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발백중
- 감독
- 이형표
- 제작년도
- 1966
- 출연
- 신성일, 고은아, 남정임, 남기숙, 전양자, 방수일, 트위스트 김, 김정철, 김희갑, 김순철, 장훈, 이예성, 지방열, 김경란
이형표는 1960~70년대에 활발한 작품 활동으로 한국영화의 전성기를 수놓았던 흥행 감독이며, 그의 이름 앞에는 항상 ‘최초’라는 수식이 붙어다닌다. 1922년 황해도 출생으로 서울 효재국민학교 입학(1930), 경성사범학교에 진학(1937)하여 서울대 사범대학 영문과를 졸업(1949)했다. 미술에 재능을 보여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1943)하고 김기림, 김순남, 이인성 등으로부터 문화, 예술 전반에 걸친 소양을 얻는다. 대학 졸업 후, 그는 USIS(주한 미공보원 영화과)의 영화 제작 보좌관으로 입사하여 미국 문화영화의 자막 번역을 맡으며 처음으로 영화계를 접하게 된다. 이윽고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서울에서 조선미술가동맹 일원으로 김일성과 스탈린의 초상화를 그리며 인민군 점령 시기를 견뎠다. 그러나 이 사실이 문제가 되어 경찰서에 끌려가 고초를 겪고, 미공보원을 떠나게 된다. 이후 유엔으로 자리를 옮겨 한국재건단(United Nations Korean Reconstruction Agency: UNKRA, 운크라)에서 뉴스를 비롯해, 홍보영화 <고집>(앨프리드 웨그(Alfred Wagg), 1952), <한국에서의 만남 Encounter in Korea>(리차드 배글리(Richard Baegley), 1952) 등의 제작에 참여한다. (사진1) <고집>(앨프리드 웨그(Alfred Wagg), 1952) 뒷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배글리, 이형표, 코넌트, 여자주인공 기순, 촬영조수였던 임병호 (사진2) <고집>(앨프리드 웨그(Alfred Wagg), 1952) 촬영 현장에서 이형표(맨 왼쪽), 카메라를 잡고 있는 임병호 <고집>에서 이형표는 통역 겸 연출 조수를 맡았는데, 녹음기사로 참여한 미국 영화인 테드 코넌트(Theodore Conant, 1926~2015)를 통해 처음으로 자기녹음기(마그네틱 레코더)를 접하는 기회가 되었다. 또한 이형표는 미국 파라마운트사가 제작한 3D 입체영화 <휴전 Cease Fire>(오원 크럼프(Owen Crump), 1953)의 통역 겸 조연출로 일하면서 남보다 먼저 할리우드 특수영상 제작 현장을 경험한다. 다큐멘터리 제작에 활발하게 참여하던 시기에, 이형표가 조력자의 입장에서 제작 주체로 거듭나는 데에는 동료였던 테드 코넌트의 영향이 컸다. 테드 코넌트 1) 는 1952년 유엔 한국재건단(UNKRA) 영화팀원으로 한국에 와서 1960년경까지 약 8년간 전쟁 및 전후 복구 중인 한국의 모습을 기록하는 한편 이형표와 돈독한 우정을 쌓으며 협업 창작 활동을 했다. 또한 코넌트는 한국영화계에 많은 기여를 했는데, 1956년 유네스코와 운크라가 한국 정부와 공동으로 설립한 신생활교육원에서 시청각 교육을 담당했고, 1958년에 미 국무부 산하 국제협조처가 한국 영화인 교육 및 영화제작소 설립을 지원하기 위해 시라큐스 대학과 맺은 ‘시라큐스 컨트랙트’에 참여하여 공보실 영화과의 사운드 분야 인력 교육을 담당했다. 이형표는 테드 코넌트와의 교류를 계기로 외교 파우치를 통해 들어온 서구 문화를 다양하게 흡수하고, 코스모폴리탄적인 문화 체험을 바탕으로 공동 다큐멘터리 작업을 시작한다. 이는 이후 이형표의 영화 창작 세계를 구축하는 데 단단한 초석이 된다. 1953년부터 그는 대한민국 공보처 영화과에서 대한뉴스를 비롯해 공보처에서 주관하는 기록영화 제작을 전담하게 된다. 영화 <한국의 시각 Korean Perspective>(1953)과 <낙원 제주>(1953) 등이 이형표가 감독한 기록 영화들이다. 이 두 작품들은 천연색 코닥크롬(Kodakchrome)으로 촬영한 컬러 영화이고, 한국의 자연경관과 명승고적을 소개하는 <한국의 시각>은 한형모 감독이 촬영을 맡았다고 한다. 앞서 언급한 단편영화 <한국에서의 만남>(1952)에서 조연출을 했던 이형표는 이 이야기로부터 아이디어를 얻은 것으로 보이는 장편 시나리오 <불사조의 언덕>을 썼고 2) , 공보처에서 이를 영화화한다. <불사조의 언덕>(전창근, 1955)에는 감독 전창근, 조연출 김한일, 촬영 한형모, 조명 김흥만, 스크립터 홍은원 등의 영화인들이 참여했다. (사진3) <불사조의 언덕>(전창근, 1955) 제작진들, 둘째줄 왼쪽 두번째부터 이형표, 전창근, 홍은원, 배우 나애심 또한, 이형표는 테드 코난트와 함께 다큐멘터리 <한국의 환상 Korean Fantasy>(1955), <한국의 예술가(Korean Artist)>(1955), <위기의 아이들(Children in Crisis)>(1955)을 만든다. <한국의 환상>은 전후 한국의 폐허와 재건 및 전통문화 등을 다뤘고, 화가로서의 이형표 자신이 출연한 다큐멘터리 <한국의 예술가 Korean Artist>(1955)는 1956년 제1회 마닐라 영화제에서 상영되었다. <위기의 아이들>은 한국전쟁 고아를 비롯한 전후 어린이들이 어렵게 생계를 이어가는 열악한 생활상을 담았다. 이 작품은 나레이션을 배제하고 녹음기를 사용하여 현장음만으로 상황을 전달하는 다이렉트 시네마(direct cinema) 형식의 새로운 시도를 선보인다. 이형표는 당시 전후 서울의 아이들을 보여주는 많은 장면을 직접 촬영했는데, 콘덴서 마이크로폰(condenser microphone)을 사용하여 레코더를 군용 트럭에 숨겨둔 채 거리 촬영을 진행했기 때문에 매우 생생한 거리의 소리들을 담아낼 수 있었다고 한다. 3) 작품 후반부에는 ‘북진통일’ 관제 데모와 전체주의적 교육에 동원되는 학생들 역시 ‘위기의 아이들’로 보여주면서 이승만 정부를 비판하는 태도를 취한다. 4) 이 때문에 이형표는 한국전쟁 중 부역 전력으로 고초를 겪은 바 있는 자신의 신상을 염려하여 스스로 공동연출자로서의 크레디트를 포기했다. 실제로 이 영화는 이승만 정권 측으로부터 ‘공산주의적’이라는 항의를 받기도 했지만 제5회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되었다. 이와 같이, 그는 당시로서는 드문 다수의 제작 경험을 통해 한국 영화제작기술의 열악함을 통감하고, 유엔 한국재건단(UNKRA)에서 원조를 받아내 공보처에 영화 기자재를 들여온다. 더불어 이를 기반으로 스튜디오를 지어 활용하도록 하는 등, 전후 한국영화의 제작 기반과 환경을 조성하는 데 큰 공헌을 한다. 1950년대 중반까지 다큐멘터리 활동을 하는 동시에, 화가로서의 정체성도 유지하며 그림을 그리던 이형표는 신상옥 감독과의 인연을 시작으로 극영화계에 본격 뛰어들게 된다. 신상옥은 이형표가 영화제작 과정과 기술 전반에 대해 해박한 지식과 경험을 갖춘 점을 간파하고 <젊은 그들>(신상옥, 1955), <무영탑>(신상옥, 1957)의 각색 및 <동심초>(신상옥, 1957) 등의 제작에 이형표를 참여하도록 한다. 이윽고 이형표는 신필름 기술부장으로 입사하여, 1961년 장안의 화제였던 신상옥 감독의 <성춘향>에서 촬영을 맡는다. 그는 이 영화에서 컬러 영화 제작을 위한 기술 전반에 관여하며 직접 분장까지 맡는다. 이형표는 이미 천연색 다큐멘터리를 제작해본 경험이 있는 바, 이번엔 코닥 이스트만 필름을 사용하여 국내 최초로 컬러 시네마스코프 극영화를 촬영함으로써 한국 극영화계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우는 데 큰 몫을 해낸 것이다. 같은 해 그는 신상옥이 제작자로 나선 <서울의 지붕밑>(1961)으로 감독 데뷔한다. 이 작품은 조흔파의 소설 『골목 안 사람들』을 영화화한 것으로 당대 최고의 스타였던 김승호, 황정순, 김희갑, 허장강, 최은희, 도금봉, 김진규 등을 초호화 캐스팅한 도시 서민 코미디로 관객과 평단의 큰 호응을 얻으며 성공한다. “대표작이 될 것”이라는 신상옥의 예견이 적중한 것이다. 기성 세대 한의사인 김승호가 자녀의 결혼 문제를 계기로 젊은 세대를 대변하는 산부인과 의사 김진규와 각을 세우며 시의원 선거에도 나서보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결국 자녀 세대와 조화를 이루는 모습을 낙천적으로 그려냈다. (사진4) <서울의 지붕밑>(이형표, 1961) 촬영 현장 빌리 와일더나 윌리엄 와일러의 작품 세계를 동경했다는 이형표의 바램대로, 미워할 수만은 없는 인간적인 결함을 가진 인물들의 애환을 가슴에 와닿는 코미디로 완성했다. 또한 <서울의 지붕밑>은 독특한 구도와 새로운 카메라 기법을 이용하여 서울의 다양한 풍경들을 담아낸다. 각각의 쇼트들에는 화가가 되고자 했던 이형표 감독의 미적 감각과 영화 테크니션으로서의 실력이 유감 없이 발휘되었다. (사진5) <대심청전>(이형표, 1962)의 용궁 장면 (사진6) <대심청전>(이형표, 1962)의 세트 촬영장에서 제작진들. 뒷줄 가운데가 이형표 이듬해, 그는 고전 심청전을 컬러 시네마스코프로 영화화한 <대심청전>(1962)을 연출한다. ‘미러 워크’라는 특수 효과를 한국영화사상 처음으로 시도하였고, 일본에서 촬영한 용궁 수중 장면 등의 특수 촬영이 압권이다. (사진7) <아름다운 수의>(이형표, 1962) 촬영 현장, 주연 배우 태현실 옆에 앉아있는 이형표 (사진8) <아름다운 수의>(이형표, 1962) 촬영 현장, 카메라에 손을 올리고 있는 이형표 1960년대 청춘영화의 시초격으로 불리는 영화 <아름다운 수의>(1962)는 주역을 신인 배우들만으로 구성하였고 배우 태현실, 최난경, 한문정, 트위스트 김 등의 영화 데뷔작이다. 이 작품은 “이형표 감독의 쾌적한 템포, 유려한 카메라 구사, 재치있는 커팅이 인상적” 4) 이라는 평을 받았다. 이후 그는 연달아 청춘물 <말띠 여대생>(1964), <연애졸업반>(1964), <백발백중>(1966) 등을 연출한다. (사진9) <말띠 여대생>(이형표, 1963)포스터 (사진10) <말띠 여대생>(이형표, 1963)의 한 장면 (사진11) <연애졸업반>(이형표, 1964) 제작진. 둘째줄 왼쪽 세 번째부터 조감독 김기풍, 배우 엄앵란, 이형표 감독, 배우 남미리 <말띠 여대생>(1963)은 개봉 후 대학 측으로부터 그런 학생이 어디 있느냐는 항의를 받는 등 영화의 리얼리즘 문제를 놓고 공방이 펼쳐지기도 했으나, 당시 외화만 보던 젊은 세대 관객들까지도 끌어들일만한 경쾌한 템포와 시원한 전개로 흥행에 성공한다. 이어 속편 <말띠 신부>(김기덕, 1966), <말띠 며느리>(이형표, 1979)가 제작되어 한국영화 최초의 시리즈물이 된다. 이형표는 1963년 무렵 신필름 전속을 그만두고 한양영화사, 극동흥업, 합동영화사 등을 오가며 청춘영화, 문예영화, 통속 멜로, 변장 코미디, 하이틴 영화 등 다양한 장르의 상업영화를 만들며 대중과 소통한다. (사진12) <아름다운 눈동자>(이형표, 1965)의 주연 배우 엄앵란과 김용연, 각각 청룡여우주연상과 청룡특별상(아역상)을 수상했다. <아름다운 눈동자>(1965)는 순박하지만 당찬 식모와 애정결핍인 주인집 아들이 훈훈한 정을 나누는 이야기로, 감독의 안정되고 세심한 연출력이 돋보인다. 웃음이 터지는 박자를 놓치지 않는 센스 있는 템포와 면밀한 씬 구성, 정확한 콘티뉴이티가 관객을 편안하고 즐겁게 몰입하도록 한다. 식모 역할을 맡은 배우 엄앵란은 출산 후 컴백하여 연기생활 11년만에 처음으로 자신의 목소리로 녹음하는 열의를 보였으며, 제 3회 청룡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이형표의 다방면에 걸친 박식하고 해박한 소양은 영화 기술적인 성과에서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취하는 영화 소재나 그것을 이야기로 풀어가는 방식에도 묻어난다. <애하>(1967)에서는 인공수정이라는 당시에는 낯선 소재를 삼각관계가 얽힌 미스터리한 구성으로 대담하게 전개한다. 획기적인 참신함으로 주목 받았던 이 작품은 제6회 대종상 각본상(이형우)과 남우조연상(윤일봉)을 수상한다. 또한 성(性)을 주제로 한 다수의 섹슈얼한 문예영화들 <밤은 무서워>(1968), <너의 이름은 여자>(1969), <방의 불을 꺼주오>(1970) 등을 통해 젊은 남녀의 내밀한 심리 세계를 긴장감 있게 표현한다. (사진13) <회전의자>(이형표, 1966) 촬영 현장에서 카메라 옆에 이형표 (사진14) <밤은 무서워>(이형표, 1968) 포스터. 위에서부터 배우 남궁원, 윤정희, 박노식 일체의 편견과 고정관념을 거추장스럽게 여긴 이형표 감독의 자유로운 사고 방식은 그의 주특기 장르인 코미디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언니는 좋겠네>(1963), <청색 아파트>(1963), <심술각하>(1966), <오대 복덕방>(1968), <산에 가야 범을 잡지>(1969), <내 것이 더 좋아>(1969), <염통에 털난 사나이>(1970), <방자와 향단이>(1972), <맹물로 가는 자동차>(1974) 등의 작품들에서 세태 풍자와 함께 권위를 조롱한다. 또한 웃음에 야박하고 저급하다고 폄하하는 기존의 시선을 가볍게 뛰어넘어 넌센스 코미디, 슬랩스틱 코미디까지 자유자재로 시도한다. 특히, 연기자 서영춘을 기용해 여러 작품을 만들었던 이형표는 당시 그의 뛰어난 희극 배우로서의 재능이 ‘저속 코미디언’으로 분류 되어, 높이 평가받지 못했던 점을 안타까워했다. (사진15) <청색아파트>(이형표, 1963) 오른쪽부터 배우 이대엽, 이형표 (사진16) <소문난 여자>(이형표, 1966) 촬영장에서 연기 연출 중인 이형표와 배우 고은아 (사진17) <내 것이 더 좋아>(이형표, 1969) 주연 배우 구봉서와 서영춘(오른쪽) (사진18) <염통에 털난 사나이>(이형표, 1970) 왼쪽부터 배우 서영춘, 구봉서, 김희갑 1970년대 TV 보급시대에도 이형표는 누구보다 빨리 변화하는 관객의 감성에 적응해갔으며, 당대 인기 배우들을 기용한 그의 청춘영화들은 꾸준히 인기를 누렸다. “이형표 감독을 잡으면 돈을 번다”는 말이 당시 제작자들 사이에서 회자될 정도로, 이형표는 경제성 있는 영화를 만드는 감독으로서 대중이나 제작자 모두가 요구하는 탁월한 상업영화 감각을 유지했다. 이는 그가 영화는 오락이고 유행이라고 생각하며, 그 유행에 맞춰 관객과 상호 작용하는 유연함을 스스로 즐길 줄 알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사진19) <모범운전사 갑순이>(이형표, 1972) 포스터 (사진20) <리칭의 여선생>(이형표, 1972) 촬영장에서 이형표 감독과 중국 배우 리칭(오른쪽) 6) (사진21) <리칭의 여선생>(이형표, 1972) 포스터 (사진22) <너무 너무 좋은 거야>(이형표, 1976) 포스터. 주연 전영록, 임예진 1970년대 중반에는 하이틴 영화의 붐을 타고 <이런 마음 처음이야>(1976), <너무 너무 좋은 거야>(1976), <제7교실>(1976), <괴짜만세>(1977) 등을 연출했고, 1980년대 한국영화 침체기에도 이형표는 성룡의 <취권>(1978)을 패러디한 코미디물 <애권>(1980)을 흥행시키며, <여애권>(1982), <애권(신)>(1982), <소애권>(1983) 등의 속편을 연달아 연출한다. (사진23) <아가씨 참으세요>(이형표, 1981) 포스터 그는 1980년대에 계속되는 저예산 흥행영화 제작 와중에, 구로공단 노동자들의 삶의 애환을 담은 일상서민극 <젊은 시계탑>(1984)을 연출하기도 한다. 이형표는 1986년 작품 <먼 여행 긴 터널>을 끝으로 극영화 연출 활동을 마치고, 국내 최초의 360도 서클 비전 영화 <내사랑 금수강산(1990)>을 제작하여 전시 영상이라는 새로운 분야에 도전한다. 이후 몇 년간 전시 영상 분야에서 새로운 영상에 대한 끊임없는 개척정신을 보이는 활동을 이어갔다. (사진24) <젊은 시계탑>(이형표, 1984) 촬영 현장. 오른쪽부터 배우 송승환, 이형표 감독, 배우 김현주 이형표의 영화 인생은 한국영화 제작 기술 발전사와 궤적을 같이 한다. 그는 전후 폐허에서 출발하는 1950년대 한국영화계를 위해 영화 기자재 도입에 앞장 섰고, 그 제작 기술을 안내하고 활용하는 데 있어 선구자적인 역할을 했다. 그리고 1960년대 한국영화 전성기뿐만 아니라 1970년대를 거쳐 80년대에 이르기까지 변모하는 세태에 뒤쳐지지 않고, 항상 새롭게 대중의 감수성을 포착해내고 섭취하는 감독이었다. 이렇듯 대중의 기호와 관심에 부응한 결과, 그의 영화 연출작들 대다수가 준수한 흥행 성적을 거두었다. 이형표는 예술가라는 자의식을 발현하기보다는, 영화라는 매체의 본질을 이해하고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유쾌하게 향유할 수 있는 영화 만들기를 추구했다. 그는 영화는 사람을 즐겁게 하는 예술이어야 한다는 엔터테인먼트 기능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 특유의 낙천적인 개성으로, 가족 드라마 <서울의 지붕밑>(1961)부터 코믹 액션물 <아가씨 참으세요>(1981), 한국판 뱀파이어물 <관 속의 드라큐라>(1982) 등과 같은 기발한 재미와 웃음을 선사했다. "그림을 아는 스타일리스트" 7) 이형표는 다양한 장르에서 편협한 시각을 벗어내고, 규범을 해체하는 데서 생겨나는 통쾌한 오락으로 대중과 함께 하는 감독이었다. *이 글은 필자가 쓴「관객과 함께 웃는 영화 패셔니스타(Fashionista), 이형표 감독」, <서울의 지붕밑> DVD 소책자, 한국영상자료원, 2008을 참고해 재구성하였다. 1)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화사연구소 엮음, 『이방인이 기록한 전후 한국, 영화_시어도어 코넌트 컬렉션』, 한국영상자료원, 2015 참고. 2) 앞의 책, 297쪽 참고. 3) 앞의 책, 293쪽 인용. 4) 앞의 책, 292쪽 참고. 5) 「[신영화] 병든 청춘의 풍속도/ 이형표 감독 <아름다운 수의>」, 《한국일보》, 1962년 11월 18일. 6) “톱감독과 톱스타 계보 (제4회)/이형표 편”,《영화잡지》통권116호, 1973년 5월, 190쪽. 7) 「[새영화] ‘스케치북’ 넘기는 재미/ 이형표 감독 <연애졸업반>」, 《서울신문》, 1964년 6월 17일
배우 전양자 는 영화와 TV드라마, 연극 무대를 두루 누비며 40년 가까이 왕성한 활동을 펼친 ''약방의 감초'' 같은 존재다. 스타처럼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지는 못했지만, 있어야 할 자리에서 제 몫을 다해온 친근한 얼굴이다. 요즘도 안방드라마에서 자주 대하는 그가 악극무대에도 선다니 나이를 무색케 한다. 요즘 젊은이들은 그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중년 팬들은 60년대 한국영화 전성기 때 그의 모습을 잊지 못한다. 한국적인 여인이 주류를 이루던 시대에 인형처럼 깜찍한 외모로 풋풋함을 뿜어내던 전양자 의 발랄한 연기는 상쾌한 청량제였다. 전통적인 여인상에서 현대적인 여성상으로 분위기를 일신한 신세대 배우군에서 전양자의 역할을 결코 과소평가해서는 안될 것이다. 전양자 는 스스로 ''조연배우''라고 말한다. 60년대 한국영화 전성기나 70년대 TV브라운관에서 주역을 맡아 인기를 모을 때도 없지 않았지만 ''조연''을 자처하는 것은 겸손이기 보다는 생리에 맞기 때문이라고 본다. ''조연''이라는 표현 속에는 그의 연기 패턴과 연기자로서의 길이 응축되어 있다. 반짝하는 스타보다는 달빛처럼 은은히 빛을 발하는 생명력이 긴 연기자이기를 소망한 것이다. 1966년 이강천 감독의 < 계룡산 >으로 스크린에 데뷔한 전양자 는 그동안 100여 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이중 대부분은 60년대와 70년대에 집중되어 있을 뿐 아니라 겹치기로 출연한 작품도 적지 않다. 기록에 남아 있는 출연작을 일별해 보면 기억에 남아 있는 영화도 있지만 생소한 제목들도 부지기수다. 66년작으로 < 계룡산 >, < 종점 >을 꼽을 수 있고, 67년의 < 가슴아프게 >, < 돌지 않는 풍차 >, < 빙우 >, < 타인들 > 68년 < 엄마의 일기 >, <여고동창생>, 69년의 < 눈나리는 밤 >, < 어느 지붕 밑에서 >, < 마인 >, < 애수의 언덕 >, < 사랑은 가고 세월만 남아 > 등 60년대 후반에 두드러진 활약을 했다. 70년대에도 < 당신을 알고나서 >, < 칠인의 숙녀 >, < 황금부르스 >(70), < 나를 버리시나이까 >, < 아마도 빗물이겠지 >, < 장군의 딸들 >(71), < 밀녀 >(72), < 혈육애 >(76), < 아무도 모를꺼야 >(77), < 비목 >,< 이 한몸 다바쳐 >(78), < 우요일 >(79) 등 연기 활동이 활발했다. 전양자 의 출연 작품을 보면 영화사의 이정표가 될 만한 ''문제작''은 거의 없다. 유현목 감독의 < 오발탄 >, 김수용 감독의 < 갯마을 >, 이만희 감독의 < 만추 >, 이장호 감독의 < 별들의 고향 >, 김호선 감독의 < 겨울여자 > 등에 그의 이름이 들어있지는 않다. 그렇다고 해서 배우 전양자의 존재나 평가를 소홀히 해서는 안될 것이다. 오히려 그를 제대로 평하기보다는 폄하한 경우가 적지 않았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출연작에서 보듯 전양자 는 주로 청춘영화나 멜로영화, 통속적인 시대극에 치중해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해서 ''문제성을 제시하는 특이한 스크린에서 빠지게 된다는 것으로 보아 아무리 연기를 잘했다지만 그렇게 뛰어난 연기자라기보다는 무난한 연기자로 알려진 것 같다''고 평하는 것은 전양자의 위상을 과소평가하는 단견이며 주관에 지나지 않는다. ''한마디로 연약한 조연급에서 맴돌기만 했다''는 것인데, 이런 평가가 과연 그 시대의 상황이나 영화환경을 고려하고, 그의 작품 전반을 파악한 후 나왔는지 납득하기 어렵다. 우선 전양자 의 연기는 60년대와 70년대로 나눠 볼 필요가 있다. 그가 맹활약한 60년대 후반은 한국영화의 전성기지만 70년대는 침체의 늪에 빠졌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별다른 볼거리가 없었던 60년대에 청춘영화나 멜로영화는 대중의 애환을 달래주는 역할을 톡톡히 했다. TV의 대두에 밀려 영화제작 전반이 위축된 70년대 상황에서는 이렇다할 ''문제작''이 나올 여건이 되지 못했다. 예술성이나 흥행면에서 평가할 만한 작품이 1년에 몇 편밖에 나오지 않은 한국영화 풍토에서 ''문제작''에 출연했는가를 기준으로 연기력을 평가한다는 것은 무리다. 그보다는 주연이든 조연이든 자신이 맡은 역할을 얼만큼 충실히 소화하고 전체적인 앙상블에 기여했나를 포괄적으로 살피는 것이 정도다. 이런 관점에 비추어 볼 때 전양자 의 역할은 ''조연''의 비중이 컸으며, 조역을 충실히 함으로써 영화 전반에 활력을 불어넣고 연기의 앙상블을 높인 점을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이다, 조역이 잘받쳐주어야 주역이 빛이 나고 영화보는 재미가 쏠쏠해진다. 전양자야말로 자기의 분수를 알고 조역을 소화해 낸 ''만능 조연''이며, 영화의 양념 역할을 톡톡히 해온 ''전문 배우''가 아닐 수 없다. 전양자 가 60년대에 출연한 영화들을 지금 다시 보면 촌스러운 대목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애정을 가지고 학구적인 자세로 감상한다면 요즘의 기획영화, 짜깁기 영화와는 다른 제작열정과 연기의 앙상블을 발견할 수 있다고 본다. 이와 함께 전양자라는 배우가 60~70년대 한국영화에 어떤 기여를 했는가를 살피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우선 전양자 는 배우의 세대교체에 일익을 했음을 평가할 만하다. 60년대 최은희 , 김지미 , 엄앵란 의 아성에 남정임 , 문희 , 윤정희 트로이카가 도전해 전성기를 누릴 때 등장한 전양자는 데뷔 당시 한창 인기를 끌던 청춘영화 계열에 합류했다. 청춘스타들이 누비던 젊은 영화에서 그의 역할은 깜찍발랄한 여대생이었다. 당시 ''여대생''은 선망의 대상이었는데다 아담한 체구에 이목구비가 또렷한 귀여운 외모는 스크린에 풋풋함을 불어넣었고 팬들은 이런 그의 모습에 신선감을 느꼈다. 그중 인상에 남는 영화로 68년 이형표 감독이 연출한 <여고동창생>을 꼽을 수 있다. 전양자는 윤정희, 문희, 김창숙 등과 공연해 왈달하고 명랑한 여대생 역으로 팬들의 사랑을 받았다. 조연은 주연보다 연기폭이 넓어야 하기 때문에 결코 아무나 해낼 수 없다. 주연은 유명세로 한몫하지만 조연은 약방의 감초처럼 적재적소에서 제 빛깔을 내고 주역을 받쳐주어야 하는 이중부담이 따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전양자 의 진가가 발휘된다. 엄앵란 , 남정임 을 잇는 청춘배우에서 온갖 장르를 넘나들며 개성있는 역할을 소화해낸 것이다. < 눈나리는 밤 >에서는 가련한 여인 조미령 의 딸로, 김효천 감독의 69년작 < 팔도사나이 >에서는 일제에 맞서는 의로운 건달 장동휘 의 여동생 역으로 다양한 변신을 해왔다. 전양자 를 ''연약한 조연''이라던가 ''무난한 배우''라는 점도 재조명되어야 할 과제다. 앞서도 말했지만 그는 60년대 겹치기 상황에서 주어진 역할 소화에 급급할 수밖에 없었다. 연기를 못해서가 아니라 연기력을 발휘할 기회나 시간적 여유를 갖지 못한 것이다. 81년 마침내 연기로 승부할 기회를 얻었다. 조세희 의 원작 소설을 이원세 감독이 영화화한 <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에서 난쟁이 아내 역으로 혼신의 연기를 해낸 것이다. 전양자의 연기는 이 영화를 통해 원숙함을 드러냈다고 할 만하다. 영화에서 신세대 배우로 활약했던 전양자 의 연기는 72~73년 안방의 인기를 독점한 MBC 일일연속극 <새엄마>에서 활짝 핀다. 새엄마가 겪은 일상의 애환을 생활연기로 풀어낸데다 안정감 있는 분위기와 중후한 목소리로 정숙한 여인의 이미지를 구축했다는 평을 얻었다. 드라마 <새엄마>에서는 타이틀 롤이지만 그는 혼자 우뚝 솟기보다는 공연 배우들과의 자연스런 연기 조화로 이웃집 아줌마 같은 푸근함을 자아냈다. 전양자 가 40년 가까이 배우 활동을 해온 장수 비결은 몇 가지가 있다. 하나는 모가 나지 않는 연기의 배합과 조화다. 대다수 배우들은 인기를 노려 오버액션을 하거나 튀려고 애쓴다. 그러다보면 일시적인 효과는 거둘지 몰라도 연기자로의 수명은 단축될 수가 있다, 한 작품의 캐릭터가 너무 강하면 다음 작품에서 이미지를 바꾸기가 쉽지 않다. 전양자는 밖으로 흐트러뜨리는 연기보다는 내적으로 다지는 심도 있는 연기로 인기를 관리해 온 뚝심 있는 배우다, 연이어 여러 드라마에 출연하면서도 시청자가 식상하지 않는 배우로 남는 것은 자신을 숨기고 역할에 충실하는 노력과 끊임없는 창의력으로 변신을 거듭하기 때문일 것이다. 최근 어느 드라마에서 단역에 가까운 노역을 한 적이 있는데, 분장이 어찌나 추하던지 그 맵시 고운 전양자라고는 믿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또 하나는 건강함에서 나오는 에너지와 대인관계의 유연성이다, 그에게는 세월이 비켜가는 듯 건강미와 의욕이 넘친다. 사람들끼리 부딪히는 연예계에서도 그의 처신은 둥글고 부드럽다. 여기에 연극무대에서 다진 화술과 단단한 기초가 배우 전양자 의 내일을 있게 하는 원동력이다. 왕년의 TV연속극 <아씨>의 악극무대에 서는 것도 식지 않는 열정 때문이리라. 우리는 그간 주역만 조명했지 조역에는 너무 무관심했다. 그 결과 자료조차 변변히 없다. 조역을 재조명하는 이번 기회가 얼마나 소중한가. 그것이 한국영화에 큰 기폭제가 되기를 기대하며 전양자 형의 건투를 빈다. 정중헌 (조선일보 논설위원) / 2003년 <프로필> 1942년 2월 20일 서울 출생 서울예술대학 졸업 1966년 이강천 감독의 < 계룡산 >으로 영화 데뷔 <주요 경력> 극단 광장 <학마을>, <수전노>, <무녀도> 등 연극 출연 TV 드라마 <새엄마>, <자매들>, <남자의 계절> 등 다수 <수상 경력> 인기상, 연기상, 연극영화상 등 수상 <주요 작품> 백발백중 , 종점 , 비목 , 낙도의 무지개 , 여고동창생, 빙우 ,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공 등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