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베리
- 감독
- 얀 쿠넹
- 제작년도
- 2004
- 출연
- 뱅상 카셀, 줄리엣 루이스, 마이클 매드슨, 테무에라 모리슨
영화와 자동차에 관해 글을 써보겠다고 달려들긴 했는데 우습게도 나는 운전면허가 없다. 다소 황당한 무면허(?) 칼럼 연재를 감행하게 된 결정적 이유는 방에 뒹굴고 있는 수백 대의 자동차 모형 장난감 때문이다. < 고스트버스터즈 > < 배트맨 > < 빽 투 더 퓨처 > 등의 1980년대 할리우드 영화들을 나이 들어 다시 보면서 그 영화의 감동을 소유(?)할 수 있는 캐릭터 피규어나 장난감 구매에 지갑을 열기 시작했다. 모형 자동차 역시 내가 소유할 수 있는 영화 굿즈의 품목 중 하나였다. ‘배트모빌’이나 ‘엑토-1’, ‘범블비’ 같은 가상의 자동차들을 보며 모형을 구매할 생각만 했지 면허를 따야겠다는 생각은 미처 못했다. 아무튼 < 007 > 시리즈의 제임스 본드가 몰던 ‘애스턴 마틴 DB-5’나 < 분노의 질주 > 시리즈에 등장하는 브라이언(폴 워커)의 분신 같은 ‘토요타 수프라’ 등의 실제 자동차 모형을 구매하려면 적어도 제조사와 모델명은 알고 있어야 했다. 나의 자동차에 대한 관심은 그렇게 시작됐다. 가상의 캐릭터 자동차를 제외하고 영화에 등장한 수많은 실제 자동차 가운데 가장 먼저 장난감 모형을 찾아보기 시작한 모델은 1968년 작 < 블리트 >의 포드 머스탱이다. 피터 예이츠 감독이 연출하고 스티브 맥퀸이 출연한 이 영화를 보자마자 배우뿐만 아니라 그가 몰았던 자동차에도 푹 빠져들었다. 해외 쇼핑몰을 뒤져 장난감을 구하는 과정에서 그 차가 영화 제작연도 즈음에 포드사에서 만든 머스탱이란 사실을 알게 됐다. 1967~8년형 머스탱은 뒷좌석 천장이 짧고 경사져 있는 ‘쿠페’식인데 전체적으로는 날렵한 디자인 같아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상당히 묵직하고 위협적으로 생겼다. 차체의 전면은 보닛과 범퍼에 잘못 부딪히기라도 하면 그대로 신체 일부분이 뜯겨져 나갈 것 같은 위압감이 흐른다. ‘패스트백’ 형태의 뒤꽁무니에서 부다다다 울리는 시끄러운 배기음은 마치 제멋대로 사건을 추적하는 영화 속 주인공 형사 프랭크 블리트(스티브 맥퀸)의 성격이나 태도와 닮아 보였다. 혹시 류승완 감독의 영화 < 베테랑 > 개봉 당시 일부 관객들이 조태오( 유아인 )가 ‘포드 머스탱 GT’라는 차를 모는 것에 의문을 제기했던 걸 기억하시는가? 영화의 설정상 조태오 정도의 재력가라면 초고가의 스포츠카 ‘맥라렌’이나 ‘부가티’ 정도의 차는 타고 다닐 것 같은데 왜 상대적으로 저렴한 머스탱을 썼는가? 라는 물음이었다. 류승완 감독은 이에 두 가지 뜻이 있었다고 말했다. 첫 번째는 예산 문제 때문에 비싼 차를 섭외할 수 없었던 탓이 크고, 두 번째는 피터 예이츠 감독의 <블리트>를 너무 좋아하기 때문에 기왕이면 극 중 스티브 맥퀸이 몰았던 자동차와 같은 차로 선택하고 싶었다고. 류승완 감독다운 선택이었다. 그의 선택에 대해서는 뒤에 가서 또 이야기하도록 하자. < 블리트 >의 1968년형 포드 머스탱, 스티브 맥퀸 피터 예이츠 감독의 < 블리트 >는 카체이스 영화의 흐름을 이야기할 때 자주 언급되는 영화다. 카체이스가 이 영화의 주요 소재는 아니지만 당시로써는 파격적인 카체이스 촬영과 편집, 거기에 스피드광이었던 스티브 맥퀸이 만나 놀라운 장면을 만들어냈다. 요즘 관객들은 < 분노의 질주 > 시리즈 같은 영화에 나올법한 멋진 할리우드식 카체이스 장면에 익숙해져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영화들의 카체이스 장면은 화려하긴 하지만 <블리트>처럼 거칠고 과감한 박력이 느껴지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 제이슨 본 >(2016)에서 본(맷 데이먼)을 뒤쫓던 킬러(뱅상 카셀)가 탱크에 가까운 거대한 차량을 이끌고 라스베이거스 도로를 질주하며 엄청난 양의 차량을 산산 조각내는 장면이 있다. 엄청난 물량 공세에 감탄이 나올 법도 한데 별 맥락도 없이 액션에 힘을 주니 아무런 박력이 느껴지지 않은 실패한 장면이 되어버렸다. 단지 많은 수의 차가 부서지는 것만이 카체이스 액션 영화의 전부가 아니다. 카체이스 장면의 생명은 화려함보다는 박력이고 그 박력의 대부분은 어떤 차를 선택하는지에 따라 좌우된다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블리트>는 카체이스 영화, 더 깊게는 머슬카의 매력을 처음으로 느끼게 해준 영화였다. 머슬카는 8기통(VB) 엔진과 같은 강력한 성능을 자랑하는 고성능 자동차를 일컫는 말이다. 1950년대 후반부터 미국에서 유행하던 경주에 적합한 고성능 엔진을 장착한 자동차 모델로 페라리, 람보르기니 등의 유럽형 슈퍼카에 대항하기 위해 만들었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머슬카는 가격 면에서 대중적인 차는 아니었다. 당시 미국 자동차 회사 포드사의 부사장이었던 아이아코카는 1960년대 초에 미국 자동차 시장 경제를 주도하던 베이비붐 세대를 겨냥해서 ‘포드 팔콘’이란 차를 새로운 스타일로 재창조하는 작업에 돌입한다. 그렇게 당시 급변했던 소비자 구미에 맞는 차를 만들어 대성공을 거두는데 그 차가 바로 포드 머스탱이다. 2차 세계대전 당시 활약했던 전투기 ‘P-51 머스탱’의 이름과 야생마라는 의미가 담긴 로고를 박고 등장한 포드 머스탱은 1964년 첫 모델을 본격적으로 출시한다. 웬만한 자동차 애호가는 다 알만한 개념이겠지만, 포니카라는 용어가 있다. 일반 소비자들이 접근할 수 있는 머슬카 즉 작은 차체에도 고성능 배기량을 가진 차를 뜻하는데 포드 머스탱은 시장 변화를 제대로 내다본 아이아코카가 만들어낸 작은 머슬카, 포니카였다. 이른바 ‘포니카’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 블리트 >에 등장하는 1968년형 포드 머스탱은 여러 머스탱 시리즈 중에서 성능보다는 디자인을 중요시했던 머스탱 라인의 초창기 1세대 모델이다. 피터 예이츠 감독은 머스탱의 매력을 영화에 담기 위해서 10분이 넘는 카체이스 장면에 엔진과 타이어 소리 외에는 어떤 음악도 삽입하지 않았다. 당시로써는 무모한 카체이싱 장면에 도전한 것인데 일단 이 장면 자체가 대본에도 없이 즉흥적으로 만들어진 장면이었다. 대본의 도시 배경은 로스앤젤레스였으나 갑자기 배경이 샌프란시스코로 바뀌면서 주택가 언덕 추격 장면을 찍을 여건이 마련된 것. 예이츠 감독은 또 스티브 맥퀸이 평소 ‘과속 촬영(운전)’을 좋아한다는 걸 알고는 촬영을 밀어붙였다. 영화에 등장하는 스티브 맥퀸의 모든 운전 장면은 배우 자신이 직접 운전했다. 예이츠 감독에 따르면 그는 예전부터 운전할 때는 대역을 쓰지 않는다는 연기 철칙을 가지고 있었다고. 참고로 극 중 블리트 형사(스티브 맥퀸)의 머스탱과 경쟁하듯 질주하다 전소되고 마는 ‘닷지 차저’를 운전한 배우는 빌 힉맨이란 사람인데 그는 당시 카체이스 전문 스턴트맨이기도 했다. 스티브 맥퀸과 함께 빌 힉맨의 멋진 스턴트 주행이 없었다면 <블리트>는 만들어질 수 없었다. < 블리트 >의 카체이싱 당시에는 또 이런 카체이싱 촬영을 해본 적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장소 대여 관계로 2주라는 짧은 촬영 시간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예이츠 감독은 이 기간 안에 10여 분 넘는 장면을 모두 찍어야 했기 때문에 두 대의 카메라를 뻗쳐놓고 찍는 방법을 고안했다. 이때 현장에서 맥퀸이 탄 머스탱이 언덕 위에서 질주하며 내려오다가 사거리 코너에 설치해놓은 카메라와 부딪쳐 카메라가 박살이 나기도 했는데 해당 장면은 영화에 그대로 삽입됐다. 카메라와 부딪친 이후에 이어서 멈춘 차를 돌리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때 맥퀸이 후진을 하면서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후방을 살핀다. 예이츠 감독에 따르면 맥퀸이 현장에서 촬영을 구경하는 일반인들에게 차를 운전하는 배우가 자신이라는 걸 알리기 위해 일부러 차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더라는 거다. 스티브 맥퀸의 여유롭고 허세 섞인 열연에 힘입어 포드 머스탱은 영화의 두 번째 주인공으로서 카체이싱 영화의 새로운 장을 열어젖히는 데 일조했다. 영화 매체를 통해 미디어 마케팅의 재미를 톡톡히 보게 된 포드사는 바로 이어서 애스턴 마틴 DB5를 상징적으로 몰던 <007> 시리즈의 제임스 본드에게도 포드 머스탱을 안겨준다. 1971년 작 < 007 다이아몬드는 영원히 >는 악당 블로펠드(찰스 그레이)가 다이아몬드로 무시무시한 무기를 만든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그가 잠입해있는 미국 라스베이거스로 향하는 이야기다. 제임스 본드는 영화의 주요 배경인 라스베이거스에서 본드걸 티파니(질 세인트 존)가 몰던 차를 대신 몰고 다니는데 이 차가 바로 새빨간 색상의 ‘머스탱 마하1’이다. 이 모델은 기존 68년형 머스탱의 성능을 업그레이드시킨 모델이다. 극 중 본드가 경찰의 추격을 피하기 위해 네 바퀴로 가는 자동차를 옆으로 세워서는 두 바퀴로 달리는 곡예를 선사하는 명장면도 탄생시켰다. 1960년대와 70년대 당시 한국 최고의 스타였던 배우 신성일은 국내 수입차 1세대인데 그가 1970년 경부고속도로 개통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리무진과 함께 고속도로를 달릴 때 탔던 수입차가 인디언 레드 컬러의 ‘머스탱 마하1’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식스티 세컨드>의 쉘비 GT 500 1960년대 후반 머스탱을 만들어 1년 사이에 60만대가 넘는 차를 팔아 치웠던 포드사는 당시 1세대 모델보다 성능이 더 좋은 스포츠카 형태를 원하는 소비자들의 의견을 수용해 유명 레이서였던 캐럴 쉘비와 협업해서 제품 개발을 진행했다. 이때 1세대 모델에는 없던 8기통(V8) 엔진을 튜닝해서 성능을 업그레이드시킨 ‘쉘비 GT350’, ‘코브라 G.T.500’ 등의 모델이 만들어졌다. 니콜라스 케이지 주연의 스포츠카 절도단 이야기를 다룬 액션 영화 < 식스티 세컨드 >는 전설적인 머슬카 ‘쉘비 GT 500’을 스포츠카의 끝판왕처럼 묘사한다. 영화 내내 유럽산 슈퍼카들이 쏟아지듯 등장하지만 주인공인 절도단들은 ‘쉘비 GT 500’을 훔치는 것을 자신들의 최종 목표라고 말한다. 미국산 머슬카의 아름다움 혹은 위대함을 널리 알릴 목적이 너무 노골적으로 보였다고 해야 할까. 조지 밀러 감독의 1973년 작 < 매드맥스 >는 또 어떤가. 주인공 맥스(멜 깁슨)의 차는 머슬카의 상징과도 같은 고성능을 탑재한 ‘8기통(V8) 인터셉터’로, 1970년대 초반에 개발된 ‘팔콘 XB GT 쿠페 1973‘가 실제 모델이다. 황량한 허허벌판 대륙을 질주하며 횡단하기에 더할 나의 없이 좋은 성능을 지닌 차들이다. 또 1969년에는 포드사가 머스탱을 업그레이드한 ‘보스’라는 제품을 출시해 모터스포츠 계에서 활약하는데 이 모델은 ‘보스 302’, ‘보스 429’ 등의 모델로 나뉘어 제작된다. 특히 보스 429 엔진은 표기된 출력보다 성능이 뛰어나다고 알려져 유명해졌다. 왠지 이름이 낯익은 모델이라고? 키아누 리브스 주연의 < 존윅 >에서 동네 건달들의 자존심에 금을 가게 해준 차가 바로 존 윅이 애지중지하던 1969년형 ‘머스탱 보스 429’다. < 존윅 >의 1969년형 머스탱 보스 429 포드 머스탱으로 대표되는 미국산 포니카는 천둥소리 같은 배기음을 쏟아내는 8기통의 박력이 다른 모든 자질구레한 성능의 장단점을 잊게 만든다. 사실 이 머스탱은 한국 실정에 비추어 보면 장점보다 단점이 많은 차다. 가장 현실적으로는 엄청난 연비를 자랑하는 통에 기름값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 베테랑 >의 조태오는 왜 포드 머스탱을 몰았을까? 머슬카 특유의 가오 때문이 아니었을까. 명동 한복판 8차선 도로를 꽉 막은 차들 사이로 육중한 차체를 들이밀며 홍해 가르듯 부수고 지나갈 수 있는 힘 좋은 자동차로 포드 머스탱만 한 차가 또 있을까? 설정상 조태오가 벤츠나 아우디를 몰았다면 재벌의 리얼리티 정도는 살려줬을지라도 후반부 명동 카체이스 장면에서의 머스탱 전용 박력은 사라져 버렸을지 모를 일이다. < 베테랑 >의 포드 머스탱 GT, 조태오 최근에 포드 머스탱과 관련한 흥미로운 뉴스가 공개됐다. 얼마 전 포드사가 전 세계 기자들을 말리부 해안가로 불러모아 2018년형 신모델의 시승식을 가졌는데 이때 많은 기자들이 한 가지 사실 때문에 당황했다고 한다. 8기통 5.0L의 가솔린 엔진에 회전 한계를 7500rpm까지 끌어올릴 수 있는 새롭게 업그레이드된 엔진 성능 때문이 아니라 머스탱 역사상 최초로 반자율주행 기능을 탑재했다는 소식 때문이었다고. 포드사는 긴급제동 보조 시스템(ASBS), 차선이탈 경고시스템(LDWS), 차선이탈 방지 시스템(LKAS) 등을 통해 그 어느 때보다도 안전을 중시한 모델임을 강조했다. 물론 세계적인 흐름을 따른 당연한 결과이자 반드시 필요한 기능이지만 미국인들의 마음속에 남아있던 ‘머스탱 정신’과는 조금 다른 행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한 가지 소식은 지구에서 사라져 자취를 찾아볼 수 없었던 < 블리트 >의 실제 촬영모델 머스탱을 발견했다는 소식이다. <블리트>에서 스티브 맥퀸이 직접 몰았던 차량 소품 머스탱은 총 2대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는데 한 대는 개인 소유 차량이고, 나머지 한 대는 자취를 감춘 채 사라져버려 찾을 수 없었다. 스티브 맥퀸이 죽기 직전까지 평생 동안 이 차를 수소문했지만 결국 찾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사연은 자동차 애호가 사이에서 유명하다. 멕시코에서 발견된 < 블리트 >의 머스탱(기사 보기) 그런데 최근 멕시코의 바하칼리포르니아주의 어느 폐차장에서 자동차 커스텀이나 복구를 취미로 즐기던 두 남자가 녹슬어 폐차된 머스탱 잔해를 찾아냈다. 그들은 이 잔해를 가지고 < 식스티 세컨드 >의 쉘비 GT 500으로 커스텀 제작을 하려고 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들이 남아있던 원본 부품을 포드사에 문의한 결과, 이 망가진 차의 잔해가 실제 < 블리트 > 촬영에 썼던 머스탱임이 밝혀진 것이다. 결국 이들은 <식스티 세컨드> 대신 <블리트>에 등장했던 원래의 모습 그대로 차를 복구하는 데 성공했다. 시대의 흐름에 따르는 최신식 머스탱 모델의 변화 소식과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가치가 있음을 몸소 보여준 유물 머스탱의 발굴 소식이 기가 막히게 대비된다. 이제 포드 머스탱은 8기통 엔진을 마음껏 돌려도 석유 걱정 따위는 하지 않았던 호황기의 유물로서 DVD와 장난감 모형 속에 영원히 갇혀 버렸지만 그 끝내주는 ‘가오’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장난감을 사게 만들 것이다. “우리가 돈이 없어 못 사지, 가오가 없어 못 사나?”
< 헤일, 시저! Hail, Caesar! > 조엘 코엔, 에단 코엔 감독 | 조시 브롤린, 조지 클루니, 엘든 이렌리치, 랄프 파인즈, 요나 힐, 스칼렛 요한슨, 프랜시스 맥도먼드, 틸다 스윈튼, 채닝 테이텀 이 영화를 기대하는 모든 이유가 ‘코엔 형제의 신작’이라는 네 마디에 다 들어 있다. 코엔 형제의 영화는 언제나 장르의 관습을 아무렇지 않게 뒤틀며 우리의 기대를 보기 좋게 빗겨난다. 그 예상치 못한 길의 끝에는 우리네 삶의 소소한 진실이 자리 잡고 있다. < 헤일, 시저! >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1950년대 할리우드, 어마어마한 제작비가 든 대작 영화의 마지막 촬영을 앞두고 주연배우 베어드(조지 클루니)가 사라진다. 이에 할리우드의 해결사 에디(조시 브롤린)가 그를 찾아 나선다.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코엔 형제의 영화에서 주인공의 진실 찾기는 늘 보잘것없는 답을 구하는 데서 끝난다는 사실이다. 정작 중요한 것은 그 답을 찾는 과정에서 맞닥뜨리는 요지경 같거나 허무한 풍경 그 자체다. 그렇다면 <헤일, 시저!>가 그리는 그 풍경은 1950년대 할리우드 황금기의 찬란했던 모습일 테다. 과연 코엔 형제가 지금의 스타 배우들의 몸짓과 표정과 목소리를 통해 바라본 할리우드 황금기는 어떤 시대일까. < 워 머신 War Machine > 데이비드 미코드 감독 | 브래드 피트, 벤 킹슬리, 에모리 코헨, 토퍼 그레이스 < 트리 오브 라이프 >(2011) < 머니볼 >(2011) < 노예 12년 >(2013) < 셀마 >(2014) < 빅쇼트 >(2015)로 확실해진 사실 하나. 최근 할리우드에서 가장 실험적이며, 완성도 높고, 문제의식 가득하며, 대담한 영화를 만드는 제작사는 바로 플랜B라는 사실이다. 맞다. 브래드 피트가 소유한 바로 그 영화 제작사다. < 워 머신 >은 플랜B가 2016년에 선보이는 코미디 전쟁 영화다. 미국 저널리스트 마이클 헤이스팅스가, 전 아프가니스탄 주둔 미군 사령관인 스탠리 맥크리스털의 이야기를 쓴 동명 논픽션(2012)이 원작이다. 맥크리스털은 2010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오바마 대통령을 비난한 것이 문제가 돼 사령관직을 사직했다. 플랜B는 이 영화에서 맥크리스털(브래드 피트)이란 인물을 통해 미국의 대테러 전쟁을 얼마나 신랄하고 기발하게 풍자할까. 더욱이 이 영화의 시나리오를 쓰고 메가폰을 잡은 이는 호주의 기대주 데이비드 미코드 감독이다. 최근작 < 더 로버 >(2014)는 실망스러웠지만, 그의 첫 장편 < 애니멀 킹덤 >(2010)이 안겨줬던 충격을 생생히 기억한다. 플랜B가 선택한 미코드 감독의 연출력을 한 번 더 믿기로 한다. < 곡성 > 나홍진 감독 | 곽도원 , 황정민 , 천우희 첫 장편 연출작 < 추격자 >(2008)로 강렬하게 증명했듯, 나홍진 감독은 한국영화 특유의 사실성을 극대화함으로써 장르의 박진감을 증폭하는 전략을 쓴다. 그의 두 번째 장편 < 황해 >(2010)는 그 실험이 더 극한으로 치달았던 작품이다. 연변에서 한국으로 건너온 구남( 하정우 )의 수난기는 사실적이다 못해 극단적이었고, 대형 트럭이 맞부딪치고 나뒹구는 액션 장면은 기존 한국영화 속 자동차 액션의 규모와 스펙터클을 뛰어넘겠다는 야심이 엿보였다. 그 욕심이 과했던 걸까. 극단적 사실성과 장르적 쾌감 모두 배가하려는 <황해>의 시도는 그 둘의 불균형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과연 나홍진 감독은 <황해>의 실패를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그 답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 바로 < 곡성 >이다. 시골 마을을 배경으로 기이한 소문과 사건을 그리는 미스터리 영화라는 것밖에, 지금으로서는 알려진 게 별로 없다. 이 지독한 감독의 절치부심이 어떤 작품을 낳았을지, 나홍진 감독의 세 번째 실험의 결과가 궁금하다. < 단지 세상의 끝 Juste la fin du monde > 자비에 돌란 감독 | 가스파르 울리엘, 나탈리 베이, 마리옹 꼬띠아르, 레아 세이두, 뱅상 카셀 자비에 돌란이란 이름이 그저 ‘젊고 잘생기고 재능 있는 인물’에 열광하는 힙스터들의 전유물이 아님을, 돌란 감독은 < 마미 >(2014)를 통해 똑똑히 증명해 보였다. <마미>에서 보듯 그의 영화에는 흡사 뮤직 비디오 같은, 젊고 감각적인 영상이 있는가 하면, 낡고 나이 든 것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순간이 있다. 한눈에 세상을 뒤흔드는 사랑에 빠지는 순수가 있는가 하면, 그것이 영원하지는 않다고 말하는 애늙은이 같은 면이 있다. 매혹의 뒤편에 공포와 슬픔을 그리고, 희망의 뒷면에 절망을 새긴다. 돌란은 한마디로 똑 떨어지는 단순한 영화를 만들지 않는다. <단지 세상의 끝>은 만드는 영화마다 자신의 세계를 한 발씩 넓혀온 돌란이 <마미> 이후 선보이는 신작이다. 12년 만에 고향에 돌아와 가족들에게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작가 루이스(가스파리 울리엘)의 이야기다. 그 이야기 안에 돌란의 더 넓은 우주가 담겨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촬영현장 < 레스터 버티컬 Rester Vertical > 알랭 기로디 감독 | 크리스티앙 발레트, 인디아 헤어, 로르 칼라미 2013년 한 영화제에서 알랭 기로디 감독의 < 호수의 이방인 >을 봤을 때를 기억한다. 남성 동성애자들이 노골적으로 사랑을 나누는 호숫가에서 벌어진 살인에 얽힌 진실을 찾아가는 이 영화는, 그 무엇도 거리낄 것 없는 대담한 표현과, 한 순간 영화의 분위기를 뒤흔드는 강렬한 연출로 알랭 기로디란 이름을 관객의 뇌리에 박아 넣었다. <호수의 이방인>이 등급 심의 문제로 여전히 국내 개봉을 못하고 있는 건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기로디 감독은 그동안 벌써 다음 영화의 촬영을 끝냈는데 말이다. 그의 신작이 바로 < 레스터 버티컬 >이다. 그는 이 영화의 줄거리를 비밀에 부치며 이렇게 말했다. “프랑스의 심장 깊숙한 곳에서 피어나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집에 가까이 가는 긴 여정에서 믿기 어려운 것을 믿게 되는 광경을 그리고자 했다.” 배짱 넘치는 그의 신작을 기대하게 만들기 충분한 말이다. 올해 영화제에서 볼 수 있기를 첫손에 꼽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