성을 이해시키는 이 영화의 뛰어난 점이 드러난다.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는 별 다른 사건 없이 등장인물들이 각자의 상처를 드러내지 않고 오직 행복한 순간만 서로 주고받기 위해 애를 쓰는 일상의 순간들을 늘일 수 있는 만큼 늘이는 영화이다. ‘나’와 사치코와 시즈오가 바에서 밤새우며 노는 장면은 거의 7분 분량을 넘어서는데 별다른 사건 없이도 그들이 노는 모습만을 카메라가 따라다니는데도 화면에는 활기와 매력이 넘친다. 심지어 세 사람이 편의점 내부를 돌며 먹을거리와 마실 것을 사는 평범한 장면에서도 카메라와 인물의 움직임은 서로 조응하며 자그마한 흥분을 불러일으킨다. 밤새워 논 다음날 집으로 가는 버스에서 곤죽이 되어 졸고 있는 세 주인공의 모습을 보여주는 카메라는 이 영화가 희열과 상실의 순환으로 이어지는 젊은이들의 자잘한 일상을 궁극의 낙관적 기운으로 담아내고 있음을 알게 한다. 지금 이 순간이 영원한 것이 아니라 영원할 것처럼 즐기고 그 다음에 오는 허무의 기운을 부드럽게 응시하며 껴안는 인물들은 자기들이 처한 존재론적 조건을 긍정하지도 부정하지도 않고 각자의 존재를 스스로 보호하면서 상대에게 부드러운 선의의 손길을 내민다. 영화의 후반부, 늦은 밤에 어머니가 쓰러졌다는 소식을 들은 시즈오는 다음날 첫 기차를 타기 전까지 ‘나’와 사치코와 함께 단골 바에 가서 늘 그랬듯이 즐긴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슬픈 상황에서 그들은 함께 있음으로써 그 시간들을 견딘다. 다음날 일찍 시즈오과 집을 나설 채비를 할 때 그런 시즈오의 행장을 도와주는 ‘나’와 어둠 속에서 그 두 사람을 바라보는 사치코의 옆모습을 잡는 카메라는 기쁨도, 슬픔도 그들 각자의 방식으로 나누는 젊은이들의 사랑과 우정을 보여준다. ‘나’역의 에모토 타스쿠, 사치코 역의 이시바시 시즈카, 시즈오 역의 소메타니 쇼타 세 배우는 특정 역할을 연기하는 게 아니라 특정 역할로 특정 공간에서 살아가는 현대적 배우의 매력을 조용히 웅변한다. 그들은 그들 각자의 스타일로 인상적인 걸음걸이를 보여주며 아무 것도 말하지 않을 때의 표정과 동작으로 그들 각자의 캐릭터를 드러낸다. 지난 전주국제영화제에서 감독 미야케 쇼를 만났을 때 그는 감독으로서의 재능을 칭찬하며 세속적인 성공을 예견하는 나의 건방진 덕담을 정중하게 사양하면서 자신이 영화를 하는 것은 영화를 준비하고 찍으며 동료들과 누릴 수 있는 시간의 행복을 음미하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를 촬영하면서 그는 배우들과 최상의 시간을 보냈고 그들 모두 영화 촬영이 끝나지 않기를 바랐다고 회상했다. 영화 속에서 보여준 행복에의 추구가 영화 바깥의 과정에서도 관철되었다는 그의 말은 만남과 이별이 늘 한 쌍을 이루는 인생의 궤도에서 슬픔을 견디면서도 기쁨을 폭발적으로 나누는 청춘의 아름다움을 오랜만에 실감하게 했다.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는 젊다는 것 자체를 부러워하게 만든 드문 활기의 영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