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씨의 하루
- 감독
- 박정훈
- 제작년도
- 2007
- 출연
- 김은천, 박현철, 강방식, 김재천, 박시범, 박성배, 김세헌, 이민숙, 정성훈, 정병원, 권미경
정부 혹은 어딘가의 비밀조직에서 위험한 실험을 한다. 유전자조작을 통한 살인병기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하지만 사고가 일어나 탈주자가 생겨나고 실험은 중단된다. 도망친 아이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들은 어떤 짓을 하게 될까? 식상할 정도로 영화와 만화에서 많이 본 설정이다. 마블과 DC가 최고의 인기 장르가 된 지금은 대중적으로 친숙하다. 하지만 장르에서 익숙함이란 장점이 되기도 한다. 관객에게 익숙한 공식을 제대로 활용하면 몰입감이 높아지고, 맘 편하게 즐길 수 있는 놀이터가 된다. 너무 뻔하고 단순한 설정과 캐릭터와 플롯이라도 제대로 긴장감을 유지하고, 적절한 리듬을 유지하며, 확실한 볼거리를 만들어준다면 관객은 만족한다. 박정훈 감독의 <마녀>도 익숙한 설정으로 시작한다. 기억을 잃고 실험실에서 도망친 자윤은 고등학생이 되었다. 부작용으로 두통에 시달리며 가끔 의식을 잃기도 한다. 축산물 가격이 폭락하고 엄마가 치매를 앓는 상황에서 자윤은 오디션 프로그램에 출연한다. 상금이 필요했다. 이후는 설명 안 해도, 영화를 보지 않아도 알 것이다. 자윤의 정체를 알게 된 누군가가 찾아온다. 친구를, 가족을 위협하고 마침내 자윤은 각성한다. ‘ㅇㅇㅇ 비긴즈’의 스토리는 거의 유사하다. 비밀이 있는 아이가 성장하면서 위기가 찾아온다. 이미 힘을 각성한 상태에서 어떻게 자신의 정체를 세상에 드러낼 것인가 고민하는 슈퍼맨 타입이 있다. 어느 날 갑자기 얻게 된 힘 때문에 흔들리는 스파이더맨 유형도 있다. 자윤은 어느 쪽일까. 아무 정보 없이 < 마녀 >를 보게 되었다면 후자에 가깝다고 생각할 것이다. 자윤은 기묘한 마술을 부릴 정도의 특이 능력이 있지만, 신체적 능력은 오히려 허약에 가까울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언젠가 각성을 하면 엄청난 파워를 보여주면서 고민에 빠질 것 같았다. <마녀>는 지나칠 정도로 전반부, 각성 이전에 심혈을 기울인다. 그리고 각성 이후를 보면서 알게 된다. 왜 지루할 정도로 자윤의 일상을 보여줄 수밖에 없었는지. 단순히 반전을 위해서가 아니다. 장르의 공식에 익숙한 관객이라면 반전이 온다고 뻔히 예상한다. 하지만 박훈정 감독은 예상할 만한 반전을 틀어버린다. 좋은 연주가 되려면, 스탠다드를 반드시 자신의 방식으로 변주해야 한다. 반전에서 자윤이 내던지는 말 ‘솔직히, 기대 이상이네.’는 이미 반전을 예상하며 보던 관객들에게서 동시에 터져 나올 법한 말이다. 이미 영화가 개봉한지도 오래이니 스포일러를 하자. 자윤은 기억을 잃은 적이 없었다. 자신의 절대적 힘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스스로 부작용을 치료할 때까지 감추고 있었을 뿐이다. 하지만 불가능했고, 시간이 없다는 것을 알기에 그들이 찾아오도록 자신을 노출했다. 모든 것을 계산하고, 모든 것을 압도할 수 있다고 믿고 있기에 선택한 결과다. 그렇기에 <마녀>의 최고점은 단연 캐릭터에 있다. 전반부에 지루하게 설명하며 쌓아왔던 자윤의 캐릭터는 전혀 무너지거나 흔들리지 않고 반전을 맞이한다. 두뇌도, 육체도 절대적으로 우월하기 때문에 자윤은 남이 보기에 지루한 일상을 살아온 것이다. 자윤은 남친도 없고, 여성으로서의 욕망을 딱히 부여되지 않는다. 그럴 필요가 없다. 자윤의 목적은 너무나도 확고하고, 낭비할 이유가 전혀 없으니까. 평범한 단발에 넉넉한 교복 재킷 안 후드를 입은 소녀는 그것만으로도 너무나 매력적이다. 그녀의 힘을 알게 된 후에도, 그녀의 이미지는 변색되거나 흩어지지 않는다. 자연스럽게 모든 이미지가 수렴된다. 자윤은 자신의 이미지를 능수능란하게 결정할 수 있고, 타인의 시선에 흔들리지 않는다. 그리고 중요한 점이 있다. <마녀>는 젊은 관객에게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다. 10대와 20대는 슈퍼히어로물에 아주 익숙하다. 만화적인 영웅 서사도 좋아한다. 이미 익숙한 이야기를 한국 배경으로 친숙한 배우들이 연기하는 영화를 원하는 것은 당연한 순서다. 그런 점에서 <마녀>는 한국형 슈퍼히어로물의 출발점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게다가 자윤의 캐릭터는 지금 한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영웅이라고 할 절대강자다. 황비홍을 연상하기도 했다는 자윤은 그야말로 압도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다. 마음만 먹는다면 누구도 자윤에게 손끝조차 댈 수 없다.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최강의 캐릭터를 먼치킨이라고도 한다. 일본에서도 <원펀맨> 같은 최강 캐릭터가 인기를 얻고는 있지만 한국에서는 그야말로 압도적인 호응이다. 과거처럼 보통 사람이나 약자가 노력을 하고, 기연을 얻고, 스승을 만나 절대강자로 성장하는 이야기는 크게 인기가 없다. 시작하자마자 주인공은 절대강자이고 상대를 박살내는 이야기가 인기다. 사회에서 노력과 운만으로 성공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해졌다는 것을 알게 된 세대의 판타지라고나 할까. <마녀>의 후반부는 심플하고 강렬하다. 각성하는 순간, 정확하게 말하자면 자윤이 본색을 드러내는 순간 모든 것은 결정된다. 누구도 자윤에게 대적할 수 없고, 누구도 능가할 수 없다. 자윤의 액션들은 멋지고 설득력이 있다. 어떻게 귀공자와 긴 머리 같은, 비슷한 살인병 기들을 제압하는지 충분히 보여준다. 하지만 아쉬운 점도 분명하게 있다. 귀공자 팀과 미스터 최의 액션 장면들은 요령부득이다. 자윤만큼은 아니어도 압도적인 능력을 지닌 귀공자와 긴 머리 등은 미스터 최가 동행한 특수부대와 맞붙는다. 총을 겨눈 상대와 맞서도 전혀 밀리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이 압도적인 힘을 가졌다고 해서 아무 방어 없이 신체를 총탄에 노출시키고, 무작정 달려드는 것은 어처구니가 없다. 귀공자 팀이 조금만 머리를 쓴다면 얼마든지 특수부대를 완벽하게 제압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대체 왜. 미스터 최 역시 특수부대를 대동한 것 이외에는 별다른 대책을 마련하지 않았다. 무기도 특별하지 않다. 과거에 자신이 제압했던 아이들이라고 여전히 믿고 있는 것일까? 자윤은 물론이고 귀공자나 긴 머리조차도 일 대 일로 붙으면 처참하게 박살 날 것으로 보이는데도. 자윤의 액션은 탁월하지만 다른 캐릭터들의 행동과 액션은 그저 하나둘씩 붙는 대결을 위해서 조작된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자윤의 각성 후 벌어지는 액션들은 충분히 흥미롭고 짜릿하지만 논리적으로는 너무 뒤죽박죽이다. 자윤이 없는 액션들은 전반부 이상으로 지루하다. 박훈정 감독은 ‘인간이 선하게 태어나서 악하게 변해 가는지, 악하게 태어나서 선하게 변해 가는지에 대해 항상 의문’이 있었다고 한다. 아직 <마녀>에서는 알 수 없다. 이제 자윤이 자신의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을 뿐이니까. 그녀가 폭주할 것인지, 이성적으로 악을 처단하고 정의를 구현할 것인지 알 수 없다. 아니 이미 그런 선택 자체가 너무 고루하고 뻔해졌다. 할리우드 슈퍼히어로물에서도 이미 보고 있는 권선징악의 작은 변주를 한국형 히어로물에서도 반복 학습하고 싶지는 않다.
임권택 감독 연출로 1984년 <비구니>는 태흥영화사의 창립 작품이 될 뻔했던 영화, 걸작이 될뻔 했던 영화, 불교계의 반대로 제작중단이 된 군부정권 시절 비운의 영화다. 그런데 당시 송길한 작가의 각본 170여 장면 중 약 1/5 분량 촬영이 끝난 상태로 유실됐던 필름은 2014년 태흥영화사 창고에서 발견됐고, 그 후 한국영상자료원과 전주국제영화제 (이하 JIFF)의 협업으로 39분 길이의 본편으로 복원, 편집됐다. JIFF는 송길한 작가 특별전의 일환으로 관계자 인터뷰 위주의 24분 길이 다큐멘터리도 제작했고, 지난해 본편과 함께 제18회 JIFF 관객과 만날 수 있게 했다. 발굴, 복원된 필름은 편집이 전혀 안 된 16mm 러시 필름이었고, 사운드는 아예 없었다. 박홍렬 촬영감독이 생필름 촬영본을 편집했고, <비구니> 촬영을 맡았던 정일성 촬영감독이 색보정을, <취화선> 등의 작품에서 정일성 촬영팀의 일원이었던 박정훈 촬영감독이 편집과 다큐멘터리 연출을 맡았고, 김영진 JIFF 수석프로그래머가 인터뷰들을 진행했다. 올해 봤던 <비구니>가 인상에 남은 것은 제작 중단으로 실현하지 못했던 가능성에 대한 아쉬움이나 표현의 자유 보장의 필요성에 대해 시사하는 점 때문만은 아니다. 발굴돼서 복원, 편집된 작품 자체가 사운드 없이도 강렬하기 때문이다. 원숙한 김지미 배우의 연기는 무성영화 시절 표정, 자태, 몸짓만으로도 거의 모든 것을 전달하던 배우들처럼 공명한다. 대사는 안 들리지만 그녀의 눈빛만 봐도 극적인 갈등과 욕망, 염원이 충분 느껴진다. 또한 작가, 감독, 촬영감독이 함께 로케이션 헌팅부터 해서 영감을 얻은 후 시나리오 작업을 한 만큼, 장면 하나하나의 압축된 구성 또한 눈여겨볼 만하다. <비구니>는 임권택 감독과 송길한 작가가 1981년 작 <만다라>로 개인 수련을 중심으로 한 소승적 불교 수행에 대한 이야기를 한 것에 이어, 새로운 영화로 ‘중생과 더불어 밝음을 지향하는 대승적 수행’을 그려내고자 한데서부터 시작됐다고 한다. 주인공이 세속적인 집착과 번뇌에서 벗어나 마침내 큰 스님이 돼가고 ‘스스로 자기를 완성하는 과정’의 이야기에 매력을 느꼈다고 송길한 작가는 전한다. 마침 그 당시 연기의 전환점을 찾던 김지미 배우도 이 영화 공동기획으로 참여했고, 삭발, 노출, 그리고 영하 12도의 추위에도 물속으로 뛰어드는 등 전심전력을 다 했다. 애초에 제작 의사도 표시했지만, 임권택 감독은 대규모 예산에 안정적인 프로덕션을 꾸려줄 회사의 필요성을 느꼈다고 한다. 그래서 극장 흥행사에서 영화제작으로 활동영역을 넓혀 나가려던 이태원 사장은 국제영화제에서 활약을 기대할 수 있는 <비구니>를 태흥영화사 창립 작품으로 하기로 했다. 이렇게 야심 차게 꾸려진 <비구니>는 1984년 3월 13일 문공부와 영화진흥공사에 제작신고를 했으나, 3개월 후 결국 제작 포기를 하게 됐다. 시나리오 작업할 당시 불교계에서는 자문과 고증을 도왔음에도 막상 대본을 전달받은 조계종에서는 불교를 모독할 우려가 있음을 표명하며 문공부에 제작중지 요청 공문을 보냈다. 태흥영화사와 임권택 감독, 송길한 작가는 조계종 사회부와 만나 대화를 나누고 대본을 수정하는 등 “수준 높은 불교 영화를 만들 수 있도록 협조 요청”을 했으나 종단에서는 불교의 성역을 영화화하는 것 자체를 반대한다고 했다. 주인공이 비구니로 입산 후 속세에서의 사랑과 번민을 회상하는 장면이나 전쟁 통에 고아들을 피난시키기 위해 트럭 운전사에게 몸을 준 것 등을 문제 삼았다. 그리고 결국 제작중지 궐기대회에, 법원에 제작중단 가처분 신청까지 이어 나갔다. 그런데 이때 조계종 전국 비구니 대표자 회의가 내놓은 요구 사항은 한번 살펴볼 만하다. 다음과 같다. 1. 불교재산관리법을 철폐하라. 2. 10.27 불교법란을 정부는 공개 사과하라. 3. 불교 탄압을 중지하라. 4. 국영방송과 기독교인은 공개 사과하라. 5. 극영화 <비구니> 제작을 중지하라. 사실상 <비구니> 관련된 것은 다섯 가지 요청 사항 중의 하나밖에 안 되는데, 심지어 순위도 맨 마지막이다. 여기서 ‘불교법란’은 전두환 정권 초기 1980년 10월 27일 전국의 사찰 및 암자를 수색하고 스님들과 불교 관련자들을 대거 연행하고 고문한 사건을 일컫는다. 불교계는 이런 치욕과 탄압에 분노하다가 영화 <비구니>가 나타나면서 마침 기폭제를 만난 것으로 보인다. 이때쯤 당국에서도 제작자 이태원을 만나 제작을 포기하라며 설득과 회유를 시도했다고 한다. 법원에 가처분 신청 변론과 심문이 진행되는 가운데 데모하던 비구니들이 전경에 맞서다가 다치기까지 했다. 이에 제작자는 사회적 물의가 너무 크다고 판단하여 제작을 포기하기로 했다. 이전에 대본 수정과 함께 제목이 <수연 비구니>로 바뀌어 있었던 영화에 대한 제작신고를 ‘자진 취하’하는 문서를 6월 13일 문공부에 접수하는 것으로 사건은 일단락됐다. 제작비 2억여 원을 날린 태흥영화사도 그랬지만, 임권택 감독, 송길한 작가, 김지미 배우 등 모두가 열과 성을 다해 임하고 있었던 작품이 중단되자 충격을 못 이기고 일정 기간 창작 의지를 상실하게 됐다고 한다. 물론 그 이후에 다시 작품 활동들을 하게 됐지만, 당시 타격이 컸다고 증언한다. 그리고 관계자들은 ‘그때는 우리 영화인들이 힘이 없어 접었지만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영화 안팎에서 표현하고 있다. 어쨌든 30년이 흐른 후, 창고에서 16mm 러시 필름이 나왔다. 시나리오의 1/5 분량밖에 촬영하지 못한 것이라 아무래도 원래 대본에서 빠진 것이 많고, 사운드가 없어서 가끔 보이는 것과 들리는 것이 서로 다른데 중첩될 때 나타날 수 있는 영화적인 효과를 놓치게 되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또 배우들의 소리 없는 모습에서 전달되는 것도 많다. 시작 장면에 수경이 민간인 복장으로 산사로 걸어 들어갈 때 애인쯤 돼 보이는 남자가 얼굴과 발걸음만으로도 ‘정말 이래야만 하겠어?’ 하는 안타까움과 답답함 표현하며 동행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수경은 절에 들어가 추운 날 나무도 해 가고 냇물에서 빨래도 하는 등 행자 생활을 하다가 이윽고 장엄한 삭발식을 치른다. 전쟁이 시작되면서 군용 앰뷸런스에 타고 가는데 아까 본 남자가 도와주다가 뭔가 엄청난 소식을 전달하면서 떠나고, 비구니는 눈물과 번민에 주저앉기도 한다. 스크린 위의 영상이 펼쳐지는 동안 정적을 깨는 듯한 것들이 가끔 있다. 분명 사운드는 없다. 그렇지만 김지미 배우의 숨소리가 들리는 듯한 순간들이 있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어머니 집을 찾아가 원삼을 받아 입고 돌아가신 줄도 몰랐던 어머니 무덤에 삼배한 후, 시집갈 때 입으라고 지어주신 그 옷과 함께 집착을 불태워버리려 할 때 불꽃 타오르는 소리가 들리는 듯도 하다. 대규모 전쟁 장면에서 폭파의 진동이 느껴지는 것 같은 착각도 든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이 전쟁 피난길 장면들인데, 최근에 나온 스펙타클한 CG 전쟁영화들과는 좀 달리, <비구니>는 폭격의 불길과 먼지와 연기 속을 고되게 뚫고 나가야만 하는 인간상들이 인상적이다. 임권택 감독은 1936년생으로 한국전쟁이 터졌을 당시 이미 십 대였고, 정일성 촬영감독은 1929년생으로 심지어 군 복무 중이었다. 그래서인지 화면에 묻어 나오는 인간성이 다른 듯하다. 피난민의 절박하거나 훈훈한 얘기들 외에도 난리 통에 기회주의적으로 실속을 챙기려고 하는 나쁜 사람들도 있을 수 있다는 암시 아닌 암시가 처음부터 떠오르기도 했다. 수경은 가족 잃은 꼬맹이 여섯 명을 챙기며 피난을 가다가 화물 트럭 운전사에게 도움을 청하지만 그는 단호히 거절한다. 책임감을 느끼고 끈질기게 호소하는 비구니를 순간, 운전사는 음흉한 눈빛으로 보게 된다. 그리고 문제의 협상이 이뤄진다. 아이들을 구하려면 원하는 대로 해달라. 사운드는 없지만 무슨 얘기가 오가는지, 비구니가 무슨 고민을 하는지, 그리고 추위에 떠는 꼬맹이들을 보며 어떻게 결심을 하게 되는지 너무도 뚜렷하게 보인다. 그녀는 폐허에 이끌려가 일을 치르고 와서는 아이들을 트럭에 실어 떠나 보내고 횡 하니 서있는다. 이윽고 눈 덮인 냇가에 가서 아랫도리를 씻는데 얼굴 클로즈업이 되면서 마치 감정에 북받쳐 나온 것처럼 영화에서 기대치 않은 음악이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아주 미니멀한 우리 소리가 눈발을 맞으며 땅을 치면서 우는 수경의 모습 위로 흐른다. 정적 속에 마치 귀가 막혔다가 트이는 것 같은 느낌이 흡사 개도나 카타르시스를 얻는 것 같은 느낌 같기도 하다. 마침내 수경은 옷을 다 풀어헤치고 알몸으로 물속에 몸을 던진다. 그리고 거기서 나오지 않고 후두두 떨면서 기도한다. 목숨을 건 김지미 배우의 과감하고 단호한 선택이었다. 정일성 촬영감독의 말 대로 촬영 당시 영하 12도의 날씨면 심장마비로 죽을 수도 있는 상황에 그 기도 하는 모습이 연기만은 아닌 것처럼 보인다. 이렇게 목숨까지 건 영화 창작이 그렇게 암울한 시절 중단됐다는 것은 잊혀서 안 될 일이다. 영화제 관계자나 영화 학자, 애호가들뿐만 아니라, 아키비스트, 사회학자, 민속지학자, 박물관 관계자 등이 관심을 갖고 상영 및 포럼을 기획해도 좋을 것 같은 작품이다. 영화의 이해를 도울 수 있다면 무성영화 시절 사용했던 것 같은 인터타이틀 삽입도 고려해볼 만할 것 같다. JIFF는 특별전에 맞춰 『작가 송길한』이란 책에 인터뷰, 기사, 사진 자료 등을 비롯해 영화 <비구니>의 시나리오 전편도 수록했다. 이 글을 쓰는 데에도 참조가 많이 된 것으로 감사하게 생각한다. <비구니> (JIFF 2017 편집 본)에 들을 수 없는 대사와 미처 다 찍지 못해 볼 수 없는 일제강점기부터 시대를 관통하는 이야기와 원래의 엔딩 등 더 많은 것이 궁금한 사람들에게 이 책을 추천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