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복
- 감독
- 김영민
- 제작년도
- 2004
2019년 대구사회복지영화제 중 상영 전 작품 소개 왜 대구에서 영화글을 쓰나요? 그 소박하면서도 긴 여정 2025년 가을, 대구·경북에서 지난 10여 년간 나온 100여 편의 영화를 소개하는 책을 한 권 출간했다. 그저 몇 년 동안 꾸준히 기록해 온 글 모음일 뿐인데, 이런 유형의 작업은 최초라는 소릴 여기저기에서 듣는 중이다. ‘지역’에서 영화 관련 글을 쓰고 활동한다는 소개를 하면, 대개 접하는 반응은 두 갈래로 나뉘게 마련이다. 1) ‘얼마나 수고(혹은 고생) 많으냐’, 2) ‘거기에서 어떻게 (제대로) 활동하느냐’다. 둘의 온도는 차이가 크지만, 배경은 거의 다르지 않다. ‘지역’에서 영화를 논하기 어렵다는 전제다. 영화 평론집을 내고 ‘작가’란 어색한 호칭을 종종 듣지만, 평론가를 지망한 적은 딱히 없었다. 영화와 무관한 일을 하며 받는 업무 스트레스를 풀고자 영화제에 종종 다니던 게 조금 유별난 점이란 정도? 그러다 조금씩 지역의 독립·예술영화 극장과 소규모 상영회에도 간간이 다니게 되기 시작했다. 그러다 불쑥 상영회를 열어보겠다는 꿈이 생겼다. 그렇게 모든 재앙(?)이 출발한다. 상영회를 열며 소소한 영욕을 쌓아간다. 관련 활동을 이어가니 주변에서 알아차리게 된다. 영화를 매개로 한 교육이나 사업 기획이 생업에 침투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공사 구분이 허물어지자 화근은 종잡을 수 없이 커진다. 마침내 영화제를 열어보자는 제안이 나오고, 실무를 떠맡게 된다. 그렇게 2010년, 대구사회복지영화제가 시작된다. 영화제 자원활동가도 한 번 하지 않고 졸지에 영화제를 책임지게 된 셈이다. 이후 10년간 좌충우돌 행각이 이어졌다. 저서 『경계의 영화: 대구영화라는 낯선 풍경』(2025, 대구경북영화영상사회적협동조합) 소 뒷걸음질 치다 쥐잡기? 어쩌면 필연을 가장한 우연 영화제 관객으로 다녔을 뿐, 실무는 관람과는 차원이 달랐다. 작품을 발굴하고, 상영작을 수급한 다음 행사를 차질 없이 진행하기 위해 온갖 문제를 해결해야만 했다. 관객의 다양한 수요를 예측하고 대응하는 건 물론, 정산과 평가까지 마쳐야 행사 하나가 끝난다. 온갖 사건 사고를 겪으며 경험과 교훈을 얻었다. 무엇보다 영화를 선별하는 안목이 얼기설기 형성되어갔다. 작지만 내실 있는 영화제를 꾸린다는 건, 실무적으로 경험이 축적되는 것과 함께, 무엇보다 자신만의 선구안이 형성되기에 가능한 일이다. 해당 영화제가 지향하는 가치, 공유하고 싶은 주제가 (영화제가 상정하는) 관객과 접점을 형성하기 위해선, 개별 ‘취향’과는 구별되는 ‘지향’이 필수다. 영화제를 통해 프로그래머의 가치와 덕목을 어렴풋이 깨우쳐 나갔다. (좌) 2019년 대구사회복지영화제 중 단편2 섹션 상영 후 관객과의 대화 (우) 2018년 전태일 노동영화제 중 < 사수 >(김설해, 정종민, 조영은, 2018) 상영 후 관객과의 대화 며칠에 불과한 영화제 동안 소개할 수 있는 프로그램은 뻔하다. 여건의 한계로 미처 소개하지 못한 작품이 잔뜩 쌓이게 마련이다. 추가 상영을 향한 갈증은 별도의 상영회로, 사전 제작 지원으로 자연스럽게 향한다. 물론 새로운 도전이니 풀어야 할 과제가 수북하다. 용케 고비를 넘기며 소박한 성과를 이룰 때마다 욕심은 더욱 커져만 갔다. 지역 영화제는 서울과 비교해 너무도 취약한 다양한 영화와, 이를 매개로 한 프로그램에 목마른 지역 관객에게 부족하게나마 극장의 대체재로 기능한다. 그 특성을 깨닫는 순간, 무형의 책임이 어깨에 내려앉는다. 우리 지역에 반드시 그 존재를 알리고 싶어 하는 작품은 무엇일까? 턱없이 부족한 자원과 기회를 어떻게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을까? 우선순위를 정하는 기준은 무엇이 되어야 할까? 최적화 모델을 찾기 위한 계산과 순수한 열망이 끝없이 충돌하며 개인의 욕망과 지역 영화문화의 공공성이 외줄타기를 거듭했다. 맨땅에 헤딩하기로 얻는 찰나의 행복, 일상의 갈증 지속 가능한 영화제를 내실 있게 꾸리고, 여력 닿는 한 온갖 명목으로 공동체 상영회를 기획하고, 영화제 프로그래머란 직함으로 여기저기 영화를 소개하는 자리에 나가거나 글을 기고하게 된다. 자연스러운 순서다. 이름을 걸고 적합한 작품을 추천해 기대 효과를 충족해야 한다. 다양한 수요가 예상치 못하게 불쑥 제기되더라도 늘 열과 성을 다해 의뢰에 응대할 때만 후일을 기약할 수 있다. 어느새 업계 관계자(!)가 되어버린 상황에서, 그에 걸맞은 책무를 수행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 할 일은 점점 늘었다. 물론 대부분은 누가 강요한 게 아니다. 그래도 하면 좋을 듯하거나 필요할 일이란 생각에 자발적으로 벌인 일이다. 그러니 잘 안 풀려도 하소연하거나 누굴 원망할 수 없다. 그러나 못내 서운한 마음은 어쩔 수 없다. 그렇게 찰나의 보람과 일상의 고민이 쌓여만 갔다. 그러다 2020년 코로나19가 터졌다. 영화제나 상영회를 지속하기가 어려워졌다. 설상가상 건강에 문제가 생겼다. 오랜 입원 기간 동안 아무것도 할 게 없었다. 외출도 면회도 통제된 가운데, 다행히 와이파이는 잘 터졌다. 노트북을 켜고 영화를 본다. 하지만 허전함은 여전했다. 영화를 소개하고 나누는 재미가 없었던 탓이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렇게 본격적으로 영화에 관한 글쓰기를 시작했다. 영화제 일을 하면서 조금씩 글을 쓰긴 했지만, 대개 작품 소개를 위한 한정된 분량과 용도에 그쳤다. 긴 글을 쓸 여력도 없고, 쓴다고 해도 게재할 지면이 지역엔 딱히 없었던 탓이다. 영화를 소개하는 건 글보다는 상영 기획으로, 혹은 종종 들어오는 방송 프로그램으로 수행해 왔다. 외부 조건의 극단적 변화로 그 경로가 변경되어야 할 상황이 닥치자, 자연스레 영화글 쓰기로 중심이 이동된 셈이다. 그러다 보니 그냥 쓰고 싶은 작품에 관한 글쓰기가 아닌, 보다 선택과 집중에 의한 작업을 구상하게 된다. 일단 다양한 영화를 소개해야 하는데, 마침 코로나19로 인해 얼어붙은 극장가엔 역설적으로 저예산-다양성-독립-예술영화 소개가 상대적으로 늘어나던 참이다. 재개봉 붐도 일었다. 다양한 영화가 어려움을 뚫고 극장에 걸리는데, 정작 이런 영화들의 정보를 접하긴 무척 어렵다. 자연히 (재)개봉 독립·예술영화 작품 소개 글을 기고하게 된다. 지역에서 영화 잡상인이 존재할 이유 다음으로 상영 활동을 수행하며 알게 된 지역 영화인과 그들의 작업을 알리고 싶었다. 역시 주기적으로 리뷰를 작성한다. 영화 애호가가 아닌 평범한 이들에게 일상과 영화가 연결되는 접점을 만들고자 예전부터 틈틈이 작성하던 교육 목적 기고도 꾸준히 잇는다. 어느새 해야 할 몫은 감당하기 힘들 만큼 불어났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정체성에 혼란이 발생하기 시작한다. 영화제 프로그래머로 인정받기 위해 십여 년 넘게 분투해 왔건만, 정작 본업은 지지부진한데 부업이 활발해진 격이라 그렇다. 그렇게 어쩌다 시작한 정기적 집필 작업은 크게 세 경로로 집중되어갔다. 가변적인 글쓰기 실험으로 인스타그램에 영화 단평을 별도로 올렸다. 단평은 정식 기고의 초벌 스케치 역할과 더불어, 지면 게시용으론 애매한 분량이나 비중의 작품도 공개적으로 소개하는 우회로로 상정했다. 그저 많이 보고 능력껏 쓰는 것에서 출발해, 일정한 방향과 목적의식을 갖고 작품을 소개하는 공적 경로를 좌표로 설정하기에 이르렀다. 그렇게 조건반사처럼 끊임없이 지금도 글을 작성하는 중이다. 그 과정이 반복되며 일종의 축적을 낳는다. 기존의 오프라인 상영을 통해 형성해 온 독립·예술영화계 네트워크를 다른 각도로 연속성을 유지할 수 있게 된 셈이다. 필자가 인스타그램에 게시한 리뷰 피드(< 밸브를 잠근다 >, < 입문반 >) 그런 실용성 말고 이런 글쓰기 활동이 지역 영화 (창작 및 관람) 환경에 어떤 순기능을 수행하고 있을까? 그저 자기만족에 불과한, 혹은 남들이 상대적으로 덜 다루는 희소성에 주목한 데 불과할까? 해당 질문은 지금도 수시로 머릿속을 맴돈다. 혹시 이 고민에 답을 얻기 위해 지역 영화 관련 활동을 계속하는 건 아닐까 싶을 만큼. 그러나 조금씩 몇 년간 꾸준히 수행하던 지역 영화 글쓰기의 쓸모가 발견되기 시작했다. 지난 몇 년간 한국 독립영화에서 ‘지역 영화’는 꾸준히 호명과 소환을 거듭해 왔다. 주요 영화제에서 여러 이름으로 서울(을 포함한 수도권에 주로 포진한 영화학과 중심)에 대비되는 로컬 작품 위주 부문을 신설하고, 지역별 독립영화제에서도 해당 분야 비중이 대폭 늘어났다. 영상 제작 환경의 긍정적인 변화와 교육/지원기관의 증가로 지역에서 제작되는 영화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이 안에 무수한 다양성과 가능성이 내재해 있다. 하지만 여전히 유력 영화제에서 호명되고 수상하지 않는 한, 절대다수의 지역 영화는 소리 소문 없이 잊히기 일쑤다. 물론 이는 수도권 지역에도 적용되지만, 바늘귀의 크기엔 분명한 차이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여기에서 파생되는 문제는 꼬리에 꼬리를 문다. ‘지역 영화생태계’란 수식어가 종종 등장하지만, 정작 제대로 된 심도 있는 논의는 찾기 힘들다. 대개 개별 지역마다 (변화된 창작 환경에 따라 대폭 증가한) 창작자는 꼭 있게 마련이다. 그리고 소수나마 복합상영관에 걸리는 상업영화에 만족하지 못하는 관객층, 그들에 의지하며 능력껏 다양한 작품과 기획을 선보이려는 상영 공간 및 집단이 존재한다. 지역 영화제/독립·예술영화관/(근래 확산되는) 상영회 개최그룹 등이다. 이들을 묶어 흔히 생태계로 호칭한다. 지역 영화 창작자와 독립·예술영화 관객이 별개가 아니라면 그 자체로 작은 영화 공동체가 될 수 있으리란 기대가 싹틀 법하다. 그러나 가야 할 길에는 난제가 숱하다. 우선 관객 입장에선 반드시 지역 영화를 관람할 이유랄 게 없다. 세상에 봐야 할 영화가 얼마나 많은데, 정보도 찾기 힘든 낯선 영화까지 챙겨야 한다는 말인가. 그러다 보니 지역에서 만든 영화가 평가받는 거의 유일한 기준은 (외부의 알려진) 영화제 진출과 수상 경력으로 제한된다. 자기 동네에서 만들어진 영화가 돌고 돌아 역수입이 되어야 비로소 인식 대상이 되는 것이다. 지역 영화의 매력이자 개성이라면, 다양한 고유의 소재와 배경, 지역 사회와 문화에 주목한 특유의 색깔일 텐데 정작 그나마 소개될 기회를 얻는 경로는 그 특색과 동떨어지기 쉬운 셈이다. 이런 오류를 보완하는 데 지역 사회 내에 공존하며, 영화생태계 일부로 소속감을 지닌 평론/평론가의 존재는 필수적인 윤활유 역할을 담당할 수 있다. 2023년 반짝다큐페스티벌 중 섹션4 상영 후 관객과의 대화 작은 변화의 가능성과 함께 엄습하는 숙제들 지역에서 왕성히 활동하는 인터넷 대안언론 《뉴스민》에 제안해 ‘무비053’이란 이름의 칼럼을 열었다. 2주마다 꼬박꼬박 대구(경북) 지역 작가와 배경의 영화를 소개하는 코너다. 2022년 3월부터 기고를 개시한 해당 칼럼이 훗날 『경계의 영화: 대구영화라는 낯선 풍경』(2025)의 산파가 된 셈이다. 몇 년 전부터 틈틈이 비정기 기고는 진행했지만, 본격적인 지역 영화글을 집필한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하지만 글쓴이에게 일어난 변화는 작지 않다. 지역에서 영화 관련 글을 쓴다는 건 단순히 글쓰기로만 끝나지 않는 일이다. 일단 영화를 찾아봐야만 한다. 대부분 지역에서 제작되는 작품이 단편이다 보니 오프라인 상영을 찾아다녀야 한다. 그나마 대구는 근래 비교적 활발하게 작품 창작이 일어나고 있기에 작품 숫자는 적지 않은 편이나, 지역별 편차에 따라 애초 작품 수급 자체가 힘든 경우도 적지 않을 것이다. 일상적인 상영 공간이 부재하니 한 번 기회를 놓치면 다시 볼 기약이 없다. 그런 상황이라면 창작자에게 별도 연락을 취해 과정을 밟아야만 한다. 그런 수소문을 통해 멀찍이 거리를 두던 지역의 영화인들과 대면하고 교섭(?)을 치르게 된다. 해당 과정을 반복하며 정보를 취합하고 평론 글을 게재하면 창작자의 반응을 기다리게 된다. 하지만 자신의 작업에 대한 피드백을 거의 경험할 기회가 적다 보니 글쓴이가 기대하던 교류를 얻기란 지극히 드물다. 그저 자신의 작업에 누군가 반응을 남겼다는 사실 자체로 기뻐하거나, 혹은 오탈자 지적이나 창작 의도에 부합하는 글을 암묵적으로 바란다는 확인이 대다수 반응을 이룬다. 이럴 땐 맥이 빠지지만, 결국엔 양측 모두 훈련과 적응이 필요한 사안이긴 하다. 『경계의 영화: 대구영화라는 낯선 풍경』 관련 대화형 행사 (좌) 2025년 부산다큐필름페스티벌 중 토크 포럼 / (우) 2025년 안동중앙아트시네마 내 북콘서트 안면을 트고 인사하게 되면 새롭고 근본적인 문제가 발생하는데, ‘팔이 안으로 굽지 않느냐는’ 의심이다. 이는 여전히 저울에 올라오는 쟁점이기도 하다. 작품에 대한 상세 정보 취득이 수월해지는 만큼, 그에 비례해 중심 잡기라는 난제가 동시에 닥친다. 지역 영화를 둘러싼 일종의 ‘온정주의’에 관한 입장은 극명하게 나뉜다. 누군가는 당연한 일이라며 여러 제약을 극복해 완성된 지역 작품을 ‘동료’적인 시각에서 다루는 게 틀린 게 아니라 말하지만, 누군가는 그러한 근접성이 공정한 비평과 동떨어진 것이라 비판한다. 정답은 늘 그 중간 어딘가에서 형성된다. 글을 쓸 때마다 성배를 찾는 불가능한 모험을 거듭해야 한다는 뜻이다. 글을 쓰는 행위는 송고했다고 바로 끝나지 않는다. 해당 작품이 웬만큼 외부에서 소개되지 않았다면, 대부분은 필자의 글이 유일한 ‘공식’ 평론으로 남는 경우가 태반이다. 즉, 해당 작품 관련 검색 가능한 ‘정전’이 되는 셈이다. 이는 아주 살짝 보람인 동시에 큰 부담으로 자리한다. 작품이 온당하게 평가받고 소개될 수 있도록, 일종의 A/S 과정까지 책임져야 한다는 의미다. 작품이 추가로 상영 기회를 얻게 지원하는 임무도 부여된다. 영화의 의미와 가치, 효용을 글을 쓰면서 포착한 데 기반해 가능한 선에서 추천하고 제안하는 과정이 글을 쓰는 동시에 부가된다. 지역별 영화생태계에서 비평의 자리를 찾기 위해 일련의 과정이 반복되다 보면, 일부 작가의 작업을 일종의 ‘작가론’으로 작성하는 경로에 진입한다. 단편 위주로 작업하는 지역 창작자에겐 쉽게 접하기 힘든 기회인 도시에, 평론 관점에서도 창작자의 출발점부터 연속적으로 작업을 관찰하고 포착할 수 있는 드문 계기이기도 하다. 그런 계기를 통해 드물게 전업 작가의 길로 들어서는 창작자를 지켜보는 건 ‘발견’의 기쁨이 되곤 한다. 여기까지 언급하면 한국 독립영화의 ‘블루 오션’으로 간주할 만하지만, 실제로 지역 영화 글쓰기는 외롭고 험난한 길이다. 우선 공개 지면이 거의 부재하다. 물론 서울 등 수도권에서 활동하는 평론 영역에서도 지면 축소는 공통된 화두겠지만, 지역은 몇 곱절 더 심각하다. 일단 영화 평론을 전문적으로 실어주는 매체 자체가 드물다. 일간지나 공중파 방송 역시 전문 코너가 부재한 데다, 온라인 미디어 또한 전문 지면을 유지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글쓴이 역시 라디오 프로그램에 간헐적으로 출연하는 것 외엔 안정적인 미디어 지면을 확보하는 데 오랫동안 어려움을 겪었다. 사실상 자기가 글을 올릴 지면을 새로 만들어야만 가능한 셈이다. (좌) 2019년 대구MBC 프로그램 <문화극장 조조할인> 중 코너 ‘작은 영화관’ 녹화 현장 (우) 2023년 KBS2 라디오 프로그램 <음악과 음악 사이> 중 코너 ‘이 영화 어때요’ 생방송 현장 물론 없던 지면을 창조하다시피 하니, 중앙 미디어에 비교하면 노력과 봉사의 비중이 높을 수밖에 없다. 지면을 유지하는 것도 감사한 일인 경우가 허다한 탓이다. ‘박리다매’로 승부할 수밖에 없다. 그나마 고료를 받고 평론을 싣는다는 기준을 설득하는 자체부터 쉽지 않다. ‘무료’로는 원고를 싣지 않는다는 원칙을 꺼내며 욕먹을 각오를 해야 할 판이다.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글을 쓸 수도 없다. 하지만 제대로 쓰고 싶은 만큼 전문성을 추구하는 데에도 한계가 뚜렷하다. 해당 매체 독자층을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보다 좀 더 핵심적인 화두가 있는데, 애초 지역을 기반으로 영화 평론을 수행하는 동업자 겸 경쟁자 집단이 부재한 데 기인하는 문제다. 원래 고민하던 목적의식, 지역 영화에 대한 다양한 비평을 통한 ‘기대 효과’가 온전히 구현될 수 없다는 구조적 한계는 대구·경북은 물론 거의 모든 ‘지역’에서 공통된 난제다. 동료를 만들고 싶어도 찾기란 쉽지 않다. 아무래도 협업이 당연한 영화 창작 과정이나 상영 활동과 달리, 기본적으로 개인 작업인 특성 때문이다. 아울러 관심사와 여타 조건이 맞아떨어지지 않으면 공동 작업은 더욱 고난도로 변한다. 앞서 서술한 것처럼, 일단 지역에서 전문화된 글쓰기를 상시 과제로 삼는 필자 찾기가 1차 관문, 지역 영화에 관심을 가진 이가 희소한 게 2차 관문, 조건 다 맞아도 일감이 없는 지역에서 해당 활동을 지속하기 어렵다는 게 3차 관문이다. 그야말로 ‘좁은 문’이다. 그룹을 구성해 ‘선의의 경쟁’을 일상에서 수행하지 않는다면 지역에 절실한 다양한 결의 비평 문화 조성은 암초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그러나 생태계 순환 과정에서 창작 집단에 자극을 주고 긴장을 유지하려면 넘어야 할 벽이기도 하다. (좌) 2022년 안동중앙아트시네마 내 영화비평 강좌 ‘영화 보기의 미학’ 프로그램 소개 (우) 2022년 인디플러스 포항 내 강의 ‘독립영화의 감상과 비평’ 지역 영화 예산 복원을 넘어서 지속 가능한 생태계 형성까지 2023년, 몇 년간 조금씩 조성해 왔던 영화진흥위원회의 지역 영화 창작 및 영화문화 관련 예산이 전액 삭감된 후, 현재까지 관련 예산은 복원되지 못한 상태다. 자연스럽게 지역 영화 관련 지원 및 정책 초점은 해당 사안으로 귀결되는 실정이다. 물론 (개별 지역이 아닌 전체) 총액 12억이란 별것 아니게 보이는 지원 예산을 참 알뜰하게 써가며 여러 항목에 골고루 종잣돈이 되온 게 증명되기에, 본 예산은 복구를 넘어 대폭 확대되더라도 전혀 낭비가 아니다. 문제는 몇 년째 이 문제로 지역 영화에 대한 모든 담론이 환원된다는 점이다. 일단 ‘지역 영화(창작과 문화)’ 정책 수립의 초점과 방향이 확립되어야 한다. 현재 정부의 영화정책은 여전히 20세기에 형성된 ‘수출산업’에 방점이 찍혀 있다. 한국 독립·예술영화는 그런 시각 아래 철저하게 상업영화의 ‘(산업)예비군’으로만 사고해 온 게 엄연한 사실이다. 그런 관점에서 언젠가부터 독립영화와 창작자마저 마치 국가대표팀 선발하듯 국내외 주요 영화제 진출과 수상 중심으로 서열화되는 실정이다. 그런 일방적 기준에 의한다면, 지역 영화는 2군도 아닌 3군 이하로 취급될 뿐이다. 당연히 관심을 호소해봐야 헛수고일 따름이다. 이런 난맥상을 돌파하려면 발상의 전환이 필수다. ‘산업’ 중심주의를 돌파하지 않으면 결국엔 지역 영화는 유령처럼 떠돌 뿐, 실체를 갖출 수 없다. 지역의 인재는 재능을 꽃피우기 위해 서울로 향하면 되고, 지역의 관객은 복합상영관 객석을 채우는 머릿수로만 족할 뿐인데 지역 영화에 유의미한 관심이 향할 리 없다. 기껏 기존 예산이 복구된다 해도 그저 시혜적인 상징에 불과할 테다. 지역 영화(창작과 문화)를 진흥하려면 우선 서울을 제외한 지역 공통 현황과 함께 차별화된 지역별 특징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 이는 단순히 영화문화 측면을 뛰어넘어 한국사회 고질병인 ‘서울 공화국’ 문제와 직결된다. 즉 지역 균형발전, 지방분권 쟁점과 같은 궤로 놓고 접근해야 할 사안이다. 그렇게 발상을 전환한다면, 독립·예술영화 접근 기회의 균등은 곧 비수도권 주민들의 문화복지 권리 일부가 된다. 물론 그저 최신 상업영화 대작 관람 기회를 넘어, 다양한 영화문화 접근권으로 향해야 유의미할 것이다. 지역 영화에 관한 글쓰기는 그저 개별 창작물에 관한 평론으로 그치지 않는다. 해당 작품이 꼭 영화제를 거쳐 인정받지 않더라도 지역 내에서 충분한 함의와 가치를 갖는다면 이를 포착해 소개하는 기능을 통해 지역 영화문화 형성의 일부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 글을 쓰는 데 그치지 않고, 상영 활동 등 2차, 3차 소개 기회를 넓히는 파급력을 상정하며 글을 쓰게 된다는 의미이다. 얼핏 피곤하거나 과도한 확장으로 받아들여질 주장이다. 그러나 지역 영화를 평론한다는 건 글쓰기로만 국한하기에 애초에 불가능한 과제다. 일종의 능동적 ‘수용’ 활동이자 순환계 내에서 끝없는 운동을 거듭하되 ‘미토콘드리아’처럼 일정 간격을 유지해야 한다. 그렇게 ‘지역화’한 영화 평론은 예산과 지원 대책에만 갇히지 않는 지역 영화문화 형성의 일부로 역할을 얻는다. 물론 ‘가지 않은 길’이기에 정답은 누구도 모른다. 다만 기존 독립·예술영화 비평 모델과 비교하면 보다 사회학적 접근, 현장 참여에 주목하는 형태를 지니리라 예상해 본다. 일단 떠나지 않고 지역 사회 쟁점과 배경을 숙지한 상태로 작품의 의미를 해석하고 발굴해 접속하는 과제를 수행하는 수밖에 없다. 개인을 넘어 집단으로, 생산자와 소비자의 이분법을 넘어 공생하는 영화생태계로 접근하는 과정에서 지역 영화 글쓰기는 고유의 형상과 임무를 찾게 될 테다. 지금은 일단 씨를 뿌리며 경작에 나설 시간이다. 2019년 대구MBC 프로그램 <문화극장 조조할인> 중 코너 ‘작은 영화관’ 녹화 현장 * 사진 전체: 필자 본인 제공 김상목(스크리닝 메이커) l 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영화제와 상영회 기획부터 매체 기고, 라디오, 텔레비전, 교육 강연 등 들어오는 일 마다하지 않고 즐겁게 지역에서 다양한 영화를 소개하며 활동 중. 저서 『경계의 영화: 대구영화라는 낯선 풍경』(2025), 공저 『이것은 카메라입니다』(2022) 집필.
올 여름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진행된 ‘해외 영화학자 초청 대중 특강’의 내용을 강연자의 시점에서 정리합니다. 영화와의 첫 만남과 학계 입문 과정에 얽힌 소소한 에피소드부터, 세계 속 한국영화의 위치, 최근 몰두하고 있는 연구 주제에 대한 학술적 분석까지. 한국영화를 향한 해외 영화학자 6인의 개성과 열정으로 꽉 채워졌던 2시간을 KOFA가 직접 기록한 특강노트 로 만나보세요. 정승훈 교수 는 영화의 매체적 특징과 더불어 작품에 영향을 미친 사회 구조나 철학에 관한 연구를 지속해왔다. 최근에는 세계화 시대에 발생하는 영화적 경향을 생명정치와 윤리, 철학의 관점에서 연구하며 ‘글로벌 시네마’ 이론을 구체화하고 있다. 저서로는 Cinematic Interfaces: Film Theory after New Media(2013), Biopolitical Ethics in Global Cinema(2023)가 있고, The Global Auteur: The Politics of Authorship in 21st Century Cinema(2016), The Mind-Game Film: Distributed Agency, Time Travel, and Productive Pathology(2021)를 공동 편집했으며, 《Studies in the Humanities》 특집호 내 “Global East Asian Cinema: Abjection and Agency(2019)”를 객원 편집했다. 뉴욕대 아부다비 캠퍼스와 컬럼비아대학교 영화학과에서 강의한 후, 현재는 캘리포니아 주립대 롱비치 캠퍼스 영화과의 조교수로 재직 중이다. 영화가 문화가 된 시기, 평론가로서의 시작 1980~90년대 국내에서 많은 사람들이 그랬듯, 나 역시 <토요명화>나 <주말의 명화>, 그리고 주한미군방송(AFKN)과 같은 TV 매체에서 방영된 해외 극영화를 통해 영화에 친근감을 가지기 시작했다. < 블레이드 러너 >(리들리 스콧, 1982)의 등장인물 레이첼(숀 영)이 황혼의 어둠 속에서 걸어 나오는 모습에서 ‘이미지’로만 관객을 매료시키는 영화의 힘을 처음 실감했으며, 장 뤽 고다르의 < 네 멋대로 해라 >(1959)에 대한 할리우드식 리메이크작 < 브레드레스 >(짐 맥브라이드, 1983)의 클라이맥스에서 주인공 제시(리차드 기어)가 경찰에게 포위당한 채 춤을 추는 장면 역시, 서사의 개입 없이 인물의 움직임만으로 작품에 집중하는 체험을 하게 해줬다. 이렇게 영화 속 이미지의 고유한 특성을 지각하면서, 스스로 주목한 작품 목록을 짧게나마 작성해보며 영화에 가까워졌다. 1990년대에 진입하면, 새롭고 다양한 영화를 발견하려는 의지에서 발원한 국내 시네필 문화가 본격화된다. 월간지 《로드쇼》의 ‘도시에’란에 김홍준 감독이 ‘구회영’이라는 필명으로 1990년부터 1991년까지 실었던 글을 엮은 책 『영화에 대하여 알고 싶은 두세 가지 것들』(1991)이 고등학교 시절 발표되었다. 영화사에 대한 개괄부터 할리우드·홍콩·유럽 등지의 영화에 대한 지식을 살펴보면서 세계 영화의 면면을 흥미롭게 학습했다. 동시에 이 책에 포함되어있던 ‘영화사상 걸작선(1895년부터 1991년 사이 발표된 고전영화 91선),’ ‘우리세대의 걸작(1980년대 세계영화 100선)’과 같은 목록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영화 감상의 폭을 넓히기도 했다. 특히 ‘우리세대의 걸작’ 100선에 한국영화 몇 편이 포함된 점이 인상적이었다. 한국인이자 한국 영화학도 또는 영화인로서의 필자(김홍준 감독)가 아직은 국제무대에서 발견되지 못한 한국영화의 가치를 대중 독자에게 소개한 대목을 읽으며, 세계에서 한국영화가 어떤 위치를 점하고 있는지를 객관적으로 탐구하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다. (좌2) <블레이드 러너>, <브레드레스> 중 (사진: "Sean Young", IMDb / "Breathless", IMDb ) (우1) 『영화에 대하여 알고 싶은 두세 가지 것들』 때마침 한국영화가 산업적 측면에서도 발전하기 시작하면서 《씨네21》과 《키노》 등의 영화 전문지들이 창간되었고, 1년여가 지난 후에 두 매체 모두 영화평론상 공모로 ‘평론가’를 배출하기 시작한다. 앞에 이야기한 계기들을 거치며 영화를 좋아하게 되고 ‘비평’ 분야 전반에도 흥미를 느꼈던 나에게 영화평론가라는 진로는 무척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그때까지 영화를 전문적으로 공부한 적은 없었지만, 학부에서 불문학을 전공하며 배운 문학 이론을 영화비평에 적용하기를 즐기며 영화를 바라보는 나만의 시각을 확립하고 있던 터라, 이를 널리 공유하는 기회를 붙잡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러던 중, 운 좋게도 2003년에 《씨네21》 영화평론상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하면서 평론 활동을 시작했다. 공모 당시 이론비평을 통해 내가 다루고자 했던 내용이자, 한국영화에 대해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지게 해준 주제를 소개하고 싶다. 바로 ‘작가’로서의 감독이 등장했음을 알리며 한국영화 르네상스 시기를 주도한 대표적 인물, 이창동 과 홍상수 작품 간 비교이다. 이들이 활동하기 직전인 1980년~90년대 중반, 사회비판적이고 현실적인 태도를 견지한 젊은 영화로서 박광수 와 장선우 등이 선보인 ‘코리안 뉴웨이브’가 주목받는다. 하지만 1995~96년 즈음에 관심의 초점은 지금의 우리에게 익숙한 ‘작가’ 감독들의 데뷔로 옮겨간다. 이전 세대의 연장선을 밟는 한편 그보다 한층 더 높은 미학적 차원을 달성한 그들의 데뷔작은 한국영화의 질적 전환을 주도하며 많은 평론가들의 비평 욕구를 자극했다. 그 전환의 과정을 들여다보자면, 이 시기의 감독들은 과거사 중심의 리얼리즘을 추구했던 이전 세대와는 달리 동시대 공간을 탐구하려는 의지 를 작품에 투영했다. 특히 이창동과 홍상수는 당시 서울 변두리의 리얼리티를 작품 속 ‘공간’에 내재된 의미(혹은 무의미)나 각자의 재현의 체계(혹은 비체계)에 따라 제시했다. 나는 그들의 작품을 ‘ 집’ 과 ‘길’ 이라는 공간 개념을 중심으로 의미론적 차원에서 해석하는 한편, 리얼리티 재현 과정에서 각자가 추구한 미학과 스타일의 차이를 이야기하고자 한다. 이창동이 유기적으로 지은 ‘집’, 홍상수가 소요하는 ‘길’ 이창동의 작품에서는 현대인이 돌아가야 할 원형적 공간으로 이해되는 ‘집’을 발견할 수 있다. 오늘날 모두가 떠나온 이곳은 그들이 다시 회귀하고 싶어 하는 궁극적인 목적지이자 ‘ 탈시간적 유토피아 ’가 되지만, 이제는 도달할 수 없는 상실된 공간이다. < 초록 물고기 >(1997)의 주인공 막동( 한석규 )의 가족은 현대화와 도시화의 물결에 떠밀려 뿔뿔이 흩어진다. 막동은 집에 돌아가고 싶다는 원형적 욕망을 지니게 되지만 실현하지 못하고 비극적 최후를 맞는다. 같은 맥락으로 < 박하사탕 >(1999)의 유명한 대사 “나 다시 돌아갈래!”에서 돌아가고 싶어하는 마음의 대상이 되는 특정 시간은, 순정에 대한 주인공 영호( 설경구 )의 기억을 담은 채 이제는 잃어버린 집과 같은 시공간적 향수를 자아낸다. < 오아시스 >(2002)에서는 종두(설경구)와 공주( 문소리 )가 꽉 막힌 청계고가도로에서 갑자기 공주의 집으로 이동하는 판타지적 순간이 연출되는데, 제목과 같이 강렬한 욕망을 불러일으키지만 존재하지 않는 신기루이자 유토피아와 같은 개념이 현실을 지배하고 있음이 여기서 나타난다. 이렇게 이창동은 갑자기 찾아온 현대사회가 개인을 폭력과 속도전에 연루시켰고, 이전에 간직했던 꿈과 순수, 사랑은 파괴해버렸음을 부각한다. 거스를 수 없는 변화와 상실 속에서, 잃어버린 ‘집’을 되찾고 싶다는 무력한 개인의 욕망이 자라날 뿐이다. (좌) <초록 물고기>, <오아시스>, <박하사탕>의 '집'에 관한 설명 (우) <오아시스> 중 공주의 집에서 일어난 판타지적 순간 반면, 위와 같은 특징을 홍상수의 작품에서는 절대 발견할 수 없다. 홍상수가 만든 인물들에게는 돌아가고 싶은 곳을 찾으려는 욕망이 없고, 그들이 잠시 머물거나 지나치는 모든 공간은 정착의 터전이 될 수 없는 ‘길’의 변주이다. ‘장소(place)’가 관계적이고 역사적인 개념으로서 누군가의 정체성이 담지 되게끔 하는 근거지를 의미한다면,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모텔, 술집, 식당, 정류장, 길거리 등은 이러한 느낌을 전혀 주지 않는 비장소 (non-place)라고 할 수 있다. 인물은 이중 어느 한 곳에 머물더라도 곧 다시 떠나 소요하면서 또 다른 비장소로의 여행을 계속한다. 일생의 한 순간을 떼어다 놓은 듯해 시작과 끝을 찾아볼 수 없는 그의 작품에서 중요한 것은 ‘과정’ 자체이다. 인물이 향하거나 머무는 장소로서의 의미를 획득하지 않는 그의 공간은 한 마디로 ‘ 탈근대적 아토피아 (atopia)’와 같다. (좌)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중 여관 (우) <강원도의 힘> 중 기차역 이어서 두 감독의 작품 전반에서 리얼리티가 재현되는 방식을 미학적으로 분석해보면, 이창동은 통합·정주의 아폴론적 편집증에 기반한 유기적이고 총체적인 리얼리즘 을, 홍상수는 생성·유동의 디오니소스적 분열증에서 비롯된 총체성 해체의 리얼리즘 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주1 이창동은 인물, 대사, 행동, 배경 등 작품 속 기호들에 ‘의미’를 부여하고, 기호들을 활용한 미장센을 롱테이크 마스터숏으로 노출시키며 관객이 이를 역사적 또는 의미론적 차원으로 독해하도록 유도한다. 이때 발견된 의미는 화면에서 그와 유사한 특성을 지닌 기호와 결합하고, 이러한 은유가 반복되면서 기호들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의미의 집’을 건축하게 된다. 이렇게 작품 곳곳에 녹아든 세부적 의미가 결합해 상위 의미 체계로 통합되는 리얼리즘을 추구한 이창동의 재현 방식은 아폴론적 편집증을 연상하게 한다. 이와 달리 홍상수의 롱숏에서는 특정한 의미가 독해되지 않고, 내면이 표백된 일상적 표층 현실만이 채집되곤 한다. 인물에게서 나타나는 행위와 몸짓, 습관, 말들이 그의 여행 여정에 흩뿌려져 장면 곳곳에서 출몰하는 광경을, 관객은 그저 관찰할 수밖에 없다. 기호들이 ‘의미의 집’을 이탈해 일상의 순간들을 따라 ‘길 가기’만을 지속하며 총체성을 해체하는 것이다. 유의미한 정보를 주지 않는 화면에서 관객은 가시적·비가시적 세계, 그리고 전지적·관찰자적 시점 간 구분이 무용해짐을 느끼기도 한다. 이러한 홍상수의 리얼리티는 이창동과 달리 생성·유동의 디오니소스적 분열증과 닮아 있다. 일상에서 발견되는 기호들이 의미와의 결합 없이 인물의 여정을 따라 자유롭게 유희하도록 놓아두기 때문이다. 두 감독의 미학이 이러한 이론과 완벽히 일치한다기보다, 극단적 위치에 있는 두 개념을 빌려 둘 간의 차이를 설명한 것으로 이해해주길 바란다. (좌) <초록 물고기> 중. 막동의 집, 도로, 아파트는 차례로 전근대, 근대화 및 그 산물을 의미한다. (우) <오!수정> 중. 마스터숏 없이 반복되는 술자리 장면과 일상적으로 오가는 말들. 논의를 전개하다보니, 다른 한국영화 감독들의 작품 세계 역시 위 관점에서 해석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 시점에서 그간 한국영화사를 돌이켜보았을 때, 대부분의 감독은 이창동의 방식을 택했다. 그들 각자가 한국사회와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을 가지고 있고, 이에 기초한 염원과 욕망을 작품에 투영하는 경우가 잦았다. 그 와중에 홍상수는 당대의 포스트 모더니즘적 경향을 영화 안에서 실험하며 별개의 노선을 택한, 상당히 독특한 작가이다. 오늘날까지도 홍상수의 실험은 그의 필모그래피에 한해서만 실행되지만, 대다수의 주류 한국영화는 이창동식 의미의 집짓기에 익숙한 모습을 보이며 이 경향을 확장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해외에서 연구한 세계 속의 영화 위 주제로 이론비평을 작성하고 등단한 이후, 1년간 열띤 평론 활동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시의적 게재가 중요한 현장 비평의 특성상, 개봉작을 특정 기한까지 감상하고 글을 써야 할 의무가 매번 주어지면서 비평에 대한 압박감이 갈수록 커졌다. 더군다나 당시 평론 활동과 불문학 박사 과정을 병행하고 있었기에 부담이 더욱 가중되었다. 기민한 현장 비평계가 주는 자극이 매력적인 것은 사실이지만, 이 작업이 반복된다면 투입을 초과하는 산출로 인해 내적 에너지가 소진되어버릴 것 같았다. 하지만 평론가로서의 한계에 도달했을 뿐 영화에 대한 관심은 여전했고 마음도 영화로 향해 있었기에, 당시 내가 내린 결심은 영화를 ‘공부’ 하는 것이었다. 이때 한국영화에 대한 국제적 관심은 한국사회의 ‘거울’로서의 기능에만 치우쳐 있었던 듯하다. 한국영화가 한국의 역사와 사회를 충실하게 ‘재현’하는 수단으로만 인식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한계가 지속되다보니 존재론, 매체론, 현상학적 의미 등 영화의 본질에 관해 세계적으로 공유되고 있는 학술 개념이 국내에 적용되는 시점이 늦어졌다. 비슷한 시기에 불문학 도서를 번역하며 현대 문학 및 사상의 흐름을 인지함과 동시에 해외 학자들의 현대 영화 이론이 국내로 유입되는 과정을 목격한 나로서는, 유학을 떠나 한국영화에 보편적 영화 이론을 적용하는 법을 배우고 싶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해외 유학 중 작성한 박사 논문 Cinematic Interfaces 를 통해 영화 속 모호하고 잠재적인 세계로의 연결을 가능하게 하는 ‘인터페이스’가 서사와 이론 측면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연구했다. 그리고 지도교수 중 한 명이었던 영화학자 토마스 앨세서(Thomas Elsaesser, 1943~2019)가 2019년에 갑작스럽게 작고한 후, 그가 집필 중이던 저서 The Mind-Game Film 에서 미처 완성되지 못한 부분을 동료 연구자들과 함께 보충해 공동 편집하기도 했다. 본 도서는 당시 화제가 된 “퍼즐 영화” *주2 가 사회적 패러다임과 맞물려 있는 측면을 정치, 경제, 사회, 정신분석, 철학 등에서의 이론을 활용해 조명했다. 캘리포니아 주립대 롱비치 캠퍼스로 오기 전 뉴욕대 아부다비 캠퍼스에서 강의했을 때는, 활발한 세계화의 중심지로서 그 명암을 모두 반영하고 있는 아부다비라는 공간을 체험했다. 또한 앞의 편서의 주제에서도 나타나듯이 당시 영화 연구에 대한 관심사도 미학 이론 너머로 확장되고 있었기에, 이들을 계기로 ‘글로벌 시네마’라는 주제를 조금 더 면밀히 살펴보게 되었다. 글로벌 시네마라는 용어가 차츰 언급되기 시작했지만 용어의 정의는 쉽사리 내려지지 않았던 때이다. 먼저 공동편서 The Global Auteur (2016)에서는 당시 막연히 떠올린 글로벌 프레임에 맞게 세계 각지 영화의 작가들이 내세운 영화의 정치성 *주3 을 매핑했다. 이를 발판 삼아, 2019년에는 잡지 《Studies in the Humanities》 특집호의 객원 편집자로서 ‘동아시아’ 영화를 중심으로 글로벌 시네마를 설명하는 글들을 모아 “ Global East Asian Cinema: Abjection and Agency ”라는 제목으로 공개했다. 이러한 편집 작업에 반영되었던 관점을 발전시킨 연구가 Biopolitical Ethics in Global Cinem a 에 담겨있다. (좌1) 번역서 『문학의 행위』 (자크 데리다, 2013), 저서 Cinematic Interfaces , 공동편서 The Mind-Game Film . (우2) 공동편서 The Global Auteur , 저서 Biopolitical Ethics in Global Cinema 위 저서에 설명된 글로벌 시네마의 개념을 살펴보기 전에, 한국영화의 세계적 위상이 강화된 계기 에 대해 생각한 바를 먼저 공유하려고 한다. 이창동, 홍상수, 봉준호, 박찬욱 등의 작가가 등장하고 작품의 장르 자체가 다양화되며, 작품의 ‘만듦새’ 역시 개선되어 산업이 진화 했다는 것이 하나의 계기이다. 한류의 인기 에 영향을 받음과 동시에 OTT 등을 통해 전 세계의 접근성이 향상되었다는 점도 있다. 그리고 한국영화 관련 학술 행사와 출판물이 기획되는 경우가 많아짐을 고려할 때 한국영화에 대한 학계의 관심 도 크게 증가했다고 본다. 오늘 이 자리를 마련한 한국영상자료원처럼, 앞으로는 영화를 다루는 국내 연구 조직이나 문화 거점을 해외와 연결하는 매개자가 더욱 늘어나리라고 기대해도 좋을 만큼, 한국영화를 주제로 한 다양한 갈래의 연구가 곳곳에서 진행되고 있다. 마지막으로, 최근 글로벌 시네마로서의 한국영화에게서 가장 두드러지는 특성은 ‘ 탈오리엔탈리즘 ’이다. 세계 진출을 위해 전통문화의 효과적 재현을 중시한 1990년대와 달리, 최근의 한국콘텐츠는 우리 역사를 우리의 관점에서 해석하되 서구적 모티프나 장르의 보편성을 녹여냄으로써 해외에 비춰진 ‘한국적’ 이미지에 더는 구애받지 않고 있다. 국지적 문화에서 비롯되었지만 글로벌리티를 동반하는, 말하자면 탈오리엔탈리즘적 글로컬리티를 지닌 것인데, 이는 뒤에서 이야기할 ‘글로벌’ 프레임으로 본 세계화 시대의 한국영화가 갖는 고유성이 되기도 한다. ‘글로벌’ 체제의 생명 정치, 그리고 이중 윤리 먼저 오늘날의 글로벌 시네마 개념에 도착하기까지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영화가 거론된 방식을 돌이켜보자. ‘세계영화’라는 용어의 의미는 실제로는 존재할지 몰라도 담론적으로는 오로지 그 용어를 바라보는 ‘관점,’ 즉 프레임만이 존재한다. 이 프레임은 보통 세 가지로 나뉘는데, 내셔널, 트랜스내셔널, 그리고 내가 연구하고 있는 글로벌 프레임이 있다. 먼저 내셔널 프레임에서는 민족국가(nation-state)의 역사와 사회현실, 문화 등을 반영하는 영화들을 배치하며 ‘세계영화’의 지도를 그린다. 하지만 지난 30년간 트랜스내셔널 프레임을 통해 이는 상당 부분 해체되었다. ‘ 영토화 ’에 기반한 내셔널 프레임이 민족국가 기반의 영화에게 동질성, 환원성, 폭력성을 요구하는 측면을 비판적으로 바라본 트랜스내셔널 프레임은, ‘ 탈영토화 ’ 개념에 근거해 다양하고 이질적이며 혼종적인 영화로서 세계영화를 정의한다. 이에 따라 서로 다른 문화권에 속한 인력의 공동 제작과 더불어, 특정 작품이 다른 국가나 문화권에서 어떻게 수용되는지에 대한 연구가 늘어났다. 또 다른 프레임으로서 내가 설명하고 싶은 관점은 ' 글로벌 ' 프레임이다. 이는 세계가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와 함께 ‘ 재영토화 ’된 시점에서부터 정치, 사회, 윤리의 패러다임이 변화한 데서 기인한다. 냉전 체제가 해체되면서, 양분되어있던 두 이데올로기적 세계가 1990년대 들어 자본주의에 따른 새 시장질서 속의 민주주의적 세계로 통합되기 시작했다. 서로 다른 세계가 분리되지 않고 하나로 포괄되어 일컬어지는 ‘포괄적 체제’가 긍정되며 세계화가 시작됐고, 여기에는 관용과 환대, 다양성에 대한 존중을 내세운 ‘ 연성 윤리 (soft ethics)’가 시대정신으로서 동반된다. 서로 다른 체제나 이념을 타도하기 위한 정치적 투쟁 및 대립의 중요성이 사라졌으며, ‘타자’ 역시 자신과 함께 살아가는 주체로 받아들여진다. 정치적으로 추구되었던 자유와 평등이 이제는 타자와의 공존 속에서 대두된 ‘윤리’로 자리 잡은 것인데, 이를 가리켜 탈정치적인 윤리적 전환이 발생했다고도 한다. 하지만 탈정치적 세계화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은 윤리적 경향의 이중성을 암시한다. 존중과 관용을 최우선의 가치로 삼는 연성 윤리는 어떤 경우에도 ‘관용될 수 없는’ 행위 역시 전제하기 때문이다. 이 ‘관용될 수 없는 행위’가 연성 윤리의 지지를 받는 포괄적 체제를 해칠 때, 그를 사회에서 제거하기 위한 ‘배제’의 메커니즘이 어쩔 수 없이 작동한다. 배제의 징후가 차별, 혐오, 추방과 같이 폭력적인 양상을 띠더라도 이를 정당화하는 ‘ 경성 윤리 (hard ethics)’가 연성 윤리의 이면으로 노출된다. 배제된 타자들은 이 체제로 다시 통합될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재차 폭력으로 맞서면서 두 세력 간의 ‘새로운 적대’ 관계가 형성된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며 통합되었던 세계에 또 다른 장벽을 세운 9.11 테러와 이후에도 줄곧 이어져 온 대테러 전쟁들이 대표적 사례이다. (좌) 베를린 장벽 붕괴 (사진: "The Fall of the Berlin Wall", German-American Heritage Museum ) (우) 세계영화를 바라보는 세 가지 프레임, 그중 '글로벌' 프레임의 '새로운 적대' 관계 에 관한 설명. 글로벌 프레임으로 본 세계화 시대는 정치로부터 벗어났다고 하지만, 윤리적 체제를 둘러싼 이 적대 관계는 오히려 ‘ 생명정치 (biopolitics)’의 영향력을 극대화한다. 인간 생명의 탈취 또는 구제 여부를 결정하는 힘으로서 가장 근원적인 권력이라고 할 수 있는 생체권력(biopower)이 정치의 중심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의 사회가 주권과 안보 수호를 명목으로 자신의 체제를 무한 정의의 편에 세우고 타자를 향해 생명정치를 초법적으로 자행하는 과정에서 피해를 입는 존재들이 발생한다. 체제에 속하지 못하거나 체제를 위협한다는 이유로, 생명정치에 의해 주체(subject)로 살아갈 법적 권리를 박탈당한 비체 (abject)들이다. 글로벌 체제를 유지하는 데 필연적으로 동반되는 이 폭력적 메커니즘을 생명정치적 비체화(abjection)라고도 부른다. 글로벌 시네마: 비체의 이중 죽음과 대안 윤리 정치·윤리적 패러다임 변화가 비체화를 일으킨다는 글로벌 프레임을 영화에 적용하여, 오늘날 글로벌 시네마의 주제를 두 가지로 나눠 살펴보고자 한다. 하나는 정치적 변화의 불가능성을 보여주는 ‘ 재난 또는 재앙 영화 ’이다. 개인적으로는 ‘재난이나 재앙’이 우리 시대 주류 상업영화에 가장 굳건히 자리 잡은 주제라고 생각한다. 이들 작품의 특징은 극중 위기 극복에 기여할 정치적 상상력을 발휘하지 않고 해결책도 던지지 않는 대신, 그 빈자리를 디스토피아적 스펙터클이 불러일으키는 파괴적 즐거움으로 채운다는 점에 있다. 이러한 양상이 부정적이라고는 절대 단정할 수는 없으며, 우리 사회가 처한 현실 자체의 반영이라는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또한 내러티브의 경향은 대체로 ‘ 이중 죽음 ’이라는 키워드로 정리된다. 작품 초반에 발생하는 특정 사건이나 트라우마로 인해 주인공은 온전한 주체로 기능하지 못하고 ‘비체화’되며, 사회적으로 소생하지 못하는 상징적 죽음의 상태에 이른다. 다만 비체화된 주인공은 희생자로만 남아있지 않고, 각자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 에이전시 (agency; 미션 수행을 위해 행동하게 만드는 동인을 의미하는 철학 용어)’를 발휘한다. 그들의 에이전시 발현을 촉진하는 목적으로는 재주체화(잃어버린 세계 또는 자신을 버린 공동체로 돌아가 다시 통합됨), 복수(자신을 비체화한 어떤 존재에 대한 복수), 테러(자신이 비체가 될 수밖에 없는 세상을 테러), 자살(어떠한 목적도 선택할 수 없을 때 스스로 목숨을 끊음) 등이 있다. 에이전시가 발현된 결과 이 목적들이 달성되는지를 결말에 확인할 수 있고, 달성에 실패할 시 주인공의 물리적 죽음이 따르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비체들의 에이전시가 꼭 위와 같은 목적에 의해서만 발현되는 것은 아니다. ‘ 잠재적 대안 윤리 ,’ 즉 연성 윤리와 경성 윤리가 충돌하는 글로벌 체제로 환원되지 않고, 오직 비체들 사이에서 서로를 위한 긍정적 잠재성을 실험하며 형성되는 윤리를 제시하는 작품도 있다. 에이전시를 발휘하고 있는 비체들이 공존하다가 알게 모르게 서로에게 실존적 선물이 되어줄 때, 그리고 이렇게 선물이 되어주며 서로 간 네트워킹이 실현될 때, 대안 윤리는 모습을 드러낸다. 물론 여기서 말한 비체들 간 네트워킹은 유토피아적이지 않은 ‘아토피아적 네트워킹’이다. 그들이 만나고 흩어지면서 산발적으로 발생하는 선물되기 경험은 영원할 수 없고 어느 하나의 이상적 방식으로 고정되어있지도 않지만, 그럼에도 그 경험의 소중한 잠재성만은 여전한 채로 과정으로서 지속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러한 작품에서의 주체를 ‘비체적 에이전시’로, 공동체를 ‘선물적 아토피아’로 재해석하여 글로벌 시네마 분석을 이어가고 있다. 지도에서 볼 수 있듯이, 2000년대 이후 활동한 글로벌 시네마 작가의 작업을 관련 사례로 연구해왔다. 2000년대 글로벌 시네마 작가들 에 대한 간략한 매핑 글로벌 (코리안) 시네마: 미완성 근대 국가 프로젝트와 그 변주 그렇다면 이러한 글로벌 시네마의 특징이 한국영화에는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을까? 내가 비평 활동을 시작했던 2003년, 공교롭게도 한국영화 르네상스가 시작되며 역작들이 연달아 발표되었다. 작품들 대부분은 ‘포스트-뉴 웨이브’라고 불리는 386 세대가 연출했다. 이 세대 감독들은 시기를 고려할 때 문화적으로는 세계화를 경험했지만 각자 한국 근현대 역사를 목도하며 모종의 정치성을 탑재 했다(대체로 1980년대 불법적 국가 폭력이 남긴 상흔이 모티프가 된다). < 올드보이 >(박찬욱, 2003) 속 사적 감옥에서의 감금과 폭행, 공상과학 영화의 외양을 한 < 지구를 지켜라! >(장준환, 2003)에서 비체화가 이뤄진 배경, < 살인의 추억 >(봉준호, 2003)이 비춘 당시 사회 및 경찰 수사의 폭력적 측면 등을 보면 알 수 있다. 감독 각자가 격동의 한국 사회 속에서 확립한 정치적 감각이 비체화 내러티브와 에이전시의 방향성에 징후적으로 드러난 것이다. 한편으로는, 관련 작품들이 거의 그리스 비극 <오이디푸스 왕>과 유사한 구도, 즉 아버지-어머니-아들로 구성된 가족 삼각형의 구도를 지니고 있다. 부정적인 법이나 권력, 제도 등을 상징하는 ‘아버지’는 ‘아들’을 비체화하고, ‘아들’은 ‘아버지’에 저항하며 복수를 꿈꾸지만 영화에서는 실패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삼각 구도는 작품이 암시하는 권력과 욕망에 정신분석적으로 접근하려는 관객의 욕구를 자극한다. <올드보이> , <살인의 추억> 중 이후 대중적 인기를 몰며 한국영화계에 등장한 ‘천만 영화’들은 앞에서 세계화 시대 한국영화의 특징이라고 잠시 언급했던 글로컬리티를 짙게 반영한다. 생명정치로 비체화된 작품 속 인물들이 에이전시를 발휘하는 동기에 힌트가 있다. ‘나쁜 아버지(가족, 국가 등)’로서의 전근대적 주권자는 초법적인 생체권력을 동원해 주인공인 ‘아들(백성, 시민 등)’을 비체화한다. 비체들은 역시 에이전시를 발휘하지만 그 결과로 달성하려는 목적이 사적 복수가 아니라 공적 정의 실현 에 가깝다는 점이 한국 천만 영화의 특징이다. 자신들을 비체화한 ‘나쁜 아버지’를 ‘좋은 아버지’로 대체하고자 하는 한국사회의 염원이 담긴 내러티브에 많은 관객들이 공감하고 호응해왔다. 생명정치로 발생한 비체들이 대안 윤리를 모색하는 글로벌 프레임에 한국사회의 정치적 실패라는 역사적 국지성이 결합한 결과이다. 한국의 거의 모든 천만 영화는 이렇게 ‘나쁜 아버지’로 표상되는 (아직도 청산되지 않은) 폭력적인 국가권력을 계속해서 소환하고 그것을 환상적 또는 역사적인 방식으로 재현하는데, 이를 ‘ 미완성 근대 국가 프로젝트 ’라고 표현하고 싶다. 시민들은 자신들을 비체화한 무능하고 폭력적인 국가가 유토피아적 공동체로서의 민족국가 또는 법치국가가 되기를 욕망하며 연대해 역사 또는 재앙 판타지를 조성한다. 더불어, 이 프로젝트를 전개하는 비체들은 함께 연대하는 와중에 서로에게 선물이 되어 ‘선물의 윤리’를 체험하고, 이를 바탕으로 대안 가족을 형성하기도 한다. 딸을 잃은 주인공이 재앙 도중 구한 아이와 밥을 먹는 < 괴물 >(봉준호, 2006)의 한 장면에서처럼, 가족에 가까운 관계로의 발전을 돕는 과정으로 한국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 ‘음식 공유’를 통해 ‘식구’가 되는 것이 대표적 방식이다. (예시) 미완성 근대 국가 프로젝트 로서의 천만 영화 그런데 흥미롭게도 2010년대 중반부터, 한국영화에서 비체화를 초래하는 근원이 정치권력에서 점차 경제권력 으로 전환됨을 관찰할 수 있다. 자본 경쟁에서 승리한 기업이나 경제인들이 그렇지 못한 이들을 비체화하는, 신자유주의가 지배하는 양극화 사회의 단면이 반영되기 시작한 것이다. < 기생충 >(봉준호, 2019)은 그 변화의 결정판이다. 글로벌 IT 자본가와 불안정한 노동 무산계급(precariat) 가족이라는 양극화된 인물 설정, 그리고 경제적 계약 관계에 내재된 이중 윤리도 인상적이다. 극중 동익( 이선균 )과 연교( 조여정 )는 기택( 송강호 ) 가족을 상냥한 태도로 존중하는 동시에 피고용인으로서 넘지 말아야할 ‘선’을 암묵적으로, 하지만 명확히 전제한다. 계약에 근거해 서비스를 제공받는 고용인으로서 선의를 베풀지만, 피고용인이 그 이상을 요구하거나 불필요하게 간섭하는 등 그들이 전제한 ‘선’을 넘는다면 이들을 ‘혐오(비체화)’한다. 자신들이 혐오 받고 있음을 지각한 피고용인들의 분노는 결국 테러를 유발한다. 역시나 정치의 개입 없이 부자와 빈자 간 격돌만 존재하는 탈정치적 생명정치 프레임이 적용된다. 다만 비체 간 매개나 연대 없이 작품 후반으로 갈수록 ‘을’들 간의 권력 투쟁만 이어진다는 점에서, 신자유주의 사회 속 비체의 특성을 반영하는 듯 내러티브가 한층 더 비관적으로 변주되었다는 점이 차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후 < 오징어게임 >(황동혁, 2021)은 서바이벌 게임이라는 설정을 통해 적자생존과 약육강식이 정당화되는 체제를 상정해서 자본주의가 자연화된 세계관을 선보이기도 했다. 이렇게 경제권력이 낳는 비체화가 최근 주류 한국영화 및 한국 콘텐츠에서 자주 나타나면서 기존 글로벌 코리안 시네마의 전형에 변형을 가하는 모습이 포착된다. 텍스트와 콘텍스트의 길항: 수행적 자기 모순 <기생충> 중 이 시점에서 한 가지 지적하고자 하는 현상이 있는데, 바로 글로벌 코리안 시네마의 수행적 자기 모순 이다. 작품들 자체는 자본주의 체제와 신자유주의적 경쟁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취하고 비체 간 대안 윤리를 모색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자신들이 비판한 글로벌 자본주의 체제를 살찌우는 방식으로 소비 된다.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기생충>이 거둔 기록적인 성과는 영화에 상품성을 불어넣어 글로벌 체제로 빠르게 흡수되도록 만들었다. 봉준호 감독이 자신의 필모그래피를 통틀어 가장 비관적인 사회상을 그리게 되기까지 동시대에는 어떠한 문제가 고질적으로 누적되어왔는지를 진지하게 성찰하려는 노력은 일어나지 않았다. 대중은 화제의 작품을 찬양하고 소모하면서 그 안에 담겨있던 의미심장한 메시지는 수신하지 않는다. 다양한 해석과 전유의 가능성을 지닌 작품일수록 이를 즐기는 관객을 통해 수입이 증대되지만, 이렇게 화제성을 얻어 글로벌 미디어 현상으로 번진 작품은 시뮬라크라(simulacra)로서의 바이럴 밈에 지나지 않게 된다. 우리가 살고 있는 문화적 네트워크가 ‘바깥’을 지시하는 어떠한 시도도 허용하지 않음을 방증하는 대목이다. 자본주의는 체제의 바깥을 상정하는 비판적 텍스트마저도 무섭도록 강력한 포섭력으로 다시 흡수함으로써 태연하게도 비대화된다.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적 기조에서 발생한 콘텍스트와 여기에 저항하는 텍스트 간의 이 길항적 공생 관계를 어떻게 바라봐야할지는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내게 숙제로 남아있을 것 같다. 오늘 특강에 찾아와준 여러분들도 함께 고민해주시면 좋겠다. * 질문과 답변 * (질문 1) 199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영화는 ‘유사-할리우드’를 흥행 전략으로 삼았다. < 쉬리 >(강제규, 1999)와 같이 할리우드 스타일이 주를 이루되 한국적 요소를 가미해 대중성을 확보한 것이다. 그런데 <올드보이>가 2004년 칸국제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한 이후부터 ‘한국영화’가 전 세계에 하나의 장르와 같이 인식되기 시작한 것 같다. 한국영화가 이렇게 짧은 시간 동안 장르로 거듭나며 국제적으로 이목을 집중시킬 수 있었던 이유 는 무엇일까? (영화저널리스트 김형석) (답변) 오늘 강연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2000년대 한국영화가 ‘질적으로 성장’하면서, 한국적 특성을 지닌 작품들이 글로벌 시장에 자리 잡는 과정에 대해 질문 해주신 듯하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상황이 영향을 미쳤겠지만, 근본적이고 추상적인 요인을 한국영화에 대한 당시 영화인들의 열정과 애정 에서 찾고 싶다. 1980년대 서울대 얄라셩영화연구회 회원을 중심으로 결성된 ‘서울영화집단’의 선집 『새로운 영화를 위하여』(2000)에 장선우 감독이 기고한 「새로운 삶. 새로운 영화」나 「열려진 영화를 위하여」와 같은 글들을 보면, 당시 시네필 문화를 견인한 인물들이 서구 영화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와중에도 어떻게 자신들만의 주체성을 담지할 것인지 에 대해 끊임없이 각성한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해외 영화의 수준에 근접하고자 하는 욕망의 근저에는 어떻게든 우리만의 영화를 스스로 만들어보려는 열망도 있었고, 이 기세가 2000년대 이후 등장한 일군의 감독들에게도 여전히 남아있었던 것 같다. 과거 한국사회에 만연했던 폭력의 가해자로서의 정부나 제도 등을 비판적으로 바라보지만 한국사회 자체에 대한 애정은 충만한 것이다. 이는 애국주의나 민족주의로 환원될 수 없는 한국 근현대사의 비판적 측면을 영화화하고자 하는 집단적 지성이자 욕망 과 같다고 본다. (좌) 『새로운 영화를 위하여』 (우) <괴물> 중. 재난 상황을 해결하려는 인물은 거의 ' 일반 시민 '이다. 한국영화에서의 ‘장르’의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저서에서 다룬 ‘재난 영화’는 한국에서 2000년대 들어서야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초반에는 할리우드 스타일을 복사해 적용했다. 화재, 건물 붕괴, 비행기 추락 등 할리우드 재난 영화가 사용한 도상을 추출해 한국적 맥락에서 토착화하려는 시도만 한 것이다. 그러다가 작품 자체의 질적 완성도를 높임과 동시에 한국적 특성을 더 정교하게 반영함으로써 걸출한 한국형 재난 영화를 선보일 수 있게 되었는데, <괴물>(2006) 정도가 그 시작이었다고 생각한다. 할리우드 재난 영화에서는 사건을 해결하는 엘리트 집단으로서의 영웅적 인물이 등장하지만, 한국에서는 그렇지 않다. <괴물>에서도 나타나듯이 한국형 재난 영화에서 재난에 대처하는 인물들은 거의 일반 시민이며, 이들은 비체가 되어 고난을 겪기는 하지만 어떻게든 스스로 사건을 해결한다. ‘유사-할리우드’ 전략으로부터의 탈피라고 할 수 있는 이러한 변화가 빠르면서도 완성도 높게 이뤄질 수 있었던 데는, 앞서 이야기한 대로 독창적 한국영화를 만들고자 하는 영화인들의 각별한 애정이 한몫을 했다고 본다. (질문 2) 강연에서 언급된 것처럼, 한국영화는 유독 한 작품 안에서 최대한 다양한 장르를 경험하도록 하려는 욕구를 강하게 내비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경향은 인위적인 연출의 느낌을 주거나 메시지의 일관성을 해친다는 점에서 국내 관객에게는 부정적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하는데, 언젠가부터 해외에서 먼저 이 장르적 혼종성 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한국영화에서 엿보이는 장르 혼종적 특징이 결국 바람직하다고 볼 수 있는 것인지, 그렇다면 향후에도 이 특징이 작품에 지속적으로 반영될 수 있을지 가 의문이다. (답변) 장르 혼종에 대한 한국영화의 집착이 계속되는 근본적인 이유는 확실하지 않으며, 더 알아보고 싶은 마음이 있다. 다만 워낙 여러 감독에 의해 반복되다 보니 이후 세대 감독들 역시 의식적으로 유사한 경향을 도입하되 자신만의 방식으로 혼종을 시도해 작품에 개성을 더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최근 할리우드에서도 마찬가지로 장르적 혼종의 경향이 두드러지는데, 그와중에 ‘새로운 스타일’에 대한 수요도 나타난다. 예를 들어, 강연에서 이야기한 마인드게임(mind-game) 영화와 같이 병리학적 증상을 보이는 주인공이 자신이 맞닥뜨린 게임 상황을 관객과 함께 헤쳐 나가는 스타일은 할리우드의 여러 작품에서 ‘장르를 불문하고’ 나타나는 중이다. 이처럼 유사한 영화적 스타일이 전 세계에 걸쳐 긍정되는 현상 은, 어떻게 보면 동시대 문화와 미디어 전반에 형성된 광범위한 네트워크의 영향력 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모든 것이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그 ‘바깥’을 떠올리기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다. 그 안의 세계를 비판하는 사람들조차 영화와 같은 ‘텍스트’에서는 비판적 태도를 취하더라도 이를 둘러싼 삶의 현장으로서의 ‘콘텍스트’ 측면에서는 ‘핵인싸’가 되고 싶어한다. 조금 다른 주제이기는 하지만, 견고한 네트워크를 통해 세계적으로 공유되는 영화적 경향이나 스타일이 동시다발적으로 긍정되는 현상도 이와 같은 측면에 기인하지 않을까 싶다. (질문 3) 한국 상업영화만의 특징 이라고 일컬어지는 전형적 인물상이나 신파성 등이 해외에서는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는지 궁금하다. (답변) 한국영화 전체를 일반화해 답변드리기가 어려워, 하나의 사례를 바탕으로 말씀드리고 싶다. < 부산행 >(연상호, 2016)의 경우 개봉 당시 국내에서는 신파적 측면이 두드러진다는 이유로 비판을 받기도 했는데, 해외에서는 신선한 좀비 영화로 긍정적으로 조명된 바 있다. 서구적 좀비물에서는 볼 수 없었던 특징이 나타나서 그럴 수도 있는데, 예를 들어 해외 좀비 영화에서는 인간과 좀비의 구분이 명확해서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고 하더라도 좀비가 되면 즉시 처단해야 할 대상으로 인식된다. 그러나 <부산행>과 같은 한국의 좀비 영화는 좀비로 변했더라도 그 인물에 대한 다른 인물의 감정적 반응이 지속된다. 한국문화에서 엿보이는 ‘정’이나 ‘유대’의 개념이 투영된 것으로도 볼 수 있는 이러한 경향을 해외 관객들은 색다르다고 느낀 것 같다. (질문 4) 설명해주신 ‘글로벌 시네마’는 역사와 정치, 사회의 흐름을 반영해 주제의식과 내러티브를 설정한다. 반면 이렇게 거대한 프레임으로 동시대 사회를 조망하는 영화적 구도에 피로감을 느낀 창작자들은 개인의 삶이나 감정을 미시적으로 다룬 작품들 을 선보이기도 한다. 이와 같은 경향의 작품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전망하시는지 알고 싶다. (답변) 사실 현재 연구 중인 주제로서 오늘 강연한 ‘글로벌 패러다임’은 동시대를 따라 이미 흘러가고 있는 개념이다. 따라서 내가 제시한 글로벌 프레임을 넘어서 다가올 사회를, 그리고 그 속의 개인을 살펴보는 작품들이 더욱 많아졌으면 한다. 2010년대 이후에는 탈정치적 모순에 따른 이중 윤리 외에도 사회 안에서 여러 복합적인 현상들이 나타나고 있다. 이를 각자의 방식으로 반영하는 작품들이 계속 발표되고 연구되리라고 예상하며, 나 역시 새로운 흐름을 지켜보고 싶다. (질문 5) 강연 초반 이창동과 홍상수의 작품에 대한 공간적 키워드로의 분석을 보면서, 두 감독 등장 이전 세대라고 언급하셨던 감독들의 작품 에서는 동일한 의미의 ‘집’과 ‘길’ 이 어떻게 나타났다고 볼 수 있을까? 특히 장선우 감독의 경우 홍상수 감독의 ‘길’과 같은 방식으로 공간을 보여주는 듯하면서도 이를 다소 모호하게 재현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한국영상자료원 학예연구팀장 정종화) <경마장 가는 길> , <너에게 나를 보낸다> 중 (답변) 두 감독 이후의 한국영화 감독들이 거의 이창동 감독의 방식 을 따랐다고 말씀드린 것처럼, 이전 세대 역시 유사 했으리라고 짐작한다. 이창동 감독의 이력을 고려할 때 그의 작품 세계의 바탕에 문학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을 텐데, 한국문학계에서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에 대한 논쟁이 꾸준히 이어지는 와중, 보다 주류에 가깝다고 논의된 사조는 리얼리즘이었다. 또 영화라는 매체 자체가 현실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도 하다는 점에서, 이전 세대 감독들의 공간이 지닌 리얼리티 역시 이창동 감독의 방식에 가깝게 구현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장선우 감독의 < 경마장 가는 길 >(1991)과 < 너에게 나를 보낸다 >(1994)가 원작으로 하고 있는 소설은 포스트 모던적 경향을 보인다. 다만 장선우 감독의 이력을 참고할 때, 이러한 원작을 영화로 각색하는 작업이 그의 작품 세계가 지녔던 맥락과 조금 어긋난 측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앞에 이야기한 「열려진 영화를 위하여」와 같은 글에서 나타난 장선우 감독의 의지는, 포스트 모던을 대표하기보다 한국적 공연 및 서사 문화의 감각을 유기적인 체계로 조직하는 데 가까웠기 때문이다. 1995년 정도부터 영화계의 ‘코리안 뉴웨이브’에 대한 주목이 차츰 줄어든 배경에는 이러한 어긋남이 자리했던 것 같기도 하다. *** 주1. 니체가 『비극의 탄생』(1872)에서 비극(예술)의 정체를 설명하기 위해 그리스 신화 속 빛의 신 아폴론과 술의 신 디오니소스의 특성을 이용한 방식을 참고했다. 니체는 ‘아폴론적인 것’이 태양과 같은 밝음과 그 밝음 아래서 사물이 드러내는 균형 및 질서 등을 의미하고,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무질서한 혼돈과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생명과 같은 특징을 지닌다고 이야기한다. 주2. 복잡한 내러티브를 통해 관객을 게임으로 초대하는 2000년대 할리우드 영화의 한 경향으로, 크리스토퍼 놀란의 < 메멘토 >(2000)와 < 인셉션 >(2010) 등이 해당한다. 주3. 영화 작가주의 개념이 프랑스에서 처음으로 등장할 때 정치적 운동의 일환으로 소개된 바 있지만, 세상을 향한 21세기 영화 작가들의 태도에서 정치성은 훨씬 더 징후적으로 드러난다고 보고, 이를 다각도로 분석한 필자들의 글을 동료와 함께 취합했다.
.... (계속) 그리고 임권택 은 < 안개마을 >을 찍기 위해서 재빨리 오던 길을 돌아왔다. 다행히도 아직 첫눈은 내리지 않았다. “원래는 시간이 충분하다고 생각했지요. < 나비 품에서 울었다 >를 찍은 것도 속초에서 시작해서 삼척을 거쳐 도계에서 단양으로 넘어가는 길을 찍고 난 다음 <안개마을>을 찍으러 돌아오면 된다는 생각을 한 거지요. 그런데 그냥 두 개가 서로 겹치면서 그게 그렇게 안 된 거요. 그때는 우수영화가 되면 외국영화 쿼터를 주었잖아요. 화천공사에서는 한편 찍으면 그걸로 우수영화 넣고 그게 되면 하나 수입할 생각이었는데 이제 날짜가 막 쫓기고 그러니까 거의 포기하면서 박종찬 사장이 내가 있는 데서 들으라고 에이, 다 틀렸네, 그러면서 짜증을 내는 거요. 그래서 나도 오기가 생겨서 아, 그거 찍으면 될 거 아뇨, 하고 촬영에 들어간 거요. 처음엔 20일 정도면 찍을 거라고 생각했죠. 시나리오를 보면 계산이 나오잖아요. 그런데 촬영을 12일 만에 마치고 눈이 내리는 걸 기다리는데, 거기서 눈이 오는 장면이 꼭 있어야 하는데, 그게 또 안 내리는 거요, 그냥 거기서 또 열흘을 논 거요. 날짜가 있으니까 그래서 일단 그걸로 편집해서 검열을 넣고, 나중에 다시 내려와서 눈 내리는 장면을 보충촬영해서 바꿔 넣은 거요” (<임권택, 임권택을 말하다>) 구태여 우회할 필요가 있을까. <안개마을>은 순식간에 찍은 영화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그걸 느낄 정도이다. 영화는 음악이 아니기 때문에 그걸 즉흥연주 하듯이, 마치 세션을 벌이듯이 만들 수 있는 방법이 없다. 맨 처음에는 이문열 의 단편소설 <匿名의 섬>(이문열은 이 소설의 제목을 ‘그렇게’ 썼다) 이 있었(을 것이)다. 계간 ‘세계의 문학’ 1982년 봄호에 발표한 고작 17장 밖에 되지 않는 아주 짧은 소설이다. 물론 작품의 깊이와 길이는 서로 아무 상관이 없다. 내가 고작, 이라는 말을 한 것은 이 길이의 단편 소설로 장편 영화를 찍어야 한다는, 영화 쪽의 입장에서만 생각한 놀라움 때문이다. 나는 영화를 먼저 보았고 그런 다음 소설을 읽었다. 말하자면 반대의 순서. 두 개의 텍스트. 두 개의 작품. 시간적으로 거슬러 올라오는 반대의 방향. 임권택 에서 이문열에로, 영화에서 소설에로. 참 이상한 일이다. 이 둘은 서로 전혀 다른 활동이기 때문에 이쪽에서 저쪽을, 물론 반대로 말하는 것도 항상 조심스럽게 이루어져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상하게도 이 짧은 단편소설이 1시간 31분 동안 계속되는 영화보다 훨씬 길다는 인상을 받았다. 나는 지금 우열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여기서 길다는 말조차도 바보 같은 설명이다. 소설에서 지속되는 독서의 시간을 영화에서 제한된 물리적 관람의 시간과 비교하는 것은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일인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둘 사이에 놓인 차이를 소설과 영화, 혹은 이문열과 임권택으로 설명하는 대신, 오히려 독서의 장소에서 내가 보낸 시간과 영화의 시간에서 내가 바라본 시간 둘 사이의 불일치, 이쪽과 저쪽 사이의 명백하게 드러난 효과의 경계를 자꾸만 희미하게 지워나가는 분산, 그저 드러난 차이 바깥에서 활동하는 차이, 그 사이에 놓여있는 어떤 나선, 때로 알 수 없는 긴장관계의 효과, 거의 피할 수 없을 만큼 저쪽이 이쪽을 끌어당기는 텍스트 안에 내재한 요구들과 제약들, 그것들이 중얼거리는 둘 사이에서 일어나는 시간의 형식 혹은 움직임에 대해서 따라가 볼 생각이다. 이문열 의 시작. (소설) “쯧쯧......” 늦은 저녁을 마친 뒤 TV를 보고 있던 남편이 한심한 듯 혀를 찼다. 짐작한 대로 화면에는 두 손이나 옷깃으로 얼굴을 가린 채 웅크린 남녀들이 경찰서 보호서 한구석에 몰려 있는 모습이 여러 각도로 잡혀 있었다. 도박인가 싶었으나 비밀 댄스홀이었다. 대낮인데도 어둑한 조명 아래서 춤을 추다가 끌려왔다는 것인데, 아나운서는 ‘춤추다’라는 말 대신 남녀가 몸을 부비고 있었다고 표현함으로써 분위기를 더욱 부도덕하고 선정적(煽情的)인 것으로 이끌고 있었다. “도대체가 우리 시대는 너무 쉽게 익명(匿名)이 될 수 있어서 말이야” 남편이 그걸 보며 개탄조로 시작했다. 이미 몇 번인가 들은 말이어서 그 뒤는 듣지 않아도 어림잡을만 했다. 도회에서는 자신이 살고 있는 동네로부터 버스 정류장 하나만 벗어나도 우리를 알아보는 사람은 거의 없어지고 만다. 그런데 손쉽게 자기를 감출 수 있다는 것, 즉 익명성(匿名性)의 획득은 사람들을 대담하게 만든다. 그것이 우리 시대의 도덕적 타락, 특히 여성들의 성적(性的) 부패를 부추기는 요인이다...... 남편은 대개 이런 식으로 몰고 가다가 결론은 그가 자린 고향의 동족부락(同族部落)을 그리워하는 것으로 맺곤 했다. “면(面) 전체가 서로서로를 물밑 들여다보듯 아는 사이지, 그것도 태반은 멀건 가깝건 혈연으로 묶여있어, 여자들의 탈선이란 어지간한 각오 없이는 엄두도 못 낼 일이야, 가끔씩 읍내를 이용해 보지만 그것도 이르든 늦든 알려지게 되어 있어.....” 하지만 남편의 말을 듣고 있으면 내게는 무슨 반발처럼이나 떠오르는 옛 일이 하나있다. 마땅히 남편에게 죄스러워하고, 어쩌면 스스로도 부끄럽게 여겨야 하지만, 지금은 물론 그때조차도 그저 아득하기만 한 하던 십여년 전의 일이다. 여기까지가 소설의 시작이다. 영화에는 이 대목이 전부 없다, 물론 소설에서 영화로 옮겨오면서 어떤 페이지는 남아있고 어떤 페이지가 사라지는 것은 신기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문열 과 임권택 은 같은 이야기 안에서 시간을 다른 방법으로 다루고 있다. 막 저녁을 먹고 난 그 어느 날, 아마도 설거지를 하고 있는 아내 곁에서 남편은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을 것이다. 뉴스 시간. 그걸 보며 남편이 혼자 하는 말을 들으면서 아내는 십여 년 전의 일을 떠올린다. 나는 이 문장을 영화적으로 다시 옮겨 쓰고 싶다. 즉각적으로 번역되는 첫 번째 인상. 마치 새어나가는 듯이 다른 삶의 시간 속으로의 도피 기계가 작동하는 장면. 이 말의 방점. 장면, 혹은 광경. 남편의 부주의한 시선. 아마도 등을 돌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자 활동하기 시작하는 아내의 은밀한 기억의 시간. 마치 눈에 보이는 듯한 배치. 마치 스크린 앞에서 화면을 읽고 있는 듯한 기분. 그것이 꼭 묘사적인 것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손에 붙잡힐 것만 같은 문자들. 이 이야기는 아내가 남편 곁에서 설거지를 하면서 떠올리는 플래시백의 형식 안에서 진행되는 기억의 시간이다. 이미 몇 번 들은 말이라면서 어림잡아 그 뒷말을 알 수 있을 만큼 남편은 이 이야기를 자주 했다고 한다. 청각의 신호에 관한 두 가지 설명. 남편은 면 전체가 물밑 들여다보듯 아는 사이일 뿐 더러 대부분 혈연으로 묶인 고장에서 자라났으며. 지금 도회에 사는 그는 그 시절을 그리워한다. 그러나 앞 대목이 사라지면서 남편의 향수도 영화에서 함께 지워졌다. 내게는 두 번째 설명이 훨씬 중요해 보인다. 아내는 남편 바로 곁에서 그 목소리를 들으며 지금 십여년 전의 일, 아직 그녀가 남편과 결혼하기 전, 그때 ‘군청 소재지에서 육십 리 가까이 떨어진, 그것도 그 너머에는 사람이 살 것 같지 않은 높고 험한 재를 두 개나 넘어야 하는’(소설) 산골에 자리한 국민학교(이 소설에는 초등학교를 그렇게 표기하고 있다)에 재임하던 시절, 깨철이라고 불리는 정체불명의 남자에게 강간당하듯이 ‘그와 한 차례 정사(情事)를 즐긴’(소설) 사건을 떠올린다. 같은 말의 반복. 남편 곁에서 떠올리는 다른 남자와의 섹스. 하지만 남편에게는 비밀스럽게 떠올리는 시간. 그때 그 두 사람은 같은 장소에서 서로 다른 시간의 감정에 몸을 내맡기는 것이다. 몸을 내맡긴다고? 그렇다. 자기 자신 말고 그 누가 그것을 알겠는가. 낯선 몸. 자기 자신에게 고유한 몸에 관한 이 은밀한 기억의 시간. 그런 다음 몸의 바깥으로부터 안으로 들어가는 시간. 마치 남편의 장소로부터 멀리 달아나기라도 하듯이 소설은 한 줄을 띄어 쓴 다음 (소설) ‘그해 이른 봄 갓 교육대학을 졸업한 나는 굳이 이름을 밝히고 싶지 않은 어느 시골학교에 첫 부임을 하게 되었다’ 라고 말하면서 그때 그 시간으로 뛰어넘는다. 대차대조표. 임권택은 결혼 ‘이후’를 건드리지 않겠다고 결심한 것처럼 보인다. 반대로 이문열은 결혼 ‘이후’의 자리에서, 십년도 더 지난 일을, 마치 그리워하듯이, 말을 꺼내들기만 하더라도 어림잡을 만큼 자주 듣는 이야기를 다시 들으면서, 그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그 사건의 장소로 달려간다. 왜 그녀는 그 순간마다 깨철과의 그 일, 그 시간, 그 사건 안으로 달려가는 것일까. 그녀는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는 중이 아니다. 혹은 그 시간을 다시 구성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냥 그 시간 안으로 단숨에 뛰어들려는 것이다. 그 자체로서 보존된 시간. 시간 안에서 살아남은 기억. 두 개의 시간의 계열. 나는 이 말하여지지 않은 부부 사이의 공백을 좀 더 밀고 나가고 싶다. 남편이 그렇게 잘 알고 있는 고향의 동족부락 속에서만 은밀하게 진행되었던 공동체의 성적인 관계라면 (그것이 설혹 다른 동네에서였을 지라도) 지금 남편이 아내의 비밀을 미루어 짐작하고 알고 있다고 가정해볼 수는 없는 것일까. 두 번째 설명에 덧붙여진 주의를 기울일만한 지적. 이때 이문열이 건드리는 ‘익명성의 획득’은 단지 텔레비전에 나온 사람들의 이야기만이 아니다. 짧은 단편이긴 하지만 단 한 구절도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남편과 아내의 이름은 등장하지 않는다. 이문열은 슬그머니 도회의 익명성과 ‘군청 소재지에서 육십 리 가까이 떨어진’ 산골 마을을 겹쳐놓고 있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아내의 이름을 그녀가 부임한 국민학교 교장 선생님이 다른 선생님들에게 소개하는 자리에서 한수옥이라고 일러주고, 남편의 이름은 한수옥이 편지를 쓰면서 (보이스 오버로) 영훈, 이라고 호명한다. 나는 이것이 단지 진행상의 기능적인 요구나 편리한 설명을 위해서라고 믿기 어렵다. 설혹 그렇다 하더라도 도대체 무엇을? 임권택은 이문열의 소설 안에 들어간 다음 맨 먼저 소설의 이야기가 작동되는 방식을 일단 중단시켰다. 사라진 시간적 거리의 간격. 영화에는 현재라는 안전한 방어선이 사라졌다. 소설에서 수옥은 아무리 위험한 지경에 처한다 할지라도 그저 간단하게, 상상을 중단하면, 거기서 빠져나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에서 수옥은, ‘사방을 둘러싼 산들은 일평생 나를 가두어둘 거대한 감옥의 벽처럼 느껴졌고, 저만큼 보이는 백여호(戶) 정도의 마을도 사람들이 모두 떠나버린 폐촌(廢村)인 것만 같은’ 장소에 도착한 다음 내내 거기서 진행된다. 물론 수옥의 보이스 오버가 눈앞에서 진행되는 이야기의 화면을 과거에로 데려간다고 말하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송길한의 각색 속에서 보이스 오버의 대사들은 현재와 과거 사이를 에매하게 만들고 있다. 소설 제목 <匿名의 섬>에서 영화 제목 < 안개마을 >로 옮겨왔을 때 이문열 에서 임권택 으로 그저 단순하게 이동할 수 없는 교란이 거기 개입하고 있는 두 개의 판본 사이에서 오가는 망설임이랄까, 어떤 선택이 읽기와 보기 그 둘 사이에서 주저하고 있는 틈 안으로 들어와 그 충돌의 어디에 내가 놓여있는지를 요구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소설에서 ‘匿名의 섬’은 깨철을 지칭하는 표현이다. (... 중략) 깨철은 혈연이나 인척으로 속속들이 기명화(記名化)된 그 마을에 유일하게 떠도는 익명(匿名)의 섬이었다, 라고 설명한다. 소설은 수옥이 깨철이라는 이 정체불명의 남자를 관찰한 다음 그와 (... 중략) 당했다기보다는 차라리 한 차례의 정사를 즐긴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는, 그날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영화는 소설에 없는 이미지를 불러 온다. 종종 이 마을은 안개 속에 숨어버린 것처럼 그 윤곽을 감추어버린다. 단지 그것은 기후만의 성질이 아니라 수옥에게는 이 마을 전체의 사람들 사이에서 알 수 없는 공모랄까, 서로 간의 비밀을 공유한 채 안개 속의 마을처럼 그 모습을 바깥사람에게는 드러내지 않는다. 수옥은 이 마을에 와서 떠날 때까지 그 누구와도 특별하게 친해지지 않으며, 이야기 속에서도 (깨철을 제외하고) 어떤 인물이 다른 인물들보다 더 중요해지지 않으며, 그들 모두가 수옥에게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친절한 태도를 보인다. 그리고 그 거리는 마지막 장면까지 좁혀지지 않는다. 풀려버린 교집합. 다소 도식적으로 말하자면 소설에서 영화로 옮겨갈 때 여기에는 반복을 중단시키는 회로가 있다. 물론 겉으로 드러난 것만을 지적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이를테면 소설에서 수옥은 이 마을의 국민학교에 부임한 다음 삼년이 조금 지났을 때 사표를 내고 그러고 나서도 (... 중략) 그런데 워낙이 머릿수를 맞춰둔 교원이라 내가 그날로 떠나버리면 그동안 맡아오던 학급은 후임자가 올 때까지 수업을 중단할 형편이었다. 그 바람에 나는 사흘이나 더 기다려 후임자와 맞교대를 하고서야 학교를 벗어날 수 있었다, 라고 설명한다. 그런데 영화에서는 (수옥의 목소리를 빌려 voice_over_narration) “부임한 지 사 개월이 조금 지났을 무렵 군에서 제대한 영훈씨로부터 직장에 취직이 되었다는 편지를 받고 나는 그와의 결혼식을 위해 사표를 내고 동족마을과 작별을 하게 되었다” 라고 설명한다. 여기에는 물론 미묘한 차이가 있다. 약간 더 앞으로. 소설은 남편과의 연애 과정을 이 짧은 소설에서 비교적 소상히 밝히고 있다. 그 두 사람이 언제 만났으며, 그런 다음 언제 약혼을 했으며, 양가의 반응은 어떠했으며, 그러고 나서 둘이 여행을 가서 나누었던 내밀한 시간까지도 밝히고 있다. 그리고 난 다음 남편은 입대를 했고 월남 전선에 차출되었다는 이야기가 이어진다. 영화에서는 이 설명이 모두 없어지고 단지 남편과 함께 여행을 가서 한 침낭 안에서 사랑을 나누었던 장면만을 짧게 플래시백으로 보여주고 있다. 사라진 시간. 여기서 중요한 구별은 무엇이 남고 무엇이 없어졌는가를 묻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거기 남아있는 시간이 소설에서 차지하는 고유한 설명만큼 반대로 거기서 사라진 시간이 비워놓은 채 활동하는 설명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여기서 두 개의 장면을 건드려볼 것이다. 먼저 소설 속의 문자를 건드리고, 그런 다음 영화 안의 쇼트들을 마찬가지로 그렇게 건드려볼 것이다. 그런 다음 그 둘을 양쪽에 세우고 그 사이에서 일어나는 효과의 형식과 의미의 힘을 만져보려고 한다. 둘 사이의 거리는 생각보다 멀지 않을지 모른다. 하지만 반대로 우리의 상상보다 멀 수 있다. 생각과 상상의 차이. 문자 안에 감추어진 승인된 전략들. 쇼트들의 새로운 질서 속에서 그것을 끈질기게 재전유하려 들 때 우리들은 두 개의 모델, 소설과 영화에 대해서 또 다른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이 글의 시작. 이문열 의 소설. (... 중략) 그 사이 함께 내린 두어 명의 승객도 모두 어디론가 가버린 후여서 나는 가까운 가겟집에나 물어볼 양으로 걸음을 옮겼다. 서너 발자국이나 옮겼을까, 나는 피부를 찔러오는 날카로운 빛 같은 것을 느끼며 걸음을 멈추고 앞을 살폈다. 그러나 내 눈 에 들어오는 것은 가겟집 툇마루에 앉아 몽롱하게 나를 바라보고 있는 어떤 사내였다. 때 묻고 해진 아랫도리는 원래의 천이 어떤 것이었는지 짐작이 안갈 정도였고, 물들인 군용점퍼도 소매가 해져 너덜거리고 있었다. 나는 좀 전의 그 강렬한 빛 같은 것의 정체를 궁금히 여기며 자신도 모르게 그 사내의 얼굴을 살폈다. 검고 깡마른 얼굴에 우뚝 솟은 코와 광대뼈- 그런데 그때였다. 나는 다시 피부를 찔러 오는 것 같은 그 빛을 느꼈다. 이내 몽롱한 광기(狂氣) 속으로 숨어들어버렸지만 분명 그의 두 눈에서 쏘아져 나온 빛이었다. 어떤 무성한 숲길에 들었을 때, 그 잎 새에서 뱀을 보면 그것은 그 숲길을 다 지나갈 때까지 공포이다. 그러나 그 공포는 단순한 두려움의 감정과는 다른, 신선한 충격 또는 묘한 기대와 같은 것으로서, 무사히 그 숲길을 빠져나오고 나면 일종의 허전함이나 아쉬움이 되기도 한다. 사내의 두 눈에서 얼핏 비쳤던 그 빛도 그러하였다. 그런데 내 그런 느낌을 일순의 착각으로 만들어 준 것은 갑자기 가게 문을 열고 나온 주인 남자였다. “깨철이 이노마야, 니 아까부터 거기 앉아 뭐 하노?” (중략... ) S# 1 S# 2 S# 3 S# 4 S# 5 S# 6 S# 7 S# 8 S# 9 S# 10 S# 11 S# 12 S# 13 S# 14 S# 15 S# 16 S# 17 S# 18 S# 19 S# 20 S# 21 S# 22 S# 23 S# 24 S# 25 S# 26 임권택 은 이 장면을 26개의 쇼트로 나누었다. 버스가 마을 가게 앞에 도착하고 거기서 마지막으로 수옥이 내린다. ( S# 1) 내린 수옥이 둘러보지만 ( S# 2) 수옥 말고는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 S# 3) 심지어 이 동네가 마치 사람들이 모두 떠난 것처럼 가게 안에도 아무도 없다 ( S# 4) 수옥은 동네에 인기척을 느껴보기라도 하듯 두리번거리다가 ( S# 5) 갑자기 한쪽 마을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있는 한 사내, 깨철을 발견 한다. 수옥이 깨철을 다소 의아하게, 호기심을 갖고, 하지만 경계를 하면서 쳐다보지만 깨철은 희미한 표정만 짓고 있다 (S# 6_7_8_9) 그런데 갑자기 깨철이 잠에서 깨어나기라도 한 듯 수옥을 바라보기 시작한다. (S# 10_11_12_13) 이 이상한 상황. ( S# 14) 그러다가 깨철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원래의 몽롱한 표정으로 돌아간다. ( S# 15) 알 수 없는 두려움에 수옥은 ( S# 16_17) 뒤로 물러나면서 방어하기라도 하듯 가방을 들면서 깨철을 바라보지만 깨철은 그저 잠든 것처럼, 원래의 자세 그대로 양지바른 자리에 가만히 앉아있을 뿐이다. 수옥의 목소리. (voice-over narration) “내가 임지에 도착해서 처음으로 만난 사람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내였는데, 그는 피부로 찔러오는 날카로운 빛 같은 것을 보내오는 것이었다. 그 강렬한 빛은 마치 숲 속에서 불현듯이 마주친 뱀 같은 공포를 주었다. 그 공포는 단순한 두려움의 감정과 달리 신선한 충격으로 나를 사로잡았다” ( S# 18_19_20) 그때 깨철이 앉아있던 툇마루 바로 곁 대문이 열리면서 집주인이 나와 “깨철이 이노마야! 니 아까 부터 여기 앉아 뭘 하노! 일마가 귀가 먹었나, 어서 일나라! 어허 일나라카이!”라며 깨철을 꾸짖는다. (S# 21) 수옥 그걸 유심히 바라본다. (S# 22) 수옥, 가겟집 주인에게 말을 걸며 ''''저, 여기 학교가 어디 있어요?'''' 리고 묻자 돌아보면서 '''' 학교예? 아, 그라고보니 새로 오신 여선생님이신 모양인데, 철아, 철아'''' 라고 부르자 (S# 23) 철이가 '''' 도곡아재, 와요?'''' 라며 집에서 나오다가 깨철가 부딪치가 밀쳐내며 ''''이노마야, 비키라마'''' 라고는 달려간다. 깨철 제 갈길을 가다 말고 돌아본다. (S# 24) 가겟집주인이 철이에게 ''''새로 오신 선생님이시다, 어서 인사드려라''''고 하자 ''''오학년 철이입니다''''라고 인사한다. 주인이 철이에게 ''''학교까지 좀 모시고 가그라이'''' 하자 ''''알았심더''''하고 길을 나선다 (S# 25) 길을 나서는 수옥과 철이를 깨철 뒤에서 유심히 바라본다. (S# 26) < 안개마을 >을 본 다음 <匿名의 섬>을 읽으면서 내가 신기하게 생각한 것은 임권택 이 이문열 의 소설을 문자 그대로 찍어나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나는 지금 단순하게 각색의 차원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송길한의 시나리오는 이미 영화가 완성된 다음 영화를 보면서 다시 옮겨 쓴 것이 아닌가 할 만큼 소설보다는 영화에 친밀(하고도 내밀)한 이미지와 동선에 따르는 배치의 표면만으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지문들. 나는 <안개마을>을 보면서 임권택의 이상한 독서 방법에 대해서 생각해보고 싶어졌다. 이상한 독서방법? 앙드레 바쟁이 조르주 베르난노스의 소설을 영화로 각색한 로베르 브레송의 < 시골사제의 일기 >을 본 다음 했던 말. 세르주 다네가 베르난노스의 소설을 영화로 각색한 모리스 피알라의 <사탄의 태양 아래에서>를 본 다음 따라했던 말. 나는 지금 영화와 문학의 관계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영화가 책을 읽는다는 문제. 이때 임권택은 <匿名의 섬>의 주제를 탐구한다든가 혹은 인물을 따라가거나 그 안의 이야기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대신 그냥 자신이 읽은 책의 효과에 대해서 영화가 건드리는 방법을 따라가고 있다. 영화는 문학의 무엇과 연결될 수 있는가, 라는 질문. 그런 다음 무엇이 연결되지 않는가, 라는 낭패. 왜 문학의 어떤 부분들은 영화라는 기계 안으로 전체화되지 않느냐, 라고 물어보는 대신 어떻게 영화는 문학을 자기의 기호 안에서 통일시키지 못하는가, 라고 물어보고 있을 때 영화는 문학의 글자를 찍기 시작한다. 말 그대로 임권택은 이 소설의 문자를 찍고 싶어 한 게 아닐까, 할 만큼 문자 그 자체가 지니고 있는 광학효과에 이끌린 다음 그 효과를 포기하려 들지 않았다. 소설의 두 번째 문장. 피부를 찔러오는 날카로운 빛 같은 것, 이라고 깨철을 문자가 건드릴 때 그것은 객관적 세계에서 그 어떤 자리도 차지할 수 없는 인상에 의해 감각한 것이지 그것을 지각한 것은 아니다. S# 1 S# 2 S# 3 S# 4 S# 5 임권택 은 처음 세 문장을 다섯 개의 쇼트로 찍었다. 처음 버스가 마을에 들어올 때 기능적으로는 마스터 쇼트이지만 다소 어리둥절하게 진행된다. 이 버스를 따라서 느리게 물러나면서 쳐다보는 느낌을 줄 때(zoom_out) 이상하게 카메라는 마치 바닥에 앉아있기라도 하듯 불편하게 올려다보고 있다. (low_angle) 표준을 벗어난 첫 장면. 그 장면이 그것 자체로 보여 지지 않을 때, 그래서 대상과 우리 사이에 무언가 개입할 때, 그 장면에 있는 얼룩은 단지 시선을 다른 데로 돌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거기에 시선이 덧붙여진 것이라는 생각을 해야 한다. 그저 단순하게 도식적으로 말하면 지금 우리가 장면 안의 대상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장면이 대상을 바라보는 것을 우리가 쳐다보고 있는 중이다. 좀 더 자세한 설명. 이때 첫 다섯 쇼트가 이상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 기술적으로만 말하면 버스가 도착해서 수옥이 내리는 장면( S# 1)과 수옥이 내린 다음 버스가 떠나가는 장면( S# 3)은 마치 누군가의 시선과 주고받은 것처럼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그 쇼트가 접속하고 있는 것은 이 낯선 동네에 내려서 두리번거리고 있는 수옥의 클로즈업이다. (S# 2) 물론 그 사이에 약간의 미세한 데드 타임이 있긴 하지만 버스는 도착하자마자( S# 1) 서둘러 다시 떠난다. (S# 3) 이때 이상하게도 두 번째 쇼트는 무언가 다가와서 수옥을 더듬거린다는 느낌을 준다. 더 이상한 시선은 네 번째 쇼트이다. 마치 사람들이 모두 떠나가기라도 한 것처럼 텅 빈 동네에는 어떤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는다. 텅 빈 동네를 둘러보던 수옥은 가게 앞에서 기웃거린다. 문제의 네 번째 쇼트. 이때 상대 쇼트(reverse_shot)는 가게 안에서 수옥을 바라보는 시선이다. ( S# 4) 그러나 이 장면은 성립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점에서 점으로 이동한 것이 아니라 장소 안으로 들어와서 상대 쇼트 저편의 사람을 쳐다볼 때 그 두 개의 쇼트를 연결하는 선은 시선의(point_of_view) 쇼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가게는 텅 비어있다. 혹은 잠시 주인이 자리를 비웠다. 만일 이 장면이 성립된다고 말하려면 한 가지 설명만이 남는다. 가게가 수옥을 바라보고 있는 중이다. 마치 하나의 인물이 되어버린 가게. 사물이 갖고 있는 인격. 나는 이 이상한 장면에 대해서 좀 더 설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왜 카메라가 가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중요해진 것일까. 거기 누가 있는 것도 아닌데, 누가 숨어있는 것도 아닌데, 그 가게를 기억시킬 필요가 있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 함으로써 보는 우리들을 불안하게 만들 필요도 없는데, 왜 그 안으로 들어가야만 했을까. 그런 다음 세 번째 쇼트의 자리로 다섯 번째 쇼트가 돌아온다. 이 말의 방점. 세 번째 쇼트의 자리. 수옥은 가게가 빈 것을 확인한 다음 이 동네의 풍경을 이리저리 기웃거리는데 그녀를 바라보는 카메라는 갑자기 손으로 들고(hand_held) 살펴보기 시작한다. 두 개의 쇼트는 동일한 대상을 바라보는데 그 방법이 전혀 다르다.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다. 세 번째 쇼트와 다섯 번째 쇼트는 서로 이어 붙일 수 없다. 이때 여기서 다르게 찍었다는 것 말고 더 기묘한 문제가 있다. 처음부터 다시 셈을 해보자. 버스가 마을에 도착한다. 정면으로 들어오는 버스. 그런 다음 멈추어선 버스에서 수옥이 내린다. 버스라는 동선. 수옥이라는 시선. 이때 영화는 하나의 선을 그어야 한다. 상상선. 그런 다음 그 선은 블록들을 만들어낼 것이며, 그 블록 사이에서 특정한 면들이 세워질 것이다. 면들의 사이. 사이라는 접속사. 이것이 영화가 무용의 운동하는 선이나 연극의 동선과 다른 활동의 구도이다. 첫 번째 활동. 수옥이 마을에 도착하는 것을 바라보게 만들려면 길을 중심으로 (버스가 다가오는 방향을 기준으로 마주보면서) 먼저 왼쪽과 오른 쪽으로 나눈 다음 버스의 문이 열리는 왼쪽으로 수옥이 내린다. 이때 카메라가 길을 하나의 선으로 해서 맞은편으로 넘어간 다음 왼쪽의 건물과 오른 쪽의 건물로 진행하면 이 문제는 간단하다. 혹은 표준적 판본에서는 그렇게 다음 장면을 이어 간다. 그러나 이 씬 전체가 이상한 것은 그 길을 중심으로 일종의 가상선을 그은 다음 모든 동선을 왼쪽에서만 진행하기 시작한다. 마치 절대로 오른쪽으로 넘어가면 안 된다는 원칙을 세운 것처럼, 어떤 불가능한 장소에 오기라도 한 것처럼, 그저 눈으로 볼 때에는 아무 문제가 없는데 영화적으로 거기 무슨 블랙홀이 있기라도 하듯이, 오른 쪽을 모두 버리고 선을 이어나가기 시작한다. 그렇게 되면 이 장소에서 180도에 이르는 공간을 모두 포기하고 진행해야 한다는 불편한 문제와 만나게 된다. 단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인물을 움직이기 매우 까다로워진다. 하지만 임권택 은 할 수 없다는 듯이 그렇게 진행하기 시작한다. 심지어 새로운 인물이 나올 때마다 모두 왼쪽 라인에서 등장한다. 차라리 이렇게 설명하면 어떨까. 세 번째 쇼트를 보여준 다음 길 건너편으로 넘어가느니 차라리 수옥 왼쪽 곁에 있는 가게 안으로 들어간 다음 다시 나온다. 평행선을 긋는 대신 길을 따라 수평선을 그은 다음 그 선을 뚫고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되돌아왔을 때, 그래서 다시 바깥으로 카메라가 나왔을 때, 기술적으로만 말하면, 다섯 번째 쇼트는 수옥을 손으로 들고(hand-held)로 찍었다. 두 가지 표면적 기술. 하나는 이 쇼트가 흔들린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 쇼트를 역광으로 찍어서 렌즈에 빛의 얼룩(halation)이 생기고 있다. 그냥 기술적으로만 말하면 이걸 차단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그리고 그것을 정일성이 모를 리가 없다. 이 영화는 역광을 이용한 촬영을 하고 있지 않다. 게다가 역광으로 찍는다고 해서 항상 빛이 렌즈에 만들어내는 얼룩이 생기는 것도 아니다. 마치 그 쇼트에서만, 오로지 이 순간에는 얼룩이 필요하기라도 한 것만 같은 번쩍이는 빛의 활동. 임권택의 광학효과. 이문열 의 가시적 문자. S# 5 S# 6 나는 이 쇼트를 이문열 의 문자와 연결시키고 싶다. 이문열의 소설 (.... 중략) 서너 발자국이나 옮겼을까, 나는 피부를 찔러오는 날카로운 빛 같은 것을 느끼며 걸음을 멈추고 앞을 살폈다. (중략...) 피부를 찔러오는 날카로운 빛. 그건 수옥이 느껴본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느껴본 것을 찍는 예술이 아니다. 무엇이 수옥을 멈춰 세운 것일까. 무엇이 그녀를 돌아보게 만든 것일까. 무엇이 저 구석 편에 숨어있기라도 하듯, 처음에는 보지 못했지만, 비로소 지금 저편에 쭈그리고 앉아있는 깨철을 발견하게 만든 것일까. 그건 피부를 찔러오는 날카로운 빛이다. 수옥의 피부 속으로 파고들 것만 같은 눈빛. 흔들리는 시선으로(hand_held) 빛이 얼룩져서 바라보는 이 장면이 돌아보는 수옥의 시선으로 깨철을 발견하는 쇼트( S #6)와 서로 이어 붙어있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 다섯 번째 쇼트는 반대로 여섯 번째 쇼트가 바라보는 쇼트이다. 같은 말의 다른 표현. 그건 깨철이 수옥을 바라보는 시선의 쇼트이다. 다소 비유적인 우회. 이때 깨철이 던지는 시선이 수옥의 피부를 찌르는 것처럼, 그래서 거기서 번쩍이는 빛의 얼룩(halation)이 깨철의 안광이 아니라면 다른 무엇이겠는가. 빛이라는 문제. 이때 깨철은 툇마루에 앉아서 오후의 따스한 빛을 맛보고 있는 중이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집도 없는 깨철이 달리 여기 어디에 앉아있을 것인가. 말하자면 영화에서 인물을 어디에 앉힐 것인가라는 문제. 그러면서 깨철은 이 동네에 버스가 도착할 때마다 낯선 새로운 방문객들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는 중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수옥이 도착했다. 새로운 먹이. 그녀를 유심히 살펴보는 깨철의 눈빛, 마치 피부를 찌를 듯한, 옷 속을 파고들 것만 같은, 그런 빛. 그 빛이 수옥의 몸에 던져질 때, 빛의 얼룩이 그녀의 이미지 위에 번쩍이고 있다. 그때 그 두 개의 빛을 찍기 위해서, 깨철이 자리 잡은 양지바른 툇마루 위의 빛과, 그가 쳐다보는 수옥의 피부를 찌를 듯한 빛을, 서로 성질이 다른 두 개의 빛을, 물리적으로 주어진 하나의 조명인 저물어가는 겨울 오후 햇살아래서 찍기 위해서, 임권택 은 수평으로 가상선을 그은 다음, 그림자만이 남은 맞은편으로 넘어가지 않는다. S# 6 S# 7 S# 8 S# 9 S# 10 S# 11 S# 12 S# 13 S# 14 S# 15 S# 16 S# 17 S# 18 S# 19 그런 다음 이어지는 네 개의 쇼트는 정확하게 수옥과 깨철이 서로의 거리를 유지하고 서로가 서로를 마주보는 시선의 교환이다. ( S# 6_7_8_9) 당신은 이 거리를 유심히 보아야 한다. 이문열 의 문장. (... 중략) 걸음을 멈추고 앞을 살폈다. 그러나 내 눈에 들어오는 것은 가겟집 툇마루에 앉아 몽롱하게 나를 바라보고 있는 어떤 사내였다. 때 묻고 해진 아랫도리는 원래의 천이 어떤 것이었는지 짐작이 안갈 정도였고, 물들인 군용점퍼도 소매가 해져 너덜거리고 있었다. (중략...) 나는 이문열의 문장을 영화로 다시 옮겨 쓰고 싶다. 카메라를 멈추고 앞을 살폈다. 그러나 프레임에 들어오는 것은 가겟집 툇마루에 앉아 몽롱하게 바라보고 있는 어떤 사내였다. (롱 쇼트로 멀리서 볼 때) 때 묻고 해진 아랫도리는 원래의 천이 어떤 것이었는지 짐작이 안 갈 정도였고, (조금 더 다가가서 풀 쇼트로 자세하게 들여다보니) 물들인 군용점퍼도 소매가 해져 너덜거리고 있었다. 임권택 은 정확하게 그렇게 찍었다. 하나의 문장을 쉼표로 둘로 나눈 것을 임권택은 두 개의 쇼트로 나눈 다음( S #6, 8), 깨철을 바라보는 수옥을 고정점으로 하여( S #7, 9) 롱 쇼트와 풀 쇼트로 묘사의 거리를 나누었다. 그런 다음 (이문열의 문장) 나는 좀 전의 그 강렬한 빛 같은 것의 정체를 궁금히 여기며 자신도 모르게 그 사내의 얼굴을 살폈다. (...중략) 이 문장의 번역. 영화에서 자신도 모르게 그 사내의 얼굴을 살필 수 있는 방법은 단 한 가지뿐이다. 그냥 한 마디로 클로즈업. (S #10) 임권택은 마치 이문열의 문장이 그림 콘티라도 되는 것처럼 그대로 따라가면서 찍어나가고 있다. 이때 임권택은 이 클로즈업을 다시 네 개의 쇼트로 나누었다. 기술적으로만 말하면 깨철은 몽롱한 눈빛에서 피부를 찔러오는 듯한 눈빛으로 바뀌었다가 다시 몽롱한 광기 속으로 빠져드는 일련의 연속적인 표정을 세 개의 쇼트로 나눈 것이며( S #10, 12, 15) 그런 깨철을 바라보는 수옥을 다시 두 개의 쇼트로 나눈 ( S #11, 13) 다음 교차 편집한 것이다. 기술적으로는 단순하다. 내 질문은 왜 깨철을 연속적인 하나의 표정으로 보여주지 않고 나누었느냐는 것이다, 좀 더 정확하게 왜 수옥의 쇼트( S #11)가 거기 개입할 필요가 생긴 것일까. 자, 이 열 개의 쇼트는 두 개의 다이어그램으로 나누어서 다시 볼 필요가 있다. 첫 번째 다이어그램. 수옥이 깨철을 발견한 다음 쳐다볼 때( S #6_7_8_9) 이 네 개의 쇼트는 수옥이 바라보는 주어의 자리에서 깨철이 목적어라는 생각을 해야 한다. 둘 사이의 거리는 유지되고 있으며, 서로 객관적으로 마주보고 있는 중이다. 이때 이 쇼트의 진행을 중단시키는 것은 갑작스러운 깨철의 클로즈업이다. ( S #10) 이 쇼트는 단지 거리를 불명확하게 만드는 것일 뿐만 아니라 관계의 좌표를 바꾸는 것이기도 하다. 수옥은 깨철에게 다가가지 않았고, 깨철이 수옥에게 다가온 것도 아니다. 그 둘은 서로의 거리를 여전히 그대로 유지하고 있지만 카메라는 그 둘을 가까이서 거의 클로즈업에 가깝게 찍는다. 연속적인 표정. 깨철과 수옥. 여기서 두 사람이 교환한 것은 ‘본다’, 라는 동사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서로의 주어와 목적어의 자리이다. 이때 이상한 쇼트가 둘 사이에 개입한다. 쇼트 14. 시선을 둘러싼 이 둘 사이의 관계 안에서 갑자기 카메라가 도망이라도 치듯이 멀리 물러났을 때 이 자리는 단지 거리의 문제가 아니라 둘 사이에 세워진 상상선 바깥으로 나가면서 무언가 이 시선의 망이 부서져버린다. 갑작스러운 시선의 중단. 이 장면에서 이상하게도 수옥은 프레임 안에 있지만 깨철은 그 바깥에 있다. 프레임(cadre)의 팽창, 혹은 이제부터 있을 부서진 프레임(de_cadrage) 안의 숨겨진 몸과 시선. 시선의 망이 부서지면서 재빨리 이루어진 배치, 깨철이가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순간, 말하자면 다시 수옥을 주어의 자리에로 되돌려주는 순환, 이 일순간의 미끄러져버린 듯한 쇼트는 수옥의 목소리를 가능하게 만들어준다. (voice_over_narration) 이 목소리와 함께 마치 다시 자기의 자리를 찾기라도 했다는 듯 깨철을 바라보는 수옥의 시선을 따라 (S #17, 19), 혹은 그녀의 조심스러운 발걸음에 맞추어서 카메라를 들고 따라간다. (hand_held) 이 활동은 우리에게 이제까지 어리둥절했던 그 모든 운동, 버스가 들어오면서 느리게 물러났던 줌의 이동, 그 버스에서 수옥이 내린 다음 동네 사람을 찾아서 가게를 기웃거릴 때 바라보던 카메라의 움직임이 깨철의 시선이었음을 증명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S# 21 그 흔들거리는 카메라가 멈추는 것은 마치 프레임웰엽링?안에 다른 구멍이 있기라도 한 것처럼 깨철이 앉아있는 툇마루 바로 곁에 자리한 대문이 열리면서 동네 사람이 화면 안으로 들어설 때이다. (S #21) 뚫린 구멍. 그 사이로 마치 빠져나가는 듯한 음악. 깨철을 발견한 다음 이미지에 달라붙어버린 듯이 시종일관 따라오던 이상하고도 불길한 음악을 멈추는 것은 바로 그 문소리이다. 모든 것이 다시 현실 속의 질서에로 되돌아오는 순간. 현실의 운동. 현실의 사운드. 이때 이 새로운 등장인물에게, 이 동네 사람에게, 큰 소리로, “저 여기 학교가 어디 있어요?”라고 말을 거는 수옥을 이상할 정도로 멀리서 찍었다. 혹은 이제까지 쇼트를 진행했던 것과 다른 렌즈로 수옥을 멀리 밀어내고 있다. 이때 사실은 이 거리가 실제로 수옥과 깨철이 떨어져있던 거리였을 것이다. 이문열 의 문장. 그런데 내 그런 느낌을 일순의 착각으로 만들어 준 것은 갑자기 가게 문을 열고 나온 주인 남자였다. (... 중략) 일순의 착각으로부터 깨어나기. 임권택 은 주관적인 시선에서 객관적인 자리에로 되돌아가기 위해서 렌즈를 바꾼다. 하지만 여기서 이 씬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아마도 이 씬 전체에서 동선이라고 부를만한 쇼트가 등장하는 것은 깨철과 동네 어른이 함께 있는 프레임 안으로 수옥이 들어올 때 깨철이 귀찮다는 듯이 일어나서, 마치 수옥과는 한 프레임에 아직은 함께 있을 수 없다는 듯이, 혹은 피하듯이 ( S #23) 다음 쇼트의 공간으로 도망치듯이 슬쩍 걸쳐서(match_cut) 빠져나가다 말고 돌아서서 수옥을 쳐다볼 때이다. ( S #24) 수옥은 더 이상 깨철을 쳐다보지 않는다. 하지만 수옥과 철이가 동네 어른에게 인사를 하고 빠져나갈 때 이 광경이 깨철의 시선 속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은 다시 한 번 이 쇼트를 가득 채우는 빛의 얼룩이다. ( S #25) 이문열 의 소설. (...중략) 순순히 앞장서는 소년을 따라나서려는데 여전히 깨철이란 사내의 눈길은 나를 쫓고 있었다. 그 사이 평온을 회복한 나는 짐짓 매서운 눈길로 그를 쏘아주고는 자리를 떴다. (중략...) 이문열은 둘 사이의 시선의 균형을 잡으려고 하지만 임권택 은 철이와 함께 이 장소를 떠나면서 깨철에게 두 번 다시 시선을 주지 않는다. 혹은 수옥은 마치 그 존재를 잊어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행동한 다음 재빨리 여기서 빠져나가려고 한다. 하지만 깨철은 이 장소를 떠나는 척 하면서 계속해서 수옥을 바라본다. 문학의 시선과 영화의 시선. 이때 이 세 개의 쇼트는 깨철을 따라가면서 서로 붙어있는 연결의 유기적 구성을 따르고 있다. 나는 재빨리 두 번째 장면으로 넘어오고 싶다. 왜냐하면 이 두 번째 장면은 첫 번째 장면과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활동하기 때문이다. 첫 번째 장면에 기대어 행여 당신이 이 모델을 하나의 도식으로 만드는 것을 어떻게 해서든 방해하고 싶다. 먼저 이문열 의 소설. (... 중략) 남편이 오기로 되어있는 그 일주일을 나는 마치 열에 들뜬 사람처럼 보냈다. 그러나 남편은 끝내 오지 않았다. 나중에 들은 것이지만, 그때 남편은 친구들과 어울려 지나치게 마신 바람에, 나에게서 보내려고 비워둔 이틀을 앓아누워버린 것이다. 남편이 올 수 있는 거의 마지막 날, 오후 다섯 시 막차까지 그냥 지나가버리자 나는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고 싶을 정도로 허탈한 심정이었다. 결근이라도 하고 그가 있는 곳으로 달려가지 못한 것이 그제야 뼈저리게 후회되었지만 이미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한 가지 알 수 없는 것은 그런 허탈함 가운데서도 식을 줄 모르고 달아오르는 내 몸이었다. 아니, 그 이상, 남편의 품에 안길 것을 상상하며 보내온 지난 일주일보다 그가 이제는 올 수 없다는 것을 뚜렷이 알게 되면서부터 더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나는 허탈함 못지않게 내 몸을 사로잡은 그 묘한 열기에 취해 거의 몽롱한 기분으로 버스 정류장을 떠났다. 그러다가 갑작스러운 소나기에 언뜻 정신이 든 것은 버스 정류소와 하숙집 중간 쯤 되는 길 위에서였다. 이미 초가을에 접어들고 있었음에도 장대 같은 소낙비였다. 얼결에 주위를 돌아본 나는 길가에 있는 조그만 창고를 발견하고 그리로 뛰어갔다. 처음 나는 그 처마에서나 붙어 서서 비를 긋고 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워낙 빗발이 세고 바람까지 일어 차츰 빗장이 질려있지 않은 함석 문께로 밀리게 되었다. 한참을 기다려도 빗발은 점점 세어져-- 이윽고 나는 함석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평소 비료 같은 것들을 쌓아두는 그 창고는 그날따라 텅 비고 조용했다. 혹시 사람이 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나였지만, 그 지나친 고요에 차근히 창고 안을 살펴볼 생각도 않고, 열려진 문틈으로 쏟아진 소낙비만 망연히 바라보았다. 지나친 방심이라기보다는 작은 벌레처럼 스멀거리며 내 몸을 돌고 있는 그 묘한 열기에서 벗어나지 못한 탓이었다. 어쨌든 창고 안을 자세히 살피지 않은 것은 큰 실수였다. 튀는 빗방울을 피해 내 몸이 완전히 창고 속으로 들어가자마자 어둠 한구석에서 누군가가 재빨리 달려 나와 창고 문을 닫고 빗장을 질렀다. 실로 눈 깜짝할 사이의 일이었다. “누구예요? 문 열어. 소리 지를 테야” 나는 그 갑작스러운 사태에 본능적인 공포를 느끼며 날카롭게 소리쳤다. “떠들어야 소용없어, 소나기 오는 들에 사람 나다니는 것 봤나?” 약간 쉰 듯한 목소리와 함께 집게 같은 손이 내 팔목을 죄었다. 처음 그림자가 퍼뜩할 때의 직감대로 깨철이였다. 그가 누구인 것을 알자 이상하게도 나를 사로잡았던 공포가 일순에 사라졌다. “깨철이지? 이거 못 놔?” 나는 제법 마을사람들이 하는 식으로 으름장까지 놓았다. 그러나 그는 대답대신 창고바닥에 깔린 짚 검불 위에 나를 쓰러뜨리더니 내 치맛자락을 거칠게 감아쥐었다. “험한 꼴로 하숙집에 돌아가기 싫거든 곱게 벗어”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그에게서 빠져나오려고 기를 썼다. 그런 나를 덮쳐누르고 있던 그가 다시 뜨거운 입김을 내게 뿜으며 중얼거렸다. “이 깨철이 다른 건 몰라도 언제 너희들이 나를 필요로 하는지는 정확히 알지. 지금 네 몸은 달아있을 데로 달아있어” 그 말을 듣자 이번에는 묘하게도 내 몸에서 힘이 쭉 빠졌다. 대신 잠깐 잊고 있었던 묘한 열기가 다시 스멀거리기 시작했다. 그런 내 귀에다가 그가 다시 이죽거렸다. “오후 내내 지켜보고 있었지. 정류소에서 안절부절 기다리고 서 있을 때부터......” 그러면서 그는 능란하게 내 몸을 더듬었다. 나는 차츰 몽환(夢幻)과도 흡사한 상태에 빠져들면서 모든 저항을 포기하고 말았다. 회상하기에도 민망스럽지만 어쩌면 그때 나는 당했다기보다는 차라리 그와 함께 한 차례의 정사(情事)를 즐긴 것이 아닌가 모르겠다. 남의 아내 된 여자로서 한 가지 변명을 삼을 것이 있다면, 그 절정의 순간에도 내가 떠올리고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남편의 얼굴이었다는 것 정도일까. (... 중략) 이 대목은 17쪽인 이 소설에서 두 쪽 분량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1시간 31분 상영시간 중에 18분 40초를 차지하고 있다. 그냥 산술적으로 말하면 영화 전체 중에 거의 오분의 일을 차지하고 있다. 만일 남편이 오기로 한 날 수옥이 아이들 수업을 가르치는 쇼트까지 셈에 포함시킨다면 더 많은 분량이 될 것이다. 나는 남편이 오기로 한 날 전체를 셈하는 대신 동료인 김 선생에게 수옥이 남편 마중을 가기 위해 아이들 수업을 맡기고 학교를 떠난 다음 쇼트부터 셈을 시작했다. 송길한의 시나리오에서는 이 대목이 10개의 씬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을 (S #72 정류장으로 뛰어가는 수옥의 몽타주_ #73 정류장 앞_ #74 돌아가는 길_ #75 방앗간 앞_ #76 방앗간 안_ #77 물레방아_ #78 물레방아_ #80 방앗간 안_ #81 물레방아 전경_ #82 마을길 낮) 임권택 은 65 쇼트로 찍었다. S# 1 S# 2 S# 3 S# 4 S# 5 S# 6 S# 7 S# 8 S# 9 S# 10 S# 11 S# 12 S# 13 S# 14 S# 15 S# 16 S# 17 S# 18 S# 19 S# 20 S# 21 S# 22 S# 23 S# 24 S# 25 S# 26 S# 27 S# 28 S# 29 S# 30 S# 31 S# 32 S# 33 S# 34 S# 35 S# 36 S# 37 S# 38 S# 39 S# 40 S# 41 S# 42 S# 46 S# 47 S# 50 S# 51 S# 52 S# 53 S# 54 S# 55 S# 56 S# 57 S# 58 S# 59 S# 60 S# 61 S# 62 S# 63 S# 64 S# 65 영화의 순서. 남편을 만나기 위해 버스 정거장으로 달려가는 수옥(S #1). 물레방아를 지나고( S #2) 커다란 나무들 사이를 지나( S #3) 단숨에 비탈길을 달려 올라가니 막 버스가 지나쳐간다. 멀리서 사내 하나가 오는데( S #4) 자세히 보니 화천댁 남편이다. 지금 아내 때문에 병원에 다녀오는 길이라고 한다. ( S #5) 수옥은 다음 버스를 기다리면서 양지바른 툇마루에 앉는다. 가게 주인이 나와서 “추운데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마실 거라도 드릴까요?”라고 권하지만 수옥은 그저 버스에만 관심이 있다. ( S #6) 마을 초입의 텅 빈 버스길. ( S #7) 돌아나가는 버스를 보면서 이 주막 주모가 나와서 수옥에게 “차가 나갔다가 다시 돌아오려면 서너 시간이나 있어야합니다. 점심식사나 합시다” 라면서 주막에 데려간다. ( S #8) 집에 돌아가는 자기 반 아이들과 마주치자 수옥은 “공부들 잘 했니? 어서 집에 가서 예습 복습 잘해”라며 인사 한다. ( S #9) 주막집 산월이가 빵을 가지고 가다가 바깥에 앉아 우두커니 버스를 기다리는 수옥을 보고 빵을 권하지만 거절한다. ( S #10) 버스가 도착하지만( S #11) 남편은 내리지 않고 떠난다. ( S #12) 수옥은 벽에 기대어 운다. ( S #13) 그때 우체부가 도작해서 속달 전보를 전해주자 ( S #14) 사인을 한 다음( S #15) 그걸 열어본다. “미안하다, 수옥아, 집에 도착하자마자 앓아누웠지 뭐야, 친구들과 어울려 과음을 한 바람에 그리 됐어. 다음 정식 휴가를 얻으면 그땐 곧장 수옥에게 달려가겠어” (남편의 음성, voice_over_narration) 수옥은 찢어버린 다음 벽에 기대어 운다. ( S #16) 하늘에 구름이 몰려오고 ( S #17) 큰 나무들 사이로 돌아가는 수옥의 뒷모습에 비가 뿌리기 시작한다. ( S #18) 걸어가던 수옥은 빗발이 거세지자 뛰어가기 시작한다. ( S #19_20_21) 저기 물레방앗간이 보인다. ( S #22) 그 곳으로 뛰어가는 수옥( S #23) 물레방앗간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다가 빗발이 거세지자 그 안으로 들어간다. ( S #24) 그런데 갑자기 문이 닫히고 ( S #25) 수옥이 돌아보니 ( S #26) 빗장 문이 걸리고 ( S #27) 깨철이 덮쳐오자 수옥은 “놔!”라고 소리친다. ( S #28_29) 바깥에는 비가 계속 내리고 문은 단단히 잠겼다. ( S #30) 수옥은 몇 차례이고 “놔, 놔, 놔, 놔”라고 반복하면서 저항하지만 깨철은 더 거칠게 껴안고( S #31) 문은 꼼짝도 안 한다. ( S #32) 깨철은 좀 더 거칠게 끌어안고 수옥은 몸부림치지만 ( S #33_34) 깨철은 수옥의 옷을 벗기기 시작하고 수옥은 무언가를 붙잡으려고 버둥거리다가 잡아당기자 ( S #35) 물레방아가 돌아가기 시작하면서 물이 넘쳐흐른다. ( S #36_37) 도망치려는 수옥, 그녀를 감싸 안는 깨철. ( S #38_39_40) 깨철은 수옥의 웃옷을 벗기고 브라자를 내린 다음 ( S #41) 짚 검불 위에 쓰러트리듯이 눕힌다. ( S #42) 그리고 팬티를 끌어내리는 깨철, 완강히 저항하는 수옥 ( S #43_44_45_46_47_48_49) 수옥이 포기해버리는 듯한 표정을 짓자 ( S #50) 깨철은 만족한 웃음을 흘린다. ( S #51) 수옥을 겁탈하는 깨철, 물이 넘쳐나는 물레방아가 돌아가기 시작한다. ( S #52_53_54_55_56) 깨철은 수옥의 옷을 집어 들어서 ( S #57) 짚 검불에 쓰러져 누워있는 수옥을 덮어준다. ( S #58) 그리고 문을 열고 조용히 물레방아를 떠난다. ( S #59) 물레방아가 텅 빈 것을 확인하고 수옥은 무너지듯 다시 눕는다. ( S #60) 비 내리는 물레방아. ( S #61) 안개 속을 혼자 걸어가는 깨철 ( S #62_63) “회상하기도 민망스럽지만 어떤 죄의식이나 도덕적인 가책으로 괴로워하진 않았다. 어쩌면 그때 나는 당했다기보다는 차라리 그와 한 차례의 정사를 즐긴 것이나 아닐 지...” (수옥의 목소리. voice_over_narration, 그리고 이어지면서) 방에 혼자 앉아있는 수옥 “약혼자가 있는 여자로써 변명을 삼을 것이 있다면 그 절정의 순간에 내가 떠올리고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영훈씨의 얼굴이었다는 것 정도였다” ( S #64_65) 소설은 처음 어떻게 시작했는지를 잊지 않고 있다. 지금 하는 이야기들은 모두 늦은 저녁 을 마친 뒤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남편 곁에서 잠깐 동안, 그저 남편이 뉴스를 보고 혀를 차며 개탄조로 말하는 동안, 그렇게 떠오르는 십여 년 전의 일을, 죄스러워하고 스스로 부끄러워하면서, 그저 아득하기만 한 시간을 불러오는 중이다. 그래서 남편이 그날 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앞질러 밝히고 있다. ( 이문열 소설) 나중에 들은 것이지만, 그때 남편은 친구들과 어울려 지나치게 마신 바람에, 나에게서 보내려고 비워둔 이틀을 앓아누워버린 것이다. (... 중략) 반대로 영화는 종종 수옥의 목소리를 사용하고 있지만 그러나 임권택 은 여기서 앞질러 알려주지 않는다. < 안개마을 >은 목소리의 시제가 때로는 플래시백이라기보다는 종종 사건 바깥의 해설적인 자리로 물러나기도 한다. 마치 그것이 자기의 존재 근거가 되기라도 하듯이, 혹은 자기 자신은 사건 바깥으로 빠져나와 재판의 자리에 가기라도 하듯이,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 알리바이를 내세우기라도 하듯, 그렇게 재빨리 후퇴한다. 그래서 어떤 때는 마치 수옥의 목소리가 화면에 보여 지는 수옥을 쳐다보기라도 하듯이 진행된다. 말하자면 목소리라는 시선. 두 개의 분리된 수옥. 영화에서 수옥은 남편을 만나기 위해 한껏 들떠서 달려가지만 소설에는 이 대목 전체가 없다. 수옥은 이미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다. 그리고 남편이 오기를 기다리는 버스 정류장에서 이미 막차는 떠난 다음이며 허탈함 못지않게 수옥을 사로잡은 그 묘한 열기에 취해 몽롱한 상태에서 그녀가 정신을 차린 것은 돌아가는 길에 버스 정류소와 하숙집 중간쯤에서 만난 소낙비 때문이다. 영화는 마치 이 빈칸을 채우기라도 하듯, 미처 쓰지 않은 문장을 불러내기라도 하듯, 수옥을 따라가면서 찍어나가기 시작한다. 소설 속의 이야기에서 미처 쓰지 않은 것의 이야기를 영화가 보려고 할 때 거기서 그건 단순히 덧붙여진 것이 아니라 소설은 그렇게 뛰어넘어도 되는 것을 영화는 함께 그렇게 할 수 없기 때문에 거기 멈춰 서서 보아야 한다는 뜻이다. S# 2 S# 26 만일 소설에 기대어서 설명하는 것을 허락한다면 수옥이 (오지 않을) 남편을 마중하기 위해서 버스 정류장까지 달려 나가는 장면에서 전보가 도착해서 그 목소리로 내용을 통보받을 때까지 16개의 쇼트는 모두 데드 타임이다. 이때 이 16개의 쇼트들은 이미 우리가 본 쇼트들과 부딪치면서 마치 작은 타악기들을 건드리기라도 하듯 기억의 잔향 효과를 불러일으키기 시작한다. 수옥이 남편을 만나기 위해서 달려가는 네 개의 쇼트 중 두 번째 쇼트. 저 멀리 물레방앗간을 뒤로 하고 작은 뚝방길을 왼쪽에서 오른 쪽으로 수옥이 약간 비스듬하게 가로 질러갈 때 반향을 불러일으키는 두 가지 진동. 하나는 < 안개마을 >을 두 번째 볼 때에야 알 수 있다. 수옥은 이 길을 정확하게 되돌아올 것이다. 오른 쪽에서 왼쪽으로, 말하자면 반대방향. 그때 동선은 여기서 끊어지고 첫 번째 쇼트로 되돌아가는 대신 저 멀리 보이는 물레방앗간으로 방향을 돌린 다음 마치 블랙홀처럼 저 문 속으로 잡혀먹이듯이 빨려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내게는 다른 하나가 더 중요하다. 이 화면 구도는 이미 영화 앞부분에서, 훨씬 앞쪽에서, 씬의 순서대로 셈을 한다면 26씬에서 동일한 위치에서 저 멀리 물레방앗간을 바라보는 카메라의 구도를 보았다. S #26. 개울가. 깨철은 커다란 돌을 치켜들고 개구리를 찾고 있다. 아이들은 깔깔 대고 웃으면서 구경하는 중이다. 지나가던 화천댁이 “야 이 빙신아, 거기 한 마리 안 가나? 바로 니 앞에 안 있나?” 하자 돌을 내리치던 깨철은 그만 미끄러져 물에 빠진다. 우리는 지금 (시나리오의 셈에 따르면) 76씬을 보는 중이다. 수옥이 지켜보았던 그 광경. 그 자리를 다시 수옥이 (오지 않을) 남편을 마중가기 위해 가로 질러갈 때 카메라는 구태여 같은 위치에서 그걸 바라보고 있다. 그 프레임에서 빠진 것은 마치 깨철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환기시켜 주는 것만 같은 쇼트. 이 두 번째 쇼트부터 깨철은 거기 없으면서 이미 함께 동반하듯이 바깥에서 포함되어 있다. S# 4 S# 5 S# 6 S# 8 S# 9 S# 10 S# 11 S# 12 그런 다음 다시 영화는 버스 정류장으로 되돌아온다. < 안개마을 >의 첫 번째 장소. 이 장소로 마치 거슬러 올라오듯이 수옥이 다시 올 때, 수옥은 온 길의 쇼트를 차례로 찾아서 돌아오는 대신, 비탈길을 헐레벌떡 단숨에 뛰어올라와 그 버스 정류장이라는 광경을 쳐다본다. ( S #4) 마치 사선처럼 그어진 동선. 그때 몽타주의 벡터는 무언가 질서를 잃어버린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 숨은 매개변수들은 무엇일까. 이때 수옥의 눈앞을 지나가는 버스는 영화적으로 번역하면 와이프(wipe_out) 효과이다. 지나간 버스 저편에 한 남자가 내려서 걸어오고 있다. 그러나 그 남자는 남편이 아니고 화천댁 남편이다. (남편) “안녕하십니꺼, 마중 나오셨군예” (수옥) “예, 어디 다녀오세요?” (남편) “여편네가 읍내 병원에 입원했다 아입니꺼” (수옥) “그래 좀 어때요?” (남편) “차도가 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없는 것 같기도 하고, 더 두고 봐야 알겠심더, 안 가실낍니꺼?” (수옥) “전 막차를 기다려봐야겠어요” (남편) “어이구, 아직 멀었는데예”라고 말한 다음 그 자리에서 떠난다. ( S #5) 이 쇼트는 이례적으로 분할하지 않고 투 쇼트로 두 사람을 세운 다음 멈춰 서서 그냥 진행된다. 두 사람이 나눈 대화는 지금 이야기의 진행과 아무 상관이 없으며, 그렇다고 해서 이후 진행될 어떤 이야기의 복선이 되는 것도 아니다. 혹은 이제까지 진행된 이야기 중의 일부의 어떤 대답도 아니다. 그런데도 생략 없이 모두 찍었다. 마치 축 처져서 늘어진 것만 같은 시간. 화천댁 남편이 떠난 다음 버스 정류장에서 혼자 기다리던 수옥은 뒷걸음질 치면서 화면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수평으로 가로 질러 양지바른 툇마루에 가서 앉는다. 뒷걸음질이라는 제스처. 마치 시간이 거꾸로 가는 것만 같은 인상. 우리가 이미 보았던 구도. 불길하고도 기이한 쇼트. ( S #6) 이 쇼트는 영화가 막 시작했을 때 첫 번째 씬 세 번째 쇼트와 거의 동일한 구도이다. 기술적으로만 말하면 두 쇼트는 동일한 날에 촬영한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유사하다. 마치 첫 장면으로 되돌아온 것만 같은 기시감. 그때 우리를 엄습하는 것은 당연히 거기 감춰진 시선이다. 무언가를 조종하는 것만 같은 우연. 바깥에 놓여진 기억. 전혀 다른 두 개의 씬에서 동일한 기분이 다가올 때 그것은 무엇을 전달하기 위한 것일까. 우리는 첫 번째 씬에서 수옥과 깨철 두 사람의 프레임에 마치 구멍이 생겨나듯이 문이 열린 다음 거기서 가겟집 주인이 나오는 것을 보았다. 여기서는 깨철 대신 수옥이 양지바른 툇마루에 앉자마자 바로 곁에 (시커먼 어둠으로 구멍이 뚫린 것만 같은) 가게 안쪽에서 가겟집 주인이 나와 그녀에게 “추운데 안으로 들어가시죠, 마실 거라도 드릴까예?”라고 말을 건다. 형태론적으로 거의 동일한 진행. 이 두 개의 씬은 거울로 마주보듯이 서로 다른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동일한 장소에 오자 동일한 법칙이 작동하는 것처럼 수많은 기호들이 활동하기 시작한다. 두 번째 버스가 지나갈 때 맞은편 주막에서 주모가 왼쪽에서 오른 쪽으로 수옥에게 다가와서 손을 잡고 “차가 나갔다가 다시 돌아오려면 서너 시간이나 있어야합니다. 점심식사나 합시다” 라고 데리고 들어간다. ( S #8) 화면에 가득 찬 빛의 얼룩들. 이때 이상한 것은 이어지는 세 개의 쇼트에서 동선이 모두 매번 반대의 방향에서 다시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냥 단순하게 이 세 개의 쇼트는 점프 컷이다. 우리는 이미 이 버스 정류장의 지도를 머릿속에 그려 넣었다. 물론 임권택 은 그걸 용의주도하게 인접 쇼트들과 이어 붙이면서 하나의 지도를 만들었다. 그걸 전제로 하고 수옥을 선으로 연결하는 대신 점에서 점으로 이동시킨다. 길 왼쪽에 자리한 주막에 주모의 손에 이끌려 점심을 먹으러 들어간 수옥 ( S #8)을 따라 카메라가 함께 길을 중심으로 한 상상선을 넘어가지 않는다. 반대로 다음 장면은 가게 안으로 들어가서 화면 프레임 안에 가게의 프레임을 다시 만들어서 두 개의 프레임을 통해 바깥에 있는 수옥을 바라본다. 마침 학교에서 하교하는 수옥의 반 아이들과 인사를 나누는 수옥은 주막의 반대편에 자리한 가게 쪽에서 나온다. ( S #9) 그런데 동일한 프레임의 다음 쇼트에서 주막집의 산월이가 가게에 와서 빵을 산 다음 다시 왼쪽의 주막집으로 돌아갈 때 수옥은 주막집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아있다. ( S #10) 우리는 주막집에서 나와서 가게 쪽으로 온 수옥을 보지 못했지만 또한 가게에서 주막집 쪽 의자로 간 수옥도 보지 못했다. 이 세 개의 쇼트는 공간적이라기보다는 시간적인 점프 컷이다. 그렇다고 이 세 개의 쇼트의 빈 사이가 데드 타임에 대한 경제적인 생략의 역할을 하는 것도 아니다. 왜 그렇게 한 것일까. 한 가지 가설. 그렇게 하면 카메라는 첫 번째 씬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오른쪽에 머물 수 있다. 만일 왼쪽으로 옮겨가면 우리는 새로운 문제와 마주치게 된다. 우리는 한 번도 보지 못한 풍경을 보아야 한다. 영화는 이미 본 이미지들을 통해서만 공간을 지각하는 예술이다. 만일 새로운 이미지가 등장하면 우리들은 새로운 지도를 그리거나, 혹은 동선의 연결 속에서 갑자기 이 선이 뒤엉키거나 미로에 빠져들 것이다. 그런 다음 두 번째 설명. 이 점프 컷은 기이하게도 시간의 동선을 생략함으로써 반대로 (오지 않을) 남편을 기다리고 있는 수옥의 지루한 시간의 감각을 팽창시키고 있다. 동선에서 감각에로, 말하자면 가시적인 질서에서 비가시적인 몸의 주관적인 신경에로의 이동. 영화의 부사적(副詞的) 쇼트. 그때 막차가 도착한 다음 아무도 내리지 않고 그냥 떠난다. (S # 11_12). 버스가 떠난 다음 네 개의 쇼트. 벽에 기대어 울고 있는 수옥에게 우체부가 자전거를 끌고 골목에서 나타나 속달편지를 건네준다. 이 쇼트의 진행 자체가 특별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네 개의 쇼트는 소설과 완전히 반대의 전제 아래 이제부터 수옥의 감정선을 따라갈 것이라는 선언이다. 물론 나는 영화가 소설을 각색할 때 그 주인을 둘러싼 인정투쟁에 대해서 매우 긴 논의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여기서는 이야기의 작가를 둘러싼 기원에 관한 위태로운 대차대조표를 꺼내들지 않을 생각이다. 그 대신 두 개의 이야기에서 수옥을 둘러싼 문자로부터 영화에로 이동하는 시청각 기호들 사이의 감각적 성질들의 변화에 대해서만 쳐다볼 것이다. 소설에서 수옥은 그날 왜 남편이 오지 않았는지 알지 못했다. 이문열 은 오지 않는 남편에 대한 수옥의 그 어떤 상상의 문장도 쓰지 않았다. 왜 그 사람은 오지 않은 것일까, 무엇이 그 사람이 내게 오는 것을 가로 막고 있는 것일까, 라고 질문하는 대신 (... 중략) 그런데 한 가지 알 수 없는 것은 그런 허탈함 가운데서도 식을 줄 모르고 달아오르는 내 몸이었다. 아니, 그 이상, 남편의 품에 안길 것을 상상하며 보내온 지난 일주일보다 그가 이제는 올 수 없다는 것을 뚜렷이 알게 되면서부터 더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나는 허탈함 못지않게 내 몸을 사로잡은 그 묘한 열기에 취해 거의 몽롱한 기분으로 버스 정류장을 떠났다, 라고만 썼다. 영화에서는 막차가 떠나가고 남편이 오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 확정되자 마치 기다린 것처럼 남편으로부터의 편지가 도착한다. 제 시간에, 올바른 장소에 도착한 편지. 거의 목적론적 순간이라고 부르고 싶을 정도로 정확한 자리. 지젝이라면 왜 편지는 항상 목적지에 도착하는가, 라는 그의 글에 < 안개마을 >을 그 예 중의 하나로 넣고 싶을 지도 모를 지경으로 정확하게 바깥에서 날아와 빈 장소를 채운다. 그러나 그 편지가 올바른 목소리를 담고 있는 지를 따져보는 것은 다른 일이다. (편지는 남편의 목소리로 낭송된다) 나는 여기서 소문자 타자에 관한 술래잡기를 벌일 생각은 없다. 그 대신 이 편지의 존재에 대해서 신중하게 질문하고 싶다. 이야기의 진행을 위해서라면 이 편지가 도착하지 않아도 영화를 진행하는데 아무 문제가 없다. 혹은 어쩌면 그때 당했다기보다는 차라리 깨철과 한 차례의 정사를 즐긴 다음, 그 편지가 도착해도 문제될 것은 없다. 나는 단지 기능차원에서만 이야기를 진행시키는 중이다. 그러나 임권택 은 동의하지 않는다. 그는 편지가 먼저 도착해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혹은 수옥이 한 차례의 정사를 즐길 수 있다는 가정이 성립된다고 믿는 것처럼 보인다. S# 3 S# 17 S# 18 S# 19 S# 20 S# 21 S# 22 나는 이 셈을 가정하는 대신 (그렇게 된다면 나는 또 한편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일이 될 것이다. 하지만 지금 내가 다루고 있는 소설은 이문열 작가가 쓴 작품이다) 그걸 오로지 수옥의 몸에 새겨진 문자와 그 몸을 기술하는 시청각 기호들 사이의 경계만을 따라가면서 이쪽과 저쪽을 번갈아 볼 것이다. 소설은 버스정류장에서 그 묘한 열기에 취해 몽롱한 기분이었다가 갑작스러운 소나기에 언뜻 정신이 들었다고 한 다음 수옥을 묘사하듯이 따라간다. 영화도 버스 정류장의 씬과 그 장소를 떠난 다음을 분리하듯이 수옥이 그 편지를 찢어버리고 벽에 기대어 운 다음 갑자기 하늘을 쳐다본다. ( S #17) 하늘에는 검은 구름이 몰려오기 시작한다. 수옥이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장면은 그녀가 이 길을 왔던 장면에 대구라도 되는 것처럼( S #3) 같은 위치에서 찍었다. ( S #18) 단지 수옥이 등을 돌리고 돌아가는 것 말고는 이 두 개의 쇼트는 정확하게 동일하다. 그 쇼트에 비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비를 맞으며 걸어가던 수옥은 거세지자 뛰기 시작한다. ( S #19_20_21) 그리고 저 멀리 물레방앗간이 보인다. ( S #22) 말하자면 수옥이 버스 정류장까지 올 때 진행했던 쇼트의 역순. 22번째 쇼트는 2번째 쇼트의 정확한 반복이며, 나는 이미 이 쇼트가 그보다 훨씬 앞서서 깨철이 동네 아이들과 화천댁 앞에서 개구리를 잡던 장면이라는 것을 설명했다. 뚝방 아래로 내려가서 개울에 카메라를 세운 다음 이 의미심장한 자리에서 올려다보는(low_angle) 카메라. 그러므로 22번째 쇼트는 이렇게도 설명할 수 있다. 지금 물레방앗간으로 달려가는 수옥을 깨철은 카메라 뒤에 숨어서 쳐다보고 있는 중이다. 반대로 소설에서는 깨철이 언제부터 수옥을 쫓아왔는지 알 수가 없다. 우연히 물레방앗간에 있다가 마주친 것인지, 아니면 거기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인지, (그런데 약속을 한 것도 아닌데 수옥이 물레방앗간에 들리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혹은 만일 소나기가 이보다 좀 더 이르거나 늦었다면 그녀는 이 길을 지나가더라도 여기 들렸을 리 없었을 것이다) 여기서 등장하기 전까지 어떤 흔적도 없다. 하지만 깨철은 수옥에게 분명하게 말한다. “오후 내내 지켜보고 있었지. 정류소에서 안절부절 기다리고 서 있을 때부터......” 나는 이 말을 문자 그대로 생각한다. 오후 내내 정류소에 함께 있었던 깨철. 그런데 그는 어디에 (숨어) 있었던 것일까. 깨철이라는 흔적. 그것을 보여주기 위한 반복. 수옥이 버스 정류장에 (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기 위해서 왔을 때, 이 쇼트들이 다시 이미 본 쇼트의 형태를 반복할 때, 그 쇼트에서 지워져버린 깨철은, 동일한 쇼트가 반복될 때, 거기 결핍되어 있는 잉여인 것이다. 피부를 찌르는 듯한 눈빛. 빛의 얼룩. 이 얼룩이 사라질 때 비가 내리기 시작하고 마치 덫에 걸려들기라도 하듯이 수옥은 물레방앗간으로 향한다. S# 25 S# 26 물레방앗간에서 소설과 영화의 차이점은 간단하다. 첫 번째 차이. 여기서 깨철의 대사가 모두 사라졌다. 깨철은 벙어리가 아니다. 하지만 그는 물레방앗간에서 단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 수옥의 대사도 빗장 문이 닫힐 때 “누구야, 문 열어! 소리 지를 테야!”와 깨철이 수옥을 짚 검블 위에 쓰러트릴 때 “놔! 놓으란 말야”가 전부이다. 하지만 소설에서는 물레방앗간의 문이 닫히자마자 수옥이 “누구예요? 문 열어. 소리 지를 테야” 라고 날카롭게 소리친다. 깨철이 약간 쉰 듯한 목소리로 “떠들어봐야 소용없어, 소나기가 오는 들에 사람 나다니는 것 봤나?”라고 대답하자 “깨철이지? 이거 못 놔?”라고 제법 마을사람들이 하는 식으로 으름장까지 놓는다. 나는 먼저 이 장면을 그려보고 싶다. 소설 속의 물레방앗간은 영화보다 훨씬 어둡다. 소설에서 수옥은 문이 닫히고 나타난 사내가 처음에는 누군지 잘 보이지 않아서 날카롭게 소리치며 묻는다. 이때 수옥이 상대방이 깨철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어둠에 눈이 익어서가 아니라 그가 하는 대답의 약간 쉰 듯한 목소리의 음색을 듣고 나서이다. 영화는 수옥이 물레방앗간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왼쪽에서 나타나서 문을 걸어 잠그자( S #25) 돌아보는 수옥을 클로즈업의 표정으로 찍었다. ( S #26) 돌아보자마자 누군지 알아차리는 수옥의 표정. 그녀에게는 질문이 필요 없다. 둘 사이의 차이. 나는 좀 더 설명하고 싶다. 소설에는 두 사람의 정사에서 가시적인 묘사가 없다. 단지 두 가지 감각, 촉각과 청각에만 의지하면서 그 둘의 정사가 진행된다. 두 개의 문장. 하나, 깨철이 문을 걸어 잠그고 처음 수옥을 붙잡을 때, (... 중략) 약간 쉰 듯한 목소리와 함께 집게 같은 손이 내 팔목을 죄었다. 두 번째. 수옥을 쓰러트리고 치맛자락을 거칠게 감아쥔 다음, (... 중략)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그에게서 빠져나오려고 기를 썼다. 그런 나를 덮쳐누르고 있던 그가 다시 뜨거운 입김을 내게 뿜으며 중얼거렸다. 이게 정사를 묘사하는 문장의 전부이다. 영화는 이걸 35개의 쇼트로 거의 분해하듯이 잘게 쪼개나가기 시작한다. 이때 정사의 진행 과정 사이로 물레방앗간이 활동하는 쇼트가 삽입되기 시작한다. 그러므로 두 번째 차이는 소설과 영화 사이에서 좀 더 결정적이 된다. 두 번째, 장소의 차이. 소설은 (... 중략) 얼결에 주위를 둘러본 나는 길가에 있는 조그만 창고를 발견하고 그리로 뛰어갔다. 그런 다음 창고 안의 어떤 묘사도 하지 않는다. 단지 문자가 건드리는 것은 그날따라 텅 비고 조용했다는 것이 전부이다. 영화처럼 말하자면 미장센이 없는 공간. 영화는 이 물레방앗간에 도착할 때까지, 여기서 사건과 마주칠 때까지, 몇 차례이고 반복해서 보여준다. 창고와 물레방앗간. 둘 사이를 형태론적으로만 비교하면 단순하다. 소설은 수옥이 창고 안으로 들어온 다음 깨철과의 정사를 촉각과 청각에 의지해서 진행시킨다. 이 진행은 종종 수옥의 주관적인 설명을 거기에 덧붙인다. 이때 이 광경은 두 가지 전제를 담고 있다. 첫째, 다시 한 번 반복하지만 이 광경은 지금 수옥이 남편 곁에서 회상하고 있는 기억 속의 시간이다. 많은 것이 지워졌을 것이며, 또 어떤 것은 그렇게 남아있을 것이다. 어쩌면 깨철의 말조차 기억 속에서 자기 자신의 알리바이를 만들어내기 위해 윤색된 것일지도 모른다. 둘째, 수옥은 지금 남편이 왜 오지 않았는지 아직 알지 못한다. 그녀의 간절함. 그녀의 의심. 그러나 소설에서는 후회만 거기 머물러 있다. 후회? (... 중략) 결근이라도 하고 그가 있는 곳으로 달려가지 못한 것이 그제야 뼈저리게 후회되었지만 이미 소용없는 일이었다. 나는 이 문자를 내 멋대로 각색하고 싶어진다. 겉으로 드러난 것은 남편을 만나러 가지 않은 것이지만 이 후회의 내밀한 고백은 남편이 오지 않아서 깨철과 정사를 하게 된 사건 자체를 앞질러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읽을 수는 없는 것일까. 영화는 수옥과 깨철의 정사를 진행하면서 물레방앗간의 물레방아가 돌아가기 시작하는 것을 평행으로 진행한다. 다소 따분한 표현이지만, 물레방앗간은 수옥의 몸에 대한 의인화를 통해서, 은유적인 기계가 된다. 이때 물레방아는 멈춰 서 있다가 그 위에 쏟아져 내리는 비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서 돌아가기 시작한다. 점점 쌓여가는 리비도의 무게. 방향을 바꿀 수 없고, 길들여지지 않으며, 조절할 수 없는 힘. 수옥을 그 어딘가로 밀어내기 시작하는 에너지. 그때 충동이 신체의 일부 대상이라는 프로이드의 말에 따라, 충동이 국부적이라는 표현을 그대로 대입하면, 수옥의 말단 기관, 성감대들, 국부적인 신체기관들이 거의 참을 수 없는 지경이 되었을 때, 마침내 물레방아가 활동을 시작한다. S# 35 S# 36 소설 안의 욕망의 문자들. 나는 발췌하듯이 건드려보고 싶다. (... 중략) 나는 아무런 부끄럼 없이 남편에게 썼다. 단 한 번, 단 한 순간이라도 좋으니 다시 한 번 그의 품에 안기고 싶다고, 다시 한 번 따뜻한 그의 체온과 뜨거운 숨결을 느끼고 싶다고 무슨 수를 쓰든 꼭 한 번 다녀가 달라고. (중략) 남편이 오기로 되어있는 그 일주일을 나는 마치 열에 들뜬 사람처럼 보냈다. (중략) 그런데 한 가지 알 수 없는 것은 그런 허탈함 가운데서도 식을 줄 모르고 달아오르는 내 몸이었다. 아니, 그 이상, 남편의 품에 안길 것을 상상하며 보내온 지난 일주일보다 그가 이제는 올 수 없다는 것을 뚜렷이 알게 되면서부터 더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 중략) 말하자면 영화가 볼 수 없는 문자들. 이때 리비도는 모두 문자 뒤로 숨어들었다. 임권택 은 이걸 (영화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말인) 대사로 설명하는 대신 물레방앗간을 수옥의 몸에 은유하는 기계로 배치한 다음 물레방아를 활동시키기 시작한다. 이 활동을 설명하는 이상한 제스처. 깨철이 수옥을 움켜잡은 다음 웃옷을 벗기기 시작할 때 수옥은 그 손길을 뿌리치는 대신 손을 내밀어 무언가를 붙잡으려고 더듬거린다. 그리고 그걸 붙잡고 잡아당기자 붙들어 매어 놓은 것이 풀리면서 ( S #35) 물레방아가 돌아가기 시작한다. ( S #36) 수옥과 물레방아 사이의 연결. 차라리 인물의 활동과 사물의 운동 사이의 접속이라고 부르고 싶은 유기적 조립. 소설에서 깨철이 수옥을 덮쳐누르면서 다시 뜨거운 입김을 귓가에 뿜으며 “이 깨철이 다른 건 몰라도 언제 너희들이 나를 필요로 하는지는 정확히 알지. 지금 네 몸은 달아있을 데로 달아있어” 라고 중얼거릴 때 나는 어리둥절해졌다. 그리고 이 말이 이 상황에 대해서 지루할 정도로 설명적이라는 생각을 했다. 여기서 구태여 그런 말을 할 필요가 있을까. 깨철이는 수옥의 심리상태를 설명하기 위해 동원된 정신분석 상담의사가 아니다. 지금 수옥은 깨철의 품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 기를 쓰고 있고, 깨철은 치맛자락을 거칠게 움켜쥐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깨철은 한가하게 수옥의 귀에 대고 그녀의 심리를 읽고 있는 중이다. 나는 이 말이 성립되는 이유는 단 한 가지라고 생각한다. 이 말은 사후적인 설명이다. 그리고 이 광경은 지금 기억 속의 시간이다. 그때 도착하지 않은 남편의 자리를 깨철이 차지하고 있는 중이다. 마치 깨철의 가면을 쓰고 나타난 것만 같은 남편의 역할 놀이. 나는 이 말이 수옥의 기억 속에서 그녀 자신이 지어낸 말처럼 들린다. 소설이 해석적이라면 영화는 도식적이다. S# 27 S# 28 S# 50 S# 51 S# 52 S# 58 S# 59 씬 S# 24 씬 S# 25 나는 이미 소설에서 정사를 다루는 문장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그 대신 두 사람은 서로의 대화를 나눈다. 반대로 영화에서는 두 사람 사이에서 아무 대사 없이 정사가 진행된다. 나는 단지 대사의 여부를 놓고 이 묘사가 반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여기에는 그보다 훨씬 미묘한 순간이 있다. 빗장을 걸어 잠근 다음( S #27) 수옥이 돌아보는 얼굴의 클로즈업을 보았을 때( S #28) 나는 이 쇼트가 자동적인 반응이라고 생각했다. 내 생각은 틀렸다. 그런 다음 이상할 정도로 깨철의 얼굴을 볼 수 있는 쇼트가 거의 없다. 카메라는 대부분 깨철의 등 뒤에서 수옥의 얼굴을 보여주거나, 두 사람이 함께 보일 때는 어둠 속에서 얼굴을 구별하기 힘들만큼 뒤로 물러나거나, 아니면 수옥의 얼굴을 보여줄 때 깨철은 프레임 바깥에 있다. 이때 가장 이상한 순간은 수옥의 팬티를 벗기려는 동작이 반복되다가 문득 이 쇼트의 진행이 멈추기라도 하듯 수옥이 이상한 표정을 짓는다. ( S #50) 그러자 그걸 내려다보는 깨철이 만족한 웃음을 흘린다. ( S #51) 이 두 개의 쇼트가 가장 이상한 것은 그 두 사람의 표정이 아니다. 혹은 그 표정은 너무 갑작스러운 것이어서 의미의 차원에서는 어떤 방향에서 바라보아도 그냥 모호하게 남는다. 임권택 은 이 진행 과정에서 두 사람 사이의 감정을 설명할 생각이 거의 없다. 내 질문은 이 두 개의 쇼트가 서로 시선이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수옥을 내려다보았을 때 나는 이 쇼트가 깨철이 보는 시선이라고 생각했다. 다음 쇼트에서 그 눈길이 깨철의 시선이 맞긴 하지만 깨철을 바라보는 시선은 갑자기 상상선 바깥으로 나와서 왼쪽 옆에서 쳐다보고 있다. 표준적 판본은 깨철을 아래서 위로 보는 것이다. 그리고 이걸 변형하면 수직선을 놓고 45도 안쪽에서 보아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카메라는 깨철과 수평으로 옮긴 다음 90도로 바라본다. 이건 누구의 시선일까. 물론 아무도 아니다. 왜냐하면 이 물레방앗간에는 두 사람 이외에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마치 이 정사의 진행 바깥으로 나와 버린 것만 같은 카메라의 자리. 다소 수사학적으로 설명하는 것을 허락한다면 깨철은 이 정사의 바깥에 놓여있는 것이다. 두 사람의 시선은 마주보는 것이지만 두 개의 쇼트는 서로 마주보지 않는다. 일련의 연쇄망에서 빠져나가버린 쇼트. 반사적인 긍정. 이제까지 내내 깨철은 없으면서 거기 있었지만 지금 깨철은 여기 있으면서 없는 것이다. 나는 이 공식을 일반화의 전철을 따라 성관계는 없다, 라는 라캉의 판본으로 옮겨놓고 싶지 않다. 소설과 영화가 서로 완전하게 겹치듯이 공유하는 이 사건에 대한 수옥의 알리바이. (... 중략) 남의 아내 된 여자로서 한 가지 변명을 삼을 것이 있다면, 그 절정의 순간에도 내가 떠올리고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남편의 얼굴이었다는 것 정도일까. 그래요, 난 지금 깨철이 아니라 오지 않은 남편과 정사를 즐기는 중이예요. 의미심장하게도 깨철의 쇼트에서 수옥의 쇼트로 되돌아왔을 때 수옥의 눈길이 무엇을 보는지 애매하게 그 무언가를 본다. ( S #52) 거기서 단 한 가지 그 시선이 깨철을 보는 것이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아니, 차라리 그 시선은 깨철을 보지 않기 위해서 거기 그렇게 모호하게 눈길을 던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내 눈 앞에 있는데도 마치 그게 보이지 않는다는 듯이, 아니 그보다는 대상 자체가 있지도 않기라도 하듯이 지나쳐 가버리는 눈길. 그때 깨철은 프레임 아래로 사라져버리고 난 다음 정사의 행위가 시작된다. 그저 수옥만이 보이는 화면. 상대가 사라진 쇼트. 이때 수옥의 쇼트를 마주 보는 것은 깨철이 아니라 돌아가기 시작하는 물레방아이다. 물론 미학적으로 이 편집이 푸도프킨의 전통이라고 말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이때 이 정사는 마치 수옥 혼자서 진행하는 일종의 자위행위처럼 보인다. 그리고 마치 증명이라도 하듯 이 모든 행위가 끝난 다음 누워있는 수옥에게 옷을 덮어주고 ( S #58) 깨철이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떠날 때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그의 발뿐이다. ( S #59) 부분대상으로서의 깨철. 이 부분적 동일시에 대해서 수옥이 지난 일주일 내내 앓듯이 식을 줄 모르고 달아오르는 몸이라는 증환이 우울증인지 히스테리인지에 대해서는 설명하기 어렵다. 혹은 그런 설명의 목표를 지니지 않고 수옥을 다루고 있다. 소설은 이 한 차례의 정사에 대해서 (...중략) 그러나 남편에 대한 죄의식이나 도덕적인 가책으로 괴로워 한 기억이 별로 없었던 것은 지금 와서 보면 한심스럽다기보다는 기이한 느낌이 든다, 라고 덧붙인다. 영화는 소설 속에서 이 정사에 대해 가졌던 수옥의 감정을 거의 고스란히 수옥의 목소리로 반복하면서도 앞 뒤 문장을 남겨놓고 이 구절은 감쪽같이 지워버렸다. 사라진 문자. 너무 당연해서 생략을 해도 상관없기 때문이 아니라 반대로 그게 너무 불편해서 그것이 주는 억압을 피하기 위한 외면이 아닐까. 무언가 영화는 이 장면을 그렇게 길게 찍고 있으면서도 이 순간을 외면하기 위해서 무언가를 피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단지 이 장면만 그런 것은 아니다. 소설에서는 수옥이 아이들을 가르치는 대목이 없다. 영화에서 수옥은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씬 S #24_25) “이번 시간엔 사회 141쪽 삼강오륜을 같이 공부하겠어요. 삼강오륜이란 유교에서 기본이 되는 세 가지 강령과 다섯 가지 기본 윤리를 말하는 겁니다. 먼저 유교란 유학을 중심으로 한 공자의 가르침으로서 이미 먼 삼국시대부터 학문과 도덕으로 우리들 생활 속에 깊이 뿌리박혀 있습니다. 일찍이 세종대왕께서도 삼강행실도란 책을 펴내 말보다는 행실이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자, 적어요”라고 말한다. < 안개마을 >에서 수옥의 목소리(voice_over)를 제외한 가장 긴 대사. 물론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그것을 가르치는 것과 그 자신이 그것을 행하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앞으로 있을 수옥의 외도에 대해서 미리 어딘가 모르게 방어선을 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다시 처음으로, 두 개의 광경. 나는 그 둘을 문자와 쇼트로 다시 생각하면서 이 둘 사이에서 줄기차게 불화를 보았다. 이것이 소설과 영화 사이의 근본적인 대결의 문제라는 지점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서로가 상대방의 내부로 들어갈 때 그 안에서 자기 자신의 방법에 따라 마치 분리를 감행하는 듯한 순간들을 계속해서 마주보게 된다. 나는 이것을 그렇다고 이문열 과 임권택 의 대결이라는 식으로 따분하게 말을 피하고 싶지 않다. 임권택은 그 이전에도 그리고 그 이후에도 많은 소설가들, 특히 < 서편제 > 이후 이청준과 매우 긴밀하게 작업을 계속했다. 같은 방식으로 다시 질문하지는 않겠지만 나는 이청준과의 작업에서도 동일한 불화를 계속해서 마주 보았다. 대부분의 영화에서 소설 안으로 들어갈 때는 배제의 기술을 활용한다. 임권택은 그런 방법을 따르지 않았다. < 안개마을 >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문자가 광학효과를 발휘할 때 그것을 쇼트로 옮겨오는 순간들이다. 물론 여기에 이행의 과정에서 마주치는 환원의 위험이 뒤따르고 있다. 이것은 저것으로 올바르게 옮겨질 것인가, 그런 다음 원래대로 작동할 것인가. 이때 여기에 각자의 근거에서 비롯된 기이한 강제력을 마주하게 된다. 문자가 끌어당기는 힘. 쇼트가 활동하는 순간 끌어당기는(attraction) 또 다른 힘. 나는 이제까지 영화 안에서 문자를 생각했다. 반대로 이문열의 소설 안에서 쇼트의 활동을 생각하고 싶어진다. (하지만 그건 여기서 내가 할 일이 아니다) 나는 이 둘이 서로 하나로 재구성될 수 없는 각자의 힘의 바탕 위에 서 있는 것을 구석구석에서 보았다. 사라진 문자, 나타난 쇼트. 때로는 거기 새겨진 문자, 그걸 반사하는 쇼트. 그 사이의 감각들. 문자를 영화는 어떻게 체험할 것인가. 둘 사이의 접촉. 문자가 움직이기 시작할 때 쇼트는 거기서 그것을 읽기 시작한다. 나는 두 개의 동사를 생각한다. 움직이는 것을 읽어야 한다. 리오타르가 내게 일러준 말. 문자는 형상을 잘게 부수고 그런 다음 내재화의 과정을 밟아나간다. 그때 바깥에 무엇이 남을 것인가. 본다는 것의 외재화. 나는 지금 담론의 시선이라는 말을 생각하는 중이다. 그때 형상은 담론 안에 살고 있는 것이다. 문학과 영화 사이의 은밀한 대화가 나타나는 서로의 방법. 하나는 오로지 문자 안에서 모델을 세운 다음 그것에 시선을 던질 때 비로소 거기서 영화가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반대로 다른 하나는 쇼트가 동사로 활동할 때, 혹은 자신의 시청각 기호들이 부사가 될 때, 서로에게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임권택은 문장을 유심히 지켜본 다음 그 순간을 느껴본다. 나는 수 없이 많은 독후감을 보았다. 나는 읽었다고 쓰지 않았다. 영화는 문학을 읽고 또 읽었다. 나는 보았다고 쓰지 않았다. 그 중에서 임권택의 독후감을 보고 또 보았다. 그냥 한 마디로 <안개마을>은 문자의 독후감이다. (계속) 1982년 91분 컬러 2.35 감독 임권택 제작 (주)화천공사 각본 송길한 촬영 정일성 편집 김창순 음악 김정길 정윤희 수옥 안성기 깨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