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지와의 조우
- 감독
- 스티븐 스필버그
- 제작년도
- 1977
- 출연
- 리차드 드레이퓨스, 프랑소아 트뤼포, 테리 가, 멜린다 딜런, 밥 바라반, 랜스 핸릭슨
아마도 < 레디 플레이어 원Ready player one >(2018)이 스티븐 스필버그를 대표할만한 걸작으로 기록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 죠스JAWS >(1975)처럼 기념비적인 흥행을 기록한 것도 아니고 < 미지와의 조우Close encounters of the third Kind >(1977)처럼 지속적으로 영감을 미칠 만한 명장면을 남기지도 못했다. < 쥬라기공원Jurassic park >(1993)처럼 CG를 활용한 리얼리티의 혁신을 가져오지도 않았고 < 에이.아이. A.I. >(2001)처럼 장중한 호흡과 묵직한 걸음으로 현실과 영화 사이 어두운 그림자를 응시하기 시작한 영화도 아니다. 그럼에도 나는 <레디 플레이어 원>이야말로 자연인 스필버그와 대중문화의 아이콘 스필버그를 잇는 가교 같은 영화라고 생각한다. <레디 플레이어 원>을 한 줄로 정리하자면 오타쿠 소년이 세 개의 시련을 통과해 온라인 세계를 구원한 후 오프라인 세계를 잇는 가교가 되어 균형을 되찾는다는 내용이다. 극장을 나서는 순간부터 이 영화는 스필버그의 과거, 현재, 미래를 압축 정리한 자서전이라고 생각했다. 스필버그는 인터뷰를 통해 “내 모든 영화들이 개인적인 것들이 녹아들긴 했지만, 나의 실제 삶을 거울처럼 반영하는 영화는 아직 만들지 않았고 앞으로도 만들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지만 소년 웨이드 와츠와 노인 제임스 할리데이는 분열된 자아라고 해도 좋을 만큼 스필버그의 과거와 현재를 대변한다. 전제(혹은 도망갈 길)를 하나 미리 깔아두겠다. 현재진행형인 감독의 행보를 결정된 감독론으로 정리하는 건 의미 없는, 아니 사실상 불가능한 작업인지라 단지 이해의 편의를 돕기 위한 보조기구 정도로나 써먹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누군가의 행적을 한 줄 서사로 정리하는 건 꽤 재미있는 작업이고, 한편으론 그렇게 해서라도 상대를 이해하고 싶은 마음도 이해한다. 할리우드 산업의 총아로 선택되었고 적극적인 탐험가를 거쳐 원숙미까지 더해가는 거장의 길이라면 더욱 구미가 당길 수밖에 없다. 2000년 이후 스티븐 스필버그는 영민한 제작자와 할리우드 클래식 최후의 수호자라는 위상을 동시에 수행 중인 것처럼 보인다. 두 영역은 영원히 좁혀지지 않을 평행 우주나 마찬가지로 여겨졌는데 오직 스티븐 스필버그만이 홀로 인과의 법칙에서 자유로운 양 양쪽을 자유롭게 넘나들고 있다. 요컨대 할리우드에는 두 명의 스필버그가 존재한다. 그렇게 믿어져 왔다. 진짜 그럴까. 정말 두 명의 서로 다른 스필버그가 있는 것일까. 스필버그는 한쪽에선 블록버스터라는 용어를 탄생시킨 사람으로서 대중영화의 최전선에서 스펙터클이라는 마법을 휘두르고, 다른 한쪽은 할리우드 시네마 최후의 보루로서 원숙미 넘치는 성찰을 낮은 목소리로 설파하고 있는 중일까. 그는 후자를 바라면서도 상업적인 판단하에 이상을 누르고 대중이라는 모호한 속성과 종종 타협해왔던 것일까. 걸작과 범작, 킬링타임용 영화까지 손을 뻗친 스필버그의 필모그래피를 납득하기 위해 대신 변명 해줄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70년대의 쇼크와 혁신, 80년대의 보편타당한 가족 드라마, 90년대의 어둠을 응시하는 성장기로 변화의 과정을 구획 짓고 연대기로 정돈하는 것도 가능하다. 어떤 식으로든 스필버그가 내놓은 다종다양한 영화들을 한 줄기로 꿰어 설명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그의 행보를 둘로 찢어놓아야만 한다. 말하자면 두 명의 스필버그를 필요로 한 건 관객이 아니라 평단의 입이다. 굳이 양립할 수 없는 우주 사이의 교차점을 탐색하는 것보단 그편이 훨씬 선명하고 손쉽다. <레디 플레이어 원>은 두 명의 스필버그로 분리해 접근해도 미적지근하다. 순수하게 엔터테인먼트를 강조한 프로젝트로 봤을 때 <레디 플레이어 원>의 심도는 미흡하다. 게임에 대한 영화 속 이해는 초보적인 수준이고 가상현실의 묘사 역시 익히 보아왔던 것에서 크게 달라지지 못했다. 원작인 소설 <레디 플레이어 원>을 사랑하는 독자들이 영화에 맞춰 변형된 몇몇 장면들에 대해 디지털, 게임 서사, 가상현실, 무엇보다 오타쿠 문화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 없는 묘사라며 불만을 토로한다면 온전히 변호할 수 없을 것이다. <레디 플레이어 원>의 세계관은 소위 말하는 ‘덕질’이 능력이 되는 은밀한 판타지를 기반으로 한다. 천재 게임 개발자 제임스 할리데이(마크 라일런스)는 가상현실게임 오아시스의 소유권을 걸고 세 가지 시련을 부여한다. 세 가지 관문을 통과하기 위해선 영화의 대사까지 통째로 암기할 줄 아는 덕질이 필요하지만, 스필버그를 이를 ‘현실과 균형을 맞추는 일’로 타협하고 이른바 ‘착하고 상식적인’ 주인공에게 힘을 실어준다. 적당한 타협. 또는 숱한 영화에서 봐왔던 익숙한 결말. 게임을 무대로 하되 비디오 게임의 탄생 시기인 1980년대 대중문화를 원전으로 내세움으로써 이른바 상업 드라마적으로 보편타당한 해답을 내놓는 것이다. 오타쿠의 시선에서 보자면 이 영화가 건드리고 지나가는 이스터에그들은 한없이 가볍고 처음 본 사람도 납득 가능할 만큼 무난하다. 반대로 2000년 이후 스필버그의 묵직한 연출에 찬사를 보내던 이들의 입장에서 봐도 <레디 플레이어 원>의 난감한 영화다. <A.I>, < 우주전쟁War of the worlds >(2005), < 워 호스War horse >(2011), < 스파이 브릿지Bridge of spies >(2015)의 진지한 통찰은 간데없고 사물의 어둠을 응시하고 현실과 재현의 거리를 고민하던 얼룩들도 깔끔하게 지워져 있다. 미성숙한 아이의 신기한 장난감처럼 자신이 사랑한 대중문화를 유희와 오락의 관점에서 쌓아 올렸을 따름이다. 이 거창하고 어딘지 낡아 보이기까지 한 놀이기구는 관점에 따라선 거의 퇴행적인 영화처럼 보일 지경이다. 어떻게든 스필버그를 이해하고 싶은 이들은 엔터테인먼트를 목표로 80년대 대중문화에 대한 애정과 향수를 모은 오마주 정도로 납득할지도 모르겠다. <레디 플레이어 원>은 스필버그를 한 방향, 한 가지 길로 규정지을 때 양쪽 모두를 충족시키기 어려운 애매모호한 결과에 도달한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내가 <레디 플레이어 원>에 집착하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어정쩡한 면모 때문이다. 어정쩡함이란 단어가 이상하다면 달리 표현하겠다. 이건 분리된 세계 중 ‘하나를 선택하지 않겠다’는 적극적인 선택이다. 할리데이는 최후의 시련을 통과한 웨이드에게 오아시스의 주인이 될 수 있는 계약서를 준다. 실은 숨겨진 테스트였기에 계약서에 사인을 하지 않은 웨이드는 그제야 진짜 에그를 얻는다. 스필버그도 마찬가지다. 그는 항상 두 가지 길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받아왔다. 예술과 상업, 영화와 현실, 리얼과 리얼리티. 스필버그의 개별영화들을 양 갈래 길로 분류하기 시작하면 그의 행보는 분열적으로 읽힐 수밖에 없다. 하지만 <레디 플레이어 원>을 보며 어쩌면 스필버그는 한 번도 무언가를 구분하는 선택을 하지 않았던 건 아닌가 하는, 새삼스런 생각이 들었다. 스필버그에게 영화란 무엇일까. 반드시 라고 하긴 어렵지만 ‘작가’로 칭송받는 감독들의 작업은 대개 연역적이다. 대다수 작가들에겐 세계와 영화과 관계 맺는 이상적인 형태가 있다. 무릇 작가라면 그 이상향에 도달하기 위해 끊임없이 영화를 두드리며 구도의 길을 걷는다. 반면 스필버그가 영화를 체험하고 구축해나간 방식은 철저히 귀납적이다. 그는 그때그때 자신이 흥미롭게 즐긴 대상을 영화적인 방식으로 소화시켜 표현의 영토를 넓혀 왔다. 스필버그는 탐욕스러운 모험자다. 재미, 호기심, 즐거움을 최우선에 두는 소년은 미지의 분야로부터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고 도전하는데 거리낌이 없다. 한때는 도전과 개척의 대상이었을 영화에 터를 잡은 뒤 스필버그는 모든 경험들을 영화라는 무대 위에 녹여내기 시작했다. < 슈가랜드 특급The sugarland express >(1974)을 연출했던 스필버그는 이른바 작가주의 영화들에 매료되어 그 시적 리듬을 자연스레 흡수했고, < 이티E.T. >(1982)에는 각종 특수효과의 상상력과 마술적인 표현을 마음껏 뽐냈다. <쥬라기 공원>(1993)에서는 컴퓨터 그래픽의 지각적 리얼리티를 영화 안에 끌어들였다. 그 결과 “디지털 시대는 어떤 장면도 더 이상 경이롭지 않게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 위험하고 그런 점에서 나 역시 유죄”라고 스스로 고백하면서도 새로운 표현방식과 전통적인(익숙한) 영화를 접목시키는데 망설임이 없었다. 스필버그의 극장에는 때로 할리우드 고전 영화들이 상영되고 때로는 스펙터클의 도배되었다가 어떨 땐 새로운 기술 시연의 장이 되기도 한다. <레디 플레이어 원>이 선택한 새로운 장난감은 가상현실 게임이다. <레디 플레이어 원>을 어정쩡한 범작에서 스필버그의 코어에 접속하는 중요한 열쇠로 승화시키는 대사가 있다. 할리데이는 최후의 관문을 통과한 웨이드를 어린 시절 자신의 방으로 초대한다. 8비트 게임기에 몰두했던 소년 할리데이는 현실에서의 소통이 얼마나 어려웠는지 안타까워하면서도 현실을 긍정한다. 그 끝에서 툭 던지는 한 마디 대사. “리얼리티 이즈 리얼.” 이 순간 현실과 가상현실게임으로 구분되고 가로막혀 있던 세계가 연결된다. 할리데이는 현실보다 게임이 더 편한 사람이었지만 그렇다고 게임을 현실로부터의 도피처로 삼은 건 아니다. 게임 속에서 쌓은 할리데이의 위대한 업적과 긴 시간들을 누가 가상, 가짜로 치부할 수 있을 것인가. 현실과 가상현실, 양쪽의 시간 모두를 긍정할 때 할리데이는 온전히 한 사람이 될 수 있다. 스필버그 역시 마찬가지다. 클래식 영화를 사랑하고 지키려는 고지식한 스필버그와 온갖 비영화적인 것(예컨대 CG, 3D, VR 등)들을 즐기고 기꺼이 영화의 세계로 초대하는 오타쿠 스필버그는 실상 분리되지 않는다. 오늘날 영화는 무엇일까. 매체가 섞이고 플랫폼이 분화되고 관객이 체험이 다종다양하게 분리되는 현재, 관객 각자의 영화적 체험이 존재한다. 전통적 영화의 개념, 바쟁이 찾아냈던 사진적 영상의 존재론이 희미해진 지금 영화는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가. 그려진 것과 찍힌 것, 달리 말하자면 애니메이션과 영화의 차이는 무엇인가. 컴퓨터 그래픽의 등장으로 찍는 영화와 그리는 영화의 구분이 모호해진 지금, 라이브 액션 시네마와 그래픽 시네마를 나누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가. 모든 의문의 근본에는 ‘필름, 실사, 시네마는 다르다’는 고집, 혹은 달라야 한다는 바람이 반영되어 있다. <레디 플레이어 원>은 이 딱딱한 고정관념에 스필버그식으로 화답한다. 어떤 신기한 기술이든 받아들이고 거리낌 없이 흉내를 내되 소통할 수 있도록 현재화하는, 오직 즐거움을 향한 모험담. <레디 플레이어 원>에는 세 가지 층위의이미지가 공존한다. 첫째는 웨이드가 속한 라이브 액션. 이는 필름의 질감과 할리우드 서사 영화의 관습을 흉내 낸다. 두 번째는 가상현실게임 오아시스의 플레이 이미지들. 이는 CG 애니메이션임을 일부러 선명히 드러내며 애니메이션이 축적해온 미학적 양식(이를테면 과장된 이미지와 애니메이션적 허용)을 기반으로 한다. 마지막은 최근 스필버그의 페르소나라 해도 좋은 마크 라이언스의 이미지를 바탕으로 재현한 제임스 할리데이다. 오아시스 속 캐릭터가 확연히 CG 애니메이션임을 드러내는 데 반해 할리데이의 비주얼은 필름을 극한까지 묘사한 최근 CG의 연장에 있다. 그려진 것이되 찍힌 것에 한없이 가까워지고자 하는 이미지. 여기서 다시 질문. <레디 플레이어 원>은 게임을 소재로 한 영화인가, 영화를 흉내 낸 게임인가. CG를 활용한 실사 영화인가, 실사를 흉내 낸 애니메이션인가. <레디 플레이어 원>이라는 결과물은 모든 개념을 포괄하고 경계를 허문 채 지금 여기 존재한다. 리얼리티 이즈 리얼. 사실적인 것(가상현실) 역시 사실(현실)의 일부라는 단순명료한 답. ‘영화적인 것’ 역시 영화의 일부라는 수용적 태도. 생각해보면 스필버그는 항상 그랬다. 스필버그를 대중과 예술이라는 평행선 위에 두고 찢어놓고 싶어 한 건 평자들의 욕망이었을 뿐, 그는 늘 대중문화의 여러 체험을 섞고 영화적인 것들로 소화한 뒤 쌓아 올려 우리의 ‘영화적’ 체험을 확장해왔다. 관객으로서 이 영화를 받아들이고 즐기는 건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우리가 두 눈으로 목격하고 있는 것은 영화라는 딱딱한 정전이나 개념이 아니라 숱한 대중문화를 통해 축적된 체험의 흔적들이기 때문이다. 할리데이와 헤어지기 전 웨이드는 묻는다. “아저씨는 진짜예요?” 할리데이는 답한다. “내 게임을 해줘서 고맙다.” 이 짧은 문답에 스필버그의 지난 영화 작업이 오롯이 담겨 있다. “내 영화를 봐줘서 고맙다”고 쑥스럽게 고백하는 스필버그에게 답하고 싶다. 이제 진짜인지 아닌지는 상관없다고. 앞으로도 당신의 영화와 함께 나이 들어갈 수 있어 다행이라고.
< 태권동자 마루치 아라치,1977 >는 임정규 의 감독 데뷔작이다. 이 작품의 시나리오에 의하면, 1973년부터 장장 4년간 매일매일 방송되던 MBC 라디오 어린이 연속극을 애니메이션 영화로 만든 것이다. 당시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 로보트 태권V-수중특공대,1977 >보다 흥행에 성공한 작품이다. < 태권동자 마루치 아라치 (이하 마루치 아라치)>는 근대의 산업화를 통해 인간의 몸에 일어난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데, 이는 기계문명의 잘못된 사용이 가져오는 결과에 대한 경고로 보인다. <마루치 아라치>가 개봉된 1970년대는 우리나라에서도 경제개발계획이 진행되면서 산업화가 고조되고 있었고, 이에 대한 우려들이 예술작품과 산업계에서 전망되고 있었다. < 마루치 아라치 >는 SF(Science Fiction)물이다. SF영화는 신화, 전설, 민담에서 소재를 구하기도 하지만 주요 대상은 과학기술문명이다. 장르 전체로 볼 때, SF는 테크놀로지에 대하여 두 가지의 상반된 입장을 취한다. 첫째는 과학기술이 궁극적으로 문명의 진보를 보장할 것이라는 것이고, 둘째는 과학기술이 지닌 파괴적인 측면을 경고하는 것이다. 상반되는 두 가지 입장임에도 SF영화들은 두 가지로 확연히 구분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SF영화의 이 두 가지 상반된 입장은 흔히 영화 속에서 함께 나타나기 때문이며, 때로는 내러티브가 표면적으로 드러내는 입장과 텍스트의 심층적 의미가 각각 다른 입장을 취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임정규 의 작품 중에 두 번째 경향을 대표하는 < 마루치 아라치 >는 산업사회를 기계와 신체의 대립이라는 문제로 부각시켜 과학기술의 파괴적 측면을 드러낸다. 영화 < 블레이드 러너 >나 < 아키라 >에서 보듯이 SF가 보편적으로 미래사회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의 징후를 포착해 내듯, 그는 기계문명의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이 작품을 통해 드러낸다. 1969년 7월 인류 최초로 달에 착륙한 미 항공우주국(NASA)의 유인우주선 아폴로 11호와 우주비행사 닐 암스트롱이 남긴 인상은 강렬했다. 이후 1975년 7월, 아폴로-소유즈의 우주도킹은 실사영화계에서도 공상과학물이 쏟아져 나오는 계기를 만들었다. 세계적으로 산업혁명 이후 점차 발전하는 기계문명에 대한 전망을 내놓고 있었다. 이런 전망들은 영화계에도 마찬가지이어서 당시 최고 흥행영화였던 < 미지와의 조우(Close Encounters Of The Third Kind), 1977 >, < 007 문레이커 (007Moonraker), 1979 >나 < 스타워즈(Star Wars), 1977 >시리즈는 미래 문명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하였다. 어쨌든 제1회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가 서울에서 개최되었던 1973년부터 시작된 MBC 라디오의 어린이 연속극 < 태권동자 마루치 아라치 >의 인기는 대단한 것이었다. 이는 태권도가 국제적으로 인정받기 시작하여, 우리나라에서 국제대회가 개최되면서 사회적 붐이 일어나는 것과 맥을 같이 한다. 또한 라디오극 <마루치 아라치>와 ‘경기(競技) 태권도’의 인기는 태권도를 소재로 <마루치 아라치>와 < 로보트태권V , 1967 >의 제작으로도 이어졌다. < 마루치 아라치 > 라디오 연속극의 원안은 김진희가 썼고, 각본을 민병권 이 맡았다. 그리고 극장용 애니메이션 영화는 민병권의 각본을 송길한 이 각색하였다. 그러나 실제 애니메이션 영화는 임정규 감독이 스토리보드 작업을 하며 대폭 뜯어 고쳤다. 원작이 라디오 극본이다 보니, 작품의 곳곳에 영상적인 장면보다는 설명적인 장면들이 너무 많아 시나리오를 그대로 쓰기에는 무리가 있었다고 한다. 특히 스토리와 캐릭터의 설정에서 많은 부분 수정되었다. 1977년 7월 27일 중앙극장에서 개봉한 <마루치 아라치>는 당시 세계태권도대회 등 태권도 붐이 일었던 시대적 분위기와 원작 방송의 인기에 힘입어 먼저 개봉한 < 로보트태권V >보다 크게 성공한다. < 마루치 아라치 >의 제작은 당시 일고 있던 태권도의 열풍 때문이었다. 1970년대는 우리 것에 대한 긍지와 주체성을 살리자는 의식이 높았던 시기로 민족문화를 재인식하고 재발견하여 보존하자는 정부정책의 하나로 태권도를 알리는데 노력하던 시기였다. 이런 노력으로 해외에서 태권도 연맹과 협회가 설립되었다. 이어 이들을 초청하는 태권도 국제대회가 우리나라에서 개최되면서 국민들에게 우리 민족의 우수함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태권도는 세계 속에 대한민국의 국위를 선양하며 국민적 자부심을 갖게 하였다. 자랑거리가 별로 없던 시절 이러한 자부심은 애니메이션 영화 속에서도 드러나 당시 선진 외국에 주눅 들었던 어린이들에게 대리만족을 느끼게 해주었다. 실제 < 마루치 아라치 >나 < 로보트태권V >의 작품 속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에서 한국의 태권 소년 ‘마루치’와 ‘훈이’는 외국의 선수들을 물리치고 競技 태권도의 영웅으로 그려진다. 이는 TV 애니메이션 시리즈를 통해 유행하던 로봇물과 결합하여 여러 작품을 내놓게도 했다. 그리고 이것은 이후 제작되는 애니메이션의 주인공들이 대부분 태권도 유단자로 설정되게 하는 전범이 되었다. < 마루치 아라치 >는 우리에게 친근한 태권도를 소재로 하고 있지만 SF장르의 영화이다. <마루치 아라치>는 ‘미래사회’가 아닌 당대(현재)적 시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 작품은 공상과학의 세계를 다루면서도 공상과학의 긍정적인 면보다는 부정적인 면을 부각시켜 당시 유행하던 공상과학물을 탐닉하는 청소년들에게 심신의 단련이 필요하다고 강변하고 있다. 따라서 이 작품이 다루고자하는 세계는 파란해골13호로 상징되는 기계문명의 폐해를 없애고, 태권도를 통해 심신을 단련하는 건강하고 밝은 사회를 그리고자 한다. 그래서 기계문명의 폐해를 극복하는 태권도영웅의 탄생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그림 2] 태권도 수련 SF물이 그렇듯 < 마루치 아라치 >도 단순한 스토리 구조를 가지고 있다. 영화는 처음 과거 회상을 통해 복수의 원인을 보여주고 갈등을 설정한다. 이후 장 선생과 양 사범의 도움으로 체계적인 태권도를 배워 파란해골을 추적하여 복수하는 단순한 구조의 이야기이다. 마루치와 아라치는 복수로 움직이는데, 복수의 원인이 되는 할아버지의 죽음을 보면 다음과 같다. 파란해골13호와 대결하는 할아버지의 대각선 인물구도와 붉은 색 배경은 불안을 야기 시키고 이를 통해 사건의 위험성을 알려준다. 이를 지켜보는 어린 마루치와 아라치의 배경도 온통 붉은 색으로 처리된다. 결국 쓰러지는 할아버지와 이를 장 선생에게 전하는 마루치의 눈동자 속에는 동굴 속의 모닥불과 겹쳐지면서 복수를 암시한다. [그림 3] 할아버지의 죽음 이 영화의 희생자는 어린 마루치와 아라치를 키우며 무술을 가르친 스승이며 할아버지이다. 그는 영화의 시작 전에 희생당한다. 이처럼 범죄가 스승이면서 가족이기까지 한 인물에 대한 살인이기에 복수는 더 정당화된다. 복수 플롯의 특징은 범죄를 목격하게 만들면 효과가 커지고, 범죄가 끔찍할수록 호응을 얻는다. 관객이 범죄를 목격하여 정서적으로 사건을 경험하는 것은 그 자체로서 강렬할 뿐만 아니라 관객과 희생자 사이에 강한 연대감을 맺어준다. 이를 통해 감정이입을 느끼게 하여, 이 플롯의 중요 목적인 관객과 복수를 하는 주인공 마루치 아라치와 강한 정서적 다리를 놓아준다는 것이다. 관객은 이들이 소개될 때, 첫 시퀀스에서 산속 동물들이 그들의 숙소 앞에 모여드는 것으로서 이들이 동물들과 교감을 나누며 자연을 지키는 정의로운 사람임을 알게 한다. 그래서 이들의 억울함이 관객들에게도 가슴 깊이 억울함을 느끼게 한다. 관객은 이런 끔찍한 분노로부터 자기를 지키기 위해서는 완전한 정의가 세워져야 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이러한 플롯을 사용할 때에는 정당한 행위와 정당하지 못한 행위가 무엇인지 분명히 구별해야 한다. 한편 주인공이 추구하는 방법은 야생의 정의이기 때문에 비싼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이야기의 핵심에는 마루치와 아라치가 있고, 그들은 어려서부터 무술을 통해 심신을 단련한다. 그들은 할아버지의 유언대로 태백산에서 자연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다. 그들은 천성적으로 자연친화적이고 불의를 참지 못하며 정의감에 불타는 소년소녀이다. 하지만 이들이 하고자 하는 바는, 스승이며 유일한 혈육인 할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복수하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개인적인 복수가 아니라 인류의 사회악을 물리치는 것이다. 이로서 영화는 갈등이 설정된다. 마루치와 아라치는 스승이기도 했던 할아버지를 갑자기 잃고 행복을 빼앗기게 된다. 그들은 범죄를 막을 수 있는 힘이 없다. 아직 파란해골에 대적할만한 힘이 없어 물러서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파란해골의 범죄를 목격하였기에 복수를 꿈꾼다. 영화는 마루치 아라치와 파란해골 13호, 장 선생과 양 사범 등 캐릭터의 소개와 주요 갈등인 할아버지의 죽음을 통한 복수의 설정, 태권도를 통해 정의를 실현하는 스토리의 세계를 13분 30초라는 짤막한 시간에 탁월하게 설정한다. 또한 중간에 드러날 사건까지 촘촘히 직조해 낸다. 장 선생과 양 사범의 권유로 산을 내려온 주인공들이 양 사범으로부터 체계적인 태권도를 수련하면서 본격적으로 복수를 계획한다. 이들의 훈련 장면에 등장하는 테마송을 보면 이들의 훈련이 무엇을 준비하는지 알게 해준다. 복수의 테마송이 나오는 동안 양사범의 지도로 밤낮과 눈비를 가리지 않고 이들의 훈련은 계속된다. 스틸 컷과 애니메이션으로 이들의 발차기, 격파, 날기 등의 태권도 수련과정이 효과적으로 전달된다. [그림 4] 복수의 준비 대개 복수의 플롯은 등장인물의 의미 있는 탐색보다는 복수의 행위 자체에 초점을 맞춘다. 따라서 마루치와 아라치의 정의는 야생적이며 법의 테두리를 넘어서 그들만 집행하는 정의이지만 이들의 복수는 관객의 정서를 자극한다. 그래서 마루치와 아라치의 복수가 법적으로는 아닐지라도 도덕적 정당성을 가진다. 이 작품에서는 타깃이 청소년이기 때문인지, 조력자로 경찰인 김 주임이 함께 동행 한다. 하지만 그의 역할은 미약하다. 사실 이들은 처음부터 양 사범과 장 선생의 도움을 받아 스스로 복수를 준비하게 된다. 태권도에 타고난 재능을 지닌 마루치는 양 사범의 훈련으로 더욱 기량이 좋아져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에 출전하게 되고, 여기서 뛰어난 재능 때문에 파란해골단의 표적이 되어 비수에 크게 다치게 된다. 이로서 복수를 위한 추적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진다. 파란해골단은 동해 수중공원에서 열리는 ‘세계핵물리학자대회’에서 장 박사를 납치하고, 마루치는 해룡과 싸우다 크게 다쳐 실종되면서 반전이 발생한다. 그러나 실종되었던 마루치를 인어 유리가 구해주고, 마루치는 유리의 도움으로 해골섬을 찾아내지만 복수에는 실패한다. 이렇게 두 번의 실패로 마루치와 파란해골 13호 간에 팽팽한 긴장이 발생하고, 이제 이들의 극적 대결만 남는다. 파란해골이란 캐릭터는 이 영화에 있어 매우 독특한 인물이다. 파란해골은 인간의 생로병사를 연구하던 과학자였지만, 기계문명을 맹신해 자신의 몸을 없애고 해골만 남은 유별난 사람이다. 그는 인간의 심신이 거추장스럽다고 느껴 기계문명에 영혼을 맡긴 인물이다. 그래서 그가 발명한 기계로 부하들을 모두 기계인간으로 개조한다. 파란해골 13호는 인간의 신체를 기계화하는 근대화와 산업화의 상징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는 태백산에서 마루치와 아라치의 할아버지를 죽인 장본인으로 사람을 함부로 죽이고, 납치하며 설인국을 파괴하려 한다. 최종적으로 그는 핵물리학자인 장 박사를 납치하여 광속으로 나는 우주선을 만들어 지구와 우주를 정복하고자 한다. 이에 반해 기계문명에 대항하는 마루치와 아라치는 태권도 수련으로 심신을 단련한 정의로운 소년소녀이다. 그들은 인류의 악이자 할아버지의 복수를 꿈꾸며 외곬으로 마지막까지 달려왔다. 그들은 파란해골을 추적했지만 매번 복수의 기회를 놓쳐왔다. [그림 5] 할아버지의 복수 파란해골 13호는 장 박사와 설인국 공주 쏘냐를 볼모로 잡고, 마루치와 대결하지만 마루치와 아라치의 정의의 주먹에 납작코가 된다. 그들의 복수는 할아버지뿐만 아니라 건강한 인류사회를 위한 행동이다. 그래서 복수의 원칙으로 처벌은 범죄와 맞먹는다. 심판은 법이 아닌 마루치와 아라치의 주먹으로 이루어진다. 마루치와 아라치는 할아버지의 복수에 성공하고 인류는 평화를 되찾는다. 복수는 파란해골이 기계문명을 맹신하고 잘못 사용한 자이기 때문에 마루치와 아라치는 그들의 몸과 마음을 수련하여 정의의 주먹으로만 응징해야 한다. 그래야 파란해골에 대한 정당한 응징이 될 수 있다. 산 위에서 자연인으로 살던 이들은 야생의 정의를 실천한다. 산위에서 일어나는 할아버지의 죽음도 문명화 되지 않은 야생이다. 이들에게 산은 야생의 공간이며, 문명이 억압하는 것을 표출하는 공간이다. 산위의 공간에 비해 이들이 하산한 도시의 공간은 문명의 공간이다. 그곳은 기계문명이 번성하는 곳으로 파란해골이 있는 곳이다. 그래서 그들은 도시에서 파란해골과 첫 대면을 하게 된다. 문명의 가장 대표적인 공간이 바다 속 수중공원이다. 그곳에서 장 박사는 납치되고, 마루치는 실종된다. 하지만 이들이 야생의 정의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다시 산 위로 올라가야 한다. 그들은 문명화되지 않은, 즉 원시가 그대로 보존된 히말라야의 설인국에서 최후의 대결을 벌이게 된다. 설인 또한 문명과는 거리가 먼 야생이다. 이들은 파란해골이 공주를 인질로 잡고 있어, 처음에는 어쩔 수 없이 마루치와 대결하게 되나, 결국에는 야생의 자연이기에 마루치를 돕게 된다. 영화는 야생의 산 위에서 시작해서 문명화된 도시로 수중공원으로 이동한다. 이는 다시 야생의 공간인 북극기지에서 또 다시 히말라야의 산 속 설인국으로 옮겨 마지막 대결을 벌여 잘못 사용된 기계문명을 무찌름으로써 복수를 완성하는 공간 구조를 보여준다. 이렇게 야생의 정의가 승리함으로써, 작품의 수직적 공간도 플롯에 상징적으로 기여한다. 이렇듯 < 마루치 아라치 >의 이야기 구조는 전형적인 복수의 플롯에 추적 및 구출의 플롯이 가미된 작품이다. 그러나 크게 보면 복수의 플롯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그 복수의 원인인 파란해골 13호의 할아버지 살해에 대한 뚜렷한 이유를 제시하지 않는다. 시나리오에서는 파란해골 13호가 태백산에 파란해골단의 기지를 짓기 위해 마루치의 부모와 아라치의 부모를 살해하는 것으로 설정되었다. 그러나 임정규 는 마루치와 아라치를 산속에서 신비한 무술을 배우는 소년 소녀로 그리고자 부모 대신 도사의 면모를 갖춘 할아버지가 파란해골에 살해당하는 장면으로 복수의 원인을 설정한다. 그리고 팔라팔라 사령관이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에서 마루치를 보고 산에서 보았던 소년이라고 파란해골에게 보고하는 것으로 보아 이들의 원한관계는 좀 더 구체적으로 제시되었어야 했다. 하나의 완결 구조를 갖는 장편에서 이 같은 실수는 스토리구조상의 약점이라 할 수 있다. 어쨌든 복수는 정서적으로 강렬한 플롯을 만들어낸다. 정의를 갈구하는 상황을 창조하여 강력한 정서를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매력적인 마루치와 아라치, 그리고 파란해골 13호로 상징되는 기계문명에 복수하는 < 마루치 아라치 >는 SF물로 당대의 시대적 상황을 핍진성 있게 그려내었고, 이는 관객에게도 정서적으로 영향을 미쳐 공감을 끌어낸 작품이 되었다. SF물이 미래의 불안한 징후를 드러내듯 작품의 극적 긴장은 냉소적인 면을 가지고 있다. 임정규 의 < 마루치 아라치 > 속에서 그려지는 것은 대부분 인간과 과학의 평화로운 공존이 아니라 파란해골 13호로 상징되는, 과학이 제어할 수 없는 진보로 인해 파멸해가는 인간의 모습이다. 그러면서 임정규 작품의 특이한 점은 보통 SF 작품에서 기계를 파괴하려는 인간, 혹은 기계 문명을 전복하려는 인간은, 그것과 싸우기 위해서 기계문명 내지 과학문명을 이용하는데 이 작품에서는 기계문명이나 과학문명이 아닌 신체를 단련하여 대항한다는 것이다. 특히 과학기술과 인간성의 충돌을 강하게 부각시킴으로써, 테크놀로지의 지배 아래에 있는 세계가 얼마나 황폐하게 변질되고 있는가를 강하게 제기하고 있다. 이로서 임정규는 당대의 현실을 SF로 변주하여 상징화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능력은 이 작품의 시나리오와 그가 감독한 영화의 스토리텔링의 차이를 보면 확연히 알 수 있다. 시나리오에서는 파란해골이 전 세계를 귀신병에 들게 하여 지배하려고 하였으나, 그는 당시 고조되고 있던 산업화의 폐해와 두려움으로 스토리의 갈등 구조를 바꾸어 놓음으로써 당대의 사회적 문제를 충실하게 그려내고 있다. 마루치가 파란해골 13호에게 어떻게 복수를 해나가는가에서 주제의식이 돌출되는데, 이는 당시 시대정신과도 연관되어 있다. 영화는 일제의 수탈과 한국전쟁으로 황폐화되었던 1950년대를 지나, 급속도로 산업화가 진행되던 1960년대와 1970년대의 혼란스런 모습을 은유적으로 보여주는데, 이를 통해 급격한 산업화로 치닫던 1970년대, 인간의 신체를 기계와 결합시키려는 자본주의적 요구에 대항하는 정신적, 신체적 저항을 보여준다. 인류평화를 실현하기 위한 마루치의 욕망은 그것을 억압한 시대의 문제를 함축하고 있다. 기계문명의 폐해와 인류평화를 위한 인간의 확고한 정의감을 대립시켜서 인류의 적인 사회악이 기계문명을 교묘히 이용할 때 무서운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는 것과 기계문명은 어디까지나 인류의 이익을 위해서만 존재가치가 있음을 말한다. 따라서 악의 무리가 조종하는 기계를 정의의 주먹으로서 격파함으로써 몸과 마음을 갖춘 인격을 강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