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납
- 감독
- 김송호
- 제작년도
- 2001
- 출연
- 이진봉, 노창섭, 김연호, 이송이, 김영선, 김송호, 최문준, 박형준, 정원균, 김중환, 독고다이
김소형 감독의 < 우리의 낮과 밤 >은 연인 관계인 지영과 우철이 공유하는 시공간에 대한 묘사를 통해서 두 사람의 사랑에 관해 이야기한다. 지영과 우철은 한 공간에 살면서 동거 생활을 이어가고 있지만 두 사람이 평일에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은 오전 7~8시가 유일하다. 지영은 주간에 피부마사지 숍에서 그리고 우철은 야간에 제빵소에서 일하고 있기에 사실상 두 사람이 같은 시공간을 공유하기는 힘들다. 영화는 지영과 우철의 관계가 일시적으로 어긋났다가 다시 회복되는 과정을 그리기 위해 두 사람이 일상적으로 공유하는 공간, 시간, 시선의 변화를 섬세하게 다룬다. 이 작품의 이야기를 전개하는 동력원은 지영과 우철이 맺은 어떤 약속이다. 오프닝은 잠에서 깬 지영이 막 퇴근한 우철과 함께 아침 식사를 하는 중에 담소를 나누는 모습을 다루고 있다. 그 일상적인 대화는 두 사람이 다가오는 주말에 어느 바닷가로 여행을 떠날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영화가 제시하는 일련의 정보를 통해 지영과 우철이 노동과 휴식이 단조롭게 반복되는 일상의 고리를 끊기 위해 혹은 사랑하는 사람과의 오붓한 시간을 보내기 위해 그 여행을 위해 계획했을 것으로 짐작해 볼 수 있다. 만약 두 사람이 연인과 공유할 수 있는 시간에 있어서 결핍을 느끼고 있었다면, 두 사람의 욕망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약속된 시공간을 공유하는 것이었을 지도 모른다. 플라톤의 『향연』의 한 구절을 참고하자면, 사랑은 지금 시간에 대한 욕망뿐만이 아니라 앞으로의 시간에 대한 욕망도 포함한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사람은 지금 곁에 있는 것들이 나중에도 곁에 있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우리의 낮과 밤>은 지영과 우철의 관계를 본격적으로 다루기에 앞서 그들 각자의 삶이 주변 환경에 영향을 받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영화의 전반부에는 지영과 우철이 각기 다른 공간에서 일하는 모습이 등장한다. 지영은 자신에게 피부마사지를 받으러 온 손님들을 응대하는 과정에서 감정 노동을 하며, 우철은 불안정한 노동 시간과 위험한 작업 환경으로 인해서 여러 고충을 겪는다. 영화는 두 사람의 현재에 드리워진 그늘을 자연적인 환경과 인공적인 환경의 대립을 통해 그린다. 지영의 경우 주간에 일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출근 시간대를 제외하고는 빛을 보지 못한다. 그가 일하는 피부마사지 숍은 암막 커튼으로 외부의 빛과 시선을 차단한다. 우철의 경우 어두컴컴한 야간에 일하고 있음에도 항시 인공적인 빛에 노출되어 있다. 그가 일하는 제빵소는 형광등으로 작업장 전체를 밝게 비추어 노동자들이 시간에 대한 감각을 잊어버리게 만든다. 지영이 자연적인 빛을 가로막은 인공적인 어둠 속에 있는 것에 반해 우철은 자연적인 어둠을 물리친 인공적인 빛 속에 있다. 비록 세부적인 조건의 차이는 있지만 두 사람 모두 자연적인 빛으로부터 소외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처럼 불안정한 노동과 삶은 지영과 우철 사이에 맺어진 여러 약속에도 영향을 미친다. 영화 초반에 이야기의 동력원으로 작동했던 지영과 우철의 약속은 이내 두 사람이 겪는 갈등의 원인으로 바뀐다. 영화는 크게 두 단계로 나누어서 지영과 우철의 약속이 지연되거나 이행되지 않는 과정을 보여준다. 우선, 우철이 지영과 여행을 가기 위해 직장에 신청한 희망 휴가가 무산되는 이야기가 먼저 등장한다. 우철의 매니저는 직원 중 한 명이 작업 중 부상을 당했다는 이유를 들어 우철에게 휴가를 반납하고 주말에도 근무할 것을 권고한다. 이어서 우철이 지영에게 여행을 갈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하는 과정에서 두 사람 사이에서 작은 언쟁이 발생한다. 전자는 사회적 계약으로 맺어진 관계에서 발생하는 약속의 불이행이며, 후자는 사적으로 맺어진 연인과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약속의 불이행이다. 두 경우 모두 미래를 향해 앞으로 나아가려는 힘과 그 약속과 관련된 시간성을 마치 애초에 없었던 일인 것처럼 되돌리려는 힘 사이에서 발생하는 충돌로 볼 수 있다. 그 결과 지영과 우철의 시선이 엇갈리는 상황이 벌어진다. 과거 같은 대상을 바라보거나 서로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던 지영과 우철의 시선은 갈 곳을 잃고 표류한다. 지영은 우철을 기다리면서 그가 없는 곳을 멍하니 바라보고, 우철은 지영이 출근하는 모습을 먼발치에서 바라보면서 그런 자기 자신의 모습을 자책한다. 이 일련의 위기와 갈등은 약속을 이행하기 위한 의지와 그것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일련의 몸짓을 통해서 봉합된다. 영화는 지영과 우철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어떤 특별한 사건을 삽입하거나 등장인물들의 수사적인 대사를 활용하는 대신 지영과 우철이 예전처럼 서로의 일상을 공유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오프닝과 대구를 이루는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우철이 퇴근하는 모습, 지영이 우철을 위해 아침 식사를 준비하는 모습, 그리고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앉아 밥을 먹으면서 대화하는 모습으로 이루어져 있다. 오프닝을 일부 변주한 이 영화의 엔딩은 지영과 우철이 과거에도 그러했듯이 지금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예를 들어, 우철이 퇴근하여 집으로 걸어가는 장면에서 우철을 제외한 모든 군중이 동질적인 방향성을 갖는 것과 달리 오직 우철만은 그 균질화된 흐름으로부터 이탈하는 이질적인 방향성을 갖는다. 우철의 몸짓은 군중의 기계적이고 일상적인 동작과 비교했을 때 부자연스럽다. 우철의 그러한 몸짓이 그가 지영과 암묵적으로 약속했던 오전 7~8시 사이의 만남을 위한 것으로 본다면, 그것은 일상의 굴레에서 벗어나 사랑에서 안식과 해방을 찾는 행위라고 볼 수 있다. 영화와 사랑은 몸짓을 수사적으로 활용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영화는 하나의 이미지에 어떤 의미를 고착시키기 이전에 무언극에 가깝다고 할 수 있는 원초적인 몸짓을 통해 특정 감정, 정서, 정동을 일으킨다. 사랑 또한 어떤 것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 목적이 되는 몸짓을 통해서 오직 두 사람 사이에서 공유될 수 있는 특별한 무언가를 창출한다. 사랑과 영화의 특이점은 마법 같은 순간을 만들어내는 몸짓, 움직임, 행위가 있을 때 발생한다. 영화가 정지된 대상을 움직이게 하여 어떤 세계를 발생시키듯이 사랑은 오직 두 사람 사이에서 공유될 수 있는 약속의 시간, 공간, 시선을 드러내어 하나의 유일무이한 세계를 구축한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낮과 밤>에서 엔딩 크레디트와 함께 등장하는 지영과 우철이 바닷가에서 함께 춤을 추는 장면은 판타지에 가까워 보이는 그래서 더 영화적으로 보이는 그런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극 중에서 지영과 우철이 바닷가에 갔는지를 확인할 방법은 없다. 중요한 것은 관객인 우리가 그 엔딩 크레디트에 등장하는 장면을 통해 지영과 우철이 여전히 서로를 사랑하고 있다는 믿음을 가질 수 있다는 점에 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사랑에 대한 믿음을 확인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 관객인 우리는 영화가 그리는 세계에 대한 믿음을 확인하고 싶은 습성을 갖고 있다. <우리의 낮과 밤>의 독특한 매력은 이 작품이 단순히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기보다는 사랑에 관한 믿음을 설득력 있게 그려낸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관련글) 1. 우리는 달팽이의 시간 속에 살고 있다 - <달팽이>(2020), 2022.04.21. 2. 나와 유령이 함께 하는 시간 - <탈날탈>(2018), 2022.05.31. 3. 타인의 그림자를 집어삼키는 법 - <햄스터 죽이기>(2021), 2022.06.29. 4. 얼굴 없는 영화, 등으로 말하는 영화 - <말투>(2020), 2022.07.27. 5. 사랑의 약속으로 하나가 되는 세계 - <우리의 낮과 밤>(2020), 2022.08.25. 6. 이 몸체의 주인을 찾습니다 - <매미>(2021), 2022.09.23. 7. 이것은 감자인가 아니면 고구마인가? - <감자>(2018), 2022.11.08. 8. 일상을 적시는 시간들 - <햇볕을 볼 시간>(2022), 2022.11.21. 9. 찢김의 고통을 극복할 날을 기다리며 - <자르고 붙이기>(2022), 2022.12.06.
1960년 영국에서 제작된 <비트 걸, Beat Girl>은 10대들의 성(性)과 비행을 다룬다는 이유로 제작에서부터 많은 논란을 낳았다. 1959년 3월, 영화의 오리지널 대본인 <스트립티즈 걸, Striptease Girl>은 영국영화검열위원회(The British Board of Film Censors, BBFC) 1 에 제출된 뒤 “기계로 찍어낸 쓰레기(machine-made dirt)”, “몇 년 사이에 본 최악의 스크립트(the worst script I have read for some years)”라는 혹평을 받았다. 이후 영화의 제목을 <비트 걸, Beat Girl>로 변경하고 누드 장면들을 대폭 삭제했으나, 검열위원회는 스트립티즈에 대한 묘사와 소년범죄, 그리고 기차 레일에 누워 담력을 시험하는 십대들의 치킨 게임 장면이 지닌 문제점을 강하게 지적하였다. 결국 영화는 스트립 클럽에서의 노출 장면을 비롯한 문제적인 장면들을 삭제당한 뒤, 관객 제한 수위가 가장 높은 X등급을 받고 개봉하였는데 2 작품에 대한 악의적인 평가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영국 박스오피스에서 성공적인 성적을 기록했다 3 . <비트 걸>의 상영을 둘러싼 논란은 동시대적으로 영화를 개봉되었던 대부분의 국가에서 발생했다. 특히 성에 대한 사회적 담론이 전무하다시피 한 한국사회의 문화적 환경을 고려하면 <비트 걸>의 상영은 그 자체로 놀라운 일이었다. 실질적으로 <비트 걸>의 국내 상영은 4.19 혁명 이후 급진적인 사회변혁의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진 제도적 변화를 빼고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영화를 둘러싼 정책적 기조가 국가권력에 의한 일방적인 통제에서 민간기구에 의한 문화예술의 보호육성이라는 관점으로 이동하면서 영화 상영은 허가제가 아닌 신고제로 변경되었다. 가히 혁명적이라 할 수 있는 제도적 환경 아래서 시장의 자율성은 보다 적극적으로 고려될 수 있었고,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시장 주체들의 도발적인 기획은 영화심의를 둘러싼 논란을 야기했다. 1960년 10월 4일, 영화윤리위원회의 심사를 마친 후 아카데미 극장에서 상영 중이던 <연인들(Les Amants, 1958)>이 불륜을 소재로 삼기에 사회의 미풍양속을 해친다는 이유로 문교부가 일방적으로 상영 중지한 사건은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비트 걸>의 경우는 상황이 조금 달랐다. 외국영화에 대한 수입 추천권을 지닌 문교부는 수입업체인 세기상사가 <젊은 육체들>이라는 제명으로 해당 영화를 배급하고자 했을 때 이를 승인하였고, 오히려 영화윤리위원회(이하 영륜)에서 해당 영화가 사회풍기를 문란케 한다는 이유로 상영보류판정을 내렸다. 이후 세기상사는 해당 조치에 불응하며 상영을 강행하는데, 세기상사와 문교부, 그리고 영륜 사이의 힘겨루기 양상으로 전개되는 <비트 걸> 논란은 박정희의 5.16 군사쿠데타와 맞물려 비로소 일단락되게 된다. 물론, 세기상사는 수입한 영화를 상영해야만 하는 입장이었기에 군부 정권이 자신들의 지배 체제를 수립한 시점에 다시금 상영허가를 신청하게 된다. 현재 한국영상자료원(KOFA)에서 보관하고 있는 <비트 걸> 검열 서류는 영화의 수입과 상영, 그리고 보류통보와 재상영을 둘러싼 일련의 과정을 재구성해볼 수 있는 구체적인 정보들을 포함하고 있다. 우선, 시간상으로 가장 앞선 서류를 살펴보자면, 1960년 11월 9일, 뉴욕에 본사를 두고 있는 리버티 상사(Liberty Trading Company)가 도쿄 지부를 통해 세기상사로 계약관련 내용을 확인하는 전신(cable) 내용이다. [그림 1] 리버티 상사가 세기상사에 보낸 계약 내용 확인 서신 [그림 1]에서 알 수 있듯이 해당 전신은 1960년 10월 29일에 세기상사가 “BEAT GIRL”이라는 제목(안건)으로 리버티상사에 보낸 문의사항에 대한 회신이다. 리버티상사는 세기상사에 <비트 걸>에 대한 복사 권한을 허용하되 프린트 복사를 5본으로 제한한다는 점을 명시하고 있다. 이를 통해 미루어 알 수 있는 내용은 10월 29일 이전에 양자 간의 영화 수입 계약이 체결되었고 원본 네거티브에 대한 듀플리케이션은 세기상사에서 진행했다는 점이다. 현재 남아 있는 검열 서류에는 계약서가 포함되어 있지 않아 판권대금을 비롯한 라이센스 기한과 같은 구체적인 계약 내용은 알 수 없다. 다만, ‘영화상영신고서’에 판권 대금이 “35미리 필름 10권 US $4,000”로 명시되어 있어 계약 사항을 짐작해볼 수 있다. 그러나 현재 남아 있는 ‘영화상영신고서’에는 “35미리 필름 10권 3편”만이 신고 대상에 올라와있는데, 복사판 계약을 5본으로 진행했던 정황을 미루어볼 때, 해당 시점에 나머지 2편에 대한 국내 배급 계약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서는 이후에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그림 2] <비트걸> 영화상영신고서 ‘영화상영신고서’의 경우는 해당 서식이 없어 기존의 ‘허가신청서’를 ‘신고서’로 수정한 흔적을 그대로 보여준다. 허가제에서 신고제로 변경이 그만큼 급격하게 이루어졌음을 엿볼 수 있는데, 여기서 주목해볼 점은 해당 서류에는 제명이 “젊은 육체들”로 변경되어 있다는 점과 1961년 1월 18일에 사단법인 외국영화배급협회를 경유하여 문교부에서 승인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외국영화배급협회는 배급업자들의 이익 단체인 만큼, 영화에 대한 심의권한을 독점하려는 영륜과 긴장관계를 형성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들 협회는 영륜의 권한은 심의 결정이 아닌 권고 수준에 그쳐야 하며, 영화에 대한 최종적 검열 권한은 배급협회에서 자율적으로 마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실질적으로 <젊은 육체들>이라는 제명으로 상영신고서를 제출할 당시, 수입사이자 배급사인 세기상사는 자율적인 심의를 통해 상당한 분량을 삭제하였다. [그림 3] 세기상사에 의한 자진삭제분 一 대사삭제부분 1. 사랑이란 섹스를 고상하게 표현한 말이죠(204) 2. 늙은 바보야(365) 3. 우린 양친과 무관계. 나는 나…. 제니에요. 완전히 독립된 신인간(632-634) 4. 내주엔 펑하고 세계가 연기로 화해 제로에요(650) 5. 법률엔(902, 905,906, 909, 913) 6. 굶주려선 정도를 못 지켜요 (985) 二 화면삭제부분 1. 나이트클럽 장면(5권) 단축 2. 무대 뒤에서 스테이지가 보이는 장면 단축 (529) 3. 노래 장면 삭제… 입과 입, 엉덩이와 엉덩이, 그대 욕적으로 수평선(846~847) 4 4. 제니가 옷을 벗는 장면(8권) 5. 스트립쇼에 유방 나오는 장면(10권) 6. 장면 변경 (1001에서 1010으로) [그림 3]은 1961년 1월 27일자 영화상영신고 품의서로서, 세기상사가 자체 심의를 통해 삭제한 항목이 명시되어 있다. 대사 6개처, 화면 6개처에 해당하는 삭제된 부분은 미풍양속을 해칠 우려가 있는 선정적 장면과 지배질서에 반하는 반사회적 내용에 주로 해당된다. 문교부는 자체 검열 결과에 대해 별다른 의견을 덧붙이지 않고 기안이 올라온 일자에 영화상영신고필증을 발부한다. 그런데 영화상영신고에서부터 신고필증이 발부되기까지 영륜의 심의과정을 반영한 문서는 보이지 않는데, 1961년 1월 28일자 《한국일보》의 기사를 참조해볼 때, 영륜에서는 상영신고 일주일 전인 1월 21일에 <비트 걸>에 대한 실사 심의를 진행하였다. 그리고 해당 영화가 사회풍기를 문란하게 한다는 이유로 전문위원 11명 전원일치로 상영보류 판정을 내렸다. 그리고 세기상사는 영륜의 판정에 불복하여 재심을 청구하였는데, 재심은 1월 27일 오후 7시에 재심이 열린 것으로 확인된다 5 . 그런데 주목할 점은 1월 27일은 세기상사가 자체적으로 문제의 소지가 있는 장면을 삭제하여 상영신고필증을 받은 날이기도 하다. 신고필증이 정확히 언제 발급되었는지 구체적인 시각은 알 수 없지만, <비트 걸>의 러닝 타임이 90여 분인 점을 감안하면, 신고필증의 발부는 영륜의 심의의견이 제출되기 전에 문교부의 일방적인 절차에 따라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결과적으로 영륜의 최종 심의의견은 다음날인 1961년 1월 28일에 언론을 통해서 공개되는데, 영륜은 전원 위원회에서도 9대 7로 상영보류를 희망한다는 의견을 제출한 상황이었다. 세기상사의 입장에서 보자면, <젊은 육체들>로 개봉할 영화는 문교부가 고시한 행정적 절차에 따라 상영신고필증을 받았기에, 상영보류 의견은 받아들일 수 없는 권고였다. 따라서 예정대로 신문사에 광고를 게재하며 “강렬한 장면의 연속! 숨막히는 애욕묘사!”와 같은 자극적인 문구로 대대적인 홍보를 시작하였다. 물론 세기상사의 행보는 영륜의 심의의견이 단지 권고일 뿐 근본적으로 어떠한 구속력도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었기에, 영륜은 언론을 통해 사건을 쟁점화하고 문교부와 세기상사의 행태를 비판하는 여론을 통해 자신들의 존재의미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었다. 결과적으로 영륜은 이 사건을 계기로 영화심의 과정에서 자신들의 입지와 사회적 역할을 분명히 명시하게 되는데, 1월 28일 기사를 필두로 영륜의 존재의미를 부정하는 문교부의 처사를 비판하는 기사가 연이어 쏟아지고, 검찰도 풍기단속을 위해 절차상 직무 유기를 한 이들에게 형법을 적용할 수 있다는 의견을 피력하게 됨으로써 <비트 걸> 논란은 사회적 문제로 부각된다. 결국 문교부장관은 영륜의 존재를 무시할 생각은 전혀 없으며 단순한 사무적인 실수일 뿐이라고 한발 물러섬으로써 사건을 일단락 지을 출구를 마련한다 6 . 이후, <젊은 육체들>에 대한 재심이 진행되었는데, 검열 서류에는 재심에 참여한 위원의 명단을 비롯하여 재심 과정의 내막을 엿볼 수 있는 단서들이 기록되어 있다. [그림 4] <비트 걸> 상영신고 필증 회수 관련 문서 [그림 4]는 1961년 2월 9일, 문교부가 세기상사에게 보내는 공문으로 <젊은 육체들>에 대한 재심의 결과 상영신고필증을 회수한다는 사실을 통보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외국영화 <젊은 육체들>의 상영을 별도의 지시가 있을 때까지 보류함 (2) 앞으로 상영 시에는 제명을 원명대로 할 것 (3) 현재 이후 모든 선전 및 광고에는 '젊은 육체'의 제명과는 일체 무관하게 할 것 신고필증 회수를 통보한 날로부터 나흘 뒤인 2월 13일에는 각 도지사에게 공문을 보내어 “이미 흥행허가가 시행되었다면 긴급히 흥행을 보류시켜 주기”를 요청한다. 그리고 그 다음날인 14일에는 세기상사에 다시 공문을 보내어 복사판 2편에 대해서도 상영신고필증을 반납할 것을 요구한다. 앞서 전신(cable) 내용을 통해 살펴본 바와 같이, 세기상사는 복사판을 5본 제작할 수 있는 권리를 확보했는데, 첫 번째 상영신고서를 제출할 당시에는 3편만을 접수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2편의 복사판에 대한 상영신고는 별도로 신청이 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실질적으로 <젊은 육체들>이라는 제명으로 영화를 개봉할 예정이었던 극장이 대한극장(서울)과 문화극장(부산) 그리고 천일극장(광주)이었던 점을 감안해보면 세기상사는 1차적으로 위의 세 극장과 상영계약을 체결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2편의 복사판에 대한 계약이 체결되고 그에 대한 상영신고필증을 발부받았을 것인데, 2월 14일의 문서는 해당 건에 대한 보류 통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문교부의 일방적인 신고필증 회수통보는 세기상사가 수입추천을 받을 시점인 1960년 11월 29일에 작성하였던 “각서”에 근거한 조치였다. 뿐만 아니라 문교부는 세기상사로 하여금 회수 통보를 받은 즉시 “서약서”를 쓸 것을 요구한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할 시 모든 책임을 지겠다는 포괄적인 내용의 ‘각서’와 ‘서약서’는 행정적 절차의 미비로 발생하는 문제에 대한 책임을 민원인에게 지우고 그에 따른 행정적 처분을 받게끔 한다는 점에서 결과적으로 사후적인 검열의 효과를 발생시키는 것이었다. 즉, 4.19 혁명 이후 검열제도의 폐기는 그 의의와 함께 한계가 분명히 존재하는 만큼, “각서”의 억압적 효과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림 5] <비트 걸> 상영신고 필증 재교부 관련 문서 [그림 5]는 2월 15일 세기상사가 제명을 <비트 걸>로 변경 후 신규로 상영신고필증을 발급받기를 희망하고 이를 허가해줄 것을 요청하는 품의서이다. 상영을 보류하지 않는 조건으로 문교부에서는 “<비트 걸>에 대한 선전 및 광고에서 ‘젊은 육체들’과 전혀 무관하게 할 것”과 “문제의 영화 운운하는 문구를 삽입치 못하게 할 것” 그리고 “영화 상영 시에 있어 관람객을 비롯한 일반여론을 충분히 파악하시어 물의가 있을 시에는 즉시 보고할 것”을 명시한다. 이와 같은 조치는 영화배급사인 세기상사가 노이즈 마케팅의 효과를 이용하려는 시도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조치라 판단된다. 그러나 세기상사는 다음날인 2월 16일, 영화의 선전과 광고가 아니라 “사과문”의 형식으로 신문광고란에 “사회 저명인사 중에는 극력 <젊은 육체들>을 찬양한 바도 있었으나 당국의 요청에 의해 <젊은 육체들>을 <비트 걸>로 개제하여 상영 7 ” 하게 되었음을 적극적으로 홍보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세기상사의 행태는 결국 문교부로 하여금 상영을 중지케 하는 빌미를 제공하는 결과가 된다. [그림 6] <비트 걸> 상영 중지를 요청하는 문교부의 공문 1961년 2월 19일 문교부는 서울특별시 교육감과 각 도지사에게 <비트 걸> 상영 중지를 요청하는 공문을 발송한다. 해당 문서에는 상영중지 처분의 이유를 “상영 후의 제반 사항을 고려하여 동 영화상영을 당시에 배급회사인 세기상사주식회사 우기동으로부터 수리한 별첨 각서와 상영계획서에 의거하여” 상영계획에 있던 극장에서 “재상영 및 동일 극장의 장기 상영을 일체 중지”할 것을 명령한다. 당시의 개봉이 계획된 극장은 대한극장, 문화극장을 비롯하여 대구의 제일극장, 광주의 동방(東方)극장, 그리고 인천의 동방(東邦)극장 5곳이었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이후의 신문기사와 관련 검열 서류를 참조해보면, 서울지역에서는 2, 3류 극장은 제외한 개봉관 상연은 제한적으로 허가된다. 2, 3류 극장의 경우 청소년들의 입장을 단속하기가 사실상 불가능하기에 영화 상영을 개봉관에 한정한다는 논리인 것 같으나, 어째서 서울 지역만 예외로 두었는지는 현재의 서류만으로는 알 수 없다. 다만, 영화수입추천에서부터 상영신고필증의 발부까지 문교부의 고시에 따라 절차를 밟아왔던 사안이었던 만큼, 세기상사에게 일방적인 손해를 입힐 수 없어 마련된 일종의 중재안 정도일 것이라 추측만 가능할 뿐이다. 결과적으로 <비트 걸>을 둘러싼 논란은 영륜의 권고안을 받아들여 서울의 개봉관에 한정하여 상영을 하게 됨으로써 일단락된다. [그림 7] <비트 걸> 재상영 허가 관련 서류 [그림 7]은 5.16 이후 정부조직이 개편된 뒤 세기상사가 공보부에 상영보류 해제를 신청했던 사실을 알 수 있게 하는 서류이다. 해당 문서는 1961년 12월 6일에 작성된 품의서인데, 그보다 앞서 1961년 11월 14일, 세기상사는 공보부 장관에게 상영보류해제와 관련하여 서신을 보낸 것으로 확인된다. “개봉 후 영화의 교육적 가치”가 인정되었고, “혁명 후(5.16 쿠데타를 의미) 이와 유사한 수편의 영화가 국내에서 상영된 사실”을 참작하여 상영을 승인해줄 것을 요청하는 것이다. 이후, 1961년 12월 6일, 공보부로부터 해당 영화가 “2월 18일로 상영보류된 작품이나” “서류고사 및 실사고사를 통하여 내용을 검토한 바 관객으로 하여금 저속한 감정을 도발할 우려가 있는 스트립쇼- 장면을 삭제하고 상영함이 무방하다”고 판정을 받고 재상영을 위한 허가증을 받게 된다. 검열 서류를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해당 영화에 대한 검열이 8월에 이미 실시되었다는 점이다. 군과 법무부, 민간 인사(추정)로 구성된 검열 위원회는 해당 영화에 대해 양가적인 결과를 내어놓는데, 역설적이게도 군에서 파견된 오세용 소령만이 “반항이 그 생리가 된 젊은 세대가 범하기 쉬운 악풍조의 감염을 부모들의 사랑과 조언으로 미연에 방지해야 된다는 것을 암시한 영화”로서 이를 검토한 결과 “스트립쇼를 하는 장면은 관객으로 하여금 야비하고 저속한 감정을 도발할 우려가 있으니” 해당 “장면만 삭제하면 상영하여도 가하다고 사료”된다는 입장을 내어놓는다. 결과적으로 영화는 상영허가가 되었고, 그 권리는 2년간 보장이 되었다. 검열 서류를 통해 알 수 있는 또 하나의 사실은 1971년 6월에 세기상사가 다시 한 번 <비트 걸> 상영허가를 신청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검열 당국은 해당 영화에 대한 권리가 세기상사에 있는지 분명하지 않다는 이유로 상영허가를 반려한다. 이후, 세기상사는 자신들이 가진 권리를 입증함으로써 권리 상에 문제가 없음을 보이고 문제가 되는 장면을 삭제하여 재심을 요청하는 의견을 전달한다. 그러나 검열당국은 “전체적인 영화의 내용이 문제되므로 화면 일부를 제거하여도 상영이 불가하다고 사료되어, 현재로서는 허가할 수 없으니” 이를 반송한다는 의견을 통보함으로써 상영금지처분을 내린다. <비트 걸> 검열과 관련된 일련의 서류들은 동일한 영화가 정책 당국의 입장에 따라 어떤 처분을 받게 되며, 그 과정에서 시장 주체는 어떠한 방식으로 대응하는지, 그리고 그들 사이의 역학 관계는 어떠한지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어 한국영화사를 구성하는 데 중요한 사료가 되리라 생각된다. 1. 1912년에 설립된 영국영화검열기구(BBFC)는 비정구기구로서 현재는 영국영화등급분류위원회(The British Board of Film Classification, BBFC)로 그 명칭과 기능이 변경되었다. 2. 1960년대의 영국의 영화 등급분류 기준은 U등급(Universal, 전체관람가)과 A등급(Adult, 성인동반 관람가능), 그리고 X(16세 이상 관람가능)등급으로 나뉘었다. 따라서 <비트 걸>의 X등급은 한국의 현행 영상물등급분류 기준으로 따지면, 청소년관람불가 등급 정도라 할 수 있다. 3. 「Beat Girl」, Wikipedia. (URL: https://en.wikipedia.org/wiki/Beat_Girl) 4. 의미를 알 수 없음. 5. 「<젊은 육체들> 말썽, 사회적 악영향을 우려하여」, 《한국일보》, 1961.1.27. 6. 「패륜영화의 상영과 극장가의 환경정리」, 《경향신문》, 1961.2.9. 7. 「영화 <젊은 육체들>에 대한 사과문」, 《경향신문》, 1961.2.16.
항의와 집단행동으로서의 검열 – 시대적 상황이 만난 돌출적 요소들 앞서 <흔들리는 땅>으로 시작된 시나리오들이 영화화되지 못하고 급기야 완전히 상반된 내용인 아름다운 노동자상을 홍보하는 영화로 뒤바뀐 경로를 살펴보았다. 이 일련의 과정들은 우리가 ‘검열’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 예상할 수 있는 면면들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영화의 내용을 고치기보다 긍정적으로 수용될 가능성이 높은 외부적 요소를 서류에 포함시켜 검열을 피하려 한다거나, 검열 역시 이를 의식하여 분명 서류와 시나리오의 내용이 다르며 시나리오의 내용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했음에도 통과시켜 주는 것은 검열의 기준이나 엄정함에 대한 흥미로운 상상을 가능하게 한다. 그러나 창작물에 반려나 전면 개작 등의 결과를 내림으로써 사회의 부정적인 요소들을 적극적으로 감추려던 것, 그러니까 이때의 검열은 작품이 나오기 전에 제재하여 국가가 원치 않은 내용을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 기본적인 작동 방식이었다는 점은 명확하다. 때문에 1981년 개봉한 <도시로 간 처녀>의 상영 중지사건이 검열의 범주에서 이야기되는 것은 꽤나 흥미로운 일이라 할 수 있다. 1981년 개봉한 <도시로 간 처녀>는 당시 영화진흥공사가 선정한 우수영화로 대종상 작품상 후보에 까지 올랐던 작품이다. 1980년대의 대종상이 영화진흥공사가 주최한 정부 주도의 영화제였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이 작품은 충분히, 아니 그 이상으로 당국의 인정을 받은 ‘좋은’ 영화였던 셈이다. 즉, <도시로 간 처녀>는 사전 제재라는 요소가 아닌 국가의 승인을 받아 이미 개봉을 한 영화가 검열의 피해를 받은 작품으로 전환돼 현재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곧 완성될 영화에 정부가 얼마나 개입했느냐가 아닌, 이미 완성된 영화에 개입된 또 다른 힘. 이것이 <도시로 간 처녀>의 검열과정이 내포하고 있던 검열의 또 다른 가능성과 1980년대만의 검열을 설명해줄 수 있을 것이다. 제작사 태창흥업주식회사(이하 태창흥업)는 1981년 1월 23일 <도시로 간 처녀>의 제작신고서를 낸다. 이 <도시로 간 처녀>의 시나리오는 <흔들리는 땅>의 ‘남숙’을 ‘문희’로 그 이름만 바꾸었을 뿐 역시 같은 시나리오라고 볼 수 있다. 약 5년 만에 원작자를 김승옥으로 바꾼 이 시나리오가 다시 영화제작을 시도한 것인데, 이 시나리오는 안내양의 삥땅 수법과 운전기사 및 회사의 대비책이 폭력적으로 그려지는 것에 유의하라는 심의 내용이 나온 후 약 열흘 만인 2월 3일에 바로 수리된다. 이는 1976년 <흔들리는 땅>이 지난한 과정을 거쳤음에도 결국 영화화되지 못했던 것과 비교한다면 매우 다른 양상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차이는 심의의견 내용을 통해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림 1) <도시로 간 처녀> 극영화 제작신고 수리통보 <도시로 간 처녀>의 제작수리 통보 서류나 시나리오 심의 의견서에 범박하게 적혀 있는 유의사항은 시나리오 심의 때에도 본편 영화검열 때에도 구체적인 제제로 이어지지 않는다. “부정적인 묘사로 건전한 사회가풍 조성이 저해 되”지 않도록 유의하라는 내용이 적혀있기는 하지만 이것으로 인해 작품이 제작에 타격을 입을 만한 특별한 문제가 생기지는 않는 것이다. 1) 이는 1976년 <흔들리는 땅> 시나리오 심의 때 지적되었던 내용들과 비교 한다면 더욱 명확해지는 것인데, 1976년에 문제가 되었던 운전기사와 버스안내양들의 치부가 드러난다는 점, 버스회사에서 일하는 이들의 인격과 인권을 모독했다는 점, 버스 안 행상인들과 버스회사 종사자들 사이의 뇌물수수가 지나치게 묘사된다는 점, 버스회사의 감독이나 운전기사가 버스안내양에게 부정행위를 유도하고 있다는 점 등이 매우 구체적으로 지적되던 것과는 분명한 차이를 두는 것이었다. 오히려 <도시로 간 처녀>가 구체적으로 지적했던 장면들은 이와 전혀 다른 맥락에 서 있다. <도시로 간 처녀>에서 검열관들의 심기를 건드렸던 부분은 본편영화검열 서류에서 확인된다. 이때 지적된 부분은 주인공 문희를 겁탈하려던 기사를 동료 버스기사들이 돌아가며 뺨을 치는 장면, 알몸수색 중 문희의 상·하반신 노출, 문희가 회사 옥상에 올라섰을 때 모여 있던 군중장면과 추락장면 등이었는데, 이 같은 장면들을 지적한 것은 버스회사 종사자들의 부정적인 모습이 겉으로 드러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기보다는 폭력적이거나 선정적, 사회적 불안 유도 등을 제거하는 데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공윤은 이 장면들만을 단축하거나 삭제한다면 버스안내양과 유부남 기사가 동거를 하는 모습이나, 버스안내양과 감독이 윙크를 주고받으며 삥땅한 돈으로 뒷거래를 암시하는 모습, 버스운전기사가 삥땅을 하지 않아 자신에게 뒷돈을 주지 않는 버스안내양을 골탕 먹이고 겁탈까지 하려는 장면이 그대로 노출됨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를 중학생 이상부터 볼 수 있으며 우수영화가 될 수 있고 해외로 수출까지 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린 것이었다. 그리고 7월 1일 검열 합격증이, 9월 7일 영화예고편검열합격증이 발부되면서 <도시로 간 처녀>는 관객들을 만날 준비를 한다. (그림 2) 영화검열 합격통보 및 각서 흥미로운 것은 검열합격증을 받기 하루 전인 6월 30일에 제작자가 작성한 각서가 있다는 점이다. 이 각서는 문공부장관 앞으로 보내는 것인데, 영화가 물의를 빚는다면 문공부의 조치를 따르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다음날 영화검열합격통보문서에서도 “동 영화 상영 중 사회적 물의가 야기될 경우 상영중지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내용이 첨부되어 있어 그 배경에 관심이 쏠린다. 현재로서 문공부가 이 각서를 왜 요구한 것인지는 명확히 알기 어렵다. 사회적인 치부를 드러내는 작품이라고 판단했을 때 관례적으로 거치는 절차일 수도 있고, (이후 상술하겠지만) 같은 해 영화 <만다라>가 겪었던 것과 유사한 일이 일어날 때를 대비한 것일 수도 있으며, 새 정권의 새로운 분위기 하에서 과한 사전 검열을 하기보다는 사후조치에 힘을 쏟기 위해 요청한 것일 수도 있다. 어찌됐던 문공부는 문제가 생겼을 때 가장 빠르게 처리할 수 있도록 상영중지를 검열합격의 조건으로 내걸었고 제작사는 영화의 개봉을 위해 이에 응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후 제작사는 몇몇 지적된 부분에 대한 재심의를 요청한 후 최종합격통보를 받고 12월 3일 개봉한다. 그러니까 버스안내양들의 부정적인 모습들은 1981년에 개봉한 <도시로 간 처녀>에 와서야 처음으로 영화에 등장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공교롭게도 버스안내양들이 노동자로서의 자의식을 끊임없이 재고하며 확장시킨 때와 맞물린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버스안내양들은 논픽션을 통해 가십거리처럼 소비되었던 자신들의 이미지를 부정하고 성실한 노동자로 바로세우기 위해 노력했고, 합리적인 노동환경을 사회에 요구할 만큼 성장해 있었던 것이다. 바로 이때 <도시로 간 처녀>는 개봉했고, 200여명의 버스안내양들은 극장 앞에 모여 공개적인 항의를 시작한다. 2) (그림 3) 한국노총의 영화상영 금지요청 (그림 4) 노동부장관이 보낸 상영중지 긴급협조 요청 가장 먼저 영화의 상영금지를 공식적으로 요청한 것은 한국노동연합총연맹(이하 한국노총)이었다. 한국노총에서는 12월 9일, 문화공보부장관에 공문을 보내 이 영화가 전국자동차노조연맹과 이 연맹에 소속된 운전기사와 안내양 등 15만 명의 명예를 손상시키고 인권을 유린했다는 내용을 구체적으로 적시하면서 영화의 상영중지를 요청하고 있다. 바로 다음날인 12월 10일에는 노동부장관이 문공부장관에게 직접 공문을 보내 비슷한 문제점을 지적하며 상영중지를 요청한다. 그리고 같은 날 <도시로 간 처녀>의 제작사인 태창흥업은 문공부에 이 영화가 물의를 일으키고 있으니 스스로 상영을 철회, 검열합격증을 반납하고 이후 개작하겠다는 내용의 공문을 보낸다. 문공부는 태창흥업에서 자진 상영취소를 하겠다고 보내왔던 공문을 두 단체에 보내는 것으로 상황을 마무리하고, <도시로 간 처녀>는 극장에서 사라진다. 상영이 시작된 지 일주일 만에 벌어진 이 모든 상황을 가장 간편하게 설명할 수 있는 것은 <도시로 간 처녀>가 현실의 문제를 과하게 다루었고, 이로 인해 정부의 제재를 받았다는 정도일 것이다. 그러나 <도시로 간 처녀>의 상영중지 사건을 다룰 때에 이러한 서술은 그리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데, 같은 해 비슷하게 특정단체의 항의를 받았으면서도 <도시로 간 처녀> 때와는 전혀 다르게 반응했던 문공부의 대처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비교한다면 문공부의 발 빠른 수습은 검열의 서류로만 이야기할 수 없는 또 다른 힘 때문이 아닌가라는 점을 의심해볼 수밖에 없다. 같은 해인 1981년 1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작품인 임권택의 <만다라>가 제작을 시작한다. <만다라>는 1981년 1월 24일 제작신고 시 ‘저속한’ 두 마디 대사가 지적되는 정도에 그칠 만큼 무난하게 제작에 착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영화 촬영 중이던 그 해 5월 대한불교조계종(이하 조계종)은 문공부장관에게 이 작품이 불교의 명예를 실추시킬 위험이 있으니 자신들의 의사가 반영될 수 있도록 조치해달라는 협조 공문을 보내면서, 창작자과 검열자 사이에 새로운 주체가 출현한다. 3) 문공부는 <만다라>의 제작사였던 화천공사에 조계종과 상호 협조하여 이후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라는 공문을 보내고, 4) 이에 화천공사는 “승적이 분명한 승려 및 사계 전문가로부터” 철저한 고증을 받았고, “이 작품의 촬영개시 이전 조계종 총무원에” 협조를 의뢰했다는 회신을 보낸 후 5) 특별한 잡음 없이 7월 13일 검열에 합격한다. 그러나 사전 시사회에서 영화를 본 조계종 측은 <만다라>가 “불교에 커다란 모욕 행위가 되는 영화”이니 다시 검열해 줄 것을 문공부에 요청하고 만약 이 영화가 상영된다면 전국적으로 불교도들이 영화의 상영을 막기 위해 데모도 불사하겠다는 강경한 뜻을 보이고 있다며 항의에 가까운 공문을 보내기에 이른다. 6) (그림 5) 문공부가 조계종에 보낸 영화 <만다라>에 대한 건의서 회신 이에 문공부는 조계종 측에 단호한 회신을 보내는데, 이 영화는 이미 조계종과 협의한 바 있으며 무엇보다 “영화는 영화관계 법령에 저촉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자유로이 제작되는 창작물로 동 영화는 합법적인 절차에 따라 검열을 받은 작품”이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덧붙여 “국가적 사회적 안정이 절실히 요구되는 현 시점에서 사회불안 요인을 유도함이 없도록 협조”바란다는 강경한 요구까지도 덧붙이고 있다. 이 같은 태도를 같은 해에 일어난 <도시로 간 처녀>의 그것과 비교한다면 매우 흥미롭다. <만다라>에 직접 명시했던 문공부의 말에 따르자면, <도시로 간 처녀>에 문제가 생기고 한국노총과 노동부의 상영중지 요청을 받자마자 상영을 중지시키는 것은 문공부 주도의 심의를 이미 통과한 이 영화가 “영화관계 법령에 저촉되지 않는 범위”와 “합법적인 절차”를 벗어났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만다라>는 행하지 않았지만 <도시로 간 처녀>는 행한 것, 바로 이 차이가 두 영화에 대한 문공부의 대처를 가른 가장 결정적인 이유가 될 것이다. (그림6) 재심의 시 삭제를 요청한 부분 표시 위에 붉게 표시된 부분은 <도시로 간 처녀>가 영화의 몇몇 부분들을 수정한 후 재심의를 받을 때까지 반복적으로 지적된 장면이다. 영화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군중신과 문희의 투신장면은 <도시로 간 처녀>가 처음 심의를 받을 때부터 계속해서 지적되는데 이 부분, 그리고 수기로 첨부되어 있는 군중신의 삭제는 문공부의 상반된 반응을 설명하는 데에 아주 중요한 힌트가 될 수 있다. 즉, <만다라>의 조계종 승려들은 행하지 않았지만 <도시로 간 처녀>의 버스안내양들은 행한 집단행동, 이것은 문공부가 “국가적 사회적 안정이 절실히 요구되는 현 시점에서 사회불안 요인을 유도”를 막기 위해 진행했던 검열과 그로 인해 승인 받은 작품이 유발한 결과가 된 셈이었다. 심의를 통해 <도시로 간 처녀>에서 끝끝내 삭제하려 했던 이 장면은 7) 1980년대 초 집회나 데모 등의 집단행동에 대한 것이 언론에서 모두 걸러내던 때, 버스안내양들로 인해 재현되고 있었다. <도시로 간 처녀>를 승인함으로써 오히려 “사회불안을 유도”하고만 문공부가 <만다라>때와는 다르게 <도시로 간 처녀>는 빨리 무마시켜야 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영화의 내용과 그것을 지적하던 서류가 아닌 사회적 분위기에 따른 민간의 항의로서의 검열은 1980년대에 들어서서야 발견할 수 있는 새로운 검열이라 할 수 있다. <도시로 간 처녀>는 바로 이 선봉에 서 있었고, 이후 <비구니>나 <우편배달부는 두 번 벨을 울린다>와 같은 영화에서 역시 영화에 등장하는 직군들의 항의로 인해 영화의 제작을 중단하거나 영화의 제명이 변경되는 등 국가적 검열과는 상관없는 방식으로 영화의 향방을 결정하게 된다. 8) 이것은 곧 심의기관의 주체였던 문공부가 전혀 예상할 수 없는 돌출적인 상황이자 1980년대라는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벌어진 검열이라고 할 수 있다. 상영이 중지되었던 <도시로 간 처녀>가 재개봉을 준비하면서 문공부보다 자신들의 영화를 문제 삼았던 단체를 더 의식하고 있던 것도, 문공부는 이 중간에서 특별한 의견을 내보이지 못하는 것도 모두 여기에서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한 가지 더. <도시로 간 처녀>는 약 6개월간 2억여 원이라는 거금이 들어간 동시녹음 영화였다. 제작사에게 상영중지는 막대한 피해로 이어질 수밖에 없기에 영화를 재상영하기 위한 필사의 노력은 당연한 것이었다. 재상영을 위해서는 버스안내양들과 그 관계자들의 눈 밖에 나지 않기 위해 제작사 ‘스스로’ 노력해야 했던 것이다. 이때의 ‘스스로’는 매우 중요하다. 영화를 다시 걸기 위해 제작사가 시행한 수많은 삭제들은 국가검열과는 전혀 상관없이 제작사의 판단으로 이루어진 자체검열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태창흥업은 검열합격증을 반납하겠다는 공문을 보낸 1981년 12월 10일에서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은 시점부터 재상영을 위한 준비를 시작한다. 이 모든 준비는 노동 단체들을 향해있었고, 제작사는 적극적으로 이들의 의견을 수렴하겠다는 의지를 피력한다. 태창흥업은 노동단체를 불러 1차로 진행한 1982년 1월 13일 시사회 이후 어떠한 공식적인 답변도 듣지 못하자 스스로 ‘검열’한 부분을 명시하고 2차 시사를 열겠다며 노동단체 측에 다시 송부한다. (그림7) 제작사가 재상영을 위해 자체검열을 실시하여 수정한 내용 태창흥업에서 수정한 내용을 살펴보면 영화의 완성도는 전혀 고려치 않은 채, 문제가 되었던 모든 부분을 삭제하고자 했으며 심지어 내레이션이나 자막을 삽입함으로써 철저히 항의 주체의 구미에 맞추려 노력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제작사는 항의를 했던 버스안내양들이나 자동차노조, 한국노총 등이 범박하게 지적했던 문제에 대해 스스로 (여성)노동자의 명예를 실추시키지 않는 범위를 설정하고 직접적인 장면삭제를 감행한 것이었다. 이는 미리 문제가 발생할 것을 우려해 삭제했던 과거의 검열과는 달리 항의 주체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반영하기 위해 진행한 자체 검열이었다. 한 가지 더 주목해야 할 것은 태창흥업의 자체검열, 이에 대한 노동자들의 회신 사이 문공부 즉 국가검열주체는 철저히 배제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태창흥업이 <도시로 간 처녀>의 재상영 의지를 밝힌 후 문공부가 이 진행사항에 대해 알게 되는 것은 태창흥업이 전국자동차노동조합연맹(이하 전자노련)과의 1, 2차 시사를 끝내고, 수정된 부분에 대해 전자노련이 한국노총과 협의하고, 이 결과를 전자노련이 다시 태창흥업에 알려주고 나서야 큰 이의 없다는 답변을 받아낸 태창흥업이 보낸 공문을 통해서이다. 이 모든 일이 진행되는 사이 어떤 단체도 문공부를 염두에 두지 않았고, 오롯이 당사자들끼리의 합의된 검열이 이루어진 후에야 제작사는 재상영 합격증을 발부해줄 수 있는 문공부를 다시 찾은 셈이다. 2월 20일 문공부는 한국노총으로부터 이 작품에 특별한 이의가 없다는 공문을 받고도, 9) 3일 뒤 노동부의 의견을 묻는 공문을 다시 보내고, 10) 다음날 노동부로부터 상영에 이의가 없다는 의견을 받고서도 11) 공윤에 재심의를 요청한다. 12) 문공부는 문제가 없다는 것을 반복적으로 확인한 후 3월 4일 검열합격증을 재발급한다. (그림8) 극영화 <도시로 간 처녀> 보도자료 상영 직전 문공부에서 작성해 언론에 배포했을 것으로 보이는 이 보도 자료는 제작사의 의지로 이 모든 것이 이루어진 것처럼 기술되어 있지만, 사실 위에서 언급한 공문들의 전달과정을 보면 제작사만큼이나 절박해 보이는 것이 문공부이다. 이렇게 구체적인 보도자료를 작성한 것 역시 다시 같은 문제를 반복하고 싶어 하지 않는 문공부의 의지를 반증하는 것이라 할만하다. 문공부는 그 어느 때 보다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도시로 간 처녀>의 재상영 여부를 확인하고자 했고, 영화 제작사와 그것의 문제없음을 판단할 수 있는 노동단체들의 합의만을 기다리며 철저하게 문서전달자 노릇을 하고 있었다. 처음 이 영화를 승인했던 문공부는 문제가 생긴 후 영화의 내용이나 재검열, 재상영 과정에 어떠한 입장도 내비치지 않았고, 오히려 문공부의 손을 떠났을 때 <도시로 간 처녀>의 재상영은 말끔하게 해결될 수 있었다. 결론적으로 처음 문제를 제기했던 버스안내양들의 요구대로 <도시로 간 처녀>는 말끔하게 재편집되었고, 재개봉 후 더 이상의 문제는 일어나지 않는다. 이처럼 <도시로 간 처녀>가 개봉했다가 상영중지가 되고, 재상영에 이르는 과정에는 수많은 검열관들이 끼어들고 있었지만 이는 우리가 익히 알던 ‘그 검열’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민간단체들은 스스로의 모습이 등장하는 영화에 민감하게 반응했고, 원치 않은 재현에 대한 수정을 요구하였다. 이로 발생한 집단적 항의는 1980년대의 상황과 맞물리면서 전혀 예측할 수 없는 결과를 낳아 영화의 향방을 결정짓기도 했으며, 각각의 이익을 대변하는 단체들이 모인 순조로운 검열이 진행될 수도 있었다. <도시로 간 처녀>의 검열과정으로 살펴볼 수 있는 이 다양한 변화들은 1970년대까지는 찾아보기 힘든 지극히 1980년대적인 검열이라 할 수 있다. 완벽할 수 없는 ‘삭제’, 유동하는 ‘검열 ’ 다소 길고 복잡한 과정을 통해 질문에 답하면서 다시금 검열에 대해 생각해 본다. 버스안내양들이 어떻게 1981년에야 항의를 할 수 있었는지, 왜 그때 마침 <도시로 간 처녀>는 개봉한 것이었는지, 군중신이 문제가 되었던 것처럼 집단적인 항의는 왜 하필 그때 또 문제가 되었던 것이었을지. 이 모든 것은 우연이었을지 모르지만, (우연이라 할지라도) 또 이 모든 것은 검열 그 자체가 될 수 있는 요소이기도 했다. 이처럼 검열에는 너무도 많은 힘들이 끼어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어떤 것도 고려치 않는 무소불위의 힘처럼 간주되어 왔다. 보통 검열을 이야기할 때 중심에 두는 것은 잘려나간 장면들이지만 이러한 시각만으로는 영화가 완성되는 과정 중 투여되는 상당수의 것들이 보지 못할 수밖에 없다. 검열은 꽤나 생산적인 작용이다. 이는 검열을 긍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지니는 영향력의 확대와 변화의 가능성, 반대로 그것이 영향을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을 분명히 하고자 하는 것이다. 1970년대에는 나올 수 없었던 <흔들리는 땅>은 1981년 <도시로 간 처녀>로 등장할 수 있었고, 분명한 승인을 받은 이 영화는 민간단체의 힘으로 스크린에서 내려왔다. 다시 이 영화가 극장에 걸리기 위해 당국과는 전혀 상관없는 단체들의 합의된 검열을 이루어졌고, 이 사이에는 창작의 자유나 현실과 재현물은 다른 것이라는 식으로 검열에 대응하는 원론적인 논리가 끼어들 틈은 없었다. 이처럼 검열은 끊임없이 움직였고, 변화했고, 약해지거나 강해졌다. 때문에 이처럼 다채로운 스펙트럼을 지닌 검열을 단일하게 보는 것만큼, 그 방향성을 하향식으로만 생각하는 것만큼 재미없게 보는 방법도 없을 것이다. 시기마다 민감한 문제들은 변화하고, 이를 걸러내는 실제 검열의 과정은 길고 복잡했으며, 검열관은 단일한 주체가 아니었다. 검열에 대해 좀 더 나은 시각을 기대한다면 검열을 늘 극복할 대상이 있었던 현대사의 증거로 보는 것을 넘어 하나의 창작물에 달라붙어 있는 모든 과정을 고려의 대상으로 두어야 할 것이다. 1) 물론 이러한 결과에는 표면적으로는 자유를 보장한 것처럼 보여야했던 1981년이라는 시기상의 요인도 기여했을 것이다. 2) 「영화계에 도시로 간 처녀 파문」, ≪경향신문≫, 1981.12.12. 이 기사에는 78년에 <맨주먹의 소녀들>이라는 <도시로 간 처녀>의 시나리오를 일부만 바꾼 영화가 나왔을 때에는 버스안내양들이 가만히 있다가 지금에 와서야 문제제기하는 것을 이상한 일이라고 서술한다. 그러나 지난 글에서 보았듯이 이 두 작품은 결코 비슷할 수 없다. 이 부분의 기사는 확인이 제대로 되지 않은 상태에서 쓰인 것으로 보인다. 3) 대불총교화제 203호, 「영화 만다라 제작에 따른 종무 협조의뢰」, 1981.5.1. 4) 예술 1724-7514, 「국산극영화 만다라 제작에 관한 건」, 1981.5.25. 5) 「예술 1724-7514에 대한 회신」, 1981.5. 6) 대불총사제 425호, 「영화 만다라에 대한 건의」, 1981.9.8. 7) 영화가 개봉한 후 상영중지를 요청하는 단체들이 모두 투신장면을 문제 삼는 것으로 보아 감독은 이 장면을 끝내 삭제하지 않은 채 개봉한 것으로 보인다. 8) 임권택 감독의 <비구니>는 비구니들의 집단적인 항의로 상당한 분량의 영화를 찍었음에도 불구하고 제작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고(≪경향신문≫, 1984.6.13.), <우편배달부는 두 번 벨을 울린다>의 제명변경을 요구한 체신노조는 문공부로부터 영화의 제목은 저작권에 관한 문제이니 함부로 변경할 수 없다는 답변을 듣고(≪경향신문≫, 1982.8.23.), 시위에 들어갈 것을 구체적으로 통보한 후 기동 경찰 백여 명이 출동하는 소동을 벌이고 나서야 자신들의 직명을 영화에서 지울 수 있었다(≪동아일보≫, 1982.8.24.). 9) 노총홍보 제115호, 「<도시로 간 처녀> 시사 결과 통보」, 1982.2.20. 10) 예일 1724-14, 「영화 <도시로 간 처녀> 재상영 협조」, 1982.2.23. 11) 노조 1454-5441, 「<도시로 간 처녀> 상영협조에 대한 회신」, 1982.2.24. 12) 예일 1724-2430, 「극영화 재상영에 대한 판단 협조」, 1982.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