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새벽
- 감독
- 이규환
- 제작년도
- 1947
- 출연
- 유계선, 김승길, 손전, 한은진, 강정애, 권일청, 박경주, 탁월, 우현, 서옥정, 이영란, 최혁, 최성섭, 주선태
‘문예영화’ 표방한 <해연>의 여학생 극장 정원제(5월 1일)가 실시되고 입장료 제한(8월 1일)이 폐지된 1948년 11월 21일 서울 중앙극장에서 개봉한 <해연(海燕: 일명 갈매기)>(예술영화사 제작)은 해방 후 <똘똘이의 모험>(1946), <민족의 새벽>(1947), <그들의 행복>(1947)에 이어 이규환 감독이 내놓은 네 번째 작품이다. 문예영화를 표방한 해방 이후 첫 문교부 추천 영화이기도 하다. 이 영화는 당초 일제 말기에 <처의 윤리>(1941)와 <우러르라 창공>(1943) 두 편을 만든 김영화 감독이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불문학을 전공하고 귀국한 이철혁과 손잡고 만들게 돼있었다. 그런데 과도정부의 초대 공보처 영화과장 제의를 받은 김영화 감독이 연출을 사양하였고, 김영화의 추천에 의해 이규환 감독이 대신 연출을 맡게 되었다. (이규환,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영화 60년(44) : 황금기」, 『중앙일보』, 1980.02.15) [사진] <해연>(이규환, 1948)에서 조미령(오른쪽) <해연>은 계모의 구박을 피해 언니 정애(남미림)가 일하는 동해안의 소년원을 찾아온 여학생(정숙)이 말썽을 부리는 문제아들을 보고 그곳에 남아 봉사하며 계도한다는 얘기다. 그 여주인공 정숙 역을 20세의 조미령이 맡았다, 서울관현악단의 연주와 남성합창단이 부르는 노래를 배경으로 소년원생들이 여선생과 함께 곡괭이질 하는 마지막 장면이 뜻하듯이, <해연>은 국가건설기의 과업이 어떤 것인지를 잘 말해 준다. 이 영화의 언니 애인 역으로 등장하여 서울에 올라가도록 만든 박학은 그 뒤 월북한 후 북한 최초의 예술영화(극영화) <내 고향>(1949)에 출연했다. 춘향 역으로 스타의 반열에 오르다 한동안 영화계와 멀어져 있던 조미령이 다시 은막에 나타난 것은 그로부터 7년 만인 1955년 이규환 감독의 <춘향전>(1955)부터였다. 그 사이 조미령은 변기종이 주도한 상록극회(1951)와 자유극회(1953)의 창단 동인으로 활약했다. 아울러 그녀의 신변에도 변화가 있었다. 16년의 차이가 나는 <해연>의 프로듀서 이철혁과 결혼한 것이다. 스물두 살 때였다. 그러나 조미령이 처음부터 흔쾌하게 춘향 역으로 선택된 것은 아니었다. 이규환 감독의 회고 (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영화 60년(48): ‘춘향물색’」, 『중앙일보』, 1980.02.19) 에 따르면, 이 역할은 당초 신인에게 맡길 생각이었다. 그래서 마땅한 얼굴을 찾기 위해 그는 유장산 촬영기사와 함께 신촌 이화여대 정문 앞으로 갔다. 몇 시간을 드나드는 학생들을 살펴봤으나 마땅한 후보가 눈에 들어오지 않자 어쩔 수 없이 그 대안으로 키가 작아 제쳐두었던 조미령을 불러내기로 한 것이다. 이 감독은 이런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신바닥을 10센티미터 가량 높이기로 하였다. 다행히 긴 치마가 이를 가려주었다. <춘향전>의 촬영이 시작된 것은 1954년 7월부터였다. 원작에 나오는 남원의 광한루가 아닌 풍광과 촬영 조건이 좋은 경북 달성군 가창면 냉천동(冷泉洞)에서였다. 그런데 2주일 뒤 장마가 시작되면서 촬영이 중단되고 자금의 압박까지 받아 고리대금을 끌어다 쓰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렇게 9월 중순이 되어서야 촬영을 마친 <춘향전>은 2시간 15분(필름 길이 1만2천자) 분량의 편집과 명창 임방울, 박초월의 ‘춘향가’가 들어간 녹음과정을 거쳐 이듬해 1월 6일 국도극장에서 개봉되었다. 그 결과 밀려드는 관객들로 하여 세 차례나 상영기한이 연장되며 24일까지 18만 여명을 동원하는 대기록을 세웠다 .(「화제의 영화 춘향전, 한국영화사상 초유의 힛트」, 『한국일보』, 1955.12.06) 극장이 개관된 이래 최대 인파였다. 더욱이 <춘향전>은 이에 앞서 시행된 정부의 ‘국산영화 입장세 면세(1954년)’라는 혜택까지 누려 제작자에게 돈더미를 안겨 주었다. [사진] <춘향전>(이규환, 1955) 촬영현장에서 조미령, 왼쪽은 이규환 감독 일반적으로 춘향이라면 갸름한 얼굴에 날씬한 키를 연상하기 쉬우나 조미령이 꾸며 보인 춘향은 그저 야무진 일편단심의 모습에 지나지 않았다. (「금주의 스타 조미령」, 『한국일보』, 1955.02.06)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남주인공 이민과 함께 일약 영화계의 정상급 배우로 떠올랐다. 여기에는 아역 출신 셔리 템플이 결혼 후 스크린에서 자취를 감춘 것과는 달리 소녀시절부터 ‘극장에서 크고 화장대에서 자라난 체험’이 큰 힘이 되었다. 조미령은 뒤이어 <춘향전>의 조감독 유현목이 첫 메가폰을 잡은 <교차로>(1956)를 비롯하여 <단종애사>(전창근, 1956), <여성의 적>(김한일, 1956), <시집가는 날>(이병일, 1956) 등 4편에 출연하게 된다. 이 가운데 특히 관심을 끈 것은 <시집가는 날>의 하녀 입분이 역이었다. 욕심 많은 맹진사(김승호)가 딸과 혼담이 오가는 세도가의 아들(최현)이 절름발이라는 말에 속아 대리 신부로 내세우는 바람에 행운을 잡게 된 여주인공이다. 더욱이 이 풍자극이 국내 최초로 해외영화제(제4회 아시아영화제 특별 희극상)에서 수상하면서 그 후광마저 입게 된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조미령의 연기는 무난했으나 신부다운 신선미가 없는 게 결점” (이봉래, 「희극영화의 가능성, 영화 ‘시집가는 날’에서」, 『조선일보』, 1957.02.19) 이라는 평을 듣는 수준이었다. [사진] <시집가는 날>(이병일, 1956)의 한 장면 그런데 김기영 감독의 <여성전선>과 김소동 감독의 <아리랑>(이상 1957)에 이르면서 진가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여성전선>의 주인공 옥란 역이 현대여성의 타산적인 행위를 잘 표현 (김규대, 「발전의 소지 개척, 영화 ‘여성전선’에서」, 『조선일보』, 1957.03.09) 했다면, <아리랑>의 여동생 영희 역은 ‘시달림을 받는 처녀로서 훌륭한 연기를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특히 오빠의 친구이자 애인인 윤현구(윤일봉)에게 말하는 대사가 퍽 세련되었다는 평가가 따랐다. [사진] <아리랑>(김소동, 1957) 촬영현장에서 조미령, 왼쪽에서 두 번째는 상대역인 배우 윤일봉, 오른쪽에서 두 번째는 감독 김소동 이 무렵 그녀의 대중적 인기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월간 대중지 『희망』(1957년 8월호)과 영화잡지 『국제영화』(1958년 8월호)가 독자를 대상으로 한 여론 조사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희망』은 조미령이 주증녀와 양미희를, 『국제영화』는 주증녀와 최은희를 제치고 인기배우 제1위로 집계했다. 남배우 1위는 김동원과 최무룡이었다. 조미령이 다수표를 얻은 데는 왜소한 청순미가 관객들의 보호본능을 자극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해방공간의 영화계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패전으로 조선은 해방을 맞았다. 해방의 감격에 조선인들의 만세 소리는 끊이지 않았고, 직접 그린 태극기가 방방곡곡에 물결쳤다. 조선의 영화인들 역시 그 기쁨을 함께했는데, 직접 카메라를 들고 거리로 나가 해방의 감동을 기록하는 것으로 응답한다. 물론 그들은 일제강점기 말 유일한 영화사이자 국책영화사였던 사단법인 조선영화사 소속이었고, 카메라 역시 ‘법인 조영’의 광희동 촬영소 창고에서 꺼낸 것이었다. 이렇게 조선영화인들이 기록한 영상들은 <해방뉴스> 시리즈로 공개되었다. 해방 정국에서 어지럽게 진행된 좌와 우의 갈등은 영화계 역시 마찬가지였다. 일제의 법인 조영 출신들이 주축이 된 조선영화건설 본부가 1945년 9월 24일 창립됐고, 11월 5일에는 좌익 영화인들이 중심이 된 조선프롤레타리아영화동맹이 결성됐다. 12월 6일에는 두 조직이 해산하며 합쳐진 조선영화동맹으로 이어졌다. 이런 과정은 영화인들의 좌우 분열과 통합 흐름을 보여주는 것이지만, 각 조직의 면면을 들여다본다면 인력과 기술을 더 중요하게 고려할 수밖에 없는 영화 제작 환경의 특수성을 읽어낼 수 있다. 지도부 외 구성원들은 좌우익 이데올로기와 정확히 밀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시기, 친일 부역 문제나 좌우익 갈등을 넘어서는 근본적인 문제는 바로 조선영화계의 생존 그 자체였다. 해방기 영화계의 상황은 미국영화의 범람과 조선영화의 위기로 요약된다. 1948년 4월 시점의 「서울신문」 기사에 의하면, 1945년 11월부터 1948년 3월까지 미국 극영화가 422편, 미국의 뉴스영화는 298편이 수입되었는데, 그중 극영화 400편, 뉴스 250편이 중앙영화배급사(CMPE)의 영화였다. 당시 일본 도쿄에서 온 ‘중배’의 조선사무소가 미군의 보호를 받고 있어 미군정 소속인지 알았다는 증언에서 볼 수 있듯이, 미국 9대 영화사의 배급 대행 기관이었던 중배는 해방기 남한에서 미국이 전파하는 이데올로기의 첨병 역할을 했다. 같은 기간 조선 극영화는 17편에 불과했다. 해방 후 첫 극영화로 이규환의 <똘똘이의 모험>(1946)이 개봉하고, 최인규의 <자유만세>(1946)가 상징적인 의미에서 ‘해방영화’로 인정받으며 흥행에 성공했지만, 영화 제작의 기본이라 할 필름 구하기도 쉽지 않아 극영화 만들기 자체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연극 무대에서 영화 장면을 활용하는 연쇄극이 다시 만들어지는가 하면, 16mm 필름에 변사를 써야 하는 무성영화들이 성행할 정도였다. 현재 필름이 보존되어 있는 영화 중에서, 16mm 발성으로 제작된 <청춘행로>(장황연, 1949), 16mm 무성으로 만들어진 <검사와 여선생>(윤대룡, 1948)이 대표적이다. ‘예술영화’라는 지향과 ‘건국 프로파간다’라는 현실 영화 <해연>은 1947년 말 촬영을 시작해,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인 1948년 10월에 완성되었고, 해방 이후 첫 문교부 추천영화로 인정받으며 11월 21일 중앙극장에서 개봉했다. 당시 일본 오사카부의 재일조선인단체에서 수입을 진행한 덕분에, 국내에서는 사라진 필름이 2014년 9월 고베영화자료관에서 발굴되었고, 개봉된 지 60년도 훌쩍 지난 시점인 2015년 7월에 다시 공개되었다. <해연>은 여러 의미에서 해방기 영화계의 상황을 여실히 보여주는 중요한 텍스트라고 할 수 있다. 이 영화를 제작한 예술영화사는 동인제 성격의 영화사로 프로듀서 이철혁, 각본 이운룡 등 구성원 대부분이 연극 무대 출신이었다. 한편 촬영 현장은 김동규 등 배우들을 제외하면, 일제강점기부터 활동한 영화인들이 주축이 되었다. <임자 없는 나룻배>(1932)로 감독 데뷔한 이규환이 연출을 맡았고, 촬영 양세웅, 녹음 이필우, 조명 고해진 등이 참가했다. 애초 <해연>의 감독을 맡기로 한 이는, 일본 도호영화사 출신으로 사단법인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법인 조영’의 전신)에서 국책영화 <우러르라 창공>(1943) 등을 연출한 김영화였다. “해방 후 3년간 자중하고 있던”(「예술영화」, 14쪽) 그가 과도정부 영화 과장으로 취임하면서 이규환이 대신 연출을 맡게 된 것이다. 식민지 조선영화 장에서 두각을 나타낸 이규환은 <똘똘이의 모험>(1946. 09. 07. 개봉), <민족의 새벽>(1947. 04. 21. 개봉), <그들의 행복>(1947. 12. 02. 개봉)을 연이어 개봉하며 해방기 영화계를 주도하고 있었다. 사실 그는 일제 말기 법인 조영에 참가하지 못해 평택 비행장에서 징용 생활을 하다 해방을 맞았는데, 이후의 활발한 활동 배경에는 일제 협력에 대한 부채감이 상대적으로 덜하다는 개인의 판단과 영화계의 일치된 평가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해연>의 제작과 관련해 주목할 만한 점은, 예술영화사가 이 영화의 착수 시점과 완성 시점에 잡지 「예술영화」와 「해연」을 각각 발간했다는 점이다. 영화사의 명칭 그 자체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그들은 미국영화가 범람하고 ‘영화다운 영화’는 제작되지 못하는 해방기 상황에서, ‘예술영화’의 이론적 고찰과 실천을 모두 겨냥하며 잡지/영화를 동시에 내놓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의 작업이 오롯이 예술영화로만 수렴될 수 있었을까.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어야 하는 바로 그때, 영화 역시 다른 매체들과 발맞춰 ‘건국 프로파간다’라는 노선을 취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 시기 <의사 안중근>(이구영, 1946), <윤봉길 의사>(윤봉춘, 1947) 등 일제강점기 애국지사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들이 만들어졌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에는 경찰 조직의 후원을 받은 <밤의 태양>(박기채, 1948), <수우>(안종화, 1948) 등 ‘경찰영화’가 다수 제작되었다. 계몽과 건국을 키워드로 한 ‘한국’영화의 등장은, 새로운 국가 만들기와 맥을 같이하는 것이었다. 소비에트 몽타주와 할리우드 스타일의 공존 기본적으로 <해연>은 건국 도상의 조선 사회와 민중이 체현해야 할 가치들을 강조하고 있다. 영화의 첫 장면, 혼란한 정국을 틈타 모리배 짓을 일삼는 철수(박학)와 헤어지고 새로운 국가 건설의 사명으로 감화원 선생을 맡기 위해 떠나는 정애(남미림)의 모습이 압축적으로 말해주는 것이다. 이어 영화는 불량소년들을 모아 계도하는 감화원(실제 촬영은 부산 수영소년학교)을 배경으로 새로운 국민 만들기를 묘사한다. 그리고 계모 때문에 가출해 불량소년이 된 수길과 계모의 구박을 피해 언니 정애를 찾아온 정숙(조미령)이 남매처럼 가까워지는 것을 통해 대중을 위한 멜로드라마적 사건을 만들어낸다. 식민지 영화감독 이규환이 연출한 <해연>이 영화적으로 흥미로운 점은, 해방 이전 조선영화의 영화문법을 대표하는 소비에트 몽타주(Soviet Montage)와 해방 이후 미국화를 상징하는 고전 할리우드 영화(Classical Hollywood Cinema)의 스타일이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전자는 감화원 실습지에서 원생들의 노동 장면을 통해 확인된다. 시나리오의 “괭이로 파는 소년, 삽으로 흙을 떠 던지는 소년들! / 박선생과 정애도 같이 일을 한다 / 정애의 고운 얼굴에 구슬 같은 땀방울! / 소년들의 합창소리! / 하늘에 나는 갈매기! / 멀리 반짝거리는 황금빛 바다물결!”이라는 문자는, 영화에서는 웅장한 남성합창단의 목소리를 배경으로 선생들과 원생들이 황무지에서 곡괭이질하는 모습과 세찬 파도의 쇼트가 리듬감 있게 병치되는 것으로 영상화된다. 감독의 예술성과 국가 건설이라는 키워드가 몽타주 기법으로 만난 것이다. 한편 고전 할리우드 영화의 연속편집(continuity editing)이 영화 전반에 안정적으로 구사되고 있는 것도 무척 인상적이다. 특히 고전 할리우드 방식의 ‘몽타주 시퀀스’ 기법을 활용해, 수길이 공중으로 핸드백을 던지는 쇼트에 바로 이어 빠른 음악과 함께 해방 후 대도시 서울의 타락한 풍경과 소매치기 소년으로 변해버린 수길의 모습이 속도감 있는 쇼트들로 배치되는 장면이 그렇다. 완성도를 별도로 하자면, 영화의 말미 떠나는 정숙과 따라가는 수길을 묘사하는 장면에서도 할리우드 스타일의 교차편집을 이용한다. 이처럼 이규환은 이 영화가 처한 정치적 기반에 동의하면서 예술영화 운동을 실천하는 주체가 되었고, 결과적으로 <해연>은 예술영화를 지향하면서도 ‘건국 프로파간다’ 서사의 자장 속에 머무른다. 해방기에서 6·25전쟁기로 오리지널 영화음악을 사용한 것이 크게 평가 받는 등 <해연>이 개척한 예술성은 <마음의 고향>(윤용규, 1949)과 <푸른 언덕>(유동일, 1949) 등의 작품으로 이어졌고, 1948~49년 한국영화계는 매해 20편의 극영화를 내놓으며 제작 환경이 안정되는 양상을 보였다. 하지만 시련은 다시 닥쳐왔다. 6·25전쟁의 발발로 모든 영화 제작을 멈출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인들은 1·4 후퇴 이후 국방부 촬영대 등 군관의 기록영화 제작에 참여하며 활동을 이어나간다. 1952년 이후 피란도시 대구 등지에서는 <태양의 거리>(민경식, 1952) 같은 극영화도 제작되고 극장에서 개봉되어, 피란지 관객들이 전쟁의 아픔과 고단한 일상을잠시나마 잊을 수 있게 해주었다. 1950년대 중후반 한국영화가 대중문화의 총아로 급부상하는 기반은 이때 마련된 셈이다.
미인은 아니었다. 남성처럼 호방하고 활달했지만 달필에다 의외로 섬세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박남옥 (朴南玉) 감독에게서 받은 인상이다. 내가 박 감독을 처음 뵌 것은 1981년 4월 20일 오후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유현목 감독의 소개로 서울 서대문 화양극장 뒤쪽에 있는 한 경양식집에서였다. 나는 그때 <일간 스포츠>의 청탁을 받고 기획 연재물 ‘인물영화사’에 대한 자료를 정리 중이었다. 그러지 않아도 박 감독에 대해 쓰고 싶었으나 관련 자료가 빈약해 일차 집필 대상에는 빼놓은 상태였다. 그랬는데 뜻밖에 미국에 살고 있던 그가 잠시 귀국했던 것이다. 만나고 헤어진 지 5일쯤 지났을까 그가 편지를 보내왔다. 엷은 미농지 넉 장에 볼펜으로 쓴 달필의 편지에는 추가 내용과 함께 간곡한 부탁이 들어 있었다. 비록 그의 표현대로 ‘일제(日帝) 교육 덕에 철자법’이 틀리긴 했지만 주요한 부분에는 삼각표시(△)를 하는 등 인상과는 달리 매우 꼼꼼한 성품의 일면을 보여주었다. 이를테면 그가 광복 전 세운 투포환 한국 신기록 수립 연도를 재확인하면서 광복 후는 백옥자지만 광복 전은 박남옥 이라고 기재하거나, 집필에 참고가 될 만한 자신의 과거사 게재 잡지<신여원>를 알려 주었다. 심지어 데뷔작 < 미망인 >의 스틸까지 지정하고, 이혼한 남편(방송연출가 이보라 )에 대한 얘기는 되도록 쓰지 말아달라고 당부했다. 그런가 하면 ‘리어카 이동차’를 탄 사진은 흥행 가치가 없으니 내지 마세요 하거나, 제7회(1960년) 동경 아시아영화제 때 일본배우 미후네 도시로(三船敏郞)가 그에게 담뱃불을 붙여주는 스냅 사진에 대해서는 “멋은 있어도 좀 건방질까?” 이렇게 타진하는 식이었다. 1955년은 6.25전쟁 복구와 함께 영화행정 업무가 국방부에서 문교부로 이관되고 이규환 감독의 < 춘향전 >이 흥행에 크게 성공해 국산영화가 기업의 기틀을 마련한 해였다. 그 뿐만 아니라 무성영화 시대부터 활약해온 배우 이금룡이 별세하고 그를 기리는 최초의 민간 영화상인 금룡상(錦龍賞)이 제정돼 시상되기도 했다. 이런 시기에 이 나라 최초의 여성 영화감독 박남옥 이 탄생했다. 그의 처녀작이자 마지막 작품이 되어버린 이보라 원작 각본 < 미망인 >은 6.25전쟁에서 남편을 잃은 한 여성의 욕망과 좌절을 그린 것이다. 박남옥 감독은 1923년 2월 24일 경북 경산군에서 섬유업을 하는 박씨 집안의 10남매 중 셋째 딸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달리기를 잘해 초등학교 때 이미 도대회에 선발될만큼 운동감각이 뛰어났다. 그래선지 경북여고 재학 중일때 단거리 달리기와 높이뛰기 선수로 뽑혀 경기에 나가 입상했고, 1939년 제2회부터 41년까지 투포환 선수로 조선신궁봉찬체육대회에 참가해 3년 연속 우승, 한국최고기록을 보유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런 반면 미술과 문학에도 남다른 재주를 보여주었다. 3학년 무렵 그는 최인규 감독의 < 집없는 천사 >(1941)를 보고 꽃 파는 소녀 역을 맡은 김신재 에게 반하면서 영화에도 관심을 갖게 된다. 이 무렵 그는 장차 화가가 될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런 희망과는 달리 집안의 압력에 굴복해 미술이 아닌 가정과에 진학하게 된다. 광복 전인 1943년이었다. 정작 남들이 부러워하는 이화여전(梨花女專)에 들어가기는 했으나 공부에는 별로 흥미가 없었다. 오히려 헌책방을 뒤지거나 영화를 보는 일에 더 열을 올렸다. 그래서 기숙사감의 눈총을 받기 일쑤였다. 이 무렵 그는 성장기 여학생들의 감성을 다룬 <제복의 처녀>(레온티에 사간, 1931)와 레니 리펜슈탈 감독의 베를린올림픽 다큐멘터리 < 민족의 제전 >(1936)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게 된다. 특히 그가 이 영화를 각별히 좋아하게 된 이유는 두 편 다 여자가 연출했다는 점이었다. 박 감독은 결혼을 강요하는 부모에게 맞서 가정과를 중퇴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1944년 일본인이 경영하던 대구 일일신문의 기자로 입사했다. 그는 여기서 광복을 맞았다. 하지만 2년도 안 돼 다시 서울로 올라와 본격적인 영화의 길에 들어선다. 첫발을 내디딘 곳이 조선영화사(사장 이재명 ) 광희동 촬영소였다. 그는 거기서 뉴스 편집 일을 거들며 최인규 감독의 < 자유만세 >, 이규환 감독의 < 똘똘이의 모험 >과 < 민족의 새벽 >(이상, 1946)의 편집과정을 지켜볼 수 있었다. 이후 최은희 를 데뷔시킨 신경균 감독의 < 새로운 맹세 >(1946)의 스크립터 일을 맡게 된다. 50년 초여름 박남옥 은 부모의 성화에 못 이겨 고향으로 선을 보러 갔다가 6.25전쟁을 겪는다. 그는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한형모 감독을 따라 국방부 촬영대의 일원으로 김석원 장군이 지휘하는 영천작전에 참여했다. 그가 방송극작가 조남사 의 소개로 방송극 연출가인 이보라 (李保羅)와 백년해로를 기약한 것은 1954년 서른세 살 때인 부산에서였다. 9.28수복 후 관훈동 종로학원 자리에 신혼살림을 차리고 첫딸 경주를 낳았다. 그가 언니 돈까지 끌어들여 제작한 < 미망인 >은 낳은 지 두 달도 안 된 딸을 들쳐업고 찍은 영화였다. 20여명의 스태프에게 밥을 해먹이고 리어카 이동차에 올라 앉아 고무신 차림으로 레디고를 외치는 그의 모습은 한마디로 가관이었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 중앙극장에서 개봉된 영화는 4일만에 간판을 내리는 참패로 끝났다. 게다가 결혼생활마저 순탄치 못했다. 심한 성격 차이로 남편과도 3년 만에 헤어지고 말았다. 1956년이었다. 영화 실패와 파경으로 인생에 회의를 느낀 박 감독은 <시네마 팬>이라는 월간 영화잡지를 창간해 스크린 대신 활자로 승부를 내고자 했다. 그러나 이마저 쉽지 않았다. 제3자에게 판권을 넘기고 57년 둘째 형부 김상문(金相文)이 운영하는 동아출판사에 들어갔다. 78년 퇴사할 때까지 21년 동안 관리과장으로 근무했다. 2년 뒤 그는 이화여고를 졸업하고 드라마센터에서 연극을 공부하다가 UCLA 디자인과를 나온 딸이 있는 로스앤젤레스로 떠났다. 박남옥 감독은 소주 2~3병은 눈 깜짝할 새에 마시는 주량과 ‘골초’라는 말을 들을 만큼 대단한 애연가였다. 또한 웬만한 권투 중계 프로는 놓치지 않았던 복싱 팬이기도 했다. 나는 박 감독과 만나기 전에 그의 남편이었던 이보라 선생을 먼저 알았다. 1950년대 말부터 60년대 초 사이 문인들이 즐겨 찾던 명동의 ‘갈채다방’과 기독교방송국이 있던 종로 2가의 ‘시온다방’ 시절이었다. 그는 스포츠형 머리에 미소 머금은 모습으로 나타나 주태익 , 조남사 등 주로 방송극작가들과 자주 어울리고는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