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북이들
- 감독
- 구교환
- 제작년도
- 2011
- 출연
- 구교환, 백성철, 고우리, 정향춘, 구용모, 원미선, 임수형
수첩에 제목이 빼곡할 만큼 많은 영화에 출연한 고기환은 출연작 DVD를 받기 위해서 길을 나선다. 의외로 여겨질지 모르나, 실제 감독들은 완성 후 배우나 스태프들에게 DVD를 잘 건네지 않는다고 한다. 한편으론 이유를 알 듯도 하다. 제작과 동시에 와이드릴리즈 되는 상업영화의 룰과 달리, 독립영화의 유통은 지극히 제한적인 것. 누군가의 장롱과 서랍 속에 고이 담겨 있는 영화 또한 무수히 존재하고 있다. 기환과 감독의 만남은 각각 독립적인 챕터를 통해 구성되어 있다. 코미디의 외피를 가지고 있는 ‘영화에 관한 영화’임을 강조하기 위해 과장된 설정을 곳곳에 드러낸다. 총을 겨누는 소품 스태프, SF영화를 연상시키는 공간과 앵글, 실패한 영화감독을 상징하는 다양한 설정들, 제작현장에서 펼쳐지는 연출과 배우 사이 극도의 긴장까지. 기환은 그들 각자의 자리를 이동하며, 상황을 담담하게 마주하거나 혹은 기억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우리는 뜻밖에 리얼리티를 만나게 된다. ‘영화는 페니스다.’ 라는 궤변을 펼치던 학회장 선배는 치약외판원이 되어 있고, ‘팀보다 위대한 선수는 없다.’ 라던 세쌍둥이 감독은 이젠 뿔뿔이 개인 작업을 하기로 했다고 한다. 천재감독 이상일은 스스로 패배자라 칭하고, 사교왕 오대교는 두문불출하는 히키코모리가 되어 있다. 아날로그만을 고집하던 순지는 디지털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고 주춤거리고 있다. 디지털은 반칙인 것 같다는 필름에 대한 아련한 로망은 낭만적이지만 부질없는 투정이다. 룸메이트인 동신 또한 그에게 DVD를 주지 않았던 감독으로 드러난다. 노란 체크무늬의 빈티지 종이가방에 DVD가 쌓여 갈수록, < 왜 독립영화 감독들은 DVD를 주지 않는가? >의 사연은 늘어간다. 웃음이 잦아질수록, 마냥 유쾌할 수 없는 서늘함이 동시에 밀려온다. 영화 만들기의 치열한 과정과 그 앞의 첩첩산중을 조금이나마 공감한다면 말이다. 세계를 창조할 것만 같던 자신감도, 협업의 위대함도, 아날로그의 기원성도 언제나 그 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시스템은 견고하고, 감독들은 가난하고 무력하며, 매체는 무엇을 위해서인지 모른 채 너무 빨리 변해가고 있다. 배우이자 감독인 구교환 은 작품에 직접 출연하고 연출하며, 그 자신을 포함한 모든 감독들의 사연을 능청스럽게 대변하고 있는 듯하다. 영화라는 욕망 앞을 서성거렸던 이들에 대한 일종의 우정 어린 헌사라고나 할까. 영화는 희극적인 설정과 더불어, 위트 있는 대사와 배우들의 감칠나는 연기로 코미디 영화의 전형을 이어나간다. 순지역의 고보결과 세쌍둥이 감독역의 백성철은 전작 < 거북이들 >에 이어 출연하여 반가움을 더한다. 구교환 을 포함한 이들의 연기는 전형적인 코미디영화의 과장법을 보여주고 있지만, 그것만으론 충분하지 않은 독특한 정서적인 리듬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한결같이 엉뚱하고, 모자라고, 외로운 캐릭터들로써 영화의 서사구조상 완전한 패배자이다. 이를테면 쓰레기들과 함께 담겨 있는 종이가방 속에 DVD들과 같은 처지이다. 언뜻 독립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인물들이다. 그러나 구교환의 영화에서 그들은 전혀 다르게 조직된다. 각각의 캐릭터들은 역할에 충실한 듯하지만, 무거운 역할놀이를 한순간 벗어던진다. 구교환은 그 짧은 찰나를 통해 그들을 완전히 새로운 관계망 속으로 끌어들인다. 그리하여 그들은 전혀 다른 생명력을 갖게 된다. 연기하는 기환의 메소드 그 자체인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