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빅스
- 감독
- 허준범
- 제작년도
- 2001
- 출연
- 이미자, 최덕희, 우정신, 홍시호, 정미숙, 이정구, 이현진, 김기현, 배주영, 이종혁
영화 너머의 포스트-시네마를 가늠하면서, 여전히 남아있는 영화의 흔적도 제시합니다. 필름이 유령처럼 배회하다 떠난 자리를 상속받은 것은 극장이다. 영화가 디지털화되는 과정에서 필름의 쇠퇴는 곧 영화의 죽음이라는 담론이 있었고, 그 서사의 효력이 다하자 극장의 위기론이 부상했다. 오늘날 극장은 베일을 두른 채로 우리 앞에 나타나 지난날의 영광을 추억하면서, 그와 동시에 DVD, 불법 다운로드, 스트리밍 플랫폼에 밀려나고 있는 자신의 처지에 대해 하소연하는 유령과 같다. 어떤 이들은 극장에서의 유일무이한 영화 관람 경험이 사라지면 그때의 영화는 더 이상 예전과 같지 않을 거라고 경고한다. 그들은 극장이 영화의 위기와 죽음을 방어하기 위한 최후의 보루라고 굳게 믿는 듯하다. 하지만 극장의 경험을 포함하는 과거의 영화 경험을 상속하지 않으려는 이들도 있다. 동시대 영화 관람 경험은 모순적이다.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 신성한 것과 세속적인 것, 이상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 연속적인 것과 단절적인 것 사이에서 팽팽한 줄다리기가 벌어지는 모양새가 나타나고 있다. 극장에 앉아 스크린에 투사된 이미지를 바라보던 과거의 관람 방식은, 오늘날 노트북, 태블릿 PC, 핸드폰과 같이 이동과 휴대가 편리한 디지털 기기를 활용하여 관객이 원하는 시간과 장소에서 모니터에 출력된 이미지를 바라보는 관람 방식으로 바뀌었다. 프란체스코 카세티(Francesco Casetti)는 자신의 책 『뤼미에르 은하계 : 도래하는 영화를 위한 일곱 개의 핵심어(The Lumière Galaxy: Seven Key Words for the Cinema to Come)』(2015)에서 이런 변화를 영화의 재배치 (relocation)라고 부른다. 그는 영화가 새로운 환경 속에서 그리고 새로운 기기를 통해서 재활성화 또는 재목적화되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 영화를-넘어서는-영화의 경험 ’과 ‘ 영화로-회귀하는-경험 ’이 동시에 나타나고 있다고 말한다. 영화는 여전히 영화적인 것으로 회귀하는 동시에 전혀 영화적이지 않은 것으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영화의 재배치를 결정하는 핵심적인 요소는 미디어 환경의 급격한 변화에 대응하는 관객의 실천 에 있다. 단순히 영화가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상태가 아니라 영화가 우리에 의해 구성되는 방식과 그 결과가 중요한 것이다. 영화의 위치가 달라져도 영화에 대한 관객의 감각과 기억이 남아 있고, 이전과는 분명하게 달라진 영화를 기존의 영화처럼 바꾸어 놓기 위한 관객의 실천이 있다면, 여전히 영화는 영화적인 어떤 것으로 존속할 수 있다. 극장에서의 영화 관람 경험도 마찬가지이다. 관객은 극장이 아닌 장소에서도 극장의 경험을 복원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디지털 기기로 영화를 관람하면서 모니터의 밝기를 조정하거나 스피커의 볼륨을 조정하여 최대한 극장에서 영화를 볼 때와 유사한 관람 환경을 구축하는 경우가 그러하다. 오늘날 관객은 디지털 기기를 활용하여 극장과 같은 곳에서 보장되는 몰입의 환경, 즉 외부의 자극으로부터 관객을 지킬 수 있는 실존적인 버블(existential bubble)을 스스로 구축할 수 있다. 이처럼 관객은 영화를 둘러싼 달라진 환경을 수리함으로써 본래의 영화적 경험을 복원한다. 카세티에 따르면, “영화는 새로운 환경에 직면했고 새로운 조건을 마주하고 있지만, 그것은 우리를 포기 하지 않았다. 요컨대, 우리로 인하여 영화는 재배치되고 있는 것이다.” 카세티(좌)와 앙드레 고드로, 필립 마리온(우)의 저서 (사진: “ The Lumière Galaxy ”, “ The End of Cinema? ”, Columbia University Press) 극장은 다른 자리에서 다른 경험과 함께 다시 태어나고 있다. 이를 살펴보기 위해 앙드레 고드로(André Gaudreault)와 필립 마리온(Philippe Marion)이 『영화의 죽음?: 디지털 시대의 위기 속 매체(The End of Cinema?: A Medium in Crisis in the Digital Age)』(2015)에서 제시한 ‘영화의 이중 탄생 (cinema’s double birth)’이라는 개념을 참고하고자 한다. 이 개념에 따르면, 영화는 역사적으로 여러 위기를 거치면서 새롭게 태어나기를 반복했다. 영화의 이중 탄생은 영화가 기술적으로 한번 그리고 제도적으로도 다시 한번 태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것은 영화의 탄생이 역사적으로 반복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실제로 영화는 사운드의 도입, 텔레비전의 발명, 비디오 기기의 보급, 디지털화와 같은 기술적 발전 속에서 위기와 변화를 겪었다. 이런 역사적 사실은 영화의 탄생이 반복되고 있다는 것을 넘어서 아직 영화의 탄생이 완료되지 않았음을 암시한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영화는 영화의 탄생에 있어서 가장 최신 버전에 해당하는 것일 뿐이다. 극장의 이중 탄생, 즉 극장 문화의 제도적 안착은 영화사 초기 30년 동안에 걸쳐서 이루어졌다. 그 과정은 유랑, 정착, 성전의 세 단계로 세분화할 수 있다. 1) 유랑 의 단계: 19세기 말, 카메라와 영사기의 발명과 함께 등장한 영화는 카페, 놀이공원, 박람회, 보드빌, 장터와 같은 곳을 전전하면서 일시적으로 상영되는 문화적 이벤트의 성격을 갖고 있었다. 2) 정착 의 단계 : 1905년을 전후해서 미국을 중심으로 작은 상점을 개조하여 만든 극장인 니켈로디언(Nickelodeon)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비로소 영화만을 위한 공간이 생겼다. 상설영화관으로서의 니켈로디언은 30석 내외의 좌석을 갖추고, 5센트의 입장료를 책정했고, 주 고객은 노동 계급이었다. 3) 성전화 의 단계 : 1920년대를 기점으로 다양한 인종, 성별, 세대를 수용하기 위해 대규모의 좌석, 화려한 외관과 실내 장식, 주차장과 매점과 같은 편의시설을 갖춘 영화 궁전(movie palace)이 등장한다. 영화학자 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Siegfried Kracauer)는 영화 궁전이 오락을 숭배하는 공간이면서 고단한 현실로부터 달아나려는 관객을 위해 마련된 일종의 도피처와 같은 곳이라고 말했다. 그는 영화 궁전이 정신적으로 거주할 곳을 잃은 자들을 포용하는 성격이 있음을 강조하면서 그곳을 ‘집 없는 자들을 위한 안식처’라고 불렀다. (좌) 1908년부터 1914년까지 5센트의 입장료를 받고 운영되었다고 기록된 캐나다의 “Comique movie theatre” (우) 미국 텍사스 샌 안토니오에 위치한 극장 “Majestic Theatre”. 스페인의 지중해풍 양식을 반영해 1929년에 지어졌다. (사진: “ Front of Comique movie theatre ”, City of Toronto Archives / “ The Venues ”, Majestic & Empire Theaters) 이런 역사적 사실은 크게 두 가지를 시사한다. 하나는 극장이 영화의 유일한 경험이 아니라 여러 가능한 경험 중 하나라는 것을,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그럼에도 극장의 경험은 영화의 역사와 대중의 기억 속 깊은 곳에서 단단한 지층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넌지시 지시한다. 디지털화 이후 영화는 더 이상 극장에 귀속되지 않는다. 이런 변화 속에서 극장은 영화의 경험을 위한 유일한 장소는 아니지만 영화적 경험의 회귀를 발생시킬 수 있는 근원적 장소이자 여러 영화적 경험이 참조하는 하나의 이념으로 존재한다. 그렇다면 극장의 경험은 어떻게 이루어지며, 그것은 어떻게 정의할 수 있는가? 이미 여러 비평가와 이론가들이 지적한 것처럼, 극장에서의 영화 관람은 건축적 공간, 각종 기계 장치, 그리고 관객이 결합해서 만들어낸 하나의 거대한 시스템의 결과물이다. 구체적으로 그 경험은 극장이라는 건축적 공간이 외부의 자극을 차단함으로써 만들어내는 밀폐된 공간, 카메라, 영사기, 스크린으로 구성된 기계적 시스템이 만들어내는 환영의 세계, 그리고 좌석에 기댄 채 스크린을 응시하는 관객의 욕망이 상호작용하면서 만들어낸 것이다. 프란체스코 카세티는 자신의 최근 저작인 『스크리닝 공포(Screening Fears)』(2023)에서 영화관 특유의 스크린 경험을 “ 투사/방어 복합체 (projection/protection complex)”라는 용어로 설명한다. 투사/방어 복합체는 기계적, 심리적, 사회적 장치들로 구성된 것으로, 물리적으로 폐쇄된 공간을 통해서 관객을 현실로부터 분리하는 동시에 스크린의 투명한 이미지를 통해서 관객을 다른 세계와 연결하는 것을 의미한다. 투사/방어가 하나의 짝을 이룬다는 것은 영화적인 경험이 현실과의 연결/분리의 모순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말과 같다. 이 모순은 관객의 심리적 요구와도 무관하지 않다. 관객은 영화 속 세계와 연결되거나 그 세계에 몰입 하고 싶으면서도 그와 동시에 영화가 제시하는 환영을 거부 하고 자신이 실제 현실에 발을 딛고 있음에 안도감을 느낀다. 관객은 영화를 통해 꿈을 꾸면서 영화에서 깨어나기를 바라는 이중의 욕구를 가지고 있다. 카세티는 계보학적인 관점에서 영화가 아닌 것에서도 투사/방어, 즉 관객인 우리를 스크린 속 세계와 연결하면서도 분리하는 이중의 경험이 나타난 역사적 사례가 있음을 지적한다. 그에 따르면, 영화-이전(pre-cinema)의 시기에 해당하는 판타스마고리아는 숨겨진 영사기의 빛을 통해 죽은 자의 이미지를 안전하게 바라보는 경험을 제공한 경우이다. 그리고 영화-이후(post-cinema)의 시기에 해당하는 화상 채팅과 같은 오늘날의 디지털 버블은 타인과의 접촉 없이 실시간으로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한 경험을 제공하는 경우이다. 각각의 매체적 경험은 극장과 스크린을 매개로 여기와 저기의 분리와 연결을 동시에 가능하게 만드는 영화적 경험과 친연성을 갖는다. 카세티는 이러한 계보학적 접근을 통해서 영화의 탄생과 발전이 물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안식처를 갖길 바라는 대중의 심리와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재차 강조한다. 그러한 영화적 경험 속에서 극장은 현실의 충격을 방어하기 위한 대피소로, 스크린은 현실에 대한 모의실험을 매개하는 장치로, 영화 이미지는 현실에 대한 예방주사로 존재한다. 만약, 카세티가 말하는 영화적 경험의 기원적, 본질적, 근원적 속성이 관객의 실천과 함께 역사적으로 회귀할 수 있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우리는 오늘날 제기되는 극장의 위기론이 지나친 기우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설령 극장이 물리적으로 존재하지 않더라도 극장의 경험은 유령처럼 우리에게 상속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극장이 없는 자리에서도 극장은 유령처럼 나타나 관객인 우리의 귀에 대고 다음과 같이 속삭일 것이다. 그럼에도 이것은 여전히 영화적이라고. 이도훈(영화평론가) l 대학에서 미디어, 대중문화, 영화 관련 강의를 하고 있다. 느리게 보고, 느리게 쓰지만, 꾸준히 영화와 관련된 비평과 연구를 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단독 저서 『이방인들의 영화 : 한국 독립영화가 세상과 마주하는 방식』(2023) 집필, 독립영화, 에세이영화, 포스트-시네마 등과 관련된 학술 논문 집필.
요즘은 디지털 리마스터링된 예전 영화를 많이 재개봉한다. 구로사와 기요시의 < 회로 >를 다시 봤고, 스탠리 큐브릭의 <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을 4K로 봤다. 미이케 다카시의 < 오디션 >은 한국에서 처음으로 개봉했다. 비디오나 DVD가 나온 적이 없었고, 영화제에서만 상영했다. 해외에서 꽤 화제를 모았던 영화이고, 한국에도 마니아들이 있었지만, 그동안 정식으로 선보이지 못했다. 마니아들은 해외 DVD를 사고, 그것을 복사하거나 파일로 변환해서 돌려봤다. 과거에 봤던 영화를 오랜만에 다시 보면, 새로운 감흥이 일거나 기억과는 다른 장면과 대사에 혼란스럽기도 하다. <오디션>은 3, 4번 봤었는데, 디지털 리마스터링으로 한 10여 년 만에 다시 보니 느낌이 약간 바뀌었다. 그 남자는 자연재해처럼 난데없는 불행에 휩싸인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다시 보니 모든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 여자의 마음은 모두 진심이었다. 애타게 전화를 기다린 것도, 완벽한 사랑을 갈구한 것도. 물론 다리를 자른 것도. 미이케 다카시는 V시네마의 걸작들을 다수 연출하며 유명해진 감독이다. 1989년, 일본의 메이저 영화사 도에이의 산하에 있는 도에이 비디오는 ‘V 시네마’라는 레벨명으로 <크라임 헌터>를 출시한다. 20, 30대 남성을 타겟으로 극장에서 개봉하지 않고 바로 비디오로 출시되는 영화들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극장용 영화보다 제작비는 적지만, 일반적인 인디 영화보다는 훨씬 스케일이 크고 상업적인 장르 영화를 만든다는 계획이었다. 도에이의 시도는 성공을 거두었고, 다른 제작사들도 V시네마에 뛰어들었다. 미이케 다카시는 1991년부터 <돌풍! 미니파트대> 등으로 감독 데뷔를 하며, 일년에 서너 편의 영화를 만드는 강행군을 시작했다. 1995년부터 만든 ‘흑사회 3부작’-<신주쿠 흑사회>, <극도흑사회>, <일본흑사회>는 극장 개봉도 했고, 높은 평가를 받았다. 미이케 다카시는 V시네마를 대표하는 감독이면서 종종 극장 개봉작과 해외영화제 수상작을 연출했고, 2000년대 중반 순조롭게 메이저로 진출했다. 1999년에 연출한 <오디션>은 2000년 로테르담영화제에 출품되어 국제비평가연맹상을 받으며 화제를 모았다. 영화를 본 한 관객은 미이케 다카시를 보고 ‘악마’라며 욕을 했고, 보다가 나가버린 관객들도 아주 많았다. 이후 해외에서 개봉을 했을 때, 충격을 받아 병원에 실려 간 관객이 나오기도 했다. 주간지 <타임>이 2007년 발표한 ‘공포영화 톱 25’에 선정되었고, 영국의 영화지 <토탈 필름>의 ‘공포영화 역대 베스트 50’의 29위에도 올랐다. 메이저에 간 후 미이케 다카시의 영화는 다소 느슨해졌고, 평범해지기도 했지만 2천년대 초반까지 미이케 다카시는 가장 기발하고, 독특하고, 에너지가 넘치는 < 이치 더 킬러 >, < 극도 공포대극장 우두 >, < 비지터 큐 >, <중국의 조인> 등을 만들었다. 무라카미 류의 소설이 원작인 <오디션>은 중반이 넘어가기까지 큰 사건 없이 순조롭게 진행된다. 호러영화라고는 느껴지지 않는다. 알 수 없는 불안감과 모호함이 맴돌 뿐이다. 아오야마는 아내가 죽은 후 7년 동안 아들 시게히코와 함께 살아왔다. 시게히코는 고등학생이 되었고, 아오야마의 사업도 안정됐다. 하지만 일본은, 그들의 세계는 불안정하다. 당시 일본은 장기 불황의 한복판이었다. 아오야마는 재혼을 하기 위해 오디션을 만든다. 명분은 영화의 주인공을 찾는다는 것. 지원서를 뒤지던 아오야마는 한 여인에게 꽂힌다. 어릴 때부터 발레를 했지만 부상으로 다른 길을 찾아야 했던 아사미. 아사미에게 끌린 아오야마는 오디션이 끝난 후 연락하고 만나기 시작한다. 아오야마의 친구는 뭔가 의심스럽다며 신중하라 하지만, 푹 빠진 아오야마는 무시한다. 아사미도 아오야마에게 호감을 표시하고, 두 사람은 함께 바닷가의 호텔로 여행을 간다. 아사미는 어린 시절 학대받은 과거를 고백한다. 아오야마는 모든 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첫 섹스를 한다. 아마도. 묘한 분위기가 감돌고, 섬뜩한 장면이 가끔 등장하지만 아오야마와 아사미의 연애가 진행되는 중반까지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그런데 한순간에 모든 것이 변한다. 전화벨 소리에 잠이 깬 아오야마는 호텔 방에서 아사미가 사라진 것을 알게 된다. 아무 연락이 없고, 수소문해도 행방을 찾을 수 없다. 아사미의 흔적을 찾아가는 곳에서 두 발이 잘린 남자를 만나고, 여자가 토막 살해되었다는 말을 듣게 된다. 파고들면 들수록 아사미라는 여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다. 그리고 집에 있던 아오야마는 아사미의 습격을 받는다.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상황에서, 커다란 바늘이 몸에 꽂히고, 발이 잘려나간다. 도대체 왜?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무라카미 류의 소설 <오디션>은 1997년 <펜트하우스 재팬>에 연재되었다. 오로지 환락과 희망, 밝은 미래만이 충만했던 버블경제가 끝난 1990년대의 일본은 혼돈이었다. 1995년에는 한신 대지진과 옴진리교의 지하철 사린가스 테러사건이 있었다. 범죄의 잔혹성과 대담성, 14세의 범인이라는 사실에 모두 당혹스러워했던 고베아동연속살인사건은 1997년이다. 대상을 특정하지 않은 무차별 살인과 범죄도 증가했다. 버블 붕괴 후의 일본은 모든 것이 닫힌 회색의 시공간이었다. 모두가 외롭고, 모두가 누군가를 혹은 자신도 모르는 무엇인가를 갈망하고 있었다. 영화 <오디션>에서는, 공룡에 심취한 아오야마의 아들 시게히코가 가장 현명해보인다. 호사로운 향락에 빠지지도 않고, 불투명한 미래에 절망하지도 않는다. 중년의 아버지에게 재혼을 권하고, 자신의 미래를 담담하게 준비해간다. 아오야마도, 아사미도 누군가를 만나 완전한 소통을 바라는 기성세대다. 타인과의 완전한 사랑을 통해 자신이 완전해질 것이라 믿는다. 그들은 모두 과거에 얽매여 있다. 친척의 학대, 어머니의 남자가 가한 폭행은 아사미를 고립되게 만들었다. 아사미는 자신을 이해해 줄, 오로지 자신만을 사랑해 줄 남자를 갈구한다. 하지만 둘만의 완벽한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절망한 그녀는 남자가 도망갈 수 없도록 발목을 잘라버린다. 아사미는 아오야마를 고문하며 말한다. “말은 거짓이어도 아픔만은 믿을 수 있죠,....아프니까 잘 알겠죠?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자신이 어떤 인간인지 깨달을 수 있을 때는 괴로울 때나 힘들 때죠. 정말 괴로울 때만 자신의 마음이 보여요.” 아사미는 아오야마를 사랑했다. 아니 사랑하기 위해 아오야마를 들여다봤다. 나만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인지를. 아오야마는 그렇다고 말하지만, 그건 거짓이다. 아오야마는 세속적인 인간이다. 크게 악하거나 선하지 않다. 욕망에 충실하고, 자신의 이익이 제일 중요하다. 아마도 아오야마의 부하 여직원은, 그에게 크게 상처받았을 것이다. 어쩌면 발목을 잘라버리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아사미와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는 그녀는 크게 다르지 않다. 그들은 강렬하게 타인을, 타인의 사랑을 원하고 있다. 자신의 순수한 사랑이 좌절되면, 자신의 존재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면, 그들은 폭력적으로 변한다. <오디션>의 세계는 세기말의 일본만이 아니라 지금 한국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원작에서는 아오야마에게 아들이 있다는 것을 안 아사미가 충격을 받은 것으로 설명된다. 나만을 사랑하겠다는 아오야마의 말이 거짓이었으니까. 영화 <오디션>에서는 이유가 없다. 모든 것이 완벽한 사랑의 과정으로 보였지만, 갑자기 아사미가 사라져버렸다. 미이케 다카시는 인터뷰에서 ‘이유 없는 재난’이라고 말했다. 길을 가다가 건물 공사장 위에서 떨어진 벽돌에 머리를 맞는 사고 같은 것. 이유가 없고, 예측할 수 없고, 막을 수도 없는 사고. 하지만 미이케 다카시는 영화의 꿈 장면에 많은 이유를 보여주고 있다. 아오야마는 아사미의 고문을 당할만한 이유가 분명하게 있다. 너무 가혹하다고 말할 수는 있겠지만, 그래도 잘못은 있다. 아오야마만이 아니라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그럴만한 이유와 공동 책임이 있다. 미이케 다카시는 무라카미 류의 소설을 그대로 각색하면서도, 자신만의 시선을 분명하게 투사한다. 아오야마는 좋은 남자이지만, 중년의 회사 사장이라는 위치에 걸맞는 비열함을 또한 지니고 있다. 그리고 자루 속의 남자와 아오야마의 고문, 계속 머릿속에서 들리는 ‘끼릭끼릭’ 소리 등 <오디션>을 보고 나면 절대 잊을 수 없는 장면들은 그 시절의 미이케 다카시만이 연출할 수 있는 기괴한 풍경이다. 지금 봐도 너무나 선명하고 강렬하다. 아마 10년 후에도. 20년 후에도.
“(밀레니엄 세대가) 성인기에 이르는 과정은 지연되고 있을 뿐 아니라 극단적인 경제 구조 조정, 심대한 문화 변동, 깊은 사회 불평등 때문에 근원적으로 파괴되고 있다.” 1) 사회학자 제니퍼 M. 실바는 미국의 밀레니엄 세대 100명을 인터뷰를 통해 연구한 저서 『커밍 업 쇼트』에서 위와 같이 적고 있다. 물론 2010년대 미국의 청년들과 2020년대 한국의 청년들을 일대일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리스크풀링(Risk-pooling)이라는 사회안전망의 축소,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 산업 노동계급의 쇠락, 급속한 문화 변동 2) 등 실바가 꼽은 문제점은 지금의 한국에도 충분히 적용 가능하다. 『커밍 업 쇼트』의 국내 서평들은 88만원 세대, N포세대, 흙수저, 헬조선 같은 단어들을 사용해가며 국내 청년의 상황을 책의 내용과 비교하고 있다. 미국의 청년들이 그러한 것처럼, 한국의 청년들 또한 독립, 취업, 결혼, 육아 등 전통적으로 성인기라 여겨지는 단계에 접근하는 것이 지연되고 있다. 이는 수준미달(Coming Up Short)의 개인들 때문이 아니라 수준미달의 사회와 제도 때문이라는 것이 이 책의 주된 분석이다. 더 나아가 실바는 성인기가 “극적으로 새롭게 상상되고” 있다며, 전통적인 성인기의 지표들 대신 다양한 방식으로 경험한 “고통의 치유를 성인 정체성의 기반” 3) 으로 삼고 있다고 주장한다. 홍다예 감독의 < 잠자리 구하기 >(2022)는 입시 이후에도 사라지지 않은 불안에 관한 고백이다. 고3이었던 2014년 입시생활에 관한 다큐멘터리 < 시발 .>(2014)을 시작으로 <개새끼>(2016), <관종쓰레기>(2018) 등으로 이어지는 감독의 필모그래피의 연장선상에 놓인 작품이기도 하다. 이 영화는 하나의 고백으로 시작한다. 감독은 고3 시기 학교에서 마주한 잠자리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 놓는다. 창밖으로 나가려 하지만 반복해서 유리창에 머리를 부딪히던 잠자리는 결국 떨어져 죽었다. 감독은 자살을 위해 찾은 한강 다리 위에서 그 잠자리를 떠올렸다고 고백한다. 대학은 지긋지긋한 입시생활의 탈출구로 여겨짐과 동시에 학생들을 구속하는 유리벽이기도 하다. <잠자리 구하기>는 “대학에 간다는 것”의 의미를 끊임없이 되새긴다. 대학에 가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며, ‘어른’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감독과 친구들은 반복되는 실패와 좌절을 경험한다. 원하는 대학에 가지 못하고, 재수생활을 하고, 원하는 대학에 들어갔음에도 또다시 좌절을 경험한다. 대학에 들어가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처럼 이야기하던 말들은 허상이었음이 드러난다. 대학에 간다는 것은 성장이 아니라 새로운 불안의 시작임을 깨닫는다. 자신을 규명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한 학생들은 성적과 대학의 이름으로 자신을 정의하기 시작한다. 각자의 상황을 토로하는 친구들과의 대화는 절망과 불안을 토해낼 뿐 아무런 논의도 서로에 대한 공감도 만들어내지 못한다. <잠자리 구하기> 속 친구들은 서로의 불안을 직관적으로 이해하지만, 그것을 서로 해소해줄 수 없다. <잠자리 구하기>는 < 공부의 나라 >(2015)와 같은 다큐멘터리처럼 입시 제도를 분석적으로 비판하는 영화가 아니다. 고3, 재수생, 대학 신입생, 20대 중반인 현재 등 다양한 시간대의 모습이 계속하여 교차되는 영화의 형식은 ‘입시’와 ‘대학생활’이라는 과정을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지도 않다. 더 나아가, 이 영화는 그러한 불안을 떨쳐내고 마침내 발전한 모습을 보여주는 성장담도 되지 못한다. 감독 자신은 이 영화를 “20대 청년의 인류학적 반(反)-성장 보고서” 4) 라 말하고 있다. “잘 지내지 못한다는 고등학교 친구에게 편지를 쓰기로 했다.”라는 시놉시스가 무색하게, 이 영화는 결국 편지를 부치지 못했다는 고백을 포함하고 있다. 불안 속에 놓여 있는 감독은 친구에게 편지를 보낼 수 있을 만큼 성장하지 못했다. 다만 부치지 못한 편지를 이 영화로 대신하고 있을 뿐이다. 때문에 이 영화는 8년이라는 시간 동안 촬영된 감정을 유일한 진실로서 제시한다. 홍다예 감독과 친구들이 입시 과정에서 어떠한 실패와 성공을 경험했는지는 그저 그들이 경험한 사실의 기록으로서 제시될 뿐이다. <잠자리 구하기>가 제시하는 기록은 입시라는 과정 속에서 경험한 사실들의 진술이 아니라, 8년이라는 시간 동안 누적된 감정들이다. 자기 파괴적이라 느껴질 정도로 날것의 감정들을 파헤치고 공개함으로써 자신의 반-성장을 고백한다. 이는 원하던 대학에 진학했음에도 여전히 불안감을 안고 살아가는, 끝없이 성장기에 머무를 뿐 성인기에 도달할 수 없는 청년의 초상이기도 하다. 대학 진학이라는 지표는 여전히 강력한 성인기의 지표임과 동시에, 너무나도 추상적이라 결코 뛰어넘을 수 없는 장벽이다. 반-성장을 고백하는 또 한 편의 다큐멘터리가 있다. 푸른영상에서 제작한 이효진 감독의 < 가단빌라 >(2022)다. 이 영화 또한 감독 자신의 자살사고를 고백한다. 흑백 화면의 작은 공원에서 시작한 이 영화는 한 빌라의 문을 열고 들어가 빌라 꼭대기의 집으로 향하는 카메라의 이동에서 시작된다. 그곳은 이효진 감독이 26년을 살아온 공간이다. 이어지는 장면 속 내레이션은 14살 때 부모를 대신해 빚쟁이들의 전화를 받으며 자라왔고, 그렇게 10여 년간 이어진 불행 속에서 자살충동을 갖게 되었다고 말한다. 감독은 불행 속에서 살아온 할머니 또한 자살을 생각했을지 궁금해 카메라를 들었다고 영화 속에서 밝히고 있다. 감독의 내레이션으로 시작하지만, <가단빌라> 속 대부분의 푸티지에서 감독의 목소리는 삭제되어 있다. 할머니나 어머니 등과 감독이 대화하는 장면에서 감독의 말은 사운드에서 지워진 채 자막으로만 처리되어 있다. 이 영화에서 감독은 카메라 뒤로 자신을 잔뜩 숨긴 채 가족의 이야기를 기록한다. 이효진 감독은 ‘손녀’이자 ‘딸’로서 할머니와 어머니 앞에 서 있지만, 목소리를 지움으로써 온전한 관찰자의 위치로 물러나기를 시도하는 것이다. 이효진 감독의 모습은 가끔씩 등장하는 내레이션으로, 흑백 화면의 영화 속 몇 안 되는 컬러 화면의 홈비디오 영상으로만 등장한다. <가단빌라>는 할머니를 비롯한 여성 가족구성원들의 일상을 관찰한다. 이 일상에는 부동산과 돈의 문제를 두고 격앙된 목소리로 싸우는 가족구성원들의 모습 또한 포함되어 있다. 내레이션이 아닌 이효진 감독의 목소리가 등장하는 몇 안 되는 순간 중 하나는 화가 난 할머니가 칼을 드는 장면이다. “할머니 칼 들었어”라는 감독의 말은 감독이 자신의 목소리를 삭제함으로써 결심한 자신의 위치를 스스로 배반하며, 자신에게 내포된 불안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가단빌라>는 가족이 왜 싸우는지, 어떤 역사를 가지고 살아왔는지 친절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부동산과 돈의 문제가 전면화되는 다른 작품, 이를테면 마민지의 < 버블 패밀리 >(2016)와 같은 작품들이 IMF를 비롯한 국가적, 사회적 사건들을 끌어오고 뉴스화면 등을 차용하며 가족과 자신이 처한 상황을 적극적으로 해설하는 것과 대비된다. 다만 관객들은 어렴풋이 그 문제들을 짐작할 수 있다. 대가족의 생계와 함께 육아와 가사노동까지 책임져야 했던 할머니의 과거, 딸의 기여를 무시하고 아들에게 먼저 이익을 물려주려는 할머니의 태도, 끊임없이 재산을 ‘날려먹음’에도 반성하지 않는 집안의 남성들. 한국 특유의 부동산 자본주의와 가부장제가 이 영화의 내부에서 맴돌고 있지만, 이효진 감독의 카메라는 그곳에 집중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이 영화는 집안의 남성들을 거의 담아내지 않는다. 종종 프레임 속에 들어오기는 하지만, 그들은 대부분 할머니와 어머니의 말속에서 등장할 뿐이다. 이 영화는 집안을 말아먹고 감독에게 불안감을 심어준 가장 큰 이유가 되는 인물들을 담아내지 않는다. 오히려 감독 자신과 비슷한 위치에서 비슷한 방식으로 살아온 여성 가족구성원에게 주목한다. 마치 “이런 끔찍한 집안에서 살아남은 비결이 무엇인가요?”라며 묻는 것처럼. 영화의 제목인 ‘가단빌라’는 감독이 거의 평생을 살아온 집이다. 동시에 "집을 지어 성공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성공하지 못한다"는 할머니의 말처럼 자본주의적 성공의 지표이고, “삼촌이 말아먹을 수 있는” 투자가치를 지닌 상품이자, 욕설과 고성이 오가는 싸움터이다. 가단빌라라는 공간에 담긴 한 가족의 역사와 정동, 수준미달의 사회와 제도가 만들어낸 집이라는 전쟁터는 반-성장을 추동한다. 영화 후반부에 등장하는, 가단빌라의 평면도 위로 가족의 사진을 오버랩시키는 장면은 영화가 담아낸 반-성장의 근원을 갈무리하고 있다. <잠자리 구하기>와 <가단빌라>의 반-성장 서사는 그것을 기록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잠자리 구하기>의 마지막에서 홍다예 감독은 물에 빠진 잠자리를 나뭇가지로 건져 올려 구해낸다. <가단빌라>는 흑백의 이미지를 담아내는 카메라 뒤에 숨어 있던 감독이 다시금 목소리를 내고 푸른색 하늘을 담아내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두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모종의 결심이 담겨 있다. 혹은 그 모든 것을 견디고 자신이 아직 버티고 있다는 증거로 각자의 영화를 제출해낸 것만 같다. 실바의 말을 다시금 빌리자면, 두 영화는 “과거로 돌아가 (정신적) 병리 현상의 숨겨진 원천을 찾고, 타인들과 의사소통하면서 겪은 고통의 이야기에 목소리를 부여하고, 해방되고 독립된 자아를 형상함으로써 과거를 극복” 5) 하는 것이다. 실바가 이를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아니다. 마크 피셔는 『커밍 업 쇼트』의 논의를 확장하는 글 [반-치료]에서 실바의 분석이 "치료 서사는 더 이상 제도에 의지해 개인을 뒷받침하고 보살필 수 없는 세계에서 의미를 부여해 주는 유일한 이야기"를 보여주는 것이며, “치료 서사의 확산은 의식 고양 운동이 야기한 분자 혁명을 억누르고 개인화한 한 방식” 6) 이라 덧붙이고 있다. 두 영화가 각각 보여주는 우정의 붕괴와 가족의 파괴는 한 개인과 한 가족의 실패라 치부될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두 감독은 그럼에도 살아있고 그럼에도 살아가며 카메라를 들고 자신과 친구들, 가족들을 찍는다. 두 영화는 그 실패 속에 놓여 있는 개인(들)에 집중하고, 각 개인이 놓인 상황에 관한 분석보단 감정의 기록을 택함으로써, 그 이면에 있는 사회와 제도를 생각하게끔 한다. 실바는 “이들이 성인이 된 이야기는 여전히 전개 중이며 이들의 미래는 아직 다 쓰이지 않았다.” 7) 며 책을 마무리한다. <잠자리 구하기>와 <가단빌라>는 90년대에 태어났고 2010년대에 성인이 되었지만 2020년대까지 성인기를 지연시키고 있는 이들의 고통스러운 일기장이다. 이제 그 일기의 이면을 상상하고, 두 영화의 마지막이 내미는 손을 잡을 차례다. *** 1) 제니퍼 M. 실바 「커밍 업 쇼트」, 문현아, 박준규 옮김, 리시올, 2020, 32p. 2) 제니퍼 M. 실바, 같은 책, 38~38p. 3) 제니퍼 M. 실바, 같은 책, 33~35p. 4) 이우빈, "JeonjuIFF #2호 [인터뷰] 20대 청년의 반성장 보고서, '잠자리 구하기' 홍다예 감독", 씨네21, 2022, 출처: www.cine21.com/news/view/?mag_id=100062 . 5) 제니퍼 M. 실바, 위의 책, 50~51p. 6) 마크 피셔, "반-치료", 박진철 옮김. https://playtime.blog/2020/10/22/반-치료/ 7) 제니퍼 M. 실바, 위의 책, 284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