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영화인 구술인터뷰] 변인식
- 제작년도
- 1999
- 출연
- 변인식
유신체제기 | 1975~1979년 1970년대 중후반 한국영화계 유신헌법에 근거해 1974년부터 발동된 긴급조치와 1975년 유신헌법 찬반 국민투표의 시행은 한국 사회를 더욱 경직되게 만들었다. 긴급조치는 대통령이 국회 동의 없이 국민의 기본권을 정지시키는 행위다. 특히 1975년 5월 13일 시행된 긴급조치 9호는 유신헌법에 반대하는 집회·시위 그리고 언론이나 표현물을 일절 금지했다. 물론 영화 검열도 강화됐다. 예술문화윤리위원회의 영화시나리오 사전심의에서, 1974년 41% 수준이던 수정·반려 비율이 1975년에는 80%에 이르게 된다. 한국영화산업의 수치도 불황을 증명한다. 한국영화 제작/상영 편수는 1975년 94/115편, 1976년 134/106편, 1977년 101/66편, 1978년 117/69편이었고, 외화 상영 편수는 1975년 70편, 1976년 71편, 1977년 47편, 1978년 41편, 1979년 68편이었다. 편수로는 한국영화와 외화가 엇비슷한 수준이었지만, 관람객도 상영 일수도 외화 쪽이 2배 이상 많았다(서울개봉관 기준). 명백하게 외화 중심으로 재편된 것이다. 이 시기 제작사는 외화를 수입하기 위해 국산영화를 만들었다. 1975년을 기준으로 보면 서울 소재 극장에서 일주일 이상 상영한 6편을 기준으로 수입권 1편을 부여하는 식이었다. 또 분기별로 5편을 뽑는 우수영화에는 각 1편의 수입쿼터가 주어졌다. 1976년부터는 정의조차 모호한 ‘우수영화’ 제작이 아예 의무화되었고, ‘국책영화’를 제작할 경우 수입쿼터를 주는 조항도 추가되었다. 제작사들은 일단 저예산 제작으로 작품 편수를 채우는 데 치중했으므로, 작품의 질이 떨어진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액션 장르를 중심으로 호스티스·에로영화가 판을 쳤다. < 바보들의 행진 >은 1975년 1월 말까지 진행된 시나리오 사전심의에서 곳곳에 개작과 삭제 통보를 받았고, 그 시나리오를 기반으로 2월부터 2개월간 촬영을 마친 후 4월 초 다시 본편 심의에 들어갔다. 그리고 15군데의 삭제와 단축 통지를 받았다. 영화는 4월 31일 국도극장에서 개봉, 49일 동안 17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했다. 검열에 시달린 감독으로서는 예상조차 못한 히트였다. 그리고 당국은 이 작품에 ‘우수영화’라는 타이틀을 달아주었다. 국가의 폭력과 암울한 사회 분위기를 온몸으로 새긴 영화를 통해 당대 관객들은 위안과 희망을 얻었다는 아이러니, 그 중심에 하길종 감독이 있었다. 뉴웨이브의 기수 하길종 1941년 4월 부산에서 태어난 하길종 은 1959년 서울대 불문과에 입학했고, 이듬해 데모대의 최전선에서 4·19 혁명을 경험했다. 문학 활동을 했지만 후배 김승옥 등에 비해 주목할 만한 것은 아니었고, 졸업 후 항공사에 입사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는 계기를 만든다. 1965년 UCLA 영화과 대학원에 입학해 정규 영화교육을 받았고 M.A(이론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사실 영화계 데뷔 전 하길종의 일부 이력에 대해서는 신화화된 점이 있음이 밝혀지기도 했지만(안재석, 「하길종 감독 바로보기」, 『영화연구』, 2009), 그의 미국 체류가 이후 영화세계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사실이다. 1960년대 미국은 저항운동과 청년 문화가 주도한 변혁의 시기였고, 특히 그가 미국에 도착한 1960년대 중반은 미국영화의 뉴웨이브 즉 ‘뉴 아메리칸 시네마’가 태동한 때이기도 했다. 정치적으로 또 영화언어적으로 청년 하길종의 이성과 감성의 각 회로는 쉴 틈조차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문화적 자산에도 불구하고, 1970년 한국에 돌아온 하길종의 연출 활동은 처음부터 순탄치 않았다. 김지하와 야심만만하게 개발한 시나리오 「태안전쟁」은 제작에 들어가지 못했고, 이효석 원작을 동생 하명중 이 각색한 < 화분 >의 촬영도 예산 부족으로 중단되었다. 1972년 데뷔작 <화분>을 완성했지만, 영화가 내포한 정치성으로 대중적인 호응에 이르지 못했다. 이후 시나리오들 역시 대중성 부족과 검열의 문제로 좌초되었다. 미학적 실험이 이어진 1974년 < 수절 > 역시 흥행에서 좋은 결과를 낳지 못했다. 하지만 1975년 세 번째 연출작 < 바보들의 행진 >은 흥행과 비평 양면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청년들의 감수성을 읽어내는 데 탁월했던 당대 최고의 인기 작가 최인호 의 원작이었고 그가 직접 시나리오를 쓰기도 했다. 단성사 시사가 끝난 후 김수용 감독이 영화의 대중적 감각을 칭찬하자 하길종이 크게 화를 냈다는 일화는 그래서 유명하다. 검열로 인해 117분의 영화가 99분가량의 작품이 되었지만, 청년 관객들은 열광했다. 물론 감독 하길종의 연출력이 빛을 발한 결과였지만, 그는 이 영화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지금도 한국영화 10선으로 선정될 만큼 높게 평가받는 작품이고 하길종의 대표작임에 분명하지만, 그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자신의 대표작으로 <화분>을 뽑았다. 영화가 성공한 그해 하길종은 ‘영상시대’ 동인이 되었고, 서울예전 영화과 교수로 부임하게 된다. 이후 그는 < 여자를 찾습니다 >(1976)와 < 한네의 승천 >(1977, 미개봉)으로 다시 주춤했고, < 별들의 고향(속) >(1978, 32만), < 병태와 영자 >(1979, 18만)로 흥행에 성공했다. 상업적으로 성공한 세 작품 모두 최인호의 원작과 오리지널 시나리오라는 점은, 서구의 ‘뉴웨이브’ 영화언어라는 이상과 통속적 대중문화라는 현실 사이에 놓인 하길종의 복잡한 고민을 짐작하게 만든다. 1979년 2월 그는 38세의 젊은 나이로 타계했다. 단 7편의 극영화를 남기고 요절한 하길종 감독 빛나는 감각 그리고 검열의 흔적 사운드 없이 대학생들이 팬티만 입고 연병장을 행진하는 장면으로 갑갑한 병영 사회임을 암시하며 시작하는 < 바보들의 행진 >은 검열과의 고투를 텍스트 곳곳에 노정하고 있는 영화다.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102분 버전의 영화(블루레이 출시본)는 당시 개봉 때보다 2분 29초 더 살아있어 그나마 다행이지만, 네거티브(원본) 필름 자체에서 삭제된 15분 정도의 분량은 심의대본을 통해서만 상상해볼 수 있다. 병태( 윤문섭 )와 영철( 하재영 )이 참가한 입대 신체검사 장면이 끝난 후, 영화는 대학 캠퍼스로 자리를 옮겨 철학과 학생들이 인근 여대 불문과 학생들과의 미팅을 계획하는 장면을 담는다. 목욕탕에서 광을 낸 병태와 영철은 미팅 장소로 향하다 경찰의 장발 단속에 걸린다. 이 에피소드는 시대상을 반영하면서도 새로운 영화 화법을 고민하고 완성시킨 하길종의 감각이 제대로 드러나는 장면이다. 경찰과 마주친 순간 병태와 영철이 도망가기 시작하면 송창식의 ‘왜 불러’가 흘러나오고, 가사와 이미지가 맞아떨어지는 뮤직비디오 같은 화면이 계속된다. 촬영된 화면에는 구경하는 인파가 그대로 등장하지만 경찰과 장발 대학생들의 추격전이라 전혀 어색하지 않다. 결국 둘은 경찰서로 잡혀가고, 경찰은 미팅이 있다는 둘에게 “흔해빠진 게 대학생인데 너희들은 혼이 나야 해, 너희들은 괴질이야”라고 나무란다. 이 장면의 아이러니는 경찰조차 장발이라는 점이다. “순경의 머리 긴 장면 클로즈업된 곳 단축”이라고 지시한 심의서류 문구에서도 볼 수 있듯이, 당연히 검열 과정에서도 문제가 되었다. 하지만 현재 102분 버전에는 살아있는 덕분에, 정부 권력에 대한 하길종 의 조롱과 야유를 읽어낼 수 있다. 둘은 경찰이 한눈판 틈을 타 경찰서에서 도망가고, 경찰이 “야 임마, 학생” 하고 둘을 부르자 “왜 불러, 돌아서서 가는 사람 왜 불러”라는 가사가 기다렸다는 듯 흘러나온다. 이후 영화는 대학생들이 만들어내는 경쾌한 분위기와 암울한 정서를 오가며 ‘파편적’으로 진행된다. 그 핵심적인 이유는 예술문화윤리위원회(예륜)의 심의 사항을 반영한 117분의 텍스트에서 또 20분 이상 잘라냈기 때문일 것이다. 하길종은 검열 당국의 요구 사항을 반영한 영화를 어떻게든 살려내기 위해 신을 흩트리고 다시 배치하는 과정을 수없이 진행했을 것으로 보인다. 초입의 ‘왜 불러’ 시퀀스가 보여주는 영화적 감각이, 전체적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후반부로 가면서 감독은 검열의 흔적을 그대로 노출하는 방식을 택함으로써 불균질한 텍스트로 남는 것을 선택한다. 특히 과 대항 술마시기 대회 이후 급격히 무너지는 리듬은 프랑스 누벨바그식의 형식 실험을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다 포기한 채 단순히 나열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이유다. 심의대본에서 영화로 옮겨지며 크게 바뀐 장면 중 하나는 학생들의 시위로 휴강하는 신이다. 대본상으로는 학생들의 시위가 묘사되고(물론 이는 유신 반대가 아니라 일본에 대한 시위로 표현된다), 교수는 참가할 사람은 나가라고 말한다. 결국 교수는 휴강하겠다며 강의실을 떠나고, 칠판을 지우던 병태는 플라톤의 ‘이상국가’에서 ‘상국가’의 획을 지우고 덧붙여 ‘사구라’로 바꾼다. 원래의 연출 의도는 학생들의 시위로 정상적인 수업이 불가능한 캠퍼스 풍경과 강의실에 홀로 앉아 고민에 빠진 병태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완성된 영화에는 시위 장면을 모두 연고전으로 추정되는 여러 운동 경기의 실사 영상으로 바꿨다. 당국의 검열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통해 감독이 더 진전한 부분도 있다. 최종 대본(녹음대본)에는 아예 글자를 고친다고만 지시하며 한발 물러나 있지만, 사구라에서 ‘사쿠라’로 한 획을 더 쓰려고 하는 순간 커트하는 것이다. 이상국가에서 바뀐 사쿠라는 일본어로 벚꽃이기도 하지만 사기꾼, 야바위꾼, 한통속 같은 의미도 있다. 한국에서는 가짜라는 의미로도 즐겨 쓴다. 과 대항 술마시기 대회 장면. 맨 아래 줄 왼쪽이 소설가 최인호, 오른쪽은 코미디언 이기동 한국의 ‘뉴 시네마’가 태어나다 < 바보들의 행진 >이 뉴 아메리칸 시네마를 비롯해 전 세계적 뉴웨이브의 흐름에 동참하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청년 문화를 직접적인 소재로 다루는 영화는 그들이 놓인 배경을 다큐적 질감으로 제시하고 또 거칠지만 인상적인 숏 배열을 보여준다. 과감하게 줌을 쓰는 장면들도 그렇다. ‘뉴 아메리칸 시네마’에서 기성곡을 영화음악으로 활용하며 뮤직비디오 신을 만든 것처럼, 이 영화 역시 송창식의 노래 ‘왜 불러’ ‘고래사냥’ ‘날이 갈수록’을 메인 테마곡으로 사용해 영화의 이미지를 넘어서는 인상적인 순간들을 만들어낸다. ‘날이 갈수록’은 영화가 엔딩을 준비하면서 흘러나온다. 무기한 휴강이 결정된 캠퍼스에서 “들립니까”라는 외침이 들리고 병태는 구역질을 하는 듯 괴로워 보인다. 그리고 예쁜 고래를 잡겠다고 버릇처럼 얘기하던 영철은 자전거를 타고 동해로 떠난다. ‘고래사냥’이 힘차게 울려 퍼지는 그 순간 영철은 자전거 페달을 밟고 절벽에서 뛰어내린다. 영화의 마지막 신은 한국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장면으로 뽑힌다. ‘그냥’ 입대를 선택한 병태는 빡빡 머리를 하고 입영열차에 타고 있고, 영자( 이영옥 )가 플랫폼으로 뛰어와 그를 찾아낸다. 열차가 출발하기 시작하자 차창 밖으로 몸을 내민 병태에게 영자가 키스하려 하고, 낭만적이게도 헌병이 그녀를 들어 키스를 도와준다. 심의대본에서 “입술을 맞추는 영자, 말리는 헌병”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렇게 영화는 당대의 청년들에게 위로를 건넨다. 한국영화의 뉴웨이브에서 가장 중요한 인자는 검열이었을지 모른다. 할리우드에서 작가주의 영화가 자본과 제작 현장의 소음을 뚫고 나온 것이라면 1970년대 한국영화의 작가주의는 당국의 가위질을 견디는 것까지 추가해야 했다. 하길종이 만들고 싶었던 ‘새로운 영화’는 당국의 집요한 검열로 파편화된 불균질한 텍스트가 되었고, 이는 당대 사회를 있는 그대로 반영한 결과이기도 했다. 한국의 ‘뉴 시네마’는 이렇게 탄생했다. 검열과 자본과 창작자가 빚어낸 한국영화사의 비극적인 순간들은 1980년대로 이어졌다. 영철 역의 하재영(왼쪽)과 영자 역의 이영옥(오른쪽) 침체의 연속 1970년대 후반 한국영화가 최소한의 품위를 지켜낸 것은, 1960년대 대표적인 감독들과 영상시대 동인 덕분이었다. 유현목 , 이만희 , 정진우 가 각각 < 장마 >(1979), < 삼포가는 길 >(1975), < 심봤다 >(1979) 등을 내놓으며 각자의 자리를 지켰고, 김호선 , 홍파 , 이원세 등 영상시대 동인들의 작품이 또 다른 축을 버텨냈다. 특히 영상시대 활동은 동인으로 참가한 평론가 변인식 의 평가처럼 비록 ‘바보들의 행진’으로 끝났지만, 1980년대 초반의 사회비판적 리얼리즘 영화, 더 나아가 ‘코리안 뉴웨이브’의 흐름을 만들어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979년 10월 26일 유신 정권이 무너졌지만 신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다시 정권을 장악했다. ‘서울의 봄’으로 상징되는 민주화의 열기에도 불구하고, 전두환은 5.18 민주화운동을 짓밟고 제5공화국을 출범시킨다. 신군부의 영화 정책은 유신 체제의 기조를 이으면서 반공안보영화의 제작을 추가했다. 당국의 요구대로 반공영화를 만들었지만, 반공영화가 아닌 반공영화가 등장한 것도 시대의 아이러니일 것이다. 1960년대와 1970년대를 장르영화로 연마한 임권택 의 구력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은 이야기한다. 하길종은 신화화된 감독이라고. 이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하길종은 그의 영화만으로도 충분히 평가받을 만한 감독이기에 이 말은 틀렸고, (그의 영화가 아니라) 하길종을 둘러싼 다양한 이야기들이 양산되면서 신화화 되었다는 점에서 이 말은 맞다. 문제는 후자에 있다. 하길종은 신화화하기 ‘딱’ 좋은 인물이다. (‘딴따라’라며 영화계를 천시하던 시기에) 서울대라는 최고 학부를 졸업했고, (누구도 제대로 된 영화 공부를 하지 않던 그때) 미국으로 건너가 명문 UCLA에서 정식으로 영화를 공부했으며, (너무도 엄혹한 현대사의 중심에서) 그 어떤 영화인보다 치열하게 살아가다가, (참으로 안타깝게도) 지나치게 일찍 세상을 떠나 버렸다. 무엇보다 그에게는 엄청난 인적 네트워크가 있었다. ‘4.19세대’의 내로라하는 이들이, 특히 문화 분야의 이름난 이들이 하길종의 친구들이었다. 하길종 사후에도 신화화가 멈추지 않은 것은 이러한 여러 요인이 복잡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문제는 하길종을 둘러싼 신화가 굳건히 유지되면서 정작 그의 영화에 대한 평가는 갈수록 드물어졌다는 것이다. 이제 사람들은 하길종에 대해서는 이야기하면서 정작 그의 영화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하길종의 불행은 여기에 있다. 2013년 한국영상자료원이 발간한 『한국영화 100선』에서 영화학자와 평론가들에게 가장 많은 표를 받은 세 영화가 있었다. 김기영의 <하녀>(1960), 유현목의 <오발탄>(1961), 그리고 하길종의 <바보들의 행진>(1975) 등이 그것인데, 놀라운 것은 언제나 표현주의의 최고작으로 꼽히는 <하녀>, ‘한국적 리얼리즘’의 정수로 여겨지는 <오발탄>과 함께 <바보들의 행진>이 공동 1위를 차지했다는 것이다. 분명 예상치 못한 결과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충분히 납득할 수 있다. 이런 질문을 해보자. 한국영화사에서 <바보들의 행진>만큼 한 시대를 온전히 담고 있거나 그 시대를 대변하는 영화가 또 있을까? 엔딩 신인 용산역에서의 키스 장면은 두고두고 회자되는 명장면이다. 현실적인 시간으로 1970년대를 살아갔던 이들에게 이 장면은 결코 잊히지 않는 장면(일 것)이다. 유신의 억압에 맞서 고뇌하고 좌절하던 청춘이 선택한 것은 자살과 군 입대였다. 낭만주의자로 살고 싶었던 병태는 친구 영철이 자살하자 역설적이게도 입대를 한다. 현실을 벗어나려는 몸부림이 입대라는 것을 이해하기 어렵지만, 그 도피를 늦게 알게 된 영자가 달려와 기차에 매달린다. 둘의 그 슬픈 키스는 1970년대 청춘들의 슬픈 자화상이다. 이때 구슬프게 들려오는 “날이 갈수록”을 더 설명해 무엇하랴? 그들에게 “고래사냥”은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이상향이었다. 이런 생각을 해본다. 1970년대에 이 영화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얼마나 암울했을까? 역으로 말해, 이 영화가 존재함으로써 1970년대에도 한국영화가 존재했다고 할 수 있고, 사회문화적으로도 그 시대를 평가하고 회고할 수 있게 되었다. 자신 있게 말하지만, 하길종은 이 영화 한 편만으로도 충분히 평가 받아야 할 감독이다. (사진1) <바보들의 행진>(하길종, 1975) 엔딩 장면 ‘하길종 신화’에서 결코 빠질 수 없는 것이 김지하와의 인연이다. 중동고 졸업 앨범에는 하길종과 김지하가 나란히 등장한다. 훗날 함께 서울대 인문대에 합격해 ‘인문대 거지그룹’ 멤버가 되어 온갖 기행을 일삼은 두 사람은 그러나 가는 길이 달랐다. 4.19를 겪은 후 김지하는 민중 시인의 길을 걸었고 하길종은 본격적으로 영화를 공부했다. 가는 길이 달랐지만, 아니, 달랐기 때문에 둘은 꾸준히 교류할 수 있었다. 하길종이 귀국하자마자, 그리고 죽을 때까지 연출하려고 했던 영화가 <태인전쟁>이었던 것도 김지하와의 교류 덕분이다. 김지하가 공부하던 동학사상을 하길종은 영화로 만들어 세계 영화계에 한국영화를 알리고 싶었던 것이다. 미국에서 공부한 하길종이 오히려 한국적이면서 우주적인 소재를 발굴해 세계 영화계로 진출하려 노력한 것은 김지하와의 관계를 떼면 설명하기 쉽지 않다. (사진2) 중동고 졸업 앨범의 하길종 1964년, 하길종은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샌프란시스코 예술아카데미에서 공부하던 시절 촬영한 것으로 보이는 사진에는 젊고 자신만만한 그의 모습이 있다. 우리 나이로 스물넷의 이 청년은 금문교 앞에서 선글라스를 낀 채 잔뜩 멋을 부리고 앉아 있다. 하고 싶었던 공부를 하기 위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는 것이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일이었기에 그의 기대는 그만큼 컸을 것이다. 세계 최강국이면서 영화에 관한 한 독점적 지위를 누리고 있는 미국 아닌가. 미국에 온 지 일 년만에 마침내 UCLA 영화과 대학원에 입학했고, 2년 반만에 다큐멘터리에 관한 석사 논문을 써 졸업을 했다. 그 사이 전혜린의 동생, 전채린과 결혼해 득남했다. 이 시기 하길종은 친구 곽광수에게 편지를 쓰면서 한국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이야기를 꾸준히 했다. 결국 그가 설 곳은 한국이라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사진3) 유학 시절 금문교 앞에서 (사진4) 유학 시절 영화를 촬영하며 1969년, 하길종은 문제의 실험영화 <병사의 제전>(1969)을 만들었다. 영화사 MGM이 전미 영화과 학생 가운데 4명에게 지원하는 프로그램에 하길종이 선발되어 후원을 받은 것이다. 귀국 후 몇 번 상영되다가 필름이 분실된 것으로 알려진 이 영화는 오랜 세월이 지난 2009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하길종 회고전을 준비하면서 발굴되었지만, 안타깝게도 사운드는 멸실되어 이미지로만 관람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얼마나 고뇌 깊은 영화인지 충분히 인지할 수 있다. 하길종은 1960년대 중후반의 혼란스런 미국에서 받은 영향을 고스란히 실험적인 영화 형식 안에 담아냈다. 타나토스적 욕망과 에로스적 욕망, 문명과 인간, 삶과 죽음 등이 치열하게 교차하는 장면을 알레고리화해 예술적 가능성을 실험했다. 당시 한국영화계에서는 감히 시도조차 하지 못할 강한 실험성을 이 영화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데, 이런 실험을 귀국 후 충무로에서 시도할 수 있다고 생각한 그의 순진함이 차라리 안타깝게 느껴질 정도이다. (사진5) <병사의 제전>(1969)의 한 장면 1970년 가을, 6년의 유학을 마친 하길종은 마침내 귀국했다. <태인전쟁>을 영화화하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이효석의 원작 <화분>(1972)을 연출했다. 엘리트 코스를 밟은 하길종이 충무로에서 대중적인 영화를 제대로 만들 수 있을지 많은 이들이 걱정 어린 눈으로 지켜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숱한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완성한 영화는 흥행에 실패하고 비평에서도 표절 논쟁에 휘말리고 말았다. 한국영화의 황금기를 지나 서서히 긴 침체기로 접어드는 이 시기에 실험성이 강한 ‘정치적’ 영화를 당시 대중들은 수용하지 못했고, 보수적인 영화상과 비평계 역시 받아들이지 못했다. 1960년대 중후반에 등장한 모더니즘 계열의 영화, 가령 이만희의 <휴일>(1968), 김수용의 <안개>(1967), 이성구의 <장군의 수염>(1968) 등의 작품보다 더 강한 정치적 실험을 영화 속에 녹여내고 있으니 그럴 만도 했다. 파쇼적인 한국 사회에서, 당시 세계영화사적 흐름인 정치적 모더니즘으로 정면승부를 펼치려고 했으니 쉽지 않았을 것이다. 청와대로 상징되는 파란 집에서 벌어지는 인간의 추한 욕망을 전시하는 영화를 통해 하길종은 자신이 가야할 길을 적시했지만, 동시에 그 길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강하게 깨달아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분>이 한국영화사상 가장 인상적인 데뷔작 가운데 한 편이라는 사실에는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사진6) <화분>(하길종, 1972)의 한 장면 차기작 <수절>(1974)은 화천공사에서 제작했다. 이 말을 다르게 하면, 하길종의 영화 가운데 처음으로 충무로 주류 영화사에서 제작했고, 화천공사에서 연출한 4편 가운데 흥행에 실패한 단 하나의 영화라는 말이다. 특이하게도 이 영화는 하길종의 연출작 7편 가운데 원작이 없는 유일한 영화이기도 하다. <화분>의 실패 이후 하길종은 현대의 푸른 집을 재현하는 대신 오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갔음에도 그가 하고자 한 이야기는 여전했다. 특정 마을에서 벌어지는 처참한 군부 독재의 폭정. 특이하게도 <수절>은 공포영화의 컨벤션을 빌려와 억울하게 죽은 아내와 딸의 한을 남편이 복수하는 내용이지만, 1970년대 중반이라는, 대사 하나, 장면 하나 검열하던 상황에서 온전히 통과되기 어려운 내용이었다. 특히 강간 장면이 많이 잘려 나갔다. 검열에서 20분 정도 잘린 영화를 본 하길종은 “눈알과 입이 없고 팔다리가 하나씩 잘려나간 나의 모습”이라고 당시 심정을 적었다. 데뷔 후 연이어 흥행에 실패하고 검열에서도 상처를 받은 하길종. 미국에서 꿈꾸던 것과는 너무도 다른 상황이었다. (사진7) <수절>(하길종, 1974) 촬영 현장에서 영화는 산업이다. 이 말은 투자한 돈은 회수할 정도의 흥행을 기록해야 한다는 뜻이다. 뒤늦게 이 사실을 깨달은 하길종은 이번에는 흥행 영화를 만들었다. 당시 최고 인기를 누리던 소설가 최인호가 쓴 에피소드식 콩트 『바보들의 행진』을 하길종 식으로 각색해 완성한 것. 이후 최인호와 하길종은 깊은 인연을 맺어 <속 별들의 고향>(1978), <병태와 영자>(1979) 등을 함께 했는데, 이 영화들은 모두 흥행에 성공했다. 하길종은 최인호와 작업할 때 자신만의 각인은 약해졌지만 흥행에서는 성공을 거두는 아이러니를 겪어야 했다. <바보들의 행진>에서 하길종은 원작에 없는 영철이라는 캐릭터를 만들고, 보수화된 당시 사회를 상징하는 캐릭터와 장면들을 넣었으며, 송창식과 강근식의 음악을 적절히 사용하면서 1970년대 한국영화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아주머니들인 ‘고무신’ 관객에서 대학생인 ‘하이힐’ 관객으로 관객층이 변화하는 흐름을 만들어내었고, 다시 이것은 청년문화를 상징하는 영화로 명명되었다. 단언컨대 1970년대의 영화가 탄생했다. (사진8) <바보들의 행진>(하길종, 1975)을 개봉한 국도극장 풍경 <바보들의 행진>의 흥행 이후 하길종은 이장호, 김호선, 변인식 등과 함께 ‘영상시대’라는 동인을 만들었다. 이 동인을 통해 새로운 신인을 발굴하고 감독을 육성하면서 새로운 흐름, 즉 뉴 웨이브를 만들고자 했다. 그러나 영상시대 결성 이후 만든 <여자를 찾습니다>(1976)는 안타깝게도 다시 흥행에 실패하고 말았다. 냉정하게 말하면, 김주영의 원작은 재미있었지만 영화화할 만한 것은 아니었다. 하숙집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남녀 갈등을 그린 원작은 영화보다는 TV 드라마로 각색되었을 때 그 묘미가 살아날 것 같았지만, 하길종은 하재영을 다시 한 번 주연으로 삼아 청춘의 질주를 그려냈다. 눈에 띄는 감각적인 영상은 곳곳에 분명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영화가 살아날 수는 없는 것이다. 무엇보다 영화가 지향하는 지점이 시대와도 맞지 많았다. 도시의 타락과 대비되는 시골의 순수함으로 귀환한다는 내용은 뭔가 어색했고, <바보들의 행진>과도 한참이나 먼 거리에 있었다. (사진9) <여자를 찾습니다>(하길종, 1976)의 한 장면 <한네의 승천>(1977)은 여러모로 아쉬운 영화이다. 하길종이 가장 좋아하던 하명중 주연, 유영길 촬영의 마지막 영화였고, 영상시대의 마지막 작품이었다. 하길종과 영상시대는 침체하던 한국영화를 갱신해 세계영화계로 나아갈 방법을 모색했는데, 그 하나가 한국적이면서 우주적인 소재를 영화화하는 것이었다. 하길종의 말을 빌리면, “전생과 내세와 현세가 한 지평 속에서 공존하는 윤회사상을 2대에 걸친 부녀의 비극적인 사랑을 통하여 향토색 짙은 영상으로 그려 보려”고 한 것으로, 실제 설악산과 공주의 깊은 산에서 촬영한 영화에는 탈춤, 산신제, 남사당, 걸립 등이 등장한다. 윤회 사상을 그리기 위해 여배우 전영선이 1인 3역을 하고 흑백과 칼라가 교차되는 등 다양한 실험을 하기도 했다. 하길종의 의도대로, 한국의 비극이지만 한 여자를 두고 아버지와 아들이 대결하는 서구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연상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서울에서 개봉도 하지 못한 채 영화는 묻히고 말았다. (사진10) <한네의 승천>(하길종, 1977)의 포스터 다시 하길종은 흥행 영화로 눈을 돌렸다. 대마초 파동으로 감독 자격이 정지되었던 이장호를 대신해 그는 <속 별들의 고향>(1978)을 연출했다. 하길종에게 이것은 참으로 어려운 결정이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이장호의 뒤통수를 치는 행동이 될 수 있다. 게다가 만의 하나 흥행에 실패하면 그는 더 이상 설 자리가 없어진다. 배수지진. 이런 각오로 만든 <속 별들의 고향>은 1970년대에 만들어진 멜로드라마 가운데 손꼽을 만한 영화가 되었다. <별들의 고향>의 속편이지만 호스티스물이 아니라 낭만적이면서 병폐적인 사랑이야기를 아름답고 쓸쓸하게 재현한다. 어떻게 보면 아름다운 미장센으로 볼거리를 남겼고, 또 어떻게 보면 하길종이 좋아하던 서구 감독에게 오마주를 바치면서 지적 이야깃거리를 던졌으며, 한편으로는 병으로 죽어가는 낭만주의자를 형상화하는 방법으로 그의 자의식을 영화 속에 심어 놓았다. 어떻게 보더라도 주인공 문오는 감독 하길종과 겹친다. 잠깐 카메오로 등장해 한없이 초조해하던 하길종의 모습은 현실의 그가 아니었을까 생각될 정도이다. (사진11) <속 별들의 고향>(하길종, 1978) 촬영장에서 <병태와 영자>(1979)가 개봉해서 한창 흥행을 할 때 하길종은 쓰러져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유작이 되어버린 것. 하길종에게 <병태와 영자>가 유작인 것은 아마 치욕일 것이다. 이 작품은 <바보들의 행진>의 속편이다. 그러니까 하길종은 <속 별들의 고향>도 속편이었고 <병태와 영자>도 속편이었다. 자신을 ‘속편 감독’이라고 자위하면서, <병태와 영자>의 흥행을 보며 이제는 진정 하고 싶은 영화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던 그 순간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러니 하길종에게 <병태와 영자>는 참으로 할 말이 많은 영화일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병태와 영자>는 그리 좋은 영화는 아니다. 속편의 연결성도 떨어지고 극적 재미도 덜하다. 그럼에도 가난한 청년이 시대의 권위와 부에 맞서 싸워나가는 에너지는 어떤 영화보다도 강하게 살아있다. 마이크 니콜스의 <졸업>(1967)을 연상시키는 엔딩이 더욱 그렇다. 가진 자가 자동차로 거리를 달릴 때 병태는 뛰어서 간다. 이때 감독은 둘을 교차로 편집하는데 기묘하게도 강한 힘을 느낄 수 있다. 사람들은 당연히 자동차를 타고 가는 이가 이길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하길종은 젊음의 싱그러움, 그 무한한 힘이 이기도록 설정해 놓았다. 미처 마흔도 되지 않은 하길종이 그 시절 젊었다는 것을 이 장면을 통해 우리는 알 수 있다. (사진12) <병태와 영자>(하길종, 1979) 포스터 많은 이들이 오해를 한다. 하길종은 영화감독만 한 것이 아니다. 귀국해 국내에서 활동한 시간 내내 그는 감독생활을 하면서 평론가로도 활동했다. 감독이 평론을 겸한다는 것은 매우 특이한 현상이지만, 하길종은 미국에서 배운 이론과 새로운 영화 사조를 국내에 빠르게 전파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엑소시소트』, 『스타워즈』,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등을 직접 번역하기도 했다. 중앙대, 서라벌예대 등에서 강의를 하다 서울예대에서 교수생활을 한 것도 인재를 양성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생전 하길종의 이 모든 활동은 한국영화계를 발전시켜야 한다는 목표 아래서 진행되었을 것이다. 그는 이 목표를 위해 없는 시간을 쪼개고 또 쪼갰으며 무엇보다 타협하지 않았다. 하길종은 동료 감독의 영화를 매우 사실적이고 직설적으로 평하는 것으로 유명해 여러 에피소드를 남기기도 했다. 같은 감독의 입장에서 보면 신랄하게 평가하는 것을 쉽게 받아들이기 어렵겠지만, 하길종의 입장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사진13) 유현목 감독과 (사진14) 서울예대 제자들과 한국영화사의 숱한 감독들은 시대와 싸워야만 했다. 나운규의 일제강점기, 유현목과 임권택의 반공영화 시기를 보면 시대가 영화를 억압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데, 하길종도 마찬가지이다. 하길종을 평가하면서 반드시 고려해야 할 것은 그가 충무로에서 활동한 시기이다. 박정희의 유신이라는 폭압적인 정치 체제 시기에 하길종이 활동했다. 더 세밀히 말하면, 데뷔작 <화분>을 만든 1972년은 유신이 시작된 때이고, 하길종이 세상을 떠난 1979년은 유신이 종말을 고한 때이다. 그러니까 하길종은 가장 가혹한 시기에 바로 이 땅에서 누구보다 열심히 영화를 만들었던 것이다. 그 8년 동안 하길종은 영화감독으로서, 영화평론가로서, 영화학과 교수로서, 번역가로서, 영화운동가로서 최선을 다해 노력했다. 정말이지 최선을 다했다는 표현은 여기서 사용해야 한다. 그러나 결국 그는 시대의 벽을 넘지 못한 채 쓰러지고 말았다. 서른여덟이라는, 너무도 아까운 나이에 저세상 사람이 되어 버린 그. 지금 그는 경기도 광주의 한 공원묘지에 잠들어 있다. 이 땅에서는 매우 드물게, 사각형의 돌로 된 그의 무덤에는 생전 그의 필체로 각인된 “河吉鐘”이라는 이름과 생몰연도만 기록되어 있다. (사진 15) 하길종의 무덤
손>은 유현목 이 1967년에 만들었던 50초 분량의 단편영화이다. 이 작품은 프린트의 소재가 불분명했으나 한국영상자료원이 2016년 5월 20일에 < 오발탄 >의 복원판과 함께 일반에 공개하여 빛을 보게 되었다. <손>을 실험영화로 분류한다면 이 작품은 프린트가 현존하는 한국 최초의 실험영화라는 타이틀을 얻게 된다. 그러나 이 분류가 유효하려면 실험영화라는 용어가 어떤 의미로 이해되어야 하는지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 만약 <손>이 실험영화의 정전들로 분류되는 1960년대의 영화들과 유사한 맥락에 있다면 그런 수고를 거칠 필요가 없을 수도 있지만, 작품을 보면 50초라는 짧은 길이를 감안하더라도 동시대의 실험영화들과는 다른 지점에 서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 글은 <손>이 실험영화라면 어떤 개념적 정의에 따라 실험영화일 수 있는지의 문제를 다루어 보고자 한다. <손>의 타이틀 이미지 필자는 <손>과 유현목이 주도하여 1964년 1월 18일에 설립했던 전위적 단편영화 제작 동인인 “시네포엠”(시네포엠은 미학적 개념이기도 하고, 단체의 이름이기도 한데 이 글에서 단체로서의 시네포엠인 경우에는 큰따옴표를 붙이고, 개념인 경우에는 별도의 표기를 달지 않도록 한다)에 관하여 두 편의 글을 쓴 바 있다. 첫 번째는 오큘로 온라인에 실었던 「유현목의 <손>과 관련된 사실들과 하나의 가설」이고 두 번째는 『영화연구』 71호에 실었던 「이색적인 문화영화: 유현목과 시네포엠(1964-66)의 실험영화 개념에 관한 제안」이다. 첫 번째 글은 <손>과 관련된 공식 기록으로 신문기사에 실렸던 사실들과 당대의 정황 등을 고려하여 <손>이 몬트리올국제박람회를 준비했던 정부의 요청에 의해 만들어졌을 수 있다는 가설을 제기하였다. 두 번째 글은 시네포엠이 지향했다고 하는 전위적 단편영화를 개념어보다는 지시어로 이해해서 구체적으로 어떤 영화들을 지칭했던 것인지를 살펴보고, 그 개념이 이색적인 문화영화에 준하는 것일 수 있음을 제안하였다(<손>에 관한 사실들은 첫 번째 글에서 정리해두었으므로 먼저 참고하기를 바란다). 두 글을 작성하면서 주로 검토해보았던 것은 유현목이 “시네포엠”을 결성하고 전위적 단편영화를 제작하기로 했던 동기가 외부의 영향에서부터 비롯된 것인가의 문제였다. 유현목은 <오발탄>으로 샌프란시스코 국제영화제에 초청을 받았고 1963년 10월 26일에 출국하여 12월 11일에 귀국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1월 18일에 “시네포엠”을 출범시켰기 때문에, 유현목이 40일이 넘는 방미 일정을 통해 실험영화를 접했고 이에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하기 쉽다. 필자도 첫 번째 글에서는 유현목의 방미와 “시네포엠”의 설립이 직접적인 관계를 갖는다고 단정했었다. 그러나 유현목의 방미 일정, “시네포엠”이 설립 후 열었던 두 번의 상영회에 포함되었던 영화들, 무엇보다도 샌프란시스코 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되었던 작품들을 일일이 따져보면 유현목이 당대의 북미 실험영화를 방미 기간에 접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유현목은 1963년 11월 8일 자 『동아일보』에 영화제 방문기에 해당하는 기사를 기고하는데, 이 기사에는 샌프란시스코 국제영화제 프로그램을 설명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고 실험영화를 상영한다고 명시되어있다. 그러나 영화제 프로그램을 살펴보면 오늘날 우리가 실험영화로 분류하고 있는 작품들이 없다. 그렇다면 당연히 유현목은 실험영화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가가 문제의 핵심이 될 수밖에 없다.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시선을 국내로 돌릴 수밖에 없다. 그러면 하나의 단서가 떠오르는데 시극동인회가 그것이다. 시극동인회는 1963년 6월 29일에 시, 연극, 영화, 무용, 미술 등에서 활동하는 작가들이 참여하여 결성되었다. 1963년 8월 12일 자 『동아일보』에는 시극동인회의 발족을 알리는 기사가 실려 있는데 이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시극의 연구 창작의 발표 활동을 목적으로 한 시극동인회가 발족을 보았다. 시극의 이론, 창작, 연출, 연기, 미술, 조명, 음악 등을 연구하거나 이에 종사하는 동인들의 모임인 동회에서는 월 1회의 정기연구 및 합평회, 연 2회의 시극에 관한 일반 공개강좌, 시극 무대공연, 동인지 시극 발간, 월 1회 이상의 방송을 통한 시극 발표 등 사업 계획을 세우고 있다. 동회에서는 제1회 8월 정기 연구 및 합평회를 24일(토) 하오 5시부터 중앙공보관에서 여는데 이인석(현대예술과 시극)의 발표와 장호 작 「열쇠장수」에 대한 합평이 진행된다. 시극동인회의 역원과 회원은 다음과 같다. 대표 간사 박용구, 창작 간사 장호, 사무 간사 최재복, 연출 간사 김정옥, 기획 간사 고원, 연기 간사 최명수, 회원 이인석, 김원태, 이흥우, 김요섭, 오학영, 박정온, 최일수(이하 생략). 이 기사를 “시네포엠”의 발족을 알리는 1964년 1월 21일자 동아일보 기사와 비교하면 상당히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전위적인 단편영화제작을 목적으로 하는 「시네포엠」 동인회가 새로 발족. 지난 주말(18일) 하오 중앙공보관에서 발기총회를 가졌다. 한국에서 거의 최초로 시도되는 이 전위적 모임은 「샌프란시스코」 영화제에 참석하고 돌아온 유현목 감독을 비롯하여 수년 전부터 「시네포엠」의 주동성을 강조해온 최일수, 배석인, 김인걸 씨가 주동이 되어 발기한 것이다. 영화예술뿐만 아니라 자매예술의 각 분야에서 골고루 회원을 포섭할 예정인 이들 「시네포엠」 동인회는 연 일편이상의 작품 제작을 계획하고 있으며 그 밖에도 연구발표회, 합평회 및 기관지발행을 기획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먼 꿈은 해외의 전위적인 영화작가들과의 교류와 국제영화제의 출품 등으로 무척 화려하다. 외국의 전위영화 동인들이 불과 사(四), 오(五) 명씩 모여 단편영화를 제작하는 데 비하면 이들의 발족은 좀 모순되는 곳도 있으나 그들의 이 활동에 일단 기대를 걸어볼 만하다. 발기총회에서 선정된 임원과 회원은 아래와 같다. 대표 간사 유현목, 총무 간사 김인휴, 기획 간사 최일수, 제작 간사 이형표, 해외 간사 정일몽, 창작위원 황운헌, 연출위원 배석인, 연기위원 김석강, 기술위원 박익순, 미술위원 박영일, 음악위원 정윤주, 무용위원 임성남, 회원(18일 현재) 장호 노만 황운헌 최일수(이하 생략). 두 단체 사이에는 상당한 유사성이 발견된다. 일종의 종합예술을 지향하고 있고 활동의 목표와 세부 내용이 거의 같다. 또한 조직의 구성이 유사하며 회원의 이름이 일부 중복된다. 일부 자료에는 시극동인회 회원에 유현목 이름이 발견되는 경우도 있다. 유현목은 시극동인회의 발족 이후 이름을 올렸던 것으로 보인다(단체의 성격을 따져보기 위해서는 회원들 개개인을 살펴보는 것도 필요한데, 이는 이 글의 범위를 벗어나므로 다음으로 미룬다). 이 두 단체를 각각 대표하는 인물은 장호와 유현목이고, 단체의 활동 목표와 미학을 정의해서 일종의 쌍둥이와 같은 관계로 만들었던 인물은 비평가 최일수이다. 최일수는 195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되어 평론 활동을 시작해서 주로 민족문학론과 관련한 글들을 썼다. 예외적으로 자신의 예술론을 전개하는 글들을 발표하기도 했는데, 여기서 다루었던 핵심 문제가 시극과 시네포엠이다. 시네포엠에 관해서는 한 편의 글을 펴냈다. 『자유문학』 1961년 9월 호에 실었던 「종합적 이메지의 예술-시네포엠에 대하여」이 그것이다(1982년에 출간된 최일수의 평론집 『현실의 문학』에는 이 글이 「시네포엠과 종합적 영상」이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이 글에서 최일수는 “시가 핵심이 된 종합적 이미지가 스크린에 표현되었을 때 그것을 시네포엠이라 하고 그것이 무대에 나타났을 때는 시극이라 한다”고 정의했다. 그가 이러한 정의를 내리는데 바탕이 되는 상황 인식은 다음과 같다. (1) 현대시는 추상적인 소리에서 구상적인 이미지로 이행해가고 있기 때문에 현대시가 스크린이나 무대로 진출하는 것은 필연적이다. (2) 현대 사회는 개별 예술 장르들을 단독으로 두지 않고 하나의 종합을 이루도록 추동하며 새로운 차원의 예술을 형성할 것을 요구한다. (3) 성격이나 형식이 전혀 다른 예술들의 종합을 이루어낼 수 있는가의 여부는 전적으로 현대시의 과제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시만이 “근원적인 창조의 계기를 개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4) 연극이나 영화는 모든 예술을 종합할 수 있는 본성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가 지니는 근원적 창조의 계기를 결여하고 있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의 종합을 이루어내는데 실패했다. (5) 시가 “스크린에 진출한 것”은 영화가 결여하고 있는 진정한 종합이라는 과업을 달성하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 인식에 비추어 보면 최일수가 내리는 시네포엠의 정의는 시는 모든 예술의 근본이 되므로 시를 통해서 개별 예술 장르들을 종합해내는 영화라고 풀어서 쓸 수 있다. 영화 대신에 무대라는 말을 쓰면 시극의 정의가 된다. 정의에 따르면 위에서 인용한 신문기사에서 볼 수 있는 단체의 목적, 조직 구성 등이 모두 이해가 된다. 그러나 문제는 이토록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정의를 어떻게 실현 가능한 방법론으로 만들 수 있는가이다. 최일수는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해 자신이 제시한 시네포엠의 정의가 이미 존재하고 있던 장르인 시네포엠과 어떻게 다른지 설명했다. 그는 기존의 시네포엠을 “1차 대전 이후에 프랑스의 시인을 비롯한 미술가, 음악가, 영화인들이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초현실주의 운동의 하나로써 시도된 전연 새로운 예술의 한 장르”라고 정의했다. 그는 이 장르가 “현대시의 변천과 더불어 하나의 뚜렷한 양식을 갖춘 예술”로 세계화되었다고 파악했고 장 콕토, 만 레이, 폴 엘뤼아르, 기타가와 후유이코 등을 대표적인 작가로 꼽았다. 그러나 최일수는 이들의 시네포엠이 영화-시라는 단어 자체에만 치우쳐서 “영화적 수법의 시”라든가 “시적인 수법의 영화”라고 부르거나 심지어는 시적인 영화라고 호칭하며 그 정의가 모호하다고 비판하였다. 그는 시네포엠이 시적 형식 혹은 영화적 형식의 차용이 아니라 “언어의 의미가 주는 영상의 표출이 시각적인 상상(원문에는 이메지네이슈운)을 낳게 되고 그리하여 그것이 곧 종합적인 광장인 스크린에 진출됨으로써 시네포엠이라는 새로운 세계를 형성하기에 이른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단어가 주는 인상을 영화로 시각화하면 그것이 시네포엠이라는 것처럼 보인다. 최일수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영화적 수법의 시, 시적인 수법의 영화, 시적인 영화 각각을 예로 들어 시네포엠과 다름을 보였다. 우선 영화적 수법의 시의 예로 장 콕토의 1920년 시집 『시 Poesie』에 실린 「첫 눈물 Premières Larmes」을 들었다. 최일수는 이 작품이 눈물을 흘리는 순간을 마치 눈앞에 그리듯이 언어화했다는 의미에서 시각적인 영상의 성격을 갖고 있고 이러한 특성이 시네포엠으로 이끌어가는 계기는 된다고 인정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시각적 특성이 두드러진 시일 뿐이지 시네포엠은 아니라고 보았다. 시적인 수법의 예로는 자크 봉장(Jacques Bonjean)의 1925년 작품 『길 위의 아름다운 결혼식 Les Belles Noces dans la Rue』을 들었다. 이 작품의 장르는 직역하면 벽장 시나리오가 되는 Closet Screenplay에 속하는데, 일본에서는 이 장르를 지칭하는 신조어로 레제시나리오(レ―ゼシナリオ)가 사용되었다. 영화로 만들어질 목적이 아니라 한 사람이 읽거나 혹은 소수의 그룹 앞에서 낭독될 것을 전제로 만들어진 시나리오를 지칭한다. 최일수는 봉장의 작품이 시적 수법을 차용해서 만들어진 시나리오이지 시네포엠은 아니라고 보았다. 다시 말하면 영화적 수법의 시와 시적인 수법의 영화 각각은 시와 시나리오일 뿐이지 영화화를 전제로 하는 시네포엠은 아니라는 것이다. 시적인 영화의 예로는 오슨 웰즈의 <오델로>(1952), 잭 카디프의 <아들과 연인>(1960), 마르셀 카뮈의 <흑인 오르페>(1959) 중에서 특정 장면을 뽑아 이 장면들이 “영화 이상의 그 무슨 심오한 시각적 이미지를 표상”해준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최일수는 이 영화들에서 특정 장면들을 시적인 이미지라고 평가할 수는 있지만, 시네포엠은 그것이 하나의 독자적인 작품으로서 존재해야 하며 시적인 장면들의 연쇄로 시네포엠이 될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비교가 시네포엠이 영화시로 번역되었을 때 올 수 있는 개념적 혼란을 다루기 위해서, 시네포엠은 시나 시적 언어로 작성된 시나리오와 같은 문학 장르가 아니며 또한 특정 장면이 시적 인상을 준다고 해서 시네포엠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라면 논거를 갖출 수는 있다. 그러나 최일수의 목적은 자신이 정의 내리는 시네포엠이 고유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므로 애초에 비교 자체가 잘 못 되었다. 비교를 하려면 제르맹 뒬락, 만 레이, 한스 리히터, 장 콕토 등의 영화 작품들을 예로 들었어야 했다. 이 작가들이 1960년대 전까지 영화와 시에 관계에 대한 독자적인 이론을 전개하고 작품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비교의 오류는 최일수가 시네포엠을 정의할 때 이에 상응하는 해외 작품들을 직접 본 것이 아니라, 식민지기에 일본을 통해 수입되고 번역된 초현실주의 문헌들이나 김기림의 시론과 관련된 글들만을 참조했기 때문일 수 있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이렇게 본다면 최일수가 극복하고자 했던 것은 해외의 시네포엠이 아니라, 국내에서 시네포엠이 이해되었던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이에 관해서는 당대의 문헌들에 대한 추가적인 고찰이 필요하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따르면, “시네포엠”의 설립과 시네포엠의 정의가 1960년대 당시 외부로부터의 영향이 아니라 식민지기 이후 국내에서 축적된 특정한 맥락에 따른 것임은 분명해진다. “시네포엠”의 설립은 당대 미국에서 형성되었던 독립적인 영화작가들의 조합과 같은 모델을 따른 것이 아니라, 국내에서 1920년대 활발하게 전개되었던 동인지 중심의 활동이 문학, 연극, 영화 등에서 소환된 결과라고 봐야 한다. 그리고 시극동인회와 “시네포엠”에서 1920년대의 극복은 연극과 영화를 시를 중심으로 한 종합예술로 정의하여 이종 예술 간의 결합을 추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각 단체를 대표하는 장호와 유현목이 동국대학교 국문과에서 김기림의 지도를 받았으며 이후 같은 대학에서 교편을 잡았던 것을 생각하면, 이들의 과제는 김기림의 비판적 극복이라고 함축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최일수가 시도했던 비교에서 생각해보면, 김기림은 시와 영화를 기법의 측면에서만 접근했을 뿐 서로 다른 예술 장르로 남겨두었다면 자신들은 시를 통해 모든 예술을 종합하는 연극과 영화를 만들겠다고 선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시네포엠은 시가 중심이 되어 영화를 진정한 종합예술로 승격시키는 영화이다. 이를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최소한 두 가지 요건이 만족되어야 한다. 시가 중심이 된다는 것은 단어가 불러일으키는 시적 연상이 시각화되어야 한다는 것이고, 종합예술은 두 개 이상의 예술 장르가 각각 독자적이면서도 결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손>에서 이 두 요건이 충족되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손>은 짧은 내레이션과 함께 이미지가 전개되는데, 내레이션은 “There were hands in the beginning of the world”로 시작한다. 이 문구가 나올 때의 이미지를 순서대로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There were 부분에 나오는 이미지 hands in the beginning에 나오는 이미지 of the world에 나오는 이미지 아기, 원숭이, 어린이의 손이 순차적으로 나오면서 해당 내레이션이 전개되는데, 작품의 나머지에서도 내레이션의 특정 단어들에 바로 연결될 수 있는 이미지들이 나온다. 이에 대한 평가를 어떻게 내리든 간에 시네포엠의 첫 번째 조건인 단어가 불러일으키는 시적 연상의 시각화는 충족한다. 그러나 두 개 이상의 예술 장르가 결합되는 것은 찾아보기 어렵다. 이 요건을 충족하는 요소를 굳이 찾아보면, 내레이션의 낭독이 산문이라기보다는 시의 낭독처럼 들린다는 정도가 될 것 같다. <손>의 내레이션은 최일수가 썼는데, 여기에 포함하지는 않았지만 최일수의 시극 이론을 생각해보면 최일수가 일종의 산문시로 내레이션을 썼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최대한 긍정적으로 보아서 <손>은 시, 이미지, 낭독을 결합해서 독립적인 장르의 작품을 만드는 시도라고 평가할 수 있다. <손>에서 시네포엠의 두 번째 요건이 불충분했던 것이 50초라는 길이의 한계 때문인지, 아니면 화려한 인적 구성으로 시작했던 초기에 비해 “시네포엠”의 구심력이 약해진 시점에서 제작되었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다. “시네포엠”의 첫 번째 작품인 <선>을 볼 수 있어야 종합예술로의 영화가 어떻게 구현되었는지 알 수 있는데, 프린트의 행방을 알 수 없으므로 지금으로서는 판단할 수 없다. 다만 시극동인회의 작품들은 기록이 보다 상세히 남아 있으므로, 종합예술의 실천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졌는지를 미루어 짐작해볼 수는 있으나 이 글의 범위를 벗어나므로 추후에 설명하고자 한다. <손>을 실험영화로 분류한다면 이때 실험영화는 종합예술로서의 영화를 의미한다. 한때 유행했던 다원예술이나 최근에 등장한 융복합 예술이라는 말과 개념적으로 별로 다를 바 없어 보인다. 최일수가 시극과 시네포엠의 정의를 종합예술 중심으로 생각하는 것은 당시에 영향력이 컸던 T.S. 엘리엇이나 장 콕토의 극복을 의식하고 있음은 분명하나 하필 왜 종합예술이라는 생각을 떠올렸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 지금으로써는 어떤 근거나 맥락 없이 예나 지금이나 예술 장르 간의 종합이라는 아이디어가 때때로 유행을 타는 결과라는 생각밖에는 떠오르지가 않는다. 유현목은 1970년에 변인식 , 하길종 등과 함께 전위적 영화운동을 벌이기 위해 소형영화동호회를 결성하는데, 이 시기에 언급했던 작품들이 동시대의 미국 독립영화 작품들이다. 유현목이 1966년부터 1970년 사이에 어떤 경로를 통해서 미국의 실험영화들을 일부 접하게 되었다는 것인데, 이때 시네포엠에 준하는 개념은 아예 사라지고 취미로서의 영화 혹은 아마추어의 영화가 전면에 나타났다. “시네포엠”에서는 미학적 개념이 중요했다면, 소형영화동호회에서는 8mm와 16mm 포맷을 이용한 소규모의 독립적인 제작방식이 더 중요해졌다. 전위적인 영화를 만들겠다는 의지는 “시네포엠”에서나 소형영화동호회에서나 마찬가지만, 둘 사이의 어떤 연속성이 있다고 가정하기는 힘들다. “시네포엠”이 1920년대의 자장에 속해있다면, 소형영화동호회는 동시대의 수용이라는 측면에서 시기의 공백이 너무나도 크며, 활동에 대한 자기반성의 흔적 역시 찾아보기 어렵다. 따라서 한국에서 실험영화를 말 할 때, “시네포엠”을 최초의 위치에 올릴 수 있겠지만 어떤 유산을 남겼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헐적이고 갑작스런 전환들의 공백 사이를 최대한 메꾸어 보려는 노력이 한국에서 영화뿐만 아니라 예술 전반에서 전위와 실험이 어떻게 자리바꿈하는지를 이해하는데 반드시 필요하다. ※ 이 글은 현재 작성 중인 논문의 일부를 추려서 실은 것으로, 시극동인회나 김기림에 대해 빠진 설명들을 포함하여 추후에 논문으로 낼 예정이다. 영화-시에 관한 전반적인 정리는 Fil Ieropoulos가 쓴 < Film Poetry: A Historical Analysis >에 잘 되어 있고, 참고문헌도 자세히 살펴볼 가치가 있다. 최일수가 일본을 통해 수입되어 읽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레제시나리오나 이론들은 Christophe Wall-Romana가 쓴 Cinepoetry: Imaginary Cinemas in Frech Poetry(Modern Language Initiative, 2013)을 통해 엿볼 수 있다. 시극에 대한 연구는 국문학이나 연극학 분야에서 축적되어 왔는데, 이현원, 「최일수와 장호의 시극 인식에 대한 연구」, 어문론집, 64, 2015를 참조하면 추가적인 자료들을 쉽게 따라갈 수 있다.