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전야
- 감독
- 조창호
- 제작년도
- 2009
- 출연
- 김남길, 황우슬혜, 정윤민, 윤제문, 오혜석, 김정민, 백성희, 남성진, 김재록, 전진기, 한철우, 노태현, 이종구, 문정웅, 성남혜, 이영미, 왕태언, 노형석, 장원욱, 이재민, 김연현
이야기는 현실에서 나옵니다. 우리가 보고 들었던 엄청나게 많은 기억들 속에서 일부만 골라낸 이야기를 영화라고 한다면, 미처 이야기가 되지 못한 나머지 기억들은 기록영상 컬렉션 곳곳에 심드렁하게 담겨 있습니다. 그에 대한 이야기를 되는대로 늘어놓아 보겠습니다. “나를 웃음거리 정도로 다루지 말아주세요.” [1] 제가 정말로 하고 싶은 말은, 세상에 정말 필요한 건 진짜로 연대하고 있다는 느낌이라는 거예요. 스타든, 노동자든, 흑인이든, 유대인이든, 아랍인이든, 우리는 모두 형제입니다. 부디 저를 웃음거리로 다루지 말아주세요. 이런 제 신념과 함께 인터뷰 기사를 마무리해 주세요. Steinem, Gloria. Marilyn . New York: H. Holt, 1986, 23. * 마릴린 먼로가 사망 전 마지막 인터뷰에서 했던 말이다. 이 마지막 부탁은 무시됐다. 죽음은 그 자체로 한 인간의 발언권을 몰수하는 사건이다. 죽음의 강을 건넌 사람의 생애를 함부로 규정짓는 것은 자칫 폭력이 될 수 있다. 1926년에 태어나 1962년에 사망한 한 미국인, 노마 진 모텐슨(Norma Jeane Mortenson)과 같이 혼란스러운 생을 살았던 이에 대해서는 더욱 그렇다. 그래도 이 정도는 말할 수 있다. 그녀는 타고난 스타였다. 그녀는 시대를 초월하는 아름다움을 지녔다. 그녀는 일생 내내 유·무형의 성적 폭력에 시달렸고 순탄치 않은 개인사를 겪었다. 그리고 그녀의 언행은 자주 모순적이고 불안정했다. 이 마지막 인상은, ‘시대의 아이콘’이라는 연막에 그녀의 본 모습이 가려져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늘상 ‘배우’로서의 자신을 강조했지만 일반적인 연기론과는 다르거나 불분명했다. 성적 매력을 부각시키는 배역 위주로 맡기는 소속 영화사에는 항의하면서도 자신의 아름다움에 사람들이 환호하는 것에는 행복해 했다. 오히려 유명인사나 거물과 적잖은 염문을 뿌렸으니, 정서적으로 불안하다거나 성공을 위해 자신의 성적 매력을 이용했다는 세간의 평을 듣기에도 충분했다. 그런데, 그녀를 배우 ‘마릴린 먼로’가 아니라 ‘노마 진 모텐슨’이라는 한 사람의 관점에서 이해하려고 하면 이런 것들이 어느 정도는 오해가 아닐까 생각되기도 한다. 이를테면, 그녀는 배우라는 탈출구를 통해 자신을 인간 대 인간으로 마주하는 관객들을 갈구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외적 아름다움을 포함한 자신의 ‘전체’를 보고 좋다고 말하는 사람이 필요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것이다. 어느 순간에는 ‘밤에는 샤넬 No. 5를 입고 자요’라는 발언이 의도적으로 성적 상상을 불러일으키려는 것이었을지, 아니면 정말 본인 말대로 피부가 민감해서 옷을 걸치지 않고 잔다는 의미였을지조차 헷갈리게 된다. 영화산업과 언론이 만들어낸 신화적인 이미지가 무려 60년 이상 재생산되고 있다. 이걸 걷어내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하물며, 본인은 얼마나 답답했을까 하는 상상에서 이야기를 시작해 본다. 신혼여행 중 도피한 여배우 6.25전쟁이 끝나고 고작 반 년이 지난 1954년 2월 16일, 서울 여의도공항에 C-54 수송기가 도착하고 마릴린 먼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미군위문협회(USO, United Service Organizations)가 해외 파병 미군을 대상으로 한 캠프 쇼(Camp Show) 공연에 출연하기 위해 왔다고 하지만, 이때의 기획은 다소 즉흥적이고 특별했다. 당시 마릴린 먼로는 메이저리그의 전설적인 야구선수 조 디마지오 (Joseph Paul DiMaggio)와 결혼하고 일본의 도쿄, 오사카 등지에서 신혼여행 중이었다. 이 결혼생활은 해가 가기 전에 고통스러운 파경 으로 치달을 것이었고, 신혼여행 중에도 이미 그 전조가 보였다. 조 디마지오는 신혼여행 중에도 일본 야구팀과의 공식 일정을 진행했고, 마릴린 먼로는 한국의 최전선에 근무하고 있는 미군들을 위해 위문공연을 하기로 결정한다. 신혼여행 출발 전부터 염두에 두고 있었다거나 비행기 안에서 제의를 받았다거나 일본에서 전격적으로 결정했다는 등의 여러 설이 있지만 모두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2] 다만, 한국에서의 모든 공연에서 그녀는 보라색 칵테일 드레스 한 벌을 입고 무대에 섰는데, ‘원래 파티장에서 입으려고 가져온 것이고 이것이 무대에서 입을 수 있는 유일한 옷이었다’고 밝힌 것으로 보아 최종 결정 자체는 긴급하게 이뤄졌다고 볼 수 있다. 1954년 2월 1일, 도쿄 제국호텔 기자회견장에서 마릴린 먼로와 조 디마지오 부부 출처: 111-SC-452331, National Archives 마릴린 먼로는 2월 16일 여의도공항에 도착한 순간부터 19일까지 3박 4일동안 미군 기지 십여 군데를 순회하며 부대 내 야외 가설무대에서 위문공연을 했다. 한국영상자료원이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tional Archives) 2관에서 수집한 기록영상 중에는 미군 촬영병들이 이때의 마릴린 먼로의 모습을 기록한 푸티지가 3점 있다. 이 영상들은 현재 < 미국 NA II 기록영상 컬렉션 (4) > [3] 을 통해 공개되고 있는데, 모두 흑백으로 촬영됐고, 특별한 경우 외에는 음향을 함께 녹음하지 않는 군 기록영상의 특성상 군인들의 환호성과 마릴린 먼로의 음성이 담겨 있지는 않다. 원 소장처에서는 모두 “MARILYN MONROE SHOWS, K-2 AND K-16, KOREA”라는 동일한 제목으로 관리되고 있었는데, 이를 자료원 컬렉션에서는 <1954년 2월, 마릴린 먼로 내한 - 미군부대 순회공연> (A), (B), (C) [4] 로 구분했다. (이하, <영상 A>, <영상 B>, <영상 C>로 지칭하겠다.) 이 부부의 결혼은 ‘세기의 결혼’으로 일컬을 만했다. 결혼과 신혼여행도 평범하지는 않아서 화제성이 충분했다. 하지만 의외로 국내는 물론이고 미국의 신문보도에서도 이 순회공연의 전 일정이 빠짐없이 명시된 기사는 찾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마릴린 먼로 헌정 사이트나 각종 블로그의 내용들은 서로 일치하지 않은 경우가 많고 출처도 분명하지 않다. 그런 면에서 슬레이트 정보와 부대마크가 포함된 기록영상들은 귀중한 근거가 된다. 다만, 이 영상들에는 당시의 몇몇 일정이 빠져 있고 시간 순서대로 묶여 있는 것도 아니라서 정리가 필요하다. 이 영상들과 당대 신문기사를 종합해 마릴린 먼로의 일자별 방문지 순서를 재구성해 보면 다음과 같다. ◦ 2월 16일(화) : 여의도 K-16 비행장 도착, 미 제1해병사단 제1보병연대(첫 공연) [5] , 미 제7보병사단 ◦ 2월 17일(수) : 미 제3보병사단, 제40보병사단 제160보병연대, 제24보병사단, 제25보병사단 [6] ◦ 2월 18일(목) : 미 제2보병사단, 제45보병사단 [7] ◦ 2월 19일(금) : 대구 K-2 공군기지(마지막 공연) 이렇게 확인된 일정만 봐도 4일 동안 총 9군데의 미군 부대를 방문했다. 기억에 의존한 일부 블로그 글, 예를 들어 마지막 날 대구 전에 춘천 공연이 있었다든지 하는 것들을 신뢰한다면, 18일과 19일에 각각 최소 2~3군데의 일정이 더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촬영된 부대들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나 최소한 18일까지는 군사분계선을 따라 최전선 부대들을 방문했다고 볼 수 있다. 신문기사들은 공연이 있었던 장소를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서부 전방’(‘Western Front, Korea’), ‘중부 전방’(‘Central Front, Korea’), 그리고 마지막 날인 19일 제45보병사단 기사에서 ‘동부 전방’(‘Eastern Front, Korea’)으로 보도하고 있다. 따라서 마릴린 먼로와 공연팀들은 서울을 기점으로 경기 북부와 강원도의 전방 부대들을 동쪽으로 순회한 후 마지막 날 대구를 비롯한 후방 주요기지를 방문한 뒤 일본으로 귀환했다고 볼 수 있다. 신문보도에 따르면 가는 곳마다 적게는 6,000여 명에서 많게는 13,000여 명의 군인들이 몰려들었다. 17일까지 이틀 동안 집계된 관객수를 6만명 으로 보도한 기사가 있고, 대략 19일까지 총 관객수를 10만여 명 이상으로 추산하는 견해가 일반적인 듯 하다. 영상들은 주로 마릴린 먼로에 초점을 두고 촬영됐지만 다른 전반적인 정보도 함께 담고 있다. 마릴린 먼로는 서울에 도착할 때와 대구 비행장으로 갈 때만 수송기를 탔고, 부대에서 부대로 이동할 때는 군용 헬리콥터를 탔다. 이 위문공연 이름을 따서 지은 것으로 보이는 밴드 ‘Anything Goes’ 일원들, 남편 조 디마지오의 동료 야구인의 아내 진 오둘(Jean O’ Doul), 그 외에 매니저 역할을 한 장교로 추정되는 인물이 늘 마릴린 먼로와 함께 이동했다. 따라서 이 인원들과 악기까지 감안하면 헬리콥터도 최소 3기가 필요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부대마다 사단장급이 나와서 일행을 영접했고 도착 장소에서 한동안 포토타임을 가졌다. 공연은 보통 밴드원들이 노래, 연주, 만담 등으로 분위기를 띄운 후 마릴린 먼로가 등장해 노래를 몇 곡 부르고 군인들과 포토타임을 가지는 식으로 진행됐던 것 같다. 마릴린을 데려와라! - 신경쇠약 직전의 군인들이 애정을 표현하는 방법 마릴린 먼로는 1953년 한 해 동안 출연한 영화 세 편이 모두 흥행하면서 떠오르는 스타로 인정받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영화배우 데뷔 이전에 누드모델로 활동했고, 당시 군인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핀업걸(Pin-up Girl) [8] 중 하나였다. 대중문화 접근성이 상대적으로 떨어졌을 한국의 미군들에게 마릴린 먼로는 영화배우라기보다는 핀업걸로 익숙했고, 사진에서 보던 모델이 현실에 나타났다는 것만으로도 흥분되는 일이었을 것이다. [9] (왼쪽) 미 제1해병항공단 비행대대 “Devil Cats”, 퀀셋 안 벽에 가득 ‘핀업’된 여성 모델과 배우 사진들 출처: 127-GR-223-A345138 , Box 32, Folder 223, National Archives. (오른쪽) 1953년 2월 14일, 미 제9군단 항공관측부대 간이비행장 관제소에서 통신 중인 병사. 창에 ‘핀업’된 여성 사진. 출처: 111-LC-31969, National Archives / 열람: < 미국 NA II 기록영상 컬렉션 (4) > 중 <AERIAL PHOTO MISSION, IX CORPS, KOREA (2)> 2분 40초 지점 하지만 여의도공항에 마중 나온 군인들의 뜨거운 열기는 그것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비정상적인 수준이었다. 이때의 미군 병사들은 물리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먼 다른 나라에 와서 3년간 전장을 경험했다. 특히 전방 부대들은 정전 후 7개월이 지난 시점에도 귀환하지 못하고 군사분계선 이남의 방비태세를 정비하거나 잔존하는 전쟁 재발의 위협에 대응하는 임무를 수행 중이었다. 생존의 불안감과 오랫동안 누적된 피로감, 고국의 민간 사회와 동떨어져 있다는 느낌이 이들의 전반적인 정서였을 것이다. [10] 제2차 세계대전 이후로 USO가 발족하고 캠프 쇼를 기획했던 것도 바로 파병 군인들의 이런 정서를 달래 사기를 진작하고자 하는 것이었고, 6.25전쟁 중에도 캠프 쇼가 수차례 열렸던 것으로 확인된다. 그렇더라도 마릴린 먼로에 대한 이들의 반응은 한국 땅을 밟은 다른 ‘레전드’급 연예인들 이상이었는데, 그만큼 이때의 미군들이 지쳐 있었고 절실히 귀환을 바라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왼쪽) 1954년 2월 18일, 제2보병사단 공연 후 자신이 담겼을 것으로 추정되는 포스터에 사인을 해 주는 모습 (<영상 C>, 3분 58초 지점) (오른쪽) 저마다 카메라를 들고 즐거워하는 제2보병사단 군인들 (<영상 C>, 21초 지점) 한 군인은 너무 당황해서 카메라 렌즈 뚜껑 벗기는 것을 잊었다. 먼로가 뚜껑을 열어주며 말했다. “자기야, 그거 벗기는거 잊었어.” 한국 전역 군부대 PX에서는 필름이 모두 매진되었고 제7보병사단 공연에서는 플래시가 너무 많이 터져, 한 기자가 "공산군들은 제7보병사단이 야간 기동 중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라고 보도했을 정도였다. " 카메라 셔터 소리와 함께 끊임없이 터지는 플래시 불빛에 하늘이 계속 환했다." [11] 1954년 2월 16일, 제7보병사단. 무대 조명을 세팅하는 모습(왼쪽, <영상 A> 3분 44초 지점)과 공연 중 플래시가 터진 순간(오른쪽, <영상 A> 4분 29초 지점) 영상에서 비춰진 마릴린 먼로는 여신처럼 군림하는 스타가 아니라 군인들과 팔짱을 끼고 대화를 나누는 ‘친구’였다. 마중 나와 기념사진을 찍은 장교보다는 사병들이 카메라에 추억을 담을 수 있도록 충분히 시간을 내어 주었다. 그녀는 영하의 날씨에도 얇은 어깨끈만 있는 칵테일 드레스를 입고 무대에 올라 헌신적으로 공연을 펼쳤다. 비나 진눈깨비가 온다고 하여 공연을 취소하거나 연기하지 않고 예정대로 진행했다. 제40보병사단에서는 비와 추위로 잠시 무대 뒤로 들어가기도 했지만 이내 다시 나와 공연을 이었다. 일본으로 돌아간 후에 39도의 고열로 앓아누운 것은 이때 무리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12] 지친 병사들은 이토록 친밀하고 친절한 모습으로부터 아마도 위로 또는 이해받고 있다는 감정 비슷한 것을 느꼈을 것이다. 한편 마릴린 먼로가 군용항공점퍼를 입고 헬리콥터나 전차, 지프 등에 올라타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드는 모습은 병사들에게 긴 긴장상태가 끝날 날이 머지 않았다는 안도감을 줬으리라 생각한다. [13] 한국에서 군인들을 위한 위문 공연을 하러 갔을 때, 그녀는 영하의 추위에도 불구하고 1만 3천 명의 미군들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에 진심으로 놀라고 감동했습니다. 군인들이 끊임없이 그녀를 부르자, 그녀는 그들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추위를 무릅쓰고 어깨끈 없는 드레스 [14] 와 샌들을 신고 무대에 섰습니다. 그녀는 나중에 "사람들에게 내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느낀 순간이었다" 라고 회상했습니다. Steinem, Gloria. Marilyn . New York: H. Holt, 1986, 20. 병사들은 이렇게 억눌렸던 욕구가 해소되고 위로 받는 감정을 폭동에 가까운 격렬한 호응으로 표출했던 것 같다. 영상에 누락됐지만 당시 신문 기사에 따르면 2월 17일 제40보병사단 공연 중에는 무대로 달려들려는 군인들 때문에 안전상의 이유로 공연이 일시 중단되는 상황이 있었다. [15] 이어 가장 격렬했다고 알려진 2월 18일 제45보병사단 공연에서는, 약 6,000명의 군인들이 마릴린 먼로의 차례를 기다리지 못해 앞 순서 공연자들에게 ‘마릴린을 데려와라!(Bring on Marilyn!)’라며 야유를 하고 돌을 던졌다. 결국 마릴린 먼로가 예정보다 일찍 등장하자 이들이 일제히 무대로 달려드는 통에 한 군인이 부상을 당해 구급차에 실려가는 사건이 발생했다. [16] 이런 해프닝들도 있었지만 현장에 있었던 군인들은 한결같이 회고록이나 구술을 통해 이때를 좋은 추억으로 회고하며 특히 마릴린 먼로에 대해서는 ‘최고로 멋진 여성이었다’, ‘여배우지만 겸손해서 놀랐다’ 등 좋은 인상으로 기억하고 있다. 영상에 드러나는 이때의 마릴린 먼로는 ‘추억보정’이라고 하기엔 유별나게 헌신적이었다. 한마디로 스타성과 진정성이 함께 폭발한 순간이었다고 할 수 있다. 1954년 2월 17일, 제40보병사단 야외 무대 ‘Grenadier Palace’ 공연 : 진눈깨비에 가까운 비가 내리자 마이크를 손으로 닦아주는 관계자(위, <영상 A> 7분 7초 시점). 결국 잠시 퇴장했다가 다시 나오는 마릴린 먼로(아래, <영상 A> 7분 21초 시점) (왼쪽) 1954년 2월 17일, 제40보병사단 공연장에 가득 찬 군인들(<영상 B> 1분 24초 지점) (오른쪽) 1954년 2월 17일, 제25보병사단 공연 장면. 추위에 입김이 나오는 모습 (<영상 C>, 5분 48초 지점) (왼쪽) 1954년 2월 17일, 제40보병사단. 패튼 전차를 타고 퍼레이드하며 공연장으로 이동하는 마릴린 먼로 (<영상 B> 50초 지점) (오른쪽) 1954년 2월 16일, 여의도 비행장에서 첫 공연장으로 향하기 위해 헬리콥터로 옮겨탄 모습. 이 순간에도 다리를 내밀고 포즈를 잡는 모습 (<영상 B> 5분 19초 지점) 마릴린 먼로의 다시 없을 순간 이번에는 마릴린 먼로의 입장에서 바라보자. 이 순간 마릴린 먼로가 미국의 배우이자 엔터테이너로서 국가를 위해 충성한 군인들을 위해 본분을 다 한 것이었다면 ‘프로’로서 존경할 만하다. 하지만 그녀의 때로는 지적이고 때로는 충동적인 발언들, 그녀에 관한 여러 전기들을 보면 그렇게 단순하게만 볼 일은 아니다. 이런 시각은 어떨까? 그녀의 모든 발언은 늘 오해를 살 만 했다. 진심이 립 서비스로 받아들여지거나 화제성을 노린 발언으로 곡해되기 딱 좋은 유형의 사람이었다. 여의도공항에 도착해서 수백명의 군인들을 보고 한 유명한 발언, “내 평생 이렇게 많은 남자를 본 적이 없어요. 남편도 왔으면 좋았으련만.”은 자신의 관능적인 이미지를 활용한 의도적 발언으로 보이기 쉽다. 모든 일정을 마치고 “이번 여행은 여러모로 제 커리어의 정점이에요.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제가 영화 스타라고 느꼈어요.”라고 말한 것도 스타의 의례적인 발언처럼 들린다. 하지만 공적인 발언에 소심하게 내면의 결핍을 드러내곤 하던 그녀의 성향에 주목한다면 모두 다른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그녀가 지인들에게 한, 좀 더 내밀한 발언을 들어보자. “스타라고 느껴본 적이 없었어요.” 그녀는 미국으로 귀환한 후 자신의 무용 선생인 로테 고슬라르(Lotte Goslar)에게 말했다. “정말 진심으로, 한국에서 그런 느낌을 받았어요. 그 많은 젊은 친구들이 웃으며 나를 보는 것을 내려다보는 것이 너무 좋았어요. 내가 필요한 사람이구나 하는 것을 느꼈어요.” [17] “7만여 명의 군인들이 내 앞에서 목이 터져라 환호하는데...” 먼로는 각본가이자 감독인 벤 헤크트(Ben Hecht)에게 말했다. “...그저 행복뿐이었어요. 집에 온 느낌처럼 .”(“I only felt happy. I felt at home.) [18] 1954년 2월 17일, 제3보병사단에서 군인들과 즐거운 한 때. 다친 오른손 엄지손가락은 신혼여행 출발 때부터 남편의 폭행 의혹을 불러일으켰다. [19] (<영상 B>, 31초 지점) 이렇듯 가장 뜨거운 대중적 인기를 모으고 있는 여배우이면서도 관심과 애정을 갈구했던 28살의 젊은 마릴린 먼로에게는 어쩔 수 없이 혼란스럽고 비극적인 앞날이 겹쳐 보인다. 극단적 상황 속에서 지칠 대로 지쳐 있던 군인들이 보인 맹목적이면서 순수해 보일 정도의 격렬한 애정표현은 역설적으로 마릴린 먼로의 결핍된 정서를 보듬어 줬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적어도 기록영상에서는 성욕이든, 갈증이든, 관심이든 뭐든, 구분하기 어려운 혼란과 결핍상태에 놓여 있던 같은 처지의 군인들과 여배우가 이 짧은 며칠동안 서로를 위로했다고 느껴진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사실은 영상 중 한 슬레이트에서 ‘Marilyn Monroe + ME’라는 문구를 보고 촬영자가 벅차는 마음으로 ‘마릴린 먼로와 나(ME)’라고 적었을 것이라고 넘겨 짚었다. 지금이야 그럴 리 없다, 이것이 군 오락(Military Entertainment)과 같은 다른 용어의 약어일 것이다, 등으로 생각하지만 말이다. 그 정도로 영상 속에서 군인들과 여배우의 소위 ‘케미’는 끈끈해 보인다. (왼쪽) 1954년 2월 16일, 제7보병사단의 탈의실 또는 대기실 입구에서. ‘마릴린, 총검사단의 연인(SWEETHEART of the BAYONET DIVISION).’ (<영상 A>, 3분 27초 지점) (오른쪽) 1954년 2월 17일, 제3보병사단. 슬레이트, ‘Marilyn + ME’ (<영상 A>, 16초 지점) 1954년 2월 17일, 제3보병사단 무대에서. (왼쪽: <영상 A> 1분 25초 지점. 오른쪽: <영상 A> 1분 15초 지점) 1954년 2월 18일, 제2보병사단 무대 ‘Bulldozer Bowl’에서. (각각 <영상 C> 4분 1초, 3분 41초 지점) 그리고 여배우들의 인생선이 교차한 순간 마릴린 먼로의 이 역사적인 내한공연은 한국어 콘텐츠에서 보통 다음의 두 가지 꼭지로 소비된다. ‘세상에, 마릴린 먼로가 한국에 왔었다고?’ 아니면 ‘마릴린 먼로가 최은희 와 만났던 것 알아?’. 사실 두 나라의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이 여배우들의 만남에 대해서는 어떤 맥락도 찾기 어렵다. 심지어 국내 신문에서도 딱히 보도된 기사를 발견하지 못했다. 이 만남은 일정 마지막 날인 19일, 대구 동촌비행장(K-2 공군기지)에서 이뤄졌다. 이 순간은 <영상 A>에 기록돼 있는데, 이로부터 몇 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우선, 이 영상은 슬레이트 외에는 매우 어둡게 찍혀서 처음에는 인물이 잘 식별되지 않았다. 보통 이런 경우는 아무리 조명 부족 등의 여건을 감안하더라도 실제로 새벽이나 늦은 저녁 등 어두운 시간대에 찍혔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럴 때 시간대를 반영하면서도 내용이 잘 식별되고 현실감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도록 색상을 보정하는 것이 바로 기록영상 색보정의 핵심이다. 색보정 후에 비로소 마릴린 먼로 양 옆에 나란히 서서 카메라를 보고 포즈를 취하고 있는 영화배우 최은희, 연극배우 백성희 의 모습을 알아볼 수 있었다. 사진으로 널리 알려진 바로 그 장면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국내외를 막론하고 잘못 퍼져 있는 대표적인 정보 중 하나를 확실히 검증할 수 있게 됐다. 이 대구 장면은 이따금 잘못 안내되는 것처럼 최은희 등이 마릴린 먼로의 ‘입국’을 환영하기 위해 마중 나온 장면이 아니라, 마지막 일정을 앞두고 대구에 도착한 마릴린 먼로를 맞이하러 온, 크게 보면 수일 동안의 공연을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환송의 의미로 나온 장면이다. 심지어는 이 장면의 장소를 여의도공항으로 오인하는 내용도 은근히 많이 보인다. 아마도 마릴린 먼로가 군 수송기에서 내리는 모습이 담겨 있어서 이 모든 오해가 시작됐을 듯 하다. 하지만 여러 소스를 교차 검증하고 전체 맥락을 살펴보면 사실이 명확해진다. 1954년 2월 19일, 대구 K-2 공군기지에서. 슬레이트(<영상 A> 4분 35초 지점) 및 세 배우가 함께 한 모습(<영상 A> 5분 18초 지점) 영상에서 마릴린 먼로는 군용기에서 내려와 카메라를 든 수많은 헌병에 둘러싸여 환대를 받는다. 그러고는 환영 인파에 포함돼 있던 두 배우를 만나 함께 팔짱을 끼고 촬영 시간을 가진다. 이때 관계자로 보이는 한국인 중년 남성이 둘 보이는데, 이중 하나가 마릴린 먼로에게 무어라 말하자 ‘Thank you’라고 말하는 입모양이 보인다. 아마도 한국의 두 배우가 마중 나왔다는 설명을 들었을 듯하다. 이 남성들의 존재로 인해 이 만남이 배우들의 의사보다는 어떤 이유로 기획된 것이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일정 내내 처음 보는 군인들과 놀랍도록 친밀한 모습을 보였던 그녀도 이 순간에는 딱히 긴 대화를 나누지 않고 데면데면한 모습을 보인다. 이 짧은 장면 이후는 그녀가 주변의 전투기 날개에 올라 원래 그렇듯이 포즈를 취하며 카메라 촬영에 응하는 장면이 이어진다. 이 시기의 백성희 배우에 대해서는 의미 있는 정보를 찾을 수 없지만, 최은희 배우는 이때 자신의 여섯 번째 출연작인 신상옥 감독의 < 코리아 >(1954) 촬영이 끝났거나 막바지 단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코리아>는 신상옥 감독의 두 번째 작품으로서, 한국의 각 명승지와 관련된 고사를 극화하여 엮은 문화영화였다. 신상옥 감독은 이 영화를 1952년부터 제작에 착수해 1954년 5월 1월에 개봉하게 되는데, 이때의 인연으로 1954년에 최은희와 결혼한다. 해방 공간에서 신예 영화인으로 주목받던 최은희는 전쟁기를 거치며 여러 가지 사건으로 배우로서의 경력과 개인사 모두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돌이켜 보면 <코리아>는 신상옥, 최은희 부부에게 앞으로 펼쳐질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영화같은 인생 역정의 출발점이었다. 마릴린 먼로와의 뜬금없는 만남에 대해 구체적인 맥락이 밝혀지지 않은 상황에서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지만, 둘의 인생 역정에서 꽤나 비슷한 시기에 조우했다는 생각은 든다. *** [1] 마릴린 먼로의 마지막 인터뷰 중 발언이다. 원어로는 “ Please don’t make me a joke. ”로서, 의미는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으나 선정적 이미지나 가십거리로 자신을 단순화하고 규정해 온 언론과 대중에 대한 마지막 호소로 읽힌다. [2] Liesl Bradner (2026. 2. 18), When Marilyn Monroe Interrupted Her Honeymoon to Go to Korea , HistoryNet Retrieved from https://www.historynet.com/when-marilyn-monroe-interrupted-her-honeymoon-to-go-to-korea/ [3] 컬렉션 사이트의 검색 필터 중 ‘미군위문협회(USO)’를 선택하면 이 영상들이 조회된다. [4] 원 소장처의 local ID로 구분하면, (A)는 111-LC-35128, (B)는 111-LC-35129, (C)는 111-LC-35130이다. [5] 제1해병사단 방문 장면은 영상에 기록되지 않았으나 신문보도 와 스틸사진들이 존재한다. [6] 제24보병사단 방문 장면은 영상에 기록되지 않았으나 신문보도 됐다. 24, 25보병사단의 방문 순서는 알 수 없다. [7] 제45보병사단 방문 장면은 영상에 기록되지 않았으나 신문보도 됐다. [8] 핀업걸(Pin-up girl)은 매력적인 여성을 촬영한 사진이나 여성을 묘사한 일러스트레이션 또는 이를 활용한 잡지나 달력 등을 말하며, 주로 벽에 핀으로 고정하고 감상하던 것에서 유래한 명칭이다. 제2차 세계대전기부터 군인들을 중심으로 유행했으며, 이후에도 남성 중심의 작업장 등에서 흔히 볼 수 있었다. 마릴린 먼로는 미군 기관지 Stars & Stripes 에서 선정한 ‘1951년 미스 치즈케이크’(치즈케이크는 핀업걸의 은어임)였다. [9] 남성 중심의 군대에서 여성의 신체를 대상화하는 문화 자체를 비난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나, 정치적 올바름을 위해 아키비스트가 실존하는 과거의 기록과 현상을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윤색할 수는 없다. 이 글은 ‘바람직함’에 대한 논고가 아니라 시대적 맥락 속에서 미군과 마릴린 먼로가 어떤 결핍 상태에 놓여 있었으며 서로를 어떻게 바라봤는가에 대해 주목한 것임을 밝힌다. [10] 미 육군의 TV시리즈 The Big PIcture 중 < USO - Where ever We Go >는 USO의 탄생 배경과 취지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 “군인이 자신이 속했던 민간사회(old civilian)와의 연결을 유지하는 것이 사기를 위해 중요한 것임을 미군 당국도 알고 있습니다”, “USO는 고향의 사람들이 당신을 잊지 않았으며 신경쓰고 있다는 것을 알려줌으로써 군인과 민간의 삶을 연결지어 주는 곳입니다.” [11] Liesl Bradner, 앞의 글 [12] The Daily Record . (Dunn, NC), Feb. 23 1954. [13] 필자 개인의 인상이 포함됐으며 어쩌면 ‘군인과 꽃’ 클리셰를 바라보는 시각과 유사한 안이한 해석일 수도 있다. [14] 정확히 말하면 끈 없는 드레스(strapless dress)는 아니다. 얇은 끈의 드레스를 수사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15] The Daily Record . (Dunn, NC), Feb. 17 1954. [16] The Key West citizen . (Key West, FL), Feb. 18 1954. [17] Liesl Bradner, 앞의 글 [18] Liesl Bradner, 앞의 글 [19] Spoto, Donald. 2001. Marilyn Monroe: The Biography . New York: Cooper Square Press. Originally published New York: Harper Collins, 1993. p.262.
2001년 | 싸이더스 감독: 허진호 | 각본: 류장하 이숙연 신준호 허진호 | 제작: 차승재 진가신 히데시 미야지마 | 촬영: 김형구 | 미술: 박일현 | 음악: 조성우 CAST 상우: 유지태 | 은수: 이영애 | 할머니: 백성희 | 아버지: 박인환 | 고모: 신신애 허진호 감독의 < 봄날은 간다 >(2001)는 그의 데뷔작 < 8월의 크리스마스 >(1998)과 함께 한국의 멜로, 로맨스 장르를 이야기할 때 영원히 언급될 작품입니다. “사랑이 변하니…” “라면 먹고 갈래요?” 같은 대사들의 일상적 울림과 함께, 이 영화는 ‘연애’라는 관계에 깃들어 있는 씁쓸한 감정들을 리얼하게 드러냅니다. 현장 공개는 2001년 여름에 있었습니다. 상우(유지태)가 은수(이영애)에게 “사랑이 변하니”라고 말하는 바로 그 장면이었죠. 묵호시 삼본아파트 앞, 해안도로와 바다가 함께 하는 그곳. 버스에서 내린 은수는 상우에게 다가가 이별의 말을 전합니다. 현장은 너무나 조용했는데요, 가끔 새 소리나 동네 아낙들 목소리가 들릴 뿐이었습니다. “우리 헤어지자.” “내가 잘할게.” “헤어져.” “너 나 사랑하니? (침묵) 사랑이 변하니… (침묵) 헤어지자…” 연인이 이별하는 일반적인 장면이지만, 그 감정을 영화에서 제대로 표현하는 건 의외로 쉽지 않습니다. 여기서 허진호 감독은 ‘숏-리버스 숏’으로 두 사람의 얼굴을 나누지 않고 하나의 테이크를 사용합니다. “두 사람의 시간이 실시간으로 한 번에 진행될 때와, 시간을 잘라서 붙여 놓았을 때는 굉장히 다른 느낌이에요. 난 전자의 느낌이 더 좋았어요.” 이 영화의 카메라는 김형구 촬영감독(맨 오른쪽)이 잡았습니다. <8월의 크리스마스>가 유영길 촬영감독의 유작인데요, 김형구 촬영감독은 유 감독님의 촬영부 출신이었죠. 허진호 감독은 현장에서 스스로를 “헤매는 스타일”이라고 말하는데요, “설명도 안 하고, OK 사인도 잘 안 주고 그러는데, 스태프들이 많이 이해해주었다”고 고마움을 전합니다. 은수는 사랑에 대해 다소 냉소적인, 어쩌면 사랑을 믿지 않는 인물입니다. 이영애는 이렇게 말합니다. “감독님은 물론 배우와 스태프를 통틀어서 아무도 은수에 대해 똑 부러지게 정의 내릴 수 있는 사람이 없었어요. 뭐라고 한마디로 말하기가 참 어려운 인물이에요. 하지만 여자라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인물이기도 하고요.” 버스 안 현장 모습입니다. 모자를 쓴 허진호 감독 뒤로 류장하 조감독이 보입니다. 이 영화의 시나리오를 쓰기도 했는데요, <8월의 크리스마스> 조감독이기도 했죠. 2004년엔 < 꽃피는 봄이 오면 >으로 감독 데뷔했고 < 순정만화 >(2008) < 더 펜션 >(2018) 등의 작품을 남겼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2019년 2월 3일에 53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다시 한번 감독님의 명복을 빕니다. 두 배우의 연기를 허진호 감독이 미소 지으며 보고 있네요. 이영애는 자신과 유지태와 허진호 감독의 성격이 비슷했고, 그래서 현장에서 잘 맞았다고 하네요. 한편 허진호 감독은 “과연 사랑은 변할까”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합니다. “사랑뿐만 아니라 모든 게 다 변하는 것 같아요. 그게 나쁜 것도 아닌 것 같고. 사람 자체가 변하는 것 같아요. 자신의 모습을 지키려는 것도 좋지만, 변해가는 것에 대해 집착하고 붙잡으려 한다면 행복해지는 데 문제가 있지 않을까 싶어요.” 허진호 감독은 은수라는 캐릭터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은수도 혼자 있을 때는 힘들어하는 부분들이 분명히 있겠죠. 하지만 누군가가 곁에 있을 때는 활발하고 자기중심적이 되는 여자예요. 그래서 상처를 줄 수도 있고. 상우는 사랑을 처음 해보는 거니까 사랑이 변하지 않을 거라 생각하지만, 은수는 사랑이 없어지면 사랑했다는 사실조차 부정해버릴 수 있는 게 사람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인물이에요.” 유지태는 <봄날은 간다>가 자신에게 “일종의 실험”이라고 말합니다. ‘자연스럽게’ 채워나가는 느낌의 연기는 처음이었기 때문이죠. 그러면서도 ‘자연스러움을 가장한 자연스러움’을 경계해야 했고요. 유지태는 <봄날은 간다>의 감정 연기가 조금은 달랐다고 합니다.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진짜 감정을 다루니까요. 사랑하던 사람과 헤어졌다고 정말 하루 종일 아무것도 못 하고 슬퍼하진 않잖아요. 실제로는 직장에 나가 일도 하고 그러죠. 영화 속에서 상우가 은수에게 청혼했다가 거절당하는 신이 있는데, 속으로는 슬프고 힘들지만 둘 다 겉으로는 슬퍼하지 않아요. 그런 내재된 슬픔이 보는 사람에게 전이될 수 있는 영화가 <봄날은 간다>라고 생각해요.” 처음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 이영애는 “슬펐다”며, 그래도 좋았던 건 ‘소리’였다고 합니다. “평소 자연의 소리에 민감한 편이었고 관심도 많았기에 소리를 채집하는 사람들이라는 설정이 매력적으로 다가왔죠.” 한편 유지태는 “멜로 영화 같지 않다”는 게 첫인상이었다고 합니다.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슬픔을 다룬 영화거든요. 누구나 슬픔이 있잖아요. 사랑하고, 헤어지고, 잊혀지는 슬픔.” “이 신에선 상우가 화면 밖으로 나가야 하는 거 아냐? 은수가 나가니까 좀 이상한데.”(허진호) “그 상황을 빨리 벗어나고 싶어서가 아닐까요?”(이영애) “그럼 이번엔 제가 나가는 걸로 한 번 해볼게요.”(유지태) 세 사람은 하나의 테이크가 끝나면 마치 오누이들처럼 소곤소곤 모니터 앞에서 대화를 나누고 다음 테이크를 준비합니다. 그래서 두 사람의 이별 장면은 쉴 새 없이 변했는데요, 은수가 상우에게 악수를 청하기도 하고, 상우가 그 손을 만지작거리기도 하고, 대사를 빼기도 하고, 은수와 상우가 번갈아 가며 화면 밖으로 나가기도 하고… 그렇게 10번이 넘는 테이크가 이어졌습니다. 허진호 감독은 <봄날은 간다>에서 되도록이면 설정하지 않고, 콘티도 만들지 않고, 상황만 던져준 채 배우들과 함께 만들어나가는 방식으로 영화를 찍었습니다. 각자 포커스를 달리한 두 배우의 투 숏입니다. 허진호 감독은 유지태의 첫인상을 ‘맑다’라는 형용사로 표현하는데요, 촬영 전에 상우는 어떤 사람일지 정말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합니다. 한편 이영애는 첫 만남부터 조금 남다른 느낌을 받았다고 하네요. < 선물 >( 오기환 , 2001) 현장에서 바로 올라왔는데, 공항인가 역 화장실에서 막 세수를 한 맨 얼굴이었다고 합니다. 허진호 감독은 유지태에서 “물이 안 채워진 유리잔처럼 배우가 아무것도 가져오지 않기를” 바랐다고 합니다. 그래서 “빈 잔에 물이 조금씩 채워져서 찰랑찰랑 넘칠 때쯤 영화가 개봉했으면 좋겠다”고 했다고 합니다. “백지상태에서 함께 조금씩 그림을 그려나가길 바라셨던 거죠.” <봄날은 간다>는 한국의 싸이더스의 홍콩의 어플라우즈 픽쳐스와 일본의 쇼치쿠가 공동 제작한 영화입니다. 제작 발표회에서 각국 제작진과 배우, 감독이 함께 카메라 앞에 섰습니다. 맨 오른쪽에 홍콩의 제작자인 진가신 감독이 보이네요. <봄날은 간다>는 “소리를 채집하는 사운드 엔지니어의 이야기”라는 설정에서 발전한 영화입니다. 그러면서 작가들과 영화사 기획실 사람들의 연애담들이 하나둘씩 보태졌고, 그렇게 시나리오가 완성되었습니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8월의 크리스마스>에 비하면 <봄날은 간다>는 훨씬 더 거칠고 현실적이며 기복이 큰 감정을 담고 있습니다. 이미지 디지털화 지원 NAVER
동시녹음 시대의 한국영화를 기억하는 사람들이라면 성우의 대명사는 고은정 일 것이다. 고은정을 모르더라도 “경아, 오랜만에 누워보는군”, “아 행복해요. 더 꼭 껴안아주세요”라는 1970년대 영화의 대사는 익숙할 것이다. 각종 TV프로에서 패러디되어 마치 후시녹음 시대의 전형처럼 남아있는 그 목소리, <별들의 고향>(이장호, 1974)에서 안인숙이 연기한 경아의 목소리가 바로 성우 고은정의 소리이다. 1960~70년대 한국영화를 제대로 접하지 않았어도 그 시대 영화 속 인물들의 목소리나 말투는 왠지 익숙하다. 고은정을 위시한 많은 성우들이 만들어낸 영화 속 인물들의 목소리와 말투는 이 시기 한국영화의 특징 중 하나로 남아있다. 고은정은 영화 후시녹음은 물론 라디오 드라마 연기자, 문화영화의 나래이터 때로는 텔레비전 외화 시리즈 더빙과 텔레비전 방송진행까지 영화와 방송계를 넘나들며 활동한, 한 시대를 대표하는 목소리의 주인공이었다. 고은정은 1936년 2월 1일 서울에서 태어나 그해 일본으로 건너가 6년간 일본에서 자랐다. [사진1, 2] 1940년 일본에서 찍은 가족사진이다. 일제강점기 일본에서 사업을 했던 부친 고희정과 모친 김재순, 그리고 좌로부터 오빠 고흥욱, 동생 고흥호, 구술자 고은정이다. 1941년 말을 타고 찍은 사진을 보면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녀를 확인할 수 있다. 1940년 일본에서 찍은 가족사진이다. 일제강점기 일본에서 사업을 했던 부친 고희정(高犧鼎)과 모친 김재순(金在順), 그리고 좌로부터 오빠 고흥욱, 동생 고흥호, 구술자 고은정이다. 1941년 말을 타고 찍은 사진을 보면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녀를 확인할 수 있다. 채 6살이 안된 어린 그녀는 당구를 삼백 정도나 치던 어머니가 아버지와 함께 당구장에서 당구를 즐기던 모습을 기억한다. 그녀는 자줏빛 카페트 위에서 연분홍 와이셔츠에 감색 망사 조끼 그리고 회색 스커트를 차려입은 어머니의 모습을 생생하게 떠올렸다. 생모와 보낸 시간이 짧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 어머니의 영향은 크고 강렬했다. 음악과 미술에 조애가 깊은 어머니는 사별하기 전까지 어린 그녀의 예술적 감수성을 부지런히 키워줬다. 그래서 어린 그녀는 밀레의 만종을 보고 그림에서 종소리가 난다 말할 만큼 충만한 감성과 관찰력을 지닌 아이로 자랄 수 있었다. 헌신적이고 생활력이 강했던 할머니와 새어머니로부터는 오랜 세월 동안 방송과 영화계에서 지치지 않고 일할 수 있는 근성을 배웠다. 그녀는 개화기와 일제강점기, 해방과 한국전쟁을 겪으며, 미망인으로 가족을 지켰던 강인하고 지혜로운 할머니를 일컬어 시대를 살아낸 모성이라고 표현했다. 어린 시절에는 모친의 죽음을, 청소년기에는 한국전쟁과 부친의 죽음을 겪었고 전후 재건기 대학생 시절에 사회생활을 시작해 목소리 하나로 시대를 풍미한 그녀 또한 집안의 강인한 모계혈통을 이을 만한 여성이라 할 만한다. 그녀는 1954년 KBS방송극회원 1기 (서울중앙방송극단 연구원 1기) 즉, KBS성우로 방송계에 입문한다. 라디오가 유일한 전파매체이던 시절, 인기 있는 라디오드라마는 사람들의 일상적인 말투를 바꾸어 놓았다. 심지어 성격파 배우 노경희 조차 영화 후시녹음에서 당시 인기였던 최초의 라디오드라마 <청실홍실>(1956, 조남사 작, 이경재 연출)의 전후파 여성 동숙(성우 정은숙 연기)의 말투를 따라 말끝을 흐리며 대사를 했다하니 라디오드라마 성우들의 영향력은 대단했던 것이다. 고은정은 KBS방송극회원으로 선발되고 난 뒤 1955년 KBS 아나운서 시험에도 합격하여 8개월 동안 아나운서로 활동했다. [사진3] 1955~56년 KBS 아나운서시절, 국회부의장실에서 찍은 사진이다. 왼쪽부터 당시 KBS 아나운서였던 장금자, 고은정, 강영숙, 라연수 이다. 어린 시절부터 웅변보다는 동화구연에 더 뛰어났던 그녀는 아나운서 생활을 8개월 만에 정리했다. 목소리에 배어있던 바이브레이션은 아나운서의 발성에 적합하지 않았고 무엇보다 그녀의 자유로운 성격은 다소 경직되고 보수적이던 아나운서실의 문화와 어울리지 않았다. 물론 발성을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게 된 후에는 국립영화제작소의 뉴스와 나래이션을 도맡아 했지만, 이제 막 방송에 데뷔해 연기에 대한 설렘으로 가득 차있던 시절의 그녀에게는 보도보다 드라마가 훨씬 더 어울렸다. 실제로 그녀는 대단한 이야기꾼이었다. [사진4] 1957년 KBS남산 사옥에서 찍은 KBS 방송극회원 1기생들. 왼쪽 뒤부터 김수일,고은정, 박용기, 김옥경, 윤미림, 오른쪽아래부터 이창환, 김소원, 심영식, 신원균 당시 KBS 방송극회원 동기생들은 영화를 보는 대신 그녀에게 영화 줄거리를 들으며 영화를 즐겼고 그래서 그들 사이에 영화 보러 가자는 말은 그녀에게 영화 이야기를 들으러 가자로 통했을 정도로 그녀의 이야기 능력은 자타가 인정하는 수준이었다. 그녀가 가진 이야기꾼으로서의 재주는 후에 방송작가로 등단할 수 있는 바탕이 된다. 그래서 그녀가 구술한 사건과 경험들은 늘 흥미롭거나 아련한 이야기들이다. 그녀가 들려준 한국전쟁 경험은 전쟁을 배경으로 한 애틋한 우정과 사랑의 드라마였다. 십대 문학소녀의 시선에서 전쟁과 피난의 여정은 친구와의 아쉬운 이별 이야기로 그려졌고, 9.28 수복 후 여군으로 생활하며 지낸 부산의 훈련소는 소공녀의 방으로 도치되었다. 물론 성장소설의 한 대목처럼 묘사된 그녀의 이야기 속에도 잔인하고 고된 현실은 존재한다. [사진5] 서울 수도여고 1학년 재학시절 동기생들과 함께 찍은 우정사진. 왼쪽부터 고은정, 최도영, 최순림. 그녀는 9.28 수복 후 서울에서 여자의용군 2기를 모집할 때 예술대에 자원입대한다. 이때 동덕여고 무용부, 한성여고 밴드부가 단체로 입대했고 그녀를 포함한 수도여고 학생 4명 또한 중창단으로 들어가 병과 훈련과 예술대 훈련을 받았다. 당시 여자의용군은 정훈대, 첩보대, 전투부대, 예술대에서 활동했고 1, 2기생 중 우수자는 전선에 배치되어 현지 임관되기도 했다. 그녀는 1.4후퇴 때 의용군 예술대 대원들과 함께 부산으로 피난해 영도의 학교건물에서 내무반 생활을 이어갔다. 위문공연을 하며 종군할 생각으로 연습과 훈련을 이어가는 속에서도, 여고생 4명은 내무반 건물 한 쪽에 책을 쌓아 소공녀의 방을 꾸미며 막막한 전쟁기를 버텨갔다. 그녀는 내무반에서 입은 부상으로 병가 제대를 하고 부산에 피난 와 있던 수도여고에서 학업을 재개했다. 여고생들에게 지낼 곳을 내어준 신부님 댁에 기숙하면서 장갑을 짜고 수를 놓아 교통비를 마련해 어렵게 학교에 다녔다. 그 속에서도 친구와 함께 쓰던 좁은 방에 씨레이션 박스로 책상을 만들고 보리밥풀로 교복의 각을 세울망정 벽에는 그리어 가슨, 그레고리 펙, 몽고메리 클리프트의 사진을 붙여 놓고 창 밖 하늘과 연결되도록 해 서정적인 상상의 공간을 만들어 어려운 현실을 견디려했다. 전쟁기 고단한 생활을 이어가는 속에서도, 휴전반대시위에 참여한 학생들을 인솔하는 규율부였던 그녀는 인기 많은 경기고 대대장과 안면을 트고 YMCA 영어강좌에 함께 참석하는 등 설레는 순간들로 그 시절을 회상한다. 그녀의 전쟁담은 사춘기 소녀가 주인공인 성장영화를 떠올리게 한다. [사진6] 1952년 수도여고 부산 피난 시절 동기생들과 함께 찍은 우정 사진. 왼쪽 아래 황양자, 고은정. [사진7] 1952년 수도여고 부산 피난 시절 휴전반대시위 중 규율부 동료와 함께 찍은 사진. 왼쪽부터 김진숙, 고은정 역사적인 사건을 정서가 도드라지는 개인사와 연결시켜 묘사하고, 감정이 고리가 되어 이야기를 자유롭게 이동시키는 방식이 그녀의 구술이 지닌 논리이자 특징이다. 그러다보니 그녀의 구술 채록문에서 가령 한국전쟁에 관한 사건은 각기 다른 주제로 다른 회 차에 반복해서 등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모두 완결된 이야기로 정리되기에 전쟁과 피난생활에 관련된 다양한 면들을 풍부하게 접할 수 있다. 그녀는 전쟁이 끝나고 숙명여대에 진학하여 연극반 활동을 한다. 이때 선배의 권유로 우연히 지원하게 된 KBS방송극회원 모집에 합격하여 방송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는 연극에 대한 갈증이 있어 친구와 함께 서라벌예술대학 연극영화과에도 진학을 결심한다. 그래서 백병원에 줄을 서서 피를 팔아 번 돈으로 서라벌예대 입학원서를 내고 남은 돈으로 당시 한창 유행하던 핫케익을 먹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연기욕심 덕에 매일 정동의 KBS방송국과 남산 서라벌예술대학 그리고 청파동의 숙명여대를 발에 못이 박히도록 뛰어다녀야했다. [사진8] 1956~7년경 KBS방송국(HLKA 서울중앙방송국) 정동사옥 앞. 성우로서의 그녀의 기초체력은 연극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고은정는 성우란 아름다운 목소리 뿐 아니라 연기에 대한 이해와 사랑, 그리고 면도날처럼 섬세한 감각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라 말한다. 그녀는 끝까지 라디오를 떠나지 않았기에 오랜 시간 동안 목소리로 표현할 수 있는 섬세한 연기실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물론 처음부터 그녀가 뛰어난 성우로 자리매김하지는 않았다. 그녀가 데뷔했을 당시 이미 전문 성우로 이름이 알려진 동료들이 있었다. 작은 녹음실에서 뿜어져 나오는 젊은 에너지들이 경쟁하고 상처받고 번민하는 일은 빈번했다. 그녀는 방송국에서 연습하던 대본들을 주워와 매일 집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여러 역할을 독학으로 연습했다. 그러던 순간 귀가 트이는 경험을 하게 된다. 신체 내부의 울림으로 자신의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타인이 듣는 소리로 인식하며 자신의 객관적인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경험으로 자신감을 얻은 후 KBS 라디오드라마 <산넘어 바다건너>(조남사 작, 이보라 연출, 1957)의 미라 역으로 주목 받기 시작한다. 이후 박남옥 감독의 남편인 연출가 이보라의 연기지도로 관습화된 연기와 언어가 아닌 현장의 연기와 실제 언어를 반영하는 훈련을 통해 KBS 라디오드라마 <동심초>(조남사 작, 이보라 연출, 1958)에서 19살 경희 역을 훌륭하게 소화해낸다. 그리고 이어서 KBS 라디오드라마 <장희빈>(이서구 작, 박동근 연출, 1959)에서 독한 장희빈의 연기를 탁월하게 해내 10년 뒤 텔레비전드라마 <장희빈>이 등장하던 시기에도 그녀의 이름이 회자될 정도로 대중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사진9] 1959년 KBS방송국(HLKA 서울중앙방송국) 라디오 드라마 <장희빈>의 마지막 녹음을 마치고 촬영한 사진이다. 서있는 이들 왼쪽부터 성우 박동근, 백성희, 고은정, 정애란, 박순옥, 작가 이서구, 김소원, 오정환, 앉아있는 이들 왼쪽부터 나옥주, 오승룡, 장서일. 1959년 <장희빈>의 마지막 녹음을 마치고 나온 사진 속 화사한 그녀의 모습처럼 그녀는 1954년에 KBS 성우로 발탁된 뒤 5년 만에 주연급 성우로 자리를 잡게 된다. 1950년대 후반 인기 라디오드라마가 방송 직후 영화로 만들어지던 시절에 성우 즉, 라디오연기자였던 고은정이 동명 영화의 후시녹음을 맡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구술자는 영화 <동심초>(신상옥, 1959)에서 자신이 했던 19살 경희를 연기한 엄앵란의 목소리를 맡게 된다. [사진10] <동심초>에 미망인의 딸 경희역으로 출연한 배우 엄앵란의 목소리를 고은정이 더빙했다. 애초에 좀 더 큰 비중의 역을 추천받았지만 본인에게는 라디오에서 했던 역의 연결이 중요했고, 귀엽고 사랑스러운 동작이 돋보이는 엄앵란의 연기가 마음에 들어 경희 역을 고집했다고 한다. 엄앵란 또한 자신의 이미지를 잘 살려준 그녀의 목소리 연기가 간절했기에 배우 엄앵란과 성우 고은정의 콤비 관계는 영화 <동심초>(신상옥, 1959)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심지어 엄앵란이 영화제 연기상 수상을 목적으로 후시녹음을 직접 했던 작품에서도 그녀의 도움과 보완이 필요했을 정도로 고은정은 엄앵란에게 각별한 존재였다. 두 사람은 적어도 영화텍스트 안에서는 하나의 정체성으로 움직였고 때때로 개인사적인 궤적 또한 묘하게 겹쳐지기도 했다. 1963년 3월 잡지 국제영화 주최 독수리상 시상식에서 여자방송인상을 수상한 고은정과 여자영화배우상을 수상한 엄앵란의 행복한 사진을 보면 두 사람의 얼굴마저 닮아 보인다. [사진11] 1963년 3월 잡지 국제영화 주최 독수리상 시상식에서 여자방송인상을 수상한 고은정과 여자영화배우상을 수상한 엄앵란이 축하연을 즐기고 있다. 숙명여대 사진동아리 숙미회에서 주최한 고은정과 엄앵란 사진전에서 보듯 대학 동문인 둘은 오랜 기간 동안 연기자로서 서로에게 기대고 의지하며 대표적인 배우-성우 콤비로 자리매김한다. [사진12] 1960년대 초반 숙명여자대학교 사진동아리 숙미회의 엄앵란·고은정 사진전에 참석한 고은정과 엄앵란 1963년 8월 방송문화상을 수상하는 고은정은 이미 당시 최고의 성우였다. [사진13] 1963년 8월 15일 방송문화상 수상식 현장. 공보부장관 임성희, 고은정. 엄앵란 뿐만 아니라 김지미, 문희, 윤정희, 남정임, 정윤희, 안인숙 까지 당대의 내노라할만한 여배우들의 목소리는 전부 고은정을 거쳐 갔다. 영화 후시녹음에서 목소리 연기는 입모양에 맞춰 대사를 넣어주는 역할 뿐 아니라 배우들이 미처 다 하지 못한 연기를 완성시켜주어야 했다. [사진14] 1960년대 후반 남산 한양녹음실에서 영화 후시녹음 중인 성우들. 왼쪽부터 강부자, 고은정, 김순원. 1960년대 후반 남산에 있던 한양녹음실에서 영화 후시녹음 중인 그녀의 표정을 보면 성우 또한 연기자임을 확인할 수 있다.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이 싫어 제대로 울지 않는 영화 속 여배우의 표정에 소위 된장을 풀어달라는, 즉 눈물을 펑펑 쏟게 해달라는 감독의 제안을 받을 때면 여배우가 얼굴을 가리거나 커트가 바뀌는 순간을 노려 눈물을 쏟아내야 했다. 연기자가 대사를 실수한 채로 어영부영 넘어갈 경우 입모양에 맞춰 애드리브나 웃음으로 그 장면을 살려내는 것은 전부 성우의 몫이었다. 배우들의 겹치기 촬영으로 연기의 몰입도가 부족하거나, 빠르게 진행되는 촬영현장에서 놓칠 수밖에 없는 부분은 후시녹음 단계에서 성우들의 연기로 보완해야만 했다. 그러다보니 후시녹음 된 한국영화에서 배우가 말꼬리를 흐리거나 대사를 반복하는 장면이 종종 등장하는데 이는 배우의 대사가 대본과 맞지 않아 성우가 궁여지책으로 보완한 경우이고 또 컷이 바뀔 때 웃음소리 등이 이어지는 경우 편집의 속도나 연속성이 맞지 않아 목소리로 연결을 맞춰 준 장면들이라 하겠다. 남산의 한양녹음실 위층에는 다방이 있어 녹음하다 잠시 다방에서 쉴 때면 연예부 기자들이 찾아와 인터뷰를 요청하기도 했다하니 녹음실과 주변 풍경 또한 영화촬영 현장만큼이나 분주했던 듯하다. 때로 후시녹음이 한국영화의 진보를 더디게 했고 더빙을 탁월하게 잘 해준 성우들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역설적인 비난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당시의 영화제작의 관행인 입도선매와 입도선매로 투자받을 수 있는 조건인 특정 배우들의 겹치기 출연 그리고 배우들의 겹치기 출연을 지탱해야 하는 빠른 제작 속도 등, 꼬리에 꼬리를 무는 영화 제작의 악조건은 촬영현장에서 부족한 부분을 후반작업에서 성우들이 메워주기를 원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실력 있고 인기 있는 성우들은 낮 시간에 라디오방송 녹음을 마치고 영화녹음실로 출근해 밤새 영화를 녹음하는 식으로 밤낮없이 일하며 1960~70년대를 보내게 된다. [사진15] 1963년 만리동 녹음실에서 러시필름을 보며 후시녹음 중인 성우들. 그러나 영화가 극장에 걸리기 전 마지막 순간에 숨을 불어넣는 그들의 역할은 영화 텍스트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다. 영화의 크레딧에 올라가지 않았기에 기록으로 남아있지 않아 그녀의 영화후시녹음 작품목록을 완전하게 완성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밤낮없이 녹음실에서 영화 후시녹음을 했고 심지어 고은정과 엄앵란, 이창환과 신성일 등 성우와 배우 콤비가 공공연하게 회자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영화 크레딧에 성우들의 존재는 남아있지 않다. 당연하고 공공연하지만 기록되지 않은 채, 타인의 연기에 목소리를 넣어주는 일에 대한 회의감 때문에 그녀는 1983년도를 마지막으로 영화후시녹음을 그만둔다. 물론 1980년대 들어 한국영화계도 동시녹음으로의 변화를 꾀하긴 했지만 장비, 자본과 제작시스템의 문제 때문에 1980년대 내내 여전히 성우들의 후시녹음은 이어졌다. 연기에 갈증이 있는 그녀는 영화 일을 하면서도 자신의 이름으로 독보적이고 온전한 연기를 보여줄 수 있는 라디오가 항상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사진16] 1963년 동아방송 개국 시 동아일보사 정문 모습. 그러나 방송계 또한 1960년대 초중반부터 민영방송국들이 대거 등장하며 성우와 탤런트를 확보하기 위해 전속제를 추진하다보니 KBS에서 나와 프리랜서로 일을 고수해 온 그녀는 불이익을 받게 된다. 그리고 1960년대 후반 텔레비전 시대가 도래 하자, 엄연히 성격이 다른 매체임에도 불구하고 라디오가 부차적으로 여겨지는 안타까움에 직면해야 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라디오 방송의 인기시리즈 <법창야화>(MBC, 최풍 각본, 고무송 연출, 1977)나 <고백>(MBC, 1975~76)같은 프로그램의 주인공으로 활동을 이어갔다. [사진17] 1975년 2월 MBC 텔레비전 프로그램인 <유쾌한 청백전>에 출연한 MBC 라디오드라마 <법창야화>팀. 뒷줄 왼쪽 세 번째부터 고은정, 최풍, 김현직, 변웅전, 고무송PD, 아랫줄 왼쪽 두 번째부터 최선자, 김성옥, 홍성민. [사진18] MBC라디오 1인 드라마 <고백>팀. 성우 고은정이 홀로 엮어 나가는 모노드라마 형식으로 주목받았다. 왼쪽부터 고무송PD, 첫 회 주인공이었던 가수 문주란, 고은정, 유현종 작가. 뿐만 아니라 인기 텔레비전 외화시리즈 <왈가닥 루시>(1971)의 루시, <사랑스런 지니>(1977)의 지니 역을 더빙해 텔레비전에서도 그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사실 그녀는 1950년대 말 종각에 있던 한국 최초의 상업텔레비전 방송국인 HLKZ에서 이순재, 김승호와 함께 텔레비전 드라마에 성우가 아닌 연기자로 출연하기도 했다. 1959년 목조건물인 HLKZ방송국이 불에 타지 않았다면 텔레비전 연기자로 활동을 이어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라디오로 목소리가 널리 알려진 상태에서 1970년대 다시 텔레비전에서 얼굴과 목소리를 일치시켜 활동해야 된다는 것은 부담이었다. 20년이 넘도록 라디오와 영화, 텔레비전 방송에서 목소리를 전달했던 그녀가 방송 매체의 변화와 보이지 않는 역할에 회의를 느낀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그녀는 1977년 작가로서의 이력을 새롭게 시작한다. MBC 라디오 각본공모에 <대니 할머니>로 당선되며 성우에서 작가로 자리바꿈을 시도했다. 그리고 같은 해에 12년간 동아방송의 동명 프로그램에서 직접 집필했던 방송 원고를 바탕으로 한 에세이 <고운정 미운정>을 출간한다. 이 책은 1996년에 다시 재간되기도 했다. 작가로 데뷔한 뒤 성우 일을 접고 세계를 돌며 취재 여행을 다니기도 했으나 그녀의 목소리가 만들어 놓은 세계는 너무도 견고하여 작가로서의 활동은 성우의 명망 뒤에 숨겨지게 된다. 1977년 이후 그녀는 방송작가와 성우를 겸했고 영화 <위기의 여자>(정지영, 1987)를 각색하고 정지영 감독의 권유로 잠시 출연하기도 했다. [사진19, 20] <위기의 여자>(정지영, 1987)에서 각색을 맡았고 수명(정윤희)의 정신과 의사로 출연했다. 사실 그녀는 연극을 통한 연기활동을 대학시절부터 꾸준히 이어왔다. 라디오드라마 <동심초>(이보라 연출, 1958)와 <장희빈>(박동근 연출, 1959)으로 한창 바쁠 때에도 그녀는 제작극회 초기작인 연극 <불모지>(김경옥 연출, 1958)와 현대극회의 창립작인 연극 <칵테일파티>(이보라 연출, 1959)에 출연했다. 현대극회는 중앙방송국(KBS)과 기독교방송국(CBS)의 성우들과 작가 및 연출가인 이보라, 임희재, 조남사가 모여 만든 극단이다. [사진21] 1958년 7월 제작극회 4회 발표작 연극 <불모지>(차범석 작, 김경옥 연출). 왼쪽부터 효과 최창봉, 건너 띄고 이두연, 박현숙, 조동화, 건너 띄고 작가 차범석 작가, 연출 김경옥. 아랫줄 가운데 노인 분장을 한 고은정, 아랫줄 오른쪽 끝 안평선. [사진22] 1959년 10월 공연한 현대극회 창립기념 작 연극 <칵테일파티>(T.S 엘리엇 작, 이보라 연출). 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 꽃을 들고 있는 이가 박용기, 고은정, 연출 이보라, 이미경, 박기선, 오승룡. 둘째 줄 안경을 쓴 이가 각색 윤병일, 최을선 가운데 위쪽 분장하고 꽃을 들고 있는 신원균, 이우영, 최난희. 1962년 유치진이 만든 드라마센터의 연극에도 꾸준히 출연했다. 1966년 드라마센터의 연극 <나도 인간이 되련다>(오사량 연출)에는 나타샤 김역으로 1968년 드라마센터의 연극 <동굴>(유인형 연출)에는 유애 역으로 열연했고 1972년 7월 국립극장에서 공연한 극단 성좌의 연극 <돈 후안>(1972, 권오일 연출)에는 첼레스티나 역으로 유인촌과 함께 출연했다. [사진23] 1966년 5월 공연한 드라마센터 연극 <나도 인간이 되련다>(유치진 작, 오샤랑 연출) 중 한 장면. 왼쪽이 나타샤 역의 고은정이다. [사진24] 1968년 4월 공연한 드라마센터 연극 <동굴>(김승규 작, 유인형 연출)의 한 장면. 왼쪽부터 김정철, 민지환, 고은정, 백성희. [사진25] 1972년 7월 공연한 극단 성좌의 연극 <돈 후안>(막스 프리쉬 작, 권오일 연출)의 출연진. 왼쪽 상단 유인촌, 아랫줄 가운데 첼레스티나 역의 고은정, 오른쪽 옆에 최병학, 건너 띄고 이수나, 고은정 뒤로 돈 후안 역의 황일청, 그 오른쪽에 미란다 역의 노경자. 그뿐 아니라 막역한 사이인 최은희 선생의 배우극장 멤버로 꾸준히 공연을 올렸고 지방 순회공연까지 참여했다. 그녀는 성우로 인기를 구가하던 시절에도 연극에 출연하며 연기에 대한 열정과 애정을 보여주었다. 공적인 영역의 활동 또한 활발해 1982년부터 1985년까지 성우협회 이사장을 지내며 성우 에이전시를 만들어 처우개선에 힘썼고 정당 활동을 통해 정치적 신념을 표출하기도 했으며 오랫동안 성우, 작가, 배우, 교수 등 다양한 역할로 전문성을 펼쳐왔다. 그러한 전문성과 노련함이 그녀의 구술채록문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사진26] 1977년 단행본 『고운정 미운정』에 실린 작가 고은정의 소개 사진. 1950년 말 우미관에서 개봉한 서부영화들을 극장 영사실에서 더빙한 기억, 1971년 개봉 영화 <러브 스토리>(아더 힐러, 1970)의 영화홍보용 라디오드라마에 출연했던 경험, 영화후시녹음의 다양한 기술, 성우들과 영화감독들의 작업 스타일, 국립영화제작소의 뉴스녹음 방식 등 무척 흥미로운 내용들이 담겨져 있다. 하지만 그녀의 구술이 지닌 가장 큰 의미는 수많은 작품에 참여했지만 단 한 번도 크레딧에 이름을 올린 적 없고 영화와 관련된 수상을 해본 적 없는, 영화의 공적 기록과 역사에서 부재된 채 남아있는 그녀의 역할을 그녀의 목소리로 기록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