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운더리
- 감독
- 윤가현
- 제작년도
- 2021
근 몇 년간, 무언가로부터 혹은 어딘가로부터 끝없이 도망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올해 초에 소설가 U와 걸으며, 이런 푸념을 빙빙 돌려가며 늘어놓았다. U는 결코 내게 직접 묻지 않았지만, 만약에 누군가 내 어깨에 다정히 손을 얹고 무엇으로부터 도망치고 있느냐 묻는다면 ‘너무도 구체적인 나, 나보다도 구체적인 나’라고 답할 것이다. 이어, 그럼 도대체 어딘가로부터 도망치고 있느냐 묻는다면, ‘이상하리만치 안정적인 내 바운더리’라고 답할 것이다. U는 이를 묻는 대신에 모국어가 아닌 언어로 소설을 쓰는 작가에 대한 얘기를 들려줬다. 아무래도 한정될 수 밖에 없는 어휘로 글을 쓰는거야. 예를 들어, 사과를 좋아한다고 표현하는 대신 “나는 어제 아침에 사과를 먹었다. 나는 오늘 아침에도 사과를 먹는다”고 표현하는거지. 나는 어제 아침에도 닭가슴살 200g 한 봉지를 전자레인지에 돌려 먹었고, 오늘 아침에도 같은 닭가슴살 한 봉지를 먹었으며, 2019년에는 같은 회사의 같은 닭가슴살 300봉지를, 2020년에는 315봉지를, 2021년에는 무려 375봉지를 먹었다고 여기 적지만, 이는 결코 내가 닭가슴살을 좋아한다는 뜻은 아니다. 다행히, 어떤 e-커머스 플랫폼도 이를 오해하지 않았고, 내게 닭가슴살 광고를 띄운 일은 여태껏 없다. 비록 룰루레몬 광고를 하루에 수십 번씩 온갖 페이지에서 보고 틈날때마다 클릭하고 있지만 말이다. 나는 이 얘기를 건너뛰고 비참하네… 중얼거렸다. 지금의 기술환경이 우리의 윤곽을 끊임없이 더듬고 이가 빠진 곳을 조물조물 채워나가기에, 나도 덩달아 원치도 않는 내 윤곽을 끊임없이 확인하게 된다. 매일 어쩔 수 없이 목격하게 되는 내 삶의 윤곽들이 어찌나 지루하고, 별 볼 일 없는지. 당장이라도 인생을 포기하고 싶다. U는 아마 언젠가는 보통의 사람들도 데이터를 취합해서 넷플릭스 스타일로 다큐멘터리를 생성할 수 있는 서비스가 나올지도 몰라, 추가로 돈을 내면, 네 주위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어서 다큐멘터리 방향에 맞게 너에 대해 심층적으로 질문해주는거지, 카메라 앞에 앉을 필요도 없어, 그냥 사진 한 장으로 영상을 생성할 수 있을테니까. 같은 소리를 하고. 나는 또 비참하네… 중얼거렸다. U는 2019년 아카데미 장편 다큐멘터리 수상작 <프리 솔로>를 내게 추천해준 사람이기도 하다. <프리 솔로>의 주인공인 등반가 알렉스 호널드의 어떤 면을 보고 나를 떠올렸다는데… 착실히 준비한 티를 팍 팍 내며, 알렉스 호널드가 엘 캐피탠을 프리솔로로 성공하는 여정을 높은 완성도로 포착한 다큐멘터리 너머, 어떤 점이? 뇌 회로 어딘가가 고장난 듯한 사람의 크고 새까만 동공? 약간 돌아있는 눈빛 같은 것? 올해 여름 U와 나는 그 시커먼 광기가 잊혀질 즈음에 넷플릭스에 공개된 < 알피니스트: 마크-앙드레 르클렉 >(이하 <알피니스트>)을 함께 보았다. <프리 솔로>와 다르게 주인공 마크-앙드레 르클렉을 전혀 치밀하게 포착하지 못하고 줄곧 어딘가가 기운 채로 나아가는 이 작품을, ‘사사로운 영화 리스트’에 넣을 작품으로 제일 먼저 정한 것은, 왜긴, 결과는 엉성하게 남은 것들을 어떻게든 오므리며 애를 쓰다 끝난 꼴이지만, 그게 좋았으니까? 공동감독 중 하나인 피터 모티머는 한 화상 인터뷰에서 <알피니스트>를 통해 재야에서 믿기 힘든 등반에 연이어 성공한 마크-앙드레 르클렉을 조명하고 세상에 알리고 싶었다고 밝힌다. 지독히도 뻔하고 지루한 이유에서 시작한 작품이긴 하지만, 피터 모티머는 또 어떤 인터뷰에선 본 뜻과는 다르게 흘러가버린 상황을 유연하게 받아들인 듯, “… 이 영화의 문제는, 어떻게 이 유령같은 1) 마크의 성격을 포착할 수 있느냐는 것이죠. 우리가 그것을 포착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었습니다. 그가 얼마나 우릴 신경 쓰지 않는지… (… the question of the film is, how do you capture Marc's personality, this elusive thing? And there was kind of no better way to capture it than by showing how we couldn't capture it. How he didn't care about us…)” 2) 라고 말하기도 한다. 다소 상충할 수 있는 두 얘기가 모두 영화에 고스란히 반영된 것이 이 영화가 어딘가 찌그러진 듯한 느낌을 주는 가장 큰 이유다. 영화의 전반부는 ‘세간의 인정을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산만을 기백있게 오르는'에 초점을 맞춰 그럭저럭 다큐멘터리를 이끌어가지만, 절반이 되기 전 쯤 마크-앙드레 르클렉이 종적을 감춘 뒤 부터는 처음의 욕심을 놓은 것이 명백하다. 그래서 별로였다는 것은 아니고, 두 감독이 돌연 마크-앙드레 르클렉은 지 맘대로 하니까 사랑스럽지 않냐고 하는 부분처럼, 영화도 사랑스러워진 것 같아. 맞아, 나는 그 부분이 특히 귀엽고 좋았는데, 그냥 제 영화보다 마크-앙드레 르클렉을 더 사랑하는거 같아서 웃기고 좋았어. 돌아온 마크-앙드레 르클렉은 감독들에게 어떤 등반을 프리솔로로 처음 도전할 때 이를 촬영하는 것은, 아무리 각별히 신경써서 준비하더라도 그 자체로 경험이 달라지기 때문에 허락할 수 없다는 말을 전한다. 앞으로 촬영할 모든 등반이 새로운 도전이 아닌 이미 성공한 프리솔로잉을 재연하는 (감독들 입장에선) 다소 김이 빠진 채로 흘러가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내내 마크-앙드레 르클렉의 등반 자체에는 각이 잘 안 선 것 같아 <프리 솔로>와는 다르게 긴장감도 크게 만들어내지 못했고. U는 두 감독이 <프리 솔로> 같은 것을, 혹은 <프리 솔로>보다 더 짜릿한 것을 만들고 싶었던 것 같냐고 내게 물었다. 당연한 거 아냐? 그래도 내 생각에 <알피니스트>는 투명한 맛이 있어. 감독들이 하나도 숨기질 않았어. <알피니스트>는 <프리 솔로>의 주인공 알렉스 호널드가 자기보다 쩌는 등반가로 마크-앙드레 르클렉을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하지. 심지어 그 인터뷰 음성 뒤로 깔린 영상은, 영화 후반부에 홀연히 사라진 마크-앙드레가 로브슨산 엠퍼러 페이스를 성공하고 돌아와서 그걸 재연한 촬영본을 아무런 설명없이 쓰잖아. 그래도 사람들이 기대하는 비장함과 긴장감을 만들어내려고. 맞아. 영화는 이리저리 고군분투했지만, 마크-앙드레 르클렉이 다른 등반에서 눈보라에 사망함으로써,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마무리 된다. 결국 피터 모티머 감독의 인터뷰처럼 결국 마크-앙드레 르클렉을 포착하지 못한 채로 끝난 것이다. 아마도 피터 모티머, 닉 로잔 두 감독은 너무도 희미하게 흩어진 마크-앙드레 르클렉의 초상을 그대로 내놓고 싶었을 것이다. 마크-앙드레 르클렉의 사망 후 편집됐을 <알피니스트>는 텅 빈 곳들을 적당한 풋티지, 모션그래픽 영상, 방향 없이 수집된 여러 진술 등으로 채우고 있다. 나레이션을 맡은 피터 모티머는, 마크-앙드레 르클렉에게서 어떠한 구체적인 답도 찾지 못한 상태에서도, 등반가이기도 한 자신의 오랜 질문인 등반의 본질에 대한 것에서 이 영화가 시작되었다는 말로 영화를 시작하고, 그게 이 허술한 영화를 근사하진 않더라도 사랑스럽게 만든다. 망한 다큐멘터리, 만세! U, 나는 올해 내내 가까운 모든 사람들이 너무도 구체적이라고 느껴져서 힘들었어. 어떤 누구에 대해서, 어떤 것도, 단 하나도 궁금하지 않았어. 내 자신에 대한 것 마저도. 답답하고, 앞으로 차에 치일 일은 없을 것만 같아서. U는 뇌의 회로가 하나 고장난 사람처럼 텅 빈 새카만 눈빛을 하고선, 내 말은 못 들은 척 한 채 의뭉스럽게 군다. 만약 마크-앙드레 르클렉이 조금 더 오래 살아서 등반했다면, 영화는 달라졌을까? 내가 그에 대해 답하기도 전에 U는 덧붙인다. 마크-앙드레 르클렉은 어제 산에 올랐다. 마크-앙드레 르클렉은 오늘도 산에 오른다. *** 1) 넷플릭스는 <알피니스트: 마크-앙드레 르클렉>에서 'elusive'를 '유령 같은'으로 번역한 적이 있다. 2) Capturing the Elusive: an interview with Peter Mortimer and Nick Rosen, "What If Cinema...", 2022.
베킷과 베케트, 서로 다르게 번역되었지만 두 이름의 철자는 Beckett로 동일하다. 베킷은 누군가의 이름, 베케트는 누군가의 성이다. 성의 자리에 놓이든 이름의 자리에 놓이든 사람들은 그를 베킷 혹은 베케트라 부른다. 영화 <베킷>의 주인공은 베킷이다. 문득 베킷(존 데이비드 워싱턴)의 풀 네임이 궁금해졌다. 베킷이라는 이름과 어울릴만한 성은 아무래도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연인 에이프릴(알리시아 비칸데르)도, 낯선 미국 대사관 직원도 그를 베킷이라 부른다. 그의 이름은 퍼스트 네임과 라스트 네임이 따로 존재하지 않고 닉네임처럼 베킷이라는 두 음절로만 이뤄진 것 같다. Beckett은 작가 사뮈엘 베케트의 이름이기도 하다. 사뮈엘 베케트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줄여 부를 때는 베케트라고 지칭한다. 베케트가 영미권 학계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는 넷플릭스 드라마 <더 체어>(2021)를 보면 미루어 알 수 있다. <X 파일>의 배우 데이비드 듀코브니가 자신을 연기하며 특별 출연한 에피소드에서 베케트의 이름은 예기치 않게 등장한다. 유명 배우인 듀코브니는 교수직를 얻기 위해 오래전에 쓰다만 박사논문을 유물처럼 발굴하는데 그것이 바로 베케트에 관한 논문이다. 이는 예일대 영문학과 박사학위를 밟던 듀코브니의 실제 경험을 반영한 것이다. 업데이트되지 않은 교수들에게 관대한 제스처를 보이던 학과장 김지윤(산드라 오)은 듀코브니와 그의 화석과도 같은 관심사에 대해서만은 유독 매몰차다. 초서를 향한 조앤(홀랜드 테일러)의 오랜 애정이 ‘힙한’ 것으로 재발견되었던 것과는 달리 베케트는 듀코브니와 함께 유행이 지난 이름이 되어 조용히 퇴장한다. <베킷>은 마치 고대 유적지 근처를 탐사하는 듯한 영화다. 두 연인이 누운 침대 곁에 놓인 메모에는 ‘신탁은 무엇이었는가’라는 도무지 그 맥락을 짐작할 수 없는 글이 적혀 있다. 도망자 베킷이 몸을 숨기거나 달아나는 장면에서 그를 든든히 지켜주던 바위산은 현지 로케이션이 비현실적인 무대 혹은 하나의 캐릭터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양봉하는 부부와 사냥꾼 등 베킷이 만난 마을 사람들은 어딘가 고전적인 모습을 하고 있으며 이것이 시대를 초월한 이야기라고 상상하게 한다. 영화는 주인공의 이야기를 전개하는 배경으로 장소를 캐스팅한 것이 아니라 장소를 먼저 캐스팅한 뒤에 그 공간을 잘 보여주기 위한 방편으로 누군가가 끊임없이 걸어서 이동하는 이야기를 만든 것 같다. 베킷은 추격전 도중 누군지 알 수 없는 사람들에게 공격당하는데, 이때 주로 공격당하는 부위는 손과 팔이다. 끊임없이 도망가야 하는 그의 운명을 알려주듯 어떤 상황에서도 다리만은 별다른 상처 없이 멀쩡하게 남겨진다. 주로 손 부위에 상처가 집중된 상황은 그에게서 운전대를 박탈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손의 한계로 인해 그는 탈 것으로 이동하는 대신 두 발로 걷거나 위험을 무릅쓰고 대중교통을 이용하거나 누군가가 운전하는 차 트렁크에 숨은 채 이동해야 한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딱 한 번 오토바이를 빼앗으려 하지만, 매몰차게 밀린다. (영화에서 누군가의 탈 것을 빼앗는 것쯤은 절로 이뤄진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카체이싱 혹은 공중전 같은 속도에 바탕을 둔 추격전이 대세인 상황에서 두 다리로, 그것도 때론 손이 포박된 채 어설프게 뛰는 도망자를 보는 일은 누군가에게는 지루하게 느껴질지 모른다. <베킷>이 넷플릭스에 공개된 후 그리 긍정적인 반응을 얻지 못한 데는 추격전이라는 장르적인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한 탓이 크다. 여행 중 불미스러운 사고로 연인을 잃은 뒤 이유도 모른 채 쫓기는 신세가 된 상황은 추격전의 전형적인 세팅이다. 그러나 이후에 벌어지는 이야기는 관객이 기대하는 바로부터 멀리 도망친다. 어쩌면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되었다는 것이 잘못 끼워진 첫 단추가 아니었을까 싶다. 안락한 오락 영화를 바랐을 관객에게 영화는 어딘가 애매한 결과물처럼 보인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넷플릭스 영화라는 모종의 바운더리 안에서 그렇고 그런 영화가 되는 대신 이상한 실패작으로 남을 수 있었다. <베킷>은 추격전에 기반을 두고 있지만 장르 영화는 아닌 조금 이상한 영화다. 이상함은 첫 장면부터 감지된다. 영화 초반 드러나는 베킷과 그의 연인 에이프릴의 여행은 어딘가 스산하다. 이 드넓은 여행지에 마치 두 사람만 존재하는 것 같다. 물론 주변에는 다른 여행객이 있다. 그러나 타인과의 접촉은 일어나지 않는다. 연인은 여행객들을 몰래 관찰하면서 그들의 이름과 관계를 추측하는 둘만의 게임을 벌인다. 나는 필시 여행객과 접촉해 추측이 맞는지를 확인하는 작업이 뒤따를 것이라 예상했다. 아니었다. 두 사람은 사진을 찍은 뒤 그곳을 빠져나온다. (후에 혼자 남은 베킷이 사람들과 접촉하는 모습은 초반의 에이프릴과 함께 한 게임 장면을 연상시킨다. 베킷은 이제 어떤 사람이 믿을만한지를 혼자서 끊임없이 판단하고 행동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식당에서도 손님은 둘 뿐이다. 가게 주인이 스치듯 카메라에 포착되긴 하지만 그와 대화하거나 접촉하는 장면은 배제된다. 식당 TV에는 훗날 베킷이 연루될 유력 정치인의 조카 실종 사건과 관련한 뉴스가 보도된다. 이것은 관객을 위한 복선처럼 보이지만, 실은 베킷이 사건에 연루되는 과정에 운명과도 같은 힘이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베킷은 기차를 타고 이동하던 중 자신을 좇던 그리스 경찰에게 발각된다. 이때 양손을 앞으로 모은 채 끈으로 묶인 상태가 된 베킷은 경찰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뒤에도 얼마간은 그 상태로 다닌다. 그의 손은 기도하는 손 모양을 연상시킨다. 그의 여정이 자신의 과오로 죽은 에이프릴을 향한 일종의 길고 긴 고행일 수 있음을 보여주는 동작이다. 동시에 기도하는 손은 아테네에서 대규모 집회가 일어나는 장소를 가리킨다. 이처럼 개인의 슬픔과 애도는 정치적인 상황으로 곧장 연결된다. 베킷이 사람들에게 떠밀려 데모하는 군중과 합류하는 장면은 <모던 타임즈>(1936)에서 찰리 채플린이 얼떨결에 시위대의 선봉에 서는 장면과 겹친다. 찰리의 우연한 시위는 그가 파업과 무관하지 않은 인물이기에 절묘하다. 베킷의 여정 역시 블랙 코미디로 만들어졌다면 지금보다 납득 가능했을지 모르겠다. 베킷은 영문도 모른 채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들을 피해 살아남았고 결국에는 정해진 운명처럼 유력 정치인의 납치된 조카를 구하는 임무를 수행한다. 운명은 우연의 다른 말이다. <베킷>은 지나치게 우연적이며, 다른 말로는 지나치게 운명적이다. 다시 베킷이라는 이름을 생각해본다. 퍼스트 네임도, 라스트 네임도, 그렇다고 애칭도 아닌 하나의 이름으로 온전한 것은 신의 이름이다. 제우스, 헤라, 아테네, 헤르메스... 이 목록에 베킷을 넣을 수 있을까. 그렇다면 왜 베킷인가. 베케트의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고도는 그 자체로 오지 않는 신을 지칭한다. 고도를 기다리던 두 주인공은 고고와 디디라는 다른 이름이 있는데, 두 이름을 합치면 곧 신(god)이 된다. 베킷 혹은 베케트가 신의 이름이 된다면 그 이름의 의미는 아마도 ‘어떻게든 버티는 자’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