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치
- 감독
- 강물결
- 제작년도
- 2018
- 출연
- 노서울, 김민아, 박형범, 이진혁, 조한나, 김도형
김소형 감독의 < 우리의 낮과 밤 >은 연인 관계인 지영과 우철이 공유하는 시공간에 대한 묘사를 통해서 두 사람의 사랑에 관해 이야기한다. 지영과 우철은 한 공간에 살면서 동거 생활을 이어가고 있지만 두 사람이 평일에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은 오전 7~8시가 유일하다. 지영은 주간에 피부마사지 숍에서 그리고 우철은 야간에 제빵소에서 일하고 있기에 사실상 두 사람이 같은 시공간을 공유하기는 힘들다. 영화는 지영과 우철의 관계가 일시적으로 어긋났다가 다시 회복되는 과정을 그리기 위해 두 사람이 일상적으로 공유하는 공간, 시간, 시선의 변화를 섬세하게 다룬다. 이 작품의 이야기를 전개하는 동력원은 지영과 우철이 맺은 어떤 약속이다. 오프닝은 잠에서 깬 지영이 막 퇴근한 우철과 함께 아침 식사를 하는 중에 담소를 나누는 모습을 다루고 있다. 그 일상적인 대화는 두 사람이 다가오는 주말에 어느 바닷가로 여행을 떠날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영화가 제시하는 일련의 정보를 통해 지영과 우철이 노동과 휴식이 단조롭게 반복되는 일상의 고리를 끊기 위해 혹은 사랑하는 사람과의 오붓한 시간을 보내기 위해 그 여행을 위해 계획했을 것으로 짐작해 볼 수 있다. 만약 두 사람이 연인과 공유할 수 있는 시간에 있어서 결핍을 느끼고 있었다면, 두 사람의 욕망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약속된 시공간을 공유하는 것이었을 지도 모른다. 플라톤의 『향연』의 한 구절을 참고하자면, 사랑은 지금 시간에 대한 욕망뿐만이 아니라 앞으로의 시간에 대한 욕망도 포함한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사람은 지금 곁에 있는 것들이 나중에도 곁에 있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우리의 낮과 밤>은 지영과 우철의 관계를 본격적으로 다루기에 앞서 그들 각자의 삶이 주변 환경에 영향을 받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영화의 전반부에는 지영과 우철이 각기 다른 공간에서 일하는 모습이 등장한다. 지영은 자신에게 피부마사지를 받으러 온 손님들을 응대하는 과정에서 감정 노동을 하며, 우철은 불안정한 노동 시간과 위험한 작업 환경으로 인해서 여러 고충을 겪는다. 영화는 두 사람의 현재에 드리워진 그늘을 자연적인 환경과 인공적인 환경의 대립을 통해 그린다. 지영의 경우 주간에 일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출근 시간대를 제외하고는 빛을 보지 못한다. 그가 일하는 피부마사지 숍은 암막 커튼으로 외부의 빛과 시선을 차단한다. 우철의 경우 어두컴컴한 야간에 일하고 있음에도 항시 인공적인 빛에 노출되어 있다. 그가 일하는 제빵소는 형광등으로 작업장 전체를 밝게 비추어 노동자들이 시간에 대한 감각을 잊어버리게 만든다. 지영이 자연적인 빛을 가로막은 인공적인 어둠 속에 있는 것에 반해 우철은 자연적인 어둠을 물리친 인공적인 빛 속에 있다. 비록 세부적인 조건의 차이는 있지만 두 사람 모두 자연적인 빛으로부터 소외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처럼 불안정한 노동과 삶은 지영과 우철 사이에 맺어진 여러 약속에도 영향을 미친다. 영화 초반에 이야기의 동력원으로 작동했던 지영과 우철의 약속은 이내 두 사람이 겪는 갈등의 원인으로 바뀐다. 영화는 크게 두 단계로 나누어서 지영과 우철의 약속이 지연되거나 이행되지 않는 과정을 보여준다. 우선, 우철이 지영과 여행을 가기 위해 직장에 신청한 희망 휴가가 무산되는 이야기가 먼저 등장한다. 우철의 매니저는 직원 중 한 명이 작업 중 부상을 당했다는 이유를 들어 우철에게 휴가를 반납하고 주말에도 근무할 것을 권고한다. 이어서 우철이 지영에게 여행을 갈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하는 과정에서 두 사람 사이에서 작은 언쟁이 발생한다. 전자는 사회적 계약으로 맺어진 관계에서 발생하는 약속의 불이행이며, 후자는 사적으로 맺어진 연인과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약속의 불이행이다. 두 경우 모두 미래를 향해 앞으로 나아가려는 힘과 그 약속과 관련된 시간성을 마치 애초에 없었던 일인 것처럼 되돌리려는 힘 사이에서 발생하는 충돌로 볼 수 있다. 그 결과 지영과 우철의 시선이 엇갈리는 상황이 벌어진다. 과거 같은 대상을 바라보거나 서로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던 지영과 우철의 시선은 갈 곳을 잃고 표류한다. 지영은 우철을 기다리면서 그가 없는 곳을 멍하니 바라보고, 우철은 지영이 출근하는 모습을 먼발치에서 바라보면서 그런 자기 자신의 모습을 자책한다. 이 일련의 위기와 갈등은 약속을 이행하기 위한 의지와 그것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일련의 몸짓을 통해서 봉합된다. 영화는 지영과 우철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어떤 특별한 사건을 삽입하거나 등장인물들의 수사적인 대사를 활용하는 대신 지영과 우철이 예전처럼 서로의 일상을 공유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오프닝과 대구를 이루는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우철이 퇴근하는 모습, 지영이 우철을 위해 아침 식사를 준비하는 모습, 그리고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앉아 밥을 먹으면서 대화하는 모습으로 이루어져 있다. 오프닝을 일부 변주한 이 영화의 엔딩은 지영과 우철이 과거에도 그러했듯이 지금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예를 들어, 우철이 퇴근하여 집으로 걸어가는 장면에서 우철을 제외한 모든 군중이 동질적인 방향성을 갖는 것과 달리 오직 우철만은 그 균질화된 흐름으로부터 이탈하는 이질적인 방향성을 갖는다. 우철의 몸짓은 군중의 기계적이고 일상적인 동작과 비교했을 때 부자연스럽다. 우철의 그러한 몸짓이 그가 지영과 암묵적으로 약속했던 오전 7~8시 사이의 만남을 위한 것으로 본다면, 그것은 일상의 굴레에서 벗어나 사랑에서 안식과 해방을 찾는 행위라고 볼 수 있다. 영화와 사랑은 몸짓을 수사적으로 활용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영화는 하나의 이미지에 어떤 의미를 고착시키기 이전에 무언극에 가깝다고 할 수 있는 원초적인 몸짓을 통해 특정 감정, 정서, 정동을 일으킨다. 사랑 또한 어떤 것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 목적이 되는 몸짓을 통해서 오직 두 사람 사이에서 공유될 수 있는 특별한 무언가를 창출한다. 사랑과 영화의 특이점은 마법 같은 순간을 만들어내는 몸짓, 움직임, 행위가 있을 때 발생한다. 영화가 정지된 대상을 움직이게 하여 어떤 세계를 발생시키듯이 사랑은 오직 두 사람 사이에서 공유될 수 있는 약속의 시간, 공간, 시선을 드러내어 하나의 유일무이한 세계를 구축한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낮과 밤>에서 엔딩 크레디트와 함께 등장하는 지영과 우철이 바닷가에서 함께 춤을 추는 장면은 판타지에 가까워 보이는 그래서 더 영화적으로 보이는 그런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극 중에서 지영과 우철이 바닷가에 갔는지를 확인할 방법은 없다. 중요한 것은 관객인 우리가 그 엔딩 크레디트에 등장하는 장면을 통해 지영과 우철이 여전히 서로를 사랑하고 있다는 믿음을 가질 수 있다는 점에 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사랑에 대한 믿음을 확인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 관객인 우리는 영화가 그리는 세계에 대한 믿음을 확인하고 싶은 습성을 갖고 있다. <우리의 낮과 밤>의 독특한 매력은 이 작품이 단순히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기보다는 사랑에 관한 믿음을 설득력 있게 그려낸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관련글) 1. 우리는 달팽이의 시간 속에 살고 있다 - <달팽이>(2020), 2022.04.21. 2. 나와 유령이 함께 하는 시간 - <탈날탈>(2018), 2022.05.31. 3. 타인의 그림자를 집어삼키는 법 - <햄스터 죽이기>(2021), 2022.06.29. 4. 얼굴 없는 영화, 등으로 말하는 영화 - <말투>(2020), 2022.07.27. 5. 사랑의 약속으로 하나가 되는 세계 - <우리의 낮과 밤>(2020), 2022.08.25. 6. 이 몸체의 주인을 찾습니다 - <매미>(2021), 2022.09.23. 7. 이것은 감자인가 아니면 고구마인가? - <감자>(2018), 2022.11.08. 8. 일상을 적시는 시간들 - <햇볕을 볼 시간>(2022), 2022.11.21. 9. 찢김의 고통을 극복할 날을 기다리며 - <자르고 붙이기>(2022), 2022.12.06.
결백과 고통, 소외에 대한 세계관에 근거한 이창동의 인본주의적 이야기들은 그를 현대 한국영화의 대표 작가로 추인하였다. 스타일과 주제의 선택은 자연주의에 의해 주도되었던 초기작들을 넘어 작품을 거듭할수록 다의적 메타포로 확장하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이창동의 영화는 개발과 번영, 선진화라는 국가적 목표 아래 한국 사회가 우리들의 시야 바깥으로 밀어내었던, 보이지 않거나 말하지 않은 것에 초점을 둔 이야기들이다. < 버닝 >(2018)은 사회적 공간에서 발생하는 개인의 분열에 관한 형이상학적 스릴러이다. 지극히 평범한 디테일까지 의례적으로 보여주는 성향 때문에 이 영화에는 정확한 의미와 유효성을 확인할 수 없는 모든 종류의 정보가 흩어져 있다. 이창동은 하나 이상의 해석에 적합하도록 체계적으로 계산된 세부 디자인으로 복잡함을 가장(假將)하는 플롯을 제시한다. 스토리의 정합성을 부정하는 영화는 기만적인 방식으로 주제를 함축한 긴 롱테이크 쇼트로 시작한다. 미세하게 흔들리는 핸드헬드 카메라로 촬영한 쇼트의 프레임을 트럭의 문이 3/4 정도 가리고 있다. 단순한 구도를 지속함으로써 관객들에게는 프레임 안의 디테일을 관찰할 시간이 주어지며, 그중 어떤 것이 앞으로 이야기의 중심을 이루게 될 것인지를 추측하도록 요구한다. 잠시 후 문의 뒤에서 흰 연기가 뿜어져 나오고, 곧이어 연기의 기원인 담배를 든 손이 보이고, 마지막으로 한 청년이 얼굴로부터 프레임 안으로 진입한다. 종수(유아인)이다. 의미 맥락을 추정하기 힘든 이 이미지는 하나의 지시이며 플롯을 추진하는 모터이다. 종수가 몰고 다니는 트럭의 문은 프레임을 가려 보이지 않는 영역을 조성하고 이 비(非) 가시성은 최초의 미스터리가 된다. 뒤이어 나타나는 종수는 온전한 얼굴을 보여주지 않은 채 등을 보이고 서서 트럭 문을 열고 옷더미를 어깨에 올려 인파들이 가득한 거리를 걷는다. 카메라는 여전히 종수의 뒤를 따라가지만 그의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번잡한 거리를 지나 종수는 ‘90% 폐업 세일’을 하는 옷 가게 앞에서 요란한 춤을 추면서 호객을 하는 두 명의 나레이터 모델을 스쳐 안으로 들어간다. 종수의 뒤를 따라 온 카메라가 먼 발치에서부터 그녀들을 보여주고 있었지만 종수의 시선에 동조된 관객들에게는 그들의 존재가 들어오지 않는다. 거리가 가까워졌을 때 왼쪽에 있는 여자는 종수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그가 간 길을 따라 시선을 옮긴다. 카메라는 종수의 뒤를 따르기를 멈추고 안으로 들어간 종수의 동태를 살피는 여자의 전신에 고정된다. 나중에 밝혀지기로 그녀는 종수의 초등학교 동창 해미(전종서)이다. 첫 대면에서 해미는 종수를 알아보지만, 종수는 알아보지 못한다. 즉, 해미는 보지만 종수는 보지 못한다. 해미가 종수를 단번에 알아봄에도 불구하고 카메라의 구도는 해미를 시선의 주체가 아닌 대상으로 다룬다. 이 롱테이크는 종수의 움직임을 면밀히 추적함으로써 관객들이 종수의 동조자가 될 수 있도록 부추긴다. 해미가 종수를 보는 행동과 해미를 객관화하는 영화적 계획 사이의 불일치는 보는 자와 보여지는 대상 사이에 발생할 수 있는 어긋남이라는 테마와 연결된다. 카메라가 그녀를 보이지 않도록 만드는 것은 사회적 정체성이 결여된 타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눈이 타자의 존재를 이해하는데 실패하거나 거부하는 신호체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여하튼 2분여에 달하는 오프닝 롱테이크 쇼트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시선의 권력과 그 대상, 드러난 것과 잠재된 것 사이의 관계를 서사화하는 플롯의 쟁점을 압축하면서 피어오르는 담배 연기를 통해 ‘태우다’라는 모티프를 시각적으로 제시한다. 해미와의 몽상적인 재회 이후 종수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깨닫지 못한 채 침대 위에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종수는 영화의 모든 장면에 등장하기 때문에 관객들이 보는 대다수 장면은 그의 시점을 통해 걸러진다. 그가 보는 것을 우리도 보고 그가 보지 못하는 것은 보지 못한다. 해미의 방에 비치는 햇빛에 종수의 시선이 옮겨갈 때 카메라는 그 빛에 초점을 맞춘다. 불안한 꿈 장면에서 화염의 환영이 종수를 방문했을 때 관객들에게도 위협이 전해진다. 해미와의 에로틱한 만남의 잔상이 사라지지 않은 상태에서 해미는 아프리카 여행을 떠나고 종수는 그녀의 보이지 않는 고양이 ‘보일’을 돌보기로 한다. 이렇듯 <버닝>은 해미의 고양이에서 종수의 아버지에 이르기까지 모든 세부 사항들이 플롯의 진행에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이야기이다. 복잡한 스토리텔링 영화들처럼 식별된 주제와 내러티브 구성 요소는 서로 대립하기보다는 보완하는 관계로 보인다. 여행을 마치고 해미와 동행한 부유한 남자 벤(스티븐 연)이 나타난 이후부터 많은 것들이 보이지 않는 문 뒤에 가려진다. 해미의 실종은 가장 큰 미스터리이며 종수를 미로로 몰아가는 필사적인 탐사 시퀀스에 들어서면서부터 해미 뿐 아니라 고양이와 우물, 두절된 전화 통화, 인적이 끊긴 비닐하우스 따위의 가려진 존재들이 연쇄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다. 벤의 방화는 물질에서 비(非) 물질로, 존재에서 비 존재로 상태를 전환시키는 행위이다. 오프닝 신의 담배처럼 벤의 방화는 존재하지만 연기와 함께 사라져버리는 사물들을 창조한다. 6분여의 기나긴 롱테이크로 구성된 결말부는 오프닝 쇼트와 공명한다. 여기서 종수는 ‘노는 일’을 한다며 자신의 직업에 대한 소개마저도 메타포로 대체하는 벤을 살해하고, 태워버린다. 이 장면에서 성공적으로 재현되는 초현실주의적인 기운은 화염에 그을리는 벤과 포르셰에 대한 단정적인 해석을 유보한다. 사건이 진행되는 공간을 반으로 갈라 벤의 영역과 종수의 영역을 마주 보게 하면서 카메라의 위치를 이동하는 신 안에서 현실과 비현실의 이음매를 확신시켜줌으로써 이창동은 종수가 벤을 태우는 한계 공간을 만든다. ‘태우기’의 양가적인 의미는 롱테이크를 통해 완성된다. 간단히 요약하면 <버닝>은 담배를 태우던 종수가 벤을 태우면서 끝이 나는 이야기인 셈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이분법적인 시선, 세계관을 초점으로 한 이 이야기에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리얼리티와 메타포, 종수와 벤으로 구체화된 이분법은 우리들이 살아가는 세계의 표면과 심층에 항상 놓여 있다. 따라서 트럭 문 뒤에서 종수가 담배를 태우며 나타나는 것은 사회, 경제, 정치적 장막에 의해 가려진 채 보이지 않는 것들의 존재를 중심에 두고자 하는 윤리적인 주제를 암시한다. 플롯의 끝에 종수는 눈에 보이는 허상을 살해하고 태워버림으로써 메타포 뒤에 가려진 현실을 보기로 한다. 과연, 그때부터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버닝>은 스토리텔링의 두 가지 양식, 예술적 형상화 방식의 두 극단에 관한 이야기라고 할 수도 있다. 이는 종수가 소설을 쓰게 되는 동기와 과정, 결과로 나타난다. 벤을 살해하고 태우는 장면으로 이행하기 전에 이창동은 종수가 해미의 원룸 창가에서 글을 쓰고 있는 신을 배치한다. 카메라는 창문에서 뒤로 물러나 해미의 방과 서울 도심의 풍경을 프레임의 좌우에 나란히 놓는데, 이는 영화의 전반부에 등장하는 남산 타워에서 바라본 시점을 재현하는 것처럼 보인다. 엔딩 시퀀스는 존재의 확실성에 대한 영화의 질문을 완성하고, 유능한 이야기꾼은 진실이 거기 없다는 것을 망각하도록 만드는 이야기를 상상한다. 따라서 수많은 해석을 낳을 수 있는 영화의 엔딩 시퀀스는 일종의 미장 아빔(액자 속 이야기)으로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새 여자친구의 얼굴을 치장하는 벤을 보여주는 신은 유일하게 종수의 관점에서 벗어나는 장면이고 벤을 살해하는 마지막 신에서는 오프닝 직후 관객의 눈을 대신해왔던 종수가 벤의 시선의 대상이 된다는 점에서 뚜렷한 차이를 보여준다. 진짜 작가가 되어가는 종수의 글쓰기가 비로소 시작되었다. (관련글) 1. 2000년 1월 1일 0시, 거꾸로 가는 기차 - <박하사탕>(1999), 2021.04.16. 2. 넥타이로 총을 겨누었을 때 - <올드보이>(2003), 2021.05.14. 3. 요리사는 어디로 가는가? - <오!수정>(2000), 2021.06.04. 4. 고반장은 이렇게 말했다 - <논픽션 다이어리>(2013), 2021.07.09. 5. 머리를 자르고 새 옷을 입는다고 해서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 <무산일기>(2010), 2021.08.10. 6. 엄마의 침통은 죄를 기억한다 - <마더>(2009), 2021.09.03. 7. 수인동성동형론(獸人同性同形論)에 따르면 -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2003), 2021.10.15. 8. 유능한 이야기꾼은 진실이 거기 없다는 것을 잊도록 하는 이야기를 지어낸다 - <버닝>(2018), 2021.11.12. 9. 죽음의 한 연구(硏究) - <파산의 기술>(2006), 2021.12.10. 10. 사마귀가 사마귀를 먹다 - <춘천, 춘천>(2016), 2022.01.07. 11. 다시 태어난다면 다시 사랑한다면 그때는 우리 이러지 말아요 - <극장전>(2005), 2022.03.08. 12. 철없는 엄마와 파란만장한 남자들, 그리고 엔카 가수 - <그때 그사람들>(2004), 2022.04.06. 13. 도무지 집중이 안 되는 이야기 - <형사 Duelist>(2005), 2022.05.24. 14. 철의 신이 수장(水葬)시킨 고래의 추억 - <철의 꿈>(2013), 2022.06.16. 15. 골목길을 저절로 움직이는 자전거 - <풍경>(2013), 2022.07.14. 16. 일자로 아뢰리다 - <춘향뎐>(2000), 2022.08.11. 17. 연결연결, 믿음의 벨트 - <기생충>(2019), 2022.09.08. 18. 아마도 악마가 - <곡성>(2016), 2022.10.20. 19. 말도 안돼 기분 나쁜 그 제목은 나쁜 영화 - <나쁜 영화>(1997), 2022.11.25. 20. 황야의 울부짖는 개 - <복수는 나의 것>(2002), 2022.12.14. 21. 숟가락을 구부리는 것은 의미가 없어 보일 수 있죠. 하지만 그러한 힘을 가지고 이 세계에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게 중요한 겁니다 - <88/18>(2018), 2023.01.04. 22. 완전하고, 만족스러운 진실은 없다 - <파수꾼>(2010), 2023.03.03. 23. 이미지의 확실성과 증거력에 대한 회의 - <김군>(2018), 2023.04.05. 24. 범죄의 요소 - <괴물>(2006), 2023.05.17. 25. 투명인간이 되는 법 - <빈집>(2004), 2023.07.05. 26. 어차피 우리는 유령이 될 거예요 - <후쿠오카>(2019), 2023.08.30. 27. 생라면, 참치 통조림, 라이터, 휴지, 그리고 사시미칼 - <넘버3>(1997), 2023.10.05. 28. 풍등(風燈)은 날아가고 - <해피엔드>(1999), 2023.10.18. 29. 504호, 고아, 사라진 애, 시체... 이제 마지막 남은 얘기 하나 - <소름>(2001), 2023.11.07. 30. 열여덟, 바람의 색깔 - <회오리 바람>(2009), 2023.11.20. 31. 가면고(假面考) - <반칙왕>(2000), 2023.12.11. 32. 문은 두 방향으로 나 있다 - <두 개의 문>(2012), 2023.12.28. 33. 지옥의 복도 - <아수라>(2016), 2024.01.08. 34. 삼(3)의 몰락 - <성적표의 김민영>(2021), 2024.02.05.
전세계의 노동자여, ‘감각’으로 단결하라 간결한 묘비명, Bruce Lee 1940-1973. 번쩍 번개가 화면을 가로지른다. 죽은 브루스 리=이소룡이 무덤에서 뛰어오른다. 그 위로 프레임을 가득 채우며 뜨는 사각의 타이틀. 브루스 리, 무덤에서 돌아오다(Bruce Lee Fights Back from the Grave). 묘비 앞의 브루스 리가 죽음의 천사를 향해 그 특유의 포즈로 주먹을 불끈 들어보이고 있다(왜인지 모르겠지만 죽음의 천사 발치에는 반라의 여성이 놓여있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더 이상 묻지 말도록 하자). 어쨌건 이쯤에서 우리의 기대치는 구체적 형태를 띠게 된다. 무덤에서 돌아온 브루스 리가 죽음의 천사와 맞서 싸울 것이다! 빠르고 강력한 비트 사운드가 계속되는 가운데 거대한 비행기가 화면 중앙을 가득 채우며 날아간다. LA 공항, 선글라스를 낀 젊은 남자가 공항을 나선다. 그는 누구인가? 브루스 K. L. 레아(Bruce K. L. Lea). 그야말로 죽음으로부터 돌아온 브루스인가? 비록 브루스 리가 아닌 브루스 레아지만…. 아마도 당신이 이런 영화들에 익숙하다면 수다한 ‘브루스’들에 대해 잠시 숙고해볼지도 모르겠다. 이를테면 Bruce Li(何宗道), Bruce Le(呂小龍), Bruce Leung(梁小龍), Bruce Lei(혹은 Dragon Lee, 巨龍), Bruce Lai(張一道), Bruce Thai(張正義) 등. 브루스 K. L. 레아, 당신은 누구인가? 그런데 이제부터 시작되는 이야기는 저 강렬한(!) 오프닝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브루스 리, 무덤에서 돌아오다>의 본편이라 할만한 것을 채우는 것은 이두용의 < 아메리카 방문객 >이다. 1976년 ‘최초의 태권 미국 올로케 감행작품’으로 합동영화사에서 제작한 이 영화는 그러나 영어 더빙을 통해 전혀 다른 이야기로 탈바꿈되어 있다. 형의 복수를 위해 라스베이가스에 온 한국인 ‘한욱’(정준)의 이야기(그러니까 저 브루스 K. L. 레아는 정준이다)는 친구이자 스승인 위대한 무도인의 죽음을 파헤치는 홍콩인 웡핸의 이야기로 바뀐다. 물론 인종적 구도는, 당연한 말이지만, 계속해서 살아남는다. 아시안 남성은 왜인지 알 수 없지만 젊은 백인 여성의 흠모를 받는다. 젊은 백인 여성은 아시안 남성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고, 아시안 남성은 백인, 흑인, 멕시칸으로 구성된 악당들을 처치한다. 그럼에도...나는 지금 ‘본편이라 할만한 것’이라고 애써 모호하게 말하고 있는 중이다. <브루스 리, 무덤에서 돌아오다>가 실은 <아메리카 방문객>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씬을 추가하고 전혀 새로운 사운드를 입히고 더빙을 한 자들의 노고는 어떻게 자리매김되어야 하는 것일까? 참고로 홍콩의 양츠 프로덕션(Yangzte Production)이 제작사로 명기되어 있는 <브루스 리, 무덤에서 돌아오다>의 예고편을 참조컨대 이 영화는 1978년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브루스 리의 죽음 이후 5년, 그가 무덤에서 돌아온다!” 이소룡은 알다시피 1973년에 죽었다). 또 <브루스 리, 무덤에서 돌아오다>의 몇몇 언어 버전은 감독 Umberto Lenzi로 명기되어 있기도 한데, 움베르토 렌치가 한때 유럽 B급 영화시장을 석권했던 이탈리아 지알로 영화의 대표적 이름이었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이 바꿔치기는 이런 영화들이 전세계의 어떤 시장에 소구하는 것이었는지를 명료하게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으리라. <아메리카 방문객>-<브루스 리, 무덤에서 돌아오다>와 같은 사례, 편집 버전에 따라 이름이 교체되거나 씬의 추가와 더빙을 거쳐 지역에 따라 다른 이야기로 변환되는 사례는 소위 브루스플로이테이션이라고 이름붙여진 영화들의 세계에서 심심치 않게 발견된다. 이 영화들은 도작과 도용, 자르기와 이어붙이기 1) 로 악명 높다. 사실 이소룡의 유작이라고 선전된 < 사망유희 > 조차 그가 살아 생전 찍었던 단 10퍼센트의 필름 푸티지와 그의 대역들(이미 소개했다시피 그중 한명은 당룡이라는 예명으로 알려진 한국 출신의 김태정이다)을 써서 찍은 필름들, 그리고 여타 영화 필름의 짜깁기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도작과 도용이라는 관점으로 원본과 아류의 위계를 정한다는 것은 이미 무리가 있는 이야기인지 모르겠다. 이 세계는 가능한 적은 비용으로 더 많은 이윤을 얻고 싶어하는 장사치들의 세계다. 몇 가지의 예들. Joseph Velasco라는 이름이 디렉터로 명기된 <My Name Called Bruce>는 한국영화 <왕도>로 확인되며, 감독은 이혁수이다. Joseph Velasco에 대해 한마디 덧붙이자면 이 이름은 아마도 이런 류의 영화들에서 가장 빈번히 마주치는 이름 중 하나일 터인데, Joseph Velaco 또는 Joseph Cong이라고도 불리는 이 다작의 ‘작가’는 1년에 평균 3편에서 4편을 만들고, 자신의 영화 거의 대부분의 시나리오를 썼으며, 틈틈이 프로듀서로도 활동하였다. 또 유행에도 대단히 민감하여 ‘Bruce’가 들어가는 제목의 영화들을 1970년대 내내 찍다가 70년대 후반 소림사(Shaolin) 영화들이 붐을 일으키자 브루스와 소림사를 섞고(<Bruce Shaolin Bronzemen>), 성룡의 <취권 Drunken Master>(1978)이 흥행에서 성공한 이후에는 곧바로 <Drunken of Fire>라는 제목으로 거룡(브루스 레이)의 술 취한 권법을 선보인 바 있다. 홍콩영화 데이타베이스(HKMDB)와 인터넷 무비 데이터베이스(IMDB)에 따르면 Joseph Velasco는 대만 출신의 강홍(江洪)이다. 그렇다면 Joseph Velasco의 영화들은 이 이름의 ‘본명’인 강홍의 작품인가? 이미 눈치챘겠지만, Joseph Velasco라는 이름으로 만들어진 많은 영화들은 도작이거나 도용이거나 짜깁기이다. 마찬가지로 Joseph Velasco의 또 한편의 영화 <Ninjas VS Bruce Le aka Condor Of Bruce Lee>의 첫 화면은 Ocean Shores라는 회사가 카피라이트를 가지고 있음을 명시한다. 그런데 1986년을 제작년도로 명기하고 있는 이 영화는 <My Name Called Bruce>(1978)와 <Return of Bruce aka Dragon Returns>(1977), <Enter the Game of Death aka Bruce the King of Kung Fu>(1978) 등 최소한 세 편 이상의 영화를 이어 붙여 만든 것이다. 한국에 마약수사를 하러 온 홍콩 수사관은 영화의 1/3 지점에서 뜬금없이 인신매매 조직을 소탕하기 위해 필리핀으로 ‘순간 이동’을 하는데, 일련의 대결씬을 끝내고 ‘홀연히’ 한국으로 돌아온다. <Enter The Game Of Death>의 영어 버전에서 감독은 James Nam으로 명기되어 있다. James Nam은 1960년대 후반부터 쇼브라더스에서 활동했으며, 1970년대 이런 영화들의 감독이자 배우로 나왔던 남석훈(또는 Nam Gung-Fan)에게 자주 쓰이던 예명이다. 이 영화는 한국에서 전혀 다른 편집 버전의 한국영화 < 십자수권 >으로 개봉되었다. <십자수권>의 크레딧에 명기된 감독 이름은 최원형이다. 남석훈의 또 다른 영화 < 속정무문 >은 <Bruce And Shaolin Kung Fu>라는 제목의 다른 편집 버전으로 옮겨졌을 때, Joseph Velasco의 이름으로 변경되었다. 그런데 이 영화는 또 <Bruce and Shaolin Kung Fu 2>와 관련있다. 한국에서는 < 신정무문 >이라는 제목의 한국영화로 개봉했고, 남기남이 감독한 것으로 되어 있는 <Bruce and Shaolin Kung Fu 2>는 버전에 따라 James Nam과 Alberto Golango라는 서로 다른 이름이 감독으로 명기되어 있다. 너무 번다하다고? 그럴지도. 이런 영화들의 세계 안에 들어서면 이런 일은 비일비재해서 무엇이 오리지날이고 무엇이 도작과 도용인지를 밝혀내는 것이야말로 참으로 무망해 보인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전지구적 시장에서 유통되는 상품의 경로에 올라선 순간(이를테면 <아메리카 방문객>의 경우) 이 영화들에는 감독, 배우, 제작자 등의 특정 이름들이, 한 편의 영화를 규정짓는 최저치의 조건이라 할 수 있을 닫힌 체계로서의 작품(work)이라는 개념이 차례로 사라진다. 요컨대 이 영화들은 국적뿐만 아니라 제작 주체마저 불분명해진 채 시장을 떠도는데, 어떤 영화는 이미 존재하는 복수의 영화들의 재편집으로 만들어졌으며 그 위에 각각의 지역의 유통업자들은 각자 자신들이 (더 정확히는 자신의 관객들이) 선호하는 언어로 더빙해서 판매했다. 그렇다면 이런 영화들을 한국영화사라는 맥락으로 복원시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아니, 과연 그것이 가능하기나 한 걸까?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해보자. 여기서는 내셔날 시네마가, 내셔날 시네마를 이루어내는 감독, 배우, 제작자 등의 특정 이름들이, 한 편의 영화를 규정짓는 최저치의 조건이라 할 수 있을 닫힌 체계로서의 작품(work)이라는 개념이 차례로 사라진다. 만약 근대예술이 소유권(나아가 지적재산권)과 개인의 확립, 이를 뒷받침하는 근대 국민국가의 성립 위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면 이 영화-상품들로 저 세 가지 개념들이 사라질 때 보이는 것은 무엇인가? 이 영화상품들은 1970년대 이소룡의 사후 아시아 각 지역에서 양산되었으며 1980년대 이후 비디오 시장에서 가장 싼 염가의 상품으로 전지구적으로 공급, 유통되었다. 그 속에서 한국, 홍콩, 대만, 필리핀 기타등등 여타의 장소들에서 만들어진 영화들은 ‘아시안’이라는 기표로 수렴되었으며, ‘아시안 마샬아츠 필름’으로 명명되었다. 이 영화들이 국적과 만든 자들, 완결된 체계로서의 작품이라는 개념에 그토록 무심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 영화들을 보는 자들이 여기에 대해 거의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영화들은 계급적으로, 젠더적으로, 세대적으로 명확하게 분할된 장소들, 도시 변두리의 재개봉관, 소극장, 그라인드 하우스에서 가장 지속적으로 소구되었다. 이 장소들을 채운 것은 한국, 홍콩, 대만, 필리핀 등지에서 값싸게 만들어진 영화들이었다. 1970년대 이 지역에서 만들어진 염가의 상품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싼값에 도시 하위계층 젊은 남성들에게 소구되었다. 아마도 이 지점이야말로 이 거대한 쓰레기 더미와 같은 영화들이 더없이 흥미로워지는 순간일 것이다. 저 영화들은 이 지역의 영화가 거의 최초로 ‘글로벌’하게 소비된 사례이다. 할리우드가 생산하는 고급 생산품들의 반대편에 놓인 가장 싼 상품으로서. 싼 값에 더 많은 이윤을 얻고자 하는 자본가들에 의해 잘라지고 이어붙여지는 것을 대가로. 전세계의 하위계층 남성들에 의해 주도되는 이 플랫한 소비 속에서 이 영화들은 상품의 형태를 얻은 순간 비로소 세계성의 획득에 성공하였다. 이것은 매우 아이러니한 순간이다. 왜냐하면 전세계 노동자들의 (무의식적인) ‘감각적’ 단결과 전세계 자본의 순환이 함께 거기에 작용했기 때문이다. 이 한국 상품은, 다른 아시아의 상품들처럼 저임금 노동의 값싼 상품이라는 점에서 ‘경쟁력’을 지녔다. *** 1) 아시안 마샬 아츠 필름의 팬사이트인 Kung Fu Fandom의 한 팬은 이런 류의 영화들에 대한 사랑을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나는 그들의 ‘자르고 이어붙인(cut and paste)’ 영화들을 정말로 사랑해요” http://www.shaolinchamber36.com/kungfufandom/index.php?/topic/2543-my-man-godfrey-ho-the-ifd-appreciation-thread/&tab=comments#comment-21806 (관련글) 1. 비행기의 시선, 무정한 시선 - 2021.04.30. 2. 액션영화의 한 기원, 안중근과 무협 - 2021.05.3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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