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진주
- 감독
- 김명제
- 제작년도
- 1959
- 출연
- 최무룡, 주증녀, 도금봉, 박노식, 변기종, 석금성, 이해룡, 하지만, 성소민, 신소영, 김정옥, 김칠성, 박점동, 송경호, 현송자
[사진] 김승호의 대표작 중 하나인 <혈맥>의 한 장면 ● 연극으로 시작한 3대 독자 김승호는 1918년 7월 13일 강원도 철원에서 3대 독자로 태어났다. 농사를 했지만 경제적으로는 윤택하여 어려움을 모른 채 귀여움을 받으며 자랐다. 일설에는 그의 아버지가 승적을 가진 적이 있었다고 한다. 본인은 이에 대해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으나 “양친께서 석왕사(釋王寺)에서 불교를 신봉하셨다” (『국제영화』 1959년 10월호) 고 말한 적이 있어 뜬소문만은 아님을 시사하고 있다. 어릴 때 이 복덩이에게 붙여진 이름은 해수(海壽)였다. 그가 네 살이 되자 부모는 아들의 교육을 위해 서울로 이사했다. 종로 청진동에 정착한 뒤 복덕방과 전당포를 하며 사림을 꾸려 나갔으나 얼마 못가 숙박업으로 전환하였다. 해장국으로 유명한 청진옥 맞은편 서울관광호텔 옆 골목에 있었던 대흥여관이 바로 그 출발이었다. 그가 입학한 수송국민학교는 집과 가까운 곳에 있었다. 그래서 공휴일에도 조무래기 친구들과 어울려 학교 운동장에 나가 놀기를 좋아했다. 그러나 명문인 보성(普成)중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는 심한 우울증에 빠졌다. 수재들과의 경쟁이 벅차서였는지, 1년 만에 그만 두고 말았다. 그 대신 집 근처에 있는 우미관이나 낙원동의 조선극장, 수은동의 단성사 등 극장을 찾아다니며 연극과 영화 보기를 즐겨 했다. 그때 이미 ‘분바른 무대 인생’의 길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셈이다. 그는 스무 살 되던 해 봄 동양극장의 전속극단인 황금좌로 박진(朴珍)을 찾아갔다. 연출부장인 박진은 당돌하게 연극을 하게해 달라고 조르는 이 초면의 청년에게 대뜸 호떡을 좋아하느냐고 물었다. 무슨 영문인지 잘 몰랐지만 그는 사실대로 잘 먹는다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내일부터 같이 고생을 하자”며 입단을 허용했다 .(김승호, 「나의 청춘과 예술의 편력」, 『국제영화』 1956년 3월호) 연구생 신분이었다. 그는 오래가지 않아 이 질문의 뜻을 알게 되었다. 공연지를 따라다니는 동안 정말 지겹도록 이 호떡을 먹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 당시 연극인들은 호떡으로 끼니를 때우다시피 했다. 그러나 김승호는 포기하지 않았다. 허기진 배를 참아가며 연극에 빠졌다. 선배들의 시중은 물론 단체의 잡일까지 마다하지 않았다. <전원교향악>이란 연극을 공연할 때였다. 그는 평소에 하고 싶었던 장님 역할을 맡고 있는 선배에게 떡을 사다가 권하며 아첨을 떨었다. 선배는 이런 호의가 기특했는지 주는 대로 받아먹었다. 그런데 공연 시간을 앞두고 급히 먹은 떡이 체했는지 그만 자리에 눕고 말았다. 그에게 대역의 기회가 왔음은 물론이다. 그동안 선배의 연기를 보며 익힌 보람이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이번에는 정식으로 캐스팅되었다. 그 첫 작품이 홍해성 연출의 <임자 없는 자식들>이었다. 1938년 그의 나이 스물두 살 때였다. 그 뒤 <백진주>, <아들의 심판>과 같은 연극에도 출연했다. 그러나 집에서는 이런 ‘광대 짓’을 못 마땅히 여겼다. 부모가 얼마나 완고했는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아들의 연극을 한 번도 보지 않았다. 이 무렵 동양극장 무대에 올려 크게 성공한 신파극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1936, 임선규 작, 홍해성 연출)가 영화로 만들어지게 되었다. 극장주인 홍순언이 김승호를 주연인 황철의 친구 역으로 나오게 해주었다. 그런데 현상 기사가 실수하는 바람에 없던 일이 되고 말았다 .(황문평, 『인물로 본 연예사: 삶의 발자국 1』 ‘서민의 우상 명배우 김승호’ 도서출판 선. 1998, 334쪽) 그는 해방 후 변기종이 주도한 자유극장으로 옮겨 연기부장을 맡아 박상익, 송재로, 김신재 황정순 등과 함께 2년 여 동안 활약했다. 그 뒤 서월영, 유계선 등과 함께 극단 청탑(靑塔)을 창단하기도 했다. 김영수의 <민중전(閔中殿)>(1945)과 <망향>(1946), <선구자>(1946) 등이 이때 공연한 레퍼토리였다. [사진 ] <박서방>의 한 장면, 황정순은 오랫동안 김승호의 가장 중요한 파트너였다 ● 특유의 발성법으로 연기력 과시 김승호는 누구보다도 화려하게 한 시대를 누빈 대기만성형의 배우였다. 그가 활동한 1958년부터 1968년까지의 10년간은 한국영화 전성기와 일치되는 시기이기도 했다. 그동안 그가 이룬 업적은 명배우로서 부합될 만큼 큰 것이었다. 하지만 제작의 유혹을 떨쳐버리지 못한 게 화근이었다. 1967년 처음 만든 <돌무지>의 흥행 성공과 제6회 대종상 최우수반공영화상 작품상 수상으로 받은 외화수입쿼터 보상에 힘입어 제작한 <영원한 모정>(원명 ‘머슴 칠복이’ 조긍하)이 실패한 뒤에도 부채를 안고 강행한 <7인의 밀사>(원제 사화산)가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그는 고혈압에 시달리다가 1968년 12월1일 아침 자택에서 세수를 하다가 쓰러진 후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서른 살에 얻은 외아들(김희라)이 1년 뒤 <독짓는 늙은이>(1969, 최하원)로 영화배우의 꿈을 이룬 모습도 보지 못한 안타까운 51년의 짧은 생애였다. [사진 ] 영화 <돌무지>(1967)의 한 장면 [사진 ] 김승호의 장례식 장면 혀와 입술 사이에서 더듬듯이 굴려 내는 독특한 발성법과 안면을 수축시키며 만들어내는 표정 연기는 김승호 연기의 특징이었다. <박서방>, <마부>, <혈맥> 등의 경우처럼 탁월한 연기력으로 어려운 현실에도 순응하며 살아가는 서민의 정서와 애환을 적절히 녹여내는가 하면, <시집가는 날>, <인생차압>, <로맨스그레이> 등에서 볼 수 있었듯이 ‘능청스런 익살’ 연기로 관심을 끌었다. 반면에 한 가장이 화목한 가정을 깬 죄책감으로 고행의 길을 걸어간 <육체의 길>(1959, 조긍하)에서는 오버액션이라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연기는 단연 고진감래(苦盡甘來)의 서민 역할에서 빛났다.
1960년대와 70년대, 80년대 이어지는 한국영화의 역사는 다사다난하다. 영화에 대한 사회적 인식, 정치적 환경, 제작 여건, 등 여러 가지 요소가 씨줄, 날줄로 얽히면서 어느 한 가지 시선이나 가치만으로 평가하기에는 참으로 많은 요소들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시대를 이끌어온 영화계의 인물이 누구였는가를 평가하는 일조차 간단치 않은 문제가 되는 것도 영화를, 그 당시의 사회를 어떤 시각으로 받아들이는 가에 따라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영화 역사를 평가할 때 가장 자주 드러나는 경향은 ''스타의 역사''로 바라보는 것이다. 어느 감독, 어느 배우, 어느 제작자 등 한국영화 발전에 기여했다고 생각되는 인물을 선정하고 그들이 이룬 업적을 예찬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돌아보면 한국영화의 역사는 스타의 역사, 주인공의 역사라기보다는 무명의 역사, 패자들의 역사처럼 보인다. 영화인들은 그들의 생존을 모색하는 동안 사회로부터 견디기 어려운 냉대를 받았고, 한국영화의 제작 여건은 참으로 오랫동안 너무도 열악했기 때문이었다. 그 속에서 영화인들은 자신의 꿈을, 집념을 키우고 지켜왔다. 최영철 감독도 그런 인물 중의 한 명이다. 그는 1963년 < 잉꼬부부 >라는 영화를 감독하고 < 백백교 >(1992)라는 영화를 제작, 감독할 때까지 80여편의 영화를 만들었다. 그러나 그가 한국영화의 중요한 스타라고 이야기하는 경우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의 영화가 한국영화의 전환점을 만들었다고 평가하는 경우도 거의 없다. 하지만 그는 한국영화계에서 평생을 바쳐 일한 감독이고 누구보다도 영화를 사랑한 영화인 중의 한 명이다. 최영철 감독은 1933년, 서울 광희동에서 아버지 최석운과 어머니 김준주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철물점을 하며 생계를 꾸렸던 아버지 덕분에 생활은 웬만큼 살 만한 정도였다. 어린 시절의 최영철은 다부지고 잽싼 날쌘돌이였다. 체격은 또래들에 비해 적은 편이었는데도 운동이나 싸움이라면 마다하는 적이 없었고, 져본 적도 별로 없을 정도였다. 그의 운동감각은 남달랐다. 특히 야구와 축구에 대한 감각과 재능은 놀라울 정도였다. 초등학교 시절에 이미 지역별 소년단 야구시합에서 3년 연속 우승하는 데 중심 노릇을 할 정도여서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축구 솜씨 또한 초등학교를 졸업하던 무렵에는 선수급의 수준에 이르렀다. 보성중학교(5년제)에 진학한 것도 축구 덕분이었다. 축구 특기생으로 특채된 것이다. 당시 서울의 고등학교 중에서 한양공업고등학교와 선린상업고등학교는 축구 명문으로 꼽히며 라이벌 관계를 이루고 있었다. 보성중학교에 다니던 축구선수 최영철 은 한양공고 축구팀의 스카웃 제의에 따라 학교를 옮겼다. 얼마동안 그곳에서 선수생활을 하던 그는 다시 선린상고 쪽으로 소속을 옮겼다. 두 학교 모두 그의 재능을 그만큼 높게 보고 있었다는 뜻이지만 라이벌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두 학교의 축구부를 오간 일은 그의 인생에 미묘한 파장을 일으켰다. 그가 소속하고 있던 선린상고의 축구코치가 학교 건물을 방화하는 사건이 일어났고 이는 축구부를 해체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선수들 대부분은 한양공고 팀으로 합류했으나 그 곳에서 이적해온 최영철은 그럴 수 없었다. 하는 수없이 그는 광신상업고로 옮겼으나 그곳의 생활도 오래가지 않았다. 축구부가 개입한 싸움이 벌어지는 바람에 또 다시 덕수상고로 옮겨가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덕수상고에서의 생활은 6.25 전쟁이 일어나면서 멈추고 말았다. 축구선수로 활동할 수 없게 된 그는 학도병으로 지원해 제8사단 21연대 수색중대에 소속되어 전쟁을 치렀다. 1.4후퇴 때 대구로 내려온 그는 영남고등학교 3학년에 복학했다. 축구부가 없었던 그 학교에 최영철은 축구부를 창설하는데 앞장섰다. 학교 측에서도 적극적이었다. 이때 같이 활동한 선수들 중에는 최정민, 문정식 같은 인물들이 있었고, 이들은 1957년, 한국이 처음으로 월드컵 대회에 참가할 때 한국대표로 활동했던 스타들이었다. 최영철 역시 당시 축구계에서 주목받는 유망한 선수였다. 덕분에 영남고는 잠시나마 당시 축구계의 스타들이 몰린 축구 명문으로 이름을 얻었다. 전쟁의 상황이 변하면서 서울로 돌아온 그는 다시 배제고등학교에 다시 들어갔고, 그곳에서 고등학교 시절을 마쳤다. 돌아보면 참으로 길고도 다난했던 고등학교 시절이었다. 대학 역시 축구 인생의 연속이었다. 축구 특기생으로 국민대학교에 입학했던 그는 다시 고려대학교 농림대학 임학과로 편입했다. 이때도 역시 그의 특기는 축구였다. 고려대학교 축구부에서 그가 맡은 포지션은 골키퍼였다. 공을 막을 때마다 날쌘 몸놀림으로 눈길을 모았던 그는 전국적으로 이름이 날만큼 유명한 스타였다. 그러나 그의 축구인생은 더 나아가지 못하고 그 곳에서 멈춘다. 재능에도 불구하고 작은 키는 선수로서의 약점으로 작용했고, 더 이상 선수생활을 하기 어려운 상황에 이르자 결국 축구선수로서의 생활을 접고 말았다. 대학생활도 함께였다. 축구와 함께 성장한 청소년 시절의 마감이나 다름없었다. 최영철 이 시작한 새로운 인생은 영화였다. 1950년대와 60년대 한국영화계에서 촬영가로 활동했던 김명재 촬영감독의 조수로 영화계에 발을 들여놓게 된 것이다. 김명재 촬영감독은 최영철의 4촌 매부이기도 했기 때문에, 그가 축구를 그만두고 영화계에 입문하는데 중요한 도움을 줄 수 있었다. < 유전의 애수 > < 오발탄 > 등을 촬영한 김명재는 미첼 카메라를 국내 여건에 맞게 개조해서 ''코첼''(Kotchell)이라는 이름으로 사용하기도 하는 등 촬영분야에서는 현장에서의 작업 뿐 아니라 기술적인 측면에서도 두드러지게 활동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최영철은 김명재의 소개로 안현철 감독의 문하에 들어갈 수 있었다. 스물일곱살 되던 해였다. 연출부에 서드(3rd)로 들어간 그는 < 낙화유수 >, < 백진주 > 등의 영화에서 조감독으로 영화계의 분위기를 익히며 영화제작과정에 직접 참여하는 경험을 쌓았다. 촬영을 전담하던 김명재의 감독 데뷔작이기도 한 <백진주>에서 그는 시나리오 각색 작업을 주로 맡았다. 이 영화에는 훗날 한국영화계의 중요 감독으로 주목받았던 이만희 가 역시 조감독으로 참여했다. 몇 년간 조감독생활을 하며 영화계에서 기반을 쌓아가던 최영철은 마침내 < 잉꼬부부 >(1963,동아영화사 제작)라는 영화를 직접 연출함으로써 감독으로 데뷔했다. 축구에 인생을 걸었던 그가 영화감독으로 인생을 바꾼 후 첫 번째 만든 영화였다. 그는 ''영화감독이 된 것은 오랫동안 지니고 있던 또 하나의 꿈을 이룬 것이다. 나에게는 영화도 축구만큼 흥미롭고 중요한 일이었다''고 회고하기도 한다. 그가 영화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의 옆 집에 왕평 (王平)이라는 배우가 살았다. 해방 전부터 < 군용열차 > < 나그네 > 등에 출연하며 이름을 얻은 인물이다. 그의 부인은 나풍심이란 이름의 만담가로, 남편 못지 않은 유명인이었다. 유명한 스타 부부와 이웃하여 살고 있었던 셈인데, 어린 최영철 은 나풍심의 귀여움을 받았다. 덕분에 나풍심의 손에 끌려 부민관(府民館)이나 단성사, 우미관 같은 극장을 자주 출입하게 되었고 영화의 매력에 일찍부터 빠져드는 계기가 되었다. 성장하면서 축구선수로 길을 잡는 바람에 영화와는 멀어졌지만 마음 속에는 영화에 대한 동경과 기대가 떠나지 않았다. 4촌 누이가 영화촬영감독과 결혼한 것도 영화와의 인연을 새삼스럽게 부추기는 중요한 일이었다. 최영철이 축구선수로서의 인생을 접었을 때 주저없이 영화인이 되기를 결심할 수 있었던 것도 주변의 그런 요소들이 작용한 결과였다. < 잉꼬부부 >는 김진규 , 문정숙 등이 주연한 홈 드라마. 자식 없이 사는 부부와 많은 자식을 거느리고 살면서 힘겨워하는 두 집안을 대조하며 행복하게 사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이야기하고 있는 작품이다. 신상옥 감독의 < 로맨스 빠빠 >, 이형표 감독의 < 서울의 지붕 밑 >, 강대진 감독의 < 마부 > < 박서방 > 등 60년대 한국영화계의 주요 흐름을 이루었던 홈 드라마의 경향을 잇고 있는 <잉꼬부부>는 최영철 의 영화감독 데뷔를 무난하게 만들었다. 같은 해 < 로맨스 가족 >이라는 영화를 또 한편 감독한 그는 주위로부터 ''편하게 일할 수 있는 감독''이란 평을 얻으며 비교적 빠르게 감독의 자리를 다져나갔다. 성격적인 요소도 있고, 운동을 했던 영향 때문이기도 했지만 멜로드라마와 더불어 그가 관심을 가진 장르는 액션영화였다. < 낙인찍힌 사나이 >(1964), < 저 자를 쏴라 >(1964) < 무명가의 지배자 >(1965) < 악인가 >(1967), < 여선장 >(1969), < 암흑가의 지배자 >(1969), < 사나이중 사나이 >(1969), < 홍콩의 마도로스 >(1970), < 홍콩의 단장잡이 >(1970), < 동경의 호랑이 >(1971) 등을 내놓으며 이른바 60-70년대 한국영화계의 중요한 흐름을 이루었던 ''충무로 액션'' 장르에서 손꼽히는 감독으로 활동했다. 부족한 자본, 미약한 기술 등으로 대작을 만들기 어려웠던 당시 한국영화계 사정에 비추어 최영철 감독의 활동은 적은 제작비로 흥행성 있는 영화를 무난하게 만들어 낼 수 있는 경우로 평가받았다. 그의 활동은 80년대까지 이어진다. < 괴도출마 >(1981), < 화야 >(1983), < 삿갓쓴 장고 >(1985), < 비내리는 영동교 >(1986) 등은 그의 후기 목록들이다. 그가 감독한 영화 편수가 80여 편에 이르는 것은 그의 활동이 결코 만만치 않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구체적인 증거다. 영화계에서 일하는 동안 그는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사람''이란 평가를 많이 받았다. 마음에 없는 말이나 행동으로 남의 환심을 사려는 생각도 별로 없었고, 경우에 벗어나는 일은 하려 들지도, 하지도 않았다. 운동선수나 건달들의 세계에서 흔히 보는 ''정정당당''이나 ''의리'' 같은 가치를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정작 본인이 피해를 입을 때가 많았다. 흥행을 끝내고도 이런저런 이유로 일한 비용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생기더라도 ''오죽하면 그러겠는가''하는 마음으로 물러서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영화감독 최영철 은 두 편의 영화를 직접 제작까지 했지만 영화제작은 그를 회복할 수 없는 형편으로 몰아붙이고 말았다. 감독 생활을 오래 하기는 했지만, 모든 사람이 내 마음 같으려니 하는 마음으로 맡긴 일들에서 사기를 당하면서 곤란에 빠졌기 때문이다. 그는 < 비 내리는 영동교 >(1986)와 < 백백교 >(1992)를 직접 제작하고 연출까지 맡았다. 80년대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작업 기회가 멀어진 그가, 사재를 털다시피 하여 기획한 영화들이었다. 마지막 혼신을 다한다는 각오로 작업에 몰두한 그는 시나리오, 연출 등의 분야에 힘을 기울였고, 흥행은 그쪽 일을 잘 안다는 사람에게 맡겼다. 그러나 어렵게 제작을 마치고 흥행을 했지만 그는 ''10원짜리 동전하나''도 건지지 못하는 처지가 되었다.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한 것이다. 젊음을 바쳐 영화계에서 일했던 그는 그 영화계로부터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받은 셈이었다. 그는 영화인이 된 것을 후회하지는 않지만 미국처럼 제작여건이 좋은 나라에서 태어나지 않은 것이 아쉽다고 했다. 그러면 좀 더 나은 조건에서 만들고 싶은 영화, 좋은 영화를 만들 수 있지 않았겠느냐는 아쉬움의 표시였다. 조희문 (상명대교수) / 2003년 <프로필> 1933년 8월 25일 서울 출생 고려대학교 임학과 졸업 1963년 < 잉꼬부부 >로 데뷔 <작품 연보> 1963 잉꼬부부 / 로맨스 가족 1964 낙인찍힌 사나이 / 저 자를 쏴라 1965 무명가의 지배자 1966 나그네 밤거리 / 그늘진 삼남매 1967 악인가 1969 사나이 중 사나이 / 죽어도 좋아 / 암흑가의 지배자 1970 동경의 무정가 / 여선장 / 홍콩의 마도로스 / 홍콩의 단장잡이 1971 맨발로 왔다 / 맨주먹으로 왔다 / 54번가의 마담 1972 동경의 호랑이 1973 사나이 훈장 1974 낙인 / 후계자 / 흑백대권 1975 검은띠의 후계자 / 황금마담 / 천의 얼굴 1976 킹콩의 대역습 / 거대한 음모 1977 7호실 손님 1978 특명 8호 1979 여호신 1980 대근이가 왔소 1981 괴도출마 1983 화야 1984 돌아온 장고 1985 비내리는 영동교 1993 백백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