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니치 뉴스, 일미 성숙 시대로 미키 방미
- 제작년도
- 1975
< 대괴수 용가리 >(1967)는 한국영화에서 거의 처음으로 우주적 시점이라고 할만한 것을 보여준다(정확히 말하자면 <대괴수 용가리>가 등장하던 그해 동시도착한 < 우주괴인 왕마귀 >와 함께). 검은 화면에 반짝이는 별, 카메라의 긴 패닝, 이윽고 보이는 푸른 별 지구. 이곳은 우주이다. 곧이어 정체불명의 대규모 폭발을 조사하기 위해 신혼여행지에서 차출된 우주비행사 광남이 지구에 대한 조망 속에서 사건의 발생 장소(핵실험이 일어난 장소)를 정확히 찾아내고, 버섯구름과 그것이 불러일으킨 거대한 지면의 균열을 목격한다. 한편 이 균열에서 시작된 움직이는 지진, 괴지진의 발생지점과 이동경로는 서울에 차려진 괴지진대책본부의 대륙 지도에 투명하게 드러난다(이 지도는 한쪽 면을 가득 채운 유리에 그려져 있다). 중국 서북부(영화에 명시되기는 오비리아라는 가상의 대륙)에서 발생한 괴지진은 황해도를 지나 시시각각 남하해오고, 휴전선 부근에서 솟아나 판문점을 부순다. 괴지진의 정체가 밝혀진다. 용가리의 현현. 이윽고 용가리는 인왕산에 우뚝 솟아 전모를 드러내고 중앙청과 서울시민회관, 서울시청과 남산에 이르는 서울의 중심부를 초토화시키고 급기야 한강다리를 파괴한다. <대괴수 용가리>의 이 지정학적 상상력은 이 영화를 한국전쟁과 그 결과 형성된 이 분단국가의 강렬한 냉전적 상상력의 우화로서 읽게 만들기에 충분해 보인다. “6.25 전쟁 때 북한군 침공의 육로 코스 그대로” 1) 를 밟고 있는 용가리는 이를테면 “괴수 김일성”과 유사해 보인다. 2) 1967년의 시점에 중국 서북부에서(이 지역은 중국이 1964년과 67년에 원폭과 수폭실험을 행하고 있는 장소이다) 발생하여 거듭되는 남하를 거쳐 판문점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서울을 파괴하는 괴수라니! 그런데 이 괴수는 한국영화사 안에서 예외적 형상이지만, 피폭괴수물이라고 할 수 있을 일종의 ‘공통’ 장르의 소산이기도 하다. 만약 이 공통 장르라는 관점에서 이 영화를 본다면, 용가리라는 형상이 지닌 공통성과 특수성은 무엇이며 그것은 각각 어떤 것을 의미하는 걸까? 잘 알려져 있다시피 <대괴수 용가리>는 동시기의 일본 괴수영화 <대괴수 가메라>(1965)로부터 포맷과 기술을 빌려왔다. <대괴수 가메라>는 당시 도호의 고지라 시리즈에 대항하여 다이에이가 시도했던 괴수영화였다. 고지라 시리즈의 1960년대적 전회에 발맞춰 보다 아동친화적인 성격을 띄고 있던 이 시리즈는 대성공을 거두었고, 1960년대 중후반 다이에이의 달러박스로 기능하였다. 오해하지 말 것. 나는 지금 <대괴수 용가리>가 일본 괴수영화의 일종의 아류작이라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 영향관계가 보여주는 바는 피폭괴수물이라는 장르에 내재된 공통성에 다름 아니다. 참고로 말하자면 <대괴수 용가리>는 당시 일반적인 한국영화보다 훨씬 고가로 해외시장에 팔렸으며, 일본을 거쳐 이런 류의 B급 영화들을 만들어내고 배급한 대표적인 프로덕션 중 하나였던 AIP(American International Pictures) 배급으로 1969년이라는 빠른 시기에 미국의 지역 방송국 채널에서 방영되었다. Yongary, Monster from the Deep 이라는 제목으로 공개된 이 영어 버전은 현재 남아있는 <대괴수 용가리>의 유일한 완전판이기도 하다. 과연, 1950, 60년대 미국과 일본의 흥행장에는 방사능 피폭괴수라고 할만한 것들이 범람하고 있었다. 이 영화들은 지독히도 닮은 패턴을 고집하는데 시작은 항상 동일하다. 지구 어디선가 핵실험이 있고 방사능에 피폭된 거대 생명체가 등장한다. 이를테면 거대한 개미떼(<뎀! Them!>(1954)), 거대한 독거미(<타란튤라 Tarantula>(1955)), 거대한 문어(<놈은 바닷속으로부터 왔다 It Came from beneath the Sea>), 거대한 메뚜기(<비기닝 오브 디 엔드 Beginning of the End>(1957)), 거대한 파충류 등등. 이 괴수들은 한결같이 도시로 향하고, 그들의 습격으로 도시는 초토화된다. 이런 식의 피폭 괴수영화의 시작은 1953년 레이 해리하우젠의 스톱모션으로 완성된 거대 공룡 리도사우르스가 등장하는 < 심해로부터 온 괴물 The Beast From 20000 Fathoms>이었다. 이 영화의 성공은 곧 무수한 피폭 뮤턴트들을 양산해내는 기폭제가 되었다. 그리고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이 괴수들 중 가장 성공적이고 지속적이며 국제적인 성공을 거두어낸 것은 일본의 <고지라 ゴジラ>(1954)였다. 2016년의 <신 고지라>에 이르기까지 28편의 시리즈를 낳은 이 영화는 모스라, 가메라, 라돈, 킹기도라 등의 수많은 일본산 괴수들이 출몰하게 될 특촬영화라는 하나의 장르를 만들어냈다. <고지라>의 성공은 일본 내에서 끝나지 않았다. 이 영화의 영어 편집 버전은 미국과 유럽에서 또한 흥행에 성공했으며, 그 여파는 1960년대까지 이어졌다. <고지라> 이후 일본 괴수영화는 미국과 유럽에서 가장 잘 팔리는 일본영화가 되었고, 고지라는 서구에서 성공한 일본산 서브컬처의 첫 번째 ‘캐릭터’가 되었다. 이 장르의 역사를 상기해보건데, <대괴수 용가리>라는 피폭괴수물은 약간의 지체를 두고 이곳에 도착한 것으로 보인다. 이 영화가 등장하던 당시 미국의 피폭괴수물은 이미 그 장르적 사이클을 소진했다. 일본의 경우 ‘고지라’ 시리즈는 1960년대 이후 극적인 성격전환을 거쳤다. 무시무시한 파괴의 괴수 고지라는 <킹콩 대 고지라 キングコング対ゴジラ>(1962)에서 외래의 것(킹콩)에 대항하는 내셔널한 것으로서 자리매김되었으며(고지라는 일본 국회의사당 꼭대기에서 미녀를 희롱하는 킹콩과 맞서 싸운다), <3대괴수 지구최대의 결전 三大怪獣 地球最大の決戦>(1964)에 이르러서는 우주 최강의 괴수 킹키도라에 맞서 지구를 구하는 정의의 사도, 아이들의 ‘친구’로 변모하였다. 이 피폭 괴수영화들이 1945년 이후 핵이 초래한 ‘불안의 시대’의 산물이라는 것은 자명해 보인다. 이 영화들의 등장 이전까지 유일한 괴수영화였던 <킹콩>(1932)이 원시의 섬에서 온 거대 유인원이 뉴욕을 초토화시킴으로써 제국-문명-도시가 식민지-야만-원시에 대해 갖는 공포와 불안을 상징화하는 것이었다면, 1950년대산 피폭괴수 영화들은 핵의 공포를 시각화한다. 이들은 바다 혹은 강 위로, 사막에서, 산꼭대기에서 불현듯 나타나는데, 이 급작스러운 출현이야말로 핵의 위협의 편재성(omnipresence)에 관한 시각적 대응이라고 할 만하다. 동시에 이 괴수가 각각의 개별국가의 영토 내로 들어와서 구체적인 장소를 점유할 때 그 장소의 역사성과 현재성이 불현 활성화된다. 이를테면 제국, 식민지, 전쟁, 냉전의 현재. 종종 이 영화들에 관한 해석이 개별국가의 역사적 상흔과 관련될 수밖에 없는 것은 바로 여기에서 기인한다. 이를테면 <고지라>에 관한 비평들에서 고지라가 전전의 공습(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자폭탄 폭격까지를 포함하여)을 감행하는 미군이자 그곳에서 죽어간 수많은 ‘전쟁의 사자’들의 망령으로 해석되고 있는 것은 장소의 역사성이 이 폐허의 풍경 위에 과거와 현재라는 두 개의 시간대를 겹쳐놓기 때문이다. 고지라와 용가리가 미국의 피폭괴수에 비해 훨씬 더 역사적 기억의 활성화와 관련되어 있는 것은 간단히 말해 도쿄와 서울이라는 장소가 전쟁의 장소였기 때문에 그러하다. 이를테면 <심해에서 온 괴물>의 리도사우르스가 뉴욕을 공격할 때, 그 풍경은 어디까지나 미래시제의 일에 불과하지만(미국 본토에서 전쟁은 없었다는 점을 상기하자), 폐허가 된 도쿄와 서울의 풍경은 과거와 현재, 미래를 동시에 불러온다. 따라서 이 일본과 한국의 괴수들이 역사적 기억 자체가 가지고 있는 훨씬 더 다의적인 복잡성과 연결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게다. 피폭괴수는 두 개의 테크놀로지컬한 계보를 가지고 있다. 미국의 괴수들이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졌다면(리도사우르스로부터 시작되는 저 수많은 피폭괴수들의 위대한 창조자는 레이 해리하우젠이다. 그는 <킹콩>의 창조자 윌리스 오브라이언의 수제자였다) 일본의 경우, 모형을 만들고 이를 사람이 뒤집어씀으로써 해결하는 방식, 즉 수트형 괴수로 이를 구현하고자 했다. <고지라>의 제작자들이 대규모 자본의 노동집약적 산물인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을 포기하고 수트형 괴수로 전환 가능했던 이유는 일본에, 특히 <고지라>를 만들어내고 있는 영화사 도호(東宝)에 축소된 공간 및 사물의 구현, 즉 미니어처와 이것들의 정교한 움직임을 만들어내는 조정 기술의 풍부한 집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1941년 진주만 공습 이후 일본 전쟁 프로파간다가 해군의 대규모 공중전 재현으로 넘어갔을 때 이를 가능케 한 것은 바로 미니어처와 조정 기술이었다. 1942년 진주만 공격 1주년을 기념해서 만들어진 <하와이 말레 해전 ハワイ・マレー沖海戦>은 이 기술의 놀라운 성과를 유감없이 과시하였다. 1500평방미터의 수영장에 6백분의 1의 미니어처를 통해 재현된 진주만 공습은 전전 일본 최대의 공중 스펙터클을 선사했으며, 대동아공영권 최대의 히트작이 되었다. 이 실제를 방불케하는 스펙터클을 창조해내는 데 지대한 역할을 한 것은 이후 고지라의 창조자가 될 츠부라야 에이지(円谷英二)를 필두로 한 도호의 특수촬영 기술진들이었다. 전전 일본 해군 프로파간다 영화의 기술적 역량 속에서 만들어진 <고지라>는 미니어처에 기반한 ‘리얼’한 공간을 창출하는데 성공함으로써 괴수의 무시무시한 난동을 실감나게 그릴 수 있었다. 이 순간에 발명된 수트형 괴수와 미니어처 촬영은 일본 피폭괴수와 미국 피폭괴수를 결정적으로 차이지운 핵심 표상이라고 할만한 것을 만들어낸 것으로 보인다. 스톱모션의 움직임은 수트형 괴수, 인간의 동작이 배어나올 수밖에 없는 고지라의 ‘자연스러운’ 움직임에 비해 간헐적이고 단속적이며 부자연스럽다. 유인원(킹콩)에서 파충류(리도사우르스)로의 이동이 낳은 지평, 그 형상이 보유하는 인간으로부터의 거리만큼 더 배타적인 타자성의 영역으로 이동해간 이 형상의 ‘낯섬’은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의 인간적 움직임과의 거리에 의해 배가된다. 킹콩의 직접적인 후예로서 리도사우르스는 비록 단독의 거대괴수이지만 그 타자성의 측면에서 보자면 여타의 군집 괴수들, 이를테면 개미, 거미, 메뚜기 등과 그리 다르지 않다. 또 일본 특촬 괴수들의 눈동자가 강조된 눈은 이들로부터 어떤 ‘감정적’인 것을 유추하도록 만든다. 종종 그들은 화를 내거나 두려워하거나 슬퍼하거나 당황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마도 이 인간적인 특징이야말로 고지라에게 그토록 다양한 의미가 부여되는 이유일 것이다. 그것은 미국영화의 괴수들처럼 명백한 타자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인간적’이어서 관객인 우리는 그들이 결국 인간에 의해 제거되는 순간에, 그리하여 드디어 재난이 수습되고 안정이 찾아오는 순간에 안도하지만, 동시에 통쾌함보다는 마음이 상함을 느낀다. 고지라는 공포의 대상이지만, 또한 연민과 동정, 심지어 희망의 대상이다.(야마네 박사는 피폭을 ‘견뎌낸’ 고지라를 연구함으로써 ‘인류’의 미래에 공헌할 수 있지 않은가라고 짧은 희망을 피력한다). 고지라의 형상으로부터 유래된 이 양가성은 정확히 1950년대 핵을 둘러싼 강력한 프로파간다, 파괴와 절멸의 무기로서의 핵과 평화와 번영으로서의 핵이라는 저 가상적 분할선을 반영한다. 1950년대 중반 이후 미국 대통령 아이젠하워의 언명 ‘평화를 위한 핵’이라는 가상은 아마도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프로파간다일 것이다. 그것은 핵 유토피아라고 할만한 것을 만들어내면서 욕망에 어필하였다. 아마도 이 지점이야말로 1960년대 이후 원전을 중심으로 한 미국의 군산복합체가 완성되는 것과 맞물려 미국의 파괴로서의 피폭괴수가 사라진 이후에도 일본 피폭괴수가 계속해서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던 이유일 것이다. 원전국가 일본으로의 이동 속에서 특촬 괴수들은 점점 더 인간적 형질이 배가되어갔다. 심지어 이들은 가족을 건사하고(미니라), 아이를 구하고(가메라), 지구를 지킨다(고지라).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1967년의 <대괴수 용가리>는 이 순간 도달한 한국에서의 핵의 관점을 그야말로 ‘총체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피폭괴수의 계보 속에서 무기로서의 핵의 파괴성을 일별하는 한편, 그럼에도 그것이 능히 조절가능하다는 믿음을 설파한다. 과학입국을 선언한 한국의 어린 남자아이는 빛이 나오는 기구로 용가리를 춤추게 한다. 트위스트풍으로 편곡된 아리랑에 맞춰. 그리고 이 믿음 위에서 알다시피 이제 곧 한국 역시 원전국가로 이동해갔다. 일본과 마찬가지로 한국은 풍요와 번영의 핵 이미지를 그 어떤 의심도 없이 수용하였다. 조절가능한 핵, 춤추는 용가리에 대한 믿음은 이곳에서 여전히 유효한 것 같다. 비록 1979년 스리마일섬에서, 1986년 체르노빌에서, 2011년 후쿠시마에서 파괴와 죽음의 무기/풍요와 번영의 에너지로서의 핵 사이를 긋고 있는 이 분할선이 핵 그 자체 안에서 이미 분할불가능한 것임이 그토록 파괴적으로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 1) 이영미, 『광장의 노래는 세상을 어떻게 바꾸는가』, 인물과사상사, 2018, 119쪽. 2) 김소영, 『근대성의 유령』, 씨앗을 뿌리는 사람, 2000, 27-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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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에서 신군부 독재로 이어지는 1970~80년대에 대해 ‘한국영화 암흑기’라는 레이블을 붙이는 건 정설처럼 보인다. 사실이었다. 영화는 TV에 밀리고 있었고, ‘반공’과 ‘새마을 운동’을 내세운 국책 영화에 얽매인 영화계는 점점 뒤틀려 갔으며, 사전 심의와 사후 검열 속에서 크리에이티브는 서서히 증발했다. 산업적 토대의 붕괴, 불합리한 제도, 미학적 고갈이 동시에 진행되었던 이 시대는 몇몇 감독들의 개인기로 돌파하기엔 너무 어두웠다. 시스템이 붕괴될 때 가장 대표적으로 드러나는 현상은 무분별한 트렌드 추종이다. 1980년대는 그 정점이었다. 멜로드라마와 문예 영화와 스타 시스템을 토대로 1960년대에 황금기를 구가했던 한국영화는 1970년대에 서서히 무너졌고 1980년대에 난장판이 되었다. 멜로는 여전히 만들어졌지만 예전 같은 힘을 잃었다(진부한 신파의 클리셰에 빠져 있었다). 그 개념은 조금 모호하지만 ‘양질’의 문학 작품을 스크린에 옮겼던 ‘문예 영화’는 더 이상 영화화할 만한 소스를 구할 수 없었다(대신 1970년대부터 최인호나 조해일 같은 새로운 작가가 등장했다). 과거의 스타들은 일거에 물러났지만 그 공백을 채울 만한 스타는 도착하지 않았다( 안성기 가 유일한 희망이었던 시대였다). 1. 한수산 원작의 <거리의 악사>(정지영, 1987) 2. 이문열 원작의 <레테의 연가>(장길수, 1987) 3. 김홍신 원작의 <인간 시장>(김효천, 1983) 4. 미우라 아야코 원작의 <빙점 81>(고영남, 1981) 가장 심각한 건 ‘소스 부족’이었다. 1960년대엔 근대 단편 소설들이 ‘문예 영화’라는 이름으로 애용되었다(여기엔 ‘우수 영화’에 외화 수입 쿼터가 주어지는 현실적 이해관계도 작용했다). 라디오 연속극도 각광 받았고, 때론 일본 영화 시나리오를 그대로 가져온 경우도 있었다. 1970년대는 서서히 재료가 떨어졌고 1980년대에 오면 바닥을 드러낸다. 새로운 광산이 채굴되어야 했다. 이 과정에서 다양한 방식의 하이브리드 현상이 나타난다. 심하게 말하면, ‘돈 될 만한’ 건 뭐든지 끌어다 썼던 1980년대였다. 여전히 ‘문학’은 가장 중요한 원천이었다. 1970년대 최인호와 조해일에 이어 1980년대엔 한수산 이외수 이문열 박범신 등이 베스트셀러 작가로서 영화계의 중요한 원천이 되었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1980년대엔 훨씬 더 대중적인 콘셉트가 강화되었다는 것이다. 『인간시장』 시리즈의 김홍신은 대표적이었으며 김성종 유홍종 백시종 김병총 등의 작가들도 가세했다. ‘시대정신’이었던 에로티시즘도 영향을 미쳤다. 외설 시비에 휩싸였던 염재만의 소설 『반노』가 대표적. <빨간 앵두> (박호태, 1982)도 최희숙의 소설이 원작이며, <매춘> (유진선, 1988)은 『매춘: 전국 사창가와 창녀 실태』라는 사회학 서적에서 온 것이었다. 전통의 부활도 있었다. 한동안 맥이 끊어졌던 문예 영화의 흐름은 에로티시즘을 통해 재등장했고 나도향과 김유정이 소환되었다. 일본 소설도 영화화되었다. 미우라 아야코 원작의 <빙점 81>(고영남, 1981)은 큰 흥행을 거두었고 호즈미 타카노부의 <수렁에서 건진 내 딸>(이미례, 1984), 하시다 스카코의 <오싱>(이상언, 1985), 나쓰키 시즈코의 <W의 비극>(김수형, 1985형) 그리고 이쿠시마 지로의 <한쪽 날개의 천사>(이성민, 1987) 등이 이어졌다. 1960년대 한국영화가, 당시 문화 교류가 없던 일본 소설이나 시나리오를 가져가 음성적으로 번안해 영화화했다면 그 원천을 밝혔다는 점에서 진일보한 모습이다. 미즈키 교코 원작의 만화 『캔디 캔디』도 영화화되었다. 1. <이장호의 외인구단>으로 최재성은 최고의 청춘스타가 되었다. 2. <신의 아들>은 최민수의 데뷔작이다. 3. 강철수 원작의 <팔불출> 4. 한희작 원작의 <한희작의 러브러브>. 가장 강력한 소스는 만화였다. 이현세의 『공포의 외인구단』을 영화화한 <이장호의 외인구단>(이장호, 1986)이 장안을 뒤흔들기 전, 1980년대 초부터 꾸준한 시도가 있었다. 그 시작은 길창덕 화백의 <순악질 여사>(김수형, 1980)였다. 이야기보다는 ‘순악질 여사’라는 캐릭터를 가져온 면이 강하며, 장미희가 주인공을 맡았다. 이후 1980년대에 약 20편가량의 만화 원작 영화가 등장하는데, 스포츠 신문 연재나 만화 가게나 당시 쏟아지던 만화 주간지를 통해 대중적 인지도를 쌓은 터에 흥행성이 꽤 괜찮았다. 이현세를 주로 이야기하지만, 이 시기 만화 원작 영화의 주요 인물은 강철수였다. <팔불출>(고응호, 1980)의 원작자였던 그는 이후 영화 쪽에 큰 관심을 보이며 <사랑의 낙서>(심재석, 1988)엔 아트 디렉터로 참여했고, 1989년엔 <발바리의 추억>으로 직접 메가폰을 잡는다. <가루지기>(1988)의 고우영 감독도 만화가에서 영화감독으로 잠시 업종 전환을 한 케이스인데, 1980년대의 만화는 충무로에 원작뿐만 아니라 인력도 공급한 셈이다. 그리고 <이장호의 외인구단>이다. 당시 프로야구 열풍과 이현세의 만화에 대한 컬트적 반응을 힘입은 이 영화는 영화 제목에 ‘공포’가 들어가선 안 된다는 당시의 심의 규율 때문에 『공포의 외인구단』에서 <이장호의 외인구단>으로 개명해야 했는데, 이것이 액땜이 되었는지 서울에서 약 28만 7,000명의 관객을 동원하는 빅 히트를 기록한다. ‘까치’ 오혜성 역을 맡았던 최재성은 당대 최고의 청춘스타가 되었으며, 동네 전파사마다 정수라가 부른 주제가 ‘난 너에게’(“난 네가 기뻐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가 흘러나왔다. 프로야구의 인기, 이장호 감독의 흥행력 등 이 영화의 성공 원인엔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핵심은 이야기였다. 당대 한국영화와 비교해볼 때 이 영화가 지닌 극적 요소는 두 배 정도는 셌다. 강한 승부욕, 목숨을 건 순애보. 팽팽한 긴장 관계, 뼈를 깎는 극기 정신…. 떡볶이로 치면 고추장이 아닌 캡사이신 맛이었고, 그 강렬함에 젊은 관객들은 반응했다. 이 영화의 성공으로 일련의 스포츠 원작 영화가 등장하는데, 박봉성의 『신의 아들』, 이현세의 『지옥의 링』, 허영만의 『카멜레온의 시』 등 복싱 소재 만화들이 영화화되었다. 1980년대 ‘복싱’은 여전히 있기 있는 스포츠였고, 여기에 혹독한 트레이닝과 청춘의 고독과 비극적 로맨스가 결합되었다. 안타까운 건 원작을 따라가지 못했던 인기였는데 완성도가 문제였다. 여기서 빼놓을 수 없는 트렌드는 역시 ‘에로티시즘’이며 스포츠 신문 연재를 통해 성인 만화의 흐름을 이끌었던 한희작과 배금택은 주역이다. <서울 손자병법>(김현명, 1986)이 한희작의 원작이 지닌 지명도에 기대 제목 정도만 가져 왔다면, <한희작의 러브러브>(윤석태 김정진, 1991)은 아예 제목에 작가의 이름을 드러낸다. 당대의 섹시 아이콘인 강리나는 만화 캐릭터를 별 위화감 없이 소화하는데, 이후 배금택 원작의 <변금련>(엄종선, 1991)에서도 캐릭터와의 높은 싱크로율을 보여준다. 하지만 만화 원작 영화의 흐름은 1990년대엔 뜸해진다. 이현세가 직접 연출을 맡은 <아마겟돈>(1996)이나 김수정의 <아기공룡 둘리>(1996) 등 극장용 애니메이션 쪽에서 성과를 냈고, 이현세의 『카론의 새벽』을 옮긴 <테러리스트>(김영빈, 1995)와 허영만 원작의 <비트>(김성수, 1997)가 흥행했지만 1980년대만큼의 양적 성과를 내지 못한다. 다시 그 붐이 일게 된 건 2000년 이후. 여기엔 웹툰의 등장이 큰 역할을 했다. 1. <멋대로 해라>의 혜은이와 김동현. 그들은 이후 부부가 된다. 2. <너무 합니다>의 원작자이자 주인공인 김수희. 3. 박남정 주연의 <새앙쥐 상륙 작전> 4. <담다디>의 이상은과 민규. 최근 한국영화계에서 아이돌 출신 연기자들의 활약이 돋보이긴 하지만, 가요계와 영화계의 크로스오버 현상은 이미 1980년대부터 시작되었다. 이전 1960년대부터 주제가는 영화 흥행의 중요한 요소였고, 남진이나 나훈아 같은 슈퍼스타들이 은막에 진출하기도 했지만, 1980년대는 남달랐다. 지금으로선 상상할 수 없지만, 이 시기엔 당대의 히트곡 제목을 그대로 딴 영화들이 쏟아졌다. 그 노래를 부른 가수가 출연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며, 영화 내용도 노래 가사와 대부분 무관했다. 오로지 노래 제목의 인지도를 이용한 경우들인데 조용필의 ‘창밖의 여자’와 ‘비련’, 와일드 캣츠의 ‘마음 약해서’, 심수봉의 ‘그때 그 사람’, 윤시내의 ‘난 모르겠네’와 ‘열애’, 이정희의 ‘참새와 허수아비’, 김현준과 민해경의 ‘내 인생은 나의 것’, 임수정의 ‘연인들의 이야기’, 주현미의 ‘비 내리는 영동교’, 최진희의 ‘사랑의 미로’, 이선희의 ‘J에게’, 최성수의 ‘풀잎 사랑’ 등 수많은 히트곡들이 그 제목을 충무로에 빌려주었다. 물론 가수가 직접 영화에 출연한 경우들도 있었다. 지난 연재에서 이야기했던 전영록이나 송골매, 김형용 같은 청춘 영화의 스타들은 대표적인 경우. 이외에도 <나를 보러 와요>(이유섭, 1980)의 방미, <슬픈 계절에 만나요>(박남수, 1981)의 백영규, <잊혀진 계절>(이형, 1984)의 이용, <담다디>(김응천, 1989)의 이상은, <울고 싶어라>(배해성, 1989)의 이남이, <앗싸! 호랑나비>(원정수, 1989)의 김흥국 등은 노래의 주인공이 직접 카메라 앞에 서는 경우들이었다. <너무 합니다>(남석훈, 1984)은 김수희의 자전적 이야기로, 그녀는 원작자이자 주연 배우로 참여한다. 노래와 상관없이, 가수 자체의 인기로 영화계에 진출하는 경우도 많았다. <아낌없이 바쳤는데>(박호태, 1980)의 심수봉, <멋대로 해라>(김정현, 1980)의 혜은이(1970년대부터 배우 활동), <그 사랑 한이 되어>(이형표, 1981)의 조용필, <날마다 허물 벗는 꽃뱀>(강대선, 1982)의 이은하, <흑녀>(강대선, 1982)의 인순이, <졸업 여행>(오성환, 1985)의 김범룡, <새앙쥐 상륙 작전>(김정진, 1989)의 박남정 등이다. 연기력을 인정받진 못 했지만, 당시 이 영화들은 그 화제성으로 이슈가 되었다. 당시 가요계와 영화계의 끈끈한 관계는, 가요 쪽의 붐에서 기인했다. 트로트 중심이었던 한국 대중가요는 1980년대 완전히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며 대중문화의 중심이 되었고, 아이돌 문화를 형성했다. 이 시기 침체기를 지나던 영화계는 가요계의 호황을 이용하려는 수많은 기획을 시도했고, 그 결과 수많은 ‘가요적 영화’들이 등장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런 영화들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그 흐름은 한국영화가 자생력을 서서히 지니기 시작하는 1990년대가 되면 사라지기 시작했다. 1980년대 충무로가 수혈받았던 또 하나의 원천이 있었다면 바로 TV의 코미디언과 개그맨이었다. 이전에도 영화와 방송을 겸하는 수많은 희극인들이 있었고 그 전통은 이주일로 이어졌다. 특히 <뭔가 보여드리겠습니다>(김수형, 1980) <조용히 살고 싶다>(김수형, 1980) <얼굴이 아니라 마음입니다>(이형표, 1983) 등의 ‘유행어 영화’는 작은 트렌드를 이뤄 <웬일이니>(김종성, 1983) <난 이렇게 산다우>(남기남, 1985) 등으로 이어졌다. 이것 역시 대중문화의 인기를 영화로 끌어오려는 기획이었다. 새로운 경향은 개그맨들의 진출이었다. ‘아동용 SF 액션’에 대한 지난 연재에서 언급했듯, 1980년대의 수많은 개그맨은 SF 프랜차이즈의 중심이 되었는데, 그들은 아이들 영화를 벗어나 성인용 영화에도 종종 출연했다. 이외에도 서세원 주병진 김명덕 김형곤 김병조 등 당대의 인기 개그맨들은 대부분 영화계와 만났으며 전유성은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비디오 영화를 직접 연출하기도 했다. 1. <뭔가 보여드리겠습니다>의 이주일. 2. <회장님, 우리 회장님>(엄종선, 1988)은 개그 프로그램을 영화화했다. 3. 주병진과 이미숙이 주연을 맡은 <가슴 깊게 화끈하게>(김수형, 1981) 4. 리메이크 영화인 <미워도 다시 한번 1980 - 1부>(변장호, 1980). 1980년대는 침체를 벗어나기 위한 강렬한 생존 욕구로 인해 숱한 하이브리드 현상이 일어났던, 용광로 같은 시기였다. 대중 문학계든 가요계든 만화계든 희극계든, 노래 제목이든 유행어든, 대중의 관심을 끌 수 있는 요소가 있다면 주저하지 않고 접목시켰으며 그 중엔 적잖은 성공도 있었고 대부분의 실패가 잇따랐다. 수많은 속편 영화들이 있었고 리메이크도 적잖았으며 애교(?) 섞인 표절도 종종 있었다. 아무튼 살기 위해 모든 것을 했던 시절이었다. 새삼 던져보는 질문. 1980년대는 과연 한국영화의 침체기였나? 표면적으로는 그럴 수도 있겠지만, 이면을 살짝 엿보면 이 시대만큼 역동적이었던 시대도 드물다. 장르적으로 매우 다양했고, 영화 이외의 분야와 끊임없이 접점을 만들어갔다(그런 점에서 2000년 이후 한국영화 르네상스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생존을 위한 분투. 1980년대는 천박한 상업주의와 여기에 저항하는 힘, 과거의 관습을 지속하려는 의지와 돌연변이 같은 존재들이 뒤엉켜 기묘한 연대기를 써 가던 시대였다. 이 시대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은 이유는, 어쩌면 이토록 미로처럼 뒤얽힌 상황 때문일 것이다.
손>은 유현목 이 1967년에 만들었던 50초 분량의 단편영화이다. 이 작품은 프린트의 소재가 불분명했으나 한국영상자료원이 2016년 5월 20일에 < 오발탄 >의 복원판과 함께 일반에 공개하여 빛을 보게 되었다. <손>을 실험영화로 분류한다면 이 작품은 프린트가 현존하는 한국 최초의 실험영화라는 타이틀을 얻게 된다. 그러나 이 분류가 유효하려면 실험영화라는 용어가 어떤 의미로 이해되어야 하는지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 만약 <손>이 실험영화의 정전들로 분류되는 1960년대의 영화들과 유사한 맥락에 있다면 그런 수고를 거칠 필요가 없을 수도 있지만, 작품을 보면 50초라는 짧은 길이를 감안하더라도 동시대의 실험영화들과는 다른 지점에 서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 글은 <손>이 실험영화라면 어떤 개념적 정의에 따라 실험영화일 수 있는지의 문제를 다루어 보고자 한다. <손>의 타이틀 이미지 필자는 <손>과 유현목이 주도하여 1964년 1월 18일에 설립했던 전위적 단편영화 제작 동인인 “시네포엠”(시네포엠은 미학적 개념이기도 하고, 단체의 이름이기도 한데 이 글에서 단체로서의 시네포엠인 경우에는 큰따옴표를 붙이고, 개념인 경우에는 별도의 표기를 달지 않도록 한다)에 관하여 두 편의 글을 쓴 바 있다. 첫 번째는 오큘로 온라인에 실었던 「유현목의 <손>과 관련된 사실들과 하나의 가설」이고 두 번째는 『영화연구』 71호에 실었던 「이색적인 문화영화: 유현목과 시네포엠(1964-66)의 실험영화 개념에 관한 제안」이다. 첫 번째 글은 <손>과 관련된 공식 기록으로 신문기사에 실렸던 사실들과 당대의 정황 등을 고려하여 <손>이 몬트리올국제박람회를 준비했던 정부의 요청에 의해 만들어졌을 수 있다는 가설을 제기하였다. 두 번째 글은 시네포엠이 지향했다고 하는 전위적 단편영화를 개념어보다는 지시어로 이해해서 구체적으로 어떤 영화들을 지칭했던 것인지를 살펴보고, 그 개념이 이색적인 문화영화에 준하는 것일 수 있음을 제안하였다(<손>에 관한 사실들은 첫 번째 글에서 정리해두었으므로 먼저 참고하기를 바란다). 두 글을 작성하면서 주로 검토해보았던 것은 유현목이 “시네포엠”을 결성하고 전위적 단편영화를 제작하기로 했던 동기가 외부의 영향에서부터 비롯된 것인가의 문제였다. 유현목은 <오발탄>으로 샌프란시스코 국제영화제에 초청을 받았고 1963년 10월 26일에 출국하여 12월 11일에 귀국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1월 18일에 “시네포엠”을 출범시켰기 때문에, 유현목이 40일이 넘는 방미 일정을 통해 실험영화를 접했고 이에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하기 쉽다. 필자도 첫 번째 글에서는 유현목의 방미와 “시네포엠”의 설립이 직접적인 관계를 갖는다고 단정했었다. 그러나 유현목의 방미 일정, “시네포엠”이 설립 후 열었던 두 번의 상영회에 포함되었던 영화들, 무엇보다도 샌프란시스코 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되었던 작품들을 일일이 따져보면 유현목이 당대의 북미 실험영화를 방미 기간에 접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유현목은 1963년 11월 8일 자 『동아일보』에 영화제 방문기에 해당하는 기사를 기고하는데, 이 기사에는 샌프란시스코 국제영화제 프로그램을 설명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고 실험영화를 상영한다고 명시되어있다. 그러나 영화제 프로그램을 살펴보면 오늘날 우리가 실험영화로 분류하고 있는 작품들이 없다. 그렇다면 당연히 유현목은 실험영화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가가 문제의 핵심이 될 수밖에 없다.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시선을 국내로 돌릴 수밖에 없다. 그러면 하나의 단서가 떠오르는데 시극동인회가 그것이다. 시극동인회는 1963년 6월 29일에 시, 연극, 영화, 무용, 미술 등에서 활동하는 작가들이 참여하여 결성되었다. 1963년 8월 12일 자 『동아일보』에는 시극동인회의 발족을 알리는 기사가 실려 있는데 이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시극의 연구 창작의 발표 활동을 목적으로 한 시극동인회가 발족을 보았다. 시극의 이론, 창작, 연출, 연기, 미술, 조명, 음악 등을 연구하거나 이에 종사하는 동인들의 모임인 동회에서는 월 1회의 정기연구 및 합평회, 연 2회의 시극에 관한 일반 공개강좌, 시극 무대공연, 동인지 시극 발간, 월 1회 이상의 방송을 통한 시극 발표 등 사업 계획을 세우고 있다. 동회에서는 제1회 8월 정기 연구 및 합평회를 24일(토) 하오 5시부터 중앙공보관에서 여는데 이인석(현대예술과 시극)의 발표와 장호 작 「열쇠장수」에 대한 합평이 진행된다. 시극동인회의 역원과 회원은 다음과 같다. 대표 간사 박용구, 창작 간사 장호, 사무 간사 최재복, 연출 간사 김정옥, 기획 간사 고원, 연기 간사 최명수, 회원 이인석, 김원태, 이흥우, 김요섭, 오학영, 박정온, 최일수(이하 생략). 이 기사를 “시네포엠”의 발족을 알리는 1964년 1월 21일자 동아일보 기사와 비교하면 상당히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전위적인 단편영화제작을 목적으로 하는 「시네포엠」 동인회가 새로 발족. 지난 주말(18일) 하오 중앙공보관에서 발기총회를 가졌다. 한국에서 거의 최초로 시도되는 이 전위적 모임은 「샌프란시스코」 영화제에 참석하고 돌아온 유현목 감독을 비롯하여 수년 전부터 「시네포엠」의 주동성을 강조해온 최일수, 배석인, 김인걸 씨가 주동이 되어 발기한 것이다. 영화예술뿐만 아니라 자매예술의 각 분야에서 골고루 회원을 포섭할 예정인 이들 「시네포엠」 동인회는 연 일편이상의 작품 제작을 계획하고 있으며 그 밖에도 연구발표회, 합평회 및 기관지발행을 기획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먼 꿈은 해외의 전위적인 영화작가들과의 교류와 국제영화제의 출품 등으로 무척 화려하다. 외국의 전위영화 동인들이 불과 사(四), 오(五) 명씩 모여 단편영화를 제작하는 데 비하면 이들의 발족은 좀 모순되는 곳도 있으나 그들의 이 활동에 일단 기대를 걸어볼 만하다. 발기총회에서 선정된 임원과 회원은 아래와 같다. 대표 간사 유현목, 총무 간사 김인휴, 기획 간사 최일수, 제작 간사 이형표, 해외 간사 정일몽, 창작위원 황운헌, 연출위원 배석인, 연기위원 김석강, 기술위원 박익순, 미술위원 박영일, 음악위원 정윤주, 무용위원 임성남, 회원(18일 현재) 장호 노만 황운헌 최일수(이하 생략). 두 단체 사이에는 상당한 유사성이 발견된다. 일종의 종합예술을 지향하고 있고 활동의 목표와 세부 내용이 거의 같다. 또한 조직의 구성이 유사하며 회원의 이름이 일부 중복된다. 일부 자료에는 시극동인회 회원에 유현목 이름이 발견되는 경우도 있다. 유현목은 시극동인회의 발족 이후 이름을 올렸던 것으로 보인다(단체의 성격을 따져보기 위해서는 회원들 개개인을 살펴보는 것도 필요한데, 이는 이 글의 범위를 벗어나므로 다음으로 미룬다). 이 두 단체를 각각 대표하는 인물은 장호와 유현목이고, 단체의 활동 목표와 미학을 정의해서 일종의 쌍둥이와 같은 관계로 만들었던 인물은 비평가 최일수이다. 최일수는 195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되어 평론 활동을 시작해서 주로 민족문학론과 관련한 글들을 썼다. 예외적으로 자신의 예술론을 전개하는 글들을 발표하기도 했는데, 여기서 다루었던 핵심 문제가 시극과 시네포엠이다. 시네포엠에 관해서는 한 편의 글을 펴냈다. 『자유문학』 1961년 9월 호에 실었던 「종합적 이메지의 예술-시네포엠에 대하여」이 그것이다(1982년에 출간된 최일수의 평론집 『현실의 문학』에는 이 글이 「시네포엠과 종합적 영상」이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이 글에서 최일수는 “시가 핵심이 된 종합적 이미지가 스크린에 표현되었을 때 그것을 시네포엠이라 하고 그것이 무대에 나타났을 때는 시극이라 한다”고 정의했다. 그가 이러한 정의를 내리는데 바탕이 되는 상황 인식은 다음과 같다. (1) 현대시는 추상적인 소리에서 구상적인 이미지로 이행해가고 있기 때문에 현대시가 스크린이나 무대로 진출하는 것은 필연적이다. (2) 현대 사회는 개별 예술 장르들을 단독으로 두지 않고 하나의 종합을 이루도록 추동하며 새로운 차원의 예술을 형성할 것을 요구한다. (3) 성격이나 형식이 전혀 다른 예술들의 종합을 이루어낼 수 있는가의 여부는 전적으로 현대시의 과제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시만이 “근원적인 창조의 계기를 개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4) 연극이나 영화는 모든 예술을 종합할 수 있는 본성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가 지니는 근원적 창조의 계기를 결여하고 있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의 종합을 이루어내는데 실패했다. (5) 시가 “스크린에 진출한 것”은 영화가 결여하고 있는 진정한 종합이라는 과업을 달성하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 인식에 비추어 보면 최일수가 내리는 시네포엠의 정의는 시는 모든 예술의 근본이 되므로 시를 통해서 개별 예술 장르들을 종합해내는 영화라고 풀어서 쓸 수 있다. 영화 대신에 무대라는 말을 쓰면 시극의 정의가 된다. 정의에 따르면 위에서 인용한 신문기사에서 볼 수 있는 단체의 목적, 조직 구성 등이 모두 이해가 된다. 그러나 문제는 이토록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정의를 어떻게 실현 가능한 방법론으로 만들 수 있는가이다. 최일수는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해 자신이 제시한 시네포엠의 정의가 이미 존재하고 있던 장르인 시네포엠과 어떻게 다른지 설명했다. 그는 기존의 시네포엠을 “1차 대전 이후에 프랑스의 시인을 비롯한 미술가, 음악가, 영화인들이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초현실주의 운동의 하나로써 시도된 전연 새로운 예술의 한 장르”라고 정의했다. 그는 이 장르가 “현대시의 변천과 더불어 하나의 뚜렷한 양식을 갖춘 예술”로 세계화되었다고 파악했고 장 콕토, 만 레이, 폴 엘뤼아르, 기타가와 후유이코 등을 대표적인 작가로 꼽았다. 그러나 최일수는 이들의 시네포엠이 영화-시라는 단어 자체에만 치우쳐서 “영화적 수법의 시”라든가 “시적인 수법의 영화”라고 부르거나 심지어는 시적인 영화라고 호칭하며 그 정의가 모호하다고 비판하였다. 그는 시네포엠이 시적 형식 혹은 영화적 형식의 차용이 아니라 “언어의 의미가 주는 영상의 표출이 시각적인 상상(원문에는 이메지네이슈운)을 낳게 되고 그리하여 그것이 곧 종합적인 광장인 스크린에 진출됨으로써 시네포엠이라는 새로운 세계를 형성하기에 이른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단어가 주는 인상을 영화로 시각화하면 그것이 시네포엠이라는 것처럼 보인다. 최일수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영화적 수법의 시, 시적인 수법의 영화, 시적인 영화 각각을 예로 들어 시네포엠과 다름을 보였다. 우선 영화적 수법의 시의 예로 장 콕토의 1920년 시집 『시 Poesie』에 실린 「첫 눈물 Premières Larmes」을 들었다. 최일수는 이 작품이 눈물을 흘리는 순간을 마치 눈앞에 그리듯이 언어화했다는 의미에서 시각적인 영상의 성격을 갖고 있고 이러한 특성이 시네포엠으로 이끌어가는 계기는 된다고 인정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시각적 특성이 두드러진 시일 뿐이지 시네포엠은 아니라고 보았다. 시적인 수법의 예로는 자크 봉장(Jacques Bonjean)의 1925년 작품 『길 위의 아름다운 결혼식 Les Belles Noces dans la Rue』을 들었다. 이 작품의 장르는 직역하면 벽장 시나리오가 되는 Closet Screenplay에 속하는데, 일본에서는 이 장르를 지칭하는 신조어로 레제시나리오(レ―ゼシナリオ)가 사용되었다. 영화로 만들어질 목적이 아니라 한 사람이 읽거나 혹은 소수의 그룹 앞에서 낭독될 것을 전제로 만들어진 시나리오를 지칭한다. 최일수는 봉장의 작품이 시적 수법을 차용해서 만들어진 시나리오이지 시네포엠은 아니라고 보았다. 다시 말하면 영화적 수법의 시와 시적인 수법의 영화 각각은 시와 시나리오일 뿐이지 영화화를 전제로 하는 시네포엠은 아니라는 것이다. 시적인 영화의 예로는 오슨 웰즈의 <오델로>(1952), 잭 카디프의 <아들과 연인>(1960), 마르셀 카뮈의 <흑인 오르페>(1959) 중에서 특정 장면을 뽑아 이 장면들이 “영화 이상의 그 무슨 심오한 시각적 이미지를 표상”해준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최일수는 이 영화들에서 특정 장면들을 시적인 이미지라고 평가할 수는 있지만, 시네포엠은 그것이 하나의 독자적인 작품으로서 존재해야 하며 시적인 장면들의 연쇄로 시네포엠이 될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비교가 시네포엠이 영화시로 번역되었을 때 올 수 있는 개념적 혼란을 다루기 위해서, 시네포엠은 시나 시적 언어로 작성된 시나리오와 같은 문학 장르가 아니며 또한 특정 장면이 시적 인상을 준다고 해서 시네포엠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라면 논거를 갖출 수는 있다. 그러나 최일수의 목적은 자신이 정의 내리는 시네포엠이 고유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므로 애초에 비교 자체가 잘 못 되었다. 비교를 하려면 제르맹 뒬락, 만 레이, 한스 리히터, 장 콕토 등의 영화 작품들을 예로 들었어야 했다. 이 작가들이 1960년대 전까지 영화와 시에 관계에 대한 독자적인 이론을 전개하고 작품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비교의 오류는 최일수가 시네포엠을 정의할 때 이에 상응하는 해외 작품들을 직접 본 것이 아니라, 식민지기에 일본을 통해 수입되고 번역된 초현실주의 문헌들이나 김기림의 시론과 관련된 글들만을 참조했기 때문일 수 있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이렇게 본다면 최일수가 극복하고자 했던 것은 해외의 시네포엠이 아니라, 국내에서 시네포엠이 이해되었던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이에 관해서는 당대의 문헌들에 대한 추가적인 고찰이 필요하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따르면, “시네포엠”의 설립과 시네포엠의 정의가 1960년대 당시 외부로부터의 영향이 아니라 식민지기 이후 국내에서 축적된 특정한 맥락에 따른 것임은 분명해진다. “시네포엠”의 설립은 당대 미국에서 형성되었던 독립적인 영화작가들의 조합과 같은 모델을 따른 것이 아니라, 국내에서 1920년대 활발하게 전개되었던 동인지 중심의 활동이 문학, 연극, 영화 등에서 소환된 결과라고 봐야 한다. 그리고 시극동인회와 “시네포엠”에서 1920년대의 극복은 연극과 영화를 시를 중심으로 한 종합예술로 정의하여 이종 예술 간의 결합을 추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각 단체를 대표하는 장호와 유현목이 동국대학교 국문과에서 김기림의 지도를 받았으며 이후 같은 대학에서 교편을 잡았던 것을 생각하면, 이들의 과제는 김기림의 비판적 극복이라고 함축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최일수가 시도했던 비교에서 생각해보면, 김기림은 시와 영화를 기법의 측면에서만 접근했을 뿐 서로 다른 예술 장르로 남겨두었다면 자신들은 시를 통해 모든 예술을 종합하는 연극과 영화를 만들겠다고 선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시네포엠은 시가 중심이 되어 영화를 진정한 종합예술로 승격시키는 영화이다. 이를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최소한 두 가지 요건이 만족되어야 한다. 시가 중심이 된다는 것은 단어가 불러일으키는 시적 연상이 시각화되어야 한다는 것이고, 종합예술은 두 개 이상의 예술 장르가 각각 독자적이면서도 결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손>에서 이 두 요건이 충족되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손>은 짧은 내레이션과 함께 이미지가 전개되는데, 내레이션은 “There were hands in the beginning of the world”로 시작한다. 이 문구가 나올 때의 이미지를 순서대로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There were 부분에 나오는 이미지 hands in the beginning에 나오는 이미지 of the world에 나오는 이미지 아기, 원숭이, 어린이의 손이 순차적으로 나오면서 해당 내레이션이 전개되는데, 작품의 나머지에서도 내레이션의 특정 단어들에 바로 연결될 수 있는 이미지들이 나온다. 이에 대한 평가를 어떻게 내리든 간에 시네포엠의 첫 번째 조건인 단어가 불러일으키는 시적 연상의 시각화는 충족한다. 그러나 두 개 이상의 예술 장르가 결합되는 것은 찾아보기 어렵다. 이 요건을 충족하는 요소를 굳이 찾아보면, 내레이션의 낭독이 산문이라기보다는 시의 낭독처럼 들린다는 정도가 될 것 같다. <손>의 내레이션은 최일수가 썼는데, 여기에 포함하지는 않았지만 최일수의 시극 이론을 생각해보면 최일수가 일종의 산문시로 내레이션을 썼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최대한 긍정적으로 보아서 <손>은 시, 이미지, 낭독을 결합해서 독립적인 장르의 작품을 만드는 시도라고 평가할 수 있다. <손>에서 시네포엠의 두 번째 요건이 불충분했던 것이 50초라는 길이의 한계 때문인지, 아니면 화려한 인적 구성으로 시작했던 초기에 비해 “시네포엠”의 구심력이 약해진 시점에서 제작되었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다. “시네포엠”의 첫 번째 작품인 <선>을 볼 수 있어야 종합예술로의 영화가 어떻게 구현되었는지 알 수 있는데, 프린트의 행방을 알 수 없으므로 지금으로서는 판단할 수 없다. 다만 시극동인회의 작품들은 기록이 보다 상세히 남아 있으므로, 종합예술의 실천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졌는지를 미루어 짐작해볼 수는 있으나 이 글의 범위를 벗어나므로 추후에 설명하고자 한다. <손>을 실험영화로 분류한다면 이때 실험영화는 종합예술로서의 영화를 의미한다. 한때 유행했던 다원예술이나 최근에 등장한 융복합 예술이라는 말과 개념적으로 별로 다를 바 없어 보인다. 최일수가 시극과 시네포엠의 정의를 종합예술 중심으로 생각하는 것은 당시에 영향력이 컸던 T.S. 엘리엇이나 장 콕토의 극복을 의식하고 있음은 분명하나 하필 왜 종합예술이라는 생각을 떠올렸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 지금으로써는 어떤 근거나 맥락 없이 예나 지금이나 예술 장르 간의 종합이라는 아이디어가 때때로 유행을 타는 결과라는 생각밖에는 떠오르지가 않는다. 유현목은 1970년에 변인식 , 하길종 등과 함께 전위적 영화운동을 벌이기 위해 소형영화동호회를 결성하는데, 이 시기에 언급했던 작품들이 동시대의 미국 독립영화 작품들이다. 유현목이 1966년부터 1970년 사이에 어떤 경로를 통해서 미국의 실험영화들을 일부 접하게 되었다는 것인데, 이때 시네포엠에 준하는 개념은 아예 사라지고 취미로서의 영화 혹은 아마추어의 영화가 전면에 나타났다. “시네포엠”에서는 미학적 개념이 중요했다면, 소형영화동호회에서는 8mm와 16mm 포맷을 이용한 소규모의 독립적인 제작방식이 더 중요해졌다. 전위적인 영화를 만들겠다는 의지는 “시네포엠”에서나 소형영화동호회에서나 마찬가지만, 둘 사이의 어떤 연속성이 있다고 가정하기는 힘들다. “시네포엠”이 1920년대의 자장에 속해있다면, 소형영화동호회는 동시대의 수용이라는 측면에서 시기의 공백이 너무나도 크며, 활동에 대한 자기반성의 흔적 역시 찾아보기 어렵다. 따라서 한국에서 실험영화를 말 할 때, “시네포엠”을 최초의 위치에 올릴 수 있겠지만 어떤 유산을 남겼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헐적이고 갑작스런 전환들의 공백 사이를 최대한 메꾸어 보려는 노력이 한국에서 영화뿐만 아니라 예술 전반에서 전위와 실험이 어떻게 자리바꿈하는지를 이해하는데 반드시 필요하다. ※ 이 글은 현재 작성 중인 논문의 일부를 추려서 실은 것으로, 시극동인회나 김기림에 대해 빠진 설명들을 포함하여 추후에 논문으로 낼 예정이다. 영화-시에 관한 전반적인 정리는 Fil Ieropoulos가 쓴 < Film Poetry: A Historical Analysis >에 잘 되어 있고, 참고문헌도 자세히 살펴볼 가치가 있다. 최일수가 일본을 통해 수입되어 읽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레제시나리오나 이론들은 Christophe Wall-Romana가 쓴 Cinepoetry: Imaginary Cinemas in Frech Poetry(Modern Language Initiative, 2013)을 통해 엿볼 수 있다. 시극에 대한 연구는 국문학이나 연극학 분야에서 축적되어 왔는데, 이현원, 「최일수와 장호의 시극 인식에 대한 연구」, 어문론집, 64, 2015를 참조하면 추가적인 자료들을 쉽게 따라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