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차로 온 사나이
- 감독
- 임권택
- 제작년도
- 1970
- 출연
- 박노식, 윤양하, 고상미, 허장강, 남미리, 독고성, 황백, 박동룡, 장혁, 이철, 이예민, 유하나, 라정옥
사태가 대단히 복잡하지 않은가. 상징적인 것은 직접적인 것이고, 현전은 부재이며, 지연되지 않은 것이 지연되며, 희열은 죽음의 위협이다. 더구나 이런 체계, 대리보충의 이 이상한 경제에 추가되어야 할 특징이 하나 더 있다. 어떤 면에서 그것은 이미 판독할 수 있었다. 무시무시한 위협인 대리보충은 또한 최초의 가장 확실한 보호라는 점이다. 그 위협 자체에 대해서 말이다. 이 때문에 대리보충을 포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 이 말은 내가 아니라 데리다가 「그라마톨로지」의 제2부 두 번째 장 ‘이 위험한 대리보충...’에서 루소의 「참회록」을 설명하며 꺼내 든 것이다. 너무 유명한 문장이라 모두들 이미 잘 알고 있을지 모른다. 나는 구태여 대리보충(la supplement)에 대해서 장황한 설명을 늘어놓지 않겠다. 다만 아주 제한적으로 이상하게도 우리를 막아서면서 환원 불가능하게 버티어선 그 흔적을 설명해보고 싶다. 왜냐하면 그 자리는 결정을 가로 막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인가, 저것인가. 결정의 망설임. 그 흔적이 무언가 더해진 잉여의 덧셈에 따라 보충된 것인지(le supplement) 아니면 다른 무언가와 바꿔치기 당한 다음 대리하는 것인지(la suppleance) 그저 하염없이 멈춰 서 있을 수밖에 없는 장소. 물론 루소를 경유하여 데리다가 말하려는 것은 예술과 자연 사이의 대차대조표이다. 나는 거기서 물러나서 단지 이 텍스트 안에서 활동하는 저 텍스트가 왜 항상 환대받지 못하는지를 물어보고 싶다. 왜 스스로 충만하지 못한 채 그 틈새 사이에서 출몰하는 저것은 여기서 무엇을 하려는 것일까. 저 안의 외침. 바깥이라는 안. 안에 있는 바깥. 무엇이 부족함을 대신하고 그런 다음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는 것일까. 「그라마톨로지」 사태를 좀 단순하게 만들고 싶다. 임권택 의 영화들, 그중에서도 불편한 영화들을 볼 때마다 영화를 구성하고 있는 참조 틀의 어딘가가 부서져 나갔다는 인상을 받는다. 내가 지금 하려는 이야기는 단지 1967년 그 어딘가에서 1977년 어디까지에 한정 지어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를테면 < 욕망의 결산 >(1963), 혹은 < 달빛 길어 올리기 >(2009), < 신궁 >(1979), 그리고 < 아다다 >(1989). 단지 그 부서져 나간 표면의 범위를 따분하게도 바깥과의 대화라는 식으로 설명하는 것은 충분한 알리바이가 아니다. 여기에는 어떤 과정이 있을 것이다. 각자의 영화는 영화사에 대한 각자의 은유라고 고다르가 말했다. 그걸 단지 어디선가에서 빌려온 영향이라고만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반대로 처음부터 거기 있었기 때문에 안에서 생산되었을 뿐만 아니라 바깥에서 뛰어 들어왔을 것이다. 나는 이 논리를 좀 더 밀고 나아가고 싶다. (스피노자의 표현을 빌리면) 핵심은 안에서 긍정하기 위해 그것은 바깥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 전도를 위해서 방법의 전위(轉位)와 그 수순에 따른 재평가의 결과로 나타난 영화에로 다시 되돌아가야 하는 요구를 순순히 따라야 한다. 여기서 왜 내가 까다로운 데리다의 전술적인 용어를 내세웠는지 받아들여 줬으면 좋겠다. 나는 임권택의 영화에서 이 불편함을 말할 때 종종 그 영화에 제한적으로 주어진 데서 설명을 시작하는 것이 잘못된, 아주 잘못된, 그래서 임권택의 진정한 시작의 지점을 놓치는 실패를 항상 가져온 것이 아닌지 의심하게 된다. 반대로 이것을 최종 결과의 효과라는 데서 시작해보면 안될까. 이유들의 순서에 종속되지 않은 대리, 그사이에 재빨리 끼어드는 보충. 우리는 올바른 시작을 찾아야 한다. 그래야만 불편한 실패들 속에서 자기원인의 동어반복 안으로 이끌려 들어가는 악순환을 탈출할 수 있을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나는 임권택의 영화 안에서 진화론적인 모델을 거부한다. 그건 그 영화들 사이에 놓인 영향 관계를 과도하게 단순화시킬 뿐만 아니라 자꾸만 그 어딘가에서 어슬렁거리는 목적론적인 설명의 함정에로 이끈다. 나는 영화들 사이의 관계에서 서사를 만들어내고 싶지 않다. 임권택의 영화들은 내게 그런 설명이 결국에는 왜 불가능한지를 알려주는 목록이다. 월하의 검 (1970) < 월하의 검 >을 가장 단순하게 말하면 재난에 가까운 실패이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임권택 에게 의미 있는 실패라고 말하고 싶지도 않다. 그는 여기서 무언가를 의식하고 있지도 않다. 그 어떤 것을 하려고도 하지 않았으며 그 무언가를 해본 것도 아니다. 1970년은 임권택에게 그런 해이다. 그 해에 임권택은 여덟 편의 영화를 만들었다. < 애꾸눈 박 > < 이슬 맞은 백일홍 > < 비내리는 선창가 > < 그 여자를 쫓아라 > < 밤차로 온 사나이 > < 속눈썹이 긴 여자 > < 비검 > 그리고 < 월하의 검 >. 어떤 일관성도 없는 영화들. 하지만 이 실패가 나에게는 의미가 있다. 사태가 그렇게 단순하지 않기 때문이다. 단지 그것을 임권택의 무능력에로 돌리기에는 그에 앞선 영화들을 생각하게 된다. 무엇보다도 그의 첫 번째 영화 < 두만강아 잘 있거라 >의 마지막 시퀀스 전부. 혹은 세 번째 영화 < 망부석 >. 나는 자꾸만 그의 실패한 영화들을 실패한 작품들이라고 부르기보다는 실패한 상황이라고 부르고 싶어진다. 그 영화들은 실패라는 조건 속에서 자기들의 방법으로 실존하는 중이다. 실패와 부딪쳐서 부서져 나가는 영화의 모습. 나는 그 모습을 지금 바라보는 중이다. 그때 부서져 나가는 참조 틀 사이로 드러나고, 재생산되고, 존재하는 잉여들의 혼란스러운 모방과 마주친다. 잠깐. 모방이라고 했나요? 물론이지요. 그건 다른 무언가가 이 안으로 들어오기 위해서 거쳐야만 하는 과정이니까요. 그때 모방은 나에게 효과라는 최종 결과라는 모습으로 다가올 것이다. 나는 그것을 거기서 멈춰 세우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결과는 여기서 무엇보다도 과정이기 때문이다. 멈추지 않는 최종이라는 종착지. 임권택 은 공식적으로 자신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친 감독으로 언제나 정창화 를 이야기한다. 그는 정창화 밑에서 전형적이고 고전적인 의미에서 충무로 도제 수업을 받았다. 영화는 기계군의 활동이며 조직이다. 공장과도 같은 시스템. 그 안에서 개념의 추상화와도 같았던 이미지를 세계 안에서 찍은 다음 배열해야 한다. 여기에는 규칙과 문법이 있다. 그것을 쳐부순다고 말해도 그 안에서 진행되는 부정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임권택이 정창화를 말하는 것은 그 인정의 테두리 안에서이다. 그런 다음 (펠리니의) < 길 >과 네 명의 할리우드 영화감독, 존 포드와 빌리 와일더, 윌리엄 와일러, 조지 스티븐스를 언급했다. 나는 여기 세 명의 이름을 더하고 싶다. 임권택이 언급하지 않는 이름. 그의 영화 전체는 아니지만 우리들이 실패작이라고 부르는 영화들이 만들어지던 시기, 실패의 상황이라고 내가 명명한 조건 아래서 만들어진 영화에서 마주치는 그림자들의 이름. 셀지오 레오네와 끌로드 를루슈, 그리고 장철. 물론 그 이름들은 잠시 후에 임권택의 영화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실패의 상황 속에서 남과 여를 주연으로 한 영화들과 < 남과 여 >, 그리고 쇼 브라더스 영화들은 마치 그림 안의 그림처럼 거기 그림자로 남았다. 영화가 한참을 자신의 서사를 진행하면서 이야기하고 있을 때 나타나는 이미지들. 그것이 다시 나타날 때 종종 지나치게 실패해서 그것을 분간하기 어려워진다는 느낌을 받기조차 한다. 미처 예기치 않았던 출현. 주인공이 자기의 몰락을 향해 걸어가고 있을 때, 그가 놓여진 상황이 다른 영화 안의 반복을 향해 나가기 시작한다. 나는 여기에 약간의 주석을 달고 싶다. 셀지오 레오네는 이탈리안 네오리얼리즘이 끝난 다음, 그것도 거의 끝난 다음, 그래서 펠리니가 그 방법을 버린 다음, 안토니오니가 리얼리즘을 거의 추상에로 밀고 나아간 다음, 황무지에서 할리우드 영화의 장르에 대한 아이러니로 시작하였다. <길>을 자신의 거의 유일한 걸작이라고 말하는 (게다가 전형적인 한국 고전영화문법 안에서 배움을 얻어온) 이 사람은 < 석양의 무법자 >에서 무엇을 본 것일까. 정창화에게서 충무로의 영화문법을 배운 임권택의 영화에서 잠시 동안 <남과 여>에서 무차별하게 사용된 시네마 베리테의 촬영과 누벨바그의 데쿠파주에 대한 키치적인 활용이 홀연히 등장하는 순간을 몇 차례이고 반복해서 마주칠 때 나는 어떤 쇼크를 받았다. 구체적으로 <남과 여>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시기의 한국영화들에서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하나의 경향이었기 때문이다. <남과 여>는 한 시기의 한국영화들을 거의 쑥밭으로 만들어 놓았다.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그들은 미처 < 히로시마 내 사랑 >과 < 비브르 사비 > < 어느 여름의 연대기 > <사촌형제> < 롤라 > < 활주로 > < 쥘과 짐 > <사자좌> < 5시에서 7시까지의 클레오 > < 파리는 우리의 것 > <아듀, 필리핀> <산타 할아버지는 푸른 눈을 가졌다>를 보지 못했다. 그저 < 네 멋대로 해라 >와 < 사형대의 엘리베이터 >를 보았을 뿐이었다. 그런 다음 그들의 경험은 중단되었다. 아마도 오직 김기영 만이 영화‘歷’사의 시간을 좇아가고 있었(을 것이)다. 김기영은 (인터뷰에 따르면) 1960년대 그 부근 언젠가부터 기회가 닿을 때마다 오로지 영화를 보기 위해서 도쿄에 방문했다. 풍문으로 누벨바그의 이야기를 듣기는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이야기들은 일본을 경유하여 각색된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그 시기의 글 자료들을 읽은 내 독후감은 그렇다. 그들은 말 그대로 무방비 상태였고, <남과 여>가 굉장한 영화라고 믿고 있었다. 왜냐하면 거의 법칙과도 같았던 고전영화 문법을 무시하면서 그저 그렇게 떠오르는대로 찍고, 연출하고, 편집하고, 그래도 괜찮은 영화를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임권택은 거기서 어떤 자유를 느꼈을 지도 모른다. 자신을 지배했던 도제제도로부터의 해방. 그때 임권택은 모던 시네마의 방법에 가까이 다가갔다. 실패한 상황. 예기치 않은 보충, 혹은 무엇이 무엇을 대리하기 시작했을까. 이 위험한 대리보충. 어쩌면, 정말 어쩌면, 여기서 무언가 잘못되었다면 그의 영화가 모두 부서졌을지도 모른다. 임권택은 재빨리 다시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그런 다음에도 방법의 흔적은 완전히 소멸되지 않고 다소 기형적인 양태로 분산되고 분할되어 머물렀다. 우리는 임권택 안에 들어서기 위해서 방법을 잘 따라야 한다. 무엇이 멈추자 무엇이 활동하기 시작했을까. 거기서 우리는 영화의 어떤 역량이 표현되기 시작했는지를 관찰해야 한다. 때로는 긍정적인 역량. 때로는 실패해버린 표현. 거기에 적합한 개념. 거기서 멈춰버린 기능. (위) 정창화 와 <길>, (아래)셀지오 레오네, 끌로드 를루슈, 장철 나는 여기서 세 번째 이름에 대해서 길게 설명할 생각이다. 장철. 張徹. 1968년 5월 23일 서울 파라마운트 극장에서 < 의리의 사나이 외팔이 >가 개봉하였다. 처음에는 이 영화가 그렇게 큰 대중적인 성공을 거둘 것이라고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고 한다). 홍콩 쇼 브라더스 무협영화는 한국 영화문화 안에서 하위 장르의 하위 장르이면서 동시에 재개봉관을 중심으로 컬트영화가 되었다. 임권택 은 이 이름에 대해서 단 한 번도 길게 언급하지 않았다. 할 수만 있다면 그저 스쳐 지나갔다. 내 질문은 왜 그것을 받아들인 다음 버렸느냐는 것이다. 나는 이 시기의 임권택을 이야기하면서 그의 영화 안에서 장철을 수 없이 다시, 거듭해서 다시, 호명할 것이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셀지오 레오네와 < 남과 여 >를 불러낼 것이다) 이것이 단지 불균등한 위계적 관계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임권택은 장철과 셀지오 레오네, 그리고 <남과 여> 없이 더 나아갈 수 없었고, 아니, 차라리 그것들의 대리보충 없이 참조 틀을 부술 수 없었고, 그런 다음 거의 불순물과 다름없는 그것들을 버리지 않고서는 다시 나아갈 수 없게 되었다. 실패해버린 상황 속에서 다시 한 번 실패하기. 더 잘 실패하기. 위험한 명제. 임권택에게 그가 실패하고 있는 상황에서 충무로는 참을 수 없는 문법이었고, 그런 다음 부서져 가는 그의 영화 안에서 셀지오 레오네와 <남과 여>, 장철은 다시 견딜 수 없는 대가가 되었다, 라고 말하고 싶어진다. 이 설명을 따분하게 변증법적 통일이라는 방식으로 도식화시키지는 말아주기 바란다. 내가 신기하게 생각하는 대목은 바로 여기이다. 갑자기 여기서 새로운 쟁점이 나타난 것이다. 임권택은 오류 안에 자기가 찾고 있는 진정한 목표가 있는 것처럼 다가가기 시작했다. 아니, 이렇게까지 말하고 싶어진다. 임권택은 오류 안에서만 견딜 수 있는 형식을 찾고 있는 중이(었을 것이)다. 그때 장철이 단지 쇼 브라더스 무협영화를 찍었다는 사실에서 멈추지 말고 그 영화들이 광동오페라의 영향 아래 만들어진 감상적인 멜로드라마의 판본 위에서 시작했다는 사실 안의 사실까지 거슬러 올라가야만 한다. 임권택과 장철이 공유하는 것은 무협활극이라는 표면적인 약속의 장르 사이에서의 트랜스 내셔널 네트워크가 아니라 피와 시체들, 복수의 정념과 의리의 도덕 뒤에 수줍게 숨어있는 감상적인 멜로드라마의 비극적 운명에 대한 믿을 수 없을 정도의 매혹이다. 더도 덜도 아닌 매혹. 그 속에서 그들이 즐기는 기쁨. 바로 거기서, 마치 그것을 쥐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것을 참조했다기보다는 차라리 그것에 대한 참조라고 할 정도로 < 월하의 검 >은 장철의 영화에 가까이 다가가고 있다. 그것도 아주 구체적으로 < 대협객(大刺客) >과 (부분적으로) < 심야의 결투(金燕子) >의 영향을 받았다. 심지어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몇몇 장면에서는 거의 같은 구도, 같은 활극동작을 빌려온 살진(殺陣)이 등장하기까지 한다. 여기서는 단지 오마주라거나 두 영화 사이에서의 상호 텍스트성이랄까, 이런 설명과는 완전히 다른 교차가 나타난다. 나는 실패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실패한 오마주라고 말해버리면 어떨까. 이 말을 잘 음미해주기 바란다. 오마주를 실패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의 효과로서 나타나 버린 오류라는 실패한 오마주, 그 안에서 이행의 대리보충을 붙잡아야 한다. 무언가 저 영화가 이 영화에 구멍을 내고 그 속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것은 단지 거기에 동의한다거나 혹은 이미 해놓은 것에 대해 가질 수밖에 없었던 감흥의 복종과는 다른 것이다. < 대협객 >(1967) < 심야의 결투 >(1967) < 대협객 >은 쇼 브라더스에서 장철이 왕우를 주연으로 하여 1967년에 만든 홍콩영화이다. 무협영화 팬들 사이에서도 상대적으로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영화이다. 아마도 이 영화가 다른 장철 영화들과 달리 긴 드라마가 장황하게 이어진 다음 아주 잠깐, 그래서 너무 순식간에 지나가 버리는, 하지만 몹시 인상적인 무협활극 장면이 나오는 절정의 클라이맥스를 맞이하고 나면 서둘러 끝나버리기 때문일 것이다. 서울에서는 1969년 10월 4일 종로 3가에 있었던 파라마운트 극장에서 개봉하였다. 이 이야기는 사마천의 <사기>에도 등장하는 자객열전 중의 하나이다. 춘추전국시대 제나라 백성이었던 섭정은 출중한 무인이었다. 그러나 그 재능을 시기한 동문 서식의 음모로 인해 스승은 당시 제나라와 적대관계에 놓인 나라의 첩자로 몰리고 무술 도장은 쑥밭이 된다. 이에 섭정과 그의 친구 두파는 복수를 한 다음 섭정은 모든 걸 포기하고 백정이 되고 두파는 옆 나라인 한나라로 피신하여 거기서 한나라의 충신 엄중자의 자식 무술 사범이 된다. 그런데 엄중자는 재상 한괴가 끊임없이 그를 음해하고 임금을 좌지우지하는 것을 보며 몹시 괴로워한다. 그러다 보다 못한 엄중자가 두파에게 도움을 청하자 그는 자기보다 훨씬 무술이 훌륭한 섭정을 추천한다. 제나라까지 찾아온 엄중자의 마음을 알고 그와 의형제까지 맺은 섭정은 다만 자기에게는 아직 병상에 누운 어머니가 살아계시고 누이가 있으니 기다려달라고 말한다. 몇 해 후, 어머니 상을 치루고 누이가 시집을 가자 섭정은 약속을 지키기 위해 혈혈단신으로 엄중자를 찾아온다. 그리고 하얀 백의에 백마를 타고 귀공자로 분장하여 혼자 수백 명의 병사들의 호위를 받는 한괴를 찾아가 그를 처단하고 자결한다. 나는 주변에 있는 섭정과 그의 연인, 그리고 누이와의 이야기는 모두 그냥 지나쳤다. 그런 다음 < 월하의 검 >. 이 이상할 정도로 기괴한 우울함으로 가득 찬 이야기가 임권택 이 직접 쓴 시나리오라는 점을 먼저 염두에 두고 읽어주기 바란다. 물론 임권택은 첫 영화를 만들 때부터 끊임없이 영화를 찍으면서 시나리오를 고쳤다. 그건 ( 송길한 이 시나리오를 쓴) < 만다라 >를 찍을 때도 그러했고 ( 이청준 이 시나리오를 쓴) < 서편제 >를 찍을 때도 그러했다. < 취화선 >을 찍을 때는 심지어 시나리오를 탈고한 다음에도 계속해서 매일 아침에 새로운 대사를 쓴 시나리오를 나누어주었다. 하지만 시나리오를 다시 고치는 것과 처음부터 쓰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여기서 임권택은 무얼 하고 있는 것일까. 물론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이야기에 뒤 이어 와서 그것을 닮은 다른 이야기가 이미 앞에서 포위하고 있을 때 그는 무얼 하고 있는 것일까. 하나가 다른 하나의 대리보충이 될 때 어느 쪽이 앞에 있고 무엇이 뒤에 있는지 그렇게 쉽게 분간할 수 있을까. 후렴구. 나는 지금 실패에 대해서 말하는 중이다. 아마도 조선 시대. 하지만 그런 다음 더 이상 어떤 것도 분명한 지표가 없는 사극의 무대. 유감스럽게도 당신은 < 월하의 검 >을 볼 방법이 없고 잘 정리된 줄거리도 없기 때문에 이 글을 먼저 읽을 수밖에 없다. (...) 임금은 무능하기 짝이 없을 뿐만 아니라 연화당 최씨의 미모에 빠져 헤어 나오지를 못한다. 그러는 동안 나라의 권세를 포도대장 최걸에게 모두 넘겨준다. 최걸은 자신을 비방하는 충신들을 모두 척살하기 위해 음모를 꾸민다. 그래서 빼어난 무술을 지닌 장무력을 고용하여 마치 연화당 최씨를 암살하기 위해 잠입한 것처럼 꾸민 다음 최씨를 지키는 호위무사 박필에게 붙들리는 계교를 꾸민다. 임금 앞에 잡혀간 장무력은 자신을 고용한 자들의 명단으로 충신들의 이름을 차례로 열거하고 곁에서 통곡을 하며 연화당 최씨는 그들을 모두 참해달라고 간곡하게 호소한다. (여기가 영화의 시작이다) 무자비한 탄압이 시작되고 이에 가까스로 살아남은 충신들은 심산유곡에 자리한 절로 피신하여 이제 남은 방법으로 연화당 최씨보다 더 빼어난 미모를 지닌 여인을 궁궐로 보내 임금의 총애를 받은 다음 진실을 알리고 간신배들을 벌할 것을 상소하자는 계획을 세운다. 그런 다음 이들은 이미 참수당한 충신의 딸 향아가 이에 적합한 미모를 가졌으며 그녀의 효성이 이를 받아들일 것이라는 데 합의한다. 문제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행방이 묘연한 향아를 찾는 것인데 우연히도 위험에 처한 그녀를 연화당 최씨의 호위무사 박필이 구하게 된다. 박필은 천애 고아로 어려서부터 최걸이 돌보면서 무술을 배우고 그 아래서 최걸의 자객이자 누이인 연화당 최씨의 호위무사가 된 몸이었지만 자신의 신세에 대해 처량함을 느끼며 그저 시간 날 때마다 조선팔도를 이리저리 떠돌며 그림을 그리면서 허송세월 나날을 보내고 있지만 무술만은 조선 최고라 부를 만한 것이었다. 박필은 향아의 정체도 모른 채 그녀를 보자마자 한눈에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변장을 하고 궁에 잠입한 향아를 보고 모든 계획을 깨달은 박필은 부디 이 위험하고 허망한 복수를 중단하고 자신과 멀리 떠나자고 말하지만 향아는 반대로 자신을 도와 복수를 이룬 다음 함께 멀리 떠나자고 부탁한다. 우여곡절 끝에 향아는 임금의 처소에 들고 그의 마음에 들지만 (여기서 나는 그사이에 향아의 정체가 탄로 나고 연화당 최씨의 인두질로 얼굴이 망가져 궁궐 바깥으로 내쳐지지만 심산유곡 절의 주지스님이 지극정성으로 치료한 묘약으로 미모의 얼굴을 고친 다음 다시 궁궐에 입궐한 사연을 둘러싼 대목을 건너뛰었다) 하룻밤 정사를 치르고 나서 증거가 없으니 연화당 최씨와 그 오빠를 벌할 수 없다고 말한다. 한편 최걸은 이제 유일하게 증언할 수 있는 장무력을 제거하면 모든 것을 용서하겠다고 박필에게 제안한다. 박필은 장무력을 찾아가 일대 결전을 벌이지만 막상막하의 실력을 갖춘 두 사람은 결국 승패를 가리지 못한다. 지친 두 사람은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눈다. 자신과 대결을 하면서도 결정적인 한 수를 쓰지 않는 박필의 마음속 진심을 본 장무력은 기꺼이 그를 위해 임금 앞에 가서 진실에 관한 증언을 하기로 마음을 바꾼다. 하지만 박필은 그 증언이 모두 끝날 때까지 바깥에서 임금의 처소를 향해 수 없이 몰려드는 병사들과 홀로 싸워야만 한다. 장무력이 모든 증언을 마쳤을 때 박필은 수백 명의 병사들의 시체 곁에 피투성이가 되어 죽어가는 중이다. 그 곁에 온 향아는 그를 비로소 여보, 라고 부르며 품에 넣어둔 극약을 먹고 그와 같은 운명의 선택을 한다. 그 시간에 연화당 최씨는 모든 비밀이 밝혀지자 자결을 한다. 무능하기 짝이 없는 임금은 홀로 남겨진다. 이 이야기를 읽고 난 다음 포스터에 있는 주연배우들의 명단을 보면서 당신은 포도대장 최걸을 허장강이 연기할 것이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추론할 수 있을 것이다. 배역의 컨벤션이라는 약속. 하지만 김지미 는 향아가 아니라 악독하기 짝이 없는 연화당 최씨를 연기한다. 향아는 김명진 이 연기한다. 물론 배역은 일종의 수건돌리기 게임이다. 영화 바깥의 여러 가지 복잡한 변수가 있긴 하지만 누구든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다. 내가 여기서 하려는 질문은 이야기 안에서 이들 사이의 오류를 불편하게 만드는 문턱에 관한 것이다. 먼저 이 영화에는 어떤 카타르시스도 없다는 사실을 지적해야겠다. 아마 이 말이 당신을 당황시킬지 모른다. 그렇다고 무언가 정의가 실현되었다는 결말을 주지도 않는다. 그러기는커녕 마지막 순간은 결말이 다가왔다기보다 무언가 종말을 맞이했다는 인상을 불러일으킨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투명하고 선악이 분명하며 우리가 누구 편에 서야 할지 따분할 정도로 잘 알고 있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점점 그 경계는 희미해지기 시작한다. 그런 다음 마지막 시퀀스 전체는 우리를 혼란에 빠트린다. 무언가를 주장하기는커녕 오히려 우리를 비웃으면서 보편적인 믿음을 우스꽝스럽게 처리해버린다. 여기서 이 모든 등장인물들의 정박지인 임금은 단지 어리석을 뿐만 아니라 과도하리만큼 색욕에 빠져 있다. 그 역을 연기하는 김순철 은 다른 배우들과 전혀 달리 의도적으로 과장되고 어색한 코미디의 연기를 한다. 김순철은 단 한 장면에서도 다른 배우들과 어울리지 않는다. 심지어 김명진 과 침소에서 운우지정을 나눌 때조차 그러하다. 이렇게 말하고 싶다. 그는 홀로 존재한다. 불편한 고정점. 나는 당신에게 임권택 이 영화 연출을 할 때 언제나 연기를 교정하는 것에서 그 인물의 형상화를 시작한다는 사실을 환기시키고 싶다. “ 정창화 감독은 나를 카메라 옆에 앉혀놓고 배우를 보라고 시키는 거예요, 어떤 배우도 유심히 들여다보면 약점이 보이는 거예요, 그게 내가 시나리오와 인물 사이의 오차 범위를 줄이는 방법이었어요.” (「임권택, 임권택을 말하다」) 여기에 한 가지를 더해야겠다. 임금은 만월이 뜨는 밤이면 내시 한 명을 데리고 홀로 비원에 행차해서 그 달을 보면서 술을 마신다. 이건 궁중의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며 그래서 향아는 임금이 혼자가 되는 그 시간에 그를 만나게 해달라고 박필에게 애원한다. < 월하의 검 >이라는 제목은 달빛 아래서 대결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시간에 거기에 가야만 하는 향아와 그녀를 거기에 보내야 하는 박필의 애처로운 사연의 알레고리이다. 하나의 시간. 만월의 밤. 세 개의 선. 임금과 향아와 박필. 서로 맞지 않는 정념들 사이에서 운명적으로 짜 맞춰져야 하는 매듭 사이로 벌어진 틈. 그 사이로 아슬아슬하게 이야기가 흘러가기 시작한다. 애초부터 그 자신들이 짓지도 않은 죄를 짊어진 상태란 무엇일까. 말하자면 비극의 수순. 그런 다음 매듭을 자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선택해야 한다. 임권택은 (장철과 마찬가지로) 결국에는 이 이야기가 죽음에로 귀결될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박필은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만들면서 역설적으로 스스로 운명 앞에서 수동적인 태도를 취한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 그녀의 간절한 소원. 하지만 그 소원이 이루어지면 내가 손 한 번 잡아보지 못한 저 사람은 임금의 침소에 들어 육욕의 대상이 될 것이며 그에게 벌거벗은 살을 내주어야 할 것이다. 임권택은 거의 기술적으로 감당이 안 되는 1970년의 한국영화 촬영기술을 바탕으로 무리할 정도로 반복해서 몇 번이고 만월(滿月)의 밤을 찍는다. 미첼 카메라의 둔중함과 값싼 아그파 필름, 그리고 조악한 조명은 한밤중에 만월을 찍는 것이 불가능한 장비들이다. 그래서 이 영화의 모든 만월의 밤은 한낮에 밤 장면을 찍었다. (day_for_night) 종종 잘못 색 보정된 다음 무성의하게 현상된 필름들은 이 만월의 밤 장면들이 낮에 촬영되었음을 잔인할 정도로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월하의 검>은 기술적으로 거의 재난에 가깝다. 그걸 임권택이 모를 리가 없다. 그는 자신이 여기서 실패할 것이라는 사실을 너무 잘 알면서도 그냥 그걸 지금 하고 있는 중이다. 나는 그걸 의도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만일 그것이 의도라면 그건 나쁜 의도이다. 여기에는 처음부터 그래도 상관없다, 는 자포자기가 무겁게 내려앉는다. 나는 임권택의 심리적인 상태에 대해서 관심이 없다. 그걸 설명하는 것은 전기 작가의 몫이지 내가 할 임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임권택은 여기서 무엇을 따라가고 있는 것일까. <월하의 검>은 미학적 기준으로 무자비하게 설명하기를 단 한 순간도 망설일 필요 없는 영화이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을 하려다가 실패하기는커녕 그걸 먼저 알아차리고 실패라는 조건을 받아들인 다음 거기서 더 밀고 나아가기 시작할 때 우리는 기묘한 실패의 정식화를 끌어낼 수 있다. 그건 실패가 외재적 조건일 때 이미 내재적으로 존재하는 부정에 대한 긍정이라는 역설이다. 이때 영화는 임권택에게 일종의 자기 심문과 같은 것이 되어간다. 마치 영화가 자기의 속살을 내보이듯이, 정말 부끄럽게, 필름의 한계와, 촬영의 제한적인 조건과, 제작의 무성의한 진행에 관한 모든 과정을 적나라하게 노출하기 시작한다. 얼마나 끔찍할까. 속수무책으로 그것을 수수방관해야만 할 때, 그때 거기서 할 수 있는 방어의 기술이 전혀 없을 때, 임권택은 반대로 그냥 내버려두고 있다. 바로 거기서 위험천만한 상실이라고 할까, 그 자신의 영화의 내부적인 멜랑콜리가 불연속적인 질문을 반복해서 던지기 시작한다. 영화 안의 질문. 지금 이것은 그래도 성립되고 있습니까. <월하의 검>은 거의 부서진 영화이다. 그런데도 가까스로 버티고 선 무언가가 이 영화에 이상할 정도로 집요하게 그것을 방어하면서 성립시키고 있다. 재앙을 피해야만 해. 폭력으로부터 보호해야만 해. 여기서 나는 그럴 때마다 아무 상관도 없는 장철의 < 대협객 >이 유령처럼 출몰하는 것을 쳐다보게 된다. 그때 그건 영화라기보다 차라리 제도 바깥에서 나타난 부정성이다. 몹시 사악하고 거의 지켜지지 않는 규칙들. 강제적인 영화의 속도. 쇼 브라더스 영화의 처음 보는 기이한 문법. 거기서 섭정의 삶은 자유자재로 스튜디오 속을 거닐며 자기의 목표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간 다음 마지막 순간 중력을 무시하고 날아오른다. 그렇게 사람이 날아가도 상관없는 것일까. 새로운 동선. 영화에서의 새로운 선, 하지만 아주 특별하고 예외적인 선. 그 자신의 학습을 통해 얻어낸 경험을 앞지르는 건너편의 방법이 나타나서 부서져 가는 참조 틀 사이로 대리하고 보충하는 시간은 이 영화가 발작하는 순간들이다. 상감, 그것은 새빨간 거짓말이옵니다. 사실이옵니다. < 월하의 검 >을 보다가 누구라도 멈춰 서게 될 두 장면, 그런데 거의 마지막 장면, 그래서 이야기가 멈추는 두 장면을 먼저 이야기하고 싶다. 여기서 임권택 은 장르 안에서의 연쇄를 갑자기 끊어버린다. 그런 다음 이야기를 밀어내고 어떤 대체의 구조를 찾기라도 하듯이 인물에서 그것을 보충하려 든다. 어떤 절단. 그런 다음 그것을 떠안아야 하는 부담을 감수하기라도 한 듯한 결정. 장무력이 임금의 앞에 가서 진실을 고하고 나자 포도대장 최걸과 연화당 최씨를 불러 그 말이 모두 사실이냐, 라고 묻는다. 그러자 최걸은 그 모두가 지어낸 이야기입니다, 로 시작하는 사극에서의 마지막 장면에서 만나는 상투적인 대사를 시작한다. 물론 악인들이 사악할 뿐만 아니라 비겁하기 짝이 없다는 강조할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사약을 내리기에 조금도 자비심이 필요 없다는 것을 확인시키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그때 최걸 의 말을 자르면서 연화당 최씨가 조금도 뉘우치지 않는 표정으로 모두 사실이옵니다, 라고 대답한다. 임금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녀를 본다. 왜냐하면 자기에게 생명을 구걸하는 요구를 거절하는 행위를 통해서 자신의 권리를 되찾는 동시에 권리와 정의를 일치시키는 제스처를 취하려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임금과 국가의 (상투적인) 변증법. 하지만 연화당 최씨는 이 일련의 자동적인 연쇄를 중단시킨다. 그런 다음 임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질문한다. 저년과 저, 둘 중에 누가 더 예쁜가요? 목숨이 걸려있는 순간에 이 질문은 적절치 않은 내기이다. 왜냐하면 임금의 대답은 어느 쪽을 선택해도 그녀의 목숨에 대한 결정을 바꾸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마치 자신의 생명에 무관심한 듯한 질문. 하지만 이때 임금은 여기서 그 자신의 대답이 결정의 이해관계로부터 바깥에 놓이기 때문에 연화당 최씨의 질문은 임금의 자리로부터 그녀의 침소에서 몸을 탐했던 한 남자에로 임금을 추락시켜버린다는 사실을 놓치면 안 된다. 그런 다음 연화당 최씨는 임금으로부터 그건 물론 네가 더 예쁘긴 하지만, 이라는 대답을 듣자 거기서, 바로 그 대답의 거기서, 만족한 듯한 웃음을 짓고 옆에 서 있던 신하의 칼을 빼 들어 그 자리에서 자결한다. 대답이라는 패배. 대답을 통한 권리의 상실. 정의의 연쇄적인 추락. 자기 목숨에 대한 연화당 최씨의 스스로의 결정. 임금은 순식간에 결정에 대한 자기의 권리를 빼앗긴다. 그러므로 거기서 임금의 명령이 대상을 놓칠 때 그렇게 많은 희생을 요구하고 얻어낸 진실은 끝내 목표에 도달하지 못한다. <월하의 검>에는 표면적인 결론과 달리 드라마의 효과가 만들어내는 사필귀정의 카타르시스가 없다. 주인은 자기의 권리를 빼앗기고 주인의 주인은 그 권리를 죽음으로 돌려준다. 바로 그 순간, 그러니까 연화당 최씨가 자살을 할 때 향아는 임금께 고하는 장무력의 고백을 위한 시간을 지키기 위해 수없이 밀려드는 병사들을 상대로 희망 없는 칼부림 끝에 죽어가는 박필에게 달려온다. 물론 이 장면은 장철의 < 대협객 >의 마지막 장면의 변주이다. 혹은 < 심야의 결투 >의 마지막의 마지막 장면, 그러니까 대결을 끝낸 다음에도 여전히 남아서 피를 흘려가며 끝없이 밀려드는 무사들과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필사적인 결투를 계속하는 은봉황이 어쩔 수 없이 떠오른다. 박필은 너무 많은 상처를 입었고 그가 입은 옷은 피로 범벅이 되어 계단에 쓰러진 채 죽어가는 중이다. 달려온 향아는 그를 껴안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를 여보, 라고 부르며 당신이 원하는 곳으로 가자고 말한다. 박필은 향아에게 이제는 만족하느냐고 묻는다. 그는 반복해서 향아의 복수를 말렸고 그녀의 희생이 얼마나 무의미한지를 설득했으며 단 한 번도 그녀의 결심에 동의하지 않았지만 그녀를 도와 지금 이렇게 죽어가는 중이다. 그리고 향아는 복수에 성공했고 그녀는 마침내 원하는 것을 얻었다. 그때 향아는 박필의 질문에 대답한다. 저 탐욕한 무리들을 떠나 당신과 함께 떠나겠어요. 연화당 최씨의 대답과 마찬가지로 여기까지 향아의 동선을 쫓아온 당신은 갑자기 멈춰 설 것이다. 탐욕한 무리들. 그 대답에서 가리키는 탐욕한 무리들은 최걸과 연화당 최씨가 아니라 그들에게 희생당한 충신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향아를 궁궐에 보내 자신들의 억울함을 탄원해달라는 명령을 내렸던 아버지의 친구들. 대의를 위한 희생. 향아는 그 충신들을 최걸과 연화당 최씨 남매와 별 차이가 없다고 결론을 내린다. 단지 그들은 서로 권력을 잡은 자와 잃은 자의 반대의 자리에 놓여있을 뿐이다. 향아는 자기가 바라는 것을 얻었고, 그런 다음 연화당 최씨가 자살을 한 그 빈자리, 임금의 옆자리에 가면 된다. 하지만 그녀는 그 말을 한 다음 품에서 언제나 몸에 지니고 다니면서 만일의 경우를 준비한 독약을 아낌없이 자기 입에 털어 넣는다. 두 개의 자살. 즐비한 시체. 여기서 자살은 어느 쪽도 자포자기가 아니다. 그녀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자살을 선택하면서 무언가를 항의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임권택 의 영화에서 가장 반복적으로 대하는 행위는 자살이라는 것을 생각해보아야 한다. 길고 긴 영화의 목록 끝에 자신의 영화에 대한 철학적 정식화가 인본주의(人本主義)라고 말한 이 사람의 영화에서 끈질기게 자살이 반복되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심지어 그 자신의 자서전이라고 부를만한 < 취화선 >에서조차 마지막 장면에서 오원 장승업은 그 자신의 예술에 대한 결론으로 자살을 선택한다. (그런데 장승업에 관한 전기에 따르면 그는 말년에 그저 실종되었다고만 기록되어 있다.) 임권택의 영화에서는 각자의 이야기에서 살고 있는 각자의 주인공들이 살아온 삶의 결론에 이르러 각자의 죽음을 선택한다기보다는 그들이 어디서 시작했건 결국에는 자살이라는 어떤 (텅 빈 상태의 공허한) 중심에로 이끌려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을 가까스로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자기의 책임을 누군가에게 떠넘기는 것뿐이다. 이를테면 역사 그 자체. 나는 <취화선>에서 바로 이어지는 또 한편의 전기인 < 하류인생 >의 마지막 장면을 유심히 바라본다. 여기서 자기의 자리를 텅 빈 구멍으로 만들어버리는 행위는 무엇을 목표로 한 것일까. 나는 임권택에 관한 논의를 더 멀리 밀고 나아가기 위해서 실패한 선택으로서의 장철의 쇼 브라더스 영화를 경유할 필요를 느낀다. 거기서 시작했고, 거기 머물지 않기 위해서 비극적인 것에서 진정한 비극에로 점핑하면서 도약하는 과정이, 오로지 그 과정이, 임권택의 목록을 쫓아가는 내게 감동을 준다. 방법론으로서의 소용돌이의 심연. 무한정한 회의. 그 안에서 탄식하는 부자연스러운 매혹. 먼저 덧셈을 한 다음, 보충한 다음, 그다음은 빼내는 것이다. 거기서 원래의 자리를 차지해버린 대리를 다시 바꿔야한다. 대리보충에 대한 대리. (데리다의 표현을 빌려) 이중의 세션. 물론 모든 문제 안에는 대답이 포함되어 있다. 그때 우리는 질문해야 한다.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이미 얼마나 주어져 있는가. 이제까지 나는 < 월하의 검 >에 대해서 불만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에서 모든 장면들이 보고 난 다음 내곁에서 사라진 것은 아니다. 임권택 은 내가 보고 있는 이야기 안에서 어떤 장면을 종종 바늘처럼 찌르듯이 불쑥 내밀 때가 있다. 이건 바르뜨가 말하는 푼크툼과 전혀 다른 것이다. 나는 이야기 안에서, 라고 말했다. 그 장면을 따로 이야기에서 때어놓고 보면 별로 대단하지 않을뿐더러 이미지 자체가 훌륭한 것도 아닌데 정말 갑자기 그 장면이 이야기 앞으로 나올 때가 있다. 그때 이 장면을 이야기에 놀랍도록 적절하게 조응한다거나 혹은 이야기를 압도하면서, 라고 설명하는 것은 사태를 완전히 오해하는 것이다. 여기서 장면은 이야기에 대해 몹시 불길하고 축축한 외설성을 갑자기 드러내듯이 출현한다. 여기서 방점은 갑자기, 에 놓여있다. 그건 무언가 더 이상 이야기가 진행되지 않는 것만 같은 불만에 빠졌을 때 그 이면에 감추어져 있던 장면이 앞에서 상연되는 것이다. 나는 상연, 이라고 말했다. 무언가를 의도적인 장면으로 보여주는 것. 누구에게? 우리에게. 왜 그런 상연이 필요해진 것일까. 그건 이야기의 표면만으로는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한계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박필과 향아의 이야기는 어느 지점에 이르자 더 이상 진행되지 않고 제 자리를 맴돈다는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마침내 박필은 향아를 그녀의 원대로 한밤중에 비원으로 데려다준다. 비원에 깊은 밤이 오면 임금이 내시 한 명만을 대동하고 술을 마시며 이 시간을 홀로 즐기기 위해 나들이를 한다는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아직 향아는 그 밤이 만월의 밤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녀는 한밤중의 비원에 홀로 앉아 오지 않을 임금을 기다리며, 아무도 듣는 이 없는 장소에서, 그 누구도 들을 리 없는 피리를 거기 없는 임금을 향해 불기 시작한다. 물론 여기까지는 이야기 안에서 오인의 청각 기호가 작동하는 중이기 때문에 아무것도 이상하지 않다. 그런데 밤은 깊어가고 아무리 기다려도 임금이 나타나지 않자 향아는 피리 불기를 중단한다. 이때 화면에서 향아가 중단을 했는데도 영화는 계속해서 피리를 분다. 그때 이 피리는 향아의 몸과 분리되어 이야기 바깥으로 나가버린다. 그런 다음 마치 장면의 사운드 트랙이 되기라도 한 것처럼 거기 홀로 남은 향아를 위해서 영화가 불어주는 풍경으로서의 청각 기호가 된다. 이 이행의 순간은 순식간에 벌어져서 단지 실수가 아니라 마치 이야기 전체가 어떤 오작동을 일으킨 것만 같은 인상을 만들어낸다. 여기서 임권택은 텍스트라고 정의 내려진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으면서 거기에 마치 어떤 맹점(blind_spot)이 존재하기라도 한 것처럼 이야기의 가시성이 만들어내는 한계 가장 가까이에 다가간다. 우리는 이걸 단지 속임수라고 지나쳐버리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여기에는 갑자기 이야기 바깥에서 운명이 찾아온 것만 같은 인상을 준다. 이야기 바깥에서 그녀를 바라보는 시선. 이야기를 조정하는 끈. 이때 운명은 비극을 상연하기 시작한다. 왜 그런 장면이 필요해진 것일까. 임권택은 자신이 다루는 이야기에서 역사를 삭제하는 대신 역사 안의 실재적인 질서가 작동시키는 운명이 비극이라는 것을 고스란히 남겨놓는다. 여기서 조선 시대의 구체적인 배경은 알 수 없지만, 아니 차라리 그런 임금의 존재를 역대 왕조에서 누구로부터도 유추할 수 없지만, 이 이야기는 조선 시대가 아니라면 한걸음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게 된다. 대리된 가상의 임금. 그 안에서의 광동 멜로드라마의 보충. 이때 임권택은 거의 초현실주의적인 상황에서 다시 이야기의 현실 안으로 되돌아올 때 소름 끼치게 무서운 장면을 준비해놓고 있다. 향아는 아무리 기다려도 비원에 임금이 나타나지 않자 실망하여 자기 방으로 돌아온다. 이때 향아가 방에 앉는 장면은 무언가 이상한 구도로 잡혀있다. 지나치게 멀리 물러난 카메라와 향아의 거리. 그녀를 둘러싼 어둠. 그런 다음 호롱불을 켜자 방 안이 밝아지면서 이제까지 그 방에서 기다리고 있던 연화당 최씨와 그녀의 궁녀들, 그리고 야경을 돌며 궁궐 안을 순찰하던 포졸들이 마치 유령처럼, 그림자처럼, 병풍처럼 향아를 둘러싸면서 그 모습을 드러낸다. 이 장면이 우리를 경악(驚愕)이라는 공포의 상태로 몰아넣는 것은 세 가지 이유에서이다. 하나는 여기가 궁궐 안에서의 향아의 유일하게 사적인 공간이자 그 어떤 위험으로부터도 안전한 것처럼 여겨진 그녀의 방이기 때문이다. 임권택은 이 방을 마치 향아에게만 개인적으로 허락된 장소처럼 다루었기 때문에 우리들은 여기를 향아의 안전한 피난처처럼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연화당 최씨가 여기에 나타났을 때는 습격을 당했다기보다 갑자기 피난처의 베일이 찢어진 것처럼 느껴진다. 다른 또 하나의 이유는 여기에 이를 때까지 연화당 최씨는 향아의 행동반경에 대해서 거의 관심이 없거나 마치 그 둘 사이에 교집합이 없는 것처럼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두 개의 원. 각자의 운동. 그런데 가장 이상한 세 번째 이유가 남아있다. 여기까지 이야기의 진행이 향아와 연화당 최씨 두 인물에 대해서 거의 대부분의 진지함을 상실한 채 지나치게 나태했기 때문에 하나가 다른 하나의 동선 안으로 개입할 것이라고 거의 생각할 수 없었다. 이 순간이 의도된 연출이라는 가정을 하는 것은 이후의 진행을 생각하면 거의 희박한 가능성으로 남는다. 아니,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이 장면에서 깜짝 놀란 우리들은 그만 이 순간에 불쑥 찾아온 예기치 않은 방문객을 맞이한 심정이 되어 버렸을 것이다. 아마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임권택은 그 효과를 잘 알고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아마도 여기가 이 시기의 임권택의 마지막 방어선이었을 것이다. 그런 다음 영화는 다시 참혹한 기술적 수준의 장면들과 진부한 이야기에로 되돌아간다. 그리고 이야기는 두 개의 자살을 향해서 앞으로 나아간다. 그 둘이 자살을 맞이할 때까지 다시 마주칠 일은 없을 것이다. < 월하의 검 >에서 그 두 사람의 죽음이 애처롭게 느껴지는 까닭은 이 영화가 ‘끝난 다음’의 이야기 속의 요지부동의 세상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 수많은 죽음 끝에 정의가 이루어진 이후에도 사실상 이 영화의 무대가 된 존재한 적이 없는 조선 시대는 아무런 변화가 없을 것이다. 여전히 임금은 새로운 여자를 찾을 것이며, 그는 정사에 관심이 없으며, 충신들의 무리는 자신들의 복권에만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이루어진 다음에는 어떤 변화도 요구하지 않을 것이며, 세월은 그렇게 흘러갈 것이다. 임권택 은 그의 세 번째 영화 < 망부석 >에서 (각색을 거치긴 했지만) 사도세자의 이야기를 다루었다. 그런 다음 계속해서 조선 시대를 무대로 하여 사극을 만들었다. 구체적인 왕조와 역사적인 실록은 이야기에 개입하였으며, 실존했던 인물들은 자기의 자리를 버티고 앉았으며, 외세는 이 시대를 수수방관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임권택은 역사 안에서 자기의 이야기를 발전시켜야만 했다. 그때 그는 우아한 화면과 그 안에서 살아가야 했던 그 자신의 할머니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연출하였다. 우리는 임권택이 1934년에 전라남도 끝자락 아직 조선 시대의 향취가 남아있던 시대에 자라났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아마도 1965년에 만든 < 왕과 상노 > 혹은 그 무렵부터 실록 바깥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정확하게 이 시기부터 임권택의 영화가 부서지기 시작했다. 거기에 남은 것은 시대의 조건과 역사라는 이름으로 부여한 최소의 이치였다. 제도와 계급. 의상과 호칭. 마치 게임의 규칙처럼 되어버린 역사의 매트릭스. 역사는 형식이 되었으며, 그 안에서 임권택이 누린 것은 자유가 아니라 절망적으로 고립된 상황과 공허한 유교에 바탕을 둔 감상적인 남녀 사이의 희생과 반복적으로 마주하는 전근대적 향수의 눈물이었다. “그때 그 영화들을 만들면서 내 영혼이 다 부서지고 무언가 잘못되어간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내가 살아본 시대는 아니지만 이게 무어가 진짜고 무어가 가짜인지는 집안 어른들로부터 다 들어본 세상 이야기란 말이에요. 그리고 그런 어른들에게서 법도와 예절을 배웠단 말이에요. 그런데 그걸 내가 내 손으로 좋았던 유산을 다 부수고 있으니 만들면서 내내 참 몹쓸 짓을 하는구나, 라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임권택, 임권택을 말하다」) < 월하의 검 >은 정확하게 그 말에 대한 대답이다. 임권택은 먼 길을 돌아와야 했으며 다시 역사 안으로 들어오기 위해서 자기에게 강요된 조건을 수락해야만 했다. 그러기까지 얼마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참으로 참혹하게도 임권택이 다시 역사 안으로 들어오게 된 것은 < 증언 >을 경유하여 그해 여름 한국전쟁을 마주 보면서, 다 부서져 버린 고향을 바라보면서, 흩어진 친척들을 찾아다니면서, 서로 총을 쏘고, 고발하고 신고하고, 죽고 죽이는 세상을 보면서, 그렇게 돌아왔다. 하지만 잠시만, 아직은, 아직은 좀 더, 나는 임권택의 그 시간에 머무를 생각이다. 그러므로... (계속) 1970년 108분 컬러 2.35 감독 임권택 제일영화주식회사 각본 임권택 촬영 최호진 조명 윤창화 편집 장현수 음악 황문평 김지미 윤양하 김명진
이렇게 서문을 시작할 수밖에 없다. 나는 1986년 11월 둘째 주 화요일에 임권택 감독님을 처음 만났다. 나는 이 날을 정확하게 기억한다. 그 날은 화창했지만 바람이 차가웠다. 막 겨울이 시작하고 있었다. 그때 나는 임권택 감독님에 관한 인터뷰로만 이루어진 책을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결국 내 동료들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다) 임권택 감독님은 그해 여름 < 티켓 >을 완성하였고, 남산에 자리한 영화진흥공사의 지하 이층에 세워놓은 세트장에서 < 씨받이 >를 촬영하고 있었다. 처음 만난 자리도 기억할 수 있다. 영화진흥공사 바로 옆에는 난다랑이라는 커피숍이 있었다. 남산에서 약속을 하면 대부분 거기서 만났다. 아침 열시에 처음 뵈었다. 내가 시간에 늦지는 않았지만 감독님이 먼저 나와 계셨다. 하지만 첫 인상은 잘 생각나지 않는다. 창가 옆자리에 앉아계셨다. 당신께서는 아직 내 나이가 스물일곱 살이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시기 바란다. 나는 남산 길을 올라가면서 거의 암송하듯이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외웠지만 정작 그 분 앞에 앉았을 때 횡설수설하듯이 말해버리고 말았다. 임권택 감독님은 말씀이 적지만 그때는 더 그러했다. 그냥 나를 쳐다보았다. 막 시작된 아침 겨울 햇살이 커피 잔에 눈부시게 반짝거렸다. 이상하게도 그 빛이 언제나 어제 일처럼 기억난다. 아무 말 없이 한참을 들은 다음, 어쩌면 그저 내가 그렇게 느꼈을 지도 모르는 시간 동안 설명을 하고 난 다음, 임권택 감독님은 내게 그냥 던지듯이 물었다. “내게 무어 들을 이야기가 있소?” 나는 이 말 뜻을 한참이 지난 다음에야 알 수 있었다. 이미 83편의 영화를 찍은 한국 영화감독. 여기서 모든 것이 방점이다. 83편이라는 그 두께. 한국이라는 영화산업 안에서 1962년에 데뷔한 다음 그는 그 영화들을 찍으면서 살아남았다. 그와 함께 시작한 대부분의 감독들이 이미 현장을 떠난 지 한참인 다음에도 그는 영화를 만들고 또 만들었다. 그리고 만들고 있었다. 그는 다른 일을 하지 않았다. 누군가는 제작자가 되었고, 누군가는 학교로 갔으며, 누군가는 관리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오로지 현장에서 영화를 연출하였다. 이십여 년에 걸친 한국영화산업의 역사. 황금시대와 1972년 이후의 몰락. 흥행의 시대가 끝나자 시작된 검열의 역사. 텔레비전과의 경쟁에서 밀려나기 시작한 대중오락. 그때 임권택 감독님은 어린 나를 바라보면서 당신이 이 영화들을, 이 영화들에 담긴 세월을, 이 세월 속의 삶을, 이 삶으로부터 나온 매 쇼트의 결단을, 정말 귀 기울여 들어볼 수 있겠냐, 는 질문을 내게 던졌다. 나는 약간 망설인 다음 대답했다. “배우고 싶습니다” 나에게는 달리 할 말이 없었다. 그것만이 내 진심이었기 때문이다. 이때 내 마음 속에 염두에 둔 책은 프랑소와 트뤼포가 1962년 6월 2일 첫 편지를 쓴 다음 그 해 8월 13일 월요일부터 6일간 유니버셜 스튜디오 146호 방갈로에 있는 사무실에서 계속된 알프레드 힛치콕과의 인터뷰를 담은 <알프레드 힛치콕(Le Salon Alfred Hitchcock)>이었다. 나는 이 책에서 영화에 관한 많은 것을 배웠다. 그 중에서도 두 가지 배움. 하나는 영화라는 비밀을 알기 위해서 동원된 인터뷰라는 방법이 사실상 최상의 비평이라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영화를 본다는 문제란 결국 질문을 던진다, 라는 형식으로 나타나는 능력(들) 사이의 (말 그대로의) 표현이라는 사실이다. 설명하는 표현, 함축하는 표현. 그 둘 사이의 활동으로서의 영화. 우리는 그 둘 중 어느 것도 놓쳐서는 안 된다. 트뤼포는 힛치콕에게 단지 미학적이거나 기술적인 질문에서 멈추지 않았다. 종종 질문은 대답보다 흥미로웠고, 때로는 질문으로부터 영화를 보는 방법을 배울 수 있었다. 혹은 질문이 때로 예상치 않은 대답을 끌어내기도 하였다. 많은 질문과 대답들은 차라리 행간을 읽어야만 했다. 그 둘 사이의 질문과 대답은 존경과 사랑으로 진행되었다. 어떤 질문은 궁금해서라기보다는 힛치콕에게 자기가 그의 영화에서 ‘발견’한 것을 자랑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 읽혔고, 어떤 질문은 마치 수줍은 사랑의 고백처럼 들렸다. 하지만 무엇보다 나를 감탄하게 만든 것은 마치 영화를 손끝으로 건드리듯이 만져보는 듯, 정확하게 그렇게 설명할 때, 영화를 애무하듯이 느껴볼 때, 그 마음이 질문 속에 담겨서 전달될 때, 그건 내게 마치 마법처럼 보였다. 트뤼포는 힛치콕의 영화를 정면으로만 응시하지 않았다. 가끔은 프레임을 이리저리 두리번거린 다음 다른 대부분의 사람들이 주인공을 쳐다보느라 놓쳤을만한 흔적들을 끌어냈다. 혹은 내 기억 속에서 완전히 사라진 클로즈업을 문득 끌어내기도 하였다. 명백하게 그는 수십 번을 맹목적으로 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질문을 던졌다. 거의 불가사의할 정도의 관찰. (내 추측이 틀리지 않다면) 때로는 눈물을 흘리면서 보았기 때문에 찾아낼 수 있는 흐릿한 시선으로 바라본 화면들. 트뤼포는 정보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무엇보다도 배움의 기호를 찾고 있었다. 영화라는 고유한 세계 안에서 활동하는 법칙들. 어떻게 저 기호들은 다른 영화에서는 작동하지 않으면서 오로지 힛치콕의 영화에서만 활동하기 시작한 것일까. 몇 번이고 다시 본 다음 매번 수수께끼 앞에서 난처하게 질문을 던지고 다시 던진 다음 마침내 그 마술을 만들어낸 사람 앞에 도착하여 참지 못하고 제발 그 비밀을 풀어주세요, 라는 간절한 하소연. (그의 스승이었던 바쟁의 표현을 빌리면) 누가 이 상형문자의 비밀을 풀어줄 수 있을까. 아마도 사랑에 빠져본 사람만이 느껴볼 수 있는 그 영화적 신호들에 대한 놀랄 만큼 예민한 반응. 트뤼포는 힛치콕의 영화를 안다고 말한 적이 없다. 그저 보고 또 볼 뿐이다. 그러나 그것은 동일한 행위의 반복이 아니다. 영화를 두 번 볼 때 우리는 첫 번째 볼 때와 완전히 다른 방법으로 보게 된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그건 단지 음미의 차원이 아니다. 트뤼포의 질문이 내게 가장 큰 쇼크를 준 순간은 영화에 단 하나의 시선만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일깨움을 주는 질문을 던질 때였다. 한 사람이 이것을 볼 때 다른 사람은 저것을 볼 수 있다. 누군가 여기서 멈출 때 다른 누군가는 존재하지도 않는 다음 쇼트를 그 안에서 찾아내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트뤼포는 처음에는 내가 그 영화를 본다, 라고 시작한 다음 그 영화가 나를 본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그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 영화가 내가 보는 것을 안다고 느껴볼 때 거기서 무슨 일이 생길 것인가. 비평은 거기서 시작하였다. 트뤼포는 용기를 내서 한 걸음 더 밀고 나갔다. 트뤼포는 자기를 보는 영화를 다시 바라보았다. 사랑의 시선. 시선의 교환. 트뤼포의 질문은 거기서 시작하였다. 나는 그것을 배우고 싶었다. 이 책을 둘러싼 나의 아주 사적인 배움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당신에게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이겠지만) 게다가 이 책의 일본판을 번역한 사람은 아아, ‘일본 제일의 영화광’이라고 불러 한 점 부끄럼 없는 두 사람, 하스미 시게히코와 야마다 고우이치였다. (이 책은 <힛치콕, 映畵術> 이라는 제목으로 ‘키네마 준보’에 일부 번역된 다음 1981년에 초판이 발행되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건 이 책의 초판본이다) 야마다 고우이치는 번역을 끝낸 다음 후기에서 “이 책은 영화의 백과사전이며, 입법전서이다. 매번의 질문은 영화란 무엇인가, 라고 불러도 좋다. 매번의 대답은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라고 썼다. 나는 이 사람들에게 영화와 만나는 태도를 배우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임권택 감독님을 처음 뵙고, 그 분에게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청했을 때. 대답을 듣고자 했을 때, 그건 나에게 배움의 실천이었다. 나는 이 배움 속에서 내 방식으로 영화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수백 번, 수천 번 던져보고 싶었다. 그리고 수백 번, 수천 번, 그 대답을 듣고 싶었다. 그 대답. 여기에는 약간의 이야기를 더해야 할 것이다. 내가 처음 이 책을 준비할 때에는 임권택 감독님에 관한 영화 평을 거의 볼 수 없었으며, 그에 관한 작가론을 단 하나도 읽을 수 없었다. 세상의 무관심.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대중들로부터의 일정한 거리. 여전히 그의 대부분의 영화들은 개봉관에서 볼 수 없었다. 혹은 아주 짧은 시간만 영화관에 간판이 걸려있었다. 임권택 감독님의 영화를 보기 위해서는 종종 시내 중심가로부터 외곽에 자리한 한적한 극장을 찾아가야만 했다. 심지어 어떤 영화는 재개봉관에서 개봉을 하기도 하였다. 나는 < 신궁 >을 보기 위해서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그리고 그런 다음 그 ‘이후’ 다시는 가보지 못한) 극장을 찾아 내가 살던 동네로부터 멀리 떨어진 뚝섬까지 가야만 했다. 물론 임권택 감독님의 영화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내가 서울 지리의 감각을 익힌 것은 그때 영화를 찾아 처음 타보는 노선의 버스에 몸을 싣고 낯선 동네, 낯선 골목을 헤매면서 두리번거리던 경험의 결과이다. 어떤 네비게이션도 없었다. 그저 동네를 기웃거리고 낯선 사람들에게 수없이 물어보면서 극장을 찾아가야만 했다. 그때 제작사들은 야비하게도 외화 수입쿼터를 따내기 위해서 한국영화를 만들었으며, 그런 다음 그 영화를 버릴 때 그런 방식을 취했다. 비평의 차가운 외면. 그때 그 영화들을 아무도 방어하지 않았다. 임권택 감독님의 영화들은 외롭게 만들어졌다. 이미 83편의 영화를 만들었지만 충무로에서는 그를 직업감독으로만 부르고 있었다. 물론 이미 < 만다라 >를 만들었고, 그런 다음 < 길소뜸 >과 < 티켓 >을 만들었지만 비평은 그에게 거의 관심이 없었다. 차라리 한국영화에 별 관심이 없었다고 말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그때 한국영화는 세계영화사의 시간 바깥에 있었다. 다시 한 번 당신을 환기하지만 1986년의 일이다. 나는 충분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많은 할리우드 영화를 열심히 보았다. 프랑스문화원에서 매달 프로그램으로 상영되는 영화들을 단 한 편도 놓치지 않고 보았다. 독일문화원에서 영화를 보았다. 일본문화원에서 영화를 보았다. 물론 나는 아직 많은 영화를 보아야 했다. 여기는 파리가 아니었다. 아직 시네마테크도 없었다. 어쩌면 영화보다도 영화에 관한 책을 더 많이 읽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때 나를 가로 막고 나선 것은 한국영화였다. 내가 영화에 대한 글을 쓴다는 문제에 대해서 자의식을 갖기 시작한 것은 대학교에 가서였다. 물론 그건 전적으로 나 혼자 읽는 글이었다. 매일 본 영화를 쓰고 또 보고 또 썼다. 그러기위해서 나는 참고문헌을 가져야 했다. 문학 비평을 처음 읽기 시작한 것은 그때였다.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논쟁이 중심에 있었다. 한국문학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은 내게 한국영화란 무엇인가, 로 번역되었다. 나는 의식적으로 한국영화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김기영 의 < 이어도 >, 유현목 의 < 문 >, 하길종 의 < 한네의 승천 >, 이장호 의 < 어제내린 비 >, 김호선 의 < 영자의 전성시대 >. 나는 두서없이 때로는 막 개봉했을 때, 혹은 재개봉으로 상영되었을 때, 종종 동시상영으로 이 영화들을 대부분 프린트에 (스크래치로 인하여) ‘비가 내리는’ 상태에서 보았다. 그리고 어느 날 늦봄 이른 아침 학교 앞 극장에서 < 족보 >와 마주쳤다. 누구에게나 어떤 영화를 보기 이전과 이후로 나누는 순간과 마주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각성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쇼크 상태. 아마도 그 목록은 모든 시네필들에게 각자 개인의 ‘은밀한’ 명단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 영화를 언제 어떻게 만났느냐에 따라 완전하게 다르게 당신을 일깨워주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에게도 그런 영화들의 명단이 있다. <족보>는 내게 그런 영화(중의 하나)이다. 나는 이 영화를 처음 보았을 때 ‘林權澤’(그때에는 포스터에도, 영화 자막에도 모두들 한자로 이름을 표기하였다) 이라는 이름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다. 심지어 그 이전 영화들을 이미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름을 기억하고 있지 않았다. (나는 쇼브라더즈 무협영화를 보면서 감독 이름을 외우기 시작했다) <족보>는 줄거리가 특별한 영화가 아니었다. 나는 이미 그와 비슷한 줄거리의 일제 강점하의 식민지 시대를 다룬 영화나 텔레비전 드라마를 보면서 자란 세대이다. 그렇다고 특별한 주인공이 나오는 것도 아니었다. 오로지 어떤 순간부터 이 영화의 진행은 내가 이제까지 본 영화들과 완전히 다르게 나아가기 시작했다. 이 영화의 씬들은 이제까지 내가 읽은 책의 일부분을 완전히 무효로 만들고 있었다. 그러나 그 장면들, 그 쇼트들의 리듬은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고 무엇보다도 우아하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그 안에 구석구석 자리 잡은 통일성과 이상할 정도로 균형을 잡은 감각들. 그러나 이 아름다움을 나는 설명할 방법을 알지 못했다. 나는 지금 도대체 무엇을 본 것일까. 영화의 수수께끼. 트뤼포를 경유하여 바쟁의 말에 기댄다면 상형문자. 무엇이 나를 이렇게 민감하게 만들었을까. 대답을 해야 한다. 나는 초조하게 두리번거리면서 다음 영화를 기다렸다. 그때부터 나는 ‘林權澤’이라는 이름을 찾아서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임권택 감독님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영화를 만들어나가고 있었다. 도대체 이 사람은 어떻게 이 영화들을 모두 만들 수 있는 것일까, 라고 어리둥절할 정도였다. 어떤 영화는 훌륭했고(< 짝코 >), 어떤 영화는 나빴다(< 내일 또 내일 >). 유감스럽게 나는 < 만다라 >를 개봉했을 때 보지 못했다. 그때 나는 군대에 있었고. 대신 전쟁영화인 < 아벤고 공수군단 >을 보았다. 이 영화는 지루했다. 제대한 다음 다시 임권택 감독님의 영화를 순서대로 쫓아갈 수 있었다. 그 어떤 영화보다도 < 길소뜸 >은 굉장하다, 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나는 이 사람에게서 영화에 대한 대답을 듣고 싶었다. 만일 내가 임권택 감독님의 영화 안에 담겨진 비밀을 알게 된다면 그건 한국영화라는 비밀을 알게 되는 순간이 될 것이라는 (앎에 대한) 은밀한 열망이 있었다. 물론 내가 임권택 감독님의 대답에서 기대한 것은 영화의 개념(들)이 아니었다. 그건 이미 책으로 충분히 ‘읽었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 개념들이 실제로 영화 속에서 어떻게 활동하고, 어떻게 이것이 저것과 접속하고, 그 안에서 반대로 개념들에 영화라는 시스템이 어떻게 의문을 제기하며, 그 과정에서 영화라는 개념이 만나는 불안의 조건이 무엇이며, 이 모든 각각의 요소들을 정의내리는 대신 그 용어 바깥에서 명령하는 날씨와, 세트와, 배우라는 몸과, 그 몸속에서 울려나오는 목소리와, 그 몸의 제스처와, 활동과, 종종 순환을 중단시키는 카메라의 뒤편에서 벌어지는 결정 사이의 블랙홀, 말하자면 아무리 노력해도 항상 불연속성으로 귀결 지어지는 비평과 현장 사이의 절망적인 중단을 다시 매듭짓고 싶었다. 나는 반문하고 싶었다. 혹시 이 모든 것들이 오로지 현장에서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 임의적으로 모인 것은 아닙니까? 어쩌면 나는 자신을 방어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알라바이를 만들고 싶어 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반대로 나는 기꺼이 개념(들)과 영화 사이의 비대칭의 대결 속에서 이념들로 이루어진 개념을 버리고 활동 중인 영화를 선택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영화에 관한 진정한 감각이란 영화가 만들어지는 과정 안에 놓여진 것이다, 라는 롯셀리니의 말. 그냥 단 한 마디로 이 개념들의 피와 살을 알고 싶었다. 트뤼포는 인터뷰를 위해서 벨기에 시네마테크에서 힛치콕의 영국시절 영화들을 다시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그러나 나는 트뤼포와 같은 행운을 누리지 못했다. 그 당시 한국영화들을 보관한 곳은 한국필름보관소였고, (1991년 9월 지금의 명칭으로 변경한 이후) 한국영상자료원이 된 2002년에서야 자료를 외부에 공개하기 시작했다. 나는 임권택 감독님의 영화를 전적으로 내 기억에 의존해야만 했다. 대부분의 영화들은 기억 속에 희미하게만 남아있었다. 고백하자면 심지어 이 영화들 중의 일부는 필모그래피를 정리하는 과정 중에 아, 내가 그때 본 그 영화가 임권택 감독님의 영화였구나, 라고 알게 된 제목들도 있었다. 인터넷은 아직 인류 문명에 도착하지 않았고, 모든 자료는 하나씩 국회도서관에 가서 찾아야 했으며, 일일이 필름으로 보관된 신문기사들을 뒤져야만 했다. 게다가 그때 나는 아직 1960년대에 만들어진 임권택 감독님의 영화 대부분을 보지 못한 상태였다. 그건 전적으로 내 나이의 한계 때문이다. 내가 무슨 재주로 (아직) 국민학교(라고 불리던) 시절에 만들어진 그 영화들을 찾아볼 수 있었을까. 혹은 보았다 하더라도 그걸 인터뷰로 질문을 해낼 만큼 기억해낼 수 있을까. 질문을 한다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발견의 방법론을 경유하는 문제의식이다. 나는 질문이 내 안에 머물기를 원치 않았다. 질문이 다시 영화 안에 들어가 활동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임권택 감독님과의 인터뷰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는 이 인터뷰가 그렇게 전면적인 상황으로 펼쳐지게 될 것이라고는 미처 상상하지 못했다. 질문은 저 아래까지, 일제 식민지 강점하를 거쳐서 조선시대 말기 그 어딘가에 까지 내려가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의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 전라남도 장성이라는 지리적 장소가 가져온 한국 근대사 안의 역사적 맥락. 한국전쟁은 그 장소를 찾아온 다음 한 인간의 영혼과 육신을 갈가리 찢어놓았다. 그는 오로지 자기 육신 안에서 이 모든 시간을 견뎌내야만 했다. 그런 다음 그 시간이 끝나지 않고 그의 영화 속에 흔적을 남겨놓고 있었다. 그의 영화 속의 시간은 경험의 시간이자 역사의 시간이었다. 시간의 다발들. 눈에 보이지 않는 시간들은 세상 속을 어슬렁거린다. 그는 종종 인터뷰 중에 탄식을 하면서 내게 말했다. 나는 많은 시간을 낭비했어요. 그저 어떤 삶의 목표도 없이 그렇게 세월을 보냈어요. 그러나 영화는 그 시간들을 차례로 쌓아나갔다. 그런 다음 우리를 되찾은 시간 앞으로 데려다 주었다. 나는 이 시간들 사이의 복잡한 기호들에 관해서 귀를 기울였다. 그 자신이 헛되이 시간을 보냈다고 말하는 그 시간 안에 있는 진실. 내가 비로소 알게 된 배움의 본질적인 성과. 나는 임권택 감독님에 관해서 이야기를 할 때 종종 어느 순간부터 한국근대사에 대해서 말하거나, 혹은 지난 50년간에 걸친 한국영화사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는 사실에 문득 소스라쳐 놀라곤 한다. 그건 내 의도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걸 설명하는 과정은 번번이 잃어버린 시간 안으로 들어와 길을 잃어버린 다음 이러 저리 그 선을 따라 나가면 그 시간을 되찾는 장소에로 나를 데려다 놓았다. 물론 첫 번째 인터뷰는 < 씨받이 >에서 끝났지만 그 ‘이후’ 임권택 감독님은 계속 영화를 만들었고 나도 계속 그 영화들을 쫓아갔다. 발걸음은 늦어졌지만 그 보폭은 점점 멀어지고 깊어졌다. 이를테면 < 아다다 >를 만들고 난 다음 갑자기 < 개벽 >으로 점핑했을 때의 아득함. 혹은 < 창, 노는계집 >을 찍고 난 다음 갑자기 < 춘향뎐 >으로 넘어왔을 때의 망연자실함. 종종 선이 끊어진 듯한 느낌을 받을 때조차 있었다. 혹은 내가 붙잡은 선이 잘못된 것은 아니었는지 자문해보게 되었다. 매번 영화 앞에서 이쪽인가, 저쪽인가를 망설여야만 했다. 임권택 감독님은 대답을 하는 대신 다음 영화를 만들었다. 항상 영화가 끝났을 때 새로운 영화가 시작되었다. 한 편의 영화 안에 놓여진 하나의 세계. 가능한 세계. 그 세계 안의 무한한 가능성. 그때 나는 무엇을 따라가야 할 것인가. 2002년에 진행된 두 번째 인터뷰는 거기서 시작하였다. 나는 멈추지 않았다. 두 번째는 훨씬 좋은 환경에서 진행되었다. 영상자료원은 기꺼이 내가 놓친 영화들을 다시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었다. 많은 영화들이 (불완전한 형태이기는 하지만) 비디오로 출시되었고, 이제 막 DVD로 나오기 시작했다. 물론 많은 영화들이 사라져버렸기 때문에 나는 그 영화들에 대한 질문을 할 수 없었다. 임권택 감독님은 그저 차라리 잘 없어졌다, 는 말로 대답을 대신 했다. 아직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다. 그런 다음에도 세 편의 영화가 더 만들어졌다. < 하류인생 >과 < 천년학 >, 그리고 < 달빛 길어 올리기 >. 나는 이미 이 세 편의 영화에 대한 인터뷰를 모두 마친 상태이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나는 계속해서 이 인터뷰의 정리를 미루고 있었다. 핑계는 금방 임권택 감독님이 102번째 영화 촬영을 시작하게 될 예정이니 잠시만 기다려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문득 내가 오랜 시간 망설여왔던 결정을 할 때가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원래의 질문으로 돌아갔다. 나는 처음에는 내 질문을 잘 알지 못했다. 내 질문을 정식화시킬 수 있었던 것은 모리스 블랑쇼로부터의 배움 덕분이다. 나는 이제까지 영화란 무엇인가, 라는 대답을 얻고 싶어 했다. 블랑쇼는 질문을 바꾸었다. 문학은 어떻게 가능한가? 나는 그 말을 영화에로 끌어당겼다. 영화는 어떻게 가능한가? 이때 영화적 경험의 공간이란 무엇인가? 모든 경험의 기억을 남겨둔 채 그것이 하나의 텍스트라는 윤곽만을 망각해버린다면 무슨 일이 생길 것인가. 거기에 온전히 남아있는 영화적인 경험의 순간들. 비평은 시선의 결단을 내려야한다. 어떤? 그것을 간신히 유지시키고 있는 윤곽을 지워버리기. 나는 완성에 대한 근심을 잊어버릴 생각이다. 그 대신 오로지 내가 경험한 영화적 공간 안에서 어떤 매개도 없이 찢겨져 나간 영화와 인터뷰 사이의 두 세계를 점핑할 것이다. 나의 기투(Entwurft)라는 모험. 나는 먼 길을 돌아서 다시 비평으로 돌아왔다. 나는 그 영화가 어떻게 완성되었느냐고 물어보는 대신 어떻게 출현하였느냐고 물어볼 것이다. 영화를 본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건 그 영화의 가능한 세계를 체험하는 것에 다름 아닐 것이다. 만일 이때 의미를 찾는 일에 몰두한다면 우리는 매번 동일한 방식으로만 영화를 보게 될 것이다. 어떻게 우리들은 매번 새로워질 수 있을까. 나는 이제까지 대답을 찾았다. 지금부터는 다시 질문을 생각할 차례이다. 좋은 질문. 오류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실패를 겁내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지금 대답을 찾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나는 여기서 다시 시작한다. 마치 만난 적이 없기라도 한 것처럼, 나는 임권택 감독님의 영화를 하나씩 다시 볼 것이다. 그런 다음 내가 볼 수 있는 모든 임권택 감독님의 영화에 대한 글을 쓸 것이다. 이것은 전체의 긍정이다. 하나도 빠짐없이 그 모두를 긍정하기. 이때 나는 영화가 영화라는 것을 스스로 질문하는 장소에서 시작할 것이다. 자, 이제 구체적인 이야기를 할 차례이다. 나는 몇 가지 원칙을 세웠다. 첫째, 모든 영화를 다시 본 다음 다시 쓴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이 가능해진 것은 한국영상자료원의 도움 덕분이다. 어쩌면 이 글은 그들과 함께 쓰는 것이라고까지 말하고 싶다) 나는 기억에 의존하지 않을 생각이다. 매번 마치 그 영화를 어제 본 것처럼 다시 본 다음 다시 쓸 것이다. 이미 이전에 그 영화에 대해서 쓴 글을 (가끔 참고는 하겠지만) 다시 끌어들이지 않을 것이다. 종종 과거의 영화들에 대해서 어떤 비평은 기억에 의존할 때가 있다. 나는 그것도 하나의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차라리 이런 경우 영화와 기억 사이의 차이에 대해서 쓴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매번 그 영화를 내 앞에 다시 불러 세운 다음 다시 생각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반대로 미래의 비평을 생각하고 있다. 과거의 영화를 현재의 자리에서 본 다음 그 영화를 생각할 때 그 사유는 미래의 종합이라는 방식으로 전개될 수 있을 것이다. 과거의 영화를 현재의 자리에서 미래에로 개방하기. 이때 세 개의 시간을 나는 하나의 자리에서 모으게 될 것이다. 이미 본 영화. 다시 보는 영화. 이미 경험한 영화, 다시 경험하는 시청각 기호들. 그 안에 담겨있을 매번의 새로운 발견의 가능성. 영화와 비평 사이의 선험적 경험주의. 나는 영화가 창조의 장소이며, 매번 새로운 가능성이 활동하는 시간이라는 것을 보고 싶다. 나는 되돌아왔지만 그러나 동시에 그 장소가 매번 다르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영화에서 같은 장소란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모든 예술에서 같은 장소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아쉽게도 나는 101편의 영화를 모두 쓸 수가 없다. 왜냐하면 현재 한국영상자료원에 보관되어 있는 영화는 모두 76편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24편의 영화에 대해서 나는 아직도 기다릴 수밖에 없다. 그 영화들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 전쟁과 노인 >(1962), < 남자는 안 팔려 >(1963년), < 신문고 >(1963년), < 단장록 >, < 욕망의 결산 >, < 십자매 선생 >, < 단골지각생 >, < 영화마마 >, (모두 1964년) < 빗속에 지다 >, < 왕과 상노 > (1965년), < 닐니리 >(1966년), < 청사초롱 >, < 망향천리 >(모두 1967년), < 돌아온 왼손잡이 >(1968년), < 상해탈출 >, < 비 나리는 고모령 >(모두 1969년), < 이슬 맞은 백일홍 >, < 비 나리는 선창가 >, < 밤차로 온 사나이 >, < 비검 > (모두 1970년), < 나를 더 이상 괴롭히지 마라 >, < 요검 > (모두 1971년), < 대추격 >, < 잡초 > (모두 1972년). 그 중에서도 가장 분한 것은 ( 임권택 감독 스스로 자신의 영화 경력에서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다, 라고 말한) <잡초>를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줄거리를 읽은 다음 이 영화를 처음부터 왠지 본 것만 같은 기분이 들긴 하지만 기억이 분명치 않다. 두 번째, 나는 이 영화들을 연대기 순으로 써나가지는 않을 생각이다. 이건 전적으로 내 쪽에서의 이유이다. 나는 이 비평을 통해서 전기를 구성하려는 것이 아니다. 내가 트뤼포에게서 배운 것은 각 영화들을 그 자체로 존재케 하라, 는 것이었다. 차라리 전략이라고나 할까. 나는 영화들 사이의 관계를 과도하게 과장할 생각이 없다. 같은 해에 만들어진 영화들조차 서로 다른 영화사에서 서로 다른 이유로 서로 다른 스태프들과 함께 서로 다른 배우들로 만들어졌을 때 이 둘 사이의 관계는 쉽게 연결 지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종종 비평 담론들은 이들 영화 사이를 마치 친족관계처럼 설명하고 싶어 한다. 어쩌면 이건 비평의 관습일지도 모른다. 종종 하나의 이름 아래 규칙을 통일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1969년은 1971년이 아니다. 혹은 1978년은 1980년이 아니다. 이 연도를 잘 생각해주기 바란다. 나는 그런 손쉬운 방법을 피하고 싶었다. 나는 연재소설을 쓰는 것이 아니다. 차라리 그런 방식으로 묶여있는 관계를 차례로 풀어낸 다음 나는 이들을 다시 배치시킬 모델을 찾아낼 생각이다. 서로 상이한 영역. 서로 다른 과정의 형성들. 나는 한 편의 영화가 매번 매우 복잡하고 상이하게 얽힌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들은 단조로운 등질관계 아래 놓고 이야기될 수 있는 균형 잡힌 성질의 것이 아니다. 모든 영화는 각자의 창문을 가질 것이다. 그리고 그 창문으로 각자의 세상을 보게 될 것이다. 이건 집합이 아니라 분산을 목표로 한 것이다. 그러니 제발 내게 어떤 영화가 임권택 영화 중의 최고냐고 물어보지 말길 바란다. 여기서는 어떤 영화가 어떤 영화보다 우월하거나 반대로 열등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각각의 영화들의 존재방식을 물어볼 것이다. 차라리 이렇게 말하면 어떨까. 자신이 예술이라는 것을 드러내 보일 때 거기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건 무조건적이자 절대적인 차이일 것이다. 자기 스스로 존재하고 그 존재에 대해 우리가 사유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각자의 힘. 각자의 아름다움. 다만 여기에 두 가지 원칙은 세웠다. 하나는 101번째 영화 <달빛 길어 올리기>를 맨 먼저 쓴 다음 두 번째 영화는 데뷔작 <두만강아 잘 있거라> 를 쓴다는 것이다. 그건 일종의 고정점 역할을 해줄 것이다. 나는 임권택 감독님의 말을 믿기로 하였다. 자신의 101번째 영화를 가리켜 “나의 두 번째 데뷔작”이라고 불렀다. 나는 맨 먼저 두 편의 데뷔작을 다룰 생각이다. 다만 뒤의 것을 먼저 다룰 생각이다. 그런 다음 임권택이라는 별자리 안에서 어떻게 각각의 영화들이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줄지를 생각할 것이다. 나는 아직 순서를 정하지 않았다. 아마 마지막 순간까지 순서를 정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내가 이 연재를 진행하는 도중 새로운 영화가 만들어지면 (아마도) 그 영화가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세 번째. 그러나 이 모든 영화에 대한 비평을 쓰지는 않을 것이다. 말하자면 나는 약간의 우회를 할 생각이다. 혹은 비평의 변주라고나 할까. (아직 아무 것도 결정하지는 않았지만) 필요하다면 그 영화에 대해서 누군가를 초대하여 토크를 하거나 혹은 라운드 테이블의 형식을 취할 생각이다. 나는 더 많은 친구들이 이 영화들을 환대하기를 기대한다. 그러므로 나의 배움은 여러 가지 전술들을 동원하여 진행될 것이다. 어떻게 그 영화와 마주칠 것인가. 어떻게 그 영화를 껴안을 것인가. 어떻게 거기서 배움을 끌어낼 것인가. 하지만 오해하지 말아주었으면 좋겠다. 나는 의미를 찾는 것이 아니다. 이 모든 노력 속에서 내가 끌어내고 싶은 것은 말 그대로 배움의 기쁨이다. 다소 길지만 이 말을 인용하고 싶다. “중국 옛말에 우공이산(愚公移山)이란 말이 있습니다. 옛날 화북지방에 북산우공(北山愚公)이라 불리는 노인이 살았습니다. 그의 집 대문이 남쪽으로 나 있었는데 태행산과 왕옥산이라는 두 큰 산이 그 출로에 버티고 있었습니다. 노인은 그의 아들들을 불러 괭이를 들리고 이 큰 산에 가 산을 파내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지수(智?, 지혜로운 늙은이)라 불리는 다른 노인이 있었는데 그들을 보고 크게 웃으면서 당신들은 참으로 멍청하구려, 당신 부자 몇 사람이 큰 산 두 개를 옮기는 것은 완전히 불가능한 일이요, 라고 말했습니다. 우공이 대답하길 내가 죽으면 아들이 있고, 아들이 죽으면 손자가 있고, 자자손손은 끝이 없습니다, 이 두 산이 아무리 높다한들 다시 더 높아지는 것은 아닐진대 조금씩, 조금씩 파헤치면 어찌 평평해지지 않겠습니까, 라고 대답했습니다. 옥황상제가 이에 감동하여 두 신선을 내려 보내 두 산을 지고 가게 했습니다” 나는 하나씩 써나갈 것이다. 내 결심. 하여튼 누군가 시작해야한다고 생각했다. 긴 시간이 걸리겠지만 차례로 써나갈 것이다. 대장정. 물론 신선을 기다리지는 않을 생각이다. 다만 그러면 누군가는 또 다른 평을 쓰기 시작할 것이다. 그렇게 우리가 하나씩 모이면 모든 한국영화들은 각자 자기 자신에 관한 각자의 영화평을 갖게 될 것이다. 적어도 우리는 한국영화 편수와 동일한 숫자의 영화평을 갖게 될 것이다. 나는 둘 사이의 우정을 생각한다. 어떤 영화도 외로우면 안 된다. 어떤 영화는 운 좋게 두 편, 혹은 세 편, 어쩌면 열 편, 아니면 훨씬 그 이상의 친구를 갖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때 어떤 영화들은 단 한 명의 친구도 갖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한다. 다시 그날처럼 11월 둘째 주 화요일이다. 임권택 감독님을 처음 만난 날. 나는 오늘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은 마음으로 시작한다. 두 번의 시작. 그리고 두 번째 시작!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