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백두산 화산 폭발!
- 제작년도
- 2010
한국영상자료원은 2006년 2월 2일,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 KMDb’를 오픈했다. 그리고 오늘 2026년 2월 2일. KMDb는 20주년을 맞이한다. 우리는 KMDb를 기획·구축하며 이름을 무엇으로 할까, 한참 고민했다. 누군가 ‘무비씨’라는 이름을 제안한 적이 있다는 것은 기억나고, 그러나 아무래도 어딘가를 따라 한 것 같지만 그 이상의 이름은 없다고 판단해 KMDb로 지었다. 그리고 한국영상자료원은 kmdb.or.kr 도메인을 구매했다. KMDb에는 20년간 생겼다 없어진 콘텐츠와 기능이 많다. 초기에는 사용자가 직접 정보를 입력하는 기능도 상당했으나 생각보다 양질의 정보가 들어오지 않았고 무엇보다 관리가 어려워 하나둘 폐기하기 시작했다. 애니메이션과 독립영화 전용 KMDb를 따로 만들었을 때도 있었다. 지금은 모두 통합된 상태에서 최대한 간결한 기능과 콘텐츠로 운영하는 중이다. KMDb를 준비하며 호기롭게 “풀 크레딧을 가지고 갑시다!”라는 (제안을 내가 한 것 같고 그래서) 고생문이 활짝 열린 정책을 시작하며 힘들기도 하고, 하지만 그로 인해 어디에도 없는 데이터를 보유하게 된 KMDb는 영화·영화인 DB 서비스뿐 아니라 VOD로 한국고전영화 스트리밍을 시작했고, 영화글로 다양한 필자의 글을 소개했으며 리스트와 컬렉션이 순차적으로 오픈해 지금에 이르렀다. 2006년 2월 1일. 오픈 전날 디지털정보화팀의 담당 세 명은 그제야 동명이인에 대한 이슈를 발견하는 사고를 친다. 비슷비슷한 나이의 정유미 배우가 하나가 아니고 무려 세 명이래! 라는 비명을 한밤중에 지르며 당시만 해도 30대 초반이었던 그들은 할 수 있는 데까지 인물을 분리하며 밤을 지새다 퇴근해 다음 날 오픈시켰다. 그리고 그 동명이인 이슈는 지금까지도 완전하지 않다. 완전할 수가 없다. IMDb도 어쩔 수 없다며 고개를 젓는 이슈를 KMDb 라고 별수 있겠는가. IMDb 매니저는 이름이 짧은 한국 인명으로 동명이인에 대한 고충이 더 심하겠다며 나를 위로했다. 성명이 “정유미”인 배우 3인에 대한 KMDb 영화인 정보 KMDb는 영화·영화인 데이터의 완벽함을 사수하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며, 이제는 영화인이 자신의 필모를 증빙하기 위한 웹사이트로 그 공신력을 인정받고 있다. 그렇게 20년이 흘렀다. 그러다 보니 문득 KMDb에 쌓인 데이터가 어떤 모양새인지 궁금해졌다. 혹시 사용자들도 궁금해할까? KMDb 20주년 이벤트를 근사하게 할 수는 없겠지만, 데이터로 가득한 사이트의 20년 묵은 통계를 소개하는 것이 가장 어울리는 축하가 아닐까 생각했다. 별다른 코멘트 없이 지난 20년의 통계 10선을 소개한다. 1. KMDb에 등록된 한국영화(극·비극) 의 수: 50,787편 2. KMDb에 등록된 한국영화인 의 수: 83,279명 3. 가장 많이 접근된 영화인 페이지 정윤희(1위), 임권택(2위), 신성일(3위) / 사진: 전승열, 정기성 1위 | 정윤희 2위 | 임권택 3위 | 신성일 4위 | 김기영 5위 | 이상사 6위 | 김지미 7위 | 박노식 8위 | 김진규 9위 | 신상옥 10위 | 안성기 4. 작품 리스트(필모그라피) 가 가장 많은 영화인 1위 | 현동춘 | 편집 | 994편 2위 | 김희수 | 편집 | 863편 3위 | 최형래 | 음향효과 | 850편 4위 | 손인호 | 음향효과 | 793편 5위 | 김기범 | 배우 | 753편 6위 | 허장강 | 배우 | 687편 7위 | 임해림 | 배우 | 660편 8위 | 김재경 | 음향효과 | 657편 9위 | 윤일주 | 배우 | 650편 10위 | 최남현 | 배우 | 609편 5. 한 작품(장편영화)에 가장 많은 크레딧 을 올린 영화인 1위 | 노영석 | THE 자연인 (노영석, 2023) | 17개 공동 2위 | 박용철 | 싸이더:애,심 (박용철, 2019) | 16개 공동 2위 | 준오 | 휴게소 (준오, 2016) | 16개 ※ 노영석 감독은 <THE 자연인>에서 감독, 각본, 출연, 프로듀서, 촬영, 조명, 편집, 음악, 미술, 의상, 동시녹음, 사운드(음향), 시각효과, 색보정, 예고편, 포스터, 기타스탭(캘리그라피)을 담당함. 6. 참여 스태프 가 가장 많은 영화 <한산: 용의 출현>(1위) 1위 | 한산: 용의 출현 (김한민, 2022) | 1,665명 2위 | 백두산 (이해준, 김병서, 2019) | 1,612명 3위 | 안시성 (김광식, 2018) | 1,502명 4위 | 미스터 고 (김용화, 2013) | 1,492명 5위 | 신과 함께–죄와 벌 (김용화, 2017) | 1,487명 7. 상 을 가장 많이 받은 영화 1위 | 기생충 (봉준호, 2019) | 58회 2위 | 헤어질 결심 (박찬욱, 2022) | 45회 3위 | 추격자 (나홍진, 2007) | 41회 4위 | 올드보이 (박찬욱, 2003) | 40회 공동 5위 | 괴물 (봉준호, 2006) | 31회 공동 5위 | 벌새 (김보라, 2018) | 31회 ※ KMDb에서 관리하는 영화제·시상식에 한함 8. 리스트에서 본 영화로 가장 많이 체크된 작품 <올드보이>(1위), <괴물>(2위), <기생충>(3위) / 사진: 디씨어터 1위 | 올드보이 (박찬욱, 2003) | 2,581명 2위 | 괴물 (봉준호, 2006) | 2,355명 3위 | 기생충 (봉준호, 2019) | 2,178명 4위 | 살인의 추억 (봉준호, 2003) | 2,055명 5위 |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미야자키 하야오, 2001) | 1,672명 6위 | 아가씨 (박찬욱, 2016) | 1,648명 7위 | 공동경비구역 J.S.A. (박찬욱, 2000) | 1,574명 8위 | 마더 (봉준호, 2009) | 1,533명 9위 | 헤어질 결심 (박찬욱, 2022) | 1,515명 10위 | 8월의 크리스마스 (허진호, 1998) | 1,438명 ※ 박찬욱 감독 작품 4편, 봉준호 감독 작품 4편 9. 리스트에 본 영화 체크를 가장 많이 한 사용자 1위 | bo**** | 2,076편 2위 | ha**** | 1,865편 3위 | gs**** | 1,747편 4위 | ba**** | 1,696편 5위 | in**** | 1,636편 ※ ****는 ID의 글자 수와 일치하지 않음. 10. 가장 많은 조회수의 영화글 1위 | “ [시네필 안내서]서문: 시네필의 세계로 들어서고 싶은 당신에게 ” (영화천국 Vol.48) | 정성일 | 91,634회 사실 진정한 20주년 이벤트라면 올해 KMDb가 전면 개편된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득하지만 어찌 됐든 2026년 말 새로운 KMDb가 문을 열 것이다. 오랜 KMDb 관여자로서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뭐냐고 묻는다면, 20년이 지난 이젠 누구나 KMDb를 KMDb(b를 소문자)로 써주길 바란다는 것 정도. 소박한 바람으로 글을 마친다.
사진: 서울역사박물관," 우미관(1937) ", 서울역사아카이브 다시 만난 세계: 식민지 조선의 극장문화 이야기 한국영상자료원에서 발간하는 『신문기사로 본 조선영화』 시리즈를 바탕으로 역사의 지층 속에 묻혀 있던 이야기와 행간 속에 숨겨진 욕망들을 재조명합니다. 한성의 상설 실내극장은 대한제국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출현하기 시작했으며 여러 극장이 어우러져 극장가를 형성하게 되었다. 1902년에 건립된 희대 는 여론의 추이에 따라 우여곡절을 겪던 와중에 폐관과 재개관을 반복하다가, 1908년부터는 원각사로 이름을 바꿔 운영되었다. 별도의 극장명 없이 활동사진을 영사해 왔던 동대문의 한성전기회사 창고 건물은 1907년부터 광무대 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또한 같은 해에는 종로대로를 축선으로 삼아 장안사, 단성사 , 연흥사 가 신설되었으며, 새문 밖에서는 프랑스인 마전(馬田, martin)이 운영한 마전활동사진관 이 영업을 개시했다. 다만, 이들 극장이 본격적인 영화 상설관으로 운영되지는 않았다. 영화가 간헐적으로 상영되기는 했지만 비중이 높다고 보기는 어려웠으며, 상영물은 대개 단편적인 활동사진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극장 프로그램에서 보다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은 전통연희와 가무, 신파극 등이었다. ‘활동사진관’이라는 명칭을 내세웠던 마전활동사진관 역시 명창들의 공연을 병행했다는 점에서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원각사 극장 전경 본격적인 영화 상설관은 일본의 자본력이 동원되면서 출현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경술국치와 함께 한성이 경성으로 바뀌는 시기와 맞물려 일어난 변화였다. 1910년에는 경성고등연예관이 영업을 개시했고, 이후 황금관 , 대정관, 유락관, 제2대정관 이 개관하면서 새로운 극장가를 형성했다. 이상의 극장들은 핵심 소구 대상으로 상정했던 재조선 일본인의 거주지인 남촌 부근에 터를 잡고 있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소수였던 일본인들만으로는 충분한 수익을 기대하기 어려웠기에 남촌의 극장들은 조선인들의 출입을 굳이 막을 이유가 없었고, 영화에 매혹된 조선인들 역시 새로운 사진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접할 때마다 남촌의 극장을 드나들었다. 결과적으로 1910년대의 극장가는 종족 혼합적 공간 의 성격을 띠게 되었던 셈이다. 본디 극장은 입장료에 대한 지불능력만을 최소한의 문턱으로 삼는 곳이며, 수익을 보장해 줄 수만 있다면 어떠한 관객이라도 환영하지 않을 이유가 없는 곳이다. 다만, 경술국치 이후 식민지의 백성으로 전락한 조선인들은 일본인들에 대해 적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총칼을 앞세운 무단통치의 폭력 앞에서 그러한 반감이 대대적인 저항으로 표면화되지는 않았지만, 잠재된 불만은 종종 불온한 공기를 형성해내곤 했다. 그리고 일본인과 조선인이 뒤섞여 있던 극장은 종족적 적대감을 징후적으로 노출하는 장면도 종종 연출해냈다. 이구영 은 영화사가 이영일 과 진행한 구술 채록 과정에서 영화를 매개로 종족적 대결의식 이 촉발된 사례를 다음과 같이 소개한 바 있다. (이구영) 그런데 거기서 사상적으로 충돌이 난 일이 한 번 있습니다.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그걸 이제 내가 얘기할게요. 왜 그런고 하니, 유도하고 권투하고, 시합하는 단편영화가 있었어요. 그러면 이제 서상호가 무대에 서면, 서상호는 일본놈 편으로 무대에서 박수를 치라고 가르치고 관중들은 한국 사람이 절반이니까 와~ 소리가 나고 말이죠. 그래서 권투 시합에, 거기서 큰 혼란이 일어났었어요. 그냥. [일본놈 치고 때리고 난리 나다시피 하고, 그짝 나고 말이지.] 허허허, 이럴 때 아주 골아봐라 하고 그놈이 쫓아들어오고 말이지. 허허허. (중략) 그래 가지고는 [양자측이 있겠지만] 일본 놈은 그냥 나막신 신은 채로 구르고 몇번 구르고 한바탕 야단을 치는데, 한국 사람 심리가 그거예요. 우우 소리를, 그냥 반대로 한 거죠. 우우 했죠. 그러니까 이제 서상호는 일본 사람 편들었으니까. 무대 위에서라면 유도하는 아무개가 짜끄를 이겼단 말이야. 이렇게 소리지르면... 그러다가 이제 이기는 것이 좀 나와야 될 거 아닙니까. 이제 권투가? 그 때는 관중이 우뢰 같은 박수갈채가 나오는 데야... 흐흐흐. (이영일) 아하하하하. 그래 됐군요. (이구영) 그래서 그거 사상적으로 큰 문제가 벌어져서, 그게 중단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야단친 일이 있었어요. - 한국예술연구소 편, 『이영일의 한국영화사를 위한 증언록 - 김성춘, 복혜숙, 이구영』 , 소도, 2003, 195쪽. 이구영은 영화 < 쌍옥루 >(1925)로 첫 영화를 발표한 이래 < 낙화유수 >(1927), < 승방비곡 >(1930) 등을 연출한 감독이었으며, 1920년대의 대표적 영화평론가로 활동한 바 있다. 또한 단성사 선전부장으로 재직한 이력도 갖추고 있었으므로 초창기 영화가의 분위기에 대해 풍부한 식견을 가진 인물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변사 서상호가 경성고등연예관에서 활동했던 시기에 대해 회고하면서 영화 상영이 종족 간의 패싸움으로 비화된 사건이 있었다고 밝혔다. 일본 유도선수와 서양 권투선수가 맞붙는 짧은 영화가 상영되었는데, 해설을 맡은 서상호는 일본 선수에 대한 응원을 유도했지만, 일본인 관객들의 호응과 달리 조선인 관객들은 야유를 보냈으며, 외려 서양 권투선수가 활약할 때 박수갈채를 보냈다는 것이다. 결국 일본인 관객들과 조선인 관객들은 서로 욕설을 주고받고 방석과 귤껍질을 서로 집어던지며 험악한 분위기를 연출하기에 이르렀다. 경관들도 함부로 끼어들지 못할 만큼 살풍경한 분위기가 형성되었는데, 이러한 모습은 종족 혼합적 극장의 분위기가 치안의 잠재적 불안요소로 지목될 수 있음을 보여 준 국면이었다. 한편, 영화가 극장의 핵심적 프로그램으로 부상하게 되면서 북촌의 극장가 역시 이러한 변화를 민감하게 받아들였는데, 1912년에는 우미관 이 건립되어 북촌의 영화상영관으로서 특권적 지위를 누릴 수 있었다. 흥미로운 것은 우미관이 조선인 관객을 독점 하기 위해 부단히 애써 왔다는 점이다. 특히 제2대정관의 노선 전환과 관련된 맥락은 우미관의 욕망을 들여다보기 위한 단초를 제공한다. 대정관 관주는 1914년 6월에 경성고등연예관을 매수한 후 제2대정관을 운영하기 시작하는데, 특이하게도 이곳은 남촌에 소재해 있었지만 조선인 관객들을 위한 전용관을 표방하면서 김덕경, 최병룡 을 비롯한 조선인 변사도 영입한 바 있다. 그러나 제2대정관은 불과 1년도 지나지 않아 다시 일본인 전용관으로 노선 전환을 꾀한다. 아마도 입지조건상 조선인 관객들만을 유치하기에는 수익 창출이 어려웠던 사정이 개입되어 있으리라고 추정되는데, 김승구 는 이 과정에 우미관과 제2대정관의 ‘이면계약’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한 바 있다. 즉, 우미관은 대정관이 조선인 전용관을 포기하는 조건으로 매월 200원씩을 지불하기로 약속했다는 것이다. *주1 물론 이것은 북촌에 영화 상설관이 우미관 하나뿐이었을 때만 유효한 전략이었을 따름이다. 1918년에는 광무대 경영자 박승필 이 단성사를 인수한 후 영화를 본격적으로 상영하기 시작하면서 경쟁 체제가 성립되었다. 또한 1922년에 조선극장 이 건립되자 북촌 극장가의 경쟁 구도는 3파전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결국 우미관은 점차 일류 상설관으로서의 지위를 양보하고 저가 입장료 정책을 펴며 틈새시장을 공략하는 모양새를 취했는데, 1920년대 이후부터는 단성사와 조선극장의 양강 구도가 자리를 잡게 되었다. (좌) 단성사 (사진: 서울역사박물관, " 단성사(1937) ", 서울역사아카이브) / (우) 조선극장 종족적 분할을 시도한 우미관과 제2대정관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 종족이 혼재된 객석의 풍경은 종족 간의 돌발적 충돌을 야기할 수 있다는 점에서 안정적인 운영을 방해하는 요소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그런 의미에서 식민지 조선의 극장들이 점차 종족공간으로서의 성격을 강화해나가게 되었다는 점은 자연스러운 현상처럼 보인다. 유선영은 조선인들이 주로 출입했던 극장들이 일본영화가 아닌 서양영화를 주로 상영했으며, 입장료도 저렴하게 책정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일본인 전용극장들과 뚜렷한 지역적, 민족적 분할을 이룰 수 있었을 것이라 추정한 바 있다. 이와 같은 분할을 통해 조선인 극장은 식민치하에서 거의 유일하게 허용된 ‘ 종족의 공간 ’이자 ‘ 집합의 공간 ’으로 기능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극장이 스펙타클적 쾌락의 소비공간이었을 뿐만 아니라 동족 집단의 존재에 대한 확인을 통해 민족적 정체성을 위무받기 위한 공간 이었다는 해석을 내놓고 있다. *주2 더 나아가 종족공간은 지정학적으로 분할 되는 양상을 띠게 되었다. 물론, 북촌 지역에 건립된 일본인 극장들이 없던 것은 아니었지만, 점차 북촌은 조선인들의 공간이며 남촌은 일본인들의 공간이라는 심상지리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백두산이 지적한 것처럼, 조선시대에 북촌과 남촌의 경계는 기존 거류민들의 기질이나 위치(청계천)를 기준으로 구분되었지만, 식민지배 이후 경제적이고 종족적인 경계구역으로 맥락화되는 경향이 현저해지게 되었다. 즉, 북촌 은 조선인의 종족적 공간이자 개발에서 낙후된 구도심 이라는 심상적 범주로 인식되었다는 것이다. *주3 이러한 변화는 치안당국의 통제를 용이하게 만든 요인이기도 했다. 이순진 이 밝힌 바와 같이, 낙후된 북촌에 종족적 ‘게토’로서 조선인 극장가가 형성되었다는 점은 종족 간의 충돌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조건이었으며, 감시 역량을 효율적으로 활용하기에도 좋은 조건이었다. *주4 다만, 극장 내에서 이루어진 종족 간의 갈등 상황이 어디까지나 극장의 울타리 안에서 봉합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었던 것과 달리, 종족의 연대를 통해 결집된 에너지가 극장 바깥으로 확산 될 가능성은 훨씬 커지게 된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현 종로구 관철동에 위치했던 1937년 우미관 의 모습 (사진: 서울역사박물관," 우미관(1937) ", 서울역사아카이브) 둘째번 연주회를 열던 십이일 밤 우미관에는 일장 대풍파가 일어난 일이 있었는데, 그 사실을 들은즉 당일밤 아홉 시쯤 되어 무대에 섰던 이왕 다동 기생의 은희 아비가 품속에 있는 금시계를 잃어버린 소동 이 생기어 형사들은 필경 사람 많이 모인 중에서 못된 스리(소매치기)란 도적이 그리함인 줄 짐작하고 대활동을 개시하여 파하기 전에 틈틈이 나아가는 사람들을 일제히 신체 수색 을 한 바 마침내 시간이 다 되어 수백의 관객은 물결치듯 솟쳐 나아가자 준비하고 있던 형사들은 나아가는 사람마다 일일이 신체 검사를 할 때, 모든 관객들은 표 사가지고 구경왔다가 신체 검사를 당하는 것은 참으로 당치 못할 일이라 하고 호성을 지르고 풍파 를 일으키어 그대로 솟쳐 나아갔으므로 한참동안 그러한 혼란은 없었고 신체검사도 마치지 못하여서 매우 살풍경을 이루었다더라. - 한국영상자료원 편, 『 신문기사로 본 조선영화 1918-1920 』, 2009, 267쪽. 기사, “우미관의 소동”, 《매일신보》, 1919. 11. 14. 우미관에서 발생했던 경찰과 관객의 충돌은 종족공간의 파급력을 엿볼 수 있는 사례에 해당할 것이다. 금시계를 분실한 관객의 신고가 접수된 후 임석경관은 소매치기의 소행으로 짐작하고 증원을 요청했으며, 극장을 나가는 수백 명의 관객들에 대해 일일이 신체 수색을 시도하고자 했다. 그러나 관객들이 “표 사서 영화 보러 왔는데 신체검사가 가당키나 하냐”면서 강하게 항의하며 나가버리자 검사도 채 마치지 못한 상태에서 무척이나 살벌한 분위기가 연출되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관객들은 극장 안에서 행사된 공권력의 통제에 대해 공공연한 반감을 드러냈던 셈인데, 주목할 것은 이 사건이 3.1운동이 시작되었던 1919년 에 발생했다는 점이다. 전 조선 단위로 확대된 3.1운동의 여파가 남아 있던 경성에서 제국은 조심스러운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경찰의 통제가 또 다른 저항운동의 도화선 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점차 종족공간으로서의 성격을 강화해 나가게 된 조선인 극장들은 중대한 소요사태가 예견될 때마다 치안 당국의 ‘일급 감시대상’으로 지목되기에 이른다. 그렇다고 해도 극장을 무조건 폐쇄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었다. 외려 제국은 극장이 영업을 중단하게 된다면 치안에 위협 요소가 될 수 있다는 태도를 견지하고 있었다. 베르톨트 브레히트나 아우구스또 보알이 지적했던 것처럼 극장은 사회적 불만이 대규모 대중투쟁으로 번져나가지 않도록 방지하는 감정의 배출구 역할을 담당한 곳이기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 제국은 사회통제와 치안 유지를 위한 유력한 기구로 극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제국은 조선인 극장들의 영업을 허용하되, 종족의식에 기반한 폭발력을 적절히 제어 하는 기술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흥행장급흥행취체규칙”(1922)을 필두로 극장 취체규칙들이 본격적으로 입안되었던 것은 그 연장선에 놓인 조치였다. 3.1운동 이후 제국은 기존의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를 표방하게 되었던 바, 극장은 새로운 통제기술의 유효성을 확인하기 위한 유력한 시험대와도 같았다. *** 주1. 김승구, 「1910년대 경성 영화관들의 활동 양상」, 『한국문화』 53,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2011. 주2. 유선영, 「극장구경과 활동사진 보기 : 충격의 근대 그리고 즐거움의 훈육」, 『역사비평』 64, 역사비평사, 2003. 주3. 백두산, 「1910년대 경성 북촌 조선인 극장가와 종족공간적 구성」, 『한국연극학』 63, 한국연극학회, 2017. 주4. 이순진, 『(조선인 극장)단성사: 1907-1939』, 한국영상자료원, 2011, 34쪽. 이광욱(극장문화사 연구자) l 읽고 생각하며, 말하고 글쓰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다. 과거의 기록을 뒤적이고 오늘의 사람들과 소통하며 함께 미래를 고민한다. 건국대학교 글로컬캠퍼스 조교수(동화 한국어문화학과), 한국영상자료원 객원연구원(『신문기사로 본 조선영화』 시리즈). 『드라마, 일상성의 미학』(2024) 공저, 「카프 연극대중화론의 전개와 송영 풍자극의 매체미학」(2018), 「도달한 임계점과 보존된 미래 – 발성영화의 정착과 경성 소재 조선인 극장의 연쇄 반응」(2021), 「표류하는 조선영화 : <임자 업는 나루배>에서 <정춘삼>으로 – 최초의 영화 판권 소송과 식민지 조선영화 시장의 추이」(2022) 집필.
이야기는 현실에서 나옵니다. 우리가 보고 들었던 엄청나게 많은 기억들 속에서 일부만 골라낸 이야기를 영화라고 한다면, 미처 이야기가 되지 못한 나머지 기억들은 기록영상 컬렉션 곳곳에 심드렁하게 담겨 있습니다. 그에 대한 이야기를 되는대로 늘어놓아 보겠습니다. 한국영상자료원에 소장 중인 < Archives Korea 1930-1940 >은 여러 가지 의미로 어마어마한 기록영상 필름이다. 이 영상은 이미 2021년에 기록영상 컬렉션 의 일부로서 심층 해제와 함께 공개됐고 VOD 기획전 에서도 짧게 다룬 바 있지만, 1928년부터 1941년경까지의 방대한 시기를 촬영하고 두서없이 묶어놓은 꽤 불친절한 영상인 탓에 전체적인 맥락을 한 번 더 소개해 보려 한다. 캐나다에서 태어나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미국 시민권을 획득한 제임스 헨리 모리스(J. H. Morris)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곳에서 트램 회사 ‘Market Street Railway’의 부매니저로 일하던 모리스는 28세가 되던 1899년에 서울로 건너와 한성전기회사가 부설한 전차 운행 관련 업무를 맡게 된다. 그의 여권(1910.2, 1918.4.)에 기재된 바대로 애초에 조선에 온 것은 '사업 목적의 임시거주'였지만, 근대적 시간 및 경제 개념이 부족했던 조선인들과 함께 아웅다웅하면서 정이 들기도 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캐나다 출생의 미국인 여성과 결혼(1902)도 하고 딸도 낳아(1905) 가정을 꾸리게 되면서 생각이 바뀐 듯하다. 결국 그는 서울 정동의 외국인 공동체 속에서 정확히 40년을 종횡무진 활약하다가 1938년에 돌아가게 된다. 조선에 올 때는 중간 경유지인 일본 고베에서 제물포까지 이동하는 데만 해도 11일이 걸렸지만, 고국에 돌아갈 때 즈음엔 23시간 정도면 가능해졌을 정도로 세상이 많이 변했다. "1899년에 조선에 온 J. H. 모리스씨는 40년간 서울에서 사업을 하다가 은퇴하고 미국으로 돌아갔으며, 현재 주소는 캘리포니아주 밀브래 하이랜드의 엘더 애비뉴 30번가입니다. 모리스 부부는 한국에 거주하는 모두에게 변함없는 친절과 배려로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 “Contributor's Column”, The Korea Mission Field 36 , no.2 (1940년 2월호) 그는 긴 조선 체류기간 동안 광산업, 자동차 수입 및 정비업, 램프 등 생필품 수입 판매업 등을 하며 미국, 일본, 중국 등을 수시로 오갔다. 한편으로는 서울기독교청년회(YMCA)에서 재정 임원을 역임했고 왕립아시아학회 조선지부(RASKB)의 회원(회보 속 회원록 기준으로 1915년부터 1940년까지)이기도 했으며, 그가 1924년에 마련한 강당 공간을 외국인 대상의 초교파 연합 교회인 서울유니온교회(Seoul Union Church) 및 서울외국인학교(Seoul Foreign School)의 각종 예배 및 행사 용도로 제공하는 등 정동의 선교사 모임들과도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다. <모리스 홀(Morris Hall) 앞 미국 장로교 조선선교회 연례 모임 기념 사진(1939)> 사진: Moffet Korea Collection (Photograph, Series 5, Box 33) “서울외국인학교협회는 작년에 매입한 건물 2층에 새로운 강당을 완공했다. 이 강당은 300명의 청중을 편히 수용할 수 있으며, 협회는 건립위원회 위원장 J. H. 모리스 씨의 봉사와 관대함을 기려 환호 속에 이 새로운 강당을 "모리스 홀"로 명명하기로 의결했다. 서울유니온교회는 준비되는 대로 이 강당에서 정기 주일 예배를 거행하기로 했다.” - “Notes and Personals” , The Korea Mission Field 20, no.4 (1924년 4월호), p.80 <정동 21번지, 모리스 상회(J. H. Morris & Co. Seoul) 전경> *주1 모리스 상회가 취급하던 물품은 자동차 및 부속들, 타이어, 모터사이클, 램프, 화재보험 등 다양했다. (좌) 광고지면, The Korea Mission Field vol.20 no.2 (1924년 2월호), (우) 광고지면, The Korea Mission Field vol.13 no.8 (1917년 8월호) 무엇보다도 사진광이었던 그는 유니버설 필름의 조선 내 수입 배급업을 하면서 필름 촬영에도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1920년대 후반부터 조선을 떠나는 순간까지의 왕성한 활동들을 필름 길이 기준으로 3시간 30분 가량(16mm 필름 7권), 적정 속도로 영사했을 때의 기준으로 5시간 15분 가량의 방대한 촬영본으로 남기게 된다. 그가 샌프란시스코에 돌아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1942년 2월에 71세의 나이로 세상을 뜨게 되니, 거의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영상으로 기록했던 셈이다. 4일 월요일. 구름. 쌀쌀함. 서울 집. 하디(Hardie) 박사의 집에서 케른(Kern) 및 그 일행들과 저녁식사를 했다. 식사 후 모리스(Morris)씨가 자신이 직접 찍은 영상을 보여줬는데, 동쪽 궐 내, 금강산, 필리핀, 백두산의 모습들이었다. 아내와 나는 9시 반 경에 귀가했다. - 『윤치호 일기』(尹致昊日記) 10권 중 12월 4일 일기 J. H. 모리스의 일대기와 그를 둘러싼 정동의 선교사, 외교관, 사업가 공동체를 이해하는 것은 이 뜬금없는 푸티지 모음집의 진정한 의미를 파악하는 가장 중요한 열쇠가 된다. 1930년대 초중반 전주와 함흥 일대의 선교 활동 모습, 뜬금없이 중국에서 촬영된 푸티지들(1920년대 중후반부터 선교공동체가 모색했던 중국 선교와의 관련성 등), 1936년 5월 28일 이화학당 개원 50주년 행사 등이 촬영됐던 이유, 그리고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에서 1940년 2월 9일부터 11일까지 진행됐던 “Bowl of Rice" 퍼레이드를 비롯한 캘리포니아 인근의 풍경들이 1940년에서 1941년 즈음에 촬영됐던 동기 등 대략적인 맥락은 이제 그의 생애와 그가 속했던 공동체와의 관계를 통해 어느 정도까지는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Archives Korea 1930-1940> 중, 1940~1941년에 촬영된 푸티지들 (좌) 캘리포니아 레드우드(Redwood) 공원, (우) 샌프란시스코 “Bowl of Rice” 퍼레이드 특히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영상 속 인물들 사이에 흐르는 정서이다. 외국인의 입장에서 기본적인 생필품조차 쉽게 구하기 어려운 극동의 한 나라에 자리를 잡고 서로 의지하고 갈등하며 3세대에 걸쳐 함께 했던 60여 년의 시간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이들은 마냥 착한 사람들은 아니었을지 몰라도 선교지의 발전과 그 국민들에 대해 함께 공부하고 고민했던 흔적들이 기록 여기저기에 남아 있으며, 어려움 속에서 하나의 목표를 위해 움직였던 공동체로서 서로 간의 유대감도 남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정동에서 태어난 2세, 3세들은 서로를 ‘Korea Kids’라고 칭했고, 1940년대 초 일제의 압박에 밀려 각자 고향으로 돌아간 후에도 최소 50여 년 이상 조선에서의 추억담과 서로의 근황을 Korea Klipper 라는 이름의 월간 소식지로 엮어 구독했으니 말이다. <J. H. 모리스의 사위(딸 Marion의 남편)인 스테판(C. H. Stephan)이 최근에 사망했다는 셔우드 홀(Sherwood Hall)의 전언> 사진: The Korea Klipper vol.39, no.2 (1980년 2월호), 첫번째 소식. 모리스의 영상을 보면 이렇듯 서로에 대한 신뢰와 친밀감이 언뜻 비춰지는 장면들이 있다. 중일전쟁 직전의 긴장감과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 등으로 인한 우울한 분위기 속에서도 영국 영사관에서 열린 1937년 5월 24일 대영제국 기념일(Empire Day) 행사 중의 아이들은 해맑기만 하고 공동체 친구들은 서로를 향해, 그리고 카메라를 향해 미소 짓는다. 1935년 3월에 경복궁 후원이 특별 개방되면서 열렸던 야외 연회장에서는 붐비는 방문객들 사이로 다른 장면에서 낯익은 얼굴들이 나타난다. 이때 카메라와 이들의 정서적 거리는 매우 가까워 보인다. <Archives Korea 1930-1940> : 모리스를 보고 활짝 웃어 보이는 사람들 (상) 1935년 경복궁 후원 (3:48:24), (중) 같은 장면, 구세군 모자를 쓴 새뮤얼 모팻 선교사? (3:48:05), (하) 1937년 영국 영사관, 대영제국의 날 행사 (4:46:32) [참고] 이하 제시되는 타임코드(시:분:초)는 적정 속도로 조정한 KMDb VOD 버전 기준의 시간입니다. 모리스의 이 방대한 기록영상 필름은 모리스 사후 그의 딸 매리언(Marion)이 간직하고 있다가 친분이 있던 로스 H. 맥도널드(Ross H. Macdonald) 토론토 대학 교수에게 전달했고, 그의 사망 후 아내 리스(Leith Macdonald)가 캐나다 연합 교회(United Church of Canada)에 기증했다. 그리고 2020년 1월, 모리스의 손녀와 친분이 있던 다큐멘터리 영화작가 마티 그로스(Marty Gross)의 도움을 통해 <Archives Korea 1930-1940>는 드디어 어언 80여 년 만에 한국영상자료원에 도착했다. 진면목이 드러난 모리스 필름의 이모저모를 짧은 글 하나에 모두 설명하기란 무리가 있다. 덧붙이자면 이 영상에 등장하는 장소, 건물, 인물, 상황에 대한 식별은 이제 걸음마 단계이다. 16mm 필름 품질 상의 한계도 있지만, 기록영상 속 정보를 새롭게 하나 식별한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정작 우리의 주인공 모리스 씨의 얼굴을 식별하는 데에만 해도 여러 근거자료를 교차 검증하는 데에 오랜 시간이 걸렸고 이마저도 100% 확신하는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의 추정은 다음과 같다. (이외에도 미 감리교 디지털 컬렉션의 자료 를 함께 참고해 볼 수 있다.) (좌) J. H. 모리스의 여권(1918.8.21.) 속 가족사진 : 순서대로 모리스(47세), 딸 매리언(14세), 아내 마벨(45세) (우) 마벨(Mabel Clair Perkins)의 여권(1923.11.5.) 속 사진 <서울유니온 50주년(1939년) 기념사진 속 모리스(68세)> 사진: The Korea Mission Field vol.36, no.2. (1940년 2월호) <위 사진 중 모리스 부분 확대> <Archives Korea 1930-1940> 속 모리스 추정 인물 - (상) 3:21:18 (하) 3:16:17 <Archives Korea 1930-1940> 속 모리스의 가족들 (상) 모리스의 딸 매리언 부부로 추정되는 인물들 (3:14:08), (하) 맨 오른쪽은 모리스의 아내로 추정 (3:17:36) ※ 참고 문헌 Morris, J. H. “Early Experience with the Seoul Street Railway”, The Korea Mission Field vol.36 no.2 (1940년 2월호), Seoul: 26-27. Macdonald, Leith, “Rare Film Footage Captures: Korea in the '30s”, Korean Culture , vol.8, no.2. (Summer 1987). 33-37. Underwood, H. G. “An American Boy in Yesterday's Seoul - 'Golden Days' Fondly Recalled”, KOREANA vol.5, no.1, (Spring 1991), 19-26 Clark, Donald N. “Impermanent Residents: The Seoul Foreign Community in 1937”, TRANSACTIONS of the Royal Asiatic Society, Korea Branch , vol.64, (1989) 19-37. *** 주1. 사진: Cameron, W. H. Morton. Present Day Impressions of Japan; the History, People, Commerce, Industries and Resources of Japan and Japan’s Colonial Empire, Kwantung, Chosen, Taiwan, Karafuto. Edited by W. Feldwick. Chicago: Globe Encyclopedia Co., (1919) p.8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