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풍
- 감독
- 박태원
- 제작년도
- 1974
- 출연
- 신성일, 안인숙, 남궁원, 유장현, 조숙자, 이경희, 한문정, 채령, 박영아, 서학, 추석양, 전숙, 최무웅, 조덕성, 김웅, 김경란, 김기종, 권오상, 남수정, 김승남, 권일정, 김승남
(좌) <젊은 육체들> 중 (사진: " Beat Girl . 1960. Directed by Edmond T. Gréville", MoMA ) / (우) <오발탄> 중 한국영상자료원이 보유한 10,000건 이상의 검열 행정자료들 중 흥미롭고 주목할만한 것들을 선별하여 영화사적 배경이나 상황과 함께 소개하는 시리즈입니다. 이 글들을 통해 새로운 자료들을 발견하는 기쁨과 아울러, 한국영화사를 보다 다양한 관점에서 볼 수 있는 계기를 만나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혁명과 함께 영화검열 폐지가 가시화되다 1960년대는 한국정치와 사회의 거대한 격변과 함께 시작한다. 4월혁명은 이승만으로 상징되는 노쇠하고 부패한 옛 체제를 불과 한 달여 만에 파괴했고, 각 분야의 개혁 작업이 뒤따랐다. 이는 영화검열의 측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5월 경이 되면 관에 의한 검열 폐지 주장이 본격화된다. 5월 6일 문교부는 이승만 정권 말기, 특히 3.15 부정선거 이후 강화된 영화검열로 상영 불허가 된 작품의 재상영을 검토하는 등 검열을 완화할 것이라는 취지를 밝혔고, 13일에는 관제 영화검열을 철폐하고, 영화계의 자율적인 위원회에 검열을 맡기겠다는 취지를 영화인들에게 비공식적으로 언급한다. 이후 한국영화제작가협회와 외화배급협회(대한영화배급협회), 영화인단체협의회 등 3자는 관영 영화검열제도를 반대하고 자율적으로 영화계가 검열을 시행하기로 합의하는 동시에, 영화윤리위원회의 설치를 논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공동구성안은 분란의 씨앗을 안고 있었다. 워낙에 한국영화 제작자들과 외화수입업자들의 이해관계가 달랐던 데다, 5월 말에서 6월 초 사이 한국영화 제작 관련자들이 한국영화의 발전을 위해 외화수입쿼터의 일부를 한국영화제작계가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고 외화 수입업자들은 이에 크게 반발하는 갈등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1960년 6월 15일 헌법이 개정되었다. 제2공화국 헌법은 “...언론, 출판에 대한 허가나 검열과 집회, 결사에 대한 허가를 규정할 수 없다”(28조)라고 규정하여 검열이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차단하였다. 또한 6월 27일 법무부는 “영화도 새 헌법상에 규정된 언론·출판 개념에 포함되므로 검열이나 허가를 할 수 없다”라는 유권 해석을 내렸다( 《동아일보》, 1960. 6. 28 ). 이제 민간 주도의 심의 기관이 시급해졌다. 그러나 5, 6월 내내 골이 깊어진 제작자들과 수입자들은 각각 별개로 영화윤리위원회를 추진했다. 7월 2일, 영화배급협회는 외국영화윤리위원회를 조직하는 한편 별도의 윤리규범을 마련했고, 영화인단체연합회 및 한국영화제작가협회는 7월 5일 영화윤리위원회창설준비위원회를 출범시켰다. 이에 영화계 안팎에서는 통합된 영윤의 출범을 촉구하였고, 그 여망을 받아 7월 내내 통합된 기관을 준비하기에 이른다. 영윤의 설립과 정부와의 줄다리기 드디어 8월 5일, 영화윤리전국위원회(이하 영윤)가 발족했다. 7월 28일 한국영화제작가협회, 영화인단체연합회, 외국영화배급협회, 극장협회 등 4개 단체의 대표들이 모여 연석회의를 열고, 8월 5일 창립총회를 열 것을 결의하였고, 5일 문화단체총연합회(문총) 회의실에서 열린 창립총회에서는 규약과 규정을 통과시킨 한편, 위원장에 이청기 , 부위원장에 이진섭 , 전문위원에 이진섭, 허백년 , 최일수 등을 임원으로 선출하였다. 윤리위원으로는 박계주 , 조풍연, 백철, 허백년, 호현찬 , 오영진 , 선우휘 , 한운사 등 영화계 안팎의 전문가 28명이 선임되었다. 영윤의 윤리규정은 국가 및 사회, 법률, 풍속, 성, 교육 등 6개 부문 22개의 세부 기준으로 구성되었다. 당시 일부에서는 이 규정이 지나치게 까다로워 자승자박이 될 수 있고, 영윤이 권력기관화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려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위원장 이청기는 “말초적인 장면에 구애되는 좁은 단정을 피하면서 되도록 그 영화가 지니고 있는 본질적인 주제정신의 건실성 여부에 대한 핵심적인 평가에까지 그 심의도의 범위를 아량껏 넓힐 것”을 약속했다(《한국일보》, 1960. 8. 18.). 8월 5일 공식 출범을 했으나, 실질적으로 영윤이 업무를 시작한 것은 9월 5일이 되어서였던 것으로 보인다. 영윤의 시작은 그다지 성공적이지는 못했다. 영윤 출범 직후 검열을 제대로 하지 않고 사무국장이 독단으로 심의필증을 발급함으로써 물의를 일으켰던 것이다. 이와 같은 일회적 사건 외에 더 심각한 것은 문교부와 벌어진 일종의 권한 쟁의였다. 문교부는 영윤의 출범에 한국영화의 심의권을 넘겨줄 수는 있지만, 외국영화에 대한 적부 심의는 문교부가 지속적으로 맡아야 한다는 종전의 주장을 반복적으로 제기했다. 문교부가 이렇게 주장할 수 있었던 것은 문교부에 외화수입추천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엄밀히 보자면 외화수입추천의 절차는 검열의 절차와 다소 결이 다르다. 외화수입추천 절차는 기본적으로는 특정 외화를 수입해도 될 것인지에 대한 표현수위를 결정하는 것이기도 했지만, 수입되는 외화의 총량 관리(즉 영화의 질이 아니라 양적인 규제), 국가의 외환 관리나 무역 관리 과정과 관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권한은 국가기관이 아닌 영윤으로 이관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외화에 대한 실질적인 검열권(즉 상영을 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권리와 수입이 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권리)이 영윤과 문교부에 애매하게 분리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문교부는 이 권한을 빌미로 외화에 대한 심의권을 유지하고자 하는 시도를 보였다. 혁명 후 외화의 수입추천 과정을 규정한 영화및공연물 사무요강 (문교부 고시 132호) 이는 9월 초 영윤이 실제 업무에 돌입했던 즈음, 과도정부 시절에 만들어졌던 문교부의 영화사무요강을 통해 가시화되었다. 이 사무요강에는 “외화의 수입추천은 서류 심사 또는 실사 심사로 하며 심사기구 및 규정은 따로 정한다”라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영윤은 영윤의 심의권을 침해하는 조치라며 크게 반발했고, 문교부와 영윤의 사이에 끼어 이중의 심의절차를 밟아야 할 상황에 처한 수입업계는 영윤을 통한 일원화를 강하게 촉구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이 일원화는 제도적으로 해결되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문교부가 처음부터 수입추천의 권한을 적극적으로 행사했던 것 같지는 않다. 당시 기사들에 따르면 4월혁명 이후 대략 9월까지 문교부는 영화의 수입추천권을 거의 서류적으로만, 즉 형식적으로 행사해 왔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이 분위기는 <차타레 부인의 사랑>(마르크 알레그레, 1955) 등 사회적인 논란이 되는 영화들이 다수 수입되거나 상영금지가 해제되고, 이에 대한 비판적 여론이 조성되면서 반전되었다. 그 중심에 있던 영화는 1960년 10월 수입된 루이 말 감독의 < 연인들 >(1959)이었다. 이 영화의 불륜성과 외설성을 이유로 사회 일각에서 비판적인 여론이 형성되자 문교부 장관은 10월 4일, 이 영화에 대한 고발 조치를 통해 상영을 중지하겠다는 의견을 밝힌다. 또한 18일부터는 기존 서류 심사 위주의 수입추천 절차를 실사 심사로 실질화시키고, 관세법 126조(공안을 해치거나 풍속을 문란케 할 서적, 도화, 조각물, 기타의 물품은 수출 또는 수입을 금지한다)에 의하여 철저히 단속할 방침을 밝히기에 이른다. <연인들>을 계기로 선정적 외화에 대한 비판적 담론이 일기 시작한다. (“ 영화가는 불륜개방시대 ”, 《경향신문》, 1960. 10. 23.) 이와 같은 문교부의 방침은 사실상 영화검열제도의 부활로 인식되었고, 영윤은 물론 당대 대다수의 언론들은 이와 같은 조치에 대해 비판적인 의견을 밝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0월 말에서 11월 초 사이 사친회의 <연인들> 상영 중단 요구를 비롯 미풍양속을 해치는 영화의 상영과 광고에 대한 반대 여론은 무시 못할 정도였다. 문교부는 이러한 분위기를 이용, 10월 말 이에 대해 실사 심의 후 문제가 되는 영화는 ‘컷’을 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수입추천을 하지 않고 수입추천이 거부된 영화는 재차 수입이 되지 않도록 하겠다는 강경한 방침을 밝혔고, 나아가 11월 초에는 외화 배급사 대표들을 초청한 자리에서 ‘음탕한 영화광고, 유인물을 첨부하는 것’까지 단속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젊은 육체들> 사건으로 룰이 정립되다 1961년 초 검열과 관련하여 또 다시 커다란 사회적 논란이 발생했다. 당시 젊은이들의 행태에 대한 선정적인 표현으로 세계적으로도 논란이 되었던 영국영화 < 젊은 육체들 >(원명 Beat Girl , 1961)의 수입 상영과 관련된 것이었다. 검열 폐지 이후 실질적인 검열의 필요성을 주창함으로써 문교부가 공세에 섰던 <연인들>의 경우와 달리, 이 영화의 수입·상영 논란에 있어서는 영윤이 공세적인 입장에 섰다. 1961년 1월 21일 영윤은 사회풍기 관계 전문위원 11인의 심의 결과 이 영화에 대해 전원 일치로 상영보류 결정을 내렸고, 수입 회사인 세기상사의 재심 의뢰로 열린 전원위원회에서도 9대 7로 상영보류 조치를 결정했다. 이는 4월혁명 이후 영윤에 의한 최초의 상영보류 결정이었다. 그러나 문교부는 이 영화에 대한 심의가 이루어지던 1월 28일 이미 상영신고필증을 발부해 버렸고, 이에 기반해 수입사인 세기상사가 영화의 개봉을 준비했다. 이는 2월 내내 한국사회에 엄청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영윤을 무시한 문교부의 결정에 대한 비판은 물론, 기존 미풍양속을 해치는 외화의 수입 관행에 대한 비판, <젊은 육체들>이 주제로 삼은 비트 세대에 대한 소개, 영화에 대한 찬반양론 등이 물끓듯 일어났다. 검찰 당국은 2월 7일 이 영화에 대한 입건 방침을 세우고 조사에 들어가기도 했다. 그러나 문교부는 2월 15일 청소년 단속이 어려운 2, 3번관의 상영은 보류하고, 대사 여섯 군데, 화면 일곱 군데 등 320피트를 삭제한 채 이 영화의 상영을 허가했다. <비트걸> 제한 상영중지 명령 문서 (“외국영화 <비트걸> 상영중지의 건”, 문교부, 1961. 2. 18.) 이 사건은 영윤과 문교부 간의 감정적인 대립에 가까운 반목을 불러왔음은 물론 영윤의 권위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 특히 수입추천 단계에서 문교부의 실사 심의, 상영 단계에서 영윤의 심의라는 이중의 심의를 감당해야 하는 외화수입사들의 불만은 영윤의 무용론으로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대다수의 언론이 문교부의 독단과 검열의 부활 움직임을 비판하는 한편. 영윤의 유지와 강화를 지원하면서 문교부의 입장은 곤란해졌다. 이와 같은 논란 끝에 문교부와 영윤은 3월 중순 다음과 같은 합의에 이르게 된다. 문교부와 영화윤리위원회 전국위원회는 당면한 영화정책에 다음과 같이 합의했다. 1. 외국영화 추천심의는 문교부 주최 아래 영화윤리위원회와 함께 한다. 2. 외화 통관후의 작품심의는 영화윤리위원회측에서 한다. 3. 외국영화 수입추천을 심의할 때 문교부와 영화윤리위원회 사이에 합의가 안되었을 때 영화윤리위원회측의 전원위원과 문교부가 위촉한 심의위원이 합석하여 심의한다. 4. 예고편, 선전자료등을 통관추천심의할 때는 문교부와 영화윤리위원회가 합동심의한다. 5. 신문광고, 극장간판, 선전탑 등의 단속은 영화윤리위원회에서 한다( 《조선일보》, 1961. 3. 15. ). 이와 같은 합의안은 문교부가 독점해왔던 외화 수입추천 심의를 문교부와 영윤이 함께 수행한다는 점에서 영윤의 입장에서는 진일보한 성취였다. 그리고 이 결정으로 4월혁명 이후 오랜 기간 모호한 채로 유지되었던 외화의 수입과 심의절차의 행정 과정이 정비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혼란을 거쳐 새롭게 시작해야 할 영윤의 역사는 채 두 달이 못 돼 발생한 5.16 쿠데타로 종말을 맞이하게 된다. 쿠데타 이후 계엄사령부는 사전 검열을 부활시켰다. 1961년 5월 15일 이전 신고필증을 받고 상영 혹은 공연 중인 영화·연극에 대해서는 사전 검열을 면제했지만, 신고필증을 받았더라도 상영 혹은 공연되지 않은 작품에 대해서는 사전 검열을 받도록 지시했던 것이다. 영화계는 쿠데타 직후 사회가 안정되면 영윤이 부활되기를 고대했으나, 이는 희망사항으로 남고 말았다. 검열은 부활되었고, 이후 오늘날까지 민간의 자율에 의한 심의제도는 채택되지 못하고 있다. 영윤: 짧지만 중요한 역사적 경험 영윤의 수립에서부터 기관의 운영, 해체에 이르는 대략 8~9개월의 짧은 기간은 다소의 혼란에도 불구하고, 관권이 배제된(물론 전적으로는 아니지만) 한국영화의 검열사에서 거의 유일한 기간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기간 < 하녀 >(김기영, 1960), < 오발탄 >(유현목, 1961) < 삼등과장 >(이봉래, 1961) 등 한국영화사를 수놓는 명작들이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은 4월혁명과 영윤에 의한 자율적인 심의의 성과물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좌) 제한 사항이 없이 발급된 <하녀>의 상영허가서(1960. 11. 1.) / (우) 제한사항 1개로 발급된 <오발탄>의 상영허가서(1961. 2. 14.) (더 많은 서류는 " 검열서류 컬렉션 "에서 확인할 수 있다. 좌 , 우 ) 그러나 앞서 몇 가지 사례를 통해 보았듯이 영윤의 시절이라고 해서 모든 영화가 자유롭게 상영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문교부에 의한 수입추천권이 실질적인 검열 기제로 작동하였음은 물론, 심지어 영윤이 자체적으로 영화의 상영을 보류하는 결정까지 내릴 정도였다. 이는 민간에 의한 자율적인 심의가 모든 영화의 자유로운 상영에 필요조건일 뿐 충분조건이 되지 못함을 의미한다. 한 영화의 수용 여부는 단순히 검열의 자율성 여부뿐 아니라 사회단체나 수용자들의 여론, 혹은 영상에 대한 감각의 한계선, 즉 망탈리떼(mentalite)에 의해 더욱 중요하게 좌우되었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이후 오랜 기간 권위주의 정권을 겪으며 검열의 가장 중요한 변수를 국가로 두어왔던 한국영화사 연구의 흐름이 놓친 부분이기도 하다. 나아가 비록 등급 “서비스”를 표방하고 있기는 하나, 여전히 관영 심의의 체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한국영화계의 현실에서, 영윤의 경험은 한국영화 심의 체제의 미래를 고민할 때 반드시 복기되어야 할 중요한 역사적 경험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수절>(하길종, 1973) 행정서류를 통해 본 1970년대 초 제작 전 검열절차 나는 한때 영화를 거의 포기하였다. <화분>을 연출한 후, 써낸 시나리오는 매번 제작자의 거부 반응을 받거나 칼자루를 든 관에서 나의 시나리오는 항시 보이콧을 받아왔다. 그래서 최대한도로 현실과 타협한다고 해서 만든 <수절>이란 영화는 작품의 배경이 한사군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저항적이다’ ‘반사회적이다’라는 이유로 20분 길이의 필름이 무참히 커트당했고, 극장 스크린에서는 알맹이가 빠진 영화가 관객에게 보여졌다. 나는 그때 마치 눈알과 입이 없고 팔다리 하나가 잘려나간 나의 모습을 공개하는 것 같은 큰 아픔을 느꼈고, 구토와 분노를 함께 느끼며 영화를 포기하기로 작정했던 것이다. 1) 이번 편에서는 영상자료원에 보존된 1973년 작 <수절>의 검열서류를 통해 이 시기 검열제도와 환경을 살펴보고자 한다. <수절>은 한사군 시대를 배경으로, 전쟁을 하러 타지에 간 유신(하명중)을 기다리던 부인 질례(박지영)와 그녀의 딸 용분(이영옥)이 온갖 고초를 겪다 남편의 스승이자 폭군인 지거도사(윤일봉)와 그 패거리에게 강간과 죽임을 당한 후 귀신이 되어 복수를 한다는 내용을 바탕으로 한다. 10년 만에 돌아온 유신은 부인과 딸의 귀신을 만나 그녀들의 억울한 사정을 안 후 지거도사와 최후의 대결을 벌인다. <수절>은 미국 UCLA에서 영화학 석사 학위를 받고 귀국한 하길종이 <화분>(1971)에 이어 두 번째로 연출한 작품이다. 1970년 귀국한 하길종은 독립 제작의 어려움 끝에 겨우 데뷔작 <화분>을 완성하였으나, 이탈리아 영화 <테오라마> 표절 시비로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고심 끝에 두 번째 작품 <수절>을 연출하였으나, “최대한도로 현실과 타협한다고 해서 만든” 이 영화 역시 고난의 상황을 면치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위의 인용문에서처럼 감독 본인이 무려 20분 길이의 분량을 검열당했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 이 영화의 검열서류를 통해 당시 한국영화 검열( 및 행정) 절차와 환경을 살펴보도록 하자. 1960년대(특히 후반) 이후 영화의 검열은 크게 제작 전 시나리오 검열과 제작 후 본편 검열로 나누어졌다. 시나리오 검열은 원래 존재하지 않았고, 1962년 제정 영화법 이래 존재했던 제작신고 절차에서 문공부가 시나리오를 검토한 후 제작상의 유의사항을 전하는 관행이 제도화된 것이다. 1960년대 후반부터 시나리오 검열이 실질적으로 강화되기 시작했고, 1970년부터는 예륜을 통한 시나리오 검열이 독자적으로 시행되었다. 이와 함께 문공부가 주관하는 제작신고 역시 존속하였다. 그러다보니 제작 이전 검열 혹은 행정 절차는 1970년 이후 예륜의 시나리오 심의와 문공부의 제작신고로 대별된다. 특히 이 편이 주목하는 것은 앞서 언급했던 바, 1972년 이후 시나리오 단계에서 검열 혹은 제작신고 체제의 변화를 서류를 통해 확인하는 것이다. 1960년대 이후 한국영화 검열체제의 주요한 변화와 혼란은 거의 항상 시나리오 검열단계의 복잡화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우선 시나리오 신청과 제작신고 단계의 절차를 영상자료원 검열서류의 일자 순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1. 1973.6.25. 시나리오 심의 신청(화천공사->예술문화윤리위원회) 2. 1973.6.29. 시나리오 심의의견서(문화예술위원회) 3. 1973.7.3. 국산 극영화 제작권 배정신청서(화천공사->문화공보부) 4. 1973.7.9. <수절> 시나리오 심의결과 통고(예술문화윤리위원회->문화공보부) 5. 1973.7.13.(작성, 7.16일 접수) 73 2/4분기 시나리오 심사 작품 제출(화천공사->문화공보부) 6. 1973.7.20. 2/4분기 제작권 배정에 대한 작품 지정(문공부 내부서류) 7. 1973.7.21. 영화제작신고서(화천공사->문화공보부) 8. 1973.7.21. 우리영화 제작현황(문공부 내부서류) 9. 1973.7.24. 73. 2/4분기 제작권 배정에 따른 작품 지정(문화공보부->화천공사) 10. 1973.7.25. 극영화 “수절” 제작신고 수리통보(문화공보부->화천공사) "국산극영화 제작권 배정신청서"와 "73년 2/4분기 제작권 배정에 따른 작품 지정"(영화 <수절>) 1970년을 거치며 체계화된 영화정책에 따르면 영화를 제작하고자 하는 자는 예륜을 통해 시나리오 심의를 통과한 다음(1, 2, 4번) 이를 바탕으로 문공부에 제작신고를 진행해야 했다(7, 10번). 제작신고는 말 그대로 제작이 시작된다는 것을 정부에 신고하는 행정절차이나, 실제 문공부는 예륜과 별도로 시나리오를 심의하곤 하여 시나리오 단계의 이중검열 논란을 낳기도 했다. 그런데 앞의 편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 두 단계에 별도로 제작사에 대한 제작쿼터(제작권) 부여 단계가 추가되었다. 이에 따라 행정서류에도 이 절차에 따른 변화가 나타난다. 볼드체로 표시한 부분이 71년까지 존재하지 않던 서류들이다.(3, 5, 6, 8, 9번) 제작사 별로 양적인 제작권을 부여하는 방식(연간 00편, 분기별 0편 등)과 달리, 개별영화에 대한 심사를 거쳐 제작사에 제작권을 배정하는 절차는 국가비상사태 이후 권위주의 정권의 영화검열 강화를 위해 신설된 것이다. 1972년에는 이 제작권 배정을 위해 영화계 안팎의 권위자 20명 내외가 예륜의 심의 이후 별개로 문공부 촉탁으로 참여하여 시나리오를 검토하게 하였는데, 이는 실질적인 검열의 과정이었다. 그 결과 1972년 신규 제작의 부진으로 이어졌고, 이를 감안 1973년 영화시책을 통해 문공부가 직접 결정하기로 했다는 점은 전편에서 언급한 바 있다. 그렇다면 1973년 실질적인 검열이 아닌 형식적 행정절차로 전락한 이 제작권 배정절차가 절차의 번거로움을 강화하는 외에 어떤 실질적인 효과가 있었는지 의문시 될 수밖에 없다. 더욱이 73년 들어 예륜의 심의가 강화되고 있는 추세임을 감안한다면 더욱 그러하다. 우리영화 제작현황(1973.7.21)(<수절>) 그럼에도 이 절차의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었는데, 영화법 개정 이후 새롭게 허가받은 12개 사의 제작내역을 미리 점검함과 동시에 통제하는 기능을 했다고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일종의 인적(생산주체) 통제 기능을 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8번 “우리영화 제작현황”이라는 양식은 다소 흥미롭다. 제작신고가 접수된 날 작성된 이 양식은 본편 검열예정일, 상영예정일과 극장, 촬영 일정까지 적시되었다. 국가가 영화의 제작 및 상영일정과 개봉관, 주조연 배우까지 관리하는 이러한 상황은 제작사의 입장에서는 직간접적으로 상당한 압박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수절>의 주요 검열사항 검토 이제 이 영화의 주요 검열 사항에 대해 살펴보자. 1973년 영화시책이 밝히고 있듯이 73년부터 예륜에 의한 시나리오 검열이 강화되었다. 당시 영진공의 기관지 『영화』의 한 기사에 따르면, 1973년 6월부터 11월까지 시나리오 심의를 마친 작품 53편의 경우 반려가 11편, 전면개작이 6편, 개작이 9편, 수정통과가 26편이며 수정이 되지 않고 초심에서 통과된 작품은 단 1편 뿐이었다. 2) 그렇다면 <수절>의 시나리오 검열은 어떠했을까? 이 영화에 대해 예륜은 13개의 사항을 지적했고, 재심 판정을 내리지는 않았다. 말하자면 53편 중 26편에 해당하는 “수정통과” 작품 중 하나였던 셈이다. 13개 내역 중 자구나 사실관계 수정 정도에 해당하는 사항이 5개, 잔혹성 지적이 4개, 외설성 지적이 1개, 고증 유의 1개, 사유 불명 2개 등이다. 항목이 적은 편은 아니지만, 당시 반 이상의 작품들이 반려나, 개작을 통한 재심 및 삼심까지 이어졌음을 감안한다면 검열이 심했다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수절> 시나리오 검열 수정지시 사항 13개 영화 촬영 후 촬영본 본편에 대한 검열은 11월 14일에 신청되었다. 첨부된 문서 중 “영화배급신청서 접수필증”(11월 17일자)이 눈에 띈다. 제작사인 화천공사가 한국영화배급협회(이사장 김태수)로부터 발급받은 접수필증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4차 개정 영화법 이후 영화배급의 전국 일원화를 목표로 설립된 영화배급협회가 관련된 행정절차의 흔적을 보여준다. <수절>의 본편 검열은 1973년 11월 17일에 진행되었다. 당시 영화 본편의 검열은 문화공보부, 중앙정보부, 내무부(치안국) 3개 기관이 주관하였다. 순전히 공무원 중심의 검열체제였다. 중앙정보부는 국가 안보사항, 내무부 치안국은 미성년자 관람가부를 중심으로 보았고, 문화공보부가 전체 검열사항을 종합하여 의견을 내는 것으로 역할 분담이 이루어져 있었다. 흥미로운 점은 위 중앙정보부 검열관의 검열사항은 4개에 불과한데, 최종적으로 문화공보부가 지시한 검열사항은 9개처에 달한다는 사실이다. 문화공보부의 추가 검열사항이 부가된 것으로 보이는데, 이를 통해 볼 때, 당시 문화공보부가 중앙정보부나 내무부 치안국의 검열사항을 취합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체적인 판단에 따라 종합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당시 문화공보부가 최종적으로 통보한 9개처의 검열사항은 대사삭제 2개처(“상납할까요”, “돈과 권력이면 전부지” 등), 화면삭제 4개처(강간 장면 2개처 등), 화면단축 3개처(나체로 춤추는 여자들과 이를 보는 질례의 얼굴 등)이다. <수절> 본편 검열 수정사항 시나리오 단계의 엄격한 검열을 거친 후, 시나리오대로 진행된 본편 완성본의 경우 검열되는 경우가 많지 않았던 당시 관행을 감안할 때, 9개처에 달하는 이 영화의 본편 검열 분량은 상대적으로 많은 편이며 꽤 심각한 검열의 대상이 되었다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저항적이다’ ‘반사회적이다’라는 이유로 20분 길이의 필름이 무참히 커트당했”다는 감독의 주장에 대해 보다 구체적으로 검토해보기로 하자. 우선 검열서류 상 절제된 이후의 총 분량은 96분으로 제시된다. 그런데 검열되지 않은 원본으로 추정되는(실제 서류상 검열사항이 모두 남아있는 것으로 확인된다) 현재 영상자료원에 보존된 오리지널 네거티브(ON) 원본을 변환하여 서비스 중인 동영상의 러닝타임은 1시간 32분 28초(93분 28초)가량이다. 오히려 원본이 짧은데, 영상자료원 버전에 크레딧롤이 빠져있어 발생한 결과로 보인다. 크레딧롤이 길어야 3-4분임을 감안할 때 검열의 분량이 그리 많아 보이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20분가량 “커트”됐다는 감독의 회고는 다소간의 과장이거나, 시나리오 검열 단계까지 언급한 것이거나, 공식적인 서류에서가 아니라 막후에서 조정된 부분이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또 하나의 주제로 “저항적” 혹은 “반사회적”이라는 면에서 검열당했다는 감독의 주장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대사 2개에 대한 검열 근거는 저항적이거나 반사회적인 이유에서 비롯된 것임을 직관적으로 인정할 수 있다. 문제는 나머지 7개 처 외면상 잔혹이나 신체 노출 등의 이유로 절제된 것으로 보이는 장면들을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데 있다. 관습적인 의미에서라면, 감독의 자의식에 찬 주장과 달리 이 절제된 장면들이 “저항적”이라거나 “반사회적”이라 보기는 어려울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이 장면들이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에서 충분히 저항적이거나 반사회적이라 볼 수 있는 여지가 있다고 본다. 우선 이 영화가 전반적으로 권력에 대한 비판을 목표로 진행된다는 점을 거론할 수 있다. 사실 <수절>은 과도한 실험성과 다소 미숙한 촬영이나 편집, 개연성 없는 인물간의 관계 설정, 앞뒤 안 맞는 서사 등이 난삽하게 흐트러져 전체적으로 잘 조율된 작품이라 보기는 어렵다. 이는 감독의 전작 <화분>에서 역시 마찬가지지만, 어찌된 일인지 <화분>에 비해 그 문제가 두드러져 보인다. 본인이 익숙하지 않은, 당대 유행하던 검술영화라는 장르적 외피 속에 자신의 메시지와 실험정신을 새기고자 한 결과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이 영화는 사실 과할 정도로 당대 권력자의 횡포와 피수탈자의 고난(유신의 부인과 딸) 장면들을 강조 내지 나열하고 있고, 이는 앞서 언급한 영화의 단점들과 어우러져 영화를 매우 보기 불편하게 만들고 있다. 이를 영화적 실패로 볼 수도, 당대 상업 주류 영화들이 도외시한 영화적 실험의 성취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 평가가 어떠하건, 이 영화가 유신 이후 강화되어가던 권위주의 체제 속에서 역사무협극을 경유하여 권력 일반의 폭력에 대한 매우 노골적인 고발의 의지를 담고 있다는 것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 영화에서 절제된 외설적이거나 잔혹한 장면들은 대개 권력자들의 횡포와 폭력을 가시화하는 사례들로 제시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장면들이 직간접적으로 비판적이거나 반사회적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고 보겠다. 영화 <수절>의 한 장면 또한 박정희 정권기, 특히 유신 이후의 권위주의 정권기에서 높은 수준의 섹슈얼리티나 잔혹함, 혹은 사회적 일탈행위의 재현 일반이 가지는 의미를 생각해볼 수 있다. 지면이나 글의 성격상 이에 관한 논의를 본격적으로 진행할 수는 없겠으나, 당시 권위주의 정권이 국민에게 요구했던 절제와 질서, 미풍과 양속의 덕목들, 그리고 그러한 덕목의 강화를 통해 현행 권력체제를 유지하고자 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과도한 잔혹성과 퇴폐, 섹슈얼리티, 일탈은 도구적 이성을 넘어서는 정동과 개인적 욕망들의 분출을 표방함으로써 권력의 체제에 구멍을 뚫고 탈주하고자 하는 개인들의 (무)의식적 의지를 담고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각주 1) 하길종, "신문 광고와 바보의 초상", 한국영상자료원, 『하길종 전집1, 태를 위한 과거분사, 백마 타고 온 또또』, 2009, 263-264쪽 2) “양질의 작품 빈곤: 시나리오”, 영화진흥공사, 『영화』, 1973년 12월호, 33-34쪽
일제강점기 조선의 중심도시 경성은 인구가 대폭 증가하면서 4대문 밖으로 그 영역을 확대하여 나갔다. 1910년 경성부에 편입된 용산 지역 외에도, 서쪽으로는 서대문 넘어 신촌과 마포 방향으로, 동쪽으로는 동대문을 지나 청량리와 왕십리 방향으로 도시가 확장되었다. 1930년대 새롭게 도시로 편입된 지역에는 영화관이 설립되었다. 도화관(桃花館), 도화극장(桃花劇場) 도화관(桃花館)은 서울 마포 도화동에 위치한 극장이다. 1930년 11월 1일부터 이곳에서 <여류명창대회> 공연 기록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1930년 이전에 건설된 것으로 보인다 .(”여류명창대회“, 《동아일보》, 1930.11.1) 일설에 의하면 도화관이 1929년 정기준에 의해 설립되었다고 한다. 1 극장의 규모가 협소한 탓에 건물의 신축을 꾀해 1933년 10월 7일 낙성식을 거행하고 영업을 재개하게 된다 .(“도화관 낙성식”, 《조선신문》, 1933.10.8) 당시 건물주는 토미이 지츠타로(富井實太郞)였다. 그는 1877년 일본 효고(兵庫)현에서 태어나 포목상으로 일하던 사람으로, 1905년 5월 조선으로 건너와 용산 원정(元町) 3정목에서 토미이상점(富井商店)을 열었으며 용산상영회(龍山商榮會) 회장을 역임한 바 있다. 도화관 신축을 추진할 당시 이를 반대하는 도화동 주민들의 진정이 있었다. 도화동 주민 150여명은 연명 날인하여 도화관이 활동사진상설관으로 신축되면 풍속의 아름다움을 해치게 하여 아직까지 보존하여 오든 동리의 미풍을 해롭게 할 것이라는 이유를 들어 경기도 보안과에 반대 진정을 냈다. 지역 주민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극장의 신축은 이루어졌다. 1933년 신축된 극장의 이름은 도화관에서 도화극장으로 바뀌었다. 일제말기까지 도화극장은 토미이가 운영하고 있었다. 《영화순보》에 실려 있는 도화관에 관한 정보를 확인해 보면 흥행주는 토미이, 지배인은 스가와라(管原)였으며, 총 좌석 수는 782석이었다 .(“全鮮映畵館錄”, 《映畫旬報》, 1943.7.11., 42쪽) 해방 후 적산처리 된 도화극장은 1950년대 경보극장으로 그 이름이 바뀌었다. 신부좌(新富座) 신부좌는 동대문 밖 신당정에 설립된 영화관으로 1936년 10월 10일 낙성식을 개최하고 12일 개관했다. 설립자는 도화극장의 운영자인 토미이 지츠타로(富井實太郞)이다. (“新富座成る”, 《京城日報》, 1936.10.11.) 신부좌의 개관을 알리는 기사를 보면, “4층의 철근 콩크리트 극장으로 수용인원이 1,200명이나 되는 큰 건물이며 12일부터 동극좌(東劇座) 일행의 공연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영업을 한다고 보도하고 있다. (”동부의 신극장 신부좌 낙성(落成)“, 《매일신보》, 1936.10.14.) 1943년 당시 신부좌의 흥행주는 토미이(富井實太郞), 지배인은 古都勇作으로 총 좌석수는 758석이었다 .(<全鮮映畵館錄>, 《映畫旬報》, 1943.7.11., 42쪽) 해방 후 적산처리 되었으며 이름을 한성극장으로 개칭했다 .(“신부좌, 한성극장으로 개칭”, 《동아일보》, 1946.1.20.) 광무극장(光武劇場) 1930년 5월 2일 발생한 화재로 소실된 광무대는 상왕십리 쪽에 가설극장을 짓고 영업을 이어갔다. 그러던 중 1933년 봄 상설극장으로 전환을 꾀하게 되면서 이름도 광무극장으로 바꾸었다 .(“광무극장 상설”, 《조선중앙일보》, 1933.5.18.) 영화와 연극을 고루 상연하던 광무극장에서는 1934년 5월 카프에서 세운 극단 신건설이 <서부전선 이상 없다>, <누가 제일 바보냐>, <신임 이사장> 등을 공연 한 바 있다. (“신건설 순회공연 시외 광무극장서”, 《동아일보》, 1934.5.2.) 1943년 당시 광무극장의 흥행주는 소노다(園田實生)였다. 총 400석의 좌석수를 가지고 있었다 .(“全鮮映畵館錄”, 《映畫旬報》, 1943.7.11., 42쪽) 해방 후 적산처리 되었다. 영등포연예관(永登浦演藝館), 영보극장(永寶劇場) 영등포연예관은 1930년대에 들면서 공업지역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영등포 지역에 들어선 영화관으로 1935년 10월 개관했다. 설립자는 써커스단을 운영하며 다년간의 흥행 경험을 가지고 있던 오오타(太田光)란 일본인인데 그는 충남 예산에서 큰 농장을 경영하던 오오타 칸(太田寬)의 동생으로 1939년 《국민신보》 창간 기념 광고에도 관주로 기록된 인물이다 .(“광고”, 《國民新報》, 1939.8.20.) 영등포연예관은 213평의 부지에 총공비 5만여 원을 들여 연와의 2층 건물로 만들어졌다. 개관 첫 공연은 연극호(演劇號)의 연극이었다. (”영등포연예관 연극호 대인기“, 《매일신보》, 1935.10.13.) 영등포 지역의 유일한 영화관으로 존재하던 영등포연예관은 1942년 9월 1일자로 흥행주가 환영영화사(丸榮映畵社)의 무라이(村伊德治)로 바뀌게 되면서 그 이름을 영보극장(永寶劇場)으로 바꾸었다. 새로운 경영자가 운영하게 된 영보극장은 최신식 『로-라』 발성영사기를 장치하는 등 시설과 외관을 정비하여 영화관으로의 새롭게 변신하였다 .(“영보극장 래 일일 개관”, 《매일신보》, 1942.8.26.) 1943년 당시 영보극장은 흥행주 무라이(村伊德治), 지배인 기하라(木原督夫)로 총 좌석수는 400석이었다. 해방 이후에도 존속했다. 1. 이에 관한 이용남의 글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마포 도화정의 도화극장은 1929년 정기준이 세운 목조 1층 건물의 극장으로, 무대는 허술하였으며 수용인원도 300명 정도의 초라한 극장이었다. 개관 후 1년이 못되어 일본인 富井實太郞이 사들여 2층 벽돌 건물로 다시 지었다. 새 건물은 무대도 넓었으며 8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극장이었다. 도화극장은 영화 상영을 주로 하였으며 가끔 연예나 연극 등도 공연하였다. 후일에는 영화관으로 사용되었다.” 이용남, 「해방 전 조선 영화극장사 고찰」, 청주대석사논문, 2001, 116쪽. * [사진](상단) 신부좌 작성 당시 기사에 게재된 사진 [자료] 《매일신보》, 1936.10.14. 동부의 신극장 신부좌 낙성(落成), 십이일부터 개관 대경성(大京城)의 실현에 ᄯᅡ라 경성 근교의 인구증가률은 기하급수(幾何級數)적인 숫자를 보이고 잇슴에 반하야 근교(近郊) 부민들의 오락기관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업서 곤난중이더니 이것을 유감으로 역이든 유지의 손으로 이번에 신당정(新堂町)에다 신부좌(新富座)라는 사층의 철근 『콩크리-트』 극장을 세웟다는데 수용인원이 일천이백명이나 되는 큰 건물로 십이일부터 동극좌(東劇座) 일행을 맞이하야 개관하얏다고 함니다.(사진은 신부좌) [자료] 《매일신보》, 1942.08.26. 영보극장 래(來) 일일 개관 영등포 유일의 영화상설관 연예관(演藝館)이 금번 새로운 경영주를 마지하는 동시 이름도 영보극장(永寶劇場)으로 곳친 후 최신식 『로-라』 발성영사기를 장치하는 한편 내용과 외관도 일신해가지고 오는 구월 일일부터 개관하기로 되엇는데 환영영화사(丸榮映畵社) 무라이(村伊德治)씨가 신경영주로 제반경영을 담당하게 되엇다. [자료] 《동아일보》, 1937.08.12. ●팔월 십이일부터 특별대공연 개관 일주년 기념대흥행 ○ 납량특별 『선물』 진정! = 요금특별 봉사제공 = 대인석 십오전 균일 조선극계의 정화! 극단 혜성좌(彗星座) 대공연 ▲ 혜성좌 名극본 대진용! =예제 매야 교환 상연= ○ 만주애화(哀話) 만주의 십년몽 이막 ○ 정의극 마음의 꽃다발 이막 ○ 사회비극 나는 왜 범죄를 하였나 삼막 ○ 희비극 온천장 행진곡 이막 ○ 시대물 임거정전(林巨正傳) 삼막 ○ 모성비극 모성애의 금자탑 삼막 막간 = 넌센스, 합창, 민요, 스켓취, 독창 무용 =혜성 올째스뺀드= 요금 싸고 『선물』 가저가시게 만원되기 전 일즉 일즉 오십시요 왕십리정 광무극장 [자료] 《조선중앙일보》, 1933.05.18. 광무극장 상설 부외 상왕십리(上往十里)에 잇는 가설극장 광무대(光武臺)를 금번에 상설극장(常設劇場)으로 개혁하는 동시에 극장 일흠도 광무극장(光武劇場)으로 고치고 활동사진과 기타 연극 등을 흥행하리라 한다. [자료] 《조선중앙일보》, 1933.10.21. 시외 도화동에 도화극장 신축 【경서(京西)】 시외 도화동(市外 桃花洞)에 잇는 영화상설관 도화극장(映畵常設館 桃花劇場)은 지난 십일일 동극장 내에서 신축 낙성식을 대성황리에 거행하엿다는대 동 극계에 경험이 잇는 부정실태랑(富井實太郞)씨와 동 지배인 김년(同 支配人 金年)씨가 가티 삼만 오천원이란 거금을 드리여가며 조선극예술을 위하여 만흔 노력을 한다하며 또 부정씨는 마포에 양영학교란 보교를 건설하고 조선무산아동을 모아서 가르킨다는데 근처 일반은 부정씨에 대한 칭송이 자자하다. [자료] 《동아일보》, 1932.07.22. 상설극장 반대 도화동민 진정 시외 도화동(桃花洞) 주민 일백오십여명은 련명 날인으로 부정(富井)씨의 경영하는 도화관(桃花館) 신축을 반대키 위하여 금 이십일일 오전 십일시경 경기도 보안과를 방문하고 진정한 바 잇섯다고 한다. 동 도화관은 활동사진 상설관으로서 풍속의 아름다움을 손하게 하여 아직ᄭᅡ지 보존하야 오든 동리의 미풍을 해롭게 한다는 것이 반대 진정의 주요 원인이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