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낌없이 주련다
- 감독
- 유현목
- 제작년도
- 1962
- 출연
- 이민자, 신성일, 허장강, 엄앵란, 방성자, 이상사, 안성기, 곽규석, 김년수, 이대엽, 강미애, 남미리, 김신재, 이재헌, 박옥초, 독고성, 박종화
< 연산군: 장한사모편 >(이하 <연산군>)은 제1회 대종상에서 최우수작품상, 남우주연상( 신영균 ), 여우조연상( 한은진 ), 촬영상 등 여덟 개 부문을 휩쓸었으며, 이후 신상옥 의 대표작 중 한편으로 거론되기도 한다. 그런데 정작 신상옥은 자서전 <난, 영화였다>의 한 페이지에서 이 작품을 두고 쓴소리를 길게 써두었다. 그게 어느 정도이냐면, 자신이 북한의 감옥에 있을 때 남한의 형에게 몰래 보낸 편지에 ‘<연산군>의 원판을 찾아서 불살라 버리라’고 부탁했다(<난, 영화였다>의 82페이지). 아마도 이 영화의 제작 과정에 얽힌 불만이 반영된 게 아닌가 싶다. 2개월 만에 찍어 1962년 신정(1월 1일)에 상영된 <연산군>이 흥행에 성공하자, 흥행업자들이 구정(설날)에 맞춰 속편인 < 폭군 연산: 복수, 쾌거편 >(이하 <폭군 연산>)을 내놓으라고 극성을 떨었다고 한다. 그래서 놀랍게도 1개월 만에 <폭군 연산>을 만들어야 했으니 창작자로서 별로 기분이 좋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렇다고 해서 <연산군>과 <폭군 연산>을 급조된 그저 그런 작품일 것이라고 예상했다간 큰코다친다. 신필름 설립 후 < 춘향전 >(1961)이 거대한 성공을 거두고 <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1961)가 국내외에서 호평을 얻은 1961년, 신상옥은 본격적인 궁중 사극을 계획한다. <연산군>은 여러 면에서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와 대조를 이룬다. 촬영과 미술 등의 규모는 입이 벌어질 정도로 엄청나며, 신필름의 위세를 증명하듯 당대의 유명 배우들이 모두 출연해 영화의 곳곳에 배치되었다. 심지어 중전 역할의 최은희조차 <연산군>의 초반과 <폭군 연산>의 후반에 잠시 나오는 게 전부일 정도로 배우들의 면면이 화려함의 극치다. 장담하건대 지금껏 만들어진 어떤 한국영화에서 이보다 더 대단한 주연급 배우들이 총출동한 예를 찾아보기 힘들다. 박종화의 <금삼의 피>를 원작으로 삼았는데, 신상옥의 연작에 대한 평가와 별개로 두 작품이 이후 만들어진 연산군 영화에 끼친 영향은 따로 말할 것도 없다. 역사 속 사건을 영화화했으므로 선점한 영화의 영향이 당연하다고 볼 수도 있지만, 이 영화의 대사, 연기, 미술 등이 하나의 기준점이 되었음은 이후의 영화들이 곧 방증하는 바다. 신상옥의 <연산군> 2부작이 보여주는 가장 큰 특징은 대하드라마 스타일의 전개 방식에 있다. 연산군 영화가 동궁 시절의 융, 즉위 이후의 사건 등을 한 편의 영화에 담으려면 대략 몇 가지의 방안 중에 하나를 취해야 한다. 몇몇 사건이나 인물에 국한해 접근하거나, 그게 아니면 아주 급박하게 전개시키는 방식. <금삼의 피>를 원작으로 삼은 이혁수 의 < 연산군 >(1987)은 연산과 장녹수의 관계에 치중했고, 임권택 의 < 연산일기 >(1987)가 연산의 심리적 측면의 묘사에 집중했다면, 근래에 만들어진 < 왕의 남자 >(2005)나 < 간신 >(2015)에서는 지나치게 폭력적이고 야만적인 인물로 비친 감이 없지 않다. 신상옥의 2부작은 전후편을 합쳐 265분이라는 상영시간이 드는 만큼 작품의 걸음걸이 자체가 다를 수밖에 없다. 인상으로 치면, 연산에 관한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받는 <연산일기>가 연극적이고 셰익스피어적인 반면, 신상옥의 연작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처럼 죄와 구원의 여정에 방점을 찍는 장편소설을 닮았다. 임권택이 조선실록에 적힌 바를 내레이션으로 삽입해 역사적 사실을 따른 것과 비교해 신상옥의 영화는 일부 허점이 품은 게 분명하다. 즉, 역사에 대한 객관적 서술에는 빈틈이 있을지 모르나, 원작 소설에 맞춰 한 인간에 대한 비극적이고 낭만적 기록으로 읽는다고 치면 또 다른 가치를 발견할 수 있지 싶다. 일례로, 영화 초중반에 짐승을 소재로 이야기를 잇는 방식이 눈에 띈다. 동궁 시절의 융이 사냥터로 떠나는 길에 거지 행색의 외조모가 길을 막는데 그는 눈치채지 못한다. 돌아오는 길에 송아지 한 마리가 다시 길에 끼어들자 신하 중 한 명이 죽여버린다. 이를 본 융은 송아지를 잃은 어미 소의 마음을 읽어 그를 죽이고 만다. 자신의 진짜 어머니가 누구인지 모르고 자랐던 그의 내면을 슬쩍 드러내는 장면이다. 신하를 죽였으나 은연중에 모정을 그리는 애처로운 인물로 묘사된 그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조금씩 비뚤어진다. 그것을 묘사하기 위해 영화는 또 하나의 동물을 등장시킨다. 성종이 중전을 위해 키우는 사슴이 있었는데, 융은 성종 앞에서 일부러 사슴에 발길질해 반감을 표출한다. 묘사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왕위에 오른 뒤 한층 성품이 포악해진 연산은 폐비 윤씨에 관한 전모를 듣고 앞서 등장했던 사슴에 창을 던져 죽어버린다. 영화는 죽은 사슴의 얼굴을 드물게 클로즈업한다. 연산과 성종의 관계가 틀어지다 마침내 선을 긋는 과정을 몇 차례에서 걸친 은유를 통해 전달하는 것이다. 자칫 영화의 속도가 느릴 거라고 여겨지겠으나, 그것보다는 섬세한 방식이라고 보는 게 더 맞을 듯하다. 다른 연산군 영화들이 사건을 전하느라 급급해 인물을 불쑥 등장시키는 경우도 잦은데, <연산군>은 다르다. 외조모인 신씨와 폐비 윤씨가 혜택을 입은 대표적 인물이다. 신씨가 거지 행색으로 도성을 돌아다니다 연산과 다시 만나는 과정에 여러 에피소드를 삽입해 감정의 리듬을 확보하고, 영화 초반 융의 꿈에 나타났던 윤씨는 후반에 통째로 시간을 부여받아 안타까운 사연의 주인공으로 화한다. 이런 것들이 쌓이고 쌓여 전달되는 감정이 두터운 진정성을 얻음은 자명하다. <폭군 연산>의 결말이 역사적 사실과 딴판이면서도 하나의 이야기로서 완결성을 구한 것도 그래서다. <연산군>이 폐비 윤씨로 인한 연산군의 슬픔을 다루면서 그에게 동정 어린 시선을 보여주는 것과 반대로, <폭군 연산>은 나쁜 왕으로서 연산군을 지속적으로 부각시킴으로써 <연산군>과 반대의 입장을 취한다. 그러던 <폭군 연산>은 결말에 이르러 전혀 색다른 하나의 플롯을 꾸민다. 사악한 행동을 일삼던 연산은 문득 자신의 죄를 깨닫고 영화 초반에 잠시 나왔다 사라졌던 중전의 방을 찾는다. 여기서 중전의 역할은 흡사 <죄와 벌>의 구원의 인물, 나타샤를 떠올리게 한다. 자신에게 내린 벌을 받아들이고 멀리 떠나가는 연산의 모습은 <광해, 왕이 된 남자>(2012)와 <무사>(2001)의 마지막 이미지와 유사한 정서를 전달한다. 일생에 걸쳐 애욕에 시달렸던 인물이 마침내 자유와 평온을 찾은 모습은 앞선 서사 전체와 맞먹는 무게를 지닌다. 촬영 시기가 한국의 산천이 지금처럼 개발되기 전인 1961년인지라 야외에서 촬영된 장면들이 여럿 돋보인다. 특히 전편인 <연산군>은 세트에서 촬영된 부분이 거의 없고, 실내 장면도 대부분 실제 궁궐 등의 현장에서 직접 찍었음을 알 수 있다. 돌아다니기를 좋아했던 연산이 말을 타고 여기저기 떠도는 장면을 보면, 배경으로 드러나는 옛 한국의 모습에 신기함을 느낄 지경이다. <연산군>은 들과 산이 펼쳐졌던 공간으로서 옛 한국을 기억하게 한다. 한 예로, 연산이 장녹수를 처음 만나는 장면의 흥취는 다른 연산군 영화들이 꿈도 못 꿀 부분이다. 근래 영화들이 인물의 심리를 드러내기 위해 클로즈업을 구사하는 것과 달리, 이 영화의 촬영은 미디엄 쇼트 이상으로 인물에게 다가가는 법이 거의 없다. 또한 와이드앵글로 넓게 퍼진 이미지를 종종 구사해 시원한 인상을 안겨준다. 전후편을 통틀어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은 영화의 내적인 스케일을 확장하는 역할을 맡는데, 어쩌면 이 부분에서 <연산군>의 단점이 두드러지게 엿보인다 하겠다. 단순하게 말해 연산군에 등장하는 배우들은 연산군 역의 신영균을 포함해 대다수가 기능적인 연기의 선을 넘지 않는다. 영화의 속도는 분명 빠르지 않은데, 인물들은 여기서 등장해 대사를 내뱉고 저기로 사라지는 데 그친다(유일한 예외가 있다면 연산의 숙부 역할로 나온 허장강일 것이다). 신상옥의 전작인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에서 보았던 넉넉하고 유유자적한 연기는 여기에 없다. 그 결과, 이야기 전체가 주는 힘이 대단하면서도 매 장면에서 인물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데는 실패했다. 신상옥이 싫어했던 부분이 바로 그것일까? 모르겠으니 짐작만 할 뿐이다. >> 연산군(장한사모편) 고화질 VOD 보러가기 <<
데뷔와 함께 세 편에 출연 황정순은 해방 전 불과 열다섯 나이에 <그대와 나>(허영, 1941)의 단역으로 스크린에 처음 얼굴을 비췄다. 이향이나 이민자와 마찬가지로 어쩌다 불려나온 반짝 출연이었다. 그러나 배우로서 첫 발을 내디딘 것은 1949년 봄 우리나라 최초의 16밀리 천연색 극영화 <여성일기>(홍성기)부터였다. 친구의 오빠(송재로)를 사랑했으나 그에게 본처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속세를 떠나 사회사업에 헌신하는 한국보육원 원장 황온순의 반생기이다. 그의 뒷얘기는 1.4후퇴 때 미공군 헤스 대령의 도움을 받아 전쟁고아들을 제주도로 실어 날은 록 허드슨 주연의 영화 <전송가>(1957)로 이어지지만, 황정순은 자신의 이름과 비슷한 황온순(주증녀)이 아닌 그의 친구로 나왔다. 이런 그녀에게 주연의 기회를 준 것은 장황연 감독의 <청춘행로>(1949)였다. 시댁의 학대에 시달리면서도 참고 견뎌내 끝내 행복을 얻는 며느리의 이야기로, 주선태(시아버지 역)의 데뷔작이기도 하다. <여성일기>에 나온 지 4개월 만이었다. 다음에는 최인규 감독의 흑산도 올 로케이션 영화 <파시(波市)>(1949)가 기다렸다. 어촌의 사내들이 즐겨 찾는 선술집 작부 김홍도 역이었다. 후배 작부(최지애)를 친동생처럼 여기면서도 돈에 팔려 다른 파시로 옮겨 가야 하는 조연급, <청춘행로>와는 전혀 다른 캐릭터였다. [사진] <청춘행로>의 한 장면 생필름을 구하기 어려워 제작비가 뛰어 오르고 여름부터 퍼진 뇌염 때문에 극장 문까지 닫히던 시기였다. 한국영화 초창기의 변사이자 배우, 해방 후 무성영화 <검사와 여선생>(1948)의 원작자이기도 한 김조성(金肇聲, 예명 춘광)도 이해 6월에 뇌염으로 사망했다. 하지만 황정순은 나라의 재난 속에서도 세 편이나 출연하는 행운을 얻었다. 30대 중반부터 시작된 노역의 멍에 하지만 불의에 닥친 6.25전란으로 그녀의 활동은 5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야 재개되었다. <왕자호동과 낙랑공주>(김소동, 1956)을 비롯한 <숙영낭자전>(신현호, 1956), <사랑>(이강천, 1957), <김삿갓>(이만흥, 1957), <봄은 다시 오려나>(이만흥, 1958), <촌색씨>(박영환, 1958), <어느 여대생의 고백>(신상옥, 1958), <인생차압>(유현목, 1958), <청춘극장>(홍성기, 1959) <육체의 길>(조긍하, 1959), <대원군과 민비>(유진식, 1959) 등 20여편이 그 산물이다. 이 시기에 <사랑>으로 제1회 한국평론가협회상 최우수여우상을 받았다. 영화계에 들어와 처음 받은 상이었다. 잇따라 <인생차압>의 이중생(김승호) 부인 우씨 역으로 제2회 부일영화상 여우조연상을 수상했다. [사진] 황정순이 부일영화상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인생차압>의 한 장면, 중앙이 배우 최남현, 우편이 유계선 <귀거래(歸去來)>(이용민)와 <박서방>(강대진)으로 시작된 1960년대는 그녀의 전성기이기도 했다. <지평선>(정창화, 1960), <주마등>(이만희, 1961), <마부>(강대진, 1961), <삼등과장>(이봉래, 1961), <서울의 지붕밑>(이형표, 1962), <한 많은 미아리고개>(엄심호, 1962), <한석봉>(이만희, 1963), <굴비>(김수용, 1963), <외아들>(정진우, 1963), <혈맥>(김수용, 1963), <성난 능금>(김묵, 1963), <잉여인간>(유현목, 1964), <육체의 고백>(조긍하, 1964), <대석굴암>(홍성기, 1964), <삭발의 모정>(강대진, 1965), <이 땅에도 저 별빛을>(김기덕, 1965), <갯마을>(김수용, 1965), <친정어머니>(김기덕, 1966), <팔도강산>(배석인, 1967), <산불>(김수용, 1967), <대원군>(신상옥, 1968), <화산댁>(장일호, 1968), <저 언덕을 넘어서>(강찬우, 1968), <부인행차>(문여송, 1969) 등 120여편이라는 양이나 질적으로 그러하다. 황정순은 이미 서른세 살 때부터 머리에 흰 칠을 하고 얼굴에 주름살을 그리며 카메라 앞에 섰다. 그보다 한 살 위인 박암의 장모 역(<인생차압>)이 그 시작이었다. 이렇게 출발한 그녀의 노역 행진은 특히 <마부>, <굴비>, <혈맥>, <갯마을>, <육체의 고백>, <산불> 등에서 빛을 내며 자신의 대표작으로 만드는데 성공했다. [사진] <외아들>에 출연한 황정순, 왼편 아역 배우는 박종화(사진제공: 김종원) <마부>의 경우는 식모(수원댁)에서 마부(김승호)의 재취로, <굴비>에서는 분가한 자식들의 냉대에도 보듬어 안는 농사꾼의 아내로, <외아들>에서는 자식을 위해 온갖 역경을 견디며 살아가는 어촌 어머니로, <혈맥>에서는 과년한 딸을 술집에 보내려 ‘신고산타령’을 가르치는 노점의 주모로, <갯마을>에서는 재가한 며느리를 따뜻하게 맞아들이는 과부 시어머니로, <잉여인간>에서는 무직인 남편을 뒷바라지하며 한 푼이라도 더 받으려 마른 동태에 바람을 불어넣는 억척스런 아내로, <육체의 고백>에서는 환락가에 군림하는 나이트클럽의 마담으로, <산불>에서는 마을에 숨어든 공비(신영균)와 통정하는 바람난 과부(도금봉)의 어머니로, <삭발의 모정>에서는 휴가 온 아들에게 따뜻한 밥 한 끼를 먹이기 위해 머리를 잘라 파는 가난한 군인 어머니로, <화산댁>에서는 처가살이하는 아들에게 냉대 받으면서도 사업 빚을 갚아주는 농촌 어머니로 각기 나타난다. [사진] <굴비>의 한 장면, 중앙이 배우 이빈화, 우편이 김승호(사진제공: 김종원) 초기에는 <촌색씨>, <자식복 돈복>(윤대룡, 1959), <모상>(박상호, 1960) 등의 경우처럼 연극 연기가 몸에 밴 오버액션의 경향이 있었지만, 60년대 초반 <혈맥>, <잉여인간> 등 일련의 문예영화에 출연하면서 한층 여과된 디테일 연기로 다듬어졌다. 일찍이 황정순을 <월급봉투>, <산불> 등 여러 영화에 출연시켜 그의 필모그래피를 빛나게 한 김수용 감독의 말처럼 ‘연기인에게 젊은 역과 노역의 구별이 있을 수 없지만 젊은 날 무대의 여왕이 은막의 노파로 전향’ (『주부생활』, 1969년 9월호 부록, 「영화와 스타 스토리」) 한 것은 의도와는 다른 운명이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