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살의 미열
- 감독
- 하시구치 료스케
- 제작년도
- 1993
- 출연
- 레이코 카타오카, 하카마다 요시히코, 엔도 마사시, 야마다 수미요, 사토 코지, 하라다 후미아키, 쿠사노 코우타, 카와구치 요이치
중동과 북아프리카 지역을 휩쓴 일련의 반정부 시위들은 마침내 독재 정치를 몰아내며 성공적인 혁명으로 자리매김했다. 2011년, 이웃 나라들이 쟁취한 ‘아랍의 봄’을 지켜본 시리아의 10대 소년들은 알 아사드 대통령을 겨냥한 낙서를 학교 벽에 남겼다. 당국에 체포된 이들은 가혹한 고문으로 신체가 심하게 훼손된 채 사망한다. 이 사건은 시리아 민중들의 반정부 시위의 단초가 되며, 나아가 반군과 정부군, 그리고 IS 간의 잔인한 살육 전쟁인 시리아 내전으로 비화되었다. 이로 인한 사망자 수는 현재까지 25만 명을 넘어섰다. 이브게니 아피네예브스키 감독은 다큐멘터리 < 시리아의 비가 >(2017)를 통해 시리안 반군과 난민의 시점에서 연대기 순으로 이 사건을 숨 가쁘게 따라가며 묵묵히 정공법으로 담아낸다. 영화는 시리아를 무사히 탈출해 살아남은 활동가들과 반군 소속 군인들, 아이들 등의 인터뷰를 통해 정부와 IS가 자행한 비인간적이고 잔인한 행위들을 재구성한다. 그리고 그 인터뷰이의 목소리는 어느새 관련 사건들을 촬영한 투박하고 거친, 그만큼 더 끔찍한 영상들 위로 흘러나온다. 감독이 밝히고 있듯이, 영화 속에 쓰인 모든 영상들은 시리아 활동가와 시민들이 카메라와 스마트폰 등을 이용해 직접 찍은 것들이다. 시리아 내전의 일거수일투족은 그들에 의해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었다. 그 영상들은 관련자들의 증언을 꼼꼼히 뒷받침하며 고통스러운 울림을 배가시킨다. 한편, 감독은 서구 열강들이 얽혀있는 내전의 복잡한 정치적 내막이나 이해관계, 그 합리적 해법에 대한 접근은 하지 않는다. 다만 묵직하게 쉼 없이 그 잔혹성을 까발릴 뿐이다. 더 심도 깊은 논쟁에 뛰어들 필요도 없이, 평범한 인간들을 저 생지옥으로 몰아넣은 것만으로도 비난받아 마땅하다고 말한다. 따라서 엄밀히 말해, 영화 속 대립 구도는 ‘반군’ 대 ‘정부군/IS’라기보다는 ‘인간의 고통’ 대 ‘그 고통에 대한 무감각’이다. 눈 앞에 펼쳐지는 고문과 전쟁, 살인의 잔혹한 날 것 그대로의 이미지들을 직시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가 TV 뉴스와 신문 지상에서 짤막한 외신들로 접했던 그 사건들이 생생한 이미지로 되살아 날 때, 그 동일한 사건들은 전혀 다른 온도로 다가온다. 무엇보다 그것은 격렬한 몸의 반응을 이끌어 낸다. 당신은 특정 장면에서 고개를 돌리거나 눈을 지그시 감게 될 수도 있다. 그러다 나중에는 너무 충격을 받은 나머지 몸이 경직되어 꼼짝 못 하고 그 광경들을 낱낱이 보게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영화가 끝난 후, 당신은 한동안 전율에 휩싸이거나 미열에 시달릴 수도 있다. 일단은, 이 영화를 마지막까지 참고 본 자신을 대견해 하자. 이처럼 영화는 포탄이 쏟아지는 시리아 한가운데로 우리를 인도한다. 그것은 ‘유니세프 난민 기구’가 동정심을 유발하기 위해 슬픈 눈망울의 시리아 아이들을 모델로 쓰며 후원금을 요구하는 방식과 다른 층위에 놓인다. 영화는 말한다. 이것은 단순히 우리의 관대한 자비심으로 해결할 수 있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고. 그래서 그토록 견디기 힘든 죽음을 둘러싼 외설적인 이미지들을 나열하며 우리를 그 내전의 참상 속으로 최대한 몰고 간다. 그 고문의 공포를, 포탄의 공포를, 죽음의 공포를, 그리하여 타인의 고통을 생생히 느껴보라고 말한다. 그 이후, 이제 그것은 더 이상 머나먼 나라의 일이 아니다. 이와 같은 전쟁의 실재는 우리를 불편한 윤리적 고민으로 이끈다. 그것은 참혹하지만 미학적으로 다듬어진 전쟁 영화와는 다르다. 카메라의 정교한 조작과 사실적인 특수효과로 빚어진 전쟁의 이미지는 우리로 하여금 그 미학 속으로 도피할 수 있도록 해준다. 그러나 날 것 그대로의 전쟁 이미지에는 차마 숨을 곳이 없다. 영화의 마지막, 난민이 된 아이들은 밝은 표정으로 관객을 향해 당당히 희망의 메시지를 전한다. 영화를 끝까지 버티고 봤다면, 당신에게 그들은 더 이상 한낱 동정의 도상으로 존재할 수 없게 될지 모른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무수히 넘나들었던 그들을 감히 어떻게 우리 따위가 동정하겠는가. 우리가 느꼈던 그 전율과 미열을 기억하자. 그것은 동정을 넘어 연대를 위한 시발점이 되어야 한다.
https://www.kmdb.or.kr/db/kor/detail/movie/F/02184 청춘, 성장, 정체성. 여기까지만 들으면 풋풋하고도 쓰라린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에 이르는 시절을 그린 성장영화들이 떠오른다. 구스 반 산트의 < 파라노이드 파크 >나 이와이 슈운지의 < 릴리 슈슈의 모든 것 > 같은. 그런데 이 단어들 사이에 섹스를 던져 넣으면 방향이 미묘하게 뒤틀린다. 섹스를 통해서 젊은 날의 방황을 진지하게 그리는 영화들도 더러 있지만 청춘과 섹스라면 대개 ‘청춘 섹스 코미디’로 연결된다. 도발적이거나 유희로 풀어내는 정도의 차이가 있고. 청춘 섹스 코미디의 시작이라면 1983년에 개봉한 < 그로잉 업 >을 들 수 있다. 고등학교 남자애들이 성에 눈을 뜨며 벌어지는 갖가지 이야기들. 당시에는 할리우드 영화라고 생각하고 봤는데 후일 알고 보니 이스라엘 영화였다. 기억을 되살려보니 남녀가 함께 입영 훈련을 하는 장면도 있었다. 야하기는 했지만 가슴 뭉클하기도 했는데, 1978년 이스라엘에서 개봉했을 때 인구의 40%가 본 화제의 국민영화였다. 골든글로브 해외영화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제임스 딘의 < 이유 없는 반항 >(1955)이나 < 폭력교실Blackboard Jungle >(1955)을 비롯하여 이전에도 청춘영화는 있었지만 하나의 장르로서 형성된 것은 1980년대였다. < 그로잉 업 >의 영향을 받아 더욱 선정적이고 머리는 비운 <포키스>가 나온 것이 1981년. 1980년대에는 청춘영화들이 쏟아져 나왔고, 수작도 많았다. 에이미 해커링의 < 리치몬드 연애소동Fast Times at Ridgemont High >(1982), 프랜시스 코폴라의 < 아웃사이더 >(1983), 폴 브릭먼의 < 위험한 청춘Risky Business >(1983) 등등. 한때 청춘영화의 셰익스피어라고 과찬을 받았던 존 휴즈는 1984년부터 <아직은 사랑을 몰라요Sixteen Candles>(1984) < 브렉퍼스트 클럽 >(1985) < 페리스의 해방Ferris Bueller’s Day Off >(1986) 등을 만들었다. 청춘영화에 성적 체험이 빠질 수는 없었지만 두드러지게 섹스를 내세운 영화는 < 리치몬드 연애소동 >과 < 위험한 청춘 >이다. 1995년에 < 클루리스 >를 만들기도 했던 에이미 해커링은 숀 펜, 제니퍼 제이슨 리, 피비 케이츠를 출연시킨 <리치몬드 연애소동>에서 남자의 성적 모험만이 아니라 여성의 관점에서 청춘의 한 시절을 그려냈다. <위험한 청춘>은 아이비리그에 진학하려던 모범생이 콜걸을 만나 대학을 때려 치고 포주로 나아가는 ‘위험한’ 결말을 보여주었다. 주인공은 무려 톰 크루즈. ‘청춘 섹스 코미디’는 어느 정도 감동과 후련함을 주지만 그 이상은 결코 쉽지 않다. < 아메리칸 파이 >(1999)는 아주 재미있고, 지나간 시절의 추억과 감동을 함께 주었지만 딱 그 정도였다. 그럴 수밖에 없다. 사춘기 남자아이들의 성적 충동은 때로 주체할 수 없을 만큼 강렬하지만 단지 그것만으로 일상을 보내지는 않으니까. 야한 책과 영화를 보고 자위를 매일 할지라도 나머지 시간에는 다른 무엇인가를 한다. 친구들과 우정을 나누거나 배신하기도 하고, 왕따를 당하며 괴로워하기도 하고, 미래에 대한 불투명한 불안으로 방황하기도 한다. 그런 고뇌와 일상의 풍경을 스쳐 지나면서 섹스에만 포커스를 맞추는 청춘 섹스 코미디는 애초에 한계가 명확하다. < 에브리바디 원츠 썸!! >도 제목만으로는 그랬다. 누구나 ‘썸’을 원해. 일단 이성을 만나고, 연애 이전에 탐색을 하며 섹스를 하고 미래로 나아갈까 말까 하는 단계. 기왕이면 연애 이전에 썸만 수없이 타면 더욱 좋지 않을까? 연애는 아주 아주 마음에 드는 사람하고 훗날 하면 되는 것이고. 제목만 듣고 <에브리바디 원츠 썸!!>은 가벼운 만남과 섹스를 보여주는 청춘 섹스 코미디이겠지, 라고 생각했다. 감독이 리차드 링클레이터라는 것을 알기 전까지는. 감독을 알고는 바로 선입견을 내렸다. 리차드 링클레이터가 연출한 청춘 섹스 코미디의 방점은 당연히 ‘청춘’일 테니까. 1991년 리차드 링클레이터의 데뷔작 < 슬래커 >는 다수의 젊은이들을 따라간다. 에피소드마다 이야기가 흐르고, 자잘한 에피소드들이 섞이고 뭉쳐서 커다란 이미지로 남게 한다. 다음 작품인 < 멍하고 혼돈스러운Dazed and Confused >(1993)은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다양한 청춘의 풍경을 그려낸다. 스치는 것 같으면서도 하나하나의 장면들이 기억에 남는다. 이후 < 비포 선라이즈 > 3부작과 아카데미 수상작인 < 보이후드 >로 대중의 사랑과 평단의 찬사를 모두 얻은 리차드 링클레이터의 영화는 순간을 포착하면서, 그 순간들이 어떻게 거대한 흐름으로 수렴하는지를 보여준다. 개별적이고 파편적이면서도 거대한 그림의 조각으로 맞춰지는 영화. < 에브리바디 원츠 썸!! >은 대학 개강을 하기 전, 3일 15시간의 풍경을 보여준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제이크가 차를 몰고 대학으로 가는 장면에서 낵의 ‘마이 샤로나’가 흘러나온다. 1980년 8월의 풍경이다. 전작인 < 보이후드 >의 마지막 장면이, 성장한 소년이 대학에 입학하여 차를 타고 떠나가는 것임을 생각하면 일종의 연장선이다. 혹은 < 멍하고 혼돈스러운 >이 1976년의 고등학생들 이야기였던 것을 기억한다면 <에브리바디 원츠 썸!!>은 그들이 대학에 들어가 겪는 사흘간의 이야기가 되기도 한다. 동시에 리차드 링클레이터 자신이 겪었던 1980년의 대학이기도 하고. 명목상의 시간은 <멍하고 혼돈스러운>의 다음이고, 상징적으로는 <보이후드>의 연속선에 놓여 있다. 고등학교에서 투수였던 제이크는 대학에서도 야구부 활동을 한다. 제이크의 동료, 선배들은 모두 개성이 강하다. 허세를 부리기도 하고, 사소한 내기에 지는 것도 싫어하고, 후배들을 은근히 경쟁자로 생각한다. 하지만 하나에서만은 일치단결한다. 여자를 만나는 것. 디스코 클럽, 컨트리 클럽, 펑크록 공연 그리고 코스튬 파티까지 오로지 여자를 만나기 위해 떠돌아다니는 그들의 목적은 섹스다. 뭐 어떤가. 혈기왕성한 스무 살의 청년인데. 하지만 그것이 그들의 전부가 아니다. 제이크는 말한다. 디스코, 컨트리, 펑크를 오락가락하다 보니 뭐가 진짜이고 뭐가 아닌지 헷갈린다고. 신입생인 뷰터도 말한다. 대학은 생각할 것이 너무 많다고. 그럴 수밖에 없다. 만약 프로에 가지 못한다면, 그들의 인생은 확 달라질 것이다. 더 이상 그라운드에 오르지 못하고, 공부를 하거나 직장인이 되어야 한다. 내가 할 수 있을까? 아니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전공은 중요하지 않다. 고등학교 때까지는 최고라고 생각했는데, 대학에 오니 주전에 끼기도 쉽지 않다. 제이크가 좋아하게 된 베벌리는 공연 예술 전공이다. 고등학교 때는 다들 주연이었는데 이제는 캐스팅만 되어도 감지덕지다. 사흘 동안, 선배들과 대학이라는 공간을 만나서 알게 된다. 이제부터가 진짜 인생의 시작이라는 것을. 나이가 엄청 많은, 좋았던 시절을 버릴 수 없어 대학을 떠도는 월러비는 말한다. “너희들이 누구인지 알아야 해. 자신을 찾는 경험을 두려워하지 마.” 하지만 그 역시 진짜 자신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고만 있다. 월러비가 쌓아놓은 <환상특급> 비디오테이프를 보고 제이크가 한 에피소드를 말한다. 어떤 여자가 예뻐지기 위해 성형을 하려고 하는데, 알고 보니 그 여자가 아름답고 다른 이들이 엉망이었다고. 그들은 모두, 자신이 별종이라고 생각한다. 사춘기 때는 대개 그렇다. 나는 왜 이렇지? 나는 누구지? 어디로 가야 하지? 뭐가 맞는 것일까? 아무리 이성을 찾아 하룻밤을 탕진하며 생각을 멈춰도 마음속의 의문은 사라지지 않는다. 월러비는 원소가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결합방식이 아름다운 것이라고 말한다. 말 많은 핀은 재료가 아니라 재료를 느끼는 방식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존재하는 그들 자신이 아니다. 남들이 평가하는 무엇, 나도 알고 있는 나 자신, 그것은 이미 존재한다. 그것을 어떻게 느끼고, 어떻게 결합해 갈 것인가. 대학은 찾아가는 과정이다. 어른이 된다는 역시. 마지막 코스튬 파티에서 그들은 평소의 모습 그대로 간다. 하지만 알고 있다. 지금의 모습 자체도 가면이라고. 우리는 항상 가면을 쓰고 있고, 어쩌면 가장 파티에서의 가면이 자신의 진짜 얼굴이거나 미래인 것일지도 모른다. 투수는 혼자 마운드에 올라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하지만, 또한 팀원들의 도움 없이는 승리할 수 없다. 나를 찾는 것과 동시에 타자를 만나고 어우러져야 한다. 그게 대학이고, 세상이고, 인간이 살아가는 방법이다. 1980년대는 싸워야 하는 대상이 사라진 시대였다. 68혁명의 여파가 이어지던 낙담과 쾌락의 70년대와는 전혀 다른 시대. 모든 것이 반짝거리고 부유하는, 텅 빈 세계. 그러나 젊은이들의 존재는 언제나 똑같다. 시대가 변해도, 그들의 불안은, 그들의 고독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렇기에 < 에브리바디 원츠 썸!! >은 결국 리차드 링클레이터가 경험했던 1980년대의 번들거리는 풍경을 통해 그려낸 청춘의 표상이다. 단지 보는 것이 아니라 명확하게 말해준다.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좋을지를. 리차드 링클레이터의 청춘 영화들은 언제나 별종들의 이야기다. 그러니까 결국은 ‘Freak’ 이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많은 여자들과 썸을 타다가 베벌리를 만난 제이크는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쓴 에세이에 대해서 말한다. 시지프스의 신화를 빗대 의미를 부여하는 만큼 의미가 생긴다고. 세상이 뭐라던 내가 할 일을 하고, 좋든 나쁘든 다가올 것을 받아들인다고. 베벌리도 말한다. 어떤 일에 열정을 갖는 것은 아름답지 않아? 그렇기에 바보처럼 보일 배짱을 가지고 예술과 함께 살아가겠다고 선언한다. 아마도 수없이 꺾이고 나뒹굴겠지만 시지프스를 떠올리면서 그들은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한계를 설정하는 것은 나 자신’이니까. < 에브리바디 원츠 썸!! >은 청춘 섹스 코미디다. 사려 깊고, 원숙한 시선으로 방탕한 청춘의 사흘을 그려낸 섹스 코미디. 하지만 인생은 그보다 길다. 사흘만으로 그들의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없는 것처럼, 한순간의 섹스에 대한 욕망과 바보 같은 열정을 쉽게 판단할 수 없다. 리차드 링클레이터는 무모하고도 요란한 청춘의 순간을 절묘하게 이어붙이면서 새벽, 아침의 개강 순간으로 관객을 끌어간다. 그건 파티가 끝난 후의 적막이 아니라 일상으로 이어지는 새로운 시작의 열정이다. 아침의 열정. 섹스가 끝난 후 남아 있는 미열을 느끼며 미소 짓는 기분이라고나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