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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독
- 김태경
- 제작년도
- 2011
- 출연
- 박보영, 주원, 강별, 이맑음, 강해인, 최지헌, 수민, 이정민, 최형근, 박민영, 한예나, 이선민, 전희수, 김혜리, 김원희, 김민혁 , 김호선, 최대호, 최인숙, 이유주, 박지연, 정동규, 강문경, 권남희, 양정원, 이상현, 백광두, 김보령, 이관영, 이동희, 김진희, 김근아, 승지윤, 유홍열, 봉은선, 정수연, 이인, 남경읍
< 놉 >을 처음 봤을 때 선명한 지향점을 지녔음에도 부분적으로 불투명한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던 필의 전작인 < 어스 >(2019)처럼 구조의 뼈대가 매우 앙상하여, 숭숭 뚫린 구멍과 같은 알레고리가 여러 의미를 불러들이는 형태가 아닌, ‘영화’와 스펙터클이라는 분명하고 직선적인 길을 따라가다 여러 갈래의 분기점으로 갈라진 후, 분명 가려고 했던 목적지에는 도착했지만, 어느 것이 중심 도로였는지 잃어버리게 되는 영화 말이다. 때문에 갈림길 없이 메시지의 대로를 따라 장르가 지닌 속도와 감응하며 시너지를 내었던 < 겟 아웃 >(2017)과 비교하면 <놉>은 장르적으로도 어느 정도 불투명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선명한 듯 불투명하게 보이는 알레고리와 장르적 애매함에도 불구하고 <놉>에는 분명 기이한 매혹이 존재한다. 아니, 오히려 선명하게 보일 듯 보이지 않는 상황이 매혹을 만든다 말하고 싶다. 똑똑히 눈으로 보았지만 구름과 언덕 사이를 유영하여 완전히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UAP(미확인 항공 현상)를, 보았다고 믿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카메라라는 기계장치로 증명하고자 하는 욕망처럼 말이다. 당연히 <놉>을 향한 많은 해석과 이 글 또한 이러한 욕망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에메랄드(키키 파머)가 일명 오프라 쇼트라고 언급한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두려움을 안고 하늘을 바라보는 것처럼 이미지를 바라보고 해석하고자 하는 욕망을 따라 <놉>에 관해 간단히 이야기해보자. 영화를 두 번째 감상했을 때 하나의 의미로 깔끔하게 정리하기 힘든 두 요소가 마치 카메라와 피사체처럼 마주 보며 반복적으로 얽혀 있음을 파악할 수 있었다. 카메라와 피사체라는 비유는 비유일 뿐 아니라 직접적인 소재로 등장하는 만큼 <놉>을 ‘영화’에 관한 영화로 이해하는 것은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그러면 영화의 오프닝에서부터 등장하는 ‘고디가 왔다’ 에피소드를 통해 피사체와 카메라의 권력 관계에 관한 이야기부터 생각해 볼 수 있다. 마치 관음의 대상이던 살인사건의 피해자가 스크린과 카메라 뒤편의 내가 될 수 있다고 말하는 < 이창 >(1954)처럼, 카메라 뒤편에 선 제프리(제임스 스튜어드)와 카메라의 피사체가 되는 쏜월드를 완전히 분리시켜 카메라-피사체의 권력 관계를 도식적으로 구조화하는 영화 말이다. <놉>은 당연히 <이창>처럼 딱 떨어지는 구조를 지닌 영화는 아니다. 쏜월드와 달리 진 재킷은 피사체이면서 동시에 카메라이기 때문이다. 진 재킷의 입/눈은 직관적으로 카메라를 유추할 수 있게 시각화되어 있으며 먹이를 먹기 직전에 내는 효과음 또한 셔터의 사운드와 닮았다. 그렇기에 <놉>의 진 재킷과 에메랄드와의 관계는 거울처럼 서로를 비추는 카메라이자 피사체면서 주프(스티븐 연)의 테마파크처럼 서부 총잡이들 간의 대결 구도와 같다. 대신 서로 한 방을 맞는 순간 끝이 나는 저격수들의 싸움이다. 촬영되는 순간, 찍히는 순간 죽는 것이다. 그렇기에 <놉>은 ‘영화’에 관한 영화처럼 보이지만 시선의 권력만으로 선명하게 의미화되지 않으며 피사체/카메라라는 이중 정체성으로 마주 보는 복합적 형태를 이룬다. 한쪽에만 카메라가 지닌 권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양쪽 모두 서로를 찍으려 하는 대결 구도는 자연스럽게 영화에서 스펙터클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이어진다. <놉>에서 스펙터클을 다룰 때 중요한 지점은 <이창>이 지닌 관음의 구조가 아니라, 볼거리를 볼 수밖에 없는 본능 그 자체에 있다. 물론 주프가 어린 시절 겪었던 1998년 ‘고디가 왔다’ 생일 파티 에피소드는 피사체에 대한 존중 없는 스펙터클에 대한 경고로 읽힌다. 또한, 보면 안 된다(Nope)는 장르적 조건과 영화의 제목은 스펙터클에 맹목적으로 이끌리는 관객과 사회에 대한 비판처럼 보인다. 하지만 유사-고디라고 할 수 있는 진 재킷이 UAP가 아니라 동물이자 괴물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고 난 중반부 이후에 그 의미는 완전히 달라진다. 두 명의 사람이 사망한 참사에서 살아남은 주프는 고디-진 재킷으로 은유 되는 스펙터클에 대한 두려움이 아닌 매혹을 느낀다. 또한, 보면 죽는다는 조건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한 동물적 두려움에 의한 것이든 시선을 사로잡는 시각적 매혹에 의한 것이든, 진 재킷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 때문에 보면 잡아먹힌다는 조건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볼 수밖에 없다는 스펙터클의 매혹을 강조하는 장치로서 스펙터클을 소비하는 행위에 관한 비판적 은유를 넘어선다. 부분적으로 아이맥스로 촬영된 영화와 진 재킷의 본 모습이 발산하는 거대하고 매혹적 자태가 그것을 증명한다. 이처럼 <놉>은 스펙터클에 대한 경고이면서 찬사이기도 한 모순적 상태를 카메라이자 피사체인 진 재킷과 피사체인 OJ(대니얼 칼루야)와 촬영자인 에메랄드 두 명의 주인공으로 구조화하고 있다. 주요인물인 OJ와 에메랄드가 각각 피사체와 카메라라는 것은 단순히 비유적 과장이 아니다. OJ는 전반부에서 많은 사람 앞에 서서 시선의 대상이 되는 것을 두려워하던 인물이었지만 동생을 구하기 위해 카메라-진 재킷 앞에 서는 것으로 쇼맨(피사체)으로서의 정체성을 받아들이며, 에메랄드는 말-진 재킷을 갖지 못했던 과거를 괴물-진 재킷의 사진이라는 이미지 획득하며 촬영자로서의 정체성을 깨달으며 극복한다. 이 중 영화의 결말에 이르러 진정한 주인공이 되어 사건을 해결하는 것은 촬영자인 에메랄드이다. 이는 스펙터클에 관한 찬사가 비판을 넘어섰다고 말한 것처럼 <놉>에서 나타나는 양가적 구도 중 핵심이 되는 것은 피사체가 아닌 카메라이며, 보지 않는 것이 아니라 볼 수밖에 없다는 본능과 스펙터클을 촬영해서 이미지로 소유하고자 하는, 증명하고자 하는 욕망에 있음을 방증한다. 주프 또한 ‘고디가 왔다’의 참사를 겪으면서 자신이 봤다고 믿는 놀라운 광경을 단순히 마음속에 간직하는 것이 아니라 재현하여 소유하고 증명하려 한다. 당연히 타인의 죽음과 비극을 일종의 스펙터클로 만드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그도 알고 있다. 사무실 속 비밀의 방에 숨겨 놓았기 때문이다. 하지 않아야 하는 전시와 쇼를 알면서 비밀스럽게 행하는 주프처럼, <놉> 역시 할리우드와 쇼 비즈니스, 황색언론 그리고 그것들을 소비하는 인간을 풍자하고 비판하지만 동시에 시선을 사로잡는 대상을 이미지로 재현하고, 쇼로 재구성하며, 스펙터클로 만드는 고전적 구조와 장르적 쾌감을 재생산한다. 많은 이들이 주프와 OJ를 비교하며 이미지와 피사체에 관한 존중의 유무를 두고 둘의 차이에 주목하지만, 사실 통제 되지 못한 스펙터클로 발생한 참사라는 점에서 ‘고디가 왔다’의 사건과 진 재킷과의 마지막 결투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고디, 진 재킷과 교감하고 있다고 믿는 주프와 눈을 마주치면 공격한다는 동물의 습성을 파악한 것만으로 진 재킷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 OJ는 크게 다르지 않으며, 주프가 진 재킷을 비밀스러운 쇼를 통해 스펙터클로 소비한 것처럼 에메랄드 또한 진 재킷을 오프라 쇼트라는 상업적 이미지로 포착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며 <놉>에서 말하려는 스펙터클이란 통제 되지 못했을 때 참사가 발생하는 불안정하고 위험천만한 이미지가 아니라, 반대로 통제되지 않아야 볼거리가 발생하고 갈등과 사건이 증폭되는 큰 그림 안에 놓인 하나의 대상이다. 그리고 그 사건을 주인공이 해결함으로써 큰 그림의 쇼가 마무리된다. 그것이 통제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나쁜 기적(Bad Miracle)을 필수적으로 요구하며, 시선을 사로잡는 대상을 이미지로 재현하고, 재구성하여, 스펙터클로 만드는 ‘영화’라는 쇼의 구조이다. <놉>의 진정으로 탁월한 지점은 이와 같은 ‘영화’와 인간의 모순적이고 양가적인 본질을 직접적이고 도식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장르라는 외피 안에 자연스럽게 배치했다는 것에 있다. 아니 반대로 ‘영화’라는 은유적 외피를 두르고 벌이는 기이한 장르 영화라는 것 때문에 매혹이 발생한다. 예컨대 진 재킷의 자기장에 의해 디지털 카메라에서 원시적 카메라로 퇴행하는 촬영 방식은 인물들의 목적이 쉽게 성취되지 못하게 하는 장치이자 액션 시퀀스의 긴장감을 만들기 위한 장르적 제한이면서, 일명 오프라 쇼트라 불리는 결정적 이미지를 소유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과 촬영 과정의 매혹을 고전적 틀 안에서 직관적으로 담아낸다. 이처럼 쇼트(Shot)가 총을 쏜다는 행위와 카메라로 찍는다는 행위를 동시에 의미하는 것을 활용했을 때의 비유 자체는 진부하지만, 게걸스럽게 먹이를 찾아 탐닉하는 진 재킷이라는 스펙터클/카메라가 볼거리와 위협을 동시에 만들어 스펙터클-이미지를 소유하고 싶어 하면서 이미지의 대상으로 서고 싶은 인간의 욕망과 두려움을 양면적으로 비추며 진부함과 도식성을 넘어선다. 그리고 그 본성이 죽음으로 이끌 수도 있다는 경고를 장르적 즐거움 안에 놓으면서 스펙터클의, 촬영한다는 것의, ‘영화’ 자체의 비윤리적 본질과 매혹을 모순적이고 기묘한 감흥 안에서 감각하게 한다. <놉>의 이러한 기묘한 감각은, 실제 말이든 말을 모사한 모형이든 구분하지 않고 모두 빨아들였다 내뱉는 진 재킷처럼, ‘영화’라는 시각 예술이 움직이는 대상을 이미지화 할 수 있게 된 이후에 획득한 의미망들을 수집광처럼 모아 광범위하게 발산시킨다. 그 과도함이 의미적으로 혹은 장르적으로 영화를 불투명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이미지를 완전히 컨트롤하지 못하여 찾아오는 위기가 영화라는 쇼 안에 포함된 하나의 과정인 것처럼, 결말에 이르러 과도하게 펼쳐진 의미망들을, 또 하나의 모순적이고 양가적인 이미지의 마주 봄으로 탁월하게 ‘영화’의 본질로 수렴시킨다. 그 본질이란 영화에서 끊임없이 반복되었던 카메라/피사체의 구도와 같이 두 개의 쇼트가 거울처럼 마주하는 엔딩에 있다. <놉>의 마지막 두 쇼트는, 영화 내적으로 카메라로 포착된 실재지만 영화 외적으로는 컴퓨터 그래픽의 환영일 뿐인 진 재킷의 사진과, 영화 내적으로는 에메랄드의 눈으로 포착된 ‘저 너머(OUT YONDER)’라는 죽음과 삶 사이의 환영적 이미지면서 영화 외적으로는 인간이 연기했음이 분명한 실재의 마주 봄이다. 이 엔딩은 오프닝 크레딧 위로 영사 됐던 에드워드 마이브리지의 <The Horse in Motion>(1878)처럼 ‘영화’란 실제 운동을 여러 장의 사진으로 재현한 것이며, 완전한 환영도 실재도 아닌 모호한 이미지임을 아이러니를 통해 꿰뚫는다. 그리고 마이브리지의 영상에서의 흑인 기수가 <놉>의 OJ로 재생산된 것처럼, 인간의 욕망과 두려움이 끊임없이 스펙터클을, 나쁜 기적(Bad Miracle)을, 영화를 필요로 할 것임을 나타낸다. 그것이 아무리 더럽고 위험한 즐거움이라 하더라도 인간과 ‘영화’가 무언가를 본다는 시각적 유사성을 공유하기에 맞이하는 저주이자 축복인 운명이다. 그러므로 이 마지막 장면과 <놉>은 동양인 주프가 만든 서부극-테마파크에 서부 영웅이 되어 서 있는 흑인 O.J라는 결말처럼, 눈과 카메라, 인간과 ‘영화’의 핵심을 유머와 아이러니로 정확히 명중시키는 조던 필 다운 탁월한 오프라 숏이라 할만하다.
이명세 의 < 개그맨 >은 1980년대 한국영화사에 기록될 만한 데뷔작이다. 당시까지 한국영화가 도달하지 못했던 미답의 영역을 탐사한 이 선구적인 영화는 억압적인 군사정권이 예술적 상상력마저 말살하던 시대, 영화적 담화의 획일화가 현저했던 앙상한 상상력에 육중한 충격을 가했다. 발표 당시까지만 해도 <개그맨>은 불운을 양 어깨에 짊어진 영화였다. 변변한 논평의 대상이 되지 못했을뿐더러 대중으로부터 공정한 평가를 받을 기회마저 박탈당했기 때문이다. 명절 특선 프로로 개봉하기로 계획했다가 할리우드 액션영화 < 다이 하드 >의 흥행몰이로 속절없이 자리를 내어준 <개그맨>은 해를 넘겨 개봉했으나 별다른 반향 없이 쓸쓸히 퇴장한다. 평단의 주목도 미미해, 시대정신이나 사회의식을 담은 영화가 당대의 주류로 득세하던 시절, 삼류 카바레 개그맨의 몽상적 탈주극에 눈길을 주는 평자는 없었다. < 개그맨 >은 대부분 그의 영화가 그러하듯 이명세 의 개성이 뚜렷이 새겨진 작품이다.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의 주인공 돈키호테와 산초 판자에게서 영감을 얻었다는 인물들을 통해 이명세는 영화에 대한 그 자신의 관점을 총화하려 한다. 이야기는 자전적 경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데, 언젠가 걸작을 만들겠다는 야심을 품은 야간업소 개그맨 이종세( 안성기 )의 다소 망집에 가까운 행태를 따라가고 있다. 채플린처럼 콧수염을 기르고 영화 촬영장에 잠입해 기웃거리는 종세는 “명작이 없는 시대에 참다운 영화를 만들겠다”는 원대한 공상에 사로잡혀 있다. 이발소 주인 문도석( 배창호 )과 극장에서 우연히 만난 오선영( 황신혜 )을 캐스팅한 종세는 마침내 꿈꾸던 걸작을 만들겠노라 꿈에 부푼다. 우연히 손에 넣은 M16 총으로 삼인조 은행털이의 탈주에 대한 영화를 찍으려던 종세 일행은 현실과 영화를 구별하지 못하고 실제 은행을 털었다가 희대의 범죄집단으로 TV 뉴스에 보도된다. 연기처럼 사라져버린 꿈, 욕망의 끝에 도달한 허무 속에서 종세와 친구들의 백일몽은 아이러니한 비극으로 마무리된다. 걸작의 시대는 갔다 탈주의 플롯이나 활력적인 반역의 에너지 때문에 < 개그맨 >은 < 내일을 향해 쏴라 >나 <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 류의 탈주극과 곧잘 비교되었지만 속사정은 많이 다르다. 폼 나는 인생을 꿈꾸는 전설적인 삼인조 강도쯤으로 자신들을 포장하지만 현실 속에서 저들은 양품점과 구멍가게를 터는 좀도둑에 지나지 않는다. 작중 인물 종세의 입을 빌려 “걸작의 시대는 갔다”라고 말함으로써 이명세 는 당대 영화에 대한 주관을 요약한다. 주류 통념에서 비켜난 변두리 인생의 부조리한 비극 안에서 당대의 예술이 처한 조건을 발견하는 것이다. 하루 만에 간추린 스토리의 골자를 시나리오로 옮겨 28일에 걸쳐 속성 완성한 < 개그맨 >에는 당시 한국영화로서는 생각할 수 없었던 스타일과 양식들이 심심찮게 나온다. 사건이나 극중 정황에 대한 살뜰한 설명이나 인물의 행위에 대한 동기화가 친절하게 제시되지 않는 이명세 의 다른 영화들처럼, <개그맨 > 역시 드라마틱한 사건들의 맞물림을 통해 이야기를 전개하지 않는다. 영화 전체가 꿈이나 몽상처럼 제시되면서 사회적 현실에 대한 경험을 표면에 내세우거나, 현실 그 자체가 주인공이 되는 당대의 영화적 경향과 완곡하게 단절하고 있다. 중심 테마의 완결성 없이 느슨하게 연결된 에피소드적 구성을 따라가는 이야기는 꿈인 듯 상상인 듯 애매하게 경계를 흐린다. 데뷔 초 이명세 는 한국영화계의 미확인비행물체(UFO) 같은 존재였다. 그의 스타일이 이단으로 평가되었던 이유는 당시까지 한국영화계에 만연해 있는 리얼리즘 우위 경향과 무관치 않다. 사회 현실을 직접적으로 반영해야 한다는 강박이나 고전적 리얼리즘의 핍진성의 원리가 영화 전반을 장악했던 시절 이명세는 영화 미학의 아집과 폐쇄성을 극복하려 했다. 영화가 현실 그 자체만은 아니며 영화 속에서 경험할 수 있는 모든 것이 진실일 수 있고, 하물며 꿈이나 상상 같은 ‘의식의 진실’도 존재한다고 그는 믿었다. 완벽하게 리얼하다고 느껴지는 사고, 꿈, 판타지를 영화의 리얼리티 안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신념이 < 개그맨 >에는 깃들어 있다. 리얼리즘이 거의 절대적인 가치로 추앙받았던 한국영화계에 이런 주장은 신선한 충격파를 던졌다. 리얼리즘의 모토를 거절한다 < 개그맨 >은 뒤늦게나마 새로운 상상력의 가능성을 본 이들에 의해 컬트적 숭배를 받았다. 이 영화를 통해 이명세 는 현대의 영화들이 스스로의 작동원리를 상실하고 있지 않은지를 묻는다. 영화는 현실을 재생하거나 반영해야 하며, 적어도 있을 법한 이야기를 그럴듯한 방식으로 묘사해야 한다는 리얼리즘의 모토를 그는 단호히 거절한다. 종세의 몽롱한 바닷가(<개그맨> < 지독한 사랑 > 등 이명세 영화에서 바다는 초현실적 판타지 공간이다) 독백에서 이런 생각이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세밀한 연출력과 상상력, 수공적 자의식으로 일군 <개그맨>의 주요 장면들은 한국영화에 부재했던 독특한 개성의 일단을 가리켜 보인다. < 개그맨 >은 단순하고 유치한 몽상이나 연애, 자의식과 스타일의 과잉, 역사의식의 부재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이명세 영화의 출발점이자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첫 번째 대답 같은 영화다. 예술의 존재 기반을 회의하는 질문을 지속적으로 제기하며 또 그에 답할 수 있다는 것은 눈에 보이는 혹은 정신적으로 경험한 현실을 어떻게 영화다운 방식으로 언어화할 수 있을 것인지의 단계로 이행했음을 의미한다. 현대 한국영화의 비약적 성장이 언어에 대한 자의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고 할 때, 작가로서 이런 성찰의 의미는 작지 않다. <개그맨>같은 돌연변이적 성운이 없었다면 1980년대 한국영화는 훨씬 단조롭고 빈약했을 것이다. 객관적 묘사를 전형적 샘플로 하는 리얼리즘이 다양한 방식으로 개조되고 있는 저간의 사정을 고려할 때, <개그맨>의 가치는 오래도록 퇴색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