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K]Broken Time Jazz Project_배신자
- 제작년도
- 2010
사진: “ 졸업 ”, tvN 올 한 해 TV와 OTT를 통해 공개된 시리즈들을 필자의 시선으로 바라봤습니다. 관심을 끌어모은 화제작부터, 스쳐 지나갔지만 돌이켜 볼 만한 문제작들까지 정리합니다. 이 글을 구상할 즈음 ‘비상계엄’이 도둑처럼 선포됐다. 용감하게 국회로 달려간 많은 시민들과 사명감을 가지고 사투를 벌인 공직자들 덕분에 비상계엄은 해제됐지만, 한국사회의 시간은 ‘12.3 내란 사태’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됐다. 이 모든 상황이 차라리 ‘드라마’였으면 하고 생각하다가 지난 여름에 본 < 돌풍 >(김용완, 2024)이 떠올랐다. 한국 정치사를 압축한 것 같은 <돌풍>이 재현한 한국사회는 ‘대의 민주주의’ 대신 음모와 폭로가 난무하는 세계였다. 당시 나는 이 드라마의 위험한 상상을 비판했었다. 그러나 그 위험한 상상은 몇 달 뒤 현실이 됐다. 참으로 유해한 것들이 도처에 깔려있다. 비상계엄이 아니더라도 이 세계는 이미 비상시국이다. 먼 곳에서 전쟁 소식이 끊이지 않았고, 기후위기가 코앞까지 도달했음을 절감했고, 경기침체로 인해 온갖 사회 지수는 지속적으로 나빠졌다. 사회적 갈등뿐 아니라 여성, 장애인, 이민자, 퀴어 등 사회적 소수자를 향한 차별과 혐오도 지긋지긋하게 반복됐다. 마치 지구 종말 200일을 앞둔 < 종말의 바보 >(김진민, 2024) 풍경처럼. 이런 유해한 세상을 견디기 위해 우리는 자극적인 맛, 즉 도파민을 상승시킬 무언가를 찾고 또 찾았다. 드라마 세계도 마찬가지다. 사적 복수극, 고자극 장르물, 이번 생은 망했으니 과거로 돌아가서라도 욕망을 실현하는 ‘회·빙·환(회귀·빙의·환생)’ 서사가 줄을 이었다. 남편에 의해 살해당한 여성이 과거로 돌아가 자신의 역사를 바로 세우며 남편에게 복수하는 <내 남편과 결혼해줘>(박원국, 한진선, 2024)가 주목을 받았고, < 살인자ㅇ난감 >(이창희, 2024), < 더 에이트 쇼 >(한재림, 2023), <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 >(모완일, 2024) 등 사적 복수물이나 고자극 장르물이 뒤를 이었다. 그러나 이런 드라마들이 예전처럼 큰 화제를 모으지는 못했다. 넷플릭스를 중심으로 생산되던 고자극 드라마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다 보니 피로감을 느끼게 된 탓이다. <돌풍>, <종말의 바보> (사진: 유튜브 넷플릭스 코리아) 뜻밖에도(!) 올해 가장 인기가 높았던 드라마는 <눈물의 여왕>(장영우, 김희원, 2024)이다. 이 드라마는 ‘너무 늦게 도착한 과거’와 같은 드라마이다. ‘퀸즈’로 대표되는 무능하고 무책임한 재벌가(가부장제)를 선하고 무해한 집단으로 재현하며 무너진 퀸즈 일가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여기에 불치병과 기억상실증 등 한국 드라마의 클리셰가 빠지지 않았다. 위기를 통해 부부 관계와 가족애를 회복한다는 방향성도 나쁘지는 않았지만, 혈연·혼인 중심 가족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이 드라마가 주목받은 이유는 간단하다. “생각 없이 편하게 볼 수 있는 드라마”였기 때문이다. 일상의 피로감이 높아질수록 단순한 맛을 찾기 마련이다. 맵거나 달거나. 앞서 언급한 것처럼 고자극 드라마에 피로감을 느낀 우리는 순하고 달달한 드라마를 도피처 삼아 그 세계에 몰입하여 울고 웃었다. <눈물의 여왕>은 그런 우리의 필요를 잘 반영했기에 진부한 설정에도 선택을 받은 것이다. 시청률은 낮았지만 마니아층이 생길 정도로 인기를 모았던 <선재 업고 튀어>(윤종호, 김태엽, 2024)나 시원하고 무해한 제주도의 풍경을 보는 재미가 쏠쏠했던 <웰컴 투 삼달리>(차영훈, 김형준, 2023~2024) 등도 비슷한 이유로 관심을 모았다. 사진: “ 눈물의 여왕 ”, “ 선재 업고 튀어 ”, tvN “생각 없이 편하게 볼 수 있는 드라마” 곁에는 서로를 구원함으로써(쌍방구원) 위로를 전하며 치유적 기능을 한 드라마들도 있었다. 얼마 전까지 ‘먼치킨’ 주인공이 위험으로부터 인간-사회를 구하거나 악을 제대로 응징하여 ‘사이다맛‘ 정의를 구현하는 히어로물이 인기를 모았으나 그 히어로들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히어로’가 사라진 자리에 ‘힐러(healer)’가 찾아왔다. <히어로는 아닙니다만>(조현탁, 2024)은 우울증, 불면증, 비만이라는 ‘현대인의 질병’에 걸려 초능력을 상실한 가족 이야기다. 이들이 초능력을 상실한 이유는 화재 참사로 인한 상실감과 죄책감 때문이었다. 어디 드라마 속 인물들뿐일까? 사회적 참사가 반복되는 한국사회 속 우리들 또한 같은 이유로 현대인의 질병에 걸린 게 아닐까? 드라마는 상처로 인해 무기력에 빠졌던 인물들이 “히어로는 아니지만” 서로의 행복을 바라며 구원하고자 애쓰는 것에서 희망은 시작된다는 걸 보여주었다. < Mr. 플랑크톤 >(홍종찬, 2024)은 뿌리를 모른 채 딛고 설 땅을 상실한 채 부유하는 “모든 물고기들의 밥”이자 “먹이사슬의 맨 밑바닥, 바닷속 가장 미천한 존재”인 플랑크톤과 같은 인물들이 서로를 위로하며 구원했다. 세상은 유해한 것들로 가득하지만, 인간은 끝까지 ‘선함’의 본능을 잃지 않고 서로를 구원하고야 만다는 단단한 신뢰를 이런 드라마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히어로는 아닙니다만>, <Mr. 플랑크톤> (사진: “ 히어로는 아닙니다만 ”, JTBC / 유튜브 넷플릭스 코리아) 드라마가 단지 도피처, 위로와 치유적 경험만 제공한 것은 아니다. 장르를 망라하여 저마다의 방식으로 ‘오늘’을 구현함과 동시에 ‘내일’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렇다면 올해 드라마가 담은 오늘과 내일은 어떤 모습일까? 우선 다양한 가족의 형태와 가능성을 보여준 드라마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눈물의 여왕>이 절절하게 보여주었듯 기성사회와 미디어는 여전히 가부장적이며 혈연·혼인 중심 가족을 대표적 가족 모델로 반복재생 하지만, 한국사회의 전통 가족 모델은 빠른 속도로 해체되고 재구성되고 있는 중이다. 이런 사회적 변화는 전통 가족의 모순성을 보여주거나 가족의 경계를 허물어 확장하는 지향성을 가진 드라마들을 통해 구현됐다. <정숙한 세일즈>(조웅, 김미진, 2024)나 <가족X멜로>(김다예, 2024) 등에서는 가부장 중심 가족의 해체를 보여주었고, <우리, 집>(이동현, 위득규, 2024)이나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송연화, 2024)를 통해서는 가족이라는 관계가 신뢰와 애정으로 유지되는 게 아니라 의심과 오해로 조각날 수도 있다는 걸 보여주었다. 가족이라서 서로를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걸 우리는 이 드라마들을 통해 씁쓸하고 서늘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낭만적 사랑과 결혼이 당연하지도 않고 심지어 불가능하다는 걸 보여준 드라마들도 있었다. < 트렁크 >(김규태, 2024)는 ‘계약결혼’이라는 파격적 설정을 통해 가족과 부부의 관계를 다시 생각하게 했다. 결혼이나 혈연을 넘어선 가족들도 등장했다. <조립식 가족>(김승호, 2024)과 <손해 보기 싫어서>(김정식, 2024)와 <Mr. 플랑크톤>은 ‘정상’ 세계에 속하지 못한 채 부유하는 인간들이 혈연·혼인이라는 관습과 제도를 넘어 서로의 ‘가족’이 되는 과정을 보여주었다. 이것이 가족이 아니라면 무엇이 가족일 수 있을까? 가족의 재구성의 문제는 관계에 관한 질문으로 이어졌다. 생활고 때문에 관계마저 소원해진 젊은 부부가 돈을 벌기 위해 불륜 커플을 협박한다는 신박한 설정의 < LTNS >(전고운, 임대형, 2023)는 ‘불륜’이라는 키워드로 (부부) 관계의 복잡성을 상기시켰다. 부부, 가족, 인간관계가 복잡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인간이란 존재가 원래 복잡하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은 ‘이토록 친밀’한데 ‘배신자’ 일수도 있는 법이다. 드라마는 이런 인간의 복잡성을 흔들리거나, 해체되거나, 재해석되고, 재구성되는 가족을 통해 다채롭게 보여주었다. (상) <우리, 집>,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 (사진: “ 우리, 집 ”, “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 ”, MBC) (하) <트렁크>, <LTNS> (사진: 유튜브 넷플릭스 코리아 / 유튜브 CJ ENM 글로벌) 최근 몇 년 동안 꾸준하게 늘어난 여성서사가 올해도 다양한 얼굴로 우리와 만났다. 여성서사는 주인공 혹은 중심인물 다수가 ‘여성’인 경우를 의미하지만, 그 여성‘서사’에 무엇을 담았는가도 중요한 문제다. 올해도 드라마들은 다양한 상황 속에서 살아가는 여성들의 얼굴을 응시했고, 용감하고, 슬기롭고, 끈질기게 사회적 관습에 저항하는 여성들을 통해 새로운 인간-사회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낮과 밤이 다른 그녀>(이형민, 최선민, 2024)는 뜻밖의 사건으로 낮에는 ‘아줌마’로 호명되는 50대 여성으로, 밤에는 ‘취준생’ 20대 여성인 본래 몸으로 살게 된 이미진/임순을 통해 사회적 존재감을 잃어버린 여성들이 존재감을 가지게 되는 과정을 담았다. <졸업>(안판석, 2024)에서는 대치동 학원가 1타 강사, 서혜진( 정려원 )이 퍽퍽하고 고단한 30대 여성 직장인의 얼굴을 보여주었다. <밤에 피는 꽃>(장태유, 최정인, 이창우, 2024)은 사별한 여성에게 자결하여 열녀가 될 것을 강요하는 사회적 관습을 거부하고 의적으로 활동한 조여화( 이하늬 )의 액션 활극을 시원하게 보여주었다. <정숙한 세일즈>는 1992년 지방 소도시를 배경으로 생계를 위해 성인용품 방문 판매를 하게 된 여성들을 통해 여성들이 ‘정숙’하기를 강요하는 사회에 도발적 질문을 던졌다. 또한 무능하고 유해한 가부장들과 능동적이고 협력적인 여성들의 연대를 대비시켰다. 1992년이라는 시대적 배경 때문에 낡은 서사로 여겨질 뻔했지만, 그 안에 담긴 지향은 오늘날의 여성들과 공명하기에 충분했다. <굿파트너>(김가람, 2024)는 ‘이혼 전문 변호사’ 차은경( 장나라 )을 중심으로 가족의 의미를 다시 묻게 하며 여성들의 연대와 성장 서사를 보여주었다. 그런가 하면 <손해 보기 싫어서>는 ‘위탁모’로 봉사한 어머니를 둔 손해영( 신민아 )과 ‘위탁아동’으로 연결된 또 다른 ‘딸들’의 자매애를 보여주었다. <피라미드 게임>(박소연, 2024)은 한 달에 한 번씩 비밀 투표로 왕따를 정하는 ‘백연여고’ 2학년 5반을 통해 계급화된 사회의 문제를 환기하고 여성 청소년들이 연대하여 힘의 세계관에 저항하며 성장하는 과정을 담았다. < 정년이 >(정지인, 2024)는 1940년대 후반부터 50년대 중후반까지 유행한 ‘여성국극’을 재현하여 남성중심 사회 속에서 꿈을 포기하지 않는 여성들과 여성들의 관계를 보여주었다. ‘여성국극’은 여성을 억압하고 차별하는 사회에서 ‘여성들의 사회’라는 대안적 상상을 해보게 하는 담대한 시도였다. 여성서사를 표방하지 않더라도 드라마 속 여성들은 꾸준하게 진화하고 있다. 드라마 속 여성서사는 장르도, 시대도, 인물들이 처한 상황도 다르지만 지금-한국 사회에서 여성들이 처한 현실과 그에 대항하는 페미니즘적 지향성과 상상력을 보여준다는 면에서 중요한 흐름이다. 사진: “ 밤에 피는 꽃 ”, MBC / “ 굿파트너 ”, SBS 드라마에서 여성서사의 공간이 늘어난다는 것은 단지 여성들의 이야기가 많아졌다는 것만 의미하지 않는다. 퀴어서사의 공간도 함께 늘어나게 됨을 의미한다. <피라미드 게임>, <웨딩 임파서블>(권영일, 2024), <엄마친구아들>(유제원, 2024)과 같이 퀴어 캐릭터가 주요하게 등장하는 ‘퀴어프렌들리’ 드라마들이 있었고, <정년이>, < 대도시의 사랑법 >(허진호, 홍지영, 손태겸, 김세인, 2024), <옥씨부인전>(진혁, 2024) 등 퀴어가 중심이 된 드라마도 제작됐다. <대도시의 사랑법>은 소설가 박상영의 소설을 영화와 드라마로 각색하여 호응을 얻었는데 게이 남성 고영( 남윤수 )을 통해 ‘이성애’ 중심 사회에서 ‘동성애’도 당연하고 보편적일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옥씨부인전>은 노비에서 양반으로 신분이 바뀐 여성, 구덕( 임지연 )을 중심으로 여성, 노비, 성소수자 등 ‘소수자’ 문제를 전면에 등장시켰다. <정년이>는 조금 다른 측면에서 퀴어서사에 관해 고민하게 했다. 동명의 웹툰 원작에서 정년이와 복잡한 관계를 형성하는 인물인 ‘부용’이 드라마에는 삭제됐다는 면에서 그렇다. 부용은 페미니즘과 퀴어서사를 담당한 중요한 캐릭터였기에 타협적이고도 퇴행적 각색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한편 <대도시의 사랑법>은 동성애를 반대하는 보수 단체의 거센 항의에 예고편을 삭제하기도 했다. 이 두 드라마를 둘러싼 논란은 드라마가 처한 모순적 상황을 절감하게 했다. 이화여대 퇴임교수 김훈순의 진단처럼 드라마는 “우리의 삶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 과정에 적극 개입하는 문화적 생산물”임과 동시에 “변화하는 사회 속에서 다양한 가치를 담아내는 문화적 공론장”이자 “시대 흐름 속에서 충돌하는 가치들을 담아내는 역동적인 텍스트”이다. 그렇기에 순응하거나 퇴행하는 면도 있지만, 관습의 저항을 피하기는 어려운 순간도 있다. <정년이>나 <대도시의 사랑법>은 충돌하는 가치들을 ‘뚫고’ 나아가는 서사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했다. 사진: “ 정년이 ”, tvN / “ 옥씨부인전 ”, JTBC 한 해 동안 우리가 주목했던 드라마들의 흐름을 톺아봤다. 지난 1년 동안 우리는 유해한 현실의 도피처로서 무해한 드라마를 보며 울고 웃다가 위로를 받았다. <옥씨부인전>에서 구덕의 말처럼 드라마가 “하루하루 수고한 사람들한테 행복을” 주고 “시름을 잊게” 한 것이다. 또한 드라마가 구현한 작은 세계를 통해 우리의 ‘오늘’을 돌아볼 수 있었다. 드라마라는 거울은 우리의 ‘오늘’뿐 아니라 ‘내일’로 나아갈 길을 발견케 했다. 드라마가 비춘 현실은 자주 절망적이었지만, 관습을 깨고, 더 나은 세계의 가능성을 보여주며 꾸준하게 성장하는 여성서사와 꿋꿋하게 등장하는 퀴어서사를 통해 우리 사회가 다양하게 넓어지고 있다는 희망적 생각을 해보게 됐다. <정숙한 세일즈>에 등장한 ‘서태지와 아이들’의 데뷔 무대처럼 어떤 시도는 “시대를 앞서간 느낌” 때문에 저항에 부딪히지만 곧 그 시차를 극복할 것이다. 그때까지 우리가 멈추지 말아야 할 것은 질문이며,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인간다움’과 ‘가족’으로 상상된 사회공동체다(그렇기에 가족의 범위가 확장되는 걸 보여준 드라마들이 반갑다). 올해 본 드라마 중 가장 좋아한 드라마가 무엇이냐고 내게 묻는다면 <졸업>이라고 대답하고 싶다. <졸업>은 한국사회의 욕망이 집약된 ‘대치동 학원가’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통해 ‘정답’이 아닌 ‘지문 바깥의 세계’를 볼 수 있는 역량과 ‘인간다움’에 관해 이야기한다. 드라마는 자신의 삶과 연인을 지극히 사랑하는 성실하고 윤리적인 직업인 혜진을 통해 ‘인간답게 사는’ 길을 보여주었다. 혜진은 수업 시간에 에리히 프롬의 글을 학생들에게 들려준다. “사랑은 사랑하고 있는 자의 생명과 성장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이다.” 이것은 나와 우리, 그리고 ‘유해한’ 세상을 향한 조언이기도 하지만, 드라마의 소명과도 같다. 사진: “ 졸업 ”, tvN 오수경(드라마평론가) l 인간과 사회에 관심이 많아 문학을 전공했고, 신앙인으로 살고 있으며, 드라마를 들여다본다. 여러 매체에 칼럼 기고. 『을들의 당나귀 귀 』(2019) 공동 집필, 『드라마의 말들 』(2022) 집필.
1. 카트린느 드뇌브와 ‘태권도’ 1974년 한국의 한 신문기사는 ‘프랑스 여배우’ 카트린트 드뇌브의 말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남성 중심의 액션영화가 하도 판을 쳐서 태권도를 하지 못하는 우리 같은 여배우는 발 붙일 곳이 없어요.” 카트린느 드뇌브의 이 한탄은 ‘이소룡 붐’이라는 해외영화계의 기현상을 언급하는 기사가 인용해오고 있는 발언이다. 이 언급을 곧이곧대로 믿어보자면 이소룡 영화 혹은 그와 같은 류의 영화들은 ‘태권도를 하는’ 남성 배우들의 영화이다. 그런데 과연 1974년의 시점에 카트린느 드뇌브는 태권도라는 말을 알고 있었을까? 그녀가 이소룡 식의 액션영화를 ‘태권도 영화’라고 인식했는지는 상당히 의심스럽지만 적어도 어느 시기 한국 영화시장 내에서 이 명칭은 꽤나 일반적으로 통용되었던 것 같다. 1973년 3월 쇼브라더스 소속의 정창화가 감독한 영화 < 죽음의 다섯 손가락 >이 홍콩영화 최초로 미국 박스오피스에 올랐을 때(이 시점은 이소룡 영화가 미국 시장을 강타하기 직전이기도 하다), 이 영화는 미국에서 성공한 ‘태권도 영화’, 한홍합작영화로 한국에서 개봉하였다. 같은 해 출범한 정부 조직 한국영화진흥공사는 한국영화의 해외시장개척을 위한 중장기 전략으로 한국산 태권도 영화를 적극 장려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같은 해 7월, 이소룡의 죽음 직후 < 정무문 >이 한국 시장에 도착했다. 이 영화는 당시 표현에 따르면 ‘이상과열’이라고 할만한 사태를 불러일으켰다. 이소룡의 영화 중 가장 노골적인 반일 텍스트인 이 영화가 보여주는 저 적의 익숙함은 한국 관객들의 공분을 사기에 충분한 것이었으며, 또 1960년대 후반 무협영화 붐부터 시작된 한국영화와 홍콩영화의 긴밀한 연결이라는 흐름 안에서 보자면 거의 절반쯤 자국영화로 보이게 할만큼 익숙한 것이기도 하였다. 게다가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 스승의 복수를 완수한 이소룡이 총구를 겨누고 있는 경찰들을 향해 뛰어오르는 프리즈 프레임을 한번 상기해보라. 요절한 스타가 정지된 화면 내에서 영원히 도약하는 모습을 목격한 당대의 관객들에게 이 영화가 어떤 정서적 감응을 불러일으켰을지 상상해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정무문>을 시작으로 1973년과 74년 이소룡의 네 편의 영화, < 맹룡과강 >, < 당산대형 >, < 용쟁호투 >가 모두 개봉하며 이 열기를 지속시켜나갔다. 전세계적인 이소룡 붐과 접속한 자국 관객의 열광은 곧 “홍콩 제작의 얼치기 태권도 영화가 세계를 휩쓴 데 자극받은......참다운 태권도 영화”가 만들어져야 한다는 당위와 겹쳐진 시장의 요구로 이어졌다. 그리고 불현 새로운 스타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소룡-브루스 리가 그러한 것처럼 미국식 이름을 붙이고 나타난 이들은 한결같이 미국에서 온 태권도 유단자임이 강조되었다. 2. 아마도 ‘태권도 영화’라고 할만한 것의 절정은 1974년이 될 것이다. 이해 이두용은 재미교포 출신의 신인배우 챠리 셀(한용철)을 기용하여 무려 6편의 태권도 영화를 만들었다. < 용호대련 >, < 죽음의 다리 >, < 돌아온 외다리 >, < 분노의 왼발 >, < 속 돌아온 외다리 >, < 배신자 >(이두용에 따르면 이 영화는 앞의 영화들의 ‘재편집’으로 완성되었다)에 이르기까지 이 놀라운 다작은 유행 장르를 자국화하고자 하는 한국 영화산업의 탄력적 대응의 실례라 할만하다. 일단 이 영화들은 1960년대의 인기 장르인 만주물의 서사를 고스란히 끌어온다. 배경은 식민지 시대의 만주 혹은 대륙, 적은 일본군이거나 일본군과 결탁한 야쿠자. 여기에 몇몇 제목들이 이미 노골적으로 명시하고 있는 바 장철의 < 의리의 사나이 외팔이 獨臂刀>가 불러일으킨 신체적 핸디캡의 영웅이라는 표상과 이 표상이 내포하는 상실, 극복, 귀환이라는 구조가 가미된다. 발차기의 명수인 주인공은 적들의 농간으로 한쪽 다리를 잃지만, 어떤 연유에서인지 극복하고, 돌아와서 적들을 물리친다. 어쨌건 주인공은 단독으로 혹은 독립군과 힘을 합쳐 악독한 일본군 또는 일본 야쿠자를 물리친다. 그렇다면 이 영화들은 만주물의 재출현인가? 만주물은 1960년대라는 국민국가 만들기의 시간에 이를 형성해낼 강력한 표상자원으로서 한국영화가 어떻게 기능했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이다. 식민지 시기 만주라는 실제의 시공간, 동시에 1960년대의 시점에서 가상적으로 재현될 수밖에 없는 이 시공간에서 벌어지는 항일독립투쟁의 이 액션활극은 포스트콜로니얼 분단국가가 상상해낼 수 있었던 가장 유력한 국가창생기일 것이다. 아직 남과 북은 분단되기 이전이며, 하나의 ‘민족’은 미래에 반드시 당도할 독립국가를 위해 싸운다. 그리하여 이 독립국가-대한민국은 저 전쟁에서 죽어간 수많은 ‘애국선열’들에 의해 여기 존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1960년대 후반 만주 웨스턴이라는 형태로 전화되어간 만주물은 이 전화의 마지막, 이만희의 < 쇠사슬을 끊어라 >(1971)에 이르러 완전히 끝장나버렸다. 만주물의 초창기 비전이 국가 만들기와 관련있는 것이라면 국가 바깥의 인간들, 국가에 무심한 인간들이라는 한국영화에서 거의 볼 수 없는 희유한 순간을 만들어낸 <쇠사슬을 끊어라>는 말 그대로 장르에 대한 탈구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는 이 이야기는 1960년대적인 내셔널 시네마적 열정이 어떻게 사라지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두용의 태권도 영화가 만주물 서사를 새삼스럽게 반복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 서사들을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어 보인다. 실제로 이 영화들은 서사에 공을 들이고 있지 않다. 공간은 극히 단조롭고 서사를 믿을만하게 만들어줄 캐릭터의 구축이랄 것도 거의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단지 이 영화들이 졸속 제작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 영화들은 오로지 하나의 볼거리, 하나의 스펙터클, 하나의 동작에 집중한다. 챠리 셀의 발차기. 길고 곧게 뻗은 다리가 화면을 횡으로, 위에서 아래로, 아래에서 위로 가로지른다. 종종 웃통을 벗는 남자는 기름을 발라 반짝반짝 빛나는 근육질의 몸을 과시하며 괴성을 지르면서 전광석화처럼 날아올라 발차기로 상대를 제압한다. 벗은 몸의 발차기. 이 형상은 이중적으로 작동할 것이다. 그것은 자국 관객들을 위해서 태권도라는 지역적 귀속을 충족시켜주는 기표로 이해되는 한편 이제 곧 형성될 아시안 마샬아츠 필름의 카테고리 안에서 싸우는, 맨몸의, 아시안 남성의 기표로서 기입될 것이다. 3. 챠리 셀에 이어 미국에서 온 또 한 명의 스타는 바비 김(김웅경)이다. 당시의 신문보도에 따르면 ‘이소룡과 함께 태권도 보급에 힘써 온’ 바비 김은 이소룡 사망 후 “미국 쪽에서 그를 이소룡의 후계자로 내세우려 들자 기왕 태권도 영화에 출연할 바에야 한국영화에서 활약할 생각으로 귀국하였다.” 챠리 셀의 인기에 대적하기 위해서 바비 김은 변별될 필요가 있었다. 그 역시 발차기가 특기이지만, 콧수염과 가죽점퍼를 트레이드마크로 강한 아메리칸 남성성을 번안해오고 있는 바비 김의 영화는 이두용의 태권도 영화보다 현대적 의장을 선호하였다. 찰스 브론슨을 노골적으로 모방하고 있는 이 ‘터프한’ 남자는 사악한 일본인과 맞서 싸우거나(< 사대독자 > < 흑룡표 >) 홍콩과 동남아의 주요 도시들을 배경으로 국제적으로 암약하는 공산주의자들의 음모를 분쇄하는데(< 국제경찰 >), 알고 보면 이 적들은 서로 결탁해 있곤 한다(< 죽음의 승부 >). 이 영화들이 설정하고 있는 적은 지극히 자국적으로 보이나(일본인과 공산주의자) 실상 현대적 의장 속에서 적의 고전적 표식은 사라지기 일쑤다. 이를테면 식민지 시대 홋카이도의 탄광촌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 귀문의 왼발잽이 >(박우상, 1977)를 보자. 다케지로와 센노스케라는 대립하는 두 일본인 집단과 이들에게 착취당하는 조선인 광부들. 어느날 이 마을에 정체불명의 사나이 바비 김이 나타나 우여곡절 끝에 고통받는 광부들을 구해낸다. <귀문의 왼발잽이>가 지극히 흥미로워지는 것은 이 영화가 시대적 배경을 믿을 만한 것으로 만들어줄 그 어떤 장치도 갖추고 있지 않다는 점 때문이다. 더 정확히 말해 설정과 아무 상관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탄광의 소유주인 다케지로는 수트 차림의 성공한 중년 사업가의 모습이다. 가죽 재킷에 헬멧을 쓰고 일당들과 함께 오토바이를 몰고 나타나는 센노스케는 폭주족에 가깝다. 영화의 실제 배경은 강원도 남부의 탄광도시 태백이다. 이 이미지들 속에서 <귀문의 왼발잽이>는 탄광 노동자를 착취하고 괴롭히는 악덕 자본가와 폭력배, 이에 맞서 노동자를 구하는 히어로의 이야기로 보아도 무방하다. 그것은 마치 1970년대 후반의 탄광도시 태백의 지역성만큼이나 당대적이고 구체적이며 로컬한 정치적 의제를 상기시키는 것처럼 보이는 동시에 착취당하는 노동자를 구하는 히어로라는 오래되고 광범위하며 글로벌한 소망과 맞닿아있는 것처럼 보인다. 4. 이소룡의 열풍이 불러일으킨 이국적 이름의 행렬은 이후에도 계속된다. 챠리 셀과 바비 김에 이어 엇비슷한 이름을 가진 자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쏟아져나왔다. Tang Lung, Bruce Li(何宗道), Bruce Le(呂小龍), Bruce Leung(梁小龍) Dragon Lee (혹은 Bruce Lei, 巨龍) 기타등등. 이 이름들 중 누군가는 한국인이고 누군가는 이미 한국인이 아닌데, 사실 이 영화들에 있어서 그것은 더 이상 중요한 사안이 아니다. 한국과 홍콩, 대만, 필리핀, 타이 등지의 영세 영화업자들이 얼기설기 엮어 만들어낸 이 영화들은 이제 국가적 귀속이라는 문제로부터 더 없이 자유로워진 채 국경을 넘어 ‘아시안 마샬아츠 필름’의 한 부류로 통칭될 터이니. ps. 현재 영상자료원에 필름이 남아있지 않은 <귀문의 왼발잽이>는 ‘불타는 주먹(les poings enflammes)’이라는 프랑스어 더빙 버전으로 찾아볼 수 있다. 당신은 유창하게 불어를 구사하는 바비 김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귀문의 왼발잽이>를 이런 상태로 볼 수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이런 영화들이 어떠한 유통경로를 거쳐갔는지를 증거한다. (관련글) 1. 비행기의 시선, 무정한 시선 - 2021.04.30. 2. 액션영화의 한 기원, 안중근과 무협 - 2021.05.31. 3. '외팔이'의 도래, 1960년대 후반의 무협붐 - 2021.06.30. 4. 태권도 영화- 챠리 셀과 바비 김, 이국적 이름들의 행렬에 관하여 - 2021.07.23. 5. 이소룡적 신체 - 2021.08.24. 6. 김두한과 협객물, 유신 시대의 가장 안전한 쾌락 - 2021.10.01. 7. 브루스플로이테이션과 한국영화 - 2021.11.01. 8. 춤추는 괴수, 1967의 '트위스트' 용가리 - 2021.12.02. 9. 우리는 왜 그때... - 2021.12.24. 10. 용팔이, 1970년대의 과잉과 잉여 - 2022.02.24. 11. 1970년대식 섹스와 폭력, 여감방 영화와 <여수 407호> - 2022.03.22. 12. <삼국대협>, '트랜스내셔널한 어떤 고립에 대하여 - 2022.04.20. 13. '빈곤한 이미지'의 여행- <정도>/<당수태권도>와 <변증법은 벽돌을 깰 수 있는가> - 2022.05.30.
한국에서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나 실존 인물을 모델로 한 영화를 만드는 일은 쉽지 않다. 특히 한 인간의 업적과 과오, 명암이 고루 담긴 사실적 전기(傳記) 영화는 더욱 만들기 어려운 것 같다. 예전에 한 원로 가수의 전기 영화를 만들면 어떨까 싶어 몇몇 제작자와 선배들에게 조언을 구한 적 있다. 기획은 괜찮지만 내가 강조한 몇 개 에피소드 때문에 모두 힘들 거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분이 직접 TV에 나와 말씀하신 일화들인데요?” 하지만 당사자보단 그 일과 관련한 다른 이들의 반발이 거센 경우가 많다. 귀신같이 알고서 딴지를 걸어온다고 한다. 피해당사자보다 오히려 가해자 쪽에서 명예 훼손을 문제 삼고 나온다. 조용히 잘 살고 있는데 왜 옛날 일을 다시 끄집어내느냐? 내 자식들이 봐도 괜찮은 영화를 만들 수 있느냐? 이런 입장을 가진 모두와 만나서 허락을 구하는 일은 힘들고 괴롭다. TV의 르포 프로만 봐도, 인터뷰만 요청했는데 경찰부터 부르는 장면을 우리는 자주 본다. 그렇다고 문제의 에피소드를 빼려니, 이 인물을 묘사하고 이해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시점의 이야기를 제대로 전달할 수가 없다. “그럼 이 분의 전기를 만들 이유가 없는데요?”, “그냥 픽션으로 만들어. 그게 편해.” 실화를 모티브로 한 범죄물이 주로 이런 방식을 택한다. 그러나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다. 가명의 가해자와 익명의 피해자가 나온다고 근원의 현실이 휘발하지 않는다. 피해자의 고통이 전시에 그치거나, 2차 가해에 가까운 과도한 표현을 하거나, 연출의 시선이 가해자의 시점과 동일시되어 피해자에게서 원인을 찾는 우를 범할 위험성은 항상 존재한다. 그리고 관객들은 극장을 나오면서 꼭 모티브가 된 사건을 검색해본다. 영화에서 현실성과 사실주의를 담보하려는 노력은 너무나 중요하다. 이것은 물론 표현의 자유이지만, 또한 윤리의 문제다. 내가 오로지 남자들만 나와서 치받고 죽이는 완전 픽션을 볼 때 좀 더 안심하는 이유가 있다. 영화는 본질적으로 현실을 모사(模寫)하는 매체이기에 특별히 민감하게 현실과 선을 긋는다. 그래서 외국 영화의 엔드 크레딧 말미에는 ‘This is a work of Fiction. 이 작품에서 묘사된 이야기, 모든 이름, 캐릭터 및 사건은 허구적인 창작입니다…’로 시작하는 문구가 꼭 들어간다. ‘허구의 면책’을 명시한 조항은 즉 과거에 있었던 소송의 결과다. 러시아의 괴승 라스푸틴 암살 사건을 영화화한 MGM의 1932년 영화 <Rasputin and the Empress>가 고소를 당한 이후로 할리우드 영화에 이와 같은 문구가 들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 역시 언젠가부터 비슷한 문구를 넣고 있다. ‘…만일 실제와 같은 경우가 있더라도 이는 우연에 의한 것입니다.’ 개인과 단체의 프라이버시와 명예 훼손을 피하다보니, 한국 영화에선 존재하는 고유한 지명조차 없는 지명을 만들어 대체하는 경우가 잦아졌다. 땅값이 떨어진다고 지역 주민이 반발한다는데, 의외로 사실이다. 그래서 우리는 한국 영화 속에서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이상한 지역을 자주 접한다. 예민한 관객에겐 가짜 지명이 꽤나 신경 쓰인다. 2시간 동안은 이 픽션이 현실이라는 착각에 온전히 빠져들어야 하는데 적잖은 방해가 되는 것이다. 시나리오를 쓰는 작가 입장에선, 현실에 없는 지명을 지어내는 순간 힘이 빠지는 느낌을 받는다. 실제 한국사회 같은 핍진한 작품을 쓰려 했는데, 대신 어떤 한국적인 총체의 원더랜드를 그리는 느낌이랄까. 그래서 가끔 엉뚱한 상상도 해본다. 차라리 한국 영화용 지명을 미리 정해서 영화사나 작품별로 공유해 쓰면 어떨까? 가령 상남자 픽쳐스라는 제작사에서 만드는 모든 남성폭력영화는 ‘한남시’를 배경으로 한다던가. 그럼 굳이 ‘유니버스’를 따로 만들려고 고민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물론 지금 나는 농담을 하는 중이다. 한국 영화 전체를 하나의 유니버스로 받아들여도 상관없을지 모른다. 한국 영화는 왜, 이른바 “다이내믹”한가? 한국이 다이내믹하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도 별의별 일이 다 일어나는 한국의 근대사는 영화화해서 보고픈 온갖 사건과 인물들로 가득하다. 이 다이내믹 코리아 유니버스의 세계관을 뒤흔들고 재정립한 몇 차례 이벤트가 있었고, 그 중 하나가 영화와 드라마 등을 통해 여러 번 영상화가 이루어진 10.26이다. 1979년 10월 26일, 종신 집권에 함몰해있던 독재자가 야심한 밤 별채에 여가수와 모델을 불러다 놓고 최측근과 술 마시며 놀다가 정보기관장이 쏜 총에 맞아 죽었다. ‘오직 한 사람을 위한 시대’였던 유신이 멱살 잡아 끌어내려지듯 막을 내렸으나 민주주의 대신 신군부라는 새로운 도둑들이 나타나 또 다른 유혈을 불러왔다. 그 잔재와 상처는 지금도 남아 현재진행형이다. 유신의 망령까지 오래 남아서, 그 부왕과 영애를 신격화한 추종자들 세력도 여전히 건재하다. 누구나 아는 내용이지만 정확한 내막은 아무도 모른다. 궁정동 안가는 독재자의 권력을 국가와 괴리시켜놓은 은밀하고 초현실적인 공간이었다. 그날 밤 안에서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나? 경호실장과 충성 경쟁을 하던 2인자이자 “여자를 남자로 만드는 일 말고는” 못 하는 게 없었다고 할 만큼 서슬 퍼런 권력을 휘두르던 중앙정보부의 우두머리가 왜 그날 갑자기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게 되었을까? 거사는 사전에 계획되었나, 순간의 충동이었나? 그는 “혁명적 민주 투사”였을까, “과대망상에 빠진 돈키호테”였을까? 사건의 맥락 혹은 복선을 찾다 보면 또 다른 미스터리만 만날 뿐이다. 토사구팽 당한 뒤 정권을 저격한 회고록으로 살 길을 노리던 이전 정보부장은 시체도 찾질 못했다. 프랑스 파리에서 행방불명된 그는 양계장 모이가 되었을까, 외교행낭 컨테이너에 실려와 청와대 지하 벙커 사격장의 표적이 되었을까? 신상옥 감독의 < 증발 >(1994)은 “이 영화는 실제로 있었던 일을 모델로 하였지만, 어디까지나 픽션이며 사실과 다르다는 것을 미리 밝혀 두는 바이다.”라는 자막으로 시작한다. 이 영화는 5.16 군사정변부터 10.26까지 18년의 시간을 밀실에 갇힌 사내들의 히스테리와 궁정동 여인들의 비소로 채운, 유신의 형이상학적 다이제스트다. 만약 한국판 <살로 소돔의 120일>을 찍는다면 바로 이 영화 같을지 모른다. 당시 독재자 역은 (누구도 맡으려는 한국 배우가 없었다는 설이 있다) 일본계 미국 배우 조지 타케이(초대 <스타트렉>의 ‘술루’ 역할로 유명하다)가 이강식 성우의 목소리로 연기한다. 주로 미국에서 찍은 걸로 알려져 있고, 배우의 동시 녹음과 성우의 후시 더빙이 알 수 없는 기준으로 뒤섞이며, 고증과 상관없이 현대 배경으로 옮겨 오프닝부터 곳곳에 80년대 시위 현장을 찍은 실제 기록 영상을 삽입한 이 영화는 아시아 어딘가에 있을 어느 정신 나간 독재정권을 그린 SF처럼 보일 지경이다. 그러니까 조지 타케이가 극중에 그냥 영어나 일본어로 말해도 영화를 보는데 있어 위화감은 전혀 없었을 것 같다. 실제로 감독은 애초 이 영화의 배경을 남미의 가상 독재국가로 옮겨 찍을 계획이었다. 주연으로 진 핵크만을 내정했었다는 이야기가 옛날 뉴스 기록에 남아있다. 파리에서 붙잡혀 컨테이너에 실려 한국으로 온 전 국가보안부 장관( 김희라 )은 이 영화의 화자이자 주인공이다. 그가 “혁명의 배신자”로서 독재자의 뜻에 반기를 든 계기는 과거 자신의 공작으로 파멸시킨 교수의 딸( 강리나 )과 우연한 조우 때문이다. 그는 그녀가 당하는 끔찍한 폭력을 밀실의 모니터로 지켜보았다. 얄팍한 죄의식을 되갚아주기 위해 놓은 이중의 덫은 황당한 비약이지만, 파리에서 김희라가 요원들에게 붙잡히는 순간에 강리나의 피아노 연주는 인상 깊은 장면이다. 마지막으로 “역사의 십자가”를 지겠다는 독재자 면전에 “누가 당신더러 십자가를 져달라고 했습니까?” 일갈한 친구의 처형을 목격한 현 보안부 장관( 신성일 )은 총구를 돌릴 대상이 누구인지 깨닫는다. 10.26을 다룬 작품 중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영화일 < 그때 그사람들 >(2005)은 “이 영화는 역사의 한 사건을 모티브로 한 상상력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세부사항과 등장인물의 심리묘사는 모두 픽션입니다.”라는 자막으로 시작한다. 개인적으로 임상수 감독의 필모그래피에서는 물론이고, 한국영화 르네상스 시기에 나온 영화들 중 단일 작품의 완성도에 있어 정점에 도달한 영화라는 생각이다. 이 블랙 코미디는 이 글에서 다루는 10.26 소재의 작품 중 가장 희극적이지만, 의외로 객관적이고, 아마도 사실에 가장 근접한 해석이란 느낌을 준다. 무엇보다도, 한국 영화는 이 작품 이후 정치적인 소재를 놓고서 대범하게 낄낄거려본 적이 없다. 대책 없이 저질러진 거사는 예정된 실패를 향한다. 영화는 권력자와 2인자들 사이 암투보다는 그들 바로 아래의 하수인과 관련자들에게 집중한다. 엄한 시간 엄한 장소에 있었던 실무자들과 두 여인의 비애가 있다. 압권은 오프닝에서 “어르신”의 성은을 입은 딸의 몸값을 셈하러 왔던 극중 명칭 ‘철없는 엄마( 윤여정 )’의 내레이션으로 마무리되는 에필로그 속 그들의 말로다. 저 철딱서니 없는 작자들이 한 짓들 보라는 식의 말투로, 관객의 입장에서 이 황당무계한 사건에 대해 진심으로 실소한다. 취조실에서 얻어맞는 정보부장에겐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담은 저 사내의 법정 최후 진술은 감동적이기까지 하다는 설이 있습니다. 글쎄, 관심 있는 분은 찾아서 읽어보시도록!” 이렇게 말하고 끝이다. 어르신의 실제 장례 영상이 나오는 엔드 크레딧에서 오열하는 시민들까지 보면 관객의 실소는 웃다 못해 울고 싶은 기분으로 변한다. 공교롭게도 현 시점에서 코로나 직전의 마지막 극장 흥행작이 되어버린 < 남산의 부장들 >( 우민호 , 2019)은 앞의 영화에서 관심 있거든 찾아보라고 한 그의 진술을 마지막 장면에 실제 음성으로 들려준다. 먼저 나는 이 영화가 김충식의 논픽션이 바탕임에도 불구하고 등장인물을 실명으로 하지 않은 것에 실망했다. 이럴 거면 원작을 굳이 내세울 필요가 있었을까? 누구나 아는 그들의 이름을 이 시대에까지 볼드모트 취급을 해줘야 하나? 글 서두에서 장황하게 떠든 만큼, 충분히 이해하지만 아쉬운 대목이었다. 겁쟁이들은 용감한 자가 먼저 간 길을 따라 가고 싶으니까. “이 영화는 1979년 대통령 암살 사건을 바탕으로 사건이 일어나기 전 40일을 재구성한 이야기입니다. (…) [남산의 부장들]을 바탕으로 실제 사건에 기초했으나, 일부 설정은 영화적 상상력을 가미한 픽션임을 밝힙니다.” 나는 이런 자막으로 시작한 영화가 결말에서 굳이 실명의 인물들을 보여주며 끝내는 것이 영화적으로 옳은지 고민했다. 보안사령관의 수사 발표와 중앙정보부장의 최후 진술은 군더더기인가 아닌가? 논픽션을 바탕으로 한 픽션이 끝에 가선 픽션 밖의 사실을 갈구한다. 어떻게든 사건의 의미를 찾으려는 발버둥처럼. 그러나 결국 이것도 영화가 선택한 해석으로서의 사실일 뿐이다. 결국 받아들이는 건 관객의 마음이다. 누구는 왜곡이라 할 것이고 누구는 정론이라 할 것이다. 정치적일 수밖에 없는 소재를 다루는 영화는 어느 쪽이든 선택을 하지 않는 게 더 나쁘다. 선택을 안 하는 류의 패착을 나는 오히려 완전 픽션인 < 인랑 >( 김지운 , 2018)에서 보았다. <남산의 부장들>은 연출자의 선택이 분명한 영화다. 그날 밤에 각하에게 총을 쏜 부장은 적어도 혁명과 민주주의를 나름대로 고민했다고 보는 믿음이다. 야간에 허가 없이 누구도 통행하지 못하는 불 꺼진 세계 속, 야근하는 부하를 불쑥 찾아와 손수 술을 따라주는 상관( 이성민 )이 살갑게 속삭인다. “임자 옆에는 내가 있잖아. 임자 하고 싶은 대로 해.” 손 안대고 코 풀기의 미학. 영화는 가장 야비한 용인술로서 권력자의 레토릭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보여준다. 클라이맥스에서 조명이 꺼지고 권총을 바꾸러 내려간 부장( 이병헌 )이 돌아와 거사를 마치고, 흥건한 피에 미끄러진 다음 일어나 안가 밖으로 나갈 때까지 롱테이크로 찍어낸 장면은 연기와 연출과 기술이 합쳐진 한국 영화의 밀도가 지금 어느 정도의 수준에 왔는지 가늠하게 한다. 마지막으로 이 영화는 그래서 10.26으로 야기된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분명하게 집어주는 미덕이 있다. 나라를 훔친 새로운 도둑. 거의 사이코패스처럼 묘사된 보안사령관( 서현우 )이 어둠 속에 나타나 씬을 훔치고 나라를 훔치는 장면은 섬뜩하다. 10.26을 다룬 이들 세 편의 영화는 거의 10년 주기마다 나온 셈인데, 나는 개인적으로 10.26 소재 영화를 계속해서, 가능하다면 매년 보고 싶은 마음이다. 온갖 연출자와 작가와 배우들이 이 사건을 끊임없이 자유롭게 해석하고 표현해줬으면 좋겠다. 전 배역이 여배우들로만 이루어진 10.26은 나만 보고 싶은가? 완전히 작정하고 아이돌 주연의 BL로 만든 10.26은 어떤가? 가상 독재국가의 근미래 SF로 옮겨 외국 배우들이 연기하는 10.26도 재미있지 않을까? 그날 밤의 진실은 여전히 아무도 모른다. 현실은 아마도 그 어떤 작품의 묘사보다 훨씬 더 엉망진창이고 속수무책이었을 것이다. 역사의 활발한 해석은 역설적으로 끊임없는 진실을 요구한다. 10.26 사건은 근대사가 우리에게 준 한국 고유의 원천 스토리 콘텐츠다. 셰익스피어가 부럽지 않은 비극과 희극의 절묘한 조합이 여기 있다. 반인반신이었던 국가 원수가 총 맞아 죽는 이야기는 전 세계 관객 대상으로 전혀 부끄럽지 않다. 인류 보편적으로 재미있고 유익하며 교훈이 넘친다. 이미 죽은 자의 추종자들과 아직 살아서 침묵하길 원하는 자들은 실제 역사와 인물을 바탕으로 한 영화 만들기를 계속 어렵게 만들 것이다. 현실을 바탕으로 한 창작의 자유는 국가가 보안 아니 보호해주어야 옳다. 권력자들의 압제 아래 엄혹한 세월을 피와 눈물로 버텨온 피해당사자이자 그 후손으로서, 우리는 이런 이야기들을 계속 보고 즐길 자격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