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난][영상]방은진 감독의 제천국제음악영화제 출품 〈트레일러〉
- 제작년도
- 2011
봉준호 감독의 영화 < 마더 >(2009)에서 엄마 혜자에게는 남들보다 조금 부족해서 앞가림 못하는 아들 도준이 있다. 아들을 지켜보느라 손가락이 잘려도 아픈 줄 모를 만큼, 도준은 소중한 존재다. 그런 아들이 살인죄로 잡혀가자, 누명을 썼다고 철썩같이 믿고 결백을 밝히려고 혼자 이리저리 뛰어다닌다. 결백을 밝힐만한 걸 잘 기억해보라는 혜자에게 아들은 묻는다. “엄마, 그때 왜 나 죽이려고 했어?” 혜자는 잠깐 “얼마나 힘들었으면 같이 죽으려고 했겠어”라고 말하지만 금세 아들 걱정으로 생각이 넘어가고, 그 일이 응어리가 되었을 거라고 면회실 유리벽 너머에 있는 아들에게 응어리가 풀리는 혈자리에 침을 놓아 주고 싶어한다. 혜자가 그러거나 말거나 아들은 신경도 쓰지 않지만. 남들은 미친 사람 취급하고 욕해도 내 자식은 무죄라고 외치는 엄마, 문제가 된 아들을 어쩌지 못해 자신의 응어리에 침을 놓고 잊어내려고 춤추는 엄마. 종일 아들만 쳐다보는 혜자의 얼굴에서, 김혜자 배우가 연기한 엄마의 다른 자식이 했던 대사가 떠오른다. “하루 종일 뭐, 엄마 얼굴만 쳐다보고 있으란 말야?” 윤인호 감독의 영화 < 마요네즈 >(1999)에서 딸 아정이 엄마에게 했던 말이다. 엄마는 딸에게 전화해 불안하고 힘들다고 불평하고 관심 받고 싶어한다. 늦게 들어와서 내가 힘드니 딸에게 일 그만두라 말하며 응석 부리던 철없는 엄마의 모습을 기억하는 관객에게, 남의 아들에게까지 이입해서 “너 엄마 없니?”라고 말하며 안타까워하는 엄마의 모습을 보는 것은 복잡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한국영화 속에서 딸의 엄마는, 아들의 엄마와 다른 존재 같다. 꼽을 수도 없을 만큼 수많은 영화에 아들의 엄마가 나오는데 엄마가 아들에게 공감을 호소하는 영화는 찾아보기 힘들다. 오히려 < 열한번째 엄마 >( 김진성 , 2007)처럼 자신의 아이가 아닌 아이를 자식으로 보듬는 여자가 있을 뿐이다. < 우리형 >( 안권태 , 2004)과 같은 영화에서처럼 아들이 엄마를 이해하는 순간은 있어도, 깊은 이해와 고통을 나누는 사이가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딸의 엄마는 다르다. <마요네즈>처럼 엄마는 딸에게 자신을 이해하길 강요하는 영화가 있는가 하면, 엄마와 딸의 이야기를 그렸던 영화 < 애자 >( 정기훈 , 2009)처럼 보살핌을 받는 것은 아들이여도 엄마와 마지막까지 함께 하는 사람은 딸이라고 말하는 영화도 있다. 일단 엄마와 딸이 등장하면, 둘 사이를 특별한 관계로 묶는 것은 너무 당연한 듯이 보인다. 스릴러 영화 < 오로라공주 >( 방은진 , 2005)에서 순정이 죽은 딸을 떠올리는 회상 속에서, 순정은 어린 딸에게 노래를 부르게 한다. “아빠 이제는 알아요. 인생은 외로운 거라고.” 어린 딸은 오로라공주를 좋아하고 그 노래를 부르고 싶지만, 엄마가 시키는 노래를 부른다. 가사는 아빠를 이해한다는 내용이지만, 엄마가 딸에게 원하는 것은 자신을 이해해주는 것이다. 순정의 표현대로 부르고 싶지 않은 노래를 부르는 이 행동은 벌이다. < 비밀은 없다 >( 이경미 , 2015)에서도 노래로 엄마와 딸의 감정을 엮는다. 딸 민진과 친구가 부르는 노래는 아빠가 바람 핀 상대에 대한 분노고, 엄마를 지키기 위해 복수할 계획을 담고 있는 가사다. 오로라공주의 딸이 중학생이라서 자발적인 공감을 형성하기 어려웠다면, <비밀의 없다>에서의 딸은 중학생인 만큼 스스로 엄마에게 공감한다. < 미성년 >( 김윤석 , 2018)에서도 이런 경향이 나타난다. 중학교 2학년인 주리와 윤아는 미성년자이지만 정신은 영화 안의 어른에 비교해 매우 성숙해있다. 그리고 그 성숙한 정신은 엄마에 대한 이해나, 엄마의 부족한 역할을 대신해주는 것으로 표현된다. 주리는 바람 핀 아빠 때문에 엄마가 상처받을까봐 고민하고, 윤아는 바람 핀 상대의 아이를 꼭 낳겠다는 엄마를 세상의 비난 속에서 지키기 위해 고민한다. 주리의 엄마 영주는 아이들에게 너희가 걱정할 문제가 아니라고 말하지만 윤아는 처음부터 엄마가 겪을 고통을 이해하고 걱정하고 있었고, 윤아의 엄마 미희는 엄마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으면서 자신을 엄마가 아니라 여자로 이해해 달라고 노골적으로 요구한다. 엄마와 딸이 이런 식으로 묘사되는 것에 관해서, 엄마와 딸의 신체적 유사성이나 같은 여성으로 사는 것에 동질감을 느낀다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영화를 보고 있으면 그 이상의 혐의를 찾을 수 부분이 있다. 예를 들면, 미성년에서 미희가 윤아에게 “엄마는 아들이 생겨서 든든해”라고 말하는 부분 같은 지점이다. 윤아가 아르바이트를 하고 엄마의 보호자 역할까지 하는 와중에, 엄마는 왜 아직 뱃속에 있는 아들에 대해 든든함을 느끼는 것일까. <마더>에서 혜자는 도준의 혐의를 밝히기 위해 변호사를 만나고, 형사를 만나지만 스스로의 힘으로 알아 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남자구실을 할 수 있느냐고 조롱당하는 도준이지만, 반쯤은 남성무리 안에 들어가 있는데 혜자는 이들에게 “도준이와 형제같은” 사람들이라며 도움을 호소한다. 그리고 딱 그 절반만큼 형사는 혜자에게 친절하고, 진태는 돈을 받았지만 혜자를 위해 일을 해 준다. 그 덕분에 혜자는 남자 무리들만이 공유하고 있는 비밀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권력이든 무력이든, 힘을 쥐고 있는 사람들은 남자무리이고, 혜자가 이 안에 진입할 수 있는 방법은 아들의 존재다. <비밀은 없다>에서 연홍은 남편을 비롯해, 형사와 같은 권력을 가진 남성집단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일 수단이 없다. 결국 그가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도움을 받는 존재는 권력과 무력을 가지지 못한 딸의 친구이다. 힘이 있는 집단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딸보다 아들의 존재가 필요해 보이는데, 이런 증거는 < 박쥐 >( 박찬욱 , 2009)에서도 찾을 수 있다. 매주 수요일, 라여사의 집에서는 마작판이 열린다. 공간은 라여사의 것이지만, 마작판의 구성원은 아들 강우의 지인들이다. 그들은 각자 의사, 형사와 같이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상 밖에서는 의사의 아내인 이블린과 강우의 아내 태주 쭈그리고 앉아 김밥을 마는 노동을 하고 있다. 이들 사이에는 명백히 눈에 보이는 계급이 존재한다. 박찬욱 감독의 전작 < 공동경비구역 JSA >(2000)에서 남북한 군인들이 한 테이블에 앉아 게임을 하고 음식을 먹는 행위를 통해 계급과 소속에 상관없이 수평적인 관계에서 교류하는 장면을 보여준 바 있다. 이런 예시까지 들지 않아도, 남자는 밥상에서 밥을 먹고 여자들은 부엌 바닥에서 음식을 장만하던 풍경을 떠올리는 것은 어렵지 않다. 강우가 죽으면서 이 권력관계는 모호해지고, 부인들은 모두 테이블 위로 올라온다. 혜자처럼 죽은 아들을 통해 입성한 권력 있는 남성들에게 도움을 처하면서도, 아들자식이 없는 여자들이 자신의 권력을 전복하고 테이블 위로 올라오는 것을 제지할 능력은 없다. 이런 의심 속에서, 영화 < 박화영 >( 이환 , 2017)에서 화영은 이런 영화들이 말하는 엄마와 딸의 관계를 거스르고 싶어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화영은 마치 아들의 엄마를 요구하고 있는 것 같다. 화영은 엄마를 자처하며 엄마는 맹목적으로 자신의 편이 되어주고, 자식이 때리면 때리기 좋은 곳을 내미는 희생정신이 있는 사람이다. 화영이 의도했든 아니든 그룹 안에서 화영은 여자로 여겨지지 않는데, 화영 또한 당연히 엄마를 이해하는 다른 많은 딸들처럼 엄마를 이해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을 버리고 새로운 가정을 꾸린 엄마를 찾아가 욕설하고, 인터폰 너머에 있는 엄마에게 침을 뱉는다. 영화 후반부, 자신이 지켜준 가짜 딸이 자신을 희생물로 삼고 도망간 뒤에 또 새로운 딸을 데리고 와, 그들이 제대로 듣지도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자신의 얘기를 끊임없이 떠든다. 그 속에서 “너네는 나 없으면 어떻게 살래?”라는 대사는 오히려 반대로 나는 들어줄 딸이 없으면 안 된다는 말처럼 들린다. 맹목적으로 희생하는 엄마가 필요하지만, 한편으로 엄마는 자신을 맹목적으로 토로할 딸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이런 점에서 박화영은 아름답지 않지만, 딸과 엄마의 관계에 대해 솔직하게 말한다. 그런 특별한 관계가 아닐 수도 있다고. 아들이 권력자에게 가까이 붙어있을 수 있는 도구로 존재할 수 있다는 짐작이, 엄마의 희생적인 애정이 정말 순수한 애정에서 비롯된 것인가를 의심스럽게 느끼게 한다. 엄마와 딸은 정말 특별한 유대 관계를 가지고 있고, 그 관계를 아름답고 특별한 것이라고 말하는 영화들의 흐름이 과연 합당한 것인가를 되묻게 한다. 그리고 이 영화들을 보기 위해 극장을 찾는 한국의 딸들에게 물어보고 싶어진다. 정말 이 영화들에서처럼 엄마를 이해하고 싶은지, 정말 딸이라서 엄마를 이해할 수 있는지, 무엇보다 엄마의 사랑이 아들과 딸에게 동등하다고 느끼는지. 혹은 박화영처럼 딸은 가질 수 없는 아들의 엄마를 갈망하고 있는지를.
이번 <영화천국>이 주목하는 영화는 방은진 감독의 세 번째 연출작 < 집으로 가는 길 >이다. 이 영화는 2013년 12월 11일 개봉해 전국 누적관객 185만 4625명(영진위 통합전산망 집계)을 동원했다. 2004년 10월 30일 프랑스 오를리 국제공항에서 마약을 운반한 혐의로 검거된 30대 한국인 주부에 대한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된 이 영화는 개봉 당시 큰 화제를 불러 모았으며, 감독으로서 방은진의 역량이 충분히 발휘된 작품으로 평가된다. 방은진 감독과 오동진 평론가가 함께한, 유쾌하고 솔직한 영화 속 이야기로 들어가보자. 오동진(이하 ‘오’) < 집으로 가는 길 >이 개봉하고 10개월이 지났다. 여전히 이 작품에 대한 잔상이 남아 있나? 방은진 (이하 ‘방’) 이 영화가 세 번째 연출작인데, 작품마다 잔상이나 여운을 느끼는 기간도 달랐다. 하지만 공통적으로 크랭크인에 들어가 극장에서 개봉하기 전까지가 가장 강력하게 조증과 울증이 반복되는 시기인 것 같다. 모든 감독이 그렇게 느낄 것이라 생각된다. 그리고 영화가 극장에서 사라지면 무언가 자식을 떠나보내는 느낌까지 든다.(웃음) 오 현재 일본에서 상영 중이다. 국내 개봉의 연장이라고 생각되는가? 아니면 새로운 영화를 개봉하는 기분인가? 방 일본에서는 <마르트니크부터로의 기도>라는 제목으로 8월 28일에 개봉했다. 일본의 주요 10개 도시에서 먼저 상영하고 이후 지역 상영으로 옮겨지는데, 현재 한창 상영 중이고 작품에 대한 평가나 관객 반응은 개봉 후 3개월이 지나야 알 수 있다고 하더라. 여러 가지로 한국과 다른 점이 많아 새로운 영화를 개봉하는 기분이 더 큰 것 같다. 앞서 < 용의자X >(2012)도 일본에서 개봉했는데, 신기하게도 < 용의자 X의 헌신 容疑者Xの獻身 >(니시타니 히로시, 2009)보다 더 재밌게 봤다는 일본 관객의 반응을 많이 접했다. (‘오’ <용의자 X의 헌신>보다 방 감독의 <용의자X>가 영화의 색감이나 느낌이 더 강렬했던 것 같다.) 사실 원작은 <용의자X>의 시나리오를 완성하고 봤다. 콘티를 구성할 때가 되니 원작과 유사하거나 중복되는 장면이 있을 수 있겠다 싶어서였다. 처음 원작을 봤을 때에는 ‘별로네’라고 생각했지만 막상 내가 영화를 찍고보니 ‘역시 원작이 잘 만들어졌네’ 하는 마음이 들더라.(웃음) 오 < 집으로 가는 길 >은 분명 감독 방은진 에게 새로운 실험, 혹은 도전이었다. 감독으로서 여러 작품을 연이어 연출할 경우 가장 쉬운 길이 자기복제나 동어반복이다. 장르적으로도 그렇다. 사실 첫 작품 < 오로라공주 >(2005)와 두 번째 작품 < 용의자X >로 봤을 때 유사한 장르로 비교적 수월하게 세 번째 작품을 연출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집으로 가는 길>은 이전의 작품과 비교해 전혀 다른 장르이기도 하고, 구성이나 표현 면에서도 전혀 다른 질감으로 연출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무엇보다 언어와 제작 시스템이 전혀 다른 해외에서 이전과 다른 스타일의 연출을 했다는 도전 정신을 높이 사고 싶다. 방 사실 세 번째 연출작을 해외 로케가 필수인 < 집으로 가는 길 >로 선택한 것은 다른 이유도 있었다. 이 영화의 제작 전, 기획안과 초고가 완성된 아이템이 하나 있었다. 이 영화를 유럽에서 찍어야 하는데, <집으로 가는 길>을 통해 해외 촬영에 대한 경험과 노하우를 쌓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결과적으로 <집으로 가는길>을 통해 해외의 영화제작 시스템과 프로덕션, 스태프들과의 협업에 대해 알게 됐다. 대한민국의 소외된 가족에 대한 묵직한 시선 오 영화 이야기로 들어가보자. < 집으로 가는 길 >은 의도적인 시선의 분산이 눈에 띈다. 기본적으로 해외에 구금된 송정연( 전도연 분)의 시선을 따라가지만 또 한편으로 한국에 남겨진 남편 김종배( 고수 분)의 비루한 삶도 따라간다. 통상적으로 영화는 이야기를 강조하고 관객의 몰입도를 높이기 위해 시선을 집중시키는데, 이 영화는 그런 부분에서 균형을 잘 잡고 간다는 느낌을 받았다. 방 사실 그것도 일종의 모험이었다. 이 영화는 기본적으로 여자주인공 송정연의 이야기다. 그래서 한국에 남겨진 남편 김종배의 감정선은 많이 걷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반면 한국인 주부가 머나먼 타국에서 검거됐을 경우 그의 남겨진 가족에 대한 관객의 궁금증도 클 것이다. 연출하면서 둘 사이의 시선에 균형을 맞추는 것이 중요했다. 돌이켜보면 그런 면에서 아쉬운 부분도 남아있다. 하지만 영화 개봉 후 내가 멘토로 생각하는 이창동 감독에게서 영화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받아서 위안이 됐다.(웃음) 오 도미니크 교도소에 수감된 송정연의 모습을 보다 ‘심하게’, 다시 말해 상업영화로서 관객의 흥미를 유발할 수 있는 여러 장치를 구사할 수 있었음에도 무척 무덤덤하게 표현했더라. 결과적으로 적정한 감정선을 유지한 것이 현실감을 높여주었다는 측면에서 긍정적이었다고 본다. 하지만 이 장면뿐 아니라 상업영화 감독으로서 영화를 연출하는 데 감정의 극대화 등 관객의 시선을 끌 수 있는 장치도 필요했을 것이다. 방 동의한다. 사실 영화에 재미있는 장면이 많았다. 하지만 많이 잘라냈다. 중요한 것은 이 작품은 편집이나 연출 스킬을 통해 다른 길로 갈 수 있는 영화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통상적으로 영화의 러닝타임이 2시간 10분 이내면 개봉 영화관의 상영 횟수에는 영향이 없다고 하더라. 그 시간 내에서 편집을 최소화했다. 이 영화를 통해 영화의 호흡을 생각하게 된 것 같다. 시나리오의 완성도가 아무리 높아도 막상 현장에 오면 예정에 없던 부분에서 욕심이 생기고 제작에 변경이 생긴다. 하지만 그것이 영화의호흡에서 반드시 필요한 경우가 있다. 이러한 편집 문제로 제작사와 설왕설래했다. 상업영화 시스템에서 감독으로 살아가기 오 이해한다. 난 방송사(YTN) 기자 생활을 했었는데, 뉴스리포트도 정확히 1분 30초로 편집해야 한다. 뉴스도 그런데 감독이라고 왜 편집에 대한 강박이나 주변의 압박이 없겠나. 방 오히려 러닝타임을 단축해야 한다는 압박은 없었다. 그것보다는 현장 편집본에 대한 중간 확인을 요구하는 게 힘들었다. 앞서 얘기했듯, < 집으로 가는 길 >은 해외 촬영이 많았는데 그 바쁜스케줄 속에서 이틀 간격으로 편집본을 한국에 보내달라고 하더라. 현장에서 촬영하기도 바쁜데 그들의 요구에 맞게 확인용 편집본을 보낼 수는 없었다. 그래서 “편집할 시간이 없으니 10회 차마다 보내겠다. 편집을 못해서가 아니다. 순서 붙여놓은 것만 확인하고 영화의 호흡에 대해 이런저런 의견을 받는 게 싫다.”고 했다. 결국 나의 의견이 관철됐지만, 영화제작 환경에서 감독의 성역이라는 게 없어졌다는 느낌이 든다. 과거에는 촬영본은 감독과 촬영감독만이 확인할 수 있는 절대적인 영역이었다. 하지만 요즘은 누구나 현장에서 그날 촬영된 영상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다 보니 의견을 내는 사람도 많고, 심지어 늘 현장에서 감시하고 보고서 올리는 사람도 있다.(웃음) 그러면서 감독이 중간에 교체되는 경우도 있다고 하더라. 너무 심하다. 비단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다. 할리우드에 진출한 감독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거기는 더 심하다. 사소한 것 하나라도 예정과 다르게 진행되면 최소 일주일 전에 회의를 해야 한다더라. 물론 감독의 편집권도 없다고 한다. 그런 상황에 비하면 한국의 제작 시스템은 고마운 점도 있다. 우리나라 영화는 산업화의 모양새를 띠고 있지만 여전히 한국 고유의 제작 방식도 남아 있어 충돌하는 과도기적 시점인 것 같다. 오 결과적으로 < 집으로 가는 길 >은 BEP(Break-even Point, 손익분기점)를 넘겼나? 방 앞서 두 편의 영화는 넘겼는데, < 집으로 가는 길 >은 BEP를 넘기지 못했다. 오 이를 영화계에서는 흔히 ‘내상을 입는다’고 표현한다. 물론 창작자인 감독이 겪는 여러 가지 감정을 미루어 짐작하기 어렵지만 개인적으로 < 집으로 가는 길 >이 손익분기점을 넘지 못했다고 해서 큰 내상을 입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시 말해 이 영화는 흥행 여부를 떠나 방은진 감독 자신에게 큰 의미가 있는 작품으로 남지 않을까 생각한다. 방 처음부터 상업영화로 데뷔했기 때문에 흥행이 되지 않을 경우 자존심이 상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남의 돈으로 영화를 찍는데 그들에게 손해를 끼치는 것에 대한 자괴감이랄까? 더욱 중요한 것은 ‘내가 잘못 만든 것이 아닐까?’라는 자책이 가장 크다고 할 수 있다. < 집으로 가는 길 > 이후 많은 생각을 했다. 이영화는 ‘가족’이라는 보편타당한 이야기이지만 동시에 답답한 현실 속에서 희망의 메시지를 던지는 이야기다. 그것이 관객을 설득하지 못했다면 당연히 감독의 책임도 있다. 더불어 마케팅적 측면에서도 아쉬운 부분이 있다. 비슷한 시기에 < 변호인 >( 양우석 , 2013)과 < 용의자 >( 원신연 , 2013)가 개봉했다. <집으로 가는 길>이 억울함을 가지고 있는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에 초점을 맞춰 홍보했다면, 이 두 영화는 그런 평범한 사람들의 억울함을 풀어줄 수 있는 영웅에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에 더 많은 관심을 받지 않았나 생각한다. 감독과 배우, 그 경계에서 오 세 편의 영화를 연출했는데, 매 작품 진화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방’ 동어반복을 안 하고 있다는 이야기인가? 고맙다.(웃음)) 투자와 제작, 배급, 상영이 수직 계열화해 있는 상업영화계가 동어반복을 부추긴다는 의미다. 방은진 감독 본인은 조급하게 느낄지 모르나 보폭, 다시 말해 작품 자체뿐 아니라 작품과 작품 사이의 간격도 무척 좋다고 생각한다. 사람들로 하여금 차기작을 기대하게 만들고 있다. 방 누군가 나에게 “드라마를 이끌어내는 힘은 있지만 신파적인 감성과 같은 감정의 호흡은 보완이 필요하다.”는 조언을 했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확실히 < 집으로 가는 길 > 이후 연출에 관록이 생긴 것 같다. 중요한 것은 영화를 만들면 만들수록 어렵다고 느껴진다는 것이다.(웃음) 그리고 여전히 대중에게는 배우 방은진 이 각인돼 있다. 지금도 “연기는 안 하느냐?”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사실 감독으로 데뷔한 후 배우 활동은 < 미쓰 홍당무 >( 이경미 , 2008)가 유일하다. 연기도 연출과 마찬가지로 할수록 어렵다고느껴진다. 연출을 하면서 배우들이 위대해 보이더라.(웃음) 감독은 배우를 발굴해 끊임없이 새로운 모습을 대중에게 보여줘야 한다. <집으로 가는 길>에서의 전도연 도 이 배우가 그동안 가지고 있지 않던 새로운 모습을 끌어내어 대중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결과적으로 그렇지 못했지만 내가 기대했던 것보다 송정원이라는 인물을 덤덤하게 연기해줘서 무척 고맙다. 오 작품의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오로라 공주)-남자 주인공(용의자X)-여자 주인공( 집으로 가는 길 )이다. 주인공에 자아를 많이 투영하는 편인가? 방 일반적으로 오해하는 것이 여자 감독이기 때문에 여자의 심리를 잘 알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배우를 할 때에도 그랬고, 연출 현장에서도 그렇고 사실 남자 같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 편이다. 오히려 남자 배우들에게 나의 자아가 투영된다고 할까?(일동 웃음)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 용의자X >를 통해 류승범 의 새로운 모습을 보았다는 평을 많이 들었다. 그 이유는 류승범 스스로가 프레임 안으로 들어와 감독의 디렉션에 정확히 맞추어 재단된 연기를 한 첫 영화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혀 다른 류승범의 모습이 나온 것이다. 배우 경력을 가진 감독으로서 욕심일 수도 있지만 늘 내 영화를 통해 배우가 빛나게 하고 싶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류승범이 이 영화로 남우주연상을 못 탔다는 것이다. (일동 웃음) 내가 배우를 할 때 현장에서 느꼈던 소망이나 바람, 이런 것을 현재 배우한테 투영한다고 할까. 감독 방은진 , 끊임없이 진화한다 오 본인이 감독을 하고 본인이 주연을 맡을 생각은 안 해봤나? 방 감독으로 데뷔했을 당시에는 그런 생각을 했다. 죽기 전에 그런 작품 한 편은 만들어보는 것이 꿈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이 없다. 난 배우로서 스타가 되지 못했다. 그리고 아직 입지를 확실히 다진 감독도 아니다. 애매한 위치다. 그렇지만 배우출신이기 때문에 그것을 교두보 삼아 연출을 하고 있는 조금 다른 종류의 감독인 것은 확실하다. 연기보다는 연출이 우선이다. 오 언젠가 내가 “< 오로라 공주 >에서 배우 겸 감독 방은진 을, < 용의자X >에서 감독 겸 배우 방은진을, < 집으로 가는 길 >에서 감독 방은진을 보았다.”고 표현한 적이 있다. 우리는 방은진이라는 배우를 잃었지만 방은진이라는 감독을 얻었다. 방 무척 감사한 말이다. 곧 출판될 책에도 그 내용을 썼다.(웃음) 더불어 나에게 “ 방은진 의 걸작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라는 말도 했었다. 그것이 나에게 굉장히 큰 위로와 희망이 됐다. 한국영화사에 길이 남을 걸작까지는 모르겠지만 우리가 어떤 영화를 떠올릴 때 그 영화의 감독을 기억하는, 그리고 그 영화가 출연 배우의 대표작이 될 수 있는 영화를 만들겠다는 의지는 여전히 가지고 있다. 돌이켜보면 인생에 대해서 깊게 성찰하게 된 순간이 배우였을 때가 아니라 연출자가 되면서부터였다. 연출을 하면서 삶의 너비가 훨씬 더 증폭됐고, 더불어 사는 것에 대한 의미를 깨닫게 됐다. 인간적으로 한층 나를 성숙시켜줬다.
90년대 중반에 만들어진 < 301 302 >는 정신/육체의 이원론 아래서 여성의 영역은 정신/영혼이 아니라 육체/살이라는 전통적인 생각, 능동성과 욕망은 남성의 영역이고 수동성과 수용성은 여성의 것이라는 개념을 거부하면서 ‘식사 장애’라는 저항의 영역을 탐색하고 집/가정이라는 공간을 낯설게 한다. 이른바 ‘식사장애’는 이렇게 여성들에게 기대되는 동시적이고 모순적인 문화 현실 속에서 나타난 문화적?심리적?정치적 표현이다. 이것은 문화가 여성의 몸에 가져온 하나의 징후이다. 서구의 19세기 사회가 생산한 여성의 질병이 히스테리인 것처럼 현대사회가 생산한 여성의 질병이 식사장애인 것이다. 이 영화는 2년 전 여전히 청년처럼 활약하다 갑자기 불귀의 객이 된 고 박철수 감독의 제작·연출작이다. 장정일의 산문시 『요리사와 단식가』에 영감을 받은 스물을 갓 넘긴 이서군의 각본에 기대어 제작된 이 영화는 당시 본격적 컬트영화로 화제를 모았다. 이제는 감독으로 더 잘 알려진 방은진이 배우로서 본색을 드러낸 작품이기도 하다. 영화는 두 캐릭터의 몸과 그 몸의 연장으로서 체화된 공간 콘셉트를 반복하면서 여성의 욕망과 주체 형성과정에 주목한다. < 안개기둥 >과 < 어미 >로 여성과 모성에 주목해온 박철수 감독은 이 영화 이후 여성의 몸을 매개로 주체와 욕망의 관계를 풀어가는 일련의 영화들을 연출하였다. (< 산부인과 > < 봉자 > < 녹색의자 >등) 익명성과 자유가 보장되는 독신자용 바이오아파트. 영화는 이웃인 301호와 302호, 즉, 요리광이자 식욕이 넘치는 송희( 방은진 )의 공간 301호와 거식증에 몸/욕망에 대한 글쓰기를 하는 프리랜서 윤희( 황신혜 )의 공간 302호를 넘나들며 이야기를 짜간다. 전공간의 부엌, 식당화를 보여주는 301호와 전공간의 서재화로 도서관을 연상시키는 302호는 공간부터가 이 두 캐릭터의 체현이다. 이렇듯 상이한 공간, 상이한 캐릭터 사이에서 탐식과 거식이라는 대립적인 컨셉과 이미지의 교환과 충돌, 그리고 소통이 이루어지는 과정이 이 영화의 핵심 줄거리를 이룬다. 여성들의 거식증과 탐식증에 대한 심층 보고서인 이 영화는 당연한 일이지만 두 여주인공의 삶이 성/음식과 매개되어 표현되고 있다. 송희는 요리된 음식/성적 욕망이 남성 혹은 자신이 원하는 사람에 의해서 먹히지 않자 결국 자기 자신에 그것을 퍼부음으로써 몸과 욕망을 가시화시키고 드러낸다. 어느 날 저녁 그녀가 남편에게 반복적으로 이 음식 저 음식을 맛보게 하려고 할 때 남편의 거부가 반복되고 남편이 먹지 않은 음식을 꾸역꾸역 자기 입에 넣는 장면이 이어진다. 애완견 살해를 통한 그녀의 이혼 과정은 충격적이지만 그녀의 요리에 대해 남편이 보이는 반응의 변화는 그녀의 탐식증이 남편에 대한 복수이면서 자기 자신에 대한 학대의 순간임을 보여준다. 여기서 음식은 사랑의 대용물이 된다. 그렇게 남편에게 무시를 당하면서도 음식 만들기를 멈추지 않는 것이나 남편의 계속된 거부와 함께 그녀의 몸이 점점 비만해지는 과정은 기괴하기까지 하다. 사실 그녀의 남편에 대한 분노는 바로 자신에게 한정된 그 노동에 대해서 어떤 식으로든 정당한 인정/보상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위자료라는 이름의 너무 늦은 보상 덕분에 이제 송희는 요리를 하면서 하루하루를 잘 살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녀의 상처와 외로움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녀의 상처는 어디서 비롯되었는가? 301호의 송희에게 음식은 자기 보상과 위안의 역할을 했다. 그녀는 양육자로서 여성의 역할로 욕망을 억제하다가 결국 그 욕망이 진탕 먹기로 터져 나옴으로써 비만에 이른다는 점에서 그러한 여성성의 일면을 보여준다. 그녀의 음식 만들기는 여성다움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행위였으나 그것은 남편뿐 아니라 이웃과의 단절 속에서 좌절되었다. ‘301호’ ‘302호’로 불리는 현대 사회에서 요리하고 음식을 나누고 먹는 행위는 더 이상 아름답다고 미화되거나 살기 위한 방편으로 당연하다고 간주되지도 않고 단지 광기로서만 해석될 수 있을 뿐이다. 그의 이웃인 302호의 여자인 윤희는 음식/욕망을 욕망하지 않는 것을 오히려 욕망하게 된 또 다른 여성이다. 윤희는 정육점을 하는 의붓아버지로부터 성폭행을 당한 이후 음식과 성을 거부하며 몸을 비가시적으로 만들고 싶어한다. 그런 그녀에게 이웃인 송희의 거듭된 음식세례는 폭력적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많은 거식증 환자가 그들을 성적인 먹이로 만든 여성의 육체로부터 탈출하고 싶은 욕망에 불을 붙인 어린 시절의 성적 학대를 경험한 사람들이라는 설정은 그래서 설득력을 갖게 된다. 거식증은 또한 자신의 의지력과 욕구에 대한 완전정복을 단언하는 여성의 질환이자 여성의 성역할이라는 함정에 빠지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일을 통해 자립하려 했던 윤희가 성이나 다이어트에 대한 글을 써서 먹고산다는 것은 지극한 아이러니이자 여성들이 취할 수 있는 막다른 골목이다. 그녀는 자립하기 위해서, 아니 살아남기 위해서 자신의 일, 그리고 자신의 몸을 배반해야 하는 모순적인 위치에 있는 것이다. 탐식증과 거식증이라는 이름의 식사장애는 남성과 경쟁하면서 동시에 여성적이어야 한다는, 성적인 대상으로 성공하면서 또한 가사노동과 자녀들을 우선적으로 돌봐야 하는 20세기 여성성의 추구가 현대 여성에게 부과한 모순된 요구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것은 두 개의 유지할 수 없고 모순적인, 자본주의적이면서 동시에 비자본주의적 위치라는 덫에 대한 저항이자 양육자라는 전통과 여성주체의 자기표현이라는 모더니티 사이의 갈등의 장이다. < 301 302 >는 바로 그 현재의 기대치와 우리가 지금 막 벗어나고 있는 과거의 기대가 충돌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 충돌의 현장이 바로 여성의 몸이며 그것이 식사장애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과연 그 모순의 틈바구니에서 301호와 302호, 송희와 윤희는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 그들의 상처는 과연 치유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