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웅
- 감독
- 엄우섭
- 제작년도
- 2021
얼굴 자체를 물음으로 만드는 영화적 순간들이 있다. 운동을 동결하는 프리즈 프레임처럼 무리 없이 흘러가던 기존의 판단과 감정을 괄호치고 우리가 처해 있는 상황을 섣불리 의미화 하지 않게 하는 정초(定礎)의 얼굴들. 특히 엔딩에서 인물들 간의 관계를 넘어 스크린 바깥으로 급진적으로 질문을 던지는 얼굴들 말이다. 인상 깊었던 한국영화의 그러한 순간들을 거칠게 꼽아보자면 < 반도의 봄 >(이병일, 1941), < 길소뜸 >(임권택, 1986), < 시 >, < 살인의 추억 >(봉준호, 2003) 같은 영화들을 들 수 있다. 물론 이들 얼굴-물음의 성격은 모두 다르다. 메타 영화인 <반도의 봄>은 식민지 조선에서의 영화 <춘향전> 제작기와 이성애 로맨스를 서사화한다. 이 영화는 일본이 내선일체를 강조하며 군국주의적 착취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던 시기에 제작되었다. 표면적으로는 영세한 조선 영화를 발전시키고자 하는 영화인들의 성장서사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본과 기술을 앞세운 총독부의 국책회사인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가 조선영화를 통제하기 위한 명분을 쌓는 프로파간다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영화는 그렇게 선명하지 않다. 영화는 여러 어려움과 오해에도 결국 영화를 완성시키고 애정을 확인한 두 영화인 남녀가 선진영화를 배우기 위해 일본 유학길을 떠나는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그런데 영화는 마지막 쇼트로 행복한 연인이 아닌 플랫폼에서 배웅하는 동료 영화인들의 어두운 얼굴 클로즈업을 선택한다. 식민지 조선이라는 현실에서 그들이 기차의 선로를 따라 뻗어 나갈 수 없음을, ‘발전’은 허구에 불과한 것임을, 실제로는 진퇴양난에 몰려있음을 드러내는 당혹감, 즉 픽션과 스크린을 넘어 현실의 시간성을 묻는 얼굴들이다. <길소뜸>은 1980년대 텔레비전이라는 매체와 가부장적 민족주의가 결합된 방식을 보여준다. 이 영화는 국가적 미디어 이벤트였던 ‘이산가족찾기’가 가진 이면을 보여준다. 화영(김지미)은 한국전쟁 중 잃어버린 아들과 연인을 극적으로 찾게 되고, DNA 검사로 그가 아들임을 확인받는다. 그러나 화영은 자신에게 매달리는 아들 부부를 끝내 뿌리치고 부인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차를 운전해 도로를 달리는 가운데 검사를 진행한 의사의 내레이션이 깔린다. 의사가 ‘과학’의 이름으로 민족과 가족의 가치를 설교하는 가운데 화영은 되돌아가려는 듯 차를 멈춘다. 그리고 카메라는 화영의 얼굴을 클로즈업한다. 살짝 눈시울이 불거진 얼굴은 ‘본능적 모성’이 그녀를 막은 것처럼 보이지만, 화영은 단호하게 다시 가던 길을 간다. 그녀의 행동은 민족-국가와 대중이 기대하는 얼굴을 부인하며, 부인을 재확인한다. 화영은 그로써 대중매체와 과학이 강요하는 가부장적 민족주의와 혈연주의뿐 아니라, 여성 스타를 거대서사의 반응(reaction) 스크린으로 만드는 얼굴 이미지를 이중적으로 질문한다. 한편 <살인의 추억>은 연쇄살인 사건을 담당했지만 범인을 잡지 못한 박두만(송강호) 형사가 시간이 흐른 뒤 피해자의 시체가 발견된 평화로운 논밭을 다시 찾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마지막 장면은 박두만이 카메라를 바라보는 것으로, 즉 직설적으로 스크린 너머의 현실을 응시하는 것으로 끝난다. 봉준호 감독이 인터뷰에서 종종 밝혔듯이 박두만의 얼굴-물음 쇼트는 당시에 아직 잡히지 않은 범인을 호명하는 것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면 왜 박두만의 표정은 아련하게 무언가를 추억하는 것처럼 보일까? 박두만은 그 시절을 ‘실수가 좀 있었지만 열심히 산 시절’로 추억할 수 있다. 여기서 범인과 동시에 그 얼굴을 질문받아야 하는 대상은 박두만을 비롯한 경찰 공권력 그 자체이다. 서태윤(김상경)도 처음에는 인권적이고 과학적인 수사를 도입하려 하지만 결국 대책 없고 폭력적인 박두만과 조용구(김뢰하)의 방식에 물든다. 박두만은 질문하는 얼굴인 동시에 질문 받아야 하는 얼굴이다. <시>의 얼굴-물음은 위의 영화들과는 다르다. 이 영화는 스크린 바깥에 질문을 던지기에 앞서 얼굴 자체를 물음으로 만들어 버린다. 앞에서 말한 정초의 얼굴에 가장 가깝다. 최종적으로 미자는 자신의 자리에 타자의 얼굴이 들어올 수 있도록 자신의 얼굴을 기꺼이 희생하는 급진적 선택을 한다. 양미자(윤정희)는 딸이 맡겨둔 손자 종욱(이다윗)과 함께 살고 있다. 60대의 미자는 신산한 삶을 살았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지만 여전히 소녀 같은 순수함을 지니고 있다. 꽃과 시에 진심인 미자는 어느 날 한 자신의 손자가 집단강간 가해자라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된다. <시>의 오프닝과 엔딩은 수미상관을 이룬다. 오프닝에서 카메라는 물이 흐르는 방향을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고 프레임 밖에서 들리는 아이들이 떠들며 노는 소리를 따라 카메라가 패닝한다. 강가 모래밭에서 놀던 한 아이가 하늘을 보다 물에 떠내려 온 희진(한수영)의 시체를 발견한다. 시체는 뒤집어져 있고 우리는 희진의 얼굴을 볼 수 없다. 카메라와 소녀의 시체가 서로 가까워지며 소녀의 뒤통수가 화면 안에 가득 찰 즈음 ‘시’라는 제목이 화면의 왼쪽에 떠오른다. 집단강간 피해 후 자살을 한 소녀는 ‘시’가, ‘영화’가 될 수 있을까? 더 정확히 말하면 희진이 시와 영화로 자신을 보여줄 수 있는 조건은 무얼까? 영화는 알츠하이머를 앓아 언어를 상실해 가는 미자가 그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시의 죽음, 영화의 죽음 또한 반복적으로 선언되고 있는 시대에 말이다. 이 영화는 무언가를 상실하고 죽어가는 것들의 연대를 말한다. 영화에서 ‘봄’은 시/영화 쓰기의 핵심적 실천으로 언급된다. 이 영화가 말하는 시적/영화적 봄은 김용탁(김용택) 시인이 사과를 두고 말한 것처럼, 존재(방식)에 관심을 두고 돌보며 이해하고자 하는 현상학적 봄이다. 현상학적인 봄에서는 주체와 대상이 이분법적으로 나눠져 있지 않고(나의 봄은 언제나 당신의 봄과 얽혀 있다), 관습적인 사용방식, 즉 도구화에 질문하면서 존재의 다양한 역량이 드러날 수 있게 한다. 하지만 시상이 자연스럽게 찾아오는 것이 아니듯 현상학적 봄도 쉽지 않다. 미자는 꽃을 비롯해 보기에 예쁜 것을 좋아한다. 챙이 있는 하얀색 모자에 하늘하늘한 꽃무늬가 있는 블라우스와 치마를 입고 늘 웃고 다니는 미자는 주변 사람들에게 곱고 예쁘다는 평가를 듣는다. 미자 역시 자신을 곱다고 하는 주변 사람들에 늘 “저 멋쟁이에요?” “나 예쁘다고 생각해요?”라고 되묻는다. 하지만 이들은 의미 없이 화제를 돌리기거나 자기 기준에 맞춰 에둘러 비난하기 위해 그들의 첫인상을 거리낌 없이 평가한다. 이 영화에 나오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실제로 상대방에는 관심이 없고 자기의 이익을 위해 빠르게 판단하고 도구적으로 이용한다. 손자 종욱과 함께 범죄를 저지른 아이들의 아버지들은 희진을 불쌍해 하지만 자기 아들들을 위해선 그녀의 피해를 지워버리려 하고, 희진 엄마를 쉽게 돈으로 매수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보며, 심지어는 미자에게 “같은 여자”, “혼자 손자를 돌보는 불쌍한 할머니”로서 희진 엄마에게 사정을 해보라고 한다. 공적 책임이 있는 기자와 교감조차 희진을 진정으로 대하려 하지 않고 자기들의 편익에 따라 이용한다. 간병을 받는 김노인 역시 미자를 일방적으로 자신의 욕구를 풀 성적 대상으로 본다. 그렇다고 피해자나 약자 역시 도구적 봄에서 완전히 벗어나기는 어렵다. 희진 엄마는 결국 돈을 받고 합의를 해주기로 하고 미자 역시 김노인을 협박해 돈을 받아내기 때문이다. 심지어 미자는 희진의 죽음과 울부짖는 희진 엄마를 가십거리처럼 동네 슈퍼에서 전한다. 미자가 다니는 병원 로비에선 전쟁에서 자식을 잃은 팔레스타인 엄마가 고통스럽게 인터뷰하지만 누구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미자는 정말로 왜 그렇게 아름다움을 보는 행위에 집착하는 걸까? 시 강좌에서 ‘내 인생의 아름다운 순간’을 고백하는 미자의 말에서 우리는 실마리를 포착할 수 있다. 미자는 자기 인생의 첫 번째 기억으로서 서너 살 즈음 아픈 엄마 대신 일곱 살 차이 나는 언니가 자신을 돌보며 예쁜 옷을 입혀주고 애정을 담아 돌봐줬던 순간을 기억한다. 언니의 ‘예뻐해 줌’은 존재의 첫 각인으로 남는다. 언니의 사랑은 그녀가 존재함을 감각하게 한 원초적 기억이다. 하지만 아름다움은 언제나 ‘아픈 엄마’처럼 고통과 함께 한다. 미자는 시를 쓰려고 노력하고, 알츠하이머로 언어를 잃고, 더 이상 손자라는 존재를 이해할 수 없게 되면서 관습적인 관계와 이해를 벗어던진다. 미자는 타자의 얼굴을 대면하는 것으로 실천을 시작한다. 미자의 추도식에서 액자에 담긴 희진의 사진을 훔쳐오고, 그 액자를 손자가 보도록 식탁에 놓는다. 하지만 손자는 그 얼굴을 외면하고 크게 마음 쓰지 않는다. 미자는 다른 아버지들에게 떠밀려 합의를 요구하기 위해 희진 엄마를 찾는다. 농사일을 하고 있는 희진 엄마를 찾아 떠나지만, 미자는 곧 자신의 목적을 잃고 따뜻한 햇살, 살랑대는 바람, 초록이 싱그러운 나무와 꽃들에 마음을 뺏긴다. 희진 엄마를 마주치지만 그가 누구인지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세상이 얼마나 아름답고 행복한지를 읊는다. 미자는 뒤늦게 그가 희진 엄마였음을 깨닫고 자신의 끔찍한 얼굴을 마주한다. 타자의 얼굴을 대면하기 위해선 어쩌면 자신의 끔찍한 얼굴을 봐야할지 모른다. 미자는 이후 자기에 대한 몰입에서 스스로의 얼굴을 질문하고 비우는 것으로 간다. 희진이 자살했던 다리를 찾아갔을 때 더 이상 습관처럼 적어 내려가던 아름다운 글귀들을 적지 못하고 비운 채로 남아있던 시상 노트는 미자의 얼굴이 된다. 자기를 비우고 타자의 얼굴을 위한 자리를 남겨둘 때야 원초적인 존재의 감각을 회복할 수 있다. 미자는 희진의 존재를 삭제하지 않기 위해 홀로 손자를 경찰에게 신고해 수사가 이뤄지도록 한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 드디어 수강생 중에서 유일하게 시를 쓴다. 희진의 세례명을 딴 ‘아네스의 노래’라는 제목을 가진 미자의 시는 김용탁 시인이 읽으려고 하는 제스처에서, 미자의 목소리로, 그리고 아마도 희진의 목소리로 옮겨간다. 미자의 보이스오버로 시가 낭독되는 가운데 화면은 미자가 살았던 집, 미자의 집에 온 딸, 아파트 앞의 평상과 커다란 나무, 자주 이용하던 버스와 정류장을 따라간다. 우리의 신체 중에서 유일하게 직접 볼 수 없는 부위는 얼굴이다. 눈이 포함된 얼굴은 다른 신체 부위를 직접 볼 수 있지만 스스로 얼굴을 볼 수 없다. 그렇기에 존재론적으로 얼굴은 비움이자 물음이 된다. 이 장면은 미자가 보아 온 삶의 흔적을 훑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삶-이미지의 흐름 자체가 얼굴이기도 하다. 얼굴은 고정하거나 규정하지 않을 때 타자의 얼굴을 만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할 수 있다. 타자의 얼굴이 존재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면서 미자는 시를 쓸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기에 ‘아네스의 노래’는 미자와 희진이 함께 쓴 시라 할 수 있다. 영화는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시를 미자와 희진의 목소리로 읽게 하고 그 둘의 시점으로 보는 삶의 이미지들을 연달아 보여준다. 희진의 목소리로 낭독되는 시의 중반부터는 희진이 애정 어린 눈으로 보았을 장면들이 주관적 시점으로 이어진다. 학교 운동장, 수업하는 교실, 희진의 집과 반가워하는 강아지, 버스와 경주하는 희진의 남동생, 그리고 희진의 친구들. 마침내 다리 위에 도달했을 때 카메라는 드디어 희진의 얼굴을 보여주며 스크린 너머에 있는 관객들의 얼굴을 질문한다. 당신은 희진이 존재할 수 있는 자리를 비워두고 있는가? 다시 카메라는 흐르는 강물을 거슬러 올라간다.
이미지는 오래 간다. “감독은 데뷔작의 인물에 자신을 담을 수밖에 없다.”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말일 테고, 실제로 며칠 전 한 자리에서 올해 데뷔한 감독이 하는 말을 곁에서 듣기도 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대중영화에서 인물 하나에 자신을 툭 던져놓는 정도일 것이다. 대개는 그렇다. 자기 이야기를 한답시고 조용한 인물과 소소한 가족의 이야기로 일관하는 영화에 돈을 댈 대중영화 제작자는 거의 없을 터이기 때문이다. < 작은 빛 >(2018)은 조민재 가 제작하고 연출한 작품이다. 작년 말 첫 번째 ’관객과의 대화‘에서 조민재 감독이 했던 말을 희미하게 기억할 즈음, 나는 1년이 지나 그와 다시 한 번 ’관객과의 대화‘를 가졌다. 그는 그 자리에서 <작은 빛>이 그의 자전적 이야기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냥 그의 삶이 조금 반영된 이야기일 거라고, 짐작할 즈음 그의 말을 듣게 됐다. 꼭 자전적 영화가 아니라 하더라도 평범한 인물의 평범한 삶의 풍경을 그린 독립영화를 근래 많이 보았다. 은은한 내음이 나쁘지 않지만, 자칫 향이 아예 안 나다시피 하는 심심한 영화도 여럿 있었다. 그럴 때 나는 보통 잠을 자게 된다. 영화가 만들어놓은 세계 속으로 들어가고 싶어 잠을 자는 게 아니라 영화가 잠을 자게 만든다. 좋은 일은 아니다. <작은 빛>은 그렇지 않다, 고 자신할 수는 없다. 시작부터 홀라당 빠져 끝까지 눈을 깜빡이며 보았을 나 같은 사람도 있겠지만, 어떤 관객은 의미를 찾다 슬며시 다른 세상으로 갔을지도 모른다. 조용하고 평범한 영화란 어떤 것일까? 위에 써놓은 글을 반복하자면, 보통 사람의 일상을 굴곡 없이 담아놓은 작품이 한 예가 될 것이다. 이런 경우 대개 사건이 일어나지 않거나 일어나더라도 관심을 기울일 만한 것이 못 된다. 간단하게 말해 장르성이 너무 없어 재미가 없는 영화라고 해도 되겠다. 감독을 포함해 채 열 명이 안 되는 스태프로 찍은 <작은 빛>은 분명히 그런 범주에 속한다. 그런데 평범한 것과, 평범한 것을 그리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평범한 것도 어떻게 그리느냐에 따라 전혀 다르게 보이는 법이다. <작은 빛>의 도입부에서 나는 인물의 어머니가 지내는 허름한 방을 보았다. 내 눈에 제일 박힌 건 빗물이 배 얼룩진 벽지다. 아들이 오고 딸이 찾아오지만 아무도 그 벽지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흉해서 도배하자고 말할 법도 한데 그런 대사는 나오지 않는다. 두 번째로 불안해 보인 건 벽에 허술하게 박힌 전기 코드였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바뀌지 않은 벽지보다는 나은 게, 어느 날 아들이 전기 코드에 손을 댄다. 그것도 전등에 고장이 나서야. 공장에서 성의껏 일하던 그는 의외로 섬세하게 코드를 정리하지 않는다. 대충했다고 보는 게 맞다. 대충이라도 어쨌든 정돈된 덕분에 천정의 등은 제 기능을 하고 그들은 그 아래에서 밥을 먹고 대화를 나눈다. 내 마음속 긴장은 그렇게 해소된다. 엉뚱한 사건을 만들거나 어울리지 않는 인물을 끼워 넣는 일은 <작은 빛>에 절대 없다. 위와 같은 일들이 그들을 설명하고 그들을 이해시키고 그들을 사랑하게 만든다. 감독이 그런 의도를 지녔는지, 그건 또 다른 문제다. 내게는 그랬다. 아들 진무가 엄마의 집을 찾았다. 휴가라고 둘러댔지만 거짓말이다. 그는 다니던 공장을 곧 그만둘 예정이다. 19분경, 의사가 진무의 수술을 언급한다. 잘못하면 기억을 잃어버릴 수 있으니 만반의 준비를 하라는 말도 더했다. 그가 엄마, 형, 누나, 그리고 백부의 집과 아버지의 묘를 차례로 방문하는 걸 보노라면 무언가를 정리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기억을 이유로 그는 캠코더를 들어 가족을 찍기 시작한다. ‘1. 잠든 어머니가 돌아누웠다, 2. 어머니와 조카 호선이 손바닥을 맞대며 논다. 3. 공장의 시계는 멈춰 있고 기계가 돌아간다. 4. 호선이 마당에 앉은 할머니, 삼촌, 엄마를 찍는다. 5. 형 정도가 문 앞에서 춤을 춘다. 6. 호선이 방에 앉은 할머니, 삼촌, 엄마를 찍는다. 7. 누나를 인터뷰한다. 8. 아들이 어머니를 인터뷰하고, 연결된 숏에서 어머니가 아들을 인터뷰한다. 9. 어머니가 터미널에서 아들을 배웅한다. 10. 어머니가 병실에 누운 아들을 찍다 이어 남편이 남긴 사진을 담는다.’ 조민재는 10개의 캠코더 신 바로 다음에 영화의 카메라로 캠코더 바깥의 인물을 찍어 붙여두었다. 1-1은 어머니를 향해 캠코더를 든 진무, 2-1은 잠자는 할머니와 호선, 3-1은 기계를 향해 캠코더를 든 진무, 4-1은 캠코더에 찍힌 가족을 보는 정도, 5-1은 동생이 떠난 후 정도가 보내는 시간, 6-1은 캠코더에 찍힌 가족을 보는 누나 현, 7-1은 동생이 떠난 후 현이 보내는 시간, 8-1은 방에서 잘 준비를 하는 어머니와 진무, 9-1은 아들을 배웅한 후 집으로 돌아와 고개를 숙이는 어머니, 10-1은 이듬해 여름 아버지의 묘를 이장하는 날.‘ ● 정확하게 말하면 1번에 앞서 캠코더 신이 하나 더 있다. 진무가 집으로 가는 길에 버스에서 찍은 바깥 풍경일 텐데, 조민재는 그것을 빠르게 지나가는 추상적 이미지로 만들어 오프닝 크레디트로 삼았다. 이미지의 본질이란 측면에서 캠코더 신이나 카메라 신이나 다를 건 없다. 필름으로 영화를 찍던 시절에, 캠코더로 찍은 장면을 삽입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사실 두 개의 디지털 이미지 사이에 화질이 좋고 나쁜 것 외에 차이라곤 없다. 그래서 조민재는 캠코더 신과 카메라 신 사이에 어떤 블랙 이미지도 넣지 않고 점프하듯이 넘어와 버린다. 이것을, 필름의 유령을 경험하지 않은 세대가 이미지를 이어붙이는 방식이라고 불러도 될까. 어쨌든 조민재가 캠코더 신과 카메라 신으로 짝을 짓는 방식은 그러하다. 영화적인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 영화에서, 조민재는 그것을 그들의 삶의 흐름이라 부른다. 사건을 보겠다는데 삶의 흐름으로 박자를 만든다. 그 삶 또한 보통의 영화에서 보기를 기대하는 유와 거리가 멀다. 1번에서 10번에 이르는 캠코더 신은 그야말로 진무라는 인물이 기억을 간직하기 위해 애쓰는 태도에 다름 아니다. 아픈 남자가 어쩌면 잃어버릴지 모르는 기억을 담는 행위, 조민재는 설령 당신이 그것에 관심이 없다 하더라도 그것을 자기 영화에 담아 기억하겠다고 다짐한다. 1-1에서 10-1에 이르는 카메라 신이 바로 그의 다짐이다. 인물이 바라본 것을 그는 자기 카메라로 다시 확인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일상을 살아가는 모습, 알지 못하는 시간에 대한 호기심과 질문들, 얼굴을 맞대고 말하기엔 쑥스러웠던 사연들, 혼자의 시간으로 돌아와 조용히 되돌아보는 순간들‘ 조민재는 그것이 자신에게 소중한 어떤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 것을 보여주는 것이 자신이 영화를 찍는 행위의 목적이라고 말한다. 진무의 캠코더와 조민재의 카메라가 기억하고 기록하는 행위는 영화 바깥에서 부여된 어떤 것의 도움을 받는데, 조민재는 그것을 일컬어 ’작은 빛‘이라 불렀다. 이미지를 기록하는 데 도움을 주었던 빛은 몇몇 장면에서 자신의 존재를 확연히 드러낸다. 첫 번째 순간은 8분 40초쯤, 현이 아들과 함께 어머니의 집을 방문하는 날 오전이다. 어머니의 집은 서너 층짜리 건물들에 둘러싸인 탓에 빛이 스며들기가 힘들다. 오전의 짧은 순간에 빛은 골목 사이로 어머니의 집을 방문한다. 물론 집 전체는 아니고 오른편 지붕 정도에 불과하다. 오른쪽 한켠 지붕 위로 살포시 내려앉은 따뜻한 빛. 두 번째 순간은 가족이 외출하는 때다. 부감 쇼트로 첫 번째 순간을 포착했던 것과 반대로, 두 번째 순간은 마당의 위치에서 빛을 향한 방향으로 담겼다. 11월 초겨울의 빛은 얼마나 귀한 것인가. 빛은 이제 집에서 거의 사라지려 하고, 카메라는 조금이라도 그 빛을 붙잡으려 한다. 세 번째 순간은 아들이 돌아가는 날 아침이다. 빛은 며칠 전과 마찬가지로 오른쪽 창에 살짝 걸쳐 있을 뿐이다. 빛은 더듬거리는 듯이 창을 어루만지는데 떠나는 아들과 아들을 마중하는 어머니는 그것을 보지 못한다. 네 번째 순간은 회사를 그만둔 진무가 자기 방에 누웠을 때다. 그의 방에서도 빛은 박하다. 빛은 머리 부분에만 살짝 비추는 대신 강렬하다. 눈이 부신 진무는 인상을 쓴다. 그에게 빛은 낯설다. 낯선 남자의 아이를 밴 어머니는 아들을 둔 남자를 만나 결혼을 서둘렀다. 그리고 현에 이어 진무를 낳았다. 아내와 가족에게 주먹을 휘두르던 남편은 젊어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36살인 아들을 보며 아버지보다 더 나이를 먹었다고 알려준다. 어머니나 세 오누이나 다 유복한 편은 못 된다. 힘겹게 노동을 해야 살 수 있는 형편은 어머니부터 진무까지 다 똑같다. 빛은 때때로 그들 위에서 비치지만 그들은 그것을 제대로 느낄 틈이 없다. 너무나 작고 너무나 짧은 순간만 비추기에 빛은 남의 것처럼 느껴진다. 그들의 기억에 아버지는 원수 같은 존재다. 어머니는 죽은 남편에게 욕하기를 서슴지 않는다. 수술 전, 진무는 창고에서 아버지의 카메라를 찾았다. 작동하는지 확인하려 셔터를 누르자, 플래시의 빛이 창고 밖으로 흘러나온다. 반짝, 반짝, 카메라는 세 번 빛을 발했다. 이 장면은 좀 특이한 곳에 배치되었는데, 조민재는 아버지의 묘를 이장하는 시퀀스 가운데 그것을 끼워놓았다. 빛이 외부에서 내려앉았던 것과 다르게, 이 장면에서는 작은 빛이 문틈 사이를 통해 바깥으로 발산한다. 바깥의 빛과 내부의 빛은 그렇게 서로 조응한다. 아버지의 유산인 카메라 속 묵은 필름엔 그가 기록한 옛 가족의 모습이 들어 있었다. 진무의 캠코더에 담긴 이미지를 보고 웃었던 가족들은 아버지가 남긴 사진을 보고 신기해한다. 그도 가족을 사랑했을까. 다섯 번째 순간은 이듬해 여름 즈음 아버지의 묘를 이장하는 날에 일어난다. 힘들게 아버지의 시신을 추린 뒤 어머니와 세 오누이와 손자는 산을 내려온다. 그들이 스쳐 가는 나지막한 숲 위로 빛이 내린다. 탁 트인 덕분인지 빛의 크기는 더 이상 작지 않고 한낮이 끝나 가는데도 금방 사라질 것 같지 않다. 빛은 가족 위로 쏟아져 내린다. 가족이 오른쪽에서 등장해 스크린 왼쪽 밖으로 사라질 때까지 빛은 변함없이 찬란하다. 빛은 그렇게 순환하는 삶을 축복한다.
2004년 | 컬쳐캡미디어 감독: 김호준 | 각본: 유순일 | 각색: 조중훈 김요석 | 제작: 최순식 | 촬영: 서정민 | 미술: 윤도환 | 음악: 히드라 CAST 박상민: 김래원 | 서보은: 문근영 | 보은 조부: 김인문 | 상민 부: 한진희 | 상민 모: 김혜옥 | 보은 부: 송기윤 | 보은 모: 선우은숙 | 혜원: 신세경 | 동구: 류덕환 2004년 한국영화 최고 흥행작은 무엇이었을까요? < 실미도 >( 강우석 , 2003)에 이은 두 번째 ‘천만 영화’ < 태극기 휘날리며 >( 강제규 , 2004)였습니다. 이론의 여지가 없는 1위였죠. 당시 충무로가 만들 수 있는, 아니 당시 충무로의 수준을 뛰어넘는 대단한 작품이었으니까요. 그렇다면 2위는 어떤 영화였을까요? 놀랍게도 < 어린 신부 >였습니다. 비수기인 4월 초에 개봉한 이 영화는 전국 관객 315만 명을 동원했습니다. 권상우 를 스타덤에 올린 < 말죽거리 잔혹사 >( 유하 , 2004), 정우성 손예진 의 < 내 머리 속의 지우개 >( 이재한 , 2004), 최동훈 감독의 데뷔작 < 범죄의 재구성 >(2004), 류승완 감독의 액션 판타지 < 아라한 장풍 대작전 >(2004), 원빈 신하균 의 < 우리 형 >( 안권태 , 2004), 강동원 조한선 의 < 늑대의 유혹 >( 김태균 , 2004)... 이 모든 영화들을 <어린 신부>가 제쳤고, 당시 대한민국은 ‘국민 여동생’ 문근영 신드롬으로 들끓었습니다. <어린 신부>는 24살 대학생 상민과 16살 여고생 보은의 결혼 이야기입니다. 보은의 할아버지는 꾀병을 부려, 죽기 전에 보은이 상민과 결혼하는 걸 보고 싶다고 하죠. 그렇게 ‘어린 신부’는 탄생합니다. 촬영 공개는 바로 그 결혼식 신이었습니다. 촬영이 공개된 날은 2003년 12월 17일이었습니다. 청담동에 있는 어느 결혼식장이었는데요, 날씨가 엄청 추웠습니다. 배우들은 촬영이 없을 땐 추위를 막기 위해 두꺼운 옷을 입어야 했죠. \ 현장에서 짬이 날 때 전화 통화를 하는 문근영의 모습입니다. 당시 문근영은 실제로 극중 나이와 같은 16세였고, <어린 신부>의 리얼리티는 배우와 캐릭터의 연령대 일치에서 생겨난 셈입니다. 김래원도 캐릭터와 같은 연령대였고요. 문근영이 주로 부각되었지만, <어린 신부>가 성공할 수 있었던 토대엔 분명 김래원의 자연스러운 연기가 있습니다. 당시 TV 드라마 <옥탑방 고양이>로 승승장구 하던 김래원은 <어린 신부>로 로맨틱 코미디 장르의 남자 주인공으로서 확고하게 자리를 굳히게 되죠. 신부 입장을 기다리는 문근영의 모습입니다. 영화 속에서 하객들이 “예쁘다, 정말 예쁘다”라며 감탄하던 그 장면이죠. 당시 문근영은 TV에서 영화로 옮겨 오면서 < 장화, 홍련 >( 김지운 , 2003)으로 영화배우로서 자리를 굳히던 시절이죠. 그리고 <어린 신부>가 이어집니다. 사실 <장화, 홍련>의 수연과 <어린 신부>의 보은은, 극과 극의 감정을 필요로 하는 캐릭터죠. 1년 사이에 그 극단을 오가는 건 10대 중반의 배우에겐 결코 쉽지 않았을 텐데요, 문근영은…… 그 어려운 걸 해냅니다. 이 영화의 모든 사건은 바로 보은의 할아버지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김인문 선생님의 모습입니다. 특유의 구수하면서도 정다운 연기가 이 영화에서도 관객들의 마음을 포근하게 만들었죠. 이 영화에서 양가 부모 캐릭터는, 주로 TV에서 활동하시는 중견 연기자들이 맡았습니다. 상민의 아버지는 한진희 씨, 어머니는 김혜옥 씨가 맡았습니다. 곧 있으면 신혼 여행을 떠날 아들에게 아버지로서 충고를 하지만, 아들은 듣는 둥 마는 둥이네요. 보은의 엄마 역은 선우은숙 씨가 맡았습니다. 아직 어린 딸이 안쓰럽기만 한 표정입니다. 대신 상민의 엄마는 며느리가 너무나 사랑스럽습니다. <어린 신부>는 김호준 감독의 데뷔작입니다. 일본에서 영화를 전공한 김 감독은 1990년대 초부터 충무로 연출부 생활을 했습니다. 임권택 감독의 < 축제 >(1996), 이정국 감독의 < 편지 >(1997) 등을 거쳐 10여 년의 도제 시스템 끝에 자신의 첫 영화를 만들게 되었죠. 한편 카메라는 베테랑 중의 베테랑인 서정민 촬영감독이 잡았습니다. 지난 번 < 몽정기 >( 정초신 , 20002) 포스팅 에서 자세히 설명 드렸던, 바로 그 분입니다. 촬영 당시 70세셨고, 2015년에 8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영화 속에서 결혼식은 보은의 수학여행 날에 치러집니다. 그래서 친구들은 보은의 결혼 사실을 모르죠. 단, ‘베프’인 혜원은 예외였는데요, 당시 14세였던 신세경이 역할을 맡았습니다. 이 영화에서 문근영보다 어린 유일한 배우? 당시 두 사람은 같은 소속사(나무 액터스)였는데요, 지금도 그곳에 함께 있네요. 상민의 선배인 지수 역은 김보경 이 맡았습니다. < 친구 >( 곽경택 , 2001)의 진숙 역으로 떠오른 그녀는 이 영화에 특별 출연을 했습니다. 결혼식이 끝나고 양가 부모가 딸과 아들을, 며느리와 사위를, 배웅합니다. 보은 아빠 역은 탤런트 송기윤 씨가 맡았습니다. 선우은숙 씨 옆에 보은의 동생 동구 역을 맡은 류덕환이 보이네요. 실제로는 문근영보다 한 살 많은 오빠지만 영화에선 동생으로 등장했습니다. 아담한 웨딩 카. 그리고 그 안의 신혼 부부입니다. 실제 촬영 때는 아니고 차 안에서 대기하는 모습입니다. 결혼식 신에 대해, 김래원은 “겉으로는 행복해 보이지만, 사실은 무거운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다. 그런 점에서 아쉬움이 많이 남는 신”이라고 말합니다. 한편 문근영은 “어떤 마음으로 연기를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해 걱정을 많이 했는데 “의외로 편하게 촬영한 신”이라고 말합니다. 호기심 많은 성격인 보은이 ‘결혼 그 자체’만 생각하고 있다는 설정이었다고 하네요. 이미지 디지털화 지원 NAV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