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로영화 전성시대
- 감독
- 한동호
- 제작년도
- 2007
이야기의 심장 복제가 아니라 배신이다. < 하트 >(2019)는 정가영 다운 어떤 것을 반복하는 영화가 아니라, 정가영에게 기대되는 것을 배반하는 영화다. 정가영의 영화에서 대화는 늘 중요했으며, 정가영의 도발성은 대부분 말에서 비롯되었다. <하트>에서 말은 전작과는 다른 양상을 보인다. 말의 내용은 정가영답지만, 그 밀도는 떨어지고 이야기가 등장하는 자리는 뜬금없다. 당혹감은 잠시 접어두고 영화를 들여다보자. 전작과는 달리 이 작품만은 말의 내용에 집착할수록 영화에 대한 이해와 멀어지고 유부남 이야기의 반복이라는 섣부른 결론에 이르고 만다. 정가영 감독은 종종 사운드 없이 화면만 보거나 반대로 사운드만 들으며 영화를 연구한다고 말해왔다. 그의 말을 힌트 삼아 우리를 지나치게 옭아매는 ‘유부남을 사랑하는 이야기’라는 사운드를 잠시 줄여 보자. 대화의 공백 사이로 보이는 것은 무엇인가. 가영(정가영)과 성범( 이석형 )의 초반 미술학원 대화 장면은 크게 네 종류의 숏으로 운용된다. 가영이 앉은 2인용 소파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숏을 기본으로 1인용 의자에 앉아 가영의 말에 반응하는 성범의 얼굴 클로즈업 숏을 함께 가져가되, 이들에게서 멀찍이 떨어진 채 관찰하는 듯한 롱숏과 초상화, 조각상 등의 인서트가 첨가된다. 롱숏은 성범 어머니의 죽음이 언급되는 장면에서 처음 등장하기에, 제삼자의 시선 혹은 죽음과 관련된 숏처럼 보인다. 그런데 여기에서 이질적인 숏 하나가 추가된다. 가영과 성범이 키스를 나누는 순간, 카메라는 소파 뒤쪽에서 이들을 비춘다. 원래 소파는 벽과 붙어 있어 어떻게 봐도 촬영이 가능한 장소가 아니다. 단지 ‘좋은 그림’을 위한 시도였다고 넘어가기에는 어딘가 꺼림칙하다. 감독은 왜 불가능한 숏을 굳이 집어넣은 것일까. 정가영의 영화는 늘 감독 정가영과 배우 정가영의 분리와 교통을 자신의 동력으로 삼아왔다. 외부의 시선을 감독의 시선으로 해석하는 것이 비교적 수월했던 전작과는 달리, <하트>에서 시선의 주인 자리는 비어 있다. 시선의 주체가 불명확해진 것은 무엇보다 카메라 앞에 선 배우 가영 캐릭터의 변화에서 비롯된다. 가영이 대화를 이끌어가는 주체로서 장면을 장악했던 전작과 달리, 이번 작품에서 가영은 제 발로 성범을 찾아오긴 했으나 이전처럼 그의 마음을 떠보며 ‘자자’고 매달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말로 고민을 상담하러 온 사람 같다. 다른 유부남에게 연정을 품은 가영은 ‘그 사람이 생각날 것 같아’서 술도 거부하고 있으며, 키스 직전 관계의 향방을 가른 결정적인 말(“나는 너 이제 보호 안 한다”)을 성범에게 넘겨주고 있기도 하다. 전작에도 충분히 제기될만한 ‘자기 복제’라는 혹평이 유독 <하트>에 쏟아진 이유는 이전까지 유희의 도구에 가까워 보였던 금기의 사랑 이야기를 감독이 진심처럼 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애인이 있는 남자를 사랑하던 이전의 이야기는 촘촘하게 짜인 대화의 맛을 따라 농담처럼 즐기면 그만이었지만, 이번에는 그 느슨함으로 인해 이야기에 거리를 두고 판단할 여지가 마련된다. 이제 관객은 가영의 관계에도, 가영의 영화에도 가혹해질 수 있다. 재기발랄한 캐릭터가 채도를 낮춘 사이, 존재감을 드러내는 건 뒤엉킨 시간이다. 감독 정가영이 배우 제섭(최태환)과 미팅하는 장면 이전에도 가영의 시간은 이미 교란되고 있었다. 성범과 가영이 술을 사러 편의점을 오가는 밤 장면 도중 가영이 무인도에 사는 100명의 남녀에 관해 이야기하는 미술학원 시퀀스의 자리는 특히 이상하다. 편의점에 다녀온 가영과 성범의 대화처럼 보이지만,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다. 카메라는 내내 가영만을 비추고 있기에 가영이 대화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특정할 수 없다. 성범일 확률이 높지만, 목소리만으로 판단하기 어렵다. 게다가 대화할 때 가영의 시선이 향하는 곳은 성범이 있던 자리가 아닌 정면을 향한다. 다음 시퀀스에서 맥주 캔이 든 봉지를 들고 계단을 오르는 가영과 성범의 모습이 뒤늦게 등장하므로, 이야기는 자신의 자리가 아닌 곳에 마치 유령처럼 도착한 것 같다. 숏의 자리를 뒤섞고 이를 이어지는 것으로 착각하게 만들면서 감독은 애초에 자신의 이야기가 어딘가 부자연스럽고 이상한 이야기가 되기를 바란 것은 아닐까. 클리셰적인 장르 전환 장면에서 실제와 허상 사이에 놓인 가영의 상태가 상징적으로 드러내듯, 감독은 이야기를 반쯤은 얼빠진 소요처럼 만들어보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상한 이야기는 결국 마지막 장면의 산뜻한 반전을 예비해 둔다. 감독의 세계를 비판적인 입장에서 바라보는 제섭을 상대하느라 내내 진땀을 뺀 가영은 그와의 마지막 만남에서야 그답게 “한 번만 안아주고 가면 안 돼요?”라며 양팔을 벌린다. 제섭은 포옹 대신 가영의 왼쪽 가슴을 느닷없이 툭 하고 치고는 떠나는데 그 순간의 파장은 꽤 오래간다. 깜짝 놀라 자신의 왼쪽 가슴에 두 손을 포개놓은 채 당황스러워하는 가영의 모습은 이상하게도 그 순간 고대하던 심장을 얻게 된 누군가처럼 보인다. 그와 함께 유령의 소요처럼 보였던 이야기도 심장을 장착한 채 다시 시작될 준비를 한다. 그러나 그 즉시 이야기는 끝나버리고, 두 사람이 각자의 방향으로 흩어진 뒤 남은 것은 속절없이 물을 뿜는 분수대뿐이다. < 밤치기 >(2017)에서 가영이 들려준 바 있던 결말이 없는 영화로서의 ‘최고의 결말’은 이렇게 실현된 것도 같다. 모두가 떠나간 자리에 남은 이 황망한 마음을 어찌할 것인가.
조용한 기사 “처음 그를 보았을 때 그는 매우 점잖고 조용한 사람이었어요. 매력적이었지만 눈에 띄지 않는 스타일이었습니다. 이런 의구심이 들더군요. 그가 과연 이 스태프들을 지휘할 수 있을까?“ 배우 가브리엘 번이 켄 로치를 처음 만난 건 1987년에 상연될 예정이었던 연극 <퍼디션>의 리허설 현장이었다. 주로 올리버 스톤처럼 패기와 카리스마 넘치는 감독들과 함께했던 그에게 켄 로치는 감독의 역량이 의심스러울 정도로 차분하고 조용했다. 그러나 그에 대한 인상이 ‘경이로움’으로 바뀌게 된 건 연극 <퍼디션>이 논란에 휩싸이면서부터였다. 켄 로치와 오랫동안 함께 작업했던 사회주의 극작가 짐 알렌의 대본을 바탕으로 연출된 이 작품은 유대인 시오니스트 지도부가 나치의 아이히만과 협력 관계였음을 폭로하고 논쟁하는 재판에 관한 내용이었다. 그러나 연극이 무대에 오르기도 전부터 언론과 예술계 일각에서는 켄 로치와 짐 알렌을 반유대주의자로 몰아세우기 시작했고 작품의 정치성을 문제 삼았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제작자와 극장 측은 첫 공연을 불과 30여 시간 앞둔 상황에서 제작 철회를 선언해 버린다. 가브리엘 번이 켄 로치를 다시금 인식하게 된 것은 엄청난 비난과 여론 압박, 제작자와의 격론에 대응하는 그를 지켜보는 과정에서였다. 연극을 둘러싸고 많은 이들이 비겁한 겁쟁이가 되거나 배신자가 되었다. 결국 연극이 제작자들에 의해 철회되는 상황에 이르렀지만 켄 로치는 침착하고 조용하되 결코 굴복하지 않았다. 그는 조용한 기사와도 같았다. Versus “위대한 투사 vs 혐오스러운 영화를 만드는 감독” “리얼리즘의 대가 vs 미친 맑시스트” “천재 vs 비열한 자” 영국 사회에서 켄 로치는 언제나 논란의 대상이었다. 60년대 BBC에 입사해 방송용 드라마와 다큐멘터리를 연출하던 시기에서부터 그는 혁신가였다. 부르주아 드라마와 관습적인 세트 촬영이 관행이었던 당시 그는 BBC 내에서 유일하게 영화적인 기법(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의 정신과 방법 그리고 브레히트적인 스타일의 거리 두기와 관찰)을 방송 드라마에 적용한 감독이었다. 무엇보다도 누구도 관심두지 않았고 묘사하거나 재현하지 않았던 노동계급의 삶과 사랑, 노동과 현실을 카메라에 포착하기 시작했다. 노동계급 여성의 출산과 육아, 홈리스 문제를 다큐멘터리 적인 방식으로 극화한 <캐시 컴 홈 Cathy Come Home>(1966)은 방영과 함께 논란을 일으켰다. 영국 노동계급이 직면한 사회적인 이슈를 BBC에서 직접 화법으로 다뤘다는 사실 그 자체와 그로 인한 놀라운 시청률 및 여론은 결국 한 편의 드라마가 영국 사회의 제도와 정책에 개입하는 사태로 이어졌다. 켄 로치의 초창기 작품들을 도맡아 제작한 제작자 토니 가넷이 그를 만난 것도 이 시기 즈음이었다. 토니 가넷도 처음엔 켄 로치의 작품에 출현하는 배우였다. 가브리엘 번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토니 가넷에게도 켄 로치의 첫인상은 지루했다. “마치 은행원 같았다. 별로 인상적이지 않았다는 것이 그에 대한 첫인상이었다.” 그러나 몹시 수줍고 조용하며 겸손한 이 사람은 매번 논쟁과 파란을 일으켰고, 영국 사회의 뜨거운 감자가 되었다. 노동계급 출신이었던 켄 로치의 아버지는 명민하고 공부 잘하는 아들이 옥스퍼드 법학과를 졸업했으니 엘리트 법조인이 되길 바랐으나 그는 이미 청소년기부터 연극과 연기에 매료되어 있었다. 대학 시절부터 직접 무대에 올라 연기를 했고, 졸업 후에는 방송국 연출자로 시작해 BBC의 부르주아적 관행과 제도 그리고 영국 사회의 검열 및 보수주의와 맞서 싸워야 했다. 1979년 신자유주의의 화신, 대처가 장기 집권을 시작하면서 그는 더욱 궁지로 몰렸다. 토니 가넷 및 짐 알렌과 함께 했던 일련의 다큐멘터리들이 검열 및 정치적 편향성 논쟁에 휘말리면서 방영 금지에 처하곤 하였다. 특히 <리더십의 문제 A Question of Leadership>(1981)에서 노동자 계급을 배신한 노조 간부들의 문제를 다루면서 좌파 진영 내에서도 격렬한 토론을 벌였다. 대처가 검열을 강화하면서 BBC는 더욱 보수화되었고 그는 대처가 물러난 90년까지 제작에 어려움을 겪어야만 했다. 더구나 87년에 준비했던 연극 <퍼디션>이 제작 중단되면서 그는 암묵적 실업자가 되고 말았다. 아무도 그와 작업하려 하지 않았다. 이 시기 그는 가족을 위해 맥도날드 햄버거를 비롯한 몇 편의 상업 광고를 찍게 된다. 켄 로치는 이 시기를 “사회주의 이념에 대한 배신행위”라고 소회를 밝힌다. 그가 극영화로 복귀한 것은 대처가 물러난 90년이었다. 영국과 아일랜드의 오랜 지배 종속의 문제, 정치적 계략의 문제를 인권 변호사 주인공을 통해 풀어낸 < 숨겨진 계략 Hidden Agenda >이 칸 영화제에서 심사위원상을 받게 되지만 정작 영국 내 여론은 호의적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다시금 아일랜드 문제를 전면에 내세운 <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으로 2006년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그리고 은퇴작인 < 지미스 홀 >이 또다시 아일랜드 문제를 지배자의 관점이 아니라 피지배자의 저항과 사회주의자의 관점으로 풀어냈을 때 영국 언론은 그를 자기 조국을 증오하는 미친 맑시스트로 폄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2016년, 영국 복지제도의 허점을 다룬 < 나, 다니엘 블레이크 >가 칸 영화제에서 또다시 황금종려상을 받자 영국 보수당은 의회에서 그를 영국 사회에 먹칠하는 반역자로 몰아세우기 시작했다. 영화와 정치 그리고 켄 로치 “누군가의 삶을 영화로 만든다는 것의 핵심은 정치학입니다. 사람들의 삶의 드라마와 갈등의 핵심에는 언제나 정치가 존재합니다.” BBC에서 제작한 다큐멘터리 < 켄 로치의 삶과 영화 >(2016)는 그의 개인사와 영화 역사를 교차편집하는 방식으로 인간 켄 로치를 조명한다. 영화계 일각에서 그는 세계적인 거장으로 추앙받지만 영국 사회 내에서, 심지어 좌파 진영 내에서조차 그는 언제나 논쟁의 대상이 되어 왔다. 조국의 문제(영국인으로서 아일랜드 문제를 다루는 방식), 계급의 문제, 신자유주의와 복지제도의 문제. 그는 자신을 둘러싼 모든 논란과 논쟁을 기꺼이 감내하면서 50년이 넘는 영화 인생을 버텨왔다. 영국 미디어 연구자 존 힐은 그의 모든 작품이 논란의 대상이 된다는 그 사실 자체만으로도 영국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에 주목한다. 그러나 이 다큐멘터리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켄 로치의 작품활동과 영화 세계에 대해 이야기하지만은 않는다. 이 영화는 그의 지난한 영화적 삶 속에 공존하는 인간 켄 로치의 모습을 포착한다. 노동계급의 아들로 태어나 그 명민함으로 인해 상류층의 주된 교육기관인 옥스퍼드 법대에 진학하기까지, 젠틀하고 조용하지만 그가 어떻게 굴복하지 않고 후퇴하지 않는 고결한 사회주의 액티비스트 감독으로 존재해 왔는지, 무엇보다도 자식을 잃어본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슬픈 아버지였는지, 이 영화는 그의 오랜 동료와 가족들의 입을 빌려 들려준다. 이 작품은 켄 로치가 영화 < 나, 다니엘 블레이크 >를 연출하던 그 무렵에 촬영되기 시작하였다. 2014년작 < 지미스 홀 >로 은퇴선언을 한지 2년 만이었다. 영화 현장에 들어설 때마다 거대한 산을 넘어야 하는 압박감을 느낀다는 그가, 다시금 은퇴를 번복하고 추운 현장으로 복귀한 것이다. 제작자 토니 가넷은 그가 분노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이야기한다. 영국 사회의 신자유주의, 긴축 재정과 복지제도 축소가 영국 노동계급의 삶을 나락으로 몰아넣는 상황 속에서 그는 분노하고 있었다.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공감과 연민, 잘못된 제도와 위정자들에 대한 분노. 그것이 그를 현장으로 돌아오게 만들었다. 그와 최근 20년 동안 함께 작업해온 시나리오 작가 폴 라버티는 그를 이렇게 비유한다. “지난 50년의 영화 인생에서 그에게 가장 중요한 첫 번째 요소는 정치의 문제였다. 피상적인 문제로서가 아니라 현실의 이슈로서 그러하다. 그의 작고 마른 몸 안에서 불타오르는 열정과 에너지가 그것을 이끌었다. 그는 그 열정을 멈출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영화의 후반부, 그에게 던져진 마지막 질문.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투쟁하는 삶의 한 가운데에서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마치 무수하게 커다란 목소리들 사이에서 작은 목소리를 내는 것과 마찬가지에요. 그것이 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를 질문한다면,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 자신에게 부여된 ‘작가주의’ 타이틀을 거부하며, 영화는 집단 노동의 결실이라 말하는 그는 자신의 영화가 어떠한 성취를 해 왔는가에 대해서도 겸손하게 응답한다. 그러나 토니 가넷과 폴 라버티, 그리고 그의 가족들이 증언하는 것처럼, 그리고 무엇보다 기나긴 그의 필모그라피가 직접 보여주는 것처럼, 그는 타협하거나 멈춰서지 않으며, 굴복하지 않는다. 그의 모든 영화들 속 주인공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특히 그의 은퇴작으로 소개됐던 < 지미스 홀 >의 주인공 지미 그랄튼이 그러했던 것처럼, 가난한 노동자들을 연민하고 연대할 줄 아는 예술가이자 액티비스트인채로 말이다.
한국영화사에서 한은진 은 화려한 스타라기보다는 탄탄한 연기력을 갖춘 연기자로 기억된다. 현재까지 그의 이미지를 규정해온 것은 <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의 엄격한 시어머니나 < 연산군 >에서 억울하게 죽은 딸(폐비 윤씨)을 가슴에 묻은 한 많은 어머니, 또는 < 씨받이 >의 대갓집 마님 등에서 보듯이 주로 양반가의 위엄있는 어머니 역할이었다. 평론가 최백산은 '그녀의 얼굴에는 이상하게도 여자에게서 보기 드문 투지와 위엄이 감돌고 있다. 이 점이 시대물에서 그녀에게 대비마마의 어마어마한 배역을 주는 것이지만 ... 아무튼 그녀에게는 중후감이 있다'고 그의 이러한 면모를 평가한다.(최백산, 「영화 스타의 호적수」, 『국제영화』, 1961년 5월호, p.49) 한국영화의 전성기였던 60년대에 그는 당대 최고의 영화사 신필름의 연기실장이었고 주로 최은희 의 어머니이거나 시어머니로 분하면서 신필름 영화를 탄탄하게 받쳐온 무게있는 연기자였다. 1996년 임권택 감독의 < 축제 >에 이르기까지 60년을 헤아리는 한은진 의 연기이력은 1935년 동양극장의 연구생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어린 시절부터 영화에 매료되어 영화배우를 꿈꾸며 재개봉관을 찾아다니던 소녀 한은진은 연기를 제대로 배우기 위해서는 연극에서 연기를 닦아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1937년 홍해성 연출의 연극 <춘향전>에서 행수기생 역할로 무대에 처음 섰던 그는 곧이어 주연급 여배우로 발돋움한다. 영화에의 입문은 동아일보사 주최 연극경연대회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것이 계기가 되었는데 < 무정 >의 영화화를 위해 영채 역을 맡을 여배우를 찾고 있던 박기채 감독이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한은진 을 찾아왔던 것이다. 이백수 (형식 역), 김신재 (선형 역)와 함께 주연했던 이 영화에서 그는 신인답지 않은 힘있는 연기로 호평을 받았다. 원작자인 춘원 이광수 가 '이번이 데뷔라는 한은진양이 이 과백(科白)도 동작도 없는 영채의 역으로 그만큼 관중의 주의를 끝까지 끌고 가는 성의와 역량은 큰 장래를 약속하는 것 같사와 기쁨을 금치 못하나이다'(이광수, 「영화 <무정>으로 공개장, 감독 박기채씨에게 보내는 글」, 『삼천리』 제11권 제7호, 1939년 6월 1일자 발행)라고 평했을 정도였다. 50, 60년대의 한은진이 복혜숙 , 석금성 , 김신재, 황정순 등과 함께 한국의 어머니상을 구현해온 역량있는 연기자였다면 동양극장과 몽화선, 중앙무대 등의 극단활동과 영화배우 활동을 병행하던 30, 40년대의 한은진은 문예봉 , 김소영 , 차홍녀 , 지경순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최고의 여성 스타였다. 그는 당시 조선영화사에 전속되어 있던 단 두 명의 여배우 가운데 한 명이었는데 그와 함께 전속이었던 여배우가 당대 최고의 스타 문예봉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그의 스타성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스타로서 한은진의 활동은 연기뿐 아니라 대중문화의 영역으로까지 확대되어 1938년에는 <연애와 결혼>(김파랑 작)이라는 라디오드라마를 낭독했고(조선일보 1938년 6월 18일자) 또 신문지상의 의상 모델로 활동하기도 했다.(조선일보 1938년 1월 3일자) 한은진 본인의 회고에 의하면 팬레터도 많이 받았는데 특히 신학문을 배우는 남학생층이 주로 그의 팬이었다고 한다. 최백산이 말한 그의 '인테리성'은 가련한 여주인공 영채 역을 맡았던 당시의 연기에서도 빛을 발하고 있었던 듯하다. 연극과 영화를 병행하던 일제시대 한은진 의 연기활동은 해방 후에도 이어졌다. 그는 해방 직후에 가장 주목받았던 극영화 < 자유만세 >와 < 똘똘이의 모험 >에 연이어 출연했고 또 50년대에는 보랑이라는 극단을 창단하여 키노드라마를 공연하기도 했으며 극단 신협의 단원으로서 연극무대에도 자주 섰다. 한국전쟁으로 주춤했던 영화제작이 다시 시작된 것은 문화영화로부터였다. 전창근 (연출), 한형모 (촬영), 이형표 (각본), 이경순 (녹음), 홍은원 (스크립터) 등 전후 한국영화의 부흥을 이끌었던 영화인들이 함께 만들었던 이 시기 문화영화의 대표작 < 불사조의 언덕 >(1955)에서 한은진 은 나애심의 어머니로 출연하면서 연기생활의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이때 이후로 한은진은 젊음과 미모를 내세우는 화려한 스타의 길을 뒤로 하고 한국의 어머니가 되었던 것이다. <불사조의 언덕>에서 한은진이 맡았던 어머니 역할은 북한군에게 쫓기는 미군병사를 목숨을 걸고 구해주는 심지 굳은 여인이었는데 이것은 이후 한은진 특유의 어머니 상을 예견케 하는 것이었다. 가령 < 민며느리 >에서처럼 몰락한 양반가의 마님으로 딸을 민며느리로 보내야 하는 궁핍한 처지지만 딸이 당한 부당한 처사에 항의하는 그런 어머니 상이야말로 한은진의 페르소나가 투영된 것이었다. 자애롭고 고운 어머니 김신재 나 '매서운 눈매로 질책하는 호된 시어머니'( 주진숙 , 장미희 , 변재란 외 지음, 여성영화인사전, p.63) 석금성 등 당시 다른 여배우들이 구현한 어머니 상과 비교했을 때 한은진 의 특징은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청상과부를 며느리로 둔 시어머니였던 <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에서처럼 그는, 말하자면 전통과 근대의 갈림길에서 갈등하던 60년대 영화의 여주인공을 얽어매는 엄격한 전통을 표상하는 인물이었다. 그의 이런 면모는 한은진 최고의 열연으로 평가받았던 < 열녀문 >(1962, 신상옥 )에서의 '꼬창꼬창하게 심술만이 남았고 봉건적인 관고한 도덕관념에 사로잡힌 할머니' 연기로 이어진다. 그러나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의 엄격한 시어머니가 마음 한구석으로는, 삭이기 힘든 정열에 고뇌하는 며느리를 이해하는 것처럼 <열녀문>의 할머니도 '어덴지 휴매니즘이 깃들어 있는 듯도 한'( 최은희 , 「후배양성에 전념하는 한은진 여사」, 『국제영화』, 1963년 3월호, p.69) 복합적인 캐릭터였다. 봉건과 근대의 갈림길에서 제국주의의 침략을 경험하며 강제적인 근대화 과정을 수행해야 했던 한국인에게 전통은 일소해야 할 구악(舊惡)인 동시에 물밀 듯이 들어오는 서구적인 것으로부터 지켜야 할 우리 것이기도 했다. 가령 1954년 신상옥 의 문화영화 < 코리아 >가 그렸던 것처럼 '민족의 성웅 이순신, 신라를 중심으로 한 찬란한 불교문화, 춘향의 절개와 이몽룡의 변함없는 마음'(신영화소개 <코리아>, 동아일보, 1954년 4월 25일자 4면)은 지켜내야 할 민족의 전통이었다. 결국 전통에는 ''나쁜'' 전통과 ''좋은'' 전통이 있었던 셈인데 한은진 이 표상한 전통은 대부분 후자쪽에 가까웠다. 엄격하고 보수적인, 그리고 자신의 욕망을 따라가고자 하는 여주인공을 저지하는 현실적 장벽으로서의 시어머니에게 '어덴지' 깃들어 있는 듯도 한 '휴매니즘'이란 결국 어떻게든 지켜야 할 전통을 감성적으로 표출한 것이 아니었을까? 한은진의 어머니 상은 그렇게 버릴 수 없는 우리 것 또는 근원으로서, 당시의 우리를 구성했다. 그런 의미에서 < 로맨스 그레이 >에서 한은진 이 맡았던 젠체하는 지식인 여성은 매우 특이한 캐릭터이다. 바람난 남편 때문에 전전긍긍하는 부인네들에게 '아내가 변변치 않아 남편이 바람난 것'이라고 일장연설하던 그가, 실은 자신의 남편(김승호 분)이 첩살림을 하고 있다는 것도 모른다는 것은 일종의 조롱거리가 된다. 자신의 현실도 모른 채 온갖 지식을 나열하고 관념적인 주장만을 일삼다가 결국은 망신을 당하는 이 지식인 여성 캐릭터는, 그러나 실은 아주 복합적이다. 초반에는 마치 '양풍(洋風) 들린 신여성'에 대한 저 유서깊은 조롱처럼 보였던 그 캐릭터는 그가 남편의 부정을 알고 '맹렬한 투지'로 남편에게 달려들어 한강에 빠져죽자고 하면서 급반전한다. 한강에서의 해프닝 이후 그는 첩살림으로 패가망신할 뻔한 남편을 내치고는 과거의 위엄을 회복한다. 그리고는 슬그머니 화해를 청해오는 남편의 손을 마지못한 척 잡는 것이다. 이렇게 엎치락 뒷치락하는 가족 코미디 <로맨스 그레이>에서 급반전이 거듭되는 동적인 캐릭터를 연기한 것은 연기자 한은진의 새로운 영역인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 뒤의 연기활동을 통해 이러한 가능성이 크게 발현된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한은진은 억울하게 밀려난 ''민중전''을 어머니처럼 돌보는 상궁으로 분한 < 장희빈 > (1968, 임권택 )에서 경우 바르고 의지적이면서도 자애로운 전통적 어머니로 돌아간 듯하다. 장희빈 수하의 습격을 받은 ''민중전'' 대신 죽음을 자청하던 상궁 캐릭터는 희생적인 모성이면서 봉건적 충성관념에 충실한, 역시 지켜야 할 우리 것으로서의 좋은 전통으로 회귀한 것이었다. 그렇게 한은진이 전형적으로 구현했던 어머니 상이 당대의 대중에게 사랑받았던 것은 결국 그가 드러낸 것이 우리 자신에 대한 자긍심이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 씨받이 >의 위엄있고 카리스마 넘치는 노역에까지 일관되게 흐르는 것도 바로 이러한 자긍심이었을 것이다. 이순진(영화평론가) / 2002년 <프로필> 본 명 : 한은진 출 생 : 1918. 9. 6 서울 출생 데 뷔 : 1941년 박기채 감독 < 무정 > 수상경력 : 대종상 여우조연상(1961, 1981), KBS, MBC,부산일보사, 대구일보사 등 다수 주요작품 : <성춘향>, < 연산군 >, < 상록수 >, < 씨받이 > 등 400여 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