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지니아
- 감독
- 프랑소와 어바웃
- 제작년도
- 1990
- 출연
- 브리짓 마그린, 자끄 데라헤이, 소냐 리나, 케롤라인 시에멘스, 장-데니스 브르고, 프랑소와 로메인, 케럴라인 델라그란지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과거에 만난 작품과 그로부터 얻은 영감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22살 겨울, 처음이자 마지막 단편 연출을 끝내고 나서 나는 명확하게 깨달았다. ‘아, 이건 내가 할일이 아니다.’ 신이 나에게 감독에게 필요한 자질들은 애초에 주지 않았을 뿐더러, 낯가림이 꽤 있었던 20대 시절 나에게는 많은 사람들과 부대껴야 하는 현장이 너무나 스트레스 였다. 이런 성향의 사람에게 편집 파트는 딱 안성맞춤이었다. 영화가 완성되어 가는 과정을 옆에서 지켜볼 수 있으면서도 현장에서의 그 불꽃튀는 부대낌은 겪지 않아도 됐으니까. 근데 막상 졸업하자마자 편집실에 취직을 하고보니, 이곳도 후반작업의 시작이어서 그런지 사람은 꽤 많이 만나는 파트였던지라, 초반에 적잖이 당황을 하며 적응을 해 나갔던 기억이 난다. 그래도 편집실은 하루라는 시간 제한이 있던 현장과는 달리 마감 기한이 훨씬 널널했기 때문에, 그 부분이 조금이나마 위안이 됐다. 나는 사실 편집을 오로지 감으로, 그리고 편집실에서 8년 동안 일하면서 수많은 작업들을 마치 게임 미션을 클리어하듯이 헤쳐 나가면서 오로지 경험으로 배운 케이스이다. 영화과에 들어갔을 때만 해도 단지 나랑 결이 맞는 영화의 엔딩 크레딧을 보는 시간과 그 순간의 공기를 사랑해서 영화를 시작한 케이스였다. 그래서 대학을 다니던 그 시절엔 영화에 대한 지식이 거의 전무했기 때문에 이게 뭔지 알아가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부족했다. 그래서 나에게 편집 선생님이 누구였냐고 물어본다면, 편집실에서 같이 작업했던 수많은 감독님들이 내 선생님들이었다고 대답하고 싶다. 그렇게 쉼없이 달려오다 어느 해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의도치 않게 쉬는 기간이 생겼다. 그때 그동안 본능으로 배운 걸 눈으로 확인 해볼 시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 대학원에 입학하게 되었는데, 그때 다시 본 영화가 < 디 아워스(The Hours) >(스테판 달드리, 2002)였다. 편집의 관점에서 영화 전체를 분석하는 과제가 있었는데, 그동안 작업하면서 사건이나 스토리가 강한 영화가 아닌 정서나 무드로 밀어붙이는 영화의 편집과 연출이 궁금하던 찰나에 마침 리스트에 있길래 선택을 했었다. <디 아워스>는 각기 다른 시간대에 사는 세 여자가 나와서 진행되는 영화이기 때문에 더더욱이 이런 접점이 없는 인물들로 펼치는 스토리 라인에서의 편집이 궁금했다. 나는 주어진 숙제는 성실히 하는 인간이기는 했지만, 그 숙제를 스스로 만들어서 하는 대단한 인간은 아니었기 때문에 그때까지는 눈앞에 닥친 작업들을 끝내는 것에만 몰두하면서 살기 급급해서 이런 식의 공부를 제대로 해본 적은 없었다. 사진: "The Hours", IMDb <디 아워스>에 등장 하는 세 명의 여자들은 소설 『댈러웨이 부인』(버지니아 울프, 1925)으로 묶여 있는 인물들이다. 1923년 영국 시골 도시에서 『댈러웨이 부인』을 집필하고 있는 소설가 버지니아 울프(니콜 키드먼). 1951년 미국 LA에서 이 소설을 읽기 시작한 임신 6개월 째인 로라(줄리안 무어). 그리고 2002년 미국 뉴욕에서 ‘댈러웨이 부인’이라는 별명을 가진 출판사 편집장 클래리사(메릴 스트립). ‘댈러웨인 부인’을 쓰고, 읽고, 그렇게 불려지는 이 세 여자들이 소설 속의 주인공처럼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파티를 준비하고 사람들과 만나는 단 하루를 통해, 결국 이 여자들을 관통하는 하나의 고독과 그것을 어떻게 마주하고 받아들이는지, 영화 안에서 시간을 건너뛰어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면서 어떤 순간들을 만들어 내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이 영화는 연출이나 편집을 활용해서, 다른 시대를 살아가는 인물들이 교차되는 씬들을 행동으로 이어 받아주든지, 아니면 서로 다른 시대에 사는 인물의 나레이션을 이용하거나 음악으로 세 인물을 하나의 분위기로 감싸는 등의 다양한 방식으로 씬과 시퀀스를 이어가고 엮어간다. 그렇게 이 주인공들이 결국 같은 불안과 고독을 가진 채 살아가고 있음을 드러내고, 이로 인해 파생되는 다양한 감정을 쌓아가며 영화의 에너지를 확장시켜 나갔다. 그때 이런 부분들을 세세히 뜯어 보면서, 나는 편집할 때 설계해야 하는 이미지의 배치나 컷 구성, 그리고 컷팅으로 어떻게 영화의 에너지를 잃지 않고 2시간 가까이 되는 시간을 끌고 나가는지에 대한 공부를 많이 하게 되었다. 영화 속 세 여주인공이 하루 동안 겪는 감정적인 불안의 근원은 결국 자기 모습 그대로 온전히 드러낼 수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허무함에서 오는 고독과 외로움이었다. 영화 속에서 보이는 이런 주인공들의 ‘하루’라는 시간은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똑같은 일상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날 만나는 사람들을 통해서 마음 속의 어떠한 균열들이 건드려지게 되고, 그 균열을 감당하고 버티고 해소하는 과정 속에서, 자신의 삶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투쟁 해야만 내 모습 그대로의 온전한 삶을 살 수 있다는 메시지를 영화는 건네고 있다. 사진: "The Hours", IMDb (좌 상단부터 시계 방향, 버지니아1 , 버지니아2 , 클래리사 , 로라 ) “삶과의 투쟁없이는 평화도 없어요.” - 버지니아 울프(니콜 키드먼) 영화를 만드는 일은 재밌으면서도 너무나 어렵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처음 편집을 시작하며 꿈을 키워 갈때는 나도 여느 유명한 편집감독님 들처럼, 이런 저런 다양한 장르를 다 잘 소화하는 편집기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그리고 그런 부분이 내 뜻대로 잘 되지 않을때 좌절도 하고 나에 대한 자책도 많이 했던 기억들이 떠오른다. 하지만 영화를 편집하면서 느낀 가장 큰 부분은 영화에는 정답이 없고, 다 각자 자기만의 색깔과 방식이 존재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편집기사는 그 무수히 많은 촬영 소스에서 배우의 연기와 감독의 연출 스타일을 통해 작품에 가장 적합한 방식으로 개성과 매력을 찾아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지금도 무난하게 5점짜리 씬만 있는 영화보다는 좀 불균질하더라도 3점과 7점이 공존하는 영화가 더 매력있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밖에서 바라볼 때 평균 점수가 똑같더라도 말이다. 아무래도 영화는 다른 예술 장르와 달리 너무나 큰 자본이 들어가고 수많은 사람들과의 소통과 협업을 통해 작업이 이뤄지는 곳이다. 그래서 대중적으로 통용되는 ‘이래야만 한다’라는 것도 분명히 존재하고, 수학의 정석처럼 딱 꼬집어 정의할 수는 없지만 무언가의 규칙들이 이 산업 안에서는 존재한다. 처음 일을 시작하고 편집기사라는 이 일에 대한 열망과 사랑이 컸던 나에게는 내가 가지고 있는 기질보다는, 이 업계에서 통용되고 있던 ‘그래야만 한다’라는 것들의 기준에 맞춰서 변하려고 많은 애를 썼다. 하지만 의도치 않은 잠깐의 휴식기 아닌 휴식기를 가졌던 그때의 나는, 나라는 사람이 거쳐온 시간에 대해서 많이 고민하고, 해소할 것은 해소하고 흘려보낼 것은 흘려보내는 그런 시간을 보냈다. 그 당시 나는 편집기사로서의 손연지, 인간 손연지의 장점과 매력은 무엇인지, 편안하게 나를 드러낼 수 있는 영화와 환경은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을 끊임없이 했던 것 같다. 살아가면서 쉼없이 달리기만 하는 것보다는, 남들이 보기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무용한 시간도 가끔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 시기가 나에겐 그랬다. “있는 나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인정하는 것.” 가지고 있는 기질 덕분에 어렵지 않게 잘할 수 있는 작업과 공부가 필요한 작업에 대한 구분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성향적인 부분에서 오는 장점과 한계들... 그때 이 영화를 통해 나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연습을 했다는 생각이 든다. 편집기사로든 사람으로든. 나는 운명론을 좀 믿는 편인데, 내가 보는 영화나 작업하는 영화가 나에게 찾아온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2017년의 나에겐 <디 아워스>가 찾아와 편집기사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던져준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내 손목이 허락하는 한 할머니가 되어서도 편집을 하고 싶기 때문에, 앞으로 나이가 들더라도 내가 가진 감각과 감성을 지키면서도 고착화되지는 않는 그런 할머니 편집기사로 늙어가고 싶다. 내가 편집한 작품이 어느 누군가에게는 필요한 말을 건네는 그런 마법같은 순간이 일어나길 기원하며, 오늘 하루도 언제나 그랬듯 마우스를 잡을 것이다. 사진: "The Hours", IMDb 손연지(편집기사) l 극영화, 드라마, 다큐, 뮤지컬 필름 등 스토리 텔링이 들어간 다양한 장르에서 편집을 한다. 눈을 끄는 화려한 편집도 좋지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편집을 하고 싶다. 영화 < 비밀 >(2023), < 세자매 >(2020), < 찬실이는 복도 많지 >(2019), < 이장 > 등 다수, 드라마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 편집
“집중, 집중.” < 저지 프리스트 > 첫 장면에서 초상화처럼 정면으로 찍힌 윌리엄 프리스트 판사(윌 로저스)는 의사봉을 두들기며 카메라를 향해 꾸짖듯 말한다. 그런 다음 정작 자신은 쥐고 있던 신문으로 눈을 돌린다. 다소 당황스런 이 장면은 이어진 크레딧 시퀀스 다음 장면에서 흑인 제프 포인덱스터(스테핀 펫칫)의 닭 절도 재판이 벌어지고 있는 법정 시퀀스의 일부임이 드러난다. 프리스트 판사는 검사의 열띤 논고가 이어지는 동안 방청객에게는 잘 들으라고 호통을 치면서도 자신은 재판에 아무 관심이 없다는 듯 태평스럽게 신문 읽기에 계속 몰두하고 있다. “포드는 가장 브레히트적 영화감독이다. 그는 자신을 벌거벗은 모순으로 제시한다.” 장 마리 스트라우브의 이 말을 <저지 프리스트>의 첫 장면보다 더 잘 예시하는 장면도 드물 것이다. 방청객에게 경청을 요구하면서 자신은 경청하지 않는 판사, 사건 자체에는 아무 관심이 없고 과시하듯 딴청을 피우는 판사, 피의자가 실제로 절도를 했는지 여부보다 그가 메기 낚시 미끼로 뭘 썼는지가 더 궁금한 판사. 피의자가 자리에서 졸고 있자 “깨워. 이 법정에서 잘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어.”라고 태연하게 말하는 판사. 첫 장면에서 프리스트 판사가 카메라를 보며 호통 칠 때, 그 호통은 법정의 방청객을 향한 것이면서 동시에 이 영화의 관객을 향한 것이기도 하다. 자신이 성실한 책무 이행자가 아님을 노골적으로 선언하는 이 장면은, 프리스트가 성직자를 뜻하는 그의 이름이 암시하는 대로 자신을 법 위의 존재, 도덕적 확신의 존재, 그리고 서사적 규율 밖의 존재로 제시하는 장면이기도 하다. 엉뚱한 희극처럼 보이는 첫 재판 시퀀스는 법정 공방도 생략된 채, 프리스트 판사와 피의자가 낚시를 가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어눌한 흑인이 어떻게 절도 혐의를 벗게 되었는지, 아니 혐의를 벗었는지 여부도 우리는 알 수 없다. 프리스트 판사처럼 존 포드도 재판에 무관심하다. 서사 전체를 통틀어 프리스트의 관심사는 두 가지밖에 없다. 낚시(혹은 크리켓 게임)와 조카의 로맨스. 존 포드는 이 게으른 판사를 주인공으로 삼아 그의 직무태만을 고스란히 드러낸 뒤, 사랑의 중재자로서의 면모에 서사의 대부분을 할애한다. 19년 뒤에 만들어진 이 영화의 리메이크이자 걸작 < 태양은 밝게 빛난다 >(1953)에 필적한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저지 프리스트>는 포드의 이력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영화다. 두 가지 점에서 그러하다. 먼저, 이 영화엔 소란과 신명에 대한 포드의 도취가 처음으로 온전히 표현되어 있다. 주인공이 자신의 직분과 임무를 잊은 듯 혹은 서사가 자신이 제시한 사건을 잊어버린 듯 발산되는 디오니소스적 파토스의 원형이 여기 있다. 이 도취는 역시 윌 로저스가 주연을 맡은 이듬해의 < 굽이도는 증기선 >(1935)에서 폭발하듯 분출하며, 이후 포드 영화에서 가까스로 억압될지언정 결코 삭제되지 않는 정념의 용암이자 영화적 활력의 원천으로 쉼 없이 작동한다. 이와 연관된 다른 하나는 포드의 주인공의 도덕적 이중성이 이 영화에서부터 뚜렷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포드의 주인공에게는 공동체로부터 도덕적 책무가 부과돼 있지만, 그는 자신의 책무에 은밀히 저항한다. 그는 신성한 책무를 훼손(< 젊은 날의 링컨 >)하거나 일시적으로 망각(< 황야의 결투 >)하거나 그로부터 도피(< 도망자 >)하려 한다. 하지만 이 시도는 대개 갖가지 방식으로 실패한다. 포드 영화에서 공동체적 도덕과 사적 윤리는 끝없는 내적 교전을 벌이며, 그의 서사에는 임무의 완수를 향한 필연적 전개라는 표면 아래, 이 내적 교전의 자의적 혹은 우연적 해소로 귀결되는 부조리와 비합리가 음각되어 있다. 프리스트 판사의 이중성이야말로 공동체의 의무를 짊어진 이후 포드의 주인공들의 숨겨진 분열증을 예기하는 것이다. 줄거리는 이렇다. 윌리엄 프리스트는 순회재판소 판사(선출직)로 30년간 일해 왔지만 요즘은 낚시와 크리켓이 일과의 대부분이다. 죽은 형의 아들 제롬이 법률공부를 마치고 뉴욕에서 돌아온다. 제롬은 엘리 메이를 사랑하지만, 제롬의 어머니는 엘리 메이가 아버지도 알 수 없는 고아라며, 프리스트의 자리를 노리는 주 상원의원이자 법률가 호레이스 메이듀의 딸 버지니아와 결혼시키려 한다. 프리스트는 제롬과 엘리 메이를 맺어주기 위해 갖은 꾀를 낸다. 그러던 중 폭행 사건과 재판이 벌어지고, 프리스트는 피의자 밥 길리스가 엘리 메이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조카 제롬과 함께 프리스트는 판사가 아닌 변호사로 법정에 나서 그를 변호한다. 영화의 배경은 1890년대, 켄터키 주의 한 소도시다. 남북전쟁이 끝난 지 30년이 흘렀지만 프리스트를 포함한 이곳 주민들은 전쟁의 기억과 더불어 살아간다. 정확히 말하면 이들은 북군(Union)과 맞서 싸웠으나 패배한 남부 연합(Confederate)에 대한 향수를 버리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프리스트는 남부인의 기질을 발휘하고 이용해 밥 길리스의 방면 및 제롬과 엘리 메이의 결합이라는 숙제를 해결한다. 몇몇 포드 영화뿐만 아니라 남북전쟁을 소재로 다룬 미국 영화를 볼 때, 우리 같은 외국 관객이 종종 이해하기 어려운 점은 남부적인 것에 대한 동경에 가까운 향수다. 미국 남북전쟁을 노예해방전쟁으로만 바라보면 이 향수는 노예제도 옹호와 같은 터무니없는 태도로 보인다. 하지만 문제가 그렇게 단순할 리는 없다. 여기엔 제도의 선악과 무관하게 남부 연합이 표상하는 모종의 모럴이 있다. 이 문제에 대해선 미국 학자의 견해를 빌려야 할 것 같다. 노예옹호론자들 뿐만 아니라 남부 충성파들의 생각은 대체로 이러하다. “북부인들은 기록과 돈에만 눈이 먼 야비하고 궤변적인 사람들일 뿐만 아니라 현실적이고 법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며 반면 남부인들은 “관대하고 기사도 정신이 뛰어나며 친절하고 명예를 존중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즉 남부 연합에 대한 향수에는 성문법이 지배하는 북부의 합리적이며 근대적인 생활방식에 대항해 명예와 관습법을 존중하는 “남부의 생활방식에 대한 옹호”라는 면이 개입되어 있는 것이다.(다니엘 부어스틴, <미국사의 숨은 이야기>, 범양사) 켄터키 주는 남북 전쟁 때 중립을 표방했으나 결국 전쟁의 소용돌이를 피할 수 없었고 주민들은 남부와 북부로 갈라져 싸웠다. 하지만 켄터키 주엔 남부 연합에 대한 호의를 지닌 주민들이 많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프리스트 판사와 주민들 대부분은 남북 전쟁 때 남부 연합에 소속돼 싸웠으며, 남부 연합 참전군인에 대한 거의 무조건적인 친밀함을 지니고 있다. 그 친밀함은 프리스트 판사에겐 법리는 물론 사건의 사실관계에도 앞서는 것이다. 반면 웅변하기 좋아하고 사실관계를 중시하는 엄격한 법률가의 태도를 지니고 있으며 프리스트의 자리를 노리는 야심가 호레이스 메이듀는 북부의 태도를 부정적인 방식으로 표상한다. 요컨대 프리스트의 남부적 모럴(관습법과 명예)과 판사라는 직책(성문법과 합리)은 불화가 예정된 것이며, <저지 프리스트>의 첫 장면은 이 불화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그렇다 해도 그가 엄격한 사실에 근거해 판정해야 하는 판사의 책무를 방기하거나 위반하면서까지 흑인 혹은 사회적 소수자에 편에 선다는 점에서 그를 일반적인 노예제도 옹호론자와 같은 부류에 포함시킬 수는 없다. 우리로선 긍정적인 의미의 남부적 모럴을 황야의 율법에도 문명의 규율에도 속할 수 없는 서부사나이의 모럴과 겹쳐놓고 보는 것이 맞을지 모르겠다. 프리스트의 정치적 모호성은 곧 존 포드의 모호성이다. 이 영화에서 위대한 남부인의 초상을 그린 포드는 5년 뒤에 가장 위대한 북부인의 초상을 담은 <젊은 날의 링컨>을 만든다. 아마도 포드의 서부사나이는 포드 자신의 범주화할 수 없는 이런 내적 모순을 투영한 인물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포드의 첫 유성 서부극 < 역마차 >보다 5년 전에 만들어졌지만, <저지 프리스트>를 포드의 또 다른 유사 서부극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재판 시퀀스로 시작한 <저지 프리스트>는 두 번째이자 마지막 재판 시퀀스로 끝난다. 앞서 말했듯 첫 재판에서 프리스트 판사는 제프의 절도 여부는 무시하고 그가 옛 북군 장군의 하인이었다는 것과 메기 낚시를 잘한다는 것에만 관심을 갖는다. 이후의 서사 전개는 마지막 시퀀스인 두 번째 재판과 직간접적으로 연관된다. 내 생각에 두 번째 재판은 포드의 필모그래피 전체를 통틀어 가장 멋진 시퀀스의 상위에 오를만하다. 이 재판의 피고는 “많이 일하고 말이 없는” 타지 출신의 일꾼 밥 길리스이다. 프리스트와 목사 외엔 그가 엘리 메이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엘리 메이 자신을 포함해, 알지 못한다. 밥은 엘리 메이에 대한 동네 남자들의 험담을 참지 못해 주먹을 휘두르고 이 때문에 법정에 선다. 프리스트 판사는 주먹다짐 현장에서 밥의 편을 들었다는 이유로 판사석에 앉지 못한다. 증인석에 앉은 밥은 왜 주먹을 휘둘렀는지에 대한 질문과 그의 살인 전과와 종신형 선고 전력을 알아낸 검사의 심문에 일체 답하지 않는다. 이때 프리스트가 변호사로 등장해 기막힌 계략을 실행한다. 증인석에 앉은 목사는 비밀엄수 약속을 깨고 입을 연다. 전쟁 당시 남군의 포병대 대위였던 목사는 남군의 패색이 짙어지자 종신형 선고자들로 부대를 충원했다. 목사는 그들 중 한 사람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가 군인으로서 인간으로서 훌륭한 사람이었다는 사실과 목숨을 걸고 전우를 구출한 경험담 그리고 이제껏 그가 딸을 위해 매달 생활비를 자신을 통해 전달해온 사실이 목사의 입으로 진술된다. 대부분 남군 병사였던 노인들로 채워진 배심원석은 목사의 증언이 진행되면서 술렁이기 시작한다. 이때 프리스트의 신호에 따라 재판소 바로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제프는 하모니카와 북으로 남군의 행진가였던 ‘딕시’를 연주하기 시작한다. 목사가 일어서서 그 병사가 바로 밥 길리스라고 지목하자, 배심원들은 일제히 일어서서 ‘제프 데이비스(남군 연합의 대통령) 만세’ ‘밥 길리스 만세’를 외치고 재판은 중단된다. 법정은 난장판이 되고, 흑인들은 흥겨운 딕시 연주를 계속하며, 이 소란은 곧바로 남군 베테랑들의 떠들썩한 축하 행진으로 이어진다. 행진하던 베테랑들은 주민들 틈에 있던 밥 길리스를 행렬에 끌어들이고 행진을 계속한다. 이것이 영화의 끝이다. 부동의 재판은 역동의 난장으로 바뀌고, 작은 사실들의 오점은 큰 정신적 우위로 무화된다. 엄격한 정신이 소유자라 해도 이 벼락같은 난장의 활기와 신명에 마음을 뺏기지 않기란 힘들 것이다. <저지 프리스트>는 세부적 규칙과 사소한 사실관계에 집착하는 북부인의 모럴 혹은 근대적 합리주의에 침 뱉는다. 이것은 포드 중기작에서 ‘주정뱅이 천사’라는 전형적 역할로 등장해온 포드의 형 프랜시스 포드의 침 뱉기로 구현된다. 호레이스 메이듀가 언성을 높일 때마다 멀리 떨어진 타구(침통)에 정확히 침을 명중시켜 법정을 번번이 웃음바다로 만들던 이 주정뱅이 배심원은 남부군 베테랑들의 행진에 경의를 표하는 호레이스의 모자 안에 다시 한 번 정확히 침을 명중시킨다. 포드는 예의와 매너로 자신을 치장하는 호레이스 같은 인간을 포용할 생각이 없다. 오늘의 눈으로 이 마지막 재판 시퀀스의 결함을 지적하는 건 쉬운 일이다. 이 재판에서는, 첫 재판에서와 마찬가지로, 폭행 사건에 대한 법률적 판단이 피의자의 삶에 대한 도덕적 판단으로 대체된다. 이는 사실상 근대적 법체계에 대한 부정이다. 더구나 이 도덕적 판단은 이성적 판단이라기보다 일종의 선동으로 이뤄진다. 두 재판에서의 프리스트의 선택이 모두 약자를 구하기 위한 시도라 해도 이건 위험한 포퓰리즘 아닐까. 또 다른 문제는 딕시를 연주하는 사람들이 모두 흑인이라는 것과 연관된다. 흑인들이 자신들의 해방을 반대한 남부 연합의 군가를 연주함으로써 남부인의 찬미에 가담하는 이 장면에는 만든 사람의 인종주의적 시각이 작용하고 있는 건 아닐까. <저지 프리스트>에는 이런 비판을 논박할 증거가 없다. 태그 갤러거에 따르면, 이 영화에는 분노에 사로잡힌 주민들의 흑인 린치 장면과 프리스트가 린치 중단을 호소하는 장면이 포함되어 있었으나 스튜디오에 의해 삭제되었다고 한다.(<존 포드>, 이모션북스) 리메이크 작인 <태양은 밝게 빛난다>에서 되살아난 린치 장면이 삭제되지 않았다면 이 영화는 보다 모호하고 복합적인 텍스트가 되었을 것이고 그 장면이 변호의 근거가 되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만날 수 있는 <저지 프리스트>는, 개봉 당시 상업적 성공을 거두긴 했어도, 당대의 진보적 관객이라면 온전히 긍정하는 게 거의 불가능한 영화였을 것이다. 80여년이 지난 오늘의 관객 그리고 외국 관객으로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가능한 대답은 존 포드가 오히려 결함과 난점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길을 택했다는 것이다. 첫 장면에서부터 판사의 직무 태만을 통해 근대적 재판에 대한 무관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냄으로써, 그리고 딕시의 연주를 굳이 흑인들에게 맡김으로써, 포드는 결함을 최소화하거나 위장하는 게 아니라 장 마리 스트라우브의 말대로 자신을 ‘벌거벗은 모순’으로 드러낸다. <저지 프리스트>는 엄숙한 재판을 신명의 축제로 순식간에 탈바꿈시킨다. 이 축제는 얼룩과 오점을 고스란히 노출한다. 누군가는 그 얼룩과 오점 때문에 이 영화를 거부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 다른 누군가는 같은 이유로 이 영화를 그 얼룩과 오점의 성찰로 간주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느 쪽이라도 해도 최종적 판단은 미루는 게 좋을 것이다. 존 포드의 본격적인 필모그래피는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다.
배가 똑바로 나아가려면 바닥에 짐을 실어야 하듯, 우리에겐 늘 어느 정도의 근심이나 슬픔, 결핍이 필요하다 - 쇼펜하우어 SF의 변곡점 SF(Science Fiction) 영화가 ‘공상 과학 영화’로 번역되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은 그냥 ‘에스에프’라고 불리는 것 같다. 공상(空想)과 과학은 다른가? ‘공상 과학’의 어감은 과학이 첨예한 정치경제학의 산물임을 은폐하는 듯하다. 마치 ‘괴짜의 상상력’처럼 현실과 동떨어진 느낌이다. 상상력이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다. 인식자의 위치를 이동시킬 때 다르게 보이는 경험이 주는 자원. 이것이 상상력이다. ‘공상 과학’은 사회적 위치성(포지션)을 공상이라는 관념으로 대체한다. 수많은 SF 영화가 있지만 나는 우주(외계인)와 지구를 대립적으로 다루는 영화가 불편하다(솔직히 말해, ‘분개한다’). 대개의 SF에서 주인공은 미국인이다. 미국인은 외계인과 친하든, 그들을 연구하든, 전쟁을 수행하든 다양한 방식으로 지구를 대표한다. 실제로 미국은 지구를 ‘지킨다(지배한다)’. 그들은 세계의 경찰임을 자칭하면서 대외적 군사 개입을 “경찰 활동(police action)”이라며, ‘국내 치안’으로 생각한다. 한국전쟁 참전도 공식적으로 “경찰 활동”(트루먼 대통령)이었다. 전 세계가 미국의 땅이라는 발상이다. 자기만 ‘지구의 1등 시민’, ‘제1의 성’이라는 것이다. 미국은 9․11 이전까지 국방부가 없었다. 미국 국방부(DOD, Department of Defense)는 우리나라처럼 자국 방위를 위한 부처가 아니라 전 지구를 대상으로 업무를 보는 곳이다. 9․11은 미국 역사상 최초로 자기 땅이 침략당한(?) 사건이었다. 이후 미국은 다른 나라의 ‘진짜 국방부’에 해당하는 국토방위부(Department of Homeland Security)를 신설했다. 디스트릭트 9(District 9) 외계인과 싸우는 지구의 대표가 ‘파키스탄인’이거나 ‘에콰도르인’인 영화가 있었던가. 닐 블롬캠프 감독의 < 디스트릭트 9(District 9 )>(2009년) 가 걸작인 이유는 영화 자체의 완성도도 뛰어나지만, 외계인과 지구인 간의 섹스나 감염 문제를 다룰 때 실험 대상은 백인 남성이 아니라 유색 인종이거나 여성임을 날카롭게 지적했기 때문이다. 외계인이 나오지 않는, 실종된 미국 우주인을 그린 < 그래비티(Gravity) >는 <디스트릭트 9>과 함께 SF의 역사의 한 챕터에 등장할 만하다. 더불어, <그래비티>는 우주 쓰레기 문제도 심각하게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스페이스 영화에 거의 등장하지 않는 (‘비록 중국이지만’)아시아 국가가 나온다는 점에서도 인상적이었다. 우울증과 중력 내게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첫 영화는 < 이 투 마마(Y Tu Mama Tambien, And Your Mother Too) >(2001)였다. 황홀했다. 나는 한동안 디에고 루나와 가엘 가르시아 베르날에 서 헤어 나오지 못했으나 친구들과 신나게 영화 감상을 나누지는 못했다(‘미남’ 배우에 대한 자기 검열이 있었다). 이후 두 배우는 엄청나게 성장했다. 알폰소 쿠아론의 필모그래피는 말할 것도 없다. 제작자로 참여한 < 비우티풀(Biutiful) >이나 < 판의 미로-오필리아와 세 개의 열쇠 (Pan's labyrinth) > 모두 굉장한 세계였고 < 칠드런 오브 맨(Children of men) >, < 사랑해, 파리(Paris, Je T'Aime) >, < 해리 포터와 아즈카반의 죄수(Harry Potter and the prisoner of Azkaban) >에 대한 내 의견은 사족이리라. 알폰소 쿠아론 알폰소 쿠아론의 <그래비티>는 2014년 제86회 미국 아카데미 감독상을 비롯해 수많은 상을 탔다. 나는 아직 <로마>(2018년)를 보지 못했고 그의 작품 세계가 어떻게 진화할지 모르지만, <그래비티>(2013년)는 그의 대표작으로 남을 가능성이 크다. 내게는 ‘내 인생의 영화’다. 하지만 두 번 볼 용기는 없다. 치유 과정의 고통을 두 번 겪고 싶지는 않다. 직면하기 어려운 영화다. 이 영화를 ‘호러’로 분류하면, 미친 짓인가? 나는 무서웠다. <그래비티>는 물리학과 실존주의를 융합하고 그 두 세계를 모두 넘어서, 제3의 지식을 만들었다. 우울증에 관한 설명이 그것이다. 모든 질병이 그렇지만, 우울증은 묘사하기 매우 어려운 병이다. 너무 복잡하고 이해하기 힘든 질병이다 보니, 누군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근대에 이르러 인간이 자연을 마구 파괴하다 보니, 이제 자연이 인간을 공격하기 시작했다.”(물론 우울증은 고대부터 있었다). 대개의 질병은 ‘원인’은 다양하고, 증상은 비슷하다. 그래서 증상을 통해 병명을 진단할 수 있다. 우울증은 반대다. 원인은 ‘하나’인데, 증상은 다양하거나 극단적으로 반대 현상을 보이기도 한다. 의사도, 환자도 진단이 어렵다. 불면으로 고통받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내내 자는 사람도 있다. 폭식증이 있는가 하면, 음식을 먹지 못하는 이들도 있다. 병을 인지하기 어렵기 때문에 초기에 치료 시기를 놓치는 경우가 많다. 살아 있을 때 몸은 의지로 움직인다. 죽음이란 몸에서 의식이 빠져나간 이후를 말한다. ‘몸’만 남는 것이다(영어의 ‘body’는 본래 시체라는 뜻이다). 경험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우울증은 의지-의식-의욕, 이 세 가지 상실이 혼재된 상태인 듯하다. 한마디로 무기력의 연속이다. 그래서 온종일 침대에 누워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몇 년간 계속되어 욕창으로 사망하는 이도 있고, 우울한 상태에서 극한의 자신과의 투쟁으로 생활을 이어나가는 이도 있으며, 심지어 우울을 잊기 위해 미친 듯이 일이나 공부, 글쓰기에 몰두하여 생산력이 높은 ‘고기능 우울증 환자’도 있다(헤밍웨이나 버지니아 울프가 이에 해당한다). 물론, 마지막의 경우 오래가지는 못한다. 대개 육십 세를 전후하여 자살한다. 더는 그럴 기운이 없기 때문이다. 지구에서 생명이 존재할 수 있는 이유는 모든 물체 사이에 작용하는, 서로 끌어당기는 힘 때문이다. 이 힘은 모든 곳에 있다. 그래서 만유인력(萬有引力, universal gravitation)이라고 부른다. 그래비티, 중력(重力)은 말 그대로 무거운 힘이다. 물체의 무게는 이 힘을 가리킨다. 만유인력과 지구 자전에 따르는 원심력이 더해져, 우리는 지표면에 의지해 살 수 있다. 우울증 환자의 호소. “지구가 나를 붙잡지 않아요.” 중력의 법칙에서 배제된 이들이 우울증을 앓는 이들이다. 우울증의 고통에 비하면, ‘우울(憂鬱)’이라는 표현은 우아하기까지 하다. 우울증 환자의 삶은 격렬하다. 격렬한 고통이다. 현실의 중력이 너무 강하면 세상살이가 고달프다. 지표에 끌려다니며, 먹고 사느라 세속을 헤매게 된다. 우울증은 반대로, 몸에 중력이 작용하지 않아 지표면에서 떠 있는 상태를 말한다. 무중력 상태의 삶을 오래 견딜 수 있는 인간은 많지 않다. 우울증은 살기 싫은 병이기 때문에, 몸과 땅이 붙지 않고 서로 싸운다. 누가 이기겠는가. 중력이 버린 몸. 자살은 이 증상으로 인한 질병사일 뿐이다. 마흔에 중증 우울증 진단을 받고 삶을 지속하고 있는 내 친구는 말한다. “난 그때 죽었는데, 왜 살아 있는 거야? 그때 죽었는데, 내 시체가 발견되지 않은 듯한 느낌 알아? 매일 내 장례식에 다녀온 기분 알아?” 우울증 환자가 24시간 아픈 것은 아니지만, 불행한 감정 상태에 ‘몰빵’되어 다른 인생을 상상하기 힘들다. 우울증에 걸린 그 순간 이후의 삶은 잉여, 살아 있으되 죽어 있는 시간, 비참하고 무의미한 고통의 시간이기 때문이다(약으로 고통을 완화할 수는 있다). 인생이라는 배가 돌아다니기(움직임) 위해서는, 일단 정박(碇泊)할 곳이 있어야 한다. 정박할 곳이 없으면 이동하지도 못한다. 정박하지 않은 배는 정처 없이 떠다니다가 모든 것으로부터 상처받는다. 배는 서서히 부서지고 부식된다. 살려는 의지와 죽음의 욕망(‘충동’이 아니다, 죽을 만큼 아픈 것이다) 사이에서의 투병 생활은 매 순간 ‘선택’의 압력에 시달리는 상태다. 이때, 선택은 자유 의지로 하는 선택이 아니다. 기분이 날뛰며(업앤 다운이 반복) 기진맥진해지는 기분 장애(mood disorder)의 상황이다. 내가 아는 우울증 환자는 이 병으로 인해 그녀가 평생 노력해서 얻은 ‘좋은 직장’을 잃었다. ‘성취’가 끝나자마자 질병이 찾아온 것이다. 그녀의 인생은 행복한 기억이 없다. 가장 괴로운 시간은 아침이다. 선택해야 하기 때문이다. 집을 떠날지, 한국을 떠날지, 지구를 떠날지. 지구를 떠난다면 갈 곳은, 단 한 곳 우주이다. 그녀는 매번 ‘선택’에 대해 조언을 구하지만, “조언해 달라”는 그녀의 요청에 한없이 응대할 사람은 없다. 그녀가 요구하는 대답은 정해져 있다.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중력이 없어서 생존 가능한 공간, 우주 우주는 무중력 상태이므로 지구와 달리 우울증 환자가 살 수 있는 공간이다. 우주가 배경인 <그래비티>에서 우울증 환자는 지구에서와는 다른 경험을 할 수 있다. 무중력이지만, 첨단 장비가 끊어진 중력과 자신을 연결해주니 발버둥 치지 않아도 생존 가능하다. 지구에서 이 연결은 사람과 사랑이지만, 구하기 쉽지 않은 끈이다. 우주의 무중력은 지구의 중력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이 영화의 아이디어는 여기서 출발한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우울은 같지 않다. 두 가지로 구별해야 하는데, 나누지 않아서 문제다. 인간은 누구나 슬프고 기쁘고 우울하고 들떠 있다. 다양한 기분 상대를 산다. 그리고 누구나 우울한 ‘기분’이 들 때가 있다. 약간 우울한 사회, 고뇌하는 사회가 좋은 사회다. 反사회적 인간의 조증(躁症)이 판치는 상태가 가장 위험하다. 글의 서두에 인용한 대로, 안정된 삶은 어느 정도의 ‘마음의 짐’을 진 채 사는 것이다. 우울, 걱정, 슬픔은 인간을 성숙하게 하고 타인과 조화로운 삶을 사는 데 필수적이다. 이런 우울한 상태는 인간의 조건이다. 하지만 질병으로서 우울증은 이와 크게 다르다. 정신 질환(mental disease)과 신체적 질병(physical disease)을 구분하는 것은 불가능한데, 사회는 유독 ‘정신병자’와 ‘암’ 환자를 다르게 생각한다. 둘 다, 고통받는 몸(body in pain)인데도 말이다. 정신 질환은 가볍게 취급되거나(“우울증은 마음의 감기”) 반대로 통제 불가능한 공포의 대상(“정신병자가 탈출했다!”)이라는 식의 극단적 인식을 오간다. <그래비티>에서 산드라 블록은 아이를 잃은 전문직 여성이다. 사랑하는 딸이 죽었다. 누가 우울하지 않겠는가. 비통하지 않겠는가. 삶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이 애도의 시간은 지극히 정상이다. 반면, 이 시간을 ‘제대로’ 보내지 못한다면, 의학의 도움이 필요한 질병으로 진전될 수 있다. (일견 해피엔딩으로 보이지만)이 영화에서 그녀가 어느 정도의 상황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지구에서는 땅을 디딜 수 없었던 그녀가 땅을 밟을 필요가 없는 우주를 경험함으로써, 다른 세상을 상상하고 여행(journey)하는 이야기임은 틀림없다. 우리가 우울할 때 혹은 우울증을 앓는 환자에게 가장 도움이 되는 방법은, 두 경우 모두 몸을 움직이는 것이다. 집에서, 침대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 일이 죽을 만큼 힘들지만 이동과 운동만큼 효과적인 것은 없다. 우울증에 대해서는 전문가들도 견해가 다른데, 움직임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다. 우주, 가장 먼 이동이다. ‘우울과 중력’이라는 주제에 대해 알폰소 쿠아론의 <그래비티>만한 통찰은 당분간 나오기 힘들 것 같다. 시리아나(Syriana) 이 영화에서 어떻게 조지 클루니를 빼놓을 수 있을까. < 시리아나(Syriana) >, < 마이클 클레이튼(Michael Clayton) >, < 인 디 에어(Up in the air) >를 보길 권한다. 특히 <시리아나>를 강력히 추천한다. 이 영화들에서 그는 반미주의자 혹은 공산주의자이며, 인생의 바닥을 수십 번 치고도 자기를 사랑할 줄 아는 매력적인 루저이며, 패배를 반복하고도 변화할 줄 아는 인간을 연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