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우드 레벨
- 감독
- 마이클 커티즈
- 제작년도
- 1958
- 출연
- 알란 랏드, 올리비아 드 해빌랜드, 딘 자거, 데이빗 래드, 세실 켈러웨이, 제임스 웨스터필드, 헨리 헐, 해리 딘 스탠튼, 톰 피트먼, 엘리 민츠, 존 캐러다인
< 여자가 더 좋아 >는 1965년 6월에 개봉하여 약 18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당해 국산영화 흥행 2위에 올랐던 코미디 영화다. 그러나 대중이 이와 같이 호응했음에도 이 영화에 대한 당시 저널리즘과 평단의 반응은 혹독했다. 이 영화에는 “C급 저속 넌센스 소극”이라는 말이 붙어 다녔고, 1) 청소년 범죄를 부추기는 영화로 지목되었으며, 2) 주제가는 「동백아가씨」가 왜색조로 금지될 때 저속하다는 이유로 함께 금지되었다. 3) 이 영화를 제작한 이들은 “바로 오늘만을 살고 스스로 묘혈을 파는 어리석은 장사치의 대표적 유형”이자 심지어 ‘영화반역자’라고 비난받기도 했다. 이때 이 영화의 대척점에 놓인 영화들은 < 자유만세 >(1946), < 성벽을 뚫고 >(1948), < 순교자 >(1964) 등인데, ‘민족의식’과 ‘저항정신’을 지닌 ‘세계시장을 지향하는 좋은 영화’로 일컬어졌다. 그러니 <여자가 더 좋아>는 그 반대의 ‘나쁜 영화’인 셈이었다. 앙리 베르그송이 웃음을 논하면서 희극과 예술일반을 비교한 것에서 드러나듯이 일반적으로 예술은 비극이고, 희극은 비극보다 열등한 것으로 오랫동안 간주되어왔다. 식민지에서 분단으로 이어지며 근대 계몽에 대한 욕구와 당위가 비등한 데다 이분법적 인식이 공고했던 한국에서 그러한 경향은 한층 더했다. 검열에서 코미디에 대해 상대적으로 관대했다는 증언은 이를 역설적으로 증명한다. 경직된 규율의 눈으로 바라볼 때 코미디는 말이 안 될 뿐만 아니라 말할 가치도 없는 것, 그야말로 난센스(nonsense)였던 것이다. 그런데 말도 안 되는 것에도 위계가 있었다. 비현실적이고 개연성 없고 우발성과 과장으로 이루어져 웃음을 유발한다고 해도 마지막에 계몽이나 위로로 귀결될 때에는 희극으로 의미가 부여되었다. 그 웃음이 계몽에 닿으면 풍자가 되고, 위로에 닿으면 유머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4) 그리고 그러한 웃음은 미래지향적이고 건전하며 명랑한 웃음으로 웃음 중에서는 높게 평가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과정이 ‘엎치락뒤치락’ 소동으로 끝날 때, 말도 안 되는 일이 말도 안 되는 상태로 끝난다고 보일 때 그것이 유발한 웃음은 “최저속선까지 철저하게 타락시킨 웃음” 5) 으로 질타되었다. 그리고 그 영화는 희극에 못 미치는 ‘저속한 C급 소극’으로 평가되었다. 바로 그 대표적인 영화가 <여자가 더 좋아>였다. 이 영화를 시종일관 끌고 가는 것은 코미디언 서영춘 의 페르소나다. 1960년대 초 라디오 방송에서 만담으로 유행어를 연달아 만들어내며 인기몰이를 시작한 서영춘은 1965년에 영화 세편에 출연한다. < 청춘사업 >(4월 개봉), <여자가 더 좋아>(6월 개봉), < 출세해서 남 주나 >(11월 개봉)가 그것인데, 그 중에서 가장 흥행한 영화가 <여자가 더 좋아>였다. 제목에서 할리우드 영화 <뜨거운 것이 좋아 Some Like it Hot>(1959)를 연상시키는 이 영화는 1960년대 후반 한국영화계에 ‘여장 남자 코미디’ 유행을 견인한다. 이 영화 이전에 ‘여장 남자 코미디’ 영화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61년에 <뜨거운 것이 좋아>가 한국에서 개봉하여 크게 흥행하고 1962년 마릴린 먼로의 돌연한 죽음으로 롱런을 하면서 <뜨거운 것이 좋아>의 번안영화가 제작되었다. 임권택 감독이 연출한 < 남자는 안 팔려 >(1963)가 그것인데 눈에 띄게 관객을 동원하지는 못했다, 그런데 2년 후에 <여자가 더 좋아>가 나와 크게 흥행하여 ‘여장 남자 코미디’의 유행을 촉발한 것이었다. 이 영화에서 서영춘이 분한 주인공 규철은 여자직업기술학교에 출강하는 음악 강사다. 그는 호리호리한 체격에 체모도 적은 데다 바느질과 요리를 즐기고 말도 얌전하게 하며 입을 가리고 웃는다. 일반적으로 여성의 특징으로 인식되는 이러한 행동 때문에 그는 ‘여성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는 기술학교 학생 영숙( 최지희 )과 엄연히 연인 사이다. 그는 결혼하기 위해 영숙의 부모님을 만나는데, 의학적으로 여성에 가까운 중성이라는 이유로 파혼을 당한다. 영숙은 박문기( 남궁원 )라는 밴드마스터와 곧바로 결혼하고 이에 상처받은 규철은 복수를 결심한다. 그는 여장을 하고 규화라는 이름의 식모로 영숙의 시집에 들어간다. 영숙의 시아버지( 김희갑 )는 성정이 ‘괴벽스러워’ 식모를 붙어있지 못하게 만드는 영감인데 규화의 ‘서비스’에 만족하여 규화와 잘 지낸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영숙은 규화(규철) 때문에 신경쇠약에 걸리지만 규화는 영숙의 남편 박문기와 악단주 선우광( 양훈 )까지 매혹한다. 규화(규철)가 불행한 영숙을 보며 자신의 복수에 대해 회의할 때쯤 선우광의 구애로 정체를 들킨다. 선우광이 규화(규철)에게 수작을 걸 때 현장을 덮친 선우광의 부인 때문에 그는 슈미즈 바람에 가발이 벗겨진 채 마침 나들이에서 돌아오던 영숙과 문기, 영숙의 친정어머니와 시아버지까지 모두 보는 가운데 뛰쳐나가게 되는 것이다. 현재 남아있는 프린트에서는 이 상태로 영화가 끝난다. 그런데 시나리오 상으로는 규철이 성전환 수술을 하여 결국 여성이 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이와 같이 여장 남자로서 남성과 여성을 넘나드는 전개는 서영춘의 규정을 거부하는 ‘난센스 페르소나’를 통해 이분법을 끊임없이 교란하며 웃음을 유발한다. 서영춘의 외양과 태도는 남성 아니면 여성으로 규정할 수 없는 분방한 모호성을 지니고 있으며 그의 행동거지와 거기에서 분출되는 에너지는 남녀로 분리된 젠더박스에 진동을 일으키고 균열을 낸다. 이는 1960년대 말 구봉서가 출연했던 ‘남자 시리즈’(< 남자 식모 >, < 남자 미용사 >, < 남자와 기생 >)와 비교해 보면 보다 명확하다. 이 영화들에서 구봉서 는 깔끔하고 자상한 남자로서 여자 흉내를 잘 낼 뿐이지 결국 남자다. 여자로 변장했을 때의 모습과 남자로서 연인과 있을 때의 모습이 확연히 구분되는 데서 젠더 이분법이 잘 드러난다. 그가 여장을 통해 수행하는 것은 발언권이 세진 여성들과 가정에 충실하지 못한 남성들을 동시에 비판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이 영화들은 가부장적인 젠더 질서를 공고히 하는 방향으로 안착한다. 이와 달리 <여자가 더 좋아>에서 서영춘이 표상하는 것은 남자도 여자도 아닌 독자적 섹슈얼리티다. 이에 대해 박선영은 “서영춘의 그로테스크한 신체는 회복되지 않은 남성성과 포기되지 않은 여성성의 기묘한 공존을 시각적으로 전시하는 것”이라고 요약한다. 6) 그런데 따져보면 규철은 영숙과 혼인신고만 안 했지 부부와 다름없이 지냈던 것으로 나온다. 그는 불량배를 만났을 때 그들을 물리적으로 물리칠 완력은 없지만 기지와 헌신으로 여성들로부터 떼어놓는다. 그가 다른 남자들처럼 밖으로 나돌지 않고 술 담배도 입에 대지 않기에 영숙은 그를 믿고 좋아했던 것이기도 하다. 이와 같이 남성으로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음에도 그의 취향이나 태도가 일반적으로 여성들의 것이라 하여 그는 선택을 강요받는다. ‘너는 남자니? 여자니?’ 라는 질문 속에서 경계의 지점은 용납될 수 없기에 그는 자신 그대로 사회에 존재할 수 없다. 그래서 그는 마지막에 성전환을 할 수밖에 없다. 이는 <뜨거운 것이 좋아>에서 마지막에 제리(잭 레먼)가 가발을 벗으며 “나는 남자야. I’m a man”라고 고백하지만, 필딩이 “완벽한 사람은 없지. Nobody is perfect”라고 받는 것과 갈라지는 지점으로, 당시 한국사회가 포용할 수 있는 난센스의 한계를 보여준다. 당대에 웃음으로 봉합될 만한 수위 차원에서 결말을 생각해보면 규철이 성전환을 해야 영숙이 오해를 받지 않고 결혼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물론 규철에게 매혹되었던 모든 인물의 행동이 정당화될 수 있다. 그래서 규철의 성전환은 선택이 아니라 다른 인물의 안전과 그에 따른 관객의 안심을 위한 사회적 거세에 해당한다. 이 영화는 1983년에 더스틴 호프만이 여장 남자로 분한 영화 <투시 Tootsie>(1982)가 흥행하면서 7) ‘남자 시리즈’의 심우섭 감독 연출로 리메이크된다. 8) 이 영화에서도 서사의 전개는 유사한데 결말은 오히려 더 계몽적인 양상을 띤다. 주인공 유경진(강태기)이 아파트에서 가정부로 일하며 젊은 부부들에게 건전한 생활을 유도하다 표창장까지 받고 여성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1960년대보다 1980년대가 민주적으로 진보했다고 여겨지나 서영춘이 보여준 난센스와 같은 경계적 특이점이 설 자리는 여전히 만만치 않았다. 서영춘은 <웃으면 복이 와요>(1969~1985)가 프로야구 붐으로 돌연 폐지 9) 된 이듬해에 간암으로 타계했다. 10) 그는 한동안 잊혔다가 21세기에 대중문화 장르와 다양성에 대한 논의가 진전되면서 비로소 ‘저질’에서 벗어나 ‘독보적인 코미디언’으로 재평가된다. <여자가 더 좋아>가 ‘말할 가치도 없는 난센스 소극’에서 벗어나, 난센스라는 요동으로 경직된 시스템에 파문을 일으키며 젠더 이분법을 일찍이 뒤흔든 영화로 재발견될 수 있는 것은 이러한 재평가와 맥을 함께 한다. >> 여자가 더 좋아 고화질 VOD 보러가기 << 1) 「만화조 넌센스 소극」, 《조선일보》, 1965.7.15.; 「소극붐 수준급 이하의 넌센스들」, 《조선일보》, 1965.11.11.; 「영화 황량한 질 안고 과잉생산」, 《동아일보》, 1965.12.27. 2) 「자극적인 영화제목과 소년범죄」, 《조선일보》, 1965.8.24. 3) 「왜색조를 추방」, 《조선일보》, 1965.9.7.; 「방송음악 日色調 일소키로」 , 《동아일보》, 1965.9.11. 4) 웃음의 유형에 대해서는 박유희, 「총론: 웃음의 서사와 한국 대중문화」, 『대중서사장르의 모든 것: 4.코미디』, 이론과실천, 2013, 22-23면. 5) 「만화조 넌센스 소극」, 《조선일보》, 1965.7.15. 6) 박선영, 『코미디 전성시대』, 소명출판, 2018, 529면. 7) 「추석 극장가 외화가 압도」, 《동아일보》, 1983.9.20. 8) 「방화에도 남성 치맛바람 강태기 여장하고 김환진과 주연」, 《경향신문》, 1983.6.15. 9) 「프로 감축 항의 MBC 코미디언들 파업」, 《조선일보》, 1985.4.25. 10) 「코미디언 서영춘씨 별세」, 《매일경제》, 1986.11.1.
2019년 사사로운 리스트 5년째 이 일을 하다 보니, 연말이 되면 사사로운 영화리스트를 작성하고, 리스트에 있는 영화 중 한 편을 골라 글을 쓰는 일이 한 해를 마무리하는 일이 되어가고 있다. 그런데 최고의 영화를 꼽는 것도 아닌 그저 사사롭게 좋았던 영화들의 리스트를 작성하는 일이 해가 갈수록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이유가 뭘까에 대해 매년 생각하고 있는데, 그게 나의 문제인지, 영화의 문제인지는 아직까진 잘 모르겠다. 그래서인지 모르겠지만 막상 리스트를 완성하고 나면 뭔가 일관성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이상한 리스트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종종 하게 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10편을 선정한 건 각각의 이유가 있긴 하다. 그러나 이 10편의 영화에 대해 하나하나 설명하기보다 2019년 한 해 동안 이러 저런 영화들을 보면서 느낀 몇 가지 생각들을 이야기하고 싶다. 작년까지만 해도 명확하게 느낄 수 없었지만, 2019년 하반기에 들어서면서 비로소 확신하게 되었다. 우리는 그리고 영화는, 지금, 분명히, 새로운 물결이 한 시대를 밀어내고 있는 거대한 변화의 중심에 있다. 이 흐름은 영화를 보는 관점 자체를 바꾸어놓고 있다. 우리는 언젠가부터 멀쩡해 보이는 영화에서, 아니 애초부터 멀쩡하지 않았지만 그런 줄 몰랐던 영화 속에서 그동안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보게 되었다. 이걸 봐 버린 이상 우리는 이제 과거로 되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저항이 있지만, 돌아갈 수 없는, 돌아가서는 안 될 강을 이미 건너버렸다. 따라서 설사 되돌아갈 방법이 있다 해도, 그런 일은 이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2019년 주요 영화들을 관통하고 있는 난민, 페미니즘, 불평등의 주제는 모두 사회적 약자와 연결되어 있다. 사회적 약자가 강력한 주제의식을 가진 영화의 전면에 나서면, 영화는 순수한 영화적 즐거움과 사회를 바꾸려는 캠페인을 위한 프로파간다의 경계에 서게 된다. 그 경계에서 어떤 쪽으로 얼마나 발을 내딛느냐에 따라 영화의 운명은 달라진다. 2019년 최고의 수작과 큰 영화제의 수상작들은 대부분 이 경계에서 양쪽에 모두 발을 딛고 서 있는 영화이거나, 주제를 꽉 쥔 채 영화적 쾌감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그걸 끝까지 밀어붙인 영화들이 대부분이다. 흥미로운 건 이런 시도들이 거대 자본을 투입하여, 정교하고 세련된 세계를 창조, 확장하고 있는 할리우드와 자본의 간섭을 받지 않으려는 최고의 창작자들에게 자본으로 영화적 자유를 선물하고 있는 넷플릭스를 통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항상 반복되어 이야기되는 독립, 예술영화들의 위기가 이번에는 아이러니하게도 두 개의 전혀 다른 거대 자본의 틈새에서 시작되고 있다. 예전과는 완전히 다른 양상이다. 넷플릭스는 알폰소 쿠아론, 코엔 형제, 마틴 스콜세즈, 노아 바움백 등 영화의 만신전에 들어갈 위대한 감독들과 손잡고 ‘넷플릭스 오리지널’들을 만들고 있다. 넷플릭스와 손잡은 감독들은 간섭하지 않는 자본이 선사해준 창작의 자유를 간증하며 자신의 영화 세계를 담아낸 야심 찬 수작들을 연달아 내놓고 있다. 이와 함께 넷플릭스는 명성이 있는 영화제들을 통해 나오는 주요 예술영화들의 전 세계 배급권을 확보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넷플릭스는 이제 자본의 사이즈로는 경쟁이 되지 않는, 중소 규모의 수입 배급사들의 경쟁자이자, 전통적인 예술영화 시장을 위협하는 포식자가 되었다. 디즈니로 대표되는 할리우드 상업영화의 반대편에는 우리가 알던 독립, 예술영화가 아니라, 주요 독립, 예술영화들의 배급권을 모조리 사들이고 싶어하는 넷플릭스가 서 있는 형국이 되었다. 독립영화도, 예술영화도 자본이 할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이다. 앞으로 독립, 예술영화는 소수의 예술영화 전용관과 영화제 서킷 그리고 미술관과 박물관을 통해서, 그게 아니면 넷플릭스를 통해서만 만나게 될지도 모르겠다. 최근 ‘시네마’에 대한 논의가 다시 시작된 건 이런 상황이 지속 또는 확장될 것임을 예측하기 시작했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2019년 리스트에 있는 영화 10편은 그 수많은 영화들 중 ‘시네마 Cinema’ 또는 ‘시네마틱 Cinematic’에 대해 영감을 주었던 영화, 그래서 응원하고 싶은 영화들을 중심으로 ‘사사롭게’ 선택했다. 여기 있는 영화들은 대부분 국내 개봉을 했거나, 국내 영화제를 통해 공개된 영화들이다. 안 본 영화들이 있다면 기억해두었다가 챙겨보길 권하고 싶다. 지금부턴 리스트에 있는 10편의 영화 중 가장 강렬하게 다가왔던 < 소녀 안티고네 >(소피 데라스페, 2019)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한다. 이 영화의 원제는 <Antigone>다. 맞다. 고대 그리스의 3대 극작가 중 한 명이었던 소포클레스의 희곡이다, 그가 저술한 4대 비극 중에서도 첫 손에 꼽히는 그 『안티고네』다, 그래서 한글 제목인 <소녀 안티고네>에서 ‘소녀’라는 단어를 처음 보고 갸우뚱했다. 사람들이 안티고네가 어린 여성인 줄 모른다고 생각했던 걸까? 아니면 안티고네가 어린 여성, ‘소녀’라는 사실이 중요했던 걸까? 의도했든 안 했든 ‘소녀’라는 단어가 강인한 인물인 안티고네와 함께 쓰이면서 제목이 주는 아이러니가 한층 강해진 것 같긴 하다. 대부분의 영화는 원작이 어떤 작품인지 제목과 간략한 내용만 알아도 영화를 이해하는 데 무리가 없다. 그런데 이 영화는 다르다. 원작과 제목만 같은 게 아니라, 영화 속 인물의 이름이 기원전 441년에 만들어진 원작 속 인물의 이름과 똑같다. 거기에 주요 인물들이 벌이는 논쟁의 지점도 유사하다. 원작의 틀을 거의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 제목이 보여주듯 원작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그래서 이 영화를 이해하려면 원작에 대해 먼저 살펴보아야 한다. 원작 『안티고네』는 『오이디푸스 왕』,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와 함께 소포클레스의 “테베 3부작” 중 한 편이다. 서사적으론 『오이디푸스 왕』이 다음의 이야기지만, 시기적으론 가장 먼저 쓰였다. 혈육의 도리를 다하려다 국법을 위반한 여주인공 안티고네의 운명을 다루고 있다. 독일의 극작가이자 철학자인 프리드리히 헤겔은 “걸작 중의 걸작이며 고대와 현대를 막론하고 이와 비견될 작품이 없다”고 했다. 안티고네는 테베의 왕 오이디푸스와 그의 어머니이자 왕비 이오카스테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다. 자신의 손으로 눈을 찔러 맹인이 된 후 왕국을 떠난 오이디푸스를 따라 여러 나라를 전전하다가 오이디푸스가 세상을 떠나자 고향으로 돌아왔다. 오이디푸스가 테베를 떠난 뒤 그의 두 아들 에테오클레스와 폴리네이케스는 왕위를 둘러싸고 전쟁을 벌이다가 모두 죽었다. 그런데 이때 테베의 새로운 왕이 된 숙부 크레온은 외국의 군대와 함께 테베를 공격했던 폴리네이케스를 조국의 배신자로 규정하고 매장을 금한다. 그러나 안티고네는 크레온 왕의 칙령을 어기고 오빠 폴리네이케스의 시신을 매장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크레온은 안티고네에게 생매장의 벌을 내리지만 그녀는 벌이 실행되기 전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한편 안티고네를 사랑했던 약혼자이자, 크레온의 아들 하에몬은 아버지로부터 그의 사면을 얻어내지 못하자 그를 따라 자결한다. 『안티고네』가 19세기 유럽 사회에서 큰 사랑을 받았던 것은, 군주의 폭정과 귀족과 성직자들의 수탈에 저항하여 봉기를 일으킨 프랑스인들과 혁명의 동조자들에게 안티고네는 자유, 평등, 박애로 대변되는 혁명 정신에 대한 완벽한 알레고리였기 때문이다. 안티고네가 죽은 오빠에게 보낸 절대적인 사랑은 가족으로서의 의무를 초월한 보편적 인류애로 읽혔고, 국가권력에 맞서 개인의 권리를 주장하다가, 자살을 선택한 그의 모습은 천부인권설에 담긴 개인의 자유를 구현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이와 함께 여성으로서 모든 권력을 가졌던 남성과 당당하게 맞섰던 그는, 성평등은 물론이고 모든 사회적 영역에서의 평등과 정치적 참정권의 옹호자로 상징되었다. 그리하여 폭군에 대한 안티고네의 저항은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던 혁명 정신과 겹쳐졌고, 저항의 대가로 받게 된 생매장의 형벌은 바스티유의 지하 감옥을 환기시켰다. 또한 그의 자결은 어떤 억압에도 굴하지 않는 강력한 자유 의지와 혁명을 위한 숭고한 순교로 받아들여졌다. 논쟁적 사유, 불굴의 의지, 과감한 결단과 실행력으로 무장한 영웅적 주인공의 이상적 모델로서의 안티고네의 상징성과 이미지는 이렇게 만들어졌다. 1) 특히 『안티고네』가 주목받았던 건 왕의 칙령을 어기고 오빠를 매장한 안티고네와 국가 반역자의 매장을 금지한 크레온의 대립과 둘 사이의 논쟁 때문이었다. 신성한 윤리이자, 감정에 호소하는 가족 윤리(자연법)와 공동체의 안녕과 존속을 위해 존재하는 국가법의 정면 충돌, 각자의 입장에서 정당성을 주장하는 두 개의 거대한 윤리 또는 법 사이의 충돌과 논쟁은 안티고네와 크레온으로 상징되는 『안티고네』 서사의 핵심이다. 또한 시스템 안에서 이루어지는 이 논쟁은 결국 비극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완벽한 가부장적 사회에선 혁명의 서사가 아니고선 결국 막강한 국가권력과 법 앞에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있는 존재는 없기 때문이다. 『안티고네』는 이 운명과도 같은 비극의 서사를 활용하여 당대의 사회적 논쟁에 대한 정치적 성찰을 이끌어내고 도덕적 힘들의 충돌에 대한 철학적 사유를 제시했다. 『안티고네』가 세상에 나온 지 2천 4백여 년의 세월이 흘렀고, 새로운 모습을 한 안티고네는 캐나다의 몬트리올에 살고 있다. 그는 이제 왕족이 아니라 알제리에서 온 난민이다. 3살이 되던 해, 오빠인 폴리네이케스와 에테오클레스, 언니 이스메네, 그리고 할머니와 함께 조국을 떠나 캐나다와 도착했고, 몬트리올에 정착했다. 현재 그의 가족은 아직 시민권을 갖지 못했지만, 자신들의 뿌리가 알제리임을 잊지 않은 채 평범한 삶을 살고 있다. 두 오빠는 자기 밥벌이 정도는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지역의 갱단에서 활동하고 있고, 성인이 된 이스메네는 미용실에서 보조로 일을 하고 있으며, 안티고네는 장학금을 받아가며 열심히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다. 이제 안티고네 가족은 풍족하진 않아도 미래를 꿈꾼다. 그러던 어느 날 경찰의 불심 검문을 받던 에테오클레스가 경찰이 우발적으로 쏜 총에 맞아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설상가상으로 함께 있던 폴리네이케스는 저항하다가 체포되어 경찰폭행죄로 알제리로 추방될 위기에 처한다. 부모의 죽음을 겪으며 먼 타국에서 간신히 삶의 터전을 잡은 듯했던 한 가족은 이제 합법적 국가권력에 의해 해체될 위기에 놓인다. 이제 안티고네의 시간이 도래했다. 연약하게만 보이던 막내 안티고네는 가족을 위해 수감된 오빠를 감옥에서 빼내기로 마음먹는다. 폴리네이케스는 남은 가족 중 유일한 남자이고, 그의 존재는 자신의 정체성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처음 생각은 단순했다. 미성년자인 자신은 어떤 잘못을 하든 쉽게 풀려날 거라 믿었다. 머리를 자르고, 문신을 하고, 남자 옷을 입고, 오빠와 비슷하게 변장하고 면회에 가서 옷을 바꿔입고 오빠를 탈옥시킨다. 원작의 매장은 탈옥으로, 크레온은 국가의 사법시스템으로 대체되었다. 원작과 마찬가지로 안티고네의 진짜 이야기는 지금부터다. 안티고네는 자신의 모든 용기를 짜내어 법을 지키는 대신 가족의 윤리를 택했다. 완전히 상반되지만 각자의 입장에서 정당한 두 가치를 어떻게 충돌시키냐와 안티고네에게 얼마나 감정이입할 수 있느냐가 이 영화의 관건이다. 가족을 위해 범법자가 되어 법정에 선 그는 두려워하면서도 당당하게 유죄를 인정한다. 그리고 “전 언제든 다시 법을 어길 거예요. 오빠를 도우라고 제 심장이 제게 말하고 있어요”라고 외친다. 재판 초기 범죄 조직에 가담한 불법 난민의 아이콘이 되어 인터넷에서 조리돌림을 당하던 안티고네는, 남자친구 하에몬의 노력으로 인해, 가족를 위해 범법자가 되기를 두려워하지 않은 용맹한 소녀로 회자된다. 대중의 지지가 강해지면서 난민 소녀 안티고네는 가족의 가치를 수호한 영웅이 된다. 그러자 합법의 탈을 쓴 국가폭력의 이면이 모습을 드러낸다. 고대 그리스에서 목숨을 놓고 벌인 2천여 년 전의 비극적 논쟁은 이렇게 동시대적 감각으로 깊은 공감을 이끌어 내며 부활한다. 이 흥미로운 각색의 중심에는 소피 데라스페 감독이 있다. 그는 원작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오랜 시간을 견디고 살아남은 안티고네의 서사에 현재 전 세계의 가장 중요한 이슈 중 하나인 난민 문제를 성공적으로 이식한다. 이 영화에서 가장 눈길을 사로잡는 건 주연을 맡은 신인 배우 나에마 리치다. 그는 데뷔작임에도 강렬한 연기력으로 서사를 장악하고 주도한다. 안티고네가 머리를 깎고 언니에게 가족을 위해 일할 것을 강하게 요구할 때, 애써서 탈옥시켰지만 다시 잡혀 와 법정에 선 오빠를 향해 피를 토하듯 절규할 때, 그리고 그 어떤 유혹의 순간에도 망설임 없이 가족의 윤리를 선택할 때 등 서사의 인과관계의 중요한 고비마다 튀니지 출신의 이민자인 그의 연기는 마법 같은 순간을 만들어내며 관객을 설득해낸다. 이렇듯 <소녀 안티고네>는 한 발 더 나간 결말에 대한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원작에 담겨 있던 사회적 논쟁에 대한 정치적 성찰과 함께 양립하는 두 가치의 충돌에 대한 철학적 사유를 고스란히 영화에 담아내는 데 성공하고 있다. 1) 『안티고네』 소포클레스 저, 강태경 역, 홍문각
부민관은 1935년 12월 지금의 서울 중구 태평로 1가에 세워진 다목적 회관으로 각종 연극과 영화를 비롯한 다양한 공연이 펼쳐진 장소이다. 부민관은 경성전기회사의 기부금으로 경성부에서 지었다. 1932년 전기사업을 독점하며 막대한 부를 획득하고 있던 경성전기주식회사에 대해 경성부민들을 중심으로 부영 계획을 세우는 등 움직임을 보이자, 경성전기주식회사는 이러한 분위기를 반전시키기 위해 100만원의 기부금을 경성부에 내놓는다. 거액의 기부금을 받은 경성부는 부민의 복리향상을 위해 이 기부금의 절반을 다목적 회관인 부민관을 짓는데 사용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하게 된다. [자료] “불원 착공할 부민관 정면도”(《매일신보》, 1934.06.27) 경성부는 일본기독교청년회관 부지 1,083평과 이왕직 소유의 덕안궁 터 873평을 매수하여, 부미관의 터를 마련하였다. 매수비용으로 이왕직에 4만원을 지급, 일본기독교청년회관에 대해서는 장곡천정 사회관 건너편 테니스장 561평을 대체부지로 제공하고 별도로 4만 2천원의 매수비용과 2만 3천원의 건물 이전 보상비를 지출하기로 한다. 부지 매수비용이 늘어나면서 예산은 60만원으로 증가했다. 공사의 시작을 알리는 지진제는 1934년 8월 15일 개최되었다. 1935년 7월 13일 상량식이 거행되었으며 같은 해 12월 10일 준공했다. 건축청부는 이키(三本) 합자회사, 냉•난방과 환기는 스기요시(杉由)제작소, 전기 시설은 가토(加藤)상회, 무대조명 시설은 가와베(川部)제작소가 맡았다. 부민관은 부지 1,780평, 건평 1,678평, 철근 콘크리트의 근대식 건물로 지하 1층 지상 3층의 상자형태의 건물에 7층 높이의 높은 시계탑이 결합된 형태로 지어졌다. 내부에는 대강당, 중강당, 소강당, 담화실, 집회실, 부속실 등을 갖추었으며 이중 대강당은 3층 높이에 건평 301평 좌석 1,800석 규모였으며, 400석 규모의 좌석에 147평의 면적의 중강당과 40평에 좌석 160석의 소강당도 있었다. 경성부는 완공을 앞두고 부민관 사용 조례를 만들었다. 입장료는 무료입장, 유료입장, 영리목적으로 구분되어 차등적으로 정했다. 예컨대 1,800석의 대강당의 경우 주야간을 통틀어 사용할 시에는 하루에 60원(무료입장), 120원(유료입장), 300원(영리목적)의 사용료를 받았으며 난방이 필요한 시기에는 30원씩 사용료를 더 책정하였다. 1935년 12월 10일 개관식이 거행되었다. 개관식에는 조선총독이 참석하였고, 3일간 경성 5권번이 총출동하는 연예회가 개최되었다. 이후 부민관에서는 1936년 음력 설을 맞아 무용의 조택원, 만담의 신불출, 영화의 나운규가 출연하는 조선중앙일보 주최 “조선 3귀재 경연회”와 같은 공연이 펼쳐지기도 했다. [자료] 부민관에서 개최된 <3귀재 경연회> 신문광고(《조선중앙일보》, 1936.01.24) 거액의 운영 경비를 충당하기 위해 책정한 비싼 대관료로 인해 대관이 이루어지지 않는 등의 문제점이 개관초부터 발생했고, 그 타개책으로 토키영화를 상영할 수 있는 영사기와 발성기를 설치하는 방안이 고려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흥행업자들이 부민관을 대관하여 영화상영과 연극공연 등을 진행하자, 부민관이 흥행장으로 활용되는 것에 대한 다양한 비판 의견이 나오기도 했다. 특히 1939년 9월에는 본정서 관내의 명치좌, 낭화관, 중앙관, 약초극장, 희락관 등 5곳의 상설관이 부민관에서 흥행물 공연을 하지 말아달라는 진정을 당국에 제출하기도 했으나 이러한 흥행업자들의 반발에도 부민관의 흥행은 계속되었다. 1941년 4월 언론에 발표된 1940년 부민관 사용건수를 보면 영화, 음악, 연극과 같은 흥행이 342건, 결혼식 200회, 간담회 162건, 총회 132건, 이하 강연, 강습회, 전람회 순이었다. 부민관이 흥행장화 되는 것에 대한 다양한 방면의 염려는 있었지만 전기료 등 고액의 고정비용을 부담하기 위해서는 흥행장으로 활용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부민관의 호화로운 무대에 서는 것만으로도 영광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하는 단체와 인물들이 많았기에 다양한 형태의 무대공연들이 끊임없이 부민관에서 개최될 수 있었으며 텐카츠(天勝)와 같은 일본의 유명 흥행단체들도 경성 공연 시 부민관을 흥행장소로 활용하였다. 최승희, 배구자 등의 무용공연과 계정식, 이인범 등의 서양음악과 아악이나 여류명창대회와 같은 전통예술 공연, 극예술연구회나 조선연극협회, 중앙무대 등의 신극공연과 “째즈와 무용의 밤”이나 “대중연예의 밤”과 같은 이름의 김해송, 이난영, 박향림 등 유명 가수들의 공연이 개관 초 큰 인기를 끈 프로그램이었다. 이중 1937년 5월 김영길과 미우라 타마키가 공연한 오페라 <나비부인>은 우리나라 최초의 오페라 공연으로 기록된다.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부민관을 시국강연장으로 활용하였는데, 방공방첩을 중심으로 한 사상전을 전개하기 위해 1939년 8월에는 연극인, 영화인, 가수 들을 총동원하는 방공음악영화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또한 필름 수급이 불안정해지면서 연극이나 악극과 같은 무대극이 큰 인기를 끌었다. 박노홍은 부민관 무대에 가장 많이 공연한 단체는 조선악극단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그 외 라미라가극단, 반도가극단 등과 극단으로는 극예술연구회, 극단 고협, 극단 아랑, 현대극장 등도 이곳에서 다수 공연을 거듭했다고 전한다. 부민관 공연 중 빼 놓을 수 없는 것이 소위 조선연극문화협회가 개최한 국민극경연대회이다. 1942년부터 1945년까지 당시 조선의 대표적인 극단들이 참여하여 3차례에 걸쳐 개최된 국민극경연대회의 1차, 2차 대회가 부민관에서 열렸다. 1942년 9월 18일부터 11월 25일까지 개최된 1회 대회에서는 현대극장, 극단 아랑, 극단 고협, 극단 성군, 극단 청춘좌가 각기 1주일씩 공연을 펼쳤고, 1막짜리 국어극(일본어 연극)이 추가된 제2회 대회(1943년 9월 16일부터 12월 26일까지)에는 1차 대회에 참여하지 못한 예원좌와 황금좌, 극단 태양이 추가되는 등 참여 극단의 수가 늘었다. 두 차례의 국민극경연대회가 관객들의 큰 호응을 얻으며 흥행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두자 3회 대회는 부민관이 아닌 부내의 일반 극장에서 나누어 개최하는 식으로 바뀌었다. 다양한 시국강연장으로 활용되던 부민관에서는 해방 직전인 1945년 7월 24일 친일민족반역자인 박춘금이 개최한 아시아 민족 분격대회를 방해하기 위해 조문기, 유만수, 강윤국이 폭탄을 설치하고 이를 터트려 대회를 무산시킨 소위 부민관 폭탄 의거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 사건은 일제강점기 사실상의 마지막 의거였다. 해방 후 미군이 사용하던 부민관은 1949년, 서울시에 이관되었다. 1950년 4월 29일 국립극장으로 지정되었으나 한국전쟁이 발발로 2회 공연을 끝으로 국립극장으로써의 역할은 끝났다. 1954년 환도 이후 1975년까지 이곳은 국회의사당으로 사용되었다. 1975년 여의도에 새로운 국회의사당이 신축되면서 시민회관으로 그 용도가 변경되었고 1976년 시민회관인 세종문화회관이 신축되자 그 별관으로 사용되었다. 1991년 지방자치제가 실시되면서 서울시의회 건물로 용도가 변경되어 현재까지도 활용되고 있다. [참고문헌] 《경성일보》, 《동아일보》, 《매일신보》, 《조선신문》, 《조선중앙일보》 정병호·김보경, 『일본어 잡지로 보는 식민지 영화 3』, 도서출판 문, 2012.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화사연구소 엮음, 『일본어 잡지로 본 조선영화(1~6)』, 한국영상자료원, 2010~2015. * [사진](상단) 국회의사당으로 사용되었던 당시의 모습(국가기록원) [ 자료 ] 《 동아일보 》 , 1935.12.06. 부민관 준공 부내 태평통 ( 太平通 ) 에 건축 중이든 부민관 ( 府民館 ) 은 드디어 7 일로써 공사는 완전이 끝낫으므로 오는 십일에 성대히 낙성식을 거행하게 되엇다 한다 . 그리고 동관을 일반에게 소개하기 위하야 십일부터 십삼일까지는 매야 육시를 기하야 연무 ( 演舞 ) 를 공연한다는 바 그 료금은 일등 오십전 , 이등 삼십오전 , 삼등 이십전씩이라 한다 . [ 자료 ] 《 동아일보 》 , 1936.01.29. 오십만원 들인 부민관 , 부민은 비난 부청은 두통 , 사용료는 비싸고 수지도 안맞아 , 사회과는 대책에 고심 경전 ( 京電 ) 이 전긔 독점 기한 연장의 조건으로 경성부에 백만원을 기부하야온 돈 중 오십만원을 뚝 띠어서 사십만 부민의 오락전당 ( 娛樂殿堂 ) 을 맨들겟다고 부내 태평통 ( 太平通 ) 에 지어 노흔 부민관 ( 府民館 ) 은 준공 후 겨우 일개월 밖에 되지 안흔 이즈음부터 부민의 비난에 싸혀 잇으며 또 부 당국으로서는 수입이 예상 의외로 적어서 경영이 곤난하다 하야 그에 대책에 머리를 알코 잇다 한다 . 즉 그 리유는 동관의 사용료 ( 使用料 ) 가 턱없이 비싸다는 것인데 가장 부민이 많이 이용하게 될 대 “ 홀 ” 의 사용료는 하로밤에 이백사십원 , “ 피아노 ” 대가 삼십원 , 겨울이면 “ 스팀 ” 값까지 붙여서 하로밤에 삼백여원의 사용료를 지불하게 된다고 한다 . 이와 같은 현상임으로 일반 흥행업자 또는 음악가협회 ( 音樂家協會 ) 같은 데서는 보고도 못 먹는 떡이라 하야 부에 대한 비난이 자못 높으며 , 따라서 동관의 수입으로써 동관의 유지를 꾀하든 부 당국에서는 수입이 적음으로 어떠케 경영해 갈 바가 문제인지라 직접 관게를 맺고 잇는 부 사회과 ( 社會課 ) 에서는 아직까지 동관의 예산 편성도 하지 못하고 있다 한다 . 동관이 준공된 후 지금까지 사십팔일 동안에 대 “ 홀 ” 을 유료 사용한 날짜는 십삼일밖에 되지 안는다 한다 . [ 자료 ] 《 동아일보 》 , 1939.3.18. 영화연극으로 일할 ( 日割 ) 독점 , 영리장화한 부민관 , 부회 ( 府會 ) 에도 상정되어 상당히 파란 일 듯 , 본정서 ( 本町署 ) 에서 개선에 진출 최근 태평통 ( 太平通 ) 부민관 ( 府民館 ) 은 설립 당초의 취지인 일반 부민에게 이편을 주는 여러 가지 개최물을 하는 동시에 회합장소로 이용한다는 본래의 사명을 전연 망각하야 영리 ( 營利 ) 위주의 영화연극을 매일 같이 상영하야 업자들은 물론 학동을 가진 가정에서도 물의가 등등한데 이 문제는 금일 부회 ( 府會 ) 에서도 상정되어 상당한 파란을 이르킬 것인데 부민관은 상설관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상설관과 똑같은 역활을 하고 잇다 한다 . 이리하야 영화 재상연으로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무리들이 오 , 육개월 전부터 날짜를 전부 게약하야 노아 보통 사람이 일반대중을 상대로 하는 강연 회합을 하려고 해도 날자가 비여 잇지 안어 부민관을 결국 사용치 못하는 형편이라고 한다 . 특히 모극단 모극장에서는 부민관과 결탁하야 언제나 토요 , 일요 , 휴일이 끼인 조흔 날이면 언제나 사용할 수 잇게 되어 잇다하니 이 역시 상설관 업자들이 불평을 일으키는 초점이라고 한다 . 그리고 상설관에 출입하는 생도 학생이면 학교당국과 보도연맹 ( 報導聯盟 ) 이 취체하야 엄벌에 처하지만 이 부민관은 상설관이 아닌 관게로 학생생도가 나뿐 영화를 보아도 무간섭하므로 이용자의 대부분은 남녀학생들이므로 학생교화상 ( 敎化上 ) 여간 큰 문제가 아니라고 한다 . 그런데 날짜를 미리 잡아 두고 꼭 필요한 사람에게 수수료를 받고 파는 뿌로커도 잇다는데 이 현상이 그대로 계속되면 앞으로는 영화 , 연극 상설관과 조곰도 다름없는 상설관으로 화할 터이니 일반은 회합에 이용할래야 도저히 이용할 수 없을 터이니 부민관 창설 본래의 사명은 잊고 말 것으로 이 문제는 학교와 사회 , 영화업자에게 큰 파문을 던질 것으로 그 귀취는 매우 주목되고 잇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