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명가 언니와 동생
- 감독
- 김혜원
- 제작년도
- 2016
이제 뻔한 이야기를 그럴듯하게 늘어놓는 일은 그만하고, 진짜 본격적으로 애니메이션 속 먹방 장면이나 감상해보자. 사실 애니메이션 속 먹방은 그 가짓수가 일만 오천육십 개까지나 되니(세어 보진 않았지만 하여튼 엄청 많다는 말씀입니다.) 오늘은 ‘밀가루’에 관련된 먹방만 감상해보겠다. 첫 번째 이야기해 볼 애니메이션은 바로 ‘지브리 스튜디오’의 작품들이다. 나는 사석에서 지브리 스튜디오를 ‘셰프 지브리’라고 부르곤 한다. 마치 감각 있는 셰프가 그날 날씨와 제철재료들을 고려하여 선보이는 ‘오늘의 추천 요리’ 메뉴처럼, 지브리 애니메이션 속의 먹방에서는 작 중 분위기와 상황에 완벽하게 어울리는 요리 메뉴를 선보인다. 먼저, 밀가루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애니메이션인 < 마녀배달부 키키 >를 감상해보자. <마녀배달부 키키>는 꼬마 마녀 키키가 빵 택배 일을 시작하면서 벌어지는 소소한 소동을 담은 따뜻하고 귀여운 성장 드라마다. 이 애니메이션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은 키키가 화덕에서 파이를 굽는 부분인데, 그 파이의 모양이 적잖이 낯설었다. 생선 모양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청어 파이’였기 때문이다. 이 청어 파이는 모두에게 몹시 충격적인 비주얼이었는지, 지금도 청어파이, 즉 생선 파이는 영국의 괴랄한 미식 문화를 조롱하는 의미로 통한다. 이 애니메이션에서도 셰프 지브리의 탁월한 센스를 엿볼 수가 있다. 생선 파이는 사실 역사가 오래된 영국 전통 요리다. 신선한 생선을 구하기 어려운 영국의 서민층들이 조리해먹은 데서 유래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여하튼 영국 서민들의 전통 홈 푸드인데, 현재는 여기저기서 푸대접을 받고 있는 모양이다. <마녀배달부 키키>의 청어 파이 역시 마찬가지 신세다. 손녀의 파티에 따뜻한 파이를 보내주고자 했던 할머니가 오븐이 고장 난 상황에서, 오래된 화덕을 수리하는 고생(물론 고생은 키키가 다 하기는 하였지만 어쨌든 키키에게 넉넉한 금전적 보상을 해주었지 않은가?)을 마다하지 않고 정성껏 구워낸 것이지만, 신세대 손녀에게는 문전박대를 당한다. 셰프 지브리의 특기인 ‘상징’이 빛나는 대목이다. 키키의 눈빛을 보면 맛있게 먹겠다는 말을 할 수밖에 없을 것 같지만… 움직이는 성안, 하울의 식사는 어떨까? 베이컨은 미국 서부개척시대에 개척자들의 필수아이템이었다. 여행 작가이자, 개척자인 랜스포드 헤이스팅스는 1845년, 오리건을 향하는 이민자들에게 150파운드(약 68kg)의 베이컨을 필수적으로 챙겨가라고 조언했다. 개척자들은 매일 아침으로 커피와 베이컨을 먹고, 저녁엔 베이컨 기름을 빵이나 비스킷에다 발라 먹었다. 1) 그 유명한 베이컨&달걀의 유행은 사실 하울이 원조가 아니다. 그 역사는 192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다이어트가 필수덕목인 이 시대에야 고열량인 이 조합은 사실 죄책감까지 불러일으키지만, 1920년대에 ‘베이컨&달걀’은 아주 ‘건강하고 가성비 좋은’ 아침식사였다. 그야말로 피로와 긴장에 찌든 여행자들에게 걸맞은 고영양 메뉴인 것이다. 게다가 셰프 지브리는 베이컨 기름으로 모든 조리를 해결한다. 올리브유나 향료같은 많은 부재료들을 챙겨 다니기 어려운 여행자들에게 아주 요긴한 재료다. 다만 계란 후라이를 저렇게 예쁜 ‘써니 사이드 업’으로 만들려면 약불로 인내심있게 구어야 하는데, 저렇게 화력이 센 불에 조리하니 타지는 않을지 걱정되었다. 뭐, 보기 좋기는 했다. 이 부분에서 서론에서 말했던 애니메이션 속 먹방 장면의 장점이 빛을 발한다. 왜 밀가루 이야기를 하다말고, 고지방 고단백 메뉴 이야기를 하고 있는가 하겠지만, 사실 내가 정말로 주목하고 싶었던 것은 베이컨과 달걀과 함께 식탁 위에 나란히 놓여있던 빵, 깜빠뉴다. 절대 사심으로 베이컨&에그를 끼워 맞춘 것이 아닙니다. 사실 약간 그래요. 뭐 어쨌든… 이 고열량, 고단백의 조합의 목 멜 듯한 기분은 탄수화물이 녹여준다. 깜빠뉴는 오래 보관하기 쉽고, 재료가 단순하고 맛이 담백하여 어느 메뉴와도 잘 어울린다. 식사빵이라는 카테고리답게 묵직하고 든든하다. 여러모로 먼 길을 떠날 때 아주 적합한 메뉴다. 사실 ‘베이컨과 에그 게다가 단순 탄수화물인 빵’은 비만 인구 상승에 힘을 실어줄 조합이기는 하지만, 미지의 세계를 여행하고 막강한 적과 싸워야하는 하울 무리에게는 더없이 걸맞은 메뉴였다. 이번엔 일본을 벗어나, 영국의 훌륭한 스튜디오로 넘어가 보자. 아드만 애니메이션은 <월레스와 그로밋> < 치킨 런 > < 플러쉬 > < 아더 크리스마스 > < 허당 해적단 > < 숀더쉽 > 등 정말 재미있는 클레이 애니메이션을 대거 제작한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다. 아드만의 애니메이션들은 진짜로 웃기고, 재밌다. 그리고 먹음직스럽다. 클레이 애니메이션이다 보니, 먹방으로써 애니메이션과 실사영화의 장점들을 고루 갖출 수 있다. 만져질 것처럼 생생하면서도 오버액션도 ok. 멋진 일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월레스와 그로밋>을 살펴보자. 월레스는 발명가이자 빵집사장이다. 그로밋은 그가 기르는 강아지. 하지만 이 강아지 그로밋이 월레스보다 약 두 배가량 현명하다. (하긴 역마살 붙은 것 마냥 한시도 가만있지 못하고 동네를 휘젓는 이웃집 개도 집만 잘 찾던데, 10년 산 동네에서 한번 낯선 길로 가보자고 했다가 돌아오는 길을 한참 헤맸던 내가 할 소리는 아닌 것 같지만.) 어쨌든, 둘은 아무리 바빠도(사실 별로 바빠 보이지도 않지만) 늘 시간을 내어 치즈&크래커와 홍차를 즐긴다. ‘빵이냐 죽음이냐’ 편에서, 파이엘라는 늘 정시에 티타임을 즐기는 월레스의 습관을 이용하여 살인을 계획할 정도로 그들에게 티타임은 무척 중요한 의식이다. 사실 이런 문화는 영국인이라면 아주 익숙하다. 영국인들의 티타임 사랑은 하루 이틀이 아니다. 빅토리아 여왕은 도버해협을 건너는 기차 안에서도 전용 도기로 애프터 눈 티를 즐겼다고 하며, 영국의 유명한 동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환상의 세계에서도 티타임은 빠지지 않는다. 이런 영국인의 홍차사랑에 대한 결실은 현재 티타임에 가장 흔하게 사용되는 찻잎들의 이름에서도 드러난다. 찰스 그레이 백작의 이름을 딴 ‘얼그레이’, ‘잉글리시 브렉퍼스트’ 같이. 영국이 구움 과자 분야에서는 두각을 나타내는 것도 이 ‘차사랑’에 원인이 있다. 음식문화가 취약하다고 정평이 난 영국도 비스킷, 스콘 등 티타임에 곁들일 메뉴를 개발하는 데에는 꽤나 열정적이었던 모양이다. 역시 인류 최고의 발명가는 사랑이라고 했던가. 월레스와 그로밋이 여기에 곁들이는 비스킷 역시 지극히 영국적인 과자다. 비스킷은 1588년 스페인과 영국이 영불해협에서 맞붙었던 전투에서 영국을 승리로 이끈 숨은 주역이었다. 해전 시 배에 실을 수 있는 식량은 한계가 있어 칼로리가 높지만 가볍고 부피가 작아야 했는데, 비스킷이 그에 딱 걸 맞는 메뉴였다. 영국군은 최대한으로 수분을 없앤 딱딱한 비스킷을 있는 대로 보관해 둔 덕에 굶주릴 일없이 전쟁에 임할 수 있었고, 결국 승리를 거두었다. 이 전쟁을 기점으로 세계최강이라 자부하던 스페인 함대는 몰락했고, 영국은 세계 주도권을 가지게 되었다. 2) 어쨌거나 월레스와 그로밋의 티타임은 달로 향하는 우주 비행선 안에서도 계속되었다. 이 용감한 개척자들은 출발하기 직전까지 티타임 도구들을 챙기기 바쁘다. 바삭하고 퍽퍽한 비스킷에 부드러운 치즈를 곁들인 티푸드에 맛있는 홍차, 그리고 오래된 친구와 즐기는 티타임이라니, 우주 한가운데 더없이 영국적인 풍경이다. 위 거론한 예시들 말고도 애니메이션 속 먹방에 대한 이야기는 밤새도록 나누어도 모자람이 없다. 언젠가 또 기회가 닿는다면 < 너의 이름은. >의 팬케이크 이야기나, < 검정고무신 >의 크림빵에는 생크림이 없다는 이야기로 시작되는 크림의 비밀 등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고 싶다. 애니메이션 속에도 현실 세계 만큼이나 먹음직스러운 이야기들이 가득 숨어있다. 행복한 이야기다. 먹는 이야기 좋아하는 사람답게 나의 첫 데뷔작도 레진코믹스에서 연재했던 음식 만화(<삶은 토마토>)였다. 주로 음식을 먹으며 나누는 대화나 상황들이 스토리의 전부다. 심심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사는 게 별건가 싶다. 우리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밥먹기’를 원하며, 대부분의 중요한 결정들이 ‘식사자리’에서 거론된다. 나는 애니메이션 속 등장인물들이 먹고 마시는 게 좋다. 등장인물들이 아무리 진중하고 긴박한 상황에서도 허기짐을 느껴, 혹은 기운이 달려 무언가를 먹고 마시는 순간 거리를 두고 감상하던 이야기들이 삶의 차원으로 넘어온다. 게다가 음식 만화를 연재하며 먹는 장면을 그리는 것이 즐겁지만, 번거로운 일임을 뼈저리게 경험했던 사람으로서 스토리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빼버려도 상관없는 먹방 장면을 굳이 삽입한 애니메이션 감독에게는 인간적인 애정을 느끼기까지 한다. 애니메이션 속 주인공들이 더 먹고 마셨으면 좋겠다. 더 많이, 더 맛있게, 더 오버액션으로 먹어주면 좋겠다. 언젠가 여러분, 제가 엄청나게 맛있게 먹는 애니메이션을 만들 거 거든요? 얼마나 맛있게 먹나 한번 보러와 주세요. 어설픈 글을 읽어줘서 고맙습니다. 어쨌든, 나도 난생처음 칼럼이라는 걸 써본 기념으로 오늘은 맛있는 걸 좀 먹어야겠다. 1)『아침식사의 문화사(Breakfast: A history-Heather)』 (헤더 안트 앤더슨 저, 니케북스, 2016) 참조 2)『양과자 세계사』(요시다 기쿠지로 저, 비앤씨월드, 2011) 참조
이 연재에서 존 포드의 1930년대 작품 중에는 1939년의 신화적인 두 영화 < 역마차 >(글)와 < 젊은 날의 링컨 >(글)을 제외하면, < 굽이도는 증기선 >(글)(1935) 밖에 다루지 않았다. 이것이 존 포드의 세계가 1930년대 말에야 원숙해졌다는 인상을 줄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 인상이 전적으로 잘못된 것은 아니다. 위의 세 편만 만들었다 해도 존 포드는 영화사의 만신전에 등재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1930년대의 포드는 그냥 지나치기 힘든 빛나는 순간을, 압도적인 걸작들에 가려진 영화들 곳곳에 새겨놓았다. 그중에서도 < 순례여행 >(1933)을 빼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아들이 전사한 어머니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 순례여행 >은 무성영화 < 네 아들 >(글)(1928)을 곧바로 연상시킨다. 캐릭터의 면에서라면 두 영화는 완전히 다르다. 독일 시골 마을이 무대인 <네 아들>의 어머니는 헌신적이고 희생적이고 순박한 전통적인 어머니이다. 반면 미국 시골 마을이 무대인 <순례여행>의 어머니는 거의 정반대로 권위적이고 배타적이며 이기적이다. 남편과 사별한 그녀는 외아들을 자신의 소유물로 여기며 더 많은 땅을 가지길 원한다. 포드의 다른 영화들에선 찾아보기 힘든 이 비정한 가모장은 아들의 아이를 가진 연인과 떼놓기 위해 아들의 입대서류를 제출한다. 아들이 프랑스에서 전사한 뒤에도 아들의 아이를 손자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10년이 지난 뒤, 프랑스 전장에서 아들을 잃은 미국 어머니들의 프랑스 순례여행에 마지못해 참여하면서 그녀는 비로소 바뀐다. < 순례여행 >은 곡예의 드라마처럼 보인다. 이 드라마엔 두 가지 난제가 있다. 어머니 한나 제솝(헨리에타 크로스맨)은 포드의 주인공들 중에서 가장 나쁜 사람에 속한다. 포드의 다른 영화에서 이만큼 부정적인 중심 캐릭터는 < 아파치 요새 >(글)의 써스데이 중령(헨리 폰다) 정도지만, 그의 곁엔 요크 대위(존 웨인)라는 포드적 영웅이 있었다. 한나는 <순례여행>의 유일한 중심인물이다. 용납하기 힘들 정도로 이 부정적인 주인공의 긍정적 변화를 서사적으로 설득할 수 있을까. 또 다른 난제는 희극의 도입이다. < 순례여행 >은 기본적으로 스산한 비극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희극의 표정이 있고 유머러스한 사건이 있다. 자신의 이기심 때문에 아들을 전쟁터로 내몰아 죽음을 맞게 한 어머니의 이야기에 어떻게 조금이나마 희극의 자리를 마련할 수 있을까.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아들을 죽게 만든 어머니가 참회 이전에도 유쾌하게 웃는 장면을 관객이 수용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게, 심지어 함께 웃도록 만드는 게 가능할까. 포드의 방식은 놀라울 정도로 간결하다. 두 난제를 단 몇 쇼트의 배치와 간단한 대사만으로 해결해버리는 것이다. 이것이 드라마적 곡예라는 사실마저 잊어버릴 만큼 경묘한 솜씨다. 미학적 전위성을 앞세운 나머지 이야기꾼으로서의 포드의 장인적 능력을 경시해선 안 될 것이다. 그는 할리우드 스튜디오 시스템의 작가이고, 그의 작가로서의 위대성은 스튜디오 시스템이 요구하는 서사경제를 경유해 발현되었다. < 순례여행 >은 포드가 이미 1930년대 초반에 어떤 이야기라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걸출한 장인이 되었음을 증언한다. 물론 포드가 훌륭한 이야기꾼이라는 말이 그가 좋은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뜻하진 않는다. 이야기 자체의 자질은 시나리오작가의 능력에 속하며, 1930년대부터 < 웨건 마스터 >(글) 외에 그가 직접 각본을 쓴 영화는 없다. 세 편의 포드 영화에서 각본을 쓴 누널리 존슨은 포드가 “자신의 생각을 종이에 써서 전달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것 때문에 거의 미칠 지경이었다.”고 말했다. 대신 포드는 시나리오를 끊임없이 고치면서 특히 “대사에 대한 눈부신 감각”을 발휘했다. 포드와 13편의 영화를 함께 한 시나리오작가 프랭크 뉴전트는 그래서 완성된 영화는 “언제나 포드의 것이었고, 시나리오작가의 것이라 할 수 없다.”고 단언했다. < 순례여행 >은 이야기꾼으로서의 포드의 능력이 위대한 단순성이라는 부를만한 특유의 간결한 터치에 있음을 입증한다. 이 터치의 중심에 한나 제솝이라는 여인, 혹은 그 여인을 연기한 헨리에타 크로스맨의 얼굴이 있다. 이 영화 외엔 영화사가 기억할만한 작품을 남기지 않는 이 배우의 시선과 표정의 쇼트에 포드는 분노와 집착, 불안과 연민, 망설임과 혼란의 긴 이야기를 새겨 넣는다. 태그 갤러거의 표현을 빌리면 이야기가 펼쳐지는 곳은 이 여인의 눈 속이다. 포드는 영화적 풍경의 발명가이지만 배우 연출의 대가이기도 했다. “영화의 비밀은 배우의 눈을 찍는 것”이라는 인상적인 말도 포드의 것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순례여행>은 여인의 표정과 시선의 영화다. #1 #2 #3 #4 < 순례여행 >은 한나의 표정과 시선에서 시작된다. 들판에서 일하는 아들(#1)을 바라보는 그녀의 표정(#2)은 만족스러운 것 같다. 아들과 농장이 그녀의 소유다. 세상과 동떨어진 듯한 이 땅에서 한나는 제왕이다. 아들과 땅의 소유자인 그녀는 동시에 시선의 권력자이다. 그녀는 적어도 여기선 다 볼 수 있다. 농장이 원경으로 보일 때도 지평선은 보이지 않거나 화면의 상단에 드러난다. 게다가 이 농장은 < 선라이즈 >의 마을을 연상시키듯 안개와 옅은 어둠에 갇혀 있다. 이곳은 한나의 시선이 편재하는 그녀의 폐쇄된 왕국이다. 그러나 그 소유와 시선의 권력은 처음부터 금이 가 있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아들은 울타리를 넘어간다. 그는 연인 마리에게 달려가는 중이다(#3). 한나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자신의 소유물인 아들을 앗아갈 대상인 여인을 만나러 가는 것이다. 권력의 위기를, 전 장면과는 다른 불안한 표정의 그녀는 이미 알고 있다(#4). #5 #6 #7 #8 아들 제임스가 연인을 만나는 장면은 아름답다. 제임스는 무언가를 보면서 환한 얼굴로 연못에 돌을 던진다(#5, #6). 연못의 물이 파문으로 너울거리다 파문이 가라앉으면서 마리의 얼굴 윤곽이 수면에 드러나고 카메라는 틸트업으로 마리의 얼굴이 비춘다(#7). 연못을 사이에 둔 수줍은 두 연인의 애틋한 유희. 그런데 더없이 아름답게 촬영된 이 유희에는 어딘지 모를 불안과 비애가 있다. 연못이라는 작은 격리, 장난이자 신호이지만 수면에 비친 연인의 이미지의 훼손을 경유해서 비로소 마리가 등장할 때 마리의 얼굴은 놀랍게도 기쁨이 아니라 알 수 없는 슬픔에 잠겨 있다(#8). 마치 앞으로의 서사에서 펼쳐질 격리와 훼손을 이미 예감하고 있다는 듯. #9 #10 마리의 클로즈업은 이 영화의 가장 훌륭한 장면 가운데 하나다. 이 장면과 비교하기 위해 어머니와 아들이 마주 보고 대화할 때의 숏-리버스 숏을 떠올려 보자. 어머니의 클로즈업과 아들의 클로즈업은 얼굴의 크기가 다르다(#9, #10). 한나의 강조된 클로즈업에는 프레임을 지배하는 모종의 표정이 있다. 하지만 제임스의 평범한 클로즈업에는 단순한 리액션의 표정만 등장하는 것이다. 이것은 두 사람의 권력관계를 뜻하는 데 그치지 않으며, 서사 내에서의 둘의 다른 지위를 반영한다. 이 영화는 아들 제임스의 이야기가 아닌 것이다. #11 #12 마리의 클로즈업(#8)이 인상적인 것은 그 크기와 표정의 강도에서 연인인 제임스의 쇼트를 훨씬 뛰어넘는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마리가 제임스를 바라볼 때, 그녀는 연인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사랑을 가로막고 결국 파국으로 몰고 갈 어머니를 동시에 바라보는 것이다. 그러니까 마리의 클로즈업은 제임스의 클로즈업의 리버스숏이 아니라, 이 프레임에 존재하지 않는 한나의 클로즈업(#4)의 리버스숏이다. 한나의 시선의 편재성이, 그 권력의 강력함과 비정함이, 그리고 자신들의 비극적 운명까지 이 기묘한 클로즈업에 담겨 있다. 포드는 불과 4분 만에 이 모든 상황과 예감을 단 몇 개의 숏만으로 압축한다. 한 남자를 사이에 둔 두 여인의 현실적 대면은 조금 뒤에 이루어진다. 한나는 마리를 찾아와 아들을 떠나라고 강요한다. 이 장면의 숏-리버스숏에서의 두 인물은 정확히 같은 크기와 강도로 담겨있다(#11, #12). < 순례여행 >은 두 여인의 이야기인 것이다. #13 #14 제임스가 프랑스 전장으로 떠나는 기차역에서의 가련한 두 남녀의 마지막 조우 장면(#13)도, 영화의 마지막에 가서야 밝혀지지만, 한나는 보고 있었다. 이 장면과 대조를 이루는 기차역 장면이 얼마 뒤에 등장한다. 제임스가 전장에서 생매장당해 죽은 지 10년이 지난 뒤, 한나는 프랑스로 가기 위해 기차에 오른다. 멀찍이 있던 마리와 아들 지미는 기차로 다가와 창가에 앉은 한나에게 자신과 아들을 위해 제임스의 묘지에 놓아달라며 꽃송이를 내민다(#14). 두 장면을 흥미로운 대조를 이룬다. 모두 최종 목적지가 프랑스이며 주요 인물이 모두 등장하지만, 전자의 제임스는 후자의 꽃으로 대체되었고, 마리의 배 속에 있던 태아는 이제 열 살의 아이가 되었다. 그리고 전자의 장면에서 보이지 않았으나 시선으로 존재했던 한나는, 제임스 대신 기차를 타고 있다. 이 영화에서 단 한 장면을 꼽으라면 바로 이 숏(#14)이다. 이 장면의 요점은 꽃을 받아드는 한나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직전 장면에서 한나는 땅을 20에이커나 더 샀다. 그녀의 왕국은 더욱 커졌고, 그 강대한 왕국에 마리와 아이가 끼어들 여지는 전혀 없다. 미혼모의 자식이라고 놀림받는 아이는 한나를 할머니라고 부르지 못하고 제임스의 개에게 접근하는 것도 허용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장면에서 한나는 마리의 꽃을 받았고, 포드는 그녀의 얼굴을 찍지 않았다. 이 카메라의 시선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한나가 자신의 얼굴을 숨긴 것인가. 아니면 카메라가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없는 각도에서 찍은 것인가. 달리 말하면, 인물이 보지 않는 것인가, 카메라가 보지 않는 것인가. 물리적으로는 후자가 맞지만, 심리적으로는 전자가 맞다. 우리는 사실상 양자를 식별할 수 없다. 포드는 인물을 볼 수 없는 지점에 카메라를 두는 것으로 그 인물을 진정으로 드러낸다. 극 중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은 객관적 시점의 카메라가 무언가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보는 것이 불가능한 자리를 선택함으로써 인물의 태도와 심리를 표현하는 것, 아니 그 인물의 고통을 존중하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인물이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표현해도 다 드러낼 수 없는 인물의 감정을 카메라가 느끼는 것이다. 이것이 포드가 감정의 미스터리를 찍는 방식이다. 이런 장면 앞에서 카메라의 시점에 관한 복잡한 기호학적 논의는 사실상 거의 무용하다. 나는 이런 카메라를 경외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불과 40여 분이 지났을 뿐이지만 여기서 영화가 끝났고 이후는 여담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제 한나는 자신의 죄의식과 고통을 감춘 채 순례여행을 떠날 것이고, 결국 돌아올 것이기 때문이다. 얼굴이 드러나지 않는 이 미스터리의 감정 숏에는 영화 전체에 값하는 긴 이야기가 담겨있고 그 이후에는 웃음이든, 참회의 눈물이든 허용되지 못할 것이 없다. 그 모든 예감이 이 신비로운 숏 안에 모두 담겨 있다. 이것이 앞서 말한 두 가지 난제의 해결하는 포드의 방식이다. #15 별다른 설명이 필요 없는 이후의 프랑스 장면들은 전반부와 대조적이다. 한나의 농장을 감싸던 폐쇄적 안개는 사라지고, 개방된 세상 앞에서 이제 한나는 제왕이 아니라 낯선 순례자가 된다. 자신의 왕국을 노려보던 한나의 시선은 이제 감시의 시선이 아니라 방황과 발견의 시선으로 바뀐다. 시선을 둘 곳을 찾지 못해 두리번거리던 그녀는 아들과 같은 고뇌에 빠진 청년 그리고 자신과 같은 이기적 어머니를 만나고, 자신의 왕국에는 없던 축제를 발견한다. 이젠 자신의 왕국으로 돌아와, 감췄던 자신의 표정을 마리와 아이에게 보여줄 일만 남았다. 아들의 아이와 사실상 처음으로 마주 볼 때(#15), 순례는 끝난 것이다.(계속)
영화란 무엇인가. 아주 오래된 질문이다. 이제는 아무도 이런 질문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한때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손에 들어보았을 앙드레 바-쟁의 책 제목이기도 한 이 질문에는 이제는 어렴풋한 향수마저 깃든 느낌이다. 이런 질문을 할 때에는 보통 영화를 알고 싶다는 욕망이 전제된다.(그냥 폼 잡으려고 책장에 비치해놓은 사람도 적지 않은 모양이긴 하지만) 움직이는 그림과 소리가 만들어내는 이 매체는 재미있게도 ‘시간’에 대해서 마술을 부리며 ‘예술’의 이름을 부여받았다. 단순히 활동사진이라는 이름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기적과 같은 영화들이 나타나면서 오히려 ‘영화란 무엇인가’란 질문의 답은 점점 더 멀어져만 갔다. 진리와도 같았던 이른바 아트 하우스 영화들이 몰락하고 오히려 쓰레기 취급을 받던 블록버스터 영화들이 마술을 부리기 시작하고... 아아 도대체 영화란 무엇이란 말인가! 이런 질문에 온몸으로 부딪힌 사람이 있었다. 그 이름도 거칠거칠한 최야성 감독. 그는 무려 20세에 < 검은 도시 >를 감독하며 (아직도 깨지지 않는) 최연소 감독의 기록을 가지게 된 사람이다. 2014년 현재까지 총 7편의 영화를 감독한 그는 충무로의 아웃사이더였고 영화광들의 조롱거리였으며 본인 스스로는 ‘여자 대신 고정관념을 벗기며’ ‘창작, 독창성으로 세계적 쇼부를 치는’이라 말하는 영화감독이었다.(다 본인의 실제 언급이다.) 그는 인터뷰를 통해 본인만의 영화제작 3대 원칙을 제시했다. 첫째, 남들이 한 것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 둘째, 최소한의 제작비만을 사용한다. 셋째, 가장 사실적인 것이 가장 영화적인 것이다. 라는 것이다. ( < 로켓트는 발사됐다 >의 DVD 서플먼트에 들어간 이 인터뷰에서 3대 원칙 중 2번째 원칙을 설명하며 술값을 아끼려 사무실에서 김치에 병맥주를 마시는 알뜰 넘치는 장면을 보여주기도 했다.) 최야성 감독 3대 영화제작 원칙 < 로켓트는 발사됐다 >는 이 세 가지 원칙을 충실하게 지켜나간 작품이다. 이 영화의 홍보 카피이기도 했던 ‘노 시나리오, 스냅무비’(무슨 뜻인지는 잘 모르겠지만)로 남들이 했던 것을 피해갔고, 모든 배우들을 ‘이게 세계적으로 되는 영화예요. 한 번 도와주세요.’로 잠깐잠깐 우정 출연시켰기에 제작비가 거의 안 들었다. 또한 가장 사실적인 것을 위해 최야성 감독은 이 영화의 스토리라인으로 ‘영화를 찍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감독’인 자신의 이야기를 담았다. 일단 본인의 3원칙은 지킨 셈이다. ‘영화를 찍는 것에 대한 영화’를 생각하면 일단 톰 디칠로의 < 망각의 삶 >이 떠오른다. 스티브 부세미가 분한 독립 영화감독은 촬영장에서 발생하는 온갖 변수와 상상도 할 수 없었던(그러나 일단 발생하니 어쩔 수 없는) 사건들을 겪으며 자신이 그렸던 완성과 점점 멀어져가는 상황을 속 터지게 지켜본다. 그래도, 그런 영화 현장에 대한 사랑과 애정을 버릴 수 없다는 결론으로 훈훈하게 마무리되는, 웃음과 낭만, 그리고 씁쓸함이 교차하는 수작이었다. 그러나 <로켓트는 발사됐다>는 안타깝게도 그런 영화 만들기의 고단함보다는 땡처리 옷 장사의 어려움이 더 리얼하게 그려져 있었으니... 만약 어떤 영화에 대해 이야기 할 때, 상영시간을 비례로 ‘핵심내용’을 말해야 한다는 법 같은 게 있다면 애석하게도 < 로켓트는 발사됐다 >의 내용은 영화를 찍는 것과 별로 상관이 없어진다. 이 영화의 대부분은, 땡장사(‘사장님이 미쳤어요!’류의 문구로 호객하여 떨이로 의류를 판매하는 형태) 옷 장수 최야성 사장이 경영난에 허덕이다가 결국 아르바이트로 위장한 양아치들에게 뒤통수를 맞고 옷을 도둑맞는다는 이야기가 된다. 90분의 상영시간에서 60분이 대충 이런 내용에 유명 배우들의 우정 출연으로 연출된 ‘썰렁 때리는’ 개그들이다. 우리는 시나리오 없이도 충분히 훌륭한 영화가 제작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로켓트는 발사됐다>는 그런 류의 영화가 아니다. 이 영화의 감독이자 제작자이며 주연배우이기도 한 최야성 감독이 당시로선 신선한 시도를 한 것은 그럭저럭 인정해줄 수 있다. 한 가지 그가 착각했던 것은, ‘아무도 안 한 것’이 ‘아무도 생각 못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영화에는 쿠엔틴 타란티노의 이름이 자주 호명된다. 독창성, 신선함의 상징으로 최야성 감독이 닮고 싶어하는 감독인데, 그는 옷가게 구석 소파에 누워 < 저수지의 개들 >을 보며 ‘타란티노를 재끼는’ 영화를 만들겠다며 중얼거린다. 문제는 그 중얼거림이 영화를 만들기 전의 다짐 같은 것이 아니라 관객이 보고 있는 영화의 한 숏 이라는 것이 문제다. 어찌어찌 유명 배우들을 만나 영화출연을 타진하며 ‘세계적으로 쇼부를 보겠다’고 수 없이 다짐을 하지만 그 다짐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그 다짐하는 과정을 봐야만 하는 관객은 그래서?? 어쩌라고?? 뭐 그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다. 영화는 <로켓트는 발사됐다>의 크랭크 인 장면에서 끝난다. “하여튼 영화 하나 찍기 되게 힘드네.” 라고 지나가듯 말하는 그 장면에서 우리는 지금까지 봤던 배우들이 사실 영화의 스태프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내가 본 장면들의 촬영이 이제 시작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끝과 시작이 맞붙어 있는 순환구조. 돌고 도는 인생사. 색즉시공 공즉시색. 감독이 자신만만(사실 그리 자신만만하지도 않다. 영화상 보이는 그의 태도나 말투는 거의 기어들어가다시피 하다. 안쓰러워...) 하게 말한 것 같은 영화가 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28살의 어린 영화감독이 뭔가 다른 것을 하고자 하는 안간힘을 볼 수 있어 재미있다. 카메오 비슷하게 출연하는 중구난방의 배우들. 그 리스트는 다음과 같은데, 최종원 , 김보성 , 현석 , 독고영재 , 허준호 , 박준규 , 조상구 , 박상면 , 가수 정광태 , 개그맨 김용 (이 분은 아예 조연급 분량이다), 시인 원태연 , 영화감독 김기덕 , 김두영 (영화 마니아들의 압도적 지지를 받는 < 주글래살래 >의 바로 그 감독이다.) 등 그야말로 다국적군이라 불릴만한 우정의 무대를 보는 재미가 있다. 어떻게 캡쳐 뜨나 했더니... 감사한 포스터 1997년은 한국 영화 르네상스의 스타트 같은 해였다. 이창동 감독의 < 초록물고기 >, 김성수 감독의 < 비트 >, 송능한 감독의 < 넘버 3 >가 차례로 개봉했고 장윤현 감독의 < 접속 >, 임권택 의 < 창 >, 배용균 감독의 < 검으나 땅에, 희나 백성 > 역시 이해에 개봉했다. (흥행은 못했지만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박찬욱 감독의 < 3인조 >도 같은 해 공개되었다.) 이런 좋은 작품들이 쏟아질 때, < 로켓트는 발사됐다 >는 개봉관을 한 곳도 잡지 못하고 3주간의 무료 상영을 했다. 다시 언급되어야 할 가치가 있다거나 당시 평가받지 못한 좋은 점이 있다고 말하긴 어렵지만, 영화가 이상이며 꿈이었던 시절의 향수가 남아있는 작품 같아 길티 플레져 비슷한 호감이 생긴다. 신선한 시도와 트래쉬 무비 사이 어디쯤에 어정쩡하게 서 있는 이 영화를 뭐라고 평가하든 별로 중요한 일은 아닐 것이다. why not? 아님 말구! 감독 최야성 은 <로켓트는 발사됐다> 이후 2편의 영화를 더 제작, 감독하고 현재는 MC야성 이라는 이름의 가수로, 3건의 특허를 등록한 발명가로, 중견화가 조범제 화백의 매니저로... 하여간 바쁜 삶을 살고 계신다. 과연 도전의 귀재라 불리는 사내답다. 최야성 독고영재 김보성 감독: 최야성 각본: 최야성 개봉극장: 시네마천국(서울) 관람인원: 693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