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노
- 감독
- 이영실
- 제작년도
- 1982
- 출연
- 원미경, 마흥식, 지계순, 남수정, 양일민, 나소윤, 최삼, 문태선, 나갑성, 신찬일, 김대규, 서준영, 김애라, 신명순, 김성자, 박승규, 박원호
<뽕>을 이야기하자면, 1980년대라는 시대를 먼저 말하지 않고 넘어갈 수 없다. 그런 질문이 나올 법하다. 무릇 대개의 영화는 시대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지 않느냐고. 물론 그렇지만 <뽕>을 비롯해 그 당시 나온 일군의 장르 영화는 1980년대라는 토양 아래 만들어졌고, 놀랍게도 1980년대가 끝나고 1990년대가 시작되면서 곧 사그라졌다. 1920년대 나도향이 쓴 동명의 원작이 1980년대의 관객에게 왜 그렇게 사랑받았는지 이야기하려면, 나는 어쩔 수 없이 1980년대의 영화들과 분위기에 대해 떠올려야만 한다. 혹자는 신군부정권이 국민들을 회유하기 위해 시도했던 ‘3S정책’을 말한다. 즉, 3S 중 ‘섹스’와 ‘스크린’이 만난 결과물이란 것이다. 확인된 문건이나 증거는 없으나, 사실이 그러하다는 것은 그 시대를 거쳐 온 사람들이 인지하고 있는 바다. 수치적으로도 보아도 1980년대의 영화 문화는 암흑에 가깝다. 한국영화와 외국영화를 막론하고 홍보용 간판에 걸리는 영화 가운데 많은 수는 성애물이었고, 거리에는 언제나 그런 영화들의 포스터가 붙었다 떨어져 나가곤 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런 영화가 어마어마한 흥행 성적을 기록한 것도 아니다. 그나마 극장을 찾는 관객들의 발걸음을 붙잡는 정도, 딱 그 정도의 흥행을 유지하는 수준이었다. 흔히 성애물이라 불리는 영화들 중 흥행에 성공한 작품이라 해봐야 수십만 관객이 다였다. 영화로 치면 정말 암울한 시간이었다. 1980년대의 성애물은 그 안에서 다시 몇 가지 갈래로 나뉜다. 하나는 유럽산 성애영화나 스릴러에서 영향을 받은 정체불명의 심리물이었다. <애마부인>(1982)으로 전설을 쓴 이 장르는 여성의 야릇한 심리를 소재 삼아 수많은 아류를 쏟아냈다. 직접적으로 유럽영화의 영향 아래 만들어진 <안개는 여자처럼 속삭인다>(1982) 같은 영화가 있었는가 하면, <무릎과 무릎 사이>(1984), <여자 여자>(1985) 따위의 괴상한 심리드라마도 시도되었다. 둘째는 사회적 메시지에 성애물을 결합한 유였다. <어둠의 자식들>(1981), <백구야 훨훨 날지 마라>(1983) 등으로 명맥을 이어가다 1980년대 후반 <매춘>(1988) 시리즈로 폭발한 장르다. 셋째가 <뽕>이 포함된 토속 성애물이다.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1981),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1981), <어우동>(1985) 등의 엄청난 성공에 힘입어 소소한 흥행세를 이어간 이 장르는 그 아래로 문예물과 해학물로 다시 나뉜다. <반노>(1982), <자녀목>(1984), <씨받이>(1987), <감자>(1987)>가 전자라면, <변강쇠>(1986), <어울렁 더울렁>(1986), <가루지기>(1988),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1993) 등이 후자의 대표작들이다. <뽕>(1985)의 경우는 다소 특이하다. 굳이 분류하자면 전자에 속하겠으나 이 영화의 영향으로 후자의 영화들이 터져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통계 정보로는 십여만 명을 동원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이는 당시의 부실한 통계 수준을 입증할 따름이다. 개봉관의 성공에 이어 재개봉관으로 내려간 뒤에도 영화의 흥행은 멈추지 않았고 여주인공을 맡은 이미숙의 얼굴이 간판에 그려지지 않은 군소극장이 드물 정도였다. 그 정도가 오죽하면 모 영화잡지에서 ‘(극장 간판마다 그려진 이미숙의 얼굴 가운데) 과연 어떤 게 진짜 이미숙 얼굴이냐’를 주제로 기사를 냈을까 싶다. <뽕>의 성공이 1980년대를 성애물의 시대로 만드는 데 한 역할을 했지만, 다시 본 <뽕>에는 그 시기의 싸구려 성애물과 구분되는 지점이 있음 또한 분명하다. 1980년대 성애물의 가장 큰 문제는 남성과 여성을, 섹스 외에는 세상사에 별 관심이 없는 짐승처럼 그려놓았다는 데 있다. 남성은 여성의 몸만 봐도 흥분하고, 여성은 남성의 육체가 다가오면 달아오른다는 식이다. 그런 까닭에 이야기의 개연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남녀의 눈빛을 클로즈업한 뒤 베드신을 연출하면 그만이었다. 싸구려 성애물이 하도 많이 만들어지니까, 그런 장면들만 기대하고 영화를 보러 다니는 관객도 적지 않았다. 예술영화나 독립영화 같은 건 별세상처럼 논의되던 시절이었다. <뽕>의 인물과 이야기는 달랐다. 근대 이전의 남성성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남편 삼보(이무정 분)나 삼돌(이대근 분)과 달리, 안협집(이미숙 분)으로 불리는 여성은 노동과 재화를 연결 지을 줄 아는, 그리고 그것을 통해 독립적인 삶을 도모하는 근대적인 인물이다. 어쩌면 안협집은 1980년대 성애물에서 육체적 굴레에 얽매이지 않은 유일한 인물일 것이다. 남편 삼보가 역마살을 핑계로 노름에 빠져 허구한 날 바깥을 돌아다니는 탓에, 그녀는 자신의 몸 하나로 세상을 버텨나가야 한다는 걸 깨닫는다. 자본이나 도구가 없는 그녀로서는 반반한 얼굴로 몸을 파는 것을 노동으로 치환하는 걸 당연하게 여긴다. 그런 까닭에 그녀는 소위 육체적 매력을 따질 겨를이 없는 터, 재화가 없는 상대방에게는 절대 몸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녀에게 육체적 관계는 곧 돈이나 쌀에 가늠하는 재화를 의미한다. 머슴살이를 하는 삼돌은 힘과 몸을 이용해 살아간다는 점에서 안협집과 다를 바 없으나, 그는 안협집과 반대로 육체의 힘을 독립적인 삶의 바탕으로 사용하지는 못한다. 힘자랑을 하는 도입부에서 보듯 그는 자신의 힘을 노동에 바치면서도 종속된 위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극중 안협집이 유독 삼돌을 싫어하는 이유는 밝혀지지 않으나, 그게 논리적으로 맞다. 자신의 힘을 잘 이용하는 안협집이 그것을 자랑 이상으로 쓰지 못하는 삼돌을 바보 천치로 바라보는 게 당연하다. 안협집에 수작을 거는 삼돌의 시도는 매번 실패하기 마련이고, 그러면 그럴수록 안협집은 그를 더욱 하찮게 여기게 된다. <뽕>은 이대근이 섹스의 아이콘으로 도약하게 해준 작품이면서도 극중 그를 쓰는 방식은 정반대라는 게 특징이다. <변강쇠> 같은 이후 작품에서 이대근은 외모와 힘 하나로 수많은 여성의 구애를 받는 남성으로 분했다. 그의 소문을 전해들은 여성들은 그와 잠자리 한 번 해보겠다고 줄을 서는 장면들이 연출된다. 그런 이대근이 분한 삼돌은 <뽕>에서 내내 내쳐지는 신세를 못 면한다. 삼돌이 힘을 주체하지 못해 식식거릴수록 관객들은 더 크게 웃었다. 원작과 다르게 삼보에게 독립운동가의 뉘앙스를 입혀 놓긴 했으나, 기실 그도 무능하기는 마찬가지. 안협집이 준비해둔 노잣돈에 깨끗한 옷을 걸쳐 입고 돌아다니는 거 외에 우리는 아무것도 보지 못하지 않았나. 삼보가 극 초반에 하는 대사 – 허기사 지금 세상에는 섣부른 사내 녀석보다 기집 편이 살기가 훨씬 나니라 - 는 어쩌면 1980년대라는 시대를 풍자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때는 박정희에 이어 사내들의 대장으로 군림한 전두환의 기세에 눌려 어지간한 사내들이 풀이 죽어 사는 시대였고, 그들의 주체 못한 힘을 여성에 대한 폭력으로 풀던 시대 아니던가. <뽕>에는 그런 못난 남자들을 향한 조롱이 가득하다. 인물과 이야기만큼 빼어난 것은 이미지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이두용의 방식이다. 극의 도입부를 돌아보자. 1분25초짜리의 짤막하고 기능적인 오프닝 크레디트가 흐르고 난 다음, 마을 풍경을 배경으로 안협집이 삼보에게 따지는 목소리가 나오고, 마을 사내 두 명이 그들에 대해 말하는 모습이 삽입된다. 싸돌아다니는 남편을 흉보면서도 보약을 달이는 안협집의 날렵한 몸짓을, 갓 일어난 삼돌이 유머러스한 표정으로 바라본다. 강원도, 황해도, 평안도(안협(安峽)은 강원, 평안, 황해 삼도 품에 있는 고읍(古邑)의 이름이다.) 투전판을 놀다온 남편은 묵묵히 화투를 만지다 화투 패로 묘기를 보여준다. 새침하던 안협집은 어느새 남편의 손놀림에 빠져 신기함을 연발한다. 이번에는 철원 쪽 화투판으로 떠나려는 남편의 입놀림에 속아 그녀는 울다가도 새 옷과 노잣돈을 스스로 꺼내 놓는다. 옷을 입혀달라며 바지춤을 내린 삼보는 슬며시 아내의 얼굴을 더듬는데, 카메라는 관객을 놀리기라도 하려는 듯 마을 남자들의 힘자랑 풍경으로 훌쩍 넘어가버린다. 절구 옮기기로 힘이 세다는 걸 증명한 사람에게 식량을 내준다는 말에 마을 아낙과 남정네들의 입담이 오가고, 모두가 나자빠진 자리에 힘 센 삼돌이 엉큼하게 일어난다. 그는 한 손가락으로 코를 휭 푼 뒤 절구를 번쩍 들어 기운을 뽐낸다. 술잔치를 벌이려 흥이 난 사람들 사이로 삼보가 새 옷으로 차려입고 마을을 떠난다. 누군가 어디 가냐고 묻자 그는 “뽕 따러 가네”라고 답한다. 그 말에 사람들은 한 열로 줄 지어 “뽕 따러 가세”를 연창하며 춤을 추고, 삼보는 어느새 고개를 넘어간다. 흥겹던 사람들은 일본 순사의 등장에 일순간 수그러들고, 일을 치른 차림으로 방에 앉은 안협집은 텅 빈 고개를 멍하니 바라본다. 음악은 어느새 구슬픈 피리 가락으로 변한다. 그것이 <뽕>의 초반 10여 분 풍경이다. 스르륵 인물을 소개하고 안팎의 공간을 넘나드는 장면 아래로 분위기를 조율하는 솜씨가 과연 이두용답다. 이두용은 <뽕>의 결말부에서 도입부를 거의 정확하게 반복하며 끝을 맺는다. <뽕>을 다시 보며 깨달은 중요한 사실은, 나도향의 소설이 그런 것처럼 영화의 생명력이 전혀 꺼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생명은 삶의 에너지에서 나오는데, <뽕>은 많은 에너지를 ‘해학’에서 찾을 수 있는 작품이다. 해학의 사전적 의미가 ‘익살스럽고도 품위가 있는 말이나 행동’인 바, <뽕>의 해학은 구수한 대사에서 나온다. 나는 한국의 판소리보다 해학이 넘치는 예술을 본 적이 없다. 서구의 오페라가 아무리 멋지다 한들, 판소리 언어의 리듬과 힘이 뿜어내는 매력에는 비할 바가 못 된다. 근대 이후 예술의 형태에서 사라진 판소리 언어의 매력을 그나마 느낄 수 있는 장르가 시대물이다. 1980년대 해학 시대물은 리드미컬한 언어의 맛을 충실하게 전달하곤 한다. <뽕>의 대사 연기야 두말할 것도 없다. 예를 들어 나도향의 원작에서 삼돌이가 삼보에게 안협집의 행실을 일러바치면서 했던 대사들 - "요놈의 자식아! 내 말을 좀 들어 보고 말을 해! 네 계집 험절을 모르고 댐비기만 하면 강산이냐? 이 동리 반반한 사내양반 쳐놓고 네 계집 건드리지 않은 놈이 없다. 이놈! 꼭 집어 말을 하라면 위에서 아래로 내리섬기마. 이놈, 너도 계집 덕분에 노자냥 노름밑천 푼 좋이 얻어 썼지. 그래 집이라고 오면서 볼받은 것이나마 옥양목 버선 벌이나 얻어 가지고 가는 것은 모두 어디서 나온 것으로 아니? 요 땅딸보 오리궁둥아! 아무리 속이 밴댕이 같기로. 그리고 또 들어 봐라. 나중에는 주워먹다 못해서 뽕지기까지 주워먹었다." - 도 거의 다 살아남았다. 특히 안협집과 삼돌이가 다투는 대사는 압권이다. 삼돌: 포도밭에는 왜 갔었소 그려? 안협: 남이야 어디 가고 안 가고 임자가 알아 뭐할 게여. 나 참 별 꼴사나운 소리 다 듣겠네 원. 삼돌: 아 그리 성낼 거 뭐 입습나, 아 임자 잔등에 포도가 뭉개져 있으니까두루 해보는 말이지. 어디 가서 누워 있다 왔습나. 안협: 아 남이야 어디 가 누워 있다 오든 말든 니가 상관할 게 뭐야, 어이구 참 어이구 비켜. 삼돌: 혼자 먹는 밥이 왜 이렇게 많누 그래. 누가 오기로 했나? 안협: 또 횡설수설하고 있네. 삼돌: 아이고 거 밥 냄새 좋다. 아이 그 뜸이 잘 들었나? 안협: 어이구 비켜, 이 망나니 같으니. 두 사람의 대사 연기 외에도, 양택조 같은 조연배우들이 쏟아내는 대사들은 영화 전체에 리듬과 힘을 제공한다. 따지고 보면 참 신기한 일이다. 1985년이면 전두환 정권이 살벌하던 시절이다. 한국 현대사에서 우울하지 않았던 시간이 별로 없겠지만, 전두환 시절은 특히 끔찍했던 때다. 그 시절에 <뽕> 같은 영화는 흡사 평범한 민초가 죽지 않았음을 방증했던 것처럼 느껴진다. 내 말이 과하다 싶으면 영화를 먼저 보면 될 일이다. <뽕>은 시시한 성애물이 아니다. 힘과 웃음이 살아 숨 쉬는 작품이다. # 이 장면은 꼭! <뽕>에는 많은 사랑스러운 장면이 있으나 그중 유독 좋아하는 게 하나 있다. 영화의 후반부에서 오랜만에 집을 찾아온 삼보가 안협집과 말다툼을 벌이다 손찌검을 하게 된다. 소설과 다르게 영화에서 삼보는 평소 아내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인물이 아니라서 안협집은 코피를 흘리며 실신해 버린다. 놀란 삼보는 의사를 불러 오는데, 안협집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방을 닦다 미소를 짓는다. 그날 밤, 안협집은 흰 종이로 코를 막은 채 누워 있다. 삼보는 돌아 누운 안협집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천장만 보고 누웠다. 안협집은 피로 물든 종이를 코에서 빼낸 다음 흰 문풍지를 찟어 동그랗게 말아 새로 코피를 막는다. 요즘 같으면 솜이나 티슈를 쓸 텐데, 보는 사람의 마음이 짠하다. 여리면서도 강인한 여성이 느껴지는 덕분에 나는 <뽕>에서 이 장면을 제일 좋아한다. 몇 마디로 설명을 해놓았지만 정말 말로 설명하기가 힘든 정서가 깃든 장면이다. 눈으로 직접 확인하길 바란다.
유신에서 신군부 독재로 이어지는 1970~80년대에 대해 ‘한국영화 암흑기’라는 레이블을 붙이는 건 정설처럼 보인다. 사실이었다. 영화는 TV에 밀리고 있었고, ‘반공’과 ‘새마을 운동’을 내세운 국책 영화에 얽매인 영화계는 점점 뒤틀려 갔으며, 사전 심의와 사후 검열 속에서 크리에이티브는 서서히 증발했다. 산업적 토대의 붕괴, 불합리한 제도, 미학적 고갈이 동시에 진행되었던 이 시대는 몇몇 감독들의 개인기로 돌파하기엔 너무 어두웠다. 시스템이 붕괴될 때 가장 대표적으로 드러나는 현상은 무분별한 트렌드 추종이다. 1980년대는 그 정점이었다. 멜로드라마와 문예 영화와 스타 시스템을 토대로 1960년대에 황금기를 구가했던 한국영화는 1970년대에 서서히 무너졌고 1980년대에 난장판이 되었다. 멜로는 여전히 만들어졌지만 예전 같은 힘을 잃었다(진부한 신파의 클리셰에 빠져 있었다). 그 개념은 조금 모호하지만 ‘양질’의 문학 작품을 스크린에 옮겼던 ‘문예 영화’는 더 이상 영화화할 만한 소스를 구할 수 없었다(대신 1970년대부터 최인호나 조해일 같은 새로운 작가가 등장했다). 과거의 스타들은 일거에 물러났지만 그 공백을 채울 만한 스타는 도착하지 않았다( 안성기 가 유일한 희망이었던 시대였다). 1. 한수산 원작의 <거리의 악사>(정지영, 1987) 2. 이문열 원작의 <레테의 연가>(장길수, 1987) 3. 김홍신 원작의 <인간 시장>(김효천, 1983) 4. 미우라 아야코 원작의 <빙점 81>(고영남, 1981) 가장 심각한 건 ‘소스 부족’이었다. 1960년대엔 근대 단편 소설들이 ‘문예 영화’라는 이름으로 애용되었다(여기엔 ‘우수 영화’에 외화 수입 쿼터가 주어지는 현실적 이해관계도 작용했다). 라디오 연속극도 각광 받았고, 때론 일본 영화 시나리오를 그대로 가져온 경우도 있었다. 1970년대는 서서히 재료가 떨어졌고 1980년대에 오면 바닥을 드러낸다. 새로운 광산이 채굴되어야 했다. 이 과정에서 다양한 방식의 하이브리드 현상이 나타난다. 심하게 말하면, ‘돈 될 만한’ 건 뭐든지 끌어다 썼던 1980년대였다. 여전히 ‘문학’은 가장 중요한 원천이었다. 1970년대 최인호와 조해일에 이어 1980년대엔 한수산 이외수 이문열 박범신 등이 베스트셀러 작가로서 영화계의 중요한 원천이 되었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1980년대엔 훨씬 더 대중적인 콘셉트가 강화되었다는 것이다. 『인간시장』 시리즈의 김홍신은 대표적이었으며 김성종 유홍종 백시종 김병총 등의 작가들도 가세했다. ‘시대정신’이었던 에로티시즘도 영향을 미쳤다. 외설 시비에 휩싸였던 염재만의 소설 『반노』가 대표적. <빨간 앵두> (박호태, 1982)도 최희숙의 소설이 원작이며, <매춘> (유진선, 1988)은 『매춘: 전국 사창가와 창녀 실태』라는 사회학 서적에서 온 것이었다. 전통의 부활도 있었다. 한동안 맥이 끊어졌던 문예 영화의 흐름은 에로티시즘을 통해 재등장했고 나도향과 김유정이 소환되었다. 일본 소설도 영화화되었다. 미우라 아야코 원작의 <빙점 81>(고영남, 1981)은 큰 흥행을 거두었고 호즈미 타카노부의 <수렁에서 건진 내 딸>(이미례, 1984), 하시다 스카코의 <오싱>(이상언, 1985), 나쓰키 시즈코의 <W의 비극>(김수형, 1985형) 그리고 이쿠시마 지로의 <한쪽 날개의 천사>(이성민, 1987) 등이 이어졌다. 1960년대 한국영화가, 당시 문화 교류가 없던 일본 소설이나 시나리오를 가져가 음성적으로 번안해 영화화했다면 그 원천을 밝혔다는 점에서 진일보한 모습이다. 미즈키 교코 원작의 만화 『캔디 캔디』도 영화화되었다. 1. <이장호의 외인구단>으로 최재성은 최고의 청춘스타가 되었다. 2. <신의 아들>은 최민수의 데뷔작이다. 3. 강철수 원작의 <팔불출> 4. 한희작 원작의 <한희작의 러브러브>. 가장 강력한 소스는 만화였다. 이현세의 『공포의 외인구단』을 영화화한 <이장호의 외인구단>(이장호, 1986)이 장안을 뒤흔들기 전, 1980년대 초부터 꾸준한 시도가 있었다. 그 시작은 길창덕 화백의 <순악질 여사>(김수형, 1980)였다. 이야기보다는 ‘순악질 여사’라는 캐릭터를 가져온 면이 강하며, 장미희가 주인공을 맡았다. 이후 1980년대에 약 20편가량의 만화 원작 영화가 등장하는데, 스포츠 신문 연재나 만화 가게나 당시 쏟아지던 만화 주간지를 통해 대중적 인지도를 쌓은 터에 흥행성이 꽤 괜찮았다. 이현세를 주로 이야기하지만, 이 시기 만화 원작 영화의 주요 인물은 강철수였다. <팔불출>(고응호, 1980)의 원작자였던 그는 이후 영화 쪽에 큰 관심을 보이며 <사랑의 낙서>(심재석, 1988)엔 아트 디렉터로 참여했고, 1989년엔 <발바리의 추억>으로 직접 메가폰을 잡는다. <가루지기>(1988)의 고우영 감독도 만화가에서 영화감독으로 잠시 업종 전환을 한 케이스인데, 1980년대의 만화는 충무로에 원작뿐만 아니라 인력도 공급한 셈이다. 그리고 <이장호의 외인구단>이다. 당시 프로야구 열풍과 이현세의 만화에 대한 컬트적 반응을 힘입은 이 영화는 영화 제목에 ‘공포’가 들어가선 안 된다는 당시의 심의 규율 때문에 『공포의 외인구단』에서 <이장호의 외인구단>으로 개명해야 했는데, 이것이 액땜이 되었는지 서울에서 약 28만 7,000명의 관객을 동원하는 빅 히트를 기록한다. ‘까치’ 오혜성 역을 맡았던 최재성은 당대 최고의 청춘스타가 되었으며, 동네 전파사마다 정수라가 부른 주제가 ‘난 너에게’(“난 네가 기뻐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가 흘러나왔다. 프로야구의 인기, 이장호 감독의 흥행력 등 이 영화의 성공 원인엔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핵심은 이야기였다. 당대 한국영화와 비교해볼 때 이 영화가 지닌 극적 요소는 두 배 정도는 셌다. 강한 승부욕, 목숨을 건 순애보. 팽팽한 긴장 관계, 뼈를 깎는 극기 정신…. 떡볶이로 치면 고추장이 아닌 캡사이신 맛이었고, 그 강렬함에 젊은 관객들은 반응했다. 이 영화의 성공으로 일련의 스포츠 원작 영화가 등장하는데, 박봉성의 『신의 아들』, 이현세의 『지옥의 링』, 허영만의 『카멜레온의 시』 등 복싱 소재 만화들이 영화화되었다. 1980년대 ‘복싱’은 여전히 있기 있는 스포츠였고, 여기에 혹독한 트레이닝과 청춘의 고독과 비극적 로맨스가 결합되었다. 안타까운 건 원작을 따라가지 못했던 인기였는데 완성도가 문제였다. 여기서 빼놓을 수 없는 트렌드는 역시 ‘에로티시즘’이며 스포츠 신문 연재를 통해 성인 만화의 흐름을 이끌었던 한희작과 배금택은 주역이다. <서울 손자병법>(김현명, 1986)이 한희작의 원작이 지닌 지명도에 기대 제목 정도만 가져 왔다면, <한희작의 러브러브>(윤석태 김정진, 1991)은 아예 제목에 작가의 이름을 드러낸다. 당대의 섹시 아이콘인 강리나는 만화 캐릭터를 별 위화감 없이 소화하는데, 이후 배금택 원작의 <변금련>(엄종선, 1991)에서도 캐릭터와의 높은 싱크로율을 보여준다. 하지만 만화 원작 영화의 흐름은 1990년대엔 뜸해진다. 이현세가 직접 연출을 맡은 <아마겟돈>(1996)이나 김수정의 <아기공룡 둘리>(1996) 등 극장용 애니메이션 쪽에서 성과를 냈고, 이현세의 『카론의 새벽』을 옮긴 <테러리스트>(김영빈, 1995)와 허영만 원작의 <비트>(김성수, 1997)가 흥행했지만 1980년대만큼의 양적 성과를 내지 못한다. 다시 그 붐이 일게 된 건 2000년 이후. 여기엔 웹툰의 등장이 큰 역할을 했다. 1. <멋대로 해라>의 혜은이와 김동현. 그들은 이후 부부가 된다. 2. <너무 합니다>의 원작자이자 주인공인 김수희. 3. 박남정 주연의 <새앙쥐 상륙 작전> 4. <담다디>의 이상은과 민규. 최근 한국영화계에서 아이돌 출신 연기자들의 활약이 돋보이긴 하지만, 가요계와 영화계의 크로스오버 현상은 이미 1980년대부터 시작되었다. 이전 1960년대부터 주제가는 영화 흥행의 중요한 요소였고, 남진이나 나훈아 같은 슈퍼스타들이 은막에 진출하기도 했지만, 1980년대는 남달랐다. 지금으로선 상상할 수 없지만, 이 시기엔 당대의 히트곡 제목을 그대로 딴 영화들이 쏟아졌다. 그 노래를 부른 가수가 출연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며, 영화 내용도 노래 가사와 대부분 무관했다. 오로지 노래 제목의 인지도를 이용한 경우들인데 조용필의 ‘창밖의 여자’와 ‘비련’, 와일드 캣츠의 ‘마음 약해서’, 심수봉의 ‘그때 그 사람’, 윤시내의 ‘난 모르겠네’와 ‘열애’, 이정희의 ‘참새와 허수아비’, 김현준과 민해경의 ‘내 인생은 나의 것’, 임수정의 ‘연인들의 이야기’, 주현미의 ‘비 내리는 영동교’, 최진희의 ‘사랑의 미로’, 이선희의 ‘J에게’, 최성수의 ‘풀잎 사랑’ 등 수많은 히트곡들이 그 제목을 충무로에 빌려주었다. 물론 가수가 직접 영화에 출연한 경우들도 있었다. 지난 연재에서 이야기했던 전영록이나 송골매, 김형용 같은 청춘 영화의 스타들은 대표적인 경우. 이외에도 <나를 보러 와요>(이유섭, 1980)의 방미, <슬픈 계절에 만나요>(박남수, 1981)의 백영규, <잊혀진 계절>(이형, 1984)의 이용, <담다디>(김응천, 1989)의 이상은, <울고 싶어라>(배해성, 1989)의 이남이, <앗싸! 호랑나비>(원정수, 1989)의 김흥국 등은 노래의 주인공이 직접 카메라 앞에 서는 경우들이었다. <너무 합니다>(남석훈, 1984)은 김수희의 자전적 이야기로, 그녀는 원작자이자 주연 배우로 참여한다. 노래와 상관없이, 가수 자체의 인기로 영화계에 진출하는 경우도 많았다. <아낌없이 바쳤는데>(박호태, 1980)의 심수봉, <멋대로 해라>(김정현, 1980)의 혜은이(1970년대부터 배우 활동), <그 사랑 한이 되어>(이형표, 1981)의 조용필, <날마다 허물 벗는 꽃뱀>(강대선, 1982)의 이은하, <흑녀>(강대선, 1982)의 인순이, <졸업 여행>(오성환, 1985)의 김범룡, <새앙쥐 상륙 작전>(김정진, 1989)의 박남정 등이다. 연기력을 인정받진 못 했지만, 당시 이 영화들은 그 화제성으로 이슈가 되었다. 당시 가요계와 영화계의 끈끈한 관계는, 가요 쪽의 붐에서 기인했다. 트로트 중심이었던 한국 대중가요는 1980년대 완전히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며 대중문화의 중심이 되었고, 아이돌 문화를 형성했다. 이 시기 침체기를 지나던 영화계는 가요계의 호황을 이용하려는 수많은 기획을 시도했고, 그 결과 수많은 ‘가요적 영화’들이 등장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런 영화들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그 흐름은 한국영화가 자생력을 서서히 지니기 시작하는 1990년대가 되면 사라지기 시작했다. 1980년대 충무로가 수혈받았던 또 하나의 원천이 있었다면 바로 TV의 코미디언과 개그맨이었다. 이전에도 영화와 방송을 겸하는 수많은 희극인들이 있었고 그 전통은 이주일로 이어졌다. 특히 <뭔가 보여드리겠습니다>(김수형, 1980) <조용히 살고 싶다>(김수형, 1980) <얼굴이 아니라 마음입니다>(이형표, 1983) 등의 ‘유행어 영화’는 작은 트렌드를 이뤄 <웬일이니>(김종성, 1983) <난 이렇게 산다우>(남기남, 1985) 등으로 이어졌다. 이것 역시 대중문화의 인기를 영화로 끌어오려는 기획이었다. 새로운 경향은 개그맨들의 진출이었다. ‘아동용 SF 액션’에 대한 지난 연재에서 언급했듯, 1980년대의 수많은 개그맨은 SF 프랜차이즈의 중심이 되었는데, 그들은 아이들 영화를 벗어나 성인용 영화에도 종종 출연했다. 이외에도 서세원 주병진 김명덕 김형곤 김병조 등 당대의 인기 개그맨들은 대부분 영화계와 만났으며 전유성은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비디오 영화를 직접 연출하기도 했다. 1. <뭔가 보여드리겠습니다>의 이주일. 2. <회장님, 우리 회장님>(엄종선, 1988)은 개그 프로그램을 영화화했다. 3. 주병진과 이미숙이 주연을 맡은 <가슴 깊게 화끈하게>(김수형, 1981) 4. 리메이크 영화인 <미워도 다시 한번 1980 - 1부>(변장호, 1980). 1980년대는 침체를 벗어나기 위한 강렬한 생존 욕구로 인해 숱한 하이브리드 현상이 일어났던, 용광로 같은 시기였다. 대중 문학계든 가요계든 만화계든 희극계든, 노래 제목이든 유행어든, 대중의 관심을 끌 수 있는 요소가 있다면 주저하지 않고 접목시켰으며 그 중엔 적잖은 성공도 있었고 대부분의 실패가 잇따랐다. 수많은 속편 영화들이 있었고 리메이크도 적잖았으며 애교(?) 섞인 표절도 종종 있었다. 아무튼 살기 위해 모든 것을 했던 시절이었다. 새삼 던져보는 질문. 1980년대는 과연 한국영화의 침체기였나? 표면적으로는 그럴 수도 있겠지만, 이면을 살짝 엿보면 이 시대만큼 역동적이었던 시대도 드물다. 장르적으로 매우 다양했고, 영화 이외의 분야와 끊임없이 접점을 만들어갔다(그런 점에서 2000년 이후 한국영화 르네상스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생존을 위한 분투. 1980년대는 천박한 상업주의와 여기에 저항하는 힘, 과거의 관습을 지속하려는 의지와 돌연변이 같은 존재들이 뒤엉켜 기묘한 연대기를 써 가던 시대였다. 이 시대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은 이유는, 어쩌면 이토록 미로처럼 뒤얽힌 상황 때문일 것이다.
<애마부인>, 에로영화 시대의 개막 <애마부인>(정인엽, 1982)은 한국영화사에서 이른바 ‘에로영화’ 2) 붐을 일으킨 영화다. 이에 대해 1980년대 3S 정책과 검열의 완화가 그 배경이 되었다고 이야기하곤 한다. 물론 신군부의 전반적인 문화정책이 에로영화 제작 붐에 영향을 미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신군부가 검열을 완화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는 보기 어렵다. 기본적으로 신군부는 박정희 정권의 검열 시스템을 답습하였고 검열 원칙에서 변한 것은 없었다. 오히려 <애마부인>이 상징하는 변화는 1980년대의 사회 전반의 변화― 민주화의 요구와 자본주의의 발달에 수반된 통금해제와 유흥문화의 확산, 컬러TV와 홈비디오의 보급 등―를 계기로 1960년대 말 이후 억압되었던 욕망이 터져 나온 것이라고 봄이 보다 적절하다. 다시 말해 신군부의 정책에 의해 에로영화 붐이 일어났다기보다는 사회 전반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자유화의 물결을 신군부가 더 이상 막을 수는 없었고, 그 흐름 중 하나가 에로영화였다는 것이다. 실질적으로 한국영화계에서의 에로영화 붐은 세계적인 성 자유화의 조류와 함께 1960년대 말에 이미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1970년대 내내 강고한 검열에 의해 억압되었다. 그러면서도 성을 표현하려는 노력은 계속 경주되었고 외설 논란도 끊이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서구 섹스영화에 관한 정보가 해외토픽으로 소개되며 이러한 흐름이 거스를 수 없는 것임을 에둘러 드러내고 있었다. 그러다 1980년대에 들어서자 그러한 정보부터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예컨대 1980년에는 <칼리귤라 Caligula>(1979)가 영국에서 말썽이 되고 있다는 기사 3) 가, 1981년에는 그리스가 영화 검열을 폐지했다는 기사 4) 가 보도되었다. 이러한 흐름에 부응하며 한국에서도 억압되었던 욕망이 표출되기 시작했다. <애마부인>이 개봉하기 전 해인 1981년에는 ‘에로티시즘 영화’라는 문구를 전면에 걸고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정진우, 1980)와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정진우, 1981)가 개봉하여 크게 흥행했다. 그 뒤를 이어 1982년 2월에 <애마부인>이 개봉하여 흥행 돌풍을 일으켰다. 같은 해에 <우편배달부는 벨을 두 번 울린다 The Postman Always Ring Twice>(1981)와 <보디히트 Body Heat>(1981)가 수입되어 관객동원 1위와 3위를 기록함으로써 5) 그야말로 1982년은 에로영화의 해가 되었다. 이러한 과정으로 볼 때 신군부의 3S 정책 중 적어도 영화[Screen] 부문은 처음부터 치밀하게 의도된 전략이 있었다고 보이지는 않는다. 다만 더 이상 흐름을 거스를 수 없는 민주화·자유화의 국면에서 집권한 신군부는 사회비판보다는 성적인 표현에 관대한 것이 낫다는 선택적 판단을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애마부인> 이후 에로영화가 양산되자 검열이 1970년대 후반 기준으로 다시 강화되었던 것은 검열의 본질, 나아가 정권의 본질이 변하지 않았음을 드러내었다. [그림 1] <애마부인>(정인엽, 1982)의 포스터. 한글로 쓴 제목 위에 ‘愛麻夫人’이라는 한자표기가 보인다. 이는 검열 과정에서 외설스럽다는 이유로 변경이 강제된 제목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 위에 나신으로 말을 타고 있는 애마(愛馬)의 모습이 보이고 있어서 아이러니하다. [그림 2] 염해리[김부선]가 주연을 맡은 <애마부인3>(정인엽, 1985)의 포스터. 역대 ‘애마’를 누가 맡느냐는 큰 관심사였다. 원조 애마인 안소영을 비롯해 오수비, 김부선 등이 ‘애마’ 역으로 데뷔했다. [그림 3] <애마부인>은 13탄까지 제작되며 한국영화사에서 에로영화를 대표하는 시리즈로 자리 잡았다. <애마부인13>(김성수, 1966)은 비디오영화로 제작되어 정식 시리즈에 넣지 않기도 한다. <파리애마>(정인엽, 1988)와 <짚시애마>(이석기, 1990), 그리고 최근에 나온 <애마부인2016>(김미연, 2016)까지 포함하면 <애마부인> 시리즈는 16편에 이른다. 보수와 외설, 그리고 검열의 친연성 1970년대에는 강력한 검열로 인해 ‘외설’에 해당하는 신체부위의 노출이 거의 불가능했다. 그런데 통제와 불황의 늪에서 성적인 표현은 영화계가 그나마 해볼 수 있는 유일한 돌파구이기도 했다. 이에 영화계는 예술을 내세우며 외설을 추구하였는데, 한편으로 그것은 표현의 자유를 확대한다는 명분을 지니기도 하였다. 그러나 1970년대 후반으로 갈수록 성적인 표현이 스크린에서 이루어지기는 점점 더 힘들어졌다. 그럼에도 그것을 모면해 보려는 영화계의 안간힘 속에서 성적인 표현은 도착적 환영의 영역이 되어갔다. 그 왜곡된 이미지가 스크린에 재현되는 것이 1980년대였고, 그 대표작이 바로 <애마부인>이었다. <애마부인>은 표면적으로는 강력한 가부장제의 윤리를 역설하면서 이면에서는 욕정을 참지 못하는 여주인공을 통해 외설을 보여주는 모순적인 영화다. 이 영화는 남편의 배신과 귀환, 그리고 그에 따른 애마의 일탈과 귀환으로 이루어져 있다. 애마는 남편의 배신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일탈하지만, 결국 남편에게 돌아옴으로써 아내로서의 자리를 지킨다. 이 영화에서 애마는 매우 도덕적이고 정숙한 아내이자 좋은 어머니이기도 하다. 이러한 애마에 대해 적대적인 시어머니나 시누이와 달리 시아버지(김진규)는 애마를 이해하고 아낀다. 그럼으로써 그는 애마로 하여금 가부장제의 이념에 충실하게 만드는 가부장 이데올로기의 수호자이기도 하다. 결국 애마는 시아버지의 뜻에 따라 가정으로 돌아가게 된다. 이와 같은 보수적 주제 아래에서 애마가 보여주는 성적 행동은 철저히 대상화되어 있다. 이 영화에서 애마의 성충동을 묘사할 때 주로 쓰이는 것은 클로즈업이다. 이 영화에서는 과도할 정도로 익스트림 클로즈업이 사용되고 있으며, 대부분 그것은 혀가 살짝 드러날 만큼 반쯤 벌어진 입술과 몽롱한 눈을 중심으로 애마의 얼굴에 집중된다. 여기에 더해지는 것이 애마의 몸을 더듬는 듯한 패닝, 그리고 말을 탈 때 말의 둔부와 맞닿는 애마의 둔부와 다리 등을 반복적으로 보여주는 것 등이다. 프레임으로 절단된 여성의 육체를 성적 도발의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것은 1970년대 검열이 보여준 페티시즘적 시선과 유비된다. 여기에 전제되어 있는 관점, 즉 여성을 성적인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시선은 이 영화에서 애마의 모든 행동에서 성충동을 연상시키는 것에서도 발견된다. 애마는 혼자 자면서도 몸의 선이 드러나는 슬립이나 슬리브리스 네글리제를 걸친다. 심지어 시골 친정에 내려가 밭 매고 똥지게를 지면서도 밤에는 흰색 네글리제를 입는다. 그녀는 침을 맞으면서도 붉은 카펫 위에 엎드려 알몸으로 입술을 반쯤 벌린 채 성충동에 사로잡히고, 아침에 개울에서 세수를 할 때에도 다리를 벌린 채 둔부의 곡선이 한껏 드러나는 포즈로 얼굴과 목선을 쓰다듬는다. 남편을 면회하는 창 앞에서는 손가락을 잔뜩 벌려 침대를 움켜잡듯 하고는 입김을 불어넣으며 “헤어지자는 얘기는 진심이 아니 었져? 당신도 날 사랑하고 있져? ”라고 입술이 닫히지 않는 형태로 서술어미를 발음한다. 그리고 이러한 애마를 보여주는 방식은 엿보기이다. 카메라는 애마의 성욕에 사로잡힌 얼굴을 클로즈업으로 제시하면서 관객으로 하여금 그녀의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상상을 관음하게 만든다. 또한 그녀의 밀실에 잠입하여 사생활을 엿보는 긴장과 쾌감을 준다. 이는 에로티시즘 영화에서는 일반적인 것이라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이 영화에서는 유난히 애마의 일정한 신체 부위와 성욕이 강조되며 애마는 관객의 성충동을 만족시키기 위해 엿보는 대상으로 최적화 되는 경향이 강하다. 그녀의 옷차림도 그 아래에 언뜻언뜻 비치는 알몸에의 엿보기를 충동한다. 마지막에 그녀가 동엽을 만나러 가는 장면에서는 그것이 폭발적인 형태로 표출된다. 애마는 성충동에 못 이겨 흰색 네글리제 바람으로 동엽에게 달려가는데, 마침 폭우가 쏟아지고 그녀의 네글리제는 비에 젖고 나뭇가지에 찢어지며 몸을 부분적으로 노출한다. 그리고 카메라는 치마 속을 들여다보는 각도로 그 부분들을 집중적으로 클로즈업하여 번갈아 보여준다. <애마부인>은 여러 가지 면에서 당시에 음성적으로 유통되었던 <엠마누엘 Emmanuelle>(쥐스트 재캥, 1974)을 연상시킨다. 유한마담의 설정, 말을 타는 여자, 친구와의 동성애 관계, 여주인공의 상상을 통한 외설적 장면 제시, 몽환적인 영상 처리, 그리고 주인공이 화장대 앞에 앉은 모습으로 끝나는 장면의 유사성 등이 모두 그러한 예에 해당한다. 그러나 그러한 장면을 재현하는 방식은 <엠마누엘>에 비해 훨씬 타자화되어 있으며, 매우 분열적이다. 표면적으로는 가부장적 윤리에 충실한 현모양처를 표방하면서 이면에서는 타자의 성욕에 의해 대상화되는 것이다. 그 결과 <애마부인>은 낮에는 현모양처, 밤에는 창녀의 표상을 지니는 ‘성욕이 강한 도시 주부’를 관객의 성충동을 자극하는 ‘정숙한 창녀’ 6) 캐릭터로 조형한 소프트 포르노그래피가 된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맥락이 결여된 도착성과 일견 그것에 어울리지 않는 보수적 주제가 1970년대 검열의 시선과 명분에 유비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요컨대 <애마부인>은 1970년대 검열에서 금지함으로써 오히려 부추겼던 외설적 상상력을 드러내는, 1970년대를 거치며 정향된 음화의 결정판이었다. <애마부인> 검열의 경과 앞서 말했듯이 1970년대 검열의 원칙은 1980년대에 들어서도 여전했다. 그러니 <애마부인>의 검열과정이 순탄할 수는 없었다. 우선 1980년대에도 1970년대와 마찬가지로 영화는 사전검열을 받아야 했다. 다시 말해 영화사는 영화를 제작하기 전에 신고를 해야 했고 영화의 시나리오를 검열 받아야 했다는 것이다. <애마부인>의 검열 과정에서 가장 문제가 된 것은 시나리오였다. 검열 당국은 대본검토 단계에서 ‘전면 재검토’하라고 제작사에 시정통보를 내린다. 문제점으로 지적된 것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영화 제목이 내용과 무관하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작품의 전개에 있어서 외설, 퇴폐성이 짙어 성도덕이나 가정윤리를 저해할 우려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 근거로 36개의 장면이 성적 표현 때문에 문제가 되었다. [그림 4] 「극영화 <애마부인> 제작신고에 대한 회신」(발신: 문화공보부 장관, 수신: 연방영화(주) 최춘지), 문화공보부, 1981.10.15. 그러자 제작사는 통보받은 지 엿새 만에 다음과 같은 신구대조표를 첨부하여 문제가 된 장면들을 모두 수정하겠다는 각서와 함께 제작신고서를 다시 제출한다. [그림 5] 「극영화 <애마부인> 제작신고」(발신: 연방영화(주) 최춘지, 수신: 문과공보부장관), 연방 제79호, 1981.10.21. [신구대비표] 제작사가 예술성을 내세우며 수정을 거부하지 않고 검열당국의 지적에 따라 순순히 시정하겠다고 한 태도가 좋게 보여서인지, 제작사와 검열 당국 간의 물밑 교섭이 있었는지 등에 대해서는 검열문서로 확인할 수 없다. 아무튼 제작사의 자진 개작 이후 <애마부인>은 비교적 부드러운 ‘유의사항’을 통보받는 선에서 제작신고가 수리되었다. 유의사항의 내용은 “제명을 변경하고 신체 과도 노출 및 정사 장면을 순화 또는 삭제하는 한편, 외설스러운 작품이 되지 않도록 주의하여 예술적으로 승화된 작품을 제작”하라는 것이었다. 여기에 “제명은 반드시 한자로 표기토록” 하라는 제한사항이 덧붙여져 있다. 이는 ‘애마(愛馬)’가 외설스럽다고 하여 한자 표기를 ‘愛麻’로 수정했으니, 그것을 반드시 표시하라는 것이었다. [그림 6] 「극영화 <애마부인> 제작신고에 대한 유의사항 통보」(발신: 문화공보부장관, 수신: 연방영화(주) 최춘지), 문화공보부 예일 1724-19796, 1981.11.7. 이에 제작사에서는 ‘제명 변경 신청’을 하여 승인을 받는다. 이 과정에서 제목과 내용이 부합해야 한다는 검열 당국에 명령에 맞추어 주인공의 이름은 ‘오수비’에서 ‘이애마’로 바뀌었다. [그림 7] 「극영화 제명 변경 승인」, 문화공보부 1724-20627, 1981.11.27. <애마부인>이 시나리오 검열 과정을 통과하여 제작된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글래머 안소영 전라(全裸) 출연 영화”로 화제가 되었고, 필름 검열에서 어떤 결과가 나올지가 초미의 관심사가 되었다. 이 영화의 전례 없는 과감한 노출은 신군부 정권의 검열 수위를 가늠해보는 층샛돌이 된 셈이었다. 우리나라 여배우중 가장 가슴이 크고 육감적이라는 안소영이 주연이며 탤런트 임동진이 처음으로 영화에 출연하고 하명중, 하재영도 공연하고 있어 캐스트로도 중량급이다. 네거티브 몽타주 수법 등 특수촬영기법(이석기)을 도입, ‘상당히 끈적끈적한 화면’으로 평가된 이 영화는 아직 검열 전이어서 엄격한 이 과정에서 얼마만한 관용(?)을 얻을까 벌써부터 궁금하다. 7) 그런데 <애마부인>은 필름 검열 단계를 큰 제재 없이 통과한다. 예고편은 말 위의 다리 노출 장면과 말 위의 애마 모습이 나오는 화면 2개 처만 삭제하는 조건으로, 본편은 “신체 과도 노출 및 정사장면 3개 처”만 단축하는 조건으로, ‘연소자관람불가’ 등급을 받으며 검열에 합격한 것이다. 이에 개봉 전부터 화제가 되었던 “안소영을 알몸으로 말에 태워 달리게 한 장면”이나 “환상적인 남자와의 관계를 마라톤 달리기 식으로 처리한 대담한 장면” 8) 은 완전히 삭제되지는 않은 채 연(軟)초점화나 단축된 형태로 공개될 수 있었다. [그림 8] 「<애마부인> 영화예고편 검열 합격증」, 문화공보부 제6053C1-123호, 1982.1.16. [그림 9] 「영화검열 합격증」, 문화공보부 6060C1-6호, 1982.1.28. <애마부인>은 개봉하자마자 “TV, 영화에서의 여성해방 기류” 9) 를 상징하고, “탈선한 유부녀를 긍정적 시각으로 묘사한” 10) 파격적인 영화로 소개되며 흥행돌풍을 일으켰다. 11) 게다가 통금이 해제되고 심야극장이 운영되면서 심야영화관의 ‘미드나잇스페셜’ 첫 프로로 선정되었다. 12) <애마부인>으로 촉발된 “관능영상(官能映像)의 세찬 바람!!” 13) 은 ‘성인용 에로물 제작붐’으로 이어진다. 14) <애마부인>을 통해 증명된 검열의 완화가 불황에 허덕이던 한국영화 시장에 불을 지핀 셈이었다. 같은 해에 개봉한 <반노>는 제작신고서에 아예 ‘완전성인영화’로 분류되어 검열을 통과하기도 했다. 마침 비디오영화 시장이 활성화되기 시작하고 있었던 것도 한 몫을 했다. 이후 이러한 흐름은 ‘-부인 시리즈’로 이어지며 홈비디오 시장에서 인기를 누리게 된다. 1980년대 검열의 원칙은 1970년대에서 달라진 것이 없었지만 이제 검열로는 어쩔 도리가 없는 매체 환경이 조성되고 있었고, 행정적 검열보다 강력한 자본의 검열이 그 힘을 드러내기 시작하고 있었다. 1. 이 글은 박유희, 「검열이라는 포르노그래피」, 한국영상자료원 편, 『한국영화역사 속 검열제도』, 한국영상자료원, 2016.12, 190-201쪽의 내용을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2. ‘에로(티시즘) 영화’라는 말이 사용되기 시작되는 것도 1969년경부터 주로 섹스영화의 미학을 논급하면서부터였다. 이후 이 용어가 본격적으로 사용되는 것은 1981년으로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에 대해 “원시적인 자연세계를 통해 인간의 본능과 욕정을 그린 농도 짙은 에로티시즘 영화”(「<뻐꾸기도 밤에 우는가>」, 『동아일보』, 1981.3.16.12면.)라고 부르면서부터이다. 그리고 1982년에 <애마부인>이 나오면서 급격하게 사용 빈도수가 높아졌다. <애마부인> 이후 ‘에로영화’는 한동안 19금 섹스영화를 가리키는 장르 명칭으로 받아들여진다. 3. “로마時代 섹스 映畫 英 검열통과로 말썽”, 《동아일보》, 1980.09.27.3면. 4. “希 映畫 검열 폐지”, 《경향신문》, 1981.10.31.4면. 5. 《동아일보》, 1982.06.22.12면; 《동아일보》, 1982.12.15.12면. 6. 캐스린 노버그는 포르노그래피에 등장하는 여성인물을 크게 정숙한 창녀, 희생자적 창녀, 자유사상의 창녀로 분류한다. 캐스린 노버그, 「자유사상의 창녀: 마르고에서 쥘리에트까지 프랑스 포르노그라피 속의 매춘」, 린 헌트 편, 조한욱 옮김, 『포르노그래피의 발명: 외설성과 현대성의 기원 1500~1800』, 상지사, 1996, 275-308쪽 참조. 7. “글래머 안소영 全裸 출연 영화 <애마부인> 檢閱과정”, 《경향신문》, 1982.01.16.12면. 8. “글래머 안소영 全裸 출연 영화 <애마부인> 檢閱과정”, 《경향신문》, 1982.01.16.12면; “안소영 육감적 演技 자랑/ 첫 主演 ‘愛馬부인’이 ‘愛麻부인’으로/ 풍만한 가슴에 정사신 대담/ 半裸로 안장 없는 말 타기도”, 《동아일보》, 1982.02.04.12면; “지금 애마부인이 몸 전체로 숨가쁘게 달려온다”, 《동아일보》, 1982.02.01.7면. 9. 《동아일보》, 1982.01.16.11면. 10. 《동아일보》, 1982.01.16.11면. 11. “1회부터 전회매진열풍”, 《매일경제》, 1982.02.24.14면. 12. “심야에도 영화 상영한다”, 《매일경제》, 1982.03.19.9면; “영화가 심야극장 첫선 <애마부인> 자정관객 만원”, 《동아일보》, 1982.03.29.12면. 13. 《동아일보》, 1982.02.04.6면. 14. “성인용 에로물 제작붐”, 《동아일보》, 1982.02.04.12면; “벗기는 映畫가 主流/ 下半期 邦畫 製作 30篇”, 《동아일보》, 1982.09.06.10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