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깥 나라의 소녀
- 감독
- 마이야 사토미, 쿠보 유타로
- 제작년도
- 2022
- 출연
- 후쿠야마 준, 타카하시 리에
< 현해탄은 알고 있다 >는 1944년 현해탄을 건너 일본 나고야 시의 육군부대로 끌려간 조선인 학도병들의 고난을 그린다. 그중에서도 반항심이 강해 일찌감치 “요주의 인물”로 낙인찍힌 주인공 아로운(김운하)은 일본 군인들에게 끊임없이 괴롭힘을 당한다. 유일한 위안은 일본 여자 히데꼬(공미도리)와의 연분뿐. 하지만 그마저도 앗아갈 파병의 날이 다가온다. 안 봐도 어떤 영화인지 알 것만 같은 줄거리다. 조선의 청년이 고초를 겪는 과정에 비분강개하고, 그에게 반한 일본 여자의 ‘조국을 배반하는’ ‘올바른’ 연정을 응원하다가, 전쟁의 폭압에 짓밟히고 마는 둘의 섬약한 사랑에 눈시울을 붉히라고 만든 영화 아니겠나. 곧 시네마테크 KOFA에서 열릴 김기영 전작展 프로그램 에서도 <현해탄은 알고 있다>를 “태평양전쟁과 일본 제국의 수탈에 대한 감독의 비판적 시각이 탁월하게 녹아든 작품”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하지만 그런 관점은 얼마나 유효할까? <현해탄은 알고 있다>의 정치적 태도는 설명만큼 그렇게 뚜렷하지 않다. 적어도 민족적 수난에 대해 울분을 토해내고자 하는 이들에게 손쉬운 카타르시스를 제공할 정도는 아니다. 아로운의 병영 생활은 수난사라고만 말하기에는 헐렁한 구석이 한둘이 아니고, 히데꼬와의 관계는 ‘불온’하기까지 하다. 히데꼬가 일본 옷을 입은 아로운에게 “옷을 그렇게 입으니까 일본 사람과 다름이 없어요.”라고 말한다든지, 아로운이 파병 직전에 “히데꼬 상을 위해 훌륭한 일본 군인이 돼주고 싶어!”라고 말한다든지, 히데꼬의 어머니가 아로운 옆에서 일본 헌병의 칼을 맞아 쓰러지면서도 “일본은 진다! 난, 난 그게 보기 싫다!”라고 말하는 대목처럼 친일 영화의 기억을 환기하는 순간들도 있다. 하기야 인간의 사회적 외피를 발가벗기고 동물적 욕망을 들여다보는 데에 주력했던 김기영이 새삼 민족혼에 불타 ‘고통 받는 조선인들/사악한 일본 놈들’이라는 구도에 매혹되었을 것 같지는 않다. 사실 관객의 감각에 호소하는 대립 구도는 따로 있다. ‘실내 세트 촬영분’과 ‘삽입 화면’의 대립이다. 영화의 도입부를 살펴보자. 첫 장면의 공간은 현해탄을 건너는 배 안이다. 바다는 보이지 않고, 실내 세트에서 촬영했음이 분명하다. 카메라가 선실들을 가로질러 격벽의 단면을 드러내면서 이곳이 실내 세트임을 공개한다. 이어 출렁이는 바다 위로 오프닝 크레딧과 “1944년 일본 나고야”라는 자막이 지나간다. 다음으로 나고야 항구를 수직으로 내려다 본 항공 촬영 화면이 등장하고, 나고야 시내 정경이 뒤따른다. 이 두 풍경은 보는 이를 움찔하게 하는 데가 있다. 우선 작은 실내 세트에 머물러 있던 영화가 갑자기 거대한 규모의 실외 공간을 항공 촬영이라는 사치까지 누리며 펼쳐 보이는 데에서 오는 충격이 있고, 이어서 동시대의 나루세 미키오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일본의 북적이는 시가지가 느닷없이 끼어든다는 데에서 오는 충격이 있다. 이후에도 이런 삽입 화면은 여러 차례 등장하면서 나고야 시의 정경을 보여주기도 하고, 전투 장면을 보여주기도 한다. 물론 스튜디오 세트 촬영을 중심으로 하는 영화가 공간 배경을 제시하기 위해 로케이션에서 따로 찍은 화면을 삽입하는 것은 무척 흔한 수법이다. 대공황이나 전쟁 등 거대한 역사적 사건을 요약 전달하기 위해 다른 극영화나 기록 영화를 인용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현해탄은 알고 있다>의 삽입 화면들이 유달리 도드라져 보이는 까닭은 실내 세트에서 촬영한 영화의 나머지 대목들과 잘 섞이지 않기 때문이다. 보통 공간 배경을 제시하는 삽입 화면은 앞뒤 장면과 관련이 있기 마련이다. 스포츠 경기가 벌어지기 전에는 경기장 외관을 보여주고, 번화가의 술집에서 다툼이 벌어지기 전에는 시끌벅적한 도심 풍경을 보여주어야 자연스럽다. <현해탄은 알고 있다>는 이런 논리에 무심하다. 병영을 배경으로 한 장면이 끝나고 다음 장면도 병영을 배경으로 하는데 굳이 둘 사이에 고성의 전각이 우뚝 선 평화로운 나고야 시 전경을 삽입한다. 세트에서 찍은 유곽 장면이 끝나자 웬 절 풍경이 들어가더니 다음 장면은 히데꼬의 집이다. 유곽이나 히데꼬의 집이 절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세 공간들의 정조도 전혀 연결되지 않는다. 풍경이 삽입될 때마다 영화는 중단된다. 전황을 담은 삽입 화면도 맥락이 희박하기는 마찬가지다. ‘전황이 이렇게 전개되어 등장인물들에게 이런 변화가 찾아왔다’는 식의 서사적 흐름은 잘 짚이지 않는다. 더구나 이 삽입 장면은 전장을 담은 기록화면과 다른 전쟁 영화에서 가져온 듯한 명백한 연출 장면을 뒤섞어 파괴의 스펙터클을 전시하고 있어 한층 당혹스럽다. 문자 그대로 다른 영화를 보는 듯한 기분이다. 그러고 보니 정말로 다른 영화를 보는 장면도 있다. 아로운을 헌병대 본부로 호출한 헌병 대장은 돌아가는 길에 찬바라 영화를 보고 일본도가 얼마나 잘 드는지 확인하라고 말한다. 아로운은 정말로 극장에 가서 찬바라 영화를 보다가 견딜 수 없다는 듯 도중에 밖으로 나온다. 이제 앞서 ‘실내 세트 촬영분’과 ‘삽입 화면’의 대립이라고 했던 것을 다른 말로 고쳐 보자. ‘안’의 실내 세트에서 아로운을 주인공으로 하는 드라마가 전개되는 사이사이 ‘다른 영화’가 무심하게 끼어들어 드라마 ‘밖’의 세계를 환기한다. <현해탄은 알고 있다>는 그 바깥 세계를 차단하려 애쓴다. 바깥은 위험해. 안에 있어야 해. 본디 대립 관계에 놓여야 했을 병영과 히데꼬의 집은 오히려 폐쇄적인 실내라는 점에서 닮았다. 히데꼬 집의 미닫이문이 창살처럼 닫히는 모습은 병영의 영창을 떠올리게 하는데, 여기서 영창은 수난의 공간이 아니라 피난의 공간이다. 영창은 아로운이 일본 군인들에게 반항하다 갇힌 뒤 동료와 웃음을 터뜨리는 곳이며, 영창에 들어가면 전쟁터에 가지 않아도 되니 살 수 있다는 말까지 나온다. 실제로 포로로 붙잡힌 미군 병사들은 영창에서 밖으로 나가는 순간 죽음을 맞이한다. 그들을 탈출시켜 주었더라면 아로운도 일본군들의 함정에 걸려 죽었을 것이다. 갇힐수록 안전하다. 바깥은 위험하다. 어떻게든 미루어 왔던 안과 밖의 만남이 아로운의 탈영 결심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아로운의 탈영을 숨기기 위해 폭격으로 죽은 이름 모를 사람의 시체가 동원된다. 아로운과 히데꼬가 찾은 피신처는 아마도 폭격으로 무너졌을 공장의 폐허다. 병영과 히데꼬의 집을 오가며 느긋하다 싶을 정도로 통속적인 드라마를 전개하던 영화는 이제 순식간에 결말로 나아간다. 그리고 바로 그 결말. <이어도>의 악명 높은 클라이맥스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 이 말문이 막히는 결말은 직접 보아야만 하기 때문에 자세한 묘사는 피하겠지만, 에둘러서라도 말해 보자. 그간 애써 차단했던 바깥세상이 드라마가 진행되던 안전한 내부로 기어이 쏟아져 들어오고야 만다. 또는 답답한 실내 세트에서 전개되던 드라마가 갑자기 <독일 영년>을 방불케 하는 폐허로 나간다. 이 영화를 위해 미술팀이 준비했으리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광대한 폐허다. 여기에서 벌어지는 사건의 묘사도 남다르지만, 일단 폐허의 정체에 관심이 쏠린다. 중간 중간 나고야 시의 풍경이 들어갔다지만 영화 전체를 일본에서 촬영했을 리 없다. 한국일 것이다. 대체 저긴 어디지? 왜 저런 폐허가? 그제야 <현해탄은 알고 있다>의 발표 연도를 찾아본다. 1961년 11월 개봉. 6.25가 끝난 지 채 10년도 지나지 않았다. 폐허는 전국에 흔했을 것이다. 그리고 개봉 한 해 전에 4.19가 있었고, 개봉 여섯 달 전에 다시 5.16이 있었다. 가능하면 안에 머무르고 싶었을 테지만 살기 위해 죽음의 공간으로 나간 사람들이 있었고, 너무 많은 시체들이 나왔고, 그 시체들을 제대로 수습하기 전에 세상이 또 뒤집혔다. 그리고 지난 글에서 김보년 필자도 언급했듯, 죽은 자들을 되살리는 것은 김기영의 장기다. 그러니 다시금 묻는다. <현해탄은 알고 있다>는 “태평양전쟁과 일본 제국의 수탈에 대한” 영화인가?
‘아프리카를 무대로 펼쳐지는 모험과 로맨스의 대작 오락물’에서 존 포드의 이름을 보게 되는 건 아무래도 어색하다. < 모감보 >는 여러 면에서 예외적인 포드 영화다. 먼저 눈에 띄는 건 배우들이다. 주연을 맡은 당대의 톱스타 클락 게이블, 애바 가드너, 그레이스 켈리는 이 영화 외엔 포드 영화에 나오지 않는다. 반면 신부를 맡은 단역 데니스 오데아(Denis O’Dea)를 제외하면 포드 사단에 속한 배우들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아프리카가 공간적 배경인 영화도 <모감보>가 유일하다. 각본을 쓴 존 리 마인(John Lee Mahin)은 이 영화가 포드와의 첫 작업이며 6년 뒤의 < 기병대 The Horse Soldiers >(1959)가 포드와의 두 번째이자 마지막 공동작업이다. 촬영을 맡은 로버트 서티스(Robert Surtees)는 < 솔로몬왕의 보고 King Solomon’s Mines > < 벤허 > 등의 대작을 찍었으며 역시 < 모감보 >가 포드와의 유일한 공동작업이다. 존 포드가 자신의 영화적 고향 모뉴먼트 밸리 혹은 미국도 아니며 가족의 실제 고향 아일랜드도 아닌 머나먼 이국땅에서 낯선 배우들, 낯선 스태프들과 만든 이례적인 영화가 <모감보>다. <솔로몬왕의 보고>(1950), <아프리카의 여왕>(1951), <킬리만자로의 눈>(1952) 개봉 당시에 「뉴욕타임스」의 유명한 평론가 보슬리 크라우더는 이 영화를 “또 하나의 아프리카 사파리 영화”라고 불렀다. 당시 할리우드에는 < 솔로몬왕의 보고 >(캠튼 베넷, 앤드류 마튼 감독/데보라 커, 스튜어트 그랜저 주연, 1950), < 아프리카의 여왕 The African Queen >(존 휴스턴 감독/험프리 보가트, 캐서린 헵번 주연, 1951), < 킬리만자로의 눈 The Snows of Kilimanjaro >(헨리 킹 감독/그레고리 펙, 수잔 헤이워드, 애바 가드너 주연, 1952)과 같은, 빅 스타를 내세우고 미지의 땅 아프리카를 배경으로 모험과 로맨스를 배합해 관객의 이국 취향을 만족시키는 영화들이 유행했다. 당대의 관객이나 평자들에게 < 모감보 >는 ‘Great White Hunter’ 멜로드라마라고 불리기도 했던 이런 영화들의 아류로 비쳤던 것 같다.(클린트 이스트우드가 1990년에 내놓은 < 추악한 사냥꾼 White Hunter Black Heart >은 <아프리카의 여왕> 촬영 당시 존 휴스턴 감독의 실화에 바탕을 둔 영화이자, 이 장르의 패러디이다.) 흥행에는 성공했지만 당대의 평론가들은 물론이고, 존 포드 열광자들 중에서도 이 영화를 주목하는 이는 드물다. 린지 앤더슨은 < 모감보 >가 “오락과 도피를 위한 외도이며, 콘셉트도 야심적이지 않고 결과도 신통치 않은 영화”라고 잘라 말한 뒤 어떤 논평도 덧붙이지 않는다(『About John Ford』). 앤드루 새리스 역시 “작가의 영화라기보다는 장인의 영화”이며 “포드의 이름을 들어본 적 없고 그의 개인적 프로젝트에 무관심한 사람들에게 < 온 마을의 수다 The Whole Town’s Talking >(1935)와 함께 포드의 가장 즐길만한 영화”라고 적고 있다. 다만 새리스는 “이 도피주의적인 빅 스타 오락물이 (대중영화로서) 흠잡을 데가 거의 없는데도, 대중영화 지향적인 비평가들조차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라고 덧붙인다.(『John Ford Movie Mystery』) 생전의 포드를 만난 진지한 인터뷰어들도 이 영화엔 별다른 관심이 없어, 포드가 이 이례적인 프로젝트를 왜 시작했는지, 어떤 구상으로 촬영했고 결과에 대해 어떤 소회를 가졌는지에 대한 발언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반면 당시 언론의 연예란에는 이 영화가 뜨거운 이슈였는데, 영화 자체 때문이 아니라, 세 주연 배우가 톱스타이자 당대의 바람둥이였고, 촬영현장에서 얽히고설킨 염문을 끝없이 낳았기 때문이다. < 모감보 >는 메이저 스튜디오 밖에서 만들어진 포드의 개인적 영화들(< 도망자 > < 웨건 마스터 > < 태양은 밝게 빛난다 > < 라이징 오브 더 문 >)이 겪은, 충분히 예상 가능한 소외와는 전혀 다른 의미의 기묘한 소외를 겪은 셈이다. 전후의 존 포드가 개인적 프로젝트(위의 네 편과 < 말없는 사나이 > 등)의 제작비 마련을 위해 스튜디오 납품용으로 당대의 상업적 장르인 서부극을 찍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전형적인 오락물처럼 보이는 < 모감보 > 역시 같은 의도로 만들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오늘의 우리에게 <모감보>가 흥미롭게 보이는 이유는, 스스로는 충분히 의식하지 않았더라도, 포드가 완전히 다른 세팅으로 또 다른 서부극을 찍고 있다는 사실이다. 포드는 자신의 서부극이 서부의 역사를 충실히 기록한다고 생각했지만, 그의 서부극뿐만 아니라 서부극적인 비서부극이 보여주는 바는, 포드의 서부극이 실화에 바탕한 이야기의 충실한 재현이라기보다 바르트적인 의미에서 신화에 가깝다는 사실이다. 애바 가드너, 클락 게이블, 그레이스 켈리 줄거리는 이렇다. 케냐의 밀림 지역에 터를 잡은 빅터(클락 게이블)는 두 백인 및 원주민 조력자들과 함께 맹수를 포획해 유럽의 동물원과 서커스단에 파는 백인 사냥꾼(white hunter)이다. 어느 날 밤무대 무희처럼 보이는 켈리(애바 가드너)가 도착해 빅터와 짧은 인연을 맺지만 빅터는 그녀를 부담스러워한다. 곧이어 젊은 영국 인류학자 도날드와 그의 아름다운 아내 린다(그레이스 켈리)가 사파리 여행을 위해 이곳에 온다. 빅터와 린다는 곧 사랑에 빠지지만 이를 숨기고, 네 남녀는 고릴라 거주 지역을 향한 위험한 사파리 여행을 떠난다. #0 거의 지적되지 않는 점이지만 < 모감보 >는 < 역마차 >(1939)와 많은 면에서 흡사하다. 이주민들의 불안정하고 작은 마을, 온갖 위험이 도사린 야생 지역(초원과 밀림/황야)을 차례로 통과하는 여정, 적대적 토착민들(아프리카 원주민과 맹수/인디언)의 위협, 주인공 남녀의 결합이라는 주요 모티프들을 두 영화는 공유한다. 고릴라 지역 원정대는 마치 서부의 평원을 지나는 마차 행렬처럼 찍혀 있다.(#0) 운송수단은 마차에서 지프와 카누로 달라졌지만, 빅터 일행의 지프와 카누가 역마차처럼 두세 곳의 토착민 마을을 경유해 최종목적지에 이르는 구성은 같으며, 승객 캐릭터들도 유사하다. 야생의 삶에 익숙한 유능하고 과묵한 단독자인 주인공(빅터/링고 키드)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지프/마차에는 지금 문명화된 지역에서 온 숙녀(린다/루시)와 창녀 혹은 유사 창녀(켈리/댈러스)가 타고 있으며 숙녀는 창녀를 경계한다. 물론 < 모감보 >의 지프와 카누에는 주정뱅이 철학자도 없고(주정뱅이는 있지만 철학자는 아니다), 이상심리의 도박사도 위선적인 절도범도 없다는 점에서 캐릭터 구성은 훨씬 단조롭다. 또한 링고 키드의 여정은 복수를 향한 것인 반면 빅터의 여정은 로맨스(다른 남자의 아내를 얻기 위한)를 향한다는 차이도 있다. 하지만 여정의 끝에 주인공과 창녀의 결합(빅터-켈리/링고 키드-댈러스)이 이뤄진다는 결말은 완전히 같다. <역마차>의 링고 키드 / <모감보>의 빅터 하지만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 역마차 >에는 공동체가 있지만 < 모감보 >에는 공동체가 없다는 점이다. <역마차>의 마을은 문명화의 도정에 있다. 이 불안정한 공동체에는 문명의 완성을 위해 제거되어야 할 외부의 위협(인디언 제로니모)과 내부의 위협(악당 플러머 형제)이 있으며 동시에 문명의 악덕(은행가의 탐욕과 범죄, 창녀와 주정뱅이 철학자를 추방하는 위선의 율법)도 이미 만연해 있다. 링고 키드는 사적인 복수심의 발로라 해도 악당들을 제거해 사실상 공동체의 문명화에 기여했지만, 이젠 살인자가 된 그를 위한 공동체 내부의 자리는 감옥이나 교수대 외에 없다. 그는 떠나야 한다. 문명화의 도정에 있는 서부 공동체의 딜레마는 오늘은 폭력적 영웅이 필요하지만 내일은 그를 추방해야 하는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영웅의 폭력 행사와 (자기)추방은 모두 공동체의 도덕적 요청인 것이다. <역마차>라는 서부극 서사에서 공동체의 도덕은 영웅의 윤리와 긴장하고 대립하는 중심 모티프이다. < 모감보 >에는 빅터가 거주하는 마을은 물리적으로 존재하지만 그의 윤리와 긴장하는 공동체의 도덕 같은 건 없다. 이 마을은 사실상 빅터가 사장인 비즈니스 조직에 가깝다. 그의 표면적 목적은 더 많은 동물을 잡아 더 많은 돈을 버는 것일 뿐이다. 물론 그의 근본적 동기가 돈벌이인지 도피인지는 모호하긴 하지만, 이곳은 온전히 자신의 계획대로 움직이는 빅터의 소왕국과도 같은 곳이다. <모감보>의 서사가 < 역마차 >에 비해 얇아 보이는 건 캐릭터 구성의 단조로움 때문이라기보다 영웅의 비극적 운명을 요구하는 공동체의 잔혹한 도덕이라는 모티프가 부재하기 때문이다. 다른 차이 하나는, 당연해 보이는 말이긴 하지만, < 모감보 >에는 공동체가 없으므로 공동체의 바깥도 없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서사의 외부 혹은 서사의 초월적 층위라고 부를만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 역마차 >의 링고 키드는 댈러스와 함께 지평선 너머를 향해 떠난다. 그들이 향하는 곳은 멕시코라는 특정 지역이라기보다 공동체의 바깥, 주정뱅이 철학자 닥 분의 표현을 빌리면 ‘문명의 축복을 벗어난’ 미지의 땅이다. < 황야의 결투 >의 와이어트 업, < 수색자 >의 이산 에드워즈도 그곳을 향해 떠났다. < 웨건 마스터 >의 인물들은 평생 그곳을 찾아 떠돌아다닐 것이다. 포드 서부극에서 그 바깥이 서사를 영원한 미결의 여정으로 만든다. 영웅의 떠남이 사실상의 추방 심지어 죽음의 은유라고 해도 그에겐 적어도 떠남의 결정권이 주어졌고 무한한 광야로 시각화된 그 바깥은 감상적 위안마저 안겨주는 낭만적 외부였다. 포드의 서부극에 한정한다면 이 외부가 닫히는 건 1960년대의 두 서부극 <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 >와 < 샤이엔의 가을 >에서였다. 두 영화는 이 바깥의 최종적 폐쇄의 확인이라는 목적지에 이르는 길고 고단한 여정이었다. 아프리카라는 공간 < 모감보 >의 장소인 아프리카는 물리적으로는 미국 서부보다 훨씬 광대하고 더 아득한 미지의 땅이다. 하지만 이곳이 < 역마차 >의 서부보다 좁아 보이는 이유는 외부가 없는 달리 말해 초월적 층위의 장소가 상상될 수 없는 동질적 공간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항상 일정한 위험이 일상인 장소이고 그 위험은 관리될 수 있을 뿐 근본적으로 제거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며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더 깊은 정글로 가더라도 마찬가지다. 빅터는 무슨 이유에선지 문명을 떠나 이 외지고 위험한 곳에 정착했고(그의 개인사는 설명되지 않는다), 도시로 나간 적도 거의 없다. 그는 문명 공동체로 돌아갈 생각이 없다. 달리 말하면 빅터는 < 역마차 >의 결말에서 링고 키드가 향해 떠난 곳에 이미 도착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계속 밀림 탐색에 나서겠지만 더 이상 미지의 땅을 향해 떠도는 게 아니라 자신의 소왕국으로 반복해서 돌아올 것이다. 그는 자신이 떠나온 곳으로 돌아갈 생각도 없지만 더 이상 나아갈 곳도 없다. 말하자면 < 모감보 >의 정글은, 다른 층위의 장소를 향해 열린 곳이 아니라, 영웅이 자신을 최종적으로 유폐시킨 폐쇄공간이다. 그런 점에서 <모감보>는 <역마차>의 변주이면서 동시에 후일담으로 볼 수도 있다. 혹은 <모감보>를 포스트 서부극이라 말할 수도 있다. < 모감보 >가 ‘또 하나의 아프리카 사파리 영화’가 아니라 포드 서부극의 친족처럼 보이는 다른 이유들도 있다. 존 포드는 메이저 스튜디오가 요구한 아프리카 사파리 장르를 수용하면서도 이 장르의 다른 영화들이 채용한 정글 모험의 일반적인 길을 택하지 않았다. 예컨대 존 휴스턴의 < 아프리카의 여왕 >에서 작은 증기선에 올라탄 험프리 보가트와 캐서린 헵번의 주된 곤경은 끝없는 갈대숲과 진창, 엄청난 수의 모기떼, 강의 가파른 급류, 미친 폭우와 강풍과 같은 아프리카의 가혹한 자연환경이 초래한 것이다. 하지만 <모감보>는, 맹수의 등장을 제외하고는, 아프리카라는 장소를 특별한 공포와 매혹의 스펙터클로 만드는 데 무관심하다. 서부극의 주요 장르적 요소 가운데 하나가 문명과 자연의 대립이라는 설명은 널리 통용되지만, 포드 서부극에서 적대적 자연환경이 주된 모티프로 등장한 경우는 거의 없다. 자연재난 장르인 < 허리케인 >을 제외하면, 성서번안극에 가까운 유사서부극 < 3인의 대부 3 Godfathers >(1948)의 소금사막이 드문 예외다. 포드 서부극에서 자연 풍경은 오히려 깊이 침묵하는 초서사(超敍事) 혹은 비지(非知)의 심연이다. 적대적 자연으로 흔히 오인되는 것은 적대적 인디언이다. 백인의 이주민공동체와 대립하는 것은 자연이 아니라 북미 인디언의 토착민공동체인 것이다. 백인 문명이 자연 지배적이고 인디언 문명이 자연 순응적이라고 해도, 이 대립은 분명히 하나의 문명과 또 다른 문명의 대립이며 투쟁이다. 인디언 공동체가 백인 공동체보다 도덕적으로도 지적으로도 더 우월한 것으로 묘사되는 < 아파치 요새 >보다 이를 더 잘 보여주는 것은 없다. 그가 달빛이 흐르는 강을 사랑하는 건 분명하지만(< 젊은 날의 링컨 > < 모감보 > < 라이징 오브 더 문 >), 감독으로서의 존 포드는 자연을 공포 혹은 신비의 대상으로 드러내는 상투적 방식에 이끌린 적이 거의 없다. < 모감보 >에서 포드는 모험이 아니라 여정을 택한다. 사파리 장르의 강점인 맹폭한 자연 대 분투하는 인간이라는 구도를 활용하는 대신, < 역마차 >의 궤적을 고스란히 떠올리게 하는 여정의 서사 안에서 <역마차>에서처럼 인물들과 그들의 관계에 집중하는 것이다. 적어도 <모감보>의 세계 안에서라면 아프리카의 자연은 빅터라는 유능한 영웅에게 거의 위협이 되지 못한다. 빅터는 공동체와 절연한 단독자이며 그를 망칠 수 있는 건 이제 그 자신밖에 없다. 이런 점들이 <모감보>를 <역마차>의 후일담으로 보이게 만드는 것이다. 그 자신이 맹수이며 자기 내부에 모든 위협을 지닌 영웅이라는 점에서 빅터는 모던한 서부사나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곳에서 그는 또 다른 맹수로부터 위협받는 게 아니라 그 자신이 최상위 포식자다. 공동체의 율법도 외부의 위협도 사실상 부재한 곳에서 최상위 포식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일상적 먹이 사냥을 제외하면 짝짓기 말고 달리 무엇이 있을까. 돌려 말할 필요가 없겠다. < 모감보 >는 맹수의 짝짓기 영화다. < 모감보 >의 흥미로운 점 가운데 하나는 위협적인 맹수들이 등장하는 시퀀스들이 최상위 맹수인 빅터의 알레고리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달리 말해 맹수들은 빅터의 분신으로서 그의 정체를 암시하고 그의 위협을 상연하며 그의 불길한 미래를 예기한다는 것이다. #1 #2 #3 #4 이 영화에선 흑표범이 여러 번 등장한다. 첫 시퀀스에서 함정에 빠져 포획된 흑표범은 백인 조수의 실수로 그물을 뚫고 도망간다.(#1) 몇 장면 뒤에 린다는 혼자 산책을 나갔다 같은 함정에 빠지고 흑표범이 그녀를 향해 으르릉거리며 다가온다.(#2, #3) 뒤늦게 쫓아온 빅터는 흑표범을 쏜다.(#4) 여기 세 맹수가 있다. 첫째, 그물을 뚫고 탈출한 맹수. 둘째, 함정에 빠진 미녀에게 다가오는 위협적인 맹수. 셋째, 여인의 육신을 노리다 총을 맞고 쓰러지는 맹수. 첫째는 공동체를 탈주한 빅터의 전사에 해당될 것이며, 둘째는 자기도 모르게 함정에 빠진 린다에게 접근하고 있는 빅터의 현재에 해당될 것이다. 셋째는 결말부에 전개될 빅터의 미래에 해당될 것이다. #5 더 흥미로운 장면은 후반부에 있다. 고릴라 거주지역 부근 텐트에서 혼자 앉아있는 켈리 곁을 치타가 무심하게 지나간다.(#5) 켈리가 뒤늦게 알아차리고 놀라지만 치타는 그녀에게 눈길을 주지 않는다. 맹수와 여인이 한 프레임에 담긴 유일한 장면이며, 촬영 현장에서 우연히 발생한 사건을 재연한 장면이지만, 켈리에 대한 빅터의 미지근한 태도뿐만 아니라, 빅터와 켈리가 같은 종의 맹수임이 절묘하게 암시된다. 둘은 모두 문명이 아니라 정글에 속한 존재인 것이다. 린다와의 결합에 실패한 뒤, 빅터는 떠나려는 켈리를 붙잡으며 “함께 있어주면 좋겠소. 당신은 내게 어울리니까.”라고 말한다. 달콤한 구애의 언어를 기대했던 켈리는 “어울린다고?”라며 화를 내고 배에 올라탄다. 하지만 그녀는 곧 배에서 내려 빅터에게 달려온다. 빅터의 말대로 둘은 사랑한다기보다 어울리는 게 맞다. 빅터와 켈리의 결합에는 < 역마차 >의 링고 키드와 댈러스의 결합에서처럼 로맨틱한 감정교환 대신 동류의 존재로서의 확인만 존재한다. 비유컨대 < 모감보 >는 먼저 떠난 링고 키드에게 댈러스가 뒤늦게 찾아온 이야기다. 둘은 맹수로서 앞으로도 공동체로부터 멀리 떨어져 정글에서 살아갈 것이다. 마지막 장면 이 마지막 장면은 해피엔딩처럼 보이지만 아름답다기보다 처연하다. 여기엔 모종의 단념이 있기 때문이다. 린다가 일깨운 문명으로의 복귀 가능성, 로맨스, 열정의 회복이 모두 단념된다. 포드는 단념의 사유를 설명하지 않고 단념의 결정만 제시한다. 마치 단념이 빅터와 켈리의 운명이라는 듯. 이것이 자신을 정글에 유폐한 서부사나이의 삶이다. 그런데 < 모감보 >에는 이 모든 설명을 부질없게 만드는 시퀀스가 있다. 산책 도중 위험에 빠진 린다를 빅터가 구한 뒤에 둘이 돌아온다. 린다는 날렵한 초식 동물처럼 프레임을 재빨리 빠져나가다(#6) 나무 등걸에 기대 그를 바라보며(#7), 빅터라는 맹수를 피하듯 유혹한다. 급작스러운 폭풍우가 몰아치고 빅터가 린다를 안아 올리자 린다는 갑자기 빅터의 몸을 빨아들일 듯 안겨든다.(#8) 그런 다음 이 영화의 가장 유명한 장면이 이어진다. 남편이 잠든 린다의 방 앞에서, 빅터는 린다의 스카프를 벗기고 그녀의 목을 감싼 다음 거칠게 당긴다.(#9) 흔들리는 눈빛의 린다는 다가올 듯하다 돌아서 들어간다.(#10) #6 #7 #8 #9 #10 입맞춤조차 없지만 이 일련의 장면들에는 숨막힐듯한 유혹, 외설적 욕망과 섬뜩한 불안이 숨 가쁘게 교차한다. 이 영화의 드문 지지자인 태그 갤러거의 표현을 다시 옮기자면 여기엔 “절정, 사랑, 이해, 공포, 고통, 모욕, 분노, 두려움, 수치와 같은 수많은 감정들”이 한 장면에 모두 담겨있는 것이다. 이런 장면을 보고 있으면 포드를 무엇보다 위대한 디테일의 작가, 감정 표현의 마술사라고 말하고 싶어진다. 사적인 감상으로는, 이 시퀀스 하나만으로도 < 모감보 >를 포드의 걸작 반열에 올리고 싶어진다.(계속)
근래 전 세계 영화제에서 가장 크게 주목받은 러시아 애니메이션은 상트페테르부르크 출신 콘스탄틴 브론지트 감독의 <우주 없이 못살아 We Can’t Live without Cosmos>이다. 2008년 <화장실 러브스토리>로 아카데미 단편 애니메이션 후보에 올랐던 감독이 그 후 6년 만에 발표한 작품이다. <우주 없이 못살아>는 2015년 5월에 열린 서울국제만화애니메이션페스티벌에서 단편 우수상과 관객상을 동시에 받으며 한국 관객의 마음을 얻었고, 같은 해 6월에 열린 자그레브국제애니메이션영화제와 안시국제애니메이션영화제에서도 단편 부문 대상을 받으며 세계 관객의 마음을 재차 확인했다. 수많은 영화제와 시상식을 사로잡은 <우주 없이 못살아>의 주인공은 우주인 훈련생들이다. 작품은 건장한 청년들이 마주 서 침대 위를 뛰는 장면으 로 시작한다. 바깥은 별이 가득한 밤. 성긴 눈발이 사선으로 날리는 매서운 계절이다. 1203, 1204 나란히 이어진 번호를 받고 같은 방을 쓰는 두 사람은 유모차 타던 시절부터 단짝이다. 그러니까 우주인 흉내를 내며 침대 위를 뛴 것도 하루 이틀은 아닐 것이다. 2015년 3월, 나는 모스크바에서 하룻밤 묵었다. 러시아 작가들이 휴양처럼 생각한다는 오픈애니메이션페스티벌 행 버스가 다음날 출발할 예정이었다. 페스티벌이 제공한 호텔 이름은 코스모스(호텔 클럽 이름은 솔라리스)였다. 3,600명을 수용할 수 있다는 어마어마한 규모지만 객실은 소박했다. 1980년 모스크바올림픽을 대비해 세운 건물인데 내부 장식도 그때 그대로가 아닌가 싶었다. 호텔 창밖으로 보이는 공원에는 은빛 탑이 예리하게 솟아 있었다. 거대한 호텔 식당에서 아침을 먹고 공원을 산책했다. 하늘은 아침부터 무척이나 새파랬고 눈이 부실만큼 번쩍이는 탑 꼭대기에는 로켓이 놓여있었다. 거기서 유리 가가린의 조각상을 발견했다. 인류 최초로 우주 궤도 비행에 성공했다는 사람. 그곳은 모스크바 우주 박물관이었다. 대한민국 최초의 우주인 이소연 씨가 훈련받은 가가린훈련센터도 모스크바에서 멀지 않다. 러시아 어린이라면 장래희망으로 우주인 정도는 한 번쯤 쓰겠구나 싶었다. 밤마다 함께 우주를 나는 꿈을 꾸던 두 친구는 서로 끌어주고 밀어주며 일상적인 체력단련과 수영, 구토를 유발하는 원심력 훈련까지 해낸 끝에 우주인과 예비 우주인으로 선발된다. 1203을 태운 로켓이 흐린 하늘을 지나 별이 빛나는 우주에 다다르자 센터 사람들과 모니터로 지켜보던 1204는 박수치며 환호한다. 그러나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그만 교신이 끊긴다. 1990년 일본 최초 우주인의 통역사로 소련을 찾은 요네하라 마리는 바이코누르 우주기지에서 “이카로스들의 묘”를 만난다. 1) 그녀의 기억에 언론은 1961년 우주 비행에 성공한 가가린을 소비에트의 이카로스라고 불렀다. 그녀는 넓은 기지 한구석의 비석을 보며 야심 찬 성공의 그늘에 가려 적막한 죽음을 맞은 이카로스가 한둘이 아니었음을 깨닫는다. 친구가 떠난 까만 하늘, 가만히 가득한 별들이 흰 눈이 되어 쏟아진다. 지상에 슬픔이 두껍게 쌓여도 삶은 멈추지 않는다. 훈련센터 관리자는 곧장 1203의 기록에 줄을 긋는다. 1204는 이제 다음 차례 우주인이다. 하지만 혼자 남은 그에게 꿈은 더는 같은 의미가 아니다. 엔딩 크레디트가 오르기 전 이 영상 편지의 수신인이 뜬다. TO OUR FRIENDS <우주 없이 못살아>는 별이 가득한 우주와 우주비행사를 꿈꾸는 두 친구 이야기다. 둘은 어릴 때부터 수없이 함께 우주를 이야기하며 자랐을 것이다. 우주 없이는 못산다고 입버릇처럼 말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작 그들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은 꿈을 나눈 친구가 아닐까. ‘우정 없이 살 수 있을까.’ 소중한 친구들에게 보내는 감독의 메시지를 부디 확인하시길 바란다. 주1. 요네하라 마리, 「이카로스와 가가린」, 『교양 노트』, 마음산책,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