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나이퍼
- 감독
- 루이스 로사
- 제작년도
- 1992
- 출연
- 톰 베린저, 빌리 제인, J.T. 월쉬, 아덴 영, 켄 래드레이, 레이날도 어리너즈, 게리 스완슨, 행크 가렛, 프레드릭 미라글리오타, 바네사 스틸, 카를로스 알바레즈, 테일러 코핀, 테오 게버트, 에드워드 윌레이, 윌리엄 커틴, 하워드 보스
베킷과 베케트, 서로 다르게 번역되었지만 두 이름의 철자는 Beckett로 동일하다. 베킷은 누군가의 이름, 베케트는 누군가의 성이다. 성의 자리에 놓이든 이름의 자리에 놓이든 사람들은 그를 베킷 혹은 베케트라 부른다. 영화 <베킷>의 주인공은 베킷이다. 문득 베킷(존 데이비드 워싱턴)의 풀 네임이 궁금해졌다. 베킷이라는 이름과 어울릴만한 성은 아무래도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연인 에이프릴(알리시아 비칸데르)도, 낯선 미국 대사관 직원도 그를 베킷이라 부른다. 그의 이름은 퍼스트 네임과 라스트 네임이 따로 존재하지 않고 닉네임처럼 베킷이라는 두 음절로만 이뤄진 것 같다. Beckett은 작가 사뮈엘 베케트의 이름이기도 하다. 사뮈엘 베케트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줄여 부를 때는 베케트라고 지칭한다. 베케트가 영미권 학계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는 넷플릭스 드라마 <더 체어>(2021)를 보면 미루어 알 수 있다. <X 파일>의 배우 데이비드 듀코브니가 자신을 연기하며 특별 출연한 에피소드에서 베케트의 이름은 예기치 않게 등장한다. 유명 배우인 듀코브니는 교수직를 얻기 위해 오래전에 쓰다만 박사논문을 유물처럼 발굴하는데 그것이 바로 베케트에 관한 논문이다. 이는 예일대 영문학과 박사학위를 밟던 듀코브니의 실제 경험을 반영한 것이다. 업데이트되지 않은 교수들에게 관대한 제스처를 보이던 학과장 김지윤(산드라 오)은 듀코브니와 그의 화석과도 같은 관심사에 대해서만은 유독 매몰차다. 초서를 향한 조앤(홀랜드 테일러)의 오랜 애정이 ‘힙한’ 것으로 재발견되었던 것과는 달리 베케트는 듀코브니와 함께 유행이 지난 이름이 되어 조용히 퇴장한다. <베킷>은 마치 고대 유적지 근처를 탐사하는 듯한 영화다. 두 연인이 누운 침대 곁에 놓인 메모에는 ‘신탁은 무엇이었는가’라는 도무지 그 맥락을 짐작할 수 없는 글이 적혀 있다. 도망자 베킷이 몸을 숨기거나 달아나는 장면에서 그를 든든히 지켜주던 바위산은 현지 로케이션이 비현실적인 무대 혹은 하나의 캐릭터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양봉하는 부부와 사냥꾼 등 베킷이 만난 마을 사람들은 어딘가 고전적인 모습을 하고 있으며 이것이 시대를 초월한 이야기라고 상상하게 한다. 영화는 주인공의 이야기를 전개하는 배경으로 장소를 캐스팅한 것이 아니라 장소를 먼저 캐스팅한 뒤에 그 공간을 잘 보여주기 위한 방편으로 누군가가 끊임없이 걸어서 이동하는 이야기를 만든 것 같다. 베킷은 추격전 도중 누군지 알 수 없는 사람들에게 공격당하는데, 이때 주로 공격당하는 부위는 손과 팔이다. 끊임없이 도망가야 하는 그의 운명을 알려주듯 어떤 상황에서도 다리만은 별다른 상처 없이 멀쩡하게 남겨진다. 주로 손 부위에 상처가 집중된 상황은 그에게서 운전대를 박탈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손의 한계로 인해 그는 탈 것으로 이동하는 대신 두 발로 걷거나 위험을 무릅쓰고 대중교통을 이용하거나 누군가가 운전하는 차 트렁크에 숨은 채 이동해야 한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딱 한 번 오토바이를 빼앗으려 하지만, 매몰차게 밀린다. (영화에서 누군가의 탈 것을 빼앗는 것쯤은 절로 이뤄진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카체이싱 혹은 공중전 같은 속도에 바탕을 둔 추격전이 대세인 상황에서 두 다리로, 그것도 때론 손이 포박된 채 어설프게 뛰는 도망자를 보는 일은 누군가에게는 지루하게 느껴질지 모른다. <베킷>이 넷플릭스에 공개된 후 그리 긍정적인 반응을 얻지 못한 데는 추격전이라는 장르적인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한 탓이 크다. 여행 중 불미스러운 사고로 연인을 잃은 뒤 이유도 모른 채 쫓기는 신세가 된 상황은 추격전의 전형적인 세팅이다. 그러나 이후에 벌어지는 이야기는 관객이 기대하는 바로부터 멀리 도망친다. 어쩌면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되었다는 것이 잘못 끼워진 첫 단추가 아니었을까 싶다. 안락한 오락 영화를 바랐을 관객에게 영화는 어딘가 애매한 결과물처럼 보인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넷플릭스 영화라는 모종의 바운더리 안에서 그렇고 그런 영화가 되는 대신 이상한 실패작으로 남을 수 있었다. <베킷>은 추격전에 기반을 두고 있지만 장르 영화는 아닌 조금 이상한 영화다. 이상함은 첫 장면부터 감지된다. 영화 초반 드러나는 베킷과 그의 연인 에이프릴의 여행은 어딘가 스산하다. 이 드넓은 여행지에 마치 두 사람만 존재하는 것 같다. 물론 주변에는 다른 여행객이 있다. 그러나 타인과의 접촉은 일어나지 않는다. 연인은 여행객들을 몰래 관찰하면서 그들의 이름과 관계를 추측하는 둘만의 게임을 벌인다. 나는 필시 여행객과 접촉해 추측이 맞는지를 확인하는 작업이 뒤따를 것이라 예상했다. 아니었다. 두 사람은 사진을 찍은 뒤 그곳을 빠져나온다. (후에 혼자 남은 베킷이 사람들과 접촉하는 모습은 초반의 에이프릴과 함께 한 게임 장면을 연상시킨다. 베킷은 이제 어떤 사람이 믿을만한지를 혼자서 끊임없이 판단하고 행동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식당에서도 손님은 둘 뿐이다. 가게 주인이 스치듯 카메라에 포착되긴 하지만 그와 대화하거나 접촉하는 장면은 배제된다. 식당 TV에는 훗날 베킷이 연루될 유력 정치인의 조카 실종 사건과 관련한 뉴스가 보도된다. 이것은 관객을 위한 복선처럼 보이지만, 실은 베킷이 사건에 연루되는 과정에 운명과도 같은 힘이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베킷은 기차를 타고 이동하던 중 자신을 좇던 그리스 경찰에게 발각된다. 이때 양손을 앞으로 모은 채 끈으로 묶인 상태가 된 베킷은 경찰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뒤에도 얼마간은 그 상태로 다닌다. 그의 손은 기도하는 손 모양을 연상시킨다. 그의 여정이 자신의 과오로 죽은 에이프릴을 향한 일종의 길고 긴 고행일 수 있음을 보여주는 동작이다. 동시에 기도하는 손은 아테네에서 대규모 집회가 일어나는 장소를 가리킨다. 이처럼 개인의 슬픔과 애도는 정치적인 상황으로 곧장 연결된다. 베킷이 사람들에게 떠밀려 데모하는 군중과 합류하는 장면은 <모던 타임즈>(1936)에서 찰리 채플린이 얼떨결에 시위대의 선봉에 서는 장면과 겹친다. 찰리의 우연한 시위는 그가 파업과 무관하지 않은 인물이기에 절묘하다. 베킷의 여정 역시 블랙 코미디로 만들어졌다면 지금보다 납득 가능했을지 모르겠다. 베킷은 영문도 모른 채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들을 피해 살아남았고 결국에는 정해진 운명처럼 유력 정치인의 납치된 조카를 구하는 임무를 수행한다. 운명은 우연의 다른 말이다. <베킷>은 지나치게 우연적이며, 다른 말로는 지나치게 운명적이다. 다시 베킷이라는 이름을 생각해본다. 퍼스트 네임도, 라스트 네임도, 그렇다고 애칭도 아닌 하나의 이름으로 온전한 것은 신의 이름이다. 제우스, 헤라, 아테네, 헤르메스... 이 목록에 베킷을 넣을 수 있을까. 그렇다면 왜 베킷인가. 베케트의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고도는 그 자체로 오지 않는 신을 지칭한다. 고도를 기다리던 두 주인공은 고고와 디디라는 다른 이름이 있는데, 두 이름을 합치면 곧 신(god)이 된다. 베킷 혹은 베케트가 신의 이름이 된다면 그 이름의 의미는 아마도 ‘어떻게든 버티는 자’일 것이다.
고다르의 첫 번째 장편 3D 영화 < 언어와의 작별 >에 대해 무언가 그럴듯한 ‘해석’을 내놓는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나는 이 영화를 지난 10월에 열린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단 한 번 보았을 뿐이다.) 하지만 ‘한 번의 감상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영화’라는 식의 편리한 변명은 이 영화에 어울리지 않는다. 오히려 이 영화는 일단 보고 나면 그것에 관해 자꾸 무엇인가 말하고, 쓰고 싶게 만든다. 우리를 언어를 향해 돌려세운다. 그렇게 다시 돌아서서 언어와 마주하고 나면 고다르적 연상의 벡터를 따라 온갖 상념이 흐르고, 갈라지고, 또 퍼져나간다. 이건 작별(‘언어여 안녕’)의 말 한가운데 자리한 모음이 돌아서면 환대(‘언어야 안녕’)의 말이 떠오르는 것과 같다. (개인적으로는 영화를 보고 나니, 한국어로는 ‘언어와의 작별’보다는 ‘안녕, 언어’라는 제목이 영화의 무드에 더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의 원제 ‘adieu au langage’는 고다르의 언어유희를 따라 ‘Ah dieux, Oh langage’(오 신들이여, 오 언어여)로 읽히는 데 그치지 않고 - 그런데 왜 신은 단수가 아닌 복수로 호명되는 것일까? 왜 언어는 여전히 하나로 남아 있는 것일까? - ‘a dieu, au langage’(신에게로, 언어에로)로까지 나아가는 것이다. 작별, 호명 그리고 지향. D: 차원(Dimension) 고다르가 즐겨 인용하는 앙드레 바쟁의 금언 가운데 하나는 “원근법은 서구 회화의 원죄”라는 것이다. < 언어와의 작별 >이 3차원의 환영을 실감 나게 보여주는 ‘입체영화’가 될 거라고 생각한 이는 아무도 없었겠지만, 이토록 단순한 방식으로 3D의 개념을 전복하는, 혹은 혁신하는 영화가 될 거라곤 아무도 짐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고다르는 때로 (‘3D 안경’을 쓰고 볼 때) 좌우 양쪽 눈에 아예 서로 다른 이미지가 입사되도록 함으로써 중첩(superimposition)의 효과를 내기도 하는데, 이는 입체적이라기보다는 ‘입체파적’(cubist)으로 여겨진다. 두 대의 분리된 카메라로 촬영한 이미지를 두 개의 눈에 각각 입사시켜 3차원의 환영을 만들어내는 스테레오스코프의 원리는 고스란히 차용하되, 좌우 양안에 비치는 두 이미지가 반드시 시각적으로 유사할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하는 순진한, 하지만 매우 근본적인 의문을 던지고 있는 셈이다. 그러고 보면 고다르가 3D 테크놀로지를 활용하는 방식은 이미지의 특성에 대한 그의 오랜 사색의 노정에 단단히 결부되어 있다. 그에게 있어 이미지란 사각의 프레임 안에 담긴 시각적 정보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게다가 이미지란 사실 반드시 시각적인 것만도 아니다. 그에게 있어 이미지란 무엇보다 두 개 혹은 그 이상의 상이한 리얼리티의 ‘관계’이자 상호작용의 ‘과정’이며 그것을 통한 ‘생성’이다. 이미지에 대한 이러한 생각은 그가 < 열정 >(1982), <리어 왕>(1987), < JLG/JLG: 12월의 자화상 >(1995) 그리고 < 영화의 역사(들) >(1988~1998) 등에서 즐겨 인용해 온 피에르 르베르디의 「이미지」(1918)에 잘 나타나 있다. “이미지는 정신의 순수한 창조물이다. 그것은 얼마간 서로 떨어져 있는 두 리얼리티에 의해 생성되는데 그들 간의 비교가 아니라 조화를 통해서다. 이러한 두 개의 리얼리티의 관계가 멀고 진실한 것일수록 이미지는 더욱 강력해지고 보다 감정적인 힘을 지니게 될 것이다. [...] 유추(analogy)는 창조의 매개체이다.” 두 대의 카메라, 그리고 그에 대응하는 두 개의 눈이 지향해야 할 것은 시각적인 깊이의 환영이 아니라 유추를 가능케 하는 거리를 둔 둘(deux)의 관계로부터(만) 생성되는 정신적 이미지, 사유의 이미지다. 말라르메가 자신의 시에서 선언했듯, “모든 사유는 주사위 던지기를 불러낸다.”(Toute pensee emet un coup de des) 하지만, “한 번의 주사위 던지기는 결코 우연을 폐지하지 못할 것이다.”(Un coup de des jamais n’abolira le hasard) 그리고 “아무것도 [...]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 그 장소 밖에서는 [...] 아마도 [...] 하나의 별자리 [...] 를 제외하고는.”(rien [...] n’aura eu lieu [...] que le lieu [...] excepte [...] peut-etre [...] une constellation) 여기서 이어지는 생각, 주사위 던지기와 별자리. D: 주사위(Dice) < 언어와의 작별 >에 대한 예고편과도 같았던 3D 단편영화 <세 가지 재앙>(2013)에서 고다르는 ‘3D’의 ‘D’를 ‘재앙들’(desastres)로, 거기서 더 나아가 ‘주사위들(des)―별들(astres)’로 바꿔 읽었다. 말라르메적 상상? 물론이다. <세 가지 재앙>에서 고다르는 말라르메의 시와 수리철학자 고트롭 프레게의 언급을 다음과 같이 (멋대로?) 포갠다. “프레게는 사유가 수(數)를 생성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모든 사유는 주사위 던지기를 구성한다고 했다.” 그런데 고다르는 왜 말라르메의 주사위―별자리에서 프레게를 떠올린 것일까? (혹은 프레게에서 말라르메로 간 것일까?) 혹시 프레게의 다음과 같은 언급 때문이었을까? “주사위의 네 눈(目)에 대한 표상에서 우리는 ‘넷’이라는 낱말에 대응하는 그 무엇이 나타난다고 믿기 쉽다. 그러나 그것은 환상이다. [...] 수는 자립적 대상으로도 외부 사물의 성질로도 표상될 수 없다. 왜냐하면 수는 감각적인 것도 외부 사물의 성질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수 0의 경우 가장 분명하다. 눈에 보이는 0개의 별을 표상하려고 해보아도 소용없을 것이다. 우리는 구름이 잔뜩 낀 하늘을 상상할 수는 있으나, 이 경우 ‘별’이란 낱말이나 0에 대응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다만 우리는 지금 아무 별도 볼 수 없다는 판단을 불러일으킬 만한 상황을 표상할 뿐이다.”(「산수의 기초」 제59절) <세 가지 재앙>은 세 개의 주사위를 통한 세 번의 주사위 던지기로 진행된다. (위 사진 참조) 의미심장하게도, 세 번째에 가서는 텍스트가 주사위들의 이미지와 함께 나타나지 않고 그저 검은 화면 위에 떠오른다. (3D는 아직 그에 걸맞은 가능한 이미지 생성의 방식을 배우지 못했다는 고다르식의 일갈일까?) 이 주사위 놀이 클립 영상은 1977년에 고다르가 안느-마리 미에빌과 함께 만든 12부작 시리즈 <프랑스/여행/우회로/둘/아이들>(‘두 명의 아이들을 통한 프랑스 여행’이라 해석할 수도 있다)에서 차용한 것이다. 심지어 영상 위에 입혀진 내레이션까지 고스란히 가져왔다. “괴물의 진화는 우연적으로 일어나는 일련의 미시적 사건들과 돌연변이에 기인하는 것이라고 주장되어 왔다. 이러한 개념은 시간적으로나 수학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들다.” (<프랑스/여행/우회로/둘/아이들>에서는 이 뒤로 “계속되는 주사위 던지기, 하나의 하부단위에 이은 또 다른 하부단위의 생성, 이러한 우연의 게임으로부터 괴물의 신체를 형성할 수십만 번의 연쇄작용을 끌어내기 위해서는 태양계의 수명보다도 훨씬 더 긴 시간이 걸릴 것이다 [...] 괴물들과 관련된 두 개의 가장 중요한 발명은 섹스와 죽음이다.”라는 내레이션이 계속 이어진다.) 그런데 <프랑스/여행/우회로/둘/아이들>의 주사위 놀이가 세 개의 주사위로 이루어진다는 점은, 3D 테크놀로지에 대한 숙고의 과정에서 고다르가 사후적으로 발견한 것이다. 그에 따라 ‘괴물’의 의미도 달라진다. 자본주의적 소비사회의 대중에서 디지털 독재로. 이때, 무언가를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 언어와의 작별 >에서 고다르는 (다시 세 개의) 주사위로 놀이를 하고 있는 소년과 소녀의 모습을 보여준다. (아래 사진) 다시 한 번, 근본문제(Grundproblem)에 대한 접근은 순진함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D: 디지털(Digital), 0과 1이라는 거짓된 둘 <세 가지 재앙>에서 고다르는 “디지털은 독재자가 될 것이다”라고 단언한 바 있다. 디지털 영화, 폭넓게는 디지털 문화에 대한 고다르의 사유는 텔레비전에 대한 그의 오랜 관심과 맞닿아 있다. < 언어와의 작별 >에서 그는 블라디미르 츠보리킨이 텔레비전을 발명한 1933년에 히틀러가 독일 수상으로 선출되었다고 지적한다. (그런데 츠보리킨이 텔레비전 시스템을 고안한 것은 사실 1933년이 아닌 1923년이다. 이러한 연대 착오는 두 개의 일견 무관해 보이는 역사적 사실을 몽타주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 영화의 역사(들) >에서 텔레비전에 대한 다음과 같은 언급은 오늘날 디지털 문화에 대한 고다르의 진단으로 고스란히 연결된다. “전 세계의 스펙터클을 허름한 침실들로 가져간다는 레옹 고몽의 꿈이 텔레비전을 통해 실현된 것이라면, 그것은 목동의 머리 위의 광활한 하늘을 엄지동자 톰(Tom Thumb)의 높이로 축소시킴으로써만 가능한 것이었다.” (문장을 정확히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언어와의 작별>에서 한 등장인물은 스마트폰 화면의 아이콘을 엄지동자 톰이 길을 찾기 위해 사용한 조약돌과 비교한다.) ‘텔레-비주얼’(tele-visual)이 도처에 존재하는 것(독재)이 된 것은 디지털 테크놀로지를 통해서이다. 고다르는 1970년대부터 그의 작업의 중요한 토대가 되었던 ‘노이즈’에 대한 관심을 전면화하는 것으로 그에 맞선다. 디지털적 이미지가 우리의 보는 방식을 표준화한다면, 고다르는 디지털적 이미지 생산의 기제들을 총동원해 그것들을 충돌시키고 각각의 차이와 부조화를 극대화시키는 방식으로, 즉 디지털적 이미지 내부에서 소란을 일으키는 방식으로 작업한다. 그는 <언어와의 작별>을 제작하기 위해 일곱 가지 다른 종류의 카메라 - 캐논의 DSLR, 파나소닉의 Lumix 그리고 ‘웨어러블’(wearable) 카메라인 GoPro에 이르기까지 - 를 활용했는데, 촬영된 영상들은 균질하게 마름질되지 않은 채 뒤섞여 가히 ‘시각적 노이즈’의 카니발이라 할 만한 광경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아름다움이 도래하는 건, 적어도 예견되는 건, 오직 이 소란 속에서다. 적잖은 평자들이 <언어와의 작별>을 보며 스탠 브래키지의 < 독 스타 맨 >(1964)을 떠올렸던 것도 그 때문이리라. “자연으로 향하는 통로로서 은유를 활용”(블레이크 윌리엄즈)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두 영화는 닮아 있다. 또 하나의, 그리고 가장 중요한 D: 만남으로 개시되는 둘(Deux) 은유(metaphor)란 무엇인가? 그것은 응축된 픽션이다. 그것은 픽션의 한계이자 오늘날의 우리에게 가능한 유일한 픽션이다. < 언어와의 작별 >이 하나의 시청각적 ‘실험’에 그치지 않는 것은 여기서 고다르가 어떻게든 이야기(하기)의 가능성을 붙들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영화가 두 커플에 대한 두 번의 같지만 다른 이야기라고 한 고다르의 말을 믿어야 한다. <필름 소셜리즘>(2010)에 출연한 바 있는 철학자 알랭 바디우는 고다르와 작업한 경험을 떠올리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고다르의 차기 작품에서 저는 어쩌면 호화 유람선 횡단에 참여한 철학자-강연자 역할을 맡아 한 장면에 출연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 고다르에게는 사랑이 거의 모든 문제의 핵심으로 자리 잡습니다. 그러나 제가 관찰한 바에 따르면 사랑과 저항 사이의 접속에서 고다르와 저의 차이는 바로 멜랑콜리인데, 이것은 고다르에게 모든 것의 색깔을 의미하는 핵심이기도 합니다.”(「사랑 예찬」) <언어와의 작별>과 관련해서, 여기에 바디우의 다른 텍스트를 겹쳐 읽어보는 것도 좋겠다. “만남을 통해 개시된 둘, 사랑이 그 진리를 실행하는 둘은 그 자신에게 닫힌 채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둘은 통로이고 중심점이며, 최초의 수적 성격이다.”(「베케트에 대하여」) <언어와의 작별>을 구성하는 한편 작품 곳곳에 산포된 여러 ‘둘’들, 영과 무한, 자연과 은유 그리고 고다르적 픽션에 관한 이야기는 이 영화를 다시 본 다음에나 가능하겠다. 마지막으로 덧붙일 말이 남아 있다. 고다르적 멜랑콜리? < 언어와의 작별 >이 고다르의 고별사일까? 이 글에서는 제대로 부각시키지 못했지만 사실 이 영화는 고다르의 그 어떤 영화보다도 원기 왕성하며 활력으로 넘쳐난다. 이 영화를 보며 나는 < 네 멋대로 해라 >(1960)를 당대에 보았던 이들은 꼭 이런 기분이지 않았을까 하고 멋대로 상상해 보곤 했다. 영화의 폐허 속에서 ‘영화 같은 무엇’의 섬광이 춤추는 광경을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 유운성 영화평론가의 16편 영화천구 Celestial Sphere of Cinema (2013년 11월 1일부터 2014년 10월 31일까지) [북극] 언어와의 작별 Adieu au langage, 장-뤽 고다르, 2014 야만의 땅 Barbaric Land, 예르반트 지아니키안 & 안젤라 리치 루키, 2013 서유 Journey to the West, 차이밍량, 2013 물 속의 도시, 김응수, 2014 [황도] 시인 요아브 The Kindergarten Teacher, 나다브 라피드, 2014 도원경 Jauja, 리산드로 알론소, 2014 자유의 언덕, 홍상수 프랑스 공주 The Princess of France, 마티아스 피녜이로, 2014 [적도] 더 홈스맨 The Homesman, 토미 리 존스, 2014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The Grand Budapest Hotel, 웨스 앤더슨, 2014 더 울프 오브 월 스트리트 The Wolf of Wall Street, 마틴 스콜세지, 2013 맵 투 더 스타 Maps to the Stars, 데이빗 크로넨버그, 2014 [남극] [TV 시리즈] 트루 디텍티브 True Detective, 캐리 후쿠나가, 2014 [필름 퍼포먼스] 간섭의 셀룰로이드 Cellule d’intervention, 메탐킨 평행 I~IV Parallel I~IV, 하룬 파로키, 2012~2014 사진측량, 변재규, 2013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요청한 것은 개봉작과 미개봉작을 모두 고려해 2014년 11월 1일부터 2014년 10월 31일까지 제작, 공개된 영화의 베스트 10 리스트를 꼽아달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영화제 프로그래머로 있지 않은 이상, 지난 1년 간 나온 영화들을 신속히 폭넓게 접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고민 끝에 나는 가능한 이 설문의 취지를 존중하면서 한편으로는 이 리스트의 각 ‘구역’이 (그저 ‘최고의 영화들’의 나열이 아니라) 제한적인 범위에서나마 지난 1년 간 내가 관측할 수 있었던 ‘영화천구’의 짜임을 추정케 하는 별자리들이 되게끔 구성해 보았다. (황도의 4편의 영화들 가운데 2편은 천구의 북반구 쪽에, 2편은 남반구 쪽에 자리할 것이므로, 관측자는 북극 쪽을 향하건 남극 쪽을 향하건 10편의 영화만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관측자가 북극이나 남극 어느 쪽을 향하건 항상 보이는 것은 적도의 영화들이다.) 이 리스트를 작성하기 위해 그간 미처 보지 못한 영화들을 일부러 찾아보려 하지는 않았다. 즉, 위 리스트의 영화들은 베스트 10 설문에 참여하게 될 것을 굳이 염두에 두지 않고 편견이나 강박이 없이 본 것들이다. 또한 영화관에서 본 작품들과 (부득이한 경우) HD 화질로 모니터한 작품들 가운데서만 골랐다. 기회가 없어 보지 못했거나 적절한 환경에서 감상할 수 없었던 것들 가운데 특별히 다음의 영화들은 조만간 꼭 영화관에서 (다시) 보고 싶다. 페드로 코스타의 <호스 머니 Horse Money>, 라브 디아즈의 <아프리오리 From What is Before>, 리처드 링클레이터의 <보이후드>, 조 단테의 <베링 디 엑스 Burying the Ex> 그리고 임흥순의 <위로공단>. 이 리스트를 작성하기 전(11월 13일 이전) 가장 최근에 본 개봉작은 데이빗 핀처의 <나를 찾아줘>였는데, 보는 이의 눈과 귀를 사로잡는 영화임은 분명하지만 (시리즈물 <하우스 오브 카드> 첫 번째 시즌에서 그가 연출한 첫 두 에피소드처럼) ‘스타일적 장치이자 서사를 위한 구실로서의 냉소주의’가 지나쳐 온전히 받아들이기는 힘들었다.
... (세 번째 이야기) < 장군의 아들 >은 세 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 반지의 제왕 >과 달리 이 세 편은 각각 독립적인 이야기이면서 서로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다. “사실 내가 할 이야기는 일편에서 모두 다 했어요. 원래는 그런 다음 연출부를 했던 김영빈 감독이 이편으로 데뷔할 예정이었지요. 그런데 이게 흥행을 해도 너무 많이 한 거예요. 나는 다른 영화를 할 생각이었는데 이태원 사장이 나를 설득한 거예요. 이건 이편에 대한 관객들의 기대라는 게 있는데 그걸 배신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거참, 내가 그 설득에 말려들어간 거예요” 아마 임권택 자신도 당황했던 것 같다. 그는 그저 잠깐 쉬어가며 1960년대 자신을 한번 돌아보면서 자기 자신의 현재를 점검해보고 싶었다, 라고 이 영화를 설명했다. 하지만 대중들은 여기서 어떤 활력을 발견했다. 1987년 민주화 대항쟁(의 승리), 1988년 서울 올림픽(의 순위). 무언가 부글거리는 사회적인 에너지. 거기서 무언가 다가오고 있다는 기분. 무언가, 라는 기대. <장군의 아들>은 그 자리에 도착했다. 물론 그것이 올바른 도착인지를 물어보는 것은 또 다른 질문이다. 나는 여기서 단지 임권택의 자리에서만 대답할 것이다. 임권택은 이 장르의 영화, 좀 더 간단하게 <장군의 아들>을 계속 이어나갈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그건 <장군의 아들> 이전에 자리한 < 개벽 >이 설명하고 있다. 거기서 좀 더 앞으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확신하게 된다. 반대로 <장군의 아들> 이후로 밀고 나아가도 대답은 마찬가지이다. 문제는 <장군의 아들> 일편 ‘이후’에 그것을 동일한 제스처로 반복해야 할 때 생긴 것이다. 모순의 자리. 거기서 멈추어도 안 되지만 더 밀고 나아가도 안 된다. 한 가지 가정을 해보자. 만일 <장군의 아들> 이편이 일편과 완전히 다른 태도를 취하면서 갑자기 역사의 고증을 바탕으로 김두한의 실제 모습을 다루는데 집중했더라면 대중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당신은 세 편의 이야기가 예외 없이 일제 강점하에서 멈춘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한다. 마치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식민지의 경험. 김두한은 서른 살이 되기 전에 해방을 맞이했고, 그런 다음 한국전쟁을 겪었으며, 1965년 국회의원에 당선된 사람이다. 세 편의 <장군의 아들>에서 김두한은 성장하지 않는다. 아니, 차라리 나이를 먹지 않는다는 문학적 표현이 어울릴 것이다. 문제는 거기서 생겨났다. 그런 다음에도 이편을 만들어야 한다. 이야기가 모두 소진되자 <장군의 아들> 이편은 이상한 모습으로 성립되었다. 사뮤엘 베케트의 표현. (같은 맥락은 아니지만) 다시 한 번 시도하기. 다시 한 번 실패하기. 다시 한 번 더 잘 실패하기. 거기서 무엇이 더 가능할까. 거기서 무엇을 더 실현시킬 수 있을까. 막다른 골목에서 약간의 우회. 먼저 이 영화는 다시 시작하면서 동시에 일편에 대한 후일담의 형식을 가졌다. 아마도 일편의 대중적인 성공이 이 영화의 줄거리와 등장인물에 대한 하나의 약속이 되었을 것이다. 세 가지 좌표. 이것은 지켜져야만 한다. 동시에 너무 여기서 멀리 벗어나면 안 된다. 그렇지만 이 줄거리를 반복하면 안 된다. <장군의 아들> 이편은 이 삼각형의 긴장 어딘가에 놓여있다. 이때 무엇이 이편을 작동시키는 힘이 될 수 있었을까. 전차(電車). 아니, 차라리 더 단언적으로 < 장군의 아들 > 이편의 영화적 주인공은 전차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이다. 전차는 조선시대 말 고종때 한양에 1898년 12월 25일 지금의 서대문에서 청량리에 이르는 구간이 개통하면서 처음 모습을 보였다. 이듬해 다시 종로에서 남대문에 이르는 2호선이 열렸다. 이 구간을 1900년 1월 원효로 4가까지 연장하였고, 1901년 남대문에서 서소문을 거쳐 서대문에 이르는 구간을 완성하였다. (그런 다음 이 구간은 여러 종점을 늘려가면서 계속 확장되었다) 전차는 서울 시민들의 중요한 교통수단이 되었지만 1969년에 이르러 다른 교통수단들과 도로 점유율의 실용성 문제로 전면 철거되었다. (그리고 당신이 잘 아는 것처럼 곧 뒤이어 지하철 공사에 착공하게 되었다) <장군의 아들> 이편에서 보여주는 전차는 (아마도) 2호선인 종로에서 남대문에 이르는 노선일 것이다. 그러나 한성은 경성을 거친 다음 한국 전쟁 때의 폭격, 1960년대 이후 끊임없는 재개발을 거치면서 원래의 길목을 알아볼 수 없게 바뀌었기 때문에 정확하게 이 노선이 어떻게 이어지는 지에 대해서 나는 알지 못한다. 아마도 1954년에 처음 서울에 올라온 (다음 여기 머물면서 충무로를 드나들며 제작부를 거쳐 연출부를 시작하고 1962년에 첫 영화를 찍은) 임권택 은 (김두한이 종로통을 풍미하던 일제 강점하는 아닐 지라도 여전히 남아있는) 이 전차가 통과하는 길목(들)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물론 <장군의 아들> 이편에서 무대가 된 경성의 지리를 정확하게 재현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대사에 따르면 <장군의 아들> 일편과 이편 사이의 시간적 간격은 6개월이다. 김두한은 큰형님 김기환을 구하기 위해 혼마찌깡에 달려가 기꾸치에서 일대접전을 벌리고 김동회를 물리친 다음 마지막 장면에서 (일본 경찰에 붙어 앞잡이 노릇을 하는 창씨 개명한 한국인) 구니모또 형사가 호명하는 데서 끝난다. 그런 다음 이편은 김두한이 (아마도 그로 인해 구치소 생활을 한 다음) 경찰서를 나서는데서 시작한다. 종로패는 김두한에게 큰 인사를 드리면서 “형님이 들어가신 지” 육 개월이 되었다고 우리에게 일러준다. 그런데 우리는 그 수많은 종로에서의 싸움을 보면서 한 번도 전차를 본 적이 없다. (이미 연표를 제시한 것처럼) 전차는 역사적으로 그 사이에 들어선 교통수단이 아니다. 정확하게 무대가 된 시간적 배경을 거의 설명하지 않지만 이야기 안의 시간적 지표 중의 하나인 박계주 작가의 <순애보>를 미루어 짐작컨대 <장군의 아들> 이편의 시간은 1940년 그해 여름일 것이다. 박계주는 <순애보>를 매일신보(每日新報)에 1939년 1월 1일부터 6월 17일까지 연재하였고 그런 다음 같은 해 10월 매일신보사에서 단행본으로 출판하였다. <장군의 아들> 이편의 계절은 여름이다. 글을 읽지 못하는 김두한은 어린 남녀학생을 불러 박계주의 <순애보>를 읽게 한 다음 그걸 들으며 눈물을 훔친다. 약간 셈을 하고 싶다. 김두한은 실존 인물이며, 1918년 5월15일에 태어난 그가 23살 때의 이야기이다. <장군의 아들>은 이제 막 어른이 되려는 소년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장군의 아들>에 넘쳐나는 청춘 예찬의 기쁨이라는 감정의 기호들. 어렴풋한 사랑. 서투른 첫 경험. 되찾은 우정. 혹은 은혜는 갚아야한다는 공명과도 같은 공감. 왜 김동회가 김두한에게 갚아야 할 마음의 빚에 대해서 하야시가 감흥을 느껴야 하는 것일까. 말하자면 잘 설명되지 않는 내밀한 공동체. 종종 그들의 배움은 불완전하고 서로에게 베푸는 예절은 때로 불가능한 규칙인데도 불구하고 그걸 지키기 위해서 그들 사이에 때로 적대감은 어떤 우애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 안에서 장르의 규칙은 그들이 어른이 되어가면서 청하는 배움 때문에 무너지기도 하지만 그 위반 자체가 <장군의 아들>에서 우리들에게 다소 기괴하게 여겨지는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순간이기도 하다. 우리들은 <장군의 아들>이 단지 1991년에 갑자기 부활한 1960년대 ‘다찌마와리’ 영화의 변주라는 지적에서 멈추면 안 된다. 이 영화가 우리들을 건드리는 것은 거기서 더 나아가 장르를 지나친 다음 불가능한 가능세계에 가 닿으려고 애를 쓸 때 문득 마주치는 파토스의 헌신이라는 것을 생각해보아야 한다. 물론 이 세 편의 연작을 공격하는 것은 간단한 일이다. 그저 이 세 편이 일제 강점하라는 무대를 빌려 폭력을 심미적인 차원으로 이동시키고 있다고 말하기만 하면 된다. <장군의 아들>에 나오는 모든 등장인물들은 그들의 시간을 헛되이 쓰고 있는 중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일제 강점하의 경성 종로에서 민족의 자존심을 지키고 있다고 믿으면서 사실은 상인들에게 세금이라는 이름으로 ‘돈을 뜯어내는’ 중이다. 착각의 왕국. 그들은 자신들이 협객이라는 착각에 빠진 깡패들이다. 도착적인 위로에 심취한 폭력. 하지만 그걸 누가 모를까. <장군의 아들>에 냉소적으로 다가갈 때 우리는 차라리 이 영화를 보지 않는 편이 낫다. 핵심은 반대로 현실에서 불가능한 삶의 긍정적인 태도(중의 일부)가 왜 일제 강점하를 무대로 한 가상세계에서는 성립되느냐는 것이다. <장군의 아들>을 채우는 것은 어떤 현대적인 해석도 배제한 채 거기 머물고 있는 향수이다. 이때 여기에는 나른한 낭만주의와 갑자기 긴장을 불러일으키는 불화의 도전이 있다. 이 불화는 전적으로 과거의 가치 기준이 오늘날 우리 시대에는 왜 적용되지 않는지에 대한 질문에서 나온 것이다. <장군의 아들>은 단지 그 시대적 배경 때문이 아니라 우리를 그 가치의 체계 안에 순응하는 자리에로 반복적으로 호명하는 영화이다. 여기에는 이미 지나간 것에 대한 충만했다고 할 만큼의 탄식에 가득 차서 거기에 머물고 싶어 한다는 인상이 도처에 남아있다. 다소 우스꽝스럽긴 하지만 <장군의 아들>에는 도올 김용옥이 그려낸 동양학 안에서의 철인(哲人)의 철인화(鐵人化)라고 부를만한 육화가 있다. (김용옥은 일편의 시나리오에 관여했다) 물론 김용옥은 이 영화가 장르영화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장군의 아들>은 흥미롭게도 가장 세속적인 밑바닥의 삶을 장르화 시킨 다음 그들에게 규칙의 윤리에 대해서 존중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이편은 김용옥 대신 (희곡작가이자 연극 연출자인) 이윤택이 이어서 시나리오를 썼지만 여전히 일편에서 세워진 불화의 바탕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그 무엇도 건드리지 않으면서 거기서 더 밀고 나아갈 때 영화는 더할 나위 없이 기호적이 되어간다. 나는 여기서 따분하게 기호학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영화를 성립시키는 시청각 기호들. 그것들만으로 만들어내는 형식들의 강도. 부서져나가는 것을 견디는 강도의 내밀성. 어떤 점에서 <장군의 아들> 이편은 세 편의 영화중에서 오로지 형식만 남은 영화, (만일 이런 표현이 허락된다면) 형식만으로 견디는 영화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이다. 그 내밀성의 중심에 전차가 있다. 우선 배치의 문제. 전차는 종로 한복판을 계속해서 가로 지르고 있다. 이 전차는 화면을 기준으로 가로로만 움직이고 있다. < 장군의 아들 > 이편에서 단 한 번도 이 기차가 세로로 오가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실용적인 설명. 이 세트장은 우리가 지금 눈으로 보는 것이 전부이다. 그러므로 각도를 벗어나면 곧장 세트의 헐벗은 이면이 드러날 것이다. 이때 이 영화는 두 개의 카메라 위치를 가질 수 있을 뿐이다. 종로 한복판(이라고 가정된) 사거리의 교차점을 중심에 놓고 세로축을 기준으로 화면을 가로 지르는 전차 철도의 이쪽과 맞은편이라는 두 개의 공간만을 사용할 수 있다. 같은 설명의 다른 판본. 그렇게 되면 오른쪽과 왼쪽에는 카메라가 들어서지 못한다. 단지 이것은 좌우 화면만을 사용하지 못한다는 뜻이 아니라 세로 축 중앙에서 45도 안에서만 카메라가 이동할 수 있으며 그 바깥을 사용하여 중앙 교차점을 기준으로 마름모꼴을 형성하여 움직이는 배치도 포기해야 한다는 말이다. 좀 더 간단한 설명. 종로 한복판은 네 개의 꼭지점 중 세로축의 양쪽 끝을 포기하고 가로축의 위와 아래만을 사용할 수 있을 뿐이다. 전차는 <장군의 아들> 이편에서 스펙터클하지만 동선을 진행하는 과정의 블랙홀이 될 수밖에 없다. 드러난 시각적 스펙터클. 과정 안에서만 보이는 시각적 블랙홀. 첫 등장. 시작하면 (혼마치깡의 하야시 구미(組)들과 김동회를 먼저 소개한 다음) 구치소에서 나온 김두한은 전차를 타고 종로에 돌아온다. 이 장면은 김두한의 전차에 대한 영화적 전유를 과시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그러나 그 곁에 구니모토 형사가 타고 함께 도착한 다음 이 전차로 이동할 수 있는 김두한의 (경성 내에서의) 반경거리를 줄거리 안에서 제한한다. 김두한의 신분에 대한 설명. 그리고 이야기의 경제성. 두 번째 등장. 김두한이 구치소에서 나오자 이튿날 아침 일찍 하야시 구미(組)가 종로에 쳐들어올 때에 전차가 지나간다. 이때의 전차는 명백히 와이프(wipe) 효과를 내면서 화면을 지워나간다. 이들은 운당여관에서 잠든 김두한과 종로패를 기습하여 승리를 거둔 다음 김두한을 종로 한복판에 무릎 꿇린다. 그때 하야시는 지나가는 전차를 멈춰 세우고 김두한의 굴욕적인 패배를 전시한다. 같은 장면의 다른 설명. 하야시는 종로통 조선상인들 앞에서의 이 부끄러운 순간을 지우려는 와이프 효과를 멈춰 세우고 그 시간을 할 수 있는 한 연장한다. 이야기 바깥에서 주인공을 돕기 위해 나타난 영화적 효과. 그것을 중단시키는 또 다른 등장인물의 요구. 세 번째 등장. 하야시와 (뒤이어 구치소에서 나온 종로패의 큰 형님) 김기환은 혼마치깡 사쿠라(櫻) 카페에서 굴욕적인 평화협정을 맺는다. 그때 김두한은 술에 취해 모자를 두고 온다. 그 모자를 돌려주러 사쿠라 카페의 주인 세츠코가 종로를 찾아올 때 전차를 타고 온다. 네 번째 등장은 반복이다. (롱테이크로 연출된) 김기환이 종로패 부하들에게 수모를 당한 다음 떠나자(마자 기다린 것처럼) 김두한과 세츠코를 태운 전차가 도착한다. 전차는 마치 김두한만을 위해 운행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다섯 번째 전차의 등장이 내가 설명하려는 장면이다. 김두한을 찾아온 김동회는 종로 한복판에서 대결을 신청한다. 전형적인 서부극의 컨벤션. 두 가지 지적. 첫째, 일편에서 김두한과 김동회의 대결은 이야기의 절정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편에서는 영화가 시작하고 37분이 되었을 때, 그러니까 영화의 사분의 일이 지나자마자, 둘을 마주치게 만든다. 말하자면 이편에서는 김동회가 중심에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 대결 이후 곧 이 인물이 이야기 바깥으로 나가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물론 이 대결 이후 김동회가 즉시 바깥으로 빠져나가지는 않았지만 중심의 외곽을 맴돌다가는 마지막 종로에서의 집단 대결 장면이 오기 전에 경성을 떠나 만주로 간다. (그런 다음 삼편에서 만주로 도망친 김두한과 다시 만난다) 둘째, 이 대결은 예를 갖춘 대결의 절정에 해당한다. 장르에서 언제나 절정은 맨 마지막까지 숨겨두는 법이다. 이걸 서둘러 보여줄 때 이제 < 장군의 아들 >에서 예(禮)의 시대가 끝났음을 알리는 것이다. 김동회와의 대결이 끝나자 이편에서는 마치 한 시대가 끝난 것처럼 일편과 같은 협객들의 예를 갖춘 대결이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 돌아온 김두한은 평화를 깨고 종로 주변의 선배들을 찾아다니면서 세금을 요구한다. 선배들은 대결에서 패배했을 때 자신의 ‘동생’들을 맡기고 ‘나와바리’를 떠나는 대신 (일편과 달리) 비굴하게 무릎을 꿇고 거기서 연명한다. 이제 약육강식의 법칙만이 이편을 지배하기 시작한다. 그러므로 이 대결 이후에 김두한은 더 이상 김동회와 대결할 이유가 없다. 그들은 이 힘겨운 대결에서 얻을 게 없다. 과잉적인 제스처 속에서 선택된 태도. 더 이상 그것을 하지 않을 때 언제나 거기에는 그것을 하지 않는 이상의 이유가 있는 법이다. S#_1 S#_2 S#_3 S#_4 S#_5 S#_6 S#_7 S#_8 S#_9 S#_10 S#_11 S#_12 S#_13 S#_14 S#_15 신기한 첫 장면( S#_1). 김동회가 김두한과 대결할 때 그들이 종로 한복판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대신 다짜고짜 둘이 마주선 것을 위에서 내려다보면서 시작한다. 말하자면 이 쇼트는 마치 다음 쇼트와 순서가 뒤바뀌었거나 앞질러 나온 것처럼 등장한다. 그런 다음 장면에서( S#_2) 여기가 종로 한복판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master_shot) 서로를 마주보면서 자신들의 동선을 원형으로 그려 나갈 때 이 모든 상황에 무심하다는 듯 느리게 두 대의 전차가 양쪽으로 마주보고 온 다음 서로 교차해서 지나간다. 물론 그 화면 효과는 우리들이 보고 싶어 하는 김두한과 김동회의 대결 장면을 정확하게 가로 막은 다음 다시 무대의 막이 열리듯이 그 둘을 다시 보여주면서 각자 제 갈 길을 따라 이동한다. 설명의 반복. 화면 안에서 다시 화면을 만들고(re_cadrage) 두 대의 전차는 화면을 지운 다음 다시 연다. (wipe_in_out) 그때 카메라는 이 모든 움직임을 허용하기 위해서라는 듯 둘이 마주보는 자리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전차가 교차하는 길목을 넘어서, 그런 다음에도 구경꾼들로부터도 더 멀리 떨어져서, 아마도 이 장면에서 가장 먼 구경꾼의 자리에 머문다. 김두한과 김동회, 이 둘은 이때 아무리 격렬한 대결을 벌인다 할지라도 (전차가 교차하는) 사거리 너머로 넘어오지 못한다. ( S#_3) 왜냐하면 이 둘이 그걸 넘어오기 위해서는 사거리의 저편으로부터 이편으로 넘어온다는 걸 보여줄 수 있는 장면을(bridge_shot) 피할 수 없는데 그때 왼쪽 혹은 오른쪽으로 이어진 세로의 방향과 마주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걸 보여주려면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거기에도 세트를 지어야 한다. 임권택 은 먼저 세트의 조건을 받아들인다. 남은 방법은 그들의 대결을 저 교차점으로부터 넘어오지 않게 진행하는 것이다. 이 씬에서 김두한과 김동회의 액션 연출 자체는 간단하다. 그러나 전차가 교차하고 있는 종로 한복판에서 세트를 인정하고 그것을 성립시키는 것은 단지 이야기의 안에 들어온다는 문제가 아니다. 이 공간이 장소로서 구멍이 뚫린 결함을 지닌 사각형이며 두 명의 벡터는 서로의 힘을 자유로이 사용하면서 이 공간의 영화적 한계와 완전히 무관하게 활동하고 있는 중이라는 것을 생각해보자. 그때 이 공간은 어떤 수단을 써서 이들을 움직이지 못하도록 묶어놓을 수가 없는 것이다. 만일 그렇게 만들면 즉각적으로 한계가 드러나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임권택은 먼저 여기에 하나의 가상원을 그린 다음(imaginary circle) 김두한과 김동회가 여기서 빠져나오지 못하게 만든다. 전차가 교차하는 선을 넘으면 안 된다. 그러나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종로 한복판을 가로로 가상선을 그은 다음(imaginary axis) 전차가 교차하는 세로선을 180도로만 오고 간다. 이 공간을 임권택의 장소라고 부를 수는 없겠지만 나는 몇 번이고 임권택이 세트를 세운 다음 그 공간에 들어가서 제일 먼저 자기에게 주어진 조건의 제한을 재빨리 받아들인 다음 동선과 시선을 분리하여 이야기의 줄거리가 진행되는 작은 공간과 그것을 바라보는 큰 공간으로 만든 다음 두 개의 공간을 조립하는 방식을 현장에서 혹은 영화에서 보았다. 이때 둘 사이를 보충하는 것은 물론 영화를 보는 우리들이 자발적으로 시선의 결함을 메우는 상상적인 지도 그리기의 능력이다. 이때 약점은 시선을 구부려서 사용할 수 없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원과 직선만이 활동할 뿐이다. 임권택은 하나의 시선을 더한다. 그건 누구의 시선도 아닌 영화의 시선인데 물론 그 쇼트는 대결하는 둘을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것이다. 자, 이제 우리는 이 대결 장면의 첫 쇼트를 설명하게 수 있게 되었다. 명성바에서 종로 한복판으로 갑자기 옮겨왔을 때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 본 첫 장면( S#_1)은 이 시퀀스의 전체 운동을 위한 마스터 쇼트이다. 어디서 시작할 것인가. 그때 기준은 이야기가 아니라 그 시퀀스를 성립시키는 역량의 존재론과 연관 지어진다. 언제나 유기적인 쇼트들의 활동. 임권택은 쇼트가 문득 차원을 이동하여 견인되거나 혹은 반대로 갑자기 뒤로 물러나서 측량되기를 원치 않는다. 변화하는 전체 안에서 던져진 시간은 무엇을 표현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즉각적인 응답. 마치 교차선 너머로 온 것에 스스로 깜짝 놀라기라도 하듯이, 혹은 그 자리에 대한 반작용이 있기라도 한 듯, 김두한과 김동회가 서로 주먹을 교환하고 동시에 나가떨어질 때 카메라는 원래의 자리로 돌아와 위에서 아래로 두 개의 힘을 내려다본다. ( S#_4) 그러자 다시 마치 앞의 쇼트가 우리들의 시선을 방해하기라도 한 듯이, 그게 마치 일시적으로 디테일을 보기 위해 삽인 된 쇼트이기라도 한 양(insert_shot), 거의 동일한 위치로 다시 한 번 반발하듯이 앞의 자리로 돌아온다. (S#_5) 이때 김두한과 김동회, 이 두 개의 힘이 시선의 망에 사로잡혀 있음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구경하러 온 종로통 상인들이 구경꾼들 사이에 끼어든다. ( S#_6) 겹겹이 둘러싼 시선. 하지만 이때 이들의 자리가 어딘지는 분명치 않다.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추론은 아무 것도 없다. 왜냐하면 이 시선을 선행한 장면이 위에서 아래로 찍었기 때문에 이 장면의 시선이 45도로 세워졌다 하더라도 그건 거의 의미 없는 규칙이다. 물론 우리는 김두한의 후견인들이라 할 종로 상인들이 서 있는 자리 뒤편의 상점들을 미루어 짐작해서 길 건너편 왼쪽 자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영화의 규칙 안에서 얼마든지 배신이 허용된 설명이다. 이 짧은 시선의 쇼트로부터 재빨리 영화는 다시 김두한과 김동회가 대결하는 그 장소에로 돌아온다. 하지만 좀 더 가깝게, 좀 더 안으로 다가간다. ( S#_7) 임권택은 여기서 두 개의 리듬을 번갈아 교차시킨다. 하나는 김두한과 김동회를 멀리 보여준 다음 다른 쇼트와 번갈아 되돌아올 때마다 계속해서 앞으로 다가가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그 둘을 바라보는 시선의 자리를 유지하면서 김두한과 김동회의 대결이 만들어내는 원을 포함하면서 고립시키는 것이다. 이때 두 개의 리듬이 모두 영화로만 성립하는 운동의 교차라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여기에 두 개의 리듬은 어느 것도 이야기에 매달리지 않는다. 아니, 차라리 이야기 바깥에서 영화를 진행하기 위해서만 필요한 요구에 응답한다. 이 운동은 한편으로 기계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순서대로 오가면서 다른 한편으로 자꾸만 새로운 힘을 더해간다. 더 들어가자마자 다시 바깥으로 빠져나올 때 이번에는 구니모또 형사가 새로이 이 시선의 덧셈에 끼어든다. ( S#_8) 나는 이 편집의 순서에 대해서 지나칠 정도로 논리 정연한 것이 아닌가, 라는 의심이 있다. 이를테면 임권택은 이미 < 길소뜸 >에서 단 하나의 장면도 예외가 없는 논리의 세계를 보여주었다. 그게 지나치게 엄정해서 거의 숨 막힐 정도로 진행된 순서. 김두한과 김동회를 바라보는 두 개의 시선의 쇼트가 있다. 하나는 종로 상인들의 시선이고 다른 하나는 구니모또 형사의 시선이다. 이때 왜 앞의 것이 뒤에 오면 안 되는가, 라는 질문이 기다리고 있다. 대답은 다음 쇼트이다. 갑자기 김두한과 김동회를 이제까지 보았던 자리에서 뒤집어서 반대의 방향에서 그 둘을 바라보고 있다. ( S#_9) 단순하게 기술적으로 말하겠다. 이건 넘어갈 수 없는 선을 그냥 넘어간 것이다. 당신은 그게 지나치게 도식적이라고 말하고 싶을 것이다. 나는 영화에서의 선이라는 도식은 문법에 속한다고 대답할 것이다. 오히려 당신의 걱정은 이걸 지속적으로 한 방향으로만 진행하면 도식적인 반복에 지나지 않는다고 지적해야 옳다. 그리고 물론 임권택도 그 사실을 알고 있다. 문제는 지나치게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두 개의 힘을 향해 다가가던 리듬을 갑자기 중단하고 좌표 안에서 반대의 자리에로 건너올 때 거기에는 그 쇼트를 잡아당길 수 있는(attractive) 돌발적인 변화의 새로운 차원을 더해야만 한다. 이때 하나는 김두한에게 긍정적인 관계의 쇼트이고 다른 하나는 부정적인 관계의 쇼트라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구니모또 형사의 쇼트는 단지 서로 다른 시선의 요구에서 생겨난 것이(일 뿐만) 아니라 바로 다음 쇼트의 반대의 자리, 종로 한복판의 세로 선을 따라서 앞으로만 진행되던 카메라를 반대 방향으로 뒤집기 위해서 필요해진 반대의 자리에 놓인 인물(antagonist)의 쇼트이다. 두 개의 시선. 두 개의 반대의 힘. 그때 형식은 이야기를 경유해서 영화를 일시적으로 중단시킨 다음 그 반작용의 힘으로 순식간에 반대의 자리에로 넘어온다. 이때 이 쇼트는 이 시퀀스 전체에서 가장 이상한 구도로 보여 진다. 약간 위로 올라가 있지만(high_angle) 이와 비슷한 구도로 보았던 장면( S#_2)의 맞은편에서 찍은 것 같은 효과(reverse_shot)를 구태여 피하고 있다. 임권택은 이 쇼트를 음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지금 이 둘 안으로 더 가까이 들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이 시퀀스가 끝나면 이제 이 둘 사이에서는 새로운 우정(과 예기치 않은 한 여자의 등장으로 인한 본의 아닌 패배)의 이야기가 시작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더 파고 들어가야 하기라도 하듯이 서로 순식간에 주먹을 교환하는 김두한과 김동회를 따라 더 가까이, 그저 주먹을 휘두르면 맞을 것만 같은 거리까지(medium_shot) 다가간다. ( S#_10) 대결과 시선 사이의 기계적인 교환. 다음 장면은 다시 구니모또 형사가 바라보는 쇼트로 돌아온다. ( S#_11) 임권택은 이 교환의 도식을 지키면서 한편으로 기계적인 반복이 가져올 수 있는 구태의연함을 하여튼 피하고 있다. 이 반복은 재빨리 돌아가는 대신 반대로 더 멀리 뒤로 물러난다. 물론 아무리 멀리 물러나도 전차가 교차하는 길 건너편 이 길목을 빠져나가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이미 우리는 그 자리에서 두 사람의 대결을 보았다. ( S#_2) 임권택은 두 사람을 좀 더 잘 보고 싶어 하기라도 하듯이 한껏 위로 올라간 다음 그걸 전봇대에 올라가서 구경하는 아이의 뒤에 서서(over_the_shoulder_shot) 바라본다. ( S#_12) 그 시대의 구경의 방식. 구경의 자리. 그 시대의 풍속. 낯선 위치를 시대 안에 자리 하기. 가장 멀리 빠져나간 다음 쇼트는 이 대결에서 가장 가까이까지 다가간다. 두 개의 클로즈업. 김동회( S#_13)의 얼굴과 김두한의 얼굴( S#_14). 마치 가 닿을 것만 같은 거리. 하지만 동시에 이 두 개의 쇼트가 유일하게 이 두 사람을 하나의 쇼트로부터 둘로 찢어낸 분리의 절단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그런 다음 맨 처음, 이 대결이 시작했을 때의 첫 번째 자리, 다시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면서 재빨리 둘 사이의 마지막 주먹을 교환하고 김동회가 쓰러진다. (S#_15) 가장 단순하게 보는 방법. 김두한과 김동회의 정정당당한 대결은 김두한의 승리로 끝났다. 시나리오의 순환에 따라 설명하는 방법. 여기서 김두한이 지면 이야기는 더 이상 진행이 안 된다. 게다가 그것은 관객들이 기대하는 것이 아니다. 대결에서 지면 김두한은 규칙에 따라 종로를 떠나야 하고 종로패는 하야시 구미(組)의 아래로 들어가야 할 것이다. 미처 대결도 하기 전에 여기서 김두한의 승리를 누가 의심할까. 이때 단 한 사람, 임권택은 의심스럽게 쳐다본다. 하나의 쇼트라는 경기장 안에서 반복적으로 함께 활동하는 두 힘을 두 개의 쇼트로 찢어낼 때 구태여 그럴 필요가 없는 데도 김두한을 보여준 다음 김동회를 보여주는 대신 그 반대의 순서를 선택한다. 나는 이 영화가 장르영화라는 사실을 환기시키고 싶다. 장르의 규칙. 컨벤션이라는 약속. 이때 대결의 장면에서 리듬은 두 개의 방향을 갖는다. 순방향과 역방향. 김두한에서 김동회에로 흐르는 대신 김동회에서 김두한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순서. 주인공을 압도하는 맞은 편 대결하는 상대방. 우리는 일편에서 김동회가 마지막 순간 김두한과의 대결에서 갑자기 그 둘 사이의 긴장을 찢고 들어오듯이 외치는 목소리, “두한아, 넌 조선의 자존심이야, 지면 안 돼, 저 놈은 쪽바리다, 비록 조선의 피가 흐른다지만 왜놈들 개 노릇을 하고 있잖아, 죽여라, 죽여”라는 외침에 갑자기 대결을 포기해버린 것처럼, 좀 전과 마치 다른 사람인 것처럼, 맥없이 김두한에게 일방적으로 맞고 쓰러진 것을 보았다. 여기서는 갑자기 쇼트의 순서에서 불협화음을 만들어낸 다음 이 두 사람의 대결을 오로지 바라볼 수 있을 뿐인 자리, 그 둘 사이의 대결에서 어떤 감정적인 교환도 바라볼 수 없는 애매한 자리에로 옮겨간 다음 이 대결을 마무리 한다. 가장 시시하게 대답하는 방법. 그건 두 사람의 (무술) 대역을 보여주지 않을 수 있는 안전한 위치에요. 단지 그것뿐일까. 나는 그렇게 연출하지 않아도 아무런 문제없이 두 사람 사이의 액션을 진행한 연출의 예로 세 편의 < 장군의 아들 >로부터 열 개 이상의 시퀀스를 제시할 수 있다. 임권택은 우리를 모호한 자리로 데려간 다음 단지 결과만을 보여주면서 일편의 여운을 고스란히 남겨 놓는다. 왜 그렇게 해야만 했을까. 김동회는 이 대결이 끝난 다음 무언가 깊은 생각에 빠진다. 그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물론 끝내 설명하지 않는다. 아마도 대결 직후에 김두한이 위로하기 위해 데려간 명성 바에서 우연히 마주친 송채환을 보고 한눈에 사랑에 빠져들었고, 그럼으로써 다른 세계에로 도약할 준비를 하는 순간이라고 설명하고 싶을지 모른다. 하지만 김동회의 패배는 송채환을 만나기 전의 일이다. 약간의 우여곡절이 있지만 그런 다음 김동회는 자기의 손가락을 자르고 하야시 구미(組)를 떠나 만주로 간다. 무언가 여기에는 잘 설명되지 않는 상위의 관점 같은 것이 있다. 하나의 세계가 사라지고 거기서 다른 세계가 자기의 고유한 성질을 가지고 생겨나는 것만 같은 순간. 이미 주어진 세상을 다시 재구성하는 것만 같은 단절. 그렇게 함으로써 이미 주어진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구별되는 새로운 이야기의 법칙이 생겨난다. 나는 미처 감흥이 사라지기 전에 < 일대종사 >에로 돌아오고 싶다. 내가 전차를 이야기하는 순간 이미 당신은 눈치 챘을 것이다. 여기서 다루려는 장면은 엽문이 (홍콩에 잠시 머물렀던) 궁이를 찾아와 궁보산의 영정에 인사를 한 다음 “궁가 64수를 보여주시오”라고 청한 다음 시퀀스이다. 엽문이 궁이에게 1937년 동북에 있는 높은 산을 찾아가려 했지만 전쟁이 나는 통에 찾아가지 못하고 외투는 저당 잡힌 채 단추만 남았다면서 책상에 단추를 올려놓고 그녀에게 밀어 넣자 궁이가 그걸 만지작거리면서 “엽선생, 십년 전 섣달그믐 밤, 내가 어디 있었는지 아세요?”라고 마치 자문하듯이, 탄식하는 것처럼 말한, 그 다음 시퀀스이다. 그러면 이야기는 십년 전으로 갑자기 옮겨간다. 기차역이 보이고 “1940년 섣달그믐 밤 동북” 이라는 자막이 뜬다. 궁이는 아버지를 배신하고 죽음에 이르게 한 제자 마삼에게 복수하기 위해 지금 진천 북역에서 기다리는 중이다. 아마도 오늘은 고향에 돌아가기 위해 기차를 타야할 것이며 그렇다면 여기에 오지 않을 도리가 없을 것이다. 하늘에서 눈이 내리기 시작한다. 시계는 11시 28분을 가리키고 있다. 전구 불빛이 깜빡거리고, 사람들은 고향 가는 길에 발길을 재촉한다. 난로는 장작을 때우면서 활활 타고 있지만 아무런 위로가 되지 않는다. 왕가위는 한껏 기차의 도착을 늦추면서 시간을 음미한다. 기다리는 시간. 서로 다른 성질의 쇼트가 번갈아 오가기 시작한다. 세상사에 관심도 없는 눈발. 궁이의 복수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들의 고향길. 제 시간이 되자 기차는 천천히 도착한다.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지 못하지만 주인 곁에서 한껏 긴장한 원숭이. 일본군 점령하의 전구는 마치 금방이라도 꺼질 듯 깜빡 거린다. 역사의 기호들. 모든 것이 한 자리에 모여들 때 그 모든 쇼트들은 궁이와 마삼의 대결이 아니라 기차의 도착과 출발에 따라 서로 연결되고 분리된다. 슬로우 모션과 스텝 프린팅의 교차. 서로 다른 속도. 종종 이미지들은 뭉개지고 그때 인물들은 그저 형상만 어른거리듯 지나친다. 카오스처럼 보이면서도 기계 톱날처럼 서로 연결된 편집의 리듬. 그 안에서 세 개의 힘이 서로 각자의 법칙에 따라 활동하기 시작한다. 하나는 위에서 아래로 내리는 눈이다. 이 눈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바닥에 쌓여만 간다. 종종 많은 액션 활극들은 그렇게 눈이 내릴 때 바닥이 매우 불안정하다는 걸 이용하기도 한다. 때로 미끄러지는 헛발질. 왕가위는 그런 따분한 클리쉐를 여기서 활용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들은 무술의 고수들이기 때문이다. 그 대신 눈은 쇼트들 곳곳에 스며들어서 섣달그믐 추운 겨울날 한기를 ‘보여’준다. 두 번째 힘은 마삼이 타고 가야 할 기차의 도착과 출발이다. 이때 왕가위는 궁이가 기다리는 대합실을 왼쪽에 설정하고 마삼이 오는 역의 입구를 오른쪽에 배치한 다음 기차를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들어오게 만든다. 마삼은 이 기차를 타야 고향에 가서 만두를 먹을 것이다. 기차가 도착하는 것을 가장 먼저 알아채는 것은 원숭이이다. 역 벤치에 앉아 눈을 맞으며 기다리는 궁이의 집사가 쓴 모자의 털이 흩날리기 시작한다. 돌아보는 집사. 대합실 창문에 비치는 기차의 불빛. 초조하게 궁이의 주변을 이동하는 카메라. 하지만 궁이는 미동도 앉고 앉아있다. 신호등을 들고 눈발을 맞으며 역무원이 막 들어오는 열차를 맞이하러 간다. 들어오는 열차. 이때 왕가위는 기차가 들어오는 것을 단지 소리만으로도 간단히 알려줄 수 있는데 (물론 더 간단한 방법은 그냥 역에 들어오는 기차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걸 누가 모를까?) 그 위에 음악을 덮은 다음 기차의 도착을 간접적인 이미지로 보여준다. 세 번째 힘. 기차의 도착에 맞춰 마삼이 도착한다. 궁이와 마삼의 대결. 마삼이 도착하자 멈춰있던 궁이가 활동하기 시작한다. 이때 조각난 세계가 갑자기 일사불란하게 하나로 모여들기 시작한다. 사방으로 흩어진 시선이 하나로 모여들고 그 중심에 궁이와 마삼이 있다. “빚 독촉보다 더하군. 섣달 그믐날 집에도 못가게 하고” 궁이는 마삼에게 그 기차를 탈 수 있는 기회를 가져갈 것이다. 그것만이 궁가의 무술을 되찾는 방법이다. “만두는 솥에 있지만 넌 못 먹을 걸, 제를 지낼 놈은 제를 지내고 밥을 먹을 놈은 밥을 먹듯이 해야 할 일은 하늘이 무너져도 해야지, 궁가의 것을 돌려받겠다” 이 두 개의 시퀀스는 전차 혹은 기차를 사이에 놓고 진행하는 대결이라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규칙도 동일하다. 한쪽이 쓰러지면 끝난다. 이 두 개의 대결은 공개적이며 구경꾼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다. 심지어 이 두 개의 대결은 (물론 우연의 일치이겠지만) 아마도 같은 해, 1940년 단지 서로 다른 장소에서 벌어졌을 뿐이다. 차이라면 < 장군의 아들 > 이편은 종로 한복판 한여름이었고, < 일대종사 >는 중국 동북부의 기차역 정도이다. 하지만 그 둘은 단지 서사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완전히 다른 관계에 의지하고 진행된다. 그러므로 두 개의 시퀀스는 같은 방법으로 설명할 수 없다. 나는 <장군의 아들> 이편을 중심에 놓고 <일대종사>를 곁에 놓는 방식으로 생각하는 중이다. 비스듬하게 바라보기. 무대의 연출이라는 면의 좌표에서 궁이와 마삼의 대결은 김두한과 김동회의 대결보다 훨씬 조건이 나쁘다. 지금 막 도착한 기차가 궁이와 마삼이 서있는 공간에서 한쪽 180도를 모두 사용할 수 없게 차단해 놓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절반의 공간. 마삼은 그 기차를 타야하고 궁이는 마삼을 무릎 꿇게 만들어 궁가 무술의 필살기 노원괘인을 받아갈 것이다. 아마도 기차는 잠시 동안만 역에 정차할 것이다. 눈은 하염없이 내리고 섣달 그믐날 밤은 금방 밝아오지 않을 것이다. 왕가위는 마삼을 기차가 가는 방향에서 오게 만들었고 궁이를 마치 기차를 멈춰 세우듯이 반대편에서 마주 걸어오게 동선을 그어서 두 개의 선, 그러니까 기차의 철도와 두 사람의 대결의 선을 평행으로 놓았다. 순방향과 역방향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선. 그 선에 무관심한 철도의 선. 두 개의 평행선. 두 개의 트랙. 물론 왕가위가 구태여 이 장소에서 대결을 선택한 이유는 궁이와 마삼의 대결과, 기차의 도착과 출발이 만들어내는 정지와 활동이라는 기계적인 동작, 두 개의 운동 사이에서 새로운 관계를 작동시키려는 것이다. 마치 스쳐 지나가듯, 늦은 시간을 보여주기 위해, 그 자리에 매달려 있던 시계는 이 순간 그 어느 것도 멈출 수 없다는 힘의 기호가 된다. 여기서 모든 것은 오로지 앞으로 갈수만 있을 뿐이다. 기차의 출발시간. 궁이와 마삼의 대결. 내리고 또 내리는 눈. 이때 이상할 정도로 이 대결의 장면이 (이런 비유적인 표현을 허락한다면) 두텁게 칠해졌다는 인상을 불러일으킨다. 어딘가 둔하게 여겨지는 공간의 구석들. 나는 필요 이상으로 섬세하게 이루어진 금루를 환기시키고 싶다. 왕가위는 의도적으로 일부를 지워나가고 있다. 그럴 필요가 있었을까. 지워진 장소. 어떤 흐릿함. 지워져가는 흔적. 바라보는 시선들을 가로 막는 성에 낀 창문. 거기 내려앉은 어둠. 섣달 그믐밤은 그림자가 깊기도 하다. 우리는 이 시퀀스 전체가 궁이가 돌아보는 시간(flash_back)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두 개의 시간. 십년이라는 시간의 간격. 직선으로만 이루어진 선들의 다발. 각자의 선들의 방향과 힘. 그 사이에서 시간의 간격은 무엇을 남겨놓고 무엇을 지운 것일까. 기억 속의 대결. 그런데 궁이는 갑자기 왜 엽문에게 십년도 더 지난 이 이야기를 꺼내든 것일까. 엽문은 마삼에게 아무런 감정적인 원한이 없으며 또한 그가 궁이를 대신해서 그녀의 아버지인 궁보산의 복수를 행해야할 의무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엽문과 마삼, 그 둘은 그저 스쳐 지나가듯이 금루에서 한번 보았을 따름이다. 엽문은 지금 오로지 궁이가 궁금해서 만난 것이다. 궁이는 단추를 돌려주기 위해서 만난 것이다. 그런데도 궁이는 마치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만났다는 듯이 힘겹게 마지막 순간에 이야기를 꺼내든다. 이유는 단 하나뿐이다. 궁이가 이 대결에서 마삼에게 졌다면 궁이와 엽문에게는 기회가 있었을 지도 모른다. 엽문의 아내는 그의 곁을 떠났고 궁이는 이제 궁가 무술의 유일한 전수자가 아니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녀의 패배는 궁가 무술의 권위를 마삼에게 넘겨야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승리는 궁이에게 사랑의 패배에 다름 아니다. 삶의 쓰디 쓴 아이러니. 하지만 여기엔 다른 해석이 하나 더 있다. 다시 한 번 환기하지만 궁가 64수 무술의 최고의 경지인 노원괘인의 마지막 필살기는 돌아보는 것이다. 돌아보는 제스처. 돌아보는 시간. 후회. 어떤 방법을 동원해도 막을 수 없는 칼날 같은 아픔. 지금 이 장면을 바로 그 돌아보는 마지막 한 수, 노원괘인의 필살기로 엽문에게 대결을 청하는 것이라고 읽을 수는 없는 것일까. 궁이는 금루에서 엽문과 아버지 궁보산의 대결을 보았다. 그때 궁보산은 엽문에게 제안한다. “엽선생, 오늘은 내 마지막 대결이니 우리 생각을 겨루세” 생각을 겨룬다는 것. 두 개의 생각. 사유의 대결. 감정의 대결. 여기서는 사유와 감정 사이에서 우위를 논하지 않을 생각이다. 물론 두 사람은 이미 금루에서 그들의 대결을 ‘즐겼다’. 마치 포옹이라도 할 것만 같았던 순간들. 마치 입술이 거의 닿을 만큼 가까이 다가간 클로즈업의 슬로우 모션. 서로 가장 가까이 다가가본 시간. 개념들은 이번에는 정감의 기호들에 자리를 양보해야 한다. 하지만 아마도 이 돌아보는 시간의 대결은 궁이와 엽문의 마지막 대결이 될 것이다. 누가 돌아보는 시간을 견딜 것인가. 그런데 그 대결에서 승자가 있을 수 있을까. 지금 이 장면의 한 장면, 한 쇼트, 한 순간, 하나의 제스처, 하나의 액션, 하나의 동작, 한마디의 말, 하나, 하나가 마삼을 경유하여 고스란히 엽문에게로 향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시퀀스 안의 모든 시청각 기호들을 읽어나갈 때 그것이 모두 이미지로 옮겨진 궁이의 말이며 엽문을 향한 치명적인 노원괘인의 필살기라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돌아본다는 것. 이때 더 이상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만 나아가는 것은 기차이다. 여기에는 두 대의 기차가 없다. 단지 한 대의 기차가 거기 잠시 멈추어 선 다음 제 시간이 되면 망설이지 않고 떠나갈 것이다. 무엇이 남고 무엇이 사라진 것일까. 나는 다소 자유자재로 시간을 뒤섞고 싶어진다. 왜냐하면 이건 왕가위의 영화이기 때문이다. 만일 계보를 세워야한다면 왕가위는 명백히 오손 웰즈에서 알랭 레네를 지나 사방으로 시간의 거미줄을 쳐나간 네트워크를 따라가고 있다. 약간의 디테일. 기차는 마삼이 오기 전에 도착했고, 마삼은 이 기차를 타기 위해 막 역에 도착했다. 그런 다음 기차를 언제 떠나보낼 것인가, 라는 문제가 남는다. 십년 전 이날, 궁이의 기억 속에는 오로지 기차만이 남아있는 것처럼 모든 운동은 이 기차의 도착과 출발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아니, 차라리 기차 시간표라는 운동 안에 이끌려 들어와서 화면 안의 모든 기호들이 그 안에서 활동한다고 말하고 싶을 정도이다. 오로지 여기서는 하늘에서 내리는 눈만이 자유로울 따름이다. 아니, 그것조차 그렇게 말할 수 없다. 궁이와 마삼의 대결이 시작되자 마치 그들의 대결을 방해하면 안 된다는 듯이 그 순간 그만 멈추고 만다. 우리는 이미 금루에서 궁이의 64수를 보았다. 혹은 그녀는 엽문에게 보여주었다. 나는 이 대결이 끝난 다음 나눈 궁이와 엽문의 대화를 환기시키고 싶다. 지금은 생각을 대결하는 중이다. 필살기 노원괘인의 필살기는 돌아보는 것이다. 궁이는 엽문에게 말한다. “엽선생, 64수를 보여드린 건 이걸 말하기 위함이에요. 사람밖에 사람 있고 산 너머 산 있듯 주먹이 앞만 보고 뒤를 못 보면 안 되죠, 여기서 많은 걸 깨우치시길” 그러자 엽문이 대답한다. “바둑에 같은 바둑판은 없는 법이죠, 잎사귀 밑에 꽃을 숨길 수 있는지 나중에 봅시다” 궁이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면서 대답한다. “그래요, 기다리죠” 이미 궁이는 노원괘인의 필살기를 알고 있었던 것일까. 왜 엽문은 지금이 아니라 나중에 보자고 한 것일까. 말하자면 이건 약속인 것일까. 나는 자막에 ‘한 마디 약속은 산보다 무겁다’라고 써 있었을 때 그 약속이 무엇이었는지를 한참 생각했다. 궁이는 엽문의 그 말에 기다리겠다고 대답했다. 무엇을 기다린 것일까. 궁이가 엽문에게 들려주는 십년 전의 섣달 그믐밤.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엽문은 홍콩에서 약국하면서 머물고 있는 궁이를 찾아왔을 때 첫 인사가 당신이 보고 싶어서 왔소, 라는 말 대신 궁가 64수를 보여주시오, 라고 청했다. 물론 문학적으로 이 말을 살짝 비틀어서 당신이 보고 싶어서 왔다는 말을 그렇게 돌려서 한 것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아마 모두들 그렇게 받아들이고 싶어 할 것이다. 나는 반대로 묻고 싶어진다. 정말 그 말이 엽문이 하고 싶었던 말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궁이는 그 말에 대답한다. 만일 문지방을 넘자마자 그 말을 했다면 한바탕 대결을 하고 만두를 대접했을 텐데요. 나는 지금 만두를 생각하는 중이다. 오늘은 섣달 그믐날이다. 고향에 돌아가서 만두를 먹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마삼은 기차를 타러 온다. 궁이는 마삼에게 말한다. “만두는 솥에 있지만 넌 못 먹을 걸, 제를 지낼 놈은 제를 지내고 밥을 먹을 놈은 밥을 먹듯이 해야 할 일은 하늘이 무너져도 해야지” 오늘 궁이와 엽문은 아무도 만두를 먹지 못할 것이다. 그들에게 홍콩은 고향이 아니다. 그들은 돌아갈 기회를 놓쳤다, 그 말을 한 다음 탄식하듯이 궁이는 십년 전 그 이야기를 시작한다. 여기서 방점은 탄식(歎息), 에 있다. 이 말을 조심스럽게 음미해주었으면 좋겠다. 궁이는 마삼과의 대결에서 이겼다. 마삼은 피를 토한 다음 눈 바닥에 누운 채 말한다. “궁가의 것을 돌려줬다” 궁이는 할 수 있는 한 거만하게 내려다보면서 대답한다. “말은 바로 해야지. 네가 돌려준 것이 아니고 내가 되찾은 거다” 멈춘 줄 알았던 눈이 다시 내리기 시작한다. 이미 기차는 떠나간 다음이다. 궁이는 이 대결에서 힘겹긴 하지만 마삼을 무릎 꿇게 만들었다. 그런데 이걸 다시 떠올리면서 여기에는 승리에 대한 어떤 도취감도 없다. 왜 그녀는 탄식하는 것일까. 이야기는 거기서 끝난다. 시간은 약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1952년 일천선의 백장미 이발소로 옮겨간다. 그런 다음 엽문과 궁이는 마지막으로 경극을 보고 헤어진다. 영화는 그 이년 동안 엽문과 궁이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어떤 감정이 오갔는지, 어떤 시간을 가졌는지 설명하지 않는다. 나는 약간의 실험을 했다. 이상하게도 내 동료들은 섣달 그믐날 이야기를 나눈 다음 경극을 보고 궁이와 엽문이 헤어지는 장면을 연이어 붙여놓고 기억했다. 그 두 개의 씬 사이에 이년이라는 간극이 있으며, 게다가 분명히 어딘가에 있었을 것이라고 하면서도 일선천의 이발소 장면이 그 사이에 있었는지조차 어리둥절하게 생각 했다. < 일대종사 >는 엄격하게 엽문의 전기를 따라가는 영화가 아니며 궁이와의 인연은 지어낸 이야기이다. 그러므로 나는 반대로 물어보고 싶어진다. 왜 마삼과의 대결 이야기가 끝난 다음 궁이와 엽문과의 이별 장면을 진행하면 안 되는 것일까. 이년 동안 별다른 이야기가 있는 것도 아니며 게다가 마삼과의 대결을 보여준 다음 이어서 일선천의 이발소를 보여주고 아무 상관도 없다는 듯이 다시 경극으로 돌아와서 궁이와 엽문의 이별 장면을 진행한다. 무언가 여기에는 궁이와 엽문 사이의 인연에 대한 (영화 바깥에 있는) 우리들의 기억 위에 기억을 겹쳐놓고 싶어한다는 인상이 있다. 인상의 연상과 기억의 순서 사이에서 벌이는 내기. 기술적으로만 설명하면 이 탄식은 궁이와 엽문의 이별에 대한 감정을 이어 붙이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면 왜 그 사이에 이년이라는 시간의 간격이 필요해진 것일까. 그런 다음 다시 그 간격을 지워버리고 있다. 궁이와 엽문의 섣달 그믐밤의 만남, 이 만남에서 궁이가 하는 십년전 섣달 그믐밤의 대결, 그리고 난 다음 이년 후의 일선천의 백장미 이발소, 그리고 다시 경극을 본 다음 이별하는 궁이와 엽문이 걸어가는 한밤 중의 길, 이 길에서 우리는 두 사람 이외에 그 누구도 보지 못했다. 마치 유령들이 거니는 것만 같은 그림자들. 텅빈 건물. 어떤 집에도 들어오지 않은 등불. 여기서 누가 구경꾼인가? 이 모든 장면의 광경들을 보는 사람은 우리들 뿐이다. 거의 서로 통하지 않는 조각들. 그것들을 영화라는 고유한 능력의 관점으로 묶어낸 다음 사랑에 관한 이야기로 만들 수 있는 자리. 하지만 여기서 기억에 대한 진정한 내기가 시작된다. 왕가위는 그 자리를 잘 정리되지 않도록 계속해서 때로 희미한 공통점을 놓아두고 종종 중단시킨 다음 그 안에서 영화를 보는 우리들의 시간 감각을 증발시키려 든다. 희박해져가는 기억. 궁이는 이야기 속에서 점점 사라져가는 등불처럼 보인다. 그때 그건 엽문이 아니라 우리가 느끼는 감각이다. 영화 속의 여러 개의 생명의 리듬. 그때 하나가 여기서 지워져가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보는 내내 마치 영화의 어떤 기능이 마비되어 작동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일대종사>는 잠시 동안 상승한 다음 내내 하강한다. 나는 두 장면 모두에서 불투명성을 설명했다. 그런 다음 구태여 여기서는 장면이라는 말 대신 광경이라는 말을 사용하려고 한다. 이때 (< 장군의 아들 > 이편의) 전차와 (< 일대종사 >의) 기차는 장면의 디테일(detail_particolare)이 아니라 광경의 디테일(detail_dettaglio)이라는 인상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물론 이 둘이 여기서 정확하게 이분법적으로 나뉘는 것은 아니다. 경계는 모호하고 어딘가에서 그 둘은 서로를 오간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따분하게 그 둘을 도식적으로 만들고 싶지 않다. 혹은 앙드레 고드롤과 톰 거닝이 제시한 매혹의 인력(spectator_in_attraction)이라는 개념 안으로 끌어들이지 말았으면 좋겠다. 그런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내가 지금 여기서 말하는 것은 이미지가 아니라 흔적 자체의 존재론이 어떻게 재현의 배치를 무너트려가면서까지 어떤 기쁨을 호소하느냐는 것이다. 과잉의 투여라는 문제. 거기에 얼룩처럼 남아서 자기의 존재를 사건으로 만들고 있는 중이다. 오로지 기능적으로만 말한다면 양쪽 모두 전차 혹은 기차가 있거나 없거나 차이가 없다. 만일 있다고 하더라도 그 차이는 근본적인 것은 아니다. 여기서 그 존재의 차이는 오로지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시선의 경로에 대한 동요로부터 시작된다. 그러므로 전차와 기차를 단순하게 대결을 무대화시키는 장치라거나 혹은 알레고리라는 식으로 설명하고 싶지 않다. 오히려 이런 상황에서 나는 이 두 개의 힘이 아무 것도 말하지 않기로 결심한 것 같은 태도를 말하고 싶다. 이 두 편의 영화에서 전차와 기차는 우연히 거기서 마주친 대상이 아니다. 임권택 은 이 장면에서 구태여 김두한과 김동회를 종로 한복판 두 대의 전차가 교차하는 그 장소에로 대결 장소를 옮긴다. 왕가위는 십년 전 섣달 그믐밤 궁이와 마삼의 대결을 기차역으로 이끈다. 하지만 거기서 두 대의 전차, 혹은 막 도착한 기차는 그저 무심하게 궤도를 따라 떠나간다. 그때 그 힘은 단지 영화적 사건으로서만 존재한다. 이 존재 자체가 어쩌면 장면을 망쳐버릴 지도 모른다. 혹은 장면에 대해서 어떤 얼룩처럼 여겨지기조차 한다. 그런데도 거기 있어야만 한다. 아니, 차라리 그것이 있는 자리에서 다시 시작해야만 한다. 마치 그것이 있는 자리에서만 이 사건이 성립되기라도 하듯이 여기에 온다. 영화에서 우리를 까다롭게 만드는 부분은 서사 안으로 통합되지 않으면서 거기에 불가사의하게 사건으로 존재하는 비인칭의 이것임, 과 마주칠 때이다. 영화에서 그 무언가를 건드릴 때 거기서 통일성을 요구하면 안된다. 기이하게도 여기에서 내가 마주친 순간은 그 존재의 사건들이 서로 다른 층위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임을 보여주고 있는 중이라는 영화적 시간이다. 나는 무엇보다도 교차하는 두 대의 전차, 혹은 막 도착한 기차가 불러일으킨 설명할 수 없는 기쁨을 말하고 싶다. 물론 이 기쁨을 가장 먼저 알고 있었던 사람은 루이와 오귀스트 뤼미에르 형제일 것이다. 시오타역으로 들어오는 기차. 상영시간 56초. 나는 잠시 멈추고 이 장면을 다시 보고 있다. 당신께서 부디 이 칸막이처럼 여겨지는 두 영화 사이를 횡단하면서 내가 찾으려는 것이 무엇인지 눈치채주었으면 고맙겠다. 가로 지르기. 영화를 본다는 것은 그 자체로 성립되면서 동시에 그 영화로부터 시작되는 다른 영화들과의 사이를 떠도는 것이다. 말 그대로 표류. 임권택을 말하면서 거기에 가 닿지 않으려는 노력. 그래서 왕가위에게 다가가기. 하지만 왕가위에게 머물지 않기 위해서 임권택에게로 돌아오기. 그 사이에서 나는 영화 안에 머무는 불가사의한 사건을 발견하고 기쁨에 넘쳐 어쩔 줄 모르는 중이다. 마치 열차처럼 양쪽을 오가면서, 놓쳐버린 열차를 그리워하면서, 다시 찾아올 열차를 기다리면서, 그 둘이 교차하는 그 시간이 바로 내가 영화와 대결하는 순간이라는 사실을 문득 깨닫는다. 말하자면 내가 임권택에 관한 글을 시작하면서 맞이하는 첫 일 년, 작년의 그날로부터 오늘. 나는 지금 다시 시작하는 중이다. (세 번째 이야기 끝, 네 번째 이야기 계속) 장군의 아들 2 1991년 103분 컬러 1.85 감독 임권택 제작 태흥영화㈜ 각색 이윤택 촬영 정일성 조명 차정남 편집 박순덕 음악 신병하 박상민 김두한 송채환 송채환 신현준 하야시 이일재 김동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