밝은 방
- 감독
- 신진규
- 제작년도
- 2020
- 출연
- 김도훈
작년 여름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진행된 ‘해외 영화학자 초청 대중 특강’의 내용을 강연자의 시점에서 정리합니다. 영화와의 첫 만남과 학계 입문 과정에 얽힌 소소한 에피소드부터, 세계 속 한국영화의 위치, 최근 몰두하고 있는 연구 주제에 대한 학술적 분석까지. 한국영화를 향한 해외 영화학자 6인의 개성과 열정으로 꽉 채워졌던 2시간을 KOFA가 직접 기록한 특강노트 로 만나보세요. 김응산 교수 는 작품의 텍스트와 미학적 형식에 집중해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퀴어영화를 연구한다. 특히 퀴어에 내재된 시간성을 반영하면서 유토피아적 상상력을 통해 구현되는 작품들에 관심이 있으며, 내용뿐만 아니라 형식의 측면에서 실험을 거듭하는 영화 작업을 포괄해 퀴어영화로 연구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현재 워싱턴대 아시아언어문학과 조교수로 재직 중이며, 앞서 이야기한 관점으로 1990년대 이후 퀴어영화를 분석한 결과를 담은 저서 Future Imperfect 를 집필하고 있다. 풍크툼의 관찰자에서, 퀴어영화 연구자로 강연을 제안받은 이후, 영화학자로서의 여정이 시작된 지점을 반추해볼 수 있어 뜻깊었다. 어린 시절 어머니 지인께서 주신 무료 관람권을 가지고 형과 지역의 단관극장을 찾았던 기억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개봉 작품들을 거의 다 봤을 정도로 극장에 자주 갔다. 이때의 경험 덕분에 영화에 빠르게 익숙해지고, 보다 일찍부터 영화를 좋아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은 이 단관극장 대부분이 아쉽게도 사라졌고, 영화를 접하는 매체마저도 노트북과 태블릿, 스마트폰으로 옮겨갔지만, 극장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이런 아련한 추억들이 내 영화연구의 출발점이 되어준 것 같다. 영화에 관심을 가지는 계기를 마련해준 단관극장들 그런 다음 본격적으로 영화학에 관심을 가지도록 만들어준 작품이 무엇일지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았다. 롤랑 바르트는 보는 이를 ‘찌르는 듯한’ 이미지로서의 풍크툼(Punctum) *주1 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는데, 나에게는 두 편의 장르영화가 풍크툼을 경험하게 했다. < 양들의 침묵 >(조나단 드미, 1991)은 포스터 자체가 시선을 사로잡았을뿐더러, 작품 속 연쇄 살인범에 대한 인물 설정이 트랜스포비아를 조장한다는 비판이 제기되었음을 알린 한 영화잡지의 기사, 그리고 그야말로 충격적이었던 작품 속 일부 장면들까지 작품의 여러 요소가 꽤 오랫동안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당시 영화를 본 후 나는 트랜스나 동성애자 등이 악인으로 등장하는 경향을 꼭 부정적으로만 바라봐야 할 것인지에 대해 어렴풋이 의구심을 가졌었다. 대학에 입학하고 봤던 < 캐리 >(브라이언 드 팔마, 1976)도 비슷했는데, 흥미롭게도 주인공 소녀의 관점에 공감하며 작품을 감상했다. 따돌림과 괴롭힘을 당하던 소녀가 비극적 운명을 마주하기 전 복수를 감행하는 순간에서야 비로소 관심을 받고 모두의 기억 속에 남는다는 설정이 가슴 아팠다. 그러면서 앞서 두 작품이 안겨준 충격을 풍크툼에 빗댄 것처럼, 영화는 배우거나 보는 것이 아니라 ‘ 느끼는 것 ’이라는 점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양들의 침묵>과 <캐리> 돌아보니 나는 공포영화를 볼 때 괴물이나 귀신, 복수하는 자들에게 감정을 이입했던 것 같다. 흔히 ‘빌런’으로 묘사되는 인물들에 자신을 동일시했던 당시부터, ‘퀴어’와 연관된 생각이나 태도에 관심을 가졌던 것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최근에 개봉한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 괴물 >(2023)과 같은 수작들을 지켜보면서도, 퀴어영화는 정체성을 그리는 영화, 미학적 실험을 하는 영화, 혹은 퀴어한 삶을 살아가는 관객들에 의해 재정의되는 영화 중 어떤 것에 해당할지를 깊이 고민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순히 성소수자에 관한 서사에 국한하지 않고, 퀴어영화가 얼마나 다양한 층위의 이야기와 삶 을 담아낼 수 있는지를 본격적으로 연구한 사례가 아직 그리 많지 않은 듯하다. 반복되는 형식적 특징은 발견되지 않기에 이를 ‘장르’라고 부를 수는 없지만, 엄연히 영화의 한 양태로 자리 잡은 퀴어영화를 다각도에서 정의하려는 노력이 필요한 때이다.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는, 동아리 차원에서 퀴어영화에 대한 정보를 담은 자료집을 만들고 관련 작품을 선정해 학내에서 상영하는 ‘이반영화제’라는 행사를 기획했다. 영화제에는 놀랍게도 아주 많은 이들이 찾아왔다. < 안토니아스 라인 >(마린 고리스, 1995), < 화분 >(하길종, 1972), 그리고 대사의 구성 등으로 볼 때 퀴어문화의 맥락에서도 무리 없이 해석될 수 있는 < 공동경비구역 J.S.A >(박찬욱, 2000) 등의 작품을 상영했다. 이외에도 즐거웠던 기억이 또 한 가지 있다. 왕가위 감독의 영화 < 해피 투게더 >(1997)가 1997년 당시 존재했던 검열 제도로 인해 국내 상영이 불허되었을 때, 동아리 구성원들과 어렵게 테이프를 구해 학내 광장에서 상영한 적이 있다. 그러자 퀴어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까지도, 왕가위 감독의 영화를 보고 싶은 마음에 수없이 몰려들었다. 아직 영화학을 공부하고 있지 않던 시절임에도, 이렇게 영화 상영을 직접 기획하는 경험을 거듭하면서 영화의 영향력과 효과를 몸소 체험했고, 영화만이 발휘할 수 있는 힘을 확인했다. 영화는 문화와 예술, 산업 등 다양한 개념으로 정의될 수 있지만, 많은 사람들을 모으고 그들과 생각을 나누는 자리를 마련하는 것을 보면 어쩌면 ‘운동’의 일환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앞서 강연해주신 교수님들과 달리 나는 영화학계에 다소 늦게 입문했지만, 국내 여러 영화제에 다니며 ‘현장’ 참여를 중심으로 영화를 배우기 시작했다. 부산, 전주, 부천을 비롯해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와 서울인권영화제 등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특히 서울인권영화제는 제2회가 이화여대에서 열렸는데, 퀴어 다큐멘터리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는 < 하비 밀크의 시간들 >(롭 엡스타인, 1984)을 상영할 때 경찰 인력이 이화여대를 둘러싸고 있던 기억이 생생하다. 돌이켜보면, 그 시대를 직접 체험함으로써 영화를 보는 시선을 발전시켰던 시간이, 학생들을 가르치게 된 지금의 자양분이 되어준 것 같아 감사한 마음이 든다. 다양한 영화를 접하고 시야를 넓힐 수 있도록 도와준 영화제들 그리고 같은 시기에 영화학에 관한 여러 외국 도서가 유입되곤 했는데, 내가 퀴어에 대해 잘 알지 못할 때 관련 내용을 처음 접한 경로 역시 번역서였다. ‘퀴어영화’라는 개념이 논의되기 전 게이·레즈비언 영화를 다룬 『베트남에서 레이건까지』(로빈 우드, 1993), 『레즈비언 게이 퀴어 영화비평의 이해(호모 PUNK 이반)』(바바라 해머 외, 1999) 등을 주제로 세미나를 진행했고, 퀴어영화의 고전을 감상하면서 생각을 나누기도 했다. 그러던 중, 나를 관통한 또 다른 풍크툼이 된 작품들을 만났다. 먼저, < 세친구 >(임순례, 1996)는 게이 인물 한 명을 포함한 세 친구의 삶을 보여준다. 친구 한 명의 성적 지향성과 젠더 표현은 이들 사이에서 중요치 않으며, 그들은 절망한 청년들로서 1990년대 한국사회를 배경으로 가난하고 힘겹게, 하지만 더불어 살아간다. 이를 지켜보면서, (만약 ‘퀴어성’에 대한 정의가 가능하다면) 영화의 퀴어성을 결정하는 요소에는 성적 지향성만 해당하지는 않으리라는 견해를 갖게 되었다. “퀴어는 연대의 다른 이름”이라고 이야기한 주디스 버틀러의 말처럼, 퀴어성은 ‘누구와 연대하는지’를 결정하고 연대의 폭을 넓히는 데 기여하는 장치 이지 않을까? 퀴어를 둘러싼 맥락을 새롭게 해석하려는 시도가 이런 영화들에서 벌써 나타나고 있었다. <올리버>(닉 디오캄포, 1983)는 필리핀의 게이클럽에서 유명인을 모사하는 올리버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이다. 올리버라는 인물은 성소수자이지만, 자녀를 낳고 한 가족의 가장으로 살아간다. 이 작품을 접하기 전까지 내가 알고 있던 퀴어영화는 대부분 당사자의 권리 보장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밀도 높게 담고 있었다. 하지만 성소수자 남성이 가정을 형성하고, 그러면서도 게이라는 지향성은 잃지 않는 모습을 기록한 영상은 당시의 내게는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한편으로, 게이클럽에 찾아와 올리버와 같은 필리핀 현지의 성소수자들을 착취하는 제1세계 외국인 관광객들도 카메라 너머에서 등장한다. 카메라의 시선은 관광객의 시선과 일치하고, 아동 성착취 기사와 동성 성매매로 삶을 연명하던 과거 어린 시절 올리버의 고백이 몽타주로 재배치되어 등장한다. 마르코스 치하에서 쓰레기더미를 뒤지는 민중의 모습을 전경으로 삼아 하층민 퀴어들의 인터뷰를 담아내는 장면까지. 영화를 통해 그 착취의 행태를 관찰하다 보면, 식민주의적 억압을 자행하는 태도를 소위 자유롭고 글로벌한 게이라는 이미지로 포장하면서 제3세계 성소수자 집단 위에 군림하는 제1세계 성소수자들과, 빈곤한 현실에 부딪혀 자신의 성적 지향성에 대한 확신을 갖기도 어려워하는 현지 성소수자들이 절대 동일한 층위에서 분석될 수 없음을 지각하게 된다. 이들을 같은 종류의 집단으로 지칭하는 순간, 퀴어정치학의 본질을 망각하게 될 우려가 있다. <올리버>는 퀴어를 바라보는 서구의 시각으로부터 독립된 채 아시아 퀴어영화의 특수성을 보여준다는 점도 인상적이었다. 가족 간의 유대, 가족 구성원으로서 이행해야 할 책임 등에 익숙한 아시아의 퀴어는 규범적이지 않은 자신의 정체성 혹은 젠더 표현과 자신이 속한 현실 사이에서 ‘ 타협 (Negotiation)’하는 과정을 거치게 되는 경우가 많다. 퀴어와 관련해서는 자유주의적 측면에서 개인의 권리 문제를 중심으로 담론을 형성하는 서구의 관점에서 이는 쉽게 이해될 수 없는 양태이다. 나는 이러한 관점의 차이가 흥미로워, 아시아 퀴어영화를 서구 이론의 틀에만 가둬 해석할 수 있을지에 대해 의문을 가졌다. 그리고 미국에서 영화를 공부하면서, 아시아 영화를 주된 연구 분야로 설정하기에 이르렀다. <세친구>와 <올리버> (사진: " Oliver ", IMDb) 퀴어영화의 각기 다른 얼굴을 찾아 유학 중 영화를 공부한 경험으로 잠시 주제를 옮겨보자. 사실 주전공을 영화학으로 바꾸기 전 나는 영문학을 전공했기에, 미국 워싱턴대로 유학한 이후 퀴어이론을 방법론으로 하여 영미권 영화 연구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토드 헤인즈 등이 이끌고 1990년대 퀴어영화의 대표적 경향으로 자리 잡았던 ‘뉴 퀴어 시네마’를 중심으로 미국의 퀴어영화를 연구하고자 했다. 하지만 토드 헤인즈의 작품 중 퀴어 및 비규범적 성정체성이 분명하게 재현되는 경우보다, 그의 영화적 스타일에 자연스럽게 녹아든 퀴어미학에 더욱 관심이 갔다. 예를 들어, < 파 프롬 헤븐 >(토드 헤인즈, 2002)에서는 흑인 남성과 사랑에 빠진 여자 주인공이 이별을 통보할 때, 이들을 바라보는 주변 인물들의 반응을 짧은 길이의 로우 앵글 숏으로 보여준다. 샷의 배치 역시 타인의 시선을 극대화하기 위해 짧으면서도 히스테리컬하게 구성되어 있다. 퀴어한 인물을 바라보는 규범적 이성애자의 시선을 재현하기 위해 기존의 퀴어영화에서 자주 사용했던 공식을, 서로 다른 인종 간의 금기시된 사랑을 묘사한 장면에도 적용한 점이 아주 흥미롭다. 이렇게 영화 속 퀴어적 순간을 보다 다양한 맥락으로 조성하는 시도가 궁금해, 관련 주제로 연구를 이어갔다. 그리고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성적 지향성에 대한 논의만으로 요약할 수는 없는 퀴어영화(특히 아시아 퀴어영화)의 미학적 특징 을 발견하고 싶었다. 대학원 과정 중에 출간한 두 편의 영어 논문에서 다루고 있는 두 작품을 그 예로 소개하고 싶다. 두 편 모두 영화의 소재를 차별화하고 미학적 실험을 거듭하면서 이전과는 다른 한국 퀴어영화 출현의 가능성을 보여준 작품들이다. < 줄탁동시 >(김경묵, 2011)는 내가 개념적으로만 구상했던 퀴어영화의 이론을 영화적 언어로 이미 구현하고 있었다. 한국의 퀴어영화 역시 성소수자의 권리 보호를 주장하는 담론이 아니라 미학적 대상으로 연구될 가능성이 충분함을 확신한 작품이다. 주인공 준( 이바울 )은 탈북 청소년이고, 자신의 성적 지향성과 관계없이 동성 대상 성노동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한다. 그리고 그는 타인에게 폭력적으로 착취당한 후 지금 보여드릴 장면에서처럼 청계천을 따라 정처없이 걷는다. 그 옆모습이 계속 롱테이크로 잡힌다. 천의 흐름을 거슬러 청계천의 끝으로 향하는 그를 보면서, 이 장면이 역사적 진보의 흐름, 즉 진보와 발전이라는 이성애·동성애규범적 시간성의 흐름을 거스르겠다는 의지 를 함축한다고 느꼈다. 예를 들면, 특히 서구의 여러 퀴어 담론과 운동들이 개인의 권리와 자유주의적인 접근을 강조하면서 “앞으로는 나아질 것이다”라는 상황적 진보에 집중하고 있는데, 이러한 역학에서 철저하게 배제되어 있는 퀴어들의 삶과 미래는 어떠할지에 대한 고민이 이 롱테이크 장면에서 드러나고 있다. 장면은 종로3가, 즉 게이 유흥업소들과 커뮤니티들이 자리한 일대에 다다르며 끝난다. 퀴어하지만 동시에 탈북 청소년이기도 한 준이, 성소수자의 공동체에 소속되고 구성원들과 소통하기가 어려운 현실을 암시하는 것이다. 이전까지는 성소수자라는 정치화된 집단, 혹은 이들이 속한 사회 공동체를 묘사하는 영화가 ‘퀴어하다’라고 인식되었다면, <줄탁동시>와 같은 작품들은 이를 넘어선 역사적, 문화적, 그리고 미학적 함의 를 퀴어와 연관지어 공유하고 있는 것 같다. 당시 위 논의를 접한 지도교수님께서도 같은 맥락에서 한국과 아시아 영화를 연구할 가치가 있음에 동의하셨고, 이를 계기로 본격적으로 아시아 퀴어영화 연구를 시작했다. <줄탁동시> 중 < 죽여주는 여자 >(이재용, 2016) 역시 성 노동자인 여성 노인과 한국계 필리핀인(코피노) 아이의 삶을 중첩해 퀴어영화의 폭을 확장한다. 오프닝 시퀀스가 독특한데, 한국인 산부인과 의사 아버지가 필리핀에서 버리고 온 코피노 소년 민호( 최현준 )는 필리핀인 어머니와 함께 아버지의 산부인과(재생산이 이뤄지고, 재생산 정치를 강화하는 장소)를 찾고, 병원 앞에서 어머니를 기다리는 아이에게 주인공 소영( 윤여정 )이 안부를 묻는다. 작품 전체의 내러티브를 보더라도, 국가의 관심 밖의 영역에서 출생한 코피노가 국내 재상산 정치의 사각지대에 놓여있는 현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역설적이게도 그런 그를 거두는 존재가 재생산 정치와 가장 거리가 먼 인물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나이 든 성 노동자라는 설정이 특별하다. 작품 말미에서는 주인공 소영과 트랜스젠더 티나( 안아주 )가 민호를 함께 양육하기도 한다. 미국 퀴어 이론가 리 에델만의 견해를 빌려 설명하자면, 미국은 재생산의 미래지향적인 측면을 이데올로기화 하며 적극적으로 지지해왔고, 할리우드 영화는 이런 이데올로기를 적극 반영하여 소위 아동들을 죽어서는 안 되는 신성한 존재로, 지속가능한 미래성의 상징으로 그려왔던 것이다. 따라서 재생산의 주체가 될 수 없는 퀴어는 사라져야 마땅한 존재로 인식되었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국가의 돌봄을 받지 못한 코피노 아이의 상징적 재생산을 돕는 주체는 퀴어 이다. 미국 내 주류로 자리 잡은 퀴어이론으로 동시대 퀴어영화를 비평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점이 여기서 드러난다. <죽여주는 여자> 중 위의 여정을 토대로 정립된, 퀴어영화에 관한 나의 연구 방향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시간의 매체인 영화가 ‘퀴어’라는 개념에 반영된 시간성 을 표현하는 방식이 궁금한데, 특히 1990년대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전역의 퀴어영화에서 발견되는 독특한 미학적 실험 을 분석하고 싶다. 그리고 미국 중심적으로 해석된 뉴 퀴어 시네마 이론을 아시아 퀴어영화에 기계적으로 대입하는 관습에 저항하려고 한다. 최근 대두된 지역 영화 (Regional cinema)라는 개념을 퀴어의 측면에서 구체화해, 아시아 지역의 퀴어영화를 보다 객관적이면서도 입체적으로 연구할 것이다. 더불어, 동시대 한국사회에서 공유되는 규범상으로는 부정할 수밖에 없는 개념인 퀴어는 영화에서도 절망 또는 실패의 형태로 나타나며, 유토피아적 상상력 을 통해서만 성립 가능하다. 하지만 여전히 현실에 존재하며 그와 연관된다는 점에서, 퀴어만의 독특하고도 흥미로운 ‘변태적 시간성’이 두드러지기도 한다. 그리고 이성애중심적 가치관으로는 포괄할 수 없는 타협 과 돌봄 , 그리고 취약한 타인에 대한 연대 를 실천하는 퀴어의 면모를 영화에서 더 적극적으로 발견하고 싶다. 미학적 실험, 타협 및 돌봄의 개념을 바탕으로 한 아시아 퀴어영화 연구의 방향성 미래불완료의 아시아 퀴어영화, 계속 꿈꾼다 집필 중인 저서의 내용을 바탕으로 연구 주제를 더 자세히 소개하고 싶다. Future Imperfect , 즉 ‘ 미래불완료 ’라는 제목이다. 미래에 완료되는 모습을 상상할 수 없는 무언가를 미래불완료라는 (존재하지 않는) 시제로 설명할 수 있다면, 아시아 퀴어영화의 성격이 이와 유사하리라고 생각했다. 아시아 지역에서는 퀴어문화를 제도권 안에서 존중하려는 노력이 아직은 부족한 상황이어서, 그 안의 퀴어영화는 유토피아적 상상력을 동원한 판타지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 또한 영화의 형식적이고 미학적인 측면에서도, 아시아 퀴어영화는 앞으로의 변화 양상을 짐작하기 어려운, 말 그대로 미래불완료 시제의 주체가 되는 영화 양태에 속한다. 그만큼 다양하고 변화무쌍한 방식으로 발전하리라는 기대가 가득하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퀴어는 ‘ 시간 ’과 분리해 논의할 수 없는 개념이므로, 저서에서는 시간을 조작해 선보일 수 있는 매체인 영화가 이를 담기에 아주 적합하다는 점을 설명하려고 한다. 결코 실현될 수 없는 개념으로서의 유토피아가 현실에서 문득 나타나는 현상으로서 푸코가 제시한 ‘ 헤테로토피아 *주2 ’가 몇몇 퀴어영화에서 공간성으로 구현된 사례도 기록했다. 한편, 파울 클레의 회화 <새로운 천사(Angelus Novus)>(1920)를 본 벤야민은 ‘ 역사의 천사 (der Engel der Geschichte) *주3 ’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진보하는 시대를 따라 날갯짓하면서도 수많은 상처로 얼룩진 과거로 시선이 향해 있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천사의 모습에는 동시대 퀴어영화의 숙명과 맞닿는 지점이 있다. 일종의 진보라고 볼 수도 있으면서 실제로도 진보라는 이름으로 선전되곤 하는 동성혼 합법화 등, 퀴어를 존중하는 제도 한 가지가 합법화된다고 해서 다양한 계급과 차이를 가진 퀴어 모두를 위한 유토피아가 펼쳐질 수 없고, 그들은 늘 어딘가에서 차별로 인해 고통 받았거나 받을 것이다. 그리고 퀴어 안에서도 계급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거나 혹은 성소수자로서 생활하기에 보다 안락한 공동체에 소속되어 있는 이들과, 끊임없는 착취의 굴레에서 고통받고 있는 이들의 차이는 더욱 도드라질 것이다. 따라서 갈수록 규범화되어 가는 퀴어의 영화적 재현을 복제하는 것이 아니라 내용과 형식 상의 실험 을 통해서, 그리고 퀴어라는 개념이 포용할 수 있는 집단 혹은 주체의 저변을 확장 함으로써 퀴어영화의 다양성에 기여하는 영화들에 대한 관심이 필요한 때이다. 이렇게 진보적 흐름에 합류하지 못하고 고통 받는 존재들을 모두 아울러 더 나은 세상을 일구기 위해 노력하는 태도가 퀴어의 윤리라고 생각하는데, ‘영화’에 이 윤리가 상당 부분 구현되었음을 추후 연구와 저서를 통해 계속 전달하고 싶다. 2000년대에 가까워지며 영화 촬영과 감상의 매체가 디지털로 전환되면서, 여러 감독이 각자의 특색을 반영한 퀴어영화를 다수 발표해왔다. 아시아 곳곳에서 활동 중인 그들 덕분에, 디지털 기술의 가능성을 효과적으로 활용하며 미학적으로 실험을 거듭하는 작품들이 선을 보일 수 있었다. 특히 태국의 툰스카 판시티워라쿤 감독은 태국의 역사나 현실을 고발하는 장면을 그와 관련 없는 다른 쇼트와 병치하는 등 퀴어성과 정치성을 결합하는 독특한 시도를 보여주기도 한다. 퀴어가 태국사회에 정착된 규범을 거스르는 데 기여하는 방법을 영화로 탐구하는 흥미로운 창작자이다. 한편, 퀴어한 영화에 대한 작업으로 국내에서 돋보이고 있는 창작자로서 임철민 감독도 언급하고 싶다. 그의 작품들에서는 퀴어한 촬영과 편집 방식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엿볼 수 있다. < 프리즈마 >(2013)의 한 장면에서, 카메라는 값비싼 촬영기기 없이 단순 용도의 짐벌이나 핸드헬드로 구현하기 어려운 움직임을 선보이며 부드럽게 유영한다. 사실 촬영 당시 짐벌이 고장 났고, 이를 수리할 여건이 변변치 않았던 임철민 감독은 고장 나서 제멋대로 돌아가는 짐벌을 가지고 하나의 쇼트를 촬영해봤다고 한다. 보시는 바와 같이 결과물은 생각보다 흥미로웠다. 더군다나 임철민 감독은 <프리즈마>를 포함해 이렇게 우연과 실험을 바탕으로 제작된 작품들이, 시장의 요구에 부합하지 않는 그 실험성으로 인해 배급되지 않으리라는 점을 알고 있었고, 작품들을 대중에게 무료로 공개하겠다는 결정을 내린다. 작품의 형식뿐만 아니라 유통 면에서도 퀴어한 방식으로 시스템에 저항하면서, ‘ 실패 ’가 곧 미학적 실험의 성과 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을 입증한 사례이다. <Santikhiri Sonata>(툰스카 판시티워라쿤, 2019)와 <프리즈마> 마지막으로 퀴어영화에 대한 재미있는 리메이크 사례를 소개하며 강연을 마치고자 한다. 이성애자인 남성 주인공의 연인이 숨진 후 남성으로 환생한다는 설정을 가진 < 번지점프를 하다 >(김대승, 2001)는 몇 년 전 국내에서 드라마로 리메이크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원작 시나리오 작가분께서 종교적 신념을 이유로 리메이크에 반대하면서 제작이 무산되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작품은 태국에서 생각지도 못한 서사로 리메이크된다. 원작에서는 주인공이 동성으로 환생한 연인과 이성애적 관계를 이어가고자 죽음을 택한다. (사실 동성애 금기에 관한 통념을 반영하고 있다.) 하지만 리메이크작 <듀, 우리 함께 떠나자>(추키얏 삭위라쿤, 2019)에서는 본래 동성 연인이었던 두 주인공 중 한 명이 숨진 후 이성으로 환생하고, 이들은 동성 연인으로서의 삶을 다시 시작하고자 극단적 선택을 한다. 인물이 지향하는 관계에 대한 설정을 완전히 뒤바꿨다. 여기서 한국 또는 아시아 퀴어영화의 특징이자 잠재력을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본국이 아닌 어딘가에서 얼마든지 퀴어한 영화로 재탄생하며 더 많은 이들의 목소리를 대변해 그 영향력을 이어가는 힘. 한국 퀴어영화에도 그 힘이 가득하다는 점을 믿고, 응원해 주시기 바란다. <번지점프를 하다>와 <듀, 우리 함께 떠나자> * 질문과 답변 * (질문1) 퀴어영화 연구를 위해 영화학과 철학을 비롯한 다양한 학문의 이론을 도입해 간학문적 연구를 진행하고 계신 듯하다. 다만 여전히, 해당 이론들만으로 아시아 퀴어영화를 완벽히 연구하고 설명하기는 어려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연구 도중 이와 같은 이론적 공백 을 발견하게 되신다면 보통 어떻게 대처하시는지가 궁금하다. (답변) 말씀하신 대로 퀴어나 영화이론 자체가 영어권 중심으로 논의되어왔고, 아시아 문화권에서는 이를 비판 없이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 나 역시 퀴어이론에 대한 영미권 학자들의 저서를 번역하며 느낀 아쉬운 점을 역자 후기에 남기려고 노력하는데, 그럼에도 새로운 담론이 원활히 생성되지는 않는 것 같다. 영화학이 학문으로 자리 잡기 시작한 곳이 영미권이며 퀴어영화 연구도 거의 미국 중심으로 이뤄져온 터라, 그간 형성된 패러다임을 전환하기가 쉽지만은 않다. 그러나 나는 이론적 한계에 부딪힐 때마다 영화의 텍스트 로 돌아간다. 이론 자체는 서구에서 발생한 논의를 참고하더라도, 이를 반박할 근거를 영화 텍스트에서 찾는다. 작품 속 다양한 재현 양상,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 영화의 특이성, 한국영화에서 타협과 가족이 중요한 이유 등을 살피다보면 길이 보이는 것 같다. 텍스트는 영화 분석의 필요조건이다. (질문2) 임철민 감독의 작품처럼 미학적 실험으로서의 퀴어영화들의 사례를 알려주셨다. 영화적 규범을 벗어나 새로운 시도를 거듭하는 작업들이 비교적 자유롭게 상영되는 장소로 ‘ 미술관 ’도 자주 언급된다. 혹시 퀴어를 소재로 한 미술 작업 중 눈여겨보신 사례가 있을까? (답변) 이 자리에 와 계신 김경묵 감독님께서도 몇 년 전 대안공간 탈영역우정국에서 VR과 AR 매체를 이용한 개인전 <QUARANTINE: 독방의 시간>을 개최하신 것처럼, 퀴어영화의 무대가 꼭 영화관이 될 필요는 없다. 임철민 감독 역시도 자신이 제작한 작품들이 ‘퀴어영화’라고 생각하고 영화제에 출품하고자 했지만 퀴어 관련 국내 영화제의 반응은 미온적이었다. 퀴어영화의 성립 조건을 주로 동성애나 트랜스 재현 관련 내용으로만 한정하고 있는 국내 영화제의 한계가 드러난다. 임철민 감독도 그랬듯이 이 작품들은 오히려 미술관에서 상영의 기회를 얻었고, 많은 퀴어영화 감독 및 작가들이 미술관과 협업하며 자신의 작업을 공개할 대안적 공간 을 찾고 있다. 이런 기회들이 지속적으로 마련되어야 작품들 간의 유의미한 ‘차이’가 보전 되어 퀴어영화가 더욱 다양한 모습으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질문3) 대학에서 한국영화사 강의와 영화사적인 연구를 진행하고 계시다고 말씀해주셨다. 영자원의 데이터베이스 KMDb의 영화글 카테고리 중 ‘ 한국영화의 퀴어한 허구들 ’이라는 코너에서는, 그간의 한국영화에서 시대적 한계 등으로 인해 미처 드러나지 못한 퀴어적 측면을 발견해 분석하고 있다. 혹시 선생님께서도, 한국고전영화 작품들 중에서 퀴어와 관련하여 맞닥뜨리게 되신 풍크툼 이 있으시다면, 알려주시면 감사하겠다. (한국영상자료원 학예연구팀 신재영) (답변) 현재 집필 중인 저서에서는 1990년대 이후의 영화들만 다루지만, 이후에는 한국영화라는 주제를 더욱 자세히 다루고 싶다. 한국고전영화 중에서도 퀴어한 순간들을 다수 포착할 수 있다. < 화분 >(하길종, 1972)처럼 직접적인 방식이 아니더라도, < 여사장 >(한형모, 1959)에서는 규범화되지 않은 여성의 모습이 나타나기도 한다. 이성애의 맥락에서만 해석되어온 < 자유부인 >(한형모, 1956)에서도 아주 재미있는 순간이 등장한다. 극중 자유부인 오선영( 김정림 )은 처음으로 비어홀을 찾았다가 서구식 무용을 화려하게 선보이는 무희를 바라보고 크게 놀라며 깨달음을 얻는다. 자유부인이 각성하는 계기가 남성이 아니라 여성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자유부인의 내면에 있던 욕망이 여성 무희를 봄과 동시에 수면 위로 드러났다고 볼 수 있다. < 이어도 >(김기영, 1977) 역시 재생산을 언급하면서도 작품의 중심에는 여성 집단이 있으며 여기서 길러진 남자 아이들은 출가한다. 이성애를 규범으로 인정하고 재생산을 목표로 삼은 사회의 통념을 역이용한 서사로, 충분히 퀴어적으로 해석될 만한 텍스트이다. 이외에도 퀴어의 관점에서 해석될 수 있는 한국고전영화에서의 순간들이 아주 많다. 여러 연구자분들께서 또 다른 사례를 활발히 발견해주신다면, 후에 이를 성실히 인용하며 연구를 이어가겠다. (상) <자유부인> 중 무희의 춤에 놀라는 오선영 / (하) <이어도> 중 (질문4) 현재 춘천영화제에서 프로그래머를 맡고 있는데, 올해(강연일 기준 2024년) < 럭키, 아파트 >(강유가람, 2024)와 < 딸에 대하여 >(이미랑, 2023)를 상영했다. 흥미롭게도, 상영 이후 관객들 대다수가 잘 만들어진 ‘가족영화’라는 감상을 전했다. 강연에서도 말씀해주셨지만 아시아 , 특히 한국 퀴어영화 는 가족 과 연결지어 이해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은데, 이러한 현상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에 대해 조언을 구하고 싶다. (영화저널리스트 김형석) (답변) 가족을 중시하는 아시아 문화를 고려할 때 아시아 퀴어영화 전반에서 나타나는 현상이겠지만, 한국에서 특히 짙게 나타난다는 데 동의한다. 다만 (< 시인의 사랑 >(김양희, 2017)에서 볼 수 있듯이) 이성애 규범에 따르며 가족을 이룬 이들도 삶의 특정 ‘상황’에서 퀴어적으로 수행할 수 있으며, 이들을 규범화된 이성애자로만 인식할 수는 없음을 짚고 싶다. 퀴어를 논할 때 오직 당사자의 정체성(이성애자, 동성애자 등)으로만 퀴어 여부를 판단하려고 하는 본질주의적 태도는 지양 해야 한다. 한국 퀴어영화의 가족을 이해할 때 역시, 위와 같이 퀴어적 순간을 경유한 인물이라면 현재 소속된 가족에서 이성애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더라도 폭넓은 관점에서 ‘퀴어’로 바라볼 수 있음을 염두에 둬야 한다. 퀴어영화에 관심을 가진 관객들에게, 정체성 정치만으로 퀴어의 영역을 재단하는 경향으로부터 이제는 탈피하기를 권하고 싶다. <시인의 사랑> 중 *** 주1. 롤랑 바르트가 저서 La Chambre Claire (밝은 방, 1980)에서 사진과 관련하여 제시한 개념이다. 바르트는 사진의 관찰자가 지닌 개인적 측면을 건드리며 그를 찌르거나 뚫고 지나가는 듯한 느낌을 주는 우연적 요소로서 풍크툼을 설명한다. 관찰자는 사진 속 풍크툼을 통해 자신을 사적 개인으로 인식한다. 주2. 미셸 푸코가 Les mots et les choses: Une archéologie des sciences humaines (말과 사물, 1966)에서 처음 설명한 개념으로, 현실의 장소들에 이의를 제기하고 그것과 반하는 가치를 가지는, 하지만 현실에는 존재하는 장소를 가리킨다. ‘현실화된 유토피아’와 같은 의미를 지녔으며, 푸코는 이를 ‘헤테로토피아’라고 명명했다. 주3. 벤야민은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1940)’라는 글에서, 파울 클레의 작품에 묘사된 천사는 진보의 폭풍에 떠밀려 날갯짓하고 있기는 하지만, 폐허가 된 과거의 잔해더미를 바라보며 마음 아파한다고 말한다. 미래로 향하는 진보의 흐름이 거세더라도 상처받은 과거는 치유되지 않은 채로 잔존함을 암시한다. <새로운 천사(Angelus Novus)>(파울 클레, 1920)
작년 여름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진행된 ‘해외 영화학자 초청 대중 특강’의 내용을 강연자의 시점에서 정리합니다. 영화와의 첫 만남과 학계 입문 과정에 얽힌 소소한 에피소드부터, 세계 속 한국영화의 위치, 최근 몰두하고 있는 연구 주제에 대한 학술적 분석까지. 한국영화를 향한 해외 영화학자 6인의 개성과 열정으로 꽉 채워졌던 2시간을 KOFA가 직접 기록한 특강노트 로 만나보세요. 스티브 최(Steve Choe) 교수 는 영화와 미디어 이론에 대한 미학적 접근에 기초해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 독일과 영미권 출신 작가뿐만 아니라 박찬욱 , 이창동 등을 중심으로 한국영화 감독에게도 관심을 가지고 관련 논문을 집필했다. 최근에는 한국드라마에서 ‘감정’을 묘사하는 방식을 개념화하는 데 주력하고 있기도 하며, 현재 샌프란시스코 주립대 영화비평과 부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 Sovereign Violence: Ethics and South Korean Cinema in the New Millennium (2016), 그리고 논문 “The Paradoxical Universal of Korean Cinema(2022)”, “Park Chan-wook beyond Globalization(2022)”, “Sympathy for the K-Drama(2024)” 등을 집필했다. ※ 본 강의는 영어(순차통역)로 진행되었으며, 원 제목은 "Korean Cinema and English-Language Film Studies"입니다. 미국에서 활동하기 시작한 한국계 영화학자로서의 여정 미국과 유럽의 영화학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되어 반갑다. 나는 영화에 관한 서적을 몇 권 집필했고, 그중 한 권은 한국영화를 주제로 한다. 오늘은, 대학원을 시작으로 영화학계에서 내가 학술적으로 전개해 온 노력과, 그 과정에서 느낀 점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한다. 한국영화와 가장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나의 연구는 바로 이 책, Sovereign Violence (2016)에서 찾아볼 수 있다. 사실 그로부터 8~10년 전부터 이미 한국영화에 관심을 가지고 글을 써왔다. 2007년에 박찬욱 감독에 관해 쓴 에세이가 시작이었는데, 그 당시에는 한국영화에 대해 영어로 작성된 연구 결과물이나 자료를 찾아보기가 쉽지 않았다. 한국영화와 관련해서는 어떤 작품 또는 감독이 중요한지, 한국영화를 둘러싼 이론은 어떻게 교육해야 하는지, 한국영화의 미학은 무엇인지에 대한 지식도 전무했다. 그래서 독일영화라는 나의 연구 분야를 토대로, 한국영화 연구의 이러한 공백을 메우고, 학계에 새로운 방식으로 기여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Sovereign Violence: Ethics and South Korean Cinema in the New Millennium (2016) 위에 언급한 책은 1960년대에 출생한 감독들의 작품이, 1960~70년대 한국영화를 통해 제기된 윤리적·도덕적 질문에 응답한다는 점에 주목했다. 그리고 흔히 ‘한국영화 르네상스’라고 일컬어지는 2001년부터 2013년 정도까지의 시간 동안 발표되었고 비평적 접근 역시 가능한 예술영화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관련 감독들은 1996년 즈음 처음 개막한 국내 영화제(부산국제영화제 등)들에서 출품한 작품을 바탕으로, 일부 고전영화가 과거에 영화를 통해 관객에게 윤리나 도덕성을 교육했던 방식 을 비판적으로 바라봤다. 단순히 장르의 일종으로서가 아니라, 관객의 ‘ 감정적 공감 ’을 불러일으키는 영화 또는 내러티브의 구조로서의 멜로드라마 영화를 비판하는 경향을 보인 것이다. 특히 복수를 다루는 작품에서 2000년대 이후 작품들은, 관객이 어떻게 영웅에게는 감정을 이입하고 악인에게 이입하지 않게 되는지, 과거의 상업영화가 이러한 공감 구조를 어떻게 직조하는지를 포착해 비판한다. 멜로드라마는 UC 버클리에서 박사 과정을 수료하던 시절, 내가 훈련받은 학술적 연구 영역이기도 하다. 지도교수님들 중 한 분이셨던 린다 윌리엄스(Linda Williams) 교수님은, 2000년대 초반부터 미국영화계의 맥락 안에서 멜로드라마를 재정의하는 데 관심이 많으셨다. 예를 들어, 인종과 민족적 정체성을 소재로 한 멜로드라마 영화에서, 인종에 관한 편견이 투영된 인물에게 관객이 어떻게 감정을 이입하게 되는지 등을 연구하셨다. 나 역시 이에 영향을 받아 멜로드라마의 영향을 2000년대 초반 한국에 맞게 맥락화하기 위해 노력했던 것 같다. 비슷한 시기 미국에서는 이라크 전쟁의 발발로 인해 자국의 도덕성과 정의에 의문을 표하고 있었고, 한국에서는 ‘미국적’ 가치나 도덕성을 비판하며 정치적 측면에서는 진보 세력이 보다 주목을 받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래서 나는 박찬욱 또는 봉준호 감독과 같은, 한국고전영화 와 할리우드영화 모두로부터 영향을 받아온 국내 영화인들이 작품 연출 과정에서 윤리적으로 사고하는 방식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그리고 이를 (린다 윌리엄스 교수님께서 할리우드 상업영화가 필수적으로 수반하는 요소라고 말씀하신) 기존 멜로드라마에서의 감정 이입 방식과 연관 지었다. 마치 사진이 찍힌 것처럼 영화에 그대로 반영된 문화를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의 내러티브에서 엿보이는 사고(Thinking)의 방식 이 궁금했다. 이와 같은 방향의 연구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대학원 시절까지 미국에서 지냈기에, 일생 동안 미국식 인문학 교육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학부에서는 인류학을 전공했지만 미학 이론에도 관심이 있어 니체, 프로이트, 앙리 베르그송, 푸코 등으로부터 비롯된 논의를 자주 접했다. 그러다가 1990년대 중반에 영화와 관련된 수업을 듣게 되었는데, 첫 주에는 < 순정에 맺은 사랑(All That Heaven Allows) >(더그라스 서크, 1955)이라는 할리우드의 멜로드라마 작품에 대해, 그다음 주에는 <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Angst essen Seele auf)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1974)에 대해 배웠다. 할리우드의 전형적인 상업적 멜로드라마를 파스빈더와 같은 감독이 예술영화의 형태로 리메이크했다는 점이 무척 흥미로웠다. 그리고 유럽의 예술영화가 할리우드의 상업영화로부터 영향을 받되 그 바깥의 무언가를 달성해 낼 수도 있을지를 알아보고 싶었다. 영화 연구자의 길을 걸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이때부터 하게 되었다. 또한 내가 2000년대 이후 한국영화와 할리우드의 멜로드라마 영화의 관계에 접근하고자 채택해 온 방법론 역시 이때 깨달은 내용에서 비롯되었다. <순정에 맺은 사랑>(1955) (사진: "All That Heaven Allows", IMDb )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1974) (사진: "Angst essen Seele auf", IMDb ) 현재 미국에서 예술영화와 상업영화를 구분하는 기준은 제2차 세계대전 종료 후 아도르노가 전개한 문화산업론에 여전히 상당 부분 기대고 있다. 그의 논의와 일맥상통하게, 대부분의 대학에서는 대중을 조작하고 감상성을 내세운 상업영화는 기피하고, 비판적 시선을 담지한 내셔널 시네마와 같이 섬세한 예술영화를 추구해야 한다고 배우게 된다. 나 역시 아도르노의 이론에 흥미를 가졌다. 하지만 나는 ‘문화산업’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를 그리 선호하지는 않는데, 단어 자체가 ‘재생산’ 또는 ‘대중문화’ 같은 개념을 단정적으로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보다 문화가 어떻게 상업적이게 되는지 , 지나치게 대중적으로 변모하게 되는지 (소위 ‘나빠지는지’)를 먼저 분석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학부 재학 중 관련 주제로 아도르노와 베토벤에 관해 논문을 썼다(아도르노에 따르면, 베토벤은 작곡한 곡에 대해 대가를 받았으면서도 시장의 자본주의 질서에 저항할 수 있는 예술가였다고 한다). 이후, 대학원에서는 1920년대 독일 표현주의 영화에 대해 연구했다. 독일에서는 연극이나 문학과는 구분되는 ‘영화’만의 특징이 무엇인지가 논의되곤 했다. 특히 영화가 처음 등장한 1895년부터 유럽의 예술영화가 주목받은 1920년대 사이에 이러한 논의는 두드러졌다. 영화만의 차별점으로 가장 많이 언급된 개념은 ‘ 생동감 있는 움직임 ’이다. 비인간 존재들이 살아 움직이는 모습을 재현할 수 있다는 점이, 역사적으로는 매우 중요하게 받아들여졌다. 뱀파이어, 골룸, <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 >(로베르트 비네, 1919)에 등장하는 인물과 같은 비현실적 존재들은 오직 영화에서만 살아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여기에 항상 ‘ 죽음 ’의 개념도 내재되어 있다고 본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전쟁으로 인해 트라우마를 겪은 영화인들의 작업에는 죽음이나 무생물적인 요소가 잠재되어 있고, 오히려 이들 자체가 영화의 특징인 ‘움직임’의 일부가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작품 속에서 하나의 장면을 선택하고, 말씀드린 알레고리들이 작동하는 방식을 짚어내며 연구를 진행했다. (좌)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1919) / (우) < 노스페라투 >(1922) 마지막으로, 몇 년 전 집필한 감독 윌리엄 프리드킨(William Friedkin)에 관한 책 한 권에 대해 잠시 이야기하고 싶다. 그는 작년에 작고했으며 < 프렌치 커넥션 >(1971), < 엑소시스트 >(1973), < 소서러 >(1977) 등의 작품들을 연출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올드 할리우드’의 영향 아래 있으면서도, 새로운 자본이 유입되고 검열이 해제됨에 따라 예술영화의 일종으로 볼 수 있는 새로운 영화, ‘ 뉴할리우드 ’를 개척한 감독들 중 하나이다. 이런 뉴할리우드의 경향은 내셔널 시네마에 한해서만 영향력을 발휘했다고 하더라도, 투자금 유치, 검열 완화 등의 조치를 통해 새로운 이야기나 재현 방식을 반영한 영화가 탄생하는 데도 분명히 기여했다. 영화 영문 연구의 현재, 그리고 한국영화 이제 영어로 진행되는 영화학에 관한 주요 쟁점 두 가지를 살펴보자. 먼저, 영화학의 특성과 소재가 변화하는 양상을 다뤄볼 수 있다. 영화학 연구의 영역은 점차 미디어 분야로 확장되며 학문 자체가 ‘ 매체학 ’의 성격을 띠기 시작했다. 이러한 관점의 영화연구는 매체고고학(Media archaeology)적 접근과 더불어 미디어가 사회 기반시설 중 하나임을 전제한다. 그리고 인간이 세계를 감지하는 인터페이스로서의 주변세계(umwelt)에 더욱 주목함에 따라, 이제 영화학계에서는 영화라는 예술 자체에 대한 연구에 비해, 영화를 ‘가능하게 하는’ 요소 , 즉 네트워크, 클라우드, 플랫폼 등에 대한 연구가 지배적이게 되었다. 동시에 아카이브를 통해 관련 문서를 조사하는 작업이 매우 중요해졌다. 예를 들어, 특정 네트워크를 형성하기 위해 작성된 계획안, 공연에서 스모크 머신을 사용한 방식, 미술 전시에 쓰인 공간 등 개별 작품이나 작가가가 아니라 그것을 지원한 요소들에 대한 기록에 집중하게 된다. 해당 문서가 사용하는 언어를 알고 있다면 훨씬 유리한데, 이를 통해 국내 매체의 기반시설을 영어로 연구할 수 있게 된다는 점은 아주 흥미로운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두 번째 쟁점은 대학에서의 한국영화 연구가 대개 ‘ 한국학 ’이라는 분과 내에서 이뤄진다는 점이다. 특히 미국 학계에서 한국영화는 한국학을 포함한 동아시아학, 즉 미디어학이 아닌 특정 문화권 관련 언어문명학부에서 연구된다. (북미와 남미, 유럽 지역 학생들이 한국에 관해 가지고 있는 모든 종류의 관심사를 반영하는 분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다보니 한국영화 역시 이러한 학문 분과의 특성에 맞게, 실질적이고 사회과학적인 방법론 (팬문화 연구 등)을 바탕으로 연구되고 있다. 내가 주로 관심을 가지고 있는 유럽 중심의 인문학적 접근법이 도입되는 사례가 드물어 아쉽다. 나는 SNS를 통해 팬들이 생성한 해시태그 개수를 측정하기보다, 보다 인문학적인 관점 에서 국내 미디어를 바라볼 수 있는 방법을 제안하고 싶다. 본 강연을 진행하신 다른 연구자분들께서도 이에 관한 내용을 전달해주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앞서 말씀드린 학계의 경향에도 불구하고 인문학 중심의 방법론을 지향해 영화를 연구하고 계신 데 경외를 표한다. 사실 한국영화와 미디어에 대한 관심이 크게 증가했다는 점에서 그에 관한 연구도 다양한 학문 분야에서 충분히 진행될 수 있지만, 해외 학계의 제도적·언어적 장벽, 경제적 지원의 한계 등으로 인해 이들은 거의 매번 동아시아학 관련 분과에 소속되어있는 상황이다. 그래서 현 시점에서 한국영화를 연구하는 이들은, 아카이브를 바탕으로 역사를 연구해 인간, 윤리, 도덕, 전통과 모더니티의 관계, 그리고 이를 가능케 한 구조적 기반 등에 관한 커다란 질문 에 답해야 한다. 나 역시 Journal of Japanese and Korean Cinema 라는 학술지의 공동 편집자로서, 최근에 투고된 국내 영화배우 문예봉 에 관한 글과 같이, 한국 출신 인물이나 한국에 관한 기타 인문학적 주제에 대해 매체학적으로 접근하는 글을 더욱 받아보고 싶다. Journal of Japanese and Korean Cinema 페이지에 대한 설명 한국드라마가 ‘감정’을 드러내는 방식: 정서적 막간 위의 내용을 마무리하며, 이제 한국의 영상 콘텐츠에 관한 나의 최근 관심사로 주제를 바꿔보고자 한다. 연구자 이민주는 한 논문에서, 한국의 대중문화가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어모으며 발생한 초국가적 미디어 및 관광 현상으로서의 한류를 설명한다. *주1 그는 기술이 지리적·문화적 경계를 가로질러 감정을 전달하는 데 성공했기에 이와 같은 현상이 발생할 수 있었다고 분석한다.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단어는 ‘ 감정 ’이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아도르노는 감정은 가치 없고 상업적인 것이라며 비판했는데, 그의 관점대로라면 보는 이의 감정을 상업적인 의도로 북돋는 콘텐츠가 가득한 최근의 뉴스와 미디어는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나는 수많은 미디어의 스토리텔링이 갖가지 감정을 (가끔은 지나칠 정도로) 발생시키는 현상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싶다. 그리고 여기서 ‘한국드라마’는 감정과 미디어의 관계 를 더욱 자세히 살펴보는 데 좋은 재료가 될 수 있다. 한국드라마가 감상자의 감정을 발생시키는 데 특화되었다는 점에는 많이들 공감하지만, 이 감정이 ‘어떻게’ 불러일으켜지는지에 대한 연구는 아직 부족하다. 관련하여 내가 소개하고 싶은 개념이 한 가지 있는데, 바로 ‘ 정서적 막간(Affective interlude) ’이다. 한국드라마에서 대사와 대사 사이에 음악이 흐르며 화면이 슬로우 모션으로 재생되거나 인물의 얼굴이 클로즈업되는 순간을 말한다. 인물들이 자신에게 아픈 기억을 안겨 준 다른 인물을 회상하는 등의 장면에 주로 사용되고, 현재로 돌아왔을 때 등장하는 첫 쇼트에서 감상적 의미가 부여된 소품이 등장하기도 한다. 그동안 끊이지 않고 연주되는 음악은 감상자가 리듬에 맞춰 장면 속 인물들의 감정에 동화되도록 한다. 여기서만큼은 인물들이 나누는 대사가 아니라 드라마의 미학적 특징이 모종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마치 1920년대의 독일영화들처럼, 그 자체로 알레고리인 장면(단 한 장면일지라도)을 통해 모든 의미 구조를 파악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한국드라마 특유의 기법은, 감상자가 ‘무언가를 느끼게 하려는’ 의도로 강박적일 정도로 지속되는 것처럼 느껴진다. <눈물의 여왕> 중 (사진: tvN ) 예를 들어, 최근 드라마 <눈물의 여왕> 중 백현우( 김수현 )가 뇌종양으로 투병 중인 홍해인( 김지원 )에게 느끼는 감정을 드러내는 과정에서 정서적 막간이 자주 사용되곤 했다. 홍해인이 본래 백현우가 사랑한 아름답고 미덕을 갖춘 인물이며, 그런 그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백현우가 너무 늦게 깨달았다는 점이, 흐르는 음악과 슬로우 모션의 반복 등을 통해 관객에게 효과적으로 전달되었다. 정서적 막간은 이렇게 인물이 경쟁적인 사회 환경으로 인해 본래와는 다른 모습을 갖게 되더라도 사실 연약한 개인에 불과하다는 점을 드러내고, 이를 계기로 관객이 그의 진심에 이입하게 만든다. 한국드라마의 정서적 막간에 대한 연구는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하나의 순간에 밀착해 세밀하게 분석하는 방법으로 진행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내가 박사 과정 중 작품을 분석할 때 자주 떠올렸던 질문, 즉 미학적 측면에서 특정 작품의 관객은 누구인지를 중심으로 한국드라마에 접근해보려고 한다. 이를 바탕으로 한국드라마에 대한 연구 전반의 다양성과 깊이가 향상되는 데 기여하고 싶다. 드라마 <스물다섯 스물하나>(정지현, 2022) 속 정서적 막간 역시 보여드리려고 한다. 이 장면은 서로 물리적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는 사람들이 미디어를 통해 연결되는 방식을 보여주는 알레고리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드라마의 다섯 번째 에피소드는, 내가 진행하는 수업을 듣는 학생들처럼 한국드라마를 좋아하지만 멀리 떨어져 있는 해외 팬들이 한국적 감성에 다가서는 계기를 마련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렇게 미디어를 통해 심리적 거리감을 좁히기 위해서는 사전에 어느 정도의 ‘거리’가 전제되어 있어야 한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스물다섯 스물하나> 중 (사진: 유튜브 tvN DRAMA) 이 장면에서 두 인물은 서로 다른 지역에 살고 있지만, 백이진( 남주혁 )은 화면이 분할된 경계를 넘어 나희도( 김태리 )의 손을 잡고 그를 자신의 공간으로 데려오고, 등대를 향해 뛰어간다. 바로 뒤에 이어지는 장면에서는 이진이 과거에 남긴 음성메시지를 희도가 반복적으로 듣는 모습이 나타난다. 드라마가 방영될 당시는 코로나19로 인한 팬데믹의 여파가 가시지 않은 때였다. 그래서 음성메시지를 재생하는 공중전화기를 매개체로 설정한 이 장면은 더더욱, 팬데믹 기간 동안 서로 분리되어 있던 이들의 시공간을 이어준 미디어 기술의 효과를 연상시킨다. 그리고 장면의 시간적 배경 역시 국내에서 외환위기가 발발한 때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1998년으로 설정함으로써, OTT 플랫폼을 이용하는 수많은 해외 감상자들이 한국인들만이 느낄 수 있던 감정과 애환에 공감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미디어는 물리적 거리를 둔 채 떨어져 있는 시공간을 봉합하는 역할을 한다. <스물다섯 스물하나> 중 (사진: 유튜브 tvN DRAMA) 그리고 나희도는 음성메시지를 반복 재생하기 위해 공중전화기의 버튼을 계속 누르고, 그가 눈물짓는 모습 역시 소프트 포커스에 클로즈업으로 잡힌다. 한국드라마나 영화를 스트리밍할 수 있는 OTT 플랫폼은 사실 한국인들의 감정을 아카이빙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그 감정들을 지속적으로 접하기 위해 이용자는 이 장면에서 보이는 것처럼 재생 버튼을 누르기만 하면 된다는, 매체의 생태학과 연관된 측면 역시 이 장면에서 지각할 수 있다. 물론 극장상영 문화 역시 여전히 중요하지만, 시공간적 제약을 극복하면서 감상자의 마음에 사적이면서도 친밀한 문화로 자리매김한 ‘스트리밍’의 존재감이 드러나는 것이다. 콘텐츠에 대한 근본적 물음의 중요성 한국영화의 영문 연구에 관한 일반적인 이야기를 들려드리면서 강연을 마치고 싶다. 젊은 학생이나 연구자들이라면, 한국영화와 미디어에 대해 보다 본질적인 질문을 던져보기를 바란다. 물론 기존에 발표된 논의를 많이 살펴보고 존중할 필요도 있지만, 여기에는 미디어를 통해 상기하게 되는 유의미한 질문들이 빠져있을 때도 있다. 민주주의 사회의 시민으로서 더 나은 삶을 살아갈 방법, 타인의 의견을 존중하는 방법, 정의에 대한 이해, 한국이 세계와 맺는 관계에 대한 성찰과 같이 아직 충분히 답해지지 못한 질문들에 집중해보자. 한국드라마의 매력을 분석하는 연구 분야에 한해서는 특히 ‘감정’이라는 주제가 더 많이 연구되었으면 한다. 그리고 한국영화와 드라마는 한국인들이 본능적으로 친숙함을 느끼는 영역인 만큼, 한국인들이라서 더욱 민감하게 분석할 수 있는 지점을 내포하고 있다. 그와 관련된 연구를 체계적인 학술 프로젝트로 육성하기 위해 노력하는 연구자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 질문과 답변 * (질문1) 영화나 미디어와 관련해 주로 연구하고 계신 윤리, 도덕성, 감정 등은 상당히 초국가적인 주제인 것 같다. 그런데 ‘한국영화와 드라마’라는 내셔널 시네마에 근접한 개념 을 활용해 이를 연구하신다면 약간의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도 있을 듯한데, 관련하여 고민하고 계신 부분이 있으실지 궁금하다. 동시에, 한국영화나 드라마가 초국가적 콘텐츠가 되면서 다른 국가의 콘텐츠 창작에 발휘하는 영향력 을 어떻게 평가하시는지도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다. (답변) 첫 번째 질문과 관련해서는, 국가성을 띤 개념을 활용함으로써 발생하는 위험을 안고서라도 연구를 이어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관련 주제를 연구할 때 주로 참고하는 텍스트는 롤랑 바르트의 Camera Lucida: Reflections on Photography (밝은 방: 사진에 관한 노트, 1980)로, 바르트는 여기서 사진에 항상 죽음과 시간성이 내재되어 있음을 논의한다. 그는 자신이 태어나기 전에 촬영된 어머니의 사진을 다루며,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 집필을 이어간 시점에서 해당 사진을 통해 자신의 유한성을 깨닫게 되었다고 덧붙인다. 이렇게 사진이나 영상의 이면에는 ‘ 인식 ’을 필요로 하는 요소들이 있음을 잊지 않은 채로 영화를 연구했으면 한다. 이미지에 대한 빠른 소비는 오해와 오독, 정치적 편향을 낳기 쉽다. 어떠한 인식을 전제로 이미지에 접근하는 것이 위험할 수는 있지만, 바르트 역시 사물이나 현상의 ‘전체’를 드러낼 수 없는 사진만을 주제로 위 논의를 이어갔기에, 그 역시 어느 정도의 위험을 품고 이미지에 대한 논의를 전개하는 시도를 보였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태도를 바탕으로 오늘날의 콘텐츠에서 등장하는 이미지들을 보면 국가 또는 남성주의적 의도를 읽어낼 수도 있다는 점에서, 영화연구에도 이 관점을 적용하고자 한다. 두 번째 질문에 대해 답변 드리자면, 사실 최근에는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 각지의 콘텐츠가 초국가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그래서 다른 국가의 창작자들이 한국 콘텐츠를 얼마나, 또 어떻게 모방하고 있는지는 구체적으로는 알기 어렵다. 다만 나는 ‘감정’의 발생을 강조하는 한국드라마나 영화가, 영상 매체의 내러티브에 잠재된 감정 전달 능력을 활성화 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그러므로 해당 연구 주제는 한국 콘텐츠가 아니라 ‘ 미디어 ’와 관련된다고 이해해할 수 있다. (질문2) 한국영화와 드라마의 인지도가 갈수록 높아지면서 작품들이 활발히 제작되고 있지만, 역설적이게도 이에 대한 연구는 오히려 해외에서 주로 이뤄지고 있는 듯하다. 지역을 북미 로 한정한다면, 북미 내에서 한국영화와 드라마에 대한 연구는 어느 정도 규모로 진행되고 있는지가 궁금하다. 그리고 앞으로 이런 연구들이 어떤 방식과 비전 을 가지고 발전해야 한다고 보시는지도 여쭤보고 싶다. (영화저널리스트 김형석) (답변) 학술지를 편집하다보면, 한국영화와 드라마를 주제로 한 원고가 최근 상당히 많이 투고되고 있다. 다만 필자들은 대부분 인도나 동유럽, 러시아 출신이고, 영어권 필자들의 비중은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몇몇 연구자들은 그 이유가 근래 한국영화의 중요도가 낮아져서, 혹은 K-팝이나 한국드라마를 분석하는 방법론이 여전히 모호해서라고 이야기한다. 나와 비슷한 시기를 살아온 연구자들이 과거에 학계에서 교육받은 내용은 이제 구시대적인 방법론으로 평가받는다. 그래서 새로운 연구 방법론 을 찾고, 최근 영화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의 주 관심사인 동시대 한국영화 에 관심을 가지고 여러 편의 글을 써야 할 것이다. 지난 몇 년 간 한국에서 발표된 상업영화들은 아쉽게도 ‘상업영화’라는 이유로 학술적으로 충분히 연구되지 못한 경우가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이와 같은 작품들에 대한 영문 연구는 거의 이뤄지지 않으므로, 누군가가 시작하여 텍스트를 마련해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질문3) 한국드라마의 정서적 막간에서 올드 미디어가 사용되는 방식을 <스물다섯 스물하나>의 장면으로 보여주신 점이 인상적이었다. 최근 그룹 뉴진스의 <Ditto> 뮤직비디오에서 등장한 비디오테이프도 비슷한 맥락에서 해석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다면 선생님께서는 한국드라마와 K-팝(뮤직비디오)의 미학적 정체성 이 어떻게 다르다고 생각하시는지가 궁금하다. 더불어, 시간의 정치성에 관해서도 여쭤보고 싶다. 선생님께서는 독일과 미국, 한국의 영화를 다루심으로써 초국가적 비교연구를 진행하고 계신 것으로 이해했다. 철학자 에른스트 블로흐가 이야기한 비동시성의 동시성(자본주의와 산업화가 발생한 시대에 근대적 및 전근대적 요소를 비롯한 이질적 사회적 요소들이 동시에 존재하는 현상)이라는 개념도 적용할 수 있을 듯한데, 세 국가의 시간성을 어떻게 병합하여 비교연구를 진행하고 계신지 에 대해 듣고 싶다. (답변) 한국드라마에서의 정서적 막간이 K-팝 뮤직비디오와 유사한 느낌을 준다는 데 동의한다. 중요한 것은 한국어를 모르는 외국인도 이 정서적 막간에서만큼은 언어에 구애받지 않고 같은 감정을 포착할 수 있다는 점이다. 나는 음악과 이미지가 관계를 맺음 으로써 이것이 가능해진다고 생각한다. 음악은 이미지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시공간의 제한 없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그 자체로 초국가적이면서 마법과 같은 힘을 지닌 요소이다. 그래서 음악이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한국드라마에서의 정서적 막간이 K-팝 뮤직비디오와 유사한 구조를 갖추게 되는 듯하다. 두 번째 질문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연구에 임할 때 내 자신을 ‘지식인’으로 설정하려는 마음이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언급해주신 블로흐의 관점에서 보자면, 시간이 비껴간(untimely) 세계 에서 지식인 으로서 활동하며 세 국가에 내재된 시간성 사이를 오고 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나이가 들수록, 내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주제보다 동시대 학생들이 주목하는 주제에 대해 연구하고자 하는 마음이 커진다.) 연구를 시작한 초반에는, ‘독일 분과의 유일한 한국인’ 또는 ‘영화학과에서 윌리엄 프리드킨에게 관심을 가진 유일한 학생’과 같은 신분이었기에, 연구자로서 내가 어떤 관점을 가지고 설득해 나갈 수 있을지를 고민하면서 여러 국가나 문화권의 이론을 참고했던 것 같다. 그리고 나는 한국영화나 드라마를 많이 감상하기는 하지만, 이를 연구하는 분야에서는 사실 아직 ‘외부자’에 가깝다. 그럼에도 지금의 젊은 세대의 학생이나 연구자들에게, 현재 본인들이 흥미를 가지고 있는 주제에 대해 주저하지 말고 연구를 시작하라고 조언하고 싶다. 과거에 연구를 시작한 시점의 나 역시, 미국에 위치한 한국계 지식인으로서 내가 가졌던 관심에 충실했기 때문이다. 이 여정을 블로흐의 개념을 빌려 해석해주신 점이 정말 흥미롭다. (질문4) 현재 비교문학 석사 과정에 재학 중이다. 함께 연구하는 동료 중, ‘한국드라마’를 소재로 설정한 이들은 대부분 해외 출신이라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그런데 드라마 연구를 위한 적당한 방법론을 찾기가 매우 어렵다. 영화처럼 분절된 텍스트가 아니기에 드라마 특유의 연속성을 어떻게 분석해야 하는지, 상업적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비평적으로만 독해해서 단순히 문화산업의 산출물 중 일부로만 취급할 것인지 등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하게 된다. 이러한 고민을 안고서라도 한국드라마를 연구 주제로 선택하는 이들이 대부분 외국인이라는 점이 특별하다. 그래서 어쩌면, 드라마와 관련하여 한국인들이 연구 주제라고 생각하지 못했거나 굳이 연구를 시도하지 않았던 부분을 새로운 연구 대상으로 부상시키는 주체는 외부인 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선생님의 강연을 들으면서도 이 점이 명확하게 느껴졌는데,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를 여쭈어보고자 한다. (답변) 나 역시 수업 중 외국인 학생들을 만나 그들이 한국드라마의 어떠한 부분에 흥미를 가졌는지를 물어야 할 때가 있다. 다만 그들과 나는 출신 국가는 물론 성별이나 연령이 다른 경우가 많기에, 그들이 정확히 어떤 이유에서 특정 작품이나 장면을 인상적이라고 느꼈는지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다만 인류학적 연구 방법론으로서, 외부인이 특정 집단을 이해하기 위해 그 집단의 일원으로 활동하며 구성원들을 지켜보는 참여 관찰법 (Participant observation)에서와 같은 태도를 갖춰 보기를 권한다. 자신이 본래 가지고 있던 관점으로부터 벗어나 외국인 연구자들의 드라마 감상 후기에 대해 직접 문의하고 대화 함으로써, 그들이 한국드라마에서 새롭게 짚어낸 지점을 발견해보자. *** 주1. Min Joo Lee, “Touring the land of romance: transnational Korean television drama consumption from online desires to offline intimacy”, Journal of Tourism and Cultural Change , vol. 18., No. 1., 2020, pp. 67~80.
1 인간은 영화관에 가는 동물이다. -조르조 아감벤 2 정상적인 관객은 자신이 욕망하기를 좋아하는 것을 보기 위해 영화관에 가는 사람이며, 자신이 이미 인생에서 싫어하는 것을 영화관으로 보러 가지 않은 사람이다. -세르쥬 다네 3 일요일의 충무로는 처음이었다. 직접 차를 운전해서 간 것도 처음… 한때 매일같이 충무로에 가던 시절이 있었다. 충정로에 있던 회사에서 퇴근해 7011번 버스를 타고 매일경제본사 앞에서 내려 영한빌딩까지 걸어가 여자친구가 일을 마치기를 기다리던 20대 후반의 몇 년, 그리고 은평구에 있던 집에서 3호선을 타고 6번 출구로 나와 매일경제본사 맞은편에 있던 ‘동화삘딍’ 4층 사무실에서 아저씨들과 머리를 맞대고 한숨과 담배연기를 번갈아 내뱉으며 시나리오를 쓰던 30대 후반의 일 년. 이제는 다 지난 일이다. 그때 충무로는 내게 해질 무렵의 골목, 커피와 생맥주, 닭꼬치, 돼지껍데기, 철판스테이크, 복지리, 통북어, 하루종일 가시지 않는 지독한 담배 냄새, 낡은 당구장, 서지 않는 택시 같은 것이었지만 무엇보다 영화였고(여자친구가 참여한), 그리고 영화였다(내가 연루된). 그리고 오늘, 40대가 되어 처음 가는 충무로 역시 영화가 될 예정이었다. 나를 모르고 나도 모르는 사람들의 영화. 영화들. 얼마나 다행인가? 내 영화가 아니라는 게… 4 영화란 무엇인가? 이 오래된 질문에 대한 답을 장 루이 뢰트라와 수잔 리앙드라 기그는 이렇게 요약한다. 코 앞에서 볼 수 있는 진정한 악마의 소굴, 왕관을 다투는 시장, 배움의 장소—말하자면 감정교육, 많은 사람들의 오락, 일부 사람들의 직업, 어떤 사람들의 열정, 여기저기서 채취해 온 1-2시간의 소재, 별 아래서 보내는 온종일, 대낮 같은 밤, 어두운 밤으로 빨려드는 불빛, 친구와 가까운 사람들 사이의 토론, 계속되는 이야기들, 역사의 단편, 움직임-지속의 덩어리, ‘현실’과의 아주 특별한 관계 설정(현실을 회피하시오, 그러면 현실이 당신을 따라가고, 현실을 따라가시오, 그러면 현실은 당신에게서 도망간다!), 위험할 정도로 서로가 닮아 있는 영화 속의 얼굴과 신체들, 진부하거나 기상천외한 대상들과 풍경들, 마치 우리가 항상 살았던 듯한 느낌을 갖는 상상 속의 저택과 또 다른 화려한 저택들, 일시적인 경험, 은밀하고 격렬한 열정이나 몸짓들, 나를 끌어들이고 빨려 들게 하는 방식, 또는 단숨에 혹은 한순간에 불확실하거나 형성중인 사고나 상상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하는 방식, 사회, 사람들이 말한 것, 타인과 나 자신과의 관계에 대한 꿋꿋한 시선… 5 나는 이 목록에 두 가지를 덧붙이고 싶다. 브루스 윌리스와 니콜라스 케이지. 내게 영화는 브루스 윌리스다. 동시에 내게 영화는 니콜라스 케이지기도 하다. 둘은 마치 동전의 양면 같다. 블록버스터와 컬트무비와 허섭쓰레기를 오가는 그들의 긴-긴 필모그래피에서 함께 출연한 영화가 단 한 편도 없다는 사실을 떠올려보라(그나마 브루스 윌리스가 출연한 로버트 로드리게즈의 < 플래닛 테러 >와 쿠엔틴 타란티노의 < 데쓰 프루프 >를 ‘동시상영’으로 묶은 <그라인드 하우스> 중간에 삽입된 4편의 가짜 영화 예고편 중에서 롭 좀비가 연출한 <나치의 늑대여인Werewolf Women of the S.S.>에 니콜라스 케이지가 출연한 경우가 가장 근접함). 따라서 브루스 윌리스가 실어증으로 은퇴를 선언한 2022년 3월 31일은 영화가 죽은 날(the day the movie died)이다. 적어도 반쯤은 그렇다… 6 충무로를 다시 찾은 건 『마테리알』이 주최한 릴레이 발표대회 [오픈 스페이스: 영화를 가르는 패스]를 관람하기 위해서였다. 아침 10시 30분부터 오후 5시까지, 4월 16일과 17일 이틀에 걸쳐, 모두 여섯 명의 발표자가 발표를 한다고 했다. 토요일 한국 독립 영화 사운드를 대하는 태도에 대하여 / 최지영(사운드 디자이너) 언제나 밝은 방에서 여러개의 창을 틀어놓고 / 윤원화(시각문화 연구자) 정당화하는 관점: 임흥순에 대한 불만 / 윤아랑(비평가) 일요일 비천한 영화를 위하여, 그 중에서도 한국 영화 / 함연선(마테리알 편집인) 문화로서 영화: 누가 도대체 진지한 표정으로 영화 이야기를 들을까? 당신도 / 강덕구(작가, 비평공유플랫폼 '콜리그' 운영자) 해적질과 영화 문화 / 한민수 모두 매력적인 주제들 가운데서 특히 내 눈을 잡아끈 것은 함연선의 ‘비천한 영화를 위하여, 그 중에서도 한국 영화’였다. 때마침 JD와 나는 봉준호, 홍상수, 이창동 같은 이름에 전적으로 기대지 않고, 관객수로 줄을 세우지도 않으면서 21세기 첫 20년의 한국 영화를 이야기하는 방법을 고민하던 참이었다. 우리는 그 모든 영화들이 없었던 것처럼 굴고 싶지 않았고, 누구도 모르는 영화를 우리가 ‘발굴’한 것처럼 굴고 싶지도 않았다. 나는 행사 안내 페이지를 캡쳐해서 JD에게 보냈다. "제일 좋아하는 영화가 무엇이냐"는 수학 학원 선생님의 질문에 "화산고"라고 대답한 학생은 망신을 당하고 맙니다. '차라리 <스파이더맨>이라고 말했다면 괜찮았을까...?' 수치의 순간을 끊임없이 되새김질한 사춘기 청소년은, 결국 유사-스노브로 성장하고...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자신의 영화 경험의 근원에는 "비천한 영화들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다음 원고를 위해 저는 여기에 가야겠어요, 그리고 어쩌면 임창정에 대해 쓸지도 모르겠네요, 쓰고 싶지 않지만요. 쏘옥, 소리와 함께 아이메시지가 전송되었다. 답장은 없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메시지를 작성 중이라는 말풍선조차 뜨지 않았다. 나도 구태여 오픈 스페이스 날짜가 원고 마감일 이후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어쩔 수 없이 원고 마감일을 어길 수밖에 없다는 말은… 7 왜 모든 영화 관련 이벤트(GV, 강연, 세미나, 기타 등등)는 내가 가기 힘든 시간만 골라서 열리는지 모르겠다. 씨네필들은 가정이 없나? 아니면 가정이 없는 것처럼 가정하고 살아가거나… 다네는 말한다. “영화 팬은? 헛되이 두 눈을 크게 껌뻑거리는 사람이지만, 이해하지 못한 것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는 사람이며, 프로다운 ‘영화 팬(영화를 보는 사람)’이라는 삶을 준비하는 사람이다. 이것은 자신의 약점을 감추려는 행위들이다.” 뢰트라와 기그는 여기에 축제가 아직도 진행중이라고 믿는 표정을 지으면서 최대한 아주 늦게 도착하는 것이 틀림없이 사람들이 영화 팬이라고 부르는 것의 핵심이라고 덧붙인다. 물론 나는 영화-어쩌고가 아니며 그렇게 되고 싶은 마음도 없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본의 아니게 영화 팬의 핵심을 수행하긴 했는데, 짧게 이야기하면 이렇다. 내가 차를 몰고 갔다는 사실은 앞서 말했다. 오픈 스페이스를 마치고 처갓집으로 아내와 아이를 데리러 가야 했기 때문이다. 철거된 동화빌딩과 매일경제본사 사이에 있는 노상공영주차장(주말과 공휴일에는 무료개방)에 주차하면 되겠거니 생각했는데 빈자리가 없었고 그래서 (저렴한 금액으로) 주차할 곳을 찾아 빙글빙글 돌다보니 시간이 흘렀다. 결국 (구)극동빌딩 (현)남산스퀘어빌딩에 차를 세우고 오픈 스페이스가 열리는 대한극장 뒷골목의 서울지역영화교육허브센터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30분도 더 늦은 시간이었다. 문앞에 선 채로 돌아갈까? 잠시 고민하기도 했지만 그냥 들어가기로 했다. 일정에 따르면 첫 번째 발표에는 2시간이 배정되어 있었고, 그래서 나는 축제가 아직도 진행중이라고 믿는 표정 을 지으면서 발표회장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설상가상, 빈자리가 없어 발표자를 정면으로 마주하는 맨 앞자리까지 빽빽하게 앉아 있는 사람들의 틈을 비집으며… 8 한숨을 채 돌리기도 전에 발표가 끝나버렸다. 스탠리 카벨은 누구나 자신이 지금 여기 있다는 것, 자신의 인생이 이 시간과 장소라는 지점에 이르게 된 것, 자신의 역사가 펼쳐져서 이 방에, 이 길에, 이 곳에 이르게 된 것을 잠깐이나마 기이하게 여긴 적이 있을 것이라고 썼는데, 그때 내가 그랬다. 질의응답이 시작되었지만 계획이 완전히 어그러졌다는 생각에 좀처럼 집중할 수 없었다. 그러다 옆자리에 앉아 있는 문윤기를 보았고—나와 그는 JD를 통해 알게 된 사이였다—인사를 나누었다. 그러면서 조금씩 현실 감각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의 옆자리에 앉은 사람이 실은 나와 ‘트친’인 영화평론가이고, 그밖에도 이 좁은 장소에 내가 타임라인에서 보아 왔던 사람들이 득시글하다는 사실은 나중에야 알았다. 기이함the uncanny은 영화에서는 보통의 경험이다, 라고 스탠리 카벨은 계속해서 쓴다. 도주, 구출, 우연의 만남이나 근처에 있는 탓에 인생이 변모해버리는 것—이러한 우연과 만남은 영화의 모든 장르를 지탱해주는 것이다. 물론 현실은 영화가 아니다. 대부분의 경우 우연한 만남은 우연한 만남일 뿐 인생을 바꾸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아무 영향도 끼치지 않는 건 또 아닌데, 모든 만남은 크건 작건 우리 안에 어떤 식으로든 흔적을 남기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건 영화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한 편의 ‘위대한’ 영화가 우리의 인생을 바꾸지는 않는다. 하지만 수백 편의 ‘비천한 영화’는 우리의 인생을 바꾼다, 제법 높은 확률로… 9 카벨은 음악이나 문학과 달리 영화의 경우에는 보통의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높은 레벨의 영화를 진정으로 좋아하기는 어렵다고 말한다. 전형적인 영화를 모른다면 높은 레벨의 영화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문제는 ‘보통의 영화’를 어떤 방식으로 말하느냐다. 카벨 스스로 이미 ‘보통의 영화’와 ‘높은 레벨의 영화’를 구분 짓고 있는 판에 하물며 ‘비천한 영화’는 또 어떻게 말할 것인가? 질의응답 시간에 이어진 것도 그런 이야기들이었다. 2000년대 초중반에 몰려 있는 비천한 영화들, 혹자는 OCN 영화들이라고도 부르는 그것들이 영화 경험의 근원에 있다고 해도 그것을 굳이 복원시킬—비평적 공론장으로 끌어올릴—필요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나왔고, 현재의 영화 담론이 특수한 세대적 경험을 보편으로 인준하는 시스템 속에서 작동되고 있으므로 이러한 영화들을 비평의 언어로 끌어들여 담론장에 균열을 낼 필요가 있다는 반론이 있었다. 그렇지만 정작 나를 놀라게 하고 두렵게 만든 건 따로 있었다. 00년생이어서, 02년생이어서, 90년대 후반생이어서 오늘 언급된 < 달마야 놀자 >, < 신라의 달밤 >, < 두사부일체 >, < 조폭 마누라 > 같은 영화를 한 편도 보지 못했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절로 식은땀이 흘렀다. 설마 여기서 내가 제일 나이 많은 사람인가? 다행히 그건 아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아마 나는 두 번째로 나이가 많은… 10 항상 12살 짜리가 있는 법이고 그들에게 맞는 책이 역시 있는 법이다. 스탠리 카벨은 말한다. 하지만 영화는, 걸작이 아닌 다음에야, 예전 그대로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이어지는 카벨의 목록: 찰스 로튼과 클라크 게이블의 <전함 바운티>, <십자군>, <유니온 퍼시픽>, <새벽의 성찰>, < 캡틴 블러드 >, <알제리>, <찰리 챈>, <폭풍의 언덕>, < 스텔라 달라스 >, <킹스 로우>, <교수와 미녀>, 로날드 콜만의 < 젠다성의 포로 >, < 마음의 행로 >, < 잃어버린 지평선 >, <후아레즈>, <데드 엔드>, <모히칸족의 최후>, <부러진 화살>, <장군, 새벽에 죽다>, <밀드레드 피어스>, <오페라의 유령>, < 스트라이크 업 더 밴드 >, <비에 노래하며>, < 캣 피플 >, <환상의 여인>, <도시의 절규>, <안녕, 내 사랑>, <화이트 히트> 등 그밖에 백 여편의 다른 영화들. 카벨은 계속해서 말한다. 이 영화들과 보낸 시간은 정말 전율의 시간이나 나날이었다. 중대한 순간이었지만 아주 일순간이었다. 기억과 회상에서만 포착 가능한 시간으로 이미 지나가버린 시간이다. 지금 당신이 이 영화들을 처음 본다면 재미있게 볼 뿐 아니라 감동을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신은 결코 그 당시 내가 알았던 것을 알 수는 없을 것이다. 오해하면 안 된다. 카벨은 지금 정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지식이나 교양으로 환원할 수 없는 개인의 영화 경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이렇다: < 동감 >, < 번지 점프를 하다 >, < 친구 >, < 엽기적인 그녀 >, < 킬러들의 수다 >, < 공공의 적 >, < 결혼은, 미친짓이다 >, < 후 아 유 >, < 라이터를 켜라 >, < 연애소설 >, < 광복절 특사 >, < 품행제로 >, < 클래식 >, < 동갑내기 과외하기 >, < 선생 김봉두 >, < 와일드 카드 >, < 싱글즈 >, < 오! 브라더스 >, < 황산벌 >, < 그녀를 믿지 마세요 >, < 어린신부 >, < 효자동 이발사 >, < 늑대의 유혹 >, < 바람의 파이터 >, < 시실리 2km >, < 알포인트 >, < 슈퍼스타 감사용 >, < 귀신이 산다 >, < 말아톤 >, < 잠복근무 >, < 혈의 누 >, < 사랑니 >, < 광식이 동생 광태 >, < 태풍 >, < 작업의 정석 >, < 싸움의 기술 >, < 흡혈형사 나도열 >, < 음란서생 >, < 달콤, 살벌한 연인 >, < 사생결단 >, < 구타유발자들 >, < 천하장사 마돈나 >, < 미녀는 괴로워 >, < 1번가의 기적 >, < 좋지 아니한가 >, < 이장과 군수 >, < 즐거운 인생 >, < 스카우트 > 기타 등등… 이것은 내가 왓챠피디아에 평가한 1499편의 영화 중 2000년대 이후 한국 영화를 구작순으로 필터링한 것 중에서 봉, 홍, 박, 이 등의 작품과 여기에 제목을 쓴다는 생각만으로도 소름 끼치는 작품을 빼고 나열해본 것이다. 모든 영화가 내게 전율을 줬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최소한 한두 장면이라도 재미를 느낀 부분이 있었다고 말해야겠다. 나 역시 빙크스 볼링처럼 “못 만든 영화라도 일단 빠져들면 무척 행복”한 관객이기 때문이다. 11 다시. 문제는 이런 영화를 어떻게 말하느냐다. 카벨은 모든 시대의 12살에게 맞는 공통의 책들이 있는 반면, 서로 다른 시대의 12살에게는 그때그때의 영화들이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다시 말해, 걸작 리스트는 공유가 가능하지만 어쩌면 평범하거나 비천한 영화들의 리스트는 공유 불가능한 게 아닐까(“지금 당신이 이 영화들을 처음 본다면 재미있게 볼 뿐 아니라 감동을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신은 결코 그 당시 내가 알았던 것을 알 수는 없을 것이다”)? 사진에 대한 바르트의 구분처럼, 걸작은 문화적으로 구성된 스투디움의 영역이지만 비천한 영화는 보는 사람의 주관에 달린 푼크툼 같은 게 아닐까? 여기에는 다양한 층위가 뒤섞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들을 위해서는 또 다른 자리가 필요할 것이다. 다만 우리에게는 21세기 첫 20년의 한국 영화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 하는 문제만이 (여전히) 남아 있다. 걸작을 나열하지도, 천만 영화 목록을 훑지도 않으면서. 다시 한 번,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우리는 한국 사람… 12 우리가 하려는 게 비평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해둬야겠다. 누구보다 나 자신에게. 내게 필요한 건 책이 아니라 카메라였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겠다. 오픈 스페이스에서 나왔던 이야기를 곱씹으며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는 것도 물론 좋지만, 그보다는 오픈 스페이스 현장을 찍는 편이 나았을 거라는 말이다. 에세이 필름을 만들어야 하니까. 늘 그랬던 것처럼 영화 그 자체가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니까 니콜라스 케이지가. 최근 케이지는 < 참을 수 없는 무게의 미친 능력 >에서 한때 잘나가던 슈퍼스타였지만 이제는 빚더미에 올라 아무 영화나 막 찍는 ‘닉 케이지’를 연기했다. 그가 자신의 광팬이자 억만장자 마약왕인 페드로 파스칼의 생일 파티에 참석했다가 예기치 못한 소동에 휘말리는 이야기라는데 내가 본 건 트위터에 돌아다니는 짧은, 그러나 영감으로 넘치는 클립이다. 으리으리한 페드로 파스칼의 집. 파스칼이 소파에 앉아 있는 케이지에게 와인을 따라준다. 케이지 고마워. (사이) 말 좀 그만 돌리고 대답해봐. 세 번째로 좋아하는 영화가 대체 뭐야? 숨을 깊게 들이마시는 파스칼, 결심한듯 내뱉는다. 파스칼 패딩턴 2 . 비명을 지르며 잔을 내려놓는 케이지. 케이지 뭐? <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 >이랑 <패딩턴 2>?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내 말은, 잘난 척하려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파스칼 영화 보는 내내 울었어.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게 만드는 영화였다고. 케이지 야, X까! 장면 바뀌면, 화면을 바라보며 코를 훌쩍이는 케이지의 모습. 나는 JD에게 링크를 보내고, 기다린다. 여전히 답이 없다. 말풍선도… *다음 책들에서 많은 부분을 차용했다. [영화를 생각하다](장 루이 뢰트라.수잔 리앙드라 기그, 김영모 옮김, 동문선, 2005) [눈에 비치는 세계](스탠리 카벨, 이두희.박진희 옮김, 이모션북스, 2014) (관련글) 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 , 금정연, 2021.03.19. 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 , 정지돈, 2021.05.07. 3.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3) , 금정연, 2021.06.11. 4.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4) , 정지돈, 2021.07.03. 5.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5), 금정연, 2021.08.06. 6.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6), 정지돈, 2021.08.31. 7.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7) , 금정연, 2021.10.08. 8.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8) , 정지돈, 2021.11.05. 9.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9) , 금정연, 2021.12.03. 10.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0) , 정지돈, 2021.12.31. 1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1) , 금정연, 2022.03.02. 1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2) , 정지돈, 2022.03.30. 13.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3) , 금정연, 2022.05.11. 14.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4) , 정지돈, 2022.06.10. 15.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5) , 금정연, 2022.07.08. 16.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6) , 정지돈, 2022.08.03. 17.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7) , 금정연, 2022.08.31. 18.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8) , 정지돈, 2022.10.14. 19.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9) , 금정연, 2022.11.11. 20.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0) , 금정연, 2022.12.07. 2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1) , 정지돈, 2022.12.15. 2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2) , 정지돈, 2022.12.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