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랑 끝의 남매
- 감독
- 가타야마 신조
- 제작년도
- 2018
- 출연
- 마츠우라 유야, 와다 미사, 키타야마 마사야스, 이와야 켄지, 나카무라 유타로
구술사로 조명하는 1960~1970년대 액션영화 연간 200여 편이 넘게 제작되며 대중문화의 유행을 선도하고 산업적인 전성기를 이끈 1960년대 한국영화는 다양한 방면으로 연구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규모와 깊이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특히 급속도로 확대‧성장한 매체의 특성으로 짧은 시간 동안 유입된 영화계의 많은 인력을 살펴보는 것은 녹록하지 않은 일이다. 영화산업 성장의 근간이 되는 제작규모와 그에 따른 인력 배치를 파악하는 데 있어서 그나마 가장 효율적인 방법 중 하나는 장르별, 제작사별, 시기별로 구분해 흐름을 살피는 방법일 것이다. 하지만 1960년대 한국영화산업의 불안정한 제작 시스템과 상영관 규모 대비 과도한 제작 편수로 인해 분류화가 어렵다는 단점이 있다. 따라서 규모에 상응하는 방대한 영상사료와 문서사료를 보다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하여 수행되어야 할 방법론이 구술사방법론이라 할 수 있다. 구술사방법론은 역사적으로 기록되지 않은 사건이나 주변부의 인물들을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그리고 그들을 통해 또 다른 방면에서 역사를 바라보게 한다. 한국영상자료원의 한국영화 구술사 프로젝트에서 다양한 직능별로 이루어진 인력 구술은 이와 같은 여러 방면에 걸친 새로운 방식의 역사쓰기에 일조할 수 있다. 그 중 하나가 배우 김영인의 구술을 통해 살펴볼 수 있는 1960~1970년대 액션영화의 흐름과 변화이다. 2016년 한국영화 주제사 ‘1960년대 후반~1970년대 초반 한국영화산업의 변화’에서 장르영화의 배우를 대표하여 이루어진 이 구술은 문서사료에는 기록될 수 없는 세밀한 현장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의 구술은 특히 1960~1970년대 여러 장르가 번성하는 가운데 제작편수의 큰 부분을 차지한 액션영화를 다채롭게 살펴보는 데 도움을 준다. 특히 시기별로 변화하는 액션연출과 액션연기의 변화에 대한 설명은 장르영화의 성장과 확대가 어떠한 방식으로 이루어지는지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특정 사례가 될 수 있다. 일례로 그는 1대1 액션과 군중신의 촬영비화, 무술지도의 원칙 등을 큰 틀로 하여 1960~1970년대 액션영화의 특징을 구술한다. 그가 데뷔한 1961년부터 활발하게 활동한 1970년대 중반까지는 우연히도 액션영화의 성장과 쇠퇴와 맞물려있는데, 이를 통해 자연스럽게 1960년대 규모가 확대되기 시작한 한국영화산업의 성장 이면에서 인력의 유입과 이탈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도 파악할 수 있다. (그림1) 김영인 한국영상자료원 구술에서 특징적인 점 중 하나는 영화의 특성상 다양한 분야의 스태프 구술이 상당수 이루어졌다는 점인데, 특정 감독이나 배우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뒷스태프’는 방대한 사료가 무색할 만큼 제대로 된 기본자료 하나 찾을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영화의 크레디트에 기록되지 않은 경우도 자주 찾아볼 수 있기 때문에 오롯이 구술자의 기억과 필름이 보존된 영화를 중심으로 구술을 완성해가야 한다. 때문에 영화의 기본 제작정보를 기반으로 구술자와 연구자가 내용을 쌓아 구술자가 활동하던 시기의 네트워크를 그려내야 한다. 배우 김영인의 경우도 이에 해당된다. 활동 기간이 비교적 긴 반면에 조연으로 오랜 기간 활동한 탓에 매체 노출이 거의 없었고, 구술이나 회고록 등의 작업물도 없어 1차 자료를 수집하기가 어려우며 한국영상자료원의 데이터베이스 자료와 영상물 외에는 참고할 자료가 미비하다. 이럴 경우 최선의 방법은 예비접촉을 통해 질문지를 구성하는 것인데, 이러한 예비접촉을 바탕으로 구성한 김영인 구술의 큰 항목들은 첫째, 영화계 입문 배경, 둘째, 배우 데뷔 후의 연기활동, 셋째, 무술지도에 관한 것이었다. 이렇게 하여 데뷔 50여년 만에 처음으로 자신의 이력을 회고함으로써 액션배우 김영인의 활동이 완성되었다. (그림2) 액션영화 촬영현장에서 ‘날으는 배우’의 탄생과 액션영화의 생생한 현장이야기 1) ‘스턴트맨’이라는 용어가 사용되지도 않던 시절, 김영인은 <5인의 해병>(김기덕, 1961)에서 주인공들의 액션 장면을 대신하며 ‘날으는 배우’라는 별명을 얻었다. 본인이 출연한 장면이 대역이란 것도 모를 정도로 영화제작 시스템에 어두웠던 그는 1966년 김기덕 감독의 조언으로 <불타는 청춘>에 출연하며 본격적인 배우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비중 있는 배역이란 언급에 큰 맘 먹고 빚까지 내 신사복 세 벌을 맞췄다. 하지만 그가 맡은 역할이 ‘깡패’라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 맞춤옷들은 무용지물이 되었고 결국 남대문 시장에서 구입한 구제 점퍼가 ‘유니폼’이 되었다. (그림3) <5인의 해병>(김기덕, 1961) 신문광고 데뷔작 이후 김영인은 <어명>(강조원, 1967), <실록 김두한>(김효천, 1974), <동백꽃 신사>(이혁수, 1979) 등의 영화부터 2000년대 류승완 감독의 <피도 눈물도 없이>(류승완, 2002), <아라한 장풍대작전>(류승완, 2004)까지 지난 반세기 동안 다수의 액션영화에서 활약했다. (사진 4) <피도 눈물도 없이>(류승완, 2002)의 백골 역의 김영인과 불곰역의 백찬기 (사진 5) <아라한 장풍대작전>(류승완, 2004) 왽쪽부터 김영인, 김지영, 안성기, 윤주상, 백찬기 1940년 경기도 양평에서 출생한 그는 학창시절에는 권투를 비롯한 다양한 운동을 섭렵할 정도로 활동적이었다. 특히 1960년대 유명한 권투선수들을 배출한 한국체육관에서는 꽤 높은 순번인 ‘27번’을 받아 아마추어 시합에도 출전할 정도였다. 이 때 익힌 권투와 유도, 가라테 등은 후일 본인의 액션 연기뿐만 아니라 액션 지도를 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되었다. 김영인의 구술은 본인이 출연하고 지도한 영화들의 액션 장면과 관련한 에피소드들을 세세하게 풀어놓는다. 그의 구술로 1960~1970년대 한국 액션영화의 관습적인 장면이 어떤 배경으로 탄생했는지 알 수 있다. 죽고 싶지 않은 배우와 필름을 아끼고 싶은 감독 사이의 신경전으로 “‘으아아악!’ 하구 그냥 멫 바꾸 돌아가서 그런 척을 했다가 쓰러져 가주구선 그냥 죽어야 될 텐데 안 죽구 풀 있는 거 풀 다 뽑구선 일어났다가 죽었다”는 에피소드나 한겨울 촬영한 사극에서 “말이 뛰구 돌아야 하는데 대개! 횃불 있는 데 가서 다 죽어” 있는 에피소드는 당시 한국영화 제작현장의 열악함이 만들어낸 장르적 관습을 보여준다. (그림6) <어명>(강조원, 1967) 포스터 액션영화에 관습적으로 등장하는 ‘조직원들’의 반응 쇼트는 카메라를 한 번이라도 더 받기 위한 조·단역 배우들의 열정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팔에 찬 단도를 보여주기 위해 괜스레 소매를 한 번 걷어 올린다거나 일부러 눈에 띄기 위해 우스꽝스럽게 보이더라도 양 손목에 시계를 찬다거나 단추라도 하나 더 달았다거나 하는 에피소드들은 그만큼 카메라 뒤에서 벌어지는 경쟁이 치열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와 같은 “소품 전쟁”에서 180센티미터가 넘는 큰 키와 운동으로 다져진 다부진 체격은 구술자가 액션 영화에서 꾸준히 활약하는 데 자산이 되었다. 액션 연기와 지도에서 구술자가 지속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현장감과 타이밍 그리고 약속이다. 이를 바탕으로 아무리 작은 장면일지라도 실제 ‘싸움’에서 볼 수 있는 ‘몸짓’을 표현하고자 했다. 이는 액션 영화의 특성상 어느 정도의 과장이 필요하더라도 실전과 너무 동떨어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액션 지도를 할 때 가장 강조한 것 중의 하나가 리허설을 통한 ‘약속’이었다.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실록 김두한>의 박치기대장 성팔이의 액션과 <동백꽃 신사>의 클라이맥스 액션은 이러한 약속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실록 김두한>의 대미를 장식하는 종로 거리 액션은 안양촬영소에서 3일에 걸쳐 촬영했을 정도로 규모가 크고 중요한 장면이었다. 성산일출봉에서 촬영한 <동백꽃 신사>의 마지막 장면은 “틀림없이 죽어야 되는 장소”인 벼랑 끝에서 한 촬영이라 감독은커녕 카메라조차 대동하지 못했는데, 오히려 이러한 악조건 때문에 이대근과의 생동감 넘치는 일대일 액션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그림7) <동백꽃 신사>(이혁수, 1979) 포스터 1960~1970년대 한국 액션영화의 성장과 변화 1960년대 초중반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한 전쟁물, 정창화, 이만희 등을 중심으로 성장하기 시작한 스릴러와 만주물 등이 관객의 사랑을 받으며 한국 액션영화의 성장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대형사극의 등장과 함께 시작된 사극영화의 군중신 등도 액션영화가 다양화되는 데 역할을 했다. 다양한 액션영화의 등장에 맞춰 액션연출도 시기별로 변화가 이루어졌는데, 김영인의 출연작을 큰 줄기로 하여 액션연출과 액션연기의 변화를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구술자가 한국영화 역사상 ‘거의 최초’의 스턴트맨으로 활약한 <5인의 해병>에서 주인공 5인의 액션연기는 지금 보면 단순한 움직임에 불과하지만 그 시기 전쟁 액션영화에서 보여줄 수 있는 기본적인 액션의 상황들을 보여주고 있다. 포탄 폭발, 전투 사격 등에 맞춰 몸을 좌우 혹은 상하로 움직여주는 연기들은 다양한 앵글로 표현되지 못한 탓에 액션의 깊이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군중 신의 경우도 롱 쇼트로 지나가는 경우가 많기에 그 규모를 세밀하게 느끼기에는 무리가 있다. 따라서 그가 말하는 ‘날으는 배우’의 진면목은 여간해서는 드러나지 않지만 그 시기 전쟁액션의 제작스타일을 알아보는 데 도움이 되는 영화라고 볼 수 있다. 불과 2년 후에 제작된 <돌아오지 않는 해병>(1963)에서 이만희 감독과 서정민 촬영감독의 스타일로 완성된 화려한 전쟁액션과 비교해본다면 1960년대 초기의 액션의 규모가 가늠될 것이다. (그림8) <5인의 해병>(김기덕, 1961) 군중 액션 <어명>을 통해서는 1960년대 중후반 수입되기 시작한 홍콩 무협영화와 한국에는 수입될 수 없었지만 흥행이나 스타일면에서 아시아 각 전역의 영화에 영향을 끼친 <자토이치> 시리즈를 필두로 한 일본 사무라이 영화들이 한국 액션영화에 미친 파급력을 추측해볼 수 있다. <어명>은 영화의 스타일 자체가 홍콩 무협영화와 일본 검객영화의 영향을 받고 있는데, 일본인 무술감독 나카하라 신(中原伸)의 영입은 이와 같은 스타일의 영향을 한국 액션영화에 녹여내는 데 절대적인 역할을 하였다. 김영인은 구술에서 나카하라 신이 연출한 액션 신을 언급하며 홍콩영화와 일본영화에서 활용하는 ‘검술액션 연기’를 “세밀한 동선을 기본으로 지도하는 무용과도 같았다”고 설명한다. 따라서 그의 구술을 통해 일본인 무술감독의 영입이 한국의 검객영화에서 액션을 좀 더 유려하게 연출하는 데 영향을 끼쳤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림9) <방랑의 결투>(호금전, 1966) 신문광고 (그림 10) <자토이치> 포스터 (그림11, 12, 13) <어명>(강조원, 1967)에서 나카하라 신이 지도한 액션 장면 1960년대 후반 영화 <샹하이부르스>와 <사나이 삼대>를 통해서는 한국 현대물 액션영화에서 액션연출이 좀 더 세밀해지고 화려해지는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이는 아마도 1960년대 <007> 시리즈와 마카로니 웨스턴 시리즈로 대표되는 서양 액션영화의 폭발적인 인기가 한국의 영화 관객과 한국 액션영화에도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라고 추측해볼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60년대 후반 영화계에 새롭게 유입된 젊은 남성 배우들은 대규모 군중 신을 필수로 하는 현대물 액션과 무협 액션이 다수 제작되는 데 영향을 끼쳤다. 인력의 확대는 이전의 영화들과 비교해봤을 때 규모면에서 큰 차이를 보여주었으며, 액션 연출의 측면에서도 규모의 성장뿐만 아니라 좀 더 깊이 있고 화려한 액션을 만들어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사진 14, 15, 16, 17) <샹하이부르스>(김기덕, 1969) 액션 장면 (세번째 사진에서 왼쪽이 김영인) <김두한> 시리즈(김효천)는 이러한 액션연출의 변화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영화라고 볼 수 있다. TV 연기자까지 인력의 풀을 확대한 이 영화는 제작 규모도 컸지만 다양한 배우들을 적재적소에 활용하여 대규모 액션 신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이전의 영화들에서 군중 액션 신의 조연 연기자들이 단체로 명시되거나 인식될 뿐 각각의 캐릭터 액션은 힘들었던 것에 비해 이 영화는 급격하게 커진 액션 규모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군상들의 캐릭터들을 창조해 액션의 특기를 하나씩 부여함으로써 ‘캐릭터 액션’을 만들어냈다는 데 의미가 있다. 시리즈의 첫 번째 영화인 <실록 김두한>의 엄청난 흥행은 이러한 캐릭터 액션의 성공이 가장 큰 요인으로 작용한 것이었으며, 캐릭터의 성공적인 안착은 시리즈물이 연달아 성공하는 데도 큰 역할을 했다. <김두한> 시리즈의 성공은 1970년대 합작액션영화들과 함께 캐릭터를 기반으로 하는 시리즈 액션물이 유행하는 데 도화선이 되었다. 따라서 1970년대 후반 이후의 액션영화들이 이야기 중심보다는 캐릭터를 기반으로 한 시리즈 액션물 중심으로 번성한 것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실록 김두한>을 그 중심에 두어야 할 것이다. (사진 18, 19, 20, 21, 22)<실록 김두한>(김효천, 1974) 종로거리 액션. 마지막 사진의 가운데가 김영인 김영인 구술의 의미와 평가 상기한 것처럼 김영인의 구술은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까지의 액션영화의 특징을 살펴볼 수 있다는 데 의의가 있다. 이와 더불어 그의 구술에서 주목할 만한 특징과 의의를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 번째는 학창시절 외국영화 관람의 경험이다. 1회라는 한정된 시간 때문에 길게 이야기를 나눌 수는 없었지만, 짧은 시간 구술자가 예로 든 관람 환경과 예시로 든 영화는 흥미롭다. 학생 입장에서 개봉관은커녕 2번관도 가기 힘들어 3번관 이하의 극장에서 영화를 관람했는데, 이 영화들은 주로 서부영화였으며, 데뷔 후 이 영화들의 액션을 많이 참조했다는 내용이 그것인데, 이러한 구술은 외국영화가 배우의 디테일한 연기에까지 영향을 주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두 번째는 군중 신의 촬영 뒷이야기를 중심으로 하는 액션영화 촬영현장의 풍경이다. 액션영화의 특징 중 하나로 조직 대 조직의 대결을 들 수 있겠는데, 구술자는 장면에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동시에 카메라에 띄기 위해 노력하는 조·단역 배우들의 모습들을 다양한 예시를 통해 재현한다. 소품과 미술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조·단역들의 경우 어떤 방식으로 극 중 인물을 표현했는지가 구술을 통해 자세하게 드러난다. 1960~1970년대 한국영화 환경의 특성상 한정된 배우 풀로 여러 장르를 생산해야하는 현실 안에서 동일한 배우들이 장르영화에 어떻게 적응하고, 표현해내는가를 지엽적이나마 살펴볼 수 있는 구술이라 볼 수 있다. 세 번째는 1970년대 액션지도 방식이다. 구술자는 학창시절 권투와 가라테를 수련했고 영화계 입문 전 자칭 주먹 좀 쓰는 ‘개구쟁이’ 시절을 거쳤다.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현실의 싸움과 액션 연기의 차이를 구별하되, 연기에서 ‘리얼함’을 살리기 위해 구체적으로 어떻게 액션 연기를 구성하고 지도했는지를 설명한다. 1대1 액션 장면, 현장에서의 소도구 이용 등의 구체적 예에서 구술자의 경험이 어떤 방식으로 적용되었는지 자세하게 드러난다. 말하자면 실전의 경험을 열악한 영화제작 환경에서 어떻게 활용했는지를 알 수 있는 것인데, 이러한 액션지도는 즉석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감독과의 사전 협의 하에 액션 콘티를 작성할 만큼 면밀히 이루어졌다는 것이 흥미로운 점이다. 1) 이 부분은 『영화천국』Vol. 55에 실린 「구술로 만나는 영화인: 액션영화의 뒤편에서 뛰다」를 수정·보완했다.
박남옥 , 홍은원 , 최은희 의 뒤를 이어 네 번째로 한국 여자감독이 된 황혜미 는 1970년대 유일하게 활동했던 여성감독이었다. 홍일점 영화감독 자체로도 유명했지만, 더욱 그녀의 명성을 뒷받침한 것은 국내에서 유일하게 프랑스 소르본느에서 영화를 전공했다는 거의 정설처럼 회자되었던 소문이었다. 간혹 남편과 함께 미국 조지타운 대학을 졸업했다는 낭설도 심심치 않게 등장했다. 이후 다큐멘터리 < 아름다운 생존 >에서 프랑스에 잠시 가있었을 뿐 소르본느를 졸업하지도 않았고 조지타운 대학에 다니지 않았다고 스스로 밝혔지만, 활동 당시에 그녀는 내내 여류감독과 소르본느를 졸업한 재원이라는 수식어로 규정되었다. 황혜미는 1936년 만주에서 출생하였다 부친은 제3공화국 시절이었던 1963년 재무부 장관을 역임했던 황종률이며, 아마도 부친이 일본 규슈제국대학 졸업 후 만주국에서 관리로 재직하고 있을 때 태어난 것으로 보인다. 그후 이화여고를 거쳐 1959년 서울대 불문과를 졸업하였고, 1961년 미국에서 김동수와 결혼했다. 졸업 후 프랑스에서 잠시 학교를 다녔지만 바로 미국으로 가느라고 등록만 해놓고 수업을 거의 불참했고 대신 하루에 3편을 볼 정도로 열성적으로 영화관에 다녔다고 술회한다. 1) 인터뷰에서는 그 당시 < 400번의 구타(Les 400 Coups) >(1959) 나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영화를 본 추억을 생생히 기억해내고 있다. 황혜미는 어릴 때부터 이미 영화광이었는데 중학교 2-3학년이었던 부산 피난시절부터 미성년자 입장불가의 극장을 출입하는데 능숙했었다고 한다. 이 시기 기억나는 영화로 < 무도회의 수첩(Un Carnet de Bal) >(1937)이나 < 망향(Pepe Le Moko) (>(1937)을 몰래 보았다고 이야기하는데 이때부터 유럽영화에 깊이 심취해있었으며 프랑스 유학시절에는 유럽 모더니즘 영화, 특히 프랑스 누벨바그 영화에 깊은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황혜미는 인터뷰에서 스스로 전후 세대로 규정하면서 성장과정에서 카뮈나 사르트르에 영향받았고 헤르만 헤세 소설을 즐겨 읽었다고 언급하면서 특히 영화제작에 대해서는 푸도프킨의 서적을 중요하게 참조했음을 밝혔다. 2) 첫 경험 미국에서 돌아와 김승옥 의 소설을 읽고 매료되었던 황혜미는 남편 김동수 의 도움으로 김승옥의 단편 「무진기행」을 영화화하게 되었다. 김수용 감독의 회고에 따르면 < 안개 >(1967)의 감독을 맡기 위해서 소공동의 사무실에서 ‘미국유학에서 돌아온 엘리트’였던 제작자 김동수와 황혜미 커플을 만났고 그 자리에는 당시 신문에 열정적으로 글을 쓰던 이어령도 참석하고 있었다. 3) 태창흥업의 대명제작을 하는 프로듀서로 황혜미는 <안개>를 통해 처음으로 영화계에 입문하였고, 그녀의 표현처럼 ‘처음이라서 재미있으니까 일일이’ ‘로케이션 헌팅까지 쫓아다니’면서 완성한 영화였다. 상업성을 염두에 두지 않고 ‘아방가르드’한 기획을 밀어붙여 제작했지만 이 영화는 흥행에서도 성공을 하였고 젊은 여성 기획자로서 황혜미의 이름을 각인시킨 작품이 되었다. 그러나 문예영화 <안개>의 성공으로 획득한 2편의 외화수입권은 영화계의 초짜였던 황혜미에게 돌아가지 않았다. 4) 차기작으로 < 감자 >(1968)를 선택했고 김승옥에게 감독을 맡겼다. 지긋지긋할 정도로 검열에 시달렸던 <감자>는 원래 기획의도와 멀어지면서 흥행에도 실패하였다. 이러한 힘든 경험을 겪은 후 김동수와 황혜미 부부는 1970년 마벨코리아라는 영화사를 세우고 첫 작품으로 황혜미 각본, 감독의 < 첫경험 >(1970)을 제작하기로 하였다. 같은 해 말 영화사는 보한산업주식회사로 명칭을 변경하였고 <첫경험>은 1970년 11월 27일 국도극장에서 개봉하였다. 평단의 호평과 더불어 『영화예술』에서 선정한 1970년 베스트 영화 4위에 올랐다. 그해 백상예술대상에서 황혜미는 신인상을 받았고 흥행 역시 무난히 성공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들을 황혜미는 실감하지 못했는데 영화가 개봉하기 전 “우리영화의 시장조사 및 수출-입 문제에 관한 현지답사”를 위해서 세계일주 여행을 떠났기 때문이다. 황혜미에게 이러한 성공을 안겨준 영화 <첫경험>은 중년을 바라보는 부부인 기준( 남궁원 )과 지숙( 김지미 )은 권태로운 일상을 다룬다. 5) 부산으로 출장을 가는 비행기에서 기준은 대학자퇴생 인애( 윤정희 )와 만나게 되고 밀회를 하는 사이로 발전한다. 이를 눈치 챈 지숙은 방황하게 되고 탈선을 시도한다. 그러자 인애가 기준과의 지난날을 소중한 첫경험으로 남겨두고 떠남으로써 그들의 가정은 파탄직전에서 구출된다. 당시 유행하던 불륜을 소재로 한 이 영화는 이야기 자체만 본다면 평범할 수 있으나 권태로운 부부의 일상 그리고 탈선 및 좌절을 섬세하게 그려낸 영상미가 뛰어난 영화였다. 슬픈 꽃잎이 질 때 이후로 황혜미는 < 슬픈 꽃잎이 질 때 >(1971)와 < 관계 >(1972)를 연이어 제작, 각본, 감독한다. 황혜미가 사업차 3개월의 외유 끝에 돌아와서 집필한 작품인 <슬픈 꽃잎이 질 때>는 고아인 서은희( 문희 )가 수녀님의 소개로 부호인 엄상훈(남궁원)의 집에 가정교사로 들어가면서 시작한다. 상훈은 이름난 바람둥이 홀아비이고 방치 속에 자라는 두 자녀는 개구쟁이들이다. 은희는 지속적으로 아이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결국 아이들과 친해진다. 이 과정에서 점차 상훈과 사랑에 빠지게 되는데 이를 시기한 전부인의 가족이 벌인 흉계에 휘말린다. 결국 상훈과 은희는 결혼하여 신혼여행을 가게 되지만 돌아오는 길에 사고로 은희는 죽게 된다. 이 영화의 이야기 전개 및 등장인물들의 구도는 < 제인에어 (Jane Eyre)>(1944)와 < 사운드 오브 뮤직 (The Sound of Music)>(1965)의 구조를 차용한 듯한 분위기를 풍긴다. 이 영화는 혹평을 받았고 흥행도 크게 실패하였다. 스스로도 인터뷰에서 작품성보다는 상업성에 치중한 기획이었는데도 불구하고 흥행에 실패하였다고 평가한다. 관계 세 번째 작품인 <관계>는 뉴아메리칸 시네마의 대표작 < 졸업(The Graduate) >(1967)을 패러디한 것인데 원래의 설정에서 남녀를 변경한 영화이다. 홀어머니( 김신재 )와 살고있는 인애( 박지영 )은 근무하는 회사의 전무 기택( 남궁원 )의 유혹에 몸을 버리게 되자 직장을 그만두고 이를 알게된 어머니는 충격으로 숨진다. 여행사에 취직한 인애는 손님인 준호( 신영일 )의 적극적 구애로 사귀게 되고 준호의 부모님과 만나게 된다. 그 자리에서 준호의 아버지가 기택임을 알게되고 결혼을 피하게 된다. 힘들어하는 준호에게 기택은 모든 것을 고백한다. 인애는 자살을 기도하나 준호에게 발견되어 병원으로 이송된다. 너무 힘들어하는 준호를 보던 준호의 어머니( 문정숙 )은 사실 준호가 기택의 자식이 아님을 밝힌다. 진실을 알게 된 기택은 깊은 참회에 괴로워하고 인애는 병실에서 나와 친구의 배웅을 받으며 고속버스를 타고 떠나지만 준호는 차를 몰고 와서 버스를 막아서며 인애와 재회한다. 이 영화 역시 흥행에는 실패했다. 성역할을 변경시켰을 때 그 이야기는 당시 흔한 불륜의 소재 이상이 아니었다는 점과 결국 친자식이 아니기 때문에 준호와 인애가 맺어질 수 있다는 결론은 한 신문평의 언급처럼 “<졸업>의 경우 기존윤리를 정면에서 초극하려했던데 비하면 <관계>는 끝내 한국적인 차원을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를 보여주었다. 6) 현재 황혜미가 감독한 이 세 영화 모두 필름이 남아있지 않다. 그녀의 작품은 감각적인 영상미로 호평을 받았기 때문에 이 부재는 안타깝다. 이 한계는 황혜미의 문제의식과 그 영화들이 가지는 당대의 의미를 가늠하는 것을 힘들게 한다. 그러나 본인의 인터뷰와 당대의 평가들 및 관련 자료를 통해 조망해볼 때 우리는 당시 남성감독들이 인식하지 못했던 감성 혹은 윤리적 길항을 읽어낼 수 있다. 우선 황혜미가 감독으로 활발하게 작업했던 1970년대 초반을 다시금 고찰할 필요가 있다. <첫경험>이 상영된 해인 1970년을 평가하면서 이영일 은 해당년도 영화계에서 두 가지 점에 주목하고자 했다. 하나는 멜로드라마의 트렌드로 떠오른 < 미워도 다시한번 >류의 범람이었고 다른 하나는 성을 주제로 한 영화가 확연한 흐름으로 자리잡은 것이었다. 7) <미워도 다시 한번> 시리즈는 1,2,3편 모두 흥행에 성공하면서 1970년대 초반 멜로드라마의 주류서사가 되었는데, 그 내부에는 항상 ‘한 남자의 비틀거리는 행위 때문에 그의 아내와 다른 하나의 동거여인 사이에 ...끝없는 자기희생’을 반복하는 여성들이 있었다. 8) 반면 이러한 보수적 이데올로기 반대편에는 당시로선 파격적인 성을 그린 성 주제 영화들이 존재했다. 이영일은 < 일요일은 참으세요(Never On Sunday) >(1960) 나 < 페드라(Phaedra) >(1962) 처럼 파격적인 윤리를 보여주는 것은 아니지만, 오랫동안 성을 타부시했던 한국의 상황에서 성을 주제로 한 이 영화들은 그 자체로 하나의 반체제적인 의미를 갖게 될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9) 황혜미의 <첫경험>은 위의 두 경향이 기묘하게 길항하고 있다. 당시 유행하는 불륜의 소재를 차용하지만, 불륜으로 인한 신파적 희생은 부재하다. 더구나 불륜 자체는 등장인물들에게 기성의 사회가 가지는 틀에 박힌 질서나 윤리의식을 벗어나는 상황으로 변주된다. 이처럼 불륜이 무겁지 않게 그려지고 있는 것은 성에 대한 감각이 다르기 때문이다. 비행기에서 우연히 만난 중년의 남성과 젊은 여성은 별다른 윤리적 고민없이 자연스럽게 섹스를 하게된다. 그들이 느끼는 탈선의 근거는 징후적으로 소품이나 이미지를 통해 보여지거나 간결한 플래시백으로 제시된다. 설명이 결여된 채 이미지의 단상들을 통해 관객은 그들이 벗어나고자 하는 일상의 권태를 감지하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많은 평론가들이 호평하였던 영화의 도입부인 기준과 지숙의 섹스 장면은 “차가운 금속성의 탁상시계 소리를 에펙트로 넣고 그 속에서 부부의 냉각된 섹스”를 보여줌으로써 “부부의 성 자체가 이미 단순한 생활 속의 반복으로 리듬같은 일상으로 변했음”을 드러낸다. 10) 인애 역시 대학이라는 제도 자체에서 막 벗어난 젊은 여성으로 둘은 부산이라는 비일상적 휴양지에서 해방 혹은 일상의 틀에서 벗어났다는 기분에 쉽게 섹스를 할 수 있었다. <미워도 다시 한번>류의 영화들에서 섹스와 불륜은 엄중한 도덕적 문제였다. 성은 대부분 여성들에게 결혼을 전제로 하는 약속된 행위여야만 했고, 남성의 기만에 속아서 순결을 지키지못한 여성들은 결혼이라는 제도에 진입하지 못하고 나락으로 떨어졌다. 그러나 <첫경험>에서 섹스는 그러한 과정을 겪지 않는다. 서울로 돌아와서도 둘의 밀회는 계속되고 눈치를 챈 지숙은 배반감에 탈선을 시도한다. 기준은 아들과 아내가 있는 가정이 점차 무너지는 것에 대해 불편함을 느낀다. 인애 역시 유부남이라는 현실과 마주했을 때 그 무게감이 점점 힘들어진다. 지숙의 탈선시도는 아슬아슬하게 멈추게 되고 인애는 담담하게 기준을 다시 가정으로 돌아가게 한다. 벼랑 끝에서 다시 일상은 봉합된다. 게다가 ‘첫경험’을 한 인애가 파멸을 한다는 암시도 없다. 영화는 치정이나 불륜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감정적 격정을 최대한 절제하고 일상성을 강조하며 영상언어를 통해 그 감성들을 유려하게 그려나간다. 공허함을 느낀 지숙이 아들이 동물원을 방문하는 장면에서 거대한 코끼리와 대조되는 지숙의 왜소함을 이미지화함으로 남편으로부터 버림받은 여성이 느끼는 위축감을 드러내거나 기준과 인애의 이별 장면에서 문을 사이에 두고 외부에 있는 남성과 내부의 젊은이들을 배경으로 서 있는 젊은 여성을 보여줌으로써 각각 속해있는 세대 차이를 강조하는 장면 등 11) 은 어떠한 발화적인 설명 없이 결국 각자의 벗어나려했던 기존의 틀로 돌아가는 행위의 당위성을 납득시켜준다. 12) <첫경험>의 불륜을 보는 여성적 시선이나 <관계>가 드러내는 한 여성을 둘러싼 부자관계의 비윤리성은 한국사회의 기본 윤리에 대한 저항적 도전이었다. 그러나 황혜미는 결국 가정으로 돌아가게 하거나 친아들이 아니었다는 안도할만한 결론을 내면서 그 저항의 칼끝을 무디게 만들었다. 이 무뎌지는 저항의 감각이 그녀 본래의 윤리의식의 한계인지 상업성의 압박 때문인지는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적어도 상업적 압박이 아니었다면 황혜미는 더 강하게 도전적인 시도를 했을 것으로 보인다. <안개>를 제작하는 도중이었던 1967년 9월, 그녀는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실험적인 시도는 하고 싶지만 당분간은 “밑지는 일이 싫어 월리엄 와일러같은 분위기의 영화를 만들” 것이라고 토로한 적이 있다. 13) 아이러니 하게도 <안개>는 황혜미가 관여한 영화 중 가장 예술적이고 전위적인 작품이 되었을 뿐 아니라 흥행에도 성공을 했다. 그러나 <첫경험>과 이후 작품을 통해 작가적 의식과 상업성은 점차 균형을 잃었다. ‘월리엄 와일러’같은 분위기의 상업영화들을 만들고자 하는 의도와 그녀가 가진 성과 결혼에 대한 시대감각, 그리고 1970년대라는 현실상황은 매끄럽게 조화되지 못했다. 황혜미는 세 편을 끝으로 영화활동을 접었으며 몸담고 있던 보한산업주식회사 역시 1973년 이후에는 제작을 중단했다. 1) 「영화제작계의 홍일점 황혜미씨」, 경향신문, 1967.9.2.8면. 2) 이 글에서 주가 없는 황혜미의 소회나 발언 및 인용문은 모두 다큐멘터리 <아름다운 생존-여성영화인이 말하는 영화> (2001)에서 채록한 것이다. 3) 김수용, 『나의 사랑 시네마』, 시네21, 2005. 105쪽. 여타 자료나 당시를 회고하는 글들을 참조하면 이어령은 시나리오의 감수를 맡았던 것으로 보인다. 4) 황혜미, 「연패 끝에 <첫경험>의 메가폰」, 『여성동아』 1970년 12월호, 179쪽. 5) 기준이라는 이름은 <안개>의 남주인공 이름과 동일하다. 그 연결점을 의도적으로 설졍한 것으로 보인다. 6) 「타협으로 끝난 애정모럴의 갈등- <관계>」, 동아일보 1972.4.25.8면. 7) 이영일, 「마비와 혼미의 시대」, 『영화예술』 1970년 12월호, 32-36쪽. 8) 이영일, 위의 글, 34쪽. 9) 이영일, 위의 글, 35쪽. 10) 이서림, 「참신한 영화감각의 가작」, 『영화예술』. 1971년 1월호, 72쪽. 11) 「<첫경험>, 처녀의 불장난을 영상화」, 동아일보, 1970.11.28. 5면. 12) 이러한 서사구조와 영상미의 성취는 당시 프랑스 영화 <남과 여>(Un Homme Et Une Femme, 1966)와 <파리의 정사>(Vivre Pour Vivre, 1967)의 표절이 아닌가하는 의혹을 사기도 했다. 13) 「영화제작계의 홍일점 황혜미씨」, 경향신문, 1967.9.2. 8면. 황혜미 감독
한 남자( 신성일 )가 건물의 지붕을 서성이다 창문을 통해 건물 안으로 들어온다. 고요하게 텅 빈 건물 안에서 남자는 금고를 찾아 그 속의 서류를 꺼내어 살핀다. 그때 총을 든 또 다른 남자가 계단을 올라 그가 있는 곳으로 오고 있다. 둘은 결국 마주치고 비밀 서류가 든 가방을 차지하기 위한 추격과 결투가 시작된다. 추격과 결투의 장소는 계단이다. 그들은 계단에서 굴러떨어지고 붙잡히고 뒤엉키며 싸운다. 마침내 남자가 계단의 끝에서 문을 열지만, 불행히도 셔터가 내려져 있고, 쓰러져있던 또 다른 남자가 다시 그의 발목을 잡는다. 문과 셔터 사이, 그 비좁은 공간에서 둘의 질긴 몸싸움이 이어지고, 먼저 밖으로 나오는 데 성공한 남자(신성일)가 셔터를 내려 상대의 목을 짓누른다. 그의 목 아래에는 비밀 서류가 담긴 가방이 있고 그의 숨은 이내 끊어진다. 그런데 적을 제거한 남자는 의아하게도 가방을 그대로 둔 채 현장을 떠나버린다. 비로소 영화의 타이틀이 셔터 위로 뜬다. 영화가 시작한 지 13분이 지나가고 있다. 어딘지 기하학적으로 왜곡된 것처럼 보이는 공간, 인물들을 포착하는 카메라의 이상한 앵글, 대사 없이 진행되는 인물들의 집요한 행로, 화려한 액션이기보다는 피로하고 무거운 노동으로 느껴지는 대결의 공기, 대결이 벌어지는 계단 장면의 끈질긴 하강의 리듬, 그리고 목적의 완수를 눈앞에 두고 목표물을 버려버리는 남자의 선택. 처음 이 영화를 마주한 날, 나는 첫 시퀀스를 경험한 후, 마치 한 편의 영화 전체를 보고 난 것처럼 얼이 빠졌다. 서사와 관련된 어떠한 정보나 대사가 부재한 상태에서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텅 빈 공간에 던져진 육체적 충돌과 동선만으로 이토록 괴이한 정념을 자아내는 영화의 정체는 대체 무엇일까. < 원점 >의 첫 시퀀스는 그렇게 느리게 휘몰아쳤다. 그 시퀀스를 보고 나니, 이후의 전개가 어떠하건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시퀀스가 도입부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어 보이는 거리의 여자에게로 이행하고, 거기 도시의 밤공기가 한없이 쓸쓸하고 퇴폐적으로 젖어들며 그 자체로 또 하나의 세계를 이룰 때, 나는 이 영화가 과감하게 뚫고 나아갈 미지의 길들에 이미 홀린 상태였던 것 같다. 역시 그러했다. 쇠락한 어두운 건물에서 시작했던 영화는, 도시의 밤거리를 지나 놀랍게도 설악산의 겨울 산장으로 이동한다. 임무를 완수하지 못한 산업 스파이와 그를 죽이려는 자들에게 고용된 창녀가 가짜 부부행세를 하며 자연 속에서 중산층 부르주아 부부들 사이에 있다. 그곳은 도시와 대비되는 평화로운 자연이 아니라, 도시의 억압된 것들이 뒤틀려 요란하게 아우성치는 시공간처럼 보인다. 위태롭고 불길하면서도 향락적이다. 사람들 사이의 의심과 비밀과 위선, 여기 노골적으로 일렁이는 천박하고 성적인 공기, 설산의 위용과 절벽의 아찔함이 뒤섞이는 가운데, 불균질한 욕망과 죽음의 그림자가 서로 각축을 벌이며 기묘하게 생동하는 것이다. 그 세계의 끝에 우리가 예상할 수 있는 사실이라고는 삶의 벼랑 끝에서 남자와 여자가 사랑에 빠진다는 것, 그 사랑이 비극으로 끝나리라는 점 정도다. 실제로 그러했다. 그런데 그 사실의 통속성을 압도하고도 남을만한 장면이 설악산에서의 마지막 시간에 등장한다. 남자와 여자는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설산을 가로지르며 도망치고 있는 중이다. 그때, 그들 앞에 산 위로 연결되는 가파른 계단이 나타나는데, 계단의 위와 아래 양쪽에는 남자를 노리는 사내들이 이미 서 있다. 피할 곳이 없다는 사실을 직감한 남자는 바지 벨트를 풀러 계단 손잡이에 걸고 손에 낀다. 계단을 오르내리며 벌이는 탐색과 벨트를 의지한 미끄러짐과 도약, 그리고 지쳐버린 맨몸만으로 성립된 마지막 액션 장면의 호흡은 건물에서의 첫 시퀀스를 떠오르게 한다. 계단에서 상대의 공격을 맨몸으로 질기게 견디는 남자의 시간을 카메라가 함께 버티고 있다는 인상이 반복되면서도 지독한 무력감의 공기를 어쩌지 못하는 것이다. 계단이라는 수직적 세계의 특성상 카메라는 남자의 싸움을 수평적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거나 아래에서 위를 올려다볼 수밖에 없다. 카메라가 남자의 싸움에 수평적으로 가까이 닿을 수 없다는 사실, 그러니까 이 싸움의 치열한 현재성은 남자 혼자만의 것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 결국 이 수직의 풍경에는 어쩔 수 없이 추락에 대한 무기력한 관망이 예견되어 있다는 사실이 (싸움의 승패와 상관없이) 이상하게도 서글픔을 안기는 것이다. 그 수직의 풍경 안에서 남자는 자신에게 돌진하는 육체들로부터 끝내 버텼으나, 어이없게도 저 멀리 아래에서 누군가가 쏜 총을 피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영화는 다시 도시의 밤으로 돌아온다. 남자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지만, 그가 자신을 싫어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안다고 읊조리던 여자는 도입부에서 본 그 황폐한 어둠의 거리를 다시 서성인다. 설악산에서의 죽음이라는 극적인 사건을 통과했으나 도시의 그 무엇도 변한 것이 없다. 그저 한 남자가 공허하게 세계에서 사라졌을 뿐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에서 우리가 본 저 많은 사연과 미련들, 저 대담하고 절박한 동선과 충돌, 불쑥불쑥 고개를 들던 생의 감각은 대체 무엇이었단 말인가. 원점. 이토록 뼈저린 영화의 제목을 나는 알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